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회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2022년 10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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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9절~20절 전반부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19節∼20節 前半
“19.すると、あなたは「枝が折られたのは、私が接ぎ木されるためだった」と言うでしょう。
20.そのとおりです。彼らは不信仰によって折られましたが、あなたは信仰によって立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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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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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3번째 시간으로서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接ぎ木のために必要な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무들의 가지를 접붙임 할 때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냥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나무에 갖다 대기만 하면 알아서 붙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접붙임을 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접붙임을 하려는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본래 나무에 있는 가지를 꺾은 다음에 거기에 접붙임 하려는 가지를 가져다가 연결을 하고 이를 단단히 고정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나무가 있어요. 거기에 제가 가지고 온 나뭇가지를 접붙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에서는 나뭇가지를 꺾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렇다면 어떤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건강한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다 죽어서 말라 비틀어진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건강한 가지를 꺾어야 합니다.


접붙임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 나무로부터 나오는 진액, 말하자면 그 영양분을 접붙임 하려는 나뭇가지로 하여금 받게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죽은 나뭇가지를 꺾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라 죽은 나뭇가지가 괜히 죽었나요? 그 이유는 본 나무로부터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니까 말라서 죽어버린 것이잖아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미 혈관이 죽어서 더 이상 피가 안 통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거기에 아무리 좋은 가지를 가져다가 접붙임을 해봤자 결국 말라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멀쩡한 나뭇가지를 꺾어 버리기가 아깝다고 해서 다 죽은 나뭇가지에다가 접붙임을 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나뭇가지를 꺾어야 해요? 그렇습니다. 건강한 가지, 튼튼한 가지……말하자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야지만 제대로 접붙임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7장 24절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動物の死骸にある脂肪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動物の脂肪は、何に使っても差し支えない。しかし、決して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

레위기 17장 15절~16절
“15.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16.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もし自分の衣服を洗わず、身に水を浴びないなら、その人は自分の咎を負う。」

레위기 22장 8절
“시체나 찢겨 죽은 짐승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て汚れ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主である。

이처럼 율법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죽은 짐승에 대해서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사람들은 절대로 스스로 죽었거나 들짐승한테 찢겨 죽은 것은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거나 짐승들한테 찢겨 죽은 짐승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와 같은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선 스스로 죽은 것은, 늙어서 죽었는지 아니면 나쁜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에는 특히나 그 고기 안에 나쁜 균이 있는지 여부를 가려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먹는다는 것은 위생적으로 대단히 위험할 수 있었겠지요.

짐승들한테 찢겨 죽은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짐승이 공격을 해서 죽였는 지도 알 수 없고, 그리고 그 공격한 짐승 안에 어떤 병균이 있었다면 그것이 옳겨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스스로 죽었거나 짐승들한테 찢겨 죽었다면, 이는 언제 죽었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요. 지나가다가 보니까 짐승이 죽어 있어요. 그렇다면 방금 전에 죽었는지 며칠 전에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고기가 부패되었기 때문에 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 또한 대단히 위험할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이와 같은 고기는 과학적으로 보나 위생적으로 보나 지금도 안 먹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굳이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단순히 우리 몸에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사실 더욱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앞서 말씀 드린 <희생>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의 전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희생>에 있어서의 대원칙은 바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금전이나 아니면 가축 같은 재산을 비롯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통한 제물이 바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기르고 있던 가축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죽었거나 아니면 다른 맹수들한테 죽임을 당한 짐승들은, 하나님께 바침으로 해서 손실이 발생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바치기 이전에 이미 손실이 발생을 했어요.

이런 것은 하나님께 바치든 안 바치든 어차피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어차피 버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것은 부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세요. 그 이유는 거기에 <희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하는 것이니, 까짓거 인심이나 쓰자 하는 식의 제물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옛날에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1장 8절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あなたがたは盲目の動物を献げるが、それ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足の萎えたものや病気のものを献げるの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さあ、あなたの総督のところにそれを差し出してみよ。彼はあなたを受け入れるだろうか。あなたに好意を示すだろうか。──万軍の主は言われる──

언제 죽었는지, 병에 걸렸는 지도 모르는 짐승, 이미 쓸모 없이 되어버린 짐승들을 그냥 버릴 바에야 하나님한테나 바치자 하는 식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병든 짐승들을 끌고 가서, 그걸 너희들 높은 사람한테 가져다 무슨 선물이라고 하면서 줘봐라. 그 받는 사람이 좋아 하겠느냐는 것이에요.

