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회 갚아야 할 빚
2020년 10월 11일 설교 (로마서 강해 6)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14절 신약 239페이지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3節~14節
“13.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 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14.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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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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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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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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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번째 시간으로서 “갚아야 할 빚” 返すべき負債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로마서 1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 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에 대해서 13절에서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식물에 있어서 열매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식물의 최종적인 결과물,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성과>라는 말도 한자로 쓰면 과실이 난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과수원 농장에서 농민 분들이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개인 날이나 눈비가 내리는 날이나 정성을 다해서 식물들을 가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것도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나무라 하더라도, 아무리 보기 좋은 나무라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농부들이 열심히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 나무를 키워봤자 이는 돈 낭비, 체력 낭비, 시간 낭비, 그리고 좋은 밭, 토양 낭비일 뿐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8절~20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みな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彼らを実によって見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안 좋은 나무인지는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어요. 오로지 열매가 좋으면 그 나무는 좋은 것이요, 열매가 안 좋으면 그 나무는 안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중고등학교 때에는 프로야구도 참 좋아하고 그랬었습니다만, 요즘은 뭐, 워낙 볼 시간이 없다 보니, 가끔 보면 한국이나 일본 야구나 축구를 보더라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가끔 한국 축구 시합을 보면 해설하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 축구는 다 좋은데 골 결정력이 없대요. 제가 운동경기 같은 데에 워낙 문외한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본래 축구가 뭘 하는 경기예요. 공을 상대방 골에 넣어야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건 다 좋은데 골 결정력이 없다……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개개인의 기술력이 좋다 하더라도, 아무리 선수들의 체력이 뛰어나거나, 하물며 아무리 선수들의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인간성이 참 좋다고 하더라도, 축구 시합에서 골을 넣지 못하고 맨날 지기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야구 선수가 정말 잘생기고 팬 서비스도 잘하고 다 좋은데 시합에서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해요. 아니면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해요. 만약에 그런 선수가 있다면 프로 운동 선수로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장점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쓸모가 없게 되어서 소속팀으로부터 버려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 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이 말씀, 어떠십니까. 누구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배도 안 고프시고 아픔도 안 느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100% 하나님과 100% 인간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이 아픔도 느끼시고 우리와 똑같이 허기도 느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도 아시고 우리의 고통도 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채찍에 맞아도 아프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도 아픔을 느끼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뼈와 살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느끼는 아픔을 그대로 모두 느끼시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모두 느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나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가 있나 하고 보셨는데,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더러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고 저주를 하십니다. 그러자 11장 20절에 의하면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좋아요. 뭐, 예를 들어서 집에 있을 때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냉장고를 열어봤는데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럼 어떻겠습니까. 좀 화가 나거나 할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도 아마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배고플 때 무화과 열매가 없었다고 해서 나무를 말라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왜 열매가 없었대요?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끝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마가복음 11장 13절 끝부분.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예수님, 이건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무화가 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것은 그 나무 잘못이 아니래요. 아직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나무를 말라 죽여버리는 것은,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는 성경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첫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 잎사귀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반대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에 그 나무에 잎사귀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게 다가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그 나무에 잎사귀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열매를 찾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대와 달리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 열매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에 대해서 화를 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있었던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화가 나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만이 아니라 다른 과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무의 줄기가 자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무 모양을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인가요? 벌레들에게 잎사귀를 먹게 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닙니다. 오로지 나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물론 나무에 잎사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보기는 좋겠지요. 물론 그 잎사귀를 벌레들이 먹고 자리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부분이지요. 무화과 나무 같은 과실나무에 잎사귀가 나는 최대의 이유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가 자라는 것이요, 열매를 맺기 위해 잎사귀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보니까 잎사귀만 여기저기 많이 달렸는데, 제일 중요한 열매가 없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잎사귀도 없었다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잎사귀만 많이 달린 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심판은 단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에 대해서 저주를 하시자 그 나무는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프로 축구나 야구선수가 다른 것들은 다 잘하는데 골을 넣지 못한다거나, 점수를 따지 못한다면, 결국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이 무화과나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도 이 공식은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이 아주 좋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고 방언도 유창하게 합니다. 예배도 빠짐없이 참석을 합니다. 그리고 또 신학교도 나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신학교를 졸업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높은 직분도 받았고, 신학서적도 아주 많이 썼어요. 뿐만 아니라 아주 유명한 신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고 계세요.

이 정도면 대단히 훌륭한 믿음의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이 목사님인 경우도 있고, 또한 성도님일 수도 있겠지요. 이 정도 배경이면 부족함이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아주 성격이 독특해요. 고집이 셉니다. 남이 하는 말을 안 듣고, 그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지만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전혀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다. 이웃 관계도 대단히 안 좋아요. 이웃한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이래봬도 옛날에 어쩌고저쩌고,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했고 어떻게 했고,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고, 내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고, 내가 금식을 얼마나 많이 했고……하는 자랑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요. 이런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다 잎사귀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어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열매가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그 배경이나 학벌이나 경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 잎사귀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씨를 뿌리고 <말씀>의 물을 빨아들여서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좀 알고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행함>이라고 하면 금방 <야고보서>를 떠올립니다. 예, 이는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도 할 정도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야고보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善を行った者は、よみがえっていのちを受け、悪を行った者は、よみがえってさばきを受けるのです。


로마서 2장 6절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디모데후서 4장 14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銅細工人のアレクサンドロが私をひどく苦しめました。その行いに応じて、主が彼に報いられます。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이와 갈이 행함을 강조한 것은 야고보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행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열매>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금식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등등 이라고 해 봤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 없는 잎사귀 투성이인 무화과나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우리 안에 강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하더라도, 행함이라는 열매가 없다면 이는 또한 모두가 잎사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제가 알려드릴까요? 아니요. 성경에서 이미 여러분께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이 사실을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빚을 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빚을 졌다고 하냐 하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돈이 되겠지요.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는 돈에 대한 말씀이 아니지요.

마태복음 10장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病人を癒やし、死人を生き返らせ、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をきよめ、悪霊どもを追い出しなさい。あなたがたはただで受けたのですから、ただで与えなさ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권유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가 아니라, 이렇게 하라……라고 하는 명령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까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거저 받았습니까.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구약 시대 때 과거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무거우니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게 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겠지요. 첫째는 우리 스스로의 죄가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면 우리의 죄가 해결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통도, 예수님의 아픔도, 예수님의 보혈도,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마저도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심판,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져야 마땅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한 구원,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저입니다. 우리가 10만원을 거저 받으면 기뻐합니다. 100만원을 거저 받으면 더욱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말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축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돈을 받고 그렇게 해주셨나요? 아니요. 거저로 그와 같은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로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속담 중에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 안에서 보면 사실인가요?

