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3회 바벨탑 사건의 교훈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7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23절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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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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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8번째 시간으로서 “바벨탑 사건의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제목 그대로 바벨탑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신약성경, 그것도 복음서 강해인데 웬 바벨탑인가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잠시 좀 들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셨으리라 여겨집니다만 역시 오늘도 어쩌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그렇다고 제 상상으로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오늘은 이 바벨탑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성경을 또 한 발자국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께 바벨탑에 대해서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전에 어디서 보니까 어떤 사람은 바벨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한 번 들어보시고 이 분의 말씀이 맞는지 틀린지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벨탑 사건은 사람의 욕심이 깊어져서 높은 탑을 세우려고 한 것이 바벨탑인데, 여기에 대해서 화가 나신 하나님이 탑을 헐어 버리시고는 사람들의 언어를 모두 다르게 하셨다.”

자, 맞습니까. 틀립니까.

우선 이를 알기 위해서는 바벨탑에 대한 내용이 적혀 이는 성경 본문을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상당히 규모가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성경에 있는 내용은 의외로 그리 길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장 1절~9절
“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さて、全地は一つの話しことば、一つの共通のことばであった。
人々が東の方へ移動したとき、彼らはシンアルの地に平地を見つけて、そこに住んだ。
彼らは互いに言った。「さあ、れんがを作って、よく焼こう。」彼らは石の代わりにれんがを、漆喰の代わりに瀝青を用いた。
彼らは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自分たちのために、町と、頂が天に届く塔を建てて、名をあげよう。われわれが地の全面に散らされるといけないから。」
そのとき主は、人間が建てた町と塔を見るために降りて来られた。
主は言われた。「見よ。彼らは一つの民で、みな同じ話しことばを持っている。このようなことをし始めたのなら、今や、彼らがしようと企てることで、不可能なことは何もない。
さあ、降りて行って、そこで彼らのことばを混乱させ、互いの話しことばが通じないようにしよう。」
主が彼らをそこから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ので、彼らはその町を建てるのをやめた。
それゆえ、その町の名はバベルと呼ばれた。そこで主が全地の話しことばを混乱させ、そこから主が人々を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からである。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바벨탑에 대한 전체 내용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일단 사실관계부터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자신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읍과 탑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안 좋게 생각하시고는 언어를 서로 다르게 하셨다고 합니다.

핵심내용은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까지 내용에 대해서 보면 일단 바벨탑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헐어 버리셨니까.

아니요.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말하자면 더 이상 건설되지는 않고 도중에 그냥 방치되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이 바벨탑 사건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지요.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지에 흩어지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으니까 언어를 다르게 해서 흩어지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를 근거로 해서 드는 구절이 노아의 홍수 이후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장 7절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神はノアとその息子たちを祝福して、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하라, 땅에 가득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어 사람들을 흩으셨다는 해석입니다.

그를 듯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좀 의문이 드는 곳이 있습니다.

우선, 흩어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까. 한국을 비롯한 많은 농경사회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가족 사회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단순히 친인척이 아니라 씨족사회 부족사회로 이어져서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서 제각각 살게 된다면 이는 국가도 없고 도시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국가를 이루는 것이 죄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죄를 안 짓고 있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서는 “땅에 충만하라, 땅에 가득하라”라고 하는 말씀이 명령인가 축복인가 하는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이를 명령이라고 이해하게 된다면, 이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벌을 받게 되겠지요.

하지만 이를 축복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필요한 만큼만 누리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부페식당에 간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여기 있는 “음식을 다 먹어라”라는 말을 명령으로 듣는다면 그 식당에 있는 음식을 모두 먹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 되겠지만, 이를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 있는 음식은 네가 먹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거기 있는 음식을 반드시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만큼만 먹으면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앞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땅에 충만하라, 땅에 가득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이 땅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네가 원하는 곳 어디에서 살아도 좋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에 대한 해석도 있지요?

창세기 11장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彼らは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自分たちのために、町と、頂が天に届く塔を建てて、名をあげよう。われわれが地の全面に散らされるといけないから。」

그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건설하고자 한 것은 바로 사람의 탐욕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글쎄요. 그렇다면 사람은 높은 탑이나 빌딩을 세우면 안 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 살면 안 된다는 것인가요.

한국에도 남산타워가 있잖아요. 그 높이가 239미터이고, 롯데타워는 123층에 높이는 555미터라고 합니다.

