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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9회 넉넉히 이기는 믿음
2022년 2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37절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5節~37節
“35.だれが、私たちをキリストの愛から引き離すのですか。苦難ですか、苦悩ですか、迫害ですか、飢えですか、裸ですか、危険ですか、剣ですか。
36.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37.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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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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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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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4번째 시간으로서 “넉넉히 이기는 믿음” 圧倒的に勝利する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세 구절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5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だれが、私たちをキリストの愛から引き離すのですか。苦難ですか、苦悩ですか、迫害ですか、飢えですか、裸ですか、危険ですか、剣ですか。

여기서 바울은 질문을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 이 질문은 8장 마지막인 39절까지 이어져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무엇이겠는가. A, B, C이겠는가…… 라는 문장 구성은, 쉽게 말해서 A도 B도 C도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는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겠는가 하는 말씀은, 다시 말하자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고 한 말씀들을 우선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에는 일곱 가지가 등장합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그리고 칼입니다.

먼저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어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2022년 2월 현재까지도 전세계를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도 그렇습니다.

코로나 초기에는 독감처럼 금새 사라질 알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마스크조차 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평소라면 하더라도 마스크 30장을 100엔이면 살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게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도무지 줄지 않아요. 좀 줄어가나 하면 다시 늘어가고, 줄어드나 하면 또다시 늘어나는 일의 반복입니다. 음식업, 관광업을 비롯해서 많은 곳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몇 대 째 걸쳐 내려온 사업장들이 문을 닫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전면전이 벌어졌습니다. 현지 기자들은 말합니다. 바로 전날까지도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던 지하철역이 하루 사이에 피난민으로 넘친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함께 식사를 했던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전 예고도 없이 총알이 날라오고 폭탄이 터집니다.

이와 같은 환난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칩니다.

성경 욥기에 보면 이와 같은 재앙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합니다.


욥기 1장 13절~19절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ある日、彼の息子、娘たちが、一番上の兄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いたとき、
一人の使者がヨブのところにやって来て言った。「牛が耕し、そのそばでろばが草を食べていると、
シェバ人が襲いかかって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神の火が天から下って、羊と若い者たちを焼き滅ぼ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カルデア人が三組になって、らくだを襲い、これを奪い取り、若い者たちを剣の刃で打ち殺し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もう一人が来て言った。「あなたのご子息やお嬢さんたちは、一番上のお兄さんの家で食べたりぶどう酒を飲んだりしておられました。
そこへ荒野の方から大風が吹いて来て、家の四隅を打ち、それがお若い方々の上に倒れたので、皆様亡くなられました。私一人だけが逃れて、あなたに知らせに参りました。」


여기에 보면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この者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멀쩡히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오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큰 바람이 불어와서 가족과 가축들이 죽고 집이 무너집니다. 정말로 숨쉴 겨를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욥이 잘못을 저질렀나요? 욥이 뭔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환난을 당하는 것인가요?

욥기 1장 1절에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1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ウツの地に、その名をヨブという人がいた。この人は誠実で直ぐな心を持ち、神を恐れて悪から遠ざかっていた。

그는 전혀 잘못이 없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욥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곤고입니다. 환난은 외부적인 요인이 강하다고 한다면, 곤고는 고뇌나 번민이라고 하는 것은 내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뇌나 번민의 원인이 환난이나 고난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울증 같은 경우는 환난이나 고난이 없더라도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부유층이나 돈 많은 연예인들이 도박이나 마약에 빠지는 경우를 뉴스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맨날 하는 고민이 돈 걱정인데, 아니, 돈도 많고 시간도 많고 나이도 젊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왜 도박을 하거나 마약에 손을 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겠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말로 할 수 없는 공허함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돈이 없고 가난할 때에는 어떻게든지 부자가 되기 위해서 이를 악 물고 공부하거나, 아니면 궂은 일도 마다 않고 일을 했는데, 이제 넉넉해 지니까 목적이 상실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돈은 많지만 오히려 마음이 공허해 져서, 마치 실이 끊긴 연처럼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질병이 곤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셋째는 박해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있고, 사회적인 스트레스도 포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은 흔히들 하는 말에 무슨 하라스먼트라는 것이 있지요.

성희롱을 나타내는 섹슈얼 하라스먼트나, 상사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서 부하직원들에게 이른바 갑질을 하는 파워 허라스먼트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보니까 이 허라스먼트의 종류가 무려 40가지가 넘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유형의 허라스먼트가 있다고는 하나 이는 모두가 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일종의 박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넷째는 기근이고 다섯째는 적신입니다. 참고로 적신이라고 하는 것은 입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위험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위험만이 아니라 질병이나 정신적인 위험도 포함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은 ‘칼’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에 의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위태로움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일곱 가지 재앙 중에서 하나라도 우리가 겪게 된다면 이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집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렵게 되겠지요.

이러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 바로 36절입니다.

로마서 8장 36절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끄떡없을 것 같다는 분 계십니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지 모릅니다.

제아무리 근육질에다가 힘이 센 사람이라 하더라도 집에서 옷장 모퉁이에 새끼발가락을 부딪쳤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 있습니까.

솔직히 새끼발가락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이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진 사람을 봤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가시 하나라도 손가락에 박히면 얼마나 아픕니까.

나는 괜찮아.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끄떡없다고 장담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는 정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양이나 다름 없다고 성경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8장 37절에 보면 기적의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접속사인 ‘그러나’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이 ‘그러나’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적의 접속사입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야구를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구에 보면 ‘홈런’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쉽게 말하자면 내가 공을 쳐서, 저기 담장을 넘어가면 홈런입니다.

보통 투수가 공을 던져서 내가 방망이로 공을 쳤을 때 수비수들이 잡거나 하면 아웃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수비수들이 아무리 다리가 빠르거나 실력이 좋더라도 이를 완전히 무력화 하는 것이 바로 홈런입니다. 홈런을 한 번 치면, 보통 야구는 수비수가 9명이지만, 9명이 아니라 90명이 있다 하더라도 소용 없습니다. 높이 공이 올라가면 아무도 못 잡아요. 그리고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면 점수를 따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른바 인과관계라고 하지요?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이에요. A라고 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B라고 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면, 만약 A라고 하는 원인이 없었다면 B라고 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 때 A와 B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있어요, 우리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요. 경제적인 문제, 물리적인 위협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고난들이 많아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죠? 이럴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은 ‘그래서’입니다. A 그래서 B, 이는 뭐예요? A 이기 때문에 B라는 거예요.


나한테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불행해요. 그렇기 때문에 절망해요. 슬퍼해요. 낙심해요.

여기서 더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예수님을 버립니다. 내가 이상해? 내가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믿어도 이렇게 어려움이 닥쳐오고 고난과 고통을 겪는데, 하나님을 믿어서 뭐하고 예수님을 믿어 봤자 뭐해?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은 여기서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러나’입니다.

놀라운 수비수들이 수 십 명, 수 백 명 깔렸어요. 그래서 나는 못해. 그래서 나는 안 돼.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물러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8장 37절에서는 뭐라고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홈런 한 방이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이 무력화가 됩니다.

환난이 있어요. 어려움이 있어요. 배도 고프고 돈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온통 내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 투성이에요……이 때 무슨 말을 떠 올려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나”입니다.


우리 눈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러나”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그러나” 뒤에 뭐라고 기록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로,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 대통령선거를 보면 참 서로가 서로를 원색적으로 비난을 합니다. 정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물고 뜯고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 중 하나가 지지율이 거의 박빙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설문조사를 하는 기관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이른바 유력후보들의 지지율이 거의 오차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0.몇 프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서로 어떻게든 작은 흠집이라도 하나 내보려고 서로 비난하고 비방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한쪽 지지율이 90프로가 넘고, 다른 한쪽 후보가 10프로도 안 된다고 해봐요. 그럼 90프로도 넘는 후보가 상대방을 그렇게 심하게 깎아내리려고 하겠어요? 오히려 점잖게 자기 길을 가겠지요.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야박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 넉넉하게 이긴다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아멘 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가벼워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입입니다.

그럴 때 보면 우리의 입이 얼마나 가벼워지는 지 몰라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 하다가도, 금새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가나단 땅을 정탐하고 온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열 사람들의 말을 믿고는 절망을 합니다. 낙심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민수기 14장 2절~3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이게 지금 무슨 말이에요? 이제 놀라운 축복,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하나님께서 주시려는데, 그들은 에잇, 차라리 광야에서 죽거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가나안 사람들한테 죽게 생겼다……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민수기 14장 28절~30절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아니, 지금 내가 놀라운 축복을 주려고 하는데, 뭐 어째고 어째?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그래. 알았어. 내 귀에 들린 대로 너희들한테 해주마.

너희들, 내가 주려고 했던 축복 못 받아. 가나안 땅? 못 들어가. 너희들이 한 말처럼 광야에서 다 죽게 해주겠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처럼 어려움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욥, 그야말로 당대에 욥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가 없었다고 하는데도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욥은 어떻게 했습니까.

욥기 1장 20절~22절
“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このとき、ヨブは立ち上がって上着を引き裂き、頭を剃り、地にひれ伏して礼拝し、
そして言った。「私は裸で母の胎から出て来た。また裸でかしこに帰ろう。主は与え、主は取られる。主の御名はほむべきかな。」
ヨブはこれら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罪に陥ることなく、神に対して愚痴をこぼすようなことはしなかった。


욥기 2장 9절~10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すると、妻が彼に言った。「あなたは、これでもなお、自分の誠実さを堅く保とうとしているのですか。神を呪って死になさい。」
しかし、彼は妻に言った。「あなたは、どこかの愚かな女が言う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私たちは幸いを神から受けるのだから、わざわいも受けるべきではないか。」ヨブはこの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唇によって罪に陥ることはなかった。

여러분,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평소 때 알지 못합니다. 무슨 과속을 하거나 급커브를 빠른 속도로 끼기긱 소리 내면서 도는 것이 운전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운전을 잘하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를 할 줄 아느냐 못하느냐 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그 사람이 믿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위기가 닥쳤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 크고 작은 사과들이 많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사과가 제일 단단하게 매달려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흔들어보면 됩니다. 보기에는 꽤 단단히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조금 흔드니까 후두두둑 하고 떨어지는 것이 있나 하면, 반면에 아무리 흔들어도 끝까지 안 떨어지는 사과도 있는 것이지요.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다가, 조금 시련이 닥쳐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심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 끝까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 입술로 죄를 짓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마침내 승리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37절에 보시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긴다고 하시나요?

로마서 8장 37절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긴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떠한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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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8회 고발과 정죄 그리고 구원
2022년 2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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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34절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3節~34節
“33.だれが、神に選ばれた者たちを訴えるのですか。神が義と認めてくださるのです。
34.だれが、私たちを罪ありとするのですか。死んでくださった方、いや、よみがえられた方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が、神の右の座に着き、しかも私たちのために、とりなしていてくださ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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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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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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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2번째 시간으로서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栄光を与え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그 만화를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쉽게 말해서 드래곤 볼이라고 하는 이름의 구슬 일곱 개가 전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데, 그것을 일곱 개 모으면 용이 한 마리 나타나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니까 예전에 봤던 일본 만담이 떠올랐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한 사람이 그래요. 자가가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드래곤 볼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 소원이 뭐길래 드래곤 볼을 찾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아까 그 사람이 말합니다. 사실 자기 할머니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데, 치료비가 많이 든대요.

그런데 자기네 집은 가난해서 치료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자기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기를 드래곤 볼을 찾아서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고 소원을 빌겠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재미가 없지, 실제로 들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이 만담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웃기기 위해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만, 이게 말이 되나요?

