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SMALL

 

제482회 [면류관 강해 제13회] 종과 주인과 예수님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50절~51절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종과 주인과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지난 주 면류관 강해 12번째 시간까지는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해서 주로 구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아직까지도 다루어야 할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만,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검토해보기로 하고 오늘부터는 신약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만,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리라 여겨집니다.

먼저 첫번째 비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51절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51절
“45.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자, 여기서 우선 이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 공동번역 성경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공동번역판 마태복음 24장 45절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 종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주인이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그 때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한 종에게 일을 맡기기를, 다른 종들을 잘 관리하고 그들이 먹을 양식에 대해서도 베풀도록 책임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어떻게 하긴요. 여기 답이 다 나와 있잖아요. 그들이 일을 잘 하도록 관리를 하고 때가 되면 양식을 주고 해서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소임을 다하는 것이 충성되고 슬기로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은 어떻게 했냐 하면 어차피 주인은 멀리 떠났으니 나에게 주어진 권한을 나를 위해 내 마음대로 쓰겠다고 하면서, 같이 있는 종들을 때리고 그리고 술친구들과 흥청망청 지냈다는 것이에요.

그러고 있었더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날,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런 광경을 보았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주인은 그 종을 엄하게 때리고 엄벌에 처해서 결국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말씀도 배경은 앞서 전해드린 비유와 내용이 비슷합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려고 해요. 그래서 종들을 불러서는 각각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 씩 맡기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히 돈을 똑같이 맡긴 것이 아니라 ‘재능대로’, 그러니까 그 종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맡겼다고 하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단순히 가지고 있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 능력에 따라 이를 활용하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 의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달란트’라고 하는 단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구약에서는 이를 무게 단위로 사용했었지만 신약에서는 화폐 단위로 계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라고 하는데, 1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일당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하루 일당을 단순하게 계산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10만원으로 본다면 어떻게 됩니까. 1 데나리온이 10만원이면, 6000데나리온은 6억원이 되지요. 말하자면 6억원이 한 달란트에요.

그러니까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씩 맡겼다고 하셨잖아요. 이를 환산해본다면 종들에게 각각 30억원, 12억원, 그리고 6억원씩을 맡기고 떠났다는 것이 되지요.


여기서 30억원 맡은 종은 열심히 사업을 해서 30억원을 남기고, 12억원을 맡은 종도 열심히 장사를 해서 12억원을 남겼어요. 그런데 6억원을 맡은 종은 땅을 파고는 그 돈을 묻어 두었다는 것이지요.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하게 되는데 30억원으로 60억원을 만든 종과 12억원으로 24억원을 만든 종에게 주인은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6억원을 땅에 묻어 놨다가 준 종에 대해서는 엄하게 꾸짖어요.

네가 일을 하기 싫다면 차라리 그 돈을 취리하는 자들, 쉽게 말하자면 은행에 맡겼다면 그 이자라도 찾았을 것 아니냐.

그런데 땅에 묻어 놨었다는 것은 너에게 그 돈을 맡긴 내 뜻을 완전히 저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주인은 그에게 말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지요.

결국 이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 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비유에 대해서 일단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비유와 두번째 비유에 있어서 공통점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우선 주인이 종에게 해야 할 일을 맡기고 떠납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돌아온 뒤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종은 벌을 받게 되는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를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할게요.

두 비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 대상과 배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부터 알아보아야 하겠는데 이는 마태복음 24장 3절부터 25장 마지막인 4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 중에 등장하는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되었냐 하면, 이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신 것이지요.

그 질문을 알아볼까요?


마태복음 24장 3절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곳이 감람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기도를 하신 곳 ‘겟세마네’와 같은 곳으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 감람산에 대해서 성경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이 곳이 어떤 곳이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누가복음 22장 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요한복음 18장 2절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이 기록에 의하면 감람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도 제자들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자들과 모임을 가지셨던 곳이 감람산이었어요.

그리고 또한 그 곳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에서 기도를 하신 후에 바로 그 곳에서 체포를 당하게 되시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구절이 성경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당시 예수님을 잡으려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다가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었는데, 이에 대해서 유다는 그럼 무리가 없을 때가 언제 어디일까 하고 생각한 끝에 바로 그 곳, 바로 감람산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감람산에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대상이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점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신 것인데,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일어날 징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약은 그 한자 뜻이 무엇입니까. 예, 구약. 그러니까 오래된 약속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신약은? 예, 그렇죠.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오래된 약속은 어떤 약속이고 신약, 새로운 약속은 어떤 약속입니까.


사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는 분들도 이렇게 질문을 드리면, 이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을 하실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럼 대답하실 수 있으세요? 구약은 어떤 약속이고 신약은 어떤 약속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약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이고, 그러면 신약은? 메시야가? 그렇죠. 다시 오신다는 약속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도 주인이 떠났다고 다시 온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즉 요한계시록 1장 7절 기록처럼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벌을 받게 된 이 종은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4장 51절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두 종은 둘 다 똑 같은 결과를 맞이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부분은 원문인 헬라어 성경을 보더라도 토시하나 안 틀리고 똑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종과 주인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종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자,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돌아온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 이 종은,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벌을 받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누구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예수님이 온 다음이라도 회개하면 되는 것 아니냐.

여러분,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그 말씀을 하셨겠지요.


하지만 그가 벌을 받게 된 것은 이미 주인이 와서 판결을 내린 다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판결이 내리기 전이라면 회개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보셨어요.

그러면 그에게 그 때까지 회개하고 뉘우칠 시간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주인은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에게는 그만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종은 결국 주인이 올 때까지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끝내는 주인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어,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주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자신이 떠나기 전에 본래 악한 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직분을 맡겼을까요?

사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선 다른 종들을 관리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는 상당한 권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 집을 비운 동안 만약에 다른 주인 가족들이 있었거나 했다면 그가 다른 종들을 때리거나 술친구들과 흥청망청 놀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를 보더라도 주인이 그 종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은 그 집을 다스리는 전권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막강한 권한을 아무 종한테 맡겼겠냐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 종은 그 집에 오래 있었고 그리고 주인으로부터 두터운 신임도 받고 있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종도 보세요. 아무리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까지는 안되었다 하더라도 한 달란트 즉 주인 돈 6억원이나 되는 재산에 대해서 관리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게 보통 지위입니까.

회사에서 본다면 이는 직원급이 아니라 임원급, 전무나 상무까지는 안 된다 하더라도 그래도 이사정도는 되는 정도의 직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결코 능력이 없는 사람, 실력이 없는 사람한테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종들을 관리하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6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맡길 정도라면 그야말로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장차 그 회사의 모든 것을 맡길 수도 있는 후계자 후보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인은 분명 충실하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고 큰 성과를 남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을 선정해서 그와 같은 큰 권한을 부여했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땠습니까.

그렇죠. 주인이 돌아와서 보니까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형편없는 꼴이 되고 말았잖아요. 그러니 주인은 그 종에게 엄한 심판을 내렸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되새겨 본다면 주인은 종에게 기대를 하고 일을 맡겼습니다만, 종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당했다고 이해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구원의 취소가 없다. 구원을 받는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기로 되어 있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본래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구원 받지 못할 죄인들을 앞에 두고 말씀을 하셨다면 그나마 이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쉽게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너희들이 지금 내 제자라고 할지라도 똑바로 하지 않는다면, 장차 내가 다시 올 때 심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주인의 집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종’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어쩌면 좀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 주인과 종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종이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주인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믿음이 좋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해 주셨냐 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이었던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는, 자기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면,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심판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 알지 못하는 시간에 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렇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설마 밤에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침이든 밤이든 추울 때든 더울 때는, 언제 주님이 오신다 하더라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면류관, 영광된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81회 [면류관 강해 제12회] 사울의 구원 문제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2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의 구원 문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지금까지 사울 왕에 대해서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얻은 것, 두번째는 사울이 버린 것, 세번째는 아말렉의 죄악, 그리고 네번째는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으로 사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아말렉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 네 번씩이나 걸쳐서 살펴본 이유는 사실 오늘 전해드리고자 하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사전설명 없이 갑자기 오늘 다루어야 할 말씀만 전해드리게 되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조금 길어졌지만 네 번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자, 이제 면류관 강해에 있어서 사울에 관한 내용은 오늘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은 구원을 받았는가. 끝까지 면류관을 지킬 수 있었는가. 더 쉽게 말씀 드리자면 사울은 천국에 갈 수 있었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사울은 하나님 앞에 큰 실수를 하게 되어서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5장 26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그렇죠. 하나님으로부터 해고통보, 요즘 우리가 알기 쉽게 말을 한다면 파면선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시고 왕으로서 높이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무엘상 11장 6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사울이 들었더니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린 그 원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변덕이 아닙니다.

원인은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셨더니 그 빈 자리를 악령이 꿰어 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서 떠난 하나님의 영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무엘에게 명을 내려서 새로운 왕을 찾아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이었던 것이지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더니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앞서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와 똑같지 않습니까.


이제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은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지고 사울은 악령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특징을 사울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납니다.

우선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사무엘상 20장 30절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개역개정 성경을 보시면 그래도 좀 점잖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참고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실까요?

조금 듣기에 불편하신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성경 본문이니까요.


현대인의 성경판 사무엘상 20장 30절
“그러자 사울은 노발 대발하며 소리쳤다. '이 미친 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것을 보십시오. 아무리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하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게 왕이라는 사람이 차마 입에 담을 만한 소리입니까.

그리고 사울은 다윗도 공격합니다.


사무엘상 18장 10절~11절
“10.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다윗은 사무엘상 17장에서 블레셋 군대의 용사 골리앗을 물리치지요.

이 공로로 인하여 사울은 그를 등용하게 되는데, 사울에게 들러붙은 악령이 보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다윗이 이쁘게 보였겠습니까. 도리어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울은 남은 평생동안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반면에 다윗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 여년 동안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28장 6절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한테나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만 응답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신 사울에게 응답하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의 특징은 바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사무엘상 28장 20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던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왕으로 뽑혔음에도 처음에는 소심해서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던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더니 이스라엘 군대 33만을 이끌어 암몬 군대를 전멸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되면 이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창세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육적으로는 벌거벗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난 다음의 아담을 보십시오.


창세기 3장 7절~10절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버린 아담은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하잖아요.

