제362회 머물러야 하는 곳 | |
2022년 10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4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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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22절 “20.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0節後半∼22節 “20.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21.もし神が本来の枝を惜しまなかったとすれば、あなたをも惜しまれないでしょう。 22.ですから見なさい、神のいつくしみと厳しさを。倒れた者の上にあるのは厳しさですが、あなたの上にあるのは神のいつくしみです。ただし、あなたがそのいつくしみの中にとどまっていればであって、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も切り取られま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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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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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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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4번째 시간으로서 “머물러야 하는 곳” とどまるべき場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함께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등등.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니, 이게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중요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을 봅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여기서 지식의 근본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를 바꾸어 본다면 아무리 다른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은 근본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경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건만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멸시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쉬운 말로 한다면 두려워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앞서 드린 말씀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고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동안 헛수고만 했다는 뜻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0.......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글쎄요. 저는 이 번역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게 어느 부분이냐 하면 ‘높은 마음’이라는 부분인데,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이 됩니까. 이는 큰 뜻을 품지 말라. 그냥 작은 것에 만족하라……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 20절 후반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 현대인의 성경에는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큰 꿈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해요? 무엇을 두려워 하라고요? 그렇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이른바 구원의 취소는 없다고 하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괜찮아, 좀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씻어 주셨으니까, 우리는 100% 천국에 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성경을 찾아보아도 그런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이 바울이 쓴 로마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 쓴 서한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형제자매들한테 쓴 글이에요. 11장 20절 전반부만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20절 전반부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そのとおりです。彼らは不信仰によって折られましたが、あなたは信仰によって立っています。 자,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왔으니까 어렵지 않게 아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접붙임에 대해서 공부 했었잖아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지가 꺾이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서 그 축복을 모두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어요. 한 번 접붙임을 받았어요. 말하자면 한 번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러면 이제 여기서 구원의 취소가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안심해. 이제 걱정하지 마. 100% 틀림없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갈 거야……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20절 후반부에 보면 뭐라고요?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즉,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국어 공부 좀 해볼까요? 이 구절을 좀 바꾸어 본다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라고 해도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자, 그럼 쉬운 부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글에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라는 것은 누구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까. 그렇죠.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문장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는 한 문장인데 앞부분과 뒷부분의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뒷부분과 앞부분의 문장에 대한 대상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뒷부분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앞부분의 대상도 역시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하는 그 대상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교만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이제 나는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할렐루야! 나는 구원 받았다! 하고 이제 무엇을 해도 된다는 마음,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거기 보면 사장님이 계실 것 아니에요? 상당히 큰 회사인데, 그런데 자기가 신입사원인데도 사장님이 아주 잘 해주세요. 맨날 점심시간이면 같이 밥을 먹자고 해요. 그리고 밥값도 당연히 내주세요. 말씀도 아주 편하게 하세요. 그렇게 되니까 어느새 이 신입사원이 생각하길, 에이 사장님이라고 별거 아니네.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나를 위해서 많은 걸 다 해 주시잖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조금 지나자 아주 사장님을 우습게 알아요. 말도 픽픽 놓고 지각도 밥 먹듯이 하고, 사장님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요. 어차피 사장님은 나를 아주 좋아하시거든. 괜찮아. 괜찮아. 우리 사장님은 아주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 하셔서 화도 안 내셔. 그런데 사장님이 보시기에 좀 신입사원이라서 잘 해 주려고 했는데 도무지 회사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요. 부장님이나 과장님을 보니까 사장님이 딱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데 이 신입사원은 일어서지도 않고 “오셨어요?” 하고 고개만 까딱 합니다 사장님은 이런 신입사원한테 말을 해요. 이봐. 자네 보니까 요즘 좀 이상해. 자기한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야 되지 않아? 그러자 이 신입사원은 말합니다. “에이,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사장님이 왜 그러세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좀 내버려두세요.” 그러면 이 사장님이 계속해서 그 신입사원을 그대로 놔두겠습니까. 사장님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요. 승진을 시킬 수도 있고 자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법적으로 해고를 마음대로 시킬 수는 없다고 해도, 다른 부서로 좌천을 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그저 좋은 사장님, 사랑이 많으신 사장님, 이거 달라고 하면 이걸 주시고 저걸 달라고 하면 저걸 주시는 사장님……. 만약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머지않아 회사에서 크게 혼이 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회사에 다니는 분들 중에서 이런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런 사람, 어디에 있느냐.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그러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한 번 믿으면 괜찮다고 하면서 참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믿음이 좋아서요?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원 가지라고 하는 것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이 가지를 꺾어서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을 접붙임 하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 같은 우리를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해서 꺾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보혈의 대가로 우리를 접붙임 하셔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에서 21절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21절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1.もし神が本来の枝を惜しまなかったとすれば、あなたをも惜しまれないでしょう。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망설임없이 그 나뭇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포도나무이자 참감람나무이신 독생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무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긴 했으나, 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는, 독생자 예수님 마저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달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잊어버린 채로, 언제까지 철없는 어린애같이 아, 나는 괜찮아. 나는 기도를 많이 하니까, 나는 금식을 많이 하니까, 나는 방언을 많이 하니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니까 괜찮아……하고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도시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있지요. 그곳은 죄악의 도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한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도시라고 한다면 어떤 모습이라고 상상을 하십니까. 으스스하고 어두컴컴한 그야말로 마귀의 소굴 같은 그런 곳을 상상하시나요? 창세기 13장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이제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지요.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이 기록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땅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큰 강을 점령하려고 전쟁을 벌이곤 했습니다만, 소돔과 고모라에는 이미 물이 넉넉했어요. 참으로 풍요로운 땅,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점차 죄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19장 24절~25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받은 땅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멸해버리고 마셨습니다. 로마서 11장 22절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2.ですから見なさい、神のいつくしみと厳しさを。倒れた者の上にあるのは厳しさですが、あなたの上にあるのは神のいつくしみです。ただし、あなたがそのいつくしみの中にとどまっていればであって、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も切り取られます。”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아껴 주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토록 우리를 아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교만에 빠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자하심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꺾어 버리셨던 그 손으로 우리를 찍어 버리실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습하는 의미로 로마서 14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바울이 쓴 로마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 쓴 서한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형제자매들한테 쓴 글이에요. 그런데 그들한테 말하기를 우리도 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심판을 받든 안 받든, 말하자면 유죄판결을 받든 무죄판결을 받든, 우리는 모두가 다 한 번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유죄냐 무죄냐, 말하자면 지옥이냐 천국이냐 하는 판결이 내려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말이 누구를 향한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앙 속에서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빌립보서도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한입니다만, 사도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보다도 한참 못한 우리가 언제 여유를 부릴 새가 있겠습니까. 잠언 1장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아닌 인자하심 속에 머물면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구원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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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1회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 |
