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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1회 결산을 대비하는 믿음
2022년 5월 2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4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7절~28절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7節~28節
“27.イザヤはイスラエルについてこう叫んでいます。「たとえ、イスラエルの子らの数が海の砂のようであっても、残りの者だけが救われる。
28.主が、語られたことを完全に、かつ速やかに、地の上で行おうとしてお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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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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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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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4번째 시간으로서 “결산을 대비하는 믿음” 清算に備える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10장 22절~23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10장 22절~23절
“22.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たとえ、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が海の砂のようであっても、その中の残りの者だけが帰って来る。壊滅は定められ、義があふれようとしている。
すでに定められた全滅を、万軍の神、主は、全地のただ中で起こそうとしておられる。

구약에 있는 이 말씀 중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確かに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に祝福し、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海辺の砂のように大いに増やす。あなたの子孫は敵の門を勝ち取る。

그 당시에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이삭 하나만 있었을 뿐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가 아니라 후손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계획이십니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 애굽을 탈출한 인구 수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그 애굽에서의 혹독한 노예 생활 속에서도 남자만 60만명, 전체는 200만명이 넘게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지난 주에 호세아서의 내용을 바울이 인용하면서 본래 구약에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이를 이방인의 구원으로 해석한 부분을 말씀 드렸었지요.

가끔 보면 신약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지금의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로 자꾸 해석을 하면서, 세상 끝 날이 오면 지금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고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고, 새 예루살렘이 지금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에 어떻게 되고……이렇게 무슨 자신이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만이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뭐가 되냐 하면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뜻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무슨 말이 되냐 하면,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 봤자 소용이 없어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육신적으로 유대인이냐 아니냐, 유전자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이냐 아니냐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모두 용서 받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 영적인 유대인이며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 참 좋겠는데, 오늘 말씀은 그렇지 않아요.

로마서 9장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7.イザヤはイスラエルについてこう叫んでいます。「たとえ、イスラエルの子らの数が海の砂のようであっても、残りの者だけが救われる。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역시 육적인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이스라엘 자손,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모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 한 번 해볼까요? 나는 마지막 날에 반드시 구원 받아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신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저도 여러분의 믿음대로 되시기를 정말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을 한 번 믿으면 절대로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한 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100프로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어요.

사실 이렇게 저도 믿고 싶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오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만큼 많다 하더라도 그 중 일부만 구원을 받는다는 거잖아요.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전세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일부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구원의 확신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당시에 보시면 구원의 확신을 가장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한치의 의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칭찬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まむしの子孫たち、おまえたち悪い者に、どうして良いことが言えますか。心に満ちていることを口が話すのです。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구원 받은 천국 백성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국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처럼 심한 말씀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자부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은 그들을 겸손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을 싹트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은 마침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 그것만으로도 정말로 크나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믿음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교회에 오래 다니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 분들이 계십니다. 방언도 참 유창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맨날 마귀 얘기, 귀신 얘기, 꿈 얘기, 환상 얘기만 해요. 그럼 무엇이 없어요?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이 없어요.


주여~주여~ 하면서 믿음이 좋은 척만 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1번 금식을 많이 해야 안다. 2번 방언을 많이 해야 한다. 3번 기타.

예, 3번 기타입니다. 그럼 기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성경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성경도 모르고 어떻게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성경도 모르고 어떻게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성경도 모르고 어떻게 올바른 행함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올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단에 넘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알면 그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가 얼마나 엉성하고 형편없는지를 알 수 있는데,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을 들으면 그럴 듯하게 느껴지고, 마침내 넘어가서는 자신의 모든 재산도 빼앗기고 인생을 망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제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걱정 없어……라고 방심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날이 옵니다. 그 날이 무엇을 하는 날입니까. 그것은 바로 <결산하는 날>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ですから、天の御国は、王である一人の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人は自分の家来たちと清算をしたいと思った。

그 결산하는 날은 예고 없이 옵니다. 무엇처럼 온다고 하지요?

요한계시록 3장 3절 후반부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目を覚まさないなら、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わたしがいつあなたのところに来るか、あなたには決して分からない。


마태복음 24장 43절~44절
43.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次の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泥棒が夜の何時に来るかを知っていたら、家の主人は目を覚ましているでしょうし、自分の家に穴を開けら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때에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한번 결산해보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결산한다고 해서 단순히 계산기만 두드리는 것일까요? 그 결산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御前にあらわでない被造物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この神に対して、私たちは申し開きをするのです。


그 결산 앞에서는 누구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감출 수도 없습니다.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이 아무리 늦게 잡는다 하더라도 지금으로부터 2천년 가까이 전에 기록된 것인데, 그 때부터 ‘속히 오리니’라고 하셨으면서 아직도 안 오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이게 좀 이상하다 했는데,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자, 이제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셔서, 자, 여기까지. 이제 한 번 너의 일생을 놓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지 아닌지, 어디 한 번 결산해보자.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 그래, 내가 이 정도면 살만큼 살았고, 내가 천국 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글쎄요. 이렇게 장담 하실 수 있는 분이 얼마나 계실까요.

오히려, 그러지 않을까요. 아휴, 예수님, 잠깐만요. 벌써 오시면 어떡해요. 그렇잖아도 내가 내일부터 제가 정말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었어요.

내일부터 제가 성경 열심히 읽으려고 했었다니까요. 내일부터 전도도 열심히 하려고 했었어요.

아, 맞다. 그렇잖아도 내가 지금까지 밀린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마침 내일 다 내려고, 저기 봐요. 통장까지 다 꺼내 놨잖아요.

내일부터 제가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봉사하려고 했었다구요. 내일부터 제가……내일부터 제가……

아마도 그럴 분이 오히려 더 많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서 끝입니다. 여기까지다. 자, 하나하나 결산해보자.

여러분, 예수님은 언제 오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속히 오시는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예, 우리는 여유 부릴 틈이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구원 받았으니까 하면서 방심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오랜 세월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을 나오게 됩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본다면 죄악 속에 물들어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 것을 나타낸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여유롭게 애굽에서 나왔나요? 편안히 놀고 즐기다가 애굽에서 나왔습니까.

시간 관계상 다음 한 구절만 봅니다.

출애굽기 12장 11절
“11.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あなたがたは、次のようにしてそれを食べなければならない。腰の帯を固く締め、足に履き物をはき、手に杖を持って、急いで食べる。これは主への過越のいけにえである。


애굽을 탈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갈 준비를 하고 급히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급히 먹냐 하면, 그 때 잡은 어린 양을 구워서 급히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 양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人の子の肉を食べ、その血を飲ま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のちはありません。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 그 생명은 뼈에 있지 않고 살과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살아있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이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먹고 마시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애굽을 빠져나갈 준비, 말하자면 구원 받을 준비를 하고 서둘러 급히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이 구원의 순간에 대한 기록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에 천사들은 롯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19장 17절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彼らを外に連れ出したとき、その一人が言った。「いのちがけで逃げなさい。うしろを振り返ってはいけない。この低地のどこにも立ち止まってはならない。山に逃げなさい。そうでないと滅ぼされてしまうから。」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7절~18절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屋上にいる人は、家にある物を取り出そうとして下に降りてはいけません。
畑にいる人は上着を取りに戻ってはいけません。

이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 모양은 지붕이 평평해서 거기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붕 위에서는 기도도 했다고 성경에 기록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기도를 하려고 지붕 위에 갔다가 마지막 날이 임했을 때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가지 말래요. 그리고 밭에 있는 사람도 마지막 날이 임했을 때 겉옷을 가지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다 무엇입니까.

이는 구원의 날이 임했을 때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애굽을 빠져 나갈 준비를 하고 긴장을 한 상태에서, 마치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급히 양을 먹는 것처럼, 언제 결산하는 날이 와도 될 정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마지막 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42절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そのとき、男が二人畑に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女が二人臼をひいて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구원의 날에 일어날 이와 같은 일은 며칠 동안에 걸쳐서 천천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데려가는 사람들한테 번호표를 나누어 줘서 천천히 차례대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어떻게 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28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8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8.主が、語られたことを完全に、かつ速やかに、地の上で行おうとしておられる。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
“35.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天地は消え去ります。しかし、わたしのことばは決して消え去ることがありません。

예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모든 말씀을 다 해주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일들을 숨김 없이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때가 되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아이구,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랐어요. 내일부터 내가……내일부터 내가……그러시겠습니까. 아니요.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우리가 내 가족에게 내 이웃에게 말씀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내 가족을 내 이웃을 섬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 날을 대비하는 믿음, 결산을 대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제 그 날이 임하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언제나 결산을 대비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깨달으며, 주님께 순종하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해서, 크나큰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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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5 설교 - 로마서 강해 8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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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5절~26절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5節~26節
“25.それは、ホセアの書でも神が言っておられるとおり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民でない者をわたしの民と呼び、愛されない者を愛される者と呼ぶ。
26.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民ではない、と言われたその場所で、彼らは生ける神の子らと呼ば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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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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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3번째 시간으로서 “살아나는 영혼” よみがえるたまし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구약에 있는 호세아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호세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호세아 2장 23절
“23.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わたしは、わたしのために地に彼女を蒔き、あわれまれない者をあわれむ。わたしは、わたしの民ではない者に『あなたはわたしの民』と言い、彼は『あなたは私の神』と応える。」


호세아 1장 10절 후반부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民ではない」と言われたその場所で、彼らは「生ける神の子ら」と言われる。

사실 이 본문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이스라엘 자손들, 수많은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주시고,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뻑 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경고도 하고 그리고 징계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신다 하더라도 영원히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범죄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 호세아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오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를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들, 유대인에 대한 구원의 회복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 부분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지금 말씀 드린 것처럼 본래 호세아서의 본문은 범죄한 이스라엘 자손의 구원에 대한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오해해서 잘못 해석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면 또 모를까 특히나 사도 바울에 있어서는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본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가말리엘이라는 선생님 밑에서 조상들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역시 사도행전 5장 34절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당시 모든 백성에게 존경 받는 율법교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이는 쉽게 말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모세오경을 비롯해서 구약 전반에 걸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면 당시는 누구한테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선생님 밑에서 구약 전반을 배웠다는 것은, 이는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 명문대에서 율법을 철저하게 배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바울은 학업을 마치고 고등관리로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학교만이 아니라 관료로 임용되어서 말하자면 출세 코스를 달리고 있는 청년 엘리트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있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바울이 성경해석을 오해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는 본래 범죄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성경구절을 이방인에 대한 구원으로 해석을 했을까요.

한 예로 유명한 구절인 요한3서 2절을 말씀 드립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 중에서 요한3서는, 한국어 성경 중에서는 요한 2서에 이어서 두 번째로 짧지만, 원어로 보면 제일 짧은 책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길이로 인해서 성경의 중요성이 정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긴 성경은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 창세기, 에스겔……이렇게 되는데, 그러면 성경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150편까지 있는 시편이고, 1장까지 밖에 없는 요한 2서나 3서나 빌레몬서 같은 짧은 책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양이 많은 시편이나 제일 양이 적은 요한 2서나 3서라 하더라도, 이는 단순히 길이가 길고 짧을 뿐이지, 그 내용은 성경 66권 중에서 모두 똑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성경 중에서 원어로 본다면 가장 짧은 요한3서는 좀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는 요한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는데, 보통 편지라고 하면 그 핵심 내용이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면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안부인사이지요. 내용상으로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한 3서 2절도 보세요.

요한 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걸 쉽게 보면 뭐겠어요.

“너 잘 지내니? 하나님 잘 믿으면 네 영혼이 복 받아서 천국 가는 것처럼, 네가 평소에도 모든 일들이 잘 되고 건강하길 바랄게.”

뭐, 말하자면 그런 내용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단순히 요한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한테 하는 안부인사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신 분이 계시지요? 바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이십니다.

