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회 문 되신 예수님
2023년 12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27절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5節~27節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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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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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4번째 시간으로서 “문 되신 예수님” 門である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드디어 로마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로마서 강해를 처음 시작한 것이 2020년 9월 첫째 주였으니까, 3년하고도 4개월이 되었네요.

처음에는 과연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했는데 마침내 오늘 이 시간이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자,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구약에 보시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세주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록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이름이 예수라고 한다거나, 그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라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예언되어 있을 뿐이었지요.


이 때문에 아무리 성경, 당시는 물론 구약 뿐이었습니다만, 이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드물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 전반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ヨハネよりも偉大な者はだれもいません。……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까지 역사상 세례 요한 보다도 뛰어난 선지자,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께 뭐라고 묻습니까.

마태복음 11장 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그 위대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 마저도 정작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도 100% 확신이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제사장이나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못 알아보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겠지요.

지난 주에 예수님의 외모,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외모만을 본다면, 우리의 육안으로 보았을 때 도저히 선지자나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외모를 보고 믿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어요.

그 대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앞서 세례 요한의 질문, 오실 그 분이 맞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절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이와 비슷한 말씀은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0장 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しかし、行っているのなら、たとえわたしが信じられなくても、わたしのわざを信じなさい。それは、父がわたしにおられ、わたしも父にいることを、あなたがたが知り、また深く理解す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의 외모를 보고 믿음이 생기지 않더라도 내가 행한 그 행함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이토록 위대한 선지자나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랫동안 가리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16절~17절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の目は見ているから幸いです。また、あなたがたの耳は聞いているから幸い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多くの預言者や義人たちが、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見られず、あなたがたが聞いていることを聞き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聞けませんでした。

구약시대에는 수많은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만, 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아직 이 땅에 있을 때 예수님을 볼 수도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막연히 누군가가 있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정확하게 그 모습을 볼 수도 없었고,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단히 가까웠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18장 17절~19절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主はこう考えられた。「わたしは、自分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アブラハムに隠しておくべきだろうか。
アブラハムは必ず、強く大いなる国民となり、地のすべての国民は彼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わたしがアブラハムを選び出したのは、彼がその子どもたちと後(のち)の家族に命じて、彼らが主の道を守り、正義と公正を行うようになるためであり、それによって、主がアブラハムについて約束したことを彼の上に成就するためだ。」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도 많지 않겠지요.

이처럼 아브라함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어느 정도는 알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는 정말로 기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놀라운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순종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도 있고, 그 말씀을 직접 그 자리에서 귀로 들을 수도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그 축복이 크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받은 축복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못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당시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알고 성령님도 알고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심판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구약 39권 신약 27권은 저자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직접적으로는 100%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갑자기 무슨 펜이 자기 혼자 움직여서 쓰여지거나 한 것은 없어요.

그러나 모든 성경은 사람의 생각이 쓰여진 책이 아니지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 전반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100%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지긴 했으나 반면에 100%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 하나님의 생각이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로마서 16장 22절에 깜짝 등장한 한 <더디오(テルティオ)>라는 인물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신학자들이 생각하기를 이 로마서는 <더디오>라는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 로마서의 저자가 <더디오>는 아니잖아요?

분명한 것은 로마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고, 더디오는 어디까지나 바울의 명을 따라 바울의 말을 받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모두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이는 모두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유일하고도 완전한 책이 바로 성경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우선 25절~26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26절 중반부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여기서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 今や明らかにされ

라는 부분, 즉 구약에서는 감추어 졌었다가 이제 비로소 나타내신 바 되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

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

라는 부분은 성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복음과 예수님을 전파하는 그 목적은 예수님이 기록된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다 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26절 후반부에서 27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6절 후반부~27절
“26.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26. ……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

자, 여기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은 그냥 문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실질적으로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그 글자나 문장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견고하게 해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에요.

그게 누구시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가 붙어 있지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知恵に富む神)”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시편 136편 5절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英知をもって天を造られた方に感謝せよ。 主の恵みはとこしえまで。

잠언 3장 19절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主は知恵をもって地の基(もとい)を定め、英知をもって天を堅く立てられた。

예레미야 10장 12절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エレミヤ書10章12節
主は、御力をもって地を造り、知恵をもって世界を堅く据え、英知をもって天を張られた。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을 암기하거나 무슨 문제를 풀거나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가끔 하나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몰라서 그러신데요.


그게 사실입니까. 제아무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見よ。主の手が短くて救えないのではない。その耳が遠くて聞こえないのではな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응답을 들어 주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천지만물 창조하시는 분이신데 우리를 도와 주실 힘이 안 되실 리가 있겠습니까.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믿을 수가 없겠지요.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눈앞에 어떠한 시련과 환난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와 넘치는 사랑은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그렇죠. 바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우리가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인데, 성경은 읽지 않고 맨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만 연발하고 있으니, 믿음이 어떻게 견고해질 수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으로부터 견고하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지혜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그렇다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로마서 16장 27절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에는 예외가 없어요. 오로지 누구를 통해서 가야 해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 그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아무리 좋은 비행기, 좋은 배,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갔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받아주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어디를 통해야 합니까.

그렇죠. 공항이든 항구든 반드시 지정된 곳을 통해서 입국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 아무리 돈이 많고 유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곳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면 이는 그야말로 밀입국이 되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범죄자로서 붙잡이고는 추방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10장 7절~10절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そこで、再びイエスは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は羊たちの門です。
わたしの前に来た者たちはみな、盗人であり強盗です。羊たちは彼らの言うことを聞きませんでした。
わたしは門です。だれでも、わたしを通って入るなら救われます。また出たり入ったりして、牧草を見つけます。
盗人が来るのは、盗んだり、殺したり、滅ぼしたりするためにほかなりません。わたしが来たのは、羊たちがいのちを得るため、それも豊かに得るためです。


성경에는 분명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기록합니다. 그것도 언제 오신다고요? 예, 속히 오신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023년 12월 현재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비롯해서 전세계에는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누구는 자신이 보혜사요 선지자라고 합니다. 도대체 보혜사와 선지자의 구분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인지 참 답답하기만 해요.

그런데 그 말을 또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주님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자기가 먼저 왔다고 하는, 이른바 자칭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도둑질하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는 이 말도 안 되는 사이비 이단에 빠져서 가족과 재산과 그리고 자신의 인생 모두를 다 빼앗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올바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 받기에 합당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신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구원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예수님 외의 다른 이름이 주어진 적이 없어요. 다른 길이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 예수님을 전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로 통하는 진정한 문, 유일한 문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 그것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3년 여에 걸쳐서 로마서를 살펴보았습니다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인생에서 길을 잃거나 어쩌면 마음이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든지 이 로마서로 돌아와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그리고 사랑과 은혜와 위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 로마서에서 배운 그 말씀을 우리 삶에 있어서 양식으로 삼아서,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 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 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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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4회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
2023년 1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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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장 25절~27절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5節~27節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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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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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3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 イエス様が背負われた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로마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오늘로 로마서를 끝내려고 했었습니다만, 여기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좀 많아서 부득이하게 오늘과 다음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오늘 살펴볼 본문 내용은 로마서 마지막 송영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성경만이 아니라 일반 책들도 마지막 부분까지 가면 이제 서둘러 건성건성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성경은 그 어디 하나 버릴 곳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구석구석까지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영양분으로 가득 찬 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이라 하더라도 오늘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으신 분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지막 인사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하지만 이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대단히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집중을 해서 함께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은 좀 금방 머리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25절에서 27절에 걸친 구절이 모두 한 문장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오늘 본문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무엇보다 짧게 끊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25절 전반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전반부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

여기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일단 <나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바울이 전하는 신앙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이미 공부해온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인가,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 율법도 역시 지켜야 하는지, 예를 들어 구약 때처럼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많은 점에 대한 혼란이 있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律法と預言者はヨハネまでです。それ以来、神の国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だれもが力ずくで、そこに入ろうとしています。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때까지이며, 그 이후 즉 예수님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볼 것 같으면, 구약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선민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은 어디에요? 예,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유대인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 외의 민족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구약 대로라면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 유대인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에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 하면, 예,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외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렇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하셨어요.

이와 같은 상황이 되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지 사람들마다 혼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뭐라고 말씀 드렸지요?

예,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그렇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왜 살아나셨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즉 우리를 구원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부분이 바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해당되는 부분이 다음부터 공부하게 될 <복음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선 복음서부터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바울이 전하는 가르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릅니다만,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본다면, 법대는 법대인데 1학년 때에는 법을 거의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법대에 들어갔으니까 법전을 좀 사야되나 했는데, 선배들이 말리더라고요. 법전 사봐야 그거 1학년 때 쓰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법전은 2학년 때부터 쓰게 되는데, 법이라는 게 매년 바뀌다보니 내년이 되면 어차피 새로 사야 된다고 하면서, 1학년 때는 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1학년 때에는 기껏 법학과목을 듣는 게 법학개론 밖에 없어요. 이는 완전히 개론서, 그러니까 개념에 대해서 정리한 과목, 말하자면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외에는 교양필수가 경제학개론이 있었고, 그리고는 모두 다 교양과목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법대생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뭘해요. 법대 건물이 15동인데, 1년 동안 15동에서 들은 과목이라고 해봐야 기초과목인 그 법학개론 하나 뿐이었고, 그것도 한 학기만 들어요. 그리고 그 외에는 다 여기저기 다른 학과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교양과목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선 개념을 잡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학에서의 공부를 어느 정도 적응도 하고, 그리고 법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념을 정리해 놓은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전공공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강해 순서에 있어서, 우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부터 하고, 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복음서를 공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 이와 같이 바울이 복음과 예수님에 대해서 전파한다고 하는데, <전파함은>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전파하는 이유는>이라는 뜻, 그러니까 전파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25절 후반부와 26절 전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후반부에서 26절 전반부
“25.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25. ……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구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구약에 있어서의 율법학자들이나 제사장들이 <예수>라는 이름은 알 수 없었지요. 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합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창세기부터 이미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록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아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구약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이사야서지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이사야서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700년 경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도 전에 예언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어떻습니까. 이미 창세기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 즉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그뿐 만이 아니라 그 분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새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의 아버지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는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는 유다 지파이자 이새의 뿌리,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실 것도 기록합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당시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도 아니요 분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구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14절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私がまた、夜の幻を見ていると、見よ、人の子のような方が天の雲とともに来られた。その方は『年を経た方』のもとに進み、その前に導かれた。
この方に、主権と栄誉と国が与えられ、諸民族、諸国民、諸言語の者たちはみな、この方に仕えることになった。その主権は永遠の主権で、過ぎ去ることがなく、その国は滅びることがない。

이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예언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달달달달 외울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결과적으로 볼 때 주님께서는 이 예언과 다르게 오셨나요? 아니요. 정확하게 이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아직 결혼하기 전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태어나신 곳도 베들레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성경내용을 다 잘 알고 있었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하나님 식이 아닌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구세주,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 같으세요.

정말 멋진 모습으로, 영광된 모습으로 오실 것 같잖아요. 그냥 무슨 왕도 아니하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세주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만약에 당시 이스라엘에 계셨다면 예수님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님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성령님도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도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육안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장차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리고 예수님도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신 상황, 그저 요셉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예수님을 우리가 당시 보게 된다면, 금방 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실 어린양! 이라면서 마치 세례 요한이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아마 그건 좀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제 생각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彼は主の前に、ひこばえのように生え出た。砂漠の地から出た根のように。彼には見るべき姿も輝きもなく、私たちが慕うような見栄えもない。


이를 좀 이해하기 쉽도록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오는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튼튼한 줄기가 아니라 연한 순 같다고 해요. 바람이 불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그리고 누군가가 꺾으려고 하면 쉽게 꺾일 것만 같은 아주 연약한 새싹 같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하잖아요.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줄기라면 아주 굵고 튼튼한 나무 줄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장차 오실 메시아를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비옥하지도 않고 오히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는 거예요. 그리고 풍채도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마도 몸집은 위풍당당, 어깨도 쫙 벌어지고 얼굴에는 귀티가 나고, 그 누가 봐도 거룩함이 넘치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좀 호리호리 하다못해 빼빼 마른 몸집에, 누가 살짝 밀기만 해도 넘어질 것 같고, 얼굴도 그리 위엄이 느껴지지도 않는, 이런 말을 하면 좀 혼날지는 모르지만, 좀 빈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해요. 아니, 이는 제 불경스러운 상상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하자면 정말 그렇잖아요.

