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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2회 첫 번째 성탄
2022년 1225 설교 - 로마서 강해 11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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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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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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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성탄절 예배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4번째 “첫 번째 성탄” 初めての聖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2장 2절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도 지난 주처럼 마지막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무엇이 선한 일인지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완전하다고 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앞에서는 두 가지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는 길이요, 또 하나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입니다.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る。

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く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어떻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지를 금방금방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잖아요. 사실 그것이 정답인데, 그대로만 하면 축복을 받는데, 그런데 그 정답이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에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정답을 쉽게 찾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해주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1번.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끝까지 지킨다.
2번.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고 뭐고 우선 살기 위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사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 땅을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이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는 대단히 곤혹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못 믿어서 결국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시켜서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멜이지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미처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생각으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에게 줄 축복을 가로채서 자신이 받아내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야곱이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까.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형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간발의 차이로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을 세우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못 미더웠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축복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집에서 나와 도망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그야말로 험난한 인생을 보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의 삶도 좀 살기 편할 텐데 이를 잘못 짚는 바람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냐 하면, 오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 척박한 복음의 땅 일본에도 가는 여기저기서 캐롤이 흘러 나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도, 목욕탕에 가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도 크리스마스를 노래하고, 시내 곳곳에는 이 시골 군마현에도 크고 작은 불빛 장식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에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흔히들 말하는 것이 일본 전체 인구의 1프로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기독교인 1프로라고 하는 숫자에는 가톨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닌 완전히 다른 종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다 똑 같은 그리스도교로 보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 숫자에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같은 곳도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숫자만을 본다고 한다면 훨씬 더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클로스다 크리스마스 케익이다 하면서 장사를 하고 그러는 것을 보면 참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교회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시간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안 계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널리 알리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본받아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왜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세상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교회에 갇혀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 보더라도 인권이 유린되고 억압받고 있을 때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에서, 인권운동에 앞장 섰던 분이 킹 목사님 아니셨습니까.

당시의 그와 같은 활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하고도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킹 목사님은 1968년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활동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마침내 오바마 대통령도 탄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과거에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시기에도 기독교인들이 그 아픔들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도 많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너도나도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다가, 이제 세상 좋아지니까 너도나도 말을 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옛날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인권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면, 요즘 보면 동영상 광고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아니면 자기가 좀 잘하면 감투라도 쓰기 위해서 그런 과격한 말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성경 좀 읽었다고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人はみな、上に立つ権威に従うべきです。神によらない権威はなく、存在している権威はすべて、神によって立てられ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을 인용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면서 복종해야 한다고 하다가, 이제 자기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마귀다 사탄이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요즘 특히 한국 교회에 보면, 안타깝게도 귀가 얇은 분들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우리 목사님이 저렇게 말했으니까……그러면서 그 말에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귀가 얇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은 안 읽었지만, 교회 다닌 게 몇 년인데……라고 한다면, 정말 교회만 다니면 성경을 올바로 알게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닙니까. 초등학교 6년에 중고등학교 3년씩 6년, 다 합치면 12년이나 학교를 다녀요. 그렇다면 12년이나 학교만 다녔다면 모두가 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자기가 원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나요?

아니에요.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어떤 분은 이를 지도 몰라요. 아, 내가 교회에 이런 프로그램도 수료했고 무슨 성경학교도 수료했다……이건 마치 나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개근상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그런 종이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내 머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13장을 공부할 때 다시 배우겠습니다만, 바울이 이 세상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도 이제 믿는 사람들이 곧 말세가 온다, 종말이 온다 그러니까 이 세상 제도를 따르려 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이는 믿음이 올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혼란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이제 곧 오신다고 해서, 학교를 안 가도 되겠어요? 일을 안 해도 되요?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아도 돼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이와 같이 세상 규범들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무조건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복종하기만 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저도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만, 당시 대선 기간이었나 그랬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초청이 되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뭐, 이름을 말씀 드리면 아실 만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때 말씀이 보니까 이건 교회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특정 후보 지지 유세를 나왔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다 이 세대를 본받는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 때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조용기 목사님이 예전에 그런 간증을 하신 적이 있으셨대요. 그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자기가 설교를 하는데 맨날 예수님 얘기나 성경 얘기만 하니까 자기가 좀 부족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는 책방에 가서 철학책을 몇 권 사가지고는 그것을 읽고서, 설교 시간 때에도 그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떤 남자분이 찾아오더래요.. 그러면서 그 분이 목사님한테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무슨 무슨 대학교 철학과 교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 말씀하시는 철학에 대한 부분은 대학교 1학년생 정도도 아는 내용이에요. 저는 목사님한테 철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대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오로지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떠나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구는 그럴 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이 21세기인데 성경은 신약성경이라고 해봤자 2000년 전에 적힌 책 아니야.

그렇다면 믿음도 요즘 식으로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주장도 있을 수가 있겠지요.


사무엘하 6장에 보시면 다윗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 왕 때 블레셋 사람들한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였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웃사라고 하는 실무 담당자가 이 과정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すると、主の怒りがウザ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神はその過ちのために、彼をその場で打たれた。彼はそこで、神の箱の傍らで死んだ。

그러면 이 웃사라는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사무엘하 6장 좀 앞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彼らは、神の箱を新しい荷車に載せて、それを丘の上にあるアビナダブの家から移した。アビナダブの子、ウザとアフヨがその新しい荷車を御した。
이들은 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게 별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부분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원인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宿営が移動する際には、アロンとその子らが聖所と聖所のすべての用具をおおい終わってから、その後でケハテ族が入って行って、これらを運ばなければならない。彼らが聖なるものに触れて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これらは、会見の天幕でケハテ族が運ぶ物である。

당시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성인 남성은 전쟁이 시작하면 모두 싸워야 했습니다만, 여기서 예외였던 사람들이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과 거기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똑 같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그 자손에 따라서 맡은 역할이 달렸는데, 특별히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반하는 방법은 수레에 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깨에 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여기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을 봅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
“6.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8.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9.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そこでモーセは台車と雄牛を受け取り、それをレビ人に与えた。
ゲルション族には、その奉仕に応じて台車二台と雄牛四頭を与え、
メラリ族には、祭司アロンの子イタマルの監督のもとにある彼らの奉仕に応じて、台車四台と雄牛八頭を与えた。
しかしケハテ族には何も与えなかった。彼らの聖なるものに関わる奉仕は、肩に担いで運ぶことだったから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모세가 레위 지파에게 소를 나누어 주었대요 그런데 다른 자손들한테는 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유독 고핫 자손에게는 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가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그들이 맡은 일들이 법궤를 운반하는 일인데, 이는 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매는 것이었기에 소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굳이 소를 주지 않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웃사는 법궤를 어깨에 매지 않고 수레로 끌었을까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고핫 자손이 운반하라고 하신 기록이 있는 민수기는 대략 기원전 1450년에 적힌 것이고, 그리고 웃사가 법궤를 수레로 끌었던 시기는 기원전 1000년 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기원전 1450년이나 기원전 1000년이나 다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벌써 450년이라는 기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450년이라고 한다면 지금이 2022년이니까 45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572년입니다. 이 때는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450년 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옛날입니까.

그러니 21세기에 와서 법궤를 운반해야 하는데,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규정을 따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휴, 지금이 어느 시댄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웃사가 자기 멋대로 그 시대에 맞게 해석을 해서 일을 저질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그를 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天地は消え去ります。しかし、わたしのことばは決して消え去ることがありません。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여러분, 성경 말씀은 오래 되었다고 고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아무리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닫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이 아닌,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어제 밤에 갑자기 프린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오늘은 주보를 뽑지 못했습니다.

뭐, 이 프린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이런 저런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프로그램을 깔거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살리기도 하고, 그리고 한 번은 분해를 해서 그 안을 청소도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가끔 에러가 나면 껐다가 다시 켜고 그러면서 그럭저럭 사용해왔었습니다만, 어제 밤에 성경 필사 원고지를 뽑고 있는데 갑자기 전원이 퍽 하고 나가더라고요.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전원을 켜봤지만 불이 깜빡깜빡 거리다가 다시 꺼지고 맙니다.

뭐, 비싼 프린터도 아니고, 그리고 워낙 오래 되기도 한 프린터이기 때문에 수명이 다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프린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이 프린터와 같은 삶을 보낼 수 있다면 괜찮은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 프린터처럼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랑할 만한 건 없지만, 끝까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조용히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값진 인생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세상에 물들어 세상을 찍어낼 수도 있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담아서 하나님을 찍어낼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이 있습니까. 주님이 계십니까.

예전에 2013년 5월 26일자 아사히신문 천성인어 칼럼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고령인 사람에는 세가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사람, 옛날에는 젊었던 사람, 그리고 단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는 사람.

高齢の人には三つのタイプがあるとも言われる。まだ若い人、昔は若かった人、そして一度も若かったことのない人。


이 말씀이 성탄절인 오늘은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이유는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분명 우리에게 오시고,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여전히 주님이 계신 사람, 옛날에는 마음 속에 주님이 계셨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마음 속에 주님이 계신 적이 없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오시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십니까.


만에 하나, 지금까지 우리 마음 안에 진정한 주님이 안 계셨다면, 이제부터라도 바로 오늘을 우리 삶에 있어서 첫 성탄절로 삼으셔서 주님을 모셔드리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오직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오로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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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1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2022년 12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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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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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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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3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神が喜ばれる礼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12장을 함께 살펴봅니다. 로마서가 16장까지니까 이제 많이 왔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공부하신 분이시라면 어느 정도 로마서의 흐름도 이해가 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만약에 복습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이시라면 언제든지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이든 음성이든, 아니면 텍스트로든 복습이 가능하니까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우선 오늘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이 문장을 좀 끝에서부터 해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에서 보면 일단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예배’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영적 예배’의 반대말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영적’의 반대말은 ‘육적’이 되겠지요. ‘육적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형식적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쁜데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심해서요? 사람들 만나러요? 바람 쐬려고요? 아니면 사업 때문에 나오시나요?

큰 교회에 보면 그런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업을 하는데 고객이 교회에 많이 있어요. 그래서 고객관리 차원에서 교회에 나간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것은 다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합니다. 제가 예전에 어디 보니까 그런 사람도 있더라고요. 평소에는 차 운전을 잘 안 하는데, 교회에 갈 때 타기 위해서 고급차를 샀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주차장에서 긁혀가지고 너무나도 속이 상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 사람 말대로 단지 교회에 가기 위해서 차를 샀다면 왜 고급차를 사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영광은 무슨,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람들한테 자랑하려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예배가 하나님 앞에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육적인 예배, 형식적인 예배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영적인 예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예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1절 말씀 조금 앞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 중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생각해보겠습니다.