이를 단순히 안부 인사로 받아들이셨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 중에서 제일 짧은 성경인 요한3서, 그것도 안부 인사에 불과한 성경구절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 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모든 일들이 잘되고 강건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구나.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이 말씀으로 한국에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 호세아에 있는 말씀을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옛날 이야기로 방치했다면, 이 호세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말로만 해석하고 말았다면, 그 말씀은 어쩌면 우리에게 죽은 말씀이 되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미이라나 박제가 아닙니다. 신화나 전설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숨쉬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남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5절~26절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5節~26節
“25.それは、ホセアの書でも神が言っておられるとおりです。「わたしは、わたしの民でない者をわたしの民と呼び、愛されない者を愛される者と呼ぶ。
26.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民ではない、と言われたその場所で、彼らは生ける神の子らと呼ばれる。」”

이 말씀을 두 가지로 구분해 보기로 합니다. 25절에 보면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고,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6절에서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를 정리해 본다면 25절에서는 사람에 주목하고있으며, 26절에는 <그 곳>이라고 하시면서 장소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이를 불문하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지금 우리가 들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습니다만, 당시로 보면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얼마나 배웠는지, 그 사람의 배경이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 그 사람의 가치를 정해준다고 한다면, 그 외에도 어디에 사는 지에 대한 것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하겠지요.

하지만 당시는 이보다도 더욱 차별이 심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서로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차별이 허물어지고,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사람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한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컬음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와 연관이 없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아니에요. 당시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믿음 바깥에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육적으로는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고, 우리도 믿음을 같게 되어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높임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사야서 중에서 43장과 11장을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43장 19절~20절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하십니다. 이는 말 그대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광야나 사막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의 땅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안 믿는 과학자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들이 사실은 기적이 아니라면서, 이를 어떻게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과학적인 지식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입증을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애굽을 탈출한 성인남성 60만명, 남녀노소를 다 합친다면 대략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살 수 있었다는 사실, 이는 절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 지식으로는 증명을 할 수가 없어요.

광야라고 하는 곳은 그야말로 죽은 땅입니다. 무엇보다 비가 내리지 않아요. 그러니 식물이 자랄 수가 없지요. 햇빛을 막을 만한 그늘조차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며칠을 버틸 수가 없지요. 그런데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40일도 아니고 40년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능력 말고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광야에 사막에 강을 낸다고 하세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죽은 땅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죽은 광야 땅에 길이 나고, 죽은 사막 땅에 강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곳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죽은 영혼,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 줄 알았던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광야에 길이 났어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와, 신기하다! 하고, 박수만 치겠습니까.

우리 앞에 어려움이 처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길을 내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에 우리 앞에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보고 박수만 쳐요?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출애굽기 14장 1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主はモーセに言われた。「なぜ、あなたはわたしに向かって叫ぶのか。イスラエルの子らに、前進するように言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 홍해를 갈라 길을 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만 하고 있겠습니까. 주여~주여~만 하고 있으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목이 말라요. 정말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만 같아요.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서 물이 콸콸콸콸 넘쳐납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에 호수가 생기고 강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목이 마른데 그냥 놀라고 박수만 치고 있어요?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을 어서 마셔야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지쳐 쓰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내어 앞으로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가 가야할 곳은 바로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땅, 예수님이 인도해주시는 땅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요. 단순히 물리적이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 있을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친인척이라고 한다면 가까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중에서 본다면, 아, 누구는 잘하면 예수님을 믿을 것도 같은데, 또 그 중에는, 다른 사람은 믿어도 그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있지 않으세요?

그야말로 온 천하 만민이 다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그 사람만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거야. 하늘이 두 쪽 나도 그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거야


자, 오늘은 그 사람을 한 번 우리 마음 안에 품어 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한테 아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교회로 데려오라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 그 사람을 품고, 기도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보세요. 하나님을 절대로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잖아요. 완전히 죽은 땅을 하나님께서 강을 내고 물을 내어서 살리신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한번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렇죠. 물이 있으면 물을 떠다 주고, 길이 열리면 건너가서 함께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바싹 말랐던 우리 마음이 옥토로 변하고, 금이 쫙쫙 갈라진 그 땅이 살아나는 것처럼, 그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안에 천국이 임하는 역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그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11장 6절~8절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狼は子羊とともに宿り、豹は子やぎとともに伏し、子牛、若獅子、肥えた家畜がともにいて、小さな子どもがこれを追って行く。
雌牛と熊は草をはみ、その子たちはともに伏し、獅子も牛のように藁を食う。
乳飲み子はコブラの穴の上で戯れ、乳離れした子は、まむしの巣に手を伸ばす。


이와 같은 일은 실제로 본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길을 갈 때, 양과 이리가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서로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실천할 때에, 마른 땅이 살아나고 마른 영혼이 살아나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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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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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9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2022년 5월 8 설교 - 로마서 강해 82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2절~24절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2節~24節
“22.それでいて、もし神が、御怒りを示してご自分の力を知らせようと望んでおられたのに、滅ぼされるはずの怒りの器を、豊かな寛容をもって耐え忍ばれ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23.しかもそれが、栄光のためにあらかじめ備えられたあわれみの器に対して、ご自分の豊かな栄光を知らせ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24.このあわれみの器として、神は私たちを、ユダヤ人の中からだけでなく、異邦人の中からも召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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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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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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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2번째 시간으로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耐え忍ば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구절입니다만, 먼저 앞에 있는 두 구절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한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2절~2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2절~23절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2節~23節
“22.それでいて、もし神が、御怒りを示してご自分の力を知らせようと望んでおられたのに、滅ぼされるはずの怒りの器を、豊かな寛容をもって耐え忍ばれ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23.しかもそれが、栄光のためにあらかじめ備えられたあわれみの器に対して、ご自分の豊かな栄光を知らせ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자, 본문 이해에 앞서 우선 여기에 나와 있는 단어부터 간단하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2절과 23절에는 각각 <진노의 그릇(怒りの器)>과 <긍휼의 그릇(あわれみの器)>이라는 두 그릇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를 단순한 그릇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개역개정성경 외에 역시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온 새번역 선경에 의하면 <진노의 그릇>은 <진노의 대상>으로, 그리고 <긍휼의 그릇>은 <자비의 대상>으로 번역되어 있고,

한편 생명에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여긴 좀 길어요.

<진노의 그릇>은 <멸망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로, 그리고 <긍휼의 그릇>은 <영광을 받도록 미리 준비하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등장하는 <그릇>이라고 하는 단어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바꾸어 본다면, <진노의 그릇>은 <아직 구원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 <긍휼의 그릇>는 <이미 구원을 약속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어떨까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진노의 그릇>은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람들, 아직 구원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 아직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긍휼의 그릇>은 이미 구원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 이제 정리가 되셨죠? 그럼 여기서는 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살펴본다면, 먼저 22절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인을 벌하셨던 것을 알 수 있지요. 때로는 한 개인이나 가족을 벌하시기도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도시, 한 나라, 그리고 한 민족을 벌하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느 <진노의 그릇>, 아직 죄사함을 받지 못한 어떤 죄인을 보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이런 나쁜 놈이 있나. 내가 당장 벌을 내리리라……라고 생각하시고는 벌을 내리시려고 했습니다.

어? 그런데 그 순간 너무나도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참자……라고 하시고는 심판을 하려고 하셨던 그 팔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 다음에 23절을 보시면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하시려던 팔을 내려놓으신 이유에 대해서 적혀 있습니다.

23절에 의하면 이제 앞으로 영광 받기로 예비되어 있는, 이제 앞으로 구원 받기로 약속 되어 있는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를 더 쉽게 줄여서 말씀 드리자면, 지금 어느 죄인을 심판하다가 참으셨어요. 그 이유는, 그 죄인이 이뻐서가 아니라, 이미 믿음이 있는 우리 보라고 심판을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라고 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보시면 참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뭐, 지금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말씀하실 필요는 없으시겠지만,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해서 우리 주변에 정말 나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도 정말 나쁜 사람들을 보면 그러잖아요. 아휴, 귀신들은 저런 놈들 잡아가지 않고 뭐하나……그런 말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 믿음이 없는 사람들만 하나요? 아휴, 참 주님은 왜 저런 인간들을 빨리빨리 데려가서 심판하지 않으시고 저렇게 그냥 내버려 두실까…… 그런 생각 솔직히 해보신 적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우리 보라고 죄인들을 향한 심판을 참으신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약성경 중에서 한 권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서입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만, 부끄럽게도 성경을 한 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통독해 본 것이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냥 교회에만 다녔어요. 설교만 들었어요. 그리고 몇몇 성경구절과 찬송가만 알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이 서른이 되고서 성경을 읽는데, 그러면서 든 생각이 아, 나는 정말 초신자였구나. 성경을 정말 알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때까지 <하박국>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했어요. <오바댜> <스바냐> 라는 성경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 때까지 제가 얼마나 엉성한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처음 성경을 통독할 때에 인상 깊었던 것이 <요나>서였습니다. 요나서는 고작 4장 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었습니다만, 저는 처음 읽었을 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다고 하면 좀 고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처음 요나서를 읽고 난 다음에는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어쩌면 사람의 심리를 이처럼 절묘하게 묘사했을까 하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요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 이름입니다. 요나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요나에게 말씀을 하세요.


요나 1장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니느웨에 가서, 너희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다 아신다. 이렇게 외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만 보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요. 사람이 와서 지금 당장 어디에 가서 걸어 다니면서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하면 주저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요나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정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을 쳐요.

누구는 이 모습을 보고서 요나를 겁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글쎄요. 그 비판이 이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이처럼 도망을 친 사람은 성경 어디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요나가 도망 쳤어? 그럼 어쩔 수 없지……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나를 택하셨습니다. 이는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도망을 간다고 하나님이 계획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부름을 뿌리치고 배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배가 풍랑을 만나요. 그 때 함게 배에 타고있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해보려고 짐을 다 바닷속으로 던져요. 그래도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만 같아요.

그래서 거기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 풍랑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제비를 뽑아보자 했더니만, 요나가 뽑히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요나한테 묻습니다. 당신 도대체 누구냐. 당신이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이토록 폭풍이 불어서 우리가 죽게 되었느냐 하고 다그칩니다.

그러면 그 이유를 요나가 모르겠습니까. 그가 말합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러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요나를 비난합니다. 너 왜 그랬냐. 너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잖아. 자,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살겠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요나가 하는 말이, 자기가 불순종해서 배가 뒤집히게 생겼으니까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어떻게 생사람을 바다에 던지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든지 배를 좀 안정시켜보려고 하지만 폭풍이 더 심해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요나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그를 바다로 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만 거짓말같이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잔잔해 졌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제 바다 속으로 빠져든 요나는 물에 빠져서 죽었느냐 하면,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 하셔서 물에 빠진 요나를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는 어땠을까요. 아이구. 바다에 빠진 것도 모자라서 물고기 머깃감이 되었구나. 이제는 정말 죽었다……싶었겠죠. 그런데 좀 이상해요. 그런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 소화액이 얼마나 독합니까. 금새 죽고 녹아버려서 물고기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데 아무리 있어도 멀쩡해요.

해도 없고 불빛도 없는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지, 왜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바닷속으로 내던짐을 당했는지, 그것도 모자라서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되었는지 ……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내리신 사명을, 너는 니느웨에 가서 머지않아 임하게 될 심판을 선포하라고 하는 명령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이토록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살려 두셨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더니만, 하나님께서는 3일 만에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셨습니다. 그게 어디였겠습니까. 성경에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니느웨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쉽게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예, 사람이란 좀처럼 안 바뀝니다.

이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아, 이름이 비둘기라고 할 정도이니까 요나는 참 온순했을 것이다……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데, 아니, 생각해보세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갓난아기일 때에 붙여지는 것인데, 이름이 비둘기라고 해서 꼭 비둘기처럼 온순한 어른이 되라는 법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 요나. 꽤 성깔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저는 요나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참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를 본다면, 어쩌면 내가 요나라도 똑같이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 요나는 이제 지난 날들을 회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나에게 임했어요. 그래서 순종하기 싫다고 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폭풍을 만나서 바닷속에 던져졌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물고기한테 먹혔습니다. 그런데도 안 죽고 3일 동안이나 살아있었어요. 그것 만도 신기한데 3일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여기까지 본다면 아무리 불순종하는 요나라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알았어요. 니느웨에 가겠습니다. 갈게요. 가면 될 거 아니에요.

