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2회 머물러야 하는 곳
2022년 10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22절
“20.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0節後半∼22節
“20.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21.もし神が本来の枝を惜しまなかったとすれば、あなたをも惜しまれないでしょう。
22.ですから見なさい、神のいつくしみと厳しさを。倒れた者の上にあるのは厳しさですが、あなたの上にあるのは神のいつくしみです。ただし、あなたがそのいつくしみの中にとどまっていればであって、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も切り取られま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4번째 시간으로서 “머물러야 하는 곳” とどまるべき場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함께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등등.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니, 이게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중요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을 봅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여기서 지식의 근본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를 바꾸어 본다면 아무리 다른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은 근본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경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건만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멸시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쉬운 말로 한다면 두려워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앞서 드린 말씀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고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동안 헛수고만 했다는 뜻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0.......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글쎄요. 저는 이 번역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게 어느 부분이냐 하면 ‘높은 마음’이라는 부분인데,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이 됩니까. 이는 큰 뜻을 품지 말라. 그냥 작은 것에 만족하라……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 20절 후반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

현대인의 성경에는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큰 꿈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해요? 무엇을 두려워 하라고요? 그렇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이른바 구원의 취소는 없다고 하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괜찮아, 좀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씻어 주셨으니까, 우리는 100% 천국에 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성경을 찾아보아도 그런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이 바울이 쓴 로마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 쓴 서한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형제자매들한테 쓴 글이에요.


11장 20절 전반부만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20절 전반부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そのとおりです。彼らは不信仰によって折られましたが、あなたは信仰によって立っています。

자,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왔으니까 어렵지 않게 아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접붙임에 대해서 공부 했었잖아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지가 꺾이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서 그 축복을 모두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어요. 한 번 접붙임을 받았어요. 말하자면 한 번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러면 이제 여기서 구원의 취소가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안심해. 이제 걱정하지 마. 100% 틀림없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갈 거야……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20절 후반부에 보면 뭐라고요?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즉,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국어 공부 좀 해볼까요?

이 구절을 좀 바꾸어 본다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라고 해도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자, 그럼 쉬운 부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글에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라는 것은 누구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까.

그렇죠.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문장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는 한 문장인데 앞부분과 뒷부분의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뒷부분과 앞부분의 문장에 대한 대상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뒷부분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앞부분의 대상도 역시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하는 그 대상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교만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이제 나는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할렐루야! 나는 구원 받았다! 하고 이제 무엇을 해도 된다는 마음,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거기 보면 사장님이 계실 것 아니에요? 상당히 큰 회사인데, 그런데 자기가 신입사원인데도 사장님이 아주 잘 해주세요. 맨날 점심시간이면 같이 밥을 먹자고 해요. 그리고 밥값도 당연히 내주세요. 말씀도 아주 편하게 하세요.


그렇게 되니까 어느새 이 신입사원이 생각하길, 에이 사장님이라고 별거 아니네.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나를 위해서 많은 걸 다 해 주시잖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조금 지나자 아주 사장님을 우습게 알아요. 말도 픽픽 놓고 지각도 밥 먹듯이 하고, 사장님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요. 어차피 사장님은 나를 아주 좋아하시거든. 괜찮아. 괜찮아. 우리 사장님은 아주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 하셔서 화도 안 내셔.

그런데 사장님이 보시기에 좀 신입사원이라서 잘 해 주려고 했는데 도무지 회사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요. 부장님이나 과장님을 보니까 사장님이 딱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데 이 신입사원은 일어서지도 않고 “오셨어요?” 하고 고개만 까딱 합니다

사장님은 이런 신입사원한테 말을 해요. 이봐. 자네 보니까 요즘 좀 이상해. 자기한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야 되지 않아?

그러자 이 신입사원은 말합니다. “에이,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사장님이 왜 그러세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좀 내버려두세요.”


그러면 이 사장님이 계속해서 그 신입사원을 그대로 놔두겠습니까. 사장님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요. 승진을 시킬 수도 있고 자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법적으로 해고를 마음대로 시킬 수는 없다고 해도, 다른 부서로 좌천을 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그저 좋은 사장님, 사랑이 많으신 사장님, 이거 달라고 하면 이걸 주시고 저걸 달라고 하면 저걸 주시는 사장님……. 만약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머지않아 회사에서 크게 혼이 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회사에 다니는 분들 중에서 이런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런 사람, 어디에 있느냐.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그러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한 번 믿으면 괜찮다고 하면서 참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믿음이 좋아서요?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원 가지라고 하는 것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이 가지를 꺾어서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을 접붙임 하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 같은 우리를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해서 꺾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보혈의 대가로 우리를 접붙임 하셔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에서 21절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21절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1.もし神が本来の枝を惜しまなかったとすれば、あなたをも惜しまれないでしょう。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망설임없이 그 나뭇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포도나무이자 참감람나무이신 독생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무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긴 했으나, 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는, 독생자 예수님 마저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달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잊어버린 채로, 언제까지 철없는 어린애같이 아, 나는 괜찮아. 나는 기도를 많이 하니까, 나는 금식을 많이 하니까, 나는 방언을 많이 하니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니까 괜찮아……하고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도시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있지요. 그곳은 죄악의 도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한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도시라고 한다면 어떤 모습이라고 상상을 하십니까. 으스스하고 어두컴컴한 그야말로 마귀의 소굴 같은 그런 곳을 상상하시나요?

창세기 13장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이제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지요.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이 기록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땅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큰 강을 점령하려고 전쟁을 벌이곤 했습니다만, 소돔과 고모라에는 이미 물이 넉넉했어요.

참으로 풍요로운 땅,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점차 죄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19장 24절~25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받은 땅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멸해버리고 마셨습니다.

로마서 11장 22절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2.ですから見なさい、神のいつくしみと厳しさを。倒れた者の上にあるのは厳しさですが、あなたの上にあるのは神のいつくしみです。ただし、あなたがそのいつくしみの中にとどまっていればであって、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も切り取られます。”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아껴 주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토록 우리를 아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교만에 빠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자하심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꺾어 버리셨던 그 손으로 우리를 찍어 버리실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습하는 의미로 로마서 14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바울이 쓴 로마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 쓴 서한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형제자매들한테 쓴 글이에요.

그런데 그들한테 말하기를 우리도 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심판을 받든 안 받든, 말하자면 유죄판결을 받든 무죄판결을 받든, 우리는 모두가 다 한 번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유죄냐 무죄냐, 말하자면 지옥이냐 천국이냐 하는 판결이 내려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말이 누구를 향한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앙 속에서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빌립보서도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한입니다만, 사도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보다도 한참 못한 우리가 언제 여유를 부릴 새가 있겠습니까.


잠언 1장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아닌 인자하심 속에 머물면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구원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63회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
← 제361회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