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54회 진정한 지혜
2022년 8월 2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6절~8절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6節~8節
“6.恵みによるのであれば、もはや行い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なければ、恵みが恵みでなくなります。
7.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か。イスラエルは追い求めていたものを手に入れず、選ばれた者たちが手に入れました。ほかの者たちは頑なにされたのです。
8.「神は今日に至るまで、彼らに鈍い心と見ない目と聞かない耳を与えられ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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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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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7번째 시간으로서 “진정한 지혜” 真の知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6절~8절 중에서 우선 6절을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7절과 8절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6절입니다.

로마서 11장 6절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6.恵みによるのであれば、もはや行い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なければ、恵みが恵みでなくなります。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행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로마서 4장 4절~5절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働く者にとっては、報酬は恵みによるものではなく、当然支払われるべきものと見なされます。
しかし、働きがない人であっても、不敬虔な者を義と認める方を信じる人には、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

예를 들어서 제가 택시 운전을 한다고 해봐요. 손님이 탔는데 어디어디까지 가쟤요. 그래서 이제 미터기를 끊고 목적지까지 갔습니다. 도착하고 난 다음에 손님으로부터 그 미터기에 있는 대금을 받았어요.

그랬다면 이것은 은혜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뭐 감사한 마음은 있겠지만, 만약에 내가 목적지까지 도착했는데도 돈을 안 줘요. 그럼 그냥 알았다고 하겠습니까. 경찰을 부르든 아니면 경찰서로 가든지 해서 어떻게든 반드시 받아내려고 할 것 아니겠어요.

왜냐하면 그 택시값은 은혜가 아니라 보수이거든요. 내가 그 돈을 받을 만큼 일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돈이 보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 돈을 받을만한 일을 전혀 못 했어요. 손님이 군마에서 택시를 타서 동경까지 가자고 해요. 그리고 미터기를 끊고 달리고 있는데, 아직 군마도 벗어나지 못해서 차가 고장 나고 말았어요. 이게 무슨 낭패입니까.

손님한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조금이나마 달리긴 했지만 그 돈을 받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저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손님이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면서 동경까지 가야지만 받을 수 있는 택시비를 모두 지불해줬어요.

사실 이게 사람한테서라면 미안해서 받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데 안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한 일은 없어요. 해야 할 일 중에서 몇 분의 일도 못 했어요. 그런데도 그 비용을 모두 받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여러가지 어려운 말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좀 뜻을 쉽게 알아보려고 했는데 더 복잡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한 번 좀 더 쉽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식이라는 한자부터 보세요.

지식의 ‘지’자는 ‘알 지’입니다. 이건 쉽지요. 그러면 ‘식’자는 무슨 ‘식’이냐 하면 이 또한 ‘알 식’이에요. 그러니까 <지식>이라는 말은 ‘알 지’에 ‘알 식’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표적으로 학문을 꼽을 수가 있겠지요. 이 세상에는 다양한 학문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이론 같은 어려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고등학문이 있나 하면 초등학문도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학문이든 간에 배움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을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일까요.

본래 한국식 한자는 ‘알 지’에 ‘지혜 혜’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일본에서는 ‘알 지’에 ‘은혜 혜’자를 씁니다.

비록 일본식이긴 합니다만, 저는 이 한자 단어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한자에 의하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은혜를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잠언 28장 26절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自分の心に頼る者は愚かな者、知恵をもって歩む者は救われる。

자기의 힘, 자기의 능력, 자기의 판단을 믿는 자는 미련한 사람이지만, 지혜롭게 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도저히 나는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 드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51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51절
“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ですから、主人によってその家のしもべたちの上に任命され、食事時に彼らに食事を与える、忠実で賢いしもべとはいったいだれでしょう。
主人が帰って来たときに、そのようにしているのを見てもらえるしもべは幸い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主人はその人に自分の全財産を任せるようになります。
しかし彼が悪いしもべで、『主人の帰りは遅くなる』と心の中で思い、
仲間のしもべたちをたたき始め、酒飲みたちと食べたり飲んだりしているなら、
そのしもべの主人は、予期していない日、思いがけない時に帰って来て、
彼を厳しく罰し、偽善者たちと同じ報いを与えます。しもべは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여기에는 두 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요, 또 하나는 악한 종입니다.

주인이 외출한 사이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그 집 주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서, 집에 있는 사람들한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악한 종은 어땠느냐 하면 동료들을 때리고 허랑방탕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지요? 주인이 예고없이 돌아와서 보았을 때 충성되게 일을 하고 있었다면 주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길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악한 종은 어때요.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45절에 보면 충성된 종은 그 집 사람들한테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고, 악한 종은 49절에 의하면 동료들을 때렸다고 합니다.