이 우스갯소리이긴 합니다만, 제게는 적지 않게 인상에 남았습니다.


자,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 사람한테는 지금 세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는 할머니가 입원을 했어요. 둘째는 입원비가 많이 드는데 돈이 없어요. 셋째는 이렇게 되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요.

그럼 이 시점에서 정말 드래곤 볼을 모아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무슨 소원을 말해야 되겠어요?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내 머리가 혼란스러우니까 일단 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한 가지 소원 밖에 말할 수가 없는데 이게 소원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리 돈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할머니 병이 낫지 않고 계속 입원하고 치료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이 안 돼요.

왜죠?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핵심적인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뭐예요? 그렇죠. 지금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할머니의 병이죠. 할머니 병이 나으면 병원비 걱정도 없어질 것이요, 이로 인해서 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해결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는 단순히 사람 웃기자고 하는 말입니다만, 어 말을 듣고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도 믿음 안에서 이와 비슷한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행히 주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 주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주님께서는 너무 많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주님께 바랄 때, 무엇이 핵심인지를 알고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을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이끌어주시는 자만이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줄 사람을 언제 선택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미 부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를 뒤집어보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사람들을 창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시기로 또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럼 여기에 우리는 들어가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그렇죠. 들어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간에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30절을 우선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자, 이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다고 합니다. 의롭다는 것이 무엇이었죠? 그렇죠.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시겠습니까. 우리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는 불충분 해요. 왜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왕 노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천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에 부연설명을 드리지만, 아니, 왕은 하나면 될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걱정 없습니다.

옛날에 중국에 보면 황제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만, 땅이 워낙 넓으니까 혼자서 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에 사람을 하나씩 두어서 이를 다스리도록 했는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보면, 당시에는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황제’라고 하지 못하고 ‘왕’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황제라고 하지 못했냐 하면 바로 중국에 황제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당시 조선은 중국의 속국과도 같은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황제는 자기를 가리킬 때 ‘짐’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왕은 ‘짐’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 같은데 보면 왕이 자기를 가리키면서 ‘과인’이라고 하면 좀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과인’의 ‘과’ 자는 ‘과부’할 때 쓰는 ‘과’자거든요. 그럼 그 ‘과’자가 무슨 한자냐 하면, ‘적을 과’자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따라서 ‘과인’이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천자, 다른 말로 황제에 비해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겸양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 우리나라를 낮춘다는 일은, 이는 지금 생각하면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춘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장차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다스릴 때에도 주님께 순종하면서 왕 노릇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는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생을 마치고 천국에 갔어요.

천국에 가면 대단히 좋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러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착순도 아니고, 어차피 가시게 될 텐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이 땅에서 다 마치시고 난 다음에 천천히 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 가운데에 이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우리더러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천국에 왔으니 왕이 되어서 나와 함께 다스려야지……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에이, 제가 무슨 왕이 됩니까. 괜찮아요. 제가 지금까지 천국 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이제 좀 편히 쉴래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주님께서, 아, 참 너는 겸손하구나……하고 칭찬하실까요?

오늘 본문 31절~3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32절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공짜예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셔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대학원, 석사 박사까지 학비를 대줬습니다.


부모는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쓰고 싶은 것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어서, 이제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어요.

졸업식을 마치고 아이한테 이제부터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세요? 이제 공부도 마치고 그랬으니까 마음 편하게 놀면서 지내겠습니다……이렇게 말하면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아니, 지금까지 공부를 시킨 이유가 이제부터 더 큰 일을 하라고 한 것이지,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으라고 공부 시킨 줄 아냐……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천국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끼지 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천국으로 인도해주었더니 기껏 하는 말이, 아무 일도 안 한고 놀고 먹겠다니 무슨 말이냐……라는 말씀을 안 듣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 우리를 왕으로 높여 주실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되신다는 꿈을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일단 분위기상 ‘아멘’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실제로 믿어지세요?

이건 실제로 말씀을 안 해도 됩니다만, 마음 속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한 번 마음속으로 떠올려 보세요.

자, 다음으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면 무엇이 된다고요? 예,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러면 방금 전 떠올렸던 기도제목이 장차 왕이 될 사람에게 걸맞는 기도 제목이라고 느껴지십니까?


큰 기도 제목과 중간 기도 제목과 작은 기도 제목이 있는데, 큰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면 모두 해결되는데도 아직도 제일 작은 기도 제목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그건 천국에 간 다음 이야기지, 여기서 살아야 되면 또 여기에 맞는 문제들이 있잖아.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요한 3서 2절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천국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면, 이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이지만, 그것 만아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모든 질병이 나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장차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땅에서도 우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것입니다.

아이구, 사람 팔자가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세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무슨 영화롭고 무슨 왕 노릇이야……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과소평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왕기하 5장~6장에 보시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포위를 당하니까 외부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 안에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열왕기하 6장에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 25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サマリアには大飢饉が起こっていて、また彼らが包囲していたので、ろばの頭一つが銀八十シェケルで売られ、鳩の糞一カブの四分の一が銀五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った。

여기에 ‘세겔’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당시 1세겔은 노동자 4일치 임금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본다면 단순계산으로 일당 만엔(10만원) 이라고 한다면 1세겔은 4만엔(40만원)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당나귀가 부정하다고 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머리 부위는 살도 별로 없어서 먹을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부정한 동물로 여겨져 왔던 당나귀, 그것도 별로 먹을 것도 없는 머리 하나에 80세겔이었다고 하는데, 80세겔이면 얼마예요?

1세겔이 4만엔(40만원)이었으니까 80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320만엔(320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비둘기 고기도 아니고, 비둘기 배설물이 다섯 세겔, 5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대략 20만엔(200만원)에 거래되었다는 거예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런 심각한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안 보여요. 이대로 이 나라는 망하는구나 하고 누구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가 왕에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2절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エリシャは言った。「主のことばを聞きなさい。主はこう言われる。『明日の今ごろ、サマリアの門で、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る。』」
しかし、侍従で、王が頼みにしていた者が、神の人に答えて言った。「たとえ主が天に窓を作られたとしても、そんなことがあるだろうか。」そこで、エリシャは言った。「確かに、あなたは自分の目でそれを見るが、それを食べることはできない。」

엘리사가 말하기를 1년 뒤나 한 달 뒤도 아닙니다 바로 내일 이맘 때,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헐값에 거래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아니, 지금 평소라면 먹지도 못할 것들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바로 내일 이맘때 헐값에 거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장광이라고 하면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고위관료가 되겠지요.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과소평가 한 것이죠.

그러자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걸 눈으로 보겠으나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현실이 됩니까. 예, 됩니다. 장도 바뀌지 않아요. 똑 같은 열왕기하 7장입니다.

열왕기하 7장 6절~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시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한테 저 멀리서 거대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환청이 들리게 하셔서, 모든 군대가 그 많았던 식량이다, 무기다, 금이다, 은이다 하는 것을 다 놔두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되자 성 안에 있었던 굶주렸던 백성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갑자기 성문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열왕기하 7장 16절~17절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そこで、民は出て行ってアラムの陣営をかすめ奪ったので、主のことばのとおり、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た。
王は例の侍従、頼みにしていた侍従を門の管理に当たらせたが、民が門で彼を踏みつけたので、彼は死んだ。王が神の人のところに下って行ったときに、神の人が告げたことばのとおりであった。

백성들이 나가서 보니까, 그때까지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던 식량들, 금이나 은보다도 귀했던 식량들을 아람 군대가 놔두고 간 바람에, 이제 막 남아 돌아요. 그래서 그 식량들이 헐값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이에요? 아까 그 하나님을 과소평가 했던 장관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장관은 어떻게 됐대요?

성문 바깥에서 지키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식량이 풍부해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봤겠지요. 하지만 한꺼번에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백성들한테 밟혀서 결국 그 맛있는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어보고 죽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정말 전세계적으로 근래에 볼 수 없는 크나큰 대재앙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정말 언제 끝날 것인지, 마스크 없는 생활이 오기는 할 것인지, 우리 생활이 언제 좀 나아질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1년 뒤도 아니고 한 달 뒤도 아니고, 언제요? 그렇습니다. ‘내일 이맘때’입니다.


우리가 천천히 몇 년에 걸쳐서 좋아집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일 이맘때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만이 아닌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높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32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고, 예수님이 우리 편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편이신데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이 내일 이맘때일 수도 있고, 불과 몇 시간 뒤일 수도 있습니다. 순식간에 변합니다. 홀연히 변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면서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시련이 닥쳐 오더라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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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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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7회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2022년 2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32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0節~32節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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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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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2번째 시간으로서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栄光を与え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본에 드래곤 볼이라는 만화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그 만화를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쉽게 말해서 드래곤 볼이라고 하는 이름의 구슬 일곱 개가 전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데, 그것을 일곱 개 모으면 용이 한 마리 나타나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니까 예전에 봤던 일본 만담이 떠올랐습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한 사람이 그래요. 자가가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드래곤 볼을 찾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한 사람이 말합니다. 그 소원이 뭐길래 드래곤 볼을 찾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아까 그 사람이 말합니다. 사실 자기 할머니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데, 치료비가 많이 든대요.

그런데 자기네 집은 가난해서 치료비를 감당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자기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기를 드래곤 볼을 찾아서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고 소원을 빌겠다……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재미가 없지, 실제로 들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었어요.

물론 이 만담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웃기기 위해서 엉뚱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만, 이게 말이 되나요?

이 우스갯소리이긴 합니다만, 제게는 적지 않게 인상에 남았습니다.


자,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 사람한테는 지금 세 가지 문제가 있어요.

첫째는 할머니가 입원을 했어요. 둘째는 입원비가 많이 드는데 돈이 없어요. 셋째는 이렇게 되니까 머리가 혼란스러워요.

그럼 이 시점에서 정말 드래곤 볼을 모아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무슨 소원을 말해야 되겠어요? 지금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내 머리가 혼란스러우니까 일단 내 머리를 좀 진정시켜 달라……한 가지 소원 밖에 말할 수가 없는데 이게 소원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리 돈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할머니 병이 낫지 않고 계속 입원하고 치료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렇게 하면 문제 해결이 안 돼요.

왜죠? 그것은 바로 그것이 핵심적인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뭐예요? 그렇죠. 지금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할머니의 병이죠. 할머니 병이 나으면 병원비 걱정도 없어질 것이요, 이로 인해서 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해결될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는 단순히 사람 웃기자고 하는 말입니다만, 어 말을 듣고 든 생각이 뭐냐 하면, 우리도 믿음 안에서 이와 비슷한 실수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행히 주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 주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주님께서는 너무 많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주님께 바랄 때, 무엇이 핵심인지를 알고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을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누구를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하고 이끌어주시는 자만이 예수님께로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줄 사람을 언제 선택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미 부르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를 뒤집어보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사람들을 창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해주시기로 또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럼 여기에 우리는 들어가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그렇죠. 들어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간에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알기 위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30절을 우선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자, 이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다고 합니다. 의롭다는 것이 무엇이었죠? 그렇죠.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시겠습니까. 우리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는 불충분 해요. 왜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왕 노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천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에 부연설명을 드리지만, 아니, 왕은 하나면 될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왕이 된다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걱정 없습니다.

