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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1회 채워야 하는 것
20232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3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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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7節
“7.すべての人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なさい。税金を納めるべき人には税金を納め、関税を納めるべき人には関税を納め、恐れるべき人を恐れ、敬うべき人を敬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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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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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3번째 시간으로서 “채워야 하는 것” 満たすべき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6절과 7절을 살펴보며 세금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7절을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이 구절을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구분을 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앞부분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 전반부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7.すべての人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なさい。税金を納めるべき人には税金を納め、関税を納めるべき人には関税を納め、

여기서 조세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일반적인 세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관세는 무엇입니까. 관세라고 하는 것은 외국 물건을 수입해서 판매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국내 생산자들에게 불이익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똑 같은 품질의 물건인데 환율이 낮은 외국에서 수입해서 그대로 판매할 경우 국내의 생산자를 보호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관세를 부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동일한 수준의 물건이라면 국산품보다 수입품 가격을 높임으로 해서 자국민의 경제활동을 보장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관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내가 세금을 내도 대부분 나한테 돌아온다는 마음이 별로 없다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급적 세금을 안 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로 많은 국민들이 세금을 안 내느냐 하면, 아니요. 대부분이 성실하게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세무서에 가서 신고를 하고 왔어요.

그렇다면 나한테 돌아올 부분도 별로 없는데도 왜 사람들이 내고 있습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요?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더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내지 않으면 나한테 불이익이 생겨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내도 나한테 좋은 일은 없지만, 안 낼 경우 내가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낸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만이 아니라 마땅한 소득이 없는 사람들도 신고를 해야 합니다. 제가 세무서에 가서 신고를 한 이유도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내야 할 세금이 있든 없든 간에 세무신고는 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좀 불안해집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어쩌면 많은 분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로마서 5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여기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에덴에서의 사건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요. 뱀을 가장한 마귀가 하와를 유혹합니다.

창세기 3장 4절~6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 열매를 따먹고,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었더니 그도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이라는 죄를 엄청난 죄를 저지름으로 해서 받은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16절~19절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女にはこう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苦しみとうめきを大いに増す。あなたは苦しんで子を産む。また、あなたは夫を恋い慕うが、彼はあなたを支配することになる。」
また、人に言われた。「あなたが妻の声に聞き従い、食べてはならないとわたしが命じておいた木から食べたので、大地は、あなたのゆえにのろわれる。あなたは一生の間、苦しんでそこから食を得ることになる。
大地は、あなたに対して茨とあざみを生えさせ、あなたは野の草を食べる。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그들이 받은 형벌은 임신과 출산, 즉 자손에 대한 고통과 생계에 대한 저주,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이라고 하는 멸망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은 본래 대단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도 첫째나 둘째도 아닌 막내였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하시고는 왕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도 함께 하시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버립니다. 그때 우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전쟁터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그리고 다윗 왕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신의 충신의 아내를 빼앗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다윗의 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이를 숨기기 위해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일부러 전사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일을 아무도 몰랐을까요?

“한 가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가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一つの嘘を本当らしくするためには、いつも七つだけ嘘を必要とする。

이는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말입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양진(楊震)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한 사지(四知)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지, 즉 네 가지 아는 것이라는 뜻인데, 이는 “천지 지지 여지 아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이 있어요.

天知る地知る人知る我知る

누군가가 나한테 뇌물을 주면서,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해봐야 정말 아무도 모르느냐고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알고 나도 아는데 아무도 모르는 게 무슨 소리냐 하는 것이지요.

다윗과 밧세바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겠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다윗은 목욕을 하는 여인을 보고 누군지 알아보도록 사람을 보내요. 그리고 그를 또 데려오라고 전령을 보냅니다. 그럼 왕이 부르는데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오겠습니까. 그것만도 여러 사람이 벌써 움직여야 했겠지요.

그리고 와서는 목욕을 하고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합니다. 그럼 왕이 불러서 온 사람인데, 밧세바가 무슨 혼자 와서 샤워하고 침실로 갔겠습니까. 여기서도 여러 여인들이 시중을 들었겠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이제 구체적인 이름이 나와요. 사무엘하 11장 14절~15절에 보니 그의 부하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라고 합니다.

이게 보통 무거운 죄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 12장 7절 후반부~11절
“7.……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に油を注いで、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また、わたしはサウルの手からあなたを救い出した。
さらに、あなたの主君の家を与え、あなたの主君の妻たちをあなたの懐に渡し、イスラエルとユダの家も与えた。それでも少ないというのなら、あなたにもっと多くのものを増し加えたであろう。
どうして、あなたは主のことばを蔑み、わたし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ったのか。あなたはヒッタイト人ウリヤを剣で殺し、彼の妻を奪って自分の妻にした。あなたが彼をアンモン人の剣で殺したのだ。
今や剣は、とこしえまでもあなたの家から離れない。あなたがわたしを蔑み、ヒッタイト人ウリヤの妻を奪い取り、自分の妻にしたからだ。』
主はこう言われ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の家の中から、あなたの上にわざわいを引き起こす。あなたの妻たちをあなたの目の前で奪い取り、あなたの隣人に与える。彼は、白昼公然と、あなたの妻たちと寝るようになる。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셔서, 그의 목숨을 노리던 사울로부터 구원해주셨고, 부와 권세와 명예와 뿐만 아니라 여인까지도 모두 다 그에게 더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었더라면 이것도 저것도 다 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씻을 수 없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선 그 자녀들 사이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서 형제들 사이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났더니 이제 그 자녀 중에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은 광야로 내몰리게 되고는, 결국 그가 가장 아끼던 아들 압살롬은 그의 부하 요압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40년을 다스리게 되었다면 70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되지요. 젊었을 때에는 그의 공적이 화려하게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 밧세바 사건을 사이에 두고 그 이후에는 그의 공적이 사라집니다. 성경은 그가 죽는 수십 년 동안의 통치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본인만이 아니라 본인의 주변이나 자손들에게 불행이 닥친다는 것은 에덴이나 구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요? 그렇습니다. 감사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무화과 이파리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히 거짓말을 해가면서 나 자신을 가리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이 무너지고 뿐만 아니라 내 가정이 무너지고 결국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 후반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恐れるべき人を恐れ、敬うべき人を敬いなさい。”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사실 모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일본 뉴스를 보면 지난 동경올림픽을 둘러싸고 뇌물을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옵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에요? 머리가 나쁜 사람들입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들, 이 시대에 엘리트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저렇게 경찰한테 잡혀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5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오로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물질이나 봉사로 섬기는 것을 단순히 벌 받을까봐 한다면,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가 없는 것이지요.

감사가 없다면 이는 아, 그런가보다, 하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주어서는 안 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에덴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을 것 같습니까.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의 모습을 보시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기쁨과 감사로 충만할 것 같은데, 그들은 여기에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기어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뱀의 탈을 쓴 마귀가 기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다윗 왕, 이제 그는 이스라엘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영웅이자 절대군주였습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더 주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여기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기어옵니다. 세상적인 육적인 유혹들이 슬금슬금 기어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된다면, 여기에는 두려움이 오게 됩니다. 피곤함이 오게 되지요. 나아가 온갖 유혹들이 나를 삼키기 위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에 있어서 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틈을 보이는 순간 마귀는 하와나 다윗에게 접근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堅く信仰に立って、この悪魔に対抗しなさい。ご存じのように、世界中で、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が同じ苦難を通ってきているのです。

우리는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들을 대적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대적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움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대적해서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가 있었더라면 다윗은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요, 무엇보다 아담과 하와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기쁨과 감사로 채움으로 말미암아 마귀 사탄을 대적하여 물리쳐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생명과 구원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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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6절~7절
“6.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6節∼7節
“6.同じ理由で、あなたがたは税金も納めるのです。彼らは神の公僕であり、その務めに専念しているのです。
7.すべての人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なさい。税金を納めるべき人には税金を納め、関税を納めるべき人には関税を納め、恐れるべき人を恐れ、敬うべき人を敬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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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2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세금” 天の御国の税金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죽음과 무엇은 피할 수가 없다. 그렇죠. 바로 세금입니다.

세금은 그 종류도 많고 복잡합니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 물론 이런 세금들은 수입이 적거나 하면 안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일본에 살면 안 낼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바로 소비세입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물건에는 이 세금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그 나라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면 내국인이건 외국인이건 일부 면세 상품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금을 내야지만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건 중에서 세금이 많이 붙은 것은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아무래도 담배를 꼽을 수 있겠지요. 일본의 경우 담배에 붙는 세금은 61%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도 지방교육세, 개별소비세, 부가가치세 등등 해서 역시 절반 이상이 세금이에요.

학생들한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서 한국은 교육세가 담배에 붙어 있고, 일본의 경우에는 이번에 방위비를 증액하는 데에 있어서 담배에 세금을 더 부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은 담배 팔아서 애들 교육을 하고, 일본은 담배 팔아서 나라를 지키려고 하느냐 하는 말이 나올 만도 하겠지요.

세금 체계도 참 대단히 복잡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보면, 세법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민법이건 형법이건 간에 보통 자기가 전공하고 있는 과목을 학생들한테 권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는 세법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세법을 전공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권하고 싶지 않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세법 같은 경우에는 매년 수도 없이 크고 작은 규정들이 많이 바뀌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연말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놀러 나가는데, 자기는 연말 때만 되면 집에 앉아서, 자기가 쓴 조세법 책 내용 중에서, 새해에 바뀌는 그 조세규정들을 하나하나 고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법철학 같은 책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대요. 그런 책 내용은 웬만해서 안 바뀌거든요.

이렇게 맨날 세금이 복잡하고 매년마다 바뀌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간단합니다. 어떻게든 국민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돈을 더 거두어드리기 위한 것이지요.


어디 세금만 그런가요. 무슨 연금이다 보험이다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国民は、法律の定めるところにより、納税の義務を負ふ。

국민은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라는 법률에 규정된 대로 세금을 국민들로부터 거두어들입니다. 그러면 그 법률은 어디서 만들어지냐 하면 국회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럼 국회에서 누가 만들어요. 그렇죠. 국회의원들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이노우에 히사시라고 하는 사람은, “정치라고 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으로부터 모은 세금이나 국유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나’라는 것” 「政治とは、端的に言えば、『国民から集めた税金や国有財産をどう使うか』ということ」 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 세금을 어떻게 거두어들이고 어떻게 쓰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법률을 만들고, 그 법률에 따라 세금이 거두어들여지고, 그 세금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금은 중요한 것이지요.

자, 무슨 학교 수업처럼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처럼 그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세금이라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납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자기 나라에 살고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29장 7절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引いて行かせた、その町の平安を求め、その町のために主に祈れ。その町の平安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平安を得ることになるのだから。』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느부갓네살 왕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바벨론이 좋았겠습니까. 아니죠. 하루 빨리 자신들의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 하면, 사로잡혀 간 그 땅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땅이 평안해야 너희들도 평안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포함해서 지금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무슨 북한이 아닌 담에야 강제로 끌려온 경우는 없을 것 아니에요. 다 자기가 원해서 오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이 땅을 위해도 기도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관심을 갖고 애정을 가지라는 말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내가 살고 있는 외국이 내 조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그 나라에 세금을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사실 그러냐 하는 것이지요. 이건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해서 세금을 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돈 없는 사람만이 세금을 안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들이 가장 겁내는 것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세무조사지요.


어떤 회사가 그 정부 말을 잘 안 들어요. 그러면 <어쭈 너 자꾸 말 안 들으면 세무조사한다?>라고 합니다. 세무조사가 뭐예요? 지금까지 세금을 제대로 내고 있는지 안 내고 있는지 조사하겠다는 것 아니에요?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간에, 수익이 있으면 세금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정부가 만약에 어떤 회사한테 <세금조사 하겠다>라고 했을 때, <어디 해보려면 해보시오.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온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회사가 얼마나 되겠냐는 것이지요.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들이야 세금을 안 내려고 해도 안 낼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서 각 사원에게 지급되는 인건비가 얼마인지 다 나오는 마당에 이를 숨길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회사원들의 수입을 유리지갑 ガラス張り 이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어요. 이미 회사에서 월급을 줄 때, 이것 뜯기고 저것 뜯기고 해서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내 손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세금을 줄이려고 해봐야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고 해요. 저는 잘 모릅니다만, 딱 까놓고 말해서 탈세를 하는 방법이 많다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세금을 낼 때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세금을 내시나요?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안 내면 제일 좋지만 그럴 수야 없더라도 가급적 적게 내고 싶어하지 않겠어요?