어디를 보더라도 좀 귀한 집 아들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 그리고 또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는 예수님의 본모습이 그렇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모습,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의 모습이 그러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자란 곳이 어디에요?

예, 마태복음 2장 23절에 의하면 나사렛에서 자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은 이스라엘 북쪽 지역입니다만,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이스라엘 북쪽지역인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누가복음 2장에 의하면 호적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인 이스라엘 남쪽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보통 신약에 등장하는 지명을 보면 구약부터 존재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지요. 베들레헴 같은 경우는 창세기에 이미 등장합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명은 구약에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주목받지도 못한 지역이었거나, 아니면 아예 지명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1장 45절~46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ピリポはナタナエルを見つけて言った。「私たちは、モーセが律法の中に書き、預言者たちも書いている方に会いました。ナザレの人で、ヨセフの子イエスです。」
ナタナエルは彼に言った。「ナザレから何か良いものが出るだろうか。」ピリポは言った。「来て、見なさい。」


여기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은 다른 곳에 등장하는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그의 친구 빌립이 그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하니까, 그가 대뜸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하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는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 때까지도 여전히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지역, 다른 곳은 몰라도 그 곳에서는 절대로 대단한 인물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니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 정복 때 유다 지파가 받은 지역은 이스라엘 남쪽 지역이었는데, 여기에 베들레헴이 포함됩니다. 베들레헴은 또한 다윗 왕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지금으로 본다면 요셉과 마리아의 주소지는 북쪽 나사렛이었지만 본적지는 남쪽 베들레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나라에서 지시가 있으면 본적에 가서 신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나사렛에서 남쪽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본적지 베들레헴이 아닌, 멀리 북쪽 나사렛 땅에서 살았을까요.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는 역사적 과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 지역이 아닌, 거기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이라고 하는 외딴 동네에서 살았다는 것이잖아요.

이를 본다면, 그들은 말하자면 그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유지……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사렛에서는 그 지역에 뿌리가 없는, 어찌 보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외지인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살았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얼마일까 하고 알아보았습니다만, 그 거리가 150킬로 정도가 된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40킬로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면 나흘 정도가 걸리는 거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건강한 성인남성의 경우입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되어 있는데, 마리아는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베들레헴까지 가는 과정도 보통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간신이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대요?

누가복음 2장 6절~7절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ところが、彼らがそこにいる間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호적을 하러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왔는데, 그 때 왔던 사람들이 이 둘 뿐이겠어요? 아마도 각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로 베들레헴이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빈 방을 찾을 수가 없었나보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았는데, 마땅히 누일 곳이 없어서 가축들의 먹이를 넣어두는 구유에 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니신 분이시라면 대부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실 지는 모르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지금 누가 태어났어요? 그렇죠.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님이 태어나셨어요. 우주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순간이에요.

그런데 실상은 어땠대요? 예, 묵을 곳이 없었대요. 여관에 빈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도, 그 날 베들레헴 여관 방은 못 잡으셨대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는 지난 번에 잠시 알아본 점이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요?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 집안의 경제사정은 어땠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자녀를 낳았을 때의 율법규정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2장 6절~8절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彼女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ら、息子の場合であっても娘の場合であっても、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一歳の子羊一匹と、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して家鳩のひなか山鳩を一羽、会見の天幕の入り口にいる祭司のところに持って行く。
祭司はこれを主の前に献げ、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その出血の汚れからきよくなる。これが、男の子であれ女の子であれ、子を産む女についてのおしえである。
しかし、もし彼女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二羽の山鳩か、二羽の家鳩のひなを取り、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きよくなる。」

자녀를 낳았을 때 여인은 어린 양을 바쳐야 하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양을 바치기가 어렵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바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주 살이 포동포동 찐 최고급 어린양을 바쳤을까요?



누가복음 2장 21절~24절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八日が満ちて幼子に割礼を施す日となり、幼子の名はイエスとつけられた。胎内に宿る前に御使いがつけた名である。
そして、モーセの律法による彼ら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とき、両親は幼子をエルサレムに連れて行った。
それは、主の律法に「最初に胎を開く男子はみな、主のために聖別された者と呼ばれ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幼子を主に献げるためであった。
また、主の律法に「山鳩一つがい、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と言わ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って、いけにえを献げるためであった。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양 대신 비둘기를 바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 당연히 경제적인 이유에서였겠지요. 이는 다시 말해서 요셉과 마리아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
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다고 하는데, 이 고향은 분명 나사렛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문맥을 자세히 보면 아무래도 그 놀란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 우리가 이 사람 집안에 대해서 좀 아는데, 어떻게 저런 지혜와 지식이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당시 높은 교육을 받았었다고 한다면 놀라지 않았겠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여기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 >라고 하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명문대에서 고등교육을 배웠다,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 회당에서 율법을 전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니까 다들 놀랍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면서 놀래요? 예, 어? 쟤 목수 아들 아냐?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집도 넉넉하지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도 못했으면서, 언제 저런 걸 배웠어? 라고 하면서 놀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 중에서 또 한 곳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 전반부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


여기서는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인이 되신 후에 요셉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예수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추정을 하고 있거든요.

자, 이렇게 보시면 어떻습니까.

여기까지 한 번 정리해본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본다면 예, 쉽게 말해서 잘생기지도 않았고, 몸집이 크지도 않았고, 아무튼 딱 봐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아라고 느낄 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출신지역은 어떻습니까. 유다 지파의 전통적인 지역 베들레헴이나 유다 지역이 아닌 저 멀리 북쪽,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 변방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셋째로 출생환경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외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방도 아닌 곳에서 태어났어요. 성경에 본다면 구유에 뉘었다는 구절 때문에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확히 그 곳이 마구간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흔한 여관방 보다도 못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하겠지요. 참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넷째로 경제사정은 어떻습니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는 이미 경제적 사적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태어나셨으니 사정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마리아의 자녀가 아니라 사촌이라고 하면서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기록에 의하면 비록 예수님께서 잉태하실 때에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예수님의 출생 이후에는 요셉과 사이에 아들 딸 낳고 살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들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을 더한다면 아들만 다섯 명이에요. 그리고 자매들은 어땠냐 하면 <누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누이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적게 잡아서 그 가정에는 자녀가 아들 다섯 명과 딸이 둘 이상, 도합 7남매 이상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가정이 어땠어요? 예, 넉넉하지 못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적게 잡아 7남매라고 한다면 어땠겠습니까. 참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다섯 번째로 가족사정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예수님 당시는 어땠겠습니까. 그야말로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약자였던 것이지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지역이나 친인척 간에 있어서도 생각 없는 사람들로부터 결손가정이다 뭐다 하면서 어쩌면 마리아나 예수님을 비롯한 그 형제들까지 때로는 수치를 당하는 일도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섯 번째로 예수님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 대단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앞서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4장 28절~30절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8.これを聞くと、会堂にいた人たちはみな憤りに満たされ、
29.立ち上がってイエスを町の外に追い出した。そして町が建っていた丘の崖の縁まで連れて行き、そこから突き落とそうとした。
30.しかし、イエスは彼らのただ中を通り抜けて、去って行かれた。

아니,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는 어쩌면 그만큼 예수님과 그 집안 사람들을 좀 무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좀 쉽게 말하자면 대단한 집안도 아니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주제에, 젊은 놈이 건방지게 누구를 가르치려고 들어? 뭐,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모질게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오래된 연고도 없고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집안이라면서, 어쩌면 그 지역 사람들한테 있어서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자,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 어떻습니까.

외모문제, 출신지역, 출생환경, 경제사정, 가족환경, 그리고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 평탄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현대 사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이 열등감, 콤플렉스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경우를 보세요. 열등감을 가질 만한 부분이 어디 한 둘입니까. 외모, 출신, 출생, 경제, 가족, 학력문제 ……이렇게만 보더라도 여섯 개나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중 한 두개만 되더라도 괴로워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이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왜 이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여기서 다시 로마서 4장 25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리를 할 때 쓰이는 믹서가 있지요? 예, 믹서에 과일이나 야채를 넣고 돌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예외 없이 완전히 갈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자면 믹서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십자가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법칙,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은 무엇이든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더니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또 무엇을 짊어지셨습니까.

이는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이 말씀을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これは、預言者イザヤを通して語られたことが成就するためであった。「彼は私たちのわずらいを担い、私たちの病を負った。」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나 질병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것도 짊어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질병 그리고 연약한 것까지 모두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외모, 출신, 출생, 경제, 가족, 학력문제 그 외에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때로는 부끄러워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는 모든 문제들, 그리고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모든 연약한 것을 다 짊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に来たのと、同じよう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그대로 우리를 섬겨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와 질병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셨고, 그리고 바로 그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 우리의 연약한 것을 모두 해결해주시기 위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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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3회 사도 바울을 본받아
2023년 12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1절~24절
“21.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없음)”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1節~24節
“21.私の同労者テモテ、また私の同胞、ルキオとヤソンとソシパテロ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23.私と教会全体の家主であるガイオも、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市の会計係エラストと兄弟クアルトも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4.(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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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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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2번째 시간으로서 “사도 바울을 본받아” 使徒パウロを見倣っ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중에서 일단 24절에 대한 부분부터 말씀을 드릴까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이 로마서 16장 24절에 대해서, 성경에 따라서는 주가 달려 있는 경우도 있을 텐데, 여기에 보시면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합니다.

24.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현재 성경은 구약 신약을 불문하고 원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사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복사기도 많고 하기 때문에 어떤 책에 대한 사본을 만들기는 쉬운 일입니다만, 과거에는 당연히 그런 것이 없었고, 무슨 복사기 이전에 인쇄술 자체도 없었기 때문에, 사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본 중에는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도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그것보다는 사본을 보고 또 그것을 베껴 쓴 사본, 그리고 또 그 사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본들이 훨씬 많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시 성경 사본을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하지 못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그리고 단순한 사본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로도 번역되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아무래도 세부적으로 차이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사실 지금 한국어 성경 하나만 보더라도 개역개정, 개역한글,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쉬운 성경 등등, 그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에 영어성경은 대표적인 것만으로도 NIV, NASB, KJV, 일본어 성경은 구어역, 신개역, 신개역2017, 신공동역 등등 참으로 다양하지요.

물론 성경 원본은 하나이지만, 지금 한 시대에도 이렇게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백 년,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글자 수 하나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번역본에 있어서 어떤 성경은 가치가 있고 어떤 성경은 가치가 떨어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인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이 로마서 16장 24절을 안 넣는 것이 일반적이긴 합니다만, 일부 성경 사본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기 때문에 참고로 난외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이 난외주에 기록된 2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내용을 넣게 되면, 사실 여기서 본문 내용이 끝나게 됩니다.

24.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있는 내용, 25절~27절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일부 신학자들은, 사실 원래는 24절에서 끝났는데, 25절~27절은 나중에 추가된 부분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원본에는 과연 25절~27절까지가 적혀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이 중요하게 되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24절을 넣어야 한다거나, 25절~27절 부분을 빼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논쟁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들한테 맡겨 놓기로 하고, 우리는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내용 대로 살펴보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번 강해에서는 24절은 제외하고 공부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21절~23절까지를 다시 보시도록 할까요.

