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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51회 말씀과 순종
2022년 7월 3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9節
“9.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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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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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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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4번째 시간으로서 “말씀과 순종” みことばと従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이제 로마서도 중반을 넘어서서 종반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만, 이 시점에서 잠시 복습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강해입니다만, 로마서에서의 성경 인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강해인 이유는, 로마서 길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해왔던 내용을 정리해보고, 그리고 이제 우리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로마서에서 자주 등장한 이스라엘 사람,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도에 대해서 보았으면 합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 우리 한국사람으로서 살아가기도 바쁜데, 유대인에 대해서까지 알아야 하냐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았지요?


우리는 지금 저기 먼 나라,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이 문제가 아닙니다. 육적인 유대인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 하면, 유대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이방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이해를 해야지만 우리가 올바로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즉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수가 많아서도 아닙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5절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니, 이 땅이 생겨나기 전부터, 온 천지와 만물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 대한 계획을 세워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에 대한 계획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우리의 경우를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도 계획을 세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무엇을 못하느냐 하면, 계획을 스스로 이루지는 못합니다.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人は心に自分の道を思い巡らす。しかし、主が人の歩みを確かにされる。

우리가 계획을 세운다 하더라도 이를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는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계획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무엇이든지 기도를 하면 다 이루어진다. 금식하고 기도하면 병도 치료받아 건강해지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네, 뭐, 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는 종종, 특히 한국 교회에 보면 기도 만능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된다……그래서 내가 어떻게 기도를 했더니, 얼마나 금식을 했더니 병이 나았다……같은 간증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성경도 모르고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저는 원고를 찾아보니까 지난 1월이었습니다.


지난 1월 23일 때 이런 말씀을 드렸었어요.

“성경도 모르면서 어떻게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성경을 알고 해야지 성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성경을 알지 못하면 기도도 못합니다.

이는 저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에요.

잠언 28장 9절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耳を背けておしえを聞かない者は、その祈りさえ忌み嫌われる。

이는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새번역 성경 잠언 28장 9절
“귀를 돌리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그의 기도마저도 역겹게 된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율법 즉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역겹게 생각하신다, 아주 싫어하신다.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면 꼭 기도할 때 성경책을 들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책 내용은 읽지 않고 맨날 들고 흔들면서 기도를 합니다. 아니, 성경이 무슨 아령입니까. 운동기구에요?

그리고 들지는 않더라도 기도할 때 꼭 앞에 두고 기도를 해요. 만약에 그 이유가 왠지 성경책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하게 되면 더 잘 들어주실 것 같고, 응답을 빨리 받을 것 같아서 그렇게 기도를 하신다면, 그건 우리의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 순간 성경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꼭 십자가를 보고 기도를 해야지 된다는 생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시면 법궤 또는 언약궤라고 하는 상자가 등장하지요. 이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돌판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십계명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법궤는 이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든 항아리와, 그리고 영적인 지도자를 상징하는 싹이 난 아론의 나무 지팡이와 함께 4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했으며, 이 법궤에는 하나님의 임재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졌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와서 싸우면 우리가 이길 것이라면서, 그걸 낑낑 매고 가지고 와서 전쟁을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되어야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법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큰 승리를 거두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사무엘상 4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4장 10절~11절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こうしてペリシテ人は戦った。イスラエルは打ち負かされ、それぞれ自分たちの天幕に逃げ、非常に大きな打撃となった。イスラエルの歩兵三万人が倒れた。
神の箱は奪われ、エリの二人の息子、ホフニとピネハスは死んだ。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큰 승리는 커녕 완전히 패배하고 전사자가 3만명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법궤를 가지고 왔던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들이 그토록 아끼던 법궤는 적군한테 빼앗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법궤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졌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후를 보면 여전히 법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군은 패배해버린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법궤를, 믿음으로 섬기지 않고, 단순한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를 보면 수많은 우상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 때처럼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우상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우상이냐 하면, 바로 기도라는 우상, 금식이라는 우상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성경이라는 우상, 더 나아가 십자가라는 우상, 교회라는 우상, 목사라는 우상, 그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께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라는 우상, 예수님, 성령님이라는 우상까지도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라는 우상, 예수님, 성령님이라는 우상이라는 게 도대체 뭐야,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해하지 마세요. 자칫하면 제가 이상한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니까 서둘러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렇다. 내가 아는 예수님, 성령님은 이렇다 하는 식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내 버리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의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내 머리 속으로 하나님, 예수님을 만들어버린다면 이것이 우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거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경 말씀에 붙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되겠습니다만, 성경에서 멀어지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당이나 미신처럼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에도 기도를 했더니 병이 나았다. 또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럼 그것도 미신이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것을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주님께서 능히 치료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다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26절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汚れた霊は人から出て行くと、水のない地をさまよって休み場を探します。でも見つからず、『出て来た自分の家に帰ろう』と言います。
帰って見ると、家は掃除されてきちんと片付いています。
そこで出かけて行って、自分よりも悪い、七つのほかの霊を連れて来て、入り込んでそこに住みつきます。そうなると、その人の最後の状態は、初めよりも悪くなるのです。」

그 사람에게 있었던 마귀 사탄이 나갔어요. 주님의 능력으로 나갔는지, 아니면 어쩌다가 그냥 나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나갔어요.

그런데 이 귀신이 나가서 떠돌다가 보니까 역시 내가 있던 곳이 좋았다. 구관이 명관이야. 다시 그 사람한테로 돌아가자 하고 가보았더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좋은 뜻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청소되었다는 것은 그 집이 비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주인이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인이 없이 장식,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좋은 줄 알고 꾸며 놓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누가 좋아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죠 귀신이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냐 하면, 자기 혼자 들어가는 것도 모자라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더니, 그 사람의 형편이 예전보다도 훨씬 더 나빠졌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교회를 가끔 병원과 같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뭐, 그 심정은 알 수 있어요. 몸이 아프거나 아니면 마음이 아플 때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치료받기 위해 가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감으로 해서 치료가 되면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갈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が、神の国はいつ来るのかと尋ねたとき、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神の国は、目に見える形で来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見よ、ここだ』とか、『あそこだ』とか言え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見なさい。神の国はあなたがたのただ中にあるのです。」

에어포스 원. 공군 1호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로 대통령 전용기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 전용기는 항상 공군 1호기인가 하면,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공군 1호기가 되는가 하면, 대통령이 탔을 때 그 비행기가 공군 1호기가 되는 것이지, 대통령이 타지 않았다면 그 비행기는 아무리 크고 호화로운 비행기라 하더라도 공군 1호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서 우리 몸에서 나쁜 바이러스가 빠져나갔다면 이제 더 이상 병원에는 갈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마귀 사탄이 나갔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을 비워둔 상태로 있다면 다시 그 악한 마귀가 돌아와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만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평소부터 우리 주님을 우리 마음 안으로 모셔 들여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이 되시고, 우리의 진리 되시고, 그리고 생명 되신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아서 우리 안에 가득 채웠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을 우리 안에 채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 말씀, 예수님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가장 기뻐하십니까.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サムエルは言った。「主は、全焼のささげ物やいけにえを、主の御声に聞き従うことほどに喜ばれるだろうか。見よ。聞き従うことは、いけにえにまさり、耳を傾けることは、雄羊の脂肪にまさる。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순종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순종을 하든지 복종을 하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 순종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최초의 인류를 창조하셨던 하나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바라셨던 것은 단 하나, 순종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나의 율법, 단 하나의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고는,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순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누가 필요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와 같은 불순종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계획을 짜고 난 다음에 이것을 하나님께 이대로 해달라고 강요하는 것이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신 계획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기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우리 마음에 모셔 오고, 예수님 말씀이신 성경 말씀으로 우리를 채움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되고, 우리가 올바로 주님의 계획에 따라 순종할 수 있게 되어, 예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 구원에 이르고, 마침내 천국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이르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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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0회 지혜로운 기다림
2022년 7월 24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3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6절~18절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6節~18節
“16.しかし、すべての人が福音に従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主よ。私たちが聞いたことを、だれが信じたか」とイザヤは言っています。
17.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18.では、私は尋ねます。彼らは聞か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いいえ、むしろ、「その響きは全地に、そのことばは、世界の果てまで届い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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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3번째 시간으로서 “지혜로운 기다림” 知恵ある待ち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 말씀이 특히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좀 쉽게 바꾸어 본 다음에 순서를 정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6절~18절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6.しかし、すべての人が福音に従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主よ。私たちが聞いたことを、だれが信じたか」とイザヤは言っています。
17.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18.では、私は尋ねます。彼らは聞か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いいえ、むしろ、「その響きは全地に、そのことばは、世界の果てまで届いた」のです。

우선 16절을 보시면,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すべての人が福音に従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어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철학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길이 있습니다. 교통수단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으로 가는 길,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우상을 통해서 갈 수도 없습니다. 다른 학문이나 고행을 통해서 갈 수도 없어요.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 가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복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이라면, 이를 사람들한테 전하면 그 복음의 능력으로 금방 하나님을 믿게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16절에 보니까 복음을 전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혹시 전도를 해보신 분들 중에서, 내가 분명히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성경에 보더라도 전도라는 것이 항상 잘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애당초 복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전해지는 것인가 하면, 17절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7.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이 말씀을 보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고, 그렇다면 무엇을 들어야 하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공식이 대단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자, 두 가지 말씀을 잘 비교해보십시다. 어느 쪽이 옳습니까.

1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목사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牧師先生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이 중에서 무엇이 옳습니까. 그렇죠. 당연히 1번입니다.

우리는 1번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면 2번을 따라가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에요. 성경을 올바로 모르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사가 주장을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꿈속에서, 또는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았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천사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라…… 

물론 주님께서 꿈으로도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6절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主は言われた。「聞け、わたしのことばを。もし、あなたがたの間に預言者がいるなら、主であるわたしは、幻の中でその人にわたし自身を知らせ、夢の中でその人と語る。


그렇지만 이 말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마치 자기가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꿈이나 환상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시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고 성경에 기록하잖아요. 이미 그런 사람들은 옛날부터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특히 예레미야에 많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14장 14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主は私に言われた。「あの預言者たち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している。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たこともなく、彼らに命じたこともなく、語ったこともない。彼らは、偽りの幻と、空しい占いと、自分の心の幻想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のだ。

예레미야 27장 15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

「わたしは彼らを遣わさなかったのに──主のことば──彼らは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してい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追い散らし、あなたがたも、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預言者たちも、滅びることになるのだ。」


예레미야 28장 15절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そこで預言者エレミヤは、預言者ハナンヤに言った。「ハナンヤ、聞きなさい。主はあなたを遣わされていない。あなたはこの民を偽りに拠り頼ませた。

예레미야 29장 9절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꿈을 꾸었다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하면서 거짓 말씀을 전하게 되면,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을 합니까.

여기에는 특별한 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그 말의 내용이 성경과 맞느냐 안 맞느냐 하고 비교를 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 성도님들 중에서 이를 구분하실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제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제멋대로 주무르고 싶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도님들, 가장 아끼는 성도님들은 어떤 분들이겠습니까.

믿음 좋아요. 금식도 많이 합니다. 기도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목사님 말씀이라면 무슨 말이든 충성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성경을 몰라야 합니다. 그래야 목사가 무슨 소리를 하든 그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100프로 충성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나쁜 마음을 가진 목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아는 성도님입니다. 목사가 무슨 말을 하면, 그건 성경과 안 맞는 것 같다고 알아차려요. 그렇게 되면, 나쁜 마음을 가진 목사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 로마서 강해로 말씀을 전해드리고 있는 이유도, 그리고 성경 필사를 당부 드리고 있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알아야지만 올바로 믿음이 자리잡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칭 교회라고 하는 곳에 대해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교리들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속인다 해도 그걸 다 믿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17절 다시 보실까요?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7.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이 말씀도 뒤집어서 보시면 알기 쉽습니다.

믿음은 들어야 한대요. 그러면 무엇을 들어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말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완성되었어요. 여기에 추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완전하고 모순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해요? 그렇죠. 들어야 합니다. 들으면 올바른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18절입니다.

로마서 10장 18절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8.では、私は尋ねます。彼らは聞か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いいえ、むしろ、「その響きは全地に、そのことばは、世界の果てまで届いた」のです。

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어요. 그렇다면 정말 그야말로 놀라운 말씀의 능력으로 듣는 사람마다 변화해서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안 믿어요. 말씀이 전해지지 않았나요? 아니요. 전하는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자, 여기까지가 16절~18절까지의 각 구절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17절, 18절, 16절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18.では、私は尋ねます。彼らは聞か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いいえ、むしろ、「その響きは全地に、そのことばは、世界の果てまで届いた」のです。
16.しかし、すべての人が福音に従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主よ。私たちが聞いたことを、だれが信じたか」とイザヤは言っています。

이렇게 하면 좀 이해가 쉽지 않을까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말씀을 전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말씀을 전했어요.

한 두 곳에만 전한 것이 아니에요. 땅 끝까지 전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땠대요? 예, 그들이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되셨나요?

자, 그럼 여기서부터가 본론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이 온 힘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아, 그래. 정말 전도는 힘들어. 내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니까……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인가요?

내가 전하는 말씀을 안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문제야……라고 하면서 무슨 남의 탓을 하라는 말씀인가 하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복음,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스스로는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비유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9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3.イエスは彼らに、多くのことをたとえで語られた。「見よ。種を蒔く人が種蒔きに出かけた。
4.蒔いていると、種がいくつか道端に落ちた。すると鳥が来て食べてしまった。
5.また、別の種は土の薄い岩地に落ちた。土が深くなかったので、すぐに芽を出した。
6.しかし、日が昇ると焼けて、根がないために枯れてしまった。
7.また、別の種は茨の間に落ちたが、茨が伸びてふさいでしまった。
8.また、別の種は良い地に落ちて実を結び、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になった。
9. 耳のある者は聞きなさい。」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을 예수님께서 해주시고 계시지요.