그래요. 뭐, 세금이 있으니까 도로가 망가지더라도 도로포장도 다시 해주고 신호등이 고장 나면 고쳐주고 그런 거잖아요.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내 물건을 도둑 맞는다고 하면 경찰이 범인을 잡아줍니다. 그럼 경찰이 한 번 출동할 때마다 돈을 받아요? 아니요. 다 세금으로 처리가 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국가나 지방 공무원, 그리고 군인들도 세금이 있으니까 운영되는 것이잖아요. 세금이 없으면 누가 나라를 지키고, 공무원들이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 중에서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 것 누가 몰라?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해져서 세금을 내지 못할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금을 웬만하면 잘 안 내려고 할까 하는 것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까워서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아까워합니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이유 중 내가 하나는, 세금을 낸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직접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평소부터 정치에 불만이 많은데, 내가 뼈빠지게 돈 벌어서 저런 사람들 월급을 주기 위해 세금을 낸다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뭐 정치인이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사실 연금 같은 경우를 보면 한국이나 일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초>가 몇 번이 붙어도 될 정도로 초고령사회가 된 상황에서, 연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돈을 낼 사람들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예, 지금 연금을 내는 사람들이 많이 내고, 정작 자기는 다 늙어서 적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돈을 은행에 넣어두면 늘어나요? 줄어들어요. 이는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많든 적든 이자가 붙잖아요. 그런데 나라에 내면 내가 지금 낸 돈 보다 나중에 받을 돈이 줄어든다고 한다면 이걸 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몇 년 전에 일본 정부에서 2000만엔이라는 말이 나와서 한 번 떠들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연금만 가지고는 못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금에다가 2000만엔 정도는 더 가지고 있어야지만 노후에 웬만큼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복지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을 보면 세금이 좀 세긴 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납부만 한다면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라에서 다 책임져주는 곳도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은 그렇지 못해요.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세금을 내는데, 정작 세금을 낸다 하더라도 나중에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금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금만 내지 않으면 내 재산은 줄어들지 않고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나요?

사실 우리는 나라에서 정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가 줄어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일단 무엇이 줄어갑니다. 맨날 저희 집 우체통에 보면 오는 것이 무슨 집을 사라고 하는 전단지가 와요. 하지만 집을 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얼마 전 어느 신문에 보니까 아무리 신축을 샀다 하더라도 되팔려고 하면 곧바로 절반 정도가 된다는 거예요.

자동차는 어떻습니까. 제가 지금 타고 있는 차는 새 차일 때는 가격도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차인데 가격이 나와요? 작년에 보험을 들러 가보았는데, 사고가 났을 경우 제 차는 보험금액이 안 나온다는 거예요. 사고가 나서 망가지면 그냥 수리하지 말고 폐차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부품을 간다고 새 차가 되나요. 아니에요. 중고는 중고입니다. 아무리 부품을 많이 갈아봤자 새 차가 되지는 않아요.

그리고 또 무엇을 새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운동을 한다거나 몸에 좋은 것을 먹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화 속도를 다소 늦추거나, 약해진 곳이 어느 정도 회복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집에 오래 머물든 아니면 무슨 별장처럼 1년에 한 두 달만 살든 간에 10년 된 집은 10년 된 집이고 20년 된 집은 20년 된 집입니다.

자동차도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주행거리가 있긴 하지만 아무리 주행거리가 짧다 하더라도 10년된 차가 새 차 취급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라에 내는 세금은 줄이거나 여차하면 안 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시간이라고 하는 세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24시간 365일 엔진이 걸려 있는 자동차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차를 이용하든 안 하든 간에 엔진이 걸려 있기 때문에 기름값은 나가고, 그리고 수명은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내버려둘 바에야 활용을 하는 것이 낫잖아요.

그럼 어떻게 활용을 하겠습니까. 누구는 그 차를 이용해서 놀러 다닐 수도 있을 것이요, 누구는 그 차를 써서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요, 또 누구는 그 차를 이용해서 이웃을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안 한다고 안 먹지는 않잖아요. 그리고 집에서 일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해서 심장을 비롯한 내 육신이 안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먹어야 하고 또한 내 몸은 노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삶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46절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天の御国は畑に隠された宝のようなものです。その宝を見つけた人は、それをそのまま隠しておきます。そして喜びのあまり、行って、持っている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の畑を買います。
天の御国はまた、良い真珠を探している商人のようなものです。
高価な真珠を一つ見つけた商人は、行って、持っていた物すべてを売り払い、それを買います。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값진 진주를 발견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왜 이 사람들은 값진 보화와 진주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은 보화와 진주를 찾았습니다.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발견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또 하나, 그 사람들이 값진 보화와 진주를 발견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그 값진 보화나 진주를 찾았다면 그 사람이 찾지 못했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때까지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못 찾아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곳 그 자리에 값진 보화나 진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그런 곳에 값진 보화나 진주가 있어?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바로 그 곳에 값진 보화와 진주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요, 그들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보화가 숨겨져 있던 밭을 사고 그리고 그 진주를 샀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요. 최소한 저는 욕심이 없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욕심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욕심이 없다면 교회도 안 다녔을 것이요, 주님을 믿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축복 받아서 뭐해요? 그냥 그럭저럭 먹고 살다가 그럭저럭 가면 되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을 믿었겠으며, 뿐만 아니라 목사까지 되었겠습니까.

남들은 그 밭에 놀라운 보화가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값진 진주가 숨겨져 있는지 몰라요. 얼마나 값진 것이냐 하면,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모든 소유를 다 합친다 하더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보화입니다. 놀라운 축복이 숨겨져 있는 밭이요 진주입니다.

그 밭과 진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곳이 바로 예수님한테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은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그렇습니다. 천국은 바로 침노해야 갈 수 있는 곳, 온 힘을 기울여서 달려가야지만 얻을 수 있는 곳이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발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서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세금은 많이 내고 적게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 세금을 도대체 누가 내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세금, 아니 무거운 형벌은 그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이미 예수님이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 살을 후벼 파는 채찍에 맞으시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시고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죄 때문에 우리 스스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먼지만도 못한 작은 순종만으로 구원 받아 천국백성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今、私は人々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神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人々を喜ばせよ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今なお人々を喜ばせようとしているの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ではありません。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육신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 여러분께서는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4시간 365일. 똑 같은 속도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똑 같은 속도로 시간이라고 하는 이름의 세금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삶 동안,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우리 주님께 순종이라고 하는 이름의 하나님 나라의 세금을 드리는 삶을 통해서, 크고 놀라운 보화, 축복과 구원이라고 하는 값진 진주를 차지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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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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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9회 본이 되는 삶
202325 설교 - 로마서 강해 121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5절
“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1節∼5節
“1.人はみな、上に立つ権威に従うべきです。神によらない権威はなく、存在している権威はすべて、神によって立てられているからです。
2.したがって、権威に反抗する者は、神の定めに逆らうのです。逆らう者は自分の身にさばきを招きます。
3.支配者を恐ろしいと思うのは、良い行いをするときではなく、悪を行うときです。権威を恐ろしいと思いたくなければ、善を行いなさい。そうすれば、権威から称賛されます。
4.彼はあなたに益を与えるための、神のしもべなのです。しかし、もしあなたが悪を行うなら、恐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彼は無意味に剣を帯びてはいないからです。彼は神のしもべであって、悪を行う人には怒りをもって報います。
5.ですから、怒りが恐ろしいからだけでなく、良心のためにも従うべ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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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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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1번째 시간으로서 “본이 되는 삶” 模範となる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대하여 제목을 붙이자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에 보니까 <그리스도인과 세상 권세>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저는 여기에 제목을 붙인다고 한다면 <권세에 복종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각 사람 위에 있는 권세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고, 그렇기 때문에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잖아요.

이를 쉽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윗사람은 다 하나님이 세운 것이니까, 윗사람이 하는 말은 다 복종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 말씀을 하면 꼭 정치 이야기와 결부시키려는 분들이 계십니다. 좋습니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세상적인 권력. 대표적으로 그 나라의 정권이라고 해두죠. 모든 정권, 왕이나 대통령이나 총리는 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까, 그 명령에는 모두 다 복종해야 한다.

맞아요? 틀려요?

사실 문자상으로 본다면 맞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위에 있는 권세는 모두 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는데, 그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서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니엘 3장 14절~18절
“14.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14.ネブカドネツァルは彼らに対して言った。「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よ。おまえたちは私の神々に仕えず、また私が建てた金の像を拝みもしないというが、本当か。
15.今、もしおまえたちが、角笛、二管の笛、竪琴、三角琴、ハープ、風笛、および、もろもろの楽器の音を聞いたとき、ひれ伏して、私が造った像を拝むなら、それでよい。しかし、もし拝まないなら、おまえたちは、即刻、火の燃える炉の中に投げ込まれる。どの神が、私の手からおまえたちを救い出せるだろうか。」
16.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王に答えた。「ネブカドネツァル王よ、こ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はお答え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
17.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が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あなたの手からでも救い出します。
18.しかし、たとえ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は仕えず、あなたが建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느부갓네살은 누구입니까. 그는 바벨론의 왕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비길 데가 없는 강대국이었지요.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나중에 바벨론식으로 붙여진 이름이고, 다니엘 1장 7절에 의하면 본래 이름은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였습니다.

ハナンヤ、ミシャエル、 アザルヤ

그들도 포로로 끌려온 신분이었지만, 용모도 뛰어나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서 왕을 보필하도록 했었던 것이지요.

자, 그들에게 있어서 느부갓네살 왕은 누가 뭐래도 위에 있는 권세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권세자인 왕이 그들에게 명합니다. 이제 시간이 되면 내가 만들어놓은 우상에게 절을 하라. 명령을 어기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른다면 왕명에 복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왕도 하나님이 세운 권세자인데 왕의 명을 거스른다면 이는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면서요.


하지만 그들은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왕이 우리를 죽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요, 만약에 구원해주시지 않고 그대로 죽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왕의 명령에는 따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못한 일입니까. 왕이 결국 그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 뜻을 거슬렀다고 해서 그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셨나요?

그들은 맹렬히 타는 불구덩이 속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다니엘 3장 27절
“27.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太守、長官、総督、王の顧問たちが集まり、三人を見たが、火は彼らのからだに及んでおらず、髪の毛も焦げず、上着も以前と変わらず、火の臭いも彼らに移っていなかった。

만약에 그들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 불타는 풀무 속에서 흔적도 없이 타서 없어지도록 내버려두셨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시고는 마침내 구원해주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3장 19절~20절
“19.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しかし領主ヘロデは、兄弟の妻ヘロディアのことと、自分が行った悪事のすべてをヨハネに非難されたので、
すべての悪事にもう一つ悪事を加え、ヨハネを牢に閉じ込めた。

분봉왕은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이 또한 사람들 위에 있는 권세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이 한 일을 두고 책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옥에 갇히게 되고 말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책망을 한다는 것은 비난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당연히 복종하는 자세는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 되는 것인가요?

이렇게 본다면 권세에 있어서 복종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겠습니다만, 이에 대한 답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3장 3절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支配者を恐ろしいと思うのは、良い行いをするときではなく、悪を行うときです。権威を恐ろしいと思いたくなければ、善を行いなさい。そうすれば、権威から称賛されます。

오늘 본문에 나오는 권세의 특징은 바로 “선을 행했을 때 칭찬을 받는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했을 때 제대로 평가를 해주는 권세라고 한다면, 반대로 악을 행했을 때 벌을 내리는 권세라고 할 수 있겠지요.
꼭 한 나라가 아니더라도 어떤 조직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상벌규정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상벌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고 철저하게 지켜져야지만 제대로 조직이 돌아가는 것이지, 똑 같은 경우인데 어떤 때는 상을 줬다가, 또 어떤 때는 벌을 줬다가 한다면 그 나라든 조직이든 간에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을 행했을 때 칭찬을 주는 권세라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공정하고 공의로운 권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공정하고 공의로운 권세만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선한 권세가 있나 하면 악한 권세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대표적인 기준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한 가지 기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왕은 초대 왕 사울, 2대 다윗, 그리고 3대 솔로몬으로 이어오게 됩니다만,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 죄가 어떤 것이었냐 하면 바로 우상을 섬기는 죄였습니다.


열왕기상 11장을 살펴보면 본래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온갖 지역에서 여자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 하면 그 여자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방지역에서 자기가 믿던 우상들을 같이 가져오게 됩니다.

도대체 그럼 그런 여자들이 몇 명이나 되었냐 하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상 11장 3절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彼には、七百人の王妃としての妻と、三百人の側女がいた。その妻たちが彼の心を転じた。

후궁과 첩을 합하면 여자들이 자그마치 천 명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왕기상 11장 4절~5절
“4.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5.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ソロモンが年をとったとき、その妻たちが彼の心をほかの神々の方へ向けたので、彼の心は父ダビデの心と違って、彼の神、主と一つにはなっていなかった。
ソロモンは、シドン人の女神アシュタロテと、アンモン人の、あの忌むべき神ミルコムに従った。

그 천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다 자기 우상들을 왕궁에서 섬겨요. 이렇게 되니까 왕이 사는 왕궁이 온통 우상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솔로몬도 여자들이 하자는 대로 우상들을 따랐다는 거예요.

9절~10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그러지 말라고 하셨지만 도무지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셨습니까.