2022년 10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3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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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19절~20절 전반부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19節∼20節 前半 “19.すると、あなたは「枝が折られたのは、私が接ぎ木されるためだった」と言うでしょう。 20.そのとおりです。彼らは不信仰によって折られましたが、あなたは信仰によって立っていま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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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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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3번째 시간으로서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接ぎ木のために必要な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무들의 가지를 접붙임 할 때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냥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나무에 갖다 대기만 하면 알아서 붙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접붙임을 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접붙임을 하려는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본래 나무에 있는 가지를 꺾은 다음에 거기에 접붙임 하려는 가지를 가져다가 연결을 하고 이를 단단히 고정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나무가 있어요. 거기에 제가 가지고 온 나뭇가지를 접붙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에서는 나뭇가지를 꺾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렇다면 어떤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건강한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다 죽어서 말라 비틀어진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건강한 가지를 꺾어야 합니다. 접붙임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 나무로부터 나오는 진액, 말하자면 그 영양분을 접붙임 하려는 나뭇가지로 하여금 받게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죽은 나뭇가지를 꺾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라 죽은 나뭇가지가 괜히 죽었나요? 그 이유는 본 나무로부터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니까 말라서 죽어버린 것이잖아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미 혈관이 죽어서 더 이상 피가 안 통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거기에 아무리 좋은 가지를 가져다가 접붙임을 해봤자 결국 말라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멀쩡한 나뭇가지를 꺾어 버리기가 아깝다고 해서 다 죽은 나뭇가지에다가 접붙임을 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나뭇가지를 꺾어야 해요? 그렇습니다. 건강한 가지, 튼튼한 가지……말하자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야지만 제대로 접붙임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7장 24절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動物の死骸にある脂肪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動物の脂肪は、何に使っても差し支えない。しかし、決して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 레위기 17장 15절~16절 “15.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16.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もし自分の衣服を洗わず、身に水を浴びないなら、その人は自分の咎を負う。」 레위기 22장 8절 “시체나 찢겨 죽은 짐승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て汚れ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主である。 이처럼 율법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죽은 짐승에 대해서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사람들은 절대로 스스로 죽었거나 들짐승한테 찢겨 죽은 것은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거나 짐승들한테 찢겨 죽은 짐승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와 같은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선 스스로 죽은 것은, 늙어서 죽었는지 아니면 나쁜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에는 특히나 그 고기 안에 나쁜 균이 있는지 여부를 가려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먹는다는 것은 위생적으로 대단히 위험할 수 있었겠지요. 짐승들한테 찢겨 죽은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짐승이 공격을 해서 죽였는 지도 알 수 없고, 그리고 그 공격한 짐승 안에 어떤 병균이 있었다면 그것이 옳겨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스스로 죽었거나 짐승들한테 찢겨 죽었다면, 이는 언제 죽었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요. 지나가다가 보니까 짐승이 죽어 있어요. 그렇다면 방금 전에 죽었는지 며칠 전에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고기가 부패되었기 때문에 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 또한 대단히 위험할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이와 같은 고기는 과학적으로 보나 위생적으로 보나 지금도 안 먹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굳이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단순히 우리 몸에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사실 더욱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앞서 말씀 드린 <희생>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의 전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희생>에 있어서의 대원칙은 바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금전이나 아니면 가축 같은 재산을 비롯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통한 제물이 바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기르고 있던 가축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죽었거나 아니면 다른 맹수들한테 죽임을 당한 짐승들은, 하나님께 바침으로 해서 손실이 발생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바치기 이전에 이미 손실이 발생을 했어요. 이런 것은 하나님께 바치든 안 바치든 어차피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어차피 버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것은 부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세요. 그 이유는 거기에 <희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하는 것이니, 까짓거 인심이나 쓰자 하는 식의 제물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옛날에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1장 8절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あなたがたは盲目の動物を献げるが、それ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足の萎えたものや病気のものを献げるの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さあ、あなたの総督のところにそれを差し出してみよ。彼はあなたを受け入れるだろうか。あなたに好意を示すだろうか。──万軍の主は言われる── 언제 죽었는지, 병에 걸렸는 지도 모르는 짐승, 이미 쓸모 없이 되어버린 짐승들을 그냥 버릴 바에야 하나님한테나 바치자 하는 식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병든 짐승들을 끌고 가서, 그걸 너희들 높은 사람한테 가져다 무슨 선물이라고 하면서 줘봐라. 그 받는 사람이 좋아 하겠느냐는 것이에요. 누가복음에 보시면 공생애를 하실 때 예수님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 공생이를 시작하실 때의 나이가 삼십 세 정도이시고, 그리고 공생애 기간을 신학자들은 대략 3년에서 3년 반 정도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시편 90편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私たちの齢は七十年。 健やかであっても八十年。 そのほとんどは 労苦とわざわいです。 瞬く間に時は過ぎ 私たちは飛び去ります。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옛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30대 초반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년 반 정도 후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33~34세 정도에 죽음을 당하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남자 30대 초반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을 시작해볼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기서 또 스스로 죽거나 맹수한테 이미 죽임을 당한 짐승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본다면, 그런 죽은 짐승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피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습니다만, 죽은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피가 몸 안에서 굳어져버립니다. 그리고 맹수한테 죽임을 당한 짐승이라면 벌써 피는 다 흘려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단 앞에서 짐승을 잡았을 때 피가 나온다는 것은 진정으로 거룩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하자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피를 다 흘려 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しかし兵士の一人は、イエスの脇腹を槍で突き刺した。すると、すぐに血と水が出て来た。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다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거기서도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접붙임을 위해서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귀한 예수님이라고 하는 가지를 십자가 위에서 꺾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지난 주에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를 공부했었지요. 본래는 돌감람나무 뿌리에 참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하는 것이 정상인데,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져다가 참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뭇가지를 꺾으셔서, 거기에 우리를 접붙임 해주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자, 그렇다면 접붙임에 있어서 생각해볼 때, 꺾이는 것은 본 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가지 뿐입니까. 아니에요. 본 나무에 붙일 나뭇가지 또한 꺾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하기 위해서는 참감람나무 나뭇가지도 꺾여야 할 뿐만 아니라,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도 꺾어야지만 그 나뭇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돌감람나무 나뭇가지가 꺾인다는 것은 돌감람나무 뿌리로부터 결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라고 하는 이름, 세상이라고 하는 이름, 불신앙이라고 하는 이름의 뿌리인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0절 전반부에 보시면 버림을 당한 나뭇가지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당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다. 즉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돌감람나무의 뿌리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時が満ち、神の国が近づいた。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 그런데 우리는 이 회개에 대해서 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이 두 단어의 차이, 후회와 회개의 차이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 답을 얻었어요. 그리고 난 다음에 한참 지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제가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서 간신히 답을 찾아냈다고 뿌듯해 했었는데, 국어사전에 보니까 너무나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제가 옳은 답을 찾아냈었구나 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국어사전을 찾아볼 걸”이라고 하는 좀 허탈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자, <후회>라는 단어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自分のしてしまっ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失敗であったとくやむこと。 그렇다면 <회개>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역시 국어사전에 의하면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過去の過ちを反省して心がけを変える。 이 차이를 아시겠어요?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 「後悔」は、自分のしてしまっ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失敗であったとくやむこと。 「悔い改め」過去の過ちを反省して心がけを変える。 