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7회 세 고을의 가르침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24절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11章20節~24節
“20.それからイエスは、ご自分が力あるわざを数多く行った町々を責め始められた。彼らが悔い改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
21.「ああ、コラジン。ああ、ベツサイダ。おまえたちの間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ツロとシドンで行われていたら、彼らはとうの昔に粗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ていたことだろう。
22.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ツロとシドンのほうが、おまえたち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23.カペナウム、おまえ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があるだろうか。よみにまで落とされるのだ。おまえのうち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ソドムで行われていたら、ソドムは今日まで残っていたことだろう。
24.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ソドムの地のほうが、おまえ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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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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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2번째 시간으로서 “세 고을의 가르침” 三つの町の教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약 3년에 걸친 공생애 기간 중에 이스라엘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셨으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많은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21장까지 있는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イエスが行われたことは、ほかにもたくさんある。その一つ一つを書き記すなら、世界もその書かれた書物を収められないと、私は思う。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신 일이 얼마나 많냐 하면, 이를 모두 기록하게 될 경우 이 세상에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도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 중 대표적인 곳이 첫째는 고라신(コラジン), 둘째는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셋째는 가버나움(カペナウム)입니다.

먼저 고라신이라는 곳은 성경에 딱 두 번만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21절이고 또 하나는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다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입니다.

다음으로 벳새다(ベツサイダ)는 몇 번 등장하는데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여기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역시 사도 빌립(ピリポ)의 고향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버나움(カペナウム)입니다. 이 곳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13절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イエスはヨハネが捕らえられたと聞いて、ガリラヤに退かれた。
そしてナザレを離れ、ゼブルンとナフタリの地方にある、湖のほとりの町カペナウムに来て住まわれた。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 계시다가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사시기도 하셨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13절에서는 백부장(百人隊長)의 하인(しもべ)을 치료하셨고, 14절~15절에서는 베드로의 장모도 고치셨습니다.

이 외에도 마태복음 8장 16절에 의하면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0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それからイエスは、ご自分が力あるわざを数多く行った町々を責め始められた。彼らが悔い改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

여기에 나오는 <권능>이라는 말은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헬라어로 <뒤나미스> 또는 <두나미스>라고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면 <두나미스>라고 붙여진 교회나 교회시설 이름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고라신(コラジン),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하나님의 크나큰 권능을 행하셨어요. 그것도 상당히 많이 행한 곳이 바로 이 도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상당히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는 단순히 비교하자면 다른 도시들보다도 많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셨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도시에서 회개와 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1절~24절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1.「ああ、コラジン。ああ、ベツサイダ。おまえたちの間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ツロとシドンで行われていたら、彼らはとうの昔に粗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ていたことだろう。
22.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ツロとシドンのほうが、おまえたち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23.カペナウム、おまえ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があるだろうか。よみにまで落とされるのだ。おまえのうち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ソドムで行われていたら、ソドムは今日まで残っていたことだろう。
24.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ソドムの地のほうが、おまえ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이 말씀에 의하면 고라신(コラジン)과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도 두나미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두로와 시돈(ツロとシドン)에 대한 심판은 정확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소돔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9장에 의하면 죄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9장 24절~25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예전에 어느 기독교 방송에서 과거에 소돔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아무리 오래 되더라도 거기에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흔적이라도 있는 것이 보통인데, 거기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허허벌판이에요. 거기에 큰 도시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 땅 표면에 보면 유황성분이 검출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 지질학자의 말에 의하면, 보통 땅 표면에서 유황이 검출될 경우에는 땅 표면 밑에도 유황성분이 있어서, 그 성분이 땅 위에까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그곳의 경우를 보면 땅속에는 전혀 유황성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땅 표면에서만 유황이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는 성경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본래 그 지역에는 지질학적으로 유황성분이 없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유황이 쏟아졌기 때문에 지금도 유황성분이 검출된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왜 유황만 쏟아진 것이 아니라 유황과 함께 불이 쏟아졌을까 하는 것인데, 이는 간단합니다. 유황만 쏟아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불이 붙게 되면 크나큰 화재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화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화약 가루만 뿌린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여기에 불이 붙게 되면 큰 폭발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역시 어마어마한 양의 유황과 불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모두 삼켜버리고는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소돔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3장 13절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ところが、ソドムの人々は邪悪で、主に対して甚だしく罪深い者たちであった。

소돔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큰 죄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를 소돔과 고모라로 보내셔서 구원 받을 기회나 회개할 기회도 주신 적도 없었고 경고를 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만약에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행했던 두나미스, 하나님의 능력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만약에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소돔에서 보여주었더라면 소돔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께로 돌아왔을 것이고, 그럼으로 인해서 소돔은 멸망을 면하고 지금까지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고라신(コラジン)과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은 지금은 모두 멸망하고 고대 유적들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에 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지금 고라신(コラジン)과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사역을 하신 분이 누구세요? 그렇죠. 예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의하면 베드로가 한 번 설교를 했더니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세 고을은 어땠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6절~17절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6.この時代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でしょうか。広場に座って、ほかの子どもたちにこう呼びかけている子どもたちのようです。
17.『笛を吹いてあげたのに君たちは踊らなかった。弔いの歌を歌ってあげたのに胸をたたいて悲しまなかった。』


고라신(コラジン)이나 벳새다(ベツサイダ)나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는 마치 이 말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많은 권능을 나타내셨지만, 결국 회개도 안 일어나고 부흥도 안 일어났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실패하신 것인가요. 다른 곳은 몰라도 고라신(コラジン)이나 벳새다(ベツサイダ)나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의 예수님의 선교는 성공하지 못한 실패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고라신(コラジン)이나 벳새다(ベツサイダ)나 가버나움(カペナウム)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명을 받아 선교사역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한다면, 역시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그 세 고을로 가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세 고을에 부흥을 일으키지 못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혼이 나야 하는 쪽은 불쌍한 세 고을 사람들이 아니라, 선교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예수님 아니겠습니까.

자,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황당한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시면 앞서 말씀드린 소돔과 고모라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멸망시켰던 일입니다.


신명기 20장 16절~18절
“1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次の民の町々では、息のある者を一人も生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すなわち、ヒッタイト人(じん)、アモリ人、カナン人、ペリジ人、ヒビ人、エブス人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られたとおり必ず聖絶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は、彼らが、その神々に行っていたすべての忌み嫌うべきことをするようにあなたがたに教え、あなたがたが、あなたがたの神、主の前に罪ある者と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이와 같은 무서운 명령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4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4.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主は私を遣わして、あなたに油を注ぎ、主の民イスラエルの王とされた。今、主の言われることを聞きなさい。
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上って来る途中で、アマレクがイスラエルに対して行ったことを覚えている。
今、行ってアマレクを討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しなさい。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幼子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しなさい。』」
サウルは兵を呼び集めた。テライムで彼らを数えると、歩兵が二十万、ユダの兵が一万であった。

예전에 저는 누구한테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가나안 사람들이나 아말렉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 아니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도 사랑과 자비로 살려줘야지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버리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셨어요. 노아의 홍수 때를 보십시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보았을 때에 지구상에는 지금보다도 인구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서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고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 만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나안 사람들도 죽이고, 아말렉 사람들도 죽이라고 하신 하나님, 더 나아가 노아의 홍수로 전세계 거의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셨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한 하나님, 무자비한 하나님이십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고 아말렉 사람들을 죽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보이시고, 그리고 거기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자, 주일학교 때의 질문을 한 번 살펴볼까요. 성경은 누구 읽으라고 쓰여진 책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읽으라고, 더 구체적으로는 나 읽으라고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심판하신 내용이 성경에 적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하나를 살리려고, 어떻게 해서든 나 하나를 살려 보시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나안 사람들이나 아말렉 사람들이 문제예요?

아니, 노아 때 멸망한 전세계 사람들이 문제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채찍을 맞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아무리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이 온 천하 만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피 한 방울보다 귀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한 방울 정도가 아닌 모든 피를 흘려 주셨으며, 이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것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지요. <교사>라고 하면 <나도 저 사람 같이 되어야지>하고 내가 본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면교사라고 한다면 반대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배운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논어에 보시면 삼인행 필유아사……라는 말도 그렇지요.

세 명이 가고 있으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뜻인데, 스승이라고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으로부터 반면교사 식으로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世の中には反面教師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教師」といえば「私もあの人のようになりたい」というように見習いたいという人と言えますが、「反面教師」というと、逆に「私はあの人のようにはならないようにしよう」という意味で学びがあ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論語に出てくる「三人行けば必ず我が師有り」もそうです。

人が三人いれば、その中には必ず自分の師となる人物がいるということですが、師と言っても必ずしも優れた人物でなくても、その人から反面教師として学ぶべき点があるという意味だと言えます。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コラジンやベツサイダ、そしてカペナウムはイエス様を受け入れず、結局裁きを受けてしまいました。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イエス様の働きが失敗に終わった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

むしろ、私たちが進むべき道、私たちが福音を受け入れ、私たちが悔い改めるということがどれ程大事なことなのかを悟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히브리서 10장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제 우리는 고라신이나 벳새다나 가버나움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보혈에 힘입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へブル人への手紙10章19節
「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これから私たちは、コラジンやベツサイダ、そしてカペナウムのようになってはな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手遅れになる前に悔い改め、そして主に従うことによって、イエス様の血によって大胆に主が許された救いに至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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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ヨハネの福音書15章7節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はかなえ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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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1번째 시간으로서 “이루어지는 삶” かなえられる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특히 성인이 되어서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 아니겠습니까. 내 질병이 낫고 내가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게 나쁜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병이 낫기 원하는 것이 어떻게 나쁠 수가 있으며, 그리고 또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나쁠 수가 있겠습니까. 질병이 축복이 아니듯 가난도 역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계시면 모든 질병이 치유 받고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 넉넉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말이에요. 이를 믿기는 하는데, 실제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맨날 교회에 다니고 기도도 하는데 여전히 질병은 그대로 있고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오늘 말씀에 보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해요. 그런데 아무리 구해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성경은 틀린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쓰여진 2천년 전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두꺼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도제목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특별히 믿음이 좋은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일단 기도를 많이 하시게 되겠지요. 누구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기도를 하신다고 하는데,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를 하실 수 있는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예배도 많이 드립니다. 한국은 특히 교회에서 예배를 많이 드리지요?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새벽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 등 많은 예배가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래도 안 되면 금식을 하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루 금식, 사흘 금식, 또는 그 이상도 금식을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보면 40일 금식을 하셨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니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비판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금식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것,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내가 기도를 많이 했어요. 예배도 많이 드렸어요. 그리고 금식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예, 응답을 받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가 부족해서? 예배가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러면 답은 쉽겠네요. 내 모든 생업, 학교도 직장도 가정도 모두 포기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금식을 하면서 40일이든 50일이든 버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은 본인에게 한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해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아, 저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을 안 해서 저렇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좀 해보신 분들은 이런 말씀, 자신이 누구한테서 직접 듣지는 않더라도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한다는 사실을 들으신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사실입니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이 부족해서?