몸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 혹시 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분 계십니까.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영혼만 가지고 있어요……라고 하는 분이 계시면……어떻게 해야 되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정말 작년 이맘때는 이제 1년 정도면 코로나도 끝나겠지 했는데, 이제 일본은 8차 유행에 돌입했다고 하잖아요. 지난 13일 발표에 의하면 군마현이 역대 최고기록인 확진자 3576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좀 위로도 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드리는 예배라는 의미는, 첫째로 남자든 여자든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누구든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은 몇 개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입니다. 내가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것이요, 내가 교회에 있으면 교회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시면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시잖아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내 몸은 산 채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주변에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귀찮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화장실에 가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봐, 나를 대신해서 예배 좀 드려달라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에스겔 18장 19절~20절
“19.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あなたがたは『なぜ、その子は父の咎を負わなくてよいのか』と言う。その子は、公正と義を行い、わたしのすべての掟を守り行ったのだから、必ず生きる。
罪を犯したたましいが死ぬのであり、子は父の咎について負い目がなく、父も子の咎について負い目がない。正しい人の義はその人の上にあり、悪しき者の悪はその者の上にある。

부모와 자식간이라 하더라도 공의나 악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대신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드리는 예배의 두 번째 의미는, 예배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예배라고 하는 것은 바로 행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행함 만으로는 온전히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배라고 해서 꼭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한 두 시간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그 순간순간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행함으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믿음과 말씀이 무엇보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기 쉽게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자동차로 비유를 해본다면, 믿음은 우선 자동차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말씀은 휘발유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기름을 넣지 않으면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넣었다고 한다면, 이제 시동을 걸고 출발해야지요.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차만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차가 없는 상태에서는 기름을 넣을 수도 없고, 시동도 걸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다고 한다면, 믿음만 있다고 주님 앞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그런 사람 있어요. 성경도 안 읽고,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그러면서 응답 받았다는 사람 있습니다. 물론 초신자 때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도 여전히 성경도 모르면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고는 무슨 환상을 봤다느니, 방언을 한다느니, 응답을 받았다느니 하면서, 자기가 무슨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엉터리 무당이지,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그리고 성령님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령님을 압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하지, 성경도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다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깨달았다면, 이제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러면서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죠? 내 이웃도 사랑하는 것 아시죠? 제가 뭘 꼭 해야 되요? 그냥 주님을 믿고 성경만 읽을게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이러고 있으면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 말을 하는 것도 그래요. 말을 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엄연한 행함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그냥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놀라운 행함인 것입니다.

지난 12월 14일자 일본 신문에 보니까, 부부나 커플에 있어서 서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어느 지방이 많이 하느냐 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와 있었습니다.

서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일본 지차제가 어디일 것 같으십니까.

이게 북해도라고 해요. 올 한 해에 평균 71.1회, 그러니까 일흔 번이 넘게 상대방한테 사랑한다, 좋아한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2위는 66.7회인 쿠마모토현이고 3위는 카나가와현 60.0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국평균은 34.3회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군마현은 47개 일본 지자체 중에서 몇 번째로 상대방에게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까요.

예, 47개 지자체 중에서 47위. 영광스럽게도 최하위였다고 합니다. 올 한해 동안 부부나 커플 사이에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게 13.4회였다는 거예요. 1위인 홋카이도에 비하면 5분의 1도 안 되고, 전국평균 34.3회에 비해도 절반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물론 마음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입으로 고백하는 행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구는 그러실지도 모르겠지요. 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성경에서도 우리더러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잖아요.

사랑하는 우리 군마현민 여러분께서도 조금 더 분발해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는 놀라운 행함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どの戒めが一番重要です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용할 때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는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아직 좀 이해가 안 된다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그렇게 의심을 하는 이유를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이웃은 그냥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왠지 하나님을 정말 첫째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만약에 “하나님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다면 어떻습니까. 여기는 논리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あなたの神、主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우리와 우리 이웃은 같아요? 달라요. 예,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 같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 이웃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우리 이웃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한테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면 불쾌하듯이, 내 이웃이 가진 것을 내가 빼앗는다면 역시 불쾌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이웃과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셔도 우리가 하나님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あなたの神、主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득이하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하지만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바꾸어 볼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隣人を愛しなさい。』


주님은 우리와 우리 이웃이 동일하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ですから、人からしてもらいたいことは何でも、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人にしなさい。これが律法と預言者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한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면서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세요.

이와 비슷한 말씀이 아까 마태복음 22장에서도 나왔었잖아요?

마태복음 22장 40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핵심, 성경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성경 모든 것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우리는 주님 앞에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남녀노소, 그리고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든지 그 삶을 주님께 제물로서 드릴 수 있다는 것.

둘째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자기 자신이 드릴 수 있다는 것,

셋째로,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요,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배웠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隣人を愛しなさい。』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이루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남녀노소,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가만히 혼자서 생각만 하는 마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함입니다. 실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과 말씀을 통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진정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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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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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회 졸음을 물리치는 방법
2022년 1211 설교 - 로마서 강해 112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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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5절~36절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5節~36節
“35.だれがまず主に与え、主から報いを受けるのですか。」
36.すべてのものが神から発し、神によって成り、神に至るのです。この神に、栄光がとこしえ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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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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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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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2번째 시간으로서 “졸음을 물리치는 방법” 眠気の退け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우선 35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5.だれがまず主に与え、主から報いを受けるのですか。」

이 말씀의 뜻이 좀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이 내용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기 4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나에게 갚으라고 할 때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냥 달라는 것과 갚으라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지요.

상대방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1만원을 달라” 라는 말과 “나에게 1만원을 갚으라”라는 말은 다릅니다. 그럼 “갚으라”라고 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1만원을 빌려주었을 때 할 수 있는 말 아니겠어요?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빌려주었거나, 아니면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었을 경우,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때 갚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갚는다”라고 한다면 “내가 주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상대방이 나에게 갚는 것”이 먼저입니까.

이는 당연히 “내가 주는 것”이 먼저인 것이지요. 일단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꾸어 주든, 아니면 무슨 일을 해주든 간에, 우선 내가 상대방에게 먼저 해 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나한테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한테 먼저 주고 그 대가를 나한테 갚으라고 하겠느냐 하는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나한테 돈이든 뭐든 꾸어 달라고 해요. 그럼 아쉬운 쪽이 누구겠어요.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꾸어주는 사람이에요. 당연히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쉬운 쪽이지요.

그러니까 세상에 보더라도 돈을 꾸어 주면 거기에 이자까지 받아서 갚으라고 하잖아요. 이게 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대표적으로 본다면 사실 은행이 그 장사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동차 살 때 돈 빌려 줄게. 집 살 때 돈 빌려 줄게. 그러면서 그 빌려준 돈의 이자로 수익을 얻고 있는 게 은행이잖아요. 이건 어디까지는 빌리는 사람이 아쉬우니까 이자를 감당하면서까지 은행을 이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쉬운 게 있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꾸고는 그것을 갚으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세요. 그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앞서 욥기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욥기 41장 11절 후반부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리고 모든 것이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욥기 38장 4절~6절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わたしが地の基(もとい)を定めたとき、あなたはどこにいたのか。分かっているなら、告げてみよ。
あなたは知っているはずだ。だれがその大きさを定め、だれがその上に測り縄を張ったかを。
その台座は何の上にはめ込まれたのか。あるいは、その要の石はだれが据えたのか。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람은 어디에 있었느냐 하고 하나님께서는 묻습니다. 어디에 있긴 어디 있어요. 아직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지요. 그 뿐만 아니라 이 36장을 읽어보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욥기 38장 32절~35절
“32.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34.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5.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あなたは十二宮をその時にかなって、引き出すことができるか。牡牛座をその子の星とともに導くことができるか。
あなたは天の掟を知っているか。地にその法則を立てることができるか。
あなたの声を密雲にまであげ、みなぎる水にあなたをおおわせることができるか。
あなたは稲妻を向こうに行かせ、あなたに向かって「私たちはここです」と言わせることができるか。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법칙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이 무슨 아쉬운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꾸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말씀을 간결하게 정리한 내용이 오늘 본문 중에서 36절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36.すべてのものが神から発し、神によって成り、神に至るのです。この神に、栄光がとこしえ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로 돌아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わたしはアルファであり、オメガである。最初であり、最後である。初めであり、終わりである。」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는 분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시지 않나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고 싶어 하세요.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러십니까. 지난 번에 어떻게 배웠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우리를 사랑해서에요? 아니면 우리를 미워해서에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쓰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음으로 인해서 놀랍고 넘치는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이루어 놓은 것처럼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했다 저것을 했다 하면서 하나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세우는 모습도 많아 봐왔습니다.

다음에 공부하게 될 12장에서도 배우겠습니다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꾸어 드리는 것이 되나요?

간단한 문제를 한 번 내보겠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예배 때 헌금 1만원을 했어요.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무언가를 해주셔야 할 의무가 생긴다. 맞아요? 틀려요?

오늘은 내가 좀 큰 기도제목이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헌금 10만원을 내야겠다. 돈을 많이 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실 의무가 생긴다. 맞아요? 틀려요?

얼마 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한국에서 제일 돈이 많은 대기업 회장의 재산이 한국 돈 13조원이라고 해요. 잘 감이 안 잡히죠? 아무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또 같은 것으로 본다면 아무리 부지런히 로또를 산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에 한 번도 1등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략 계산을 해보았더니만 로또 1등 당첨을 1400번 정도는 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진 사람한테, 자기가 가진 전재산이라면서 1000만원을 주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이렇게 돈을 많이 냈으니까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게 자기한테는 큰 돈일지는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게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8조원에 비하면 1000만원은 130만분의 1이에요. 요즘 뭐 1억이라고 해봤자 부자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8조원에 1000만원이라고 한다면, 1억에 77원입니다.

1억 가진 사람한테 77원 줄 테니까 자기 소원 들어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장난 하냐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8조원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를 다 가지신 분이시라면서요. 그런 하나님한테 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바쳤으니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해봐야, 그 돈 액수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드렸을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そこ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です。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주님 앞에 드렸다고 해도 그것이 오직 내 힘으로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두 역사해주셨기 때문에 벌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라는 것은, 아무리 많은 액수라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느냐 하면 바로 그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이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단순히 소원 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라고 하는 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途中、サマリアとガリラヤの境を通られた。
ある村に入ると、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十人の人がイエスを出迎えた。彼らは遠く離れたところに立ち、
声を張り上げて、「イエス様、先生、私たち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言った。
イエスはこれを見て彼らに言われた。「行って、自分のからだを祭司に見せなさい。」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そのうちの一人は、自分が癒やされたことが分かると、大声で神をほめたたえながら引き返して来て、
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彼はサマリア人であった。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十人きよめら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저 멀리서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들은 바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이 나병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한센병이라고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센병도 있었겠습니다만,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성 피부병도 포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당시 이 나병에 걸리게 되면, 이는 전염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에서는 함께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시 외곽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청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목소리를 들으시고는 제사장한테 그 몸을 보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 이유는, 당시에도 그 나병이 낫는 경우가 있었는데, 완치되었는지 여부는 제사장이 판단하게 되어 있었거든요. 이는 단순한 관행이 아니라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율법에 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이 나병을 앓고 있던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사장한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여서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 받으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제사장에게로 가는 시점과 병이 나은 시점을 비교해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점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자신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직 낫지 않았어요. 그러면 언제 낫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보이러 가다가 보니 치료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아니, 내 병이 나아야 제사장한테 보이든지 말든지 하지,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한테 가봤자 뭘하냐 하고 따질 만도 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사장한테 가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믿음이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지요. 그랬더니 가다가 보니까 나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감기나 배탈이 아니에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음을 받은 열 명 중 아홉 명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당시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도 안 했을 정도로 차별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면서 그토록 잘난 척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와 같은 넘치는 축복을 받고서도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반면에 자신이 질병에서 해방되었던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렸는데, 이를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중요하지요.