예를 들어서 중고차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된 차라고 해도, 주인이 많이 바뀌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해요. 그것은 원래 하던 대로 운전을 하는 것이 차에 좋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만년필 같은 경우를 보아도 다른 사람의 것을 쓰면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년필을 쓰게 되면 펜 끝이 닳게 되는데, 그게 사람마다 각각 다르대요. 그래서 여러 사람이 쓰게 되면 금새 펜 끝이 닳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뭐예요? 예, 새것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고품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것이 아니라 중고품이라면 원래 하던 대로 사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우리가 중고품이라고 적혀 있나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비교적 깨끗한 중고품이 되었도다……가 아닙니다. 완전한 새것이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8절~20절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先のことに心を留めるな。昔のことに目を留めるな。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광야는 본래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사막에도 강은 없어요. 사막에 강이 있다면 이는 사막이 아니지요. 광야에 길을 낸다는 일, 하물며 사막에 강을 낸다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 길이 나면 사람들이 왕래합니다. 그러면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서 그전에는 값어치가 없던 땅에 작은 마을이 생기고 큰 도시가 생겨납니다. 메마른 사막에 강이 생기면 죽었던 땅에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모래바람만 불었던 지역에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는 그 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나는 부족해. 나는 참 못났어…….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 일을 행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한 새로운 축복,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줄 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삶,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가 드디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문명인이냐 야만인이냐, 지식인이냐 어리석은 인이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13절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その家に入るときには、平安を祈るあいさつをしなさい。
その家がそれにふさわしければ、あなたがたの祈る平安がその家に来るようにし、ふさわしくなければ、その平安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返って来 るようにしなさ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든 안 하든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제부터 새로운 삶,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갚아 가면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 우리 인생의 광야에 길이 나고 우리 인생의 사막에 큰 강물이 생기는 삶, 큰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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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회 예수님과의 만남
2020년 10월 4일 설교 (로마서 강해 5)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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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9절~12절 신약 239페이지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9節~12節
“私が御子の福音を伝えつつ心から仕えている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私は絶えず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
祈るときにはいつも、神のみこころによって、今度こそついに道が開かれ、何とか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け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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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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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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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과의 만남” イエス様との出会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9절~10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9절~10절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9.私が御子の福音を伝えつつ心から仕えている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私は絶えず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
10.祈るときにはいつも、神のみこころによって、今度こそついに道が開かれ、何とか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け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우리가 시간 관계상 적어도 두 가지 시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의 시각입니다. 그는 이제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이방인에게 주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상황에 보더라도, 물론 국내 선교를 보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일본처럼 기독교인구가 적은 나라만이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처럼 기독교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목회를 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에서 목회를 하게 될 경우 외국에서 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래도 문제될 부분이 좀 적기는 하지요.


무엇보다 외국에서 선교를 하게 된다면 비자 문제가 걸리게 됩니다. 요즘은 며칠이나 몇 개월 정도 관광으로 외국을 방문한다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곳도 많지만, 그 나라에 정착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비자를 발급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나라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바뀌기도 하고 하니 해외에서 사역하고 계신 분들 중에서, 이 비자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도 사실 이 비자문제 때문에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서 도합하면 한 5개월 정도나 이산가족이 된 상태로 지내야 했었습니다. 입국관리국도 여기 군마현에 있는 다카사키 출장소에도 갔다가, 동경에 있는 입관에도 갔다가, 거기서는 담당자와 면담까지도 하기도 하고 해서 아무튼, 지난 2018년에는 1년 동안 그 비자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이고 정말 얼마나 막막해지는지 모릅니다.

해외선교에 대한 어려움은 물론 지금과 바울 당시 때와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외국에 간다는 것이 국내에서의 이동보다 어려움이 동반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말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사모하고 방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때로는 아무도 안 알아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외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꿈이나 환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요. 뭐, 만나셨다고 하니 정말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무슨 흔한 그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저는 모르지요. 저 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저기 중심이 예수님이라고 해요. 저 그림을 본다 하더라도 글쎄요.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옷이라도 좀 입고 계시지 왜 저렇게 벗고 계실까 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습니다.

다빈치가 그린 그림을 보아도 글쎄요. 이런 말을 하면 좀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남들이 명화다 뭐다 하니까 그렇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좀 표정들이 대체적으로 무서워요. 어떻게 좀 더 자연스럽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금식을 합니다. 기도원에 갑니다.

물론 기도를 하는 것 중요합니다. 금식을 하는 것도 성경적인 것이지요. 저도 기도원에 몇 번 가보았습니다만, 거기 가면 일상에서 떠나와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해서 꽤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금식을 해야지만 만날 수가 있을까요. 산속에 가야지만 만날 수가 있을까요.

남녀가 연애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서로간에 있어서 어느 쪽이 상대방을 더 보고 싶어할까. 그래서 아무래도 상대방이 나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보다 내가 더 보고 싶어하면 왠지 손해를 본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야기도 한다고 해요. 남녀가 연애를 할 때, 맨 처음에 누가 먼저 좋아했냐 하는 것이죠. 이럴 때에도 서로 미룬다고 하지요? 네가 먼저 좋아했다. 아니다 네가 먼저 좋아했다. 뭐, 그러면서 다투기도 한다고 합니다. 뭐, 이런 건 다툰다 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사랑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과 나, 어느 쪽이 서로를 보고 싶어 할까요. 어느 쪽이 먼저 서로를 사랑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 믿기가 쉽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고 은혜가 넘치고 축복이 넘쳐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가끔 보면 어떻게 된 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다들 잘 살고, 그래도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나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이고, 도대체 예수님을 믿지 않은 누구누구는 저렇게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예수님을 믿는 나는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만 생깁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

솔직히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예수님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누가 나 믿으라 그랬어? 네가 좋다고 네 마음대로 믿었던 것 아냐. 그런데 왜 내가 너를 책임져야 하는데? 싫으면 관두면 될 거 아니야!”

뭐,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마음이 가벼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고 계신가요?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택한 거야.”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일서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 내가 너를 먼저 택했어.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어. 그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다 책임져줄게.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러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나요? 예수님 믿는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羨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잠언 24장 19절~20절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悪を行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しき者を羨むな。
悪者には将来がなく、悪しき者のともしびは消えるからだ。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이 적힌 시기는 솔로몬 왕 때이니까 대략 기원전 9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900년 이상 옛날에도 지금과 똑같이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에서 볼 때 한국은 서쪽에 있습니다. 여기 한국에 가려는 두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까. 그렇죠. 목적지인 한국이 서쪽에 있으면 서쪽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습니다.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아니, 바보같이 한국은 동쪽인데 왜 서쪽으로 가고 있어?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서쪽으로 간 사람은 한국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동쪽으로 간 사람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서쪽으로 간 사람은 자기 힘으로 열심히 뛰어갔고, 동해바다를 자기 힘으로 헤엄쳐서 건너려고 하다가 그만 빠져버렸지만, 동쪽으로 간 사람은 거기에 있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먼저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일만 가지고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광야로 나왔을 때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결별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롯에게 먼저 길을 택하라고 합니다. 네가 가는 길을 먼저 택하면 나는 그와 다른 길을 가겠다.