로마서 16장 21절~23절
“21.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1節~27節
21.私の同労者テモテ、また私の同胞、ルキオとヤソンとソシパテロ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23.私と教会全体の家主であるガイオも、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市の会計係エラストと兄弟クアルトも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여기서 우리 잠시 복습을 해볼까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를 지나 동쪽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로마서 16장 3절에 등장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지요?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의하면 이 부부는 로마, 그러니까 고린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서쪽에 있는 로마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서쪽 로마에서 온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동쪽에서 온 바울을 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부와 바울은 잠시 고린도에서 지내다가 에베소로 함께 건너가게 되지요.

그리고 바울은 다시 고린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우리가 이미 공부해서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 16장 3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그 때 다시 로마에 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홀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나 하면, 이미 그에게는 또다른 사역자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이 사람들을 본다면 그 명단이 오늘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성경에서 본다면 그 정보양이 적어서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대부분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디모데 정도입니다.

디모데는 정말 오랫동안 바울과 사역을 함께 하면서 큰 도움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외의 사람들은 솔직히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누구는 알아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생각해보세요. 이 로마서가 기록된 시기를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서기 56~57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가까이 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 이름이 2천년 뒤에까지 남아서, 사람들이 자기들 이름을 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솔직히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겠습니다만, 지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름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과연 우리의 이름이 2000년 뒤에까지 남아 있을까요?

2000년 뒤, 그러니까 서기 4000년 경에 누군가가 내 이름을 듣는다면, 아, 그 사람, 하고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0년전 한국에 있었던 왕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2천년 전 일본에 있었던 왕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상대방을 죽이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비석도 세우고 하면서 자기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비석들은 부서지고 낡아지고 대부분이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라고 해봐야 몇몇 전문가들이나 보는 고전 역사서에나 기록되어 있겠지요. 그리고 쓸쓸히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왕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권력싸움을 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나라를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이나 그들의 이름들이 수많은 성경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세상에 있는 성경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나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요한계시록 3장 5절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勝利を得る者は、このように白い衣を着せられる。またわたしは、その者の名をいのちの書から決して消しはしない。わたしはその名を、わたしの父の御前と御使いたちの前で言い表す。


이 땅에 이름이 남아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땅에 아무리 자기의 큰 동상을 세워봐야 주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귀하게 여겨 주시고,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22절입니다.

로마서 16장 22절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이 말씀에 보면 갑자기 어느 한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더디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앞에 등장했던 다른 사람처럼 단순한 동역자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라고 하지 않아요?

느닷없이 깜짝 등장한 이 더디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사실 이 사람의 이름은 역시 신구약을 통틀어 여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가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는 분명합니다. 바로 대필을 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바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사람이 바로 더디오라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른바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 중에서 대필을 한 것은 로마서만이 아닙니다.

현재 신학자들이 바울서신으로 꼽는 것은 총 13권이 있습니다만, 이 중에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 이렇게 네 권은 바울이 대부분의 내용을 대필하도록 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빌레몬서를 넣을 것이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최소한 이 네 권,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는 아마도 대부분을 바울이 말을 하고 이를 다른 사람이 받아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다음 성경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1절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골로새서 4장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여기서 보면 각각 “친필로 기록한다”가 아니라 바울이 “친필로 문안한다”고 되어 있는 점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좀 직역을 해본다면, “나 바울은 직접 내 손으로 이 인사말을 씁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바울 서신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문안인사 부분이 나오는데, 이 문안 인사 부분은 나 바울이 직접 썼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이 문안인사 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자기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 썼다는 것을 뜻한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바울이 글을 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일까요?

아니,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하던 일이 무슨 어부였다거나 아니면 목자였다거나 하면 글을 읽고 쓰는 데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청년 관료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수준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대에 있어서는 그래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필을 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슨 육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신학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고린도후서 12장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이 부분을 들어서 아마도 바울은 당시 어떤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무슨 병을 앓고 있었을까.

사실 그 구체적인 병명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과연 어떤 증상을 앓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요.

그래서 바울이 서한들을 대필하도록 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 스스로가 긴 글을 쓰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바울 본인이 밝히고 있는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 즉 질병에서 오는 증상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추정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있어서 일부 신학자들은 아마도 안질, 그러니까 눈의 질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기 전인 바울, 그 때는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는 당시 청년관료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그는 이 빛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이후 3일 동안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또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데, 당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3절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その途中のこと、王様、真昼に私は天からの光を見ました。それは太陽よりも明るく輝いて、私と私に同行していた者たちの周りを照らしました。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그 빛이 해보다도 더 밝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강렬한 빛 때문에 바울의 눈에 질병이 생겨서 시력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대부분의 서한을 대필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바울의 구체적인 증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냥 단순히 신학자들이 추정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일단 바울은 글을 읽거나 쓰는 데에 있어서 그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적어도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는 대필을 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육체적인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어디가 불편했을까.

글을 쓰기 어려울 정도의 육체적인 질병이라면 단순히 눈이나 손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에 위와 같은 기록들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눈에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추정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로마서를 제외한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의 경우에는, 다른 부분은 대필을 하도록 하긴 했지만, 마지막 문안 인사 부분만은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는 바울 자신의 서한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말하자면 글 마지막 부분에 하는 서명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 글을 쓰는 데에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화룡점정, 마지막 문안인사 부분은 바울이 직접 씀으로 인해서 그 서한을 완성시켰다고 본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이 로마서는 어떻습니까.

다른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이 세 권과는 달리 이 로마서는 마지막에 있는 문안인사까지도 바울이 아닌 더디오라는 인물이 기록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기록은 13권의 바울서신 중에서도 이 로마서가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유독 로마서만 끝까지 그 기록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까요.

그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바울 선생님을 만났을 때 여쭤봐야지만 알 수 있는 부분이겠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첫째로 바울은 여러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에도 마지막 문안인사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기록할 정도로 이 문안인사 부분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둘째로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부분을 직접 쓰지 못할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이와 같은 점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중요한 마지막 부분을 쓰지 못할 정도의 사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이는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야말로 바울 자신이 쇠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짧은 글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주님의 일을 포기하려고 했나요?

아니요. 우리가 이미 공부했잖아요? 바울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다고 해요.

마게도니야와 아가야 사람들이 모아준 연보를 예루살렘에 전달해주고 난 다음에 다시 정 반대방향인 로마에까지 가겠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예전에 제가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배운 것 중 하나가, 회사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바쁘다”는 말이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누가 나한테 언제까지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약속한 그 날까지 하지 못했어요.


그럼 상대방은 왜 못했냐고 물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때, “아, 제가 좀 바빠서요……”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자기만 바쁘고 다른 사람은 다 한가한 줄 알아?

당연히 그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아, 물론 정말로 바쁠 때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때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내일 임원회의가 있는데 여기에 쓸 회의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 며칠째 밤을 새고 있어요……아니면 내일 제출해야 할 제안서가 있어서 다른 일들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라고 상대방한테 설명을 하면, 상대방도 그래, 나도 뭐 그럴 때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냥 바빠서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몸이 안 좋아서요? 먹고 살기가 바빠서요?

여러분, 바울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몸이 좀 피곤해서, 이래저래 바빠서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육체적인 어려움, 외적인 난관이 닥쳐와도 바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으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만약에 이 말이 맞다면 바울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들은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이 말씀.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굳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실 성경을 본다면 천국에 바울이 못 간다면 누가 가겠습니까. 회심한 후 바울은 평생동안 주님의 일을 열정적으로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바울도 자신은 내가 이만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제 안심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서 주실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누워 있겠습니까. 쉬고만 있겠습니까.

아니면, 바울 앞에서 내가 좀 바빠서요, 그러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만큼 쉬었으면 이제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발을 내디딜 때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私に倣う者となってください。


고린도전서 11장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私がキリストに倣う者であるように、あなたがたも私に倣う者でありなさい。

이제 우리를 기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이제부터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날까지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일을 힘차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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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2회 지혜로운 삶
2023년 1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9절~20절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9節~20節
“19.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20.平和の神は、速やかに、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サタンを踏み砕いてくださいます。どうか、私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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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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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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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1번째 시간으로서 “지혜로운 삶” 賢い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두 구절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이는 별개가 아니라 연결된 한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19절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19.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20절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0.平和の神は、速やかに、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サタンを踏み砕いてくださいます。どうか、私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이와 같은 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탄은 우리 힘으로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럼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면, 바로 19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잠시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우선 마태복음을 잠시 보실까요?


마태복음 10장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いいですか。わたしは狼の中に羊を送り出すようにして、あなたがたを遣わします。ですから、蛇のように賢く、鳩のように素直でありなさい。

오늘 19절에 나오는 <미련하다>라고 하는 뜻은 이 구절에 나오는 <순결>이라는 단어와 같은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미련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무식하다거나 어리석다고 하는 부정적인 뜻이라기 보다는 <순결하다, 순진하다>라는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예를 들어서 무슨 불법 마약을 사는 방법이라거나 아니면 불법 도박을 하는 장소 같은 것을 모른다고 무식한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좀 이상한 것이지, 그런 것과 관련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면 모르는 것이 나쁘다기 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비슷한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兄弟たち、考え方において子どもになってはいけません。悪事においては幼子でありなさい。けれども、考え方においては大人になりなさい。

이 말씀과 오늘 본문 중 19절 말씀을 같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한 데에 있어서는 장성한 어른처럼 지혜롭고, 악한 데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라, 순진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반대 아니겠습니까. 선한 데는 미련하고 오히려 악한 데에 지혜롭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죠.

창세기 8장 21절 중반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人の心が思い図ることは、幼いときから悪であるからだ。……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에는 아주 교묘한지 몰라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힌 방법으로 사기를 칩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무슨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기 치는 방법을 배웠겠어요?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사기를 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빼앗습니다.

정말 악한 데에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몰라요.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은 선한 데에 지혜롭고 악한 데에는 좀 미련하라, 순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반대로 그렇게도 나쁜 데에는 지혜롭고 선한 데에는 미련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실까요.

성경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지막 날은 언제라고 성경에는 적혀 있습니까.


일본에 어디 보니까 중요한 것은 다섯 번 말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섯 구절만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마태복음 24장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ただし、その日、その時がいつなのかは、だれも知りません。天の御使いたちも子も知りません。ただ父だけが知っておられます。

사도행전 1장 7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いつとか、どんな時とかいうことは、あなたがたの知るところ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父がご自分の権威をもって定めておられることです。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しかし、主の日は盗人のようにやって来ます。その日、天は大きな響きを立てて消え去り、天の万象は焼けて崩れ去り、地と地にある働きは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


요한계시록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見よ、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裸で歩き回って、恥ずかしい姿を人々に見ら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目を覚まして衣を着ている者は幸いである──

어느 정도 연배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1992년에 일어난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1992년 10월 28일날 휴거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고 뭐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주님은 말씀 하셨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안다고 하니 이게 무엇입니까.

그건 성경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도 그리고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하니 이처럼 알기 쉬운 이단이 어디 있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기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피해, 재산적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또 조만간 이 시한부 종말론은 분명 다시 고개를 듭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거든요.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면 그저 막연한데,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면 정말 믿기 쉬워질 것 같잖아요.

그래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본다면 주기적으로 이 시한부종말론이 등장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말을 잘하고 그리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성경과 다르면 그건 99%도 아닙니다. 100% 이단입니다.