자, 생각해보십시오. 아니, 본문을 잘 보십시오. 지금 이 말을 할 때 아담은 벗었습니까. 입었습니까.

7절에 보시면 그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로 삼았다잖아요.

이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대단히 엉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몸은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때에는 아무리 육적으로 벌거벗고 있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육적으로 가진 것이 없더라도 영적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게 된다면 아무리 육적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니, 천하에 부러울 것 없는 왕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영적으로 벌거벗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서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핵심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 중에 길보아 산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만, 그렇다면 사울은 죽은 뒤에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좀 안된 말씀입니다만 사울이 천국에 들어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망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앞서 사무엘상 15장 26절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무엘은 분명히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렸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누구는 또 그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울도 천국에 갔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는 어떻게 나오는 주장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응답하지 않으니까 사울은 이제 무당을 시켜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무엘의 영을 불어와서 물으려고 해요.

그런데 사무엘상 28장 19절에 의하면, 그 때 나타난 영이 말하기를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해서 사울도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회심한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우선 무당이 세상을 떠난 사무엘의 영을 불러 올 수가 있냐고 하는 문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자랐고, 그리고 한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무엘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저 또한 사무엘이 천국에 갔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 그렇다면 천국 하나님 나라에 간 사무엘의 영을 한낱 무당이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간혹 무슨 전설이나 설화에 보면 죽은 사람의 영이 살아 있는 사람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어디 하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사랑했지만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의 영이 이삭이나 야곱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잖아요.

그리고 성경기록을 자세히 보면 사울이 사무엘의 영이라고 하는 그 모습을 직접 본 것도 아닙니다.

사무엘상 28장 13절~14절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무당이 말하기를 한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사울에게 말하자, 어떻게 생긴 영이냐고 물어요. 그러자 무당이 말하기를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사울은 이 말을 듣고 그 영을 사무엘인 줄 알았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알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사무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인 것으로 이해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그저 무당이 말한 겉옷을 걸친 노인의 영을 사무엘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아니 백만분의 하나, 그 형상이 진짜 사무엘처럼 하고 있었다고 칩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있는 사무엘의 영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모를까 땅에서 올라와요? 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안되는 주장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영은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렇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악한 마귀 사탄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가 제일 속이기 쉬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자기를 사무엘로 생각했다는 것을 눈치채자 마치 자기가 정말 사무엘인 것처럼 사울한테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내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있겠다고 말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악한 마귀가 있는 곳은 지옥이니 사울은 죽은 뒤에도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그 악한 영이 예언한 대로 그 다음 날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근거로 인해서 안타깝게도 그는 천국 백성이 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대체적으로 이론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울의 구원은 취소된 것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사울이 처음에는 구원을 받아 천국백성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을 저버림으로써 구원이 취소된 것일까요? 아니면 사울은 본래부터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던 것일까요.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경우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울은 비록 왕이 되긴 했으나 애초에 구원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앞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택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암몬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울이 첫번째 실수를 저질렀을 때 사무엘은 뭐라고 하면서 그를 꾸짖습니까.

사무엘상 13장 13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이 말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백성입니까. 이 세상 수많은 백성들 중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잖아요. 그런데 그와 같은 백성들의 왕, 그것도 영원히 이어질 왕의 나라를 세우는데 구원받지 못한 왕을 세운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구원하실 생각도 없었던 사울에 대해 후회를 하시고, 사무엘은 처음부터 버림 당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사울을 위해 근심하여 온 밤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는 그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결과만 보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한 오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죠.

예를 들어서 대통령 선거를 보았을 때, 선거 기간에는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결과가 나온 다음에 A가 당선이 되면, 이번 선거에서는 당연히 A가 당선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고, 또 A가 떨어지게 되면 뭐라고 해요? 예, 자기는 A가 떨어질 것이라는 일은 벌써 예상하고 있었다. 뭐 이렇게 주장하는 정치평론가들 많잖아요?

마치 그런 식으로, 그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아무리 도중까지는 순종하는 삶을 살다가도 마지막에 하나님을 버림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다면, 아, 그 사람은 원래 처음부터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반대로, 과정은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다가도 나중에 회개해서 하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되면, 아, 그 사람은 원래부터 구원받기로 되어있던 사람이었어.

이런 주장이야말로 마치 3류 정치평론가들과 같은 논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 요약하자면 사울은 분명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셨으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으나, 나중에 그가 하나님을 버림으로 인해서 그는 끝까지 구원을 지키지 못했기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의 구원,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지킬 수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은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질책하고 계시는 말씀인데 그 이유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 사랑 회복’ ‘첫 사랑 회복’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많이 들어봤어요.

하지만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오랫동안 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교회에 가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쯤이었는데, 그 때는 무슨 대단한 감동을 받아서 교회에 가기 시작한 것도 아니거든요. 솔직히 일요일에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어서 간 거죠.

그랬던 나에게 무슨 믿음에 대한 처음 사랑이 있을까, 이는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인 것일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잘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니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서 처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언제입니까.


내가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어요.

내가 정말 어려움에 처해서 더 이상 앞길이 안보였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셨어요.

이 얼마나 감격적인 순간입니까. 여러분께서는 그와 같은 경험이 없으십니까? 없기는 왜 없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울에게 했던 사무엘의 말을 들어보면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5장 17절~19절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말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별볼일 없는 존재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일으켜서 왕으로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의 그 감격, 그 감사, 그 은혜를 기억했었더라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을 것을,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이제 잊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요?

사무엘상 13장 14절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예, 이제 더 이상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될 자격도 없으며, 그 영광의 촛대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게 누구라고요? 그렇죠. 이스라엘의 왕위는 이제 사울에게서 빼앗아 다윗에게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에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건져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법학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을 수가 없다”는 격언이 있어요.


이는 아무리 내 소유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키지 못하면 그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버리게 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면류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넋 놓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리게 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할까요.

요한계시록 3장 11절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면류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이상 구원 위에 잠자는 자가 아니라,

지금 당장 깨어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굳게 잡아 끝까지 지켜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80회 [면류관 강해 제11회] 사울의 죄책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7절~11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10.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1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순서대로라면 지난 번에 사울이 버린 것 (1)이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은 (2)라고 해야 하는데, 그보다는 ‘사울의 죄책’이라는 제목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했습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은 지지난 주, 그러니까 2주 전에 전해드린 말씀에 이어서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의 결정적인 실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무엘상 15장 1절~3절까지 보실까요?


사무엘상 15장 1절~3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해서 대단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말렉을 한 번 공격하거나 겁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살육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까지도 완전히 없애 버리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삼으셨지요. 이는 그가 무슨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명하십니다. 내가 아말렉을 진멸하길 원하니까 네가 가서 그들을 전멸시켜라. 아예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라. 이렇게 명하세요.


그럼 사울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예, 알겠습니다”하고 나가서 그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 오늘은 이 사울과 아말렉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이를 좀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중요한 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사실과 현실과 진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실과 현실과 진실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가시적인 객관적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사진 한 장.

누가 보더라도 똑같이 보이는 사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정적 시각. 그러니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되어 있는 한 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다음으로 현실은 어떨까요.

이는 정지되어 있는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인 종합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시간적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종합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이 정적인 시각인 데 반해 현실은 동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실은 어떨까요.

이는 내면적인 진정한 판단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심리까지도 감안하는 것이기에 이는 진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이는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아실 수 있는 시각이라는 의미에서 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좀 어렵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교통사고를 예로 들어보도록 할까요.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는 어두컴컴한 차도였는데, 어떤 여성이 길을 건너던 중 한 남성이 운전하던 자동차와 부딪치게 되어서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시다.

이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고 인근 CCTV에도 찍혀 있었습니다.


이는 말하자면 그 순간 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누가 보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는 이 교통사고에 있어서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현실’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당시 여성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있어서 밤길에서도 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골목에서 나와서는 뛰어가다시피 차도를 건너려고 했었어요.


반면에 남성은 음주상태도 아니었고 남성이 운전하던 자동차는 과속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여성이 어두운 옷차림에 주위가 너무 어둡고 거리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미처 자동차가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사실과 현실로 비추어 보았을 때 여러분이 판사라고 하신다면 남자 운전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일단 자동차가 보행자를 사망하게 한 것이기에 완전 무죄라고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비교적 가벼운 벌을 내리지 않을까요?

객관적 사실과 현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비록 여성이 사망하기는 했지만 운전자에게는 과실이 없었기 때문에 이는 피하기 어려웠던 사고라고 해석하고, 중형이 아니라 가벼운 형벌, 어쩌면 집행유예도 내려지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실’을 알아볼까요.


사실 이 사고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운전자 남성과 피해자 여성은 면식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던 관계였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같은 동네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서로 어깨가 부딪쳤어요.

그런데 이를 두고 여자가 남자에게 심한 욕설을 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남자는 대단히 큰 모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남성은 시력이 좋았어요.

그런데 마침 그 날 밤 여성이 골목에서 뛰쳐나왔는데 순간 그 남성은 여성을 알아보았어요.

아, 저 여자는 얼마 전에 나에게 심한 욕설을 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조금 더 일찍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었지만, 이전의 그 기억이 뇌리를 스치면서 브레이크를 조금 늦게 밟는 바람에 결국 그 여성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시다.


이것이 이번 교통사고의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이는 부득이하게 일어난 단순 사고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고의적인 살인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여기까지 본다면 이는 이 남성 운전자가 자신의 심리까지 말을 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인데, 자기한테 불리한 일을 굳이 털어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남성 운전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면, 분명 이것이 이 사건에 있어서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아무도 모르는, 그야말로 신적 시각, 하나님만 아실 수 있는 시각이라고 하겠지요.

좀 무섭죠? 하지만 알고 보면 이런 일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제로 비일비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성경 말씀에서 사울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도 사실과 현실 그리고 진실로 분석을 해서 무엇이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실’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아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사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사울은 어떻게 했냐 하면 사무엘상 15장 7절~9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7절~9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말렉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왕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다고 하지요.

여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소유물들 중에서 하찮은 것들은 다 죽이고 가장 좋은 가축들은 그대로 끌고 왔습니다.

이는 사진 한 장으로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옵니다. 그들은 아말렉의 왕을 사로잡고 와요. 그리고 좋은 가축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울이 그래도 하나님 명령을 꽤 충실히 수행했잖아요.

