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회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2023년 10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5절~28절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5節~28節
“25.しかし今は、聖徒たちに奉仕するために、私はエルサレムに行きます。
26.それは、マケドニアとアカイアの人々が、エルサレムの聖徒たちの中の貧しい人たちのために、喜んで援助をす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27.彼らは喜んでそう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が、聖徒たちに対してそうする義務もあります。異邦人は彼らの霊的なものにあずかったのですから、物質的なもので彼らに奉仕すべきです。
28.それで私はこのことを済ませ、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通ってイスパニアに行くことに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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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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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3번째 시간으로서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主の御国の拡張の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일단 본문 말씀을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일단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하는데,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해 후원을 해준 지원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빚진 곳이니까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로마에 먼저 가고자 했었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우선 예루살렘에 먼저 갔다가 그 다음에 로마를 들르고, 그 다음에 서바나, 그러니까 스페인으로 가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상황을 좀 자세히 알기 위해서 각 도시의 대략적인 위치를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지금 바울이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이 로마서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신학자들은 아마도 고린도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이 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 도중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인데, 고린도라고 하는 곳은 지금도 아직 있습니다. 지금 이름은 <코린트>라고 하는데, 그리스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럼 여기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로마, 그리고 스페인의 위치를 본다고 한다면, 단순하게 직선거리로 보아서 고린도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은 동쪽으로 약 1,300킬로, 그리고 로마는 서쪽으로 역시 약 1,300킬로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그 로마에서 더 서쪽으로 1400킬로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까지를 본다면 고린도에서는 로마를 거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단순계산으로 2700킬로가 떨어져 있다는 계산이 됩니다.

본래 바울의 계획은 어디로 가는 것이었다고요? 예,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여행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돕기 위해서 후원금이 모였어요. 그래서 이 후원금을 예루살렘에 가져다 준 다음에 다시 로마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잘 와 닿지가 않을 것 같아서 좀 더 알기 쉽게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고린도가 서울이라고 해봐요. 그리고 예루살렘은 동경입니다. 그러면 로마는 어디냐 하면 중국 북경이라고 하고, 스페인은 몽골이라고 해보죠.

지금 우리는 서울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획은 북경을 지나서 몽골로 가려고 해요. 그런데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동경을 들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서울에서 동경을 들렀다가 다시 북경으로 가서 몽골로 가겠다는 것이에요.

사실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서울 동경 북경 몽골……이렇게 했습니다만, 실제 고린도나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을 본다면 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처럼 무슨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서울에서 북경을 거쳐 몽골로 가려고 하는데, 동경에 먼저 간다고 한다면 완전히 반대 방향이 됩니다. 거기다가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후원금을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그 금액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그래도 손수 가져다 준다고 하는데, 아주 적은 금액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벼운 종이 돈, 지폐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금속으로 된 화폐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그 부피도 그렇고 무게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일본에서는 이틀 정도 전국적으로 타행이체가 안 되는 은행시스템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쪽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해서 저쪽 은행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입금을 시키기도 했다는데, 아무래도 목돈을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이 은행에서 저 은행 정도가 아니지요.

거리도 그렇고 무게도 문제이지만 보안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위험요소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 간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고단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무거운 돈을 들고 다니니까 힘도 들겠지만 안전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위험한 여정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토록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후원금을 전달하려고 했을까요.

사실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복음이 시작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대교와의 마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 하더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로지 교회와 관련된 일이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사회권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종교지도자가 곧 사회지도자였으며, 문화나 관습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는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바울도 젊었을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그랬었는데, 이는 그렇다고 다른 민족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들였다는 것이 됩니다.

비록 바울은 회심해서 이제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바울 자신도 스스로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자기들이 믿는 신앙과 다른 것을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겠지요. 하지만 같은 유대인한테 복음을 전하는 경우에도 역시 핍박을 당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명처럼 지켜왔던 율법을 이제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팔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고, 만약에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할례를 받아야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바울은 어떻게 주장을 합니까.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바울이 말하기를 할례는 이제 마음에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굳이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율법에서는 먹어도 되는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19절에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すべての食物をきよい)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 먹지 못할 음식은 없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한테서도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움이 심해지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갔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은, 비록 그 여정이 험난하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굳이 로마로 가기 전에, 로마와는 정반대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아니,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야말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일을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감당했던 사람 아닌가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본 것처럼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그 정도가 아니에요.