이는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절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요, 만약 이를 따르게 되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왜 마지막 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분명히, 그것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언제 오신다고요? 예, 잠시 잠깐 후면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은 성경 후반에 가면 갈수록 더욱 절박하게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イエス・キリストの黙示。神はすぐに起こるべきことをしもべたちに示すため、これをキリストに与えられた。そしてキリストは、御使いを遣わして、これをしもべヨハネに告げられた。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는 요한계시록은 벌써 1장 1절부터 속히 일어난다고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1장에 이어 3장에 또다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면 갈수록 이 긴박함은 더해갑니다.

요한계시록이 몇 장까지 있지요? 예, 22장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22장에 보시면 마지막 날이 언제 임할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6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御使いは私に言った。「これらのことばは真実であり、信頼できます。」預言者たちに霊を授ける神である主は、御使いを遣わして、すぐに起こるべきことをしもべたちに示された。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에 보시면 처음으로 애굽 왕 바로 앞에 선 요셉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왕의 꿈에 대한 해설을 이 요셉이 하게 되는데 그는 이제부터 7년 동안 풍년이 있고 난 다음에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하게 되지요.

이 상황에서 요셉은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창세기 41장 32절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夢が二度ファラオに繰り返されたのは、このことが神によって定められ、神が速やかにこれをなさるからです。


사실 바로는 같은 날 밤에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말하기를 그 꿈이 갖는 의미는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보여주셨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두 번이요? 아니요.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만 보더라도 여섯 번,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만 보더라도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아니, 두 번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께서 일을 정하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처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이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그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사실, 주님께서는 이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되겠지요.

그 중에는 여럿이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삶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재산을 얻기를 원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면서, 이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면서도 잘 지킬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내 욕심 때문 아니겠습니까.

일단 내 배가 부른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든 이웃을 섬기든 할 것 아니야……하면서 어떻게 해요?

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이웃을 섬기지도 않은 채, 그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남은 시간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면 돈을 받아요. 그런데 그 돈의 화폐가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돈에 대해서 욕심을 갖겠습니까.

이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얻을 명예에 대한 욕심을 갖겠습니까.

다니엘 서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서 이 세상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니엘 2장 34절~35절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あなたが見ておられると、一つの石が人手によらずに切り出され、その像の鉄と粘土の足を打ち、これを粉々に砕きました。
そのとき、鉄も粘土も青銅も銀も金も、みなともに砕け、夏の脱穀場の籾殻のようになり、風がそれを運んで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そして、その像を打った石は大きな山となって全土をおおいました。

이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세상을 다스리고 싶은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겠지요.

오히려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편 43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わがたましいよ なぜ おまえはうなだれているのか。 なぜ 私のうちで思い乱れているのか。 神を待ち望め。 私はなおも神をほめたたえる。 私の救い 私の神を。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를 떠나 우리에게 허락된 날이 언제까지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수명이 아무리 오래 남았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100년 뒤까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날이 어쩌면 수십년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의외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가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날이 속히 온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그것도 반복적으로 하신 이유는, 우리가 불안에 떨면서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삶이야말로 선한 데에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선한 데에 지혜롭고 악한 데에 미련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 크나큰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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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1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2023년 12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7절~18절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7節~18節
“17.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学んだ教えに背いて、分裂と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彼らから遠ざかりなさい。
18.そのような者たち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にではなく、自分の欲望に仕えているのです。彼らは、滑らかなことば、へつらいのことばをもって純朴な人たちの心をだま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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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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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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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0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神様が愛される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한 영혼과 온 천하, 어느 쪽이 귀합니까.

교회에서는 흔히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요.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이 성경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본 기억이 안 났거든요.

그런데 예전에 우연히 어느 교회에 방문을 했었는데, 그 교회 어느 벽면을 보니까 한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는데, 거기에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글과 함께 성경 절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구절이 어디인가 하고 보았더니 마태복음 16장 26절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全世界よりも一つのたましいのほうが重い


이를 보고, 그래, 드디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리는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일단 마태복음 16장 26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いのちを失ったら何の益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人は何を差し出せばよいのでしょうか。

다시 한 번 읽어드릴까요?

마태복음 16장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いのちを失ったら何の益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人は何を差し出せばよいのでしょうか。

어떻습니까. 이는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 내용이 과연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제가 일본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몇 년 동안 시험대비반도 가르치고 그랬습니다만, 독해문제를 이런 식으로 풀면 큰일납니다.

이 말씀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목숨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에 더 가깝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말씀과 함께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自分のいのちを救おうと思う者はそれを失い、わたしのためにいのちを失う者はそれを見出すのです。

그리고 그 다음에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人は、たとえ全世界を手に入れても、自分のいのちを失ったら何の益があるでしょうか。そのいのちを買い戻すのに、人は何を差し出せばよいのでしょうか。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아무리 귀한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데, 그 목숨을 얻는 방법은 세상적인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에 진정한 목숨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라고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구절이 어떻게 해서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로 사용되었을까요.

저는 이런 해석이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줄 알았습니다만, 인터넷에 보니까 어떤 미국 목사님도 이런 식으로 인용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어디서부터 그리고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전도를 함에 있어서 아무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아, 그래,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지 않는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도를 해서 교회에 데리고 와야 한다……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전도 세미나 같은 데에서 교육을 하게 되면, 더욱 열심히 전도를 하게 하고, 마침내 성도는 늘어나고 교회는 부흥하고, 그리고 수익도 많아지고……

제가 좀 성격이 삐딱해서 그런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확한 성경 출처는 불분명합니다만 왠지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은 좀 성경적인 것 같지 않으세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성경 어딘가를 찾아보면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정말 성경적인지를 한 번 따져봐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맨날 문제나 다툼을 일으키고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면서요. 그러면 어떻게든 그 영혼을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16장 17절~18절
“17.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7節~18節
“17.兄弟たち、私は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学んだ教えに背いて、分裂と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たちを警戒しなさい。彼らから遠ざかりなさい。
18.そのような者たち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にではなく、自分の欲望に仕えているのです。彼らは、滑らかなことば、へつらいのことばをもって純朴な人たちの心をだましています。”

이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로마서 16장 17절~18절
“17.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분열을 일삼고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장애물을 놓는 사람들을 조심하고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18.그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분열을 일삼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래요?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끈질기게 매달려서 좀 바꾸도록 해보래요?

성경은 그들을 멀리하라,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구절은 여기만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命じます。怠惰(たいだ)な歩みをして、私たちから受け継いだ教えに従わない兄弟は、みな避けなさい。

이는 역시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인데 그와 같은 사람한테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님도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15절~17절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また、もしあなたの兄弟があなたに対して罪を犯したなら、行って二人だけのところで指摘しなさい。その人があなたの言うことを聞き入れるなら、あなたは自分の兄弟を得たことになります。
もし聞き入れないなら、ほかに一人か二人、一緒に連れて行きなさい。二人または三人の証人の証言によって、すべてのことが立証され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それでもなお、言うことを聞き入れないなら、教会に伝えなさい。教会の言うことさえも聞き入れないなら、彼を異邦人か取税人のように扱いなさい。

어떤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면 우선 공개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한 번 말을 해 보라고 하세요.

그래도 안 들으면 그 사실을 아는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을 해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하는데,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나 세리를 당시 유대인들이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도 안 섞고 아예 교제 자체를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해도 돌이키지 않는다고 해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면 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회개를 시켜야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들과는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떠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조금 더 살펴볼까요?



디모데후서 4장 10절 전반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デマスは今の世を愛し、私を見捨ててテサロニケに行ってしまいました。……

디모데후서 4장 14절~15절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銅細工人のアレクサンドロが私をひどく苦しめました。その行いに応じて、主が彼に報いられます。
あなたも彼を警戒しなさい。彼は私たちのことばに激しく逆らったからです。

우선 10절에 나오는 데마는 본래 바울과 사역을 함께 했었던 형제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결국 도중에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누구는 한 번 믿으면 이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이제 무슨 죄를 저질러도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를 다 해결해 주셨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인기를 얻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어디에도 안 나와 있습니다.

우선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데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이 사람은 바울이 대단히 아꼈던 인물로 여겨집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愛する医者のルカ、それにデマス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빌레몬서 1장 24절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私の同労者たち、マルコ、アリスタルコ、デマス、ルカ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처럼 바울서신에도 몇 번이나 그의 이름이 등장해요. 그 정도로 바울과 대단히 가까웠고 사역도 함께 열심히 했었던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그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리고 맙니다.

또한 14절에 등장하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고 하는 사람은 더 심합니다.

바울에게 해를 아주 많이 입혔다고 하면서 디모데에게 너도 조심하라고까지 말을 합니다.

아니,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만사를 제쳐 두고라도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을 멀리하라. 떠나라. 조심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어떤 개인만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성경 전체적으로만 본다면 그 정도가 아니지요.

구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한순간에 멸망시켜버리지 않으셨습니까.

노아 때에 기록을 보시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하고 전인류를 홍수로 멸망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처럼 사람들을 멸망시키셨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그저 막무가내로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버릴 때에는 철저하게 버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아니요. 사랑하십니다.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를 버리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6절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わたし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その人は枝のように投げ捨てられて枯れます。人々がそれを集めて火に投げ込むので、燃えてしまいます。

주님께서는 주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주님을 떠나게 된다면 밖에 버려져서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정말로 많은 깨달음을 주십니다.

나뭇가지는 그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영양을 공급 받아 성장하고 잎사귀가 달리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지, 아무리 처음에는 나무에 붙어 있었다 하더라로, 그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나뭇가지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지요.

머리카락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남자분들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여성 분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요.

미용실에 가게 된다면 때로는 몇시간이나 들이면서 머리를 가꾸기도 하고, 그 비용도 정말 놀랄 정도로 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말하자면 그만큼 자신의 머리카락을 아끼고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머리카락이 한 번 빠지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비싼 돈을 주고 한 머리카락이라 하더라도,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난 다음에 머리에서 빠져서 배수구 쪽에 있는 머리카락을 아까워 하면서 주워 가지고서는 다시 머리에 심으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지저분한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해도, 나중에 화장실 갔다가 물 내리기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님을 버린 사람들에 대한 성경말씀은 단호합니다.

그렇게 되면 철저하게 버림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된다면,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7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이 세상, 우주 천하 만물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그 귀한 피 한방울과 어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아무리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아흔 아홉마리 양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모든 피를 흘려 죽으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ました。わたしの愛にとどまりなさい。

우리가 거해야 하는 곳은 단 한 곳,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고 그래야 축복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아무리 튼튼한 포도나무라 하더라도 겨울이 되면 잎사귀가 떨어지고 추위에 떨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싫다고 해서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쓰레기나 땔감이 되고 말겠지요.

그러나 그 추운 겨울을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게 된다면, 마침내 따뜻한 봄날이 되어 또다시 힘차게 살아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박국 3장 17절~18절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いちじくの木は花を咲かせず、ぶどうの木には実りがなく、オリーブの木も実がなく、畑は食物を生み出さない。羊は囲いから絶え、牛は牛舎にいなくなる。
しかし、私は主にあって喜び躍り、わが救いの神にあって楽しもう。 




이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끝까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서, 마침내 진정한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놀라운 사랑,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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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20회 문안하시는 주님
2023년 11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16절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3節~16節
“13.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14.アシンクリト、フレゴン、ヘルメス、パトロバ、ヘルマス、および彼らとともにいる兄弟たちによろしく。
15.フィロロゴとユリア、ネレウスとその姉妹、またオリンパ、および彼らとともにいるすべての聖徒たちによろしく。
16.あなたがたは聖なる口づけをもって互いにあいさつを交わしなさい。すべてのキリストの教会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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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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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9번째 시간으로서 “문안하시는 주님” 挨拶さ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5절부터 16절 중에서 보면 똑같이 문안인사를 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12절과 13절 사이에서 나누어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부터 먼저 살펴본 다음에 이 문안인사에 관한 대목을 정리를 하고, 그리고 이 문안인사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볼까 합니다.