이제 그는 니느웨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왜 니느웨에 가기 싫어 했을까요. 왜 니느웨에 가서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기 싫어 했을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앗수르는 상당히 위협적인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앗수르는 빨리 망해버려야 마땅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요?

그건 마치 일제 시대 때 독립을 바라고 있는 조선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는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러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당시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 사람한테 있어서는 일본이 빨리 망하는 것이 소원이고,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한테 있어서는 러시아가 곤경에 빠져서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 무자비한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가 천벌 받기를 원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요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그냥 심판하시려면 심판하실 것이지, 굳이 요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니느웨에 가서, 너희 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 라고 말을 했다가, 니느웨가 회개해서 멸망하지 않으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3일 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선포합니다.

요나서 3장 3절에 의하면 니느웨의 넓이는 3일 동안 걸어 다녀야 할 정도였다고 해요. 그래. 딱 3일만 내가 선포하자. 그걸로 나는 순종한 거 아니냐.

어쩌면 요나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딱 3일만 순종하기로 하고 거리에서 외치기 시작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입니다만, 그렇다고 열심히 외쳤겠어요? 그냥 뭐, 정말 지극히 형식적으로만 외쳤지 않았을까 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3일은 고사하고 딱 하루 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야야, 어떤 사람이 니느웨에 심판이 임한다고 했대. 어. 그래? 야, 이거 큰일났네. 그러면서 이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더니,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하면서 회개를 하기 시작 하더랍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그 소문이 당시 니느웨 왕의 귀한테 들어갔더니만, 왕이 아예 공문을 내리고 선포하기를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까지 금식을 하게 만들고는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그 내리시려던 심판을 결국 거두시게 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믿음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기뻐할 일이지요. 자기가 복음을 전했는데 거기 백성들이 모두 다 회개를 하고 멸망을 면한 것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이 당시 요나가 머릿속에 그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에서 심판을 선포하는데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요. 그랬더니 결국은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져서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게 되는 것을 상상하지 않았을까요.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지,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고, 그리고 적대국인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위기는 해소가 되고, 그리고 여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이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가 요나라고 하는데, 그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니느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뭐 이러면 와, 요나 선지자도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이제 요나 선지자님의 말씀을 잘 들여야겠다……이렇게 요나의 이름값도 올라갈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는 어떻게 되었어요.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이렇게 되니까 결국 니느웨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도 않고, 이스라엘에 대한 위기도 해소되지 않고, 그리고 자기 이름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자, 요나는 이제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하나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도망 갔었던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요나는 집으로 돌아갔느냐……하면, 아니에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또 몰라. 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다가 말고 또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져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니느웨 인근에 초막(仮小屋)을 짓고는 언제 망하나 하고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막이 별거 였겠습니까. 나뭇가지를 엮어서 대충 만든 엉성한 작은 집이었겠지요.

거기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니까 햇빛이 뜨거웠나보죠? 나무들을 엮어서 만든 지붕 사이로 뜨거운 햇빛이 새어 들어오니까, 하나님께서 지붕에 박넝쿨을 나게 하시고는 햇빛을 가리게 해주셨어요. 그러자 그러잖아도 더웠던 참이었는데 박넝쿨 덕분에 시원해 졌으니까 요나가 참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랬더니 새벽에는 하나님께서 벌레로 하여금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어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침이 되었더니 뜨거운 햇빛이 내리 쪼입니다. 너무 뜨겁고 더워서 정신이 혼미해 집니다. 너무도 힘들고 괴로우니까 하나님한테 화를 내면서 기도하기를 차라리 죽여달라고 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시다.

요나 4장 10절~11절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主は言われた。「あなたは、自分で労さず、育てもせず、一夜で生えて一夜で滅びたこの唐胡麻を惜しんでいる。
ましてわたしは、この大きな都ニネベを惜しまないでいられるだろうか。そこには、右も左も分からない十二万人以上の人間と、数多くの家畜がいるではないか。」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야, 요나야. 너는 네가 심지도 않고 물도 주지도 않은, 그깟 박넝쿨 하나가 있었다가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는데, 니느웨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12만명이나 살고 있어. 그 뿐이 아니라 가축들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들을 내가 아끼는 게 그렇게도 네 마음에 안 든단 말이냐.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래?”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것은 쉽습니다. 다 없애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차라리 그게 더 깔끔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게 어려우시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한순간에 멸망시키셨던 분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노아의 방주 안에 탄 사람들과 짐승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과 땅과 하늘에 사는 모든 짐승들을 한꺼번에 멸망시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 있어서 니느웨 같은 도시 한 두 개 없애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회개하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시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요? 물론 니느웨 사람들 자신들을 위해서일 수도 있겠으나, 오늘 본문에 보시면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9장 23절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3.しかもそれが、栄光のためにあらかじめ備えられたあわれみの器に対して、ご自分の豊かな栄光を知らせ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すか。

긍휼의 그릇, 그러니까 구원이 약속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그와 같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려고 하셨을까요.

성경에 보시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이제 애굽을 탈출해서 선택 받은 백성이 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3장 9절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あなたは寄留者を虐げ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たはエジプトの地で寄留の民であったので、寄留者の心をあなたがた自身がよく知っている。


신명기 10장 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あなたがたは寄留者を愛しなさい。あなたがたもエジプトの地で寄留の民だったからである。

참 은혜로운 말씀 아니십니까. 너, 오갈 데 없는 사람들 무시하지 마. 구박하지 마. 너희들이 애굽에 있을 때를 생각해봐. 사람 취급도 못 받았잖아.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웠어. 그 때를 기억하고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죄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 하물며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했던 사람들,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해서 저주를 바라고 심판을 바라는 대신,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도 역시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셨더라면, 그보다도 훨씬 먼저 우리에게 저주와 심판이 내려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머리 위에 무서운 저주와 심판을 내리시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와 심판을 누구 위에 내리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위에 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심판을,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받아 주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4절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4.このあわれみの器として、神は私たちを、ユダヤ人の中からだけでなく、異邦人の中からも召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구약에서는 이방인에게 믿음이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이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육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면서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는 육적인 유대인에 한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 받는 영적인 유대인인 우리 자신들도 이제 영적인 이방인을 향해 이 주님의 복음, 주님의 은혜, 그 영광의 풍성한 사랑을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이웃의 저주를 바라는 대신 축복을 바라고, 멸망을 바라는 대신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셔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널려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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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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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8회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
2022년 5월 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1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9절~21절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9節~21節
“19.すると、あなたは私にこう言う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神はなおも人を責められるのですか。だれが神の意図に逆らえるのですか。」
20.人よ。神に言い返すあなたは、いったい何者ですか。造られた者が造った者に「どうして私をこのように造ったのか」と言えるでしょうか。
21.陶器師は同じ土のかたまりから、あるものは尊いことに用いる器に、別のものは普通の器に作る権利を持っていないの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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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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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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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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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1번째 시간으로서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 尊く造られた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조금 어려운 내용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내용을 복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은 출애굽기에 대한 내용이었지요?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이 애굽 왕 바로한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당장 내보내라고 말하지만, 바로 왕은 끝까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지난 주에 공부하기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18절로 마무리를 하지요. 18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8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ですから、神は人をみこころのままにあわれみ、またみこころのままに頑なにされるのです。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뿐 아니라 완악하게 하실 자도 완악하게 만드시는 경우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기지요. 그것이 바로 19절입니다.

로마서 9장 19절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19.すると、あなたは私にこう言うでしょう。「それではなぜ、神はなおも人を責められるのですか。だれが神の意図に逆らえるのですか。」

이 말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음? 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히 보내셔서 애굽 왕 앞에 세우시고, 그리고 왕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면, 바로 왕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우리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더러 죄를 짓게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를 죄인 취급하신다? 이건 좀 너무 하잖아? 라고 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자칫 운명론이라고 하는 어설픈 함정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운명을 바꿀 수가 없어. 그저 하나님의 꼭두각시에 불과해 ……. 뭐, 이렇게 어설픈 주장을, 꽤나 대단한 철학이나 사상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그러니까 완악하게 된 애굽 왕에 대한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생각해 볼 점은 바로 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게 하신 바로를 전도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하시기를 원하셨고, 그 목적을 위해서 바로 왕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죄를 짓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순종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 바로에게 있어서는 순종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셨던 모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을 뿐이지만, 그는 그렇다고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심각한 죄를 범하도록 하지는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부러 죄를 짓게 하셨다는 일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더러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우리더러 죄를 짓게 만들어놓고는 왜 우리를 탓하느냐 하는 주장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어설픈 주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리고 다음 구절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내용을 언급합니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에 대한 내용이 종종 나옵니다.

예레미야 18장 3절~4절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私が陶器師の家に下って行くと、見よ、彼はろくろで仕事をしているところだった。
陶器師が粘土で制作中の器は、彼の手で壊されたが、それは再び、陶器師自身の気に入るほかの器に作り替えられた。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보면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녹로라고도 하고 돌림대라고도 하는 것 위에 진흙을 올려놓고는 돌려가면서 그릇을 만드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릇을 만들고 있는데, 진흙이 사람더러 나를 이렇게 만들어라 저렇게 만들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만들 그릇의 크기나 모양, 그리고 어디에 쓸 그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흥미롭지요?


20절~21절입니다.

로마서 9장 20절~21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0.人よ。神に言い返すあなたは、いったい何者ですか。造られた者が造った者に「どうして私をこのように造ったのか」と言えるでしょうか。
21.陶器師は同じ土のかたまりから、あるものは尊いことに用いる器に、別のものは普通の器に作る権利を持っていないのでしょうか。

이 말씀을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오해하실 수가 있냐 하면요. 이봐, 매사에 불평 불만을 말하지 마. 너를 귀한 그릇으로 만드시든 천한 그릇으로 만드시든,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일이니까 잘났건 못났건, 넉넉하든 부족하든, 그냥 너 생긴 대로, 네 팔자 대로 살아.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서, 이 또한 그야말로 어설픈 운명론처럼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것과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명하니 한 평생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침노한다는 것은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기울여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하여 순종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그냥 네가 귀한 그릇이든 천한 그릇이든 불평하지 말고 네 팔자 대로 살아라……가 아니라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푸는 힌트는 디모데후서에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ですから、だれでもこれらのことから離れて自分自身をきよめるなら、その人は尊いことに用いられる器となります。すなわち、聖なるものとされ、主人にとって役に立つもの、あらゆる良い働きに備えられたものとなるのです。

오늘 본문에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 이렇게만 나왔는데 디모데후서에는 여러 가지 그릇의 비교가 나옵니다.

먼저 금 그릇과 은 그릇,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나오지요. 그리고 역시 오늘 본문처럼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이는 바로 육의 눈과 영의 눈으로 분류를 해보면 금발 알 수 있습니다.

금 그릇이냐, 은 그릇이냐. 나무 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은, 육의 눈으로 본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그릇을 만든 주인이 그 그릇들을 무슨 용도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새로 컴퓨터를 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양을 보면 그 컴퓨터가 얼마나 가격이 나가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컴퓨터를 산 사람이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요. 정말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해서 구입했을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비싼 컴퓨터를 사 놓고는 밥상으로만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컴퓨터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까.


그릇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이라 하더라도 막상 그 주인이 그 그릇을 어디에 쓸 것인지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안 쓰고 창고에 넣어두고서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전혀 가치가 없는 그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만들었든지 불평불만하지 말고 그냥 입다물고 생긴 대로 살아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우리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지불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만큼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렇게나 만드셨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기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큰 부품도 있고 작은 부품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큰 부품은 귀하고 작은 부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가요?


그렇지가 않지요. 아무리 큰 부품들이 멀쩡하다고 해도 작은 나사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로 인해서 기계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아, 정말 내가 부모 잘 만나서 부자였다면 정말 멋진 인생 한 번 살아보는 건데, 작은 나라가 아니라 미국이나 그런 큰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시골이 아니라 대도시에서 자랐더라면,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또는 반대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태어났었더라면 정말 멋지게 한 번 살아보는 건데……이런 생각 아마도 많은 분들이 해보셨을 것입니다.

뭐, 상상이야 자유이니까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생각을 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허탈해 지고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 잘못 만나서, 내가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내가 돈이 없어서……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평불만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한테 따지지 말라고 그래요.