사도행전 19장 12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彼が身に着けていた手ぬぐいや前掛けを、持って行って病人たちに当てると、病気が去り、悪霊も出て行くほどであった。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한테 얹으면 병이 낫기도 하고 악귀도 나갔다는 거예요. 이런 기록은 정말 구약에서의 모세나 엘리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요. 그와 같은 바울이 굳이 산 넘고 물 건너 바다를 건너가며 후원금을 모으고 그리고 그 후원금 배달까지 가야 하나요?

출애굽기 때 보세요. 모세가 바위를 쳤더니 물이 나오기도 했다잖아요. 사실 그런 장면을 그려 놓은 무슨 그림들을 보면 무슨 옹달샘처럼 물이 나오는 것처럼 되어 있는 그림들이 많은데, 아니, 생각해보세요. 그 물로 인해서 당시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셨다는 것 아니에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기 12장 37절에 의하면 성인 남성만이 60만명이었다고 해요. 이를 바탕으로 추정을 하면 남녀노소 전체 인구는 대략 200만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신학자들은 예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바위에서 나온 물로 200만명이 마셨다고 하는데, 그 양이 졸졸졸졸 나오는 정도의 물이었겠어요? 아마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했다기보다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땅에서는 하늘에서든 간에 돈이 펑펑펑펑 쏟아져도 될 법하지 않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후원금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방 지역에서 세운 교회인데 그 사람들이 넉넉해 봐야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서로 없는 가운데에도 한푼 두 푼 모은 후원금일 것이고, 그리고 그 돈을 낑낑 매고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 위험을 무릅쓴 채로 가지고 갔다고 하는 것인데, 굳이 바울이 그래야 했었냐는 것이지요.

설마 하나님의 능력이 광야에서 물은 낼 수 있지만 돈은 못 내시는 분은 아니실 거잖아요.

여기에는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지금 가지고 가고자 하는 <연보>는 단순한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모금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에 바쳐진 헌금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헌금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구약에 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섬긴다는 증거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조공을 바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내가 당신 나라를 섬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열왕기하 17장 4절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しかし、アッシリアの王はホセアの謀反に気がついた。ホセアがエジプトの王ソに使者たちを遣わし、アッシリアの王には年々の貢ぎ物を納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そこで、アッシリアの王は彼を捕らえて牢獄につないだ。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을 때, 북 이스라엘 19대 왕이었던 호세아가 강대국 애굽을 믿고 그 때까지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자 호세아가 무엇을 했다고 해요? 예, 배반을 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6절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あなたのうちの男子はみな、年に三度、種なしパンの祭り、七週の祭り、仮庵(かりいお)の祭りのときに、あなたの神、主が選ばれる場所で御前に出なければならない。主の前には何も持たずに出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하나님을 뵙지 말라, 즉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고 반드시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하나님 말씀을 악용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적지 않게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해서 대전제는 뭐냐 하면, 무조건 많이 내면 복 받고 적게 내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속죄제에 대한 규례를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위기 5장 6절~7절
“6.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7.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6.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ために償いとして、羊の群れの子羊であれ、やぎであれ、雌一匹を主のもとに連れて行き、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のために、罪を除いて宥(なだ)めを行う。
7.しかし、もしその人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償いとして、山鳩(やまばと)二羽あるいは家鳩(いえばと)のひな二羽を主のところに持って行く。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とする。


레위기 5장 11절
“11.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もしその人が、山鳩二羽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さえも手に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なら、自分の罪のために、ささげ物として、十分の一エパの小麦粉を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行く。その人はその上に油を加えたり、その上に乳香を添えたりしてはならない。これ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であるから。

속죄제에서는 양이나 염소를 드려야 하는데, 경제적 여건이 어려우면 비둘기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비둘기를 바치기도 어렵다고 한다면 곡물가루로 바칠 수도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을 바치면 큰 죄도 용서받지만 곡물가루를 바치면 작은 죄만 용서받는다고 하세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그 예물을 받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예물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예,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 주님을 내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통일교 같은 것이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거기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집안이 엉망이 되도록 고액의 돈을 내라고 유도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로 인해서 가정이 파탄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고 해요.