그리고 뭐, 솔직히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쓸모 있는 가축들을 가지고 온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제부터는 ‘현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앞서 살펴본 사실관계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서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명령을 행하지 않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7절~19절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당신을 왕으로 세우시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해서 그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다고까지 해요.

이에 대해서 사울의 말을 들어볼까요.


사무엘상 15장 20절~21절
“20.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의 꾸짖음에 대해서 사울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님의 명령대로 제가 아말렉 사람들을 다 진멸했잖아요.

그리고 그 증거로 왕도 사로잡아 왔어요. 가축들 중에서 쓸모없는 것들은 다 죽여버렸고, 다만 가장 좋은 것들은, 솔직히 아깝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끌고 온 것인데 뭐가 잘못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 말씀, 그리고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비난, 그리고 사울의 변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나 사무엘이 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여기서 사실과 현실을 한 번 좀 정리해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고 그들의 소유들도 모두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에 대해서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했어요. 다만 그들의 왕만 사로잡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의 소유는 대부분 없애버렸고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서 끌고 왔습니다.

이를 인간적으로 본다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를 수행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울이 아예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잖아요.

물론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95% 정도는 수행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사울이 한 행위도 100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95점 정도는 줄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95점은커녕 0점, 전혀 하나도 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했다고까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사무엘상 15장 23절 후반부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13장 14절에 의하면 첫번째 실수에서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 두번째 실수에서는 아예 하나님께서 왕을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까지 하셨다고 사무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완전히 해고통보 아닙니까.

우리의 판단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 것을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과 현실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사실을 정적 시각, 현실을 동적 시각이라고 말씀 드렸고 진실을 신적 시각, 말하자면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 사울은 아말렉을 모두 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의 왕을 사로잡아 왔으며 왜 가축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끌고 왔던 것일까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울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이 아말렉 전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까요.


자,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아말렉을 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전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가장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우선 사무엘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사무엘 선생님, 제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말렉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울이 왔다는 소식은 들리는데 안 나타나요.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는데 어떻게 되었대요?

사무엘상 15장 12절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러 갔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대요.

하지만 사울은 안 보이고 그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후딱후딱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사무엘이 사울을 꾸짖자 사울은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4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이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자, 이 말을 보시면 사울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백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어요. 군사들은 자신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기는 했지만, 정작 백성들은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사울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쳐들어가서 아말렉 왕과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까지도 모두 없애버렸어요.

그랬다면 사울은 전쟁터에서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겠어요. 예, 다 죽여버리고 없애버렸으니 전리품이 없겠지요.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말렉 사람들에게 쳐들어가서 그들의 왕을 사로잡고,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가축들을 대거 끌고 왔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는 백성들로부터 크나큰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더라면, 비록 자신이 칭송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했어야 했겠지만, 사울이 원하던 것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사울은 사람들로부터 열광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이 높임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기념비,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닌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의 고백처럼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비유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고보니 첫번째 실수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그가 끝까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번제를 드려버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13장 11절~12절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이것 보세요. 그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오로지 그의 백성들만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사울 왕이 저지른 잘못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때 사울이 한 짓은 분명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죄가 됩니다.


자, 지금부터 제 말씀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맡긴 일을 처리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한테 일을 맡긴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을 처리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아니면 전혀 상관 없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그 결과 정작 자기한테 일을 맡긴 사람한테 손해를 끼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를 좀 쉽게 말씀 드려볼까요.

어떤 사람이 A라는 회사에서 일을 해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A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A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하지는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아니면 경쟁사 B라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함으로 인해서 그 결과 정작 A라는 자기 회사에 대해서 손해를 끼쳤다면 이는 당연히 잘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잘못인가요? 아니에요. 이는 엄연한 현행법상 범죄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무슨 죄냐 하면, 대한민국 형법에서 규정한 바로 업무상 배임죄입니다.

이는 사울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을 맡겼어요. 그렇다면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울은 자신에게 일을 맡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에 급급했고, 엉뚱하게도 백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께서 맡기신 명령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분명히 사울은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업무상 배임죄를 저지른 그 직원을 회사에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아니에요. 당장 내쫓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형법 제356조 제2항에 의해 10년 이하의 지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행법을 위반한 한 개인도 업무상 배임죄를 저지르면 처벌을 받게 되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왕 사울이 어찌 왕으로서 직임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사실과 현실만 보았다면 사울은 100점까지는 안 되더라도 95점 정도는 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진실까지 살펴보면 어떻게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울은 95점은 고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크나큰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인 것이지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약에 사울 왕이 하나님께 좋게 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였더라면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서 높임을 받았을 것을, 결국 그는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세상에게 기쁨을 구한 나머지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까.

마태복음 14장 28절~30절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여러분, 베드로에게 오라 한 분이 바람입니까, 주님이십니까. 그렇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가야지, 엉뚱하게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 결국 빠지고 말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부르신 분이 백성들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며 가야지,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백성들을 보고 두려워하면 어떻게 돼요?

예, 마치 물속으로 빠져가는 베드로처럼 실족하고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누가 부르셨습니까. 세상이 불렀습니까, 우상이 불렀습니까, 아니면 마귀 사탄이 불렀습니까.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여 세워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택하셨대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우리를 주님 안에서 택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바람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우리를 세워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택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워 주시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주님을 바라보며 순종하고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9회 [면류관 강해 제10회] 아말렉의 죄악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3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10번째 시간으로서 “아말렉의 죄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사울이 저지른 두 번째의 결정적인 실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사울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계속해서 공부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 이전에 아말렉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3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오늘 이 명령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어른부터 젖 먹는 아이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진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르고 있던 가축들까지도 완전히 죽여 없애 버리라는 엄중한 말씀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씨를 말려버리고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에게 대해서 상당히 화가 나셨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아말렉에 대해서 이처럼 화를 내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대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좀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있었던 전투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까요.

출애굽기 17장 8절~16절 사이에 보시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말렉 사람들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그리고 9절에 의하면 모세는 한 사람을 택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하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여호수아가 성경에 등장하게 되는데, 모세가 여호수아를 임명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중임을 맡기게 되어 마침내 모세의 후계자로서 가나안 땅 정복을 하게 되는데, 벌써부터 모세는 여호수아에 대해서 신임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의 나이를 한 번 짚고 넘어갈까요?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여호수아 14장 7절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출애굽을 했을 당시의 나이가 모세는 여든 살이었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가 출애굽으로부터 1년 정도 뒤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기 때문에 그 때 여호수아의 나이가 마흔이었다고 한다면, 아말렉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이 시점은 아직 홍해를 건너고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모세는 여든 살이고, 여호수아는 마흔에서 1년 전인 서른 아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든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젊었을 때 날고 뛰던 모세라 하더라도 선봉에서 싸우기에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는 서른 아홉입니다. 그야말로 한창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모세는 비록 애굽에서도 왕실에서 자라기는 했습니다만, 여호수아나 다른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가 다 노예 집안 출신입니다.

그런데 노예한테 군사교육을 시켰겠습니까.

노예한테 괜히 군사교육을 시켰다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까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명령을 합니다. 네가 알아서 사람들을 선발해서 군대를 조직하고는 목숨을 걸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워라.

만약에 여러분이 모세한테 이런 명령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저, 있잖아요. 저를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태어나서 평생 노예로만 살았는데, 아니, 제가 뭘 안다고 사람들을 선발해서 군대를 조직하고 어떻게 전투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런 걸 제가 배워 봤어야죠. 이러다가 저 뿐만이 아니라 다 죽어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못합니다.”

아니, 제 말이 이상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하지만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출애굽기 17장 10절 전반부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이야, 참 멋있지 않습니까. 모세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았어요. 그는 단 한마디 핑계나 변명도 하지 않고 모세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과감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훗날 다윗은 고백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그렇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칼이나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은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보다도 훨씬 전에, 여호수아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호수아에게 이 말을 남겨놓고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싸움을 지켜보는데, 출애굽기 17장 11절 이하에 의하면, 모세가 지팡이를 쥔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졌다는 거예요.

당시 모세 나이 여든이셨다고 하니 오랫동안 팔을 올리고 있었다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러자 모세가 손을 올리면 그 손을 아론과 훌이 각각 붙잡아서 내려오지 않게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어떻게 되었대요?

출애굽기 17장 13절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여호수아가,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밖에 살지 못했던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고 나아가자,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말렉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 보시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전투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이 전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14절~16절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 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해서 아주 단단히 화가 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리라,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왜 이토록 화를 내셨을까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25장을 보실까요.


신명기 25장 17절~19절
“17.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9.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여기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운 바로 그 전투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은 이 전투에서 당당하게 싸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피로에 지쳐 있을 때, 뒤로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고 되어 있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과연 아말렉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말렉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이방 사람들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6장 12절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여기에는 우선 ‘에서’가 등장하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에서와 야곱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야곱의 자손이 되는 것이고, 아말렉은 에서의 자손이 되는 것이니,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이 둘은 형제지간이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자,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탈출을 했습니다. 이제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에서 빠져 나왔지만, 거기까지 오는 것도 대단히 힘든 과정이었지요.

열심히 도망쳐 왔더니 홍해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어요.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추격해 옵니다.

이제는 여기서 다 죽는구나 하고 절망을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셔서 가까스로 광야로 건너올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곳은 풀한포기 나지 않는 곳이에요. 애굽은 나일 강이 있어서 비옥한 지역이 있었지만 광야에서는 어디를 가나 물 걱정 끼니 걱정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는 일부 물이 있어서 오아시스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만, 광야의 대부분은 본래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도록 하게 하시고, 그리고 때를 따라 물을 공급해 주셔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척박한 광야에서의 생활. 홍해를 나와 아직 시내산에도 다다르지 못한 그들은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문제이지만, 나무들도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늘도 없어요. 비도 안 내립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햇빛이 내리쬐고 모래바람 부는 땅을 적게 잡아 수십만 명, 많게는 수백만 명이 그저 걷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한 생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반면에 아말렉 자손들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광야에서 아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자, 여러분의 기억력 테스트를 한 번 해볼까요? 여호수아가 싸우고 모세가 손을 들어서 승리를 하게 된 전투가 어디서 있었다고 했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17장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예, 그곳은 바로 르비딤이었다고 합니다.


