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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3회 [면류관 강해 제4회]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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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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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4번째 시간으로서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아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내리신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모세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습니까.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애굽에서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사람을 해치게 되어 결국 광야로 돌아와 또 40년 동안 쓸쓸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한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400년 가까이 되는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를 한 번 간략하게 정리해보도록 할까요.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 중 하나인 야곱이 있지요. 그의 아들인 요셉이 그의 형들에 의해 노예로서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의 일이지요.

그리고는 노예로 살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팔려간 지 13년 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자, 그는 애굽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되어서 애굽을 다스리는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로부터 7년 동안에는 풍년이 들더니 그 이후에는 극심한 흉년이 들어서 애굽 외에는 모두 아사 직전이 되지요. 그러나 애굽에는 요셉의 지혜 덕분에 식량이 넉넉했습니다.

이제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과 일가족 모두를 애굽으로 불러들이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식량 걱정 없이,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 가족으로서 풍요로운 삶을 보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와 같이 좋은 환경 속에서 나날이 수가 늘어 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요셉을 비롯하여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자, 이제 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뀝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네 나라에 수많은 이민족이 있게 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배신을 할 수 있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기 시작하고, 점차 노예로서 고된 삶을 강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이에요.


창세기 15장 13절~14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는 벌써 한참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라고까지는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이 말씀에 의하면 이방 나라에서 400년 동안 이방 나라에 살면서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출애굽기 12장 40절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이상하죠?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이방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그것보다 30년이나 지났잖아요.

이 말씀을 보고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400년이라고 하면 400년 만에 풀어 주시거나 하실 일이지, 왜 30년이나 더 괴롭힘을 당하게 내버려두신 거냐.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계산을 잘못하신 거냐. 뭐, 그러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에요.

자, 지금 시리즈로 전해드리고 있는 말씀은 주제설교가 아니라 강해이기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의미로 우리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방금 말씀드린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떻습니까.

창세기 15장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여기서는 400년 동안 이방 민족이 괴롭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어떻습니까.

출애굽기 12장 40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괴롭힘을 당한 기간이 아니라 단순히 거주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은 비록 430년이긴 하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기간은 400년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당시 총리였던 요셉의 부름을 받아 애굽에 들어갔을 때부터 노예로 살았던 것은 아니잖아요.

초반에는 안락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노예로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성경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노예로서 살았던 기간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선, 성경기록에 의하면 요셉이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고 7년 동안 풍년이 있은 다음에 7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하지요.

창세기 45장 6절에 의하면 요셉이 가족들을 불러들인 것이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으로 접어들고는 2년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풍년부터 계산하면 9년 뒤인 셈이지요.

이를 근거로 단순계산을 한다면, 나이 서른에 총리가 되고 난 다음,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들어간 것은 9년 뒤이니까 요셉의 나이 39세 때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마지막인 50장 26절에 의하면 요셉이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요셉이 39세 때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왔고, 그가 11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들어가서 총리로 있던 요셉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소한 70년은 평안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출애굽기 12장 40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 만에 나왔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살았던 전체 기간인 430년 중에서 요셉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70년을 뺀다면 360년이라는 기간이 나오죠?


그러니까 요셉이 세상을 떠난 다음 곧바로 그들의 노예생활이 시작했다고 해도 430년 빼기 70년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길어도 360년 동안 노예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400년 보다 무려 40년이나 그 기간을 줄여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360년이라고 하는 기간이 어디 짧습니까.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36년이라고 해도 대단히 긴 세월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36년도 아닌 최대 36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면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니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께서는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셨습니까.

사실 꿈을 꾸는 데에 동서고금, 남녀노소, 그리고 빈부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2024년 11월 15일자 신문에 보니까 올해 수능 응시자 중에서 83세 되는 할머니도 계셨다고 하고, 그리고 작년 2023년 2월에는 94세 되는 할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참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하지만 노예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노예는 태어날 때 노예면 죽을 때까지 노예입니다. 노예는 꿈이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일거수일투족 자신이 무엇을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해요. 자신을 위한 삶도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 태어나서, 평생동안 주인을 위해 살다가 가는 인생이 노예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자, 여기서도 잠깐 공부 좀 하고 갈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으로 보내셨던 것일까요. 그들이 미워서 그러셨을까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인구의 증가율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자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면 대략 100년 동안에 3배에서 4배 정도의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00년에 4배라고 한다면 400년이면 16배잖아요? 이는 세계적으로 보아도 대략 추세가 비슷해요.

세계인구가 1600년에는 5억 정도였는데, 400년 뒤인 2024년대에는 80억이 되었으니 이것도 정확히 16배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인구는 대략 100년에 4배 정도, 400년이라면 16배 정도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엔 대해서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의 증가속도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46장 26절~27절
“26.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27.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여기에 보시면 며느리들을 제외한다고 하면 아이들까지 합한 숫자가 70명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며느리까지 남녀노소 모두 합친 숫자를 본다면, 좋습니다. 반올림까지 한다고 치고 넉넉잡아서 약 100명이라고 해보죠.

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일 때, 처음에는 약 100명이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430년 뒤에 나올 때에는 인구가 얼마였다고 말씀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출애굽기 12장 37절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을 세어보니까 장정, 그러니까 성인 남성의 수가 6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남녀노소를 다 합치면 대략 20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산을 해요.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애굽에 들어갈 때를 약 100명이었다고 한다면 나올 때는 몇 명이요? 예, 200만명이라고 한다면 430년 동안에 몇 배가 늘어난 거예요?

100명에서 200만명, 400년 사이에 2만배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평균이 400년 동안에 16배인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20배도 아니고 2만배가 증가했어요. 세상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라는 환경에 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도록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신 결과입니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당시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들 하나가 아니야.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 거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요즘 사람들은 뭐 이런 말을 별로 기뻐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지금 밥 한끼 먹을 돈이 없어요. 아니면 한달 치 집세를 낼 돈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재산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줄게……. 이러면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좀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정도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자, 이제 그 수가 이제는 한 가정이 아니라 한 나라의 민족을 이룰 정도로 늘었어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점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모세를 부르실 때의 말씀을 우리는 주목을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축복처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집도 없고 재산도 없고, 그리고 자유도 소망도 없이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한테, 최고로 좋은 집과 넉넉한 재산을 주시겠다는 것보다도 더욱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을 이끌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나일 강을 피로 만들고, 개구리와 이와 파리를 통해서 재앙을 내리시고, 질병과 자연재해와 마지막에는 장자를 치시는 이적을 통해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출애굽기 14장에 의하면 그들 앞에 놓인 홍해를 갈라 여성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격해오던 애굽의 최정예부대를 모두 전멸시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씀드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려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요?

예, 그렇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 아니, 야곱이나, 이삭도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그와 같은 놀랍고도 기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 그리고 단순히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을 통해서만이 아니에요. 400년 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폭발적으로 늘리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아무리 옥토였던 곳이라 하더라도 땅이라고 하는 것은 놔두면 폐허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렇죠. 가나안 여섯 족속을 시켜서 그 땅을 부지런히 가꾸도록 만드셨던 것이지요.

가나안 사람들은 그 거기가 자기들을 위한 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려고, 그들을 시켜서 열심히 가꾸게 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 백 년에 걸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줄 어마어마한 축복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준비하셨어요. 이 축복의 주인은 이미 정해진 것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주어진 영광된 축복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경은 무엇에 대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예, 순종에 대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이 모든 축복이 주어진다는 점은 이미 기정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왔습니다.


민수기 13장 1절~2절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내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 씩을 뽑아 총 열두명을 가나안 땅으로 정탐을 보냅니다.


이제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 땅이 어떻다고 합니까. 아주 황폐하고 쓸모없는 땅이래요?

아닙니다.

민수기 13장 25절~27절
“25.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들은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땅,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에 거짓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에게 주실 축복이 정말로 놀랍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당장 올라가서 그 축복을 차지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지요.

민수기 13장 28절~33절
“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는 뭐예요? 예, 거기 있는 이방민족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 지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명료합니다. 너희들을 위해서 좋은 땅을 몇 백 년에 걸쳐 준비해 놨어. 너희도 가서 직접 봤지? 그러니까 이제 그 땅을 차지하면 돼.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말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강해 보여서 저희는 차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러고 있는 것이잖아요.

이를 보고 정탐꾼 중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합니다.

민수기 14장 6절~9절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합니다.

이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거기 있는 백성들을 보고 두려워하지 마.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거기 사는 백성들이 아니라, 그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광대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땅이냐 하는 거야. 그 땅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로 했어. 그러니까 당장 올라가서 차지하자.

그러나 좌절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들은 듣지를 않습니다.


민수기 14장 1절~3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 저는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가 생각납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물위를 걸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폭풍이 몰아치는 물위를 걸어갔어요.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죠.

마태복음 14장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담대한 믿음을 가졌으면 예수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람을 보게 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국 물속으로 빠져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손가락으로 실험을 해보면 금방 압니다. 멀리 보면 자세히 보이더라도 손가락을 눈앞에 두고 가까이만 본다면 멀리 있는 모습이 흐려져서 안 보이게 돼요.

마치 그런 식이지요.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이길 수 있는데, 주님이 아니라 코앞에 있는 바람을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게 되자 무서워서 실족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의 3절 가사가 어떻게 됩니까.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우리가 주님께 초점을 맞추면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고는, 세상과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아닌 코앞에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그렇죠. 구속한 주님은 간곳없고 세상과 나만 보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요? 예, 그렇죠. 마치 바람을 보고 물속으로 빠져버린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현실 앞에서 실족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 이런 격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현실을 보니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제 도망가고 싶어요.

그래서 뭐라고 해요? 예,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가 그들한테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하고 난리를 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6절~33절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들이 지금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뒤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보세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정성 들여서 너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걸 못 받겠다고?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좋아. 너희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해주마. 사리분별이 있는 성인들 중에서, 내 말을 믿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광야에서 다 죽을 거야. 가나안 땅에는 절대로 못 들어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정성 들여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나 보죠? 저희가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겠습니다! 하고 자기들 멋대로 쳐들어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겠어요.