우선 지난 주에는 5절부터 12절까지에 있어서 바울이 각 사람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면서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3절에서 16절에 보시면,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단순하게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부분에서는 하나하나 설명했는데 뒤에 가니까 귀찮아져서 그냥 이름만 적은 것일까요?

다른 주석서에 찾아보아도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어떤 주석서에 보니까 앞에 나온 사람들은 바울과 비교적 가까웠던 사람들이라서 자세하게 썼는데, 13절 이후에 나온 사람들은 바울과 별로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이름만 적었을 것이라고 되어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


아니, 그럼 생각해보세요.

앞쪽에 이름이 적힌 사람에 비해서 자기는 바울과 별로 친하지 않으니까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 이름이 뒤에 나오는 것도 서러웠을 텐데, 설명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 본인은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마도 어쩌면 이 로마서가 적히고 지금까지 약 2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이해되지나 않았을까 합니다만, 오늘은 이 오해를 좀 풀어드릴까 합니다.

여기서 힌트가 되는 것이 바로 13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6장 13절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3節~16節
“13.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이 13절에서는 루포라는 사람과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루포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루포와 바울이 형제지간이라기 보다는 루포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루포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있는 반면, 루포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이 없어요.

그리고 14절 이후에는 대부분 이름만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13절에 나오는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바로 자세한 설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분기점이 생긴 것일까요.

지지난 주에 16장 3절에서 16절까지 내용 중에서 4명, 2쌍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말씀을 드렸고, 그 때는 이 중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면, 오늘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루포라고 하는 이름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딱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 로마서 16장 13절인데, 나머지 하나는 마가복음 15장 21절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이 장면, 우리가 잘 아는 장면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갑자기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한테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본론과는 좀 관련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문제를 내볼까요?

이 구레네 시몬은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갔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시는데 머리는 가시관으로 피범벅이 되고 온몸은 채찍을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면서 올라가시다가 도중에 쓰러지시죠.


그 모습을 본 로마 군인이 생각하기를 더 이상 십자가를 짊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마침 그 옆에 있었던 구레네 시몬한테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잖아요?

예, 영화 같은 데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사실 <루포>라는 이름만 본다면 마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만, 구레네 시몬과 관련된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 깊었나봐요.

마가복음 외에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27장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누가복음 23장 26절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うしろ)から運ばせた。


좀 신기하지 않으세요?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의 기록을 비롯해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시면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쓰러지거나 넘어지셔서 걸어갈 수가 없게 되자 그 옆에 있던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본다면,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레네라고 하는 시골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그러면 이 구레네라고 하는 곳이 시골이라고 하는데, 구레네가 어디길래 시골이라고 되어 있을까 하고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구레네라고 하는 곳은 영어발음으로는 싸이린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도시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예루살렘까지는 얼마나 되냐 하면, 인터넷으로 찍어보니까 자그마치 1800킬로나 됩니다.

그래서 걸어서 가게 되면 하루에 40킬로 정도 간다고 해도 45일 그러니까 한 달하고 보름이나 걸리는 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큰 명절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올라온 사람이었다는 것인데, 마침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엉겁결에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마가복음에 있는 구절을 살펴볼까요.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앞서 로마서에 있는 구절에서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을 가리키면서 물음표가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루포>와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등장하는 <루포>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로마서 16장 13절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선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실 텐데, 이번에는 이 구절에서 다른 성경구절과 비교했을 때 좀 부자연스러운 점을 한 번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자, 어디가 부자연스럽습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에 있어서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역대상 4장 37절
“또 스마야의 오대 손 시므리의 현손 여다야의 증손 알론의 손자 시비의 아들은 시사이니”

シフイの子ジザ。シフイはアロンの子、アロンはエダヤの子、エダヤはシムリの子、シムリはシェマヤの子。


느헤미야 11장 15절
“레위 사람 중에는 스마야이니 그는 핫숩의 아들이요 아스리감의 손자요 하사뱌의 증손이요 분니의 현손이며”

レビ人のうちでは、ハシュブの子シェマヤ。ハシュブはアズリカムの子、アズリカムはハシャブヤの子、ハシャブヤはブンニの子である。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 보면 그 이름에 <성씨>가 있지요.

그래서 대충 어느 집안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은 성씨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소개를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이고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가 누구이고……라는 식의 기록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조상에 대해서 소개하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소개하려는 본인보다 조상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정작 그 사람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손자이고 하면, 아하 누군가 했더니만 그 집안 아들이군! 하고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아, 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누구누구의 아들이고, 누구누구의 손자야……라고 하는 경우라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더 유명한 경우 아니겠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더라도 어떤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누구의 아들이요, 누구의 손자다……라는 식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은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이게 일반적이라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이렇게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인용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마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아버지 시몬보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더 유명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단지 구레네 시몬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고 하면, 아~~그 사람들의 아버지구나! 라고 알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알렉산더와 루포는 시몬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라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알렉산더와 시몬 이름이 없어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어쩌면 이 시점에서는 아버지 시몬과 큰아들 알렉산더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정리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우선 구레네라고 하는, 저기 아프리카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 시몬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그의 아들 루포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인물이 되었어요.

이렇게 본다면 로마서 16장 13절에서 왜 루포는 그 이름만 열거되었을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당시에 이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루포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굳이 해설을 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한국사람한테 가수 조용필씨에 대해서 말하면서, 아 이 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시작해서 이러이러한 히트곡이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인데……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휴, 이미 다 알아요. 한국사람 중에서 조용필 모르는 사람 있어요? 라고 하지 않겠어요?

뭐, 이 점에 대해서는 세대마다 좀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당시 이 로마서를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루포라는 인물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유명인사였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했었나봐요.

그러니까, 아,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인 루포 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도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분이라고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14절 이후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이유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별로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우리에게 있어서는 낯선 이름이라 하더라도, 당시 로마에서 이 서한을 읽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있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나요?

자, 그럼 다음으로 문안인사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아무런 의미없이 쓰여진 것은 없습니다.

다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계속되는 문안을 그저 단순한 안부인사 정도만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서한은 우리가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자매 뵈뵈가 고린도에서 그 먼 로마까지 그 험난한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 목숨을 건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본다면 이 로마서는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로마에 반드시 전달해야 했을 정도로 중요한 서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단순한 짐작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로마서를 공부해온 우리는 이미 이 로마서가 신앙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처럼 중요한 서한, 그것도 자매 뵈뵈가 목숨을 걸고 험난한 길을 가면서 전해준 그 서한에, 단순한 안부인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면, 이건 좀 너무하지 않겠습니까.


종이도 지금 같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당시는 양피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에 부피도 컸을 뿐만 아니라 무게도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뵈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해서라도 정말 중요한 내용만 적으면 됐을 텐데, 굳이 한가하게 인사말까지도 적을 필요가 있었겠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런 저도 조금 생각해보면 알 만한 일인데, 바울이라고 그 점을 몰랐겠습니까.


그리고 이는 나중에 공부할 예정인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지금 대단히 몸이 쇠약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긴 문안인사까지를 굳이 기록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이 문안인사 대목은 도저히 뺄래야 뺄 수 없을 만큼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안인사가 적힌 부분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까요.

자, 우리 알기 쉽게 이 부분까지 좀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청와대……지금은 대통령실인가요? 아무튼 거기서 일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으로 대단히 중요한 긴 공문이 도착했어요.

그리고 그 중요한 공문 마지막에 뭐라고 적혀 있냐 하면 군마현에 있는 이카호중앙교회 홍훈표 목사님한테 문안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공문을 받은 대사관에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교회로 연락을 하겠지요. 이카호중앙교회가 어디야? 하면서 연락처를 알아본 다음에 전화라도 한 통 걸어서 하는 말이, 지금 한국 대통령실에서 중요한 공문이 대사관으로 왔는데, 그 내용 중에 이카호중앙교회 홍훈표 목사님께 문안을 전해달라는 내용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 전화를 받은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쇼……라고 하고 그냥 끊어버리겠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아니, 무슨 공문이길래 대통령실에서 온 공문 중에 나한테 문안한다고 했을까?

혹시 나도 그 내용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라고 하지 않겠어요.

직장에서 보면 공문을 발송할 때 보면 수신란이 있고 그리고 참조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공문 내용은 수신인만이 아니라 참조란에 적힌 사람들까지도 읽도록 하라는 내용인 것이지요.

이 로마서 16장에 적힌 문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지금 뵈뵈가 목숨 걸고 가져가는 이 서한에 그저 한가롭게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하기 위해 적은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적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서한을 반드시 읽도록 하라는 요청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로마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아갈 핵심인물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주는 로마 교회의 직분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이름이 적힌 여러분들은 이 서한의 내용을 반드시 숙지해서 로마 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가야 한다면서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 로마서를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는 것,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이 로마서를 읽고 있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주님께서 역시 우리에게도 문안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사력을 다해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그리고 자매 뵈뵈가 목숨을 걸고 이 로마서를 가져간 이유는, 단순히 2천년 전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전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2천년이 지난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이 귀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단순히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아, 그렇구나……하고 끝나라고 문안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로마만이 아니라 다름아닌 바로 이 땅에도 주님의 교회가 굳건히 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문안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요청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문안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서,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주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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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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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9회 심음과 거둠
2023년 11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5절~12절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5節~12節
“5.また彼らの家の教会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キリストに献げられたアジアの初穂である、私の愛するエパイネトによろしく。
6.あなたがたのために非常に労苦したマリアによろしく。
7.私の同胞で私とともに投獄されたアンドロニコとユニアによろしく。二人は使徒たちの間でよく知られており、また私より先にキリストにある者となりました。
8.主にあって私の愛するアンプリアトによろしく。
9.キリストにある私たちの同労者ウルバノと、私の愛するスタキスによろしく。
10.キリストにあって認められているアペレによろしく。アリストブロの家の人々によろしく。
11.私の同胞ヘロディオンによろしく。ナルキソの家の主にある人々によろしく。
12.主にあって労苦している、トリファイナとトリフォサによろしく。主にあって非常に労苦した愛するペルシスによろし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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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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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8번째 시간으로서 “심음과 거둠” 種まきと刈り入れ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16장 1절~2절은 바울의 이 귀한 서한을 겐그레아에서 로마까지 자그마치 10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가져간, 그것도 힘이 센 남자도 아닌 자매 뵈뵈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본 내용은 로마에서 고린도로 왔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 그들은 고린도에서 에베소, 에베소에서 로마,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 에베소로 이어지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마다 않고, 오로지 주님의 일을 위해 바울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한 부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5절부터 16절까지 보시면 계속해서 문안하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를 그냥 읽어 내려가면 재미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에 한 번 빠지게 되잖아요? 그러면 세상 학문이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무슨 소설가나 철학자가 쓴 책의 내용을 두고 그 내용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 후세 학자들이 여러 주장들을 내놓은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래봐야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이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쓴 글이나 책이라 하더라도, 그 생각이나 주장이 항상 옳다고 만은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국어시험에 보면 본문이 있고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예전에 어디서 들어보니까 그 시험에 나온 본문의 필자가 직접 그 문제를 풀어봤대요.

그랬더니 절반도 못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저 글을 쓴 사람 따로, 그리고 해석한 사람 따로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어떤 글을 해석했다 하더라도 그게 정말로 그 글을 쓴 사람의 생각과 같은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문제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비록 이 성경이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 하더라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구약 39권, 신약 27권, 전체 66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올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로마서 16장 5절에서 16절까지를 보시면, 우선 한 곳에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나눌 수 있냐 하면 바로 12절과 13절 사이에서 나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다음 주에는 13절부터 16절까지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5절부터 12절까지를 함께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유명한 식당이나 요리를 소개하는 방송을 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와 같은 방송을 보시면 주로 인기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음식을 먹는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연예인들은 그런 것을 잘 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음식을 먹었을 때의 그 소감, 그 묘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걸 잘하는 사람을 보면요, 정말 보고 있는 제가 직접 그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 맛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잘 못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냥 이걸 먹어도 아, 참 맛있네요. 저걸 먹어도 아, 정말 맛있네요……라는 말 밖에 안 하면 정말 보는 사람이 재미가 없죠.