자, 일단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애굽의 국경을 넘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애굽 군대들이 추격을 해왔습니다만, 홍해를 건너게 되자 애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제 완전히 애굽에서 탈출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그들은 시내산을 향해 진군을 합니다. 시내산에 도착하게 되자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셔서 율법과 함께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주시게 되지요.


그렇다면 르비딤은 어디에 있냐 하면 홍해와 시내산 그 중간 부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애굽에서 탈출해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르비딤이라고 하는 곳은 그 지명이 “평원, 쉬는 곳” 이라고 해요. 따라서 그 곳은 광야 중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물이 많고 나무들도 우거져서,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대단히 적합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저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무기를 든 것도 아니요, 공격을 해올 것 같지도 않아요.

공격은 무슨, 아직 광야라는 환경에 적응도 제대로 못해서 그 발걸음은 무겁고 지금 피로에 지쳐서 손으로 슬쩍 밀기만 해도 쓰러져버릴 것만 같아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아말렉에 있어서 남도 아닌 자신들의 형제 벌인 이스라엘 자손들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에게는 물도 있어요. 식량도 있습니다. 충분히 도울 수가 있어요.

아니, 꼭 물질로 돕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르비딤’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처럼 최소한 좀 쉬게라도 해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은 어떻게 했대요?

예,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스라엘 자손들의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뒤에서 공격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비열한 짓입니까.

하지만 그것 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토록 화를 내셨을까요.

이 일에 대해서 신명기 25장 18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신명기 25장 18절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비열하거나 비겁한 짓이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짓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라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았을 때, 아무리 그들이 지쳐서 보잘것 없이 보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발걸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그들이 400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았고, 이제 간신히 탈출해서 누추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기 힘으로 자기 멋대로 걷는 발걸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겉모습이 아무리 볼품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힘겨워 하는 이웃이 있습니까.


겉보기에는 그 사람이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에 하나 그 사실을 잊고 그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거나 모욕을 준다거나 괴롭힌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십니까.

출애굽기 17장 16절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러분, 이 세상에 권력자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경우는 더러 있겠으나,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편 128편 1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기서 ‘경외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시편 128편 1절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그의 명령대로 사는 자는 복이 있다.”

그렇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만으로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빼앗기지 않고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우리 이웃도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지켜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8회 [면류관 강해 제9회] 사울이 버린 것 (1)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8절~12절
“8.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9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이 버린 것”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에도 좀 정보량이 많아서 이번주와 다음주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자, 이번 시간에는 지난 주에 이어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그는 그 자신의 노력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의 인생은 어떠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나를 높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생동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 합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떤 프로야구 구단에 있어서 제일 높은 사람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그 팀의 감독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감독에게는 선수들을 훈련 시키고 누구를 시합에 내보낼 것이며, 어떤 작전을 써서 경기를 펼칠 것인지를 결정하는 등 그 팀을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실무적인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감독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 그것은 바로 구단주, 오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너는 대부분 그 구단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 사장이 맡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구단에 따라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오너가 회사 사장이든 개인이든 간에 그는 구단의 소유주라고 할 수 있어요. 구단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얼핏 보기에는 감독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진짜 높은 사람은 바로 오너, 그러니까 구단주인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감독도 결국 오너 밑에 있는, 말하자면 월급쟁이 사장, 아니, 월급쟁이 감독인 셈입니다.


선수들 앞에서는 아무리 큰 소리를 치는 감독이라 하더라도 오너 앞에 서게 되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고 아무리 잘생기고 멋지고 선수들에게 인기가 많은 감독이라 하더라도 팀의 성적이 부진한 경우에는 오너 말 한 마디에 언제든지 경질이 될 수도 있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간단히 말해서 그 팀의 소유자는 감독이 아니라 오너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오너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팀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감독에게 팀을 맡긴 것이고, 감독은 열심히 팀을 이끌어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 그 임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감독이 선수들에 대한 훈련이나 아니면 경기에서 이길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이 감독이라고 하는 것을 내세워가면서, 맨날 목에 힘을 주고 잘난 척만 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슨 감독을 맡길 만한 사람이 그 사람 뿐인가요.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오너라 하더라도 그 감독을 잘라 버리고 다른 감독을 앉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혹시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 봤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사무엘상 9장 17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가리켜 사무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울이 그의 백성을 다스리리라”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사울이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구단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구단주라고 한다면 사울 왕은 감독이라는 것이 됩니다.

구단의 소유주는 감독이 아니라 구단주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은 사울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되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앉힌 이유는 구단주의 뜻에 합당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백성의 소유주 되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던 것이지요.

자, 그럼 순종을 하려면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아야 하는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 16절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그렇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그들의 숙적이자 당시에도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울이 즉위한 후 그의 인생을 바꾼 세 번의 전투 역시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 때였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크게 두 번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첫번째 실수는 사무엘상 13장에 등장합니다.

이제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 전투를 시작하려고 해요. 13장 2절에 의하면 사울은 정예부대 3,000명을 택해서, 그 중 2,000명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나머지 1,000명은 자기 아들 요나단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제 사울이 길갈에 있는데 블레셋 군대는 수없이 많아서 그와 함께 했던 백성들은 불안해했다고 해요.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다음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8절~12절까지를 한 번 보실까요.

사무엘상 13장 8절~12절
“8.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1.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그러니까 7일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까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졌다고 해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 사무엘상 10장 8절을 봅니다.


사무엘상 10장 8절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여기서 보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것이니까 너는 먼저 길갈로 가서 7일 동안 기다리라고 명합니다.

물론 이 두 구절을 보면 장소가 똑같이 ‘길갈’로 되어 있긴 합니다만, 10장 8절에서 7일 동안 기다리라고 말한 때가 13장 8절이다, 라고 하기에는 그 사이가 너무나 벌어져 있어요.

그래서 대다수 신학자들이 생각하기에는 당시 사무엘 선지자는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사울 왕에게 7일을 기다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종종 내리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을 합니다.

따라서 문맥상으로 볼 때 13장 8절에서도 역시 그 이전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길갈에 가서 7일 동안 기다리라고 명령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제 7일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무엘은 오지 않아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시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구약시대에도 비록 지금처럼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시간이라는 개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말에 있어서는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단순히 7일 동안 기다리라는 것이었잖아요.

자, 여러분께서는 오늘이 7일째가 되는 날이에요. 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을 보면 그 날의 끝은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가 진 때까지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거든요.


하지만 당시 사울에 대한 장면을 보면 아직 해가 저물었다는 기록이 없어요.

다만 사무엘이 약속한 7일째가 되었는데도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 이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져요.


본래 사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2,000명이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15절에 보면 그 수가 600명까지 줄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사울은 불안하고 초조하죠. 가만히 있다가는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전쟁도 못해보고 도망가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되자 누구보다도 불안해진 사울은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13장 9절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은 말합니다.

“야, 안 되겠다. 사무엘을 기다리다 다 죽겠어. 제물을 이리로 가져와. 내가 제사를 드릴게.”

사실 왕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사울은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제사를 드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보고 우선 사울이 어디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잘못으로 그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서 어느 지파 사람들만 할 수 있었습니까.

예, 그것은 바로 레위 지파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지파 사람들은 제사는커녕 하나님 성전에 있는 기물들을 만질 수 조차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울 왕은 무슨 지파 사람입니까.

사무엘상 9장 1절에 의하면 그는 베냐민 지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제아무리 왕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직접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편 사무엘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장 1절에 의하면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를 가리켜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는 애굽에서 총리로 있을 때 낳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록만을 보면 마치 사무엘이 에브라임 지파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대상 6장 34절 이후에 보시면 사무엘의 족보가 나오는데, 사무엘에서 그의 아버지 엘가나, 그리고 그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38절에서는 야곱의 아들 레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고보니 사무엘상 1장 1절에서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에 대해서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했을 뿐 ‘에브라임 지파’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사무엘 집안은 비록 그 가족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거주했었지만, 족보상으로 본다면 사무엘은 분명 레위 지파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울의 두 번째 잘못으로, 그는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7일을 기다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울은 분명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그냥 몇 월 몇 일에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면 됐지, 왜 굳이 기다리라고 했던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두 가지의 기다림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출애굽기 24장 12절~18절
“1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13.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15.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남겨둔 채 여호수아와 함께 산을 오릅니다.

이제 아마도 어느 정도 올라가서 6일 정도 기다리니까 7일째가 되어서 모세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40일 동안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지요.

40일이 지나자 산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출애굽기 32장 1절~6절
“1.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모세가 한 달이 넘도록 안 내려오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제사를 드리며 숭배를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산 아래에 있어요.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과 산에 있어요. 그러면 누구 하나가 빠졌죠? 예,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모세가 산에 오르기 전까지는 모세와 함께 산 중턱 부근에 함께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모세가 산에 오른 다음에 여호수아는 다시 아래로 내려왔을까요?

자, 여기서 출애굽기 32장을 봅니다.


출애굽기 32장 15절~17절
“15.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16.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 십계명이 새겨진 증거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도중에 여호수아를 만나요.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저기 백성들한테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 무슨 싸우는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사실 이는 싸우는 소리가 아니라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난리를 치는 소리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죠. 모세가 올라간 뒤 산밑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세와 함께 오르지도 못한 여호수아는 산 중턱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며칠 동안이나요?


예, 40일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 40일을 기다린 것이지, 아니, 생각해 보세요.

애초에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40일 있다가 내려오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 이유는 모세도 40일이나 걸릴 거라는 사실을 몰랐거든요.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모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먹을 것은요. 모세야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배고픈 줄도 몰랐겠지요. 하지만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풀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 있는 산 중턱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몇 날 며칠동안 홀로 있으면서 모세를 기다렸을 여호수아.

이에 반해 끝까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버리고는 우상을 섬기며 난리를 치던 이스라엘 자손들.

이 두 기다림이 너무나도 대조되지 않습니까.