민수기 14장 39절~45절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 값진 선물을 내던지셨어요. 너희들에게는 안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미 버스는 떠나간 다음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기로 되어 있던 그들은 순종을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쓰러지게 되고 그들의 흔적은 광야의 모래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축복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놀라운 면류관,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을,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보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축복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순종을 버리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축복의 약속을 버려 버리셨듯이 우리를 향한 축복도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믿고 견디게 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모두 얻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끝까지 견딤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하신 면류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도 같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아름답고 광대한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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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2회 [면류관 강해 제3회]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5장 29절~34절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개척후원, 선교후원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www.후원.com
미션펀드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미션펀드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3번째 시간으로서 “팔아 넘긴 장자의 명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도 면류관 강해의 핵심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고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오늘 본문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등장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그 출생부터 독특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이 두 형제는 쌍둥이였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용모가 매우 달랐어요.


창세기 25장 24절~26절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형 에서의 용모는 피부가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7절~28절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이 구절에 의하면 형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었던 반면에, 야곱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좀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에서는 사냥을 해오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가족들에게 대접을 했는데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해 오는 음식을 아주 좋아했다고 하지요?

반면에 야곱은 맨날 집에 있으니까 어머니 리브가와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두 형제들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창세기 25장 22절~23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아이를 임신했는데 뱃속에서 아주 많이 싸웠나봐요. 그러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더구나 그때까지 출산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참으로 괴로웠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뱃속 아이들은 두 민족인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큰 자가 작은 자를, 그러니까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언제요? 예, 태어나기도 전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지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렇다면 리브가 외에 그의 남편 이삭이나 아니면 그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뭐냐 하면 야곱은 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아니, 단순히 에서의 형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라, 장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당시에 장자라고 하면 그 집의 상속자였습니다. 대단한 권한이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야곱이 장자가 된다는 것은 이는 현실적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장자라고 하는 것은 다름아닌 태어난 순서로 정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야곱이 아니지요. 그는 장자권을 자신이 얻기 위한 방도를 생각합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내용에 의하면 600개가 넘는 세부적인 규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였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그만한 규율이 필요했겠습니다만, 야곱 당시에는 아직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하자면 거래와 같은 일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원칙이 필요했을까요.

이는 단순합니다. 상대방과의 합의만 있으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해요. 거기에 1만원이라는 가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1만원에 사려고 해요.

그럼 물건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에게 물건을 넘기고 그 대신 1만원을 그 사람으로부터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당시에는 무슨 ‘장자권은 팔 수 없다’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서로가 합의만 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든지 상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 주목한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넘겨받을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나 시간대를 계산했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올 때에는 항상 허기진 상태였다는 점도 놓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준비해온 야곱은 그날 한 길목에서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떡을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느 때처럼 에서가 걸어옵니다. 야곱은 태연하게 팥죽을 쑤고 있었겠지요. 이를 본 에서는 다짜고짜 야곱에게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네가 왜 여기 있냐, 왜 팥죽을 쑤고 있냐는 등을 물어볼 기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야곱은 신중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순간인데 대충 넘어가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야곱은 에서에게 말합니다. 형님이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세요.

이는 말하자면 떡과 팥죽을 줄 테니 그 대가로 나에게 장자의 명분을 넘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에서는 말합니다. 아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밥 먹여주냐. 그래, 너나 가져라. 그리고 빨리 거기 있는 떡과 팥죽을 내놓으란 말이야.

에서는 배가 고파서 그런지 성질을 부리며 소리칩니다. 그래도 야곱은 신중합니다.


장자의 명분을 자기한테 판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하지요. 여기서 맹세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닙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제 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고는 떡과 팥죽을 먹고 일어나 떠났다고 하지요.

이러므로 인해서 이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그의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버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가 어리석었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잘했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사냥을 잘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야곱이 나빴기 때문에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은 야곱이 악했기 때문에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습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에서는 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25장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예, 그렇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이를 떡과 팥죽에 팔아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말았던 것일까요.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본다면 ‘베코라’라고 해서 ‘태를 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영어번역본에는 뭐라고 되어 있냐 하면 birthright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birth’라고 하는 것은 birthday 라고 할 때 쓰이는 것처럼 ‘태어나다’라는 뜻이고, ‘right’라고 하는 말은 ‘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참 절묘한 표현 아닙니까. 장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열심히 공부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엄청난 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에는 그 외에도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거저로 얻은 권리라는 점입니다.

에서는 자신이 노력해서 얻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주고 사지도 않았어요. 단지 태어나면서 자신의 아무런 노력 없이 거저로 주어진 것, 그것이 바로 장자권, 장자의 명분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졌다는 것이에요.

만약에 몇 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절약한 끝에 돈을 모아서 샀던 비싼 것이었더라면, 에서가 그 장자의 명분을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겼겠습니까.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자신의 노력 없이, 자신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단지 ‘그까짓 것 뭐가 대단하다고’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결국은 헐값에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까.

에베소서 1장 3절~5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언제 우리를 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시기도 전에 이미 주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놀랍고도 놀라운 축복과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느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냈는데, 얼마나 십일조도 많이 내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데…….

혹시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자, 지난 주의 강해를 조금 복습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에덴에 있는 온갖 과실들을 밤낮없이 분주하게 키우거나 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 단지 그것 하나만 지킨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영원히 누르고 흔들어 넘칠 정도로 부어 주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약속의 크기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하는 축복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이 비교가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헌금이나 십일조를 많이 냈다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가 받은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장차 우리가 받을 축복과도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것으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받아 주시고 우리에게 약속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토록 부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는 축복, 사람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얻지 못할 엄청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축복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겼기에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은 오바댜서에 의해 멸망이 예언되고 결국 그 예언대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후손은 어떻습니까. 그 후손에서 이새의 아들 다윗이 나고 마침내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족보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떡 몇 개와 팥죽 몇 그릇에 그와 같은 축복을 팔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물론,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우리의 구원과 팥죽 몇 그릇을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자, 그럼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돈이 좀 넉넉하십니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글쎄요. 돈이 얼마 정도 있으면 넉넉하겠습니까. 100억원? 아니,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넉넉할까요?

사실 그 정도 되면 저 같은 경우는 잘 감이 안 옵니다만, 좋아요. 한 1,000억원 정도 있으면 남은 여생까지 좀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께 이렇게 제안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제가 지금 당장 여러분 은행 계좌에 현찰로 1,000억원을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신앙을 버리십시오.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1000억원이라면 이제 더 이상 집세 오를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생활비나 자녀들 교육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원하는 집, 원하는 차를 살 수도 있고, 직장에서 치사한 상사 밑에서 눈치 보며 일할 필요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동안 병원비 걱정도 없어요.

이처럼 꿈과도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조건은 단 하나,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앙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면,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유혹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런 유혹, 어디서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 5절~7절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인 것이지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귀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크고 작은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갈림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과 세상의 갈림길’인 것이지요.

아휴,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해도 내 인생에 바뀌는 것 하나 없더라. 신앙이 밥 먹여주나. 성경이 밥 먹여주나. 차라리 그런 쓸데 없는 것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에서가 빠져든 덫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구원의 약속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별볼일 없는 것처럼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이 구원의 약속은, 온 세상 모든 금은보화라 하더라도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가볍게 여긴다면 마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이라는 면류관도 역시 빼앗겨 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이제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 구원의 약속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시험이 닥쳐 오더라도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면류관을 끝까지 굳게 잡아 지킴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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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1회 [면류관 강해 제2회] 최초의 축복과 저주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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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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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 강해 2번째 시간으로서 “최초의 축복과 저주”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른바 구원의 취소, 그러나 저는 단순히 ‘구원의 취소’라기 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 이 점에 대해서 이를 긍정하는 의견,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약속은 취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이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6장 4절~6절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해서도 면류관 강해 중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만, 사실 성경에 보면 이 외에도 대단히 많은 곳에서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에 대한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이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라는 내용을 담게 될 면류관 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에 있어서 이 강해의 핵심이 되는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본 구절에 의하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즉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에 알아본 바와 같이 면류관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자신을 위해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며, 그 면류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이 면류관을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 그것은 바로 빼앗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를 위해 예비된 면류관은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주님은 이와 갈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친히 이를 빼앗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은 이 면류관 강해에 있어서 핵심이기 때문에 이 강해 동안에는 그 날의 본문구절과 함께 우선 이 핵심구절도 함께 읽고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요한계시록 3장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면류관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 1절부터 보실까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 방송국에서 어떤 한 여성을 밀착취재를 했다고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침에 그 여성이 일어나더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요. 그래서 어디를 가나 하고 카메라가 따라가 보았더니 시장에 갔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음식재료를 삽니다.

그 다음에는 마트에 가서 또 여러 가지 재료를 삽니다. 그것 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이제 백화점에 가서 실내외를 장식할 물건들도 사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 안과 바깥을 아주 정성스럽게 꾸밉니다. 그리고는 구입해온 최고급 자료를 써서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차렸습니다.

몇 시간 동안 집도 꾸미고 음식도 열심히 했는데 이제 저녁 6시쯤이 되자 누군가가 집의 벨을 눌러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어떤 남성이 활짝 웃으면서 들어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성의 남편이 며칠 동안 먼 곳에 출장을 갔다가 그 날 돌아오는 날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여성은 남편을 환영하기 위해 아침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것이지요.


도중까지 본다면 그 여성이 왜 그와 같은 준비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먹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 여행을 가려고 도시락 준비를 하는지 알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일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더니 그제서야 모든 목적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 여성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면서 쇼핑도 하고 그리고 집에 와서는 하루 종일 집도 꾸미고 요리도 하고 그랬던 것은 모두 다 누구를 위해서예요?