그러자 롯은 어떤 길을 택하게 됩니까.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사막에서는 무엇보다도 물이 많은 곳이 좋은 땅이지요. 그런데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까 물이 넉넉해서 그 모습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애굽 땅처럼 보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롯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땅이 어디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죄악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참된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꾸만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합니다. 자꾸만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호세아 11장 8절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エフライムよ。わたしはどうしてあなたを引き渡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イスラエルよ。どうしてあなたを見捨て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どうしてあなたをアデマのように引き渡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どうしてあなたをツェボイムのように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わたしの心はわたしのうちで沸き返り、わたしはあわれみで胸が熱くなっている。

여기서 <아드마(アデマ)>와 <스보임(ツェボイム)>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희들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 같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먼저 택해버린 것이 잘못이요. 먼저 사랑한 것이 잘못이지요.
先に選んしまったのが運の尽き、先に愛してしまったのが運の尽き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그렇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먼저 택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만나러 오셨습니다. 제아무리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는 것보다 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이 있었나요? 아니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 11절~12절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까 일본의 한 패럴림픽 대표선수를 소개하는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수의 좌우명을 써달라고 하니까 “기적은 없다”라고 적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로지 연습만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연습 없이 게으름을 피워도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기적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의 말로서 본다면 정말 멋진 말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으로 보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코로나인지 뭔지가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해결해줍니까. 뉴스에 보면 돈 많은 사람들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영국이나 브라질 총리도 코로나에 걸렸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며칠 전에 보니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영부인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백악관이 어떤 곳입니까. 핵전쟁이 나도 무사하다고 하는 곳이 백악관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미국 대통령이 타는 전용차량은 별명이 비스트, 짐승, 야수라고 하는데, 정말 짐승이나 야수라 불릴 정도로 탄탄하고 웬만한 폭탄에도 끄떡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할 때에는 이 자동차까지도 비행기로 운반한다고 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씁니다.

자고로 미국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권력, 세계 최강의 군 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니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보내려고 하는데 바로 왕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의 장남들이 죽었습니다. 이는 서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바로의 장남까지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 바로 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 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권력보다도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코로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마치 깊은 늪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회복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그 늪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갖고 서로가 안위함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 인해서 믿음을 통해 힘을 얻게 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적인 축복, 영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막혔던 것이 뚫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수많은 선택이라는 이름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문들은 때로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문과,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문입니다. 축복의 문과 저주의 문,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서 가장 믿을만하지 못한 방법은 다수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자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다수결로 선택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올바른 선택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なら、わたしはその人のところに入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드리는 문을 여시면 됩니다. 그 문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문이요, 기뻐하시는 문이요, 축복의 문이요, 생명의 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삶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문, 축복의 문, 생명의 문을 활짝 열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맛 보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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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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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253회 예수님 것으로서의 사명
20209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6절~8절 신약 239페이지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章6節~8節
“その異邦人たち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ローマにいるすべての、神に愛され、召された聖徒たちへ。私たちの父な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 恵 みと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りますように。まず初めに、私はあなたがたすべてについて、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私の神に感謝します。全世界であなたがたの信仰が語り伝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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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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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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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 것으로서의 사명” イエス様のものとしての使命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 중에서 1장 6절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6절
6.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その異邦人たち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

여기서 <그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로마서 1장 5절을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서 순종하게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인 <그들 중에서>라고 되어 있으니까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장 6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우리도 이방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라고 하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글에 보면 이 번역,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것> 그러니까 소유격으로 번역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무슨 번역판을 사용해야지만 된다고 하면서, 옛날에 어떤 기독교 신문을 보니까 아주 신문광고까지 내면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은 어디가 틀렸다, 어디가 잘못되어 있다, 하는 그런 내용을 싣기도 하는 분들이 계신데, 자꾸 이런 것에 휩쓸리다 보면 성경을 읽을 때 은혜가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안 들어와요.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고, 그러면 뭐가 맞냐 하면 무슨 무슨 성경을 써야지만 된다고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잘 들어보면 결국 그 사람, 자기가 하는 말이 맞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 하는 이야기예요.

이와 같은 일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외국에서도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전에 미국에 보니까,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이 NIV라는 성경이 있는데, 이 성경은 어디가 틀렸고 어디가 잘못됐고 하는 것을 아예 책으로 출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좀 문제가 있는 성경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인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성경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 번역을 한 것이고 다양하게 검증된 책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혹시 이 성경은 좀 이상한 것이 아닌지 궁금할 경우에는 저한테 물어보시거나 아니면 다른 목사님께 여쭈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한글 개역개정이나 일본 신개역2017에 보면 역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본문 내용을 따라 말씀을 전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로마서는 말 그대로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지금은 로마 쪽에 보면 바티칸도 있고 큰 교회들도 있습니다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사실 바울은 아직 이 당시에 로마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방지역인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고 바울이 어떻게 이를 알고 로마에 서한을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라고 하는 점 또한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오늘 6절 말씀에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우리가 본다면 그다지 감동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율법이나 성경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추측입니다만, 그 당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하더라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어딘지 모르는 열등감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당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다”(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라고 하는 말은 크나큰 힘과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육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닙니다만, 영적인 유대인,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 영적인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한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질문도 선택지가 있습니다만, 조금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끝까지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질문입니다. 우리는 방금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의 것일까요.

1번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2번 기타

자, 제 질문 취지를 아시는 분들께서는 어쩌면 고개를 좀 갸우뚱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저는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제가 드리는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대부분 그게 정답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음?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자, 그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입고 계신 옷,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스마트폰, 누구의 것입니까. 예, 혹시 남의 옷을 입고 계시거나, 뭐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만, 혹시 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시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대부분 자신의 옷을 입고 있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이나 스마트폰이 여러분 것이라는 이유가 여러분이 직접 만드셨기 때문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뭐, 옷 정도는 솜씨가 좋다면 직접 만드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하더라도 스마트폰을 처음부터 조립해서 자기고 다시는 사람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손수 만들지도 않은 옷인데도 불구하고, 손수 납땜질을 해가면서 조립한 스마트폰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것이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것이 되는 경우가 반드시 자기가 돈을 내고 사야지만 되는 것인가요?

그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하더라도 그것은 내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 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습니다. 무엇으로 값을 치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죄악 속에 있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절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로마서 1장 7절
“7.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ローマにいるすべての、神に愛され、召された聖徒たちへ。私たちの父なる神と主イエス・キリストから、恵みと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りますように。

우리는 이제 우리 스스로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넘쳐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면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어떤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이 분은 어린이집 교사에요. 그런데 이 분이 흥미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예전에 탈북자 가족 중에서 그 어린이를 돌봐준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한국의 일반 아이들과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자기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예요. 선생님이 무슨 물건을 쓰라고 주어도 조금 쓰다가 아무데나 내팽개쳐버린대요. 그리고 전혀 물건을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무래도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이다 보니까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한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누구누구야, 이건 네 것이니까 네 이름을 적어놓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해. 하고 가르쳤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것, 우리가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것, 예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가만히 할렐루야 하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사야 5장 1절~2절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さあ、わたしは歌おう。わが愛する者のために。そのぶどう畑についての、わが愛の歌を。わが愛する者は、よく肥えた山腹にぶどう畑を持っていた。
彼はそこを掘り起こして、石を除き、そこに良いぶどうを植え、その中にやぐらを立 て、その中にぶどうの踏み場まで掘り、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ところが、酸いぶどうができてしまった。