사실 이와 같은 말이, 무슨 신앙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귀한 충고처럼 여기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말은 대부분이 상대방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의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이 부족해서 그 사람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믿고 계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예,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먼저 기도하고 내가 먼저 금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그게 진정한 이웃 사랑 아니겠습니까. 상대방더러 기도해라 금식해라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가 부족하고 금식이 부족한 것이 정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금식하고 기도해주면 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와 같은 분들? 기도가 부족한 내 이웃을 위해서 금식까지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40년 넘게 해왔는데 그런 분들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반면에 상대방더러 당신은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금식이 부족해서 응답을 못 받는다고 충고하는 말씀? 제 주위에서 수도 없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상대방에게 기도해라 금식해라 하는 말씀은 이는 충고가 아니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 그럼 처음으로 돌아와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왜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요.

일본에 보면 경찰이 수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격언들이 몇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현장 백번”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냐 하면, 예를 들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범인을 잡기 위해서 아무리 수사를 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범행현장으로 것입니다. 사건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반드시 사건 현장에 있다. 처음에는 그것을 놓칠 수도 있으니 100번이라도 현장을 찾게 된다면 반드시 사건의 실마리,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의 격언입니다.

이를 우리 신앙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신앙에 있어서의 100번이라도 더 찾아야 할 현장은 어디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결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성경에는 분명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현장을 100번이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그 말씀이 적혀 있는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5장 7절을 다시 한 번 봐야 하겠지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서 경찰이나 탐정이 수사할 때 보면 돋보기 같은 것을 들고 보는 경우도 있잖아요? 자,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はかなえられます。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어떻습니까. 분명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리라” (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れば、かなえられます。) 라는 말씀은 있습니다만, 이것 만이 아니지요? 여기에는 분명히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면(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이라는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우리가 원한다 하더라도 이 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나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 하더라도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에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도 좋고 금식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면 이는 말짱 헛것입니다. 그야말로 공허한 믿음, 자칫하면 미신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나 세워놓고 거기에 대고 절하면서 기도한다면 그게 올바른 믿음입니까. 성경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그저 손에 들고 흔들면서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고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나 성경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예, 물론 돈을 가져가야 하겠지요. 하지만 돈만 가져가면 됩니까.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다고 해요. 돈도 넉넉하게 가져갔습니다. 이제 종업원이 메뉴를 가져 오면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요. 주위 사람들은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 테이블 위에는 물 한잔도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오겠지 하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결국 가게 영업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식당은 뷔페식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먹을 것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기만 하니까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밥 한 숟가락 먹지도 못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그저 웃자고 한 소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이야기처럼 아무리 좋은 식당에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갔다 하더라도 그 식당의 방식을 모르면 음식을 못 먹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금식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방식,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을 모르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근거로 해서 기도를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성경도 모르고 밤낮 기도를 해봐야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 하나를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60장 22절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最も小さい者も軍団となり、最も弱い者も強国となる。わたしは主。時が来れば、速やかにそれをする。」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자세히 보시면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신약 베드로전서에도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일본어 성경에 보니까 베드로전서에서의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을 “가장 좋을 때” “가장 적절할 때”라고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 이는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드릴까요? 이 ‘때’는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정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면 바로 이 “때”를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이는 바로 대단히 힘들고 고단해지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응답은 간혹 우리가 원하는 바와 다르게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모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그 백성들 대부분이 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빨리 바벨론에서 풀려나서 내 나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도제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4절~10절
“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エレミヤ書29章4節~10節
「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エルサレムからバビロンへわたしが引いて行かせたすべての捕囚の民に。
家を建てて住み、果樹園を造って、その実を食べよ。
妻を迎えて、息子、娘を生み、あなたがたの息子には妻を迎え、娘を嫁がせて、息子、娘を産ませ、そこで増えよ。減ってはならない。
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引いて行かせた、その町の平安を求め、その町のために主に祈れ。その町の平安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平安を得ることになるのだから。』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ま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夢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まことに、主はこう言われる。『バビロンに七十年が満ちるころ、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顧み、あなたがたにいつくしみの約束を果たして、あなたがたをこの場所に帰らせる。


이게 뭐예요? 기껏 내 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응답이 뭐라고요? 예, 그냥 거기서 결혼하고 애 낳고 살라는 거예요.

다른 선지자들이나 점쟁이들이 아, 이제 곧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말을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세요? 예, 70년이 차면 너희를 돌려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때를 누가 정하셨죠? 예,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 우리의 고집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에 맞는 기도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분은 아, 주님의 뜻과 달리 내 기도로 응답을 받은 적이 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캄캄한 밤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주여, 어서 아침이 되게 하옵소서……. 속히 아침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도 아침이 안 돼요.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몇 시간이고 기도했습니다. 배가 고파도 금식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점점 날이 밝아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동쪽에서 환하게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를 보고 그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제가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간증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응답 받았다고 하면서.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안 해서라고, 자기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장담합니다.

자, 이 사람의 주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명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현명한 것이 아닌, 대단히 피곤한 신앙생활, 미련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이 밝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기도를 해서예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아침이 밝은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서 5장 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るために、互いに罪を言い表し、互いのために祈りなさい。正しい人の祈りは、働くと大きな力があります。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모든 생활을 다 포기하고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기도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나서 2장에서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상황에서 기도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대단히 많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しかし私たちがこの世で生きている間は、やるべきことがたくさんあります。主に仕え、隣人に仕えるためにやるべきことがどれほどたくさんあるでしょうか。

そして、なにより、主の心を学び、知っ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ホセア書6章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성경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주님을 알자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 오류가 없이 완전하고도 유일하신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말씀을 힘써 알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聖書は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いようと記されております。

それでは、どのようにすれば主を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まさしく私たちに下さった、誤りのない、完全でかつ、唯一の神様のみ言葉である聖書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이에요.

이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이암아,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私たちが主を知ることができれば、主が私たちに最も望まれている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主を知るためには、そうです、聖書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れからは、主の中にとどまり、主のみ言葉を正しく理解す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が主に求めるとき、かなえられる人生となりますよう、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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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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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5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5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7절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ヨハネの福音書 11章 5節~7節
“5.イエスはマルタとその姉妹とラザロを愛しておられた。
6.しかし、イエスはラザロが病んでいると聞いてからも、そのときいた場所に二日とどまられた。
7.それからイエスは、「もう一度ユダヤに行こう」と弟子たちに言わ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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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찾으러 오시는 주님” 捜しに来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잃어버린 양이라는 비유로서,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양 한 마리가 안 보여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목자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산 한 가운데인데 만일 자기가 없으면 이 양떼들이 흩어질 지도 모르고, 뿐만 아니라 맹수들이 와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목자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귀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둔 채로 목자는 그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본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누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이지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는 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기서 길을 잃은 양에 대해서 우선 한 번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 왜 길을 잃었을까요. 어떤 분은 양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은 어린 양……그래서 그림 같은 것도 보면 길을 잃은 양은 항상 새끼 양으로 그려지는 것을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것이 어린 양이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은 오늘 마태복음 18장 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옵니다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어디를 보더라도 그저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볼까요. 이 양, 도대체 왜 길을 잃었던 것일까요.

이는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는데, 이를 부정하실 분은 아마도 안 계시지 않을까 해요. 이 양은 왜 길을 잃었을까 하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좀 모자라서입니다. 다른 양들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갑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좀 부족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무슨 어린 애들만 고집이 세나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니,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다가 큰 일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에 보더라도 고령자분들의 교통사고가 많이 늘어나서, 정말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잘 못 밟아서 사람들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군마처럼 자동차가 없으면 정말 생활하기 어려운 곳에 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대중교통이 많이 있는 곳인데도, 이제 운전을 하지 마시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시라고 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운전을 얼마나 잘 하는 줄 아냐고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그만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길을 잃은 양은 비단 어린 양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과, 조오금 부족한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아니, 그냥 아흔아홉과 하나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똘똘한 한 마리 양과 부족한 아흔아홉을 비교하는 것도 아닌, 똘똘한 아흔아홉과 여러가지로 조금 부족한 한 마리 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비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거 맨날 모자라서 말도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양이라면 오히려 없어지는 편이 속히 편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그 양 한 놈 때문에 속을 썩였는데, 에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그거 한 놈 없어져도 여기 아흔아홉만 잘 키우면 또 매년 새끼는 태어나니 별 걱정이 있겠나.

사실 이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전혀 반대로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은 내버려둔 채로, 그 좀 모자라고, 그런 주제에 고집은 세서 맨날 일만 벌이고 사고만 치는, 그래서 이번에도 길을 잃고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고 다니는 양, 똘똘한 양이라면 어쩌면 자기가 길을 찾아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 좀 모자란 양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국 이 목자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 양을 찾아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잃을 양이 누구라고요? 예, 아, 그때 그 사람, 맞아, 아 그 때 저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좀 모자랄 뿐이라면 길을 잃지도 않아요. 오히려 겁이 많아서 목자나 양한테 꼭 붙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딱한 양은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고집도 세요. 그래서 그냥 자기 멋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맨날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도 내고, 여기저기 부딪쳐서 머리도 깨지고 무릎도 성할 날이 없는, 그런 양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는 우리가 똘똘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까.

역시 주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내가 좀 잘한 것이 있으니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으니까 나를 선택해주신 것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반복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제발 그런 황당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神は私たちを救い、また、聖なる招きをもって召してくださいましたが、それは私たちの働きによるのではなく、ご自分の計画と恵みによるものでした。この恵みは、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私たちに永遠の昔に与えら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힘이 셌기 때문입니까. 그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고분고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까.



신명기 7장 6절~8절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主が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を選ばれたのは、あなたがたがどの民よりも数が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事実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のうちで最も数が少なかった。
しかし、主があなたがたを愛されたから、またあなたがたの父祖たちに誓った誓いを守られたから、主は力強い御手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導き出し、奴隷の家から、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手からあなたを贖い出されたのである。


우리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잖아요. 맨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난리를 치고, 맨날 이걸 달라 저걸 달라며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살만 하면 뭘 해요? 예,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 보면 황소 모양을 세워놓고 거기에다가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예로 살면서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똑같이 거기에 대고 숭배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거기에 있는 온갖 잡신들, 그것도 모자라서 외국에서 건너온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경고를 하신 바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3절~26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気をつけて、あなたがたの神、主があなたがたと結ばれた契約を忘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またあなたの神、主の命令に背いて、いかなる形の彫像も造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みの神である。
あなたが子や孫をもうけ、あなたがたがその地に長く住むうちに堕落して、何かの形に刻んだ像を造り、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御怒りを引き起こすようなことがあれば、
私は今日、次のことで、あなたがたに対して天と地を証人に立てる。あなたがたは、ヨルダン川を渡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その地から追われ、たちまち滅び失せる。そこで、あなたがたは長く生きるどころか、すっかり根絶やしにされる。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놨는데도 허사였습니다. 맨날 말을 안 듣고 우상숭배를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맨날 일을 저지르고 사고를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는, 그야말로 좀 모자란 길 잃은 양과도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때로는 경책하시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신 이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도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인도해 내셨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분은 좀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이면 믿음의 조상이요, 자기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그와 같은 의인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도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로마서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때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등장은 사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상당히 생뚱맞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바로 앞장인 11장에서도 그 때까지는 이름이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착한 일을 했다거나 좋은 일을 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없어요. 사실 좀 막무가내입니다.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명령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이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려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거기서 그의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기다려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그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사랑,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이 살펴 본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는, 언뜻 보면 우리가 신앙을 갖기 전,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를 때에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불러 주셔서 이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이해를 하시게 되지요.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양이 될 염려가 없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좀 모자라서 때로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와 같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은 초신자 딱지를 뗀 지 오래된 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우리가 뭐 동물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있지요?