예, 그렇습니다. 모두 다 그의 남편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앞에 있어왔던 모든 일들은 다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렇죠. 그의 남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성의 모든 일은 다 그의 남편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남편을 제외해버린다면 모든 일들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는 빛과 어둠을 나누세요. 물과 궁창을 나누시고는 육지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채소와 나무들을 만드십니다. 해와 달을 만드세요.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와 하늘 위에 많은 생물들도 만드셨습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 열심히 일을 하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날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셨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천지창조는 모두가 다 ‘사람’이라고 하는 피조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사람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지금까지 다른 생물들을 만드셨을 때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른 생물들을 만드셨을 때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의 창조 목적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모양대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세상에 수많은 생물들을 창조하셨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신 피조물은 오로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축복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창세기 2장에 의하면 에덴 동산은 전체가 아름다운 귀금속이나 보석으로 넘쳐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의 · 식 · 주 문제, 뿐만 아니라 죽음도 질병도 없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세상에서 큰 기쁨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숲속에서 그냥 먹고 자고 하는 것인데 뭐가 좋겠냐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을 드립니다. 제가 여러분께 종이를 나누어 드리고 시간을 충분히 드릴 테니까 여러분 집에 있는 것, 여러분 것이든지 여러분의 가족 것이든지, 아무튼 여러분 집에 있는 것을 모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자세히 적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몇 가지 정도를 적으실 수 있을까요. 실제로 적어보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 번 구체적으로 자세히 하나하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머리 속으로라도 여러분 집에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적으셨나요?

그럼 제가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적으신 그 목록에 ‘지우게’를 적었나요? ‘양말’이라고 적으셨나요? ‘귀이게’라고 적으셨나요? ‘손톱깎이’라고 적으셨나요? ‘가위’라고 적으셨나요?

제가 지금 다섯가지를 말씀 드렸지요? 지우개, 양말, 귀이게, 손톱깎이, 가위……이 중에서 여러분 집에 하나도 없는 분 계십니까. 만약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언제 제가 여러분 댁에 심방 갈 일이 있다면 예쁜 것으로 하나 구입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설령 이 다섯가지 전부가 다 집에 없다 하더라도 이 중에서 한 두가지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여러분 집에 있는 물건 목록을 적어 보시라고 했을 때, 이와 같은 것들까지 적은 분들이 얼마나 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안 적은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아니 뭐 그런 게 대단한 거라고 꼭 적어야 해. 그거 아니에요? 그야 맞는 말씀이지요. 지우개나 가위 같은 것이 무슨 대단한 재산이라고 재산목록에 적겠습니까.

자, 에덴이 어떤 곳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 곳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가장 완전하고도 완벽한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 집도 없고 잘 곳도 없어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 집이 있었다거나 침대가 있었다거나 하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벽한 세상에 그와 같은 것들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있었으면 있었지, 그저 불편하게 맨날 흙위에서 먹고 자고 해서 온몸이 흙 범벅이었고 하는, 그와 같은 지저분한 생활을 아담과 하와가 보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내용, 구체적으로는 에덴에 어떤 시설이 있었고 얼마나 쾌적한 생활 공간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 내용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굳이 그와 같은 점에 대해서 기록이 없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쾌적하다 하더라도,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세상을, 당시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것을 창조하신 에덴 동산과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간혹 보면 과거 에덴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여기다 저기다 하고 주장을 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러면서 창세기 2장 14절에 보면 “유브라데”라는 강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지금도 이라크나 시리아 쪽에 흐르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아마도 에덴은 그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그 쪽을 잘 찾으면 과거 에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하지만 성경 기록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저희로서는 이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 때에 일어난 홍수 때문인 것입니다. 당시 홍수는 그저 하늘에서 비가 많이 온 정도가 아닙니다.

창세기 7장 11절~12절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지난 2011년 3월 11일에 일본에서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의 경우를 본다면 단 한 번의 지진과 쓰나미로 그 쪽 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 때 홍수를 보면 한 두 번도 아니고, 그리고 일부 지역에만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 기록에 의하면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단순히 하늘에서 비가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면에서도 지하수가 터져서 쏟아진 것이고, 그리고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세계적인 지진이나 홍수가 하루나 이틀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창세기 7장 24절에 의하면 물이 가득차 있었던 기간만 보더라도 150일이나 되었고,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나온 날을 본다면 1년 이상이라고 하는 긴 기간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홍수 이전에 있었던 에덴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어땠는지 찾아낸다는 것은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요컨대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곳이고, 둘째로 그 곳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완전한 세상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축복을 누려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 이후에는 노아의 홍수 이전이라 하더라도 에덴에 들어가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인 에덴에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에는 수많은 각종 나무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먹어도 되지만,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초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키기가 어려운가요? 수많은 열매를 먹지 말고 그것만 먹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다른 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되지만, 유일하게 그것만 먹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이잖아요.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본다면 ‘사랑’만 강조하기 십상인데 사실 여기에는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이지요.

사실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순종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순종의 책입니다. 사랑도 순종입니다. 순종과 구원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불가분의 개념인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은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래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순종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 알아듣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에덴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네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마시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괜찮아. 다만 단 하나, 내가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 열매만 먹지 않는다면, 그 작은 명령 하나만 지켜준다면, 네가 나에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생각하고 너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언제까지요? 예, 영원토록 부어 줄게.

하나님께서는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은 그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했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에덴에서 마귀에게 유혹을 당했을 때의 모습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5절~6절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람이 유혹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나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와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자기는 악인이 되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더욱 좋게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런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기고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23절~24절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제 그들에게 주어졌던 놀라운 축복은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빼앗기고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서도 구원이라는 약속의 취소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주어진 면류관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5장 5절에 의하면 아담은 930세까지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큰 소리로 주장을 해봤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빼앗기고 결국은 에덴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그들에게 또다시 축복이 회복되고 에덴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셨던 아담과 하와도 그들이 불순종을 하였을 때 가차없이 모든 축복을 빼앗아 버렸는데 하물며 우리가 불순종을 했을 때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으신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8절~29절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더더욱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 구원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끝까지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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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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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0회 [면류관 강해 제1회] 믿음의 시작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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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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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제 지난 주까지 이어온 복음서 강해는 44회로 일단 마무리를 하고,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면류관>을 주제로 해서 <지켜야 할 면류관>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강해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면류관 강해 그 첫 시간으로서 <믿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기독교 인구 수는 줄어가고 있으며, 반면에 이단이나 다른 종교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까. 성경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기독교는 왜 이렇게 쇠퇴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요리책이 있다고 해요. 그 요리책은 아주 유명한 요리사가 쓴 것인데, 그 요리사가 운영하는 식당은 대단히 놀라운 성장을 하고 있다고 해보죠.

그래서 나도 어디 한 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보자 하는 마음에 그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요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요리가 정말 맛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요리책이 잘못 되어서요?


아니에요. 그 책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검증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게 되고 말았다는 경험이 있으시다는 분 많이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요리책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만들고 그럴 때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설명서대로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해도 이상하게 작동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원인이 다 요리책이나 아니면 프라모델 설명서에 있는 것입니까.

물론 간혹 가다가 그런 경우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경우가 많겠습니까.

그렇죠.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이죠.

분명히 넣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안 넣었다든지, 아니면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어버렸다든지, 또는 넣기는 넣었는데 그 분량을 잘못 넣었다든지 하는 그 원인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프라모델도 그렇지요. 설명서대로 하지 않고 엉뚱한 부품을 가져다가 붙이려고 했다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 연결을 해버렸기 때문에 작동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책이나 설명서를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 그 요리나 프라모델이 이상한 이유는 그 책이나 설명서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한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이유도 그 원인이 복음이나 성경이나 하물며 예수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나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기에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어서 교회가 이처럼 문제 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리책이나 설명서 잘못이 아니라 요리책이나 설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음식맛이 이상해 지는 것이요, 프라모델이 이상해지는 것인 것처럼,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고 복음이 오염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16절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편지는 바울이 쓴 서한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나 고린도서, 데살로니가서나 갈라디아서 등의 성경은 모두가 다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던 당시에는 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믿음을 심어주고 말씀을 풀어주고 그리고 행함을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그 내용을 본래 뜻이 아닌, 이상하게 풀어버리는 바람에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망에 이른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오해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단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어떻게 성경을 풀게 됩니까.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의 교주는 재림 예수라고 하는 경우를 볼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말씀이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서 주입시키고는,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이 바로 자기라고 하면서 자기를 떠받들면 구원 받고,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멸망한다면서 결국은 자기한테 돈 갖다 바치고 재산 갖다 바치고 그리고 시간이나 몸까지도 갖다 바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다른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시한부 종말론입니다.

성경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억지로 왜곡해서 끼어 맞추어 놓고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멸망할 테니까……그러면서 역시 교주 말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 각 이단 사이비들 마다 앞에 붙은 문구들은 좀 다를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대부분이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한국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 없이 있어 왔던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새롭다기보다는 식상하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이러한 일들은 이후에도 또다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이처럼 성경을 오해하거나 억지로 푸는 것이 과연 이단이나 사이비들만 그런가 하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이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면 교회는 나날이 부흥할 것이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교회는 나날이 쇠퇴하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기에 대한 결론은 하나,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우리 스스로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저는 몇 년 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져온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그 동안 주저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 이전에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한 주장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로 인해서 성경말씀이 올바로 우리 안에 심어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이는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구원의 취소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의 취소’라고 하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이 취소되어 멸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더 쉽게 말하자면 한 번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그 구원이 취소 되어져서 지옥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른바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천국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장 23절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한 구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것 비록 아직은 이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당장 천국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장차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구원 받을 자격,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였기에 의로 여겨졌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구원 받을 자격을 주셨습니까.

성경에는 이점에 대해서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무슨 선행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즉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바로 구원이 약속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이 약속되었습니다. 누구는 세례를 받아야지만 비로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세례라고 한다면 이는 신앙을 가졌다는 징표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식교인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를 구약적으로 본다면 할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경우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신 그 시점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을까요, 아니면 할례를 받은 다음이었을까요.

이는 성경을 보면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시점이 15장 6절이라고 한다면, 한편 할례는 언제 등장하는가 하면 창세기 17장 10절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시점에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시점과 세례는 무관하다고 할 것이고, 오로지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그 시점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시점, 말하자면 구원을 약속 받은 시점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시점, 구체적으로 믿음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요엘 2장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로마서 10장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와 같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아 우리가 믿음을 시작한 시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한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표적으로 사도신경을 꼽을 수 있겠지요.

세례를 받거나 특별한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사도신경에 담긴 내용을 믿고 입으로 “전능하사 전치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라는 신앙고백을 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우리의 신앙은 시작되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지막 날에 구원에 이르는 자격,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이 놀랍고도 기쁨에 찬 구원의 약속은 과연 절대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남긴 서신이라고 합니다.