옛날에 중국에 보면 황제가 나라를 다스렸습니다만, 땅이 워낙 넓으니까 혼자서 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에 사람을 하나씩 두어서 이를 다스리도록 했는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 보면, 당시에는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황제’라고 하지 못하고 ‘왕’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황제라고 하지 못했냐 하면 바로 중국에 황제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당시 조선은 중국의 속국과도 같은 존재였거든요. 그래서 황제는 자기를 가리킬 때 ‘짐’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왕은 ‘짐’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 같은데 보면 왕이 자기를 가리키면서 ‘과인’이라고 하면 좀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과인’의 ‘과’ 자는 ‘과부’할 때 쓰는 ‘과’자거든요. 그럼 그 ‘과’자가 무슨 한자냐 하면, ‘적을 과’자입니다. 그러니까 부족하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따라서 ‘과인’이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천자, 다른 말로 황제에 비해 부족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겸양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 우리나라를 낮춘다는 일은, 이는 지금 생각하면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춘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장차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다스릴 때에도 주님께 순종하면서 왕 노릇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는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생을 마치고 천국에 갔어요.

천국에 가면 대단히 좋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너무 서둘러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착순도 아니고, 어차피 가시게 될 텐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이 땅에서 다 마치시고 난 다음에 천천히 가시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 가운데에 이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우리더러 말씀하십니다. 자, 이제 천국에 왔으니 왕이 되어서 나와 함께 다스려야지……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에이, 제가 무슨 왕이 됩니까. 괜찮아요. 제가 지금까지 천국 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이제 좀 편히 쉴래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주님께서, 아, 참 너는 겸손하구나……하고 칭찬하실까요?

오늘 본문 31절~3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32절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공짜예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끼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셔가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대학원, 석사 박사까지 학비를 대줬습니다.


부모는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쓰고 싶은 것도 한 푼이라도 더 아끼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어서, 이제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어요.

졸업식을 마치고 아이한테 이제부터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 지금까지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세요? 이제 공부도 마치고 그랬으니까 마음 편하게 놀면서 지내겠습니다……이렇게 말하면 부모가 기뻐하겠습니까.

아니, 지금까지 공부를 시킨 이유가 이제부터 더 큰 일을 하라고 한 것이지,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으라고 공부 시킨 줄 아냐……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천국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끼지 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천국으로 인도해주었더니 기껏 하는 말이, 아무 일도 안 한고 놀고 먹겠다니 무슨 말이냐……라는 말씀을 안 듣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 우리를 왕으로 높여 주실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되신다는 꿈을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일단 분위기상 ‘아멘’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실제로 믿어지세요?

이건 실제로 말씀을 안 해도 됩니다만, 마음 속으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한 번 마음속으로 떠올려 보세요.

자, 다음으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면 무엇이 된다고요? 예,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러면 방금 전 떠올렸던 기도제목이 장차 왕이 될 사람에게 걸맞는 기도 제목이라고 느껴지십니까?


큰 기도 제목과 중간 기도 제목과 작은 기도 제목이 있는데, 큰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면 모두 해결되는데도 아직도 제일 작은 기도 제목에만 매달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그건 천국에 간 다음 이야기지, 여기서 살아야 되면 또 여기에 맞는 문제들이 있잖아. 그렇게 생각 하십니까.

요한 3서 2절에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천국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면, 이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되는 것이지만, 그것 만아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모든 질병이 나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장차 천국에 가서 영화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이 땅에서도 우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뭐냐 하면,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것입니다.

아이구, 사람 팔자가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세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무슨 영화롭고 무슨 왕 노릇이야……차라리 돈 몇 푼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과소평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왕기하 5장~6장에 보시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포위를 당하니까 외부에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 안에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열왕기하 6장에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 25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サマリアには大飢饉が起こっていて、また彼らが包囲していたので、ろばの頭一つが銀八十シェケルで売られ、鳩の糞一カブの四分の一が銀五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った。

여기에 ‘세겔’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는데, 당시 1세겔은 노동자 4일치 임금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본다면 단순계산으로 일당 만엔(10만원) 이라고 한다면 1세겔은 4만엔(40만원)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적으로 당나귀가 부정하다고 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머리 부위는 살도 별로 없어서 먹을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부정한 동물로 여겨져 왔던 당나귀, 그것도 별로 먹을 것도 없는 머리 하나에 80세겔이었다고 하는데, 80세겔이면 얼마예요?

1세겔이 4만엔(40만원)이었으니까 80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320만엔(320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비둘기 고기도 아니고, 비둘기 배설물이 다섯 세겔, 5 곱하기 4만엔(40만원)을 하면 대략 20만엔(200만원)에 거래되었다는 거예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에 보면, 먹을 것이 없어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런 심각한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안 보여요. 이대로 이 나라는 망하는구나 하고 누구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가 왕에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7장 1절~2절
“1.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エリシャは言った。「主のことばを聞きなさい。主はこう言われる。『明日の今ごろ、サマリアの門で、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るようになる。』」
しかし、侍従で、王が頼みにしていた者が、神の人に答えて言った。「たとえ主が天に窓を作られたとしても、そんなことがあるだろうか。」そこで、エリシャは言った。「確かに、あなたは自分の目でそれを見るが、それを食べることはできない。」

엘리사가 말하기를 1년 뒤나 한 달 뒤도 아닙니다 바로 내일 이맘 때,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헐값에 거래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아니, 지금 평소라면 먹지도 못할 것들조차 구할 수가 없어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고운 밀가루와 보리가 바로 내일 이맘때 헐값에 거래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장광이라고 하면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고위관료가 되겠지요.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신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과소평가 한 것이죠.

그러자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그걸 눈으로 보겠으나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현실이 됩니까. 예, 됩니다. 장도 바뀌지 않아요. 똑 같은 열왕기하 7장입니다.

열왕기하 7장 6절~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시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한테 저 멀리서 거대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환청이 들리게 하셔서, 모든 군대가 그 많았던 식량이다, 무기다, 금이다, 은이다 하는 것을 다 놔두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되자 성 안에 있었던 굶주렸던 백성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갑자기 성문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열왕기하 7장 16절~17절
“16.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そこで、民は出て行ってアラムの陣営をかすめ奪ったので、主のことばのとおり、上等の小麦粉一セアが一シェケルで、大麦二セアが一シェケルで売られた。
王は例の侍従、頼みにしていた侍従を門の管理に当たらせたが、民が門で彼を踏みつけたので、彼は死んだ。王が神の人のところに下って行ったときに、神の人が告げたことばのとおりであった。

백성들이 나가서 보니까, 그때까지는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던 식량들, 금이나 은보다도 귀했던 식량들을 아람 군대가 놔두고 간 바람에, 이제 막 남아 돌아요. 그래서 그 식량들이 헐값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이에요? 아까 그 하나님을 과소평가 했던 장관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하늘에 창을 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장관은 어떻게 됐대요?

성문 바깥에서 지키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식량이 풍부해졌다는 사실을 눈으로 봤겠지요. 하지만 한꺼번에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백성들한테 밟혀서 결국 그 맛있는 음식을 한 입도 못 먹어보고 죽어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정말 전세계적으로 근래에 볼 수 없는 크나큰 대재앙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정말 언제 끝날 것인지, 마스크 없는 생활이 오기는 할 것인지, 우리 생활이 언제 좀 나아질 것인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1년 뒤도 아니고 한 달 뒤도 아니고, 언제요? 그렇습니다. ‘내일 이맘때’입니다.


우리가 천천히 몇 년에 걸쳐서 좋아집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내일 이맘때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만이 아닌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높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32절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0.神は、あらかじめ定めた人たちをさらに召し、召した人たちをさらに義と認め、義と認めた人たちにはさらに栄光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1.では、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えるでしょうか。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るでしょう。
32.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고, 예수님이 우리 편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편이신데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이 내일 이맘때일 수도 있고, 불과 몇 시간 뒤일 수도 있습니다. 순식간에 변합니다. 홀연히 변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면서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시련이 닥쳐 오더라도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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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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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6회 크나큰 계획
2022년 2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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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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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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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1번째 시간으로서 “크나큰 계획” 大いなる計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로 하여금 그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어느 목적지에 가려고 한다면 그 경로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는 경로가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곧 하나님이 계신 나라인데 거기에 가기 위해서는 어디를 통해서 갈 수 있냐 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에는 죄가 있는 사람이 갈 수가 없어요. 큰 죄이든 작은 죄이든 간에 그 죄를 가지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그 길은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다 받아 주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가 해결될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님한테 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한테 갈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아무나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라고 고속도로를 타는 길밖에는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 고속도로는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아니라면 탈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그냥 닥치는 대로 불러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미리 아신 자들,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나중에도 계시록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요한계시록 7장에 보시면 ‘인침을 받은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수가 144,000인데, 이 숫자가 어디서 나왔냐 하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각각 12,000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2,000명이 열두 지파이니까 12,000명 곱하기 12를 해서 144,000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여기에 들어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예. 꼭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를 일반적인 숫자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 지금까지 인류가 얼마나 많았는데 구원받는 사람이 고작 144,000명밖에 안 된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이는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12라고 하는 숫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완전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악용하는 것이 이단들입니다. 거기 보면 이미 사람마다 각 지파를 정해 놓았어요. 그리고 돈 많이 내고 말 잘 듣는 사람들을 자기들 멋대로 배정을 해 놓고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뭐예요? 입시학원에서 각각 대학교를 정해놓고 누구는 돈을 많이 내고 말을 잘 들으니까 좋은 대학에 배정하고, 누구는 돈을 조금 냈으니까 안 좋은 대학에 배정을 시켜놓고, 누구는 말을 안 들으니까 내쫓았어요.

자, 그렇다면 입시학원에서 이렇게 정해놓으면, 각 대학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학생들을 뽑아 가나요?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자기들이 뭔데 자기들 마음대로 너는 이 대학에 들어가라, 너는 저 대학에 들어가라 하고 정해 놓고는, 나중에 대학교한테, 자, 우리가 이렇게 정해 놓았으니 당신들이 이대로 뽑아가시오……라고 하면 그대로 뽑아 가나요? 오히려 비웃겠지요.


성경을 그렇게 자기들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복음 6장 39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イエスはまた、彼らに一つのたとえを話された。「盲人が盲人を案内できるでしょうか。二人とも穴に落ち込まないでしょうか。

요한복음 9장 40절~41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の中でイエスとともにいた者たちが、このことを聞いて、イエスに言った。「私たちも盲目な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마태복음 23장 13절
“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人々の前で天の御国を閉ざしている。おまえたち自身も入らず、入ろうとしている人々も入らせない。

당시 바리새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들 말을 들어야지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너희들은 맹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도 구원을 못 받을 뿐 아니라, 너희들을 따르는 자들도 구원을 못 받고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하였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 또는 그 전에라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시게 될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 사실을 알고 오늘 본문 29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언제’와 둘째는 ‘왜’입니다.


먼저 첫째 ‘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기로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정해 놓으셨을까요. 언제부터 우리를 아시고 언제부터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부르시려고 정해 놓으셨을까요.

내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기로 정하셨나요?

만약에 그랬다면 이는 말이 좀 이상해집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서야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보시고, 아이구 성필이가 있었네, 하고 우리를 아셨다면 믿기 전에 우리를 어떻게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우리의 이름, 우리의 얼굴을 알고 계셨을까요? 모르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를 알고 계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그렇죠.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실 계획이 있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실 계획이 있으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우리를 아셨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때 아직 우리를 이끌어 주실 계획이 없으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아직은 우리를 알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기를 언제 계획 하셨을까요. 이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기로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서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이사야 53장 11절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彼は自分のたましいの激しい苦しみのあとを見て、満足する。わたしの正しいしもべは、その知識によって多くの人を義とし、彼らの咎を負う。

이 말씀대로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장차 예수님께로 인도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장차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우리를 분명히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그 십자가의 고난을 예수님도 만족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성경은 신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으로 넘쳐나지 않습니까.