마태복음 7장 7절~11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주님은 분명히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시겠다고 하시잖아요.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두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주실까요. 1번 즉시, 2번 기타.

네, 제가 문제를 드릴 때 <기타>가 있으면 대부분 그게 답입니다. 하지만 <기타>라고 대답하셨다면 주관식으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요.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언제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실 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기도 응답을 늦추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아무리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3~4살 밖에 안된 아이한테 자동차를 사주겠습니까. 그리고 나이만 먹었다고 차를 사달란다고 사주겠습니까.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해요. 그렇죠. 면허가 필요하죠.


아무리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면허도 따지 않았는데 운전을 하라고 차를 사준다면 이것이 축복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끔찍한 저주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식이 달라는 대로 돈을 펑펑 준다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24절~25절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우리가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없는 것, 그러나 꼭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바랍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오래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에이, 그게 말이 돼? 안 들어주실거야……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주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에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感謝をもって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가끔 보면 기도를 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그런데 왜 기도를 안 들어주냐는 거예요.


아니, 오늘 말씀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빚진 것이 있어요? 그런 기도는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드리지요? 기도라고 하는 것이 꼭 교회에 나와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에요. 우리가 평소에 길을 가다가도 할 수가 있고, 누워서 자기 전에 할 수가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대화를 하는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의 졸음은 바로 포기입니다. 안 될 거야. 소용없어…라고 하는 포기는 그야말로 우리의 축복을 막는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졸음이 오면 사탕이나 껌을 씹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잖아요? 기도에 있어서 졸음을 물리치는 것은 감사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고, 그리고 가장 좋을 때에 응답해주시기 위해서야……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 보면 옛날에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어떻게 해야 맛있는 밥이 되는지에 대한 요령을 짧게 정리해놓은 말이 있어요.

はじめちょろちょろ なかぱっぱ……

이렇게 시작되는 말인데, 그러니까 처음에는 불을 작게 하고 중간 쯤에 가서 강한 불로 끓이라는 말인데, 이 마지막이 흥미롭습니다.

赤子泣いてもふたとるな

이 말은 뭐에요. 아기가 울더라도 뚜껑을 열지 말래요. 그러니까 밥을 다 짓고 난 다음에 뜸을 들여야 하는데, 아기가 배고프다고 운다고 해도 서둘러서 뚜껑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밥을 다 망쳐 버리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직 기도 응답이 안 오십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기가 막힌 밥을 짓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울어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 이유는 우리를 미워 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를 높이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참음으로 기다리며, 지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깨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예비하신 때가 되었을 때,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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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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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회 나를 아시는 주님
2022년 124 설교 - 로마서 강해 111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34절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3節~34節
"33.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神のさばきはなんと知り尽くしがたく、神の道はなんと極めがたいことでしょう。
34.「だれが主の心を知っ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主の助言者になったの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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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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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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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1번째 시간으로서 “나를 아시는 주님” 私を知ってお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감탄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34절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3節~34節
33.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神のさばきはなんと知り尽くしがたく、神の道はなんと極めがたいことでしょう。
34.「だれが主の心を知っ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主の助言者になったのですか。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감탄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스라엘 자손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이 점을 들어서 유대인들이 어리석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ち)の雨のように。


여호와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자 명철이기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분명 상하관계이긴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하나이십니다. 생각에 있어서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요한복음 7장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教えは、わたしのもの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ものです。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말씀을 하시고 모든 일을 행하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서 구약성경을 달달달달 외울 정도로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을 때, 우리가 오, 주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영접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사람의 생각으로 배우기만 했다면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성경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배운 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성경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 마지막인 말라기까지 성경은 온통 예수님에 대한 말씀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의 머리로만 풀려고 하다 보니 엉뚱한 지식만 쌓이게 되어서, 결국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ので、思い違いをしています。


이런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해요. 아니, 자기들은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박사학위도 받고 유명 신학교 교수이자 전문가 중 전문가인데,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밖에 안 되고 무슨 대단한 학교도 나오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그리고 성경 전문가인 자신들한테 당신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나름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달려듭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때 배운 사람들이라고 아픈 데가 없었겠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어요? 아니요. 그런 문제들이 있었겠지요. 영육간에 문제들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앞에 누가 계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얼마나 큰 기회입니까. 그러면 정말 체면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저를 고쳐주세요. 제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하면 주님이 그것을 해결 안 해 주셨겠어요?

하지만 얄팍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간에 말로 예수님을 이겨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만 합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세요. 눈이 안 보여요. 보길 원합니다. 하면 고쳐 주시고,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해요, 걷게 해주세요. 하면 그 소원을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에요? 무슨 지식이 없고 순진한 사람만 예수님을 믿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뛰어난 과학자라고 하면 믿음이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뭔가 사람의 머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힘을 느낀다는 것이에요.

괜히 좀 어려운 책 몇 권 읽고 나서 지식인인 척 하는 수준의 사람들은 성경을 안 받아 들이려고 하지만, 과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연구하다 보면, 이건 단순한 우연이나 확률이 아닌 무슨 강한 힘이나 의지가 있어야지만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을 많이 본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보면 율법학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남들의 눈을 피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진정한 천국 복음을 듣고는 구원을 받기도 하고 병고침을 받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서 이방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고, 오히려 이방인들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도 구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넘쳐납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세상을 심판하시고는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서 그를 통해서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신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노년에까지 아이가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이 하나 둘 정도가 아니라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을 때는 훨씬 더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니, 기왕 주실 거면 좀 일찍 주시든지 하시지, 좋은 세월 다 보내고 이제 늙어서 주신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등등 아브라함이라고 할 말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지난 번에 공부한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군천사들을 이끌고 애굽에 쳐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든 살과 여든 세 살 먹은 할아버지 두 사람을 통해서 최대 강국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200만명을 구출해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의 머리로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군대를 모아서 애굽에 쳐들어가서 강제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냈다면 분명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의지했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시면 사무엘이 이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을 대신할 왕을 찾아 나섭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아들 중에서 택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이새한테 가서 당신 아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더니만 일곱 명이 왔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새한테 물어요. 당신 아들이 이 뿐이냐. 그러자 지금 막내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지금 양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지금은 한창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인데, 형제들이 다 오면 양을 누가 지킵니까. 그래서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아들한테 일을 다 떠넘기고 형들은 아버지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서 그 막내아들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이제 그가 사무엘 앞에 섰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무엘상 16장 12절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エッサイは人を遣わして、彼を連れて来させた。彼は血色が良く、目が美しく、姿も立派だった。主は言われた。「さあ、彼に油を注げ。この者がその人だ。」

그게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들한테는 물론이요 아버지에게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맨날 형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만 맡게 됩니다.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あと)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는 이처럼 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는 아직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하는 미성년자였어요. 참, 아버지나 형도 매정하지요. 어떻게 어린 애한테 이처럼 험한 일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이와 같은 생활에 대해서 다윗이 불평불만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 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블레셋 군의 용사 골리앗을 무찌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윗이 좀 머리가 모자라서 그랬었던 건가요? 여러분, 하나님은 미련한 자를 택하셨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것은 지능이 좀 모자란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좀 머리가 부족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지금으로 본다면 명문대를 나와서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엘리트 청년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제 장래는 보장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겠다고 하면,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모자라서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유능했기 때문에, 그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바울은 그렇다고 치고 베드로 같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에게는 대단한 학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어부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주님께 순종하자 주님께서는 그를 높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방언이 막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말하자면 외국어에요. 그런데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사도행전 2장 7절~8절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彼らは驚き、不思議に思って言った。「見なさい。話しているこの人たちはみな、ガリラヤの人ではないか。
それなのに、私たちそれぞれが生まれた国のことばで話を聞くとは、いったいどうしたことか。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저기 있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지방 말들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뜻이고, 둘째는 갈릴리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학문 수준이 높지 않은 지역인데, 거기 출신 사람들이 어떻게 저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의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부족하십니까.

저도 한 번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참 좀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나는지 모릅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실격’이라는 책은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라고 시작합니다만, 정말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남들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남의 것을 빼앗은 적도 있고 남을 속인 적도 있었고…… 정말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낯이 뜨거워져서 자다가도 가끔 벌떡벌떡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의 머리는 나쁜 기억부터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좀 안 그런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쁜 기억 투성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뭐, 반면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 이런 나쁜 기억만 남게 하시는 것도 너무 교만하지 말라고, 좀 겸손 하라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저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분명 계획이 있으시지 않겠습니까. 1976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인도해주신 주님께서는, 어쩌면 몇 십년 뒤에 일본에서 해야 할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 벌써 그 때부터 준비하신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저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18장 3절~6절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私が陶器師の家に下って行くと、見よ、彼はろくろで仕事をしているところだった。
陶器師が粘土で制作中の器は、彼の手で壊されたが、それは再び、陶器師自身の気に入るほかの器に作り替えられた。
それから、私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イスラエルの家よ、わたしがこの陶器師のように、あなたがた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か──主のことば──。見よ。粘土が陶器師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토기장이가 되셔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드시고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귀한 그릇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ち)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전도서 8장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何が起こる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いつ起こるかを、だれも告げることはできない。

전도서 10장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愚か者はよくしゃべる。人はこれから起こることを知らない。これから後(のち)に起こることを、だれが彼に告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많은 사람들은 장래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왜 알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죠.

아니, 알 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만 의지하면 잘 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걸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세요. 우리의 그 얄팍한 지식으로 어찌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했을 때 참 여러가지로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회사에 대해서, 회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뭐, 제가 힘들었다기 보다는 솔직히 제 주변사람들이 힘들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저는 어떤 업무가 있으면, 그 업무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다 알고 난 다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 간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무슨 인턴사원이다 뭐다 해서 회사 업무도 어느 정도 익힐 기회도 많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들어가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참 여러 가지로 막막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세월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난 다음에 시작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참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냥 시작해요. 아브라함도 맨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말씀도 안 해주세요. 그냥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여기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며, 마침내 순금과도 같이 귀한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2년 마지막 남은 한 달을 주님 안에서 잘 마무리 하시고, 다가올 2023년에는 주님께 순종하는 한 해, 주님을 의지하는 한 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 상상도 하지 못했던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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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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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회 언제부터입니까
2022년 11월 27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0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0절~32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0節~32節
“30.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神に不従順でしたが、今は彼らの不従順のゆえに、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
31.それと同じように、彼らも今は、あなたがたの受けたあわれみのゆえに不従順になっていますが、それは、彼ら自身も今あわれみを受けるためです。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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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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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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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0번째 시간으로서 “언제부터입니까” いつからです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장 30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0.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神に不従順でしたが、今は彼らの不従順のゆえに、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

여기서 30절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된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긍휼’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를 직역을 하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복음’ 즉 구원의 말씀이라고 하면 좀 이해가 쉽습니다.


본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파되어야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부를 했어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부터가 조금 어려워집니다.