우선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자기가 알아서 풀을 찾아 먹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사실 그렇게 양이 똘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그리고 먹이를 찾기 위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러니 일일이 목자가 그 양떼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먹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을 친다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양을 칠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당시 사울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러니까 양 주위에는 항상 이와 같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 내가 지금 길을 잃었어요. 언제 사자나 곰이 와서 나를 공격할지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당장 근육을 키워서 그런 맹수들이 공격해와도 이길 수 있도록 훈련을 해요? 내가 양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헤집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점점 더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고, 해는 떨어지고 배도 고파지고, 체력은 더 떨어져서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그러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인생을 다 포기해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오늘 말씀처럼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와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틀림없이 나를 찾아와 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私は切に 主を待ち望んだ。 主は私に耳を傾け 助けを求める叫びを聞いてくださった。

잠언 8장 34절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레미야애가 3장 25절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기다림이 아니라, 마치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해 나아가면서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이 기다림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무엇을 안 하는 것이 기다림이냐 하면, 바로 낙심을 안 하고, 포기를 안 하고, 좌절을 안 하고 절망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다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의 문화청 청장도 지낸 적이 있는 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 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늦은 밤에 일본 전철 역에서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표를 사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막차가 걱정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역무원에게 문의를 했는데, 그 때 역무원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여기서 “노조미”라고 하는 말은, “희망” 또는 “소망”이라는 뜻이 있고, “히카리”는 빛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를 직역을 하면, 소망은 없지만 빛은 있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외국 사람이 들으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겠습니다만, 이 대화가 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노조미’나 ‘히카리’는 사실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KTX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은 신칸센 종류가 많아서 이름도 다양하거든요.

그러니까 역무원은 단순히 신칸센 노조미는 막차가 없지만 신칸센 히카리는 아직 있다는 뜻으로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라고 말한 것인데, 이게 듣기에 따라서는 “소망은 없으나 빛은 있습니다”로도 들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심리학자는, 물론 그 역무원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 뜻도 알았지만, 그보다도, 그래, 이 세상 소망은 끊어지더라도(失っても) 하늘에서 비치는 빛은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대단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바울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바울로 하여금 오직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빛으로 친히 우리가 있는 이 낮은 땅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수천 수만 마리 양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다 내팽겨 치고서라도,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오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져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そうです。主は光として来られました。 私たちが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自ら私たちのいる低いところまで下ら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皆さん、道に迷っておられますか。苦しみと苦難のただ中におられますか。大丈夫です。主が来られます。九十九匹の羊どころか、何千何万の羊であろうともすべてを山に残し、あなた一人を助けるために走って来られる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この世においての望みを失っても、光として来られた主を待ち望み、頼りさえすれば私たちは生きられます。勝利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제 아무리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소망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いくら人間的、世俗的な望みを失っても、ただ主のみを頼り、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るため、道に迷っている私たちの捜しに来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そして待ち望むことによって、不安と落胆と挫折と絶望を振り払い、光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とともに勝利す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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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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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4회 찾으러 오시는 주님 - 기린선교회
2024년 5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14절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8章 12節~14節
“12.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ある人に羊が百匹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
13.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その羊を見つけたなら、その人は、迷わなかった九十九匹の羊以上にこの一匹を喜びます。
14.このように、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が滅びることは、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みこころ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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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찾으러 오시는 주님” 捜しに来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잃어버린 양이라는 비유로서,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양 한 마리가 안 보여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목자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산 한 가운데인데 만일 자기가 없으면 이 양떼들이 흩어질 지도 모르고, 뿐만 아니라 맹수들이 와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목자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귀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둔 채로 목자는 그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본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누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이지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는 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기서 길을 잃은 양에 대해서 우선 한 번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 왜 길을 잃었을까요. 어떤 분은 양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은 어린 양……그래서 그림 같은 것도 보면 길을 잃은 양은 항상 새끼 양으로 그려지는 것을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것이 어린 양이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은 오늘 마태복음 18장 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옵니다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어디를 보더라도 그저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볼까요. 이 양, 도대체 왜 길을 잃었던 것일까요.

이는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는데, 이를 부정하실 분은 아마도 안 계시지 않을까 해요. 이 양은 왜 길을 잃었을까 하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좀 모자라서입니다. 다른 양들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갑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좀 부족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무슨 어린 애들만 고집이 세나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니,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다가 큰 일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에 보더라도 고령자분들의 교통사고가 많이 늘어나서, 정말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잘 못 밟아서 사람들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군마처럼 자동차가 없으면 정말 생활하기 어려운 곳에 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대중교통이 많이 있는 곳인데도, 이제 운전을 하지 마시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시라고 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운전을 얼마나 잘 하는 줄 아냐고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그만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길을 잃은 양은 비단 어린 양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과, 조오금 부족한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아니, 그냥 아흔아홉과 하나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똘똘한 한 마리 양과 부족한 아흔아홉을 비교하는 것도 아닌, 똘똘한 아흔아홉과 여러가지로 조금 부족한 한 마리 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비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거 맨날 모자라서 말도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양이라면 오히려 없어지는 편이 속히 편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그 양 한 놈 때문에 속을 썩였는데, 에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그거 한 놈 없어져도 여기 아흔아홉만 잘 키우면 또 매년 새끼는 태어나니 별 걱정이 있겠나.

사실 이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전혀 반대로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은 내버려둔 채로, 그 좀 모자라고, 그런 주제에 고집은 세서 맨날 일만 벌이고 사고만 치는, 그래서 이번에도 길을 잃고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고 다니는 양, 똘똘한 양이라면 어쩌면 자기가 길을 찾아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 좀 모자란 양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국 이 목자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 양을 찾아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잃을 양이 누구라고요? 예, 아, 그때 그 사람, 맞아, 아 그 때 저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좀 모자랄 뿐이라면 길을 잃지도 않아요. 오히려 겁이 많아서 목자나 양한테 꼭 붙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딱한 양은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고집도 세요. 그래서 그냥 자기 멋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맨날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도 내고, 여기저기 부딪쳐서 머리도 깨지고 무릎도 성할 날이 없는, 그런 양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는 우리가 똘똘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까.

역시 주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내가 좀 잘한 것이 있으니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으니까 나를 선택해주신 것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반복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제발 그런 황당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神は私たちを救い、また、聖なる招きをもって召してくださいましたが、それは私たちの働きによるのではなく、ご自分の計画と恵みによるものでした。この恵みは、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私たちに永遠の昔に与えら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힘이 셌기 때문입니까. 그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고분고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까.



신명기 7장 6절~8절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主が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を選ばれたのは、あなたがたがどの民よりも数が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事実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のうちで最も数が少なかった。
しかし、主があなたがたを愛されたから、またあなたがたの父祖たちに誓った誓いを守られたから、主は力強い御手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導き出し、奴隷の家から、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手からあなたを贖い出されたのである。


우리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잖아요. 맨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난리를 치고, 맨날 이걸 달라 저걸 달라며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살만 하면 뭘 해요? 예,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 보면 황소 모양을 세워놓고 거기에다가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예로 살면서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똑같이 거기에 대고 숭배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거기에 있는 온갖 잡신들, 그것도 모자라서 외국에서 건너온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경고를 하신 바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3절~26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気をつけて、あなたがたの神、主があなたがたと結ばれた契約を忘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またあなたの神、主の命令に背いて、いかなる形の彫像も造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みの神である。
あなたが子や孫をもうけ、あなたがたがその地に長く住むうちに堕落して、何かの形に刻んだ像を造り、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御怒りを引き起こすようなことがあれば、
私は今日、次のことで、あなたがたに対して天と地を証人に立てる。あなたがたは、ヨルダン川を渡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その地から追われ、たちまち滅び失せる。そこで、あなたがたは長く生きるどころか、すっかり根絶やしにされる。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놨는데도 허사였습니다. 맨날 말을 안 듣고 우상숭배를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맨날 일을 저지르고 사고를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는, 그야말로 좀 모자란 길 잃은 양과도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때로는 경책하시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신 이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도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인도해 내셨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분은 좀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이면 믿음의 조상이요, 자기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그와 같은 의인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도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로마서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때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등장은 사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상당히 생뚱맞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바로 앞장인 11장에서도 그 때까지는 이름이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착한 일을 했다거나 좋은 일을 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없어요. 사실 좀 막무가내입니다.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명령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이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려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거기서 그의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기다려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그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사랑,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이 살펴 본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는, 언뜻 보면 우리가 신앙을 갖기 전,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를 때에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불러 주셔서 이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이해를 하시게 되지요.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양이 될 염려가 없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좀 모자라서 때로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와 같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은 초신자 딱지를 뗀 지 오래된 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우리가 뭐 동물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있지요?

우선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자기가 알아서 풀을 찾아 먹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사실 그렇게 양이 똘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그리고 먹이를 찾기 위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러니 일일이 목자가 그 양떼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먹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을 친다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양을 칠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당시 사울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러니까 양 주위에는 항상 이와 같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 내가 지금 길을 잃었어요. 언제 사자나 곰이 와서 나를 공격할지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당장 근육을 키워서 그런 맹수들이 공격해와도 이길 수 있도록 훈련을 해요? 내가 양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헤집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점점 더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고, 해는 떨어지고 배도 고파지고, 체력은 더 떨어져서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그러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인생을 다 포기해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오늘 말씀처럼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와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틀림없이 나를 찾아와 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私は切に 主を待ち望んだ。 主は私に耳を傾け 助けを求める叫びを聞いてくださった。

잠언 8장 34절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레미야애가 3장 25절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기다림이 아니라, 마치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해 나아가면서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이 기다림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무엇을 안 하는 것이 기다림이냐 하면, 바로 낙심을 안 하고, 포기를 안 하고, 좌절을 안 하고 절망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다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의 문화청 청장도 지낸 적이 있는 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 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늦은 밤에 일본 전철 역에서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표를 사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막차가 걱정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역무원에게 문의를 했는데, 그 때 역무원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여기서 “노조미”라고 하는 말은, “희망” 또는 “소망”이라는 뜻이 있고, “히카리”는 빛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를 직역을 하면, 소망은 없지만 빛은 있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외국 사람이 들으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겠습니다만, 이 대화가 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노조미’나 ‘히카리’는 사실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KTX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은 신칸센 종류가 많아서 이름도 다양하거든요.