하나님께서는 극상품 포도나무, 샤인 머스캣이나 거봉 같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극상품 포도나무가 튼튼하게 자라기 위한 모든 환경을 조성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들포도가 맺혔습니다. 최고급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키었는데, 결과적으로 맺힌 것은 짐승 사료로도 쓸 수 없는 들포도가 맺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이사야 5장 4절~6절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わがぶどう畑になすべきことで、何かわたしがしなかったことがあるか。なぜ、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のに、酸いぶどうができたのか。
さあ、今度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知らせよう。わたしが、わがぶどう畑に対してすることを。わたしはその垣を取 り払い、荒れすたれるに任せ、その石垣を崩して、踏みつけられるままにする。
わたしはこれを滅びるままにしておく。枝は下ろされず、草は刈られず、茨やおどろが生い茂る。わたしは雨雲に命じて、この上に雨を降らせないようにする。」

하나님께서는 이를 무섭게 심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밭의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데 큰 빚을 졌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가 없을 정도의 빚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사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취업도 할 수가 없지요. 그런 사람을 누가 써주겠습니까.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하지요. 법적으로 볼 때 개인파산, 자기 파산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채무가 면제됩니다. 모든 빚이 해결돼요.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모든 채무가 면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죄인이었습니다. 작은 죄를 지은 죄인은 자기가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반복해서 죄를 지어온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는 자기가 무거운 죄인인지 아닌지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오늘 당장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 우리는 예외인가요? 아니요.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얼마나 많이 가족이나 이웃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른 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 죄,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내 죄가 햇빛을 쬐면 드러나듯 점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모두 완전히 해결해졌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다면 극상품 포도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혔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하는 포도밭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극상품 포도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자,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는 주관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をエデンの園から追い出し、人が自分が取り出された大地を耕すようにされた。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근원인 우리 마음의 땅을 갈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인 것입니다.


우선 믿음이라고 하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냥 무작정 땅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주님께서 주시는 나무를 심기 위해 바치겠다고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땅을 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무엇으로 땅을 갈겠습니까. 설마 손으로 갈아요? 그러면 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대로 갈아보지도 못하고 금방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총이나 칼로 갈아요? 연필로 갈아요? 아닙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空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かの捕らわれの身になら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間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もろもろの霊 による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땅을 갈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올바른 도구, 바로 괭이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있는 힘을 다 해서 갈려고 해 봤자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땅을 올바로 갈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갈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믿음이라고 하는 고백, 성경말씀이라고 하는 괭이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경작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고백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밭을 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 괭이질을 하면 그만인가요? 아닙니다. 아침이고 밤이고 반복적으로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괭이질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단단했던 땅이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바위나 돌멩이들이 튀어나옵니다. 잡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그대로 놔두면 아무리 좋은 씨를 심어도, 아무리 좋은 나무를 심어도 다 말라 죽어버립니다. 이런 바위나 돌멩이나 잡초들을 쑥쑥 뽑아서 내버려야지만 보들보들하고 기름진 옥토가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은 옥토가 되면, 이제 극상품 포도를 심으면 극상품 포도가 나고, 극상품 야채를 심어도 극상품 야채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것으로 끝인가요? 포도를 심었어요. 포도나 났어요. 포도를 먹었어요.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다면, 포도나무가 죽으면 이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교배를 시켜서 늘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8절
“8.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まず初めに、私はあなたがたすべてについて、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私の神に感謝します。全世界であなたがたの信仰が語り伝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이라 하더라도 작은 컵에 담아서 내버려 둬보십시오. 며칠 지나면 냄새가 나고 썩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우리가 좋은 믿음이라 하더라도 우리 안에만 가두어놓는다면 이는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척을 해봐도, 아주 고집이 세요. 남의 말을 안 듣고 그 마음이 아주 단단해요.

또는 기도도 많이 하고, 방언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는데 그 마음 안에 올바른 성경말씀이 없어요. 꿈 이야기를 하고 환상 이야기를 하고 예언 이야기를 하고, 도저히 그 마음 안에 성경 말씀이 없어요.

이렇게 된다면 그 마음은 단단해져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항상 마음이 아주 보들보들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포도는 언제나 입에 달기만 한 포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고난이라는 포도를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시련이라는 포도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의 포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항상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괭이로써 매일매일 부지런히 행함이라고 하는 괭이질이 된 보들보들한 땅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극상품 고난을 심어도 극상품 은혜라는 열매가 맺히고, 극상품 시련을 심어도 극상품 평강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극상품 고난과 극상품 시련을 주세요? 예, 그렇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야고보서 1장 2절~3절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私の兄弟たち。様々な試練にあうときはいつでも、この上もない喜びと思いなさい。
あなたがたが知っているとおり、信仰が試されると忍耐が生まれます。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더욱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극상품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신 우리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 앞에 좌절은 없습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로지 은혜와 평강이 넘쳐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고백과 말씀의 괭이로써 우리의 마음을 갈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불신의 바위나 돌멩이들, 이 세상 근심걱정이라는 잡초들을 모두 깨끗하게 뽑아내 버리고는, 우리 일생 속에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를 열매 맺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극상품 포도를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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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252회 순종하는 그릇
20209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5절 신약 239페이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1章5節
“この方によって、私たちは恵みと使徒の務めを受けました。御名のために、すべての異邦人の中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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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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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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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순종하는 그릇” 従順する器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경 다섯 번째 책인 사도행전은 대단히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신 모습은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만, 만약에 사도행전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이 있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고,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책 이름이 사도행전이긴 합니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는 선지자를 통해서, 때로는 천사들을 통해서 역사하셨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갑자기 하늘에서 성령님이 내려오시더니 이제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 위에 성령님이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 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요한복음 14장 25절~27절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これらのことを、わたしは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間に話しました。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平安を残します。わたしの平安を与えます。わたしは、世が与えるのと同じようには与えません。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ひるんではなりません。


요한복음 15장 26절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 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반복해서 성령님이 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시면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언은 앞서 살펴본 사도행전 2장 1절~4절로 인해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聖霊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부 극소수 선지자들만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야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다음 성령을 부어주신 이후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제 어디서 어떤 때는지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 이후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시대입니다. 이제 사람의 능력이 아닌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은 그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행전이라기 보다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 핵심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도에 의해서 이스라엘 내외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우선 이스라엘 내외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 중에서 어느 쪽이 이스라엘 전도에 적합하고, 어느 쪽이 이방인 전도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두 사도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비교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사도 베드로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출신입니다. 그가 살던 곳은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벳새다(ベツサイダ)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이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그 벳새다라고 하는 동네 이름의 뜻은 “어부의 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 동네에 여러 직업이 있는 사람 중의 어부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어부의 일밖에 모르는 사람, 당시에는 의무교육이나 그와 같은 제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철이 들고 난 다음부터 그저 고기잡이만 해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성령강림 사건 때에 그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니까 아무리 많이 배우지 못했기는 하나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そこで、ペテロは彼らに言った。「それぞれ罪を赦していただくために、悔い改めて、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なさい。そうすれば、賜物として聖霊を受けます。
この約束は、あなたがたに、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に、そして遠く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すなわち、私たちの神である主が召される人ならだれにで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ペテロは、ほかにも多くのことばをもって証しをし、「この曲がった時代から救われなさい」と言って、彼らに勧めた。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아무리 못 배운 베드로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니까 설교를 한 번 하자, 3천 명이나 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바울은 어떤지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 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이와 같은 구절로 볼 때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바울이 태어난 곳은 길리기아 다소(キリキアのタルソ)라고 하는데, 당시 이 곳은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 지파였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리새인이라고 맨날 예수님한테 혼 나고, 자기들은 맨날 잘난 척이나 하고, 결국 대제사장과 결탁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한 장본인들 중 하나입니다만, 사실 그들은 당시 종교적으로 본다면 지도자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또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고 하는데, 사도행전 5장 34절에 보면 그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교사(民全体に尊敬されている律法の教師)”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학이라고 하면 캠퍼스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학생들과 교수님들 계셔서 수업을 듣고 졸업을 하고 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어느 선생님에게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로 좋은 학교,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배경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장 27절~29절
“27.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28.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29.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そこで、千人隊長はパウロのところに来て言った。「私に言いなさい。あなたはローマ市民なのか。」パウロは「そうです」と答えた。
すると千人隊長は言った。「私は多額の金でこの市民権を手に入れたのだ。」パウロは言った。「私は生まれながらの市民です。」
そこで、パウロを取 り調べようとしていた者たちは、すぐにパウロから身を引いた。千人隊長も、パウロがローマ市民であり、その彼を縛っていたことを知って恐れた。