결국 기다림을 참지 못해 하나님을 버렸던 아론이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엄하게 질책을 받았으나, 끝까지 인내하고 견딘 여호수아는 장차 모세의 뒤를 이어 큰 종으로 쓰임을 받게 되고,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서 가나안 땅 정복을 성공적으로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이 번제와 화목제를 위해 기다리게 한 것. 이는 단순히 그가 게으름을 피운 것이 아닌, 그 기다림도 또한 번제와 화목제 때 바쳐지는 다른 제물 못지않게 하나님께 바쳐지는 귀한 제물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기다리지 못한 사울이 자기 멋대로 제사를 드리자 곧바로 나타난 사무엘은 그를 엄하게 꾸짖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이신 율법을 어기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졌었더라면, 그가 면류관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영광된 이스라엘의 왕위는 사울의 가문에 영원히 이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지지 못했던 사울은, 이제 그에게 주어졌던 면류관이 빼앗기고 그 나라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이라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울의 입에서 용서와 회개가 나오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사울이 버린 것’이라는 것 중 첫번째 시간으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용 중에서 사울이 버린 것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었습니다.


‘기다림’을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영광된 이름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지만, ‘기다림’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결국 실패한 왕으로 남게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믿음 안에서 기다리는 지혜를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이사야 59장 1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힘이 부족해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요, 귀가 어두워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을 때에 우리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로부터 ‘기다림’이라는 귀한 제물을 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그 어떤 제물보다 값진 제물인 ‘기다림’이라는 제물을 주님 앞에 거룩하게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된 면류관,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7회 [면류관 강해 제8회] 사울이 얻은 것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0절~22절
“20.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21.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22.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8번째 시간으로서 “사울이 얻은 것”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자, 이번 시간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엘리 제사장은 그의 아들들과 같은 날에 사망하고, 이제 그의 밑에서 성장한 사무엘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혜롭게 다스렸고, 백성들 또한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 사무엘도 나이가 들었어요.

사무엘상 8장 1절~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8장 1절~3절
“1.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그에게는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산의 뒤를 잇는 사사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지난 번에 알아본 바와 같이 그의 스승인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문제가 많았는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 또한 그의 두 아들들에게는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무엘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중에서도 대표적인 선지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처럼 아버지가 충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처럼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와 달리 뇌물을 먹고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식 만큼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늙어서 이제 실무적인 일은 아들들이 하는데 이처럼 문제가 많다 보니까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도 남의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고 요구를 하지요.

그 때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제사장이나 사사였다고 말씀 드렸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왕과도 같은 통치자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도자였을 뿐이었지요.

그렇다면 이른바 지도자와 통치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권력의 상징은 바로 인사권과 형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시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나 사사에게는 이와 같은 권력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의 인사권에 있어서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레위지파 사람들 뿐이었고, 그 중에서도 각 자손에 따라서 감당할 임무가 율법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사사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이 따라주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따라주지 않았다고 해도 체포해서 형벌을 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사시대를 상징하는 구절로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사기 17장 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당시 율법은 있었습니다만, 이를 어겼다고 해서 누가 체포하거나 감옥에 가두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반면에 통치자인 왕이 다스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왕은 제사장이나 사사와 달리 막강한 공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총리나 장관 같은 높은 자리에 앉힐 수가 있어요. 그리고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있어서 왕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없는 것이 좋습니까.

사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 통치자가 있어서 좋은 것은 별로 없어요.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문제가 많았고, 그리고 자기들이 보니까 남의 나라 왕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대신해서 왕이 싸우고 그러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에게도 이제 사사가 아니라 왕을 달라고 성화를 했던 것이죠.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독특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의하면 하루는 기스라는 사람이 그의 아들 사울에게 말하기를 암나귀를 잃어버렸으니 사환과 함께 찾아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함께 있던 사환이 말합니다. 이 근처에 선지자가 살고 있다고 하니 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자고 해요. 그 인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무엘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물어물어 사무엘을 찾아갔더니, 아직 사울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말하기를, 네가 찾고 있는 암나귀는 이미 찾았으니 걱정할 것 없고,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말을 나눌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삼십 명 가량이 모인 잔치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그를 앉히고는 그에게 고기 중 제일 좋은 부위를 주며 대접을 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무엘은 이미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사무엘이 사울을 처음 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9장 17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사무엘은 이미 사울과 말을 나누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왕이 될 인물이라는 사실을 듣고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식사를 마치고는 사무엘상 10장 1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이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으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당장 왕으로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왕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궁궐이 있는 것도 아니요, 왕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되려면 다스리는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지금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당장 밖으로 나가서, 이제부터 내가 왕이다, 라고 해봤자 아무도 인정을 안 해준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무엘상 10장 17절 이하에 의하면 사무엘은 얼마 뒤,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요.


구약에 의하면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제비를 뽑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열 두 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그 중에서 가족별로 뽑으니까 사울 가족이 뽑혔고, 또 그 중에서 뽑으니까 정말로 사울이 뽑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자리에 사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어디 있었냐 하면 사무엘상 10장 22절에 의하면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고 해요.


이와 같은 기록으로 우리는 몇 가지를 짐작할 수가 있겠습니다.

첫째로 사울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울 가족 중 누군가가 사울을 대신해서 제비를 뽑았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둘째로 사울은 자신이 뽑힐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마지막 셋째로 사울은 그의 성격이 대단히 소심하거나 겸손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이제 사울을 데려오고 사무엘은 그를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임명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만세를 외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어요.


사무엘상 11장 5절의 기록을 보면 여전히 사울은 밭에서 소를 몰며 일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암몬 사람들이 공격을 해와요. 반면에 이스라엘에는 마땅한 군대가 없습니다.

사실 그럴 만도 하지요. 왕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군대도 없고, 군사 지도자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사사라고 해도 사무엘은 늙었고, 문제가 많았다는 그의 못난 두 아들들이 제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어서 전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통곡을 합니다.

마침 밭에서 소를 끌고 오던 사울이 사람들의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이유를 물어요. 그랬더니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고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사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는 그 조각난 소를 이스라엘 각 지역에 보내서, 너희들이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소들도 이렇게 만들어 버리겠다, 하고 전령을 보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각 지역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공포심을 심게 하시니까 수많은 백성들이 나왔어요.

사무엘상 11장 8절에 의하면 사울의 집합 명령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총 3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이제 그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암몬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새벽부터 한낮까지 공격을 해서 풍비박산을 내버리고 맙니다.

이제 이렇게 되니 누가 보더라도 왕 다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서 사울은 비로소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이제 진정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소심하고 겸손했던 사울에게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와 같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1장 6절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이 울부짖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아무리 소심하고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능히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여기까지가 사울이 이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왕으로서 등극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있었습니까.

방금 말씀 드린 암몬 사람들을 물리친 거요? 아니, 그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에 있었던 일이잖아요.

그것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세움을 받기 위해서 했던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예, 따지고 보면 왕이 되기 위해 그가 노력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이 왕이라는 자리가 보통 자리입니까. 우리나라 대통령 같은 경우는 현행 헌법상으로 볼 때 5년까지밖에 못 합니다.

세계를 쥐락펴락 한다는 미국 대통령도 1기에 4년, 연임을 해도 8년까지밖에 못 해요.

그러나 왕은 어떻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라는 자리는 임기가 없어요. 한 번 즉위하면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하게 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자기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기 후손에게 그 자리를 물려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왕이 가진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 지금의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부러우신가요. 예, 물론 부러울 수도 있겠지요.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본다면 그 몇 년 밖에 못하는 대통령 자리 한 번 해보려고 얼마나 고생들을 많이 합니까.


그런데 사울은 어때요. 예, 그냥 잃어버린 암나귀 찾으러 나갔다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제비를 뽑았더니 당첨되어서 왕으로 임명된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은 그의 노력 없이 어마어마한 절대권력, 상상할 수도 없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또한 어떻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는 사울 못지않게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축복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구원이라는 축복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없습니다.

아니, 없을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이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구약에서 누군가가 한 마디, 당신의 아들을 어서 보내주셔서 나무에 달리게 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제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 하더라도 그렇게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말은 뭐예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할 정도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있어서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서 죽게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구원 받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는 채찍에 맞아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형벌을 받으시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축복을 위해서 우리가 지불한 대가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없었어요.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지불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구원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 없이 거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주님으로부터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축복, 엄청난 축복을 어찌 사울이 받은 축복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은 지금까지 ‘사울이 받은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노력없이 사울이 받은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다음은 ‘사울이 버린 것’이라는 제목으로 계속해서 사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은혜, 우리가 받은 축복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6회 [면류관 강해 제7회]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들 (2)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 17절~18절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7번째 시간으로서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들”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지난 시간에는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오늘은 그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직무 수행에 있어서는 제사장적인 역할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는데,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렇다고 무슨 가축처럼 죽여서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 것이지요.

그래서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밑에서 자라면서 하나님 섬기는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한편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들에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을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두 아들에게 돌리기 보다는 그들의 아버지인 엘리에게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 27절에서 36절에 보시면 이름도 밝히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불현듯 나타나서 엘리를 책망합니다.

우선 이 말씀을 조금씩 살펴볼까요?

먼저 사무엘상 2장 27절에서 29절까지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상 2장 27절~29절
“27.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내어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모세의 형인 아론을 제사장으로 삼아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감당하게 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점령하여 땅을 분배할 때를 보시면, 다른 지파 사람들과 달리 레위 지파 사람들은 나누어 받은 분깃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땅을 분배 받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안 좋은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들이 분배 받은 땅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만, 레위 지파 사람들은 세상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일에만 전념을 하면서 사람들이 가지고 온 제물 중에 일부를 하나님께 바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일정부분을 자신들이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일도 해야 했지만, 그들은 온전히 하나님 일만 하면 되는 그와 같은 직분이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겠습니까.

아론의 자손들은 이처럼 은혜를 입은 집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하나님 일을 하는 데에 정진해야 하잖아요.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말씀에 의하면 그들 즉 엘리 집안 사람들은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하십니까.

우선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과 예물을 밟았다고 합니다.

이는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이나 예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들이 멋대로 취하거나 다루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엘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네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중히 여겨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치는 예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기보다도 자신들이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네 두 아들들이 한 짓은 잘못했지만 그 이유는 엘리 제사장 네가 하나님보다도 네 아들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 까닭이 아니냐. 1차적인 문제는 두 아들이 아니라 너한테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사무엘상 2장 30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이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히 여기지만 나를 멸시하는 자는 내가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그러면서 이제 엘리 제사장 집안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 31절~36절
“31.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선 엘리 집안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겠다고 하십니다. 다른 집안에는 축복이 임해도 너희 집안에는 환난이 닥칠 것이고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래 살았다 하더라도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슬퍼진다고 하세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자손들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들이 젊어서 죽을 것이고, 어쩌다가 오래 산다 하더라도 건강이 나쁘고 슬픈 일들만 있을 것이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고요? 예, 바로 제사장 엘리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이와 같은 말씀은 쉽게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나 봅니다.