그러니까 역무원은 단순히 신칸센 노조미는 막차가 없지만 신칸센 히카리는 아직 있다는 뜻으로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라고 말한 것인데, 이게 듣기에 따라서는 “소망은 없으나 빛은 있습니다”로도 들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심리학자는, 물론 그 역무원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 뜻도 알았지만, 그보다도, 그래, 이 세상 소망은 끊어지더라도(失っても) 하늘에서 비치는 빛은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대단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바울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바울로 하여금 오직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빛으로 친히 우리가 있는 이 낮은 땅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수천 수만 마리 양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다 내팽겨 치고서라도,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오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져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そうです。主は光として来られました。 私たちが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自ら私たちのいる低いところまで下ら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皆さん、道に迷っておられますか。苦しみと苦難のただ中におられますか。大丈夫です。主が来られます。九十九匹の羊どころか、何千何万の羊であろうともすべてを山に残し、あなた一人を助けるために走って来られる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この世においての望みを失っても、光として来られた主を待ち望み、頼りさえすれば私たちは生きられます。勝利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제 아무리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소망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いくら人間的、世俗的な望みを失っても、ただ主のみを頼り、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るため、道に迷っている私たちの捜しに来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そして待ち望むことによって、不安と落胆と挫折と絶望を振り払い、光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とともに勝利す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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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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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3회 좋은 이웃 - 기린선교회
2024년 5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37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ルカの福音書10章29節~37節
“29.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30.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31.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2.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3.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34.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35.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36.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37.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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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좋은 이웃” 善き隣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이전 설교 내용에 있어서 좀 정정을 해야 할 뿐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우선 말씀 드리고 난 다음에 오늘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지지난주, 그러니까 지난 4월 21일 주일 설교 내용에 있어서 달란트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여기서 한 달란트는 30킬로 정도가 되고 금 30킬로는 1그램을 1만엔, 10만원으로 계산한다면 3억엔, 한국돈 30억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좀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너무 많더라 했지. 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조금 더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그런 줄 알았고,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내용을 보더라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큰 의심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이제 제가 동영상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어 설교를 마치고 일본어로 촬영을 막 하고 있는데, 도중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일본어로 설교를 할 때에 보면, 한국어로 된 원고를 보고 이것을 이제 일본어로 바꾸어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런데 성경 본문은 제마음대로 통역을 하게 되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 본문에 대해서는 일본어 성경을 입력해 놓거든요.

이제 한국어 설교 촬영을 마치고 다음으로 일본어로 설교 촬영을 하는데, 그런데 문득 제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어요. 그게 어디냐 하면 마태복음 25장 15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彼は、おのおのその能力に応じて、ひとりには五タラント、ひとりには二タラント、もうひとり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それから旅に出かけた。

한국어 성경은 분명히 <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금, 그러니까 금은 골드이고, 무게는 대략 30킬로 정도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성경 신개역 2017을 보니까 <금>이라는 말이 없는 거예요. 그냥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입니다.

그래서 일본어 설교 동영상을 촬영하다가 도중에 일단 좀 멈추고 난 다음에, 서둘러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다른 일본어성경에도 <금>이라고 하는 표현이 없고, 그리고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골드>라고 되어 있는 성경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봤지요. 그랬더니 거기에도 금을 나타내는 헬라어 <크뤼시온>이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른 번역본들을 보더라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나온 달란트를 <금> 그러니까 말하자면 골드로 표현한 번역본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한글개역과 한글개역개정 성경에만 <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금>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는 <골드>의 금이 아니라 <돈>을 나타내는 <금>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보면 예를 들어서 <금일봉>이라고 해도 그게 금이 아니라 사실 돈이잖아요.


그래서 영어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NIV 성경에 보면 이를 금을 나타내는 <골드>가 아니라, 돈을 나타내는 <머니>로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한글 성경에서 본다면 공동번역 성경에 보니까 아예 <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니까, 구약에서는 달란트라는 것을 무게로 사용해왔지만 신약에 있어서는 이를 화폐단위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이를 귀금속인 <금>의 무게로 해서 말씀을 전하신 분들은 잘못 전하신 것이냐 하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셨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의 본질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약시대에 있어서 화폐단위로 사용된 달란트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냐 하면,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혹시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드렸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래서 이를 편의상 요즘 하루 일당을 대략 1만엔, 10만원으로 잡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이 1만엔이니까 한 달란트는 6000 곱하기 1만엔이잖아요. 그러면 6000데나리온 곱하기 1만엔, 10만원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 한 달란트는 화폐가치로 본다면 지금의 6000만엔, 한국돈 6억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를 무게가 아니라 화폐가치로 보게 된다면, 제가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3천만엔, 3억원보다도 두 배나 많은 돈이 됩니다.

하지만 뭐 한 달란트가 3천만엔이든 6천만엔이든, 그리고 3억원이든 6억원이든 간에 큰 돈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게로 이해를 하든 화폐가치로 이해를 하든 그 말씀의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지요.

하지만 이번 복음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 이번 기회에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이 점을 기억하고 넘어가고자 해서 말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본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善きサマリア人のたとえ)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간과하고 있는 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선 지금 이 상황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의하면 지금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사람은 <어떤 율법교사>(律法の専門家) 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난 다음에, 오늘 29절에 보니까 이 율법교사가 이웃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지요.

누가복음 10장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오늘 중요한 핵심내용은 사실 이 구절에 대부분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이지, 나이든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 첫째이고, 다음으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짐은 물론이고 옷까지도 빼앗겨버렸다는 점이 둘째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사람의 상태가 거의 죽은 것이었다는 점이 셋째입니다.

당시는 인종차별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여자와 미성년자들은 사람 수를 셀 때에 인구에도 포함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홀대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음으로 이 사람은 현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강도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어요. 하물며 이 사람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겨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거의 죽은 것 같다고 했지요. 이는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이렇게 멀리서 보기만 한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시고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1절~32절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1.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2.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여기서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라고 하면 모세와 아론의 후손으로서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당대에 있어서 누구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이 강도를 만난 사람 옆을 지나가는데, 그를 도와주지는 않고 똑같이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짐작해본다면 그 옆을 지나간 사람들이 어디 이 두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그 외 많은 사람들도 이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 곁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이지 알지 못해서, 아니면 어린애나 여자를 괜히 건드렸다가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불안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옷까지 벗겨진 사람을 살려봤자 마땅한 대가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옆을 그냥 지나갔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마저도 인정머리 없게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그림을 봤는데 이는 이 장면, 그러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사람 곁을 피해서 가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었는데, 그 그림을 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사람 옆을 아주 몰래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지나가는 듯이 그려 놓은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방금 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지나온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멈춰 세우고는, 아니, 당신 지금 너무한 거 아니냐. 사람이 지금 저렇게 쓰러져 있는데 그걸 보고도 그냥 지나쳐오면 어떡하냐…… 만약에 이렇게 따졌다면 그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어떻게 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아이구, 들켜버렸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할까요?

저는 장담합니다. 지금 강도 옆을 피해서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절대로 죄를 지었다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상태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상태가 어땠다고 했습니까.

강도들이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멀리서 이렇게 보기만 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렇다면 다가가서 흔들어 보기라도 하면 될 것 아닌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민수기 19장 11절~13절
“11.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その者は三日目と七日目に、先の水で身の汚れを除いて、きよくなる。三日目と七日目に身の汚れを除かなければ、きよくならない。
死人、すなわち死んだ人間のたましいに触れ、身の汚れを除かない者はみな、主の幕屋を汚す。その者はイスラエルから断ち切られる。その者は汚れを除く水を振りかけられていないので汚れていて、その者の中になお汚れがあるからである。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만지게 되면 그 사람은 하루도 아닌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고 해요. 그리고 정결하게 되지 않은 상태라면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큰 문제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죠. 제사장과 레위인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큰 지장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직접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부정하게 되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하루 뿐이냐 하면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잖아요. 다시 말해서 한 번 부정하게 되면 일주일 동안 일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지나가다가 누가 땅에 쓰러져 있는데 움직이질 않아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괜히 만졌다가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면 7일 동안 부정해져서 자기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이 그냥 개인적인 일이에요? 아니에요.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고 있는데 그 일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냐. 그러니까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사람 옆을 피해 왔는데,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이냐. 오히려 율법을 잘 지켰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고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냐.”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분명 이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말도 서로 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심한 차별을 받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든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재산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그리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그 사람한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졌나요? 예, 만질 정도가 아니지요.

누가복음 10장 34절~35절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4.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35.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만졌을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성껏 치료를 해주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거기서도 돌보아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 자기는 떠나야 하기 때문에 숙소를 나서게 되지만 이 다친 사람은 거동할 수가 없었나보죠? 그래서 거기 주인한테 2데나리온, 그러니까 2만엔, 한국돈 20만원 정도를 주면서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혹시 부족했다면 그 때가서 나머지도 자기가 갚겠다고 해요.

여기서의 2데나리온, 2만엔, 20만원이라는 돈이 꼭 적은 액수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다음 날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아서, 그래도 이 사람의 여행에 있어서는 큰 지장이 없는 지출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까지 말씀을 마치시고 그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예수님은 묻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 율법을 어기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이 중에서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한 사람도 율법교사라고 할 정도이니까 당연히 율법을 잘 알고 있었겠지요. 만약에 이 중에서 누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냐고 예수님이 물으셨다면, 이 율법교사는 어쩌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는 절대로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 그러니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기 때문인데,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이 율법교사가 처음에 했던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9절 말씀을 다시 볼까요.

누가복음 10장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9.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이 율법교사는 애초에 자기 이웃을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진정한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쩌면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교사한테는 이렇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율법교사야, 네가 이렇게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너를 살려주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너를 살려줬어. 그럼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니.”

아마도 그의 귀에는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니, 지금 자기가 죽어가는 마당에 율법을 지키는 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를 살려준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철저하게 차별하고 있었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간신히 <자비를 베푼 사람이 제 이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

이 말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셔야 해요? 그래. 맞다. 율법을 어기면서도 너를 살려준 사람이 네 이웃이다……이렇게 끝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극적 반전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풀이 죽어 있는 그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0장 37절 후반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어쩌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까지 율법교사는 자기가 강도 만난 피해자이고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에 보면 뭐예요?

율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는 입장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어느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 보니까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미혼 젊은 여성들에게 당신들의 이상형인 남성은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 대답이 뻔해요. 키는 몇 센티 이상, 학력은 어디어디 대학 이상이고 연봉은 얼마 이상에다가 외모는 어떻고 집안은 어떻고……하는 조건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거기 나온 강사가 하는 말이, 자, 여러분이 말씀하신 이 조건들을 모두 갖춘 남성, 그것도 미혼 남성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상위 5프로에 드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봐라. 여러분이 자기자신을 생각했을 때, 이 나라에서 상위 5프로에 드는 남성이 당신을 선택할 것 같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자만이 아니지요. 남녀를 떠나서 상대방도 바보가 아닌데, 단순히 계산해봐도 상위 5프로에 드는 상대방이 자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상위 5프로에 들 정도는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 자신은 정말 그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이지요.