아……그러면 그나마 성경을 읽으려다가도 소망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만드시고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빛을 만드시고도,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도, 채소와 나무들을 만드시고도, 태양과 달을 만드시고도, 짐승들을 만드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神は良しと見られた)”라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는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보시기에 좋았더라(神は光を良しと見られた)”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에이, 괜히 만들었다”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위해서, 땅과 바다나 나무들과 짐승들을 위해서, 하물며 태양이나 달을 위해서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우주 천하 만물보다도 귀한 예수님의 피를, 바로 우리를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모두 흘리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보았을 때, 그릇으로 본다면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가 않아요? 싸구려 형편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나요?

아,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참 값없는 인생을 살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나요? 남들은 참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가 있으신가요?

자, 우리 앞에 어떤 그림이 있습니다. 화려한 색을 겹겹이 칠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연필로 쓱쓱 그린 그림입니다. 크기도 별로 크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 그림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그림 구석에 조그맣게 적힌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작은 글씨로 “피카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그림의 가치가 얼마나 크게 뛰겠습니까.

이사야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64장 8절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しかし、今、主よ、あなたは私たちの父です。私たちは粘土で、あなたは私たちの陶器師です。私たちはみな、あなたの御手のわざです。

이 본문에 의하면 토기장이는 주님이고 우리는 진흙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가치가 없어 보이십니까. 남들은 귀한 그릇처럼 보이고 나는 천한 그릇처럼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른바 명품 브랜드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익히 아는 아주 비싼 물건들을 만드는 곳에서 천한 상품을 만들겠습니까. 아닙니다. 고급 상품만 만듭니다. 저 같은 비전문가가 보면 저걸 어디에 쓰라고 만들어 놓은 거야? 라고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명품 브랜드가 만든 이상, 천한 데 쓰라고 만들어 놓은 것은 없어요. 다 고급 용도로 쓰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들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 아무리 값비싼 명품 브랜드다 하더라도 하나님, 예수님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명품 물건들도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만큼 가치가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천한 그릇으로 만드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천한 그릇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뿌려진 예수님의 피를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만이 아니에요. 항상 말씀 드리지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다면, 그것은 바로 나만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서도 쏟으신 예수님의 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귀한 그릇으로 쓰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귀하게 만들어진 그릇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하여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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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7회 되돌아 보는 믿음
2022년 4월 24 설교 - 로마서 강해 80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7절~18절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18節
“17.聖書はファラオに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18.ですから、神は人をみこころのままにあわれみ、またみこころのままに頑なにさ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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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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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0번째 시간으로서 “되돌아 보는 믿음” よく考える信仰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당시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노예생활을 겪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3절~14절
“13.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それでエジプト人は、イスラエルの子らに過酷な労働を課し、
漆喰やれんが作りの激しい労働や、畑のあらゆる労働など、彼らに課す過酷なすべての労働で、彼らの生活を苦しいものにした。

참으로 힘든 고난의 세월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시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에서 지내는 모세를 불러 내셔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내라고 하는 크나큰 사명을 주시지요.

이에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에굽 왕 앞에 섭니다.

출애굽기 7장 7절에 의하면 당시 모세의 나이는 여든이고, 형인 아론의 나이는 여든 셋이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두 할아버지에게 이 막중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자, 이제 두 어르신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출애굽기 5장 1절~2절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その後、モーセとアロンはファラオのところに行き、そして言った。「イスラエルの神、主はこう仰せられます。『わたしの民を去らせ、荒野でわたしのために祭りを行えるようにせよ。』」
ファラオは答えた。「主とは何者だ。私がその声を聞いて、イスラエルを去らせなければならないとは。私は主を知らない。イスラエルは去らせない。」


애굽 왕 바로를 만나서 하는 말이, 지금 당장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고 말합니다.

앞서 잠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극심한 노예 생활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만, 애굽 입장에서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노동력입니다. 시민이 아니라 노예이니까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월급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3권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 끔찍한 일이지만, 애굽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편리한 도구였던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었냐 하면 출애굽기 12장 37절에 의하면 성인 장정만 보더라도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두 할아버지가 와서, 그들을 내보내라고 한다고 해서 애굽 왕 바로가 “아이구 그러세요”하고 순순히 내보내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로 왕을 처음 만나기 전부터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21절 후반부
“21.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しかし、わたしが彼の心を頑なにするので、彼は民を去らせない。

이 말씀은 애굽에서 아직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 정도가 아니라, 아직 모세와 아론이 애굽으로 출발하기 전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왜 굳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려고 하시는 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7절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
“17.聖書はファラオに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출애굽기 9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9장 16절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しかし、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여기서 “나”는 하나님이시고, “너”는 애굽 왕 바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를 애굽 왕으로 앉힌 이유는, 네가 이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애굽 왕에게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을 순순히 내보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두 할아버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애굽 왕은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출애굽기 5장 4절 이후에 보면, 일을 하는 조건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당시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벽돌을 사용했는데, 수많은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 벽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벽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흙에다가 지푸라기를 섞어서 굳힌 것을 사용했는데, 그 때까지는 애굽 사람들이 지푸라기를 모아다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면, 그들이 그걸 가지고 벽돌을 만들고 있었는데, 모세의 말에 화가 난 바로 왕은, 야, 이제부터 지푸라기를 가져오는 일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시켜. 하지만 만들어내는 벽돌 수는 줄이지 말고 똑같이 해야 돼. 이렇게 명령을 합니다.

아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푸라기를 모아오게 되면 그만큼 벽돌을 만드는 일손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돌 수를 똑같이 맞추라고 하면 이는 상당히 곤란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수를 못 맞추니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때립니다.

이처럼 고난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미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노가 누구를 향하게 되겠습니까. 바로 모세와 아론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장 21절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彼らは二人に言った。「主があなたがたを見て、さばかれますように。あなたがたは、ファラオとその家臣たちの目に私たちを嫌わせ、私たちを殺すため、彼らの手に剣を渡してしまったのです。」

야, 그냥 이렇게 살게 내버려둬. 아니, 지금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엉뚱한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드느냐, 하고 모세한테 따지는 것이지요.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지금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나요. 아니요. 따랐습니다.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있어서는 애굽이 적군이라고 한다면,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군이잖아요. 그런데 애굽 왕이 모세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도 싫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의 걸음, 순종의 걸음을 멈추면 안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있어서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주여 믿습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자, 우선 단순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칩니다. 정말 참고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에요. 그럴 때 “주여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한다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소불위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기도인 것이지요.


물론 그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전부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왕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게 되지요.

이 때 우리가 “믿습니다” 하고 기도를 한다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를 빨리 애굽에서 내보내달라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보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첫번째, 두번째 재앙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애굽 왕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번째, 네번째…… 이렇게 재앙은 계속되지만 애굽 왕 바로는 여전히 완고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해왔었다면 이제 서서히 지쳐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기도를 했다고 해봐요. 다섯 번째, 여섯 번째까지도 “믿습니다…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를 내보내 주지 않습니다. 이제 여기 쯤 되면 기도하던 사람들 중에서는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지요.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이, 기도를 해 봤자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나 보다. 그래서 포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기에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첫째는, 대단히 인내심이 강한 분이시죠.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렇게 해서 끝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두 번째 사람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저 밤이나 낮이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 기도는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소망을 갖는 것이 기도 아니겠습니까.


전도서 7장 14절을 봅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형통한 날에는 기뻐해야지요. 하지만 이 기쁨은 단순히 그냥 아이고 좋아라 하는 것만이 아니라, 형통케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 기뻐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참 심오합니다. 곤고한 날, 고난이 닥칠 때에는 금식하고 철야하라……가 아니라 “되돌아보아라”라고 되어 있어요. 개역한글에는 이 부분이 “생각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두 번째 사람은 바로 “되돌아보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되돌아보아야 할까요. 물론 지금 고난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회개할 일, 하나님이나 이웃에 대해서 회개할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어서어서 회개하고 화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내가 무슨 이와 같은 고난을 겪을 만한 죄를 지은 것 같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와 같은 고난을 허락 하셨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주여! 믿습니다!”하면서 힘들게 흔들었던 두 손을 잠시 내려놓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잠시 생가해보자는 것이지요.

우리 한 번 운전을 하는 데에 있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텔레비전 같은 곳에서 보면 광활한 벌판에, 커브도 없이 일직선으로 쫙 뻗은 도로를 보면, 와, 정말 한 번 달려보고 싶다……이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길을 조금 달리면 정말 참 지루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때, 미국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랜드캐년을 버스로 가 봤었거든요. 정말 참 지루하더라고요. 아무리 달려도 바깥 풍경이 바뀌질 않아요. 앞에 보면 정말 일직선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주위에는 허허벌판이에요. 그나마 커브를 하고 그러면 풍경이 바뀌기라도 하겠는데, 그냥 일직선으로 가기만 하니까 그나마도 안 바뀝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무슨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아무리 달려도 그 자리에서 안 움직여요.

미국 특히 서부에 보면 이런 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있는 자동차에 보면 특이한 기능이 있어요. 아마도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고급 차는 이런 기능이 있는 자동차들이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직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그런 차를 타본 적이 없는데, 미국에 보면 웬만한 차들에는 다 있는 기능이 뭐냐 하면, 자동차가 달리다가 속도를 고정해주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100킬로로 달리고 있으면서 거기에 딱 맞춰서 고정을 시켜놓으면, 내가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어놓아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이상 그 고정시켜 놓은 속도로 계속 달리게 됩니다.


이 기능이 정말 그런 일직선 도로를 달릴 때에는 꽤 편하거든요. 왜냐하면 계속 똑 같은 힘으로 발에 힘을 추게 되면, 자칫하면 쥐가 나기도 합니다. 다리가 막 뻐근해 집니다. 그래서 어차피 앞에 차도 안 보이고, 길은 일직선이고 하면, 딱 고정을 시켜 놓습니다. 그러면 발도 편하고, 그리고 또 지나치게 밟아서 과속을 할 위험도 없지요.

그런데 이제 발도 뗀 채로 운전을 하다 보면 정말 할 것이 없거든요. 커브도 없으니까 핸들도 별로 움직일 필요가 없어요. 그럴 때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졸음 운전인 것이지요.


차가 막히지도 않아요. 신호등도 없어요. 오른쪽 왼쪽으로 꺾어지지도 않아요. 사실 이렇게 보면 운전하기에 제일 좋은 조건처럼 보입니다만, 이럴 때 졸음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만에 하나 깜빡 조는 바람에 도로에서 벗어났다고 쳐요. 그래도 그런 도로에서는 뭐 주위에는 건물도 없으니까 빨리 멈추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면 자동차는 속도가 줄어 들잖아요. 그렇게 되면 그나마 대형사고는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속도를 고정시켜 놓았다고 생각해보세요.

100킬로로 고정을 시켜 놓았다면 졸음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100킬로로 달립니다. 그러다가 길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면, 도로가 아닌 곳을 100킬로로 달리게 돼요. 그러면 차가 온전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99%도 아니에요. 100% 목숨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도 운전을 하면서, 특히 피곤한 상태에서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면 졸음이 막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잠시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두고 눈을 붙이는 게 최고지요.

하지만 잠을 자지도 않았는데 잠이 깰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던 경험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어떤 때였냐 하면, 자동차 기름 부족 램프가 켜졌을 때에요. 당장 기름을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주유소가 안 보여요. 그렇게 되면 정말 졸렸던 눈이 빤짝빤짝 해집니다.

한국이나 일본은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겠지만, 아까 말씀드린 그런 광활한 길을 달리다가 한복판에서 서게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정말 답이 없거든요. 더구나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좀 무섭습니까. 특히나 제 경우에는 그 때가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이 정말 확 깨더라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인데, 자동차 상태가 심상치 않았을 때입니다. 제가 예전에 비자 문제가 좀 꼬여서, 한 번은 동경에 있는 입관에까지 갔던 적이 있거든요.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아침 일찍 출발합니다. 아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4시쯤에 출발했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피곤 했겠어요. 그래서 동경에 도착해서 입관 쪽으로 가는데 정말 참 졸리더라고요.