열왕기상 11장 11절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そのため、主はソロモンに言われた。「あなたがこのようにふるまい、わたしが命じたわたしの契約と掟を守らなかったので、わたしは王国をあなたから引き裂いて、あなたの家来に与える。

끝까지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솔로몬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탄하시고는 그 나라를 빼앗아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서 각자 왕조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 왕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좋은 왕과 악한 왕으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상숭배였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왕이 다스릴 때에는 평화가 임하게 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왕이 다스리게 되면 그 나라가 온통 어지럽게 되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이 내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이켜 본다면 기독교, 구체적으로는 개신교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천주교를 영어로 하면 가톨릭이 됩니다만, 개신교는 무엇입니까. 이는 프로테스탄트라고 하지요.

이 어원이 된 프로테스트라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순종인가요? 아니요. 항의나 저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 다시 말해서 구교와 신교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구교가 전통적인 가르침이고, 신교는 새로 만들어진 교리다……이렇게 알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무엇인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어요. 무엇으로부터 멀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성경에 사람의 주장이 개입됩니다. 성경에도 없는 교황이나 성모나 우상숭배 사상이 판을 칩니다.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해진다고 하면서 이제 장사까지 시작해요.

이렇게 되니까 여기에 항의를 하게 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종교개혁이라고 한다면 그저 종교적인 것만을 생각하기 십상인데, 당시 유럽에는 이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죠. 도무지 가망성이 없는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나라 독일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전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혁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당시 사회에 군림하고 있었던 천주교라는 권세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성경에서 멀어진 믿음, 우상을 숭배하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는 비단 종교나 정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회사를 보세요. 사장이나 회장이 아닌 담에야 회사에는 자기 상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상사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라고 해서 모두 복종을 하기만 해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꼭 그 사람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우리는 모두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판단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럴 때 아무리 내가 밑에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위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그렇고 외국에 보면 역시 마찬가지에요.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 힘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님이라고 한다면 정말 웬만한 나라 지도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큰 힘이 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 위치에 있다면 이 세상을 위해서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참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질 못합니다. 기껏해야 가끔 무슨 생색만 내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 세상에는 수많은 법률들이 많이 있습니다. 1년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법안들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법률이나 법령들은 어디에서 벗어나면 안 되냐 하면 바로 헌법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어떤 법률이 헌법에서 벗어났다고 판결이 되면 그 법은 효력을 잃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있어서의 헌법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 하는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우상숭배에 대한 것은 분명 하나님 사랑에서 벗어나는 일이지요.

열왕기나 역대를 보면 우상을 숭배하던 왕이나 지도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까. 이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하나님 사랑에서 벗어나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면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 뒤따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을 핍박하는 지도자나 직원을 괴롭히는 경영자는 아무리 큰 나라나 회사 지도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권세는 복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쉬운 예로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의 목사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생각, 자기의 정치견해를 전하는 것이 역할입니까. 아니에요. 성경에 이와 같은 말씀이 적혀 있다고 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앞에 서서 성경 이야기는 안 하고 맨날 정치 얘기나 세상 얘기나 하고 있으면 역시 그 말에도 복종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에요. 이건 반드시 개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맨날 비판이나 하고 데모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割り当てられている人たちを支配するのではなく、むしろ群れの模範となりなさい。

성경은 우리에게 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비단 위정자나 지도자한테 국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대할 때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시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발을 씻어 주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17절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4.主であり、師であるこの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であれば、あなたがたもまた、互いに足を洗い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15.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した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するようにと、あなたがたに模範を示したのです。
16.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しもべは主人にまさらず、遣わされた者は遣わした者にまさりません。
17.これらのことが分かっているなら、そして、それを行うなら、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우리가 우리 위에 있는 권세자들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웃더러 내 발을 씻으라고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 이웃의 발을 씻어주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따라간다고 말해요.

참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정치가 판을 칩니다. 권력다툼이 있습니다. 이게 세상 정치판이지 어떻게 주님이 머리 되신 교회의 참 모습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세상의 본이 되어서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요 전부가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이웃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임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섬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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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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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8회 선에 속한 사람(4) - 사랑의 목적
2023년 1월 2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0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21절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4節∼21節
“14.あなたがたを迫害する者たちを祝福しなさい。祝福すべきであって、呪ってはいけません。
15.喜んでいる者たちとともに喜び、泣いている者たちとともに泣きなさい。
16.互いに一つ心になり、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身分の低い人たちと交わりなさい。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てはいけません。
17.だれに対しても悪に悪を返さず、すべての人が良いと思うことを行うように心がけなさい。
18.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19.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20.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21.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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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0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4) - 사랑의 목적” 善側の人(4)-愛の目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좀 길다고 하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오늘 본문을 보시고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21절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4節∼21節

“14.あなたがたを迫害する者たちを祝福しなさい。祝福すべきであって、呪ってはいけません。
15.喜んでいる者たちとともに喜び、泣いている者たちとともに泣きなさい。
16.互いに一つ心になり、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身分の低い人たちと交わりなさい。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てはいけません。
17.だれに対しても悪に悪を返さず、すべての人が良いと思うことを行うように心がけなさい。
18.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19.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20.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21.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오늘 이 본문, 마음이 온유하신 여러분께서는 은혜롭게 말씀 그대로 아멘 하고 받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구절 하나하나에 대해서 완벽하게 반박할 자신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세상적으로 볼 때 이 구절들은 정말 무엇 하나 말이 안 된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정말 그런지 한 번 살펴볼까요?

로마서 12장 14절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4.あなたがたを迫害する者たちを祝福しなさい。祝福すべきであって、呪ってはいけません。

자,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 아닙니까.

아니, 내가 축복할 사람이 따로 있지, 내 성공을 바라고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축복한다면 모를까, 내가 안 되기를 바라고, 내가 어떻게든 불행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에 대해서 저주를 하면 저주를 했지, 축복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15절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5.喜んでいる者たちとともに喜び、泣いている者たちとともに泣きなさい。

이는 그나마 좀 나을 것 같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즐거워 하는 자>나 <우는 자>는 앞서 14절에 나왔던 <나를 박해하는 자>가 포함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나를 박해하는 자가 즐거워해요. 그것이 내게 있어서도 즐거운 일일까요? 나를 박해하는 자가 슬퍼해요.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슬픈 일일까요? 오히려 반대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실패를 바라고 내 불행을 바라는 사람이 즐거워 한다는 것은 오히려 내게 있어서는 안 좋은 일일 경우가 많겠지요.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하고 있는데 경쟁상대가 있어요. 정말 내게 있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저 회사만 없다면 내 사업이 더 잘될 텐데 저 회사 때문에 항상 매출이 떨어져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 회사가 망하는 것이 내게 있어서 잘 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회사가 막 잘 돼요. 그 회사가 부동산이 늘어나고 건물도 새로 짓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나한테 있어서 좋은 일이에요? 아니에요. 안 좋은 일이지요. 왜냐하면 그걸로 인해서 내 회사의 매출이 줄어들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닌 말로 그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면서 뭐, 고사를 지낸다기 보다는, 금식기도를 해도 모자랄 판에, 같이 즐거워해요?


반대로 본다면 내 경쟁사가 잘 안 돼요. 그러면 나는 즐거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16절도 보시겠습니다.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6.互いに一つ心になり、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身分の低い人たちと交わりなさい。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てはいけません。


자, 우선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회사는 나와 어떤 관계입니까.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눌러야 할 대상, 내가 끌어 내려야 하는 대상 아닙니까. 그런 사람과 어떻게 마음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낮은 데 처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천한 사람들의 벗이 되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내가 성공을 하려고 해요. 내가 사업을 크게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어울려야 하겠습니까. 큰 회사나 고위 공직자와 어울려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돈이 없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과 어울려야 하겠습니까.

쉽게 말하자면 내가 사업을 하고 있는데, 큰 회사 사장님과 가난한 실업자 중에 누구와 골프를 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세상 이치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큰 회사 사장님이나 고위 공직자와 어울려야지 내 사업에 있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가난한 사람과 어울려서 무슨 이득을 볼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한테 만만해 보이면 되겠어요? 그렇잖아도 가만히 있으면 무시 당하는 세상인데, 내가 좀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좀 보여줘야지 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어디 한 번 계속해 볼까요?

17절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7.だれに対しても悪に悪を返さず、すべての人が良いと思うことを行うように心がけなさい。

자,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선하게만 살아갑니까. 선한 일을 해줄 사람이 따로 있지. 어떻게 모든 사람 그러니까 내 불행을 바라고 나를 핍박하는 사람한테까지 선을 도모할 수가 있겠습니까.

18절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8.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이 말씀은 어때요? 아이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나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들과 화목하기도 바쁜데, 무슨 모든 사람들이에요.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 불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갚아줘야지, 그들과 화목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9절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9.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내가 저 사람한테 당한 일이 한 둘이 아닌데, 아무리 기다려도 저 사람은 잘 되고 나는 고생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기회가 될 때 내가 보복을 하든지 해야지, 어느 세월에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줄 줄 알고 그것을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


20절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0.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내 경쟁상대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것은 내게 있어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내가 당한 것을 갚아줘야 한다 하면서 여세를 몰아 완전히 억눌러야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살아나서 나를 또 괴롭히면 어떡하겠습니까.

21절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21.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말이야 쉽지요. 어떻게 악에 대해서 선으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당한 만큼 나도 갚아 주여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제 말이 이상해요? 그러니까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야. 어떻게 현실이 다 성경대로 된다고 할 수 있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이 말씀들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 보면 누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흔한 가요 같은 것을 들어보면 뭐 맨날 무슨 사랑타령이잖아요. 만나고 헤어지고 기쁘고 슬프고……다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이 들리는데, 그런데 그런 흔한 노래가 마음이 와 닿을 때가 있대요. 그게 언제냐 하면 자기가 실연을 하면 다르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버린 후”

그 때까지는 그저 다 그 노래가 그 노래처럼 들렸는데, 막상 자기가 실연을 당한 입장이 되어 보니까, 정말 모든 노래들이 다 자기의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번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 살펴본 본문, 14절부터 21절까지 정말 세상적으로 본다면 말이 안 된다고 제가 반박을 했습니다만, 어떤 사람한테 이 글을 보여준다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꼭 주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글을 보는 순간 와! 정말 맞는 말이다. 이 사실을 알려주어서 정말 고맙다! 라고 까지 할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그 사람의 직업은 무엇일까요.

예, 그것은 바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오늘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이제 한국을 보면 내년 2024년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고, 일본도 본래 중의원 임기는 2025년까지인데, 그 이전에 해산하기도 하기 때문에 누구는 조만간 선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냥 우리가 읽으면 다른 성경말씀과 별반 차이가 없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만약에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이 본문을 본다면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번에는 우리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라는 입장이라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14절
“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4.あなたがたを迫害する者たちを祝福しなさい。祝福すべきであって、呪ってはいけません。

자, 우리가 당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출마하는 지역구에서 표를 많이 얻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지역구에 보면, 처음부터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만 가지고는 내가 당선하기 위해 충분하지가 않아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박해한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당선하기 위해서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한테 가서도 내 지지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가서 저주를 퍼부어요? 그러면 지지는 커넝 오히려 내 인기만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축복도 하고 다독거리기도 하면서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만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겠지요.


15절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5.喜んでいる者たちとともに喜び、泣いている者たちとともに泣きなさい。

그 지역구에서 이른바 관혼상제가 있다고 해보세요. <관>이라고 하면 쉽게 말하자면 성인식이고, <혼>은 결혼식, <상>은 장례식, <제>는 무슨 축제 같은 행사잖아요. 국회의원이 되려고 한다면, 요즘은 무슨 축의금이나 부조 같은 것은 선거법상 문제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지난 주가 저희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만, 그 날 저희 결혼식에 와 준 사람이나, 여러 모로 축하를 해준 사람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 명단이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평생 간직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분명 제가 초청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 안 온 사람도 있어요. 그럼 제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제아무리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간에 그리 좋은 기억으로는 안 남을 거잖아요.


그러니 자기 지역구에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간에 그 행사가 있다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안 좋아하는 사람이든 참석을 해야지요. 그렇잖아요. 어떻게든 표를 모아야 하는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표가 따로 있고 싫어하는 사람의 표가 따로 있겠습니까.

16절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6.互いに一つ心になり、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身分の低い人たちと交わりなさい。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てはいけません。

특히 한국에서 보면 선거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만 모여서 같이 잘 먹고 잘 살자? 아니죠. 온 국민이 마음을 하나로 해서 화합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이 무슨 뜻이었다고요? 예,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과 어울리라는 말씀 아니었습니까.

선거라는 것이 어떻습니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유권자 한 사람 당 한 표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10표이고 가난한 사람은 1표가 아니에요.


뿐만 아니라 20대 청년도 은퇴한 고령자도 모두 한 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만나기가 쉽겠습니까.