그를 재판하고 있는 천부장은 지금으로 본다면 외국으로부터 이민을 와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어렵게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하는데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던 것이지요.

자, 이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작은 어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바울은 대도시에서 자랐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유대인이었겠으나 구체적인 지파나 집안 내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내세울만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반면에 바울은 베냐민 지파에 바리새파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 중에서도 상당히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많이 배우지도 못한 고기잡이 집안이었는데, 바울은 쉽게 말해서 훌륭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했었으나, 바울은 고급 관료였습니다.

자, 지금 이 두 사람을 이용해서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를 벌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본다면 누가 유대인 선교에 적합하고, 누가 이방인 선교에 적합하겠습니까.

이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제게 말을 해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어느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래요. 지인들 중에 한국 명문 사립대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는 서울대를 나왔는데, 미국에 가서 얼마 안 되어서 미국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도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그 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미국인이 한국인 친구들이 나온 그 명문 사립대를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뭐 그 미국인이 한국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대학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하고, 그 학교를 나온 한국인 친구가 좀 실망을 하더래요.

그래서 서울대를 나온 그 분이, 아무리 그래도 서울대는 알겠지, 하고, 아, 자기는 서 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 때까지 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국 학생 표정이 아주 밝아지더래요. 그래서, 그래, 역시 서울대 정도 되면 이 미국인 친구도 알아주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미국인이 의외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니까, 그 미국인 대학생이 뭐라 그랬냐 하면 아주 활짝 웃으면서 “Oh, I know Seoul! I know Seoul Olympic!”

아하! 나 서울 알아! 서울올림픽 알아! 그랬다는 것이에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 미국인 친구는 서울대라고 하는 대학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를 나도 알아!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지요.

뭐, 물론 그 미국인 대학생 친구가 너무 뭘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이 일을 경험하고 느낀 것이, 아, 그래 한국에서는 그렇게 죽어라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했었는데, 어쩌면 그게 다 우물 안 개구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허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보았을 때, 아무리 바울이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왔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급 공무원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나 알아주는 일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와~ 정말 대단하네~ 뭐 그러면서 인정해줄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한발자국 나가면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그리스 같은 외국에 가서 아~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베냐민 지파고 바리새파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고……라고 하면 누가 알아주나요.

반면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제 한 번 설교를 하니까 수 천명이 모여들어요. 하지만 화려한 배경이나 학벌이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유대인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알아주는 배경과 실력을 갖춘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맡고, 그러한 학력이나 배경 같은 것이 없는 베드로는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방인 선교로 돌리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학벌도 배경도 없는 베드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더니 3천명이 모였다고? 그렇다면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적어도 3만 명은 모이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중에 천국 가서 바울 선생님을 만났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혼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많이 부족한 저였더라면,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사도행전 13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6절~41절까지 보면 안식일 날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이 작심하고 말씀을 전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 날은 반응이 좀 괜찮았어요.

사도행전 13장 42절~43절
“42.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二人が会堂を出るとき、人々は、次の安息日にも同じことについて話してくれるように頼んだ。
会堂の集会が終わってからも、多くのユダヤ人と神を敬う改宗者たちがパウロとバルナバについて来たので、二人は彼らと語り合い、神の恵 みにとどまるように説得した。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따랐다고 합니다. 반응이 좋으니까 다음 주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 봐라. 역시 내 적성은 유대인 선교야……. 어쩌면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주 안식일입니다.

바울은 역시 그 날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무리들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여든 유대인들의 반응이 좀 이상해요.

사도행전 13장 44절~45절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次の安息日には、ほぼ町中の人々が、主のことばを聞くために集まって来た。
しかし、この群衆を見たユダヤ人たちはねたみに燃え、パウロが語ることに反対し、口汚くののしった。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모여든 것을 보고 시기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목사나 전도사라고 하는 직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 말씀을 전할 사람을 섭외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했었다고 합니다만, 어쩌면 그 자리에는 평소에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가 설교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그러면 질투가 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많이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시기가 나니까 바울이 말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고 트집을 잡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화가 난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6절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そこで、パウロとバルナバは大胆に語った。「神のことばは、まずあなたがたに語ら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あなたがたはそれを拒んで、自分自身 を永遠のいのちにふさわしくない者にしています。ですから、見なさい、私たちはこれから異邦人たちの方に向かいます。

이봐, 유대인들아, 너희들이 먼저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왜 이를 안 받아들이냔 말이야. 너희들 자꾸 이러면 차라리 이방인한테 가는 수가 있어?

자, 바울이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아이구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고 바울을 만류했을까요?

사도행전 13장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ところが、ユダヤ人たちは、神を敬う貴婦人たちや町のおもだった人たちを扇動して、パウロとバルナバを迫害させ、二人をその地方から追い出した。

참 인생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부귀와 명예와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을 전하기로 작정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평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렇다면 좀 일이 술술 풀려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도 일이 꼬이게 되니 바울도 참 답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어떻게 말씀하고 계셨습니까.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사실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울에게 안수를 줄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 그러니까 바울더러 이방인 선교를 하라는 주님의 뜻을 바울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13장 47절에서 바울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主が私たちに、こう命じておられる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異邦人の光とし、地の果てにまで救いをもたらす者とする。』」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서 빨리 이방인들에게로 향했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있다 보니까, 사람들을 충동해서 아예 내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울을 가리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 질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면 축복을 받을까요? 못 받을까요. 예,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릇으로 쓰임을 받게 된다면 축복, 그것도 큰 축복,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부터가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여러분 앞에 나타나셔서, 너를 내 그릇으로 삼겠다, 라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기쁘십니까. 두려우십니까. 1번 기쁘다. 2번 두렵다.