아니, 그 맛이 단지 매운지 짠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식감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어떤지를 알려주면서 먹어야 하는데, 그냥 맛있다고만 하면 보는 사람은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별로 그 음식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어휘력이나 표현력이 딸린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먹으나 저걸 먹으나, 그냥 맛있다는 말로만 떼우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로마서 16장을 보시면 특히 12절까지에 대한 내용에 의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정성 들여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우선 5절에 등장하는 에베네도(エパイネト)라는 사람, 이 사람은 아시아에서 처음 맺은 열매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종종 <아시아>라고 하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다시 말해서 지금 터키 근방을 가리키는 소아시아 반도를 가리킵니다.

대략적인 지리적 위치를 본다면 이태리와 이스라엘 사이 부근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사역을 했는데 여기서 처음 전도한 사람이 바로 에베네도(エパイネ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6절에 의하면 <마리아>라는 자매가 나오는데,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안드로니고(アンドロニコ)와 유니아(ユニア), 암블리아(アンプリアト)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12절까지를 보면 각 사람마다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로마서 16장 1절부터 12절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등장한 인물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간단하게 구분해볼까요?

만약에 여기 나오는 사람들을, 심는 사람들과 거둔 사람들로 구분을 해본다면, 여기에 등장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 모두 다 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 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만, 주님 안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다 심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모세, 다윗, 그리고 바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면, 사실 우리에게 거두는 것이 아닌 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심기보다는 거두고 싶어 합니다. 하나를 심고 열을 거두고 싶어합니다. 열을 심고 백, 천, 만, 백만 억을 거두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지요.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면 누구는 한 해 동안 수입이 많이 늘어서 기뻐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한편으로는 수입이 늘기는커녕 빚만 늘었다는 분들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런 분들은 추수감사절이라고 해도 감사할 것이 없는 건가요?

그런데 잠깐요. 우리말로는 추수감사절이지만 영어로는 뭐라고 합니까. Thanksgiving 이라고 하지요.

사실 성경을 해석할 때 영어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어가 원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추수감사절 같은 경우는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추수감사절의 시작은 성경이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수확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11월로 한 것은 과거에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난 다음부터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을 나타내는 Thanksgiving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까 하는데, 이 단어를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한다는 말도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대한 감사>라고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회사원이라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 우리가 몇 억대의 큰 계약을 따왔어요. 이는 얼마나 큰 성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월급을 언제 받습니까.

1번 계약금이 입금되면 받는다.
2번 기타.

예, 계약금이 입금된다면 어디로 입금이 됩니까.

아무리 내가 계약을 따왔다고 해도 그 계약금이 내 통장으로 입금되지는 않잖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 돈이지요. 그렇다면 몇 억 짜리 계약을 따온 내 월급은 언제 입금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월급날에 입금되겠지요.

회사에 있으면서 놀라운 성과를 내면 보너스가 나올 수도 있고, 월급이 오를 수도 있고, 그리고 승진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회사에서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내 보너스를 줄 수도 없는 것이요, 내 마음대로 월급을 올릴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승진할 수도 없겠지요.

그러나 내가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올린다면, 분명 그에 걸맞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는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물론, 세상에는 항상 공정하지만은 않겠지요. 내가 분명 성과를 올렸는데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이 먼저 승진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전혀 오차가 없습니다.

여기서 <때가 되면>이라는 뜻은 단순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다른 뜻이 아니라 <가장 좋을 때에> <가장 적합할 때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할 때에 우리를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도 안 믿어지십니까. 그런 분들을 위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軽んじたりし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天にいる、彼らの御使いたちは、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御顔をいつも見ているから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별볼일 없이 보이는 사람도 무시하지 말래요. 그 이유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항상 뵙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두고 카톨릭에서는 천사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런 말씀은 안 하세요.

그 대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요한복음 14장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일부 이단 교주들은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보혜사 말고 다른 보혜사도 보내주시겠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그게 누구냐 하면, <그게 바로 자기다>라고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혜사는 무엇이냐 하면 그게 천사라고 하나요? 아니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 보혜사는 무엇이냐 하면, 요한복음 15장 2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사를 시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 진리의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뵙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분명히 그럴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쩌면 천사들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늘에 기록하고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말씀에 있어서의 핵심은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사람 한사람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1961년에 존 F 캐네디는 미국 제35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하지요.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国があなたのために何ができるかではなく、あなたが国のために何ができるかを問うてほしい

이런 말을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제부터 국정을 맡게 될 대통령이 될 사람의 말로서 이게 합당한지 저는 좀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대통령으로서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바라기 전에,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대통령이 했기 때문에 좀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이제 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사람한테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말을 다음과 같이 한 번 바꾸어 보았습니다.

“회사가 자네에게 무엇을 해줄지 생각하지 말고 자네가 회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도록 해.”

어떻습니까.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리겠습니까. 왜 내 월급은 안 올려주는 거야. 왜 나는 승진을 안 시켜 주는 거야. 왜 나는 남들처럼 넉넉하지 못한 거야……라고 불평 불만만 늘어놓겠습니까.

사실 그런 사람한테 회사에서 무슨 비중 있는 일을 맡기겠습니까. 맨날 회사 불평이나 하고 상사 불만이나 하고, 동료들 후배들 험담이나 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아무런 성과도 남길 수 없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회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우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심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행함으로 심어야 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심었다면, 그러면 거두는 것은 누가 거둡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을 해서 큰 계약을 따왔다 하더라도, 그게 내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 돈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나서 때가 되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억울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님 안에서는 한치의 오차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내 노력을 회사나 조직이 알아주지 못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에 있어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는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 주시고, 그리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회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무나 그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나요?

그렇죠. 그 회사의 입사 시험에 합격 해야지만 그 회사에 들어가서 그 회사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선택 받은 사람만이 그 회사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エペソ人への手紙1章4節~5節
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の置かれる前から彼にあって選び、御前で聖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
神は、みむねと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심을 수 있는 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그저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기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쁨을 가지고 믿음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행함으로 심었을 때,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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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8회 어느 한 부부의 헌신
2023년 11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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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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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7번째 시간으로서 “어느 한 부부의 헌신” とある夫婦の献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3절에서 16절에 보시면 이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몇 명의 이름이 나오는지 궁금하실 수가 있는데, 이게 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이는 세는 사람들이 실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를 포함시키느냐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구체적인 이름 숫자만 세면 26명입니다만, 다음 구절을 한 번 봅니다.

로마서 16장 10절 후반부
“10.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アリストブロの家の人々によろしく。

여기에 등장하는 아리스도불로라는 사람은 헤롯 왕의 손자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도불로가 아니라 그 집안 사람, 그러니까 그 가족이나 또는 그가 데리고 있는 노예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과 이 아리스도불로라고 하는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11절 후반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6장 11절 후반부
“11.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ナルキソの家の主にある人々によろしく。

여기에 등장하는 나깃수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울이 문안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집에 속한 사람, 이는 가족 뿐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 수하에 있던 노예들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을 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 수가 구체적으로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름 구절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6장 5절 전반부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また彼らの家の教会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로마서 16장 14절 후반부
“14.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彼らとともにいる兄弟たちによろしく。

로마서 16장 15절 후반부
“15.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彼らとともにいるすべての聖徒たちによろしく。

이는 누가 보아도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나 교회 전체를 대상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인원수를 짐작할 수는 없겠지요.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볼 때 지금 여기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몇 명이냐 하는 것은 이 기록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인데, 성경 만으로 본다면 이 로마서 16장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성경이 아닌 다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들의 직업을 추정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그와 같은 노력이 학문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고 했을 때, 그와 같은 추정, 그러니까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추정은 어디까지나 신학자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성경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이 점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4명, 2쌍의 인물들에 대해서 주목을 해 볼만 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은 우선 그 중에서 2명, 1쌍의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3절~4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하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 지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이름은 여기 말고도 사도행전 18장 2절과 18절, 26절, 고린도전서 16장 19절,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9절, 이렇게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서 구절까지 더하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성경에 총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만, 그러면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사도행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성경이 있으신 분은 함께 살펴볼까요?

사도행전 18장 1절~3절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1.その後、パウロはアテネを去ってコリントに行った。
2.そこで、ポントス生まれでアキラという名のユダヤ人と、彼の妻プリスキラに出会った。クラウディウス帝が、すべてのユダヤ人をローマから退去させるように命じたので、最近イタリアから来ていたのである。パウロは二人のところに行き、
3.自分も同業者であったので、その家に住んで一緒に仕事をした。彼らの職業は天幕作りであった。

여기서 ‘아덴’이라고 하는 곳은 아테네 그러니까 그리스의 수도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왔다고 하는데 아테네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으니까 바울은 동쪽에서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본래 로마에 있다가 고린도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났다는 거예요.

여기서 브리스길라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부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 서쪽 이태리 로마에서 왔고, 바울은 고린도 동쪽 아테네에서 왔는데, 마침 고린도에서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굴라는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바울도 같이 살면서 함께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교나 목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텐트메이커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과 아굴라 내외는 단순히 면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살면서 일도 같이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겠습니까.

그들 부부의 기록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パウロは、なおしばらく滞在してから、兄弟たちに別れを告げて、シリアへ向けて船で出発した。プリスキラとアキラも同行した。パウロは誓願を立てていたので、ケンクレアで髪を剃った。

우선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그의 서원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민수기 6장 5절과 18절에 보면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이 되기로 서원을 했다면 그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있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기 전에 머리를 잘랐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어디라고요? 예, 겐그레아라고 하는데, 겐그레아? 어디서 들어본 적 있지 않으세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자매 뵈뵈가 속해 있던 교회가 바로 겐그레아 교회였잖아요. 이게 바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적어도 바울은 이 시점에서 뵈뵈와 면식을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겐그레아는 항구도시라고 말씀 드렸었잖아요? 고린도도 항구도시이긴 했습니다만, 고린도는 서쪽에 있고 겐그레아는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수리아로 가려고 했다고 하는데 수리아는 고린도에서 동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도중에 있거든요.

그래서 겐그레아 항을 통해서 출발한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그 때 이 아굴라 부부도 함께 갔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수리아까지는 대략 400~500킬로 정도라고 하니까, 서울에서 제주도 정도, 동경에서는 오사카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하니까 결코 가까운 곳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굴라 부부는 이처럼 헌신적으로 바울과 함께 하면서 그의 사역을 도왔다고 하니, 바울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이 부부에 대한 인상은 어떻습니까. 왠지 그런 느낌,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손과 발이 되어서 충실하게 일하는 일꾼 같은 모습이 들지 않나요?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26절
“2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さて、アレクサンドリア生まれでアポロという名の、雄弁なユダヤ人がエペソに来た。彼は聖書に通じていた。
この人は主の道について教えを受け、霊に燃えてイエスのことを正確に語ったり教えたりしていたが、ヨハネのバプテスマしか知らなかった。
彼は会堂で大胆に語り始めた。それを聞いたプリスキラとアキラは、彼をわきに呼んで、神の道をもっと正確に説明した。

수리아 지방으로 건너온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 쪽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에베소에 있는 회당에서 한 언변이 좋은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믿음도 좋고 설교도 잘 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 부족했나봐요.


그러자 아굴라 부부가 어떻게 했냐 하면 그를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가르침은 바울을 통해서 얻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니까 이 아굴라 부부는 단순히 바울의 잡일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지식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부부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부부는 로마에 있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따라서 수리아 지방에 있는 에베소로 갔다면서요?