이제 주님 앞으로 나아갈 날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는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이와 같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내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요.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마지막 그 날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하여 구원의 약속을 받았는데, 남은 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버리고 믿음에서 벗어나 타락했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번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주님을 저버리고 신앙을 저버렸을 때에도 여전히 구원,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구원의 약속은 취소가 되는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회개를 했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에베소서 1장 7절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일서 1장 9절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보혈에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어떠한 죄라 하더라도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아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치만 문제는 회개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한 번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이 약속되었는데 그 다음에 타락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회개를 하지 않더라도 구원의 약속이 취소되지는 않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한 번 구원의 약속을 받았으나 죄를 짓고 타락을 하게 되면 한 번 받았던 구원의 약속은 취소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반 성도님들과 전문적 신학지식이 있는 분들과의 사이에서 견해가 갈리지 않을까 합니다.

짐작하건대 일반 성도님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처음에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나중에 믿음을 버리게 된다면 구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생활을 했었다고는 하지만, 나중에는 신앙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계속 섬기다가 죽었어요. 그렇다면 그 사람도 역시 처음에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천국에 간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번 주라도 교회에 가셨을 때 목사님께 한 번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의 약속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취소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드리면 특히 장로교나 침례교의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라는 놀라운 답변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이것이 이단이나 사이비라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통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목사님이나 신학자 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의견이 나오는 대표적인 견해는 장로회를 창시한 장 칼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 칼벵의 5대교리라고 하는, 이를 영문 첫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의 교리가 이른바 ‘성도의 견인’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성도는 구원의 취소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이 의견에 동의를 하십니까. 한 번 주어진 구원은 죄를 짓는다고 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단지 한 번 구원이 주어졌다고 해서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에 동의가 되시나요?


어떤 분은 그럴 리가 있겠냐고 하실 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장로교회 침례교에서 주장하는 엄연한 교리의 원칙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셨던 어떤 분은 제가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도 생소한 의견이라고 하면서 제 말을 반신반의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좀 지난 기사이긴 합니다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2017년 2월 23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목회자 500명에게 물었더니, 절반 가까이 "구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내용에 의하면, 총신대학교 실천목회연구과정에서 약 1년에 걸쳐서 초교파로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할까. 아니면 중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52.5%가 “구원은 그래도 영원하다”라고 답한 반면, 절반에 가까운 47.5%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조사는 오차범위가 ±5.75%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차범위 안에서 거의 절반이나 되는 목회자 분들이 “구원을 한 번 받았다 하더라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상으로 보면 구원은 취소가 없다고는 하기에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부터 시작한 이 면류관 설교에 대해서 이제 이와 관련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신학자나 목회자에 의해 적혀진 종교서적이 아니고 당연히 성경을 바탕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제 이 성경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올바로 심겨짐으로 말미암아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복음의 열매,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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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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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9회 소망과 겸손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9절~30절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미션펀드 :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4번째 시간으로서 “소망과 겸손”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적인 이치에 있어서 본다면 먼저 된 사람과 나중 된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 될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를 좀 알기 쉽게 본다면 자, 먼저 출발한 사람과 나중 출발한 사람, 어느 쪽이 먼저 결승점을 통과하겠습니까. 예, 당연히 먼저 출발한 사람이 먼저 골인할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된 사람은 먼저 될 가능성이 높고, 나중 된 사람이 나중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사실 오늘 본문인 주님의 말씀도 이를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누가복음 13장 29절~30절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많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몰려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인데,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된다거나, 아니면 항상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이 먼저 된 사람은 먼저 되고, 나중 된 사람은 나중 되는데, 이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세상에 보면 이른바 조기교육이라는 것이 좋다고 하지요? 저희 때 같은 경우에는 영어를 배우는 것은 중학교 때쯤부터 학교에서 배웠었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다고 하고, 그리고 가정에 따라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영어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는 너무 과하지 않나 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 사실 음악이나 스포츠 같은 경우를 본다면 초등학교가 아니라 이미 3~4살 때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을 처음 경험한 것은 대략 20대 중반 쯤이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인터넷이 아니라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PC통신이라는 것을 했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에 한정되고 그리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였거든요.



그런데 1995년 경이 되니까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이 이제 시작되었는데, 이를 경험하고 나니까 그야말로 차원이 다릅니다.

그도 그렇겠지요. 그 때까지는 하이텔이면 하이텔, 천리안이나 나우누리는 모두 각 회사에 있는 컴퓨터 안에서만 놀았었는데, 이제 그 좁은 틀에서 벗어나서 한국은 물론이고 이제 전세계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발전입니까.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부분 사람들 주머니에는 크고 작은 스마트폰이 들어 있어서, 웬만한 산간벽지가 아니라면 전화는 물론이고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하게 되었다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두고 ‘놀랍다’라고 하면 ‘아제’라는 말을 듣는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올해가 2024년인데 인터넷이 보편화가 된 2000년 경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 20대 중반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인터넷은 존재했던, 말하자면 IT에 있어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기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기성세대와의 차이는 좋고 나쁨을 떠나서 분명히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젊은 사람들은 100% 컴퓨터나 인터넷을 잘 하고, 중년층 이후 세대는 100% 컴맹이다……라고는 단정지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연배가 지극하신 분이 오히려 웬만한 젊은 사람들보다 놀라운 IT 실력을 발휘하고 계신 경우도 많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찍 시작하는 편이 늦게 시작하는 것보다 일찍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야곱의 아들 요셉은 17세라고 하는 나이에 고난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나이 서른에 당시 애굽이라고 하는 세계최강의 나라에서 2인자가 되었습니다. 다윗 또한 그의 나이 서른에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의 경우에는 어머니 한나의 서원으로 인해서 어린 나이에 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해서 일찍 시작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방주와 홍수라고 하면 한 사람이 떠오르지요? 예,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5장입니다.

창세기 5장 32절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성경, 특히 노아의 홍수 이전의 사람들 기록을 본다면 그 나이가 경이롭지요. 지금은 평균수명이 조금씩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00세를 넘게 사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는데, 노아의 홍수 지언의 기록들을 보면 700세, 800세가 보통입니다.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는 창세기 5장 27절에 의하면 969세까지 살았다고 하니까 놀랍지요?

하지만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그 수명이 급격하게 짧아집니다. 여기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자 분들의 주장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홍수 이후에는 이전에 비해 대략 10분의 1 정도로 수명이 짧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홍수 이전의 나이를 10으로 나누면 대략 지금 우리 나이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세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건설하도록 명을 받게 됩니다.

노아가 과연 몇 살 때 그 명을 듣게 되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방주를 짓도록 명하시는 가운데에 보시면 흥미로운 기록이 있어요.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명령을 하시는 장면은 창세기 6장 13절에서 22절에 등장하는 데 그 중 18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이 기록을 보시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건설을 명하실 때에는 이미 세 아들들에게 며느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당시에는 20세가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 500세 때에 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그 막내까지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다고 할 경우, 적어도 노아의 나이는 520세 때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홍수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언제냐 하면,

창세기 7장 6절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가 육백 세 때 홍수가 일어났다고 해요. 그러니까 이를 정리하자면 노아는 500세 때 쯤에 세 아들이 일었는데, 520세 경에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600세 때 홍수가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몇 살까지 살았는가 하면,

창세기 9장 29절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이를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0으로 나누어 본다면 노아는 50세 때 아들 셋이 있었고, 52세 쯤에 방주에 대한 명령을 들었으며, 60세 때 홍수가 일어나고 95세가 되어서 하늘나라고 갔다는 것이 되겠지요.

말하자면 노아는 적어도 50세가 넘어서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2장 1절~4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 땅에서 부르셨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오래 살았기 때문에 75세는 많은 나이가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홍수 전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홍수 이후의 사람입니까.

예, 홍수 이후의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홍수 전에 비해서 수명이 많이 줄어든 상황입니다.

창세기 25장 7절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아브라함은 175세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래도 지금 보면 오래 산 편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800세나 900세까지 살았던 홍수 이전의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아내 사라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하지요?


창세기 18장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홍수 이전처럼 800세 900세까지 살았던 시기에 99세라고 하면 그야말로 청춘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이미 노쇠하였다고 하니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75세라는 나이도 충분히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애굽에서 왕족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만 그 이후에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치고는 쓸쓸하게 보내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 그를 부르시게 됩니까.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신명기 34장 7절에 의하면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은 정확히 세 구분으로 나눌 수가 있어요. 애굽에서 풍요롭고 화려하고 멋지게 살았던 40년, 광야에서 쓸쓸하게 살았던 40년,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았던 40년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처음 40년과 두 번째 40년이라고 하는 기간은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40년 더하기 40년 도합 80년이라고 하는 기나긴 세월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40년, 그의 나이 80세부터 120세라고 한다면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 노년기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고, 그저 여생을 즐기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시기에 그를 가장 귀하게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이 늦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나큰 계획이 있으십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념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이른바 금수저다 흙수저다 하는 말이 있다고 하지요. 그 출생배경에 따라서 이미 사람의 인생이 어느 정도 정해진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세상에는 금그릇이나 은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기준은 다릅니다.

누가 금이냐 은이냐, 또는 누가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누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가 순종함으로 따를 때에 우리가 쓰임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겸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이후에 보시면 남유다의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이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보시면 그가 질병을 앓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음을 입은 장면이 나오는데,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편지와 많은 예물과 함께 사절단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때 장면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열왕기하 20장 12절~18절
“12.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13.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14.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하니
15.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그들이 다 보았나니 나의 창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하더라
16.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7.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병문안을 와준 사절들을 반갑게 맞아들인 히스기야 왕은 마음이 상당히 들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에 있는 보물고를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 기록을 자세히 보십시오. 어디 그 뿐이었습니까.

히스기야 왕은 ‘군기고’까지를 보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군기고를 보면 당연히 그 나라의 군사력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죠. 군사력은 그야말로 군사기밀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에서 온 사절단에게 보물고를 보이고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하고, 뿐만 아니라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안 보여준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군사력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왕이 살고 있는 왕궁의 내부까지도 샅샅이 보여주었다는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나라에 있어서 왕이 사는 곳은 이 또한 1급비밀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한국이 다른 나라에게 대통령실 설계도면을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았다고는 해도 그렇지, 히스기야 왕은 왜 이처럼 어이없는 행동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히스기야 왕의 말을 자세히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대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기를 지금 온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고 묻자 그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에게 말하기를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저기 멀리 있는 변방 시골 촌에서 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촌 사람들한테 자기네 나라의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모든 것을 보여줘 봤자 저기 바벨론인지 뭔지 모르는 지방 촌놈들이 뭘 알겠느냐 하고 방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이사야는 무서운 예언을 합니다.