그런데 아이고. 자동차에 이상이 생겼어요. 가속페달을 밟아도 차가 제대로 가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제가 옛날에 살았던 동네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뭐 어디가 어딘지 조차 모르죠. 그런데 동경 한복판에서 차가 멈출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잠이 달아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7절 말씀을 다시 보실까요.


로마서 9장 17절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
“17.聖書はファラオに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ことのために、わたしはあなたを立てておいた。わたしの力をあなたに示すため、そうして、わたしの名を全地に知らしめるためである。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완고한 사람 때문에, 어떤 고약한 사람 때문에 앞길이 막힌 적 없으십니까. 참고로 저는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면, 또는 뜻하지 않은 곤고한 일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하는 것, 물론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내 주시고 환난 가운데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사람을 완악하게 하거나, 또는 곤고함을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채 그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전혀 의롭지도 않은 우리, 정말 죄악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죄악 속에서 멸망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 우주 천하 만물 중에서 예수님의 피 한 방울만큼 값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피 한 방울입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 모두를 십자가 위에 쏟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의 값어치는 얼마라는 뜻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값어치는 예수님의 피와 같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만큼 잘났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첫째는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웠다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의 피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흘리게 하시면서까지 구원하기를 원하셨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을 다시 보실까요.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가끔 미래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 점을 본다고 하는데, 아니, 성경에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 장래 일을 할지 못하게 하셨다잖아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가령 지금 우리가 고난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에요.

다 알 것 같지요? 하지만 제가 항상 말씀 드리지요? 우리는 차를 타고 달리다가 5분 뒤에 빨간 신호에 걸릴지 안 걸릴지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년 뒤 5년 뒤, 10년 뒤를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주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놀라운 축복으로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셨습니까. 고통과 고난 중에 있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름 램프가 켜졌습니까. 가속 페달을 밟아도 앞으로 안 갑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통이고 고난이고 위기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일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도 앞서 말씀 드렸던 경험을 되돌아볼까요?

장거리를 달리고 있는데 기름 램프가 켜졌을 때 잠이 확 깼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으나 덕분에 졸음운전을 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무사히 주유소를 찾아서 기름을 넣을 수가 있었습니다.


동경 한복판에서 가속 페달에 이상이 있었을 때에도 역시 이거 어쩌면 좋을까 하고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덕분에 졸음운전을 하지 않게 되고, 그리고 무사히 사랑하는 군마현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때로는 우리를 졸음에서 깨우시고, 올바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가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중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8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7節~18節
“18.ですから、神は人をみこころのままにあわれみ、またみこころのままに頑なにされるのです。”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이랬더가 저랬다가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갖는 삶을 통해서,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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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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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4회 영적인 달음박질
2022년 4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16절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5節~16節
“15.神はモーセに言われました。「わたしはあわれもうと思う者をあわれみ、いつくしもうと思う者をいつくしむ。」
16.ですから、これは人の願いや努力によるのではなく、あわれんでくださる神によ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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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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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9번째 시간으로서 “영적인 달음박질” 霊的な努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잠시 반대말 문제를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 얼마나 좋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오셨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가끔 보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선 사회주의는 무슨 말의 반대말일까요. 이는 자본주의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반대말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일까요?

사실 자본주의 반대말이 사회주의입니다만, 민주주의 반대말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이는 전제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제주의라고 말하면 좀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말하자면 일인독재 또는 일당독재가 전제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가 좋습니까 아니면 독재가 좋습니까. 이런 질문을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에게 던진다면, 정말 일부 좀 독특한 사람이 아닌 담에야 당연히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겠지요.

민주주의라고 하면 그 특징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다수결이 있겠지요. 다수결의 대표적인 일례가 선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8세든 20세든간에 그 나라에서 성인이 되면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선거권이 인정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기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그리고 미국 등을 비롯해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는 그 나라의 대표를 선거로 선출합니다. 그리고 선거로 인해서 정권이 교체가 됩니다. 이는 당연하게 생각될 지는 모르지만, 사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놓고 싶어하는 경우가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반대를 하게 되면 그 때는 그야말로 내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다른 개발도상국에 보면 정치적인 권력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내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미국도 일본도 그리고 한국도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성사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상당히 성숙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도 있어야 합니다. 온 국민이 한 번에 같은 자리에 모여서 논의를 하거나 대소사를 결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공정한 선거로 대표자를 뽑아서 그 대표자들이 의회에 모여서 토론도 하고 결정도 하면서 나라를 이끌고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아가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은혜를 베푼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길 것이냐,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 것이냐 하는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자,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대요?

오늘 말씀 중에서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5절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5.神はモーセに言われました。「わたしはあわれもうと思う者をあわれみ、いつくしもうと思う者をいつくしむ。」

이는 출애굽기 33장 19절 후반부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은 여러분께서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누구를 긍휼히 여기고 누구를 불쌍히 여기 것이냐 하는 것을, 천국 회의 같은 곳에서 결정한대요?

하늘나라의 각 지역에서 뽑힌 천사들을 모아놓고 다수결로 결정하신대요?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거예요.

이는 어떻게 보더라도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말이 좀 거칠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야말로 독재인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는 민주주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 누구 마음이에요? 예,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의를 해서 결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결정하십니다.

이런 말을 하면 세상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불평을 합니다. 불만을 말합니다.

아니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 합리적인 이유도 없고 명확한 규정도 근거도 없이, 그냥 하나님 혼자 마음대로 정해? 그런 건 말도 안 돼.

그러나 지난 주에 우리가 뭐라고 공부했습니까.

로마서 9장 14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그렇습니다. 사람의 결정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결정에는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 긍휼히 여길 자나 불쌍히 여길 자를, 회의나 토론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학교나 어떤 회사 같은 데에서 누군가를 뽑아요.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학교 성적이나 입사시험 성적 또는 면접 결과 등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사람들이 논의를 하고 난 다음에 누구를 뽑을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일들을 다 펼쳐놓고, 하나님과 천사들이 빨간 펜을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회의를 합니다.

누구는 언제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해왔는지 자세히 적혀 있는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서로 토론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사람이 구원 받아 마땅한 지 아닌지를 다수결로 정하기로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구원받을 자로 뽑힐 자신이 있으십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인입니다.

의인이라고 하면 무엇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의인’인 것이지요.

하지만 지난 주에 공부한 대로 의인이 얼마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길,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이 모여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격론을 벌인 결과, 아무리 생각해도 저 죄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방법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천사들이 예수님더러, 저……십자가에서 죽어 주셔야겠는데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아휴, 예수님, 그냥 저 죄 많은 인간들을 다 깨끗이 쓸어버리고, 깔끔하게 다시 시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감사하게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으셨습니다. 혼자 정하셨습니다. 무엇을 혼자 정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악에 물든 이 못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무참하게 죽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해 주시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활짝 열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혼자서 결정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 전반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神はモーセに仰せられた。「わたしは『わたしはある』という者である。」また仰せられた。

우리는 우리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선거로 뽑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지도 않습니다. 누구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걸 사람이 흉내 내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 망합니다. 이 세상의 독재자들이나 자기를 하나님이다 예수님이다 선지자다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망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서게 되어 있는 심판대 앞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 하셨을까요. 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결정 하셨을까요.

자, 지금 마음 속으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선택하셨을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요? 에이. 그래도 하나 정도는 있지 않으세요?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은 그나마 남들보다 나으니까 이것을 보고 나를 구원해 주셨을 거야.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남들보다 이것 하나 정도는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있으니까 이것을 보고 나를 선택해 주셨을 거야.

그런 것이 조금은 있지 않으신가요?

만약에 곰곰이 생각하다 그런 것들이 하나 둘씩 생각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니요.

오히려 당장 그 마음을 버려 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절대로 열리지 않는 쓰레기통, 절대로 다시 주어 올 수 없는 낭떠러지 밑으로 던져 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하셨을까요. 수가 많아서요? 힘이 강해서요? 전쟁을 잘 해서요?


신명기 7장 6절~7절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主が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を選ばれたのは、あなたがたがどの民よりも数が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事実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のうちで最も数が少なかった。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봐, 너희들이 수가 많아서 택한 줄 알아? 아니야. 오히려 수가 제일 적어……

하나님의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봐, 너희들이 잘 나서 내가 택한 줄 알아? 아니야, 착각하지 마. 오히려 너희들이 남들보다 못나면 못났지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어.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잘나지도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택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바로 다음 구절인 신명기 7장 8절에 나옵니다.

신명기 7장 8절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しかし、主があなたがたを愛されたから、またあなたがたの父祖たちに誓った誓いを守られたから、主は力強い御手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導き出し、奴隷の家から、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手からあなたを贖い出されたのである。

그렇습니다. 누가 명령해서도 아니요, 누가 지시해서도 아닙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이것이 잘 나서? 저것을 잘 해서? 아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택한 것은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면 네가 기분 나쁠 지는 모르지만, 사실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못 나면 못 났지, 잘 난 것이 없어.

하지만 뭐예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들보다 좀 모자라면 어떻고, 못나면 어떠니. 하지만 스스로 있는 내가 너를 선택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를 불렀고, 너를 구원하기를 원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감사한 일 아닙니까.

자, 다음으로 오늘 본문 중에서 그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16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6.ですから、これは人の願いや努力によるのではなく、あわれんでくださる神によるのです。

이 말씀을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로마서 9장 1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이 원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야 받습니다.”

여러분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15절과 16절 말씀을 요약 하자면 뭐냐 하면, 누구를 긍휼히 여길지 누구를 불쌍히 여길 지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그러니까 축복 받으려고 애를 써봤자, 그 노력을 보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실지 안 주실 지는 전적으로 하나님 판단에 달렸다……말하자면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건가요?

아니요. 성경에 보면 노력하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없는 것이 아닐 정도가 아니라 좀 많아요.

누가복음 13장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狭い門から入るように努め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多くの人が、入ろうとしても入れなくなるからです。

로마서 12장 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最後に兄弟たち。主イエスにあってお願いし、また勧めます。あなたがたは、神に喜ばれるためにどのように歩むべきかを私たちから学び、現にそう歩んでいるのですから、ますますそうしてください。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あなたは務めにふさわしいと認められる人として、すなわち、真理のみことばをまっすぐに説き明かす、恥じることのない働き人として、自分を神に献げるように最善を尽くしなさい。


이렇게 보면 힘 쓰라는 것이 노력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 헷갈리게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9장 24절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競技場で走る人たちはみな走っても、賞を受けるのは一人だけだという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賞を得られるように走りなさい。

아까 로마서 9장 16절에서는 달음박질 해도 소용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여기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는 달음박질 하라고 합니다.

더욱 골치 아픈 것은 로마서도 고린도전서도 모두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한이에요.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인 노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알아보았지요. 그런데 믿음이 좋은 사람은 형 에서보다 동생 야곱이었습니다.

형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동생 야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를 자기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장자가 되어야 해요. 그런데 자기는 쌍둥이지만 엄연한 동생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래, 장자권을 형한테서 빼앗으면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 머리로 꾀를 부려서 에서한테서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이제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장자로서 대를 이을 축복을 해주려고 합니다. 이는 말하자면 법적인 유언과도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지요.

창세기 25장 28절에 의하면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사랑했지만,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사랑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한테 축복의 유언을 남기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형처럼 분장을 시킵니다.