食事時に彼らに食事を与える、
仲間のしもべたちをたたき始め、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이 집 주인은 대단히 부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요. 종이 하나만이 아니라 종을 시켜서 그 집 사람들을 관리하게 할만큼 종들이 많았습니다.

다음으로 두 종은 각각 그 집에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 말하자면 월급을 지급할 권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종의 경우를 본다면, 아무리 나쁜 종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동료들을 때릴 수 있었겠어요? 거기에다가 자기 집도 아닌데 술친구들까지도 불러서 놀고 먹고 했다는 것은, 이 악한 종도 그 집에서는, 아무리 자기 멋대로 해도 누구 하나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꽤나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둘 모두가 가지고 있던 지위, 그것은 스스로 얻어진 것은 분명 아닙니다. 자신이 종인 주제에 자기 힘으로 어떻게 그런 권한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행사했던 권한, 그 집 사람들한테 양식을 나누어줄 수 있는 권한이나, 종들을 때리고 자기 친구들까지도 불러서 잔치를 벌여도 누구 하나 막지 못했던 권한은 모두 당연히 인사권자인 주인으로부터 주어진 힘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두 종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본다면 그것은 자명합니다. 충성된 종에게는 무엇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45절에 보면 충성된 종을 가리켜 무엇이 있는 종이요? 그렇습니다. 지혜 있는 종이라고 되어 있지요.

忠実で賢いしもべ


지혜의 한자 뜻이 무엇이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은혜를 아는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자리는 내가 내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요, 오로지 주인께서 내게 주신 크나큰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충성된 종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악한 종은 어떻습니까. 악한 종도 처음부터 악한 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처음부터 주변 사람들을 때리고 자기 멋대로 하는 종이었다면 주인이 그런 권한을 그 종에게 주었겠어요?

그 종은 처음부터 악하거나 미련한 종은 아니었겠지요. 밑에 있을 때에는 나름 부지런하고 영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리가 올라가더니만 이제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이제 자기 멋대로 행동하 정도로 교만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사회에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 놀고 싶은 것도 참고,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열심히 공부 했어. 열심히 일을 했단 말이야. 주인 눈치 보면서, 주인 비위 맞춰가면서, 아부도 하고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열심히 살아 왔어. 그런 내가 이 정도를 누린다고 뭐가 문제라는 거야?

얼마전 어떤 텔레비전 방송을 보았습니다. 교도소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거기에 나온 어느 한 무기수에 대한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 징역 판결을 받게 되면 5년이면 5년, 10년이면 10년이 다 찬 다음에 출소를 하는, 이른바 만기 출소가 원칙이긴 합니다만, 모범수인 경우에는 그 기간이 다 차지 않더라도 조건부로 석방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가석방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가석방은 말 그대로 완전히 석방된 것이 아니에요. 임시로 석방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교도소에서 나오긴 했지만 완전히 석방되기까지 보호관찰대상이 되기 때문에, 교도소 바깥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까다로운 준수사항이 많다고 해요.


예를 들어서 담당보호관찰관이 호출을 하면 반드시 출석해야 하고, 취업을 한 경우에도 보고를 해야 하고, 이사를 하거나 7일 이상의 여행을 하는 경우에도 신고를 해야 한다고 해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에 따라서 개별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을 지정할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범죄자 집단과 교제를 한다거나, 과도한 음주나 낭비를 하는 경우, 또는 선량한 사회 일원으로서 부적절한 행위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가석방 중에 이런 준수사항을 위반하게 되면 다시 교도소로 수감되고 맙니다. 그래서 남은 형기를 다 채워야지만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5년만에 가석방이 되어서 나왔는데, 준수사항을 위반해서 재수감될 경우에는 나머지 5년을 다 채워야지만 석방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유기징역의 경우에는 재수감될 경우라도 그 기한이 차면 석방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한편 무기징역은 어떻게 되냐 하면, 이는 유기징역과 달리 기한이 없습니다. 원칙적으로는 평생 동안 교도소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만 여기에도 가석방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럼 언제부터 가석방 심사대상이 되냐 하면, 보통 일본의 경우에는 유기징역인 경우에는 최대가 30년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사람이 가석방이 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최소 30년은 지나야 가석방 심사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30년 이상이 되었다고 해도 무기수 중에서 그 심사를 통과해서 가석방을 실제로 받아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고 해요.