일본은 도쿄타워가 333미터, 도쿄 스카이트리는 634미터라고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건축물은 물론 필요에 따라 건설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국위선양, 자기 나라나 지역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의미도 있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까. 당시 바벨탑 높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게 기록이 안 나와있습니다만, 설마 롯데타워나 600미터가 넘는 일본의 스카이트리보다 높았겠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높은 탑을 지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다고 하는 해석은 비약이 있고, 무엇보다 그렇다고 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되겠지요. 이 바벨탑 사건이 주는 가르침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답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하면, 당연히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자, 그럼 이번 기회에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바벨탑의 색깔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과연 바벨탑은 어떤 색깔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쉽게 생각합니다.

“그 때는 흙이나 돌로 지었을 테니 당연히 밤색이나 회색이었겠지 뭐.”

그래서 과거에 여러 유명한 화가들이 바벨탑을 그려왔는데, 그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이 밤색이나 회색들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투는 것은 뭐냐 하면 바벨탑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냐 하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여러 바벨탑 그림들을 보면 어떤 것은 원기둥이나 원뿔 모양을 하고 있냐 하면 또 어떤 그림은 삼각이나 사각뿔 또는 기둥 모양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그림들을 보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모양이 아니라 바로 색깔이야.” 라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 본문에 보시면 이 건설 공법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1장 3절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彼らは互いに言った。「さあ、れんがを作って、よく焼こう。」彼らは石の代わりにれんがを、漆喰の代わりに瀝青を用いた。

자, 여기에 보세요. 바벨을 흙이나 돌로 지은 것이 아니라, 벽돌로 지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그 다음,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당시에는 돌 만을 가지고 쌓으면 허물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진흙을 가지고 고정을 시켰었는데, 이 바벨탑 공법을 보면 진흙이 아니라 역청을 사용해서 지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선 벽돌에 대해서 알아보죠. 단순한 돌이 아니라 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크기도 똑같이 맞출 필요가 있겠지요. 당연히 공정이 더 많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더욱 튼튼해지고 무엇보다 틈새를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이 역청이라고 하는 것은 외국 번역본에 보면 타르라고도 하고 아스팔트라고도 하는데, 타르든 아스팔트든 그 색깔이 어떻습니까. 그렇죠. 대단히 검은 색깔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돌이 아닌 가급적 촘촘하게 벽돌을 쌓으면서 시커먼 역청을, 그것도 이유는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아낌없이 이 역청을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기 때문에, 그 색깔은 밤색이나 회색이 아니라 그 전체가 검은 색깔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들은 왜 건물을 지으면서 역청을 사용했을까요. 우리가 이 말을 들으면 그냥 단순하게 뭐, 건물을 튼튼하게 지으려고 그랬겠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만약에 정말로 역청을 사용하는 것이 건물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다른 건물도 그런 식으로 지어진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성경에 의하면 어떤 건물을 지으면서 역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유독 바벨탑을 짓는 과정에서 역청을 사용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힌트는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살펴보면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 역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이 바벨탑 말고 딱 두 번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6장과 출애굽기 2장입니다.

먼저 창세기 6장부터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6장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ゴフェルの木で箱舟を造りなさい。箱舟に部屋を作り、内と外にタールを塗りなさい。


이 기록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방주를 만드는데 그 방 주 안팎에는 역청을 칠하라고 하셨잖아요.

이는 여담입니다만,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노아의 방주 색깔은 이 말씀에 의하면 어땠을 것 같으세요. 예, 그렇습니다. 역청을 모두 발랐기 때문에 아주 새까맸을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딸을 낳으면 살려주지만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을 내리지요.

그런데 어떤 집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차마 죽일 수 없어서 몰래 키웠습니다만, 이제 더 이상 숨겨 놓을 수 없어서 작은 배를 만들고는 거기에 아이를 태워서 떠내려 보냅니다.

그 아이가 누구예요? 그렇죠. 모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 모세를 태웠던 배를 어떻게 만들었다고 합니까.


출애굽기 2장 3절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しかし、それ以上隠しきれなくなり、その子のためにパピルスのかごを取り、それに瀝青と樹脂を塗って、その子を中に入れ、ナイル川の岸の葦の茂みの中に置いた。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을 칠했다고 하잖아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성경에 의하면 무언가를 만들 때 역청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바벨탑에 관한 기록 외에 딱 이 두 곳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를 만들면서 그 안과 밖에 역청을 칠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모세를 태웠던 배에도 역청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청이라고 하는 성분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짐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방수를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인터넷에 살펴보았더니 이 방수를 하기 위해서 역청을 사용하는 공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흔히 사용되는 건설 공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하는 곳이면 이러한 방수처리를 위해 역청을 바르는 일도 필요하겠습니다만, 중동 이스라엘 쪽만 하더라도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방수를 위해 역청을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당시 바벨탑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이라크 쪽이라고 추정됩니다만, 지금도 거기는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비도 그리 많이 오지 않는 지역에서 왜 이 사람들은 번거롭게 벽돌까지 구워서 촘촘하게 쌓았을 뿐만 아니라 방수처리, 그것도 표면에 바를 정도가 아닌 진흙을 대신할 정도로 역청을 아주 덕지덕지 사용해가면서 그토록 철저한 방수처리를 한 바벨탑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을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이 바벨탑의 말하자면 공사 책임자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냐 하면 여기에 대한 기록이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바로 앞 창세기 10장입니다.