3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1절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それと同じように、彼らも今は、あなたがたの受けたあわれみのゆえに不従順になっていますが、それは、彼ら自身も今あわれみを受けるためです。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너희’라고 하는 것은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긍휼 즉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었는데, 이제는 이방인이 받은 복음으로 그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역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배웠습니까.

로마서 11장 11절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それでは尋ねますが、彼らがつまずいたのは倒れるため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彼らの背きによって、救いが異邦人に及び、イスラエルにねたみを起こさせました。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전에는 이방인이 받은 축복을 보고 시기를 하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조금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 점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나머지 32절을 마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여기서는 이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범위를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까지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구원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31절에서 생길 수도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1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받아야 했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가 되어서, 자신들이 받아야 할 축복을 이방인들이 받게 된 사실을 알고 시기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시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무슨 남의 집 담장 넘어 보듯이 훔쳐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는 하기 힘들잖아요.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면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복음을 받은 우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처럼 우리더러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지난 주에 우리가 공부 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이세요? 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좋으시니까 그저 아멘 하고 받아들이시겠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시다면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면서.

그러면 뭐예요? 그럼 자기가 하지 왜 우리한테 시킬까.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솔직히 저는 해봤습니다.

거 참 이상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도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니셨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는 것이 말하자면 복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모든 민족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하나님께 있어서 어려운 일이에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우리한테 이 일을 시키려고 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말이에요.

자,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번 기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미워하십니까. 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야말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 그럼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미 답까지 다 말씀드린 것이지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본인이 하시지 왜 우리를 귀찮게 하면서 우리더러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1.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2.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주에 에덴에 심겨져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굳이 에덴 동산 그것도 정중앙,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아담과 하와가 미워서 그랬습니까. 괜히 시험을 주어서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열매를 먹지만 않는다면, 그것 하나만 지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순종한 것으로 쳐주어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축복을 막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면 모든 사람한테 그냥 축복을 주시면 될 것 아니야. 꼭 그렇게 열심히 믿고 순종을 해야지만 축복을 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를 별로 안 사랑하시나보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사실을 알면 그렇지 않습니다. 뭐, 우리 알기 쉽게 돈 이야기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일시적으로 가난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가난이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이 어느 정도 돈을 주면 축복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1억? 2억? 좀 넉넉하신 분들은 1억이나 2억이라고 해 봤자 부족하다고 하실지 모르니까, 좋습니다. 100억이라고 칩시다. 그 정도면 돈으로 본다면 축복이라고 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고 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100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순간 전세계 경제는 마비가 될 것입니다. 물가는 순식간에 오르게 되고, 여기저기에서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문제들로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지난 동경 올림픽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죠. 사실 원래는 2020년에 치러질 예정이었습니다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연기가 되었잖아요?


그리고 난 다음에는 1년 뒤인 2021년에 하느냐 아니면 취소를 하느냐 하는 많은 논란이 있었고,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 2021년에 무관객으로 개최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어땠을까요. 올림픽을 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안 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 그거 괜히 올림픽을 하게 되면 훈련도 힘들게 해야 되고, 고생이 많은데 차라리 안 하는게 낫지 않아? 생각 없는 분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선수들, 특별히 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선수들은 올림픽 개최를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운동경기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운동경기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 목표가 국가대표, 올림픽. 더 나아가서 올림픽 금메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올림픽이 열려야 메달을 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어요. 올림픽이 열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놀라운 상을 받을 기회조차도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만약에 올림픽이 취소되고 그 대신 출전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금메달을 하나씩 걸어주겠다고 하면, 선수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금메달에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 건 아무리 금메달이 아니라 그냥 금색 메달이지요. 상이라기보다는 기념품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힘써 땀을 흘린 끝에 금메달을 따기를 원하는 것, 그 때 비로소 전세계 국민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고 그 나라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금메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마침 월드컵 축구가 한창입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일본과의 경기는 중계를 해줍니다만, 한국 경기는 볼 수가 없지요. 인터넷으로 보려고 해도 “해외에서는 이용하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나와서 볼 수가 없어요. 이럴 때보면 참 외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얼마 전에 보니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이 독일을 꺾고 화제가 되고, 한국도 강팀인 우루과이와 비겼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나 자기 나라 팀이 이기는 것을 원합니다만, 그렇다면 자기 나라 팀이 갑자기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천사가 되어서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축구 강국인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라 하더라도 천사로 구성된 축구팀이 못 이기겠어요? 당연히 이기겠지요. 그러면 그것으로 본래 축구선수들이 좋아하겠어요?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대표선수가 다 천사들로 대체되었어요. 그러면 천사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그깟 금메달이 아니라 세계신기록을 못 세우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박수를 선수들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선수들이 받지 못합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시면 누가 상을 못 받아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을 못 받아요. 아니, 우리가 무슨 공을 세워야 우리가 상을 받을 텐데,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어요. 이는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기보다는 아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뭐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스스로가 하시는 편히 훨씬 쉽고 빠름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32절을 보세요. 이 사실을 모르고 보시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실을 알고 보시면 완전히 이해가 됩니다.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원하시면 한 순간에 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과업을 누구한테 맡기셨어요? 그렇죠. 우리한테 맡기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상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이렇게 전도를 하다 보면요, 여러 가지 간증 거리가 많습니다. 우선 제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제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한테는 다시는 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도를 하는 데에 있어서 그 사람이 거부를 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끈질기게 전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 5절~6절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どの家に入っても、まず、『この家に平安があるように』と言いなさい。
そこに平安の子がいたら、あなたがたの平安は、その人の上にとどまります。いなければ、その平安はあなたがたに返って来ます。

누가복음 10장 10절~11절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しかし、どの町であれ、人々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ないなら、大通りに出て言いなさい。
『私たちは、足に付いたこの町のちりさえ、おまえたちに払い落として行く。しかし、神の国が近づいた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


제가 매주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메일을 보내면서 선교후원금을 당부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아직 지원이 안되기 때문에 저희 가정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교 후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구걸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설령 사람한테 선교후원을 구걸할 지언정 복음은 절대로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 사업장에 대해서 방문 전도를 시작할 때에는 여러 가지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오지 말라고 물을 뿌리거나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아니, 웃으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로 그런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시는 분들은 없으셨어요.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물론 뭐, 오지 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다른 곳은 몰라도 오지 말라고 하는 곳은 절대로 다시는 안 갑니다.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에요. 제 실수가 아니라면, 메일을 안 받겠다고 하는 분에게는 다시 보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거나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제가 아닌 다른 손길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제 방문을 받아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제가 방문하면 오래 있지 않습니다. 제가 준비한 전도지를 드리고, 그리고 일 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까봐 금방 나옵니다.

그리고 간혹 제가 찾아 뵈었을 때 헌금이라고 하시면서 돈을 주시려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양을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제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제가 받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저도 사람인데, 만약에 어디를 갔는데 헌금을 해주셨어요. 그럼 다음에 갈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번에 가면 또 주실까? 어? 그런데 이번에는 안 주시네? 라고 하면 저 자신이 얼마나 못난 사람이 됩니까.

그리고 주신 쪽도 마찬가지죠. 제가 자주 찾아 뵈면, 이휴, 저 인간, 왜 이렇게 자주 와? 지난 번에 돈 줬는데 이번에도 줘야 하나? 돈 주길 바라고 이렇게 자주 오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안 생기겠어요? 아니, 이건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전도지를 들고 찾아 뵈었을 때, 행여 돈을 주거나 하는 일이 없으시도록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그래야 제가 찾아 뵙는 발걸음도 가볍지요.


예전에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두 경우인데, 이제 코스를 따라서 차례차례 방문을 하는데, 다음은 어디를 방문할 차례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말 가기가 싫어요. 거기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고, 한국과 관련된 사업장 같은데 한국사람이 하는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몇 번 갔었거든요.

그 때까지 사람은 못 만나고 그냥 문에다가 전도지를 넣고만 왔었는데, 그 날 따라 그렇게 거기를 가기가 싫더라고요. 하지만 이게 마귀가 전도를 방해해서인지 아니면 성령님이 가지 말라고 해서인지 제가 구분이 잘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뭐 예정에 있었던 곳이니까 억지로 갔어요.

그랬더니 마침 주차장에 한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기 분이냐고 물으면서 전도지를 드리니까, 자기는 종교가 달라서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전도지를 드리면서 그냥 시간 나실 때 보시라고 하니까 그것도 안 받으시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그래, 주님께서는 다른 손길을 예비해 놓고 계시나 보다 하고, 더 이상 그곳은 방문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곳은, 여기는 안 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어요. 다만 제가 방문전도를 하는 곳은 한국 분이 하시는 곳만 찾아 뵙는데, 거기는 한국 분이 운영하는 곳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여길 일본 분이 운영하는 곳이면 가지 말아야 같은데 어떻게 알 길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는 사업장 안에 들어갔더니, 어떤 사장님 같은 분이 이름표 목걸이를 걸었는데, 거기에 한국 이름이 적혀 있잖아요.

그래서 아하, 성령님이 이런 것도 보게 하시는구나 하고, 거기는 요즘도 계속해서 방문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 정말 이처럼 성령님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오프라인 전도보다 온라인 전도입니다. 온라인은 얼굴이 안 보이니까 정말 얼마나 좀 힘든 일도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온라인 상에서 보면 정말 평생 듣지도 못했던 참 심한 말도 많이 듣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메일을 받기 싫으면 안 받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참 여러 가지 의미로 화려한 답장을 보내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게 되면 반드시 이런 일을 겪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마음 아픈 경험을 하는 것은, 그것은 말하자면 운동할 때의 근육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운동할 때 근육통이 온다면 그것은 몸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통이 없다면 이는 오히려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너무 나무라거나 미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거라고 2천년 전에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32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해서 축복을 받으려고 해도, 주변에 전도할 사람이 없으면 곤란 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 곁에 아직 순종하지 않는 사람, 즉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를 싫다는 대도 억지로 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みことばを宣べ伝えなさい。時が良くても悪くてもしっかりやりなさい。忍耐の限りを尽くし、絶えず教えながら、責め、戒め、また勧めなさい。

여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는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복음 전파, 언제부터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 말씀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 전파는 선택이 아닙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 성령님께서 섬세한 손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마음에 상처를 좀 입어도 괜찮습니다. 자존심 상해도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바로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69회 나를 아시는 주님 →
← 제367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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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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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7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2022년 11월 2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9節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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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9번째 시간으로서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賜物で満たし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라고 말하면 꼭 돈이나 물질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 오늘은 주님께서 가득 채워 주시는 은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에도 잠시 살펴보았던 내용이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잠시 지난 주 말씀을 복습 하실까요?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사와 부르심에 대하여 후회하심이 없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신 적이 있으셨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후회를 안 하시도록 하는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피조물은 이 세상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다른 열매는 다 먹어도 좋아. 하지만 내가 말한 그 열매만은 먹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설마 그 열매가 아까워서 그러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못 먹잖아요. 그건 순종이 아니지요.


그럼 어떤 것이 순종이냐 하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는다면, 이것이 진정한 순종이겠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 동산의 어디에 있었습니까.