그들이 에베소에 있었다는 근거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잠깐 고린도전서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도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인데, 고린도전서가 어디에서 쓰여졌냐 하면 고린도전서 16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8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しかし、五旬節まではエペソに滞在します。

그러니까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를 거쳐서 에베소에 갔던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쓰여진 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19절에 보시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アジアの諸教会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アキラとプリスカ、また彼らの家にある教会が、主にあって心から、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 말은 뭐냐 하면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에베소로 건너온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는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분명히 에베소에 같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그 부부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자, 기억하시죠? 오늘 본문인 3절부터 16절은 문안 인사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뵈뵈는 문안이 아니라 추천을 했었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문안 인사의 경우 그 대상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뵈뵈는 로마가 아닌 고린도 인근 겐그레아 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추천이라는 말을 썼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로마서 16장 3절에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분명히 로마로 보내는 서한 중에서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는 분명 아굴라 부부는 당시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이를 정리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의하면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거기서 바울을 만나고 함께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옮겨 왔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해서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서를 쓰면서 에베소에 아굴라 부부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니까 바울과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에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 추정되는 디모데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私はすでに注ぎのささげ物となっています。私が世を去る時が来ました。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순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그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이 디모데 전서와 후서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한의 수신자인 디모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1장 3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私がマケドニアに行くときに言ったように、あなたはエペソにとどまり、ある人たちが違った教えを説いたり、

즉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상황에서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로마에는 누가 있어야 해요?


예, 바울을 돕던 아굴라 부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디모데후서에는 이 또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また、オネシポロの家族によろしく。


여기서 또 이 아굴라 부부가 등장해요. 그럼 지금 아굴라 부부가 디모데에게 문안한다고 해요?

아니요. 오히려 디모데더러 아굴라 부부한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굴라 부부는 지금 어디 있어요?

예, 디모데가 지금 있는 곳, 그러니까 또 에베소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어떻게 되냐 하면 로마에 있던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왔습니다. 거기서 아테네 쪽에서 온 바울을 만났어요. 그리고 함께 에베소로 건너갑니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이지요.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여전히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로 다시 와서 로마에 있는 교회로 편지를 하는데 그 내용에 보니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에 있다잖아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아굴라 부부는 어디 있어요? 예, 다시 에베소에 와 있어요.

이를 보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아, 거 참 이 아굴라 부부는 이사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안 드린 것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사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처음 만난 시점부터 순교를 앞두고 있는 시점까지, 바울은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아굴라 부부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서 로마서를 쓸 때에도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문안하라고 편지를 썼고,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이제 순교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면 다음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굴라 부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이 부부는 얼마나 헌신적으로 바울은 도왔냐 하면 하물며 자기들의 목숨, 이는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분명 <자기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가 합심해서 헌신적으로 바울을 도왔을 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아굴라 부부는 바울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시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는 분명하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디모데후서를 쓰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시점에서 자신을 가장 잘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할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아굴라 부부를 부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이 아굴라 부부가 지금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あなたは、何とかして早く私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い。

바울은 디모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와 달라고 하지요. 순교를 앞둔 상황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겨둘 가르침도 있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러 부탁도 함께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あなたが来るとき、トロアスでカルポのところに置いてきた外套を持って来てください。また書物、特に羊皮紙の物を持って来てください。

그런데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도 단 한 가지 부탁을 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굴라 부부를 데려와 달라는 부탁입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들도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에 안 불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젊은 디모데가 모셔오든지, 아니면 올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봐 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 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이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굴라 부부에 대한 문안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분명 바울이 그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울의 선교활동 중에서 이 아굴라 부부만큼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단순히 세상적으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신앙적 지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바울로부터 성경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교육받았을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는 바울의 사역과 함께 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그 부부를 로마로 보내서 로마 교회에 대한 사역을 부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은 자신을 대신해서 아굴라 부부로 하여금 에베소로 보내서 역시 거기에 있는 교회를 믿음 위의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해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그 이동 거리를 한 번 볼까요? 고린도부터 시작한다면 고린도에서 에베소까지 400킬로,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1700킬로,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 에베소까지 1700킬로.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 그 시기에 이토록 먼 거리를 남자인 아굴라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브리스가까지 함께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 살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하지만 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합심해서 끝까지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헌신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 어쩌면 금방은 눈에 띄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 21세기에도 그들의 헌신은 이처럼 성경 속에서 흐려지는 일 없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이제 우리도 조금 더 힘을 내어서 주님의 사역에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름이 조금도 흐려지는 일 없이 영원토록 선명하게 하늘에 기록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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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7회 로마로 향하는 뵈뵈
2023년 11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2절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節~2節
“1.私たちの姉妹で、ケンクレアにある教会の奉仕者であるフィベを、あなたがたに推薦します。
2.どうか、聖徒にふさわしく、主にあって彼女を歓迎し、あなたがたの助けが必要であれば、どんなことでも助けてあげてください。彼女は、多くの人々の支援者で、私自身の支援者でもあ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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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6번째 시간으로서 “로마로 향하는 뵈뵈” ローマに向かうフィ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16장 본문의 전체 구성을 살펴본 다음에 드디어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먼저 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27절까지 있는 로마서 16장의 구성은 네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2절, 3절부터 16절, 17절부터 20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21절부터 27절입니다.

우선 1절부터 2절은 뵈뵈의 추천, 3절부터 16절은 문안 인사, 17절부터 20절은 본론, 그리고 21절부터 마지막인 27절까지는 맺음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본어 시험반, 그리고 일본대학 입시반을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만, 특히 많은 수험생들이 독해과목을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독해 문제 중에서도 이른바 “본문 내용”과 “필자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 제일 까다롭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본문 내용과 같은 것은 무엇인가, 또는 필자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문장 전체의 흐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독해문제를 풀기 위해서 문장 전체를 모두 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 독해문제는 본문 전체를 이해하고 푸는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내는 문제라고 했었지요.

그래서 독해 본문의 특징 중에서 본다면, 본문 중에서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핵심 내용이 마지막에 오는 본문입니다. 서론 본론으로 이어지고는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이 나오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는 핵심 내용이 처음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우선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을 처음에 땅 하고 말한 다음에 그 이유에 대해서 서술하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핵심 내용이 중간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핵심 내용이 본문의 중간에 오는 경우가 있나요? 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편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편지의 경우에는 일단 처음에는 인사말이 들어가지요? 예를 들어서 무슨 계절인사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본론이 있고 마지막에 맺음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입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될 로마서 16장에 있어서, 그 핵심내용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번, 1절부터 2절인 뵈뵈의 추천 부분
2번, 3절부터 16절까지인 문안 인사 부분
3번, 17절부터 20절까지인 본론 부분
4번, 21절부터 27절까지인 맺음말 부분

이 중에서 어디에 그 핵심 내용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번, 1절부터 2절인 뵈뵈의 추천 부분
2번, 3절부터 16절까지인 문안 인사 부분
3번, 17절부터 20절까지인 본론 부분
4번, 21절부터 27절까지인 맺음말 부분

이 중에서 핵심 부분은? 예, 그것은 바로 전부 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 문장과 성경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요한삼서 2절.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구절이 좀 어렵게 들릴지는 모르기 때문에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그대의 모든 일이 잘 되고 몸도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내용을 보세요. 이 구절은 일반적인 문장으로 본다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안 인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이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안았을 때,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볼 이 로마서 16장에 있어서도, 아, 이건 문안인사라서, 이건 맺음말이라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단어, 한 글자마다 우리가 버리는 것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뵈뵈라는 이름이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느냐 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이 이름은 성경에서 이 곳에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 이름이 나오지 않아요.

이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둘째 이유는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주제설교를 계속 했었다면 주일 말씀에 이 부분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분도 다룰 수 있는 것이 바로 강해설교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2절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私たちの姉妹で、ケンクレアにある教会の奉仕者であるフィベを、あなたがたに推薦します。
どうか、聖徒にふさわしく、主にあって彼女を歓迎し、あなたがたの助けが必要であれば、どんなことでも助けてあげてください。彼女は、多くの人々の支援者で、私自身の支援者でもあるのです。”

여기서 바울은 한 교회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겐그레아 교회입니다. 이는 교회 이름이라기보다는 겐그레아라는 곳에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가 어디 있냐 하면, 주석서에 의하면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11킬로 떨어진 항구도시였다고 합니다.

제가 앞서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한 장소가 고린도였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이 추정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로마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한 성도를 추천하는데 그 성도가 고린도 바로 인근인 겐그레아에 있는 자매이기 때문에, 분명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고린도 또는 그 근방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지요.

자,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만, 3절부터 16절까지 이어지는 문안인사에 이 뵈뵈라고 하는 자매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안이 아니라 분명 추천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뵈뵈라고 하는 자매가 그녀의 소속된 교회는 겐그레아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 로마 쪽에 있다고 한다면, 뭐, “주 안에서 사랑하는 자매 뵈뵈에게 문안하라” 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분명 문안이 아니라 추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안의 특징을 살펴본다면 다음 두 가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문안은 그들이 만나거나 연락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대면하거나 아니면 편지나 기타 방법을 통해서 연락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을 때 문안을 할 수 있겠지요.

둘째로 문안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가 저한테 편지 하기를 거기 누구누구한테 안부 전해주세요……라고 해봤자 제가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면 안부를 전할래야 전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으로 본다면 뵈뵈라는 자매에 대해서 문안이 아니라 분명 추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로마에 있는 교회 사람들은 이 뵈뵈에 대해서 그 때까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모르는 사람을 추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이유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이 바울이 쓴 편지, 그러니까 이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교회까지 가지고 간 인물이 다름 아닌 뵈뵈였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자신이 쓴 서한을 로마에 있는 교회까지 전해달라면서 이를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 자매인 뵈뵈한테 부탁했고, 뵈뵈는 이를 들고 겐그레아에서 로마까지 간 것으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서한을 들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달했다고 해도, 그들은 바울은 알아도 뵈뵈라는 자매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누군데 이걸 가지고 왔느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뵈뵈라는 자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녀는 대단히 신뢰할 수 인물이라고 하여 추천한다는 말까지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글을 읽으면, 아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거리가 대충 얼마 정도라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십니까.

예, 직선거리로 1300킬로 정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까 코스에 따라서 1222킬로에서 2400킬로 정도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코스를 보니까, 참 세상 많이 좋아졌어요. 군마 시골에 있으면서도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까 금방 떠요.

고린도가 있는 그리스와 이태리 사이에는 바다가 있기 때문에 도중에 패리를 타고 간다면 그게 1222킬로인데 이렇게 가면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19시간 정도 걸린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다를 건너지 않고 육로로만 간다면, 북쪽으로 삥 돌아가게 되어서 2400킬로나 되는데, 이렇게 자동차만으로만 간다면 무려 30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자동차도 없었고 지금처럼 패리가 있었을 리도 만무하지요. 결국 육로는 걸어가야 하고 바다는 느린 배로 건너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편의상 거리가 1300킬로라고 하고, 이 길을 모두 걸어간다고 하면 얼마나 걸릴까요.

사람의 걸음걸이가 성인 남성의 경우 시속 4킬로라고 하고, 하루에 일어나 있는 시간을 16시간, 그리고 여기에 식사도 하고 휴식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실제로 걸어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 하루에 대략 40킬로 걸으면 많이 걷는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건 남성인 경우이지만 뵈뵈는 자매라면서요. 그녀의 나이가 몇 살 정도였는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편의상 하루에 평균 30킬로를 걸었다고 해보죠. 그러면 총 거리 1300킬로를 하루에 30킬로 정도 걸었다고 한다면,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는 데 며칠이나 걸립니까.


