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2023년 9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4절~16절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4節~16節
“14.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自身、善意にあふれ、あらゆる知識に満たされ、互いに訓戒し合うことができると、この私も確信しています。
15.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16.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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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8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②” 聖書をどう読むか② 라는 제목으로 지난 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물건을 잊어버리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 신문을 보니까 이른바 분실물에 대한 기록이 있길래, 잠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분실물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우산을 보니까, 작년 일본 동경에서의 자료에 의하면 습득한 우산 개수가 280,763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인 없는 우산이 신고가 들어온 총 개수가 동경만 해도 한 해에 28만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저도 얼마 전에 우산 하나를 두고 오는 바람에 나중에 따로 가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산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어떤 일본 신문을 보니까 흥미로운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산을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내용이었어요.


어느 한 심리학자 교수에 의하면,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다는 것입니다. (体から離さない)

자기는 좀처럼 바람이 강한 날이 아니면, 접는 우산을 가지고 나간다고 해요. 그래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실내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접어서 가방에 넣는다고 합니다.

둘째는, 비싼 우산을 산다는 것입니다.. (高い傘を買う)

앞서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작년 동경에서 발견된 우산 28만개 중에서 실제로 분실신고가 들어온 건수는 6,200개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잃어버린 우산 중에서 고작 2.2% 밖에 안 되는 숫자예요. 말하자면 나머지 97% 이상, 27만개 이상의 우산은 별로 찾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 잃어버려도 별로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반대로 본다면 그렇게 싸구려 우산을 사니까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지만, 비싼 우산을 사면 그만큼 안 잃어버리려고 신경을 더 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 살 때 비싼 우산을 사면 싸구려 우산을 샀을 때보다는 훨씬 더 안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셋째는, 시간적 여유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時間的余裕を作る)

특히 전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내리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내리게 되면, 정신이 없어서 우산을 잃어버리게 될 수가 있으니까, 자기가 내리기 몇 정거장 전부터 스마트폰 같은 것은 집어넣고 내릴 준비를 하게 되면 우산도 챙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넷째는 포스트잇이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付箋やほかの人の記憶を利用する)

자기가 있던 자리나 가방 같은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게 되면 나중에 그것을 볼 때, 우산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고, 그리고 그게 불편할 경우에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한테 “내가 좀 잘 잊어버려서 그런데, 있다가 우산을 챙기라고 말해줘”라고 해 놓으면, 만약에 자기가 깜빡했다고 하더라도 옆사람이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우산을 두고 오는 일을 줄일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왜 느닷없이 우산 이야기를 드리느냐 하면 이 분실물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제목을 보았습니다. 그 제목이 뭐였냐 하면 <기도가 먼저냐 전도가 먼저냐>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글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제목만 보고 제 마음이 적지 않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그 반면에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하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먼저입니까. 전도가 먼저입니까.

이는 마치 배가 고픈 상황에서 과자가 먼저냐 아이스크림이 먼저냐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기도나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에 있어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인지 신약인지, 노아가 먼저인지 모세가 먼저인지, 누가 사울이고 누가 바울인지, 누가 요한이고 누가 요셉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를 하고 무엇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저 기도하고 금식하면 성령님이 임하고 은사도 받고 축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

만약에 그렇다면 <오직 말씀>이라고 하면서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주장을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도 좋고 전도도 중요하지만, 말씀 없는 기도나 말씀 없는 전도는 그야말로 믿음이라고 하는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영적인 골다공증, 아니면 흰개미가 갉아먹은 낡은 목조건물처럼, 어느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완전히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성경말씀을 알아야지만 제대로 기도도 할 수 있고 제대로 전도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앞서 말씀 드린 우산 이야기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예,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体から離さない)

우리는 성경 말씀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께서는 아, 그래, 어디를 가든지 성경책을 항상 들고 다녀야겠구나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교회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때 보면 꼭 성경책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저도 그랬습니다만, 그러면 그 분들이 기도하다가 가끔 성경을 펼쳐 보시나 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냥 앞에 놓고 기도하거나 들고 기도하거나 하다가, 기도가 끝나면 그냥 들고 나가십니다.

여러분,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책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책은 책일 뿐이고 그냥 종이입니다. 그런데 가볍지도 않은 그걸 들고 다니면서 안에는 뭐가 적혀 있는지 보지도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건 마치 아주 좋은 약이라고 하면서 먹지는 않고 맨날 가방에 넣어서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가끔 보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에이,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어떻게 성경대로만 살아?”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것은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죽은 말씀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무슨 뜻이 됩니까. 예수님이나 십자가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다 그냥 책에 적혀 있는 이야기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바로 그 말이 되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슨 옛날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아니에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항상 우리의 머리 속, 그리고 마음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둘째는, 말씀의 가치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싸구려 우산은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얼마 하지 않는 것 까짓거 다시 사면 그만이잖아요. 귀찮게 찾아 나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잃어버렸던 우산이 별볼일 없는 것이었다면 굳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끼는 우산이었기 때문에 굳이 거기까지 가서 다시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성경책은 어떻습니까. 이 책이 그냥 우리 손까지 들어온 것 같나요?