아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한테 에서의 냄새가 나도록 에서 옷을 입고, 그리고 에서는 몸에 털이 많은데 야곱은 털이 없으니까, 팔에 양털을 붙이고 에서인 척 하면서 아버지 이삭한테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속임수를 써서 결국 본래 에서가 받았어야 할 축복을 야곱이 가로채 버리고 맙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해서 야곱이 잘 되나요?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을 빼앗아서 에서가 야곱한테 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가로챘다고 해서, 이로 인해 야곱이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나요? 아니요. 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실을 알게 된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쫓아옵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이고 유산이고 다 버려둔 채로 도망을 쳐서, 어머니의 지시로 자기 오라버니이자 야곱에게 있어서는 외삼촌이 되는 라반 집에서 살게 되는데, 거기서 무려 20년 동안을, 돈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도 온갖 고생을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이 외에도 사실 시간 관계상 다 말씀을 못 드리는 것뿐이지,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그가 애굽 왕 바로 앞에 나왔을 때 그가 자신의 인생을 가리켜서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47장 8절~9절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ファラオはヤコブに尋ねた。「あなたの生きてきた年月は、どれほどになりますか。」
ヤコブはファラオに答えた。「私がたどってきた年月は百三十年です。私の生きてきた年月はわずかで、いろいろなわざわいがあり、私の先祖がたどった日々、生きた年月には及びません。」

그렇습니다. 자신의 130년 인생을 두고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회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잠깐. 우리 지난 주에 뭐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다면서요. 언제요? 그렇죠.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택하셨던 야곱이 그토록 험악한 세월을 보냈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달음박질해서, 자기 생각으로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 내려고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꾀를 부려서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형이 받을 축복을 자기가 가로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축복을 부어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렇죠. 하나님을 믿었어야지요. 그런데 야곱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적으로 더 노력을 해서, 세상적인 힘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해야지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그렇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우리가 강해서요? 우리가 잘나서요? 우리가 선해서요?

아니요.

우리가 남들보다 약하면 약했지 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못나면 못났지 잘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나쁘면 나빴지 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부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부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로챌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넘치는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세상적인 노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축복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몇 년 교회에 다녀서 성경 좀 알게 되었다 하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성경 두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私は主が言われる声を聞いた。「だれを、わたしは遣わそう。だれが、われわれのために行くだろうか。」私は言った。「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누가복음 10장 2절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収穫は多いが、働き手が少ない。だから、収穫の主に、ご自分の収穫のために働き手を送ってくださるように祈りなさい。

이 말을 아주 자기한테 편리하게 해석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무슨 선거 같은 데에 출마할 일이 있거나, 무슨 직함을 맡을 일이 있어요.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가 손을 듭니다. 그러면서 이래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리고 이제 전도하거나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 뭐라고 기도해요?

“주여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해야 하는데 추수할 일꾼들이 부족합니다. 일꾼들을 보내주시옵소서……”

그럼 이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야, 니가 해. 왜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해. 니가 하면 되잖아?”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상을 받는 달음박질, 상을 받는 노력은 세상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결국 야곱이 그 험악하다고 한 그의 인생을 통해서 보여준 것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상 우리의 영혼은 잘 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세상적인 달음박질,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하는 노력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은 야곱과 같이 험악한 인생 밖에는 얻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는, 이미 나에게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은 약속되어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영혼이 잘 되고 우리가 강건해진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정말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전도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꼭 해야 하는데 남들이 다 귀찮아하는 일,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 있을 때,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영적인 달음박질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험악한 삶을 살아가는 세상적인 달음박질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적인 달음박질을 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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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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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3회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
2022년 3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0절~14절
“10.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0節~14節
“10.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一人の人、すなわち私たちの父イサクによって身ごもったリベカの場合もそうです。
11.その子どもたちがまだ生まれもせず、善も悪も行わないうちに、選びによる神のご計画が、
12.行いによるのではなく、召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進められるために、「兄が弟に仕える」と彼女に告げられました。
13.「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14.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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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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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8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 私たちを選ばれた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복습을 잠깐 해볼까 합니다.

지난 주에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 드렸지요. 아브라함은 아이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대로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포함해서 총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자손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삭을 선택 하셨을까요. 어쩌면 사라가 아브라함의 정식 아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을 보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스라엘 제2대 왕이 된 다윗에게는 이미 아내들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자신의 충신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틈을 타서, 그의 아내를 대단히 부적절한 방법으로 빼앗게 됩니다.

다윗의 죄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숨기기 위해 잔꾀를 부립니다만 이게 생각대로 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일부러 전사하게끔 만들어버리고는 그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세상에 이런 나쁜 짓이 어디 있습니까. 이 일로 인해서 그 때까지 승승장구했던 다윗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맙니다. 집안에는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남매 사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인해서 형제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고, 한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 왕이 광야로 쫓겨나기도 하고, 결국은 그 아들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

당시까지의 다윗 왕의 인생에서 본다면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불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지요.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충신을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게 만들면서까지 빼앗은 그의 아내라고 한다면 다윗과 밧세바는 말하자면 죄악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12장에 의하면 그와 같은 부적절한 관계에서 갖게 된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 아이를 하나님이 치셨고, 그 결과 병으로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이지요.

하지만 밧세바가 다윗 사이에서 또다시 아이를 갖게 되는데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솔로몬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 솔로몬을 다윗에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으로 선택을 하시게 되는 것이지요.

밧세바 전에 있던 아내들 사이에도 아이들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굳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세우십니다.

왜 멀쩡한 다른 자녀들은 놔두고 하필이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선택 하셨을까요. 이를 보면 참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선택은 이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이삭, 이제 그가 장성해서 아내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리브가입니다.


창세기 25장 21절 이후에 의하면,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을 했지만 좀처럼 아이를 갖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를 했더니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배가 불러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아무래도 쌍둥이 같아요.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이 두 아이들이 뱃속에서 싸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이 하나가 뱃속에 들어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둘이나 들어있어요. 그것만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 두 아이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참 그 엄마 리브가도 고생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남편 이삭도 많이 당황 했나 봐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리브가가 밤에 잠도 충분히 자질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할 줄 몰랐나 보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대단히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이 말씀을 알기 쉽게 보시면 두 아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두 민족으로 나누인다고 하시면서, 둘 중에서 한 쪽이 강하대요.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아이 이름이 없습니다만, 태어난 후에 붙여진 이름이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입니다.

그러면 보통 아, 형이 동생보다 강하게 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겠다” 즉 이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그러니까, 동생 야곱이 형 에서보다 더 강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아무리 쌍둥이라 하더라도 위 아래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냥 형을 강하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하나님께서는 형보다 동생을 강하게 하셨냐 하는 것이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3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9장 13절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3.「わたしはヤコブを愛し、エサウを憎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이 말씀은 구약 말라기 1장 2절~3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요약한 것인데, 여러분께서는 이 하나님의 답을 들으시면 이해가 가시나요?

하나님께서 형 에서가 아닌 동생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뭐래요? 형 에서는 미워하고 동생 야곱은 사랑했기 때문이래요.

아니, 그런데 잠깐요. 지금 이 두 아이는 어디 있어요? 예, 엄마 리브가 뱃속에 있어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형 에서였다면 이 말을 듣고서 어떻겠습니까. 납득이 가시나요? 아니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미워하는 게 어디 있냐고 그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 하십니다. 망설임이 없으세요.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도록 하겠다. 그 이유는 내가 형 에서는 미워하고 동생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상 끝. 이게 다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겠지요.

그 의문이 뭐겠습니까. 이거 하나님 조금 이상한 것 아니야? 좀 잘못하신 것 아니야?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참 대단합니다. 이런 의문을 우리가 가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2천년 전에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니다.

로마서 9장 14절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4.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神に不正がある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럼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냐 하는 것이지요.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는 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세는 비단 이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대전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항상 말씀 드리는 세 가지가 믿음과 말씀과 행함입니다. 말씀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치 선로를 벗어난 전철처럼 곤두박질 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앞서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게 되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1장 1절부터 보세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이 말씀을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봤다고 생각해보세요. 말이 됩니까. 이 우주는 오래 전에 빅뱅, 그러니까 대폭발이 일어나서 우주가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의 힘으로 인해서 은하계나 태양계가 생겨나고, 그리고 지구도 생겨난 것이지, 무슨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어……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 전혀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어마어마한 힘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아, 그래. 지금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 나를 지으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은 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이 우주 세상 천하 만물을 다 만드신 하나님, 지금 이 순간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지 못하실 질병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문제든 해결해 주실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질병이라도 치료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도 잘못됐다 저것도 잘못됐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전혀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이신 이 성경말씀은 전혀 오류가 없다.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이 바로 오늘 본문 11절~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12절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1.その子どもたちがまだ生まれもせず、善も悪も行わないうちに、選びによる神のご計画が、
12.行いによるのではなく、召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進められるために、「兄が弟に仕える」と彼女に告げられました。


에서와 야곱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에는 그 행위에 따라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 한 번 복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선택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1장 22절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また、神はすべてのものをキリストの足の下に従わせ、キリストを、すべてのものの上に立つかしらとして教会に与えられました。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우리가 지금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교회라고 해서 반드시 건물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다면, 이 곳이야 말로 진정한 교회,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인 것이요,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이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선택하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냐 하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택하신 것이 너무 일러요? 아니요. 우리를 택하신 것은 엄마 뱃속은 고사하고 우리 조상님들도 태어나기 전,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평을 하시겠습니까? 불만을 하시겠습니까? 아이, 참, 하나님도 이상하지. 왜 나를 선택하셔서 괜히 구원하고 천국에 가게 만들고 그래……이렇게 불평을 하시겠습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요. 그렇다면 불평이나 불만 대신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입니다. 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것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을 사랑하시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여기서 의인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랜만에 그 질문 한 번 해볼까요?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었지요.

그렇다면 의인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しかし、人は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ではなく、ただ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知って、私たちもキリスト・イエスを信じました。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す。というのは、肉なる者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
만약에 의인이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 받아 천국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그렇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합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이는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만으로 의롭게 되어서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어느 목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미국 시민권을 받기 위해서는, 물론 여러 가지 자격도 갖추어야 하고 서류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마지막에는 반드시 면접을 보아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질문에 잘 대답을 해야지만 합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 목사님은 시민권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번에는 이 목사님의 어머님께서 시민권 면접을 받게 되셨다고 해요.

그 때도 벌써 목사님 연세도 많으셨으니까 목사님 어머님은 훨씬 더 고령이셨겠지요. 그런데 미국 시민권 면접에서는, 당연히 영어로 물어보면 영어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 어머님께서도 이거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고 해요.

자, 이제 면접 당일이에요. 이 고령이신 어머님이 얼마나 긴장을 하셨겠어요. 이제 어머님 차례가 와서, 면접 보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으니까 서류를 보던 면접관이 영어로 질문을 하더래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이름은 무엇입니까.” (링컨 16대, 케네디 35대, 조 바이든 46대, 키시다 101대, 문재인 19대)

자, 미국의 초대 대통령 이름이 누구죠? 예, “조지 워싱턴”이죠.

당시 미국 대통령은 빌 클린턴 대통령일 때였는데, 이 어머님이 긴장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문제도 분명히 전날에 공부해 간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조지 워싱턴”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을, “조지 클린턴”이라고 대답해 버렸대요.

그러니까 오히려 면접관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어머님이 눈치를 채시고는, 아차차차…… 그러면서 다시 “조지 워싱턴”이라고 대답을 했대요.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면접관이 뭐라고 했냐 하면, 딱 한 마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굿”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이 질문 하나로 면접이 끝났대요.

뭐, 젊은 사람들한테는 이런저런 어려운 질문들도 많이 하고 그러겠지만, 나이도 많으신 분이라고 해서 좀 봐 주었는지도 모르죠. 딱 그 질문 하나만 하고 통과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무사히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여러분께 묻습니다.

“너는 무엇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주었고요, 교회를 얼마나 많이 세웠고요,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고요, 얼마나 많은 학위를 땄고요, 얼마나 많은 직분도 받았고요, 얼마나 많이 착한 일도 했고요…….

그러시겠습니까. 이는 무슨 말이에요? 다 자기가 잘 나서, 자기가 노력해서,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천국 시험에 합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셔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 하실까요.

분명 엄지를 세우시면서 “굿”이라고 하시고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리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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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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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2회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2022년 3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6절~9절
“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6節~9節
“6.しかし、神のことばは無効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から出た者がみな、イスラエルではないからです。
7.アブラハムの子どもたちがみな、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サクにあって、あなたの子孫が起こされる」からです。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9.約束のみ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来ます。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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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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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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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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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7번째 시간으로서 “약속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約束の子孫となる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하나 짚어 나아가면 결코 어렵지는 않습니다.