이 둘을 좀 알기 쉽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회개>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 「後悔は」は、悔やむこと 「悔い改め」は、悔やんで変えること 여기에서의 차이는 <고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것>과 <잘못을 고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건 쉽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기만 한 것>은 겉으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마음 속으로 한 것이 <뉘우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그 사람이 진짜로 뉘우쳤는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고치는 것>이 되면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겉으로 볼 수가 있어요. 알아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고치는 것> 즉 <회개>는 바로 행함, 실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행함이 아닌 그저 <잘못만 뉘우치는 것>에 머물고 만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누구는 “에이, 그래도 후회를 하게 되면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몇 번이나 다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후회만 한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후회>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적힌 지옥의 모습을 보십시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기 떨어진 사람들이 후회를 안 할 것 같습니까. 내가 지금 지옥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래 내가 그래도 세상에 살면서 나쁜 짓을 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만족해……라고 그러겠어요? 아닙니다. 아, 내가 괜히 그랬다. 괜히 죄를 짓고 괜히 남에게 상처를 주고 괜히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안 믿고 그랬다……. 이렇게 지옥에 떨어져서 이처럼 고통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죄를 짓지 말고 우리 주님과 이웃을 조금 더 섬겼을 텐데……이런 후회를 100% 다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죄라는 죄는 다 짓고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다 하는 그런 <후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기도를 해도, 거기서 끝나버리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 기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입니까. 그렇습니다. 실제로 고쳐지는 것, 행함 곧 실천으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뭇가지를 꺾으시고, 그 귀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해서, 이 돌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후회가 아닌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썩어져 가는 돌감람나무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예수님께 접붙임 되어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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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2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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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16절~18절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16節∼18節 “16.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こねた粉もそうなのです。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なのです。 17.枝の中のいくつかが折られ、野生のオリーブであるあなたがその枝の間に接ぎ木され、そのオリーブの根から豊かな養分をともに受けているのなら、 18.あなたはその枝に対して誇ってはいけません。たとえ誇るとしても、あなたが根を支えているのではなく、根があなたを支えているので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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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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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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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2번째 시간으로서 “부지런한 섬김” 勤勉なる仕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을 향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장13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말을 한다고 선언하고 난 후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유대인이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을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단순한 대조만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를 우리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6절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6.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こねた粉もそうなのです。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なのです。 우선 바울은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하고, 뿌리와 가지를 비교합니다. 곡식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했을 때 사람이 보기에는 당장 배를 채울 수 있는 떡덩이가 더 좋아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은 그 떡덩이를 만든 곡식가루가 더 거룩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처음 익은 곡식가루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첫 수확물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9절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最初に胎を開くものはすべて、わたしのものである。あなたの家畜の雄の初子はみな、牛も羊もそうである。 우리 앞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려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를 가장 아끼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면, 누구한테 제일 좋은 것을 주는지를 살펴보면 되겠지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값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을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수확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사실 제일 처음 얻은 수확물은 너무나도 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금광을 캔다고 생각해봐요. 자, 여기를 파면 금이 나온다고 해서 그 금광을 우리가 샀어요.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샀습니다. 여기서 금이 많이 나오면 부자도 될 수 있고, 그리고 이웃들도 많이 도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대 반 불안 반의 마음을 가지고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와! 정말 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처음 난 금을, 자기 것으로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웃한테 기부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것으로 먼저 하겠지요. 이게 나쁜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계속 파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나올지 모르잖아요? 정말 금이 듬뿍듬뿍 나와서 이제 내가 먹고 살기에 남아도 아주 많이 남을 정도가 되었어요. 이제 더 이상 채워 넣을 곳이 없어요. 그러면 이제 이웃에게 나누어 주거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금광을 캘 기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사업을 시작했어요. 아니면 우리가 취직을 했어요. 하지만 사업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게 정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몇 개월 못 가서 문을 닫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취직도 그렇습니다. 경기가 안 좋을 때에는 당장 취직을 했다고 해도 내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얼마 안 되어서 짤리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 열매를 바치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라고 하시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다 지으셨고, 그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첫 열매를 바치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받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가해보세요. 그와 같은 불안한 상황에서 첫 수확물 즉 첫 수입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주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 3장을 봅니다. 잠언 3장 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あなたの財産で主をあがめよ。あなたのすべての収穫の初物(はつもの)で。 이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몇 푼 안 되는 첫 수확물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 믿음의 손길을 받으시겠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뿌리와 가지는 어떻습니까. 가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엇보다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지만 뿌리는 어때요? 일단 기본적으로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파보면 거기에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보기도 좀 아름답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뿌리에는 값어치가 없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지요.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자라나지 못합니다. 꽃도 못 피우고 열매를 맺지도 못하지요. 꽃집에서 아름다운 꽃을 사옵니다. 그것을 사다가 꽃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아 놓지요. 그러면 며칠은 갑니다만, 얼마 못 가서 시들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는 몰라도, 뿌리가 없다면 결국 꽃도 피우게 할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처음 익은 곡식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해보았을 때, 떡덩이보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더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값어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믿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더욱 거룩한 것이요, 그리고 뿌리와 가지를 비교해 왔을 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값진 열매를 맺게 하는 가지라 한다 하더라도 뿌리가 없으면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가지보다 뿌리가 더욱 거룩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7절에 보시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가 나옵니다. 감람나무라고 하는 것은 올리브 나무를 뜻하는데, 쉽게 말해서 돌감람나무는 야생이고 참감라나무는 귀하게 가꾸어진 값진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는 귀하기 때문에 빨리 자라게 하고 싶은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하냐 하면 참감람나무 가지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한다고 합니다. 어차피 뿌리는 똑같잖아요.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능은 야생 올리브나무나 값진 올리브나무나 같아요. 그러니까 이미 많이 자라서 튼튼한 뿌리가 있는 야생 올리브나무를 찾아서, 거기에 값진 참올리브나뭇가지를 접붙임 하게 된다면 손쉽게 귀한 올리브를 수확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를 보면 완전히 반대입니다. 값어치가 없은 야생 올리브나무에 값진 참올리브나뭇가지를 접붙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참올리브나무 뿌리에 야생올리브나무가지를 접붙임 했다는 것이에요. 이건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아니, 기껏 값진 참올리브나무가 있어서, 가만히 놔두면 거기서 귀한 올리브 열매를 거둘 수 있는데, 굳이 거기에 야생올리브나무가지를 접붙임 해요? 이는 누가 보아도 상식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나요? 저를 포함해서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1차적으로 본다면 참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가지를 접붙임 하게 되어서, 참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돌감람나무가 받도록 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는 축복과 구원을 이방인에게도 받도록 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공부해 본 바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이방인이 믿게 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인에게 믿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이방인이 대단히 의로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의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자신들이 더 의로워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뿌리로 하여금 이방인이라고 하는 돌감람나무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올라가버리는 식의 엉뚱한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우선 16절에서 보면 <처음 익은 곡식 가루>(麦の初穂)가 나옵니다. 즉 이는 처음 얻어진 수확물, 처음 얻어진 열매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しかし、今やキリストは、眠った者の初穂とし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ました。 