그리고 그런 가정의 피해자 중 하나가 아베 전 총리를 저격한 범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기존 교회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우려되는 일입니다.

돈 많이 내면 많이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각자 형편에 맞게 기쁜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잖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일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수입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맞게, 적은 사람은 역시 그 비율대로 드리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돈을 채워서 목돈을 내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헌금이다 저런 헌금이다 해서 각 지역에 목표금액을 책정하고 어떻게든 거기에 맞추어서 내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다른 이단 사이비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자유가 사라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피해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돈 많이 내야 천국 갈 수 있다” 뭐 이런 말을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데,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에 흔들리게 되고, 천국에 못 갈까봐 괜히 불안해져서, 결국 나쁜 종교 지도자들한테 속아넘어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희도 교회에서 사례비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저희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에도 지금 이 순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선교사님은 탄자니아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고, 또 매주 메일을 보내주시는 한 선교사님께서는 캄보디아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교회들이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당장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가 무슨 장사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하겠습니까.

당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저도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선교후원을 당부하기 위해서 매주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전도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는데, 정말 일면식도 없는 분들께서 해주시는 선교후원 덕분에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들 중에는, 사실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좀 넉넉히 후원을 해주시는 경우에는 참 큰 힘이 되지요.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금액의 경우를 본다면, 이 또한 은혜가 넘칩니다. 이 후원을 해주시는 그 손길에 얼마나 큰 간절함이 있을까 하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친 말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밤을 새고 이른 아침까지 무슨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는데, 지난 2021년……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지요? 2021년 11월 11일 새벽 5시 38분에 전화가 울려요. 왜 정확하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어제 찾아보니까 아직 기록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받아보니까 어느 남자분이신데 처음에는 점잖게 말씀을 하세요. 자기가 어디서 공부를 하고 어디서 학위를 받았고 뭐 그래요.

그런데 느낌이 좀 약주를 한 잔 하신 것 같더라고요.


아니 뭐 약주 한 잔 하신 것 정도가 큰 문제인가요. 그래서 아, 예……하고 듣고 있었는데, 똑 같은 말씀을 반복하는 거예요.

자기가 어디서 공부했고 어디서 학위를 받았고 뭐 그래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더러 자기가 나온 그 학교 신학과를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 알 수 있대요.

마침 그 때 제 아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건 혼자 듣기 아깝다 싶어서 스피커폰을 켜서 같이 듣고 있었지요. 그랬더니 그 자기 이력을 몇 번 반복을 하시더니만, 갑자기 제 학교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 법대를 나왔다는 게 거짓말 아니냐는 거예요. 거기 법대 나와서 목사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체포조를 보내서 저를 잡아가겠다고 막 난리를 치십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더 이상 듣고 있으면 이 분도 쉬지 못하실 것 같아서 그냥 끊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끊은 게 오전 6시 4분이었습니다.

오전 5시 38분부터 6시 4분까지 한 26분 정도 되는 통화였네요.

아마 저 혼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누구는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체포조가 오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만 안 오시더라고요.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사실 들더라고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떤 사이비 종교에 대한 시사방송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교주가 그 법대를 나왔다고 했대요. 그런데 방송국에서 알아보니까 학적부에 그 교주 이름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저도 그런 사람처럼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을 하다가, 메일주소를 쓸 때 일반 메일과 함께 제 학교 메일을 쓰면 어떨까 했어요.

하지만 그걸 보고 오히려 또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는데 하고 제 아내와 상의를 해보니까, 학교 메일 주소도 같이 적어 넣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메일을 보내 드리고 하는 이유는, 물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선교후원을 당부 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전도를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선교후원을 당부 드리면서 죄송한 마음도 있긴 합니다만, 저는 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역을 주님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꼭 저희 교회에 대한 후원만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제2, 제3 그리고 수많은 예루살렘 교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지금도 있으며, 그와 같은 교회들에 대해서 도움을 드리는 손길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리고 분명히 그 손길 위에 넘치는 축복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실 염치 불구하고 매주 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 저희 선교회도 어서 성장해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있는 미자립교회를 후원하고 주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가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의 부흥을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 확장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바로 우리의 손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의 작은 손길로 인해서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을 함께 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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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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