누가복음에 보시면 공생애를 하실 때 예수님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

공생이를 시작하실 때의 나이가 삼십 세 정도이시고, 그리고 공생애 기간을 신학자들은 대략 3년에서 3년 반 정도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시편 90편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私たちの齢は七十年。 健やかであっても八十年。 そのほとんどは 労苦とわざわいです。 瞬く間に時は過ぎ 私たちは飛び去ります。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옛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30대 초반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년 반 정도 후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33~34세 정도에 죽음을 당하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남자 30대 초반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을 시작해볼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기서 또 스스로 죽거나 맹수한테 이미 죽임을 당한 짐승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본다면, 그런 죽은 짐승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피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습니다만, 죽은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피가 몸 안에서 굳어져버립니다. 그리고 맹수한테 죽임을 당한 짐승이라면 벌써 피는 다 흘려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단 앞에서 짐승을 잡았을 때 피가 나온다는 것은 진정으로 거룩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하자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피를 다 흘려 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しかし兵士の一人は、イエスの脇腹を槍で突き刺した。すると、すぐに血と水が出て来た。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다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거기서도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접붙임을 위해서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귀한 예수님이라고 하는 가지를 십자가 위에서 꺾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지난 주에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를 공부했었지요. 본래는 돌감람나무 뿌리에 참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하는 것이 정상인데,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져다가 참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뭇가지를 꺾으셔서, 거기에 우리를 접붙임 해주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자, 그렇다면 접붙임에 있어서 생각해볼 때, 꺾이는 것은 본 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가지 뿐입니까. 아니에요. 본 나무에 붙일 나뭇가지 또한 꺾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하기 위해서는 참감람나무 나뭇가지도 꺾여야 할 뿐만 아니라,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도 꺾어야지만 그 나뭇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돌감람나무 나뭇가지가 꺾인다는 것은 돌감람나무 뿌리로부터 결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라고 하는 이름, 세상이라고 하는 이름, 불신앙이라고 하는 이름의 뿌리인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0절 전반부에 보시면 버림을 당한 나뭇가지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당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다. 즉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돌감람나무의 뿌리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時が満ち、神の国が近づいた。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

그런데 우리는 이 회개에 대해서 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이 두 단어의 차이, 후회와 회개의 차이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 답을 얻었어요. 그리고 난 다음에 한참 지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제가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서 간신히 답을 찾아냈다고 뿌듯해 했었는데, 국어사전에 보니까 너무나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제가 옳은 답을 찾아냈었구나 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국어사전을 찾아볼 걸”이라고 하는 좀 허탈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자, <후회>라는 단어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自分のしてしまっ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失敗であったとくやむこと。

그렇다면 <회개>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역시 국어사전에 의하면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過去の過ちを反省して心がけを変える。

이 차이를 아시겠어요?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

「後悔」は、自分のしてしまっ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失敗であったとくやむこと。
「悔い改め」過去の過ちを反省して心がけを変える。

이 둘을 좀 알기 쉽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회개>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

「後悔は」は、悔やむこと
「悔い改め」は、悔やんで変えること

여기에서의 차이는 <고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것>과 <잘못을 고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건 쉽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기만 한 것>은 겉으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마음 속으로 한 것이 <뉘우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그 사람이 진짜로 뉘우쳤는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고치는 것>이 되면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겉으로 볼 수가 있어요. 알아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고치는 것> 즉 <회개>는 바로 행함, 실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행함이 아닌 그저 <잘못만 뉘우치는 것>에 머물고 만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누구는 “에이, 그래도 후회를 하게 되면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몇 번이나 다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후회만 한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후회>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적힌 지옥의 모습을 보십시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기 떨어진 사람들이 후회를 안 할 것 같습니까. 내가 지금 지옥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래 내가 그래도 세상에 살면서 나쁜 짓을 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만족해……라고 그러겠어요?


아닙니다. 아, 내가 괜히 그랬다. 괜히 죄를 짓고 괜히 남에게 상처를 주고 괜히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안 믿고 그랬다……. 이렇게 지옥에 떨어져서 이처럼 고통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죄를 짓지 말고 우리 주님과 이웃을 조금 더 섬겼을 텐데……이런 후회를 100% 다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죄라는 죄는 다 짓고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다 하는 그런 <후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기도를 해도, 거기서 끝나버리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 기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입니까. 그렇습니다. 실제로 고쳐지는 것, 행함 곧 실천으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뭇가지를 꺾으시고, 그 귀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해서, 이 돌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후회가 아닌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썩어져 가는 돌감람나무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예수님께 접붙임 되어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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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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