마태복음 13장 18절~23절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ですから、種を蒔く人のたとえを聞きなさい。
だれでも御国のことばを聞いて悟らないと、悪い者が来て、その人の心に蒔かれたものを奪います。道端に蒔かれたものとは、このような人のことです。
また岩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くと、すぐに喜んで受け入れる人のことです。
しかし自分の中に根がなく、しばらく続くだけで、みことばのために困難や迫害が起こると、すぐにつまずいてしまいます。
茨の中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くが、この世の思い煩いと富の誘惑がみことばをふさぐため、実を結ばない人のことです。
良い地に蒔かれたものとは、みことばを聞いて悟る人のことです。本当に実を結び、あるものは百倍、あるものは六十倍、あるものは三十倍の実を結びます。」


저는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니, 이왕 씨를 뿌리시려면 좀 제대로 보시고 좋은 땅에 뿌리시지, 아니, 길가에 뿌리거나 흙이 얇은 곳에 뿌리면 씨가 제대로 자라겠어요? 이건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를 뿌리는 쪽 잘못이다 하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은혜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이 뿌려졌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 안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별로 내 생활에 변화가 안 일어나요. 맨날 하루하루가 힘들고 도무지 나아지는 것이 없어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만약에 그랬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 상태가 콘크리트 같아서, 아무리 성경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까 마귀들이 그 말씀들을 쏙 빼앗아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조금씩 성경말씀을 좀 알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면 기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얼마 못 갑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의 본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 은혜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조금 지나면 또 본래대로 돌아가버립니다.

뭐 부흥회 같은 곳에 가서 분위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감동도 받기도 하는 것 같다가도, 집에 오는 길에 보면 금방 식어버려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바로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는 경우입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진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 성경이 무엇인지 알아요. 말씀의 씨가 뿌려지면 이해를 합니다. 감사함도 있어요. 하지만 문제가 뭐냐 하면, 싹이 나다가도 세상적인 요인 때문에 믿음이 안 자라는 경우입니다.

이게 어떤 경우겠어요.

예배요? 아이, 중요하다는 것 알죠. 성경요? 읽어야 한다는 것 알지요. 봉사요? 전도요? 이휴, 해야한다는 것 알지요. 누가 모르나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것입니다.

아휴, 하루하루 먹고 살다 보니까 왜 이렇게 바쁘고 시간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가시떨기인 것이에요.


아무리 땅이 좋으면 뭘 합니까. 결국은 조금 싹이 났다가도 이 가시떨기 때문에 막혀버려서 믿음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와 같은 가시떨기가 사라지고 내 마음이 진정으로 좋은 땅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주님의 말씀이 뿌려지고 주님의 사명이 뿌려졌을 때, 우리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말씀인 무엇인지, 그리고 행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요. 감사가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이 우리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가 없어요. 어디 감히 마귀 사탄이 내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덤벼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30배 60배 100배의 큰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씨를 뿌리는 비유에는 숨겨진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라는 지혜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각 나라마다 군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대를 언제 만들어요. 전쟁이 시작한 다음에 군대를 만듭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전쟁이 시작한 다음에 군대를 만들어봐야 이미 늦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그렇죠. 평소부터 군대가 있고 힘든 훈련도 해 가면서, 언제 어떠한 불상사가 터진다 하더라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문제가 터지고 난 다음에 성경을 읽기 시작해도 늦어요. 주님이 씨를 뿌리기 시작했을 때, 괭이를 찾으려고 해봐야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마지막으로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을까.

둘째는 주님이 뿌리시는 씨는 무엇인가.

이는 모두가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도 ‘말씀’이요, 주님께서 뿌리시는 씨도 ‘말씀’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もろは)の剣(つるぎ)よりも鋭く、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を分けるまでに刺し貫き、心の思いやはかりご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여러분, 단단한 콘크리트 같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 쉽게 좋은 땅이 될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교회 좀 다니고, 직분 좀 받고, 기독교 서적 몇 권 읽고, 부흥회 몇 번 다녔다고 우리의 마음이 바뀔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그 정도로는 안 바뀝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바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괭이이자,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이자,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드는 놀라운 비료인 것입니다.

항상 이와 같은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으면, 이제 언제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더라도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생각해보세요. 예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조용기 목사님이 그 동안 이 요한 3서 2절 말씀을 모르셨겠어? 아니요. 알고 계셨겠지요.

그러나 평소에 그 마음이 좋은 땅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요한 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라는 말씀을 주셨을 때, 그 말씀이 그 좋은 마음의 땅에 심어져서, 마침내 세계적인 교회를 세우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서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항상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놓고서 그리고 지혜로움으로 기다리면서, 마침내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뿌려졌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로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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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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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9회 전파하는 사람들
2022년 7월 17 설교 - 로마서 강해 92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3節~15節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14.しかし、信じ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呼び求めるのでしょうか。聞い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信じるのでしょうか。宣べ伝える人がい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聞くのでしょうか。
15.遣わされることが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宣べ伝えるのでしょうか。「なんと美しいことか、良い知らせを伝える人たちの足は」と書いてあるように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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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2번째 시간으로서 “전파하는 사람들” 宣べ伝える人た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13절은 지난 주에도 살펴본 부분입니다만, 이 구절은 다음 구절까지도 이어져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은 13절까지 포함해서 15절까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간단한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집에 계십니다. 그런데 밥을 먹으려고 해요.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밥을 지어야겠지요. 그럼 밥을 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 쌀을 씻어야겠지요. 그럼 쌀을 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쌀을 가지고 와야 하겠지요. 그런데 쌀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쌀을 사와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쌀을 사오고, 사온 쌀을 씻고, 그 쌀로 밥을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밥을 먹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본다면 밥을 먹는다는 것이 바로 최종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그냥 앞서 열거한 내용들을 무작정 다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바로 순서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서 쌀을 사와서는 그대로 밥솥에 넣어서 스위치르 누르고는, 그 다음에 밥을 씻어요? 그런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니까 해야 할 것을 그 순서에 맞게 모두 해야지만 마지막 목표인 밥을 먹는다는, 놀라운 임무를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지는 모릅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구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최종목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0장 13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즉,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비싼 돈을 내고 입시학원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입시학원에서 수석도 했어요. 그런데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입시학원에 다니는 유일한 목표가 그 학원에서 1등 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건 다 완벽하게 했는데 결정적으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아무리 그 입시학원에서 수석을 했다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직분도 받았습니다. 헌금도 많이 냈습니다. 교회도 많이 세우고, 뭐 여러가지 일들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했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마지막 날에 한 분도 남김없이 모두 구원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 하면, 일단 확인을 위해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3節~15節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14.しかし、信じ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呼び求めるのでしょうか。聞い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信じるのでしょうか。宣べ伝える人がい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聞くのでしょうか。
15.遣わされることが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宣べ伝えるのでしょうか。「なんと美しいことか、良い知らせを伝える人たちの足は」と書いてあるようにです。”

자,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으시면서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최종목표는 무엇이었죠? 그렇죠. 13절에 있는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대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잖아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씀이 13절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わたしに向かって『主よ、主よ』と言う者がみな天の御国に入るのではなく、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みこころを行う者が入るの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저 입버릇처럼, 아니면 남들한테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지난 주에 마태복음 14장 30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람을 보고 베드로가 물에 빠져갈 때에 주님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냥 입버릇처럼 부른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정말 필사적이었습니다.


“주님!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의지할 수가 없어요!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구원해주세요!”

이와 같이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됐죠?

그러면,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14절 전반부를 봅니다.

로마서 10장 14절 전반부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しかし、信じ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呼び求めるのでしょうか。

자,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아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다고 해요.

14절 전반부 말씀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아니, 주님을 믿어야 주님의 이름을 부르든지 말든지 하지,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부르느냐 하는 것이에요.


이는 당연한 말씀이지요?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의지한다는 말씀인데, 주님을 믿어야 의지하든지 하지, 주님을 믿지도 않는데 어떻게 의지하겠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된대요? 예,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그러면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 하면,

14절 중반부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聞いたことのない方を、どのようにして信じるのでしょうか。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물론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도 되지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포함된다고 하겠지요.

보거나 듣지도 못한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보고 듣는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어떻게 하면 듣게 될까요.


14절 후반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宣べ伝える人がい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聞くのでしょうか。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그 때까지는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했는데, 가만히 혼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신 분 혹시 계신가요.

그런 경우는 없겠지요. 대부분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듣게 되거나, 아니면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접하게 되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다 주님에 대해서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파하는 자가 필요하다고 기록합니다.

전파하는 자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리고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책이나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은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사람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파하는 자>입니다.

자, 조금만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전파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다음 구절 로마서 10장 15절 전반부를 봅니다.

로마서 10장 15절 전반부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15.遣わされることがなければ、どのようにして宣べ伝えるのでしょうか。

주님에 대해서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파하는 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전파하는 자는 자기가 혼자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를 정리해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최종목표가 무엇이었지요? 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시작이 어디냐 하면,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듣기 위해서는 주님에 대해서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해서 전파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좀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분이 계시다면, 이를 뒤집어보면 더욱 알기 쉬워집니다.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주님을 전파합니다. 그러면 그 전파하는 사람을 통해서 주님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 들으면 주님을 믿게 되지요. 그러면 주님을 부르게 되고, 주님을 부르게 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좀 이해가 되셨나요?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물론 마지막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지요. 하지만,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일 처음 있는 사람,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잖아요. 이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없다면 그 이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어서 비로소 모든 사역들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1번 목사, 2번 기타.

특히 한국에 가끔 보면 목사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신성시 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목사가 신성합니까.

예를 들어서 보면요, 성가대가 있잖아요. 저도 한국에서 성가대 생활을 몇 년 했었습니다만, 성가대의 성자가 거룩하다는 글자잖아요. 그러면 성가대원들은 모두 거룩한 건가요? 아니에요.

성가대원이 거룩해서 성가대인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가대인 것이지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이른바 성직자라고 합니다만, 이는 목사가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직자인 것이지요.

요즘도 아직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한국에서 제가 다니던 교회에 보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설교를 하시면서, “……뭐뭐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목사인 자기랑 성도님들은 다르다는 건가요?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인지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가 저면, 성도님들은 숟가락입니까. 예, 잘 이해가 안 되셨다면, 집에 가서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ㅎㅎ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꼭 목사나 교역자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보내심을 받았을까요.

간단합니다.

성경은 누구 읽으라고 있는 책입니까. 목사만 읽으라고 있는 책이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 더 구체적으로는 나 읽으라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1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2번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

그렇죠.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어디에 나와 있을까요.

예,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20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しかし、ペテロとヨハネは彼らに答えた。「神に聞き従うよりも、あなたがたに聞き従うほうが、神の御前に正しいかどうか、判断してください。
私たちは、自分たちが見たことや聞いたことを話さないわけにはいきません。」

이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지난 주에 살펴본 베드로와 비교하면 어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중에 천국 갔을 때 베드로한테 혼 날지 모릅니다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물속에 빠질 뻔한 베드로에 비하면, 지금 이 베드로, 많이 컸쵸?

지금의 베드로는 예수님한테 혼이 났던 작은 믿음을 가졌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어요. 한 두 번 보았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며칠 동안 보이셨다고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어요. 이제 사도들은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파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물며 죽음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보고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보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 또한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의문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설교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축복을 받습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만나서 축복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는 말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보면 좀 마음이 공허했던 기억이 있어요. 왜냐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요. 성경책을 펼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럼 성경책을 읽기만 하면 내 인생이 변해요? 성경책만 읽으면 축복 받나요? 그건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오늘은 여러분도 집에 가시는 길에 공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주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자, 지난 주에 공부했던 베드로, 아직 믿음이 작았던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바람을 보는 바람에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삶, 순간순간마다 감사한 마음이 드시나요?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주일 아침이라면 씻고 준비하고 교회까지 왔다가 집에 가는 하루……평일이라면 출근 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 자고 다음 날 일어나고……이와 같은 우리의 정말 평범한 삶을 보았을 때, 어느 시점에 우리는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좋은 일이 있었을 때? 그 때만 감사를 드리면 되고 나머지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나요?

우리에게 감사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크나큰 축복을 축복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탄탄하고 평탄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냥 한 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작은 그림자가 보이는데, 정밀 검사를 좀 해봅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나 직장 문제, 가족문제,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깨닫게 됩니다.


“아아, 내가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지내왔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 사실은 하루하루가 크나큰 축복의 연속이었구나

나는 평탄한 길을 내 힘으로 걷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출렁이는 물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구나.

사실은 그 때 순간순간마다 내가 빠지지 않도록 주님이 나를 지켜주고 인도해주시고 계셨던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할까요. 저는 솔직히 주님을 하루하루 만나고 있습니다. 이는 자랑이 아니에요. 그리고 또한 제가 목사라서 그렇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지금 상황을 본다면 한국에 있는 교단에서 선교비가 지원되는 것도 아니요, 여기 일본에서 생활에 필요한 월급을 꼬박꼬박 받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본다면, 이는 과장이 아니라 벌써 몇 년 전에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비자 걱정도 없지요. 제 아내도 취직할 수 있고, 저도 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어느 정도는 생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국을 비롯해서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선교 후원을 해주십니다. 솔직히 얼마나 놀라운 지 몰라요. 이와 같은 손길 덕분에 하루하루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분들께 복을 안 주신다면 누구한테 주실까. 분명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이 있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저는 어떻습니까.

이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야말로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보고 듣고 주님을 느끼면서, 그리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이는 조금도 과장이 아닌 제 진심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평탄한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가 없다면 주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서 감사가 넘쳐나오게 되고,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목사인 저나 여러분이나 똑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 마음에는 한 가지 분명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제 마음 안에 깊이 박힌 말씀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여러분이 복음을 전파하면 크나큰 축복이 함께 하시겠지만, 목사인 제가 복음을 전파하면 본전이고, 전파하지 않는다면 나한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회사원이 회사 다니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자랑인가요? 아니요.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혼이 날 일이 아니겠습니까.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을 안 하면 직장에서 짤리듯이 제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제 할 일을 안 한다면 어찌 제가 주님으로부터 꾸짖음을 안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든 아니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이고,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나야 하는데, 이는 바로 감사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순간순간마다 감사함 속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아름답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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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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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8회 구원해주시는 주님
2022년 7월 1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91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1절~13절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1節~13節
“11.聖書は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だれも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
12.ユダヤ人とギリシア人の区別はありません。同じ主がすべての人の主であり、ご自分を呼び求めるすべての人に豊かに恵みをお与えになるからです。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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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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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1번째 시간으로서 “구원해주시는 주님” 救ってくださ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본문을 하나하나 간단하게 살펴보고 난 다음에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한 전체적인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입니다.