창세기 10장 8절~12절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クシュはニムロデを生んだ。ニムロデは地上で最初の勇士となった。
彼は主の前に力ある狩人であった。それゆえ、「主の前に力ある狩人ニムロデのように」と言われるようになった。
彼の王国の始まりは、バベル、ウルク、アッカド、カルネで、シンアルの地にあった。
その地から彼はアッシュルに進出し、ニネベ、レホボテ・イル、カルフ、
およびニネベとカルフの間のレセンを建てた。それは大きな町であった。


여기에 대단한 용사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은 ‘니므롯’이라고 합니다. ‘그의 나라’라고 하니까 아마도 그가 다스렸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다스렸던 네 지역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라고 하잖아요.

그 나라들은 시날 땅에 있었다고 하는데, 시날 땅이라고 하는 곳은 앞서 말씀 드린 지금의 이라크가 있는 부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비가 별로 안 내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을 다스리던 니므롯이라고 하는 사람은 철저한 방수처리를 한 바벨탑을 지으려고 했다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가 이제 서서히 밝혀지게 됩니다.

창세기 10장 8절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구스였다고 하는데, 그의 족보를 좀 거슬러 올라볼까요?


창세기 10장 6절~8절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ハムの子らはクシュ、ミツライム、プテ、カナン。
クシュの子らはセバ、ハビラ、サブタ、ラアマ、サブテカ。ラアマの子らはシェバ、デダン。
クシュはニムロデを生んだ。ニムロデは地上で最初の勇士とな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니므롯의 아버지는 구스이고, 구스의 아버지는 함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함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창세기 10장 1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これはノアの息子、セム、ハム、ヤフェテの歴史である。大洪水の後、彼らに息子たちが生まれた。

그렇죠. 바로 함의 아버지는 노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아들은 함이고 함의 아들은 구스이고 구스의 아들이 니므롯이 되기 때문에, 노아는 니므롯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므롯은 증조할아버지 노아를 만날 수가 있었을까요? 예, 충분히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니므롯이 몇 살에 태어나서 몇 살까지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니므롯과 같이 노아의 아들인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리고 아르박삿의 아들이자 역시 노아의 증손주인 셀라를 기준으로 본다면, 창세기 9장 29절에 의하면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는데, 성경에 기록된 나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노아의 증손주 셀라가 313세 때까지 노아가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똑 같은 증손주라고 생각해봤을 때 니므롯도 대략 300세 정도까지 노아가 살았을 것이며, 니므롯도 당연히 노아의 말을 직접 들으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비록 노아의 홍수는 그들이 태어나기 30~4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에는 아직 홍수가 할퀴고 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홍수를 직접 경험한 노아나 그의 아들이자 니므롯의 할아버지인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몇 번이고 들어왔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노아의 홍수는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마치 우리에게 있어서 일제시대나 한국전쟁처럼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홍수가 일어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7장 17절~24절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大洪水は四十日間、地の上にあった。水かさが増して箱舟を押し上げたので、それは地から浮き上がった。
水がみなぎり、地の上に大いに増し、箱舟は水面を漂った。
水は地の上にますますみなぎり、天の下にある高い山々もすべておおわれた。
水は、その上さらに十五キュビト増し加わり、山々はおおわれた。
こうして、地の上を動き回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は、鳥も家畜も獣も地に群がるすべてのものも、またすべての人も死に絶えた。
いのちの息を吹き込まれたもので、乾いた地の上にいたものは、みな死んだ。
こうして、主は地の上の生けるものすべてを、人をはじめ、動物、這うもの、空の鳥に至るまで消し去られた。それらは地から消し去られ、ただノアと、彼とともに箱舟にいたものたちだけが残った。
水は百五十日間、地の上に増し続けた。


이와 같은 말을 그 때도 멀쩡하게 살아 계셨던 노아 증조할아버지나 자기 할아버지로부터 아주 생생하게 들어오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은 또다시 홍수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죠. 만약에 또다시 그와 같은 홍수가 닥쳐와서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긴다 하더라도 안 잠길 정도의 높은 탑, 아무리 오랫동안 물이 땅에 넘치더라도 전혀 물이 새지 않는 건물을 지으려 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벽돌로 촘촘하게 쌓아 올릴 뿐만 아니라 역청까지도 써가면서 철저하게, 그야말로 집요하리 만큼 방수처리를 하면서 바벨을 건설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일본의 어느 총리가 당시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일본을 무슨 불침항모,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었는데, 니므롯의 이 발상은 바벨탑을 그야말로 가라앉지 않는 노아의 방주, 불침방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까.