왕이 지금 그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 없이 바벨론한테 빼앗기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왕의 후손들 중에서도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무서운 예언이긴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비현실적인 예언이었겠습니까.

저 듣도 보지도 못한 시골 촌놈들한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럴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 왕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그로부터 10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시드기야 왕 때, 그와 같은 일은 현실이 됩니다.

열왕기하 25장 8절~12절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저 멀리 있는 변방 시골 촌놈이라고 비웃었던 바벨론에 의해 철저하게 멸망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영원한 강자가 없지 않습니까.

이는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앞서 인터넷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인터넷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브라우저로 무엇을 썼냐 하면 넷스케이프라는 것을 썼습니다. 누구나가 모두 넷스케이프 브라우저를 써서 인터넷을 이용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익스플로러가 나왔어요. 당시 모든 웹사이트는 넷스케이프를 표준으로 해서 제작되었는데 누가 갑자기 나타난 익스플로러를 씁니까. 아무리 마이크로소프트가 큰 회사라 하더라도 넷스케이프의 아성은 절대로 안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있었더니 넷스케이프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그 브라우저를 정식으로 사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고 구입을 해야 했었는데, 익스플로러는 윈도우 안에 공짜로 딸려 오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무료로 쓸 수 있는 익스플로러를 쓰지 누가 굳이 돈을 내고 넷스케이프를 쓰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금 지나니까 이제 모든 인터넷이 익스플로러를 기준으로 만들어집니다. 전세계의 표준이 이제 넷스케이프가 아니라 익스플로러가 되어갔던 것이지요.

이제 익스플로러의 아성은 절대로 안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대세가 구글에서 만들어진 크롬을 사용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대부분 그 표준이 크롬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어요.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절대적인 아성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이는 웹브라우저만이 아닙니다. 메신저도 그래요.

예전에 메신저의 원조는 여러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ICQ라고 하는 메신저가 있었습니다. 이게 맨처음에 나왔을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인터넷을 통해서 상대방이랑 실시간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당시에는 메신저 자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제 기억으로는 처음 대화했던 것이 당시 미국 해군에 근무하고 있던 어떤 미국 군인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랬더니 조금 있으니까 MSN 메신저라는 것이 나오더라고요. ICQ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이만한 메신저는 없겠다 싶었는데, 이제 국산 메신저가 등장해요. 여러분 중에서도 아시는 분은 많을 겁니다. 혹시 네이트온이라고 기억하시나요?

예, 네이트온 정도가 되니까 이제 업무상으로도 활용이 많이 되더라고요. 저도 학원에 근무할 때였는데 그 때에는 이 네이트온을 사용해서 단체문자도 보내고 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네이트온 메신저의 아성은 안 무너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이는 뭐 두 말하면 잔소리죠? 카카오톡이 등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이제 지금 아무리 세상을 석권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2024년 11월 현재 주식시장을 보면 어떻습니까. 뭐,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S 무슨 전자 주식이 요즘 심각하다고 하지요.


제가 몇 년 전 신문을 좀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2020년 1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5년 전의 신문기사에 의하면 “S전자, 사흘째 사상 최고가…액면분할 전 기준 300만원 넘었다”였습니다.

주식이 한 주에 300만원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확실한 재태크 중 하나가 거기 주식을 사는 것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매달 한 주 씩 꼬박꼬박 사 놓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이게 엉뚱한 말도 아니지요.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로 유망한 기업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지금 2024년 11월 하순인 지금 그 주가가 얼마인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4만원대였다고 하지요? 아까 보니까 그래도 조금 올라서 56,000원이었습니다. 300만원에서 56,000원이라고 하면 53분의 1이에요. 100만원에 샀다고 한다면 18,000원이 되었다고 하는 계산입니다.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웬만한 컴퓨터에는 그 회사 반도체가 빠짐없이 들어갔던 인텔. 사실 인텔이 몰락할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회사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미국의 NVIDIA라는 회사가 뜬다고 하지요? NVIDIA? 물론 제가 공부 부족이라서 그렇겠지만, 제 머리속에는 그저 컴퓨터 그래픽카드나 만드는 회사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인텔을 누르고 어마어마한 약진을 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과 겸손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너무 늦었어? 다 틀렸어? 그건 우리가 판단할 몫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용하실 하나님 몫인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계시록 5장 9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주님은 그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해결해주시고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우리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로 예수님의 피값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절망이나 낙심이나 좌절이나 포기대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부르실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거만하거나 교만하거나 오만하거나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질그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과 겸손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주님으로부터 귀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는 나중된 자가 아닌 먼저 된 자로서 높임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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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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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8회 빌라도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2절~23절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미션펀드 :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3번째 시간으로서 “빌라도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하면 서두 부분에서 사도신경을 드리지요.

그리고 주일예배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에 목사님의 축도로 끝나게 되지만 주일예배가 아닌 새벽기도나 수요예배, 금요예배 같은 경우, 또는 아직 안수를 받지 않은 교역자가 예배를 인도한 경우에는 예배 마지막에 주기도문을 드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는 사도신경입니다만, 저는 여기서 좀 오랫동안 머리 한 구석에 걸려 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빌라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여러분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늘은 이 점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은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도신경의 위상에 대해서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앞서 사도신경과 함께 주기도문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여러분께 한 번 이런 질문을 드려볼까요?


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먼저 주기도문에 대해서 본다면 이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까지에 나와 있는 내용이며,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아시나요?

예, 사실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하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에, 그것 만으로 본다면 내용의 중요성에 있어서 주기도문보다 훨씬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지금까지 여러 번 추가가 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이유는 믿음에 대한 이해, 말하자면 올바른 신앙이 정립해 오는 과정에 따라 변천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어왔고, 그 과정에서 완성되어 온, 말하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또는 신학의 결정체가 바로 이 사도신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빌라도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신약성경에 보시면 빌라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로마 관리로서 당시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잡아 와서는 십자가에 매단 사람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1절~2절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장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을 결박한 이들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 말하자면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빌라도는 어땠을까요.

마가복음 15장 10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총독 빌라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대세자장들이 예수님을 자기한테 끌고 와서 죽여 달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저들이 예수님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고 했었다고 하는 사실을 총독 빌라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22절~24절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가복음 15장 12절~14절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누가복음 23장 13절~15절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9장 6절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와 같이 사복음서 전체를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처벌에 있어서 상당히 소극적 또는 부정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렇다고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재판장으로서 예수님을 처벌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막상 사형판결을 내리려고 한다면 마음이 상당히 괴롭다고 합니다.

그렇잖아요. 직접 자기 손으로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마치 사람을 해하는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아무리 잘못을 찾으려고 해도 말하자면 예수님을 처벌할 법조항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가 없는 무고한 사람에게 단순히 여론 때문에 극형을 선고한다? 이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사태가 심각해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물론 로마에는 막강한 군대가 있어요. 만에 하나 그와 같은 일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진압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민란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지요.

로마 정부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이 됐다고 한다면 그 지역을 아무런 문제 없이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현저하게 떨어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자신의 출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잘못하다가는 황제로부터 엄한 질책을 당하거나 또는 한직으로 밀려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24절~26절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힘을 써봤지만 대제사장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끌고 온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요구가 너무나도 완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사도신경을 한 번 볼까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만약에 여러분이 빌라도 총독이라고 한다면 이 문장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 무슨 소리야. 나는 예수님을 놔주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는데 그래. 성경에도 나와 있잖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었다니까.”

혹시 그러지 않겠어요?


사실 빌라도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반복해서 마치 빌라도가 가해자인 것처럼 전해져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빌라도가 적극적으로 사형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당시 총독에게는 분명히 예수님을 풀어줄 권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에 못박게 내주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애를 쓰지 않았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무슨 잡범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9절부터 19장 11절까지에는 예수님과 빌라도와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상당히 깊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을 썼지만, 몰려든 대중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그들의 손에 내주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실 이런 부분도 있고 해서 요즘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잘못되어 있는 것인가요?

빌라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가요?

뭐,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주기도문과 달리 사도신경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서로 합의만 된다면 충분히 고칠 수도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사도신경이 맞을 수도 있다는 시각에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빌라도에게 분명히 잘못이 있었다는 점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썼으나, 여론 때문에 놔주지 않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 아니요. 저는 그것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있어서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잘못이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점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요. 이는 다름 아닌 사도신경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 중에서 빌라도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자, 오늘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살펴보았던 본문이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본문을 보시면 어디에도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무엇을 했대요? 예,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음? 빌라도가 십자가 말고 고난을 당하게 했어요? 예,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채찍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장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요한복음 19장 1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복음서의 기록을 본다면 여기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당시 채찍질이라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혹독한 처벌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사용된 채찍에는 금속조각이 달려 있어서 한 번 맞을 때마다 살이 파이기도 했다고 해요.

율법에서는 채찍질 그러니까 태형을 가할 때에도 제한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신명기 25장 2절~3절
“2.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율법에 의하면 채찍질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마흔번을 넘기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이 이 규정을 지킬 의무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로마에서는 대단히 과도하게 채찍질을 하기도 했고, 그렇게 되니까 채찍질을 당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채찍질을 당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당시에 몇 번이나 채찍질을 당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이 부분이 더 끔찍하게 느껴져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율법에서는 아무리 많이 때린다 하더라도 마흔 번을 넘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때릴 때마다 그 회수를 셀 필요가 있었겠지만, 로마에서는 회수가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냥 상관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무자비하게 때렸을 테니까 아마도 회수를 안 세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쩌면 십자가보다도 더한 고통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놔주려고 애를 썼던 빌라도는 왜 예수님께 채찍질을 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의 말에서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3절~16절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누가복음 23장 22절~23절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때리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 죽일 만한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구절을 볼까요.