어쩌면 그들의 집은 크고 재물도 많고 그리고 건강한 사람들도 많아서,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우리 집안에 그런 일이 일어 나겠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한 일이 틀림없이 일어나는데, 네 두 아들이 같은 날에 죽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하세요.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너 대신 충실한 제사장을 세울 것이니 너희 집안 사람들은 그 사람한테 가서 푼돈으로 허드렛일을 구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절망스러운 저주입니까.

이런 말을 들었으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이구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이놈의 자식들부터 엄하게 가르쳐서 바로잡게 하든지, 그래도 안 된다면 당장에 그 직분을 빼앗아버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무서운 말씀을 듣고도 제사장 엘리가 회개 했다거나 용서를 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나라를 심판하려고 하실 때에는 일반적으로 한 번만 경고하지 않으십니다. 어서 돌아오라, 제발 돌아오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셔도 안 들으니까 이제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사무엘상 3장 11절~14절
“11.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엘리의 집에 내리겠다고 한 심판을 이룰 것이다. 이는 그 자신도 알고 있는 죄악 때문이다. 자기 아들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를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시지요.

자, 엘리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이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듣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무엘상 3장 18절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어린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엘리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대로 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잘 하실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 들으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의 말처럼 들리시나요?

여러분, 지금은 무엇이 필요할 때였습니까. 그렇죠.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지금이라도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눈물로 기도를 드렸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 지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역시 이번에도 그의 입에서 회개나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지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하는 방심 때문이었을까요.

엘리 제사장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실로 끔찍했지요.


사무엘상 4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천적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블레셋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주에 사사라고 하는 사람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것은 바로 군사 지도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쟁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그 선두에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어야 했습니다만, 엘리의 모습은 전쟁터에 없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 15절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가 98세였다고 하는데, 고령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18절의 기록처럼 몸집이 무거워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본래부터 군사지도자 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동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선민이었다면 한낱 이방인들에게 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 2절에 의하면 그 때까지 사망한 이스라엘 군인이 4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이게 보통 일입니까.

이제 그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실 전쟁에 패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여호수아 7장에서 전쟁에 패배한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패배의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블레셋 군에게 패배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기서 결정적인 판단착오를 합니다.


그들은 승리하기 위해서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전쟁에 졌을 때 언약궤를 가져오면 승리한다는 일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보다도 자신들의 지혜를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도 자신들의 생각을 의지했던 것이지요.

이제 하나님이 오셨는데 어찌 전쟁에서 질 수가 있겠습니까. 언약궤가 전쟁터 진영으로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대는 승리를 확신하면서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 6절~11절
“6.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스라엘 진영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블레셋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오히려 더욱 힘을 내어 싸우게 되었고, 1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오른 블레셋 군대에게 대패하여 희생자가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니, 이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오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희생자가 4천명이었는데, 언약궤가 오니까 승리하기는 커녕 희생자가 일곱 배 이상이나 늘어난 3만명이었다고 하잖아요.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의 언약궤는 빼앗기고 말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했던 것과 같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같은 날 전장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괜히 언약궤를 가져온 바람에 그들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빼앗긴 언약궤가 가짜였습니까. 아닙니다. 빼앗긴 언약궤는 블레셋 진영으로 운반된 뒤에도 이적을 나타냈습니다. 그 언약궤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진정한 언약궤였던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스라엘 군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지고 말았던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언약궤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싸구려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어 성경책을 아무리 비싼 재료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건 그냥 책에 불과합니다. 그 책 자체에는 어떠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책은 어디에 가치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그 책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읽지도 않는 성경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거나 차에 싣고 다니면서 성경책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성경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책을 싸구려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목걸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 목걸이나 장식을 하고 다니거나, 아니면 집 같은 데에 걸어 두면서, 그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살아나 주신 예수님을 묵상하게 된다면 이는 은혜롭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무슨 마치 싸구려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십자가 목걸이가 나를 지켜줄 것이다? 십자가를 걸어 놓으면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거나 십자가를 걸어놓게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와 같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던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 미리 사전에 만류해야 할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당시에는 그 역할을 누가 했어야 했습니까.

그렇죠. 사사이자 제사장이었던 엘리가 그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분명 자신이 책임 지고 관리했을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는 것에 대해서 제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결정한 이스라엘 장로들은 애초에 엘리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았어요.

이를 보더라도 엘리의 지도력이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이스라엘이 패하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의 손에 넘어갔고 자신의 두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상 4장 18절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엘리는 자신의 두 아들이 죽었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제사장 엘리, 그의 아들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막기는커녕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이 여념이 없었던 제사장 엘리, 이제 그와 그 두 아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그에게 주어졌던 면류관은 빼앗겼으며 그 집안에 주어졌던 촛대는 옮긴 바가 되어 이스라엘의 지도자 자리는 이제 엘리의 자손이 아닌 사무엘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일반 성도도 아닌 제사장이나 사사라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까.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의 구원은 약속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엘리나 그 두 아들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죽게 되었는데, 그 후에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도록 경고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촛대를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견디며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기쁨의 면류관, 영광된 면류관,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5회 [면류관 강해 제6회]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들 (1)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3장 12절~14절
“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온라인 후원
KB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NH농협은행 302-1981-7399-2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안내 : www.후원.com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6번째 시간으로서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들”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오늘과 다음 주로 두 번에 나누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자, 오늘 이 시간에는 사무엘 상에 있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주하는 동안에 이른바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삼손과 같은 사사가 있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난 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사의 역할은 재판을 하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 군사 지도자적인 임무도 감당 했었습니다.

사사가 총 몇 명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어떤 기준으로 구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하겠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 대체적으로는 보통 12명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각각 열 두 지파로 나뉘게 되는데 사사들을 보면 그 지파가 다양합니다.


첫 사사인 옷니엘은 유다 지파이고, 왼손잡이 에훗은 베냐민 지파, 드보라는 에브라임 지파,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돌라는 잇사갈 지파, 야일과 입다는 길르앗 지파, 엘론은 스불론 지파이고, 삼손은 단 지파입니다.

그리고 사사의 경우에는 이처럼 지파가 다양하다는 점으로 알 수 있듯이 그 지위가 세습되지 않는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사사의 아들이 사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세워 주시는 사람이 사사로서의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사는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기는 사사가 있었지만 또 어느 시기는 사사가 없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자면 사사는 첫째로 그 역할은 재판이나 군사 지도자였고, 둘째로 출신 지파가 다양했으며, 셋째로 세습되지 않는다는 점, 넷째로는 부재기간이 존재했다는 점을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제사장은 어땠는가 하면 이는 첫째로, 그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직분, 말하자면 예배를 드리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 직분입니다.


둘째로 제사장은 다른 지파가 아닌 오직 아론의 후손인 레위 지파 사람들 만이 선출되었으며, 셋째로 제사장 직분은 세습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리고 넷째로, 그렇다 보니 당연히 부재기간 즉 제사장이 없는 기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항상 누군가가 이 제사장 직분을 맡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사무엘상은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브닌나와 한나였다고 해요.


그 중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무슨 문제가 되나 하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이를 두고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게 했나 봅니다.

이를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과 사라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본래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죠.

그런데 창세기 16장에 의하면 사라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까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지려고 했는데, 정작 하갈이 아이를 갖게 되자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라를 멸시하게 되잖아요.


여종이었던 하갈도 아이가 생기게 되자 주인을 멸시했다고 하는데, 브닌나와 한나는 같은 정실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한나는 성전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 앞에 괴로워 하면서 기도를 드리지요.

사무엘상 1장 10절~11절
“10.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참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 엘리였던 것이지요.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절~16절
“12.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엘리는 한나가 입술만 움직이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 취한 줄 알고 말하기를 술을 끊으라고 권면을 했다고 하지요.


그래요. 일부 신학자들에 의하면 포도주는 당시에 여러 종교행사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술에 취해서 주정을 하는 사람을 목격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또한 당시에는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한나는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를 드렸다고 하기에, 이를 보고 한나가 술에 취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할 만한 소지가 있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엘리는 지금 일반인이 아니에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거기는 하나님의 성전이에요. 그런 그가 누군가를 권면한다는 것은 제사장이니 만큼 그의 말에 무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제사장으로서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지금 가슴이 아파 애통해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도에게 지금 뭐라고 있습니까.

사무엘상 1장 14절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이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사무엘상 1장 14절
"그녀를 꾸짖었다. '언제까지 술주정만 하고 있을 작정이오? 당장 술을 끊으시오!'"

엘리는 말합니다.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술주정을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술 끊어! 이렇게 아주 심한 말로 꾸짖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습니까.

만약에 정말 그랬다고 하더라도 꾸짖거나 하려면 무슨 확실한 근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술주정을 할 정도였다면 무슨 술냄새를 풍긴다거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다거나 뭐, 그런 것도 없는데도, 그냥 자기가 보기에 그런 것 같다는 이유 만으로 다짜고짜 술주정뱅이로 몰아가면서 성도에게 혼을 낸다면 되겠습니까.

이는 지극히 신중하지 못한 처신이라고 하겠지요. 그래도 명색이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기도인지 술주정인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 또한 상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모스은 이후에 나오는 엘리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좀 아쉬운 제사장 엘리입니다만, 그에게는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두 아들이었지요.

엘리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두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엘리는 그가 술주정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 한나가 낳은 아기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 살면서 양육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에요.

사무엘상 3장 12절~14절
“12.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13.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여기서 특히 13절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인의 성경판으로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사무엘상 3장 13절
“나는 엘리의 아들들이 행하는 악에 대해서 그 가족을 영원히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해 주었으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저주받을 짓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만이 아니라 엘리의 집 전체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엘리의 아들들이 악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는 이런 저주 받을 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아버지인 엘리는 이를 막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엘리의 두 아들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분을 내셨던 것일까요.