로마서 10장 11절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聖書はこう言っています。「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だれも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

<일본 로마서 <恥を見ることがない>라고도 할 수 있음>

여기서 “성경에 이르되”라고 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직까지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성경”이라고 하면 구약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인용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사야 28장 16절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저는 49장 23절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이사야 49장 23절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사야 49장 23절 후반부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を待ち望む者は恥を見ることがない。」

사람들은 육체적 고통 보다도 정신적 고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치를 당하는 것을 괴로워 합니다. 차라리 돈을 잃거나 매를 맞는 게 낫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나 또는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을 인용함에 있어서 새로운 단어를 추가시켰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누구든지’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だれも 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면 바로 다음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10장 12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2.ユダヤ人とギリシア人の区別はありません。同じ主がすべての人の主であり、ご自分を呼び求めるすべての人に豊かに恵みをお与えになるからです。

우선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풍성한 복이나 은혜, 넘치는 축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이미 로마서 3장에서도 나왔습니다.

로마서 3장 29절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それとも、神はユダヤ人だけの神でしょうか。異邦人の神で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うです。異邦人の神でもあります。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교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나이가 젊거나 어린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모든 이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믿는 사람”, “주님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찾고,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피를 흘려 주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모든 축복을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불러야 하겠습니까. 부르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주님을 불러야 하겠지요.

로마서 10장 13절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主の御名を呼び求める者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

우리가 구원을 받을 조건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주님을 부름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성경 속에서 기억 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은 베드로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부터 32절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있으신 분은 찾아보시길 바라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32절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22.それからすぐに、イエスは弟子たちを舟に乗り込ませて、自分より先に向こう岸に向かわせ、その間に群衆を解散させられた。
23.群衆を解散させてから、イエスは祈るために一人で山に登られた。夕方になっても一人でそこにおられた。
24.舟はすでに陸から何スタディオンも離れていて、向かい風だったので波に悩まされていた。
25.夜明けが近づいたころ、イエスは湖の上を歩いて弟子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た。
26.イエスが湖の上を歩いておられるのを見た弟子たちは「あれは幽霊だ」と言っておびえ、恐ろしさのあまり叫んだ。
27.イエスはすぐに彼らに話しかけ、「しっかりしなさい。わたしだ。恐れることはない」と言われた。
28.するとペテロが答えて、「主よ。あなたでしたら、私に命じて、水の上を歩いてあなたのところに行かせてください」と言った。
29.イエスは「来なさい」と言われた。そこでペテロは舟から出て、水の上を歩いてイエスの方に行った。
30.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主よ、助けてください」と叫んだ。
31.イエスはすぐに手を伸ばし、彼をつかんで言われた。「信仰の薄い者よ、なぜ疑ったのか。」
32.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예수님은 보통 제자들과 함께 이동하시고, 배도 함께 타시곤 하셨는데, 그날따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먼저 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셨다고 해요.

이유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적지 않게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 전인 마태복음 8장 23절~27절에 보시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막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칩니다. 그래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살려 주셨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들끼리만 배를 타고 가다가 혹시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열두 사도 중 최소한 몇 명 정도는 가졌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쩌면 몇몇 제자들은, 아이, 예수님, 그러지 마시고 우리랑 같이 가시지 그러세요……라고 미적거리는 제자들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4장 22절에 보시면,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재촉하셨다고 해요.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토록 재촉까지 하시니 어쩌겠어요. 불안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자기들끼리만 배를 타고 떠납니다.

아이쿠 그런데 이 불안감이 적중했어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파도가 치기 시작합니다. 24절에 보시면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상황이라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사실 그 배에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배 타는 법을 책으로 배운 것이 아니에요. 아주 어릴 때부터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몸에 배인 사람들이에요.

배에 대해서라면 경험이 아주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한테도 속수무책입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얼마나 지난 다음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을까 한 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노 젓는 배의 속도가 대략 시속 5킬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보면 건너편까지 거리가 8킬로 되는 곳도 있고, 12킬로나 21킬로 정도 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미 많은 거리를 왔는데 아직 갈 길이 멀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아마도 예정된 항해 거리 중에서 거의 중간 지점에서 폭풍을 만났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예정된 항해 거리가 8킬로였다는 중간 거리는 4킬로가 되고, 12킬로의 중간지점이라면 6킬로, 21킬로의 중간 지점은 10.5킬로입니다.

배 속도를 5킬로라로 잡는다면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한 그 중간지점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빠르면 1시간 정도, 아무리 늦어도 2~3시간 정도가 되겠지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23절에 의하면 시간 순서를 보면 제자들을 보내시고 산에 오르시니까 해가 저 물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해가 저물기 전에 배를 타고 출발했다는 것이 되고, 그리고 폭풍이 일어나기까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시간 정도로 잡는다면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간은 몇 시쯤 될까요?

계절이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 때 일몰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략 오후 6시라고 하고, 그리고 최대한도로 잡아서 3시간 뒤에 폭풍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오후 9시가 되겠지요?


자, 밤 9시에 폭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미 육지와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어떻게든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영화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습니다만,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힘든 시간이 몇 시간 정도 계속 됐을까요.

25절에 보면 ‘밤 사경’(夜明けが近づいたころ)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밤을 셋으로 구분하고,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넷으로 구분했다고 하는데, ‘사경’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그리스 로마 식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1경은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2경은 9시부터 12시까지, 3경은 12시부터 3시까지, 그리고 4경은 3시부터 6시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밤이 6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니까, 일몰을 6시로 잡는 것이 적당하다고 하겠지요.

자, 해가 지기 전에 제자들이 출발했으니 오후 6시 전에 출발했어요. 그리고 가장 늦게 폭풍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밤 9시입니다. 그리고 4경 중에서 제일 이른 시간이라고 하면 밤 3시에요.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폭풍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고 단 한 마디로 적혀 있습니다만, 그 고난 당했던 시간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밤 9시에서 새벽 3시까지인 6시간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최소한 6시간 이상 너무나도 힘들고 죽음과 직면한 상황을 보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숙한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6시간이나 파도와 사투를 벌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짐을 다 바닷속으로 던져버립니다.

그러니 먹을 것이라고 있겠습니까.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배가 뒤집히게 생겼는데, 밥은 고사하고 물도 마실 새가 없었을 것입니다.

잠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면서 난리를 쳤으니, 이미 체력은 바닥이 났고, 정신도 혼미해졌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출렁이는 바다 위로 걸어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물론 그 밤에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 오신다고는 상상도 못했겠지요. 그리고 아직 해가 뜨기 전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파김치가 된 상태였겠지요.

사람이 이 지경이 되면 예수님 조차도 유령으로 보일 때가 있다는 사실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정말 힘들 때에는 성경도 보기 싫어지고 기도도 하기 싫어집니다. 그리고 무엇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 무엇이 주님의 뜻에 안 맞는지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기서 우리를 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있자 주님은 자신을 밝히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만약에 주님이시거든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오라고 해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오라!” 「来なさ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배에서 뛰어내렸더니, 풍덩 하고 빠지지 않고 저벅저벅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전히 바람은 불어오고 파도는 위 아래로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 위를 걸으면서 예수님한테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배에 있던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아마도 베드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 온 몸이 곤비한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파도 위에 서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고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더니 그 때까지 자신을 받쳐주던 바다가 힘을 잃더니만 물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0절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ところが強風を見て怖くなり、沈みかけたので、「主よ、助けてください」と叫んだ。

사실 이 장면도 우리는 한순간에 풍덩 하고 빠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폭풍 속에서 물속으로 빠져버렸다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여러 번역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빠진다>는 것이 진행형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 성경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한국어 성경에도 “빠졌는지라”가 아니라 “빠져 가는지라” 라고 역시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한번에 물속으로 풍덩 하고 빠진 것이 아니라, 점점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 소리를 질렀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를 탔을 것입니다. 수영도 남부럽지 않은 실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몰아치는 폭풍과 파도 속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가 의지했던 것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입니다. 주님 만이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다. 주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그래야 살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4장 31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イエスはすぐに手を伸ばし、彼をつかんで言われた。「信仰の薄い者よ、なぜ疑ったのか。」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가 빠지게 된 것은 예수님 잘못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빠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 꾸짖으셨습니까. 그를 살려내고 꾸짖으셨습니까. 아니면 꾸짖으신 다음에 살려 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단 살려 놓으셨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우선 급한 불은 꺼야 하잖아요.

지금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네가 무엇을 잘못해서 지금 죽어가는지를 설명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일단 먹을 것을 주고 살려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남은 언제 구원해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즉시> すぐに 구원해 주셨어요. 참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즉시 구원해주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지요?

마태복음 14장 32절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그렇습니다. 주님과 함께 배에 오르기 전에는 여전히 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쳤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배에 오르게 되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도 잔잔해 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배에 돌아온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좀 짓궂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위를 걸었을 때만 해도 얼마나 놀랍고 자랑스럽고 기뻤을까요. 하지만 그의 믿음이 사라지자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없이 소리쳐서 간신히 구원을 받고는 배로 돌아왔지요.

어쩌면 이 모습을 배에서 보고 있었던 제자들은, 글쎄요, 직접 말은 안 했더라도,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잘난 척 하고 나서더니만 아주 꼴 좋다”라고 생각한 제자들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요. 아휴, 마지막까지 내가 믿음을 지켰더라면 예수님한테 칭찬도 받고 다른 제자들한테도 인정도 받았을 텐데, 괜히 내가 순간적으로 방심을 해버려서 창피만 당하게 됐다……어쩌면 베드로도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자,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알고 보면 주님이 없는 우리의 삶은 바람에 약합니다. 파도에 약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그 사실을 몰라요.


허, 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네, 예수님 없이도 별 문제 없잖아. 내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뭐, 귀찮게 교회 다니고 그럴 필요 있겠어?

그러나 바람이 불어옵니다. 파도가 몰아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아끼고 아끼던 돈이나 재산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고통과 고난이 닥쳐옵니다.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온통 슬픔과 괴로움으로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폭풍과 파도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 주님만을 믿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랬더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삼키려고 달려들었던 파도가 내 발을 받혀줍니다. 내게 해를 끼칠 줄 알았던 파도가 이제 나의 길이 되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믿음이구나. 정말로 놀랍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 때는 할렐루야! 하면서, 정말 뭐라도 빼줄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물에 빠지기 시작한 베드로의 믿음이 언제 사라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바람을 보았을 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길을 가기 시작했다면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바람을 보았습니다.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무서워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믿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에서 <무서움>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여기서 <경외하다>는 것은 무서워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이 순간 그는 예수님의 힘보다도 바람의 힘을 보고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순종합니다.

우리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다면 우리는 바람에게 순종한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에게 순종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한테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람도 다스리고 파도도 다스리고, 그리고 우리 모두를 다스리시는 주님, 이 세상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께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불어 닥치던 바람이 언제 멈추었다고 했지요?

마태복음 14장 32절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そして二人が舟に乗り込むと、風はやんだ。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람과 파도 속에서, 연이어 터지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우리 인생에 모셔드리게 되면, 바람이 그치게 됩니다.

파도가 잔잔하게 됩니다.

물속으로 빠지게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길이 평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장 21절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人の道は主の御目の前にあり、主はその道筋のすべてに心を向けてくださる。

이제 이 세상에서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며 폭풍 속에서 고난을 당하며 살아갔던 우리의 모습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부르며 나아갈 때,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 받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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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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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7회 믿음과 시인
2022년 73 설교 - 로마서 강해 90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9節~10節
“9.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10.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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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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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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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90번째 시간으로서 “믿음과 시인” 信仰と告白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은 본문의 구성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9절을 봅니다.

로마서 10장 9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9.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이 본문을 보면 구성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입으로 시인(口で告白)>하는 것이고, 뒤에서는 <마음으로 믿음(心で信じる)>이라는 구성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입으로 시인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쉽게 말해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지요.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 하면,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게 돼요.

내 인생에 있어서 내가 주인인데 누구를 의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내가 막 기도를 열심히 해요. 내가 이걸 하고자 합니다. 저걸 하고자 합니다. 이걸 해주세요. 저걸 해주세요……아니,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바를 주님께 말씀 드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생겨날까요.


예를 들어서 비행기 조종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즘 비행기 특히 여객기 같은 경우는 대부분이 컴퓨터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경로를 입력을 해놓으면 대부분 자동 조종으로 목적지까지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능한 조종사와 미숙한 조종사의 차이가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그럼 그 차이는 어디서 나타날까요. 그것은 바로 위급상황 때 나타납니다.

제가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들은 바에 의하면, 평소에는 자동 조종을 하게 되지만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수동으로 전환을 한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사람 손으로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조종 실력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누가 믿음이 좋고 누가 믿음이 부족한지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러면 언제 차이가 나느냐 하면 바로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입니다.

이걸 해주세요. 저걸 해주세요……라는 기도는 누구나 다 하지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기도를 하지 않나요? 아니요.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있어서의 위급상황이 언제일까요.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내가 이걸 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저걸 해달라고 기도를 분명히 했어요. 그런데 기도 응답을 못 받았어요.

이럴 때 믿음이 아직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아니, 내가 기도를 했는데 왜 안 들어 주냐고 불평을 말합니다. 불만을 토합니다. 그러면서 실망을 합니다. 좌절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당장은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지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거야. 더 좋은 것으로 내게 주실 거야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하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은 우리 기도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이요,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고 계십니까.

사실 입으로 시인은 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자주 시인을 하고 계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 때마다 시인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인을 하십니까.