큰 회사 사장님들은 다들 바빠요. 만나려고 해도 사전에 약속도 잡아야 하고 복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드신 분들은 경노당 한 곳에 가면 수 십 명을 한 번에 만날 수도 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언제든 내가 찾아가면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럼 누구를 먼저 공략해야 하겠습니까. 효율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만나기 쉬운 사람들부터, 그리고 한 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부터 공략해야 하잖아요. 이는 선거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7절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7.だれに対しても悪に悪を返さず、すべての人が良いと思うことを行うように心がけなさい。

이는 당연하죠. 지금 선거운동 기간인데 나한테 잘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악으로 갚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런 일을 하게 된다면 그 때까지 나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자칫 잘못하면 떨어져 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사람 앞에서, 더 구체적으로 모든 유권자 앞에서 선을 도모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는 것이지요.

18절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8.自分に関することについては、できる限り、すべての人と平和を保ちなさい。

당선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사람과 화목하게 된 사람, 다시 말해서 가능한 한 많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당선하지 않겠습니까.

19절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9.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아무리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원수를 갚으면 나는 그 사람한테서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한테서도 내가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이 안 좋게 되었다 하더라도 내 탓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20절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0.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여기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말에 대한 해석은 신학자들 사이에도 분분합니다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게 해서 회개하거나 부끄러움을 깨닫게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나를 해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나는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일이 선거운동기간에 일어났다고 하면 나 자신에 대한 호감도는 얼마나 많이 올라가겠습니까.


21절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21.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와, 정말 이렇게 본다면 나를 억누르려고 하는 상대방 후보에 대해서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선거에서 멋지게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현실과 전혀 맞지 않아 보이던 이 성경말씀이,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의 입장에서 보니까, 그야말로 선거운동의 매뉴얼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 말씀대로만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 무슨 선거라 하더라도, 하물며 대통령선거라 하더라도 분명히 당선될 것이라 확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고, 그리고 정말 악을 악으로 갚을 수도 없고, 이 사람한테 가서 굽신거리고 저 사람한테 가서 또 굽신 거립니다. 누가 싫은 소리를 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낼 수도 없어요.

그럼 그 사람들이 남들보다 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보면 학력이나 경력으로나 보았을 때 어마어마합니다. 남들보다 많이 가졌고 남들보다 많이 배운 그럼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마음대로 화도 못 내고 많은 사람들과 화목하려고 애를 씁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해서 당선만 된다면, 어마어마한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라고 자존심이 없겠습니까. 화를 낼 줄 몰라서 못 냅니까. 하지만 거기서 내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게 된다면 그 때까지 노력해온 일을 그르치게 되어서 큰 것을 얻을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화가 나도 참고 자존심이 상해도 견디는 것이지요. 그래야 훨씬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세요. 그냥 아무런 일도 안 하고 편하게 먹고 자고 하는 그런 나라가 천국인가요?


요한계시록 5장 10절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もはや夜がない。神である主が彼らを照らされるので、ともしびの光も太陽の光もいらない。彼らは世々限りなく王として治める。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피를, 십자가 위에서 아낌없이 모두 다 흘려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그저 하늘나라 가서 편안하게 먹고 자게 하기 위해서 뿐이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장차 우리와 함께 주님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나라의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 지역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챙기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사람이 그 지역의 대표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나라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사람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空の鳥を見なさい。種蒔きもせず、刈り入れもせず、倉に納めることもしません。それでも、あなたがたの天の父は養っていてくださいます。あなたがたはその鳥よりも、ずっと価値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는 지금 현재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만 그렇다는 것인가요?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에스겔 18장 32절
“32.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わたしは、だれが死ぬのも喜ばない──神である主のことば──。だから立ち返って、生きよ。」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인이었기 때문인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다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위에 정말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가 아무리 착한 것처럼 생각된다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본다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인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죄 가운데에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일을 하시기 위해 누구를 쓰시고 싶어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를 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보면 대통령이나 총리 밑에서 장관이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바로 대통령이나 총리와 마음이 맞는 사람입니다.

자기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불러서 장관도 시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저 착한 사람이 되어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부르셔서 쓰시고자 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저 이 세상에서 국회의원이나 장관 정도 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도 훨씬 더 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더욱 더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목적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며, 마침내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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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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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회 선에 속한 사람(3) - 사랑의 대상
2023년 1월 22 설교 - 로마서 강해 11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13절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2節∼13節
“12.望みを抱いて喜び、苦難に耐え、ひたすら祈りなさい。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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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9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3) - 사랑의 대상” 善側の人(3)-愛の対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만, 12절과 13절 중에서 우선 두 13절부터 살펴보고 마지막에 12절을 살펴보도록 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13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3節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이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어쩌면 이 말씀은 지금까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여겨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선 이 구절의 형식부터 살펴봅니다.

이 13절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앞에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는 말씀과 뒤에는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라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우선 앞부분부터 볼까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


자, 여러분께 누가 이 말씀을 들고 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말하기를, 성경에 보면 우리가 쓸 것을 공급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또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느냐.

자, 이렇게 말을 했다면,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겠지요?

“내가 좀 요즘 많이 어렵다. 돈 한 100만엔 정도만 꾸어달라.”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번 성경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꾸어준다.
2번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니 안 꾸어준다.
3번 기타.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경 안에서 끝나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성경 따로 현실 따로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성경 속에 있기만 한 이야기이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이지 현실에는 죄가 사해지지 읺았다……라고 하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따로 현실 따로>라고 하는 2번은 좀 문제가 있겠지요.

그럼 이제 남은 것은 1번과 3번입니다.

돈이 많은 분들이야 100만엔, 한국 돈 1000만원 정도가 적을지는 모릅니다만, 우리 같은 서민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 돈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나한테 100만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그냥 빌려주기에는 아주 상당히 무리가 있어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주여 믿습니다>하고 빌려줘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왔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니, 교회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곳이 아니냐.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내가 정말 절실하게 얼마가 필요하니까 돈을 좀 빌려달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그 사람한테 돈을 빌려줘야 돼요? 아니에요?

자, 우선 13절 앞부분부터 다시 한번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

여기서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저 <사람>이라고 되어 있나요? 아닙니다. 여기서의 주어는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이는 교회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본다면 총무부나 관리부 같은 곳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그 회사 직원들이 쓸 물건들을 파악해서 공급하는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우선 책상이나 의자, 컴퓨터 등이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전화기, 필기도구, 서랍장, 그 외에도 다양한 문구류 같은 것들이 착착 공급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이뻐서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공짜가 있어요? 의자, 책상, 컴퓨터 뿐만이 아니라 볼펜 하나, 지우게 하나까지 다 돈이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급해 주는 이유는, 그 물품들을 써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뭘 달라고 하면, 볼펜 하나라도 마음대로 줄 수 있나요? 아무리 그 회사에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회사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반면에 회사에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이 회사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아무리 비싼 장비라 하더라도 기꺼이 구입을 해서 그 사람에게 공급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단어는 <교회>라고 하는 말과 하나가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무작정 도우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교회 구성원이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보면 정말 교회 물건을 안 아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성경이나 찬송가 같은 것들을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가지고 가요.

그러면서 왜 그걸 가져가냐고 하면, 집에서 보려고 한다는 거예요.

아니, 회사에서 준 컴퓨터를 집에 가져가서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생각해봐요. 그게 정상입니까.

교회에 있는 성경이나 여러 물품들도 사실 그게 다 돈이잖아요. 교인들 헌금으로 구입을 한 것인데, 그걸 왜 자기 가방에 넣느냐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필요하면 자기가 돈을 내서 사면 되잖아요. 요즘 같은 경우에는 인터넷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냥 가지고 가요.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 보면 제가 섬기던 성가대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요. 성가대에 보면 성가대 가운이 있잖아요. 그럼 동복이 있고 하복이 있어요.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성가대원들이 자원해서 그 가운을 가져다가 드라이를 맡기고 난 다음에 가져와요. 그러면 그걸 교회에서 보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 가운이 몇 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언제 사라지냐 하면 누군가가 드라이를 맡긴다고 가져간 다음에 안 가져온다는 거죠. 물론 그게 누가 가져갔는지 체크를 하면 되겠지만, 그게 잘 안 됐나 봐요.

그렇다고 사실 그걸 체크를 꼭 해야 되요? 성가대 가운이라고 하는 게 무슨 외출복으로 입고 다닐 수도 없는 옷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운영위원으로 있을 때 보니까 회의시간 때 당시 총무님이 하는 말씀이, 아니, 무슨 집에서 잠옷으로 입나, 그걸 왜 안 가지고 오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건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이 그런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성가대에서도 보면 연습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해오시거든요.

그런데 누구는 사람들이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반찬을 자기 집에 가져간다고 챙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거 별거 아닌 것 같지요? 예전에 보니까 다른 교회에서도 똑 같은 일들이 있더라고요. 그거 가지고 서로 다툼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고 그럽니다.

아니, 사람들이 다 먹고 난 다음에 남은 반찬이나 음식을 싸가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요. 가만히 놔두면 버리게 되는데, 그럴 바에야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 대접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그걸 자기가 먼저 챙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습니까.

이처럼 13절에서 말씀에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하는 데에 힘쓰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오해가 없도록 말씀을 드리면, 앞서 말씀 드린 마태복음 5장 42절 말씀도 살펴보고 넘어갈까요.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여기서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슨 큰 돈이나 재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웃에게 비싸고 큰 돈을 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마태복음 5장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고 고발까지 했어요.

그런데 뭘 빼앗으려고 해요? 예, 내가 입던 속옷이에요. 그렇다고 이건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새옷도 아닌, 그리고 겉옷도 아닌 그냥 내가 입던 중고 속옷, 그야말로 값어치가 별로 없는 것인데도 이걸 빼앗으려고 난리를 쳐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하면, 속옷만이 아니라 차라리 그냥 입고 있던 겉옷, 별로 값도 안 나가는 겉옷 헌 거까지 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외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の弟子だからということで、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一杯の冷たい水でも飲ませる人は、決して報いを失うことがありません。」

자, 무엇을 주라고 하세요? 예, 냉수 한 그릇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값어치가 없는 것을 주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 목이 말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큰 돈이 필요해요? 금은보석이 필요합니까. 아니에요. 물 한 그릇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은 무슨 큰 돈이나 재산을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것을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뒷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자, 여러분께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적지 않게 좀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게 어떤 거냐 하면, 예를 들어서 그런 경우입니다.

가끔 그런 메일을 받아요.

제가 이번에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이카호중앙교회에서 꼭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동경에 아는 분이 계셔서 일본에 처음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우리 교회에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경에서 얼마나 걸립니까,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같은 동경이나 그러면 가능성은 있겠지요. 여차하면 택시를 타고 오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경에서 여기 군마까지 택시를 타고 오실 수도 없잖아요.

거기다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보시면 교회 주소도 다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가 어디쯤 되는지 질문하시는 것을 보면, 인터넷 검색이나 일본 지리에 있어서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교회에 다녔던 자매가 얼마 전에 오랜만에 왔었잖아요? 그러면 약속하기는 어렵지 않지요. 무슨 무슨 역에 어디 출구에 몇 시까지 오면 데리러 가겠다고 하면 됩니다. 여기 군마에 4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그게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일본에 처음 오시는 분, 군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는 분이라면 일본 지리는 물론이고 언어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으신 분이실 텐데, 그런 분께, 동경역이나 우에노 역에서 죠에츠 신칸센을 타고 다카사키까지 오시고는, 거기서 죠에츠센으로 갈아타서 시부카와 역으로 몇 시 몇 분까지 오시라고 할 수 있겠냐는 거죠.

사실 저 자신도 가끔 동경에 가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일본에 처음 오시는 분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오셨다면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식사라도 하시고, 그리고 기왕에 온천으로 유명한 이카호까지 오셨다면 온천이라도 모셔다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정도로 해야 좀 손님을 모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로 그 정도로 손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오신다고 하니까 다카사키나 시부카와가 아닌, 정말 하네다 공항까지 가서 모셔와서는 온천이나 식사는 물론이고 호텔까지 잡아드리고는 매일같이 제가 운전해서 관광도 해드리고 그랬던 적이 있었지요.

언제 그랬냐 하면 제가 결혼하기 전에 제 아내 될 사람과 장모님 될 분이 오셨을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부족했었습니다만, 그래도 장모님이 오신다면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여기 왔다가 가신 다음에 만에 하나라도 장모님이, “에이, 그 홍 목사, 안 되겠어” 뭐 이러셨다가는 큰일 나는 거 잖아요.