창세기 6장 5절~7절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図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それで主は、地上に人を造ったことを悔やみ、心を痛められた。
そして主は言われた。「わたしが創造した人を地の面から消し去ろう。人をはじめ、家畜や這うもの、空の鳥に至るまで。わたしは、これらを造ったことを悔やむ。」


하나님께서는 다름 아닌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서 홍수로 심판하신 것이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지나치리 만큼 방수처리를 한 탑을 건설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들의 힘으로 무력화 시키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바벨탑이 완성되었다고 가정을 해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이제 아무리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들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또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물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가요?


창세기 9장 11절~16절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わたしは、わたしの契約をあなたがたとの間に立てる。すべての肉なるものが、再び、大洪水の大水によって断ち切られることはない。大洪水が再び起こって地を滅ぼすようなことはない。」
さらに神は仰せられた。「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に、また、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すべての生き物との間に、代々にわたり永遠にわたしが与えるその契約のしるしは、これである。
わたしは雲の中に、わたしの虹を立てる。それが、わたしと地との間の契約のしるしである。
わたしが地の上に雲を起こすとき、虹が雲の中に現れる。
そのとき、わたしは、わたしとあなたがたとの間、すべての肉なる生き物との間の、わたしの契約を思い起こす。大水は、再び、すべての肉なるものを滅ぼす大洪水となることはない。
虹が雲の中にあるとき、わたしはそれを見て、神と、すべての生き物、地上のすべての肉なるものとの間の永遠の契約を思い起こそう。」


창세기 2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장 5절~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地にはまだ、野の灌木もなく、野の草も生えていなかった。神である主が、地の上に雨を降らせ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また、大地を耕す人もまだいなかった。
ただ、豊かな水が地から湧き上がり、大地の全面を潤していた。

그러니까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습기가 땅을 촉촉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더니 온 땅이 멸망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이제 비가 내리기 시작하기만 하면 또다시 멸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얼마나 두려워 했겠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을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 그렇죠. 걱정하지 마. 내가 더 이상 물로 심판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 증거로 무지개를 내가 보여 줄게. 비가 내릴 때 이 무지개를 보면 내가 한 약속을 기억하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잖아요. 참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십니까.

그러나 아마도 니므롯은 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완전 방수처리 된 높은 바벨탑을 쌓아 올리려고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벨탑을 다 완성해 놨는데 이제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물로 심판을 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되면 그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하, 우리가 이처럼 완벽하게 대비를 해 놨으니 하나님도 더 이상 물로 심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겼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이제 아무리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들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우려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11장 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主は言われた。「見よ。彼らは一つの民で、みな同じ話しことばを持っている。このようなことをし始めたのなら、今や、彼らがしようと企てることで、不可能なことは何もない。


이 말씀은 여기서 이 바벨 건설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사람들의 죄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런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기 전에,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이 바벨 건설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게 된다면, 이 바벨 사건에 대한 맥락이 모두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은 그런 일을 하면 큰일 나지만 저희 때까지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잘못하면 선생님이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걸 맞으면 정말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자, 그렇다면 선생님으로부터 엉덩이를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 잘못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에요. 아무리 엄한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아이들을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다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몽둥이로 맞지 않으려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데, 자신들이 엉덩이를 맞는 것은 저 몽둥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몽둥이를 감춰버리거나 엉덩이에 두꺼운 걸레라도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이런 일은 실제로 있었다고 해요. 그러면 학생들이 나쁜 짓을 했는데 선생님이 몽둥이가 없어졌다고 해서 혼이 안 나겠습니까. 아니면 몽둥이를 때리는데 엉덩이에 걸레가 들어있다고 하면 그걸 선생님이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과거에 어떤 학생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더니만 평소보다도 혼이 더 많이 났다는 거예요. 아주 힘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봐야 우리에게 닥친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누가 하십니까.

요한복음 5장 22절~23절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また、父はだれをもさばかず、すべてのさばきを子に委ねられました。
それは、すべての人が、父を敬うのと同じように、子を敬うようになるためです。子を敬わない者は、子を遣わされた父も敬いません。


심판은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이끄실 분은 오로지 예수님이십니다. 그 외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이시요, 우리의 길이시요, 우리의 진리시요, 우리의 생명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우리 스스로의 힘이나 지혜를 의지하시겠습니까.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あなたがたには、明日のことは分かりません。あなたがたのいのちとは、どのようなものでしょうか。あなたがたは、しばらくの間現れて、それで消えてしまう霧です。

아무리 학식이 많고 아무리 권세를 누린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온전히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길이 열립니다.