정작 자기는 거기에 전혀 미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조건만 높아진다면 그게 실현가능성이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것 참 맞는 말씀 같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이웃이 되어서,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기 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도 좋고 규례(命令)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율법을 빌미로, 규례를 빌미로 해서 우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핍박하고 비난하고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편 94편 20절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破滅をもたらす法廷が あなたを仲間に加えるでしょうか。 おきてに従いながら 邪悪なことを謀る者どもが。

때로는 율법을 빙자하고 규례를 빙자해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공격하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차별하면 주님은 우리를 차별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율법이나 계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강도 만난 사람 옆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이웃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이웃을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을 찾아 나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에게 우리가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좋은 이웃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서, 장차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みなさん、素晴らしい隣人が欲しいですか。私たちが困っているとき、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隣人を望みますか。主は私たちにそのような素晴らしい隣人を探し求めなさいとはおっしゃいません。むしろ私たち自身が素晴らしい隣人になりなさい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これからは、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隣人を探し求めるのではなく、私たちの助けを必要とする隣人、私たちが助けてあげられる隣人に、私たちが惜しみなく助けてあげる素晴らしい隣人になることによって、神様に対する愛と隣人に対する愛の模範になるような人生を送り、やがて主から大きな称賛を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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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2회 구분하십니다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31節~46節
“31.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34.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を受け継ぎなさい。
35.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36.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37.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させ、渇いているのを見て飲ま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8.いつ、旅人であるのを見て宿を貸し、裸なのを見て着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9.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病気をし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41.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42.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43.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44.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45.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46.こうして、この者たちは永遠の刑罰に入り、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いのちに入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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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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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7번째 시간으로서 “구분하십니다” 分けられ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마태복음 25장을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도 조금 길긴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복음 25장 31절~33절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1.人の子は、その栄光を帯びてすべての御使いたちを伴って来るとき、その栄光の座に着きます。
32.そして、すべての国の人々が御前に集められます。人の子は、羊飼いが羊をやぎからより分けるように彼らをより分け、
33.羊を自分の右に、やぎを左に置きます。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오셔서는 모든 민족을 앞에 모으시고 난 다음에 이를 양과 염소로 구분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를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상징이냐 하면, 34절과 41절에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구분된 오른쪽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それから王は右にいる者たちに言います。『さあ、わたしの父に祝福された人たち。世界の基が据えられたときか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御国を受け継ぎなさい。

반면에 염소로 구분된 왼쪽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1.それから、王は左にいる者たちにも言います。『のろわれた者ども。わたしから離れ、悪魔とその使いのために用意された永遠の火に入れ。

그리고 마지막 구절,

마태복음 25장 46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6.こうして、この者たちは永遠の刑罰に入り、正しい人たちは永遠のいのちに入るのです。」

이렇게 본다면 양으로 구분된 오른쪽 사람들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고, 염소로 구분된 왼쪽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영벌 즉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에 보면 마귀들을 그릴 때에 염소뿔이 달린 것처럼 그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이와 같은 성경 구절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정말로 양은 구원을 상징하는 동물인 반면에 염소는 마귀나 지옥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시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당연히 거룩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엄격하게 구체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구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레위기 22장 18절~19절
“18.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거류하는 자가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번제와 더불어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19.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アロンとその子ら、またすべてのイスラエルの子らに告げよ。だれでも、イスラエルの家の者、またはイスラエルにいる寄留者がささげ物を献げ、誓願のささげ物あるいは進んで献げるものとして、全焼のささげ物を主に献げる場合、
あなたがたが受け入れられるには、それは牛、羊、あるいはやぎのうちの、傷のない雄でなければならない。


그 외에도 성경에 보시면 양과 염소를 항상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양은 거룩하고 염소는 부정하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구분하시는 과정에서 양과 염소로 표현하셨을까요.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예를 들어서 양을 한자로 쓰시면 어떻게 됩니까. 예, 양 양자가 있지요. 이 글자 하나를 쓰면 이것이 곧 양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혹시 염소를 한자로 나타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예, 이는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습니다만 염소를 한자로 쓴다고 한다면 산양(山羊)이라고 씁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양과 염소는 분명 다른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실제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법적으로 양과 염소를 동일하게 취급해오기도 해왔었다고도 하니 역시 이 점을 반증해주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 큰 양이나 염소는 저 같은 비전문가라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아직 어렸을 때에는 이게 양인이 염소인지는 대단히 구분하기가 어렵잖아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으로 사진을 구분해봤는데 어렸을 때에는 정말 어느 쪽이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중에서 주님이 굳이 양과 염소로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사람의 눈으로 볼 경우 겉으로는 잘 분간이 안 간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 차이를 알아보시고 판단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우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양으로 구분된 구원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40절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35.あなたがた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与え、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し、
36.わたしが裸のときに服を着せ、病気をしたときに見舞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たからです。』
37.すると、その正しい人たちは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なのを見て食べさせ、渇いているのを見て飲ま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8.いつ、旅人であるのを見て宿を貸し、裸なのを見て着せて差し上げたでしょうか。
39.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病気をし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訪ねしたでしょうか。』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보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그랬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これらのわたしの兄弟たち、それも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ことは、わたしにしたの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시지요. 여기서 작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몸집이 작다거나 아니면 나이가 어리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겠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정말로 내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 가족이나 친구들, 또는 권력자들이나 부자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에요.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내가 잘해주었다면 그건 누구나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6장 33절~34절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たちに良いことを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人に貸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だけ返してもらうつもりで、罪人たちに貸しています。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사람은 오히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그야말로 나한테 아무리 큰 돈이 거저 생기더라도 밥 한 끼 안 사주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내 이웃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었으며, 이를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에 왼쪽에 있는 사람들, 염소로 구분된 저주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45절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2.おまえたちはわたしが空腹であったときに食べ物をくれず、渇いていたときに飲ませず、
43.わたしが旅人であったときに宿を貸さず、裸のときに服を着せず、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に訪ねてくれなかった。』
44.すると、彼らも答えます。『主よ。いつ私たちは、あなたが空腹であったり、渇いていたり、旅人であったり、裸でいたり、病気をしていたり、牢におられたりするのを見て、お世話をしなかったでしょうか。』
45.すると、王は彼らに答えます。『まことに、おまえたちに言う。おまえたちが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なかったのは、わたしにしなかったのだ。』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작은 자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지극히 작은 자, 너희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은 곧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에 대해 꾸짖고 계신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우선 오해를 없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을 좀 덜어 드리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이 사람들은 왜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 한 둘은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미운 사람, 정말 나한테 해를 끼쳤던 사람, 내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얄밉고 이기적인 사람,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한테 선뜻 도움을 주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우리는 억지로라도 내일이라도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서 밥 한 끼라도 사주고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뭐 그래도 괜찮겠습니다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여기 보시면 당장 그 사람을 찾아가라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어려움을 겪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 도와주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필요 이상으로 부담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에게 거금을 빌려 달라고 한다거나 아니면 대단한 도움도 줘야 하느냐 하면, 아니요.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다 퍼주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오늘 말씀에 보시면 언제 도움을 주었다고 하십니까.

그렇죠. 상대방이 주릴 때나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잖아요.

(空腹であったとき、渇いていたとき、旅人であったとき、裸のとき、病気のときや牢にいたとき)

주릴 때라고 하다면 아주 배가 고플 때입니다. 그 때 무슨 고급 레스토랑에서 풀코스를 대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밥 한끼나 빵 한 개라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목마를 때라고 한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비싼 무슨 음료수가 필요하겠습니까. 아니에요. 깨끗한 물 한 잔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장 잠을 잘 때가 없거나 헐벗었을 때라고 한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집을 대신 얻어주거나 비싼 새 옷을 사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서 하루 이틀 머물게 한다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나누어 줄 수 있는 옷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병들었을 때라고 해도 무슨 비싼 치료비를 대라는 것도 아니고, 옥에 갇혔을 때에도 큰 돈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돌보고 그리고 옥에 갇혔다면 외롭지 않게 찾아가 주거나 편지라도 써주라는 것이지요.

이를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대단한 돈이나 많은 시간을 들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면 충분하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인데, 항상 말씀 드리듯이 이는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일하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는 또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지요.

아이고 주님, 제가 주님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합니다만, 제가 그 인간은 아무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요한1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神を愛す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んでいるなら、その人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してい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눈에 보이는 그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냐.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軽んじたりし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天にいる、彼らの御使いたちは、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御顔をいつも見ているからです。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못 나고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나한테 아무리 미운 짓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가면서 관심있게 지켜보고 계세요.

이방인에 대한 전도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0장 15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마찬가지입니다. 아휴, 주님, 그 인간 아시잖아요. 그 인간이 지금 아무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그건 다 벌을 받아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한테 도움을 줄 필요가 전혀 없다니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라고 한 사람을 네가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지 말라.”

「神が助けてあげなさいと言った人を、あなたが助ける必要が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주님은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말씀에 대해서 또 하나의 오해를 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 누가 얘기를 하면서 하는 말이, 오늘 성경에 보면 의인들이 하는 말이 자기들이 언제 착한 일을 했는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갖고 착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것이고 교만이 생기게 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어려운 것을 생각하기 전에, 쉽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가 도움을 줬어요. 아니, 뭐, 대단한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버스나 전철에 탔을 때 나이 드시 분에게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그것도 역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 것이잖아요.

그러면 그와 같이 일을 하면서도 “나는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것이 교만이에요?

이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무리 우리가 무심코 한 일이라 하더라도,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행기의 경우를 본다면 큰 비행기든 작은 비행기든 간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기록장치가 탑재되어 있다고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비행음성기록장치와 비행자료기록장치라고 합니다.


우선 비행음성기록장치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 측과 관제탑, 그리고 비행기 조종석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음성들이 자동적으로 녹음이 되고, 비행자료기록장치라고 하는 것은 비행기의 속도, 고도, 가속도, 기체방향, 엔진 동작, 날개 상태, 조종관 방향 등 모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이 기록장치들은 1100도 고온에서도 30분 동안이나 견딜 수 있고 바다 깊이 6000미터 수압에도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비행기에 이어서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사고와 달리 비행기 사고의 경우에는 한 번 발생하게 되면 대부분 큰 참사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장치가 우리 안에도 모두 장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대화가 기록되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되는 장치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제 상상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행위라고 할 수 있잖아요.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마지막 날에 우리는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행동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도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비행기 기장이라 하더라도 앞서 말씀 드린 그와 같은 비행기록장치를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듯이 우리 안에 있는 기록장치도 우리 마음대로 바꾸거나 조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도움을 줄 때 우리도 모르게 해야 한다? 아니요. 오히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로지 이를 위해서 이를 악 물고 힘껏 달려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취미로 선교를 했습니까. 심심풀이로 여유 부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갔습니다. 이를 악물고 순종을 하며, 이를 악물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를 악물지 않아요?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기를 쓰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순종이잖아요.