사무엘상 2장 12절~16절
“12.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부분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레위기 7장 28절~34절에서 화목제를 드리는 규정에 있는데, 그 규정 의하면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제물을 가져오면, 우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가슴과 뒷다리만 제사장이 취하고 나머지는 제물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들은 다른 부위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둘째로, 방금 말씀 드린 대로 제물을 바칠 때에는 우선 기름을 먼저 태워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기름을 태우기도 전에 먼저 고기를 내놓으라고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 셋째로는 삶은 고기가 아니라 자기 멋대로 고기를 구워 먹겠으니까 삶기 전에 날고기를 내놓으라고 하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요.

사무엘상 2장 17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지금 일반 평민입니까. 아니에요. 제사장 집안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제사장이고 뿐만 아니라 사무엘상 1장 3절에 의하면 두 아들들도 제사장 직분을 감당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해요? 이것이 어찌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들의 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2장 22절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부패하는 모습은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 지 모릅니다.

항상 세 가지 요소, 물질과 권위와 그리고 성적인 문제로 타락하지 않습니까. 율법으로 정해진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하나님 말씀보다도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고, 그리고 성적인 문란으로 인한 타락.


여기에는 믿음도 말씀도 행함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와 같이 타락해 가는 교회가 수없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사장이자 아버지인 엘리도 그의 두 아들이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23절~24절
“23.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엘리는 그의 두 아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들 또한 제사장이자 레위 자손으로서 누구보다도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물들어서 자신들의 지위를 악용하고, 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음란에 빠졌다고 한다면, 이는 제사장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미 실격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라면 당장에 그 직분을 빼앗아서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엄하게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앞서 한나에게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포도주에 취했다는 둥 술을 끊으라는 둥 하고 엄하게 질책을 했으면서, 정작 자기 아들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이토록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들도 자기 아버지의 성격을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니 그 아버지의 말을 듣겠습니까. 아무리 권면을 해도 안 들어요. 하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아들이 아버지의 권면을 듣지 않았던 이유.

사무엘상 2장 25절 후반부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돌이키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이 시점에서 오늘 본문 구절을 떠올려 보시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사무엘상 3장 14절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참으로 무서운 말씀 아닙니까.

여기서 제물과 예물에 대해서 신학자들에 의하면 제물은 피흘림이 있는 제사이고 예물은 피흘림이 없는 제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정한 그 어떤 제사라 하더라도 엘리 집안에 대해서는 죄 사함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두 아들에게 권면하는 엘리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25절 전반부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한국에서 예전에 그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영화화가 되기도 한 사건이었는데, 어떤 재판에서 판결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했냐 하면 그 판사 집까지 찾아가서 부상을 입히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니까 법원 쪽에서는 난리가 났겠지요. 판사회의가 열리고 이는 사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를 두고 어느 방송국에서 한 변호사한테 인터뷰를 했는데, 그 변호사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사건은 이미 게임이 끝난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서 재판을 받게 된 경우에는 변호사가 판사한테 어떻게든 잘 설명을 해서 가능하다면 무죄판결을,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든 판사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줘서 죄를 가볍게 해야 할 텐데, 그 사건의 경우에는 판결을 받아야 할 판사를 공격해버렸으니 더 이상 어떻게 판사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가 있겠냐는 거예요.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한 경우도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멸시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음란한 죄를 범하고 탐욕을 채우는 죄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께 잘 간구를 해서 용서를 받을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정작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하니 이를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엘리 집에 대하여 심판의 예언을 하십니다.

사무엘상 2장 34절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결국 사무엘상 4장 11절에서 그들의 죽음은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죄를 반복해서 저지르고 말았을까요.

자신의 아버지 만이 아니라 그들도 역시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버지도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고 그래도 왜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을까요.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형법에는 그런 조항이 있습니다. 어떠한 나쁜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만 14세 미만은 처벌할 수가 없다는 조항이에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세상적으로 보아 사리분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 지를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엘리의 두 아들은 어떨까요. 설마 그들이 율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사장은 사사와 달리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집안입니다. 적어도 지식으로는 분명 율법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자신들이 그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 제사를 소홀히 여기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지식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10장 1절~2절
“1.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하나님 앞에 분향하기 위해 사용한 불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왔다는 것만으로 불이 그들을 삼켜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지식이 엘리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에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어떻게 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멸시했습니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그 정도 어긴다고 벌을 받겠어? 우리는 제사장 집안이야. 대대로 내려온 명문 가문이라구. 그리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들은 틀림없이 구원 받을 거라니까.


어쩌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이와 같은 강한 믿음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구원의 면류관을 빼앗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기록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걸맞는 행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리 믿음이 있어 봤자 이는 공허한 믿음, 이는 자신을 결코 구원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좋습니다. 이는 대단히 값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지키며 행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고, 다음 주는 제사장 엘리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이제 진정한 믿음과 말씀과 그리고 이에 따르는 행함을 이루어 감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3회 [면류관 강해 제4회]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www.후원.com
미션펀드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미션펀드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내리신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모세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습니까.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애굽에서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사람을 해치게 되어 결국 광야로 돌아와 또 40년 동안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한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400년 가까이 되는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를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할까요.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 중 하나인 야곱이 있지요. 그의 아들인 요셉이 그의 형들에 의해 노예로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의 일이지요.

그리고는 노예로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팔려간 지 13년 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자, 그는 애굽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되어서 애굽을 다스리는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로부터 7년 동안에는 풍년이 들더니 그 이후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어서 애굽 외에는 모두 아사 직전이 되지요. 그러나 애굽에는 요셉의 지혜 덕분에 식량이 넉넉했습니다.

이제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과 일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불러들이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식량 걱정 없이,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 가족으로서 풍요로운 삶을 보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와 같이 좋은 환경 속에서 나날이 수가 늘어 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요셉을 비롯하여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자, 이제 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뀝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네 나라에 수많은 이민족이 있게 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배신을 할 수 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기 시작하고, 점차 노예로서 고된 삶을 강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이에요.


창세기 15장 13절~14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벌써 한참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라고까지는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이 말씀에 의하면 이방 나라에서 400년 동안 이방 나라에 살면서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기 12장 40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이상하죠?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이방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그것보다 30년이나 지났잖아요.

이 말씀을 보고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400년이라고 하면 400년 만에 풀어 주시거나 하실 일이지, 왜 30년이나 더 괴롭힘을 당하게 내버려두신 거냐.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계산을 잘못하신 거냐. 뭐, 그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에요.

자, 지금 시리즈로 전해드리고 있는 말씀은 주제설교가 아니라 강해이기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의미로 우리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방금 말씀드린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5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여기서는 400년 동안 이방 민족이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2장 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괴롭힘을 당한 기간이 아니라 단순히 거주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비록 430년이긴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은 400년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당시 총리였던 요셉의 부름을 받아 애굽에 들어갔을 때부터 노예로 살았던 것은 아니잖아요.

초반에는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노예로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노예로서 살았던 기간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선, 성경기록에 의하면 요셉이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고 7년 동안 풍년이 있은 다음에 7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하지요.

창세기 45장 6절에 의하면 요셉이 가족들을 불러들인 것이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으로 접어들고는 2년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풍년부터 계산하면 9년 뒤인 셈이지요.

이를 근거로 단순계산을 한다면,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고 난 다음,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은 9년 뒤이니까 요셉의 나이 39세 때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마지막인 50장 26절에 의하면 요셉이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요셉이 39세 때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왔고, 그가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총리로 있던 요셉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소한 70년은 평안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 만에 나왔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살았던 전체 기간인 430년 중에서 요셉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70년을 뺀다면 360년이라는 기간이 나오죠?


그러니까 요셉이 세상을 떠난 다음 곧바로 그들의 노예생활이 시작했다고 해도 430년 빼기 70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길어도 360년 동안 노예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400년 보다 무려 40년이나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360년이라고 하는 기간이 어디 짧습니까.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36년이라고 해도 대단히 긴 세월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36년도 아닌 최대 36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면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니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께서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셨습니까.

사실 꿈을 꾸는 데에 동서고금, 남녀노소, 그리고 빈부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2024년 11월 15일자 신문에 보니까 올해 수능 응시자 중에서 83세 되는 할머니도 계셨다고 하고, 그리고 작년 2023년 2월에는 94세 되는 할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하지만 노예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노예는 태어날 때 노예면 죽을 때까지 노예입니다. 노예는 꿈이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 자신이 무엇을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해요. 자신을 위한 삶도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 태어나서, 평생동안 주인을 위해 살다가 가는 인생이 노예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자, 여기서도 잠깐 공부 좀 하고 갈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일까요. 그들이 미워서 그러셨을까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인구의 증가율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대략 100년 동안에 3배에서 4배 정도의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00년에 4배라고 한다면 400년이면 16배잖아요? 이는 세계적으로 보아도 대략 추세가 비슷해요.

세계인구가 1600년에는 5억 정도였는데, 400년 뒤인 2024년대에는 80억이 되었으니 이것도 정확히 16배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인구는 대략 100년에 4배 정도, 400년이라면 16배 정도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엔 대해서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증가속도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46장 26절~27절
“26.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여기에 보시면 며느리들을 제외한다고 하면 아이들까지 합한 숫자가 70명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며느리까지 남녀노소 모두 합친 숫자를 본다면, 좋습니다. 반올림까지 한다고 치고 넉넉잡아서 약 100명이라고 해보죠.

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일 때, 처음에는 약 100명이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430년 뒤에 나올 때에는 인구가 얼마였다고 말씀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12장 37절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세어보니까 장정, 그러니까 성인 남성의 수가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남녀노소를 다 합치면 대략 20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산을 해요.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애굽에 들어갈 때를 약 100명이었다고 한다면 나올 때는 몇 명이요? 예, 200만명이라고 한다면 430년 동안에 몇 배가 늘어난 거예요?

100명에서 200만명, 400년 사이에 2만배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평균이 400년 동안에 16배인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20배도 아니고 2만배가 증가했어요. 세상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라는 환경에 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도록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신 결과입니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당시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들 하나가 아니야.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 거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뭐 이런 말을 별로 기뻐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지금 밥 한끼 먹을 돈이 없어요. 아니면 한달 치 집세를 낼 돈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재산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게……. 이러면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좀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자, 이제 그 수가 이제는 한 가정이 아니라 한 나라의 민족을 이룰 정도로 늘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점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모세를 부르실 때의 말씀을 우리는 주목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축복처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집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리고 자유도 소망도 없이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한테, 최고로 좋은 집과 넉넉한 재산을 주시겠다는 것보다도 더욱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을 이끌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나일 강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를 통해서 재앙을 내리시고, 질병과 자연재해와 마지막에는 장자를 치시는 이적을 통해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출애굽기 14장에 의하면 그들 앞에 놓인 홍해를 갈라 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격해오던 애굽의 최정예부대를 모두 전멸시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요?