이제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심판을 면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을 얻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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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52회 신앙의 자가진단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7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3절~4절
“3.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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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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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7번째 시간으로서 “신앙의 자가진단” 信仰の自己診断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가복음 외에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대부분 줄거리는 비슷합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호보완을 하면서 사실관계를 우선 정리를 해보고, 그리고 이 말씀에 담긴 뜻, 특별히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은 뜻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 사실관계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도 하시고 그리고 천국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는, 물론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 외에도 때로는 길가에서 때로는 강가에서, 그리고 때로는 산이나 들에서도 말씀을 전하기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장면을 보면 어떤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많은 역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지역 주위에는 이미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마침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중풍을 앓고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왔어요. 중풍이라고 한다면 알기 쉽게 말해서 뇌졸중 그러니까 뇌에 있는 혈관이 막혔거나 아니면 터졌거나 해서 거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겠는데, 이 사람을 한글 개역개정이나 개역 성경에 보시면 메워 가지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네 사람이 한 사람을 동시에 등에 업을 수는 없고, 그리고 또 네 사람이라고 하니 아마도 들것 같은 것에 이 거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누위고는 넷이 들고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고쳐 주신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지금 예수님은 집 안에 계신 것 같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좀 민폐기인 해도 사람들 틈새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 일어날 수도 없어서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한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 바로 위 지붕에 구멍을 내서 들것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들것을 가지고 지붕 위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림이나 영화 같은 것에서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 집들을 보면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비스듬하게 경사진 것이 아니라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옥상도 하나의 생활 공간이었어요. 사도행전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그러니까 당시에는 지붕 위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도 하고 그랬던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옥상에서 휴식을 하기도 하고 곡물을 말리거나 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면 그 때마다 사다리로 올라갔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아예 바깥 쪽에 계단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옥상에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지요. 첫째는 단순히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사람이 누워 있는 들것을 가지고 네 사람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냉장고나 큰 짐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옮겨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둘이서 운반하기에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무게도 무게지만 균형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들것에는 물건이 아닌 사람이 누워 있어요. 그리고 네 사람이 운반 했다고 하면 둘 중 하나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 네 사람이 들것을 가지고 균형을 맞추어 가면서 좁은 계단을 올랐거나, 아니면 네 사람이 어렵다면 두 사람이 낑낑 대면서 무거운 들것을 올렸거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두번째 문제로는 지붕을 뜯어 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집은 대부분 벽면이 돌로 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지붕은 돌이 아니었습니다. 눈이나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면 단단하게 만들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스라엘 기후는 눈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어느 정도 굵은 나무를 여러 개 놓은 다음에 그 위에 종려나무나 돌멩이 또는 기와를 덮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지붕에 구멍을 낼 수는 없어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지붕 위 옥상에는 사람들이 자주 올라 다녔고, 지금도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 한 명과 이를 들고 온 네 명, 최소한 총 다섯 명이 올라가 있잖아요.

그리고 구멍의 크기도 문제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하나 쏙 들어가기 위한 구멍이라고 한다면 작아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 들것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큰 구멍을 내야 합니다.

당시 들것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구멍을 내고 거기로 들것을 내린다고 한다면 최소한 길이는 2미터 가까이, 그리고 폭은 1미터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큰 구멍을 내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세번째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당연한 말씀이겠습니다만, 지금 그들이 지붕을 뚫으려고 하는 집은 그 사람들 집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멀쩡한 집의 지붕을 그것도 지붕의 상당 부분을 모두 뜯어내야 할 정도의 구멍을 뚫어야 하는 것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 집의 멀쩡한 지붕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고 한다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민사상으로는 손해를 배상해야 할 것이고 잘못하면 잡혀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사상 책임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잖아요.

마지막으로 네 번째 문제는 이제 그 뚫은 구멍을 통해서 이 사람이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놔야 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사람들의 체력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위험요소들을 감수하고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뚫고 그 중풍 환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렸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누가복음 5장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すると彼はすぐに人々の前で立ち上がり、寝ていた床を担ぎ、神をあがめながら自分の家に帰って行った。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고쳐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이야기라서 설교 말씀으로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왜 이 말씀이 성경에, 그것도 마가복음 뿐만이 아니라 누가복음에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이 일련의 기록으로 인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예,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앞으로 들것을 내릴 때에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の信仰を見て、中風の人に「子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言われた。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가 아닌 “그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여기에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이 포함되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나누어지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최소한 들것을 들고 온 네 명의 믿음을 보시고 그 환자를 치료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누군가의 믿음이 없거나 아니면 적은 경우에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하면 우리의 믿음을 보고서라도 기도 응답을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오늘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놓쳐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반쪽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버려버리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이해하기 어렵거나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단지 시각을 조금 바꾸어 보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어디까지나 들것을 메고 온 사람들의 시각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헌신적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그러면 그 시각을 잠시 돌려서, 우리가 들것을 메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그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지금 온몸이 마비가 되어서, 걷기는커녕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저기 어딘가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셨다고 해요. 나도 그 분을 만나면 병이 나을 것 같아요.