하지만 다른 분들까지도 그 정도로 대접을 해드릴 시간이나 경제적 여건이 되냐 하는 것이지요. 큰 교회 같은 경우에는 손님을 모실 경우 비용이 나올 지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는 다 개인 비용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경제적인 것도 그렇고 시간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현실적으로는 좀 어려움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건 다 제가 부족해서입니다만, 그 정도로 대접을 해드렸다고 해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가 이 정도로 대접을 해드렸으면, 이 정도는 감사헌금이나 선교후원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다른 교회에서도 보면 적지 않게 있다고 해요. 누가 와서 이렇게 극진히 대접을 하고 비용도 들었는데 그 사람은 헌금을 얼마 밖에 안 해서 서운했다……아마도 교회 운영에 조금 관여해보신 적이 있다면 이런 일들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게 정말 손님을 대접하는 진짜 의미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렇게 목회를 하다 보면 단기선교를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가끔 받습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까지 한 3~4번은 받아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아무리 오시는 팀이 자기 비용으로 한다고 해도, 그럼 우리가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일정이나 준비도 그렇고, 신경 쓸 일이 한 둘이 아니지요. 그리고 사실 교회 앞에서 이벤트를 해 봤자, 다들 차를 타고 다니고 무슨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요.

그렇다고 시내에 나가서 한국처럼 노방전도를 한다고 해도, 실제 교회 부흥으로 이어질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부터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단기선교라고 하는 것이 선교지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이를 보내는 교회 쪽에서의 이벤트 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어떤 선교사님이 그러시더래요. 외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은 단기선교를 안 오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랍니다.

뭐, 그래도 큰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파송 나와 있을 경우는 다르겠지요. 그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월급이나 주거비, 수당, 애들 학비 같은 것이 꼬박꼬박 나오고 그런 곳이라면, 본 교회에서 단기선교를 보내겠다는데 그걸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서 본다면 자기 월급 주는 본사에서 자기가 있는 지사로 손님이 온다는데, 만사를 제쳐두고 최선을 다해서 신경을 써야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 사정으로 봐서, 이 단기선교 또한 좀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개인적으로 오신다는 분께는 “저희 이카호중앙교회 주일 예배는 오전 11시부터 있고, 모든 분들께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단기선교에 대한 문의에 대해서는, 저희 교회 사정을 말씀 드리고는 정중하게 좀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이런 일들이 혹시나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하는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성경에 있었습니다.

자, 성경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 질문합니다.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게 무슨 사이비 같은 질문이냐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레 짐작하지 마시고,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다시 질문합니다.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예, 이 질문에 대해서 “목사를 대접해도 복을 안 받습니다”라고 하신다면 듣는 목사 기분 나쁘겠지요.


자, 그럼 당장은 동의하시기가 좀 어렵다 하더라도, 일단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질문입니다. 왜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까?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자, 성경말씀에 보시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주님은 이 말씀에서 어떤 사람을 대접하라고 말씀 하십니까.

여기서 주님 말씀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돈이 많거나 힘이 있거나 하는 사람들한테 대접을 했을 때 그에 대한 보답을 받게 되면 나중에 하늘에서 상이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상대방이 너에게 보답을 못해줄 사람한테 대접을 하라, 그래야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국 같은 데에 보면 이른바 뇌물을 주거나 받았을 때에 <대가성이 있는지>가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이나 어떤 선물을 받았을 뿐이라면 죄가 안 되지만, 그걸로 인해서 어떤 특혜를 준 근거가 있게 되었을 때 죄가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니, 무슨 가족이나 친인척도 아닌데, 아무런 대가 없이 정치인이나 공직자들한테 큰 돈이나 비싼 물건을 줄 리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다만 그게 당장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다 자기가 받을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바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갚지 못할 사람을 대접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갚아주겠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보면 글쎄요. 큰 교회에 보면 무슨 직분을 받기 위해서 목사님한테 돈도 갖다 바치고 선물도 보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받은 직분이 주님 앞에서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뭐, 지금은 아직 그런 상황은 아니겠습니다만, 나중에 우리 교회가 커지고 중요한 직분을 임명할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좀 특별한 방법을 써서 사람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게 할 생각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목사한테 대접을 해 봤자 무슨 받을 대가가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까. 그런 힘이 목사한테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한테 대접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목사님이 무슨 주의 종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은 꼭 목사만이 아니라, 뭐예요?

예, 우리가 진정으로 대접해야 할 사람은 재력이나 권력이 있어서 나한테 인간적으로 보답을 해주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나에게는 아무런 인간적인 보답을 해줄 수 없는, 그런 이웃을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섬겼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크나큰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건 정말 간증입니다만, 2015년에 일본에 와서 우리 교회를 보니까 성도님이 딱 두 분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그 중에서 한 분이 안 오세요. 그러니 교회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어떻게든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정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정말 심각한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이제 안 되겠다 해서 정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님의 일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가능성이 안 보여요. 이대로 간 다면 머지 않아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제 비자가 종교자격이니까 목사로서의 일 말고는 할 수가 없거든요.

전도지도 만들어서 교회 주변에 돌려보았지만 무슨 사람이 있어야지요. 교회 주변을 돌아보아도 주택단지들이 좀 있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띄엄띄엄 집이 있을 뿐인데 별로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인데, 어떤 일본 분은 제가 찾아가니까 자기가 나이 들어서 이제 죽을 때가 다 됐기 때문에 왔냐고 그러더라고요.

잘못하면 이러다가 괜히 오해라도 생기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동영상으로 주일 예배 때에 전해드렸던 말씀을 다시 촬영하고 인터넷에 올리고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매주 메일을 보냈어요.

그렇다고 확고한 희망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한테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일을 꾸준히 보냈던 이유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먹고 살긴 해야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선교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정말 신기하지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이 후원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면, 감사한 것을 넘어서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떤 분은요, 그 주일에는 선교후원을 해주신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는 말씀을 했더니만, 그 날로 은행에 가셔서 비싼 수수료까지 내시면서까지 일본에 있는 은행으로 직접 보내주신 분도 계십니다. 그러니 감동이 안 되겠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좀 이상한 말이지만 진심으로 성경이 믿어집니다.

출애굽기에 보시면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어떻게 홍해가 갈라질 수 있느냐고 의심을 합니다.

근데 제가 살아온 것이 얼마 되지 않은 세월이지만,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과정만 보더라도, 홍해는 갈라지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루하루 홍해가 갈라질 정도의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제 상황이 그래요.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슨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광야에서의 삶처럼 하루라도 만나가 안 내리면 큰일날 것만 같은, 제게 있어서도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다 그와 같은 정말 만나와도 같은 후원의 손길 덕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저한테 무슨 대가를 바라시겠습니까.

여기는 일본이고 하기 때문에 후원을 해주신 분들께 그 흔한 기부금영수증 하나 못 해드려요.

거기다가 대부분이 다 한 번도 뵌 적도 없는 분들인데, 제가 그분들께 인간적으로 무엇을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인간적인 대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만나와 같은 후원을 해주시는 그런 분들이,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못 받는다면 누가 받겠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힘들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는 분명히 여러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100프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돈을 꾸어드려요? 아니면 세상적인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드려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기도로 도움을 드리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人にはできないことが、神にはできるのです。」

목사나 교회한테 세상적인 도움을 구하는 것은, 그것은 마치 변호사한테 가서 수술을 해달라거나, 의사한테 가서 재판을 도와 달라거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돈이나 세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만군의 주가 계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望みを抱いて喜び、苦難に耐え、ひたすら祈りなさい。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듣고 이루어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인내할 수 있고,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며, 우리 이웃, 정말 인간적으로는 갚지 못할 우리 이웃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에,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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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6회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2023년 1월 15 설교 - 로마서 강해 11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0절~11절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0節∼11節
“10.兄弟愛をもって互いに愛し合い、互いに相手をすぐれた者として尊敬し合いなさい。
11.勤勉で怠らず、霊に燃え、主に仕え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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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8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善側の人(2)-愛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지난 주에 배웠던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랑들이 말하는 <사랑>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 이상형이나 아니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겠지요. 이를 바꾸어 말하면 객관적으로 보아서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 그와 같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선한 사람을 위해서, 의인을 위해서,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7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선 양 100마리 중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있는데 나머지 한 마리가 어디 갔는지 안 보여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ある人に羊が百匹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

그러니까 사라진 양 한 마리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다면 길을 잃지 않은 양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에요. 퍼센트로 하면 어떻습니까. 99%는 길을 잃지 않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길을 잃지 않은 99%의 양들이 대단히 똑똑했다기 보다는 그저 평균 정도라고 할 수 있겠고, 오히려 나머지 1%의 양이 좀 부족했었다고 하겠지요.

99%는 멀쩡히 길을 잃지 않았는데, 나머지 1%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 1%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적으로 본다면 양 아흔아홉 마리와 양 한 마리, 어느 쪽이 귀하겠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길을 잃지 않은 평균적인 양들 아흔아홉 마리와 길을 잃은 좀 부족한 한 마리 양.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겠지요?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를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멀쩡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둔 채로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는, 그것도 모자라서 친구들을 불러 잔치까지 벌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은 본래 어깨에 메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무게는 새끼 양이라 하더라도 20킬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20킬로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만, 요즘은 겨울이라 난로에 넣을 등유를 사가지고 오는데, 그 통 하나에 들어가는 기름 무게가 20킬로거든요. 이게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어깨에 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양을 발견한 기쁨이 그 무게보다도 훨씬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야말로 어깨에 메고 춤이라도 출 정도로 너무나도 기뻤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목자는 정말 똑똑하고 영리한 양들, 사랑 받아 마땅한 양들을 뒤로한 채, 참으로 미련하고 말 잘 안 듣고 불순종한 양, 정말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발견하고는 너무나도 기뻐했다는 주님의 마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럭비라는 운동경기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스포츠라고 하겠습니다. 웬만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는 럭비부가 있을 정도로 아주 활발합니다.


일본에서는 코시엔이라고 해서 전국고교 야구대회가 유명합니다만, 럭비도 전국 고교 대회가 있는데, 매년 겨울에 오오사카에 있는 하나조노 럭비경기장에서 열려요. 그래서 고교야구는 코시엔, 그리고 고교럭비는 하나조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럭비는 미식축구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우선 공 모양이 미식축구와 비슷한 타원형을 한 계란 모양인데 럭비가 좀 더 큽니다. 그리고 공을 들고 뛰는 것도 똑같은데, 미식축구는 헬벳에다가 이런저런 보호장비가 많지만 럭비는 그런 것을 쓰지 않고 그냥 맨몸으로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고 하는, 상당히 좀 과격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경기를 뛰는 한 팀의 인원이 구기종목 중에서는 제일 많은 15명이에요. 그러니까 양쪽 팀을 다 합하면 서른 명이 동시에 경기를 하는 셈이지요. 축구가 골기퍼를 포함해서 11명이고, 미식축구도 11명인데, 한 팀에 15명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라고 하겠지요.

그만큼 인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 번에 호흡을 맞춰야 하는 인원이 많다는 뜻이니까, 팀워크라고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쿄토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새로 체육 선생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전 일본 국가대표 럭비선수였습니다.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서 체육선생님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나중에 그렇게 회고했습니다. 자기는 이제 학교에 처음 가서 럭비부를 맡게 되면, 럭비부 학생들은 국가대표 출신 선생님이 왔다고 좋아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꿈과 기대에 부풀어서 다음날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럭비부 집합 시간이 됐는데 학생들이 하나도 안 나타났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학교는 정말 문제아들만 모인 학교였다고 합니다. 학교 유리창은 여기저기가 깨지고, 그리고 럭비부 부실에 가보니까 여기저기에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대요.

수업중에도 학생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짓들이나 하고, 그리고 선생님들도 이미 포기를 해서 혼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괜히 건드렸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학교 꼴이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새롭게 부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열정이 넘쳤겠습니까. 그래서 선생님들한테도 좀 잘 해보자고 말을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한테 아무리 역설을 해 봤자 그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이미 다 해봤다는 거예요.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자기가 맡은 럭비부를 보면 그냥 애들이 와서 선배들이 후배를 괴롭히고, 연습이라고는 가끔 모여서 좀 시늉만 하다가 힘들면 그만 두고……그런 식이었으니 실력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다가 학생들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불량학생들의 소굴……완전히 그런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선생님도 포기를 했느냐 하면, 아뇨,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집 한집 찾아 다니면서 아이들을 연습에 나오게 하고, 그렇게 해서 정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럭비부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아이들이 전혀 안 따라준다는 거예요. 맨날 동네에서 문제나 일으키고 경찰서에 끌려가면 그걸 또 가서 데려오고……그런 나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좀 승부욕을 생기게 해줘야겠다 해서 다른 학교와 연습시합을 하기로 했대요. 그런데 웬만한 학교에서는 자기네 학교와 연습시합을 하기 싫어했다는 거예요. 아니, 실력도 없고 그런 학교와 연습시합을 해봤자 시간낭비라는 것이죠.

그래도 이 선생님이 가서 몇 번이나 머리를 숙여가며 어렵게 연습시합을 하기로 하고, 그리고 자기 사비까지 털어서 학생들 하나하나의 기차표를 다 사고 그 날 아침에 역에서 기다렸다고 해요. 그런데…? 예, 한 놈도 안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런 참 말로 할 수 없이 형편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은 정기체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부임한 이후로 첫 공식대회예요.