자, 우리는 당연히 기쁘다, 1번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저를 주님께서 쓰시기 위한 그릇으로 택해주셨다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음 구절입니다. 이사야 30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30장 12절~14절
“12.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13.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
14.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それゆえ、イスラエルの聖なる方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言うことを退けて、虐げと悪巧みに拠り頼み、これに頼った。
それゆえ、このあなたがたの不義は、そそり立つ城壁に広がって今にもそれを倒す裂け目のようになる。その倒壊は瞬く間に来る。
その倒壊は、陶器師の壺が容赦なく打ち砕かれるときのよう。その破片の中には、炉から火を取り、水溜めから水を汲むかけらさえ見つからない。」

지금도 실제로 손으로 도자기를 만드시는 분들을 보면요, 가마에서 구워 나온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망치로 박살을 내버립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가마에 넣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다 구워 나온 상태에서는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깨버리시냐 하면 그 조각을 가지고 불을 붙이거나 물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완전히 박살내 버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목이 말라요. 그래서 컵에 물을 따라 마시려고 했어요. 그런데 컵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물을 안 마셔요? 아니요. 다른 컵을 꺼내서 마시면 그만입니다.

에스더 4장 14절을 봅니다.

에스더 4장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もし、あなたがこのようなときに沈黙を守るなら、別のところから助けと救いがユダヤ人のために起こるだろう。しかし、あなたも、あなたの父の家も滅 びるだろう。あなたがこの王国に来たのは、もしかすると、このような時のためかもしれない。」

이제 유다 민족이 망하게 생겼는데 왕비 에스더가 자기 목숨이 귀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시겠지만, 너는 망한다고 에스더의 의부인 모르드개가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인데 얼마나 큰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나 그 그릇이 하나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거부한다고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포기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그 그릇을 아끼지는 않으십니다. 흔적도 없이 박살을 내신 다음, 새 그릇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바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꼭 목사나 교역자, 또는 직분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 내가 지금 하는 일, 이는 모두가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거기 있고, 내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세우시고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 후에는 주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거부한 채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죄악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다른 그릇을 선택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바울이 만약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끝까지 자신은 유대인 선교를 하겠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시라고, 내가 이방인 선교보다는 유대인 선교가 더 낫지 않겠느냐고 끝까지 우겼다고 한다면, 주님은 결국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을 깨고 다른 그릇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릇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희망적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려갈 길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릇, 예수님의 그릇으로서 바울이 끝까지 순종하여 의의 면류관을 얻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 남겨진 삶 속에서 끝까지, 순종하는 그릇으로 쓰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를 위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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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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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회 하나님 아들의 사랑
20209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신약 239페이지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 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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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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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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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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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아들의 사랑” 神の子の愛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한 번 통독을 해보려고 할 때, 구약을 보면 창세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레위기나 신명기 같은 경우를 보면 좀 어렵잖아요. 참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럼 신약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어 봅니다만, 그 때 처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비가 바로 이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시작하는 계보입니다.

길이는 짧아요. 그래봤자 한 장 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처음 읽는 분들한테는 이게 참 난감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에 보면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래요. 뭐 여기까지는 좋은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죠. 참 어려운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계보의 제목이 무엇이죠?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アブラハムの子、ダビデの子、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계보인 것입니다. 구약을 전혀 모르고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읽어보면, 이는 무슨 암호나 주문처럼 들리는 지루한 구절입니다만, 이러한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이는 대단히 큰 은혜가 됩니다.

정말 구약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쫙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신약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의 계보가 마침내는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져 있다는 놀라운 말씀이 바로 이 마태복음 1장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는 단순히 그 사실만을 기록해놓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계보는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서 준비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다윗에서 요셉을 거쳐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예비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마태복음의 계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아브라함과 다윗 이후에 계신 분이신가요?

누가복음 20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0장 41절~44절
“41.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すると、イエスが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人々は、キリストをダビデの子だと言うのですか。
ダビデ自身が詩篇の中で、こう言っています。『主は、私の主に言われた。「あなたは、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ですから、ダビデがキリストを主と呼んでいるのです。それなら、どうしてキリストがダビデの子なのでしょう。」

이는 예수님께서 다윗이 쓴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시편 110편 1절은 개역개정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 110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主は 私の主に言われた。 「あなたは わたしの右の座に着いていなさい。 わたしがあなたの敵を あなたの足台とするまで。」

이 구절은 예수님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때까지는 <주>가 곧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여기에 등장하는 <주>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처럼 이미 주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그 당시 이미 예수님은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59절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あなたがたの父アブラハムは、わたしの日を見るようになることを、大いに喜んでいました。そして、それを見て、喜んだのです。」
そこで、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に向かって言った。「あなたはまだ五十歳になっていないのに、アブラハムを見たの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アブラハムが生まれる前から、『わたしはある』なのです。」
すると彼らは、イエスに投げつけようと石を取った。しかし、イエスは身を隠して、宮から出て行かれた。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아브라함도 나를 보고 기뻐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 계보는 조금 이상해지지요. 즉, 이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계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준비단계를 기록한 것이지,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 안 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이 부분은 제가 몇 번이나 말씀 드려왔던 부분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성경 어디에 처음 등장하십니까.

요즘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어떤 분의 설교를, 제가 얼마 전에 들어보았습니다만, 이 분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 3절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등장하는 빛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빛이 아니라, 이 빛은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아멘! 그럽니다.

그래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을 예수님이라고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빛을 만드시게 되는데, 이 빛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뜻이 되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예수님 또한 이 온 세상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 처음 등장하십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시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예수님이 등장하신다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좀 여담입니다만, 저는 오랫동안 이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순서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자, 창세기 1장 1절~3절 중에서 1절과 2절의 순서를 바꾸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1절, 3절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地は茫漠として何もなく、闇が大水の面の上にあり、神の霊がその水の面を動いていた。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맨 처음에 혼돈한 상황,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하고 빛을 만드십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이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굳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라고 하는 구절을 가장 처음에 넣으셨습니다.

이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 가장 처음에 예수님을 넣으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치밀한 의도가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22장 21절에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즉, 이렇게 됨으로 인해서 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도 예수님으로 끝나는 완전한 예수님의 책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3節中~4節

御子は、肉によればダビデの子孫から生まれ、
聖なる霊によれば、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より、力ある神の子として公に示された方、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이는 분명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채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만 끝났다고 하면 이는 예수님에 의한 구속사역의 50% 달성? 아닙니다. 0%입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죄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런 것이죠. 전철을 탈 때, 돈을 내고 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출입구에 그 표를 찍었어요.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나요? 아닙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그렇지요. 문이 열려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내고 표를 사고, 그 표를 개찰구에 찍 하고 댔다 하더라도, 문이 안 열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예수님께서 아무리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없다면 이는 구원으로 가는 출입문이 안 열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이 있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에 충분하다고 인정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정해주십니까. 그렇지요. 죄값이 충분히 치러졌는지 아닌지는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 내 아들이 고난을 받음으로 해서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의 죄가 해결되었다.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라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대 명절은 오히려 성탄절보다도 부활절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예수님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뜻이라고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神は主をよみがえらせましたが、その御力によって私たちも、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십자가를 통한 제사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실 전적인 권한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를 받으시고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부활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 전에도 계셨고, 아브라함 전에도 계셨을 뿐만 아니라, 온 천하만물을 모두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잠시 오늘도 문제를 내볼까 합니다. 오늘은 연속해서 두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평소부터 성경을 얼마나 잘 읽고 계신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먼저 첫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얼마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올라가셨을까요.