하나님은 열매를 거두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에서 벗어나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이며, 그 첫 열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열매에 대한 말씀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만, 오늘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道端に一本のいちじくの木が見えたので、そこに行って見ると、葉があるだけで、ほかには何もなかった。それでイエスはその木に「今後いつまでも、おまえの実は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すると、たちまちいちじくの木は枯れた。 마가복음 11장 13절~14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잎사귀가 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열매를 얻지 못하셨어요. 그 이유가 뭐래요? 예, 무화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열매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나무가 말라 버려서 이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완전히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배가 고파서 열매를 따려고 갔더니, 열매가 없어서 예수님이 성질을 내신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잘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 첫째로 예수님은 열매를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보셨겠지요. 셋째로 예수님은 어떤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넷째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왜 그 나무, 어떤 한 무화과나무한테로 가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가복음 11장 13절 앞부분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11장 13절 전반부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한테 가신 이유는 그 잎사귀가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멀리서 보았는데도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니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렇다면 왜 잎사귀가 않은 것을 보시고 무화과나무에 가셨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의 특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지만 벚꽃이 만발하지요? 봄에 꽃이 필 때를 보시면, 잎사귀가 아니라 우선 꽃이 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잎사귀가 돋아나지요. 무화과의 경우를 보면 희한한 것이 봄이 되면 잎사귀가 나기 전에 열매부터 맺힌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정말 이파리가 없는 앙상한 나무 가지에 무화과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열매가 맺힌 다음에 이제 잎사귀가 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뭐예요? 예, 당연히 거기에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 저렇게 잎사귀가 무성 하다면 당연히 먹음직한 열매도 많이 있겠구나 짐작하시고 다가가셨는데, 막상 나무를 살펴보셨더니 정작 먹을만한 열매는 없고, 먹지도 못하는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이에요.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나무는 아무데도 쓸 모가 없는 나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하셨다는 뜻인 것이지요. 열매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잎사귀들은 많았지만 정작 쓸모가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디에 접붙임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기 중동에 있는 먼 나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접붙임을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요한복음 15장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あなたがたが多くの実を結び、わたしの弟子となることによって、わたしの父は栄光をお受けになります。 우리가 접붙임을 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열매는 없고 온갖 잎사귀 투성이는 아니십니까. 교회에 오래 다니고 이런저런 잎사귀는 많이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취하실 만한 열매는 없는, 그런 인생을 보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5장을 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あなたがたは、年数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아기들을 보세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집안 일을 하겠어요. 아니면 나가서 돈을 벌어 오겠어요. 주변에서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아요. 그저 주는 젖을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되고 서른, 마흔이 됩니다. 몸도 어디 하나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정도 되었으면 이제 나가서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맨날 집에서 주는 젖이나 먹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되면 괜찮아요. 그런데 교회도 오래 다니고 그랬는데도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해요. 맨날 교회가 나한테 뭘 해주길 바라고, 이웃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래요. 내가 먼저 교회나 이웃을 섬기지를 않아요. 그건 뭐예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인데, 여전히 목에 아직 탁받이나 하고 장난감 젖꼭지나 입에 물고 집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과 뭐가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쉽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성경에 보면 이 게으른 사람을 참 흥미롭게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 26장 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怠け者は皿に手を伸ばしても、その手を口に持って行くのを面倒がる。 게으른 사람은 먹을 것이 있는 그릇에 손을 넣고도 그걸 집어서 입에 넣기도 귀찮아 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것도 챙겨주고 저것도 챙겨줍니다. 초신자 때에는 그냥 교회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열매를 맺지 못해요. 생활이 바뀌지 않아요. 믿음 생활은 그냥 취미로 생각해요. 맨날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고, 하나님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라고, 이웃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뻑하면, 내가 교회에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알아? 내가 직분이 뭔지 알아? 내가 몇 대째 목사 장로 권사인지 알아?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이게 뭐예요? 그렇습니다. 다 잎사귀에요. 주님께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잎사귀들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믿음 안에서 게으른 사람의 모습입니까. 마태복음 25장 26절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누가복음 3장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斧もすでに木の根元に置かれています。だから、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すべて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저도 부지런한 편은 아닙니다. 좀 빠릿빠릿 하게 일처리도 그때그때 잘하면 좋겠는데, 자꾸 미루게 되고 게을리하게 됩니다. 이 설교 준비도 좀 미리미리 해두면 좋을 텐데 오늘 이 말씀도 오늘 아침 새벽 5시쯤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인간적인 게으름이 아니에요. 신앙적인 게으름입니다. 신앙적인 게으름은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꾸짖고 계시고 마지막 날에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잎사귀 같은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걸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勤勉で怠らず、霊に燃え、主に仕えなさ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무에 접붙임 되어서,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부지런한 섬김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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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1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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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15절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5節 “15. もし彼らの捨てられることが世界の和解となるなら、彼ら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死者の中からのいのちでなくて何でしょう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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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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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1번째 시간으로서 “기다리시는 주님” 待た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후에 보시면 이른바 돌아온 탕자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교회에 몇 년 다녀 보신 분들이라면, 아니, 교회에 다녀보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익히 알고 계신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오늘은 함께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깨달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는 한 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신약성경 121페이지가 되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24절까지인데, 우선 세 곳으로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14절에서 14설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14절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1 イエスはまた、こう話された。「ある人に二人の息子がいた。 12 弟のほうが父に、『お父さん、財産のうち私がいただく分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財産を二人に分けてやった。 13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14 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後、その地方全体に激しい飢饉が起こり、彼は食べることにも困り始めた。 여기에 보시면 세 사람이 등장하지요. 아버지와 두 아들 그러니까 첫째와 둘째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느 날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자기에게 물려줄 상속분을 미리 달라고 말합니다. 보통 아버지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 배우자나 자식들이 상속을 받는데,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을 몫을 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둘째를 너무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좀 이 둘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한 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자신에게 물려줄 몫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게 나쁜 것인가 하면, 아나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를 생전증여라고 해요. 상속이라고 하는 것은 돌아가신 다음에 발생하는 것이지만, 증여는 생전에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보고 둘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왜 아버지에게 생전증여를 요구했을까요. 정말로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유흥비로 펑펑 써버리고 싶어서였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 볼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째가 이와 같은 요구를 했을 때 아버지가 이를 금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보았을 때 정말 이 둘째한테 나쁜 버릇이 있어서, 정말 그가 요구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면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 둘째의 요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둘째에게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정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쁜 곳에 펑펑 써버리고 말았을까. 저는 여기에 대해서도 편견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둘째의 아버지는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큰 부자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렇잖아요. 일반 서민층이라고 한다면 자식이 아버지한테 자기 상속분을 먼저 달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아버지는 대단한 거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요즘 식으로 본다면 대기업 정도 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둘째가 아버지의 하는 방식을 보니까, 좀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요. 지금은 아버지처럼 가축을 사들일 게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보아서 송아지보다는 양들을 더 많이 매입을 해서 키우면 나중에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서 이건 아버지처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대로 이렇게 해야 하는데……그와 같은 불만이 이 둘째한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이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속여서 빼앗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이 아버지 사업 방식에 대해서 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걸 가지고 꼭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그 동안 몇 번이나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무지 자기 의견을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참다못해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아버지, 이제는 제가 나이도 먹었고 하니 제 방식대로 사업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세요. 