자, 이렇게 본다면 첫번째 질문 ‘언제’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번째 질문, ‘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부르시기로 계획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8장 29절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9節
29.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그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좀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로 여기심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이상한 말씀을 드려볼까요? 사실 그러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좀 이상할 지는 모르지만 천국에 들어가면 됐지, 예수님을 본받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 우리는 이제 드디어 믿음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도 않고, 한 번도 들어보지도 않았을 질문,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고, 반드시 생각해야 할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나요?

자, 그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시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시면 무엇을 하게 될 것 같으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한 다음에는 천국에 가면 된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니, 그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천국에 반드시 가야지요. 지옥에 가면 큰일납니다.

이것도 좀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세상에 보면 신기한 것이 뭐냐 하면, 지옥은 상상하기가 쉬워요. 지옥은 어떤 곳이냐고 여러분께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시간관계상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성경에도 보면 여러 묘사가 나오는데, 그 중에 보면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겪는 모습들 같은 것을 보면 쉽게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장차 천국에 가실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가시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누군가가 여러분께 천국에 가면 뭐가 좋냐고 물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천국은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대.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대. 병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아주 즐거운 곳이래……. 자, 제가 지금 드린 말씀이 틀립니까? 뭐, 성경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이 말이 틀리다고 반론하실 분은 별로 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게 다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돈 걱정 없이, 집 걱정 없이, 병 걱정 없이 살게 하기 위해서, 그것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습니까.


하릴없이 편안한 삶? 그건 그야말로 요양시설이잖아요. 천국은 노후관리를 위한 곳이에요? 우리더러 편안하게 먹고 춤추고 놀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피범벅이 된 채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을까요?

일본에는 5월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4월달에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신입생이나 신입사원에게 일어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특히 어떤 경우냐 하면, 이제 자기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4월달에 학교라면 입학식, 회사라면 입사식을 치르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크나큰 기대를 합니다. 꿈과 희망에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한 달이 지난 5월달쯤 되면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이지요.

자, 이제 어려운 시험을 뚫고 대학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첫 달인 4월은 정신 없게 지나가겠지요. 그런데 이제 5월. 한 달이 지났어요. 그 때까지의 자기 목표는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어갔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 시점에서 목표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주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어요. 그 이유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어갔어요. 그러면 끝이에요?

만약에 그게 끝이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을 본받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십자가만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면 되잖아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예수님을 본받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왜?’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회사에서나 어느 사업장에서 본다면, 너 누구 밑에서 일을 배워……라고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그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도 되겠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배워라. 장차 너에게 그 일을 맡길 것이다……라는 지시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우리더러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장차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의 말로 말씀 드리자면 딱 세 글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왕 노릇’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第七の御使いがラッパを吹いた。すると大きな声が天に起こって、こう言った。「この世の王国は、私たちの主と、そのキリストのものとなった。主は世々限りなく支配される。」

요한계시록 11장 17절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私たちはあなたに感謝します。今おられ、昔おられた全能者、神である主よ。あなたは偉大な力を働かせて、王となられました。

요한계시록 20장 6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この第一の復活にあずかる者は幸いな者、聖なる者である。この人々に対して、第二の死は何の力も持っていない。彼らは神とキリストの祭司となり、キリストとともに千年の間、王として治める。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시요 신 중의 신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어린양 예수님도 이 땅을 다스리시고, 그리고 장차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거기서 춤추고 먹고 노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아직 세상 끝 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왕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리게 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우리는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많은 지도자들이 나옵니다만, 오늘은 사울과 요셉과 다윗을 짤막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그 때까지는 사사가 나라를 다스렸지만 백성들이 자기들도 왕을 달라고 해서 제비를 뽑아서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도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결국 그는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다가 갈보아 산(ギルボア)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요셉과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40년은 다스렸고 요셉은 애굽 총리로서 80년을 다스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을 비교해보면 사울은 별 어려움 없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로 주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요셉과 다윗은 그 자리까지 가기가 대단히 험난했습니다.

다윗은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할 미성년자일 때 블레셋 골리앗을 무찌릅니다. 그렇게 해서 영웅이 되었으나, 이를 시기한 사울 왕한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결국 10년 이상을 생명의 위협도 당하고, 동굴에서 숨어지내기도 하고 하면서 그 어려움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나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떻습니까. 그는 어린 나이에 아무런 잘못 없이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노예로 살다가 보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또한 아무런 잘못 없이 누명을 쓰게 되어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 역시 그 수많은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80년이나 통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게 되면 어려움이 없을까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왕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사탄에 한 번 승리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절~3절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1.また私は、御使いが底知れぬ所の鍵と大きな鎖を手にして、天から下って来るのを見た。
2.彼は、竜、すなわち、悪魔でありサタンである古い蛇を捕らえて、これを千年の間縛り、
3.千年が終わるまで、これ以上諸国の民を惑わすことのないように、底知れぬ所に投げ込んで鍵をかけ、その上に封印をした。その後、竜はしばらくの間、解き放たれることになる。

이어서 7절 이후에는 무저갱에 들어갔던 사탄이 천년 후에 잠깐 놓여서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게 될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가 장차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편안히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다스리면서도, 우리가 극복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그리 길지 않은 지금까지의 제 삶을 한 번 돌아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이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 아내와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의 제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복선 회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여러 경험들이, 그 때는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전혀 몰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운전 하나도 그래요. 20대 때는 나는 평생 동안 서울에서 살아갈 줄 알았고, 그러면 뭐 대중교통이 잘 정비된 서울에서 운전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평생 동안 운전을 안 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만약에 그랬다가 갑자기 이 군마에서 살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암담합니다. 그런데 미국, 그것도 서부에서 살게 되니까 운전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요. 덕분에 아주 이 운전만 보더라도 철저하게 준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인터넷 홈페이지나 유튜브나 팟캐스트 방송 같은 것들을 보더라도, 아직까지는 여러가지로 부족합니다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돈 내고 배워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본다면 이 모든 것이 지금 주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해서, 미리 저한테 이렇게 훈련을 시키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영원한 생명이지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이 땅에서 지내는 몇 십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영원히 주님의 나라에 간 다음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도, 역시 그 이후인 하늘나라에 가서 장차 왕 노릇 하게 될 때에 쓰시려고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천국은 이 땅에서 몇 십년 살다가 들어가는 요양시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여기서 사는 삶은 연습이고, 천국에 들어간 다음이 진정한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크나큰 계획을 가지신 주님께 소망을 두고,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소망을 두는 삶을 통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과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 주님을 본받으면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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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5회 하나님의 뜻대로
2022년 1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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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0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기억이 있습니다만 주일학교 다닐 시절, 여러 개 적어준 성경구절 중에서 하나를 외워가면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종이에 다 붙이면 선물을 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는 구절이 바로 오늘 구절,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참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가는 말씀 아닙니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참 이 구절,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된다고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가 되는 것처럼 여겨 지십니까.

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 로마서 8장 28절보다도 더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외우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이 말씀도 역시 참 읽으면 읽을수록 은혜를 받는다……는 말씀 많이 들으셨지요?

아직 신앙이 없거나 아니면 초신자인 분이 여러분께 이 구절의 뜻, 특별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부분의 뜻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되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대충 짐작으로 넘어가는 것, 나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이렇다고 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 사실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마치 나는 사실 잘 모르는데,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전에 제가 IT 관련 회사에 다닐 때 보면, 저는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니까 그것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 가잖아요? 그러면 대부분 친절하게 잘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이쪽이 물어보는데 갑자기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어요. 그리고 또 어떤 때 보면,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 말해주지는 않고, 막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를 해요.

저는 맨 처음에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누가 이런 설명을 해주더군요.

친절하게 잘 가르쳐줄 때를 보면 자기가 아는 질문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것이라면 친절하게 잘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갑자기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아니면 막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는 뭐냐 하면,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자기도 모를 때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 질문을 자기도 모르는데, 모른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니까, 아이 참 지금 바쁜데 그런 걸 물어 가지고 귀찮게 구냐고 한다거나, 아니면 무슨 전혀 상관 없는 복잡한 이야기를 해가면서, 자기는 이런 어려운 것도 아는 사람이라고 과시를 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거죠.

이런 경우, 교회에도 보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다기 보다는 주위에서 가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했더니만 막 화를 내면서 왜 성경을 의심하느냐고, 성경말씀은 의심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막 혼이 났다는 것이에요.


글쎄요. 뭐, 그 분은 전도사님이었다고 하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기도 그런 식으로 배워 오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질문을 하는 것이 잘못이에요? 비판 하자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인데, 그걸 가지고 왜 의심을 한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일이지요.

그리고 전도사님이 아니라 목사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100%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한평생 성경만을 연구한 신학대 교수들도 모르는 일들이 많은데, 모른다고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가 모르는 내용이었다고 한다면, 솔직하게 아,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한 번 제가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수치예요?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요. 다만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때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그 외워오라고 준 그 프린트에 적힌 성경구절의 뜻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외워오라는 거예요. 외워오면 그 종이, 지금도 생각 나는데, 포도 송이에 번호가 붙어 있는 종이에요. 그 번호가 붙여진 포도송이 위에 하나씩 스티커를 붙여주고, 다 채우면 선물을 줘요.

성경구절 의미도 잘 몰랐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질문도 안 했습니다. 괜히 나서는 것 같고,, 그리고 또 질문을 한다고 혼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질문을 했다가 혼이 나면 어떡해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는 그냥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른이 되어까지도 역시 그 정도라면 곤란하겠지요. 모르는 것은 우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모르면 물어 봐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도 모르는 것이 많아요. 제가 모른다고 한다면 역시 저도 자료를 찾아보고 해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다시 오늘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돌아오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

이게 무슨 뜻이에요. 특히 ‘이처럼 사랑하사’ 중에서 ‘이처럼’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지시대명사인데, 그렇다면 ‘이처럼’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냐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이 점에 대해서 물으시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는 한국어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되어 있는데, 외국어 성경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어 성경 신개역 2017 판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은 실로 독생자를 주셨을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번역도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 그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주일학교에서도 좀 이렇게 알기 쉽게 성경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는 분이 계셨더라면, 이 성경의 참 맛을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는 좀 더 심각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

이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게 다 우리에게 득이 된다……이게 맞습니까 틀립니까.

한 가지 다른 말씀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이 말씀도 역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이에 아무 것도 안 하고 편안하게 쉬기만 하면 된다?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해 놓으셨으니까 우리는 이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그럼 우리더러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고 말씀 하셨나요?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반 토막을 내어서 부분적으로 외우기만 한다면 여기에는 큰 잘못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すべて疲れた人、重荷を負っている人は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休ませてあげます。


이 구절 뒤에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저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멘~ 할렐루야~만 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법칙 대로 힘겹게 살아왔으나,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법칙대로 살게 된다면, 그게 훨씬 쉬운 일이요, 우리가 쉼을 얻게 될 것이요, 진정한 자유와 소망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배울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태복음 11장 28절,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말씀만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안 믿으시겠습니까?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고 싶어요?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반쪽짜리 믿음이지요. 반쪽짜리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 믿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13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もとで全き者でなければ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무조건 모든 일이 다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 반쪽만 읽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을 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났는데 안약을 눈에 한 방울 넣으면 이 배탈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그냥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다 좋은 일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어야 하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봐서 붙었어요.

그 사람보다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보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떨어졌는데 이 사람만 붙었어요.