창세기 2장 9절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동산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은, 에덴 어디에 있든지 제일 잘 보이는 곳, 제일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먹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가서 따먹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안 먹는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으로 쳐주겠다. 이와 같은 말씀이셨던 것이지요.


매일 삼시세끼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안 먹기만 하면, 그 말씀만 지키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여겨 주셔서, 영원토록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만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あるこの思いを、あなたがたの間でも抱きなさい。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모든 영광을 받고 계셨으나, 이를 마다하고 사람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불순종을 해결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죄의 근원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사탄은 항상 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무기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순종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정말 괄목할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라고 하겠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의하면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의 인생은 크게 40년 씩 세 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 40년은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할 때였고, 다음 40년은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 쓸쓸히 광야에서 생활하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서 광야를 떠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언제가 가장 화려하겠습니까. 당연히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할 때라고 하겠지요. 당시 애굽은 최고의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애굽인이 아닌 이스라엘 자손이면서 왕자로 인정을 받아서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리고 살았던 시기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시기를 성경은 얼마나 기록하냐 하면, 한 장도 아니에요. 모세의 출생부터 애굽에서의 생활을 마친 40년 동안의 세월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2장 2절~15절까지 달랑 14절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낯선 땅 광야에 머무르면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지내는 40년도 출애굽기 2장 15절에서 마지막 25절까지, 이건 더 짧아서 11절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에서 그의 생을 마치는 40년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장에서 40장까지 38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36장, 그리고 신명기 마지막 34장까지 무려 135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똑 같은 40년인데 왜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면 성경은 철저하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80. 이제 고령자가 된 모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옛날엔 좋았지. 그 강대국 애굽에서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때는 참 멋있었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에게 머리를 숙이고, 내 명령 하나라면 모든 군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그랬었지.

그런데 사람 팔자 모를 일이야. 인생이 한 번 꼬이더니 모든 것을 다 잃고서는 이제 이 광야 땅에서 쓸쓸하게 나이를 먹었구나.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일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십니까.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너무나도 기가 막히는 노릇 아닙니까. 이제 인생 끝자락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세요. 아무리 사람이 끝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어떻게 돼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어려운 말씀을 쉽게 하세요.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 내게 하시겠다는 것인데, 지금 이팔청춘 젊은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팔십 먹은 할아버지한테 이 어마어마한 사명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 보더라도 외국에 잡혀 있는 사람 하나를 살려내려고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정부 고위층이 오랜 시간을 걸쳐 협상도 해야 하고 그래요.

그런데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출애굽기 38장 26절과 민수기 4장 48절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수 방법에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일단 성경에 나온 기록으로 본다면, 성인 남성이 603,550명에다가 레위 지파 8580명. 이를 더하면 612,130명. 이를 바탕으로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전체 수를 신학자들은 대략 20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놀고 있는 사람 데려오는 게 아니에요. 그 나라에서 종으로 살고 있다는 뜻은, 실질적인 노동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유인도 아니고 종, 그러니까 노예입니다. 200명도 아닌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말하자면 북한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런 막대한 사명을 누구한테요? 예, 80먹은 할아버지한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당연히 못 한다고 하지요.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저 이 나이까지 양이나 치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세가 지금 못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손에 뭐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지팡이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거 가지고 가.

참 말씀 쉽지요?

그래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또 뭐라고 하세요?

출애굽기 4장 14절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すると、主の怒りがモーセ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こう言われた。「あなたの兄、レビ人アロンがいるではないか。わたしは彼が雄弁である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見よ、彼はあなたに会いに出て来ている。あなたに会えば、心から喜ぶだろう。

야. 너 자꾸 말 안 듣지? 알았어. 그럼 네 형 있잖아. 형도 붙여 줄게. 빨리 가.

이렇게 말씀하세요.

모세의 나이 여든 살. 그러면 모세의 형이라면 모세보다 젊겠어요? 늙었겠어요. 당연히 나이가 위잖아요.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ファラオ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그의 형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 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든 살, 그의 형 아론은 여든 세 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핍박 받고 있는 애굽에서 구해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해준 것이 뭐였어요? 예, 나무 지팡이와 모세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할아버지 아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할아버지 둘이 200만명이나 되는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말하자면 북한 같은 곳에 쳐들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참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세가 이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참 너무하지 않아요?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시면서 새로 뭔가를 주신 것이 없어요. 지팡이? 원래 모세가 가지고 있었어요. 아론이요? 원래 있었던 형이잖아요. 다 원래 있던 거예요. 하지만 원래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원래 있던 아론 형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럼 막강한 군대를 짠 하고 만들어주실 능력이 없으십니까. 아니요. 그 정도가 아니라 천군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팡이와 그의 형, 아니, 뭐 사실 형은 나중에 하도 모세가 자꾸 못 하겠다고 하니까 억지로 붙여준 것이지만, 솔직히 그 모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지팡이 하나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애굽을 향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そこでモーセは妻や息子たちを連れ、彼らをろばに乗せて、エジプトの地へ帰って行った。モーセは神の杖を手に取った。

그 때까지는 양이나 치기 위해 쓰던 흔한 그 나무 지팡이였지만,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자 어느덧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못 한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순종을 하면 내가 능력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합니다. 아니,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에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감사가 없어요.

항상 이게 없어요. 저게 없어요. 하고 불평을 합니다. 불만을 말해요. 하지만 어쩌면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모세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천군만마요? 막대한 돈이요? 아니요. 오로지 그의 순종이었습니다. 그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가지고 있던 나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나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은사도 주신다고 기록합니다.


은사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11절.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ある人には同じ御霊によって信仰、ある人には同一の御霊によって癒やしの賜物、
ある人には奇跡を行う力、ある人には預言、ある人には霊を見分ける力、ある人には種々の異言、ある人には異言を解き明かす力が与えられています。
同じ一つの御霊が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なさるのであり、御霊は、みこころのままに、一人ひとりそれぞれに賜物を分け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 보시면 유독 한국에서는 이 방언의 은사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시면 방언을 하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だれかが異言で語るのであれば、二人か、多くても三人で順番に行い、一人が解き明かしをしなさい。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기도할 때 하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방언으로 크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성경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도 해석하지 못하는 방언을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바깥에 나가서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던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남들 앞에서 크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와~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좋구나~ 하고 칭찬할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가 받을 상은 이미 다 받았다. 그러니까 뭐예요? 내가 줄 상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혹 교회에 보면 은사 찾기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게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기도에 은사가 있다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제가 어느 교회에서 본 분인데 말이에요. 한 여자 집시님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예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즉흥으로 그 분이 식사기도인가를 하게 되었는데, 야, 정말 어쩌면 그렇게 기도를 잘 하세요? 길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즉석에서 하시는 기도인데 마치 정말 종이에 적어온 것처럼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잘 하는 것만이 은사인가요?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는 안수집사님이셨는데 당시 섬기고 계셨던 교회의 어느 한 교구가 크게 성장한다는 소식을 들었대요. 그런데 거기 구역장님이 정말 소문이 자자해서 자기도 한 번 가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였냐 하면 이 구역장님이 말씀을 하실 때 좀 많이 더듬는대요.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것도 좀 매끄럽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 그런가보다……했는데, 이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이야기 하시는데, 이러시더래요.


“음…음…음…”

말을 원래 더듬으시니까 매끄럽게 잘 안 나오죠.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 자리에 있던 구역 식구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들 마가복음을 펴더래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길래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답니다. 아니, 어떻게 마가복음인지 알았습니까. 그랬더니, 아, 구역장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때는 <마가복음>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래요.

그래서, 아니 <마>로 시작한다면 <마태복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가복음>이라고 알았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그러시더래요. 우리 구역장님이 마태복음을 말씀하실 때는 “마마마마마” 그러신대요.

이 분은 인간적으로는 말씀에 은사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구역장님 덕분에 크게 성장을 한다는 거예요.

다른 구역을 보면 구역장님이 말씀을 전할 때 다른 짓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서는 잘못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모두가 다 그 구역장님의 입을 본다는 거예요.

그만큼 집중을 해서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이 심어지고 그 구역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우리에게 없는 것만 자꾸 보려고 하는 것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순종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나무 막대기가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고, 인생의 끝이 놀라운 인생의 시작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넉넉하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인생, 축복과 은혜로 넘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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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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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회 흔들림 없는 순종
2022년 11월 13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8절~29절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8節~29節
“28.彼らは、福音に関して言えば、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に敵対している者ですが、選びに関して言えば、父祖たちのゆえに、神に愛されている者です。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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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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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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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8번째 시간으로서 “흔들림 없는 순종” 揺るぎのない従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로마서 11장 28절을 봅니다.

로마서 11장 28절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8.彼らは、福音に関して言えば、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に敵対している者ですが、選びに関して言えば、父祖たちのゆえに、神に愛されている者です。

여기에 보시면 ‘그들’과 ‘너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이요, ‘너희’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28절 내용은, 복음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인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자라고 하십니다. 이는 누구에 대해서 원수가 된 자라는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원수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으로 인해서 분명 택하심을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경은 지금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잠시 복습을 한다면 본래 복음은 이스라엘에 전파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를 거부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자 그들에게로 전파되었을 복음이 이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서, 이방인이 구원 받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며,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말씀을 지난 주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29절에서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로마서 11장 29절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믿음을 한 번 가지면 절대로 구원의 취소가 안 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わたしはサウルを王に任じたことを悔やむ。彼はわたしに背を向け、わたしのことばを守らなかったからだ。」それでサムエルは怒り、夜通し主に向かって叫んだ。

이 구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는데, 사무엘상 15장 11절 말씀에 보시면 분명히 후회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15장 11절은 어쩌다가 우연히 좀 잘못 기록된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사람이 있을 까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5장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サムエルは死ぬ日まで、再びサウルを見る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サムエルはサウルのことで悲しんだ。主も、サウルを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ことを悔やまれた。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것을 놓칠 까봐,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점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후회하셨던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만, 우리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그 동안 종살이를 하고 있던 애굽에서 탈출하고는 무려 40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한 끝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에 이어 그들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부터 시작해서 대대로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사사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대단한 권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사기 17장 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そのころ、イスラエルには王がなく、それぞれが自分の目に良いと見えることを行っていた。

사사기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そのころ、イスラエルには王がなく、それぞれが自分の目に良いと見えることを行っていた。

그러니까 사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왕이나 대통령 같은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글쎄요.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인 지도자 정도로 인식 되어 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사의 말을 들으면 좋겠지만, 안 듣는다고 해서 체포한다거나 특별한 형벌을 내린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참으로 이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을 원했던 것이지요. 참 이상한 노릇이지요? 왕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명령을 할 것이요, 자신들의 세금도 가져갈 것이요, 얼마나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시면, 왕을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시 사사였던, 정확하게는 일선에서 은퇴하고 자기 아들에게 사사를 물려주었던 사무엘은, 왕을 세우게 될 경우의 불이익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역설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끝까지 왕을 세워달라고 해요. 그들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8장 19절~20절
“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しかし民は拒んで、サムエルの言うことを聞こうとしなかった。そして言った。「いや。どうしても、私たちの上には王が必要です。
そうすれば私たちもまた、ほかのすべての国民のようになり、王が私たちをさばき、私たちの先に立って出陣し、私たちの戦いを戦ってくれるでしょう。」

참 단순하지요? 생각해보세요. 물론 당시에 전쟁을 하게 된다면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어디 항상 그러나요. 보통은 후방에서 보고를 받거나 군대를 지휘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럼 직접적으로 전쟁은 누가 합니까. 당연히 병사들이 하는데, 병사는 말하자면 그 나라 백성, 그러니까 자기들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왕을 세우면 왕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전쟁도 해주고 얼마나 좋아?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지요.

