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회 기다리시는 주님
2022년 9월 25 설교 - 로마서 강해 101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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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5절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5節
“15. もし彼らの捨てられることが世界の和解となるなら、彼ら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死者の中からのいのちでなくて何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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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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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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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1번째 시간으로서 “기다리시는 주님” 待た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후에 보시면 이른바 돌아온 탕자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교회에 몇 년 다녀 보신 분들이라면, 아니, 교회에 다녀보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익히 알고 계신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오늘은 함께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깨달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는 한 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신약성경 121페이지가 되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24절까지인데, 우선 세 곳으로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14절에서 14설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14절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1 イエスはまた、こう話された。「ある人に二人の息子がいた。
12 弟のほうが父に、『お父さん、財産のうち私がいただく分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財産を二人に分けてやった。
13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14 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後、その地方全体に激しい飢饉が起こり、彼は食べることにも困り始めた。

여기에 보시면 세 사람이 등장하지요. 아버지와 두 아들 그러니까 첫째와 둘째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느 날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자기에게 물려줄 상속분을 미리 달라고 말합니다. 보통 아버지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 배우자나 자식들이 상속을 받는데,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을 몫을 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둘째를 너무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좀 이 둘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한 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자신에게 물려줄 몫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게 나쁜 것인가 하면, 아나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를 생전증여라고 해요. 상속이라고 하는 것은 돌아가신 다음에 발생하는 것이지만, 증여는 생전에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보고 둘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왜 아버지에게 생전증여를 요구했을까요. 정말로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유흥비로 펑펑 써버리고 싶어서였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 볼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째가 이와 같은 요구를 했을 때 아버지가 이를 금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보았을 때 정말 이 둘째한테 나쁜 버릇이 있어서, 정말 그가 요구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면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 둘째의 요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둘째에게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정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쁜 곳에 펑펑 써버리고 말았을까. 저는 여기에 대해서도 편견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둘째의 아버지는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큰 부자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렇잖아요. 일반 서민층이라고 한다면 자식이 아버지한테 자기 상속분을 먼저 달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아버지는 대단한 거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요즘 식으로 본다면 대기업 정도 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둘째가 아버지의 하는 방식을 보니까, 좀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요.


지금은 아버지처럼 가축을 사들일 게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보아서 송아지보다는 양들을 더 많이 매입을 해서 키우면 나중에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서 이건 아버지처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대로 이렇게 해야 하는데……그와 같은 불만이 이 둘째한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이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속여서 빼앗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이 아버지 사업 방식에 대해서 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걸 가지고 꼭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그 동안 몇 번이나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무지 자기 의견을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참다못해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아버지, 이제는 제가 나이도 먹었고 하니 제 방식대로 사업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세요.

뭐,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에 대해 아버지도 납득을 하고 그래, 그러면 내가 네 몫을 줄게, 한 번 해봐라……라고 허락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이제 둘째는 거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집 근처에서 할 수는 없잖아요. 괜히 가까운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기껏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니까 아예 멀리 갔는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먼 나라로 왔습니다. 이 정도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가 있어요. 그럼 무엇부터 할까. 그래, 일단 회사 건물을 알아 봐야겠지요. 괜히 변두리 자리를 잡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사나이가 이왕 시작하는 것, 도시 중심에서 깃발을 꽂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만한 자금력은 충분히 되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이제 사장 아들이 아니라 본인이 사장님이에요. 그러면 이제 옷도 좀 새로 맞춰야죠. 구질구질하게 입으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업을 하려면 사교계에도 진출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아버지는 맨날 회사에서 일만 했는데, 요즘은 사업을 하려면 인맥이 있어야 돼. 그러면 파티도 참석해야 하고 골프도 쳐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래서 아주 멋진 옷도 갖추고, 고급 파티도 갔습니다. 물론 골프채도 제일 비싼 걸로 샀지요. 일단 그 정도 돈은 아버지한테 받았거든요.

자,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상류층들, 셀럽들이 모이는 파티장이나 골프장에 버스나 전철 타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자동차도 사야 하는데, 그런 셀럽들 사이에 끼려고 하는데, 경차나 중고차를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 부유층 사람들과 비교를 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의 고급 자동차도 샀습니다.

자,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이 둘째 아들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까. 물론 좀 소비가 지나쳤다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받은 돈도 그 정도 있고 뭐 그런 상황인데, 고급 옷이나 차를 샀다거나 아니면 골프를 치거나 파티장에 간다는 것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없잖아요.

누가복음 15장 30절에 보면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둘째 아들이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첫째 아들의 상상이죠. 그 동안 먼 나라에 있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직 만나지도 못했는데, 동생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를 형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제 동생은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자본금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가 했던 그런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하자면 정보화 시대에 맞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다방면으로 멋지게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지, 자신의 생각대로 잘 굴러가지 않아요. 여러 인맥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분석해서 투자를 했는데, 어찌 된 게 내가 증권을 사면 떨어지고, 팔았다 하면 올라요. 부동산도 구입을 했더니 무슨 규제에 묶이게 되고, 마침 또 그 때 외환시장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어떻게 된 게 손을 대는 것들이 모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분명 다시 기회가 있을 거야. 다시 일어서고 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안 좋아집니다. 이제 빚이 늘어갑니다.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되었어요. 이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회사나 자동차 같은 모든 재산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나라 상황이 그나마 괜찮다면 어디 취업이라도 해보겠는데,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잖아요. 경제는 좋은데 자기만 망했다면 일자리도 있었겠지요. 월급을 받으면서 빚도 갚고 근근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상황도 말이 아니에요. 말하자면 대공황이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그곳은 먼 나라였잖아요. 그렇잖아도 일자리가 없는데 이왕 사람을 구한다면 내국인을 먼저 뽑지 외국인을 먼저 뽑을 리는 만무합니다.