마태복음 27장 19절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서 그의 남편에게 말을 전하기를,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처벌하지 말라고 간청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와 같은 정황들로 보았을 때 빌라도는 최소한 예수님을 처벌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이유는 처벌을 원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 당신들이 지금 이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달라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죄가 없으니까 그냥 채찍질을 하겠으니 그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떻겠냐. 말하자면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채찍질로 인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풀려나지도 못한 채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빌라도의 판단은 아무리 그가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채찍질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더욱 괴롭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그의 판단은 분명 잘못되었으며, 비록 그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을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로마서 3장 5절~8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우선 7절에서 8절까지를 먼저 볼까요.

로마서 3장 7절~8절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들은 바울더러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내가 거짓말을 해도 그 거짓말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나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을 행해도 괜찮다.” 이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꿈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천사를 만났다. 그런데 이런 계시를 받았다. 저런 예언을 들었다. 그런 말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니까 일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서 하는 말이, 저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이 말씀을 조금 풀어서 해보면, 우리가 불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고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불의하다는 것인가 하는 말씀인데, 이를 조금 더 쉽게 말씀을 해드리자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내리신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는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함이 거짓되거나 올바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과 빌라도로 바꾸어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라고 하는 좋은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위해 예수님께 채찍질을 한다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를 옳게 보시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자 제 머리속에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시간 관계상 그 중 하나만 말씀 드리자면, 교계에서 예전에 한창 이슈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세습 문제였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신 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이 은퇴를 하시면서 그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많은 말들이 나왔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성명도 내고 주일날 그 교회 앞에까지 몰려 가서 반대집회도 하고 그러기도 했었지요.


저는 장담합니다만, 그와 같이 행동하신 사람들은 절대로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을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세습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는 것이요, 성경적으로도 맞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닐까 해요.

다만, 그 사람들이 한 행동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에 잠시 알아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날 그것도 그 교회 교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의 교회 앞에까지 가서는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난 연설을 하고 그러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겠냐는 것이지요.

아무리 자신들이 생각하기를 세습 반대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이웃 형제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외국에 보더라도 교회나 선교단체를 아버지가 아들이나 가족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경우는 별반 말씀이 없더라고요. 혹시 영어가 딸려서 그렇습니까.

만약에 아들이나 가족에게 물려 준다거나 하는 그 결정과정에 있어서, 예를 들어서 무슨 문을 걸어 잠근다거나 아니면 또 무슨 강제로 어떻게 한다는 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결정이 되었다면 이는 분명 비난의 소지가 있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결정된 것을 가지고 외부에서 비판을 하고 비난을 하고 하는 것은, 이는 말하자면 자신들은 올바르고 그 교회 사람들은 다 잘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그와 같은 불의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진노를 내리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아무리 선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하물며 주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는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등의 불의한 행함을 하게 된다면, 이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께 채찍질을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싶으십니까.
그럴 시간에 우리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해봅시다.

우리 이웃을 비난하고 싶으십니까.
그럴 시간에 우리 이웃을 위해서 전도지 한 장이라도 돌려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제 예수님께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비판이나 비난 대신 예수님의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온유함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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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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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7회 정죄보다 중요한 것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미션펀드 :     이루리라선교회 후원
일반후원 :     www.MISSIONFUND.kr
정기후원 :  www.MISSIONFUND.co.kr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2번째 시간으로서 “정죄보다 중요한 것”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주님은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비판한다는 뜻은 우리가 알기 쉽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정죄한다는 말의 뜻은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의하면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6장 37절의 ‘정죄하지 말라’ 라고 하는 말씀이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말아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8장 1절에서 11절에 의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말하자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한 여성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 여성은 간음을 하다가 잡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에 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 여성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레위기 20장 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2장 22절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22장 24절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율법은 음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분명히 죽음으로 다스리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법에 죽이라고 되어 있으면 죽이면 될 것이지 왜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중에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총독 빌라도에게까지 끌고 가지 않았습니까.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빌라도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이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로마는 식민지를 다스리는 방법이 조금 독특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네 방식을 강요하며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자율적인 부분을 허용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일정 범위까지는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처벌하는 방법도 그들의 법에 따라서 집행하는 것을 인정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 대한 것, 말하자면 사형선고에 있어서는 로마의 재판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을 총독 앞에까지 끌고 가서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18장 31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총독 빌라도가 말하기를 그렇게 예수님을 처벌하고 싶으면 니네 법대로 재판하면 될 것 아니냐 하니까 예수님을 끌고 간 제사장들이 말하기를, 자기네들에게는 사형판결을 내릴 권한이 없으니까 당신이 내려 달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고 따지고 들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6절 전반부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책잡아서 십자가에 매달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도 예수님께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묻고 있는 이유는, 예를 들어서 사형선고는 로마 재판관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이 만약에 그 여자를 죽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하신 것이 되기 때문에 로마법에 위배되는 행위이고, 만약에 죽이지 말라고 하셨다면 이는 율법에 반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신다면 로마법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로마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것이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게 되는, 말하자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든 간에 예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게 되는, 대단히 교묘하게 짜여진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덫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8장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래, 너희들이 정녕 이 여자를 정죄하고 싶다면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죄 없는 자’라고 하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의인’ 그러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여기 중에서 지금 죄가 없는 의인이 있다면 그가 먼저 돌로 치라, 말하자면 정죄하라, 죄인으로 단정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 중에 죄가 없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이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는 죽어 주신 것인데, 애초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복음 8장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렇습니다. 그 여인을 정죄하려고 살기가 등등했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그들이 들고 있던 돌을 버리고 하나 둘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을 정죄하려고 하는 이유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아니겠습니까.

마치 나에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마치 내가 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8장 10절~11절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보면 완전한 죄인, 당장이라도 돌로 쳐서 죽여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겠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죄할 자격이 없으셔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정죄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5절~16절
“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판단하신다 하더라도 그 판단은 참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능으로 판단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멸망을 원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78편 38절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에스겔 18장 32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우리가 의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일만 하며 살아가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혼이 나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시며 우리를 멸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번 그 진노를 참으시고 참으시고 그리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죽어 마땅한 자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예,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 예수님께서 간음으로 끌려온 여자에게 하셨던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8장 11절 후반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에스겔 18장 32절 후반부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요? 예,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판단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로 형사재판을 보면 무죄판결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죄판결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없는 경우에 내려진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죄가 있는데도 무죄판결이 내리지느냐 하면,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죄판결을 내리는 요건이 엄격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유죄라고 하는 확실한 증인 증거들이 있을 때만 내릴 수 있는 것이지, 아무리 그 사람이 수상하고, 하물며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누가 봐도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할 정도라 하더라도 확실한 증인이나 증거가 없다면 유죄라고 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무죄판결의 내용을 보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라기보다는 “유죄라고 볼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무죄”인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이웃을 유죄라고 볼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이웃을 정죄하십니까.

제가 요즘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전도지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한 동네에서 전도지를 돌리고 있는데, 어떤 건물 입구 대문에 흰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더라구요.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 B1 화장실”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한글로만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 B1 화장실”

저는 이를 보고 대단히 불쾌해졌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사진까지 찍었어요.

예전에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한국사람이 외국에서 살게 되면 때로는 크고 작은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된다고 하는데, 정말로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는 다름아닌 한국이다……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평범한 건물 입구에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얼마나 마음이 안 좋았겠습니까.

아니, 건물 지하에 아랍인 부부가 살면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것도 “삽니다”도 아니고 “산다”래요. 거기다가 지하 1층에 화장실? 아니, 지금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제 말이 이상합니까. 정말 그 건물 지하에 살고 있는 아랍인 부부가 이렇게 써 붙여 놨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불쾌하겠어요. 사실 이거 잘못하면 국제문제로까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양성과 포용성이 강조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 무슨 행태인가 하면서 아무튼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혼자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외에 달리 어떻게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그런 것을 보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셨겠어요.

그래서 인터넷 한 SNS에, 이를 찍은 사진을 올려놨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웬 일입니까.

누군가가 제가 올린 사진을 바탕으로 해서 그 지점을 검색했어요.

그리고 알게 된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 건물 지하에는 연극 극장이 있는데,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라는 것은 거기서 공연을 하고 있는 연극 제목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 연극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정말 그야말로 극적 반전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본 그것은 정말로 그 건물 지하에 아랍인 부부가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는 “건물 지하에는 아랍인 부부가 산다”라고 하는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단순히 그 건물 지하 1층에는 화장실이 있다고 하는 안내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고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그 연극 관계자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말하자면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서 오해를 하고는 비판을 하고 화를 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보니 또 몇 년 전에는 일본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 일본 외무장관이었는데 한국 외무장관과 악수를 하는 사진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이 사람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가 나왔는데, 이걸 가지고 어떤 일본사람이 인터넷에서 말하기를, 일본 각료가 금딱지 시계를 차고 다닌다면서 대단히 원색적으로 비난을 한 거예요.

이 사람 말을 듣고 그 사진을 보니까 시계가 정말 완전히 금붙이로 만든 고급 손목시계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이 글에 대해서 그 일본 외무장관 본인이 직접 답변을 했어요. 아주 짧은 글이었는데, 그 글을 번역하자면 “대나무제입니다만, 문제 있나요?” 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과 함께 실제로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 사진을 올렸는데, 정말 대나무로 된 손목시계 더라구요.

이는 어떤 외국 공식행사 관련해서 받은 기념품이라고 하는데, 이 대나무로 만든 손목시계를 금붙이 시계로 잘못 보고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난을 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정죄할 때에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보면 얼마나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여러분, 주님도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데 우리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라고 우리 이웃을 정죄할 수가 있겠냐 하는 것이지요.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높은 직분을 여러 개 받았고, 방언도 하고 금식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바로 옆 눈에 보이는 우리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고 한다면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다시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세상에 비판 받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죄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를 받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 또한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비판이나 정죄를 받고 싶지 않으면 비판이나 정죄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요, 용서를 받고 싶으면 용서를 해주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비판하기 보다 비난하기보다 정죄하기보다 그리고 판단하기보다 이에 앞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이웃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은혜로운 용서와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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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6회 채워야 합니다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1번째 시간으로서 “채워야 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독특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선 이 말씀에 의하면 더러운 귀신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마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마귀는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땠냐 하면 이 사람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있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와 같은 사람들한테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을 우리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 말씀을 보시면 사람한테서 나간 이 마귀가 물 없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물 없는 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본래 마귀가 광야 같은 물 없는 곳을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고, 또 누구는 정착할 곳이 없이 떠도는 것을 표현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한테서 나온 마귀가 쉼을 얻지 못했다고 한 점입니다.