여러분이 만약에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여러분을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로 데려가줄 네 명의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요. 지금은 뭐 차에 태워드리거나 아니면 119를 부르면 알아서 잘 해주겠지요.

그러나 꼭 몸이 아플 때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그 정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그 정도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여러분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여러분을 도와 줄 네 명 정도의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는 있으십니까.

이 들것을 들고 온 사람들의 헌신이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이라면 무슨 전화나 아니면 카톡을 해서 언제 모여서 같이 들것에 실어서 가자는 식으로 쉽게 약속을 잡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한 사람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그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모았겠지요.


그리고 네 사람이 낑낑거리고 들것을 메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몇 킬로 안 되는 거리라고 하더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무슨 들기 쉬운 가방을 매는 것도 아니고 들것을 들게 되면 한쪽으로 힘이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마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막상 업거나 들거나 하려면 상당히 힘이 들기 마련이에요.

거기다가 어디 그 뿐인가요. 네 사람이 한 들것을 들었으니까 한 사람만 빨리 간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잘못해서 떨어뜨리기라도 한다면 큰 일입니다. 그러니까 조심조심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제 도착한 다음에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옥상으로 올려야 하고, 거기다가 구멍을 뚫어서 이제 밧줄로 아래까지 내려야 했습니다. 이것도 균형을 잡으면서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야 했을 것인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힘든 것은 어디 그 뿐이었을까요? 아무리 빨리 작업을 했다 하더라도 지붕을 뚫는 작업이 그저 1~2분 사이에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일에 교회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요. 그것도 조금 떨어졌겠습니까? 지붕을 아예 들어낼 정도로 뚫고 있는데?

이런 저런 부스러기들이 아주 그냥 폭포수처럼 쏟아졌을 것입니다. 갑자기 막 기침이 나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가 날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할렐루야 그랬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들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뭐 그러면서 난리를 치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육체적인 수고만이 아니라 이 모든 정신적인 수모까지도 감수하면서 그 네 사람은 끝까지 지붕을 뚫고 난 다음에, 온갖 야유와 질타 속에서도 네 사람이 조심조심 하면서 마침내 들것을 아래로 내리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분명합니다. 99%도 아니에요. 그 네 사람들은 들것을 아래로 내린 다음에 100% 지쳐서 뻗어버렸을 것이에요.

자, 다시 한 번 질문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와 같은 헌신적인 수고를 아낌없이 해줄 수 있는 네 사람 정도가 지금 현재 여러분 주변에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내 주변에는 나를 위해 그 정도로 헌신해줄 사람이 없다는 분들께 질문을 드립니다. 이상하네요. 왜 없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대로 살았다고 한다면, 무슨 평생동안 나를 위해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 정도 시간과 수고를 낼 정도라면 얼마든지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이 수십명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그래, 내 주위에는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나에게 그 정도의 도움을 줄 만한 네 사람 정도는 있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아무런 사심없이 그 정도로 헌신적인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막상 현실로 닥쳤을 때 실제로 그리 많을까요?

물론 여러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내가 그 사람한테 해 준 게 얼마인데. 내가 언제도 도와줬고 언제도 어떻게 해주고 그랬는데 설마 나를 안 도와 주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과연 그 마음이 상대방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까요? 혹시 여러분만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정말 네 사람이나 있습니까.

한국 속담에 그런 말 있잖아요.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정승 집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문상객들이 몰려들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생색 내기 위해서 얼굴 도장 찍으러 간다지만, 정작 정승 본인이 죽었다면 얼굴도장 찍을 사람도 없는데 뭐 하러 가냐 하는 것이지요.

세상 인심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무슨 도움을 주거나 한다면 나한테도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이 있어야 움직이지, 아무리 수고를 해도 나한테 득이 되지 않는다면 손 하나 까딱이라도 하고 싶겠어요?