다음으로 15절~1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19절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 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 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17 しかし、彼は我に返って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なんと大勢いること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ようとしている。
18 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こう。そし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
19 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一人にしてください。」』

여기서 15절을 보시면, 이 둘째가 있었던 곳이 아버지 집으로부터 단순히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완전히 외국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이제 이 둘째는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는데 간신히 얻은 것이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돼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젖이나 가죽을 얻기 위해서 기를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돼지의 경우를 본다면 먹지 못한다면 달리 기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둘째가 머물고 있었던 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정말 산 설고 물 설은 완전 남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문득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해왔던 방식이 옳았는지 모른다. 괜히 내 생각대로 했다가 다 말아먹게 되었다……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지. 여기서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꿈꿔왔던 금의환향, 그 동안 나를 무시했던 아버지나 형님한테 보란 듯이 성공해서 집으로 돌아갈 테야.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밑바닥 중에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젠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키우키는커녕 불결한 짐승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돼지들을, 먹고 살기 위해서 애지중지 돌보아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그 돼지 먹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그것조차도 먹지 못해요. 말하자면 자기 신세가 그 불결하게 여겼던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야, 정말 멋진 꿈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사람은 고사하고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었구나. 차라리 아버지한테 돌아가자. 지금 내 몰골이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보다 못하지 않냐.

그러면서 이제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20절부터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24절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0 こうして彼は立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へ向か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て、かわいそうに思い、駆け寄って彼の首を抱き、口づけした。
21 息子は父に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22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외국으로 갈 때에는 몇 대나 되는 마차를 끌고서 제일 멋진 말을 타고서는 편안하고 우아하게 출발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꼼짝없이 걸어갈 수 밖에 없어요. 그것도 한 두시간이 아닙니다. 먼 나라 외국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몇 날 며칠을 가야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이제 멀리 아버지 집이 있는 동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글쎄요. 여기 군마가 아버지 집이었다고 한다면, 저 멀리 군마현청이 보여옵니다. 이제 지친 몸을 끌고 걸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 달려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만약에 집 근처까지 갔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했다면 우연히 맞닥뜨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집에 가까이 간 것도 아니에요. 아직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둘째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죠.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딸이 집을 나갔는데, 그 딸의 어머니가 언제 돌아와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끼니때마다 밥을 차리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돌아왔는데 집이 없어지면 못 찾아 올까봐 이사도 안 가고 기다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쩌면 둘째는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몇 날 며칠 동안,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몇 번이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말로 용서를 빌까. 어떻게 말씀을 드리면 나를 받아 주실까.

아버지가 달려오자 아들은 몇 번이고 되뇌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너 이 자식아 그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많던 돈은 다 어디에 쓰고 이런 꼴로 돌아왔어? 돈은 얼마나 남은 거야? 등등……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물어볼 것이 많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다고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23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2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아버지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가 아무리 돈을 탕진했다 하더라도 아버지 집은 여전히 풍족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합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이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도록 하라고 종들한테 명합니다만, 아들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주시는 최고급 옷도 좋지만 이 누더기도 버릴 수 없습니다. 순금반지도 좋지만 철사로 만들어진 반지도 끼고 있을래요. 비싼 신발은 이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신을래요……이러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새롭게 좋은 옷을 입기 위해서는 옛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싸구려 가락지들을 주렁주렁 끼고 있었다면 이를 빼 버려야지 아버지가 주시는 가락지를 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발은 더하지요. 그 먼 거리를 걸어오느라고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벗어버려야지만 아버지가 주시는 최고급 신발을 신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옷만 입으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맨날 너덜너덜한 추리닝 차림으로 다니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헌 옷인데, 뭐가 묻으면, 대충 쓱쓱 문지르거나 어디든지 그냥 땅바닥에 앉아도 상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최고급 정장을 입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여기저기 아무데나 앉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이제 몸가짐도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락지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내가 이제 큰 일을 맞게 되었는데, 예전처럼 동네 건달처럼 행동해서 되겠습니까. 무슨 욕이나 상스러운 말들을 내뱉어서야 되겠냐 하는 말이에요. 그 주어진 권위에 걸맞는 말과 행동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발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최고급 신발이 아니더라도 새신발을 사 신으면 적어도 그 날은 어떻습니까. 그 깨끗한 신발을 신은 채로 진흙탕에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옛 옷들을 입고 있었습니다. 옛 가락지와 낡아빠진 신발들이 제일 좋은 것인 줄 알고, 그것 하나 놓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거리며, 그런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바로 세상적인 생각이자 세상적인 교만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세상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교만을 끝까지 고집 했었더라면,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요, 아버지가 주는 새 옷과 새 가락지, 새 신발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생각,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맞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15장 24절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5절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もし彼らの捨てられることが世界の和解となるなら、彼ら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死者の中からのいのちでなくて何でしょうか。

여기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한 덕분에 아버지를 다시 알게 되고 새사람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보고 시기하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주님 앞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는 이제 옛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 옷을 입을 수 있고, 새 가락지를 끼울 수 있고, 새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잘못될 수 있어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보다 아들 생각이 더 맞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틀리고 우리가 맞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어요. 우리는 공의롭고 진리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옳은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날을 저 멀리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에게 주실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차례입니다.

낡은 생각, 낡은 고집, 낡은 자존심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말씀, 새로운 행함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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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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