그러면 단순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회사에 붙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건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회사에서 그 사람을 뽑았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것은 실제로 예전에 제가 다녔던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해 신입사원시험을 봤는데, 그 중에서 한 여자 응시생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지는 못해서 정확하게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만, 아무튼 면접관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정말 참 괜찮대요. 그런데 이 사람을 쓸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예요.

아니, 무슨 대단한 경력직 임원을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신입사원인데 무슨 뜻일까 했습니다만, 저는 당시 말단이었기 때문에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인사부 담당자의 그런 말에 어떤 부장님이 관심을 보였어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면 내가 한 번 만나봐도 되겠냐고 했던 거지요. 그래서 따로 그 여자 응시생한테 연락을 해서 그 부장님이 면접을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죠. 면접을 본 이 부장님의 말이 똑 같은 거예요. 사람은 참 괜찮은데 막상 쓸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거예요. 저는 여전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신기할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도 신기했나 보죠. 마침 제가 당시 근무했던 기획실의 실장님이 또 관심을 보였어요. 그래서, 아니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면 우리 기획실에서 써보면 되겠네 하시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만나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 번째로 그 사람을 불러내서 이번에는 기획실장이 면접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 기획실장님도 역시 똑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아……정말 사람 참 괜찮은데……사장님 비서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은데……비서는 이미 있고……아……정말 마땅히 쓸 곳이 없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은 세 번이나 면접을 보았습니다만, 결국 그 사람은 회사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능력이 없어서요? 아니요. 능력이 없었다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지요.

저는 그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능력 있고 괜찮은 사람인데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면접을 봤는데도 다 떨어졌는지, 지금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를 뒤집어본다면 반대로 붙은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합격한 사람들 중에는 그 사람보다 능력이 좀 모자란 사람도 있었는지 모르지요.

하지만 붙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사람을 어디에 써야 하겠다. 어느 부서에 배치하면 좋겠다. 어떤 일을 맡기면 잘 하겠다 하는 회사 쪽의 명확한 계획이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여러 시험을 봐왔습니다만, 그 중에서는 제가 왜 붙었는지, 제가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것은 제 의지가 아니라 저를 뽑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두 쌍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형의 이름은 에서이고 동생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창세기 25장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23절
“21.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1.イサクは、自分の妻のために主に祈った。彼女が不妊の女だったからである。主は彼の祈りを聞き入れ、妻リベカは身ごもった。
22.子どもたちが彼女の腹の中でぶつかり合うようになったので、彼女は「こんなことでは、いったいどうなるのでしょう、私は」と言った。そして、主のみこころを求めに出て行った。
23.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여기에 보면,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자는 형이요 작은 자는 동생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에서와 야곱은 어디 있어요? 예,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엄마 뱃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말라기 1장 2절~3절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愛している。──主は言われる──しかし、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あなた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か』と。エサウはヤコブの兄ではなかったか。──主のことば──しかし、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た。
わたしはエサウを憎み、彼の山を荒れ果てた地とし、彼の相続地を荒野のジャッカルのものとした。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고 에서를 버린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동생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형 에서를 버린 이유는 에서를 미워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무슨 착한 일을 해서요? 에서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요?

아니에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에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그러면 불공평 하잖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가 지극히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착한 일을 했습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요? 아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다시고, 피를 흘려서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8節
“28.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를 일본어 성경에 의하면 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아, 그냥 부르기로 했으니까 불렀다……가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우리를 ‘그릇’으로 비유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ですから、だれでもこれらのことから離れて自分自身をきよめるなら、その人は尊いことに用いられる器となります。すなわち、聖なるものとされ、主人にとって役に立つもの、あらゆる良い働きに備えられたものとなるのです。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만들지 않습니다. 분명히 목적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그릇으로서 쓰실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말하지 않았는데도 책상도 주고 의자도 주고 컴퓨터도 주고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다 준비해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사로부터 맡겨진 일을 하라고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회사에서는 맨날 졸거나 딴짓만 하면서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하나도 안 해요. 그러면서 이걸 달라 저걸 달라 하면 주겠습니까.

주기는커녕 머지않아 회사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획이 있으십니다. 우리를 쓰실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이, 그저 딴짓만 하면서 이걸 달라 저걸 달라,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줄 테니까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하면 주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하나님은 우리를 대충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막연하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우리 이름을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를 정확하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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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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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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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2022년 1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27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6節~27節
“26.同じように御霊も、弱い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私たちは、何をどう祈ったらよいか分からないのですが、御霊ご自身が、ことばにならないうめきをもって、とりなしてくださるのです。
27.人間の心を探る方は、御霊の思いが何であるかを知っておられます。なぜなら、御霊は神のみこころにしたがって、聖徒たちのためにとりな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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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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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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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9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私たちを助けて下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하다고 소문난 병원을 찾았습니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되어서 진찰실에 들어가서는 의사선생님한테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릎이 좀 오랫동안 안 좋아요. 그런데 무슨 무슨 약이 좋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러자 의사선생님이 말합니다.

“그럼요, 무릎이 안 좋은 데에 쓰는 약으로는 대단히 좋은 약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너무나 이상해요. 제가 그 비싼 약을 어렵게 구해서 몇 년 동안 꾸준히 먹고 있는데, 도무지 좋아지지 않아요. 좋아지기는커녕 그 약을 먹기만 하면 소화도 안 되고, 여기저기에 두드러기 같은 게 많이 나고, 몸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이 약이 저랑 안 맞는 건가요?”

이 말을 들은 의사선생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 약은 먹는 게 아니라 바르는 약이에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잘못 사용을 하게 되면,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발라야 하는 약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면 몸에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글쎄요. 실제로 이런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한 번 제가 그냥 만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27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저 같은 경우에는 이 구절을 보면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방언입니다.

방언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같이 이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본인이 하시는 방언을 알아들으시냐는 질문을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 구절, 특히 26절을 말씀하세요.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이 말씀 아마 한국 교회에 좀 다녀 보신 분들은 드물지 않게 들어 보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참고로 저는 많이 들어봤습니다.

성경에는 방언에 대한 말씀이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이 바로 오늘 로마서 8장 26절인가요? 아니요. 더 자세히 나온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중에서 방언에 대한 기록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9절 후반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도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도 방언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는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6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장 23절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들, 어떤 분들께는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는 분들, 그리고 방언을 하신다는 분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생소하게 느껴지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고린도전서 강해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우선 간략하게 이와 같은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6절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고 있는데, 방언보다도 예언 하기를 원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39절 후반부만 살펴보았습니다만, 39절 전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성경은 이처럼 반복적으로 방언보다는 예언에 대한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한국 교회를 보면 유독 이 방언 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교회에 다니시다 보면 방언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시기도 하셨고, 또한 방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여겨집니다만, 이 방언에 대해서 본다면 교회에서 성경 말씀대로 설명을 해주는 경우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방언이라고 하면 로마서 8장 26절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래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정말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대신 말씀해주고 계신다고 설명을 합니다.

앞서 고린도전서에는 방언에 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단순한 숫자상으로 본다면, 고린도전서에는 전체적으로 ‘방언’이라는 단어가 21번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5번이 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방언 하시는 분들이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에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올까요. 예,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럼 우리가 방언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로마서를 봐야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를 봐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고린도전서지요. 특별히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에 있어서의 사용설명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가 교회에 그래도 초등학교 2학년부터 다녔습니다만, 우리가 예언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목사님으로부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고린도전서 14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을 하는 분들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적혀 있습니다만, 역시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14장 23절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통 교회에서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을 보면 조용히 기도 한다기 보다는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그 때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데, 어느 기독교 서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보면 학교 한 가운데에서 여럿이 둥글게 서서 손을 서로 마주잡고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학생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정말 신비스럽구나. 하나님이 계시나보구나. 나도 예수님을 믿어 보아야겠다…….그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주장하실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방언을 할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면 통성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솔직히 우리 고백해봅시다. 옆에서 기도하시는 분의 기도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뭐,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들려오는데 어떡해 해요.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개인적인 내용을 큰 소리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제가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누구한테 이러이러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을 도둑질했습니다. 누구를 미워했습니다. 누구를 속였습니다……저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회개의 기도를 크게 하시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큰 소리로 통성 기도 하실 때 보면 어떻게 기도를 하세요? 대체로 보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게 계세요. 또는 “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기도를 하시거나, 아니면 크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정말 크게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괜찮으세요? 방언을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면서요? 그러면 어떨 때 탄식을 해요? 어떨 때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탄식을 하실까요?

아이구……이 누구누구가 못나서 이런 죄를 지었고, 저런 죄를 지었어요. 마음이 너무나도 아픕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의 처지를 놓고 탄식을 하신다면 이와 같은 기도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이런 기도를 큰 소리로 하실 자신이 있으신가요?

성경에 이와 같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다음 3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1. 은밀한 내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더라도 상관 없다.
2. 내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한다.

설마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상관 없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8절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무슨 내용이 내 입에서 나오는지 모르는데, 은밀한 기도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방언을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람들 앞에서는 잠잠하고 조용히 하나님께 말하라고 이렇게 참 친절하게 방언의 사용설명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다 알고도 사람들 앞에서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뭐라고요? 예, 자기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확신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여……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카라바리야라바 싸라바리야라바……”

저 이거 사람들 앞에서 한 시간 두 시간도 할 수 있어요.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첫째 여기에 제 개인정보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둘째, 이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셋째. 이 방언은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방언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고 따라한 거거든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방언을 통역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모든 방언은 통역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자신이 하는 방언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다고 한다면 뭐예요? 예, 그것은 이미 방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에 보면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두 개이기 때문에 앞에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두 번째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인 것이지요. 이 내용으로 보자면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제가 많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느 정도 규모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씀에 보면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방언을 말하면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자면 수 십 명이 한 번에 할 수 있을까요? 시간도 시간이지만 개인적인 은밀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런 식으로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컨대 대여섯명, 아무리 많아도 10명까지는 안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게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방언을 하는 사람에 비해 대략 10분의 1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방언을 말하는 열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 정도는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통역하는 사람이 극히 소수였다면 당시 이 편지를 받아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했겠어요. “에이, 방언 통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 기도를 하겠어?” 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렇게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정확히 알고 이에 대해서 지적을 합니다. 그런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대한 규모나 상황을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리고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기도도 하고 통역도 하도록 바울이 말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도 방언 기도를 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방언 해석을 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적어도 그 10분의 1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지금까지 한 분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경의 기록처럼 방언을 하고 통역을 하고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지요.

예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닐 때,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데, 자기도 그래서 아무렇게나 말한 적이 있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귀한 고백처럼 제게 와 닿았는지 몰라요.

남들은 방언 기도를 하는데 나만 못한다면 창피할 거잖아요. 그래서 방언처럼 기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분들, 아마도 적지 않게 계시지 않나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자기 믿음이 좋은 척 하는 모습이 예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믿음생활을 한다면, 나중에 무슨 낯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5절~6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사랑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꼭 사람들이 많은 데에서만 해요. 아주 유창한 말로, 문학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큰 소리로 남들이 다 들리게 자기한테 사랑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단둘이 있을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 고백이라고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모습 보다도 단둘이 있을 때 마음이 담긴 몇 마디로 진정한 사랑이 전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기도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창한 말솜씨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진정한 마음을 받고 싶어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 26절~27절 말씀을 방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주로 한국에서만 그렇습니다. 대체적으로 외국 성경 주석들을 보면 그렇게 해석을 안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본문에 보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탄식만 하나요? 탄식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괴로워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그럼 괴로워할 때만 기도를 한다는 뜻인가요?