뭐,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에 대해 아버지도 납득을 하고 그래, 그러면 내가 네 몫을 줄게, 한 번 해봐라……라고 허락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이제 둘째는 거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집 근처에서 할 수는 없잖아요. 괜히 가까운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기껏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니까 아예 멀리 갔는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먼 나라로 왔습니다. 이 정도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가 있어요. 그럼 무엇부터 할까. 그래, 일단 회사 건물을 알아 봐야겠지요. 괜히 변두리 자리를 잡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사나이가 이왕 시작하는 것, 도시 중심에서 깃발을 꽂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만한 자금력은 충분히 되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이제 사장 아들이 아니라 본인이 사장님이에요. 그러면 이제 옷도 좀 새로 맞춰야죠. 구질구질하게 입으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업을 하려면 사교계에도 진출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아버지는 맨날 회사에서 일만 했는데, 요즘은 사업을 하려면 인맥이 있어야 돼. 그러면 파티도 참석해야 하고 골프도 쳐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래서 아주 멋진 옷도 갖추고, 고급 파티도 갔습니다. 물론 골프채도 제일 비싼 걸로 샀지요. 일단 그 정도 돈은 아버지한테 받았거든요. 자,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상류층들, 셀럽들이 모이는 파티장이나 골프장에 버스나 전철 타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자동차도 사야 하는데, 그런 셀럽들 사이에 끼려고 하는데, 경차나 중고차를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 부유층 사람들과 비교를 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의 고급 자동차도 샀습니다. 자,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이 둘째 아들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까. 물론 좀 소비가 지나쳤다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받은 돈도 그 정도 있고 뭐 그런 상황인데, 고급 옷이나 차를 샀다거나 아니면 골프를 치거나 파티장에 간다는 것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없잖아요. 누가복음 15장 30절에 보면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둘째 아들이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첫째 아들의 상상이죠. 그 동안 먼 나라에 있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직 만나지도 못했는데, 동생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를 형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제 동생은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자본금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가 했던 그런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하자면 정보화 시대에 맞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다방면으로 멋지게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지, 자신의 생각대로 잘 굴러가지 않아요. 여러 인맥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분석해서 투자를 했는데, 어찌 된 게 내가 증권을 사면 떨어지고, 팔았다 하면 올라요. 부동산도 구입을 했더니 무슨 규제에 묶이게 되고, 마침 또 그 때 외환시장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어떻게 된 게 손을 대는 것들이 모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분명 다시 기회가 있을 거야. 다시 일어서고 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안 좋아집니다. 이제 빚이 늘어갑니다.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되었어요. 이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회사나 자동차 같은 모든 재산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나라 상황이 그나마 괜찮다면 어디 취업이라도 해보겠는데,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잖아요. 경제는 좋은데 자기만 망했다면 일자리도 있었겠지요. 월급을 받으면서 빚도 갚고 근근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상황도 말이 아니에요. 말하자면 대공황이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그곳은 먼 나라였잖아요. 그렇잖아도 일자리가 없는데 이왕 사람을 구한다면 내국인을 먼저 뽑지 외국인을 먼저 뽑을 리는 만무합니다. 다음으로 15절~1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19절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 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 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17 しかし、彼は我に返って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なんと大勢いること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ようとしている。 18 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こう。そし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 19 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一人にしてください。」』 여기서 15절을 보시면, 이 둘째가 있었던 곳이 아버지 집으로부터 단순히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완전히 외국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이제 이 둘째는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는데 간신히 얻은 것이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돼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젖이나 가죽을 얻기 위해서 기를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돼지의 경우를 본다면 먹지 못한다면 달리 기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둘째가 머물고 있었던 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정말 산 설고 물 설은 완전 남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문득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해왔던 방식이 옳았는지 모른다. 괜히 내 생각대로 했다가 다 말아먹게 되었다……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지. 여기서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꿈꿔왔던 금의환향, 그 동안 나를 무시했던 아버지나 형님한테 보란 듯이 성공해서 집으로 돌아갈 테야.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밑바닥 중에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젠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키우키는커녕 불결한 짐승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돼지들을, 먹고 살기 위해서 애지중지 돌보아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그 돼지 먹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그것조차도 먹지 못해요. 말하자면 자기 신세가 그 불결하게 여겼던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야, 정말 멋진 꿈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사람은 고사하고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었구나. 차라리 아버지한테 돌아가자. 지금 내 몰골이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보다 못하지 않냐. 그러면서 이제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20절부터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24절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0 こうして彼は立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へ向か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て、かわいそうに思い、駆け寄って彼の首を抱き、口づけした。 21 息子は父に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22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외국으로 갈 때에는 몇 대나 되는 마차를 끌고서 제일 멋진 말을 타고서는 편안하고 우아하게 출발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꼼짝없이 걸어갈 수 밖에 없어요. 그것도 한 두시간이 아닙니다. 먼 나라 외국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몇 날 며칠을 가야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이제 멀리 아버지 집이 있는 동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글쎄요. 여기 군마가 아버지 집이었다고 한다면, 저 멀리 군마현청이 보여옵니다. 이제 지친 몸을 끌고 걸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 달려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만약에 집 근처까지 갔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했다면 우연히 맞닥뜨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집에 가까이 간 것도 아니에요. 아직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둘째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죠.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딸이 집을 나갔는데, 그 딸의 어머니가 언제 돌아와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끼니때마다 밥을 차리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돌아왔는데 집이 없어지면 못 찾아 올까봐 이사도 안 가고 기다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쩌면 둘째는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몇 날 며칠 동안,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몇 번이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말로 용서를 빌까. 어떻게 말씀을 드리면 나를 받아 주실까. 아버지가 달려오자 아들은 몇 번이고 되뇌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너 이 자식아 그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많던 돈은 다 어디에 쓰고 이런 꼴로 돌아왔어? 돈은 얼마나 남은 거야? 등등……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물어볼 것이 많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다고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23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2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아버지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가 아무리 돈을 탕진했다 하더라도 아버지 집은 여전히 풍족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합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이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도록 하라고 종들한테 명합니다만, 아들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주시는 최고급 옷도 좋지만 이 누더기도 버릴 수 없습니다. 순금반지도 좋지만 철사로 만들어진 반지도 끼고 있을래요. 비싼 신발은 이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신을래요……이러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새롭게 좋은 옷을 입기 위해서는 옛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싸구려 가락지들을 주렁주렁 끼고 있었다면 이를 빼 버려야지 아버지가 주시는 가락지를 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발은 더하지요. 그 먼 거리를 걸어오느라고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벗어버려야지만 아버지가 주시는 최고급 신발을 신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옷만 입으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맨날 너덜너덜한 추리닝 차림으로 다니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헌 옷인데, 뭐가 묻으면, 대충 쓱쓱 문지르거나 어디든지 그냥 땅바닥에 앉아도 상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최고급 정장을 입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여기저기 아무데나 앉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이제 몸가짐도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락지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내가 이제 큰 일을 맞게 되었는데, 예전처럼 동네 건달처럼 행동해서 되겠습니까. 무슨 욕이나 상스러운 말들을 내뱉어서야 되겠냐 하는 말이에요. 그 주어진 권위에 걸맞는 말과 행동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발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최고급 신발이 아니더라도 새신발을 사 신으면 적어도 그 날은 어떻습니까. 그 깨끗한 신발을 신은 채로 진흙탕에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옛 옷들을 입고 있었습니다. 