먼저 6절 초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6절 초반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6節 前半
6.しかし、神のことばは無効にな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시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6절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今、もしあなたがたが確かにわたしの声に聞き従い、わたしの契約を守るなら、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族の中にあって、わたしの宝となる。全世界はわたしのものであるから。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とって祭司の王国、聖なる国民となる。』これが、イスラエルの子らにあなたが語るべきことばである。」

이스라엘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이방인 사역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효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다고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이 주장에 대한 근거, 즉,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서 1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이방인들과 맺은 열매처럼 당신들에게 가서도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즉 로마에서도 이방인들과 믿음의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 로마서의 수신인은 대부분이 이방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굳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은 내가 비록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니까, 너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바울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어떤 신앙이 있는 일본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다음과 같은 축복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3절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이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에게 선을 베풀면 우리도 복을 받는다……뭐, 이런 말을 저에게 진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말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당신들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잘해야 한다, 그래야 당신들 같은 이방인들도 복을 받는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9장 6절 후반부부터 9절까지를 다시 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6절 후반부~9절

로마서 9장 6절 후반부~9절
“6.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イスラエルから出た者がみな、イスラエルではないからです。
7.アブラハムの子どもたちがみな、アブラハムの子孫だ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サクにあって、あなたの子孫が起こされる」からです。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9.約束のみ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来ます。そのとき、サラには男の子が生まれています。」”


바울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라고 본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을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열두 명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열두 명의 자손이기 때문에, 각 자파에 속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손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아들이 이삭 밖에 없었나요? 아니요. 이삭 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자손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는 밤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아들 하나 없어요.

그래도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을 주지 않으세요. 하루하루 나이만 먹어갑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말하기를, 자기 여종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라고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닥달을 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인 사라가 아닌 그의 여종 하갈 사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도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도 태어났으니 이제 기도 응답을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18절~19절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そして、アブラハムは神に言った。「どうか、イシュマエルが御前で生きますように。」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대를 이을 자녀는 이스마엘이 아니다. 그가 아니라 사라한테서 태어나는 아이인 이삭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사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면 이삭과 이스마엘 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아니에요. 더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아브라함은 새로 아내를 맞이합니다.


창세기 25장 1절~2절
1.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アブラハムは、再び妻を迎えた。その名はケトラといった。
彼女はアブラハムに、ジムラン、ヨクシャン、メダン、ミディアン、イシュバク、シュアハを産んだ。

아브라함은 사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후처를 맞이해서 아들을 6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본다면 아브라함은, 하갈, 사라, 그리고 그두라 라고 하는 세 여인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요. 먼저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아내 사라 사이에서 이삭을 낳고, 그리고 후처인 그두라 사이에서 6명을 낳았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은 모두 여덟 명입니다.

그 여덟 명의 자손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을 해도,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아이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낳은 이삭만이 너의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이삭과 그 외 일곱 명의 자녀들에 있어서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가 바로 8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9장 8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8절
“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8.すなわち、肉の子どもがそのまま神の子どもなのではなく、むしろ、約束の子どもが子孫と認められ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외의 자녀와 이삭에 대해서 구별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별을 했냐 하면 바로 그 외의 자녀들은 ‘육신의 자녀’요,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로 구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닙니다. 모두 사람의 생각으로 태어난 자녀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앞서 살펴본 창세기 17장 19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9절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いや、あなたの妻サラが、あなたに男の子を産むのだ。あなたはその子をイサクと名づけなさい。わたしは彼と、わたしの契約を立て、それを彼の後の子孫のために永遠の契約とする。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7장 21절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しかし、わたしがわたしの契約を立てるのは、サラが来年の今ごろあなたに産むイサクとの間にである。」

이삭에 대해서는 사라가 아직 임신도 하지 않았는데, 이삭의 이름 뿐만 아니라 언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유가 다른 자녀들은 <육신의 자녀>였지만 이삭 만은 <약속의 자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가 무엇입니까. <언제 태어날 것이다>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인가요?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삭 뿐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과도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의 언약, 구원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그리고 야곱에서 열두 아들들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신들만이 구원 받은 백성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 말을 한 세례 요한도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표면적인 족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너희들 스스로가 자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돌멩이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오늘 말씀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아주 심한 차별을 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 돌멩이 수준으로 취급 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례 요한의 말에 의하면 어떻게 됩니까. 돌멩이를 이방인으로 바꾸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차별하는 이방인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요, <약속의 자손>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자손들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다면 지금 저기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는 유전자 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로마서 1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율법적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이 유대인이 아닙니다.

표면적인 할례가 더 이상 의미가 없듯이, 표면적인 유대인, 유전자 적인 유대인, 유전자 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육신적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인들을 돌멩이 취급한다 하더라도, 이면적인 유대인,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야말로 진정한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자, 여기서 한 번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약속>이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일까요.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약속이 두 가지 있습니다.

다음 힌트입니다. 하나는 오래된 약속이고 하나는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래된 약속은 구약이요, 새로운 약속은 신약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라는 말은 구약과 신약 즉 ‘성경’이 되겠지요.

오래된 약속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가 오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45절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れからイエスは、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を開いて、

여기서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면 쉽게 말해서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걸쳐서 예언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신약에 있는 말씀들을 네 글자로 나타낸다면 그것은 바로 ‘오시리라’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신약에 보시면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 그것도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말씀은 어떻습니까. 구약에도 그렇고 신약에서도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지키는 자가 곧 <약속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7절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록합니까. 방언을 해야 구원을 받는데요? 40일 금식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적혀 있습니까.

아니에요.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지키고,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난 다음,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성경 기록에 의하면 부활하신 다음에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가복음 24장 27절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モーセやすべての預言者たちから始めて、ご自分について聖書全体に書いてあることを彼らに説き明かされた。


이 말씀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셨어요?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어요?

아니에요. 더 급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셨던 것이에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제대로 알고 지켜서 행해야지만 약속의 자녀로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읽지 않아요. 말씀을 보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아니,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한 번 확인을 해볼까요?

자,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무엇으로 알아본다고 성경에 적혀 있습니까.


일요일에 성수주일 하면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술 담배 안 하면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40일 금식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알아본대요?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만약에 그렇다면 일요일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다리가 부러져도 가게 문은 닫아야 되고, 술 담배를 안 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런 사람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되고, 굶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40일 금식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나요? 나를 믿으려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던가요?

요한복음 13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互いの間に愛があるなら、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すべての人が認めるよう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줄 알아본다는 것이에요.

저 먼 나라 이스라엘에 있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주게 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축복이 임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 선택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깨닫고, 그리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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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1회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2022년 3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절~5절
“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節~5節
“1.私はキリストにあって真実を語り、偽りを言いません。私の良心も、聖霊によって私に対し証ししていますが、
2.私には大きな悲しみがあり、私の心には絶えず痛みがあります。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4.彼らはイスラエル人です。子とされることも、栄光も、契約も、律法の授与も、礼拝も、約束も彼らのものです。
5.父祖たちも彼らのものです。キリストも、肉によれば彼らから出ました。キリストは万物の上にあり、とこしえにほむべき神です。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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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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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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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6번째 시간으로서 “되돌아보는 우리의 사랑” かえりみる私たちの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가 5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은 앞의 3절과 뒤 2절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절~3절
“1~2.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1節~3節
“1.私はキリストにあって真実を語り、偽りを言いません。私の良心も、聖霊によって私に対し証ししていますが、
2.私には大きな悲しみがあり、私の心には絶えず痛みがあります。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바울은 지금 큰 근심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근심을 말하기에 앞서, 대단히 이 근심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그냥 잠시 어쩌다가 하는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라, 정말 마음 속 깊이 가지고 있는 근심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근심이 뭐냐 하면 <나의 형제 곧 나의 골육>이라고 합니다.

그럼 지금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가족이나 자기 집안 사정을 털어놓으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4절 첫 부분에 보시면, 그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사람(イスラエル人)>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잠시 바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바울은 유대인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예,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열두 지파가 있는데, 바울은 무슨 지파였을까요.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그는 유대인 중에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고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는 율법에 규정된 것이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그가 도중에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정통적인 유대인 집안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3절만 다시 볼까요?

로마서 9장 3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私は、自分の兄弟たち、肉による自分の同胞のためなら、私自身がキリストから引き離されて、のろわ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


바울이 지금 말하기를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다시 말해서 자기와 같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저주를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끊어질지라도 상관 없다……이런 말입니다.

아니, 갑자기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좀 의아스러울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우선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인이었을까요.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여기에 보면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지만 지금까지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에 가려고 했냐 하면, 로마에 가서 당신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다른 이방인들과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를 근거로 본다면 이 편지의 수신인은 적어도 대부분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다면 애초에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것이지, 왜 멀리 있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그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봅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6절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シラスとテモテがマケドニアから下って来ると、パウロはみことばを語ることに専念し、イエスがキリストであることをユダヤ人たちに証しした。
しかし、彼らが反抗して口汚くののしったので、パウロは衣のちりを振り払って言った。「あなたがたの血は、あなたがたの頭上に降りかかれ。私には責任がない。今から私は異邦人のところに行く。」

이를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 중에서 밝혀진 것만 보더라도 절반 가까이를 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요, 그리고 설교가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말재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지금 이방인도 아닌 동족에게 말을 하고 있어요. 그것도 보통 말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회개의 말씀을 한 번 전했더니 믿는 사람이 3천명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베드로보다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고기잡이 출신이었지만 바울은 학벌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엘리트였습니다. 그리고 언변도 탁월했습니다.

그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천 명이 회개를 했다면,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 5천 명 정도는 회개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회개는 하지 않고, 바울한테 대적하고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8장 6절
“6.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しかし、彼らが反抗して口汚くののしったので、パウロは衣のちりを振り払って言った。「あなたがたの血は、あなたがたの頭上に降りかかれ。私には責任がない。今から私は異邦人のところに行く。」


그래. 알았다. 너희들이 내가 전하는 복음을 안 받아들인다면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한테 있다. 나는 이제 이방인에게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유가 바울이 부족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보시면 주님이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애초에 이방인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내가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에요. 잘못한 것도 없어요. 주님을 열심히 의지하려고 해요.

그런데도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되거나 길이 잘 안 열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에는 무턱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께서 내게 다른 길이 있어서, 다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한다면, 이것을 우리는 그냥, 아, 지금의 무슨 선교사 파송 정도로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요. 이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그야말로 고난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의 인도로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복음을 전하고 왔더니만, 그 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방인한테까지도 전도를 하고 왔다고 칭찬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11장 1절~3절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さて、使徒たちとユダヤにいる兄弟たちは、異邦人たちも神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ことを耳にした。
そこで、ペテロがエルサレムに上って来たとき、割礼を受けている者たちが、彼を非難して、
「あなた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者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彼らと一緒に食事をした」と言った。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함께 밥을 먹는 것조차도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구약에 있어서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한테 아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만, 이는 그러니까 아주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힘든 사명을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붙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이렇게 되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한다고 비난을 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전에 자신들을 핍박했었다고 비난을 하게 되고, 이방인들한테는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을 부정한다고 비난을 하게 되는, 그야말로 대단히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러한 사역은 바울 정도가 아니면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주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해서, 이와 같은 어려운 사명을 감당하도록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 특히나 이 서한의 수신자인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 바울이 이제 유대인들은 포기하고 이방인들만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유대인들은 지옥에 가고 이방인들만 구원을 받게 된다……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하면, 이제 역차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버렸다. 봐라. 바울도 이제 유대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방인들한테만 전도하지 않느냐……뭐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차별을 받게 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와 똑 같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도 좋다.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모세의 기도와도 비교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32절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そこでモーセは主のところに戻って言った。「ああ、この民は大きな罪を犯しました。自分たちのために金の神を造ったのです。
今、もしあなたが彼らの罪を赦してくださるなら──。しかし、もし、かなわないなら、どうかあなたがお書きになった書物から私の名を消し去ってください。」

이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지었지만 이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라면 나도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는 모세가 자기의 이스라엘 자손들을 얼마나 사랑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지금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나도 저주 받기를 원하다는 말은, 내가 유대인을 버리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 그렇다고 우리도 “아, 네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가 교회에 안 나간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 뭐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그리 적절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표현은 모세나 바울 정도 되는 경우나 쓸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좀 알아듣기 쉽게, 보다 좀 사랑스러운 표현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요.


다음으로 4절~5절을 봅니다.