성경은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항상 어두침침한 교회에서 무릎 꿇고 분위기 잡으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기도인가요? 아니에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주님께 드리는 짧은 기도. 감사의 기도, 기쁨의 기도,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기도입니까.

기도할 것이 없어요? 예전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설교들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씀 한 마디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크나큰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정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다 소용없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니고, 내기 십일조 헌금 바친 게 얼마냐.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냐……하는 괴로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시다는 주님의 마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는, 그럴 때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더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토록 힘을 때라 하더라도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인도해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이 성경에 나오나요? 예,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 11절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 사탄의 시험을 당하신 후에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 심부름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약한 상황에서 힘을 도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힘들고 괴로워하시는 중에 천사가 힘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힘드셨을 때 천사가 도왔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육간에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이처럼 친히 힘을 더하여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걸 주소서 저걸 주소서 하고 그저 우리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이걸 하고 싶고 저걸 하고 싶으니까 주님, 이루어 주소서…….만이 아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성경을 읽으라고 말씀을 드리면, 자기는 기도 하는 중에 주님께서 다 말씀 해주시니까 성경을 안 읽어도 된다는 분이 계십니다.

아니, 그러면 성경을 읽은 사람은 믿음이 부족해서 성경을 읽나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기도가 부족해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나요. 이는 지나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우리는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되니까, 마치 발라야 하는 약을 먹어버리는 것처럼,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아무리 높은 직분을 받아도, 아무리 유창한 방언을 한다 하더라도,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기도, 올바른 행함은 바로 이 성경에 근본을 두었을 때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기도와 진정한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힘들 때,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기쁠 때나, 즐거울 때다, 힘들 때다, 슬플 때나, 어려울 때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과 믿음으로 함께 하고, 말씀으로 함께 하고, 그리고 행함으로 함께 할 때,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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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3회 소망을 가진 사람
2022년 1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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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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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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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8번째 시간으로서 “소망을 가진 사람” 望みを持つ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오늘 본문에서는 ‘소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소망’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 말씀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즉, 이 세 가지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혹시 그렇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은 어떻게 됩니까. 믿음과 소망은 사랑만큼 중요하지 않다? 사랑만 있으면 믿음과 소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말씀인가요?

사실 이 구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믿음과 소망이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저 일반적인 뜻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가지에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믿음은 천국에 대한 믿음, 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 그리고 사랑은 천국에서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만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아시겠어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자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믿음이고, 소망이라고 하는 것도 천국에 대한 소망인데, 사랑은 천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사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차이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돈이 없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이와 같은 조건이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 예외 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 눈으로 보시기에 옳다고 인정 받을 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오랜만에 또 여쭤볼까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천국에 들어갈 만큼 합격점을 받을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어요. 다만 자격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한 다음에, 아니면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심판을 하실 때에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렇습니다.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의 차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이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들어가지 못했어요. 아직 실현되기 전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과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천국에 들어갔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천국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나요?


우리가 어디 외국에 가기 위해서 비자 수속을 준비합니다. 반드시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 나라에 갈 수 있을 거야. 하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에 입국을 했어요. 그런데도 아 나는 그 나라에 갈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과 소망이 있어요?

아니, 이미 그 나라에 입국을 했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무슨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믿음과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천국에 가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과 소망이지, 이미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도 ‘아…천국에 들어가야지…천국에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막연한 믿음과 소망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믿음과 소망이 뭐가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지는 것이지, 이미 이루어졌다면, 다시 말해서 이미 천국에 들어간 다음이라면 믿음과 소망은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가끔 사람은 실제로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때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도 우리를 구원해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정말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예수님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 부족한 우리에게 부어주신 넘치는 사랑,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넘치는 사랑, 놀라운 사랑은 그러면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없어지나요?

남녀가 결혼을 하기 전에는 간이라도 빼줄 정도로 사랑을 하다가,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사랑이 식어버려요? 그렇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今、私たちは鏡にぼんやり映るものを見ていますが、そのときには顔と顔を合わせて見ることになります。今、私は一部分しか知りませんが、そのときには、私が完全に知られているのと同じように、私も完全に知ることになります。

오히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뜻에 대해서 때로는 잘 모르고 희미할 때도 있고,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시나,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맞나 하면서 의심할 때도 있지만,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완전하게 깨닫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こういうわけで、いつまでも残るのは信仰と希望と愛、これら三つです。その中で一番すぐれているのは愛です。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면 우주를 향해 로켓을 발사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로켓 모양은 일반적으로 가늘고 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 로켓 전체가 모두 우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밑에 기다란 부분은 대부분이 연료탱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켓을 발사하게 되면 그 연료탱크에 있는 연료를 태우면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데, 연료를 다 쓰게 되면 빈 탱크가 든 엔진은 차례대로 분리를 해서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마치 천국에 대한 소망은 천국에 가기 위한 엔진, 연료탱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천국을 향한 추진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침내 천국에 들어간 다음에는 이미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24절에도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먼저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아직 천국은 아니에요. 이미 천국이라면 이는 ‘소망’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다만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이 사랑은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욱 명확하고 확실하게 그 크나큰 사랑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제일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믿음과 소망’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앞서 로켓의 예로 든다면 믿음과 소망은 모두 연료탱크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엔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소망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러 이렇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몸이 아파요. 그런데 기도할 때 “이 아픈 것을 치료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잖아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아직 치료해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아직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미 치료해주시고 해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은 차이가 없는 것인가요? 어떤 주석서에 보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소망으로 쓰인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과 의미상 같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4절 말씀을 보면, 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합니다.(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 그러면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즉,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는 말씀이 25절에 나오지요. 이 말씀을 ‘소망을 갖는다’는 말씀으로 바꾸어 보며 어떻게 됩니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즉 만일 우리가 소망을 갖는다면, 어떻게 하라고요? 그렇습니다.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참고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에 보시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많아요. 하지만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이요, 믿음이 있으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요, 믿음이 있으니까 기도를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냐 하면, 소망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만 있고 소망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요.

교회는 다녀요. 예배도 드려요. 기도도 해요. 그런데? 예, 참지를 못해요.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보면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주여. 지금 당장 응답해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해결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래도 안 돼요? 그러면 이제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더 큰 소리로 주여! 지금 당장 응답해 주시옵소서! 지금 당장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여리고 성 공략 장면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시면, 이제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한 끝에 애굽을 탈출한 광야 2세대가 가나안 땅을 공략합니다. 그 첫 고비가 여리고 성입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 않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여리고 성 성벽은 내벽과 외벽 즉 2중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외벽 높이는 12미터에 두께는 2미터였다고 하고, 내벽 높이는 14미터에 두께는 4미터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첨단 군사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공략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난공불락의 성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 무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제대로 된 갑옷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여리고 성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광야 1세대들처럼, 너희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게 낫겠다, 뭐 그렇게 불평불만을 쏟아냈겠지요. 하지만 이제 광야 2세대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여리고 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믿음 외에 또 하나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망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3절~5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 6일 동안 하루에 한번씩 여리고 성벽을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나팔을 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진대요.

자, 지금 여리고 성 공략이 급해요? 안 급해요?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식량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에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먹었다면서. 그러니까 식량은 충분했을 거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앞장인 여호수아 5장 12절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マナは、彼らがその地の産物を食べた翌日からやみ、イスラエルの子らがマナを得ることはもうなかった。その年、彼らはカナンの地で収穫した物を食べた。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어왔던 만나는 이제 내리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의 소출이라고 해봐야 농사를 지을 틈이 있었겠습니까.

풍부한 식량은 성 안에 축적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저 나무에 달린 열매나 먹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는 200만 명이나 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만한 충분한 식량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식량사정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나도 없고 들에서 먹을 만한 것들은 충분하지 않아요. 하루라도 빨리 여리고 성을 공략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세요? 예, 6일 동안 하루 한 번씩 성벽을 삥 돌고, 7일째는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래요.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7일 동안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성벽을 무너뜨려 달라고 금식하고 밤새도록 목이 터져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아무 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올해는 북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됩니다만, 하계올림픽이든 동계올림픽이든 4년마다 열리게 되는데, 그 때마다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아~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위해 4년을 기다려왔습니다……라고 하지요.

이게 틀린 말이에요? 아니에요. 맞는 말입니다. 4년을 기다려왔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선수들이 달력만 보면서 4년만 기다렸겠습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정도의 선수라면 지난 4년 동안 정말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끊임없이 훈련을 하면서 준비해왔을 것입니다.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기다릴 수 있는 힘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소망은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힘이자 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그들이 통곡하면서 당장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면, 그 높고 두꺼운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식량은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때문에 쓰러져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여리고 성을 돌며 7일 동안 소망을 가지고 기다린 결과,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7편 5절~6절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あなたの道を主にゆだねよ。 主に信頼せよ。主が成し遂げてくださる。
主は あなたの義を光のように あなたの正しさを 真昼のように輝かされる。


뜻을 이루는 분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4節~25節
“24.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25.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소망을 가진 사람은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련이 우리 앞에 닥친다고 해도, 우리의 참음이라고 하는 제물, 기다림이라고 하는 제물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크나큰 축복을 얻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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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2회 승리의 확률
2022년 1월 9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23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2節~23節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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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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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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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7번째 시간으로서 “승리의 확률” 勝利の確率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23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22節~23節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먼저 22절에 나오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일부 주석에 의하면 사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는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앞뒤가 안 맞게 됩니다.


오늘 22절과 23절을 보더라도, 그 문장 구도를 보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22절에 나오는 ‘피조물’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단어는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 즉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대조되는 말이 ‘사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다? 이렇게 하면 문장 구도 자체에 모순이 생기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여기에 말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과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던 것처럼 ‘피조물’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23절에 보면 우리를 가리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는 우리에 대한 최고의 수식어가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성령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전에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후에야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제는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수기 3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3장 13절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長子はすべて、わたしのものだからである。エジプトの地でわたしがすべての長子を打った日に、わたしは、人から家畜に至るまで、イスラエルのうちのすべての長子をわたしのものとして聖別した。彼ら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わたし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처음 난 것을 대단히 중요하고 거룩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옷을 삽니다. 그 옷을 글쎄요, 10년 20년 입었다고 해요. 이제 너덜너덜해져서 못 입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이제 그걸 뭐, 걸레로 쓰던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도 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새 옷을 사서 그것을 걸레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옷은 자기를 위해서 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성 들여 고른 선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쓰다 남은 열매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다가 그냥 덤으로 얼떨결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결과, 구원의 결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이는 우리 이웃, 정말 훌륭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어쩌다가 재수 좋게 그 사람 옆에 있어서 덩달아 나까지도 덤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쓰다 남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나 하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를 위해서 첫 열매로 성령님을 부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 2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2.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のすべては、今に至るまで、ともにうめき、ともに産みの苦しみをしています。


피조물,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탄식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피곤한 삶을 살아갑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광활한 바다에서 돛대도 없이 나침반도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파도가 몰아치는 대로 오르락 내리락 좌우로 흔들립니다.

이와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고 탄식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반면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은 우리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좀 나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앞에 어떤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우리 입에서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냐 하는 것이지요.

오늘 23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8장 23절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3.それだけでなく、御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私たち自身も、子にしていただくこと、すなわち、私たちのからだが贖われることを待ち望みながら、心の中でうめいています。

오늘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역시 탄식을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御座の中央におられる子羊が彼らを牧し、いのちの水の泉に導かれる。また、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


우리가 장차 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씻어 주시겠지만,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도 역시 탄식을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때 탄식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요? 적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기뻐하면서 살아가야지만 되는 건가요? 어려움을 당할 때 탄식을 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요?