예, 바로 예배 첫 순서로 드리는 사도신경이 그 시인을 하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기도문은 말 그대로 기도입니다만, 사도신경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몇 년 다니게 되면 사도신경 정도는 외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의미를 제대로 아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이 그냥 습관적으로 외우기만 해요. 이렇게 그냥 외우기만 하게 되면 입으로 시인은 하는 것이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믿는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우리의 소중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사도신경의 이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에 ‘사도’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정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백인지 여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도신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변해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변해왔느냐 하면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로 근현대까지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무엇이 진정한 해석이고 무엇이 잘못된 해석인지가 점점 명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하는 것, 그 핵심이 정리되어왔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보면서 당연하다고 여기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노력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가 되실 줄 믿습니다.

먼저 첫 줄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我は天地の造り主、全能の父なる神を信ず。

세상 사람들은 우주나 지구 나아가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생물들이 자연의 힘으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세포 생물에서 진화를 하게 되는데, 자손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유전자 복제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아데닌은 티민과 결합하고 시토신은 구아닌과 결합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서 어쩌다가 실수로 엉뚱한 것끼리 결합을 하는 일이 발생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돌연변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생물들은 유전자의 결합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난 실수의 결과물인 돌연변이로 진화를 거듭해서 결국 사람까지 탄생하게 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결코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천하만물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나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我はその独り子、我ら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ず。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장 3절과 빌립보서 2장 6절에서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기록하고,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見えない神のかたち)”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主は聖霊によりてやどり、おとめマリヤより生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유전자를 이어 받아서 자녀가 태어나게 되는데,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도 이 예언은 계속됩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 예언의 성취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넷째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ポンテオ・ピラトのもとに苦しみを受け、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이 부분에서 고민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에 보면 당시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석방을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은 빌라도라기보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는 다른 한국어 번역이나 외국어 번역을 비교해보면, 직접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께 고난을 주었다기보다는 빌라도 밑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를 로마에서 통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일정 부분에 대해서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어긴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처벌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형에 처하는 것은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1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そこで、ピラトは言った。「おまえたちがこの人を引き取り、自分たちの律法にしたがってさばくがよい。」ユダヤ人たちは言った。「私たちはだれも死刑にすることが許されていません。」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원했던 것은 예수님을 가두거나 고통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죽음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로마 총독한테까지 예수님을 끌고 갔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그렇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죽음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세상적인 힘에 의해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고 이해해야 정확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입니다.

十字架につけられ、死にて葬られ、陰府にくだり、


예수님이 단순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는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キリストは、ご自分が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者となることで、私たちを律法ののろ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みな、のろ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한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으로서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신 이유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모두 받아 주셨다고 하는 놀라운 은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三日目に死人のうちよりよみがえり、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멸망을 당해야 마땅한데, 죄가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바로 ‘용서’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껏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부활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神は主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が、その御力によって私たちも、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います。

부활은 예수님 스스로가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고 하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하늘에 오르사,”
입니다.

天に昇り、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부활 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단지 이 땅에서 편하게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을 보시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全能の父なる神の右に座したまえり。かしこより来たりて生ける者と死にたる者とを審きたまわん。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이는 단지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하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은 이제 다시 오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마태복음 24장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마가복음 13장 26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そのとき人々は、人の子が雲のうちに、偉大な力と栄光とともに来るのを見ます。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이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기록은 성경에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실 때에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정말 누추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에는 큰 권능과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심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을 믿사오며”

我は聖霊を信ず。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누구는 성령님을 단순히 무슨 천사와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간단한 문제를 하나 낼까요? 천사는 조물주입니까, 아니면 피조물입니까.

요한계시록 19장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10.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이 천사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자, 천사가 말하기를 자신들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즉, 천사는 우리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 이와 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우리의 믿음을 정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 조심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음에 열거된 것을 모두 ‘믿사옵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무엇을 믿냐 하면 <거룩한 공회(聖なる公同の教会、)>를 믿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를 굳이 <공회>라고 할 필요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천주교에서 온 개념이 좀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넓은 의미의 교회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 즉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데, 교회는 거룩한가요? 만약에 거룩한 이유를 묻는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아, 그야 예배를 드리는 곳이니까 거룩하죠……가 아니라, 항상 그 질문의 답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また、御子はそのからだである教会のかしらです。御子は初めであり、死者の中から最初に生まれた方です。こうして、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第一の者となられました。

교회의 머리는 목사나 건물주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성경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거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건물이나 공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이 주님의 몸 되신 교회요 주님이 머리 되신 거룩한 교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입니다.

聖徒の交わり、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 다닐 때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아, 우리가 길을 건너거나 할 때에도 지켜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말씀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많이 보이는 것이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는 <믿음>을 열거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쉽게 말해서 성도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믿는다? 그게 무슨 신앙고백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성령님과 우리와의 교제입니다. 성령님은 저 멀리 군림하고 계신 하나님의 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내주신 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영이라는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한1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神が私たちに御霊を与えてくださったことによって、私たちが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私たち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ることが分かります。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두 번째의 교제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바로 모임에 있어서의 교제입니다.

간혹 믿음에 있어서 교회는 필요 없다는 식의 교회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사도행전 2장 46절~47절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そして、毎日心を一つにして宮に集まり、家々でパンを裂き、喜びと真心をもって食事をともにし、
神を賛美し、民全体から好意を持たれていた。主は毎日、救われる人々を加えて一つにしてくださった。

사람들은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함께 모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힘썼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ある人たちの習慣に倣って自分たちの集まりをやめたりせず、むしろ励まし合いましょう。その日が近づいていることが分かっているのですから、ますます励もうではありませんか。

교회가 필요 없다, 모일 필요가 없고 그저 혼자서 잘 믿으면 된다? 그와 같은 주장은 성경과 철저하게 배치되는 말에 불과합니다.

물론 알지요. 교회에 모이면 이런 저런 문제들이나 다툼도 생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의 문제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세요. 이미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여러 문제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을 알아가게 되면서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자,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입니다.

罪の赦し、

우리의 죄는 누가 사해 주십니까. 유명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사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からだのよみがえり、永遠の命を信ず。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해결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그리고 영생인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神は彼らの目から涙をことごとくぬぐい取ってくださる。もはや死はなく、悲しみも、叫び声も、苦しみもない。以前のものが過ぎ去ったから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もはや夜がない。神である主が彼らを照らされるので、ともしびの光も太陽の光もいらない。彼らは世々限りなく王として治める。

이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몸이 다시 사는 것,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간략하게 나마 우리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그래도 좀 쉬운 말씀으로 전해드린다고 했는데, 그래도 다소 어렵다고 생각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갑자기 순간적으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올 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빨리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믿음을 굳건히 세우고 싶은데, 너무 말이 길어서 잘 떠오르지 않아요.

그럴 때를 위해서 제가 아주 짧고도 강력한 신앙고백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사도신경은 어떻게 시작하지요? 전능하사……예, 그렇습니다. 거기까지. 그 한마디 말씀으로도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전능하사……

全能の父なる神を信ず。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꽤 유능한 하나님, 꽤 능력 있는 하나님, 꽤 쓸모 있는 하나님,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무슨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무슨 걱정 근심 불평 불만이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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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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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6회 말씀까지의 거리
2022년 6월 2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9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8절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8節
“8.で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みことば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る。」これは、私たちが宣べ伝えている信仰のことばの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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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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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9번째 시간으로서 “말씀까지의 거리” みことばまでの距離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 주에 전해드렸던 말씀에 대해서 잠시 복습을 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본문에서는 그 누구도 사람의 힘으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모셔 올 수 없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죽음까지 내려가서 예수님을 일으켜드릴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신 기쁨과 소망은 물론이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용서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난 주에는 그 본문이 신명기 30장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지난 주에는 로마서의 내용만 살펴보고, 원문인 신명기는 이번 주에 살펴보겠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래서 이번 주는 인용된 부분의 원문인 신명기 30장 11절~13절까지,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14절도 함께 살펴볼까 합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 30장 14절이 바로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 8절에서 인용한 원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명기 30장 11절~14절을 보시겠습니다.


신명기 30장 11절~14절
“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1.まことに、私が今日あなたに命じるこの命令は、あなたにとって難しすぎるものではなく、遠くかけ離れたものでもない。
12.これは天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天に上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13.また、これは海のかなた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海のかなたに渡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14.まことに、みことばは、あなたのすぐ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って、あなたはこれを行うことができる。

모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전하면서, 이는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지키기가 어렵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다면 무엇이 필요 없었을까요?

그렇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었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만 보더라도 600개가 넘는데 그걸 어떻게 모두 완벽하게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주 작은 율법 하나를 어기는 것은 율법 모두를 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잖아요.

이는 말하자면 형법 중에서 작은 죄 하나를 저질러도 형법 모두에 있는 죄를 다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걸어가다가 신호등 하나 어긴 것만 가지고도 살인죄를 포함해서 온갖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럼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어떤 벌을 받게 됩니까. 그렇죠. 죽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고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웬만한 한국어 성경이나 일본어 성경에는 다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 하고 이런저런 영어 성경을 보니까 딱 하나 KJV, 한국어로 하자면 흠정역이라고 하는 킹제임스 영어 성경 번역본에 힌트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는 지키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로 하자면 숨겨진 것, 가려진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너희들이 지켜야 할 것은 내가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다 말했다. 비밀로 가려 놓거나 숨겨놓은 것은 하나, 모두 다 공개했다, 모두 다 너희에게 알려주었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자 그 다음에 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11절 마지막에는 ‘먼 것도 아니라(遠くかけ離れたものでもない)’라는 말씀, 이 부분도 KJV에 보니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보면 KJV는 분명 ‘거리’를 강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이 ‘거리’에 대한 의미가 강하지 않나 합니다.

신명기 12절과 13절을 보면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신명기 30장 12절~13절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2.これは天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天に上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13.また、これは海のかなたにあるわけではないので、「だれが私たちのために海のかなたに渡り、それを取って来て、私たちが行えるように聞かせてくれるのか」と言わなくてよい。

이것을 보면 옛날에 즐겨봤던 서유기가 떠오릅니다. 거기에 나오는 손오공이나 사오정, 저팔계 등은 물론 상상 속의 등장인물입니다만, 삼장법사는 실존 인물이었지요. 중국의 승려였던 삼장법사는 현재 인도 쪽인 천축까지 가서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중국 장안을 출발해서 무려 16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떨까요. 한국이나 일본 사람이 성경을 가져오기 위해서 저기 이스라엘이나 그리스까지 머나먼 여행을 했다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복음이 전해집니까. 그렇죠.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먼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습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자유롭게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보시면 성경책이 어느 정도 있으십니까. 교회에 몇 년 다니신 분들 댁에 보시면 적어도 교회에 다니시는 사람 수 이상으로 성경책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만 보더라도 놀라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과 천년도 안 된 책들이 국보라고 하는데, 수천년도 더 된 성경책이 집에 막 굴러다녀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어요. 이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저희 교회만 하더라도 개역한글이나 일본 신개역 제3판 성경 같은 책은 너무나도 많아요. 좀 가져가셔서 보실 분들은 가져가셔도 될 만큼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안 가져가실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 댁에도 많이 있을 거거든요.

이처럼 우리에게는 말씀이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펼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4절도 보세요.

신명기 30장 14절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4.まことに、みことばは、あなたのすぐ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って、あなたはこれを行うことができる。

이는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 8절과 함께 볼까요?

로마서 10장 8절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8節
“8. では、何と言っていますか。「みことば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にあり、あなたの心にある。」これは、私たちが宣べ伝えている信仰のことばのことです。”

하나님의 가르침이 하늘에 올라가서 가져오거나, 먼 바다를 건너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치 우리들 집에 여기저기 있는 성경책처럼 대단히 가깝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종이 책이 아니더라도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성경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오셨을 때를 보세요. 예수님이 어디 한 곳에서 꼼짝도 안 하시면서, 얘들아, 너희들이 와서 내 말을 듣고 싶으면 오고, 아니면 말고……였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밤이나 낮이나 정말로 부지런히 온 이스라엘을 누비셨습니다.


바울도 3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얼마나 많은 거리를 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역사적 기록들을 보면 예수님을 팔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다면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열 두번째 사도가 된 맛디아를 포함해서 모두가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지금도 한국이나 일본이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목사님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만 보더라도 조용기 목사님 같은 경우는 전세계 80개국을 방문했는데 전체 여행 거리가 지구를 120바퀴나 되는 거리를 돌면서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고, 한국도 방문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평생 동안 전세계 방방곡곡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 그 인생을 바치셨습니다.


뭐 제가 그런 분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매주 전도지를 들고 군마현 여기저기를 찾아 뵙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전도지를 가져가면 정말 반갑게 맞아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다 그런 건 아니거든요. 제가 들어가면 싸한 분위기가 감도는 경우도 있고, 또는 오지 말라는 곳도 있습니다.

전에도 전도를 하면서 어디를 가니까, 자기는 사실 다른 교회에 나가고 있는데, 거기 목사님이 제가 나누어 드린 전도지를 보셨대요. 그래서, 그 분이 그 목사님한테, 이카호 교회 목사님은 참 열심히 전도를 하고 다니신다는 말을 했더니만, 그 목사님이 그 전도지를 보고 싫어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이 저더러 하시는 말씀이 정말 죄송한데 다음부터는 안 오셔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오지 말라고 하면 안 갑니다. 하지만 거부하지 않은 경우는 끝까지 나누어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촬영을 하고 메일을 보내드립니다. 거기 보시면 제가 종이를 들고 계좌번호를 말하면서 선교후원을 부탁 드리거든요. 그런데 지난 번에는 어떤 분이 저한테 메일을 보내시면서 하는 말씀이, 그러는 게 창피하지 않냐고 해요.


아니, 저라고 자존심이 없습니까. 돈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돈 달라고 매번 종이 들고 부탁 드리는 것이 왜 창피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제 알량한 자존심 하나 상함으로 해서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게 대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복음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이 어디에 있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기 전에 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와 얼마나 가깝게 계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도 우리와 함께 있고 주님도 우리와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이 멀리 있고 주님도 멀리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어려움이 닥쳐오면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데, 주님이 저 높은 하늘이나 저 먼 바다 건너에 계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엇을 의지하게 되냐 하면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욥기 이야기를 해볼까요. 욥기를 보면 욥은 정말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으로 충성된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칭찬하실 정도였어요.