1번 부활하시고 3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2번 부활하시고 1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3번 부활하시고 10일 이상 계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셨다.

어떤 분은 부활하신 후에 곧바로 서둘러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무려 40일 동안이나 이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질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 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가 문제입니다. 이 문제도 선택지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이 보기에는 물론 놀랐겠지요. 하지만 그 중에 용기 있는 제자 하나가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예수님! 하고 덥석 끌어 안으려 했다고 합시다. 만약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1번 뜨겁게 끌어 안을 수 있었다.
2번 투명인간처럼 끌어 안을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께서 오해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꽤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아있던 구절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요,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17절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イエスは彼女に「マリヤよ」と言われた。マリヤはふり返って、イエスにむかってヘブル語で「ラボニ」と言った。それは、先生という意味である。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さわってはいけない。わたしは、まだ父のみ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だから。ただ、わたしの兄弟たちの所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またあなたがたの父であって、わたしの神またあなたがたの神であられるかたのみもとへ上って行く』と、彼らに伝えなさい」。

자, 예수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마리아가 랍오니……라고 하는데 이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랍비>보다도 상대방을 더 높이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이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하셨다는 것,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 왠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만질 수가 없거나 만져서는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읽어드린 성경은 개역한글, 그러니까 우리가 예전에 사용했던 성경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에는 어떻게 되어있냐 하면, 자, 개역개정판 요한복음 20장 17절만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イエスは彼女 に言われた。「わたしにすがりついていてはいけません。わたしはまだ父のもとに上っていないのです。わたしの兄弟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わたしは、わたしの父であり、あなたがたの父である方、わたしの神であり、あなたがたの神である方のもとに上る』と伝えなさ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의 반가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는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만류하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는 예수님을 끌어 안을 수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자, 단순히 생각해서 우리가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물론 뭐, 사전에 동의가 있어야 하겠지요. 특히 이성간에는 사전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 만이 아니라 제3자의 동의까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끌어안았다가는 큰 일 나지요. 더구나 코로나가 난리를 치고 있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 가지로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그런 복잡한 것이 아니라……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끌어 안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하냐 하면 뭐, 육체가 있어야 하잖아요. 육체가 뭐예요. 예, 살과 뼈입니다.

자,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있었다면, 뜨겁게 끌어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요, 부활하신 예수님께 살과 뼈가 없었다면 끌어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택지를 바꾸어보겠습니다. 1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있었다. 2번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살과 뼈가 없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의심하시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38절~39절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なぜ取り乱しているのですか。どうして心に疑いを抱くのですか。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 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셨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제 장차 오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과거에 육신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은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이요, 또 한 사람은 엘리야였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エノクは神とともに歩んだ。神が彼を取られたので、彼はいなくなった。


열왕기하 2장 11절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こうして、彼らがなお進みながら話していると、なんと、火の戦車と火の馬が現れ、この二人の間を分け隔て、エリヤは竜巻に乗って天へ上って行った。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위대한 선지자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데려가셨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리 우리가 에녹과 엘리야를 믿는다고 해봤자 우리의 죄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용서 받고 해결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누가 증언해주고 계십니까.


요한일서5장 5절~6절
“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世に勝つ者とはだれでしょう。イエスを神の御子と信じる者ではありませんか。
この方は、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た方、イエス・キリストです。水によるだけではなく、水と血によって来られました。御霊はこのことを証しする方です。御霊 は真理だ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을 해주셨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39절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私はこう確信しています。死も、いのちも、御使いたちも、支配者たちも、今あるものも、後に来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
高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深いところにあるものも、そのほかのどんな被造物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神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예수님을 언제 직접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그것이 아니라면 장차 훗날에 천국에 가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언제라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이 사랑을 알게 되셨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바로 그 날,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를 가지신 예수님을, 우리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항상 함께 해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사랑의 예수님을, 뜨겁게 끌어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고통과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아무리 그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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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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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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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회 참된 복음
20209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신약 239페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 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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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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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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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참된 복음” 真の福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를 그 순서에 따라 살펴보는 강해설교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서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어떤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에 오래 다니면 내가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왠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 말씀을 듣기는 하거든요.

한국의 경우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회라면 주일예배 외에도 매일 새벽예배가 있고, 수요예배, 금요철야가 있습니다. 구역예배에서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많이 듣게 되고 많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무슨 함정이냐 하면, 성경을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은 착각,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을 들었어요. 그 말씀은 주일예배 때도 듣고 수예예배, 금요철야, 새벽예배 때도 들었어요. 이제 자동차가 가기 위해서는 휘발유를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어요. 그런데 뭐냐 하면 휘발유를 안 넣어요.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귀로 듣는다 하더라도 듣기만 하면 소용이 없어요. 믿음이 성장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또 그분 들이 좋아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ですから、信仰は聞くことから始まります。聞くことは、キリストについてのことばを通して実現するのです。

여러분, 이 말씀이 이상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듣기만 하다 보니 믿음이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내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하면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어요. 그러면 그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합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자기 생각.

이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가 다 아는 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기에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보면 어떻겠습니까.

자,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띄엄띄엄 알고 있었어요.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있습니다. 이 구멍을 무엇으로 메워야 하겠습니까. 1번 성경 말씀, 2번 목사님 말씀, 3번 자기 생각.

물론 대다수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적힌 대로 말씀을 전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만, 그러나 100%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복음을 전하셨을 때에는, 이는 99%가 아니죠. 100%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어떻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항상 매순간 매순간 100%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가 있나요? 아니요. 제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아니면 제가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와 같이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주일 예배를 포함해서 말씀을 전해드렸는데, 좀 이상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예, 당연히 물어봐야죠. 그렇다고 설교 중에 갑자기 손을 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좀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예배가 끝나고 나서 각 교회 목사님께 물어보신다거나, 아니면 교회에 다른 교역자 분들이 계실 경우에는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전에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게 물으면 그건 목사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라며 꾸짖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일인가요? 목사나 교역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에 대한 불순종?

여러분, 목사가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목사님한테 순종해야지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예수님이에요? 아니면 선지자예요?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순종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사나 교역자가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을 때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왜 모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성경을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오늘부터 성경강해를 시작하도록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첫 강해로서 창세기도 아니요 마태복음도 아닌 로마서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 믿음의 축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성경말씀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에 대한 내용이 확실하게 잡혀 있으면 성경 어디를 읽어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 이와 같이 강해라고 한다면 이를 몇 주에 나누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로마서를 살펴봄으로 인해서 성경 전체를 함께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본문 말씀은 로마서입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사도행전 내용도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라고 해서 로마서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1년, 아니면 평생 동안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전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성경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이기 때문에 서론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만, 너무 길어지면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이는 신약성경에 있는 서신들 중에서 저자가 분명히 밝혀진 책 중 하나입니다. 이는 과거에는 사울이라고도 불렸던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청년 엘리트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유대인 베냐민 지파, 그 중에서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면서도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는 탄탄한 배경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훌륭한 교육도 받았다고 하니, 옛날 우리 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양반 집에 태어나서, 성균관에서 배우고, 젊은 나이에 과거 급제를 하고는 장래가 보장된 관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이른바 엄친아. 일등 신랑감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자동적으로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닿는 대까지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대요. 그 사람에 대한 소문을 그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고는 부활을 했대요.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비웃었겠지요. 사이비 집단이 있는 것은 비단 요즘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스승인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 5장 36절~37절
“36.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先ごろテウダが立ち上がって、自分を何か偉い者のように言い、彼に従った男の数が四百人ほどになりました。しかし彼は殺され、従った者たちはみな散らされて、 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
彼の後、住民登録の時に、ガリラヤ人のユダが立ち上がり、民をそそのかして反乱を起こしましたが、彼も滅び、彼に従った者たちもみな散らされてしまいました。

그러니까 옛날에도 이상한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은 흔히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교주가 죽거나 망하면 그를 따랐던 사람들이 다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던 바울은, 역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남긴 성경에 그런 내용이 어디 있냐? 사기꾼 같으니라고. 하지만 뭐, 이미 죽었다고 하니까 어차피 저러다가 금방 또 없어지고 말겠지.