옛 가락지와 낡아빠진 신발들이 제일 좋은 것인 줄 알고, 그것 하나 놓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거리며, 그런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바로 세상적인 생각이자 세상적인 교만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세상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교만을 끝까지 고집 했었더라면,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요, 아버지가 주는 새 옷과 새 가락지, 새 신발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생각,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맞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15장 24절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5절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もし彼らの捨てられることが世界の和解となるなら、彼ら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死者の中からのいのちでなくて何でしょうか。 여기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한 덕분에 아버지를 다시 알게 되고 새사람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보고 시기하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주님 앞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는 이제 옛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 옷을 입을 수 있고, 새 가락지를 끼울 수 있고, 새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잘못될 수 있어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보다 아들 생각이 더 맞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틀리고 우리가 맞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어요. 우리는 공의롭고 진리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옳은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날을 저 멀리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에게 주실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차례입니다. 낡은 생각, 낡은 고집, 낡은 자존심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말씀, 새로운 행함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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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0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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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13절~14절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3節~14節 “13.そこで、異邦人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私は異邦人への使徒ですから、自分の務めを重く受けとめています。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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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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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0번째 시간으로서 “마음 속의 우상” 心の中の偶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그래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력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청년관료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탄압 했었다는 과거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 들여졌을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공생애 기간 중 유대교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백성들을 따뜻하게 대하였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심하게 꾸짖으신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잘못됐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거나 바꾸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면, 그러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잘못이 없고 예수님도 잘못이 없고, 그리고 율법도 잘못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잘못의 원인은 바로 그들, 당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기들 생각에 맞추어서 마음대로 해석을 한 다음, 그것을 백성들에게도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냐 하면 말씀에 변질이 생깁니다.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순수한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 빛은 1000년 전이나 1000년 후나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은 모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변하고 녹이 슬고, 끝내는 그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철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금이라고 한다면, 순금 중의 순금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자신들은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던 종교지도자들은 그 순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수많은 불순물로 인해서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른바 가톨릭에 대해서 기독교를 개신교라고 하지요. 그래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교회가 생겨났고, 그 명맥을 가톨릭이라고 한다면, 우리 기독교는 1517년 종교 혁명 때 탄생한, 아직 500년도 안 된 새로운 종교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과연 그런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신데,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마틴 루터입니다만,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카톨릭 사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카톨릭의 가르침을 보면 볼수록 어딘가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여기에 자꾸 사람의 생각, 사람의 주장, 사람의 전통 등이 들어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해서 그가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각, 사람의 주장, 사람의 전통이라고 하는 불순물로 인해서 변질되었던 믿음에서 벗어나, 변질되기 이전인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가 신교라기보다는 오히려 구교보다도 훨씬 이전, 변질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잖아요. 그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고, 또한 철저한 유대교 교육을 받았던 그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잡아들이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제 예수님의 부름을 받게 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되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 그리고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성경을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순금이고 예수님이 불순물이 섞인 금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들은 형편없는 고철덩어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순금 중의 순금, 완전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です。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그래서 그는 자신이야말로 참된 믿음을 가진 의인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 의인이는커녕 죄인 그것도 죄인 중에서 괴수였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데, 이 길은 대단히 험난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고철덩어리한테 고철덩어리라고 하면 듣는 고철덩어리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일반 서민층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당신들의 생각들 틀렸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이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바울도 유대인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그야말로 힘든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이방인에게도 가야 했습니다. 바울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쉽지요. 유대인이 아니면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방인이라면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이사야서 44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사야 44장 13절~18절 13.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3.木で細工する者は測り縄で測り、朱で輪郭をとり、かんなで削り、コンパスで線を引き、人の形に造り、人間の立派な姿に仕上げて、神殿に安置する。 14.杉の木を切り、うばめ樫(がし)や樫の木を選んで、林の木の中で自分のために育てる。月桂樹を植えると、大雨がそれを生長させる。 15.それは人間のために薪(たきぎ)になり、人はその一部を取って暖をとり、これを燃やしてパンを焼く。また、これで神を造って拝み、これを偶像に仕立てて、これにひれ伏す。 16.半分を火に燃やし、その半分の上で肉を食べ、肉をあぶって満腹する。また、温まって、『ああ、温まった。炎が見える』と言う。 17.その残りで神を造って自分の偶像とし、ひれ伏してそれを拝み、こう祈る。『私を救ってください。あなたは私の神だから』と。 18.彼らはよく知りもせず、理解もしない。その目はふさがれていて見ることもできず、その心が賢くなることはない。 사람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것을 베어 가져와서, 추울 때에는 그걸 땔감으로 해서 장작불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리고 일부는 그 나무들로 불을 일으켜서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그리고 나머지로는 조각을 해서 그걸 신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 소원을 빈다는 것입니다. 아니, 땔감으로 썼던 장작이나,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었던 나무나, 우상을 만든 나무나, 그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에요. 똑 같은 나무에요. 이런 말을 하면, 아, 그 조각에는 만드는 사람이 혼을 불어넣는다……뭐 그런 표현을 씁니다만, 아니, 혼을 불어넣는 건 아무나 합니까. 혼을 불어 넣는 것은 누가 할 수 있어요? 그렇죠. 하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사람은 혼을 불어 넣을 수가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혼을 불어넣었다면 살아서 움직여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나무나 돌 우상이 움직입니까. 그리고 백 보 양보 해서 정말 사람이 그 우상에게 혼을 불어넣어서 그 우상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되었다면, 그 우상이 대단해요? 아니면 그 우상을 만든 사람이 대단해요? 당연히 그 우상을 만든 사람이 더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구원할 신을 만든 사람인데. 그렇다면 그 우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든 사람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세상에, 신을 만든 사람인데 말이에요. 사람이 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그냥 그만큼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혼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지요. 이 이사야서는 대략 기원전 70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그로부터 2700년이 지난, 21세기의 지금도 역시 이처럼 우상을 섬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은 이 우리의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우상이 아니라 조금 다른 우상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그 이전에 오늘 본문 중에서 14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자, 여러분이 이방인이라고 합시다. 이방인인데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와서 여러분께 말합니다. 복음이 왜 당신한테 전해지게 되었고, 당신이 왜 구원을 받게 된 줄 알아? 그건 말이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질투 나게 하기 위해서야. 만약에 이런 말음 들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까요? “아니, 무슨 소리에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셔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거예요.” 그러자 바울이 말합니다. “알아. 그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복음이 너한테까지 전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방인인 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질투를 일으키게 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좀 어떻게 구원 받게 하려고 한 거야.” 물론 여러분께서는 인간성이 좋으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제가 만약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저한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바울이라 하더라도 좀 마음이 안 좋았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좀 삐졌을 것 같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게 알고 보면 상당히 골치 아픈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존심,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이상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나 자신을 존중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에요. 예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때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논하고 신앙을 가르치면 껌뻑 죽고 순종을 하는데, 고작 서른 정도 밖에 안 된 젊은 사람 입에서 율법이 막 나오고 성경이 나오는데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어요. 자기들이 생각해도 그 말에서 모순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들의 주장이 모순처럼 느껴지게 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했어요? 