사무엘이 아무리 만류를 해도 백성들이 도무지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도 그들 위에 왕을 세우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미국도 그렇습니다만, 그깟 몇 년밖에 못하는 대통령이나 총리 한 번 하려 해도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까. 그런데 원칙적으로 죽을 때까지 평생 할 수 있는 왕이 되기 위해서 사울이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은 것은 99%도 아니고 100%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어떻게 해야했겠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결국 사울은 하나님을 후회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던 것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아말렉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절~3절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上って来る途中で、アマレクがイスラエルに対して行ったことを覚えている。
今、行ってアマレクを討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しなさい。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幼子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しなさい。』」

이런 말씀을 보시면 참 무섭고 잔인하지요. 아니, 성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젖 먹는 아이나 가축들까지도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는 단순한 공격이나 점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알기 쉬운 예로, 소돔과 고모라를 보더라도 거기에 무슨 어린 아이들이나 가축들은 남겨두고 멸망한 것이 아니잖아요?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그 도시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흔적도 남김없이 전멸하신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입니다만, 출애굽기 17장에 의하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고 얼마 가니까 이 아말렉 족속들이 공격을 해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고, 그 심판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신 사울을 통해서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상 15장 7절~9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サウルは、ハビラからエジプトの国境にあるシュルに至るまで、アマレク人を討ち、
アマレク人の王アガグを生け捕りにし、その民のすべてを剣の刃で聖絶した。
サウルとその兵たちは、アガグと、肥えた羊や牛の最も良いもの、子羊とすべての最も良いものを惜しんで、これらを聖絶しようとしなかった。ただ、つまらない値打ちのないものだけを聖絶したのである。


사울은 별볼일 없는 하찮은 가축들은 다 죽였지만, 아말렉 왕인 아각이 가지고 있던 최고의 가축들은 남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15절에 의하면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니요. 오히려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서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어느 쪽을 좋아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기뻐하실 것도 같지만,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좋은 제물을 갖다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말렉을 심판하라는 명령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얻은 그깟 가축 몇 마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サムエルは言った。「主は、全焼のささげ物やいけにえを、主の御声に聞き従うことほどに喜ばれるだろうか。見よ。聞き従うことは、いけにえにまさり、耳を傾けることは、雄羊の脂肪にまさる。

그 어떤 제사나 그 어떤 제물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도 끝까지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고집,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31장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린 사울은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이스라엘 왕위는 다윗에게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성경을 알게 되면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면서요. 전지전능이 무슨 뜻이에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처럼 순종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을 텐데, 왜 왕으로 세우시고는 후회를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만약에 사울이 순종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게 되잖아요.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서나 위인전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객관적인 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앞에 두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에 대한 후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란 무엇인가>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세워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지금의 왕도 그렇습니다만, 이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대를 이어 계승되는 것이 바로 왕위인 것입니다.


사실 사울이 범한 실수는 이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13장에서 처음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제사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자신이 대신 제사를 드리는,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월권행위를 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しかし、今や、あなたの王国は立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主があなたに命じられたことを、あなたが守らなかったから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왕이 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울을 통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라고 하는 단순한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우리는 우리가 내 의지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내 의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1장 6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その異邦人たち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


고린도전서 3장 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もの、キリストは神のものです。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혼자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그리고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축복은 결코 후회하심, 즉 취소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해주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신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수많은 모래알 속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세워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리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헌신짝 버리듯 버림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의 원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남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후회하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후회하게 하셔도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흔들림 없는 순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림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서, 마침내 넘치는 축복과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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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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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5회 구원의 약속
2022년 11월 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5節~27節
“25.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この奥義を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人の一部が頑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の満ちる時が来るまでであり、
26.こうして、イスラエル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救い出す者がシオンから現れ、ヤコブから不敬虔を除き去る。
27.これこそ、彼らと結ぶわたしの契約、すなわち、わたしが彼らの罪を取り除く時であ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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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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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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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7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5節~27節
25.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この奥義を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人の一部が頑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の満ちる時が来るまでであり、
26.こうして、イスラエル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救い出す者がシオンから現れ、ヤコブから不敬虔を除き去る。
27.これこそ、彼らと結ぶわたしの契約、すなわち、わたしが彼らの罪を取り除く時であ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일단 25절에 보시면 하나의 신비 즉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한 대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십 번 십자가에 못박힌다 하더라도, 아무리 수백 번 채찍에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의 죄는커녕 우리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만 우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에 대한 우둔함은 예수님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요, 구원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중 일부가 이처럼 우둔하게 된 이유가 뭐라고 배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둔하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셨다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실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하기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수가 충만해 진다> <수가 찬다>는 말을 들으면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이에요. 사실 이런 집단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마다 일만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명만 인치심을 받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지막 날에는 이 십사만 사천명 안에 들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열두 지파를 만들어놓고는, 각 지파에 들어가는 명단을 만들어요. 그래서 각 지파에서 12,000명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말하는 12,000명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그 종교집단의 말을 잘 들어야 그 명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뭐예요? 예, 헌금을 많이 내면 그 명단에 들어가게 되고, 헌금을 못 내면 그 12,000명에서 밀려나게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말합니다. 공짜 천국은 없다. 그러니까 헌금을 많이 내라. 신자들을 많이 모아와라. 그래야 천국 간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런 걸 들으면요. 정말 참 장사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렇게 하면 교회 재정도 좀 넉넉해지고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말씀을 못 드립니다.

물론 성경에는 물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무조건 많이 내기만 하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요.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だ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と。十分の一と奉納物においてだ。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十分の一をことごとく、宝物倉(ほうもつぐら)に携えて来て、わたしの家の食物とせよ。こうしてわたしを試してみよ。──万軍の主は言われ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の窓を開き、あふれるばかりの祝福をあなたがたに注ぐかどうか。


십일조 즉 자신의 수입에 있어서 10분의 1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바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하고, 뿐만 아니라 어디 한 번 십일조를 드려봐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이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지 않나 한 번 하나님을 시험해봐라.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계세요.

누구는 십일조는 구약에만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씀을 안 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イノンド、クミン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律法の中ではるかに重要なもの、正義とあわれみと誠実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누가복음 11장 42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だが、わざわいだ、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うん香、あらゆる野菜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正義と神への愛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의와 긍휼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중요하지만, 뿐만 아니라 십일조도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보험이 많습니다만, 저는 그 보험 중의 보험이 바로 십일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종종 보면 이 십일조가 얼마나 시험에 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회사생활 할 때를 생각하면, 꼭 십일조만 내지 않으면 딱 맞아요. 십일조를 내면 그 만큼 적자가 날 것만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바치기만 하면, 길이 열리고 주님께서 물질과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경험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분을 보니까, 자기는 십일조를 지금보다 열 배 스무 배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니 무슨 교회에 돈을 많이 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나……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 자기 수입이 열 배 스무 배 늘어나게 해달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걸 듣고 그것 참 자혜로운 기도네……라고 감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수입이 열 배 스무 배 이상 늘어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가 돈 이야기 한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이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십일조에 대해서도 안 전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이 하는 돈 이야기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무조건 돈을 많이 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그들은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은 못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 지파마다 12,000명, 총 144,000명 안에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재적교인만 보더라도 75만명이라고 하는데, 전세계, 그것도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다 포함을 한다면 어떻게 그 절대적인 숫자만이 구원받겠습니까.

좋습니다. 100보 양보를 해서, 1명 2명 3명……해서 정말 144,000명이 구원을 받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명단을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요? 자기들이 멋대로 명단을 만들어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보여드리면, 그 명단 대로 주님이 그걸 보시고 구원을 해 주신대요? 자기들이 뭔데요?

이렇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을 그 안에 있으면 교묘하게 세뇌를 해서, 성경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믿도록 한다는 것인데, 이게 참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2,00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성경에 나오는 완전수입니다. 성경에는 12만이 아니라 3이나 40 같은 수도 완전수라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이를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교회 좀 다니고 설교 좀 들었다고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면, 그냥 조금 잘못될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꼬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인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경에 적혀 있는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이 맨날 말만 했지 도무지 지키는 모습이 안 나와요.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도 믿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최대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문제를 내볼까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말 그대로 본다면 구약은 오래된 약속이요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약속의 책입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구약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요, 신약은 아직 안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은 어디서 나누어질까요.

많은 분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 구약이요 예수님이 오신 다음이 신약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사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부터 신약성경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부터 신약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지 말아야 하잖아요?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성취가 된다면 그 성취까지가 구약이 되는 것이요, 새로운 약속이 선포되고 시작되는 시점이 신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사실은 구약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습니다. 구약 39권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오신다는 예언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이지요. 시간관계상 인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이사야 53장에 보면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예언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자, 그럼 구약의 예언이 어디서 완전히 끝나게 되느냐 하면, 이는 예수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내용인데, 여기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것,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왔던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구약의 예언은 모두가 성취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예,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가신 것이 아니지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사도행전 1장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こ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使徒たちが見ている間に上げられた。そして雲がイエスを包み、彼らの目には見えなくな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상장이라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답은 두 개입니다.

자,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지 않지만, 올라가시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 중 하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하나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2절~3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3절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用意し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がいるところに、あなたがたもい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주시기 위해서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어때요?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144,000밖에 없다고 하시나요? 아니요. 걱정하지 마세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서 가려고 하실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모두 다 마치고 난 다음 천천히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며칠 전에 차를 타고 제 아내와 어디를 가는 길에 보니까, 그럴 때 있잖아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쫙 비치는 모습이요. 서울이나 동경 같은 도시에서는 하늘이 넓지 않으니까 그런 걸 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군마 같은 경우는 하늘이 넓으니까 참 멋진 경치를 볼 기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그 구름 사이로 몇 갈래나 햇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 마치 예수님이 오실 것 같다는 거예요.

글쎄요. 실제로는 어떤 상황에서 오실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니까 정말 영화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 같은 분위기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에요.

그래서, 오, 정말 그러네?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예수님을 만나면 뭐라고 할 거냐고 저한테 물어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딱 만나면 뭐라고 하실 것 같으세요? 할렐루야! 주여! 그러시겠어요?

저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겠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첫 마디는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할 거 같애요.

자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기에는 거할 곳이 많은데, 너는 어디서 살고 싶니.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으십니까. 큰 집에서 살고 싶어요? 교통편이 좋은 곳에서? 경치가 좋은 곳? 산이나 바다가 가까운 곳? 아니면 설마 땅값이 비싼 곳?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한 가지 좋은 답이 떠오른 것 같아요.