어쩌면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뭔지를 믿는 무리들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어쩌면 그는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는데, 오직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데, 무슨 이상한 사람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잖아.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청년 관리의 가슴은 뜨거워졌습니다.

안 되겠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이 무리들을 다 잡아서 일망탕진을 시켜버려야겠다. 이것이야말로 위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요, 아래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9절~20절
“19.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そこで私は答えました。『主よ。この私が会堂ごとに、あなたを信じる者たちを牢に入れたり、むちで打ったりしていたのを、彼らは知っています。
また、あなたの証人ステパノの血が流されたとき、私自身もその場にいて、それに賛成し、彼を殺した者たちの上着の番をしていたのです。』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지 예수인지 하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가두고 때리고 온갖 학대를 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는 그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예수라는 자를 믿는 무리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지역에까지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사도행전 9장 1절~2절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さて、サウロはなおも主の弟子たちを脅かして殺害しようと息巻き、大祭司のところに行って、
ダマスコの諸会堂宛ての手紙を求めた。それは、この道の者であれば男でも女でも見つけ出し、縛り上げてエルサレムに引いて来るためであった。

누구는 이른바 공무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냥 일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기만 해도 월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 물론 이는 옛날에, 그것도 일부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요. 요즘 공무원들을 보면 웬만한 일반 회사원들보다도 열심히 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그저 자리만 지키는 관료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솔선수범해서 일을 하는, 그야말로 공무원의 모범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흠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그는 열심히 무슨 일을 했었느냐. 교회를 탄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는 물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어디 그 뿐입니까.

훗날 바울의 열정적인 전도사역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사도행전 9장 6절~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6절~9절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立ち上がって、町に入り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告げられる。」
同行していた人たちは、声は聞こえてもだれも見えないので、ものも言えずに立っていた。
サウロは地面から立ち上がった。しかし、目を開けていたものの、何も見えなかった。それで人々は彼の手を引いて、ダマスコに連れて行った。
彼は三日間、目が見えず、食べることも飲むこともしなかった。

참으로 사람 팔자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그는 당당한 고위관료로서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다메섹에 입성한 후로는 곧바로 회당으로 찾아가서 제사장으로부터 교부 받은 공문을 보이고는 닥치는 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말을 타고 위풍당당은 무슨, 지금 눈도 안 보이게 되어서 사람 손에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래 같았으면 예루살렘에서 높은 분이 오셨다고 하니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그랬을지도 몰랐습니다만, 그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예, 앞도 못 보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문제들 내겠습니다. 자, 저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를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사흘 동안 다메섹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유다라는 사람의 집은 다메섹에 있는 어느 한 거리에 인접한 곳에 있었는데, 그 거리 이름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사도행전 9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1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すると、主はこう言われた。「立って、『まっすぐ』と呼ばれる通りに行き、ユダの家にいるサウロという名のタルソ人を訪ねなさい。彼はそこで祈っています。

(新共同訳)直線通り

예, 그 유다의 집이 있었던 곳은 직가라는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곧게 뻗은 거리라는 뜻이지요.

직가, 직선거리라고 하는 거리, 말하자면 종로 1가 2가 하는 식의 길 이름이지요. 아직도 그 직가라고 하는 거리가 남아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계속되는 내전 때문에 어쩌면 많이 파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역시 주님의 명을 받고는 직가라고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가서 당시는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바울에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바꾸어 볼까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신약성경 총 27권 중에서 대체적으로 13권 정도를 바울이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를 읽을 때마다 적지 않게 궁금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라고는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한참 뒤의 인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타이밍만 맞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었지요. 또한 아직 복음서가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도들로부터 직접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듣고 배웠는가 하면, 만약에 그랬다고 한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바울은 어쩌면 상하 관계에 있어야 했었겠습니다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서로 대등하게 교제를 한적은 있었지만 상하관계나 사제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읽어보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그야말로 다른 사도들 못지않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유대교적인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던 인물 아니었습니까.

그랬던 그가 어쩌면 이렇게 주님의 복음을 정확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자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18절 처음부터 중반부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するとただちに、サウロの目から鱗のような物が落ちて、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

이를 두고 일본에는 흥미로운 관용 표현이 있지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입니다. 일본어를 공부하시거나 일본어 시험을 준비중이신 분들은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지금도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일본에서 자주 쓰이는 이 표현은 바로 이 성경에서 온 관용어입니다.

이 말은 어떨 때 사용하냐 하면,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알게 된다거나, 어떤 한 가지를 알게 됨으로 인해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깨닫게 된다고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바울은 당시 성경 그러니까 지금으로 본다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의문이 있는 부분은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한테 아들이 있다는 말이 성경에 어디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해결해준다는 내용이 어디 있느냐고 분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앞이 보이지 않은 채 그는 꼼짝없이 다메섹 직가에 있는 유다 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마도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었겠지요. 분명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랜 동안 어두움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눈이 안보였으니 얼마나 어두웠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왔던 지식과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그런 기록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배워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그러면서 그는 사흘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이 떠오르고 율법이 떠오릅니다. 이사야서와 같은 선지서가 떠오릅니다.

자신이 그 동안 배워왔던 성경이라고 하는 이름의 자물쇠 안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를 넣고 돌리니까,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새로운 말씀, 아니, 그야말로 완전한 복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순식간에 성경의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게 된 그가 오늘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늘 말씀 로마서 1장 1절~2절까지를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아아, 그랬구나.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때로는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예언되어 오신 그대로 오셨던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비밀을 알게 되니까, 그 동안 꽉 막혔던 성경의 비밀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열쇠로 풀리게 되니까, 이제 진정한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십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보통 올림픽 같은 장거리 마라톤을 보면, 출발점과 결승점이 똑 같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전해드리는 말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시작한 장거리 로마서 강해도,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 결승점에는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장 1절~2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1장 1절~2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章1節~3節中
キリスト・イエスのしもべ、神の福音のために選び出され、使徒として召されたパウロから。
──この福音は、神がご自分の預言者たちを通して、聖書にあらかじめ約束されたもので、
御子に関するものです。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 오르시고
우리를 위해서 장차 다시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 로마서 강해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된 복음, 진정한 복음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 참된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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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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