거기서 처음에 붙은 학교가 어디였냐 하면 당시 럭비 명문 하나조노 고등학교였다고 합니다. 경기가 시작했습니다. 고교 럭비는 전반 30분, 그리고 후반 30분입니다.

경기가 이제 끝났습니다. 럭비 명문 하자조노 고등학교와 문제아들의 오합지졸인 이 고등학교의 승부는 어떻게 됐을까요. 점수 결과는 112대 0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점수가 야구나 축구처럼 1점씩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는 4점, 2점, 3점……이런 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만, 보통 럭비 점수라고 한다면 대충 20~30점대 30~40점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112대 0이라고 한다면 이는 참패도 보통 참패가 아니겠지요.

뭐, 굳이 비교한다면 프로팀과 초등학생 정도의 실력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선생님이셨다고 한다면, 시합이 끝나고 돌아온 학생들한테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 때까지 그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선생님 말은 죽어라고 안 듣고, 지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문제만 일으키고 하다가 결국 정말 수치스러운 점수로 지고 돌아왔는데, 이노무 자식들 꼴 좋다, 뭐 그러면서 하고 싶은 말이 정말 트럭 한 대 분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선생님, 자기 학생들이 낯뜨거울 정도로 비참한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지켜 보면서 정말 화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났냐고 하면, 이 선생님 하는 말이, 자기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을 들고는 참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열 받아서 험한 말이라도 퍼부어줘도 시원치 않았을 텐데, 이 선생님은, 자기가 그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운 점수, 112대 0으로 지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이 선생님은 뭐라고 했냐 하면, 다른 말은 안 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다친 데 없냐. 많이 속상했지?”

자신들은 선생님한테 심한 꾸중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이 말을 듣게 되자, 그 순간 아이들이 울면서 무너졌다고 합니다.

“선생님, 나 정말 이기고 싶어요. 정말 열 받아요. 어떤 일이라도 참을 테니 내년에 저 학교를 이기게 해주세요”라면서 모두가 다 울었다고 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말합니다. “좋아. 이기게 해줄게. 나만 따라와.”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맹훈련이 시작됩니다. 이제 연습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뛰라면 뛰고, 던지라면 던지고, 부딪치라면 부딪칩니다.

그 결과 1년 뒤 또다시 이 럭비명문 하나조노 고등학교와 붙습니다. 1년 전에 112대 0으로 진 그 학교와 붙었는데, 1뎐 뒤인 그 시합, 경기 막판에 역전을 해서 18대 12로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는 하나조노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럭비 명문학교로서 자리를 잡게 되고, 그리고 이 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유명 럭비 선수들이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에요. 이 문제아들이 모였던 학교가 지금은 다른 학교와 합병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학교 이름은 교토에 있는 후시미 공업고등학교이고, 이 선생님 이름은 야마구치 요시하루 선생님입니다. 아직도 살아 계세요.

이게 얼마나 유명하냐 하면 1984년에는 스쿨 워즈라고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 드라마가 당시 엄청 히트를 했었고, 그리고 그 때 제가 중고등학생이었는데, 제 또래 중에서 럭비를 시작했다고 하면 거의 100프로 이 드라마에서 영향을 받고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오늘은 좀 길게 이 럭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아이들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도 말을 듣지도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반항했던 학생들입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처럼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이 선생님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을 다른 데에서 찾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을 꾸짖기는 쉬웠겠지요. 너 이 놈들아, 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런 게 아니냐 하는 말, 얼마나 하기 쉬운 말입니까.

그러나 이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땠느냐 하면 그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던 것이지요. 저렇게 비참하고 부끄러운 시합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 정작 내가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하나도 없구나. 다 나 때문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남 탓을 하게 되면 발전이 없어요. 그러나 자기 탓을 하게 되면 발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본어학원에서 가르칠 때도 보면 그랬습니다. 어떤 선생님을 보면 맨날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대요. 학생들이 자기 말을 듣지를 않는대요.

어디 그 뿐인가요. 학원 시간표에 자기 자리 글씨가 너무 작대요. 그래서 학생이 잘 안 온대요. 그리고 자기 사진이 어떻고 학원 시스템이 어떻고…… 자, 그런 선생님한테 발전이 있을까요?

주변 선생님들은 다 알고 있어요. 뭘 알고 있었느냐 하면, 자기 학생들 중에서도 그 선생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 학생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소문을 다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선생님이 수업을 너무 못한다는 거예요. 맨날 자기 혼자 떠들고, 그걸 못 알아들으면 성질을 낸다는 거예요. 아니, 학원이 무슨 졸업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 돈 내고 왜 그런 수업을 듣겠습니까.

그래서 학생들이 그 선생님 수업을 안 듣는 건 그 자기 수업에 문제가 있어서인데, 그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무조건 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요. 그러면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뭐라고 하셨냐 하면, 무조건 학생이 옳다는 거예요.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다. 자기가 자기 돈 내고 수업을 듣는데 당연히 좋은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만약에 자기 수업에 학생이 줄었다고 한다면, 학생 탓을 하는 것도 아니요, 학원이나 교재 탓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면서 반성하고 그리고 새롭게 수업을 연구해야 한다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수업이 안 좋아질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그 학교 이야기로 잠시 돌아간다면, 이 선생님이 부임한 그 다음 해에 어떤 소문이 돌았대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불량배가 있는데 그 불량배 녀석이 자기네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소문입니다.

불량배라고 해 봤자 다음 해에 고등학교에 들어온다면 중학생일거잖아요. 그런데도 아주 유명했다고 하니 뭐 대단했겠지요. 그 때 사진을 제가 봤는데, 정말 이게 무슨 중학생이야 할 정도로 좀 살벌하게 생겼습니다.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면 좀 옮기고 싶을 정도의 인상이에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입학식날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것도 혼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기 꼬봉들을 몇 명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이 야마구치라는 선생님이 그 불량배한테 어떻게 했냐 하면, 다짜고짜 가서 <너 럭비 하지 않을래?>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너 싸움 좋아하지? 럭비도 싸움이나 마찬가지야. 그냥 싸움은 나쁜 짓이지만, 럭비에서는 공만 가지면 뭘 해도 된단 말이야.>

이 말에 넘어가서 럭비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시작하고 보니 선생님 말과는 완전 다르더래요. 아니, 그렇죠. 아무리 과격한 럭비라고는 하지만, 다 룰이 있고 규칙이 있는데 공만 들었다고 뭐든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시시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해 자기 선배들이 하나조노 고등학교에 18대 12로 이긴 다음에 기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는, 야…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럭비를 계속 해서 고등학교 때 럭비 명문인 호주로 유학을 갔다 오기도 하고, 그리고 체육대를 졸업하고는 세상에, 그 불량배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 분도 인터넷에서 사진을 봤어요. 이제 그 불량배였던 선생님도 나이를 먹고 정년퇴임을 했지만, 여전히 럭비감독을 계속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사람 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봐도 글쎄요. 길 갈다가도 길을 묻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인상은 안 바뀌더라도 인생은 놀랍게 바뀌지 않았습니까. 동네에서 유명한 불량배인 상태로 자랐더라면 그 인생이야 뻔했겠지요. 하지만 야마구치라는 선생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불량배가 대학까지 나와서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남의 탓을 하지 않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으려고 했던 이 선생님 한 사람한테서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어쩌면 성경과도 같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요한복음 12장 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だれか、わたし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守らない者がいても、わたしはその人をさばきません。わたしが来たのは世をさばくためではなく、世を救うためだからです。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나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회개를 시키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너희들은 죄인이니까 너희들이 각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들의 죄값을 치러야 한다……그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이, 너희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누가 십자가를 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셨지만, 우리 탓을 하시거나 우리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주님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누가 남의 탓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의 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부모만 아니었더라면, 내 형제만 아니었더라면, 내 배우자만 아니었더라면, 내 친구만 아니었더라면……이렇게 남의 탓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로 나 스스로 홀로 남고 내 주면 사람들은 다 떠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제 누가 떠나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영화배우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함께 영화를 찍는 배우들도 다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이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 저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이렇게 불평불만을 해보십시오. 그건 누구에 대한 불평불만입니까. 그렇죠. 영화감독에 대한 불평분만 아니겠습니까.

영화감독이 자기 작품에 맞는 사람들을 불러서 캐스팅해놨는데 이 사람도 싫다 저 사람도 싫다고 한다면 그건 감독이나 연출을 맡은 책임자를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한 두 번이면 모를까, 맨날 남의 탓만 하는 배우를,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 하더라도 그냥 지켜만 보겠습니까? 됐어. 싫으면 빠져. 다른 사람 쓸 거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항상 말씀 드리지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왜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우리 주변에 어렵게 모셔다 놓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 그런 주님은 어떤 주님이세요? 그렇습니다. 완벽한 주님,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총감독을 맡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어떻게 주님과 이웃을 동일시할 수 있냐고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데,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 없는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천분의 일, 아니, 천 만분의 일이라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려고 한다면, 정말 우리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억지로 싫은데 좋은 척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보면 가끔 그런 사람들 계세요. 싫은데 억지로 좋은 척 해가면서, 그래도 할말 못할 말 다 하는 사람이 계신데, 그건 올바른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싫은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냐 하면, 억지로 좋은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 내가 저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데, 그러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주신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너는 네가 미워하는 이웃, 네가 싫어하는 그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인사도 안 하던 사이였지만 인사라도 한 마디 하는 것, 그것도 하기 어려우면 나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라도 한 번 해보십시오. 이는 분명 우리 삶에 있어서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 인용한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76회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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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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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5회 선에 속한 사람(1) - 사랑의 의미
2023년 1월 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9절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9節
“9.愛には偽り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悪を憎み、善から離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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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7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1) - 사랑의 의미” 善側の人(1)-愛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12장 9절에서 시작해서 12장 마지막인 21절까지 크게 보면 하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보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한 번에 다루기 보다는 몇 회에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손자병법이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손무라는 사람이 쓴 병법, 말하자면 전쟁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 자체는 기원전 500년 경에 기록되었다고는 합니다만, 21세기인 지금에 있어서도 단순히 무슨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처세술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이처럼 최고의 병법서라고 할 수 있는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는 언제 결정이 난다고 되어 있을까요.

이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는 언제 결정이 나냐고 되어 있냐 하면, 그것은 뚜껑을 열어본 다음이 아닌,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 있다는 것이에요.

그도 그렇겠지요. 자기 나라에 어느 정도 힘이 있고, 상대방에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면, 전쟁을 하기 전에 이미 승부는 결정 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는 손자가 살아 있던 그 옛날이나 21세기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믿음에 있어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요.


축복을 받기 위해서, 병이 낫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뭐, 이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더 쉽게 말하자면 장차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지요. 좀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축복도 받았어요, 병도 나았어요. 부자도 되었어요. 그런데 천국에는 가지 못했어요. 이렇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쟁과 구원, 사실 좀 무서운 말이기 합니다만,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어떻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는 됐다가 또 언제는 안 됐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결정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여부는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 있을 심판에서 판결이 내려집니다.


성경에는 장차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私たちはみな、善であれ悪であれ、それぞれ肉体においてした行い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ために、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の前に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우선 이 두 구절은 어떻습니까. 누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까. 죄를 지은 사람만 심판대 앞에 서게 되나요? 아니요. 우리가 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을 조금 아는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서는 모두 바울이 쓴 것인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냐 할지도 모릅니다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여기에도 보시면 모든 사람은 한번 죽는다는 것이 정해져 있고, 그리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 또한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부분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이처럼 성경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반복적으로 기록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큰 자나 작은 자나 예외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 부자였건 가난했건, 지위가 높건 낮건 상관이 없어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길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 언제 결정이 나는 것일까요. 뚜껑을 열어봐야 하나요?

아니요. 이미 심판대에 서기 전, 이 땅에 살고 있을 때 벌써 구원을 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은 결정이 난다고 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재판은 사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절차도 복잡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는 어떤 증거나 증인이 제출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원고와 피고가 어떤 주장을 하는지, 사실관계나 법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에 심한 경우에는 몇 년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변호사가 누구냐,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서 판결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세상 재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세상 재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만을 말한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어쩌면 누구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면하기 위해서 사실을 말하지 않거나, 또는 결정적인 증거를 감추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 만은 없겠지요.


하지만 하늘나라의 재판은 이렇게 오래 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그 보좌 앞에 있는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증인이나 증거가 없더라도 모든 행위, 이는 눈에 보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까지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전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없는, 100프로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시간을 끌 필요가 무엇입니까. 이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재판일 것이며 그 재판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을 받게 될 사람은 언제 정해진다고요? 그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정해진다고요? 아니요. 그 심판대 앞에 서기 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을 때 이미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몇 번 있어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이제 어떤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래서 너는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고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자, 그 때 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 잘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가 씻겨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때 모든 죄가 씻겨져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뭐,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 은혜가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이 말처럼 아무리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심판대 앞에 가서 “아, 나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죄가 해결되었습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보십시오.