가석방이 되더라도 유기징역의 경우에는 그 남은 형기 동안 보호관찰대상이 되고, 그 형기가 지나면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지만, 무기징역수의 경우에는 가석방이 되어서 나와도 기한이 없어요. 그러니까 평생 동안 보호관찰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무기징역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징역살이를 하다가 34년만에 가석방 판정을 받았대요. 그 사람의 나이가 70대 후반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단순계산으로 70세라고 한다면 36살에 교도소에 들어간 다음 70세가 되어서야 가석방이 인정되었다는 뜻이잖아요.


물론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겠지요. 구체적으로 죄목이 거기 나오진 않았지만 거의 사형 판결과 맞먹을 정도로 흉악 범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교도소 안에서 성실하게, 그것도 상당히 성실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 어렵다는 가석방을 받아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 가석방이 되어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국 재수감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게 되었냐 하면, 그것은 참으로 놀랍게도 주차위반이라고 해요. 물론 주차위반 한 번 했다고 잡아들이지는 않았겠지요. 방송에서는 ‘주차위반 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심각한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 주차위반을 비롯해서 그 정도의 잘못을 몇 번 위반했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기징역이었다면 남은 형기를 다 채우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무기징역이에요. 다시 수감되면 이제 언제 나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34년만에 가석방이 허가 되었는데, 잘못을 저질러서 다시 수감되었어요. 그 사람의 나이 이제 70대 후반이에요. 그러면 언제 다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을 담당했던 보호관찰관이 이런 말을 합니다.

“무기수인데도 내보내 줬더니만 다시 잘못을 저질러서 재수감이 되었어요. 이제는 아마도 더 이상 안 내보내 줄 겁니다. 기껏 무기수를 내보내줬는데 문제를 일으켜서 다시 돌아왔는데 또 내보내 주겠습니까”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방송국 기자가 이 재수감된 무기수한테 인터뷰를 했어요. 또다시 수감되어서 무기를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충격 아니었어요?. 그랬더니 이 사람의 말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だいぶショックでした。これぐらい大丈夫かと思いました。

그런 주차위반 같은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런 사람, 아까 예수님 말씀 중에 나오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4장 51절 후반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람을 실제로 해치거나 한다면 자기가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어느 정도 각오를 했겠지요.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뇌물을 받거나 해서 경찰에 잡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면 아무나 뉴스에 나올 정도로 거액의 뇌물을 받습니까. 그 정도로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그 정도로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정치인이든 아니면 관료든 간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겠습니까. 그리고 뇌물을 받을 때에는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아, 이게 들통나면 내 모든 것이 날아간다? 아니요. 오히려 그 정도로 문제가 될 줄은 모르지 않았을까 해요. 뭐, 남들도 다 하는 일인데 내가 이 정도 받는다고 문제가 되겠어?

한국 보면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는 속담이 있지요. 날림으로 만든 탑도 아니고 공들여서 정성껏 만든 탑은 웬만해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와르르 하고 무너집니다.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그러면 그 때가 되어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これぐらい大丈夫かと思いました。

성경적으로 본다면?

그렇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です。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11장 7절~8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7절~8절
“7.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7.では、どうなのでしょうか。イスラエルは追い求めていたものを手に入れず、選ばれた者たちが手に入れました。ほかの者たちは頑なにされたのです。
8.「神は今日に至るまで、彼らに鈍い心と見ない目と聞かない耳を与えられ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여기서 7절을 보시면, 이 말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었다면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절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다고 합니다.

イスラエルは追い求めていたものを手に入れず、選ばれた者たちが手に入れました。

즉, 이스라엘과 택하심을 입은 자는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들 즉 선택 받지 못하고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이유를 우둔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완고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ほかの者たちは頑なにされたのです。

8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즉 이스라엘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합니다.

8.「神は今日に至るまで、彼らに鈍い心と見ない目と聞かない耳を与えられ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이렇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잘못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몇 번이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지금의 어떤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었지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 드려왔었지요.

한국만 보더라도 얼마나 큰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을 비롯해서 유명한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목회자만 하더라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어느새 우둔해지고 심령이 혼미해지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되어버린 핵심적인 이유는 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죠. 은혜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인데,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은혜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게 되고, 하나님 사랑 보다, 그리고 이웃사랑보다 내 이익을 챙기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됩니까.

간단합니다.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큰 문제야 있겠어?

하지만 그러다가 어떻게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ところが、神の恵みによって、私は今の私になりました。そして、私に対するこの神の恵みは無駄にはならず、私はほかのすべての使徒たちよりも多く働きました。働いたのは私ではなく、私とともにあった神の恵みなのですが。


오늘 하루를 사는 것,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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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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