여러분, 순종이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는 것이 무슨 순종이에요. 그것이 아니라 나는 하기 싫은데도 내 주인이 시키니까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 순종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날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 다가올 것입니다. 그 때가 임했을 때 서둘러 이것저것 준비하려고 해도 그럴 여유가 없어요.



마태복음 24장 40절~42절
“40.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そのとき、男が二人畑に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女が二人臼をひいていると一人は取られ、一人は残されます。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主が来られるのがいつの日なのか、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고린도전서 15장 51절~52절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聞きな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奥義を告げましょう。私たちはみな眠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みな変えられます。
終わりのラッパとともに、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変えられます。ラッパが鳴ると、死者は朽ちないものによみがえり、私たちは変えられるのです。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나팔이 불 때에 순식간에 홀연히(終わりのラッパの時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 구분되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날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날이 언제 임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예, 하필이면 그 날 그 때,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예, 그렇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そうです。終わりのラッパの時たちまち、一瞬のうちに分けられると書かれ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私たちは、それがいつなのか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それはいつだと申し上げましたか?

そうです。よりによってその日、私たちが全く予想だにしなかった、まさにその日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ですから、どう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そうです。目を覚ま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常に備え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더 늦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우리의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 그 나팔이 불어오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바로 그 날,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手遅れになる前に、主が私たちにおっしゃってくださったとおりに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私たちに残された時間のその時まで、私たちの考えより主のみ言葉に従いながら生きていく人生を通じて、

最後の日、そのラッパの音が響き渡り、主が雲に乗って来られるまさにその日に、一人も漏れることなく、あなたがたのために備えられていた天の御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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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1회 결산을 합니다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4節~30節
“14.天の御国は、旅に出るにあたり、自分のしもべたちを呼んで財産を預ける人のようです。
15.彼はそれぞれその能力に応じて、一人には五タラント、一人には二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て旅に出かけた。するとすぐに、
16.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それで商売をし、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た。
17.同じように、二タラント預かった者も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た。
18.一方、一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地面に穴を掘り、主人の金を隠した。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20.すると、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が進み出て、もう五タラントを差し出し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五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私は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2.二タラントの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二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3.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4.一タラント預かっていた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あなた様は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厳しい方だと分かっていました。
25.それで私は怖くなり、出て行って、あなた様の一タラントを地の中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これがあなた様の物です。』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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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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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6번째 시간으로서 “결산을 합니다” 清算をしま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까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좀 길지만 말씀 자체는 우리에게 친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시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다음에 이 말씀에 담겨진 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종들의 주인이 먼 길을 떠나는데 그 전에 자기 소유를 그 종들에게 맡겼다고 하지요. 한 사람한테는 금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한 달란트라고 하는 것의 무게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 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당시의 무게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달란트가 지금의 무게로 환산했을 때 신학자들은 대략 27킬로에서 34킬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30킬로라고 하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뭐가 한 달란트래요? 예, 금이 한 달란트라고 합니다.

요즘은 금값도 많이 올랐다고 하지요? 그래서 금 1그램이 1만엔, 10만원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것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금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는 몇 그램이에요? 예, 1킬로는 1000그램입니다.

그러면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 1000그램은 얼마입니까. 예, 계산 쉽지요? 1그램에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 1000그램이라면 1000만엔, 1억원이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무게가 어떻게 되었지요? 예, 30킬로입니다.

금이 1킬로에 1000만엔, 1억원이었으니까 30킬로면 어떻게 됩니까.

예, 30배를 하면 되니까 3억엔, 30억원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게 몇 달란트요? 예, 한 달란트가 그 정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해서 조금 맡겼다고 생각하면 이는 오해입니다. 제일 적게 맡긴 종이라 하더라도 3억엔, 30억원이라는 거금을 맡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큰 재산을 맡기고 주인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와서 결산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종들은 주인이 맡긴 재산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칭찬을 하지요.

하지만 마지막 종은 어떻습니까. 그 종은 일을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놨었어요.

이 사실을 알았던 주인은 크게 화를 냅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30절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26節~30節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주인은 그를 가리켜서 악하고 게으른 종(悪い、怠け者のしも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졌던 것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바깥 어두운 데(外の暗闇)로 내쫓기고는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우리는 일단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부분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확인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처음 오시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です。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は今から後(のち)に、人の子が力ある方の右の座に着き、そして天の雲とともに来るのを見ることになります。」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다시 이 땅에 오시게 되는데 그 때의 상황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 때는 저기 이스라엘 시골 마구간에서 조용히 태어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 중에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이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하물며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이나 모두가 보는 가운데 오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다음에 무엇을 하신다고 말씀하세요? 나를 믿은 사람은 구원 받고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뜨린다고 하시나요?


오늘 말씀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결산(清算)”을 하시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확인해야 할 두 번째 점입니다. 주님은 분명 “결산”을 하시겠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은 사실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 우선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등장하는 주인을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 주인 밑에 있는 세 종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 믿는 사람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누구한테 돈을 잠시 가지고 있으라고 맡긴다고 한다면, 아무리 적은 돈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한테 돈을 맡기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보세요. 그냥 푼돈이 아니에요. 자기마치 금 30킬로, 대략 3억엔,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아무한테나 맡길 리가 있겠습니까.


에이, 뭐 그래도 부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이나 일본에서 아무리 대기업 재벌 회장이라 하더라도 누군지 모르는 사람한테 3억엔, 30억원을 맡기겠어요?

그리고 자기 회사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단 사원이나 대리, 과장한테 그 큰 돈을 맡기겠습니까. 적어도 부장이나 아니면 임원급한테 맡기지 않겠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회 돈 3억엔,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한테 맡기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아무리 못해도 교회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종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 주인과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있어왔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도 그 종들이 분명히 성실하게 일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어떻습니까. 다른 종들은 열심히 맡은 바 소임을 감당했는데 마지막 종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기껏 그 큰 재산을 맡겨 놨더니, 아무 일도 안 했어요.


이는 마치 그런 것이지요. 주인이 그 종을 위해서 3억엔이나 들여서 회사를 차려줬는데, 주인이 떠나자 셔터문 내리고 놀기만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단순히 게으른 것만이 아니라 주인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저버렸기 때문에 악한 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하시나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30절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생각해보십시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당하고 거기서 슬피 우는 사람을 두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단순히 슬퍼한다는 것이 아니라, “슬피 우며 이를 간다(泣いて歯ぎしりする)”는 것은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을 당한 상황을 뜻한다는 것이에요.


저는 이 주장에 대해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종은 내가 주인이 맡겨준 돈을 땅에 묻어 놨다가 주인이 다시 왔을 때 그걸 파내서 주면 칭찬 받을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반대로 크게 혼이 났을 뿐 아니라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고 억울했겠습니까.

그래서 단순히 슬피 우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갈았다고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참 맞는 말씀 같아요.

그런데 저는 요즘 교회에 보면 마지막 날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슬피 울며 기를 갈게 되지나 않을까 대단히 우려가 됩니다.

이는 이단 사이비 단체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교회에서도 말합니다. 한 번 믿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아. 한 번 믿으면 그 때에 구원이 약속되는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아무리 큰 재산을 맡길 만한 종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결산을 할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는 축복이나 구원 대신 저주를 받을 수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13장에 보시면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남북이 나뉘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있는 남쪽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レハブアム)이 왕이 되지만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ヤロブアム)이 통치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도 우상을 숭배해요. 바로 그 때 남쪽 유다에서 한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 벧엘(ベテル)까지 와서 보자 여로보암이 우상한테 절을 합니다. 이 때에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ヤロブアム) 왕을 저주하고 죽음을 예언합니다.

이를 들은 여로보암(ヤロブアム) 왕은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대접하려고 하는데, 이 선지자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열왕기상 13장 8절~10절
“8.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すると神の人は王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の宮殿の半分を私に下さっても、私はあなたと一緒に参りません。また、この場所で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みません。
というのは、主のことばによって、『パンを食べてはならない。水も飲んではならない。また、もと来た道を通って帰ってはならない』と命じられているからです。」
こうして、彼はベテルに来たときの道は通らず、ほかの道を通って帰った。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기서는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아무리 왕이 먹거나 마시라고 해도 못 마시겠다고 거절을 해요.

그런데 마침 그 벧엘에 어떤 한 늙은 선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의 아들들이 여로보암 왕과 유다에서 온 선지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거나 들었나보죠? 이 일을 집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인 나이 든 선지자한테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 선지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이 늙은 선지자가 지금 막 유다로 돌아가고 있는 선지자를 길가에서 만나요. 그러면서 이 늙은 선지자가 말하기를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하자고 청합니다.

하지만 거긴 자기 고향이 유다가 아니라 아직 이스라엘 땅이에요. 왕의 명령도 거절했는데 그 사람의 부탁을 들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이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온 선지자한테 말합니다.


열왕기상 13장 18절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彼はその人に言った。「私もあなたと同じく預言者です。御使いが主のことばを受けて、私に『その人をあなたの家に連れ帰り、パンを食べさせ、水を飲ませよ』と告げました。」こうして彼はその人をだました。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 나이든 선지자가 말하기를,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인데, 천사가 나한테 나타나서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에 당신을 집으로 초청하고는 함께 식사를 하라고 하셨다더라……이랬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이 말을 믿고 이 나이든 선지자를 따라가서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열왕기상 13장 20절~22절
“20.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21.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彼らが食卓に着いていたとき、その人を連れ戻した預言者に主のことばがあったので、
彼は、ユダから来た神の人に呼びかけて言った。「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は主のことばに背き、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ず、
引き返して、主があなたに、パンを食べてはならない、水も飲んではならないと言った場所でパンを食べ、水を飲んだので、あなたの亡骸は、あなたの先祖の墓には入らない。』」


유다 선지자가 나이든 선지자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갑자기 이 나이 든 선지자한테 임하더니만, 너 왜 내가 하지 말라고 한 짓을 하느냐고 크게 꾸짖는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데, 결국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자한테 물려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유다에서 온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나이 든 선지자가 왜 이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집에까지 초청해서 식사를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이든 선지자는 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집으로 초청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먼 길을 온 선지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반가운 마음, 아니면 대담하게 왕한테까지 찾아가서는 그 면전에서 그와 같은 무서운 저주까지도 할 수 있는 선지자라고 하기에 존경하는 마음에서 초청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그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처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야기 흐름 상으로 보았을 때,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만들어서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죽여버리자고 하는, 그와 같은 의도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성이 그런 악한 사람 같지는 않아요. 그가 한 거짓말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나 그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 못한 것입니까. 이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하는 크나큰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왜곡되고 변질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란 간에 있어서 전운이 감돌자 어느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하지요.

이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할 때다.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할 때다.