사실 이 답은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 드리려고 했는데, 여러분께만 특별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어디에 살고 싶냐고 물으시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싶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니까 왕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누가 사냐 하면, 최측근이 살지 않습니까. 그래야 왕이나 대통령이 부를 때 언제든지 제일 빨리 갈 수 있잖아요.


이는 그렇다고 무슨 천국에 가서까지도 권력에 욕심을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이 가장 귀하고 값진 삶이 아니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부어주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 주십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시고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주신다는 구원의 약속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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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회 앞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2022년 10월 30 설교 - 로마서 강해 10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4절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4節
“24. あなたが、本来野生であるオリーブから切り取られ、元の性質に反して、栽培された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たのであれば、本来栽培された枝であった彼らは、もっとたやすく自分の元の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るは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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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6번째 시간으로서 “앞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行く道を平らにさ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서 접붙임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이 접붙임에 대해서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4절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4節
“24. あなたが、本来野生であるオリーブから切り取られ、元の性質に反して、栽培された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たのであれば、本来栽培された枝であった彼らは、もっとたやすく自分の元の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るはずです。”


자, 두 나뭇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려고 해요. 하나는 다른 나무인 돌감람나무에서 꺾어 온 나뭇가지이고, 또 하나는 본래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었다가 꺾였던 나뭇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나뭇가지 중에서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것과, 본래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던 나뭇가지를 다시 똑 같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것과, 무엇이 더 쉽겠습니까.

당연히 서로 다른 나무를 접붙임 하는 것보다 같은 나무를 접붙임 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본래 그 나무에 붙어 있었던 나뭇가지라면, 다른 데에서 가져온 나뭇가지보다 훨씬 더 접붙임을 하기 쉽겠지요.

이는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 돌감람나무라는 것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본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되어야 마땅했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완전히 버리셨느냐 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구원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서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더 수월하겠느냐 하는 기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시고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일 사랑하시고, 한국사람이나 일본 사람인 우리는 그 다음일 수밖에 없겠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좋겠다……라는 것인가요?

놀라운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겠다……하고 손가락 물고 부러워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전반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

여기서 <우리>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저기 먼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곧 창세 전에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참감람나무 나뭇가지일까 아니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일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님 앞에서 참감람나무 나뭇가지 같으십니까. 아니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 같으십니까.

글쎄요.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나뭇가지는 고사하고 그저 버러진 나무 막대기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말씀이 떠올랐어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です。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이 <미쁘다>라는 말은 참되다. 진실되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진실한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생각하기를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니까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 아니요.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기야 말로 죄인, 그것도 죄인 중의 죄인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도 그만 안 오셔도 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인인 나를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 만화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일본의 ‘너의 이름은’이라는 영화인데,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까,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을 어떤 사람이 계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보니까, 확률이 몇 억 분의 1이나 몇 조 분의 1 정도가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단위 분의 1이래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36자리 수의 번호를 한 번에 정확히 알아 맞추는 확률 곱하기 3이라고 합니다.

잘 감이 안 오죠?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이 상당히 낮다는 정도는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처럼 낮은 확률의 만남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구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시면 이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자기 본래 고향으로 보내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4장 3절~9절입니다.

“3.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私はあなたに、天の神、地の神である主にかけて誓わせる。私はカナン人の間に住んではいるが、あなたは、その娘たちの中から、私の息子の妻を迎え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は、私の国、私の親族のところに行って、私の息子イサクに妻を迎えなさい。」
しもべは彼に言った。「もしかしたら、その娘さんが、私についてこの地に来ようとしないかもしれません。その場合、ご子息をあなたの出身地へ連れて戻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
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気をつけて、息子をそこへ連れて戻ることのないようにしなさい。
天の神、主は、私の父の家、私の親族の地から私を連れ出し、私に約束して、『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方が、あなたの前に御使いを遣わされるのだ。あなたは、そこから私の息子に妻を迎えなさい。
もし、その娘があなたについて来ようとしないなら、あなたはこの、私との誓いから解かれる。ただ、私の息子をそこに連れて戻ることだけはしてはならない。」
それでしもべは、主人であるアブラハムのももの下に自分の手を入れ、このことについて彼に誓った。


자,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찾아 나서게 하는데, 여기에 보시면 그의 종에게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째로,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향까지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인을 구하라고 해요.

둘째로, 이삭을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어려운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서 그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라고도 하는 하란까지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가 하고 찾아 보았던니 무려 600킬로나 떨어져 있었다고 해요.

거기에 그 당시에는 비행기는 고사하고 자동차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걸어서 가야 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낙타를 타고 갔다고 해요.


그것 만도 보통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갔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그 도시에 가서 무슨 수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성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는 것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어서 구인광고를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먼저 보내셔서 찾아 주실 것이라는 거예요.

여기까지 보더라도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망성이 거의 없어요. 그야말로 사하라 사막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격이겠지요.

자, 좋아요. 백 보 양보를 해서 그 바늘을 찾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지요? 마땅한 여성을 찾았다고 해도 그 여성이, 얼굴도 뭐도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역시 600킬로 떨어진 곳까지 와 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 여성만의 결심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여성의 부모님도 허락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황당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은 이를 믿고 그 먼 길을 출발합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24장 10절~27절까지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제가 정리를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제 오랜 시간을 걸쳐 드디어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서 이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창세기 24장 13절~15절

“13.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ご覧ください。私は泉のそばに立っています。この町の人々の娘たちが、水を汲みに出て来るでしょう。
私が娘に、『どうか、あなたの水がめを傾けて、私に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い、その娘が、『お飲みください。あなたのらくだにも水を飲ませましょう』と言ったなら、その娘こそ、あなたが、あなたのしもべイサクのために定めておられた人です。このことで、あなたが私の主人に恵みを施されたことを、私が知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
しもべがまだ言い終わらないうちに、見よ、リベカが水がめを肩に載せて出て来た。リベカはミルカの子ベトエルの娘で、ミルカはアブラハムの兄弟ナホルの妻であった。

거기에 보면 우물가가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여인 중 한 소녀에게 말하기를, 내가 목이 마르니까 물을 좀 달라고 할 텐데, 만약에 그 소녀가 말하기를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이 데리고 온 낙타 열 마리한테도 물을 마시게 하겠다고 한다면, 그 소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소녀라고 믿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자, 이걸 보시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 사람이 목마르다고 하면 아무리 갈증이 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컵으로 물 한 두잔 정도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낙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낙타 혹에 보면 그게 지방으로 되어 있어서 수분이나 영양분을 몸에 저장해 놓을 수 있다고 하니까, 물을 마셔도 한 번에 무척이나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더구나 낙타는 지금 방금 도착했어요. 얼마나 갈증이 나 있는 상황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낙타가 몇 마리요?

10절에 보시면 낙타가 10마리였다고 합니다. 솔직히 성인 남자라 하더라도 지금 목이 탄 낙타 열 마리가 마실 물을 길어서 나른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 시집도 안 간 젊은 소녀가, 그렇다고 무슨 이쪽이 부탁을 한 건도 아닌데 열 마리의 낙타가 마실 물을 길어 나른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리 못해도 무거운 물통을 들고 우물과 낙타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중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줄 소녀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에다가 돈도 받지도 않았는데 그 쪽이 먼저 그런 말을 해준다?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로 처음 눈에 띈 소녀한테, 자기가 마실 물 한 잔 달라고 하니까, 이 소녀가 뭐래요?


창세기 24장 18절~20절
“18.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すると彼女は、「どうぞ、お飲みください。ご主人様」と言って、すばやくその手に水がめを取り降ろし、彼に飲ませた。
水を飲ませ終わると、彼女は、「あなたのらくだにも、飲み終わるまで、水を汲みましょう」と言った。
彼女は急いで水がめの水を水ぶねにあけ、水を汲みに、再び井戸まで走って行き、すべてのらくだのために水を汲んだ。

대뜸 하는 말이 당신이 데려온 낙타들한테도 물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낙타들한테 한 머금씩 주겠다는 게 아니에요. 낙타들이 배가 부를 때까지 마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소녀는 이 때부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물과 낙타 구유 사이를 왔다갔다 했겠지요. 그러면 이 종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냐아냐. 그만하면 됐어. 그랬을까요?


창세기 24장 21절~22절
“21.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22.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この人は、主が自分の旅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どうかを知ろうと、黙って彼女を見つめていた。
らくだが水を飲み終わったとき、その人は、重さ一ベカの金の飾り輪と、彼女の腕のために、重さ十シェケルの二つの金の腕輪を取り、

그 종은 그 소녀가 정말 낙타가 배부를 때까지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하는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낙타가 물을 다 마시고 나니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지요. 알고 보니까 이 소녀가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친척 집안이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끝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이 소녀가 600킬로나 떨어진 자기 집 주인한테 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부모님도 이를 허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마침내 그 리브가라고 하는 그 소녀를 데리고 돌아와서 이삭의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말이 쉬워 600킬로지 당시 감각으로 본다면 한국과 일본 정도로 먼 거리로 여겨졌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요, 자, 일본에 있는 한국사람이 자기 아들의 아내를 구하려고 해요. 그래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한국에 가서 자기 아들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그 일하는 사람은 알았다고 하고 10명의 일행들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을 딱 나가자 마자, 그 공항 건물 입구에서 어떤 아리따운 소녀를 발견해요.

이 사람이 그 소녀한테 말합니다. 이봐. 내가 좀 배가 고픈데 말이야. 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 사주지 않겠니?

그러자 이 소녀가 하는 말이, 그러지 마시고, 당신만이 아니라 같이 계신 10명한테도 부페를 대접해드리겠다고 해요…….

뭐, 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럴 확률이 있어요? 없습니다. 36자리 숫자를 맞출 확률이 아니라 360자리 숫자를 맞출 확률보다도 낮겠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4장 40절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すると主人は答えました。『私は主の前に歩んできた。その主が御使いをあなたと一緒に遣わし、あなたの旅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あなたは、私の親族、私の父の家から、私の息子に妻を迎えなさ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주셨을까요.


누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감람나무 나뭇가지 보다도 못한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평탄한 길이 허락되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평탄한 길이 아무런 대가 없이 허락되었나요?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하나님과 사람의 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어마어마하게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를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대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까.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면 됐지, 왜 우리는 죽어라고 예수님을 매달립니까. 예수님에 매달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이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우리는 죄악 속에서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26장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正しい人の行く道は平らです。あなたは正しい人の道をならし、平らにされます。

이제 돌감람나무 가지보다도 못한 우리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접붙임을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앞길을 평탄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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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회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2022년 10월 23 설교 - 로마서 강해 10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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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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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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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5번째 시간으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素晴らしい神様の接ぎ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접붙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이 말씀을 좀 쉽게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그들도 믿는 데에 머무르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あの人たちも、もし信仰の中に居続ける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는 참 감람나무 가지가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그들이 축복을 받았을 텐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감람나무 가지가 꺾이고, 그들이 받아야 할 복음이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어떻게 말씀드렸었지요? 참 감람나무 가지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꺾이심으로 말미암아, 돌감람나무 가지 즉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서 그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난 주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공부해오면서, 그저 그런가 보다……하고 막연하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접붙임과 하나님의 접붙임. 같을까요. 다를까요.