마귀는 언제 쉼을 얻습니까. 말하자면 마귀는 언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가로채서 자기들을 섬기게 만들고 자기들을 찬양하게 만들었을 때 마귀들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 것이 우상숭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마귀는 자신을 섬겨줄 사람을 찾지 못했나 보죠?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그래, 구관이 명관이다. 밑져야 본전 식으로 어디 한 번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자 하고 본래 자기가 들어갔었던 사람한테 와봤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어 있었대요?

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마귀가 그 사람한테 있을 때에는 얼마나 엉망진창이었겠습니까. 하지만 마귀가 나가자 청소되고 수리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보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게 청소도 되고 수리까지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마귀가 이를 보고 아주 신이 났나 보죠? 그래서 지 혼자 들어가면 심심할까봐 그랬는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을 그것도 일곱 씩이나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어떻게 되었대요? 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그 마귀가 처음에 그 사람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였는데, 이제는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으니 얼마나 비참한 꼴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전보다 더욱 상황이 심각하게 되었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권세 잡은 자에게 하셨는지 아니면 일반 서민에게 하셨는지, 유대인에게 하셨는지 아니면 이방인에게 하셨는지 하는 점을 알아야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2장 14절에 의하면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는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는 바리새인들,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본다면 그 곳에는 모두 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비록 예수님을 믿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진의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한테서 더러운 귀신 즉 마귀가 나갔다고 하시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사람한테서 악한 마귀가 나갈까요.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나간다고 하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마귀는 사람한테서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마귀가 사람한테서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주님의 능력 만이 더러운 귀신 마귀를 내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처음에 마귀가 들어와 있었다가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는 기도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내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있던 더러운 마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갔어요. 그렇다면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병을 앓고 있었어요. 의사도 이미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 누구 하나 소망을 주지 못했는데 주님의 능력으로 내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해보세요.

그야말로 다시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러운 귀신으로 인하여 엉망이 된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신 주님, 이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 드리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어땠다고 적혀 있습니까.

마태복음 12장 44절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마귀들이 나가서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청소도 해주시고 수리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이 비어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본 마귀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 친구들까지도 데리고 들어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마귀들의 습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마음이 비어 있으면 마귀들은 그 빈 틈을 타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마귀들의 습성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기웃기웃 거리면서 빈집을 찾고 있어요. 그리고 빈집을 발견하면 지체없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베드로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요.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렇습니다. 마귀는 허기에 지쳐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자와 같이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먹이를 찾는 것처럼 빈 집, 그 마음이 빈 영혼들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귀들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8절~34절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귀신 들린 자가 얼마나 사나운지 그가 있는 곳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지나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귀신에게 나가라고 하시자 귀신들이 말하기를 저기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해요.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셨더니 마귀들이 그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다고 기록합니까. 그렇습니다. 수많은 돼지 떼가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는 모두 죽어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마귀 사탄들이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마귀 사탄들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면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잘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마귀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알기 쉬운 것이 마약 아니겠습니까.

저는 뭐, 마약이나 대마초 같은 것을 해본적은 없습니다만, 나라에서 법률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 위험을 저지르면서 그리고 비싼 돈을 내가면서 마약에 손을 댑니까.

그것은 바로 쾌락이 있어서겠지요. 경험자 말에 의하면 그런 약물을 사용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라에서 그것을 금지시킵니까. 그것은 바로 한 번 그런 약물에 중독이 되어 버리면, 헛것이 보이고 난폭해지고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며, 본인에게 있어서도 뇌나 건강상에 있어서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끝내는 자기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멸망시켜버릴 수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요즘 거리에 보니까 그런 경고 문구가 있더라고요.

“마약은 시작이 끝입니다”

정말 맞습니다. 마약에 한 번 손을 대게 되면 그것으로 인생은 멸망을 향해 돌진하고 마는 것이지요.


마귀나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은 그 마귀나 우상으로 인해서 쾌감을 느꼈다고 착각할 수는 있으나 결국 마귀를 섬기거나 우상들에게 무릎을 꿇게 되면 이는 시작이 아니라 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우리가 잘되고 우리를 강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 가는 우리의 마음을 도중에 가로채서 자기들을 섬기게 하고, 그리고 끝내는 마치 돼지 떼들을 바다로 빠뜨려서 몰살시키듯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설마 그 안에 마귀가 있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비록 지금 네 마음 안에 마귀가 있지는 않지만, 그 마음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라면 언제든지 마귀들이 일곱을 데리고 너희 마음 안에 들어가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하고 계시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행진할 때 항상 가지고 다녔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법궤라고도 하는 언약궤였습니다. 그러면 여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분분합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가에 대해서 물으면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께서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들어있었다고 할 것이고, 또 어떤 분께서는 아니다, 그 안에는 돌판만 들어있었다고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의견이 갈라지는 데에 있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먼저 신약부터 볼까요?

히브리서 9장 3절~4절
“3.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이 문맥으로 본다면 언약궤 안에는 만나가 든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돌판이 들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인 열왕기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요.

열왕기상 8장 9절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여기에 보시면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244회인 2020년 7월 26일자 설교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만, 이 두 견해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기진 두 돌판, 즉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의 구조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5장 10절 이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모양새를 보면 비록 안과 밖을 금박으로 덮었으나 본래 재질은 조각목 그러니까 아카시아 나무로 된 상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궤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언약궤에 그와 같은 능력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화려한 장식이 달려 있어서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그 안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화려한 장식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놀라운 능력의 언약궤가 되는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겉보기가 화려하고 금박으로 도배를 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런 가치 없는 나무상자에 불과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가 머무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막 즉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출애굽기 40장에 보시면 이 성막이 처음 완성되었을 때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3절~38절
“33.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34.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성막이 완성되자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고는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인도해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도 좋습니다. 은사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없다면 성령님께서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인도해주지 않으세요.

하지만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낮이나 밤이나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마음이 비어 있다면 마귀들이 틈을 탈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성령님께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데 어찌 감히 더러운 귀신들이 우리를 넘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마음 안을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완전하신 말씀이신 성경 말씀으로 채우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과 함께, 이기고 또 이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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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5회 인내의 의미 - 이루리라선교회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1절~13절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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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0번째 시간으로서 “인내의 의미”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인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특별히 믿음에 있어서 인내라고 하는 것, 참고 견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이 인내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끝까지 견디면 그냥 단순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을 얻는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9절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이 말씀에서는 인내로 우리가 영혼을 얻는다고 기록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우리 영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저 인내라고 한다면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처럼 참고 견디게 되면 이 신앙에서의 핵심 곧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다른 것을 다 잘한다 하더라도 이 참고 견디는 것, 인내한다는 것을 못하게 된다면 모두가 다 헛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종종 교회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누구는 믿음이 좋다. 누구는 신앙심이 좋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는 것? 방언을 많이 하는 것? 직분이 높은 것?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

이와 같은 것이 나쁘다거나 필요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소중한 것이지요.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믿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성경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항상 시험하고 검증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지요.



고린도전서 3장 9절~15절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터 위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세워 놓습니다. 어떤 집은 크고 웅장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집은 작고 아담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 재료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지어졌는지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불이 나타나서는 그 집들을 모두 태우려고 들 텐데, 그래도 그 집이 남아 있다면 상을 받게 되겠지만 만약에 그 집이 아무리 크거나 웅장했다 하더라도 그 불에 모두 타버리게 된다면 상은 고사하고 해를 받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믿음생활을 합니다만, 겉으로 본다면 누가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는지 잘 몰라요.

하지만 어떨 때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시험이 닥쳐오면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불이 대기가 무섭게 흔적도 없이 타버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아무리 불이 닥쳐와도 그을리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직분을 많이 받으면 타지 않나요? 교회에 오래 다니기만 하면 타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인내, 그러니까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참고 견딘다는 것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지요.

인내한다는 것, 참고 견디다는 것은 곧 무엇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기다린다는 것, 그러니까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하시기를, 7일 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라고 하십니다. 6일 동안은 하루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번을 돌라고 하세요. 그리고는 큰 소리를 지르면 성벽이 무너질 테니까 그 때 쳐들어가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략과 전술이 만들어져 왔습니다만, 이와 같은 전쟁방식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것도 안하고 그 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면 그 성을 차지할 수 있다? 세상에 그런 황당한 공략법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래도 뭐 속은 셈 치고 며칠 돌아봤어요.

그런데 3일을 돌아도 4일을 돌아도 성벽이 꿈쩍이라도 했습니까. 아니에요. 작은 금 하나 안 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날까지 돌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 6장 20절~21절
“20.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순종을 했더니, 그 철벽 같은 여리고 성 조차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편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아직 미성년자였을 때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무찌르고는 하루아침에 전쟁영웅이 됩니다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울 왕으로부터 10년 이상 동안이나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요셉도 그렇지요. 창세기 37장 2절에 의하면 요셉은 그의 나이 고작 17세에 그의 친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가서는 거기서 노예로 살다가 또 역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죄수로서 감옥에 갇히게 되어 총 13년 동안이나 참고 견디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볼까요?

75세에 하란 땅을 나선 그가 원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들 하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을 얻었던 것이 언제였습니까. 그의 나이 100세 때니까 무려 25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지요.

모세도 보십시오. 그는 비록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유대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애굽의 대궐에서 왕족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음이 앞서서 그만 애굽 사람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자 그는 혈혈단신으로 도망칩니다.

그의 나이 40세. 사실 남자 나이 40세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황금기 아니겠습니까. 남들은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으나 모세는 광야로 도피한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나이가 몇 살 때였습니까. 예, 그의 나이 80세 때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지요.

그럼, 더 기다린 사람은 없었을까요? 아니에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받고 그는 최소한 70년 이상 동안 묵묵히 기다리면서 배를 건설해 나아갔습니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기다려야만 했던 것일까요. 아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위해 곧바로 응답을 해 주셔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보면, 우리에게 응답이 언제 필요할 때 기도합니까.

지금은 아니고 한 달 뒤, 1년 뒤에 응답이 필요할 때, 기도합니까.