반면에 그런 경우도 있겠지요. 내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만 있을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에게 다소 손해가 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흔쾌히 도움을 주어야지…….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때가 그런 경우일까요. 대표적인 예가 본인이 과거에 여러가지 도움을 받았을 경우 아니겠습니까.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때 그 사람이 나를 도와주었는데, 지금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같은 경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를 위해서 그럴 사람이 네 사람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 그렇죠. 내가 그만큼 내 이웃을 사랑하고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누가복음 16장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不正の富で、自分のために友をつくりなさい。そうすれば、富がなくなったとき、彼らがあなたがたを永遠の住まいに迎えてくれます。

이 세상이 누구의 것입니까. 그렇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내가 쓰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는 내 것이면서도 진정한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주님이 나에게 잠시 동안만 맡겨 놓으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내 것인 줄 알고, 이를 악 물고 놓지 않으려고 해요. 나한테는 지금 차고 넘치는데 지금 이 순간 부족한 이웃에게 나누어 줄 생각은 꿈에도 안 해요.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잖아요. 안 되겠다. 내놔. 라고 진정한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꼼짝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놔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 하라고요? 예, 친구를 사귀라고 하잖아요. 친구가 별것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다 퍼주라고 말씀하시나요?


마태복음 5장 40절~42절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내가 가지고 있는 하찮은 것을 뜯어가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래요? 예, 내가 가지고 있는 별 것 아닌, 마치 헌옷 같은 것도 같이 줘버리라고 하시잖아요.

물 한 잔 달라면 물 두 잔 주고, 밥 한 그릇 달라고 죽일 듯이 달려들면 그냥 두 세 그릇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잘 했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쉽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루 정도 정말 헌신적으로 도와줄 만한 이웃이 네 명 정도가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만약에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이 현실로 닥쳤을 때 정말로 그 정도 헌신적으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꽤 믿음생활을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까.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라도 나를 헌신적으로 다와줄 사람이 네 사람은 고사하고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을 듣고 계시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서도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 전에 제 아이디가 도난을 당해서 몇몇 사람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장 비밀번호도 바꾸고 이상한 메시지가 전달된 분들께는 사과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는 이에 대한 내용의 글을 썼는데, 한 친구가 제게 그러더라고요. 만약에 돈을 빌려 달라고 여러 사람들한테 말을 했었는데 아무도 안 빌려줬다면 좀 서운했겠네? 라고 하는 거였어요.

자, 그렇다면 비록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쁜 의도로 제 아이디를 써서 돈을 빌려 달라고 했었다고 하는데, 이 일로 인해서 정말 돈을 빌려준 사람이 있었을까요?

예, 다행히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실 좀 서운했었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게 서운해 할 일입니까.


제가 지금까지 10년 동안 일본 그것도 군마현에 살면서, 사례비도 제대로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지금까지 그래도 빚 없이 사역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 후원을 해 주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가 일본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런저런 곱지 않은 소리도 많이 듣고 그랬습니다만, 얼마 전에는 누가 저에게 그런 글을 남겼더라고요.

매주 동영상이나 음성으로 말씀을 전할 때 보면 서두에 후원해주시는 분들의 성함을 말씀 드리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봐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모습이 후원에 목을 매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께는 그저 여느 비판에 대한 답글처럼 “귀하의 의견을 존중합니다”라고 말을 남기긴 했습니다만, 참 모르시는 말씀이지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 사이비 교주처럼 무슨 몇 억 씩 내라는 것도 아니고, 지금 목이 말라서 물 한 잔 달라는 심정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그게 마음에 안들 것이 뭐가 있습니까.

성함을 말씀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솔직히 제 심정 같아서는 매주마다 한 분 한 분 찾아 뵈면서 직접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저희 사역을 위해서 관심을 가져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신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렇다면 제가 그 분들을 위해 해 드린 것이 있나요. 사실 앞서 저도 여러분께 자신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사람 넷이 있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 자신도 그런 분들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부터도 그런 도움을 많은 분들께 드리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보다 더 분발해서 많은 이웃분들을 섬겨야겠다는 다짐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선 저 자신한테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스스로 지금까지의 신앙적인 자세를 진단해 봄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남겨진 시간 동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헌신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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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51회 거듭나야 합니다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7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설교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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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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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6번째 시간으로서 “거듭나야 합니다” 新しく生まれなけらばなりません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말씀 뜻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듭나다”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이는 바로 다시 태어나는 것,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ヨハネの福音書3章3節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에 대해서 주석서에 의하면 이는 단순히 “눈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경험하다, 참여하다, 인식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그저 단순히 먼발치에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제로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절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さて、パリサイ人の一人で、ニコデモという名の人がいた。ユダヤ人の議員であった。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그는 일반 서민이 아니라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그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그 외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될 정도로 많은 교양이나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겠지요.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에게 주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천국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에서도 무슨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표현은 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니고데모는 대단히 놀랍니다.