예,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의 힘으로 접붙임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힘으로 접붙임을 하는 것.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시러큐스(シラキュース) 대학에는 한 놀라운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분명 한 그루의 나무인데 이 대학 미대 교수님이 하나하나 접붙임을 함으로 인해서, 이 한 나무에서 40종류의 과일이 맺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A라고 하는 나무에 B라고 하는 나뭇가지를 접붙임 했어요. 그렇다면 B라고 하는 나뭇가지는 시간이 지나면 A라고 하는 나뭇가지가 된다? 아니면 계속 B라고 하는 나뭇가지이다?

만약에 접붙임을 한 결과 본래 나뭇가지의 성질이 변해서 그 접붙임 한 나무와 동일하게 된다면, 아무리 접붙임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40종류의 과일이 열리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처음에는 조금 다른 과일이 열리다가, 접붙임 한 나무와 같아진다면 40번이 아니라 400번을 접붙임 해봐야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한 가지 열매 밖에는 안 열릴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대학에 있는 나무는 어떤가 하면, 본래 그 나뭇가지가 가지고 있던 성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접붙임을 한 나무와는 다른 열매를 계속해서 맺는다는 것이에요.


자, 그럼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참감람나무가 있어요. 제가 어딘가에서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를 꺾어 왔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의 나뭇가지도 꺾어서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 했습니다. 그렇다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는 참감람나무의 열매가 일릴까요. 아니면 돌감람나무 열매가 일릴까요.

그렇죠. 앞서 그 미국 대학에 있는 그 나무에 40종류의 과일이 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어떤 나무에 다른 나뭇가지를 접붙임 해도 그 나뭇가지의 본래 성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양한 과일이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사과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복숭아 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는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안 난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간증해주세요.


자, 우리는 그러면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라고 하는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 참감람나무 열매 맺기를 기대하실까요 아니면 돌감람나무 열매 맺기를 기대하실까요.

잠시 이사야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장 1절~2절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さあ、わたしは歌おう。わが愛する者のために。そのぶどう畑についての、わが愛の歌を。わが愛する者は、よく肥えた山腹にぶどう畑を持っていた。
彼はそこを掘り起こして、石を除き、そこに良いぶどうを植え、その中にやぐらを立て、その中にぶどうの踏み場まで掘り、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ところが、酸いぶどうができてしまった。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기름진 땅에 최고의 환경을 갖추어 놓으시고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고 난 후에도 열심히 가꾸셨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와 같이 노력을 했다면 어떤 열매가 맺었겠습니까. 최고의 토양에 최고의 포도를 심고 최고의 기술로 가꾸었다면 당연히 최고의 포도가 맺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포도 맺기를 바라셨대요? 그렇습니다. 좋은 포도, 최고의 포도 맺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부으시고 정성껏 가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맺혔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분명 최고의 포도를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날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바라셨대요? 그렇습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뒤집어서 오늘 말씀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좋은 참감람나무라 하더라도 그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에서는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안 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생각해보세요. 그깟 돌감람나무 열매를 얻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이셨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단순히 나무를 꺾어다가 접붙이실 뿐만이 아니라,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와도 같은 우리라 하더라도, 믿음에 머묾으로 인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면,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열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에 있습니다.

이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은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본래 어부였습니다. 그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보다는 배를 탔을 것이며, 고기잡이에 대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의 나이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참고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15절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それからイエスはペテロの家に入り、彼の姑が熱を出して寝込んでいるのをご覧になった。
イエスは彼女の手に触れられた。すると熱がひき、彼女は起きてイエスをもてなした。

여기 보시면 베드로에게는 그의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장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베드로는 당시 결혼을 했었다는 말이 되지요?

베드로가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5절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私たちには、ほかの使徒たち、主の兄弟たちや、ケファのように、信者である妻を連れて歩く権利がないのですか。

여기서 <게바>라고 하는 이름은 요한복음 1장 42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사역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당시 가정을 가질 만한 충분한 나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충분한 나이와 함께, 그에 걸맞는 고기잡이로서의 지식과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혹시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함께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절~2절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5:01 さて、群衆が神のことばを聞こうとしてイエスに押し迫って来たとき、イエスはゲネサレ湖の岸辺に立って、
5:02 岸辺に小舟が二艘あるのをご覧になった。漁師たちは舟から降りて網を洗っていた。

여기서 게네사렛 호숫가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니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는 그물을 씻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기잡이를 하면 그 다음에 그물을 손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조금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왔다고 한다면 그물을 손질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잡아온 고기를 실어 날라야지요. 고기를 내버려두고 그물을 손질할 수가 있나요. 하지만 그들은 배에서 내린 다음 그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는 날라야 할 물고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3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5:03 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つ、シモンの舟に乗り、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舟から群衆を教え始められた。

예수님께서는 거기 빈 배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거기 앉으시고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아마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들도 일을 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의외의 행동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04 話が終わるとシモンに言われた。「深みに漕ぎ出し、網を下ろして魚を捕り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앉아 계셨던 배의 주인인 시몬 베드로에게로 다가가십니다.

여러분, 보통 처음 만난 사람과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급하더라도 일단 안녕하시냐는 인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많이 바쁘시죠, 고기는 많이 잡혔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 다 생략. 베드로에게 다가가서는 뭐라고 하셨다고요? 예, 다짜고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부자연스럽지 않은 범위 내에서, 한 번 베드로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5절에서 보시면 알다시피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어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갈릴리 바닷가는 물이 맑기 때문에 환할 때 그물을 던지면 고기들이 다 도망가 버린대요. 그래서 밤에 고기잡이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어요. 말하자면 완전히 장사를 망쳤습니다.

거기다가 밤까지 샜으니 얼마나 피곤 하겠어요. 밤새도록 일을 해서 몸은 피곤한데 고기도 안 잡혔으니 대단히 심기가 불편했겠지요. 본래 뱃사람이라고 한다면 좀 거친 성격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투덜투덜 거리면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는데, 저기 보니까 낯선 남자 하나가 와서는 사람들한테 무슨 말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자세히는 안 들리지만 거기 모인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게 누구야? 사람 바빠 죽겠는데 아침부터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어쭈? 나한테 허락도 없이 내 배에 올라타네?

뭐 그러면서 대단히 불편한 심기로 예수님과 거기 모인 사람들을 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사람이 말을 마치고 자기한테로 와요. 옳지. 잘 됐다. 내가 속상한데 쓴 소리 한 번 해줘야겠다. “아니, 이 보쇼. 주인한테 허락도 없이 남의 배에…….” 이렇게 말하려고 했더니만 그 사람이 먼저 말을 해요.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뱃사람은 뱃사람을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 여러 기계들도 있고 해서 옛날보다는 편해졌을 지는 모르지만, 옛날에는 그야말로 고기잡이에 있어서 모든 것을 힘으로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고기잡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는 어느 정도 몸집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타고난 뱃사람인 베드로가 자기한테 말을 하는 사람을 보니까, 전혀 고기잡이처럼 보이지가 않아요. 예수님은 그 때까지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 집에서 자랐을 테니까 목수 일을 하셨었겠지요. 그것도 편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기잡이만큼 힘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전혀 고기잡이를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렇잖아도 지금 일을 망쳐서 심기가 불편한데 꼭두새벽부터 다짜고짜 다시 고기잡이를 나가래?

열 받아요? 안 받아요? 사실 여기서는 열이 받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아니, 지가 뭔데……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베드로도 차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분명 그 자리에는 방금 전까지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무리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한테 선생님이라고 해요.

여기서 베드로가 함부로 성질을 부렸다가는, 아니, 지금 선생님한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냐면서 혼날 지도 몰라요.

그에게는 이 순간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자존심과 지식과 경험, 또 하나는 그 남자가 하는 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는 놀랍게도, 어쩌면 평소의 베드로 답지 않게 그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 보기로 결정을 합니다.


누가복음 5장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05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捕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ですので、網を下ろしてみましょう。」

그 선생이라는 사람의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쇼. 슨상님, 우리 같은 고기잡이 프로가 밤새도록 노력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소. 그런데 지금 보자 하니 고기잡이는커녕 그물 한 번 못 잡아 본 것 같으면서, 우리한테 가르치려 한단 말이제.

좋소. 여기 많은 사람들도 있고, 당신 체면도 있을 테니 그래, 한번만 따라 봅시다.

저에게는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해요. 제가 너무 오버한 것 같으십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좀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해야지만 말이 맞아요.

그 이유는 좀 뒤에 보시면 압니다.


자,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야고보와 요한 등과 함께 다시 배에 올라탑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에 대해서 의문이었습니다. 아니, 갈릴리 호수가 좀 넓어요? 얼마나 넓으면 분명히 호수인데 갈릴리 바다라고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깊은 데”가 어딘 줄 알고 거기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나 거기서 고기잡이를 하는 뱃사람이라면 그들 사이에서는 “깊은 곳”이라고 한다면 “아, 거기”라고 하는 곳이 있지 않았을까 해요.

만약에 베드로가 알지 못했다고 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깊은 곳이 어디냐”하고 물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기 뱃사람들은 “깊은 곳”이 어딘지는 다들 알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낯선 선생님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보자고 생각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들만 아는 그런 말을 예수님께서 사용했기 때문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뭐,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베드로한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아무튼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또다시 손질하던 그물들을 다시 배에 싣고서 그 “깊은 곳”을 향해 나갑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 다음에 할 말을 이미 준비해 두었을 지도 몰라요.

그는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냐 하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봤자 소용없다. 우리는 괜한 짓만 하다가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선생인지 뭔지 하는 사람한테 그 빈 그물을 내던지면서,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한 마디 해줘야겠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누가복음 5장 6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06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그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고기가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이 1%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가득 차서 찢어지고 있는 그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누가복음 5장 7절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07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물고기가 많은지 배가 잠길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이제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워집니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건방진 소리를 한 거야. 나는 이제 끝장이야. 천벌을 받을 지도 몰라.

돌아온 그는 예수님 앞에 나갑니다.


누가복음 5장 8절~11절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5:08 これを見たシモン・ペテロは、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言った。「主よ、私から離れてください。私は罪深い人間ですから。」
5:09 彼も、一緒にいた者たちもみな、自分たちが捕った魚のことで驚いたのであった。
5:10 シモンの仲間の、ゼベダイの子ヤコブやヨハネも同じであった。イエスはシモンに言われた。「恐れることはない。今から後、あなたは人間を捕るようになるのです。」
5:11 彼らは舟を陸に着けると、すべてを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그는 예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을 축복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록 그가 믿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보다 말씀을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배를 육지에 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뭐였다고요? 아니, 그토록 원했던 고기를 잡았는데, 그것도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수많은 고기를 잡았다면 그 물고기들을 이제 날라야 하잖아요.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잡아온 수많은 물고기를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때까지 생명처럼 아껴왔던 배나 그물이나 물고기들마저도 이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까지 세상이라고 하는 이름, 지식이라고 하는 이름, 경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을 때, 그는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 참감람나무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18절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良い木はみな良い実を結び、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ます。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접붙임을 하려고 해 봤자 결국은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붙임 되면, 참감람나무로 변화하게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으로서 과거의 돌감람나무 뿌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이라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좋은 열매,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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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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