만일 이 말이 정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열심히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이 말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한 말, 구원 여부는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다고 말씀 드린 제 말이 잘못된 것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이 말에 의하면 심판대 앞에 가기까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른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만약에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최소한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로마서 12장 9절 이후의 내용은 필요가 없게 되고 맙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피만 의지했다고 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그 때까지 자기 멋대로 하지 못하고 성경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이 미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전쟁의 승패가 전쟁 전에 이미 결정 난다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 또한 그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예요?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 그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구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9절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愛には偽り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悪を憎み、善から離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이 말씀을 단순화 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에게는 악에 속한 사람과 선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 사람은 어디에 속한 사람? 그렇습니다. 선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선에 속한 사람이냐 하면 바로 <사랑>을 가진 사람이 선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선에 속한 것이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선에 속하지 않은 사람, 즉 악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랑>이 있는 사람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정말 선한 사람만이 사랑이 있고 악한 사람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자, 이 말씀을 보시면 악한 자라 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기 자식한테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을 위한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아무리 악에 속한 자라도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한테도 역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말 아닌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을 위할 줄 안다고 한다면, 그 악한 사람한테도 사랑이 있다는 뜻이 된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한테 잘해준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2절~33절
“32.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自分を愛してくれる者たち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自分を愛してくれる者たちを愛しています。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たちに良いことを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악인이나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누가 그 상을 받느냐 하면 그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그와 같은 크나큰 상을 받은 것은 우리가 의인이었기 때문인 아닙니다. 우리가 상을 받을 만한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그와 같은 상상도 못하는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적으로 보면 사랑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세상에도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이 질적으로 다른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정말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전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예수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보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도 너희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한테까지도 사랑을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성경을 보아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지, 이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 혼동을 하게 된다면, 그저 다른 교양서적들이나 세상적인 사랑 이야기와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랑, 정말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한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이 바로 <선에 속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선에 속한 사람이냐, 아니면 악에 속한 사람이냐,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선에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악에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사랑은 내 사랑을 받아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람이 바로 선에 속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쉽습니까. 만약에 이게 쉽다면 저도 그냥 12장 9절부터 21절까지 한 번 쭈욱 읽고 끝내버릴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몇 번에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하는 이유는,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야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제 말씀을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해주시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선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구원 받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천국시민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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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4회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2023년 1월 1 설교 - 로마서 강해 11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4절~8절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4節~8節
“4. 一つのからだには多くの器官があり、しかも、すべての器官が同じ働きをしてはいないように、
5. 大勢いる私たちも、キリストにあって一つのからだであり、一人ひとりは互いに器官なのです。
6. 私たちは、与えられた恵みにしたがって、異なる賜物を持っているので、それが預言であれば、その信仰に応じて預言し、
7. 奉仕であれば奉仕し、教える人であれば教え、
8. 勧めをする人であれば勧め、分け与える人は惜しまずに分け与え、指導する人は熱心に指導し、慈善を行う人は喜んでそれを行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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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6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私たちにくださる賜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만 그 기능은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과 섬김과 가르침과 위로와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이렇게 일곱 개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預言、奉仕、教えること、勧めること、分け与えること、指導すること、慈善を行うこと

우선 예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만, 무슨 기도를 하는 가운데 주님이나 천사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해주는 것이 예언의 은사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착각을 누가 하느냐. 믿음이 적은 분들이 하느냐 하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꽤나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응답을 받았다, 계시를 받았다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어설프게 읽고는 구약 시대 때의 선지자 흉내를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극히 한정된 선지자만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만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시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구세주의 탄생에 있어서 예언하기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으로 성취가 되지요. 그런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기록합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혹 교회에 보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좀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무슨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3절~14절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あなたがたに受け入れる思いがあるなら、この人こそ来たるべきエリヤなのです。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이는 성경, 구체적으로는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구약에서 예언된 사람은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그 이후로는 제아무리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바울과 같은 대표적인 사도라 하더라도 예언된 바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 사도들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을 찾으면 찾게 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예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꿈속에서 보인 예수님입니까. 금식하는 데에 들려온 음성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목사의 말이라 하더라도 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약에 보시면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5절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それから六日目に、イエスはペテロと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
すると、弟子たちの目の前でその御姿が変わった。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そこでペテロ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がここにいること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よろしければ、私がここに幕屋を三つ造ります。あなたのために一つ、モーセのために一つ、エリヤのために一つ。」
彼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見よ、光り輝く雲が彼らをおおった。すると見よ、雲の中から「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彼の言うことを聞け」という声がした。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어떤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자들이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모습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 장소가 무슨 산이었는지,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예, 성경 어디에도 그 장소가 무슨 산이었는지, 아니면 그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 기록이 없겠어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 내용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소가 어디다, 무슨 말들이 오갔다고 하는 말들을 하면서, 마치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자기만 아는 것처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라고 한다면 그에게 상징되는 의미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모세는 곧 율법이었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그는 구약에서 선지자로 대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세례 요한을 예언하는 구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見よ。わたしは、主の大いなる恐るべき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
彼は、父の心を子に向けさせ、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それは、わたしが来て、この地を聖絶の物として打ち滅ぼす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수님 외에 누구였지요? 예,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선지자로 상징되는 인물입니다. 음?

율법과 선지자가 뭐라고 그랬죠?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중심에 누가 계세요. 그렇죠.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율법과 선지자 즉 성경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그런 의문을 가져야지요. 그건 홍목사 당신의 해석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져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1절~22절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しかし今や、律法とは関わりなく、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によって証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信じるすべての人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差別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들 즉 성경에 의해 증거를 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일부 몇몇 선지자들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의가 미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길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예언이라고 한다는 것은 무슨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깨닫는 것이요,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9절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私たちが以前にも言ったように、今もう一度、私は言います。もしだれかが、あなたがたが受けた福音に反する福音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주시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에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언 외에도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과 그리고 다스리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오해를 하면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중에서 어떤 은사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교회에 보면 이른바 은사 찾기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은사는 하나가 아닙니다.
둘째, 은사는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은사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경제학자 말에 의하면 지금 전세계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현재 경제를 제대로 분석한 경제학 이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경제학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이에요. 이를 쉽게 말하자면 예를 들어서 경제학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분류를 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럼 여러분께서는 생산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소비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어디 생산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세상에 어디 소비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생산하는 사람이 소비도 하고, 또한 소비도 하는 사람이 생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나누어서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설명하려고 하니까 이게 실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기만 하는 사람?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 물론 교회도 규모가 어느 정도 되면 각 부서가 있지요. 회사도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부서에 따라서 섬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위로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섬기기도 하다가 가르침을 받기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구제를 하다가도 위로를 받거나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나는 섬기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섬기기만 할 거야, 나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가르치기만 할 거야. 더 나아가서 나는 다스리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다스리는 일 아니면 안 할 거야……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조직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달라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 그래도 기도를 하면 다 주신다고 했는데 은사도 구하면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경에 보시면 은사를 구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은사를 구하라고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성경은 우리에게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기록을 합니다. 여러분, 예언이 뭐라고요? 예, 이는 기도하면서 무슨 음성을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다……가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 보면 유독 무슨 방언의 은사를 달라 또는 신유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방언의 은사를 구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기를 바라지만, 그 중에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だれかが異言で語るのであれば、二人か、多くても三人で順番に行い、一人が解き明かしをしなさい。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하고 그 때마다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되어 있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 14장 23절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 교회에서 보면,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도 없고 자기도 해석하지 못하면서도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유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만, 자기 아내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갔었는데 수술을 하라고 하더래요.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수술을 하려고 했더니만 교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더라는 거예요.

그 소문이 뭔지 아십니까. 아니, 목사님 정도 되면 기도로 병을 고쳐야지 왜 병원에서 수술을 받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슨 신유의 은사가 없다는 둥 기도가 부족하다는 둥, 나아가서 믿음이 적다는 둥 그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힘들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병원에 가면 안 된다고 한다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아니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악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좋으면 환자를 보고도 기도를 열심히 해서 고치면 되지 왜 째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합니까. 그렇잖아요?

하지만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믿음이 좋은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을 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까. 그런 그 사람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마땅한 치료법이나 약 같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때는 정말 기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손을 들었어요. 치료할 수가 없대요. 약도 없대요. 그러면 어떡합니까. 오로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병원에 가면 치료법도 있어요. 약을 먹으면 낫는 병이에요.


그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아요? 아니, 병원에 가는 것이 무슨 우상숭배를 하는 일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사님들의 손길을 통해서도 주님이 역사해주셔서 치료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을 미련하게 해석을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하물며 목사님한테까지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정말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구한다면서 무슨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그러면서 은사를 구합니까. 성경에 그렇게 해서 은사를 구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아가 무슨 다스리는 은사를 구한다면서, 이제 자기가 무슨 선거에 출마를 하려고 하는데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이사야 6장 8절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합니다.

「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자, 생각해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왕이나 선지자들 중에서 자기가 왕이나 선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응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모세나 엘리야가 기도 응답 받아서 선지자가 됐대요? 아니면 사울이나 다윗이 자기가 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원 가서 기도했다고 합니까.

대표적인 선지자인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한테 부름을 받아서 순종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7장에 의하면 그는 목자였고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였습니다.

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모두가 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신 것이에요.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무슨 성수주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다른 하나도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9절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맨날 아침이나 밤이나 평일이나 주말이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한다고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런 시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무슨 시험 준비를 한다거나 하면 몇 개월에서 몇 년 동안 공부만 해야 할 때도 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공부가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평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도 중요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6일 동안 우리의 모든 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감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2023년 첫 주일, 하루를 내디뎠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깨달으면서 때로는 섬기기도 하고 때로는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위로하거나 구제하거나 다스리거나 긍휼을 베풀어 가면서 주님의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해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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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3회 바라보아야 할 주님
2023년 1월 1 송구영신 예배 설교 - 로마서 강해 11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
“3. 내게 주신 恩惠로 말미암아 너희 各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以上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分量대로 智慧롭게 생각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3節
“3.私は、自分に与えられた恵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一人ひとりに言います。思うべき限度を超えて思い上がっ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神が各自に分け与えてくださった信仰の量りに応じて、慎み深く考え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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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2023년 송구영신예배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5번째로 “바라보아야 할 주님” 見つめるべき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되돌아보면 참 감회가 새롭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참 그렇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삶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뭐, 저만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때로는 정말 힘겨워서 답이 보이지 않다가도 어떻게든 견뎌내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두가 다 주님의 은혜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2023년 새해를 맞이해서 첫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
“3. 내게 주신 恩惠로 말미암아 너희 各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以上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分量대로 智慧롭게 생각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3節
3. 私は、自分に与えられた恵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一人ひとりに言います。思うべき限度を超えて思い上がっ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神が各自に分け与えてくださった信仰の量りに応じて、慎み深く考えなさい。

이 말씀도 현대인의 성경판으로 한 번 보실까요?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2장 3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러분 각 사람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하고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우선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에 보시면, 어떤 책은 저자가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만, 또 어떤 책은 저자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명확한 경우만 보더라도 신약성경의 절반 가까이를 바울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오늘 무슨 말을 하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작은 생각에 갇혀 있으라는 말씀인가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복습하는 의미로 11장에 있던 말씀을 다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이 말씀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생각, 작은 생각에 갇혀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량에 맞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한 번 오늘은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청년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회사원으로 시시한 회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키우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큰 꿈을 가지고 그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어요.

이게 잘못인가요? 아니요. 잘못은커녕 대단히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청년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 회사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야 이 회사를 키울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부장님한테 말을 합니다. 부장님, 제가 이번에 있을 임원회의에 참석하겠습니다. 그러면 부장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 그래, 잘 생각했어. 참석하게……그러겠습니까


물론 회사에서 그 사람을 뽑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회사에서 월급을 주면서 일을 시키려고 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성장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직 신입사원이잖아요. 아무리 열정이 넘친다고 해도, 그리고 잠재적인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그건 일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지, 어떻게 하루 이틀만에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장님은 말합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임원회의라면 적어도 이사 이상, 상무, 전무, 그리고 대표이사가 참석하는 자리인데, 부장 과장은 고사하고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사원이 어떻게 참석을 한다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이번 임원회의에서 쓸 자료나 복사해와.

