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회 부지런한 섬김
2022년 10월 2 설교 - 로마서 강해 102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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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6절~18절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16節∼18節
“16.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こねた粉もそうなのです。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なのです。
17.枝の中のいくつかが折られ、野生のオリーブであるあなたがその枝の間に接ぎ木され、そのオリーブの根から豊かな養分をともに受けているのなら、
18.あなたはその枝に対して誇ってはいけません。たとえ誇るとしても、あなたが根を支えているのではなく、根があなたを支え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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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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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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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2번째 시간으로서 “부지런한 섬김” 勤勉なる仕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을 향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장13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말을 한다고 선언하고 난 후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유대인이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을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단순한 대조만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를 우리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6절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6.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こねた粉もそうなのです。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なのです。


우선 바울은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하고, 뿌리와 가지를 비교합니다.

곡식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했을 때 사람이 보기에는 당장 배를 채울 수 있는 떡덩이가 더 좋아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은 그 떡덩이를 만든 곡식가루가 더 거룩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처음 익은 곡식가루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첫 수확물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9절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最初に胎を開くものはすべて、わたしのものである。あなたの家畜の雄の初子はみな、牛も羊もそうである。

우리 앞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려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를 가장 아끼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면, 누구한테 제일 좋은 것을 주는지를 살펴보면 되겠지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값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을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수확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사실 제일 처음 얻은 수확물은 너무나도 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금광을 캔다고 생각해봐요.

자, 여기를 파면 금이 나온다고 해서 그 금광을 우리가 샀어요.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샀습니다. 여기서 금이 많이 나오면 부자도 될 수 있고, 그리고 이웃들도 많이 도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대 반 불안 반의 마음을 가지고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와! 정말 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처음 난 금을, 자기 것으로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웃한테 기부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것으로 먼저 하겠지요. 이게 나쁜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계속 파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나올지 모르잖아요?

정말 금이 듬뿍듬뿍 나와서 이제 내가 먹고 살기에 남아도 아주 많이 남을 정도가 되었어요. 이제 더 이상 채워 넣을 곳이 없어요. 그러면 이제 이웃에게 나누어 주거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금광을 캘 기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사업을 시작했어요. 아니면 우리가 취직을 했어요. 하지만 사업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게 정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몇 개월 못 가서 문을 닫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취직도 그렇습니다. 경기가 안 좋을 때에는 당장 취직을 했다고 해도 내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얼마 안 되어서 짤리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 열매를 바치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라고 하시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다 지으셨고, 그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첫 열매를 바치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받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가해보세요. 그와 같은 불안한 상황에서 첫 수확물 즉 첫 수입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주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 3장을 봅니다.

잠언 3장 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あなたの財産で主をあがめよ。あなたのすべての収穫の初物(はつもの)で。

이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몇 푼 안 되는 첫 수확물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 믿음의 손길을 받으시겠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뿌리와 가지는 어떻습니까. 가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엇보다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지만 뿌리는 어때요? 일단 기본적으로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파보면 거기에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보기도 좀 아름답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뿌리에는 값어치가 없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지요.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자라나지 못합니다. 꽃도 못 피우고 열매를 맺지도 못하지요.

꽃집에서 아름다운 꽃을 사옵니다. 그것을 사다가 꽃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아 놓지요. 그러면 며칠은 갑니다만, 얼마 못 가서 시들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는 몰라도, 뿌리가 없다면 결국 꽃도 피우게 할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처음 익은 곡식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해보았을 때, 떡덩이보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더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값어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믿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더욱 거룩한 것이요, 그리고 뿌리와 가지를 비교해 왔을 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값진 열매를 맺게 하는 가지라 한다 하더라도 뿌리가 없으면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가지보다 뿌리가 더욱 거룩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7절에 보시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가 나옵니다. 감람나무라고 하는 것은 올리브 나무를 뜻하는데, 쉽게 말해서 돌감람나무는 야생이고 참감라나무는 귀하게 가꾸어진 값진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는 귀하기 때문에 빨리 자라게 하고 싶은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하냐 하면 참감람나무 가지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한다고 합니다.

어차피 뿌리는 똑같잖아요.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능은 야생 올리브나무나 값진 올리브나무나 같아요. 그러니까 이미 많이 자라서 튼튼한 뿌리가 있는 야생 올리브나무를 찾아서, 거기에 값진 참올리브나뭇가지를 접붙임 하게 된다면 손쉽게 귀한 올리브를 수확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를 보면 완전히 반대입니다. 값어치가 없은 야생 올리브나무에 값진 참올리브나뭇가지를 접붙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참올리브나무 뿌리에 야생올리브나무가지를 접붙임 했다는 것이에요.