물론 그럴 때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어떻습니까. 예, 바로 지금 당장 응답해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시면 ‘호산나’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말씀이에요.

사람이 기도를 드릴 때에 응답을 빨리 받고 싶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는 당연한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응답이 그때그때 올 수도 있어요. 이건 저도 체험한 일이지만 어떨 때는 주님이 더 급하세요.

오히려 저는, 아니 뭐 천천히 응답해주시면 돼요, 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이 오히려, 아냐, 지금 급해, 빨리 서둘러, 뭐 그러면서 일을 정신없이 밀고 나가실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좀처럼 응답을 안 하실 때도 흔히 있지 않습니까. 남들 보니까 누구는 귀로 주님의 말소리가 들려 오기도 한다거나 꿈속에서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해주시기도 한다는데, 어떤 때는 정말 기도를 해도 밋밋하고 우리의 마음도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아무런 감동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성경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낮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이 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낮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낮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깊은 밤 속에 있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더욱 더 소망을 가지고 낮을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여러 위기일발의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서 3장이 아닐까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신상을 세워 놓고 여기에 절을 하라고 명령을 해요. 그리고 여기에 절을 하지 않으면 활활 타는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겠다면서 으름장을 놓습니다.

비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니엘의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말합니다.

다니엘 3장 16절~17절
“16.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들은 섬기지 않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유명한 말을 하지요.


다니엘 3장 18절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하지요?

예,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신다 해도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


야아, 정말 얼마나 멋진 믿음입니까.

아무리 내가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해주실 것이지만, 만에 하나 구원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조건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도에 지금 당장 응답해주면 믿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 믿겠다? 그게 아니에요.

지금 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시든 안 해 주시든 간에 나의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지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 점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눈 앞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왕과,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 어느 쪽에 순종을 해야 할 것인지를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말이에요. 이 정도로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다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응답이 곧바로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자신들을 벌하려 하는 왕을 없애버린다거나,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돌이켜서 그들을 풀무불 속에 던져 넣지 않게 한다거나, 아니면 지금 곧바로 풀무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이 꺼져 버린다거나 할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하나님이시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늘에서 불은 떨어지지 않고,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벌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돌이키지 않아요. 그리고 풀무불이 꺼지기는커녕 왕은 오히려 그 불을 더 뜨겁게 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제 그들은 꼼짝 없이 뜨겁게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셨나요?


다니엘 3장 26절~27절
“26.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들은 풀무 속에서 뼈도 추리지 못할 정도로 새카맣게 타버린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도 않은 채로 나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할렐루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눈앞에 놓인 시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참고 견디며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를 헤맬 때에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하면서 원망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말처럼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들기 위해 끌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타국에서 노예 살이를 하던 그들을 이끌어 내어서 자유를 주고,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애굽을 탈출하면 곧바로 가나안 땅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를 건너게 하시면서 우리가 참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 나중에 받을 축복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보시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 아무런 인내의 기간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왕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자 그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리게 되고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에게는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그릇이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습니까. 왕에 오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참고 견디는 인내의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힘드십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아침이 밝아 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믿음 안에서는 인내에 대해서 공짜가 없습니다. 참고 견디는 과정, 기다림에 대해서 공짜가 없습니다. 분명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놀라운 축복이 바로 코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까지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렵게 인도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부터 응답을 안 주세요? 인도를 안 해주세요? 반대로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까.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밤이 깊으면 낮이 가깝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라는 터 위에 흔들림 없는 믿음의 집을 짓고, 마침내 우리의 영혼,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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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4회 하나님 나라의 욕구 법칙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10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39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욕구 법칙”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염려를 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학교 문제, 직장 문제, 이성 문제, 부모 또는 자녀 문제 등등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 속에는 온통 문제 투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 앞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문제를 끌어 안고 살아요?

물론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은 간에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이론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 심리학자인 매슬로가 주장한 욕구단계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욕구를 피라미드 모양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삼각형 제일 밑에는 생리적 욕구가 있고, 그 위에 안전의 욕구, 그 위에 애정과 소속의 욕구, 그 위에 명예의 욕구, 그리고 제일 위에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만,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 되어야지만 그 위에 있는 욕구를 충족하고자 한다는 것이에요.


말하자면 생리적 욕구,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요구가 충족 되어야지만 그 위에 있는 안전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하고, 이것이 충족되면 또 한 단계 위에 있는 애정과 소속의 욕구로 올라간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충족되면 그 위에 있는 명예의 욕구, 그리고 가장 상위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올라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자아실현의 욕구란 무엇입니까.

이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라고 하는 것을 모색하고 실현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도 예전에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여기에 대해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이 자아실현이라고 하는 욕구는 다른 욕구들과 비교해서 조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욕구는 비교적 단시간에 충족시킬 수 있어요.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다면 뭔가를 먹거나 마시면 그 욕구는 충족되는 것이잖아요.

돈이 부족해요? 물론 조금씩 벌 수도 있겠지만, 까짓거 로또 한 번 당첨 되거나 누군가가 도와 주면 되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이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성취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뭐 이렇게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이와 같은 욕구단계설이라고 하는 것이, 참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잠깐만요.

이 주장대로라고 한다면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안전의 욕구도 없고 애정에 대한 욕구도 없다는 것이 되잖아요.

쉽게 말해서 사람이 일단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워야 안전에 대한 욕구도 챙기고, 그리고 안전이 확보 되어야지만 애정도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하기도 하고, 이게 다 충족 되어야지만 마지막에 가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일단 배를 채울 걱정부터 하라고 말씀하시나요?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앞서 살펴본 욕구단계절에 의하면 일단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말하자면 생리적인 욕구에 대한 염려를 먼저 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채워져야지만 더 윗단계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일단 의식주 걱정, 돈 걱정, 먹고 살 걱정부터 먼저 하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 먹고 살 걱정은 나중에 해? 아니야, 그런 걱정은 아예 할 필요가 없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란 말이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신실하시고 경건하신 여러분께서는 차마 입밖으로 말씀은 안 하시겠지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이고, 참으로 세상 물정을 모르셔도 한참 모르시네.

아니, 내가 가만히 있으면 누가 밥 먹여줘?

믿음도 좋고 신앙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성경도 좋고 복음도 좋고 다 좋지만, 아니 일단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지금 무슨 배고프고 춥고 굶어 죽게 생겼는데 무슨 하나님 나라고 하나님의 의 타령이냐.

뭐,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투정을 부리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세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6장 31절~33절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은 이방인,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걱정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왜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다음에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걱정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는 이미 다 알고 계시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세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단순히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져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를 우리가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33절 전반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자, 여기서 일단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 보시면 참고가 됩니다.

마태복음 6장 10절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이기에 그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사야 11장 6절~8절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참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육식동물이 초식동물과 어우러져 놀아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 구멍에서 장난을 친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는 단순히 무슨 동물의 왕국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아니,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서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서로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탐욕이 없는 세상인 것입니다.

앞서 매슬로의 욕구단계설로 본다면, 아니, 무슨 의식주 욕구가 해결되면 그 윗단계로 넘어가요?

지금 인간세상을 보십시오. 넘어가긴 뭐가 넘어갑니까.

돈이 곧 안전이요, 돈이 곧 애정이요 돈이 곧 명예이자 돈이 곧 자아실현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돈이 최하위 욕구예요. 오히려 최상위 욕구, 아니 욕구의 처음과 나중이 온통 이 돈에 대한 욕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 돈을 많이 축적하려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꼭 돈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돈이 많건 적건 간에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그저 돈과 재산을 축적합니다.

요즘에는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는데 얼마전에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이 좁은 땅덩어리에 집이 10채 이상을 가진 사람이 3만 7천명이라고 합니다.

저 같은 사람한테서 보면 그 정도면 평생 먹고 살 만큼 넉넉한 돈과 재산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돈을 모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일까요.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그 근본에는 바로 <불안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돈과 재산을 모아도 불안한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 정도 돈이 있으면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예, 마치 소금물을 마시듯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구, 탐욕이라는 이름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탐욕이라고 하는 시커먼 웅덩이 속만 바라보던 눈을 들어 고개를 돌려 보면 어떻습니까.

주위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애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우리가 존중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애정을 위해, 명예를 위해,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해 우선 무엇을 하라? 예, 의식주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것이 세상 생각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의로 통치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에 하나님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A인 것 같은데, 내가 배부르기 위해서 내가 이익을 보기 위해서는 B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B를 선택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서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씀에는 ‘나’라는 존재도 역시 포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나’로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내가 나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나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나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의와 내 의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었을 때에는, 어느 쪽은 선택해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해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욕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에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욕구를 가지면 안 됩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심을 가지십시오. 욕구를 가지십시오. 그러나 작은 욕심이나 욕구가 아닌 큰 욕심과 욕구를 가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따라 선택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가난하게 산대요? 우리가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서 그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 나오는 모든 욕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욕구의 법칙은 무엇보다 돈과 재산을 모아야 하고, 그래야 다른 욕구들이 하나씩 채워지고, 마지막에 가서야 자아실현,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욕구의 법칙은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이 모든 욕구를 우리에게 채워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에 있을 때 보면 밀크보이라고 하는 개그 만담 콤비가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시리얼’을 주제로 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보면 한 사람이 그래요.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아침식사가 있는데 그 이름이 생각 안 난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달고 빠삭빠삭 하고 우유를 부어서 먹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아, 그건 시리얼이네. 틀림없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한쪽이 말하기를, 자기도 시리얼인 줄 알았는데 자기 엄마가 말하기를, 나중에 자기가 죽기 직전에 먹을 마지막 식사로도 그걸 먹고 싶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뭐라 그러냐 하면, 그럼 시리얼이 아니겠네. 인생 마지막 식사로 시리얼이 좋을 리 있겠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시리얼은 아직 수명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거야.

라고 하는 것이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만, 실제로는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더구나 믿음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인지, 어느 쪽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인지 알지요.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람에게, 더 구체적으로는 나에게 기쁨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수명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그 날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있잖아요.

누가복음 12장 15절~21절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수명에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그리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수명이 끝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언제 다시 오신대요?

누가복음 12장 40절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신다고 하십니다. 속히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우리는 언제 어느 때에 내 수명이 다 하게 되더라도, 그리고 언제 어느 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 하더라도, 내 욕구와 내 이익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을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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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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