마가복음 3장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すぐに、ヘロデ党の者たちと一緒に、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그렇습니다. 그들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이 거룩한가요? 우리 마음이 거룩하다면 우리가 가진 자존심 또한 거룩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거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12절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悟る者はいない。神を求める者はいない。 すべての者が離れて行き、だれもかれも無用の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だれ一人いない。」 여러분, 우리 마음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거룩하기만 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그 마음 안에는 얼마나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까. 마가복음 7장 20절~23절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イエスはまた言われた。「人から出て来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内側から、すなわち人の心の中から、悪い考えが出て来ます。淫らな行い、盗み、殺人、 姦淫、貪欲、悪行、欺き、好色、ねたみ、ののしり、高慢、愚かさで、 これらの悪は、みな内側から出て来て、人を汚すのです。」 아무리 우리 자존심이 거룩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 자존심은 마치 거룩해 보이는 나무 신상이 알고 보면 땔감에 쓰이는 나무와 같은 것처럼, 우리의 자존심도 우리를 더럽게 하는 마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자존심이 안 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이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 나에게로 온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아브라함이 무슨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위해, 그 당시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 대신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자, 오랜만에 그 질문 한 번 여쭈어볼까요?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귀한 자격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이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로 여겨 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예수님 근처에도 갈 자격도 없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값없이 의롭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그 부족한 자존심이라고 하는 우상을 벗어버리고, 내가 잘나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넘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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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9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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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11절~12절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1節~12節 “11.それでは尋ねますが、彼らがつまずいたのは倒れるため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彼らの背きによって、救いが異邦人に及び、イスラエルにねたみを起こさせました。 12.彼らの背きが世界の富となり、彼らの失敗が異邦人の富となるのなら、彼らがみな救われることは、どんなにすばらしいものをもたらすことでしょ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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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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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9번째 시간으로서 “올바른 회개” 正しい悔い改め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역시 어렵게 느껴지실 수가 있는데, 항상 그랬던 것처럼 함께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다시 볼까요? 로마서 11장 11절~12절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1節~12節 11.それでは尋ねますが、彼らがつまずいたのは倒れるため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彼らの背きによって、救いが異邦人に及び、イスラエルにねたみを起こさせました。 12.彼らの背きが世界の富となり、彼らの失敗が異邦人の富となるのなら、彼らがみな救われることは、どんなにすばらしいものをもたらすことでしょう。 우선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지지난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은 이방인도 아니요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자신들의 눈을 어둡게 했고, 끝내는 하나님의 독생자마저도 알아보지 못한 채 처참하게 살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중 라오디게아 (ラオディキア)교회에 보내라고 하신 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あなたは、自分は富んでいる、豊かになった、足りないものは何もないと言っているが、実はみじめで、哀れで、貧しくて、盲目で、裸であることが分かっていない。 여기에 나오는 부자와 가난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믿음으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믿음이 좋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다른 죄인들은 몰라도 나는 반드시 1순위로 구원 받을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고 있지만, 아니야. 그건 착각이야. 세상에 너만큼 비참하고 너만큼 불쌍하고, 너만큼 믿음이 적은 사람도 없어. 너는 앞도 제대로 못 보고 너 스스로가 벌거벗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이는 바로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11절에 의하면 교만한 이스라엘로부터 그 믿음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기하게 된다고 해요. 생각해보세요. 자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엄한 신앙 속에서 자랐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고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율법대로 엄격한 환경 속에서 생활해왔습니다. 그 결과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줄 알았어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 다른 죄인들은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정말 가까이 가기도 불결한 죄인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인데 그 근처에 있다가 자기도 저주를 받으면 어떡해요. 그래서 상종도 안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끼리 거룩한 곳에서 거룩하게 생활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교만이 예수님을 못 박아 버림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고, 오히려 자기들이 제일 경멸했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어요. 일이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해 하겠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요? 예,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말씀하셨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금 길지만 19절에서 31절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9.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20.その金持ちの門前には、ラザロという、できものだらけの貧しい人が寝ていた。 21.彼は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たちもやって来ては、彼のできものをなめていた。 22.しばらくして、この貧しい人は死に、御使いたち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懐に連れて行かれた。金持ちもまた、死んで葬られた。 23.金持ちが、よみ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遠くにアブラハムと、その懐にいるラザロが見えた。 24.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25.するとアブラハムは言った。『子よ、思い出しなさい。おまえは生きている間、良いものを受け、ラザロは生きている間、悪いものを受けた。しかし今は、彼はここで慰められ、おまえは苦しみもだえている。 26.そればかりか、私たちとおまえたちの間には大きな淵がある。ここからおまえたちのところへ渡ろうとしても渡れず、そこから私たちのところへ越えて来ることもできない。』 27.金持ちは言った。『父よ。それではお願いですから、ラザロを私の家族に送ってください。 28.私には兄弟が五人いますが、彼らまでこんな苦しい場所に来ることがないように、彼らに警告してください。』 29.しかし、アブラハムは言った。『彼らにはモーセと預言者がいる。その言うことを聞くがよい。』 30.金持ちは言った。『いいえ、父アブラハムよ。もし、死んだ者たちの中から、だれかが彼らのところに行けば、彼らは悔い改めるでしょう。』 31.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モーセと預言者たち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たとえ、だれかが死人の中から生き返っても、彼らは聞き入れはしない。』」 이는 대단히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한번 좀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어느 동네에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대단히 값이 나가는 옷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최고급 명품 옷이라고 하겠지요. 그런 옷들만 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하니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 등등 최고급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나사로는 반대로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다고 할만큼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건강도 안 좋고, 집도 없고, 마땅한 옷도 없고, 끼니조차도 제대로 때우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나사로는 아브라함이 있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 불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아니, 부자였던 사람이 저기 보았더니 그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한테 말하기를 거기 있는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한테 물을 그 손가락에 찍어서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해요.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이 부자였던 사람, 정말 상황판단이 안 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 본다면 자기는 귀한 신분이요 나사로는 하찮은 사람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제 상황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어요. 나사로는 천국 시민이고 자기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나사로한테 심부름을 시키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24절만이 아니에요. 27절에도 보면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으로 보내라고 해요. 이것을 보면 정말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져서도 고쳐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에 보면 여기에는 정보량이 워낙 많아서, 이것만으로도 몇 주 연속으로 말씀을 전할 수도 있는 분량입니다만, 오늘은 간추려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거지 나사로 이야기라고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만, 여기서의 주인공을 거지 나사로에 맞추면 이야기의 본질이 흐려집니다. 어떻게 흐려지냐 하면, 마치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은 가난했기 때문이고, 부자가 지옥 불에 떨어진 이유는 부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가난한 것이 축복이요, 풍요로운 것이 저주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가난이 축복입니까. 아니에요. 가난은 절대로 축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면 하나님도 이웃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어요. 물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나쁜 짓을 해서 재산을 축적했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열심히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일을 해서 풍요롭게 되었다면 이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난한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것이 핵심이 아니라, 부자였던 사람이 지옥 불에 떨어진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부자였던 사람이 지옥 불에 떨어졌느냐 하면, 그 이유는 부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자였기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부분, 그러니까 부자의 눈이 가려져서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다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그것은 바로 <나사로>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세상에 보면 아주 가난한 사람들 계시잖아요. 물론 지금 전세계가 코로나다 전쟁이다 해서 많은 분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만, 아니,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정말 집도 없고 마땅한 옷도 없어서, 오늘 하루 잠을 잘 곳, 오늘 하루 먹을 것도 얻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에서는 여러분 주위에서 그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아시나요? 저는 요즘은 제 주변에 그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서울에 있을 때에는 이렇게 시내를 다니다 보면 많이 봤죠. 