그런데 마귀가 하나님한테 충동(そそのかす)을 합니다.

욥이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줬으니까 그런 거겠죠. 줬던 축복을 다 뺏어 보세요. 금방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라고 하세요.

그랬더니 사탄이 그의 자녀들을 다 죽이고 재산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하지만 그래도 욥은 죄를 짓지 않아요.


욥기 1장 21절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1.そして言った。「私は裸で母の胎から出て来た。また裸でかしこに帰ろう。主は与え、主は取られる。主の御名はほむべきかな。」
22.ヨブはこれらすべてのことにおいても、罪に陥ることなく、神に対して愚痴をこぼすようなことはしなかった。

그러자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봐라. 네가 그렇게 다 빼앗아도 욥이 여전히 믿음을 지키지 않느냐. 그러자 사탄이 또 말합니다. 이제 그의 건강을 빼앗으면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다시 그럼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말씀하세요.

이제 사탄이 욥의 몸을 칩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욥기 2장 7절~8절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7.サタンは主の前から出て行き、ヨブを足の裏から頭の頂まで、悪性の腫物で打った。
8.ヨブは土器のかけらを取り、それでからだを引っかいた。彼は灰の中に座っていた。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풍부하고 부러울 것 없었던 욥이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듣고 먼 곳에서 친구 세 사람이 옵니다. 와 봤더니 모습이 정말 비참하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비참하면 친구 셋이 욥의 그 모습을 보더니만 7일 동안 차마 말을 건네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7일이 지나자 욥과 그 친구들의 대화가 시작돼요. 그런데 말이에요. 욥의 친구들이 처음에는 위로를 하려고 오긴 왔는데, 욥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된 게 욥을 책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막판에는 거의 싸움이 날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세 친구들의 이름이 엘리바스(エリファズ)와 빌닷(ビルダデ)과 소발(ツォファル)인데, 이 친구들이 한 말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는 화를 내세요.

욥기 42장 7절
“7.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主がこれらのことばをヨブに語った後、主はテマン人エリファズに言われた。「わたしの怒りはあなたとあなたの二人の友に向かって燃える。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しもべヨブのように、わたしについて確かなことを語らなかったからだ。

그래서 누구는 이 욥기야말로 위로자가 어떻게 책망자로 변하는지를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물론 친구들이 잘못 했지요.

아니, 위로를 하러 왔으면 위로를 해야지, 지금 재산 잃고 자식도 잃고, 본인은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깨진 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벅벅 긁고 있는 친구를 앞에 두고 책망을 한다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한테 혼이 나도 싸다고 하겠지요.


뭐, 이런 것이 대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몇 천년 동안 비난의 대상이 되어 온 욥의 친구들 편을 조금 들어볼까 합니다.

아니, 그렇다고 욥의 친구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세 친구가 욥에게 왔는데, 7일 동안 아무런 말도 못 건네고 침묵만 흘렀습니다. 이 침묵을 깬 것은 욥이었습니다.

욥기 3장 3절부터 욥이 친구들 있는 앞에서 입을 엽니다. 이 말이 26절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욥기 3장 1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そのようなことがあった後、ヨブは口を開いて自分の生まれた日を呪った。


세상에,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태어나지 말고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내가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냐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여러분 친구 중에 어떤 분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서, 여러분이 병문안을 갔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아이구, 내가 이렇게 아파서 고생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괜히 태어났어. 내가 태어나지 말고, 그냥 엄마 뱃속에서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괜히 태어나 가지고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고통스럽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팍 죽어버리면 좋겠는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네 그래…….

만약 여러분 친구가 여러분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어, 그래? 알았어. 지금이라도 당장 팍 죽어버리라고 기도할게……. 설마 그러시겠어요?

아니죠. 그럼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휴……힘든 건 알겠지만 그러면 안돼……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이 사람아, 안 되긴 뭐가 안돼. 니가 나처럼 힘들어 봤어? 당해 보지도 않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라고 그 친구가 말했다면 어떤 말이 나오겠습니까. 아니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니가 뭘 잘못했으니까 하나님한테 벌을 받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친구가 이래요. 야, 니가 뭘 알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자 여러분이 말합니다. 어쭈 이게 하나님한테 벌을 받는 주제에 혼자 잘했다고만 하네?

뭐, 이렇게 되지 않겠어요?

사실 좀 거칠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게 욥기의 흐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애초에 어디서 잘못됐냐 하는 것이죠. 물론 지금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는 욥을 책망한 친구들이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 시작을 따져보면, 친구들을 앞에 두고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말하자면 자신의 신세 한탄이 그 시작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지요.


그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신세 한탄도 못해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라고 신세 한탄할 일이 없을 것 같으십니까. 아니요 있지요.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끔은 신세 한탄도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런 죽는 소리를 왜 하겠습니까. 아, 자기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는, 죽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하는 소리, 살겠다고 하는 소리, 좀 위로 받고 싶어서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자기 친구들이나 가족이나 이웃한테 한다면 이는 바로 욥과 그의 친구들의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한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와 가까이 계신 주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께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주님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지요.

당시 이 기도를 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 그런 형식으로 기도를 드리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당시 주님의 기도문을 들었던 백성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 그런 것도 기도해도 돼” 라고 하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또 하나의 형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기도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9.あなたがたも、自分の子がパンを下さいと言うときに、だれが石を与えるでしょう。
10.また、子が魚を下さいと言うのに、だれが蛇を与えるでしょう。
11.してみると、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は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には良い物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とすれば、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が、どうして、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下さらないことがありましょう。

아들이 부모한테 배가 고프다면서 떡을 달라고 한다면, 아들이 어른이라고 한다기 보다는 아직 미성년자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집에 있는 나이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한테, 배가 고프니까 밥 달라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형식이고 무슨 격식을 차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냥 밥 달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시편 94편 9절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耳を植えつけた方が 聞かないだろうか。 目を造った方が 見ないだろうか。

우리는 우선 무엇보다도 앞서 우리 주님께,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 말씀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어디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까. 뭐, 통성 기도도 좋습니다만, 성경에는 어디서 하나님께 말씀 드리라고 기록되어 있나요?



마태복음 6장 5절~6절
“5.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6.あなたが祈るときは、家の奥の自分の部屋に入りなさい。そして戸を閉めて、隠れたところにおられるあなたの父に祈りなさい。そうすれば、隠れたところで見ておられるあなたの父が、あなたに報いてくださいます。

방언이든 뭐든 간에 자기가 해석도 못하면서 남들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욥기를 보세요. 괜히 다른 사람들이 내 기도를 들으면, 어쩌면 욥기의 기록처럼 일이 복잡하게 될 지도 몰라요. 그러지 말고, 그냥 아무도 듣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서, 주님한테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털어 놓으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냐, 하고 혼내지 않으십니다. 시편을 보세요. 특히 다윗의 기도를 보세요.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을 어린 아이가 자기 부모한테 밥 달라고 하듯이 기도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열왕기나 시편을 읽어보면 그렇습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다 잘한 것은 아니에요. 죄를 짓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만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정말 하나님 입장에서 보신다면 이 다윗이 얼마나 이뻤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가 아니에요. 힘들면 힘들다고 고백하고, 잘못하면 용서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위기에 처할 때는 제발 살려달라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저놈들을 다 혼내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시면, 또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고 감사해 하는지 몰라요.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이뻤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 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강하고 담대하게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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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5회 믿음의 지혜
2022년 6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8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5절~7절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5節~7節
“5.モーセは、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律法の掟を行う人は、その掟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います。
6.しかし、信仰による義はこう言います。「あなたは心の中で、『だれが天に上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引き降ろすことです。
7.また、「『だれが深みに下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引き上げる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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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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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8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의 지혜” 信仰の知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만, 역시 함께 살펴보면 전혀 어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5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5절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5.モーセは、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律法の掟を行う人は、その掟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います。

여기에 보면 “모세가 기록하되”라고 되어 있어서, 구약성경 특히 모세가 쓴 모세오경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신학자들은 이를 레위기 18장 5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掟とわたしの定めを守りなさい。人がそれらを行うなら、それらによって生きる。わたしは主である。

레위기 본문에는 ‘의’라는 말씀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규례와 법도 즉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의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의를 행하는 사람이요, 의를 행하는 사람은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는 사람이 되고, 죄를 범하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로마서 3장을 봅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일부 사람 또는 대다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의를 행하는 것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될 텐데,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어긴 죄인이 되어서 꼼짝없이 멸망을 당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를 구원할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다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기에, 우리가 행한 것이라고는 죄 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절에 보시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산다고 되어 있는데, <의를 행하는 사람>이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를 가리킨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의로 산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 받아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되셨지요?

자, 그럼 다음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6절~7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6절~7절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6.しかし、信仰による義はこう言います。「あなたは心の中で、『だれが天に上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引き降ろすことです。
7.また、「『だれが深みに下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引き上げることです。

이 구절은 역시 구약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신명기 30장을 인용한 말씀입니다만, 이 신명기 말씀은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로마서 본문에 집중을 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오늘 6절~7절 말씀은 그 문장 구성은 신명기 구절을 따르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로마서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6절의 시작을 보시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그런 말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모셔 내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7절에는 ‘무저갱’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바닥이 없는 갱도, 즉 끝도 없이 깊은 곳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는 말하자면 사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지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7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6절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보면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또는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죄를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죄를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다른 방법도 있으셨다면, 왜 굳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시대에는 뛰어난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대표적으로 본다면 엘리야나 그의 제자 엘리사도 그렇고, 사무엘도 그렇고 이사야나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보시면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된 선지자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시면 천사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17절에 의하면 단순히 그의 출생만이 아니라 이름까지도 정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그는 구약 말라기 4장 5절~6절에서도 예언된 바와 같이 메시야가 이 땅에 오기 전에 미리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마태복음 11장 14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느 날부터 요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선포하게 되지요.

이는 단순히 그가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세례를 베풀어야겠다 하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전반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세례를 베풀도록 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세례를 베푸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에게 당신의 정체가 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이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면서, 사실 세례 요한도 자신이 성경에 예언되었던 엘리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물음에 대해서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한 이 대답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를 하는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 있어서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는 단순히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세례 요한도 자기 자신이 다시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보아야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5절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さて、牢獄でキリストのみわざについて聞いたヨハネは、自分の弟子たちを通じて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行って、自分たちが見たり聞いたり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이 기록을 본다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100프로 확신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영적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우리가 다 아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
“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ヨハネよりも偉大な者はだれもいません。しかし、神の国で一番小さい者でさえ、彼より偉大です。

여기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큰 자라고 하셨는데, 그가 큰 자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그 당시 살아 있는 사람 중에 한한 말씀이 아니라, 천지가 만들어지고 사람이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예언되었을 정도로 놀라운 선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실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로서 다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처럼 큰 선지자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해도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극히 작은 자라 하더라도 다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사역에 대해서 그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뿐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 정도 되는 선지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해보세요. 아, 우리의 죄가 무거우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달라고 할 수 가 있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기도 응답으로 오신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오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단적인 계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은혜로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이 또한 사람의 기도 응답으로서 부활하셨습니까.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모시게 되는데,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말씀들을 들어왔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겠습니까.

그렇죠. 이제 예수님께서 미리 하셨던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역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자, 그럼 여기서 잠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었을까요?


마가복음 16장 9절~11절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さて、週の初めの日の朝早く、よみがえったイエスは、最初にマグダラのマリアにご自分を現された。彼女は、かつて七つの悪霊をイエスに追い出してもらった人である。
マリアは、イエスと一緒にいた人たちが嘆き悲しんで泣いているところに行って、そのことを知らせた。
彼らは、イエスが生きていて彼女にご自分を現された、と聞いても信じなか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대요? 부활을 기다린 그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아니요. 그 소식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바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있었습니다. 그럼 그게 누구였냐 하면, 마태복음 27장 62절~6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66절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마태복음 27장 62절~66절
明くる日、すなわち、備え日の翌日、祭司長たちとパリサイ人たちはピラトのところに集まって、
こう言った。「閣下。人を惑わすあの男がまだ生きていたとき、『わたしは三日後によみがえる』と言っていたのを、私たちは思い出しました。
ですから、三日目まで墓の番をするように命じてください。そうでないと弟子たちが来て、彼を盗み出し、『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と民に言うかもしれません。そうなると、この惑わしのほうが、前の惑わしよりもひどいものになります。」
ピラトは彼らに言った。「番兵を出してやろう。行って、できるだけしっかりと番をするがよい。」
そこで彼らは行って番兵たちとともに石に封印をし、墓の番をした。

참으로 어이없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주범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왜 부활을 기다리지 못했을까요.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부활의 의미를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해주신 것은 그야말로 기쁨이었습니다.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 뛰어난 선지자나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기도 응답이 아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그들의 기도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부어주시는 은혜와 용서라고 하는 축복의 결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못합니다.


예전에 그런 예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나이 많은 어머님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신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셨대요. 그런데 마침 그 때 목사님이 아니라 성당 사제가 찾아왔다고 해요.

가톨릭에는 병자성사라고 하는게 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 누워계신 어머님께 기도를 하고 나서는, “어머님의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누워계신 권사님이 그 사제한테 말하기를 당신 손을 좀 보여달라고 하시더래요. 그래서 아, 마지막에 내 손을 잡으시려고 하는구나 하고 손을 내밀었더니만, 이 권사님이 사제의 손을 만지면서 그러시더래요.