생각해보십시오. 이 책이,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와 있습니까. 그것은 우연히 어쩌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이 복음이 바울을 거쳐 우리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당한 고난을 한번 볼까요?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8.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9.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3.……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24.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25.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26.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27.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참으로 눈물겹지 않습니까. 사실 바울은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라서 지금으로 본다면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청년관료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이와 같은 고생을 감수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고난은 바울만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쓴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4.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5.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6.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충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고, 이는 몇 년 전이나 몇 십년 전이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불러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를 알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의 그 귀한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과 동행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ですから、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う者はみな、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を襲っても、家は倒れませんでした。岩の上に土台が据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
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누구는 집을 단단한 반석 위에 지었고, 누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에 비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들겠지요. 기둥 하나 박기 위해 구멍을 파려고 해도, 단단한 바위 때문에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냥 기둥을 푹푹 꽂으면 세워집니다. 그러면서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을 보고 비웃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쁜 세상에 언제 그 단단한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앉았어. 참 미련하게 말이야. 사람이 효율을 생각할 줄 알아야지. 저런 반석 위에 집을 한 채 지을 시간이면, 여기 모래 위에는 집 10채라도 더 세우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바람이 불고 홍수가 닥치자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튼튼하게 서 있을 수 있었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예전에 노벨상을 받은 어떤 교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통 수학이나 과학에서 어떤 문제를 풀 경우를 보면 미리 정해진 공식에 따라 거기에 숫자를 대입해서 풀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 무엇보다 공식을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교수님은 수상 연설에서. 자기는 학생 때 어떤 문제를 보면, 학교에서 가르쳐준 공식을 쓰지 않고 풀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 문제를 풀더라도 다른 학생들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냐 하면, 공식 하나를 배우더라도 단순히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식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특히 공부 같은 경우를 보면, 무슨 머리 좋은 척하고 효율을 따지면서 공부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인 공부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보면 많은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라고 합니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를 다 읽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성경에 어떤 말씀들이 적혀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귀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래 다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말씀을 띄엄띄엄 밖에 모른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어떤 흐름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어서, 결국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그야말로 누더기와 같은 성경지식이 되고 말아요. 그런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 삶에 있어서 무슨 힘이 되겠으며, 우리 믿음에 있어서 무슨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휴, 그 두꺼운 성경을 언제 읽고 있어……가 아니라, 시간에 여유를 갖고 말씀을 믿음의 양식 삼아 미리미리 담아두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로 이 목사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설교에 있어서 생전처음 듣는 말씀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맨날 새로운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겠지요.

사실 목사의 임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고, 그 말씀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설명을 드리는 것, 그것이 가장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제 개인적인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많이 말씀 드리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이 기록하기를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도 어련히 잘 하고 계실 줄 알지만,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예배를 인도한다면서 이 강단에 서서, 성경에도 없는 제 꿈이나 환상 이야기나 하고, 세상 정치 이야기나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쩌면 그게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목사로서 할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 어느 SNS에 보니까 누가 이런 글을 써 놨더라고요.

자기는 목사인데, 정치인 누구를 지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그 낯뜨거운 말도 같이 말합니다. 그런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시죠? “제 말을 사람 말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 말입니다.

아니, 자기가 하는 말을 사람 말로 듣지 않으면 뭔데요? 자기가 무슨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라도 된다는 소리입니까.

가끔 이렇게 보면 자기가 목사라고 하면서 무슨 대단한 영적인 사람, 그야말로 물 위라도 걸을 수 있을 것처럼 하고, 여차하면 당장 홍해라도 가를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 설교 동영상을 봤는데, 이 분은 그래도 좀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설교에서 하시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말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그냥 <우리>면 <우리>지, <저와 여러분>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는 누구고 여러분은 누군데요? <자기>는 목사님이니까 특별하고 <여러분>은 목사님이 아니니까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들을 부끄럽지도 않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봅니다.

로마서 15장 15절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여기서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되어 있지요?

자, 여기 원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한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 예수님의 말씀을 적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제 말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예, 여기서 제 말을 안 믿겠다고 하면 좀 서운하겠죠?

그럼 백 보 양보를 해서 제 말을 믿으셨다고 쳐봐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적어왔다고 해요. 그렇다면 이 글이 이제부터 무슨 야고보서나 유다서와 같은 성경처럼 성필서……가 된다? 안 된다?

되긴 뭐가 되겠습니까. 이 원고요? 예전에 무슨 강연할 일이 있어서 그 때 써 둔 원고예요. 그 때 썼던 원고를 그냥 이면지에 찍어 두었던 거예요.



갈라디아서를 봅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8절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6.私は驚い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自分たちを召してくださった方から、このように急に離れて、ほかの福音に移って行くことに。
7.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8.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여러분,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 더 이상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이것이 성경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웬만하면 목사님 하시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말씀이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었을 때에 한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완전히 자기 생각으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말, 세상적인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에 목사님 말씀이라고 해서 꼭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성경적이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2.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예, 성경을 많이 읽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제 떡만이 아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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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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