하지만 그런 분들 중에서 제가 이름을 아는 분들은 안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정말 무슨 재벌그룹 회장님 부럽지 않을 정도로 호화롭게 살았던 이 부자가, 집도 없고 그런 극도로 가난한 나사로의 이름을 알았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고 한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을 갑자기 나 개인이 도우려고 한다면 사실 좀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더 쉽게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나사로를 알았습니다. 그런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만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나사로>라고 하는 이름도 알았어요. 그리고 부자는 말 그대로 돈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거기에 걸맞을 정도로 사회적인 지위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나사로에게 충분히 도움을 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나사로에게 그냥 돈을 몇 푼 쥐어줄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최소생계비라도 주고, 그리고 그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치료비나, 거기에 작은 단칸방 정도를 얻어준다 하더라도, 그 비용은 어쩌면 그가 먹는 저녁 한 끼 식사값 정도도 안 될지도 모릅니다. 큰 풀장에서 바가지로 몇 번 물을 떠서 준다고 해봐야 티도 나지 않잖아요. 정 돈을 거저 주고 싶지 않다면, 내가 돈을 꾸어 줄게. 그걸로 앓고 있는 병도 고치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나중에 벌면 갚아라. 아니면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을 해라. 그래서 그 월급으로 갚아라. 그 정도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는 나사로를 그 이름까지 알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를 충분히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그렇습니다.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属する者だということで、あなたがたに一杯の水を飲ませてくれる人は、決して報いを失うことがありません。 도움을 준다고 해서 전재산을 몽땅 준다거나, 빚을 내면서까지 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목마른 사람한테 물 한잔 주는 정도의 도움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다면 그는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약에 부자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정말 그에게 있어서 물 한 그릇 정도에 해당하는 도움을 나사로에게 주었더라면, 그는 결코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옥 불에 떨어진 부자가 알고 있는 것은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지옥으로 오게 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31절 “27.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7.金持ちは言った。『父よ。それではお願いですから、ラザロを私の家族に送ってください。 28.私には兄弟が五人いますが、彼らまでこんな苦しい場所に来ることがないように、彼らに警告してください。』 29.しかし、アブラハムは言った。『彼らにはモーセと預言者がいる。その言うことを聞くがよい。』 30.金持ちは言った。『いいえ、父アブラハムよ。もし、死んだ者たちの中から、だれかが彼らのところに行けば、彼らは悔い改めるでしょう。』 31.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モーセと預言者たち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たとえ、だれかが死人の中から生き返っても、彼らは聞き入れはしない。』」 이 부자, 이번에는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네 아버지 집으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그들한테 나사로가 가서 이런 사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서 이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회개하기만 하면 자기가 있는, 정말 그런 고통스러운 곳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자기는 알았죠. 그들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그런 짓들을 당장 하지 말고 회개해서 절대로 이런 끔찍한 곳으로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16장 29절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29.しかし、アブラハムは言った。『彼らにはモーセと預言者がいる。その言うことを聞くがよい。』 그리고 31절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31.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モーセと預言者たちに耳を傾けないのなら、たとえ、だれかが死人の中から生き返っても、彼らは聞き入れはしない。』」 여기서 말하는 <모세와 선지자>가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굳이 죽은 사람이 다시 가서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할 말은 성경에 다 적혀 있다. 만약에 성경에 적힌 말씀을 읽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가서 말해봤자 어차피 회개하지 않는다고 아브라함은 말했다는 것이에요. 이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지옥 불에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부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것은 지금 그 순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에 대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시기와 질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 말씀을 깨닫고 회개 했었더라면 내가 지금 이 끔찍한 고통을 겪지 않고 있을 텐데, 저렇게 내가 무시했던 나사로가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시기와 질투와 후회가 끓어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뜻은 지금 이 시대에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날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세상이 교회를 보고 반성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그리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하고 성경 말씀,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으로 인도해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교회가 세상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돈 문제, 여자 문제, 권력 문제, 정치 문제 등으로 얼룩져서 점점 더 성경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1장 31절 후반부에 보시면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장로들(祭司長と民の長老)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 후반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取税人たちや遊女たちが、あなたがたより先に神の国に入ります。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진흙탕 속에서 죄를 지으며 뒹구는 사이에, 우리가 받아야 할 축복이 어디로 가냐 하면, 그 전에는 정말 우리가 생각하기에 죄인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은 구원 받더라도 저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한테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1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1절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1節 11.それでは尋ねますが、彼らがつまずいたのは倒れるため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彼らの背きによって、救いが異邦人に及び、イスラエルにねたみを起こさせました。 이스라엘이 실족하더라도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지는 않았다고 하십니다. 즉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인해서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시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을 봅니다. 로마서 11장 12절 “12.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2節 12.彼らの背きが世界の富となり、彼らの失敗が異邦人の富となるのなら、彼らがみな救われることは、どんなにすばらしいものをもたらすことでしょう。 이스라엘이 넘어져도 이방인에게 풍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이스라엘이 충만하게 되면 얼마나 더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되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나사로가 작심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시작한 경우와, 어마어마한 부자가 이제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그 재산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 시작한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회개한 부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는 없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회>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의 하루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 이웃을 섬길 수 이는 기회,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꼭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기도하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에요. 뉘우쳐야 할 잘못이 있으면 주님 앞에서 뉘우치고 올바른 길을 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부자가 회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지요? 그것은 바로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 18장 32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エゼキエル書18章32節 わたしは、だれが死ぬのも喜ばない──神である主のことば──。だから立ち返って、生きよ。」 아무리 죽어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神の御使いたちの前には喜びがあるのです。」 이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회개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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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8회 마음 속의 우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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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5회 높이시는 주님 | |
2022년 8월 2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8 |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9절~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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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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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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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8번째 시간으로서 “ 높이시는 주님 ” 高く上げてくださ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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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4회 진정한 지혜 | |
2022년 8월 2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7 |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6절~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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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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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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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7번째 시간으로서 “진정한 지혜” 真の知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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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3회 7000이라는 축복 | |
2022년 8월 14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6 |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1장 1절~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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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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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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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6번째 시간으로서 “7000이라는 축복” 7000という祝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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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회 깨어나기 위하여 | |
2022년 8월 7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5 |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0장 19절~2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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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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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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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5번째 시간으로서 “깨어나기 위하여” 目を覚ます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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