“신부님, 저의 죄는 손에 못 자국이 있으신 분만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찌 사람의 죄를 사람이 해결해줄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 두 손에 못 자국이 있으신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이 땅으로 모셔올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죄악 가운데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기쁨과 소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떻게 사람이 원한다고 사람의 힘이나 행위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아직 자신의 힘으로 죄악에서 벗어나려고 하십니까.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은 믿음의 의인이 가져서는 안 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あなたの神、主を愛し、御声に聞き従い、主にすがるためである。まことにこの方こそあなたのいのちであり、あなたの日々は長く続く。あなたは、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土地の上に住むことになる。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려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모셔오려고 하는 것이나, 우리 힘으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단은 네 힘으로 해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이고,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으로 처음부터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진정한 믿음의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처음부터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과 기뻐하고,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승리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성 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人の子の肉を食べ、その血を飲ま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のちはありません。
わたしの肉を食べ、わたしの血を飲む者は、永遠のいのちを持っています。わたしは終わりの日にその人をよみがえらせます。わたしの肉はまことの食べ物、わたしの血はまことの飲み物なのです。わたしの肉を食べ、わたしの血を飲む者は、わたしのうち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ります。
生ける父がわたしを遣わし、わたしが父によって生きているように、わたしを食べる者も、わたしによって生きるのです。





구찬송가 281장 아무 흠도 없고

1. 아무 흠도 없고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네
2. 이는 나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사 깨뜨리신 주님의 몸일세
3. 이는 나 위하여 형벌을 받으사 주가 친히 대신 흘린 주의 보혈일세
4. 이는 주가 지금 나에게 주시는 영생하는 양식이요 마시는 잔일세
5. 심히 사모하는 떠나셨던 주님 속히 세상 다시올 때 반가이 뵙겠네
6. 우리 그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주의 자비함과 은혜 널리 전파하세


신유기도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そむきの罪のために刺し通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彼の打ち傷によって、私たちはいやされた。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저를 씻어 주시옵소서. 저를 위하여 죽으시고 저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 구주로 영접하였으니 오늘 이 시간부터 하나님은 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구주가 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원이 주를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저를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本日来られた皆様をイエスの御名において歓迎いたします。
2. 教会のホームページ ・ フェイスブック ・ ポッドキャストにてメッセージの動画を配信しています。伝道用に活用してください。
3. 屋内外にかかわらずマスクの着用と三密を避けるようご協力をお願いします。
4. コロナ19ウイルスの終息と教会のリバイバルのためにお祈りください。


1. 오늘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교회 홈페이지 ・ 페이스북 ・ 팟캐스트, 팟빵에서 설교말씀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은혜 받으시고 전도용으로 활용해주시기 바랍니다.
3. 실내외를 불문하고 마스크 착용과 3밀을 피하도록 협조를 당부 드립니다.
4. 코로나 사태 종식과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를 바랍니다.

Ikaho.jp
비자 수속 원활하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도록
코로나로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 이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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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ホームページを開設しました。http://isesaki.kir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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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홈페이지


주 기 도 문
마태복음 6장 9절~13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主の祈り
マタイの福音書 6章9節~13節

天にまします我らの父よ。
ねがわくは御名〔みな〕をあがめさせたまえ。
御国〔みくに〕を来たらせたまえ。
みこころの天になるごとく、
地にもなさせたまえ。
我らの日用の糧〔かて〕を、今日〔きょう〕も与えたまえ。
我らに罪をおかす者を、我らがゆるすごとく、
我らの罪をもゆるしたまえ。
我らをこころみにあわせず、
悪より救いだしたまえ。
国と力と栄えとは、
限りなくなんじのものなればなり。
アーメン。


주 기 도 문
개역한글
마태복음 6장 9절~13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ちち みこ みたまの
おおみかみに
ときわに たえせず
みさかえあれ
みさかえあれ















6장
찬양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신께
영세 무궁하기까지
영광을 돌리세 영광을 돌리세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내주하시고
충만하시고 운행하심이, 오늘 2022년 6월 셋째 주 주일예배에 모인 성도, 개인, 가정, 생활, 직장, 학교, 자녀 위에 영원토록 함께 계실지어다

願わくば、我ら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
父なる神様の愛、聖霊の親しき交わりが、
今日2022年 6月 第3週 主日礼拝をささげた我ら一同、
個人、家庭、生活、職場、学校、子息たちと共に、限りなくあらんことを。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로 영광을 돌리시겠습니다.

2022년 6월 셋째 주 주일예배

시편 115편 9절~11절

“9.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詩篇 115篇 9節∼11節

9.イスラエル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10.アロンの家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11.主を恐れる者たちよ 主に信頼せよ。 主こそ助け また盾。




あめつち こぞりて
かしこみ たたえよ
みめぐみ あふるる
ちちみこ みたまを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使徒(しと)信条(しんじょう)
我(われ)は天地(てんち)の造(つく)り主(ぬし)、全能(ぜんのう)の父(ちち)なる神(かみ)を信(しん)ず。
我(われ)はその独(ひと)り子(ご)、我(われ)らの主(しゅ)、イエス・キリストを信(しん)ず。
主(しゅ)は聖霊(せいれい)によりてやどり、おとめマリヤより生(うま)れ、
ポンテオ・ピラトのもとに苦(くる)しみを受(う)け、十字架(じゅうじか)につけられ、
死(し)にて葬(ほうむ)られ、陰府(よみ)にくだり、
三日目(みっかめ)に死人(しにん)のうちよりよみがえり、
天(てん)に昇(のぼ)り、全能(ぜんのう)の父(ちち)なる神(かみ)の右(みぎ)に座(ざ)したまえり。
かしこより来(き)たりて生(い)ける者(もの)と死(し)にたる者(もの)とを審(さば)きたまわん。
我(われ)は聖霊(せいれい)を信(しん)ず。
聖(せい)なる公同(こうどう)の教会(きょうかい)、聖徒(せいと)の交(まじ)わり、罪(つみ)の赦(ゆる)し、
からだのよみがえり、
永遠(とこしえ)の命(いのち)を信(しん)ず。アーメン






로마서 10장 5절~7절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5節~7節

“5.モーセは、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律法の掟を行う人は、その掟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います。
6.しかし、信仰による義はこう言います。「あなたは心の中で、『だれが天に上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引き降ろすことです。
7.また、「『だれが深みに下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引き上げることです。”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8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의 지혜” 信仰の知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만, 역시 함께 살펴보면 전혀 어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5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5절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5.モーセは、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律法の掟を行う人は、その掟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います。

여기에 보면 “모세가 기록하되”라고 되어 있어서, 구약성경 특히 모세가 쓴 모세오경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신학자들은 이를 레위기 18장 5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掟とわたしの定めを守りなさい。人がそれらを行うなら、それらによって生きる。わたしは主である。

레위기 본문에는 ‘의’라는 말씀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규례와 법도 즉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의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의를 행하는 사람이요, 의를 행하는 사람은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는 사람이 되고, 죄를 범하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로마서 3장을 봅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일부 사람 또는 대다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의를 행하는 것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될 텐데,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어긴 죄인이 되어서 꼼짝없이 멸망을 당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를 구원할 방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다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기에, 우리가 행한 것이라고는 죄 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절에 보시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산다고 되어 있는데, <의를 행하는 사람>이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를 가리킨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의로 산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의롭게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 받아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되셨지요?

자, 그럼 다음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6절~7절까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6절~7절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6.しかし、信仰による義はこう言います。「あなたは心の中で、『だれが天に上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引き降ろすことです。
7.また、「『だれが深みに下るのか』と言ってはならない。」それ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引き上げることです。

이 구절은 역시 구약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신명기 30장을 인용한 말씀입니다만, 이 신명기 말씀은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로마서 본문에 집중을 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오늘 6절~7절 말씀은 그 문장 구성은 신명기 구절을 따르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로마서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6절의 시작을 보시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그런 말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모셔 내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7절에는 ‘무저갱’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바닥이 없는 갱도, 즉 끝도 없이 깊은 곳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는 말하자면 사망이라고도 할 수 있고, 지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7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6절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보면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또는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죄를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죄를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다른 방법도 있으셨다면, 왜 굳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시대에는 뛰어난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대표적으로 본다면 엘리야나 그의 제자 엘리사도 그렇고, 사무엘도 그렇고 이사야나 다니엘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보시면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언된 선지자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시면 천사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17절에 의하면 단순히 그의 출생만이 아니라 이름까지도 정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그는 구약 말라기 4장 5절~6절에서도 예언된 바와 같이 메시야가 이 땅에 오기 전에 미리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마태복음 11장 14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느 날부터 요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선포하게 되지요.

이는 단순히 그가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세례를 베풀어야겠다 하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 전반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私自身もこの方を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るようにと私を遣わした方が、私に言われました。……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세례를 베풀도록 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세례를 베푸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에게 당신의 정체가 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彼らはヨハネに尋ねた。「それでは、何者なのですか。あなたはエリヤ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言った。「では、あの預言者ですか。」ヨハネは「違います」と答えた。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이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면서, 사실 세례 요한도 자신이 성경에 예언되었던 엘리야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물음에 대해서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한 이 대답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를 하는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 있어서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는 단순히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어떻게 되냐 하면, 세례 요한도 자기 자신이 다시 오리라고 예언된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보아야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5절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さて、牢獄でキリストのみわざについて聞いたヨハネは、自分の弟子たちを通じて
イエスにこう言い送った。「おいでになるはずの方はあなたですか。それとも、別の方を待つべき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行って、自分たちが見たり聞いたり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が見、足の不自由な者たちが歩き、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たちがきよめられ、耳の聞こえない者たちが聞き、死人たちが生き返り、貧しい者たちに福音が伝えられています。


이 기록을 본다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100프로 확신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영적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우리가 다 아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
“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女から生まれた者の中で、ヨハネよりも偉大な者はだれもいません。しかし、神の国で一番小さい者でさえ、彼より偉大です。

여기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큰 자라고 하셨는데, 그가 큰 자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그 당시 살아 있는 사람 중에 한한 말씀이 아니라, 천지가 만들어지고 사람이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예언되었을 정도로 놀라운 선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실 구세주의 앞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로서 다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처럼 큰 선지자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해도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극히 작은 자라 하더라도 다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사역에 대해서 그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뿐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 정도 되는 선지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해보세요. 아, 우리의 죄가 무거우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달라고 할 수 가 있었겠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기도 응답으로 오신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오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단적인 계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은혜로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이 또한 사람의 기도 응답으로서 부활하셨습니까.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모시게 되는데,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말씀들을 들어왔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했겠습니까.

그렇죠. 이제 예수님께서 미리 하셨던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역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자, 그럼 여기서 잠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었을까요?


마가복음 16장 9절~11절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마리아가 가서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さて、週の初めの日の朝早く、よみがえったイエスは、最初にマグダラのマリアにご自分を現された。彼女は、かつて七つの悪霊をイエスに追い出してもらった人である。
マリアは、イエスと一緒にいた人たちが嘆き悲しんで泣いているところに行って、そのことを知らせた。
彼らは、イエスが生きていて彼女にご自分を現された、と聞いても信じなか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대요? 부활을 기다린 그들이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아니요. 그 소식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바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이 없었을까요? 아니요. 있었습니다. 그럼 그게 누구였냐 하면, 마태복음 27장 62절~6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27장 62절~66절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마태복음 27장 62절~66절
明くる日、すなわち、備え日の翌日、祭司長たちとパリサイ人たちはピラトのところに集まって、
こう言った。「閣下。人を惑わすあの男がまだ生きていたとき、『わたしは三日後によみがえる』と言っていたのを、私たちは思い出しました。
ですから、三日目まで墓の番をするように命じてください。そうでないと弟子たちが来て、彼を盗み出し、『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った』と民に言うかもしれません。そうなると、この惑わしのほうが、前の惑わしよりもひどいものになります。」
ピラトは彼らに言った。「番兵を出してやろう。行って、できるだけしっかりと番をするがよい。」
そこで彼らは行って番兵たちとともに石に封印をし、墓の番をした。

참으로 어이없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주범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왜 부활을 기다리지 못했을까요.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부활의 의미를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해주신 것은 그야말로 기쁨이었습니다.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 뛰어난 선지자나 믿음이 좋은 사람들의 기도 응답이 아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그들의 기도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폭포수처럼 부어주시는 은혜와 용서라고 하는 축복의 결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못합니다.


예전에 그런 예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나이 많은 어머님이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신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셨대요. 그런데 마침 그 때 목사님이 아니라 성당 사제가 찾아왔다고 해요.

가톨릭에는 병자성사라고 하는게 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 누워계신 어머님께 기도를 하고 나서는, “어머님의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누워계신 권사님이 그 사제한테 말하기를 당신 손을 좀 보여달라고 하시더래요. 그래서 아, 마지막에 내 손을 잡으시려고 하는구나 하고 손을 내밀었더니만, 이 권사님이 사제의 손을 만지면서 그러시더래요.

“신부님, 저의 죄는 손에 못 자국이 있으신 분만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찌 사람의 죄를 사람이 해결해줄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 두 손에 못 자국이 있으신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이 땅으로 모셔올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죄악 가운데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기쁨과 소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떻게 사람이 원한다고 사람의 힘이나 행위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전적으로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아직 자신의 힘으로 죄악에서 벗어나려고 하십니까.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은 믿음의 의인이 가져서는 안 되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신명기 30장 20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あなたの神、主を愛し、御声に聞き従い、主にすがるためである。まことにこの方こそあなたのいのちであり、あなたの日々は長く続く。あなたは、主があなたの父祖、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土地の上に住むことになる。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려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모셔오려고 하는 것이나, 우리 힘으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단은 네 힘으로 해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이고,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백으로 처음부터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진정한 믿음의 지혜는 바로 하나님을 처음부터 의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부터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과 기뻐하고,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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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4회 하나님의 의를 아는 지식
2022년 6월 1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7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절~4절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0章1節~4節
“1.兄弟たちよ。私の心の願い、彼らのために神にささげる祈りは、彼らの救いです。
2.私は、彼らが神に対して熱心であることを証ししますが、その熱心は知識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3.彼らは神の義を知らずに、自らの義を立てようとして、神の義に従わなかったのです。
4.律法が目指すものはキリストです。それで、義は信じる者すべてに与えられ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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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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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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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7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아는 지식” 神の義を知る知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드디어 로마서 10장에 들어갑니다. 로마서는 16장까지이니까 이제 서서히 저 멀리 남아 고지가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자, 오늘도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가면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로 넘치는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절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兄弟たちよ。私の心の願い、彼らのために神にささげる祈りは、彼らの救いです。

앞서 9장 후반부에서 본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은, 이방인과 대조되는 말, 즉 유전자 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고 하는 자부심에 넘치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작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은 믿음을 의지해서 의를 얻게 되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행위 즉 율법을 의지했기 때문에 의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렸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1절을 보시더라도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구원 받기를 구한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이스라엘’은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믿음이 있는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오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좀 이상한 말일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정말로 하나님을 믿으면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대단히 기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의 말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것, 즉, 나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에 담긴 감정은 무엇입니까. 기쁨입니까?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 분명하니까 기쁨과 감사에 넘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불안해 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구원 받아야 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불안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못할까봐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2.私は、彼らが神に対して熱心であることを証ししますが、その熱心は知識に基づ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

바울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 즉 믿음 있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에요. 믿음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해요. 그것도 열심히 믿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그 지식,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지식이 올바른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이를 살펴보기 전에 3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3.彼らは神の義を知らずに、自らの義を立てようとして、神の義に従わなかったのです。

이 3절에서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복종’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종하려고 합니다. 글쎄요. 뭐 지금 이 시대에 부하직원이 상사한테 복종한다거나 하는 어울리지 않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군대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좀 이해가 쉽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옛날 같지는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군대는 상명하복의 사회라고 해야겠지요.