단순계산으로 1300 나누기 30하면 되겠죠? 답은? 예, 대략 44일, 그러니까 한달 하고도 보름 정도라는 답이 나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무슨 서울 시민 걷기 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제 아내와 걸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대략 10킬로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어땠을 것 같습니까. 예,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도 익숙한 길도 아닌 처음 가는 길이니까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그런데 거기에 3배를, 그것도 한달 반 이상이나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걸어야 하는 거리가 바로 이 뵈뵈가 갔던 여정이었습니다.

사실 이것만 보더라도 참 먼 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지요.

본문에 보시면 뵈뵈는 무슨 일행이 있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일행이 있었고 거기에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다면, 굳이 자매인 뵈뵈 이름만을 쓰지는 않았겠지요. 훨씬 더 힘이 있는 형제 이름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매 뵈뵈만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바울의 서한을 들고 그 먼 거리를 간 인물은 자매 뵈뵈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형제도 아닌 자매인 뵈뵈에게 이 서한을 맡겼을까요. 그 지역 사람 수가 적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지명사전에 의하면 거기는 당시 고린도나 앞서 말씀 드린 겐그레아 항구들이 있어서 상업과 물질적인 번영을 누린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구 수 자체가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바울은 자신의 서한에 대한 가치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있어서 로마는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습니까. 이스라엘과 유럽을 비롯해서 그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심장부가 바로 로마인데, 여기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말하자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 내용은 어떻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혼란한 가운데에 있을 때 신약 시대에 있어서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이 서한이 무슨 사고로 인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도중에 유실된다고 한다면, 이는 복음전파는 고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혼란은 종잡을 수 없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요한 일을 감당할 인물로 바울이 자매 뵈뵈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는 사람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로마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바로 자매 뵈뵈야 말로 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웬만한 남자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임무를 자매인 뵈뵈한테 맡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매 뵈뵈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그 결과 로마에 이 서한이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이 귀한 로마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자매 뵈뵈는 정말로 놀랍고도 귀한 일을 해낸 인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요즘도 여성이 혼자 여행을 한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고 하는데, 당시는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녀의 노력은 분명 보상이 따랐을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2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どうか、聖徒にふさわしく、主にあって彼女を歓迎し、あなたがたの助けが必要であれば、どんなことでも助けてあげてください。彼女は、多くの人々の支援者で、私自身の支援者でもあるのです。”

이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사랑으로 주 안에서 그녀를 정중하게 맞아들이고 무슨 일이든지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때는 아낌없이 도와 주십시오. 그녀는 많은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나도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서한을 받은 로마 교회 사람들은 무사히 도착한 자매 뵈뵈에 대해서 여자라고 무시하거나 하지 않고 크나큰 대우로 그녀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도중은 험난했을 것입니다. 로마까지 가는 길에서는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오히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생명까지도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따랐을 것입니다.

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우리 인생 가운데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면, 쉽게 낙담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경우에 우리는 이 뵈뵈를 한 번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그 외로운 여정 가운데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로마로 향하던 뵈뵈.

그녀는 어쩌면 다음 성경말씀을 의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恐れるな。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たじろぐな。わたしがあなたの神だから。わたしはあなたを強くし、あなたを助け、わたしの義の右の手で、あなたを守る。

우리가 가는 그 길, 힘들고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굳세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強く、助けて、守って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고난과 역경을 뚫고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던 자매 뵈뵈의 믿음과 행함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마침내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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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6회 로마서 16장 서론
2023년 10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4절
“24.(없음)”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4節
“24.(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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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5번째 시간으로서 “로마서 16장 서론” ローマ人への手紙16章序論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드디어 로마서 마지막 장인 16장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혹시 마태복음 1장에 대해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렇게 해서 마지막 25절에서는 예수님이 기록됩니다.

이 마태복음 1장,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글을 처음 읽으면 참 지루하고 따분합니다만, 구약을 다 읽고, 그 흐름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읽으면, 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벌써 이렇게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계셨구나 하고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로마서 1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이 로마서 16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구약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를 무심코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가면 대단히 큰 은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16장 첫 시간이기 때문에 우선 16장에 대한 개론과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부터 알아본 다음에 세부적으로 들어가볼까 합니다.

15장까지는 이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16장은 왜 이렇게 살펴보아야 하는가 하면 이는 15장까지와는 다르게 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선 16장에 대한 개론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바울 서신을 보시면 마지막 부분에, 누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 16장은 많은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나마 골로새서 4장에도 많은 이름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기타 다른 서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구체적인 이름들이 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16장에 대해서 일부 신학자들은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로마서 16장은 그 전에 있는 15장까지와는 별개로 쓰여진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글의 흐름이 앞부분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들기도 하고,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몇몇은 분명 에베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앞서 15장까지는 로마에 있는 교회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16장은 로마가 아닌 에베소로 보내는 서한이 여기에 끼었다는 주장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로마서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구성의 차이에 있어서 무려 15종류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논쟁은 로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데, 1장부터 50장까지 있는 창세기는 사실 여러 가지 문서들이 조합된 것이라고 하는 이른바 문서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도 나누어진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을 접하면 제가 학부 때 전공서적을 공부하던 기억이 납니다. 뭐, 별로 열심히 공부한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맨날 보면 다수설, 소수설, 절충설……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뭐, 법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정답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봉건주의나 전제주의 같은 독재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민주주의 국가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면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선거제도가 공정하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지도자가 선출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국회의원들이 훌륭한 법률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3권분립이 있다고는 하나, 판사들이 항상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고 할 수도 없고, 행정시스템이 항상 공정하게 돌아기만 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엄격하게 본다면 정답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 시대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들이 변화 되어감에 따라, 법률도 변화되어가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이는 법학만이 아니라 문학이나 경제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은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명확한 정답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학은 이 부분에 있어서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학에 있어서는 명확한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이야말로 진정한 정답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문과 학문은 명확한 정답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요. 반면에 이과를 보면 정답이 딱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내가 800원짜리 물건을 사고 1000원을 내면, 이와 같은 경우 거스름돈을 얼마 주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학자마다 견해가 갈라지는 경우는 없을 거 아니에요. 당연히 200원을 거슬러 줘야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문과라기 보다는 이과에 가까운 학문, 명확한 정답이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에 대해서 자꾸 사람의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로회를 창시한 장 칼벵의 경우를 보면 그도 성경에 대한 주석을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주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칼벵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쓴 다른 신학자들에 비해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명확한 근거라는 것은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에 대한 문제는 성경으로 풀 수 있었을 때에 비로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경우에는 성경 66권 중에서 계시록을 제외하면 65권인데,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 나머지 65권 중에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보면 이는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신학에 있어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칼벵이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안 쓰겠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계시록도 어떻게든 끼어 맞추려고 했다면 충분히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이는 오히려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용기 없는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는 생각이 깊지 않은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 또는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예언자나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계시록이나 기타 성경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그것을 무슨 율법이나 십계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강요를 합니다.

이는 비단 사이비 지도자만이 아닙니다.

지난 10월 26일자 어떤 기독교 신문에 의하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더라고요.

주일 예배 드리면서 커피를 마셔도 되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까.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이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다음 성경구절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敬虔と恐れをもって、神に喜ばれる礼拝をささげ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이는 무엇입니까. 주일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을 헤친다는 것 아닌가요?

여기에 대해서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찬반의견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예배 때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교회가 무슨 영화관이냐. 예배 드리는 시간 정도는 커피를 안 마셔도 되지 않냐.” “커피도 중독이다. 예배 때는 마시면 안 된다”라고 해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의 어떤 대형교회 원로목사님도 예배 때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거들고 나섰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기사를 읽으니까 얼마 전에 읽었던 또 하나의 신문기사가 떠올랐습니다. 10월 23일자 기사였는데, 한국 어느 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내용이 뭐였냐 하면,

“목사가 된 다음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유혹이 하나 있다. 성경을 잘 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변할 수 있다”며 “본질적인 것에서 떠나선 안 된다. 목사가 되어 성경을 더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듣고 느낀 점은 뭐냐 하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판사 임명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축사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이제부터 법전을 열심히 읽도록 하세요. 라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있는 판사들이 법전을 제대로 읽고 있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판사님들이야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목사님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금 목사님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지 않으면 세상에 목사 안수식에 이런 말이 나오겠냐 하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은 신문기사 이야기를 계속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신문기사를 하나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다 요즘 읽은 기사입니다만, 이는 10월 24일자 신문기사입니다.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부분 4년제 대학을 나온 다음에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쳐야 그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학부 전공은 상관없이 일단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신학대학원에 지원을 할 수가 있는데, 작년에 보니까 신학과 학부과정 중에서 상당수가 미달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요. 뭐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꼭 학부를 신학과에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번 신문을 보니까 국내 대형 신학대학원이 대부분 미달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나마 한 곳만 1.4:1을 기록하면서 간신히 정원을 채웠고, 다른 대형 신학대학원들은 다 88%, 79%, 74%, 69%였고, 어디 한 곳은 정원의 18%만 지원을 한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대학교가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교수도 좋아야 하고 건물이나 시설도 그렇고 거기에 위치가 좋고 등록금도 싸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명문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명문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졸업생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 학교를 나온 졸업생들이 모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뛰어난 성과를 낸다고 한다면, 설령 등록금이 비싸거나 위치가 별로 좋지 않더라도 명문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인 경우는 좋은 대학들이 다 대도시에 있습니다만, 미국 같은 곳을 본다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은 대부분 사립대학이라서 등록금도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렇죠. 졸업생들이 쟁쟁합니다. 세계적으로 평가 받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거기를 들어가려고 몰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국의 신학대학원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누워서 침뱉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100프로 신학교를 나온 기존 목회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무엇을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문제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설교 시간 때라 하더라도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고,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도 성경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자기 멋대로 풀게 된다면 그게 이단 사이비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커피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건 미국 목사님의 말씀이었다고 하는데, 히브리서를 인용하면서 커피를 들고 예배 시간 때 들어오는 것이 경건하지 않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不義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不義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ます。

만약에 예배 시간 때 담배를 피운다거나 하는 것은 옆사람에게 민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술을 마신다는 것도 냄새가 날 수도 있고 그렇겠지요.

뭐,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예배시간 때 컵라면을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냄새도 나고 소리도 나고 그러니까 그 주변 사람한테 얼마나 민폐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요, 그저 예배 시간 때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는 성경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만 안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안 마시는 사람더러 비판할 수 있나요?

로마서 14장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만약에 예배 시간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생각도 비난 받아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신의 경건함을 헤치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자기가 안 마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의 경우 예배 때 넥타이를 꼭 매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만약에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는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만, 넥타이를 매지 않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거나 비난하는 일은, 이는 대단히 옳지 않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뭔데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이와 같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무슨 커피가 어쨌다거나 하는 말들이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요? 예,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가지고 남들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학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이는 인학도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잡학들이 교회에서 판을 칩니다. 그러니 누가 목사가 되려 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법대나 의대가 인기학과라고는 하지만, 그 나라 법조인들, 판사나 변호사들이 법을 너무나도 몰라요. 맨날 판결을 보면 엿장수 마음대로예요.

아니면 의사들이 너무나도 공부를 안 해요. 맨날 수술을 하고 주사만 놓으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요.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누가 법대나 의대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이건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지금 교회가 이런 상황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때문에 상처를 받고 다툼만 일어나요. 이러니 누가 목사가 되고 싶어하겠습니까.

구약에서도 보면 자기 생활을 절제하는 나실인의 경우를 본다 하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기가 스스로 결정을 해서 나실인이 되는 경우는 있지만,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보고 나실인이 되라고 해서 되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판사가 법을 모르면 무죄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의사가 의술을 모르면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목사가 성경을 모르면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상처를 입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ですから、私たちは、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사람의 생각을 개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내 생각으로 풀려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으로 풀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비난이 아니라 화평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제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이 로마서 16장에서도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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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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