로마서 9장 4절~5절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彼らはイスラエル人です。子とされることも、栄光も、契約も、律法の授与も、礼拝も、約束も彼らのものです。
父祖たちも彼らのものです。キリストも、肉によれば彼らから出ました。キリストは万物の上にあり、とこしえにほむべき神です。アーメン。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멀리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 당시 이 때는 아직 신약이 없었고 구약 뿐이었으니까, 구약에 보더라도 유대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고, 성경에는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 받으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자신의 동족을 어찌 버릴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내가 비록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는 있으나, 비록 때로는 자신을 핍박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같은 유대인에 대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뜨거운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쓰여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쓰여졌다는 사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읽으라고 쓰여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대목에 있어서, 그냥 단순히, 아, 바울이 그만큼 자기와 같은 유대인을 사랑했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지금 이토록 뜨겁게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뜨겁게 사랑했다는 말씀을 나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십니까. 밖에서는 아주 겸손하고 친절하고 그러는데 집에서는 아주 엄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 자기와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면서, 자기와 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까다롭게 굴거나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들. 여러분 주변에는 그런 분 안 계신가요?


일본어에는 ‘우치벤케이’라는 흥미로는 말이 있습니다. ‘우치’는 집이나 아니면 안쪽을 나타내는 말이고, 벤케이라고 하면 옛날 일본에서 싸움을 잘했던 사람인데, 밖에 나가면 조용하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다 하면 갑자기 큰 소리를 치고 자기 멋대로 하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자기 가족한테만 그러느냐 하면, 꼭 가족이 아니라도 자신과 가까운 사람한테는 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 하지만 자기와 좀 먼 사람한테는 아주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우리말로는 <구들목 장군>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는데, 저는 잘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밖에서 전도하거나 봉사할 때에는 아주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하면서, 교회 안에 들어왔다 하면, 이것저것을 내세우면서 으시대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챙길 것 같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챙길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은 잘 챙기고 그러면서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한테는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서 짓궂게 한다거나 험담을 하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과 형제와 화목하는 것. 이 둘을 비교해볼 때 무엇이 더 중요할까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씀을 지금 식으로 바꾸어 본다면,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아차, 내가 어떤 사람한테 잘못한 것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에이, 지금은 교회 늦을 것 같으니까 일단 예배 드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를 하든지 카톡을 하든지 하지 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우선 그 사람과 화해하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교회 좀 늦어도 괜찮아요. 경우에 따라서는 1부 예배에 못 맞출 것 같으면, 2부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고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일단 이웃과 화해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예배를 드리든지 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와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40절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イエスがサドカイ人たちを黙らせたと聞いて、一緒に集まった。
そして彼ら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どの戒めが一番重要です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말씀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는 말씀은 <둘째도 첫째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가까운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학생들 돌봐 주느라고 자기 아이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는 말씀.

그리고 이는 제가 직접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인데, 그 목사님은 대단히 훌륭한 목사님이시거든요. 하지만 그 분의 자녀분들은 솔직히 좀 대체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성도들도 돌봐야 하고 여기저기 다녀야 할 일이 많았고 해서, 자기 가족을 돌 볼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글쎄요. 저는 그것이 과연 주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회에 우리의 이웃 사랑을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사람들,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우리 이웃들을 소중히 여기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눈으로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님도 유대인으로 오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오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예, 그렇죠. 나를 위해 오셨고 나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이는 똑같이 우리 이웃, 내 곁에 있는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어떤 한 사람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냐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 제일 불편한 사람, 제일 싫어하는 사람, 제일 짜증 나는 사람을 한 사람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너무 많이 떠 올리면 괜히 힘드니까, 딱 한 사람만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제 말씀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 같이, 그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여러분 위에 넘치는 것 같이, 여러분이 생각하신 바로 그 사람 위에도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 사랑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공허한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하고 구체적인 사랑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이웃에게 실천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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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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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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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0회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2022년 3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8節~39節
“38.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39.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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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5번째 시간으로서 “끊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引き離されてはならない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8節~39節
“38.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39.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오늘 이 구절에 보면 아홉 가지가 등장합니다. 사망과 생명과 천사들과 권세자들과 현재 일과 장래 일과 능력과 높음과 깊음입니다.

우선 이 아홉 가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망(死)’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사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망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두 사람 나옵니다. 하나는 에녹이요 다음은 엘리야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노아든 아브라함이든 다윗이든 베드로든 바울이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사망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찬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순서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예외 없이 ‘사망’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생명(いのちも)’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천사들(御使いたち)’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천사 숭배 사상이 있었던 시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사사기 13장 15절~16절
“15.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16.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マノアは主の使いに言った。「私たちにあなたをお引き止めできるでしょうか。あなたのために子やぎを料理したいのですが。」
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献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이 천사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자 천사는 자신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10절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預言者であるあなたの兄弟たち、この書のことばを守る人々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천사 앞에 엎드리자 오로지 경배를 받을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장면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라고도 기록되는 천사는 분명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천사라고 해서 모두 좋은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른바 타락 천사를 떠올리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는 것인데, <루시퍼>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이는 이사야 14장 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明けの明星、暁の子よ。どうしておまえは天から落ちたのか。国々を打ち破った者よ。どうしておまえは地に切り倒されたのか。

라는 구절에서 ‘계명성’에 대한 단어가 일부 번역본에서 ‘루시퍼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이 구절이 말하자면 천사가 타락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대다수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실 이 <루시퍼>라고 하는 것이 단어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이름, 다시 말해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새벽별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는 <헬렐>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대표적인 한글이나 일본어 번역본에 보더라도 <루시퍼>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대표적인 영어 번역본에 보더라도 KJV 에만 <루시퍼>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NIV나 NASB 같은 번역본에는 그저 모닝스타, 스타 오브 모닝……아침의 별, 말하자면 샛별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유다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유다서 1장 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またイエスは、自分の領分を守らずに自分のいるべき所を捨てた御使いたちを、大いなる日のさばきのために、永遠の鎖につないで暗闇の下に閉じ込められました。

이 말씀에 의하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들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천사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천사로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방심하면 안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저는 아직 육안으로 천사를 보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만, 정말 놀랍게 반짝이는 천사를 보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마귀 사탄도 천사로 가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현재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 중에는 가브리엘이나 무슨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거나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 또는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줄 뿐입니다. 그들은 숭배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프랑스에 보면 몽 상 미셀이라는 수도원이 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니까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봤는데, 분위기를 보니까 카마쿠라에 있는 에노시마 비슷하기도 한 것 같더라고요.

아무튼 그런데 그 몽 상 미셀이라고 하는 뜻은 뭐냐 하면 이를 번역하면 성 미가엘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엘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천사 이름입니다.


그래서 몽 상 미셀이라는 뜻은 말하자면 미가엘의 동산이라는 뜻인데, 왜 이름을 이렇게 붙였냐 하면 꿈속에 미가엘 천사가 나타나서 자기 이름으로 교회를 세워라……해서 미가엘 천사의 이름을 따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 꼭대기에는 미가엘 천사 모양을 금빛으로 만들어서 저 높은 곳에 세워놓았습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몽 상 미셀에 놀러가면 안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저도 언제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실제로 미가엘 천사가 그런 말을 했겠냐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세워라? 그런 말은 성경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세상에는 얼마나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넷째로 권세자들(支配者たち)입니다. 이는 이 세상의 권세자들도 있고 공중의 권세자들도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자라고 해서 천사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かつては、それらの罪の中にあってこの世の流れに従い、空中の権威を持つ支配者、すなわち、不従順の子らの中に今も働いている霊に従って歩んでいました。

여기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란 마귀를 뜻합니다. 동서를 불문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권세를 잡은 자들은, 자기를 신격화 해서 신으로 모시기를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권세자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리고 마귀 사탄을 뜻하기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 번째로 <현재 일(今あるものも)>입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여섯 번째에 나오는 <장래 일(後に来るものも)>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래에 다가올 지도 모르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래의 불안함을 얼마나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이는 빈부의 차이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장래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되겠지만, 많이 가진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보면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만큼 가졌으니 더 이상 모으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사업을 더 확장하거나 새로운 곳에 투자를 해서 더욱 재산을 늘리려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불안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내가 얼마만큼 가지고 있어야 안심해도 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돈을 벌려고 하고,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심한 경우에는 남의 것까지도 빼앗으려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 능력(力あるものも)입니다. 이는 단지 권세자들에 의한 능력이 아닌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힘을 말한다고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것이 천재지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비나 눈이 오고, 태풍이 몰아치고, 산이 무너지고 화산이 터집니다.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 여파로 쓰나미가 몰려 오기도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2022년 3월 초 현재 전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도 그렇고,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평화로울 때에는 한 사람을 죽여도 흉악범이 되는데, 전쟁이 한 번 시작하면 사람을 많이 죽이면 영웅이 됩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을 지켜보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러시아가 유럽에 대해서 하고 있는 요구는 도무지 수용할 수가 없는 내용이에요.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철수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쪽에 군사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걷잡을 수 없이 전쟁이 확대될 수 있어요. 러시아 외무장관이 말합니다. 만약에 제3차대전이 시작된다면 이는 핵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요. 그렇겠지요. 러시아는 엄연한 핵보유국인데 자기들이 지게 생겼다고 생각해보세요. 자기들 목에 칼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핵무기를 안 쓰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른 핵보유국들은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게 될지 모르지만, 3차 대전 다음에 일어나는 4차 대전에서 쓰일 무기는 돌멩이와 곤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면 인류의 문명들은 모두 망하고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무서운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가로막거나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힘을 <능력>이라고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에는 <높음(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이요 아홉 번째는 <깊음(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사망(死)이나 살아있는 것들(いのち)이나 천사들(御使いたち)이나 권세자들(支配者たち)이나, 현재의 어려움이나 장래의 염려나, 그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강한 힘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저는 여기에 굳이 <그러나>라는 말씀을 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러나>라는 단어는 기적의 접속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안 좋은 말들 뒤에 <그러나>가 왔을 때의 일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이렇게 되면 참으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좋은 말씀 뒤에 <그러나>가 붙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가 없다……라고 하는 대단히 기쁘고 놀라운 말씀 뒤에 굳이 <그러나>를 붙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이 다음에 <그러나>를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것은 끊을 수가 없다. 여기에 <그러나>가 붙으면? 그렇죠. 무언가는 끊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아니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있을까요.

더 쉽게 말하자면 누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경에 보아도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축복을 하늘의 새들이 끊겠습니까, 바다의 물고기들이나 땅에 움직이는 생물들이 끊겠습니까. 그 누구도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축복이 끊어졌습니다. 누구에 의해서요? 그렇죠. 이 축복을 받은 아담과 하와 자신들에 의해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므로 인해서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헌신짝 내버리 듯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어떻습니까.

지금 한국에 보면 고작 5년짜리 대통령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죽어라고 고생을 하는데, 당시의 왕은 어땠습니까. 그렇죠.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게 왕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가 죽은 다음에도 자기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왕위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무런 노력 없이, 선거운동 한 번 안 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는데 그 누가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고 맙니다. 누구에 의해서 끊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사울 자신에 의해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왕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しかし、今や、あなたの王国は立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主があなたに命じられたことを、あなたが守らなかったからだ。」

원래라면 사울에서 시작해서 그의 아들 요나단, 그리고 그 후로도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위가 이어졌을 것이지만,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6절~27절
“26.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私はあなたと一緒に帰りません。あなたは主のことばを退け、主があなたをイスラエルの王位から退けられたからです。」
サムエルが引き返して行こうとしたとき、サウルが彼の上着の裾をつかんだので、上着は裂けた。

이 기록을 보면 누가 먼저 버렸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먼저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사울이 잡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지듯, 그가 잡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도 끊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영원히 이어졌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은 사울한테서 빼앗기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한 손으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밧줄을 잡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굵은 밧줄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고 우리 손이 그 밧줄을 놓치지 않도록 아무리 큰 힘을 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는 칼로 언제든지 그 밧줄을 끊어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한 손에 쥔 칼,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릴 칼을 버려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남은 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밧줄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야 하는 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우리는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촛대가 옮겨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의 촛대 은혜의 촛대가 옮겨지지 않도록 우리 두 손으로 굳게 잡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두 손으로 굳게 잡고, 마침내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마지막 날에 축복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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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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