부하는 상관에게 복종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단순히 상관에게 복종 한다기보다는 이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관의 명령에 복종을 하는 것이지요.


이를 다른 말로 한다면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상관의 명령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관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무슨 명령을 하라고 했는지를 올바로 알아야 복종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상관이 무엇을 하라고 했는지 어디로 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면 복종을 하고 싶어도 할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 지를 알아야 순종을 하든 복종을 하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서 순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도 특히나 믿음이 좋은 척을 했던 바리새인들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지적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6절~22절
16.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마태복음 23장 16절~22절
わざわいだ、目の見えない案内人たち。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神殿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神殿の黄金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愚かで目の見えない者たち。黄金と、その黄金を聖なるものにする神殿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また、おまえたちは言っている。『だれでも祭壇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何の義務もない。しかし、祭壇の上のささげ物にかけて誓うのであれば、果たす義務がある。』
目の見えない者たち。ささげ物と、そのささげ物を聖なるものにする祭壇と、どちらが重要なのか。
祭壇にかけて誓う者は、祭壇とその上にあるすべてのもの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また、神殿にかけて誓う者は、神殿とそこに住まわ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天にかけて誓う者は、神の御座とそこに座しておられる方にかけて誓っているのだ。

여기서 눈 먼 인도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키라고 합니다. 성전에 제단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전혀 율법에 없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이를 지키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런 게 바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며칠 전에도 어떤 신흥종교집단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 사람한테서 메일이 왔습니다. 자신은 대단히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메일을 쓴 것 같지만, 제가 보면 완전히 엉터리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들 멋대로 성경을 짜깁기 한 것을 가지고 교리라고 하면서, 그것을 믿으라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단들을 보시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 정도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이건 정말 농담이 아니라 웬만한 명문대는 넉넉히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다니던 학교나 직장까지 모두 그만두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밤이고 낮이고 얼마나 열심히 성경 공부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공부하는 내용이, 전혀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교리, 자기들의 교주나 그 조직의 간부급들한테 순종하기 위한 교리를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일생을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자기들 교주를 성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니까 결국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올바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이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주를 성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믿고 있는데, 성경을 조금만 알았더라도 자신들의 교주를 성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 4장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5.見よ。わたしは、主の大いなる恐るべき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
6.彼は、父の心を子に向けさせ、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それは、わたしが来て、この地を聖絶の物として打ち滅ぼす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모두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모두가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온다고 하던 엘리야가 누구냐 하면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3절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あなたがたに受け入れる思いがあるなら、この人こそ来たるべきエリヤなのです。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은 다른 말로 하자면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의 예언은 세례 요한까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이고, 그 후에 예언된 사람은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나, 하물며 사도 바울이라 하더라도 구약에서는 예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기들의 교주가 성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주장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성경과 맞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라고 하는 게 얼마나 엉성한 지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 더욱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일반 교회 내부에도 이와 같은 잘못된 가르침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간단히 기도와 방언과 금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絶えず祈りなさい。)”라고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 보면 바울도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58장 6절에 의하면 금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8장 6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わたしの好む断食とはこれではないか。悪の束縛を解き、くびきの縄目をほどき、虐げられた者たちを自由の身とし、すべてのくびきを砕くことではないか。

기도도 좋고 방언도 좋고 금식도 좋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기도 많이 하면 구원 받습니까. 방언 많이 하면 구원 받습니까. 금식 많이 하면 구원 받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도나 방언이나 금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기도도 유익하고 방언도 금식도 유익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저 기도만 하고 방언만 하고 금식만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방언하고 금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까. 그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인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에 뭐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없어요.

고린도후서 11장 14절~15절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ですから、サタンのしもべどもが義のしもべに変装したとしても、大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最後は、その行いにふさわしいものとなるでしょう。

기도하거나 방언을 하거나 금식을 하는 과정에서 뭔가가 내 눈 앞에 나타나서 무슨 말을 했다고 쳐요. 그러나 그 뭔가가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천사의 모습, 하물며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내 눈 앞에 나타나서 무슨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어디에서 빗나가면 거짓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빗나가면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당장 물리쳐야 하는 마귀 사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에 의하면 유다 제16대 왕이 요시야 때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데 그 때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왕에게 보고하면서 읽게 됩니다. 그러자 이를 들은 요시야의 모습이 성경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22장 10절~13절
“10.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1.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
12.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さらに書記シャファンは王に告げた。「祭司ヒルキヤが私に一つの書物を渡してくれました。」シャファンは王の前でそれを読み上げた。
王は律法の書のことばを聞いたとき、自分の衣を引き裂いた。
王は祭司ヒルキヤ、シャファンの子アヒカム、ミカヤの子アクボル、書記シャファン、王の家来アサヤに次のように命じた。
「行って、この見つかった書物のことばについて、私のため、民のため、ユダ全体のために、主を求めよ。私たちの先祖たちがこの書物のことばに聞き従わず、すべて私たちについて記されているとおりに行わなかったために、私たちに向かって燃え上がった主の憤りが激しいからだ。」

이 율법책 내용을 들은 요시야 왕은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찢습니다. 이는 대단히 크나큰 충격을 받았을 때에 했던 당시 관행였습니다.

율법책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진노를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빨리 서둘러 율법대로 행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모습만을 보더라도 당시 요시야 왕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열왕기나 역대를 보면 참 나쁜 왕들도 많았습니다만, 그 가운데 이 요시야는 정직한 왕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데, 이 율법책을 읽는 순간, 아,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헛것이었구나.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새롭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무엇에 대해서 회개를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회개를 하더라도 올바로 알고 회개를 해야 됩니다. 무엇이 잘한 것이고 무엇이 잘못한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회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도 그렇고 방언도 그렇고 금식도 그렇습니다. 무작정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할 때에 은혜가 넘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4.律法が目指すものはキリストです。それで、義は信じる者すべてに与えられるのです。”

믿는 자들이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의를 이루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게 되겠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어요.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오로지 죽음 뿐입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 갈림길이 있습니다. 구원 받아 영생을 얻느냐, 아니면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느냐 하는 두 가지 갈림길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꼼짝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있던 두 가지 갈림길 중에서 하나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임을 당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당해야 마땅한 죽음이라는 갈림길을 지워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는 무엇만 남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 받아 영생을 얻는 갈림길만 남게 된 것입니다.

영생은 율법을 온전히 이룬 의인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고사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갈림길을 지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의롭게 되어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습니까. 기도나 방언이나 금식하다가 응답을 받아서 알 수 있나요? 아닙니다.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올바로 알아가므로 말미암아,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과,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축복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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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회 실천과 외식
2022년 6월 5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6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33절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30節~33節
“30.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義を追い求めなかった異邦人が義を、すなわち、信仰による義を得ました。
31.しかし、イスラエルは、義の律法を追い求めていたのに、その律法に到達しませんでした。
32.なぜでしょうか。信仰によってではなく、行いによるかのように追い求めたからです。彼らは、つまずきの石につまずいたのです。
33.「見よ、わたしはシオンに、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を置く。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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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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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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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6번째 시간으로서 “실천과 외식” 実践と偽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로마서 9장 후반부 내용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차별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

같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오늘 내용은 10장 이후에도 이어집니다만, 오늘 본문은 일차적으로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요, 자신들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유일한 민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 외의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 바깥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는 반복해서 그런 육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국적이나 인종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가 바로 영적인 유대인이요 영적인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겠고,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해야지만 본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차례대로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31절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ローマ人への手紙9章30節~31節
“30.それで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義を追い求めなかった異邦人が義を、すなわち、信仰による義を得ました。
31.しかし、イスラエルは、義の律法を追い求めていたのに、その律法に到達しませんでした。


이 말씀을 보시면 조금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자, 기본적으로 의를 따르면 의를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조금 더 쉽게 말씀 드린다면, 좋은 일을 하면 그 결과도 좋은 결과가 따라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를 따르는 사람이 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요, 의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의를 얻지 못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본문에 의하면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방인들이 얻은 의는 무엇이냐 하면 이는 믿음에서 난 의라고 합니다.

자, 오랜만에 그 질문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우선 31절에서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律法に到達しませんでした)라고 하는 것은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의를 얻지 못하였다”(義を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는 말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30절과 31절을 단순하게 바꾸어 보면 일단 다음과 같습니다.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고
의를 따른 이스라엘은 의를 얻지 못했다

義を追い求めなかった異邦人は義を得ることができ、
義を追い求めたイスラエルは義を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참으로 이상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의를 따르는 이스라엘은 의를 얻고,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지 못해야 한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고, 의를 따른 이스라엘이 의를 얻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32절입니다.

로마서 9장 32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2.なぜでしょうか。信仰によってではなく、行いによるかのように追い求めたからです。彼らは、つまずきの石につまずいたのです。


30절에 보면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얻은 의는 믿음에서 난 의라고 합니다. 즉, 이방인들은 믿음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땠냐 하면 행위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난 의는 무엇이고 행위에서 난 의는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지요.

우선 행위에서 난 의부터 말씀 드리면 쉽게 말해서 이는 율법을 말합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613개가 넘는 조항이 있었습니다만, 여기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것저것 덧붙여서 마지막에는 2134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율법에는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고 하는 내용도 있지만, 반대로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저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도 있지요.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 율법만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행위를 중요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와 같은 율법을 명령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그 행위만을 말하자면 습관적으로 반복해왔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려고 했겠지요. 그래서 613개의 율법을 2134개까지 늘린 데에도 처음에는 다른 의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조금이라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규정들을 더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점점 늘어가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냐 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너희들은 이것을 하면 안돼, 저것을 하면 안돼……하는 규정들을 넣어가면서 종교지도자들 말하자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규정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런 것이 되겠지요. 너희들은 내가 하라는 것을 하고,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너희들은 구원을 받지만, 내 말을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이런 식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말이 되냐 하면 이는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근래에까지 있어왔습니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당시 교회에서 사용하던 성경은 모두 라틴어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사제도 라틴어로 전하고, 하물며 찬송가도 라틴어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일요일에 모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느냐 하면 바로 성찬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들이 발생하냐 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전혀 모르니까, 누구의 말을 믿게 되냐 하면 사제의 말을 믿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는 성경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르는데,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한다면 안 들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당시 사제들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성경을 쓰지 않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겠습니까. 이는 바로 그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빌미로 해서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것처럼, 성경을 빌미로 해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 했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해서 일어난 사람이 마틴 루터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존 교회에 저항을 하면서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말씀,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가장 처음으로 한 작업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당시 독일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을 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보면 종교지도자라고 할 수 있었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이른바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됩니다.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도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도 이런저런 규정들을 다 갖다 붙였습니다.

그래서 본래 율법에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식일에는 이것을 하면 안돼, 저것을 하면 안돼 하는 규정들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이 사실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안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난리를 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9장 16절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すると、パリサイ人のうちのある者たちは、「その人は安息日を守らないのだから、神のもとから来た者ではない」と言った。ほかの者たちは「罪人である者に、どうしてこのようなしるしを行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と言った。そして、彼らの間に分裂が生じた。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치료하셨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핵심이냐 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치료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와 같은 규정은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규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의 권위에 대해 흠집을 냈다는 것에 대해서 불쾌해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손을 치료하려고 하신 마침 그 때, 이를 두고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11절~13절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一匹持っていて、もしその羊が安息日に穴に落ちたら、それをつかんで引き上げてやらないでしょうか。
人間は羊よりはるかに価値があります。それなら、安息日に良いことをするのは律法にかなっています。」
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手を伸ばしなさい」と言われた。彼が手を伸ばすと、手は元どおりになり、もう一方の手のように良くなった。

이 얼마나 명쾌한 답입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금지규정을 확대해석해서, 말하자면 안식일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덩이에 빠진 양을 안식일이라고 해서 꺼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에요. 이와 같은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 그들이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놓은 규정들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인지를 지적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28절
“27.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そして言われた。「安息日は人のために設けられたのです。人が安息日のために造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
ですから、人の子は安息日にも主です。」

이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실제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4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むことができる。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이렇게 보면 참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정하셨을까요.


이른바 과로사라고 하는 말은 꽤 오래전부터 들어온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이 일을 했기 때문에 그 피로로 인해서 사망하게 되는 것이고, 근래에는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정규근로시간은 주5일근무. 하루에 8시간으로 주 40시간입니다만,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몸에 무리가 안 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하겠지요.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고용주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초과근무수당 몇 푼 더 주더라도 일을 하게 해서 돈을 더 벌어오면 좋은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무리한 근무환경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도한 초과근무를 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직원에게 1시간아리도 초과근무를 시키는 상사는 사형에 처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규정을 만들어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그깟 돈 몇 푼에 목숨을 거는 상사들은 없지 않겠습니까.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야근이나 휴일근무에서 해방되겠지요.