이게 사실입니까. 여전히 저기 중동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들, 또는 유전자적 유대인만이 유대인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이 어쩧다는 둥 예루살렘이 어쩧다는 둥의 주장을 한다면, 그 주장대로라면 예수님도 필요없고 신약도 필요 없고 당장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배를 가르고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강단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군요.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투표하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 분들을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을 하시는 분들, 인간적으로 본다면 나쁜 분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지 않을까 해요. 사실 알고 보면 다 좋으신 분들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꿈속에서 천사가 말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기도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알려주셨다고 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보면 가끔 꿈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5절~26절
"25.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わたしの名によって偽りを預言する預言者たちが、『私は夢を見た。夢を見た』と言うのを、わたしは聞いた。
いつまで、あの預言者たちの心に偽りの預言があるのか。心の偽りごとを語る預言者たちのうちに。

예레미야 29장 8절~9절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ま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夢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둥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둥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이단 사이비 교주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이다 환상이다 하면서 이를 믿으래요. 그리고 더 심한 경우는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풀면서 또 그것을 믿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また、私たちの主の忍耐は救いであると考えなさい。愛する、私たちの兄弟パウロも、自分に与えられた知恵にしたがって、あなたがたに書き送ったとおりです。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기도도 좋고 방언도 좋고 금식도 좋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모르고 목사님 설교를 포함해서 맨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말이나,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마지막 날에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祈りや異言、断食もいいでしょう。しかし、何よりも聖書のみ言葉を正しく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聖書も知らずに、ただ、牧師先生の説教も含めて、あの人この人の言っていることとか、聖書以外のほかの本にばかり耳を傾けていて、最後の日に外の暗闇に追い出されて歯ぎしりをすることになったらどうしますか。

私たちは聖書を正しく学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何よりも主のみ言葉に耳を傾け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아니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결산을 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결산을 하게 되는 바로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라고 하는 크나큰 칭찬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先、主が来られるとき、あるいは私たちが主の御前に立つとき、主は私たちに清算をしようと言われるはずです。

まさにその最後の日、主の御前で清算することになるまさにその日に、『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といって大きな称賛を受けら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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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0회 슬기 있는 자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13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5章 1節~13節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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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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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5번째 시간으로서 “슬기 있는 자” 賢い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에만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여기에 보시면, 두 부류의 여성들이 등장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절~2절
“1.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1.そこで、天の御国は、それぞれともしびを持って花婿を迎えに出る、十人の娘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2.そのうちの五人は愚かで、五人は賢かった。


이 여성들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슬기 있는 여성과 슬기 없는 여성의 차이가 있겠지요. 그 차이가 3절과 4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4절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3.愚かな娘たちは、ともしびは持っていたが、油を持って来ていなかった。
4.賢い娘たちは自分のともしびと一緒に、入れ物に油を入れて持っていた。


여기서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담아서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슬기가 없는 자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등만 가져가고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니, 미련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등을 가져가면서 기름을 안 가져갔나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문을 읽어가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일단 이 열 명의 여성이 이제 신랑이 온다고 해서 맞으러 갔어요. 여기서도 아니, 신랑은 하나인데 왜 신부가 열 명이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점도 역시 좀 뒤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열 명의 여성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땠다고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5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5.花婿が来るのが遅くなったので、娘たちはみな眠くなり寝入ってしまった。

예, 온다고 한 신랑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다 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습니다.

마태복음 25장 6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6.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さあ、花婿だ。迎えに出なさい』と叫ぶ声がした。

신랑이 이제 온다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하필이면 밤중이었다는 것이에요.

마태복음 25장 7절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7.そこで娘たちはみな起きて、自分のともしびを整えた。


다들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오니까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태복음 25장 8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8.愚かな娘たちは賢い娘たちに言った。『私たちのともしびが消えそうなので、あなたがたの油を分けてください。』

여기서 보면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기름을 아주 안 가져간 것이 아니에요. 그들도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뭐예요? 예, 기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반면에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기름이 넉넉했었나보죠? 그러니까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슬기 있는 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마태복음 25장 9절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9.しかし、賢い娘たちは答えた。『いいえ、分けてあげるにはとても足りません。それより、店に行って自分の分を買ってくださ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름이 서로 나누어 써도 충분할지 어떨지 모른다. 우리가 나누어 주면 둘 다 부족할 지도 모르니까, 그것보다는 어서 가서 기름을 파는 곳에 가서 사오는 게 낫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미련한 자들은 서둘러 사러 가지요.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25장 10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0.そこで娘たちが買いに行くと、その間に花婿が来た。用意ができていた娘たちは彼と一緒に婚礼の祝宴に入り、戸が閉じられた。


하필이면 그 미련한 자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어요. 그래서 신랑은 그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던 슬기로운 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예, 문이 닫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제 얼마 후에 아까 그 기름을 사러 갔던 자들이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1절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1.その後で残りの娘たちも来て、『ご主人様、ご主人様、開けてください』と言った。

사실 이 사람들도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아니잖아요. 따지고 보면 신랑을 기다리기 위해서 기름을 사러 갔다 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그들에게 신랑의 말은 단호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2절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자, 이렇게 끝나게 되는데, 이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우선 전체적으로 살펴본 다음에 몇몇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서는 혼인잔치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혼인잔치는 말하자면 결혼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자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이 혼인잔치를 천국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御使いは私に、「子羊の婚宴に招かれている者たちは幸いだ、と書き記しなさい」と言い、また「これらは神の真実なことばである」と言った。

즉 성경에 있어서 우리의 신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고 신부는 우리 모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실 부모자식이나 형제 자매보다도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에도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은 1촌입니다만,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親等’이라고 하는데, 역시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어요.

부부라고 하는 것이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それゆえ、男は父と母を離れ、その妻と結ばれ、ふたりは一体となるのである。

부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처럼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들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분명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나가서 기다릴 리가 없겠지요.

더구나 미련한 자들 만이 아니라 슬기 있는 자들도 신랑을 맞이러 나갔다고 하니, 이는 분명 곧 신랑이 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제가 항상 드리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에게 “믿음”이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신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알았어요. 신랑이 곧 온다는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그들은 모두 흠잡을 곳이 없는 믿음과 말씀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슬기 있는 자들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등불을 켜기 위해 기름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기름을 넣어 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오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소리가 나기를 지금 신랑이 왔으니 맞으러 나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깜짝 놀라 서둘러 준비를 시작하지요.

6절에 보시면 “밤중에(ところが夜中になって)”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밤중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아마도 그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을 때에는 밝았을 것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까 주위가 캄캄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제서야 등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제 온다고 하면 빨리 와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온다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도 좀처럼 그 모습이 안 보였나죠?

열 명이 모두 다 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등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미련한 자들의 등불이었죠.

자, 큰 일 났습니다. 신랑이 도착할 때까지 불이 켜져 있어야 할 터인데, 등불의 기름이 떨어져가요. 그래서 그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기름을 나눠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떻게 말합니까. 슬기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되면 우리 서로가 다 모자라게 될 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이는 당연하지요. 신랑이 언제 도착할 지 모르는데, 막상 도착했더니 둘다 불이 꺼져 있어봐요.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던 것이 모두 헛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어서 가서 사오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미련한 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서둘러 달려가서 기름을 사러 갔는데, 하필이면 마침 그 때 신랑이 도착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기름을 사서 돌아온 여성들은 신랑이 들어간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저희도 지금까지 기다렸었다고요. 이 날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들어가버리면 어떡해요. 어서 빨리 열어주세요.

하지만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2절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2.しかし、主人は答えた。『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私はあなたがたを知りません。』

문 안에서 들려온 소리는 엄합니다. 너희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들에게는 모두 믿음과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는 분명 말씀, 그러니까 신랑이 올 것이라는 말씀을 알았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행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행함? 물론 그들은 행함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등을 들고 맞으러 갔잖아요.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가 뭐냐 하면 기름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등불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석서에 보면 유대인들의 결혼식 행사에 등불을 켜는 관례가 있었다고 하는데, 만약에 이를 위해 그들이 등불을 준비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모두 같은 분량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한쪽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다른 한 쪽은 기름이 부족했다고 한다면, 이는 그들이 생각하기를 등불은 어디까지나 비상용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말하자면 신랑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서 등불과 넉넉한 기름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필수품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느 분 주장에 의하면 이 때의 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등잔불 같은 것이 아니라, 불이 활활 타는 횃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이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면 작은 등불이라도 괜찮을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캄캄한 길을 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횃불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횃불의 경우에는 아무리 오래 탄다 하더라도 10분에서 15분 정도라고 해요. 그러고는 꺼지기 때문에 기름을 더 보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길을 나서기 전의 두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슬기 있는 자 다섯 명과 미련한 자 다섯 명이 이제부터 신랑을 맞으러 나갈 때에, 미련한 자들은 예비 기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반면, 슬기 있는 자들은 예비 기름을 몇 통이고 준비했을 지 모릅니다.

만약 이 때에 등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등잔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기름이 필요했겠습니까. 그야말로 두 손에 무겁도록 낑낑 매고 기름을 들고 나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모습을 보고 미련한 자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신랑이 온다면 아무리 늦더라도 초저녁일텐데 무슨 그렇게 무거운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있냐. 괜히 옷이나 지저분해지고 땀을 흘리면 화장도 지워질 수도 있는데 우리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하고 가야하지 않겠냐……뭐 이러면서 똑똑한 척을 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슬기로운 자들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기름을 여유롭게 준비해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던 것이지요.

마태복음 25장 13절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곧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 2009년 1월 15일 오후 3시 26분. 한 여객기가 뉴욕의 공항을 이륙하자 1분만에 두 번이나 새 떼와 충돌함으로 인해서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이 났다고 합니다. 관제소에서는 공항으로 회항하라고 했으나 비행기 상황으로 보아서 이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판단한 설렌버거 기장은 (サレンバーガー:Sullenberger) 뉴욕 시내를 흐르는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을 감행합니다.

이 허드슨 강에 대한 착륙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155명의 승객과 승무원 모두가 무사히 구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셀런버거 기장은 허드슨 강에 착륙한 뒤에도 승무원과 승객들이 모두 밖으로 무사히 탈출했는지 비행기 안을 두 번이나 살피고 난 다음에야 마지막에 자신도 탈출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어서 2016년에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이 허드슨 강의 주역인 설렌버거 기장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는 질문에 대해 그는 말합니다.

“나는 평소 훈련대로 했을 뿐이다.”

그렇죠. 그는 평소에도 그런 훈련을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 기장만이 아니라 다른 비행기 조종사들은 분명 그와 같은 비상착륙 훈련을 몇 번이고 해왔을 것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휴, 세상에 항공기가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훈련을 해……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수많은 비행기 조종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평생동안 강 위에 착륙할 일이 있는 조종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고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 (国家運輸安全委員会) (NTSB)의 자료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0.0009%이고, 이는 438년 동안 매일 탑승해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그만큼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해서 철저하게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허드슨 강 비상착륙이라고 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당히 믿는 자신은 지혜롭고 그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있는 힘껏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16절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このように、後の者が先になり、先の者が後になります。」

저는 이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립니다.