그럼 이 말을 들은 신입사원은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이깟 복사나 하려고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는 거야? 나는 정말 큰 꿈이 있고 능력도 있는데, 이 회사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 아무래도 내가 회사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아……


만약에 이런 고민을 한다면 그것이 맞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장래가 유망합니다. 능력도 있어요. 하지만 그 진가를 발휘하려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전문지식도 더 배워야 합니다. 자기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알고 있는 것보다 알아야 하는 일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자세가 바람직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를 뽑아준 직장을 믿고,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 한다면 분명 놀라운 성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뭐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조직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 능력이 부족하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이 세상에서 아무리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41장 4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だれが、最初から代々の人々に呼びかけてこれらをなし、これらを行ったのか。主であるわたしだ。わたしは初めであり、また終わりとともにある。わたしがそれだ。

이 세상 모든 일을 시작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행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마침내 이루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신용카드 회사를 보면 처음에는 이용 가능한 금액이 상당히 적습니다. 아니, 돈을 쓰겠다고 하는데도 처음에는 그 한도를 아주 조금밖에 안 줍니다. 하지만 카드를 쓰고 그 돈을 성실하게 갚잖아요? 그러면 이제 조금씩 그 한도액을 늘려 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봅니다. 뭐, 여러 견해를 가지신 분들이 계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정치인들을 보면 정말 자신의 분량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을 보면 대부분이 다 비슷합니다. 후보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교회나 성당을 비롯한 종교시설을 찾습니다. 자신의 종교와는 다른 종교시설도 찾아 갑니다.

예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들으신 적이 있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절대로 범하지 말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다시 한번, 아니, 이후에도 수십 번이라도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절대로 우상숭배만은 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무슨 선거든지 간에 많은 곳을 찾아가야지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우상들한테 예를 표하고 때로는 그 우상들한테 절까지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겉으로는 절을 하지만, 마음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없지 않냐고 할지 모릅니다.

이런 말이 다 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잘 알지 못해서입니다. 구약 다니엘서에 보면, 왕이 오로지 자기가 세운 금으로 만든 우상한테만 절을 하라고 명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 그러면 죽인다고까지 해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겉으로는 우상들한테 절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우상한테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 3장 17절~18절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が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あなたの手からでも救い出します。
しかし、たとえ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は仕えず、あなたが建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만약에 겉으로는 우상에게 절을 할지라도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까.

이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가 이처럼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도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특히 한국의 수많은 정치인들을 보세요.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여러 종교시설에 가서는 그 우상한테 절을 하고, 누구는 거기서 지어주는 이름까지 받아오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큰 교회를 가요, 아니면 작은 교회를 가요. 예, 큰 교회를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설마 큰 교회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게 아니지요. 그럼 큰 교회만 찾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에 누가 있다? 예, 사람들, 특별히 유권자가 많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게 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부족한 저도 아는데, 주님이 그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당선되었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요. 이는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리 이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겨야, 그래야 우리가 복음을 전할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이웃을 섬긴다는 것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일은 분명히 다른 일입니다.

유권자들의 한 표를 구걸하기 위해서 우상한테 절을 한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유권자들 뿐입니까. 그 자리에 주님도 계시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 대통령들 보면, 물론 그 권좌에 앉아 있을 때는 좋지만, 거기서 내려와서 보면 대부분이 기구한 삶을 살다가 갑니다.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자기 주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평탄치 않은 여생을 살다 가는 모습을 보면, 그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강연을 했을 때의 일인데, 거기서 어떤 일본 사람이 저에게 하는 말이, 왜 한국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잡혀가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분한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치인이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잡혀가지 않는 일본이 저는 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드리니까 웃더라고요.


뭐, 말은 그렇게 했습니다만, 그런 말을 외국 사람한테 들으니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다 이게 무엇 때문이요? 예,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 식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시편 57편 2절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私は いと高き方 神を呼び求めます。 私のために すべてを成し遂げてくださる神を。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人は心に自分の道を思い巡らす。しかし、主が人の歩みを確かにされる。

우리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이루는 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今、私は人々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神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人々を喜ばせよ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今なお人々を喜ばせようとしているの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은 하나님께만 좋게 하고 우리 이웃 사람들한테는 좋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생각을 앞세울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생각을 우선시할 것이냐 하는 말씀이에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 하나님 방법, 예수님 방법을 우선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2023년도 우리를 지켜보실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면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으시는 새해 2023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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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2회 첫 번째 성탄
2022년 1225 설교 - 로마서 강해 11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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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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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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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성탄절 예배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4번째 “첫 번째 성탄” 初めての聖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2장 2절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도 지난 주처럼 마지막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무엇이 선한 일인지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완전하다고 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앞에서는 두 가지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는 길이요, 또 하나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입니다.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る。

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く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어떻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지를 금방금방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잖아요. 사실 그것이 정답인데, 그대로만 하면 축복을 받는데, 그런데 그 정답이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에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정답을 쉽게 찾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해주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1번.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끝까지 지킨다.
2번.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고 뭐고 우선 살기 위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사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 땅을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이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는 대단히 곤혹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못 믿어서 결국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시켜서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멜이지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미처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생각으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에게 줄 축복을 가로채서 자신이 받아내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야곱이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까.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형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간발의 차이로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을 세우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못 미더웠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축복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집에서 나와 도망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그야말로 험난한 인생을 보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의 삶도 좀 살기 편할 텐데 이를 잘못 짚는 바람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냐 하면, 오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 척박한 복음의 땅 일본에도 가는 여기저기서 캐롤이 흘러 나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도, 목욕탕에 가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도 크리스마스를 노래하고, 시내 곳곳에는 이 시골 군마현에도 크고 작은 불빛 장식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에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흔히들 말하는 것이 일본 전체 인구의 1프로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기독교인 1프로라고 하는 숫자에는 가톨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닌 완전히 다른 종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다 똑 같은 그리스도교로 보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 숫자에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같은 곳도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숫자만을 본다고 한다면 훨씬 더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클로스다 크리스마스 케익이다 하면서 장사를 하고 그러는 것을 보면 참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교회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시간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안 계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널리 알리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본받아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왜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세상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교회에 갇혀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 보더라도 인권이 유린되고 억압받고 있을 때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에서, 인권운동에 앞장 섰던 분이 킹 목사님 아니셨습니까.

당시의 그와 같은 활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하고도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킹 목사님은 1968년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활동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마침내 오바마 대통령도 탄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과거에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시기에도 기독교인들이 그 아픔들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도 많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너도나도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다가, 이제 세상 좋아지니까 너도나도 말을 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옛날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인권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면, 요즘 보면 동영상 광고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아니면 자기가 좀 잘하면 감투라도 쓰기 위해서 그런 과격한 말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성경 좀 읽었다고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人はみな、上に立つ権威に従うべきです。神によらない権威はなく、存在している権威はすべて、神によって立てられ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을 인용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면서 복종해야 한다고 하다가, 이제 자기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마귀다 사탄이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요즘 특히 한국 교회에 보면, 안타깝게도 귀가 얇은 분들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우리 목사님이 저렇게 말했으니까……그러면서 그 말에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귀가 얇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은 안 읽었지만, 교회 다닌 게 몇 년인데……라고 한다면, 정말 교회만 다니면 성경을 올바로 알게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닙니까. 초등학교 6년에 중고등학교 3년씩 6년, 다 합치면 12년이나 학교를 다녀요. 그렇다면 12년이나 학교만 다녔다면 모두가 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자기가 원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나요?

아니에요.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어떤 분은 이를 지도 몰라요. 아, 내가 교회에 이런 프로그램도 수료했고 무슨 성경학교도 수료했다……이건 마치 나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개근상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그런 종이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내 머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13장을 공부할 때 다시 배우겠습니다만, 바울이 이 세상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도 이제 믿는 사람들이 곧 말세가 온다, 종말이 온다 그러니까 이 세상 제도를 따르려 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이는 믿음이 올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혼란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이제 곧 오신다고 해서, 학교를 안 가도 되겠어요? 일을 안 해도 되요?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아도 돼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이와 같이 세상 규범들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무조건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복종하기만 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저도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만, 당시 대선 기간이었나 그랬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초청이 되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뭐, 이름을 말씀 드리면 아실 만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때 말씀이 보니까 이건 교회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특정 후보 지지 유세를 나왔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다 이 세대를 본받는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 때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조용기 목사님이 예전에 그런 간증을 하신 적이 있으셨대요. 그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자기가 설교를 하는데 맨날 예수님 얘기나 성경 얘기만 하니까 자기가 좀 부족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는 책방에 가서 철학책을 몇 권 사가지고는 그것을 읽고서, 설교 시간 때에도 그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떤 남자분이 찾아오더래요.. 그러면서 그 분이 목사님한테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무슨 무슨 대학교 철학과 교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 말씀하시는 철학에 대한 부분은 대학교 1학년생 정도도 아는 내용이에요. 저는 목사님한테 철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대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오로지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떠나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구는 그럴 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이 21세기인데 성경은 신약성경이라고 해봤자 2000년 전에 적힌 책 아니야.

그렇다면 믿음도 요즘 식으로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주장도 있을 수가 있겠지요.


사무엘하 6장에 보시면 다윗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 왕 때 블레셋 사람들한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였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웃사라고 하는 실무 담당자가 이 과정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すると、主の怒りがウザ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神はその過ちのために、彼をその場で打たれた。彼はそこで、神の箱の傍らで死んだ。

그러면 이 웃사라는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사무엘하 6장 좀 앞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彼らは、神の箱を新しい荷車に載せて、それを丘の上にあるアビナダブの家から移した。アビナダブの子、ウザとアフヨがその新しい荷車を御した。
이들은 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게 별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부분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원인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宿営が移動する際には、アロンとその子らが聖所と聖所のすべての用具をおおい終わってから、その後でケハテ族が入って行って、これらを運ばなければならない。彼らが聖なるものに触れて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これらは、会見の天幕でケハテ族が運ぶ物である。

당시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성인 남성은 전쟁이 시작하면 모두 싸워야 했습니다만, 여기서 예외였던 사람들이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과 거기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똑 같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그 자손에 따라서 맡은 역할이 달렸는데, 특별히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반하는 방법은 수레에 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깨에 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여기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을 봅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
“6.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8.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9.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そこでモーセは台車と雄牛を受け取り、それをレビ人に与えた。
ゲルション族には、その奉仕に応じて台車二台と雄牛四頭を与え、
メラリ族には、祭司アロンの子イタマルの監督のもとにある彼らの奉仕に応じて、台車四台と雄牛八頭を与えた。
しかしケハテ族には何も与えなかった。彼らの聖なるものに関わる奉仕は、肩に担いで運ぶことだったから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모세가 레위 지파에게 소를 나누어 주었대요 그런데 다른 자손들한테는 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유독 고핫 자손에게는 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가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그들이 맡은 일들이 법궤를 운반하는 일인데, 이는 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매는 것이었기에 소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굳이 소를 주지 않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웃사는 법궤를 어깨에 매지 않고 수레로 끌었을까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고핫 자손이 운반하라고 하신 기록이 있는 민수기는 대략 기원전 1450년에 적힌 것이고, 그리고 웃사가 법궤를 수레로 끌었던 시기는 기원전 1000년 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기원전 1450년이나 기원전 1000년이나 다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벌써 450년이라는 기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450년이라고 한다면 지금이 2022년이니까 45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572년입니다. 이 때는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450년 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옛날입니까.

그러니 21세기에 와서 법궤를 운반해야 하는데,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규정을 따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휴, 지금이 어느 시댄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웃사가 자기 멋대로 그 시대에 맞게 해석을 해서 일을 저질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그를 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天地は消え去ります。しかし、わたしのことばは決して消え去ることがありません。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여러분, 성경 말씀은 오래 되었다고 고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아무리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닫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이 아닌,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어제 밤에 갑자기 프린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오늘은 주보를 뽑지 못했습니다.

뭐, 이 프린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이런 저런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프로그램을 깔거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살리기도 하고, 그리고 한 번은 분해를 해서 그 안을 청소도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가끔 에러가 나면 껐다가 다시 켜고 그러면서 그럭저럭 사용해왔었습니다만, 어제 밤에 성경 필사 원고지를 뽑고 있는데 갑자기 전원이 퍽 하고 나가더라고요.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전원을 켜봤지만 불이 깜빡깜빡 거리다가 다시 꺼지고 맙니다.

뭐, 비싼 프린터도 아니고, 그리고 워낙 오래 되기도 한 프린터이기 때문에 수명이 다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프린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이 프린터와 같은 삶을 보낼 수 있다면 괜찮은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 프린터처럼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랑할 만한 건 없지만, 끝까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조용히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값진 인생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세상에 물들어 세상을 찍어낼 수도 있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담아서 하나님을 찍어낼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이 있습니까. 주님이 계십니까.

예전에 2013년 5월 26일자 아사히신문 천성인어 칼럼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고령인 사람에는 세가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사람, 옛날에는 젊었던 사람, 그리고 단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는 사람.

高齢の人には三つのタイプがあるとも言われる。まだ若い人、昔は若かった人、そして一度も若かったことのない人。


이 말씀이 성탄절인 오늘은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이유는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분명 우리에게 오시고,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여전히 주님이 계신 사람, 옛날에는 마음 속에 주님이 계셨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마음 속에 주님이 계신 적이 없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오시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십니까.


만에 하나, 지금까지 우리 마음 안에 진정한 주님이 안 계셨다면, 이제부터라도 바로 오늘을 우리 삶에 있어서 첫 성탄절로 삼으셔서 주님을 모셔드리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오직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오로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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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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