이건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아니, 기껏 값진 참올리브나무가 있어서, 가만히 놔두면 거기서 귀한 올리브 열매를 거둘 수 있는데, 굳이 거기에 야생올리브나무가지를 접붙임 해요? 이는 누가 보아도 상식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나요? 저를 포함해서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1차적으로 본다면 참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가지를 접붙임 하게 되어서, 참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돌감람나무가 받도록 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는 축복과 구원을 이방인에게도 받도록 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공부해 본 바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이방인이 믿게 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인에게 믿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이방인이 대단히 의로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의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자신들이 더 의로워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뿌리로 하여금 이방인이라고 하는 돌감람나무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올라가버리는 식의 엉뚱한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우선 16절에서 보면 <처음 익은 곡식 가루>(麦の初穂)가 나옵니다. 즉 이는 처음 얻어진 수확물, 처음 얻어진 열매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しかし、今やキリストは、眠った者の初穂とし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ました。

하나님은 열매를 거두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에서 벗어나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이며, 그 첫 열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열매에 대한 말씀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만, 오늘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道端に一本のいちじくの木が見えたので、そこに行って見ると、葉があるだけで、ほかには何もなかった。それでイエスはその木に「今後いつまでも、おまえの実は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すると、たちまちいちじくの木は枯れた。

마가복음 11장 13절~14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잎사귀가 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열매를 얻지 못하셨어요. 그 이유가 뭐래요? 예, 무화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열매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나무가 말라 버려서 이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완전히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배가 고파서 열매를 따려고 갔더니, 열매가 없어서 예수님이 성질을 내신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잘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 첫째로 예수님은 열매를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보셨겠지요. 셋째로 예수님은 어떤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넷째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왜 그 나무, 어떤 한 무화과나무한테로 가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가복음 11장 13절 앞부분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11장 13절 전반부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한테 가신 이유는 그 잎사귀가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멀리서 보았는데도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니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렇다면 왜 잎사귀가 않은 것을 보시고 무화과나무에 가셨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의 특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지만 벚꽃이 만발하지요? 봄에 꽃이 필 때를 보시면, 잎사귀가 아니라 우선 꽃이 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잎사귀가 돋아나지요.


무화과의 경우를 보면 희한한 것이 봄이 되면 잎사귀가 나기 전에 열매부터 맺힌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정말 이파리가 없는 앙상한 나무 가지에 무화과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열매가 맺힌 다음에 이제 잎사귀가 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뭐예요? 예, 당연히 거기에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 저렇게 잎사귀가 무성 하다면 당연히 먹음직한 열매도 많이 있겠구나 짐작하시고 다가가셨는데, 막상 나무를 살펴보셨더니 정작 먹을만한 열매는 없고, 먹지도 못하는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이에요.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나무는 아무데도 쓸 모가 없는 나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하셨다는 뜻인 것이지요.

열매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잎사귀들은 많았지만 정작 쓸모가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디에 접붙임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기 중동에 있는 먼 나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접붙임을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요한복음 15장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あなたがたが多くの実を結び、わたしの弟子となることによって、わたしの父は栄光をお受けになります。


우리가 접붙임을 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열매는 없고 온갖 잎사귀 투성이는 아니십니까. 교회에 오래 다니고 이런저런 잎사귀는 많이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취하실 만한 열매는 없는, 그런 인생을 보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5장을 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あなたがたは、年数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아기들을 보세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집안 일을 하겠어요. 아니면 나가서 돈을 벌어 오겠어요. 주변에서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아요. 그저 주는 젖을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되고 서른, 마흔이 됩니다. 몸도 어디 하나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정도 되었으면 이제 나가서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맨날 집에서 주는 젖이나 먹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되면 괜찮아요. 그런데 교회도 오래 다니고 그랬는데도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해요. 맨날 교회가 나한테 뭘 해주길 바라고, 이웃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래요. 내가 먼저 교회나 이웃을 섬기지를 않아요.

그건 뭐예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인데, 여전히 목에 아직 탁받이나 하고 장난감 젖꼭지나 입에 물고 집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과 뭐가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쉽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성경에 보면 이 게으른 사람을 참 흥미롭게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 26장 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怠け者は皿に手を伸ばしても、その手を口に持って行くのを面倒がる。

게으른 사람은 먹을 것이 있는 그릇에 손을 넣고도 그걸 집어서 입에 넣기도 귀찮아 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것도 챙겨주고 저것도 챙겨줍니다. 초신자 때에는 그냥 교회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열매를 맺지 못해요. 생활이 바뀌지 않아요. 믿음 생활은 그냥 취미로 생각해요. 맨날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고, 하나님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라고, 이웃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뻑하면, 내가 교회에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알아? 내가 직분이 뭔지 알아? 내가 몇 대째 목사 장로 권사인지 알아?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이게 뭐예요? 그렇습니다. 다 잎사귀에요. 주님께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잎사귀들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믿음 안에서 게으른 사람의 모습입니까.

마태복음 25장 26절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누가복음 3장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斧もすでに木の根元に置かれています。だから、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すべて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저도 부지런한 편은 아닙니다. 좀 빠릿빠릿 하게 일처리도 그때그때 잘하면 좋겠는데, 자꾸 미루게 되고 게을리하게 됩니다. 이 설교 준비도 좀 미리미리 해두면 좋을 텐데 오늘 이 말씀도 오늘 아침 새벽 5시쯤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인간적인 게으름이 아니에요. 신앙적인 게으름입니다. 신앙적인 게으름은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꾸짖고 계시고 마지막 날에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잎사귀 같은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걸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勤勉で怠らず、霊に燃え、主に仕えなさ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무에 접붙임 되어서,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부지런한 섬김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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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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