더구나 당시에는 노예까지도 있었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직장 상사와 부하 관계보다도 훨씬 더 엄격했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노예라 하더라도 절대로 안식일에는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누구를 위한 규정이겠습니까. 그렇죠. 이는 사람을 위한 규정이지 하나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규정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이를 오해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한테까지도 이를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일본의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는 옛날 에도 시대 때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당시 일본은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해져 옵니다만, 이 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종교탄압으로 인해서 일본에서는 이른바 ‘후미에’라고 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이는 벼루만한 조각판인데 여기에는 예수님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밟으면 신자가 아니니까 살려두는데, 이를 밟지 않으면 신자라고 해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당하게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던 외국인 사제인데, 그 사제도 체포를 당하게 되어서는, 그 예수님이 새겨진 돌판을 밟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하지만 이 사제는 이를 거절하지요.

그러던 중 이 사또가 직접 찾아옵니다. 이봐. 자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을 많이 받고 있어. 그러니까 어서 이 돌판을 밟으시게.

이 말을 들은 사제는 감동을 합니다. 아아, 그래, 지금도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 돌판을 안 밟은 사람들이 많구나.

그러자 사또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봐. 그게 아니야. 그들은 이미 자기 신앙을 버렸어. 다만 자네가 이 돌판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을 뿐이야. 자네가 이 돌판을 밟으면 그들을 석방해주겠네.

참 얼마나 교활합니까. 저 사람들은 이미 신앙을 버렸어. 그럼에도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이 예수님 돌판을 밟으면 그 사람들을 풀어주겠다. 그러나 네가 네 이 돌판을 밟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계속해서 극심한 고문을 받을 것이다.


만약에 제가 이 사제의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꽤 오랫동안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보고 위협하면서, 이 돌판을 밟아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겠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면, 뭐 지금 생각하기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고 하는 각오는 있습니다.

물론 또 모르죠. 제가 워낙 겁이 많기 때문에, 막상 그 상황이 되면, 아이구, 뭐든지 다 할 테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도 지금 생각은, 그래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그 돌판을 밟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요. 내가 그 돌판을 밟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고통에서 풀려나요. 만약에 그런 상황에 처해졌다면, 그럴 경우 나는 어떻게 할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명확한 답을 내렸습니다. 내가 그 돌판을 밟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당장 가지고 와라. 내가 그런 돌판이라면 열 장이든 스무 장이든 박살이 나도록 밟아버리겠다 라고 하는 결론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돌판을 밟지 않는 것이 내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면 끝까지 지키겠지요.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밟지 않는다는 것으로 내 이웃이 고통받고 있다면,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안 밟는다는 것은, 그것은 실천이 아니라 외식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의 외식을 위해서 이웃사랑을 저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실천과 외식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외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겉치레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이를 제일 많이 한 사람들이 누구였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28절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白く塗った墓のようなものだ。外側は美しく見えても、内側は死人の骨やあらゆる汚れでいっぱいだ。
同じように、おまえたちも外側は人に正しく見えても、内側は偽善と不法でいっぱいだ。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무덤 겉부분을 하얗게 칠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당시 무덤은 모두 화장이 아니라 매장이기 때문에 당시 율법적으로 본다면 불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그나마 좀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그리고 또 하나는 불결한 것을 가까이 하는 겁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때라도 눈에 띄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자기들이야말로 율법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철저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겉은 하얗게 칠해서 결백하게 보일지언정 그 안에는 썩어들어가는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식하는 자, 즉, 겉모습만 꾸미는 자, 겉보기만 믿음이 좋은 것처럼 행세하는 자라고 비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 32절을 봅니다.

로마서 9장 32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2.なぜでしょうか。信仰によってではなく、行いによるかのように追い求めたからです。彼らは、つまずきの石につまずい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야말로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움직여서 무엇인가를 합니다. 이를 행동이라고 한다면 이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을 의지하는 행동과 행위를 의지하는 행동입니다.

믿음을 의지하는 행동은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실천은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는 행동은 외식일 뿐입니다.

아무리 기도나 금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이 아닌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척, 경건해 보이는 척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보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엄한 꾸짖음을 당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천이고 무엇이 외식이겠습니까. 그 기준은 간단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성경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한 쪽만 있고 다른 쪽은 없는 행동은 실천이 아니라 외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겉보기에 아름다운 행동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는 행동이라면, 이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꾸짖음을 당하는 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33절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33.「見よ、わたしはシオンに、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を置く。この方に信頼する者は失望させられることがない」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비교해보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だれでも、わたしにつまずかない者は幸いです。」

이 두 말씀은 쉽게 말하면 이런 뜻이지요.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이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뱉어 내버리면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그리고 처방대로 하지 않고 약을 잘못 먹게 된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잘 씹어서 올바른 처방에 따라 먹었을 때에는 병이 낫고 건강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오해하거나, 그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으로만 행동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무한 믿음이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예수님 말씀을 올바로 받아서 이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실천한다면 크나큰 축복으로 넘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행위에 의지하여 주님께 꾸짖음을 당하는 외식이 아닌, 믿음에 의지하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실천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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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회 유익한 열매
2022년 5월 2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85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9절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9章29節
“29.また、イザヤがあらかじめ告げたとおりです。「もしも、万軍の主が、私たちに子孫を残されなかったなら、私たちもソドムのようになり、ゴモラと同じようになっていた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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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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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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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85번째 시간으로서 “유익한 열매” 有益なる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 1장 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1장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もしも、万軍の主が私たちに生き残りの者をわずかでも残されなかったなら、私たちもソドムのようになり、ゴモラと同じになっていたであろう。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실 때에,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조금 남겨 두는 경우와 또 하나는 완전히 멸해버리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비록 당시 소돔에 살고 있던 롯과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사실 롯은 본래 소돔 주민이 아니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조카 롯을 함께 데리고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지 롯을 부르시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아브라함 네 가축들과 롯의 가축들이 다툽니다. 분쟁이 생깁니다. 그래서 창세기 13장에 의하면 그들이 서로 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롯이 소돔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소돔이 멸망함을 당할 때, 그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롯이 구원을 받은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9장 29절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神が低地の町々を滅ぼしたとき、神はアブラハムを覚えておられた。それで、ロトが住んでいた町々を滅ぼしたとき、神はロトをその滅びの中から逃れるようにされた。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는 아브라함 덕분에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의 원주민인 경우는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단 두 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24절~25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보니까 고고학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보면, 지금은 그들이 이루어 놓았던 그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고 해요. 정말 영상을 보니까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지역 땅바닥에 보면 아직도 유황성분이 있다는 것이죠. 보통 유황성분이 발견되는 지역을 보면 그 땅속 깊은 곳에서도 유황이 나와야 하는데, 거기는 정작 땅밑에는 유황성분이 없는데도 그 표면에만 있다는 것이에요.

이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그 지역은 본래 전혀 유황성분이 없는 곳이었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할 때,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쏟아졌기 때문에 아직도 표면에만 유황성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그리고 무서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앞서 성경이라고 하는 기록은 거짓이나 과장이 없는, 진정한 사실만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심판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원주민 출신인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가 그 유황과 불로 인한 심판 때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9장 29절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また、イザヤがあらかじめ告げたとおりです。「もしも、万軍の主が、私たちに子孫を残されなかったなら、私たちもソドムのようになり、ゴモラと同じようになっていたであろう。」

자, 여기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이처럼 살아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드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착해서? 우리 믿음이 정말 좋아서일까요?

우리가 이미 공부한 부분이지만 로마서 3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여기서 “간과하다”라는 말씀은 다른 번역에 의하면 제가 생각하기에 <죄를 눈감아 주셨다>는 표현이 제일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를 눈감아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서 화목제물로 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을 받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야 마땅한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징계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눈감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저는 길을 가다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이나 동경 같은 대도시 같은 경우를 보면 대부분 도시가스를 사용하지만, 군마현 같은 경우를 보면 아직 LP가스를 사용하는 곳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 가스통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제가 이렇게 좀 덩치가 크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실 좀 겁이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가스 통 옆을 지나간다거나, 아니면 차를 운전하다 보면 그런 가스 통을 여러 개 실은 트럭도 있잖아요? 그러면 저도 모르게 좀 떨어져서 가기도 합니다.

그걸 보면서 든 생각이 이래요. 좀 무서운 말씀일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 가시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참 쉽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그런 가스 통 옆을 지나가고 있을 때 뻥~ 하면 그냥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니라 뉴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멀쩡히 대낮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돌진해서 대형참사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운전하다 보면, 다행히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사고가 일어날 뻔한 일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려고 하셨다면 언제든지 한순간에 데려가실 수도 있었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행히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제가 먼저 간 사람들보다 착해서요? 믿음이 좋아서요?

그렇다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벌을 받아서 그렇다는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아직도 여기서 살아가게 하실까요.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기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열매’인 것이지요.

이사야 5장 2절~6절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彼はそこを掘り起こして、石を除き、そこに良いぶどうを植え、その中にやぐらを立て、その中にぶどうの踏み場まで掘り、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ところが、酸いぶどうができてしまった。
今、エルサレムの住民とユダの人よ、さあ、わたしとわがぶどう畑との間をさばけ。
わがぶどう畑になすべきことで、何かわたしがしなかったことがあるか。なぜ、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のに、酸いぶどうができたのか。
さあ、今度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知らせよう。わたしが、わがぶどう畑に対してすることを。わたしはその垣を取り払い、荒れすたれるに任せ、その石垣を崩して、踏みつけられるままにする。
わたしはこれを滅びるままにしておく。枝は下ろされず、草は刈られず、茨やおどろが生い茂る。わたしは雨雲に命じて、この上に雨を降らせないようにする。」

하나님께서는 참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여러가지 일을 얼마나 열심히 일하셨습니까. 그리고 극상품 포도, 그냥 포도가 아니에요. 비싼 포도가 뭐죠? 거봉이나 샤인머스켓 같은 포도보다도 훨씬 더 좋은 포도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에이 내가 무슨 극상품 포도야……라고 혹시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전에 제 대학 동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 친구는 법대는 아니고 의대였는데,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대학 1학년 때였는데, 그 친구는 벌써 딱 보면 의사처럼 생겼어요. 정말 참 똑똑하고 착한 친구였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현재 한국에서 제일 큰 병원에서 외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친구가 옛날에 했던 말이 있는데,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제 의대에서 공부하는 과정에 보면 해부실습이 있다고 해요. 연구용으로 기증을 받거나 아니면 임자가 없는 시신을 통해서 의대생들이 실제로 해부실습을 한다고 하는데, 이 친구가 그걸 몇 번하고 느낀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실제로 해부 실습을 하다 보면 정말로 인체가 너무나도 정교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냥 대충대충 만든 것 같지가 않다는 거예요. 이 눈동자 하나만 보더라도, 실제로 해부를 해보면 정말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정교하고 기가 막히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충대충 만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별볼일 없어 보이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극상품 포도가 자라날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난 다음에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극상품 포도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데, 뭐 가 맺어졌대요? 그렇습니다. 들포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열매가 맺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그 자리를 황폐하게 만들어버리겠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애초에 롯이 소돔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13장 10절~11절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ロトは、自分のために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選んだ。そしてロトは東へ移動した。こうして彼らは互いに別れた。

사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가나안 땅은 척박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어디를 가면 반드시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그래야 물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반면에 소돔과 고모라는 어땠습니까. 거기는 힘들게 우물을 필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물이 넉넉해서 그야말로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죄악으로 물들었습니다.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좋은 땅에 좋은 씨를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락해서 전혀 쓸모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황폐하게, 아주 흔적도 없이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포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5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にとどまりなさい。わたしもあなたがたの中にとどまります。枝がぶどうの木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自分では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のと同じ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にとどまっていなければ、実を結ぶことはできません。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요한복음 15장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あなたがたが多くの実を結び、わたしの弟子となることによって、わたしの父は栄光をお受けになります。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 없는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에 나와야 할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과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열매를 맺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고 하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멘” 하시겠지요? 그렇게 해서 말씀을 끝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문제를 내드릴까 합니다. 예수님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찝찝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わたしの枝で実を結ばないものはすべて、父がそれを取り除き、実を結ぶものはすべて、もっと多く実を結ぶように、刈り込みをなさいます。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 붙어 있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열매를 맺지 않을 수 도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 다니기만 한다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나 찬양 없이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면 이는 허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만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으십니까.


이사야 1장 11절~13절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あなたがたの多くのいけにえは、わたしにとって何になろう。──主は言われる──わたしは、雄羊の全焼のささげ物や、肥えた家畜の脂肪に飽きた。雄牛、子羊、雄やぎの血も喜ばない。
あなたがたは、わたしに会いに出て来るが、だれが、わたしの庭を踏みつけよとあなたがたに求めたのか。
もう、むなしいささげ物を携えて来るな。香の煙、それはわたしの忌み嫌うもの。新月の祭り、安息日、会合の召集──わたしは、不義と、きよめの集会に耐えられない。

우리의 마음이 없는 예배나 예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예물은 가져오지도 말고, 그런 예배는 드리지도 말라. 마당만 더럽힐 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드리는 예배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아무리 작은 예물이라 하더라도 간절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과연 열매란 무엇일까요.

열매에 대한 설교를 한다면 보통 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말씀을 많이 인용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しかし、御霊の実は、愛、喜び、平安、寛容、親切、善意、誠実、
柔和、自制です。このようなものに反対する律法はありません。

이는 이른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라고 하는데, 사실 이 아홉가지를 우리가 쉽게 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를 다 외운다고 해서 꼭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조금 더 쉽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무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나무 자신이 배부르기 위해서 열매를 맺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서 열매를 맺느냐 하면 그 열매를 따먹는 사람이나 다른 생물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열매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유익함을 주는 것이 열매요, 우리 이웃에게 유익함을 주는 것이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기 좋은 열매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한테만 유익하고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유익하지 않다면, 이는 주님 안에서 값진 열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유익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에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고, 그 유익함이 우리 주님께 유익하고 우리 이웃에 유익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값진 열매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심으신 귀한 값진 극상품 포도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값진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 유익하고 우리 이웃에게 유익한 진정으로 값진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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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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