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회 마음 속의 우상
2022년 9월 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0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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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3절~14절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3節~14節
“13.そこで、異邦人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私は異邦人への使徒ですから、自分の務めを重く受けとめています。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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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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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0번째 시간으로서 “마음 속의 우상” 心の中の偶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그래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력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청년관료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탄압 했었다는 과거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 들여졌을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공생애 기간 중 유대교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백성들을 따뜻하게 대하였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심하게 꾸짖으신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잘못됐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거나 바꾸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면, 그러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잘못이 없고 예수님도 잘못이 없고, 그리고 율법도 잘못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잘못의 원인은 바로 그들, 당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기들 생각에 맞추어서 마음대로 해석을 한 다음, 그것을 백성들에게도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냐 하면 말씀에 변질이 생깁니다.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순수한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 빛은 1000년 전이나 1000년 후나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은 모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변하고 녹이 슬고, 끝내는 그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철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금이라고 한다면, 순금 중의 순금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자신들은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던 종교지도자들은 그 순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수많은 불순물로 인해서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른바 가톨릭에 대해서 기독교를 개신교라고 하지요. 그래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교회가 생겨났고, 그 명맥을 가톨릭이라고 한다면, 우리 기독교는 1517년 종교 혁명 때 탄생한, 아직 500년도 안 된 새로운 종교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과연 그런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신데,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마틴 루터입니다만,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카톨릭 사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카톨릭의 가르침을 보면 볼수록 어딘가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여기에 자꾸 사람의 생각, 사람의 주장, 사람의 전통 등이 들어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해서 그가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각, 사람의 주장, 사람의 전통이라고 하는 불순물로 인해서 변질되었던 믿음에서 벗어나, 변질되기 이전인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가 신교라기보다는 오히려 구교보다도 훨씬 이전, 변질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잖아요. 그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고, 또한 철저한 유대교 교육을 받았던 그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잡아들이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제 예수님의 부름을 받게 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되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 그리고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성경을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순금이고 예수님이 불순물이 섞인 금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들은 형편없는 고철덩어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순금 중의 순금, 완전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です。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그래서 그는 자신이야말로 참된 믿음을 가진 의인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 의인이는커녕 죄인 그것도 죄인 중에서 괴수였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데, 이 길은 대단히 험난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고철덩어리한테 고철덩어리라고 하면 듣는 고철덩어리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일반 서민층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당신들의 생각들 틀렸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이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바울도 유대인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그야말로 힘든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이방인에게도 가야 했습니다.

바울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쉽지요. 유대인이 아니면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방인이라면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이사야서 44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사야 44장 13절~18절
13.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3.木で細工する者は測り縄で測り、朱で輪郭をとり、かんなで削り、コンパスで線を引き、人の形に造り、人間の立派な姿に仕上げて、神殿に安置する。
14.杉の木を切り、うばめ樫(がし)や樫の木を選んで、林の木の中で自分のために育てる。月桂樹を植えると、大雨がそれを生長させる。
15.それは人間のために薪(たきぎ)になり、人はその一部を取って暖をとり、これを燃やしてパンを焼く。また、これで神を造って拝み、これを偶像に仕立てて、これにひれ伏す。
16.半分を火に燃やし、その半分の上で肉を食べ、肉をあぶって満腹する。また、温まって、『ああ、温まった。炎が見える』と言う。
17.その残りで神を造って自分の偶像とし、ひれ伏してそれを拝み、こう祈る。『私を救ってください。あなたは私の神だから』と。
18.彼らはよく知りもせず、理解もしない。その目はふさがれていて見ることもできず、その心が賢くなることはない。


사람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것을 베어 가져와서, 추울 때에는 그걸 땔감으로 해서 장작불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리고 일부는 그 나무들로 불을 일으켜서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그리고 나머지로는 조각을 해서 그걸 신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 소원을 빈다는 것입니다.

아니, 땔감으로 썼던 장작이나,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었던 나무나, 우상을 만든 나무나, 그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에요. 똑 같은 나무에요. 이런 말을 하면, 아, 그 조각에는 만드는 사람이 혼을 불어넣는다……뭐 그런 표현을 씁니다만, 아니, 혼을 불어넣는 건 아무나 합니까.

혼을 불어 넣는 것은 누가 할 수 있어요? 그렇죠. 하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사람은 혼을 불어 넣을 수가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혼을 불어넣었다면 살아서 움직여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나무나 돌 우상이 움직입니까.

그리고 백 보 양보 해서 정말 사람이 그 우상에게 혼을 불어넣어서 그 우상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되었다면, 그 우상이 대단해요? 아니면 그 우상을 만든 사람이 대단해요? 당연히 그 우상을 만든 사람이 더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구원할 신을 만든 사람인데.

그렇다면 그 우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든 사람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세상에, 신을 만든 사람인데 말이에요.

사람이 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그냥 그만큼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혼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지요.

이 이사야서는 대략 기원전 70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그로부터 2700년이 지난, 21세기의 지금도 역시 이처럼 우상을 섬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은 이 우리의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우상이 아니라 조금 다른 우상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그 이전에 오늘 본문 중에서 14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자, 여러분이 이방인이라고 합시다. 이방인인데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와서 여러분께 말합니다. 복음이 왜 당신한테 전해지게 되었고, 당신이 왜 구원을 받게 된 줄 알아? 그건 말이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질투 나게 하기 위해서야.

만약에 이런 말음 들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까요?

“아니, 무슨 소리에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셔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거예요.”

그러자 바울이 말합니다.

“알아. 그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복음이 너한테까지 전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방인인 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질투를 일으키게 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좀 어떻게 구원 받게 하려고 한 거야.”

물론 여러분께서는 인간성이 좋으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제가 만약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저한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바울이라 하더라도 좀 마음이 안 좋았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좀 삐졌을 것 같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게 알고 보면 상당히 골치 아픈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존심,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이상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나 자신을 존중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에요.

예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때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논하고 신앙을 가르치면 껌뻑 죽고 순종을 하는데, 고작 서른 정도 밖에 안 된 젊은 사람 입에서 율법이 막 나오고 성경이 나오는데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어요.

자기들이 생각해도 그 말에서 모순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들의 주장이 모순처럼 느껴지게 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했어요?

마가복음 3장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すぐに、ヘロデ党の者たちと一緒に、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그렇습니다. 그들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이 거룩한가요? 우리 마음이 거룩하다면 우리가 가진 자존심 또한 거룩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거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12절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悟る者はいない。神を求める者はいない。
すべての者が離れて行き、だれもかれも無用の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だれ一人いない。」

여러분, 우리 마음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거룩하기만 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그 마음 안에는 얼마나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까.

마가복음 7장 20절~23절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イエスはまた言われた。「人から出て来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内側から、すなわち人の心の中から、悪い考えが出て来ます。淫らな行い、盗み、殺人、
姦淫、貪欲、悪行、欺き、好色、ねたみ、ののしり、高慢、愚かさで、
これらの悪は、みな内側から出て来て、人を汚すのです。」

아무리 우리 자존심이 거룩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 자존심은 마치 거룩해 보이는 나무 신상이 알고 보면 땔감에 쓰이는 나무와 같은 것처럼, 우리의 자존심도 우리를 더럽게 하는 마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자존심이 안 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이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 나에게로 온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아브라함이 무슨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위해, 그 당시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 대신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자, 오랜만에 그 질문 한 번 여쭈어볼까요?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귀한 자격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이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로 여겨 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예수님 근처에도 갈 자격도 없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값없이 의롭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그 부족한 자존심이라고 하는 우상을 벗어버리고, 내가 잘나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넘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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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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