가끔 보면 우리 인생을 달리기, 그것도 마라톤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도 바울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푯대를 향하여 달라가는 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푯대 즉 결승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모습은 어때야만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지면, 예수님을 믿는 삶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기만 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나 슬픔이 닥쳐오게 된다면 이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뭔가 신앙에 있어서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힘들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라톤이 올림픽 같은 대회에서 본다면 달리는 선수들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뉴욕마라톤이나 보스턴마라톤 같은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에서는 그 참가인원수가 몇 만명에 달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우승하는 선수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까요? 마라톤에서 달리는 거리는 일반적으로 42킬로가 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막 힘들어하는 반면 그 우승한 선수는 출발부터 골인을 할 때까지 웃음이 넘치고 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함께 달리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たとえ 死の陰の谷を歩むとしても 私はわざわいを恐れません。 あなたが ともにおられますから。 あなたのむちとあなたの杖 それが私の慰めです。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망의 골짜기,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님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차이는 무엇이냐 하면 그 탄식 속에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바로 그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풀려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아요.

당장 가다가 보니까 눈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4장 6절~7절
“6.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戦車を整え、自分でその軍勢を率い、
選り抜きの戦車六百、そしてエジプトの全戦車を、それぞれに補佐官をつけて率いて行った。

이스라엘 자손들 뒤에서는 애굽 왕인 바로가 직접 최정예부대와 모든 병거를 이끌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당시 모세와 함께 하고 있던 사람들이 몇 십 명 정도라면 어디 숨어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인 남성만 60만명이 넘었습니다. 남녀노소 다 합치면 200만명이나 되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도 계시고, 힘이 없는 여성들이나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허허벌판 광야예요 어디 숨을 곳도 없습니다.

이렇게 외부적인 어려움이 생기면 자기들끼리라도 서로 협조를 하고 단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참 그들은 정말 도움이 안 됩니다. 이렇게 불평불만을 해요.


예전에 어느 외국에서 한국식품점을 운영하는 분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 사는 한국 교민들이 외국 현지 마트에 가면 말이 안 통하니까 불만이 있더라도 말을 못하다가, 한국 마트에 오면 그 울분을 다 토해내는 것처럼 자기들한테 이런저런 것들을 트집잡아서 따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 힘이 든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요.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수 백 년 동안 노예로 살아오면서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던 애굽 사람들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이제 같은 이스라엘 자손인 모세한테는, 협조는커녕 마치 무슨 봇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堰を切ったように)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이후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경우의 수(場合の数)를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1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항복하고 또다시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로 돌아간다.

2번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살기가 등등한 애굽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몰살당한다.

3번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 바다로 뛰어들어 빠져 죽는다.

이외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정적인 경우의 수를 모두 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방법,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행해주심으로 인해서,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들을 모두 멸망시키시고, 그리고 200만이 넘는 남녀노소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그냥 동네 마라톤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42킬로를 달리는 것 자체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말이 42킬로이지 성인 평균 걷는 속도가 시속 4킬로라고 한다면, 10시간이 넘게 쉬지 말고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러면 걷는 속도의 두 배로 달린다 하더라도 5시간 이상이에요.

그런데 대회 주최측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완주할 때까지 무제한으로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 거리를 적어도 4시간 이내에 달려야 한다고 합니다.

자, 마라톤 대회가 내일이에요. 기권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참가해야 돼요. 함께 달리는 선수들은 각 나라 국가대표급입나다.

이제 내일 아침 9시 출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우승을 하실 수 있겠어요?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중학교 육상부 학생들과 겨뤄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국가대표급 선수들과 겨뤄서 1등을 해요? 이건 1%도 아니에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입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결론은 하나, 절대로 우승을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8장 50절 전반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머리로 우리의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을 의지하면.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능히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이럴 때 홍해 바다를 떠올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0%,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할 확률은 100%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 주셨는가 하면,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할 확률들을 하나하나 지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군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확률도 지워주시고, 홍해 바다에 빠져서 죽어버리는 확률도 지워주시고, 또다시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는 확률도 지워 주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멸망 당할 확률들을 완전히 지워 주셨다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승리한다는 확률, 구원 받는다는 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내일 우리가 달려야 할 마라톤 경기의 결말을 우리는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요.

1번 시간 초과로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한다.
2번 제일 꼴찌로 결승점을 통과한다.
3번 달리고 있는 도중에 다리에 쥐가 나서 기권한다.
4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구급차로 실려간다.
5번 목이 마른데 물을 마실 수 없어서 기권한다.
등등등……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굴려봐도 내가 우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내일 경기에서 질 확률은 100%. 이길 확률은 0%입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 확률은 100%이고, 우리가 우승을 해서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를 확률은 0%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주셨다고 성경에 기록합니까.

이사야 53장 4절~5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여야 할 고통과 슬픔을 모두 대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아 주시고,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와 고통의 확률,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100%라고 하는 패배의 확률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치를 당할 확률을 예수님께서는 몇 프로로 만들어 주셨을까요.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인 100%하는 확률을 예수님께서는 몇 프로까지 줄여 주셨을까요.

50%요? 30%요?

만약에 우리가 패배하고 멸망하고 수치를 당할 확률을 예수님이 1%라도 남겨주셨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완전한 십자가요, 예수님의 보혈은 불완전한 보혈이라고 하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수치와 고통과 고난을 100% 대신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패배를 0%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마지막으로 오늘 문제를 내드리겠습니다. 본래 우리가 패배할 확률은 100%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패배할 가능성이 0%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몇 프로가 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패배할 모든 가능성은 0%가 되었다면,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100%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좀 평탄한 길을 달리고 있나요? 다른 선수들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우승하는 선수만 깨끗하게 포장된 평탄한 도로를 달리나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승하는 선수나 꼴등을 하는 선수나 마찬가지로 똑 같은 도로를, 똑 같은 거리를 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라 하더라도 우리 인생이 무슨 평탄하기만 하고 어려움이 전혀 없는 삶만 살아간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탄식도 할 때도 있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해 주시기에,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기에, 그리고 우리가 패배하고 수치를 당할 확률을 0%로 만들어주시고, 이 경기가 끝나는 마지막에는 승리의 확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확률을 100%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승리, 놀라운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승리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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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1회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
2022년 1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9節~21節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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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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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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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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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6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보내시는 주님” 私たちを遣わさ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말씀인데,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이해를 좀 돕기 위해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로마서 8장 19절~21절

19.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20.피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한 것은 스스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21.그래서 그것들도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 피조물들이 헛된 것에 복종하고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헛된 것에 복종하도록 하셨대요.

그래서 피조물들도 썩어질 것, 그러니까 헛된 것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를 누리기를 원한대요.

이 말씀에 대해서 주석서들을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피조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다른 피조물조차 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전 우주가 무질서 가운데 빠졌다.”

또 다른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도의 문학적인 기법을 통해서 전체 피조물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놀란 세상에 나타나게 될 때를 고대하고 있는 모습으로 의인화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의 범죄는 인류만이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을 망라한 모든 피조물에게 영향을 끼쳤다. 땅이 저주를 받는다. 많은 야생동물들이 무참히 죽어간다. 질병이 날짐승과 뭍짐승 및 물고기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죄의 결과는 충격파와 같이 모든 피조물에게로 파문이 미쳤다.

따라서 바울의 설명대로 피조물이 허무와 좌절과 혼돈에 굴복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첫 조상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선언에 의한 것이다.


피조물은 에덴에서 존재하던 이상적인 상태를 회고한다. 그리고 죄의 유입으로 말미암은 재앙을 둘러본다. 그들은 항상 이상적인 상태로 복귀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 때가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 중에 나타나는 그 영광스런 시대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이다.”

즉 이 주석들의 주장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나 땅이나 산이나 바다나 동물이나 식물 같은, 말하자면 사람 외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에덴에서 사람이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서 사람 외의 모든 피조물들까지도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에요.

지금도 자연재해나 환경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사람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연세계에 있는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성경 본문과 이 해석을 비교해볼 때, 아무리 읽어봐도 이와 같은 주장이 전혀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모두 저주를 받았다?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누린 왕이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이스라엘 3대 왕인 솔로몬입니다.

솔로몬 왕이 누렸던 풍요로움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열왕기상 10장 21절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ソロモン王が飲み物に用いる器はすべて金であった。「レバノンの森の宮殿」にあった器もすべて純金で、銀の物はなかった。銀は、ソロモンの時代には価値あるものとは見なされていなかった。

그 중 하나의 예로 솔로몬이 마시는 그릇은 다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이는 솔로몬만이 아니라 당시에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풍요로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기록합니다.

열왕기상 10장 23절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ソロモン王は、富と知恵において、地上のどの王よりもまさっていた。

요즘은 대통령이나 총리보다도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왕보다 더 많은 부귀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고 지혜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27절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草花がどのようにして育つのか、よく考えなさい。働きもせず、紡ぎもしません。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栄華を極めたソロモンでさえ、この花の一つほどにも装ってはいませんでした。”

솔로몬이 누린 모든 영광이 한낱 백합화 한 송이가 입은 영광 보다도 못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와 같은 백합화도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백합화는 유일하게 저주를 받지 않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까.

그리고 그보다 앞에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24절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烏のことをよく考えなさい。種蒔きもせず、刈り入れもせず、納屋も倉もありません。それでも、神は養っていてくださいます。あなたがたには、その鳥よりも、どんなに大きな価値があることでしょう。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마저도 기르신다고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면, 까마귀나 다른 새들도 역시 저주를 받았다는 뜻인데, 그 저주를 받은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또 이와 같은 성경 주석의 설명이 옳다고 한다면, 아니 왜 갑자기 뜬금없이 사도 바울이 사람 외의 피조물에 대한 언급을 하는지, 생물이나 무생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하는 말을 갑자기 언급하는지를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서 다른 목사님들께서 적어놓으신 글들을 봤는데 역시 하나같이 그 성경 주석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갖습니다.

성경은 누구를 위한 책입니까. 다시 말해서 누구더러 읽으라고 적힌 말씀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 읽으라고 적힌 글이요, 우리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사람 외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글이 있기는 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6절 후반부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あなたは子やぎをその母の乳で煮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요리를 위해 염소 새끼 고기를 삶을 때에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이와 같은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기 전에, 그 때까지 가나안 땅에 있었던 이방인들에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새끼 염소를 삶을 때에 그 어미의 젖으로 삶으면 맛이 더 좋아진다고 하는 그들의 미신적인 문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이방인들의 문화를 따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이를 금하셨던 첫번째 이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이유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래 어미의 젖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새끼를 기르기 위한, 말하자면 생명을 지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미의 젖을 오히려 새끼 염소를 죽이고 먹기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잔인한 행위이겠습니까.

제가 염소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말씀을 들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어미 염소나 새끼 염소가 누구 젖으로 무엇을 삶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미 염소가 자기 젖으로 자기 새끼를 삶는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만에 하나 안다고 해서 사람들한테 항의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염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을 위한 말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그들의 문화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명에 대해서 아끼는 마음을 갖도록 함으로써,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할 것을 원하셨기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염소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그와 같이,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피조물’을 우리 인간 외의 모든 사물이라고 해석하게 된다면 앞뒤가 말이 안 맞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이는 바로 19절과 2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대조되는 의미, 즉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요.