예, 그렇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 아니, 야곱이나, 이삭도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그와 같은 놀랍고도 기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그리고 단순히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통해서만이 아니에요. 400년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폭발적으로 늘리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아무리 옥토였던 곳이라 하더라도 땅이라고 하는 것은 놔두면 폐허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렇죠. 가나안 여섯 족속을 시켜서 그 땅을 부지런히 가꾸도록 만드셨던 것이지요.

가나안 사람들은 그 거기가 자기들을 위한 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려고, 그들을 시켜서 열심히 가꾸게 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 백 년에 걸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줄 어마어마한 축복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준비하셨어요. 이 축복의 주인은 이미 정해진 것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주어진 영광된 축복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경은 무엇에 대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예, 순종에 대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이 모든 축복이 주어진다는 점은 이미 기정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왔습니다.


민수기 13장 1절~2절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내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 씩을 뽑아 총 열두명을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냅니다.


이제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 땅이 어떻다고 합니까. 아주 황폐하고 쓸모없는 땅이래요?

아닙니다.

민수기 13장 25절~27절
“25.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들은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땅,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에 거짓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 주실 축복이 정말로 놀랍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당장 올라가서 그 축복을 차지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지요.

민수기 13장 28절~33절
“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는 뭐예요? 예, 거기 있는 이방민족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 지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명료합니다. 너희들을 위해서 좋은 땅을 몇 백 년에 걸쳐 준비해 놨어. 너희도 가서 직접 봤지? 그러니까 이제 그 땅을 차지하면 돼.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말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강해 보여서 저희는 차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러고 있는 것이잖아요.

이를 보고 정탐꾼 중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합니다.

민수기 14장 6절~9절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합니다.

이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기 있는 백성들을 보고 두려워하지 마.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거기 사는 백성들이 아니라, 그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광대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땅이냐 하는 거야. 그 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로 했어. 그러니까 당장 올라가서 차지하자.

그러나 좌절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들은 듣지를 않습니다.


민수기 14장 1절~3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 저는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생각납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물위를 걸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폭풍이 몰아치는 물위를 걸어갔어요.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죠.

마태복음 14장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담대한 믿음을 가졌으면 예수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람을 보게 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국 물속으로 빠져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손가락으로 실험을 해보면 금방 압니다. 멀리 보면 자세히 보이더라도 손가락을 눈앞에 두고 가까이만 본다면 멀리 있는 모습이 흐려져서 안 보이게 돼요.

마치 그런 식이지요.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이길 수 있는데, 주님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바람을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게 되자 무서워서 실족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의 3절 가사가 어떻게 됩니까.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우리가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고는, 세상과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아닌 코앞에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그렇죠. 구속한 주님은 간곳없고 세상과 나만 보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요? 예, 그렇죠. 마치 바람을 보고 물속으로 빠져버린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현실 앞에서 실족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 이런 격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을 보니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제 도망가고 싶어요.

그래서 뭐라고 해요? 예,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가 그들한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하고 난리를 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6절~33절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들이 지금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뒤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보세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성 들여서 너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걸 못 받겠다고?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좋아. 너희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해주마. 사리분별이 있는 성인들 중에서, 내 말을 믿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광야에서 다 죽을 거야. 가나안 땅에는 절대로 못 들어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정성 들여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보죠? 저희가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겠습니다! 하고 자기들 멋대로 쳐들어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겠어요.


민수기 14장 39절~45절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값진 선물을 내던지셨어요. 너희들에게는 안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미 버스는 떠나간 다음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기로 되어 있던 그들은 순종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쓰러지게 되고 그들의 흔적은 광야의 모래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축복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놀라운 면류관,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을,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보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축복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순종을 버리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축복의 약속을 버려 버리셨듯이 우리를 향한 축복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믿고 견디게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모두 얻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끝까지 견딤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하신 면류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도 같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
728x90
SMALL
제472회 [면류관 강해 제3회]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5장 29절~34절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www.후원.com
미션펀드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미션펀드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오늘 본문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등장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그 출생부터 독특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이 두 형제는 쌍둥이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모가 매우 달랐어요.


창세기 25장 24절~26절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형 에서의 용모는 피부가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28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 구절에 의하면 형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던 반면에, 야곱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에서는 사냥을 해오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가족들에게 대접을 했는데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해 오는 음식을 아주 좋아했다고 하지요?

반면에 야곱은 맨날 집에 있으니까 어머니 리브가와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두 형제들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창세기 25장 22절~23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했는데 뱃속에서 아주 많이 싸웠나봐요.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구나 그때까지 출산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참으로 괴로웠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뱃속 아이들은 두 민족인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큰 자가 작은 자를, 그러니까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언제요? 예, 태어나기도 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렇다면 리브가 외에 그의 남편 이삭이나 아니면 그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야곱은 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니, 단순히 에서의 형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라, 장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당시에 장자라고 하면 그 집의 상속자였습니다. 대단한 권한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야곱이 장자가 된다는 것은 이는 현실적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장자라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태어난 순서로 정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야곱이 아니지요. 그는 장자권을 자신이 얻기 위한 방도를 생각합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내용에 의하면 600개가 넘는 세부적인 규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그만한 규율이 필요했겠습니다만, 야곱 당시에는 아직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하자면 거래와 같은 일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칙이 필요했을까요.

이는 단순합니다. 상대방과의 합의만 있으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해요. 거기에 1만원이라는 가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1만원에 사려고 해요.

그럼 물건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물건을 넘기고 그 대신 1만원을 그 사람으로부터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당시에는 무슨 ‘장자권은 팔 수 없다’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서로가 합의만 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주목한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넘겨받을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나 시간대를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올 때에는 항상 허기진 상태였다는 점도 놓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야곱은 그날 한 길목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떡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느 때처럼 에서가 걸어옵니다. 야곱은 태연하게 팥죽을 쑤고 있었겠지요. 이를 본 에서는 다짜고짜 야곱에게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네가 왜 여기 있냐, 왜 팥죽을 쑤고 있냐는 등을 물어볼 기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야곱은 신중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순간인데 대충 넘어가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야곱은 에서에게 말합니다. 형님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세요.

이는 말하자면 떡과 팥죽을 줄 테니 그 대가로 나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에서는 말합니다. 아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주냐. 그래, 너나 가져라. 그리고 빨리 거기 있는 떡과 팥죽을 내놓으란 말이야.

에서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성질을 부리며 소리칩니다. 그래도 야곱은 신중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자기한테 판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맹세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제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고는 떡과 팥죽을 먹고 일어나 떠났다고 하지요.

이러므로 인해서 이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그의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버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가 어리석었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잘했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사냥을 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이 나빴기 때문에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은 야곱이 악했기 때문에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습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예, 그렇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떡과 팥죽에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말았던 것일까요.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본다면 ‘베코라’라고 해서 ‘태를 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영어번역본에는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birthright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birth’라고 하는 것은 birthday 라고 할 때 쓰이는 것처럼 ‘태어나다’라는 뜻이고, ‘right’라고 하는 말은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참 절묘한 표현 아닙니까. 장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엄청난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에는 그 외에도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거저로 얻은 권리라는 점입니다.

에서는 자신이 노력해서 얻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사지도 않았어요. 단지 태어나면서 자신의 아무런 노력 없이 거저로 주어진 것, 그것이 바로 장자권, 장자의 명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졌다는 것이에요.

만약에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절약한 끝에 돈을 모아서 샀던 비싼 것이었더라면, 에서가 그 장자의 명분을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겼겠습니까.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자신의 노력 없이, 자신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단지 ‘그까짓 것 뭐가 대단하다고’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결국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까.

에베소서 1장 3절~5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언제 우리를 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시기도 전에 이미 주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놀랍고도 놀라운 축복과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느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냈는데, 얼마나 십일조도 많이 내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혹시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자, 지난 주의 강해를 조금 복습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에 있는 온갖 과실들을 밤낮없이 분주하게 키우거나 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 단지 그것 하나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영원히 누르고 흔들어 넘칠 정도로 부어 주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크기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는 축복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이 비교가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헌금이나 십일조를 많이 냈다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받은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장차 우리가 받을 축복과도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으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받아 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토록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축복, 사람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축복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겼기에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은 오바댜서에 의해 멸망이 예언되고 결국 그 예언대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은 어떻습니까. 그 후손에서 이새의 아들 다윗이 나고 마침내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족보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떡 몇 개와 팥죽 몇 그릇에 그와 같은 축복을 팔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물론,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우리의 구원과 팥죽 몇 그릇을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자, 그럼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돈이 좀 넉넉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글쎄요. 돈이 얼마 정도 있으면 넉넉하겠습니까. 100억원? 아니,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넉넉할까요?

사실 그 정도 되면 저 같은 경우는 잘 감이 안 옵니다만, 좋아요.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남은 여생까지 좀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께 이렇게 제안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제가 지금 당장 여러분 은행 계좌에 현찰로 1,000억원을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신앙을 버리십시오.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1000억원이라면 이제 더 이상 집세 오를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활비나 자녀들 교육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원하는 집, 원하는 차를 살 수도 있고, 직장에서 치사한 상사 밑에서 눈치 보며 일할 필요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동안 병원비 걱정도 없어요.

이처럼 꿈과도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조건은 단 하나,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유혹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런 유혹,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 5절~7절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인 것이지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귀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크고 작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갈림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과 세상의 갈림길’인 것이지요.

아휴,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해도 내 인생에 바뀌는 것 하나 없더라. 신앙이 밥 먹여주나. 성경이 밥 먹여주나. 차라리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에서가 빠져든 덫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의 약속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이 구원의 약속은, 온 세상 모든 금은보화라 하더라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마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이라는 면류관도 역시 빼앗겨 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제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 구원의 약속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시험이 닥쳐 오더라도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면류관을 끝까지 굳게 잡아 지킴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