“이와 같이 미련 자가 슬기로운 자가 되고, 슬기로운 자가 미련한 자가 되리라”

このように、愚かな者が賢い者になり、賢い者が愚かな者になります。

바울은 참으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9장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私が福音を宣べ伝えても、私の誇りにはなりません。そうせずにはいられないのです。福音を宣べ伝えないなら、私はわざわい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그는 자신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 행함이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으니까 이제 안심하고 다리 뻗고 쉬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부족하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부족해서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다, 더 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불타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요. 이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 보시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오시느냐 하면, 바로 “하필이면 그 때(よりによってそんな時)”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예, 그렇습니다.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미련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로운 자, 슬기로운 자, 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는 지나침이 없습니다. 믿음과 말씀을 통하여 넉넉한 행함으로 대비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 앞에서 슬기 있는 자로서 인정함을 받아, 마지막 날에 기쁨으로 넘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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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9회 오병이어의 두 가지 은혜 - 기린선교회
2024년 4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11절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ヨハネの福音書 6章 5節~11節
“5.イエスは目を上げて、大勢の群衆がご自分の方に来るのを見て、ピリポに言われた。「どこからパンを買って来て、この人たちに食べさせようか。」
6.イエスがこう言われたのは、ピリポを試すためであり、ご自分が何をしようとしているのかを、知っておられた。
7.ピリポはイエスに答えた。「一人ひとりが少しずつ取るにしても、二百デナリのパンでは足りません。」
8.弟子の一人、シモン・ペテロの兄弟アンデレがイエスに言った。
9.「ここに、大麦のパン五つと、魚二匹を持っている少年がいます。でも、こんなに大勢の人々では、それが何になるでしょう。」
10.イエスは言われた。「人々を座らせなさい。」その場所には草がたくさんあったので、男たちは座った。その数はおよそ五千人であった。
11.そうして、イエスはパンを取り、感謝の祈りをささげてから、座っている人たちに分け与えられた。魚も同じようにして、彼らが望むだけ与え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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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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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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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38회 거듭난 사람 - 기린선교회
2024년 3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マタイの福音書 28章 6節
“ここにはおられません。前から言っておられたとおり、よみがえられたのです。さあ、納められていた場所を見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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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난 사람” 新しく生まれた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더니 다시 살아나셨더라. 신기하다……로 끝나는 하나의 흥미로운 사건, 요즘 식으로 하자면 무슨 해외 토픽,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방송에 나올 만한 그런 놀라운 사건으로 끝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습니까.

사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정작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면 긴가민가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아직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아직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이든 보상이든 간에 돈으로 물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민사상이든 형사상이든 간에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상대방과 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한 절차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사과를 하고 물어주니까 재판이나 기타 방법으로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기껏 내가 물어주었는데 또다시 재판을 하게 되면 이 쪽이 이중 삼중으로 물어주어야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

이와 같은 합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 합의 내용에 대해서 만족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100만원을 물어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정중히 사과도 했습니다. 여기에 만족을 하면 상대방이 좋다. 그 정도 금액을 받고 사과도 했으니까 내가 용서해주마……라고 하면서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게 되면 이제 제가 잘못한 일은 상호간에 있어서 해결되는 것이지요.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로 나누어서 다투게 되면 하루하루가 피를 말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증거로 제시되어서 날을 거듭할수록 부끄러운 일들만 드러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과 화해를 하고 합의를 하게 되면 그 다툼은 끝나게 됩니다. 이제 상대방은 적이 아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화해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해결인 안 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과 합의가 안됐거든요. 하나님이 아직 합의문서에 사인을 안 하셨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증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활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죄를 모두 다 해결해주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합의문서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부활 하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부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자, 학생들이 아침에 학교에 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푸는지 아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그 문제 풀이를 처음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문제 푸는 방법을 몰랐는데 그 풀이를 보고 나니까 이제 학생들도 그 문제를 이해하고 풀 수 있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이 그 문제를 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선생님이니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 문제는 내가 선생님이니까 풀 수 있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이 이 문제를 푸셨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 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면 누구든지 풀 수 있어 하고 그 문제 푸는 방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7장 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すると主は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に、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桑の木に『根元から抜かれて、海の中に植われ』と言うなら、あなたがたに従います。

겨자씨 크기는 1~2미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2~3미터 크기의 나무가 되어 숲을 이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주 작은 믿음의 씨를 심기만 해도 나무가 움직이고 산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의롭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희생으로는 그 누구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의 희생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피조물인 인간이 아무리 수백 번 십자가에 달린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은커녕 자기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십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이것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의 것,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외하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요, 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3절~15절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もし死者の復活がないとしたら、キリストもよみがえ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して、キリストがよみがえらなかったとしたら、私たちの宣教は空しく、あなたがたの信仰も空しいものとなります。
私たちは神についての偽証人(ぎしょうにん)ということにさえなります。なぜなら、かりに死者がよみがえらないとしたら、神は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なかったはずなのに、私たちは神がキリストをよみがえらせたと言って、神に逆らう証言をし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성경은 우리 스스로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있는 것이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복음도 믿음도 모두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何とかして死者の中からの復活に達したいのです。

빌립보서를 기록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아니, 바울 정도가 되었으면 당연히 부활은 따 놓은 단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안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むしろ、私は自分のからだを打ちたたいて服従させます。ほかの人に宣べ伝えておきながら、自分自身が失格者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바울은 가만히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도 주님이 위에서 주실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전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떠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너무나도 안주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냥 가만히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로스쿨도 생기고 그래서 제도가 좀 바뀌고 그랬습니다만, 예전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2년 동안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쳐야지만 법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법대 동기 변호사가 제게 털어놓은 내용입니다만, 자기는 시험에 합격한 다음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방심을 해서 공부를 좀 소홀이 했다는 거예요.

사실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 연수원이야 웬만하면 수료는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사법연수원 과정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법시험 성적과 이 연수원 과정에서의 성적을 바탕으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고 그리고 그 성적이 관직에 있으면서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수원을 마치고 난 다음 사법시험 성적과 연수원에서의 성적에 있어서 상위권은 판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이 검사로 임용이 됩니다. 그 외에는 임용되고 싶어도 될 수 없어요. 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 차이를 본다면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일단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에 들어가면 공무원입니다. 5급이에요. 이 5급이라고 하는 것은 외무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을 해서 사무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와 같지요.

5급 사무관이라고 하면 과장급인데, 사실 밑에 9급부터 시작하면 거의 정년퇴임 할 때쯤 잘하면 달 수 있는 것이 5급입니다. 그런데 고시에 합격하면 빠르면 20대 후반, 그리고 보통 30대 초반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써 스타트 라인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판사나 검사로 임용이 되면 그 급수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갑자기 2단계가 뜁니다. 초임 판사나 초임 검사는 벌써 3급이에요.

보통 고시에 합격하고 5급부터 시작을 했다 하더라도 5급에서 3급까지는 빨라도 17년 이상이 걸리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년만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연수원을 마치고 2년 만에 3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야말로 고속 출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판사나 검사로 임관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그냥 변호사 자격만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니까 급수가 없어요. 단순히 변호사 면허만 취득한 것이 됩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그 자격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돈이 나오나요. 말하자면 운전면허나 같습니다. 운전면허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라에서 돈을 주지는 않잖아요. 그 면허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지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동기는 이걸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연수원 때 좀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면서 아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고시 패스한 것 보다 더 잘한 일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제 열심히 뛰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는 열심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믿은 지 얼마나 됐고, 자기가 무슨 직분을 받았고, 무슨 장을 몇 년 무슨 장을 몇 년 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와 같은 과거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서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찾지 못했지요.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저주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분명 잘못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꾸짖으셨던 것이지요.

여러분,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는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광합성에 있습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서 물과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잎사귀는 광합성을 통해서 그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꾸고는 나무 전체에 공급하게 됩니다.

이 광합성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햇빛입니다. 나무는 그 잎사귀를 통해서 햇빛을 받아요. 이를 통해서 광합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잎사귀가 이와 같은 작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잎사귀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은 안 좋은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나 장로 권사만이 아니라 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사모도 역시 귀한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갈은 직분은 목에 힘을 주라고 받는 것이 아니잖아요.


마치 나무에 있어서의 잎사귀와 같이,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에너지로 만들고는 교회 전체, 나아가 이 세상에 공급을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잎사귀가 있다면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그와 같은 잎사귀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헌금만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잎사귀에만 관심이 있어요. 이를 주님은 기뻐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하나님으로부터 잎사귀를 많이 받았다면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부활이라고 하는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우리는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서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風は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のか分かりません。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もみな、それと同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거듭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사람 움직이는 것, 자동차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느 쪽에서 와서 어느 쪽으로 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의 생각으로는 짐작할 수가 없어요.

자, 여기가 바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요한복음 20장 26절~27절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それから、トマスに言われた。「あなたの指をここに当てて、わたしの手を見なさい。手を伸ばして、わたしの脇腹に入れなさい。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になりなさい。」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묘사한 부분입니다만, 모두 문이 닫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그렇다면 영혼만 오셨나 하면 그 육신도 함께 오셔서 만질 수도 있는 존재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간의 제약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공간의 제약을 모두 넘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면, 아니요. 그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제약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 태어나는 것부터 잘 태어나야 해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답이 없다고들 합니다. 쉽게 말해서 부잣집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다음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돈 많이 벌고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등등……. 물론 다른 방법도 많이 있긴 하지만 대충 이런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잘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믿음에 있어서도 그렇다면 바울도 그렇게 했어야죠.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그와 같은 길을 박차고는, 그 험난한 고생길을 선택했다면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 생각으로는 바울처럼 살아가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그 좋은 배경, 그 좋은 집안과 그 좋은 경력을 가지고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적인 제약, 세상적인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적인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만 살아가려 합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잎사귀입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육신이라고 하는 잎사귀, 그리고 시간이라고 하는 잎사귀가 있지 않습니까.



みなさん、未だに世俗的な制約から抜け出せずにおられますか。未だに世俗的に生きていこうとされていますか。

みなさん、私たちには葉っぱがあります。それではそれは、どのような葉っぱでしょうか。

自分には何もないとおっしゃるかもしれませんが、いいえ、そうではありません。いくら持っているものがない人だとしても、私たちにはこの体という葉っぱ、そして時間という葉っぱ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잎사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잎사귀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열매는 맺지 않고 잎사귀만 기를 쓰고 모은다면 주님으로부터 나중에 무슨 말씀을 들으시려고 합니까.

이제 우리는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찾으실 때, 그동안 맺었던 믿음의 열매를 한아름 안겨 드릴 수 있는 삶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は主がくださった貴重な葉っぱだと言えます。しかし主が私たちに下さった発破で実を結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実は結ばずに、せっせと葉っぱだけを集めているとしたら、のちに主からどのようなお叱りを受けるおつもりですか。
これからは新しく生まれた人、御霊によって生まれた人として、すべての制約から抜け出し、信仰を身を結ぶ者、主が私たちに実を求められたとき、それまで結んでおいた信仰の実をたくさんささげられるような人生を通して、最後の日に喜びの復活を迎えられるみなさんであらんことを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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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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