먼저 본문부터 다시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피조물 즉 믿지 않은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그러니까 구원받은 영혼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허무한 데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굴복하도록 만드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썩어지는 것에 대한 종 노릇, 즉 허무한데 굴복하는 데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과 자유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먼저 20절과 21절을 해석한 다음에 19절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0절~21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허무한 데에 굴복을 합니다. 허무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전혀 유익한 것이 없는, 반대로 완전히 무익하고 오히려 악하기만 한 것에 굴복합니다.

오늘 교회 오시는 길에 못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가시는 길에 보십시오. 이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우상들한테 돈을 바치고 절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지만 갈급함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하지만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헛된 우상들한테 돈을 바치고 마음을 바치면서 그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굴복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출애굽기 7장 3절~5절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7장 3절~5절
“3.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わたしはファラオの心を頑なにし、わたしのしるしと不思議をエジプトの地で数多く行う。
しかし、ファラオはあなたが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そこで、わたしはエジプトに手を下し、大いなるさばきによって、わたしの軍団、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す。
わたしが手をエジプトの上に伸ばし、イスラエルの子らを彼らのただ中から導き出すとき、エジプトは、わたしが主であることを知る。」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세를 보내서 노예 생활에 괴로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구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갈게.” 라고 말하자, 바로가 말하기를 “오오. 그렇다면 어서 데리고 가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좀처럼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출애굽기 8장 10절 후반부에서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8장 10절 후반부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それは、あなたが、私たちの神、主のような方はほかにいないことを知るためです。

만약에 모세가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라고 하셨으니까 당장 내보내라……라고 했을 때 즉시 이를 승낙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왕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은혜로운 바로 왕, 자비로운 바로 왕……이라면서 하나님이 아닌 바로 왕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진정으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을 완악하게 해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안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에 가니까 바로의 신하들이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10장 7절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家臣たちはファラオに言った。「この男は、いつまで私たちを陥れるのでしょうか。この者たちを去らせ、彼らの神、主に仕えさせてください。エジプトが滅びるのが、まだお分かりにならないのですか。」

이제 애굽의 신하들까지 난리입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이제 애굽은 망했습니다. 어서 저들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셔야 합니다. 이렇게 아우성을 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재앙, 애굽에서 사는 각 집안의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하고서야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게 됩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그 누구도 바로 왕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도 바로의 자비로 내보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내보냈다고 하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로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년전에 여기 군마로 와서 교회 상항을 보니까, 이건 뭐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 교회만 가지고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겠다 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해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제가 교회 만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해가면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누구 노력이겠습니까.


그렇죠. 제가 열심히 일해서, 정말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뭐 이렇게 주7일, 1년 365일을 열심히 세상 일도 하고 주님 일도 하고 그랬더니 생활이 유지가 되더라……라고 하면 이로 인해서 칭찬을 받는 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 자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내 힘과 내 노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로 제가 그 동안 해왔던 세상적인 다른 모든 일들이 막히게 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냐 하면 오로지 하나님 일만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못 버틸 줄 알았습니다. 이제 교회도 텅텅 비고 다른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하니 버틸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몇 개월만 버티다가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자……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께서 기도와 섬김의 손길로 이렇게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은,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오로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멀리 하고 오로지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해도 좀처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어디 그 뿐인가요. 때로는 얼마나 심한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도 메일을 보내면 참 심한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요. 무슨 마구잡이로 메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나와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니까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이고 직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인터넷에 나와 있는 분들은 그래도 대체적으로 웬만큼 배운 분들이고 웬만큼 교양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리도 심한, 정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왜 복음을 전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으니까 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을 때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지 못했는데, 모세보다 못해도 한참 못한 제가 한다고 해서 어찌 단번에 모든 일들이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제가 복음을 전하니까 그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요.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주님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주목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다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헛된 우상에 복종하고 있는 것은 이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보세요. 당신들의 답답한 심정을 압니다. 그러나 우상들에게 아무리 절을 해봐야. 우상들을 아무리 의지하려고 해봐야, 그건 헛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경배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해 주신 예수님을 믿는 그 길 뿐이라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23절~25절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봅니다.



먼저 로마서 1장 23절~25절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3.朽ちない神の栄光を、朽ちる人間や、鳥、獣、這うものに似たかたちと替えてしまいました。
24.そこで神は、彼らをその心の欲望のままに汚れに引き渡されました。そのため、彼らは互いに自分たちのからだを辱めています。
25.彼らは神の真理を偽りと取り替え、造り主の代わりに、造られた物を拝み、これに仕えました。造り主こそ、とこしえにほめたたえられる方です。アーメン。


그리고 오늘 본문인 로마서 8장 19절~21절입니다.

로마서 8장 19절~21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20.被造物が虚無に服したのは、自分の意志からではなく、服従させた方によるものなので、彼らには望みがあるのです。
21.被造物自体も、滅びの束縛から解放され、神の子どもたちの栄光の自由にあずかります。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 백 년 동안 노예 살이를 하도록 내버려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이제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십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일부에서는 이 땅끝이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곳이 예루살렘이고, 그리고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땅끝은 바로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는 주장이에요.


그러면서 또 마태복음 24장 14절을 근거로 듭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御国のこの福音は全世界に宣べ伝えられて、すべての民族に証しされ、それから終わりが来ます。

그러니까 지구를 한 바퀴 삥 돌아서 땅끝인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선교에 힘을 써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우리 모두 당장 예루살렘으로 가야지요. 그게 진정한 예수님의 명령이라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불순종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자꾸만 그렇게 사람의 생각으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땅끝,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땅끝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우리 이웃, 허무한 우상에 굴복하고 있는 우리 이웃, 진정한 하나님, 진정한 구세주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영광과 자유에 이르게 해야 하는 우리 이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땅끝인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중에서 19절을 봅니다.

로마서 8장 19절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9.被造物は切実な思いで、神の子どもたちが現れるのを待ち望んでいます。

믿음이 없는 분들은 그 영적인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것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손길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 그 하나 뿐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 2022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먼 옛날 애굽으로 모세를 보내셨던 것처럼, 아직 믿음이 없는 우리 이웃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보내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와 같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진정한 땅끝인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모세보다도 더욱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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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0회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2022년 1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第二コリント人への手紙 5章17節
“17.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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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이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한다면, 한 해, 한 달, 하루, 한 시간, 1분 1초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작년 2021년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었으며, 이제 새롭게 시작한 2022년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기쁘고 놀라운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이신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마음을 깨달아, 올 한 해 2022년을 멋지게 보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 첫 예배 시간을 맞이해서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新しく造られた者になりましょう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가요? 아니면 좀 오래된 피조물인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은 아니겠지요. 적어도 태어나서 몇 십년이 지난 상황인데 이제 와서 새롭다고 하면 좀 쑥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새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지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때묻지 않은 상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자동차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구입을 해서 사용했어요. 그렇다면 이는 그 순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중고품이 되고 맙니다. 그 순간부터 낡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새 차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이미 중고차입니다. 아무리 부품을 바꾸고, 바퀴를 바꾸고, 비닐을 다시 씌어 본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새 차처럼’ 보이게 한 것일 뿐이지 진정한 새 차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예, 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人にはできないことが、神にはできるのです。」

사람의 힘으로는 우리 스스로를 새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새롭다’는 의미부터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가령 ‘새로운 디자인’이라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이는 기존에 있던 것과 비슷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다시 말해서 과거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믿음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은 어땠습니까.

그냥 교회 안 가면 찝찝하고, 헌금 안 내면 왠지 벌 받을 것 같아서 내고, 습관에 젖어서 아무런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는 믿음이었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むしろ、冷たいか熱いかであってほしい。
そのように、あなたは生ぬるく、熱くも冷たくもないので、わたしは口からあなたを吐き出す。


이는 이도 저도 아닌 믿음을 말합니다. 커피를 보세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하면 맛이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따뜻한 커피 한 잔, 여름에는 시원한 커피 한 잔이 얼마나 추위와 더위를 식혀줍니까.

우리의 믿음도 뜨거운 믿음과 차가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차가운 믿음이라고 해서 이상한 말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열정적으로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래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침착하게 나를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이처럼 침착하게 주님과 나 사이에서 묵상하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커피는 겨울에도 여름에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뜨겁게 믿는 것도 아니요, 침착하게 주님과 마주 대하는 것도 아닌, 그저 매사에 믿음이 뜨뜨미지근한 상태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토하여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이 그와 같은 미지근한 믿음이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을 회복해서, 새로운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찌 보면 요즘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훈련이 잘 안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차가운 믿음 중의 핵심이 바로 이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을 보면 기도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약한 부분이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이에요.

금식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말씀을 잘 알지 못해요.

아니, 본인은 많이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그 성경에 대한 지식은 그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목사님한테 들었던 설교내용이나, 부흥회 가서 부흥 강사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목사님들도 많고 그렇습니다만, 제 경험으로 본다면, 어떤 분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아니면 심한 경우에는 성경에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경우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기도 속에서 응답을 받았다면서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말들을 책으로 써서 그걸 믿으라고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재판에서 검사가 이랬다고 칩시다.

아, 저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생긴 것부터 나쁜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범인은 저 사람이 분명합니다. 저 사람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사실 뭐 검사가 이런 경우는 없겠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이렇게 검사가 주장을 했다고 한다면, 판사는 이 검사의 말을 믿고 유죄판결을 내릴까요? 아니요. 그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법조문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은 무슨 법 몇 조 몇 항을 위반했습니다. 그리고 증거와 증인은 이러이러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해야지 거기에 적합한 판결을 판사가 내릴 텐데, 그러지 않고, 아, 저 생긴 것 보세요. 나쁘게 생겼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저런 나쁜 놈이 어디 있어요……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주장을 해봐도 자신이 원하는 판결을 받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기도를 많이 하고, 방언도 기가 막히게 하고, 40일 금식을 몇 번이나 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5절 중반부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聖書はあなたに知恵を与えて、キリスト・イエスに対する信仰による救いを受けさせることができます。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의 설교도, 아무리 유명한 신학 서적들도 결국은 성경의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성경을 가까이 하지 못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더욱더 성경을 가까이 해서, 이 성경,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새로워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행함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성경에 있어서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행함이 없어요. 말만 할 줄 알고 손 하나 까닥 안 해요. 그러면 그 믿음과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5절~17절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고 헌금이나 십일조 내고, 식사 때 기도하고, 뭐 그 정도면 신앙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합니다.

신앙은 뜨거운 믿음을 가진 가슴이나, 냉철한 지식을 가진 성경 말씀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입각한 행함이 있어야 모든 것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3절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木を良いとし、その実も良いとするか、木を悪いとし、その実も悪いとするか、どちらかです。木の良し悪しはその実によって分かります。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의 ‘열매’를 ‘행함’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만약에 여기서의 ‘열매’를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는 우리는 항상 ‘행함’을 해야 합니다. 즉, 행함을 위한 믿음과 행함을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모든 믿음과 말씀은 항상 행함이 동반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말하자면 성과주의가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것을 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했다 하고 자랑하기만 하면서, 이것이 마치 믿음과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혈관을 본다면 혈액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혈관 속을 혈액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흐르고 있는가 하면, 대략 시속 200킬로 이상의 속도로 돌고 있다고 합니다. 대단히 놀랍지요.

그런데 만약에 피가 그 속도로 바깥으로 빠져나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금방 목숨을 잃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도는 피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우리 몸 안에서 순환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행함을 위한 믿음, 행함을 위한 말씀만 강조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혈액이 일방통행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쉽게 지쳐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믿음에서 시작하여 말씀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행함이 있었다면, 그 결과는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할 수가 있고, 더 많은 말씀의 깨달음과 더 많은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이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로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로운 축복, 놀라운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2022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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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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