요한복음 3장 4절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ニコデモはイエスに言った。「人は、老いていながら、どうや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ますか。もう一度、母の胎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などできるでしょうか。」

아니, 이미 태어난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까, 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21절까지에 걸쳐서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이 내용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난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방송에서 보니까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듣는 사람들은 좀 표정이 복잡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좀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사실 어려운 것을 어려운 말로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좀 이상한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쉬운 것도 어려운 말을 써가면서 설명하기도 사실 쉬워요.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어려운 것을 쉽고 짧게 설명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실 좀 감탄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상당히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시간에 그나마 전문용어들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분의 말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은, 그래, 그 짧은 시간에 저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고 한다면, 저렇게 밖에는 할 수 없겠구나. 참 어려운 내용인데 그래도 설명을 참 잘하신다 하고 느꼈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런 기초지식 없이 이 말씀만 들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거듭남이라고 하는 어렵고 많은 내용들을 이 정도로 간략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오히려 참으로 놀랍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거듭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태어나는 순간은 말하자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0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경험도 쌓여가게 되지요.

처음에는 가정에서 시작한 지식의 습득과 경험의 축적이 이제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제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역시 또 많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의 축적이 곧 인생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 아니겠습니까.

세상적으로 본다면 이를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했던 인물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나서 훌륭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했습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청년관료로서 그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몰랐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구약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에 비추어 보아서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문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바뀌게 됩니다.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당시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3절~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彼は地に倒れて、自分に語りかける声を聞いた。「サウロ、サウロ、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
彼が「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言うと、答えがあった。「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イエスである。




이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된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를 받게 됩니다. 자신이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박해하고 핍박해야 마땅했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되자 예수님 만이 구원이고 예수님 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바울은 그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머리 속으로 집어넣었던 지식이 결국 나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지식이었구나, 결국 내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닌 내 눈을 가리게 하는 지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어떻게 고백을 합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예를 들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포기한다고 한다면 어느 쪽이 어렵겠습니까.

당연히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야 어차피 없는 것, 동전 몇 개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큰 회사를 몇 개나 가지고 있고, 좋은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것도 자신이 평생동안 노력해서 얻게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 포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살을 깎아내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지식이나 경력으로 본다면 대단한 부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을 완전히 버리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율법에 대한 지식, 세상에 대한 경력들은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은 왜 이렇게 작정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 그와 같은 결심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대화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잡혀왔을 때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베스도와의 대화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2절~25절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使徒の働き26章22節~25節
このようにして、私は今日(こんにち)に至るまで神の助けを受けながら、堅く立って、小さい者にも大きい者にも証しをしています。そして、話してきたことは、預言者たちやモーセが後(のち)に起こるはずだと語ったことにほかなりません。
すなわち、キリストが苦しみを受けること、また、死者の中から最初に復活し、この民にも異邦人にも光を宣べ伝えることになると話したのです。」
パウロがこのように弁明していると、フェストゥスが大声で言った。「パウロよ、おまえは頭がおかしくなっている。博学がおまえを狂わせている。」
パウロは言った。「フェストゥス閣下、私は頭がおか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真実で理にかなったことばを話しています。

여기에 등장하는 베스도도 총독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는 과거에 바울과 비슷한 삶, 좋은 배경, 좋은 집안, 좋은 학벌, 좋은 성적……이렇게 해서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겠지요.

하지만 베스도와 바울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였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과 경험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다시 살아나신 것,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요.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리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사전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0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는, 말하자면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한다거나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식의 우선순위에 대한 재배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세상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지식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세상적인 지식, 여기에는 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난 삶, 새롭게 0에서 시작하는 삶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가져보지 못했던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깨닫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해보지 못한 행함을 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바뀝니까.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새롭게 바뀝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 안에서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고, 세상적인 지식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지금까지는 나 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 평생 해보지 않은 행함, 다른 사람을 위한 행함을 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끔 그런 분들 계십니다. 자기는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을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8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예, 좋은 나무는 당연히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고, 못된 나무는 당연히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신이 정말로 거듭난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가 먼저 알게 될까요? 예, 주위 사람이 먼저 압니다.

그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주변 사람이, 아, 저 사람 정말 예전의 모습과 달라졌어……라고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말로만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면서 며칠 좀 열심히 노력하더니만 얼마 지나니까 예전 모습으로 또 돌아갔어요. 그러면 주변에서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까. 달라지긴 뭐가 달라졌어……그러지 않겠습니까.


잠언 26장 11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장 22절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箴言 26章11節
「犬は自分が吐いた物に戻る」、「豚は身を洗って、また泥の中を転がる」という、ことわざどおりのことが、彼らに起こっているのです。

第二ペテロの手紙2章22節
犬が自分の吐いた物に戻って来るように、愚かな者は自分の愚かさを繰り返す。


皆さん、主が私たちのために十字架に架けられ、死な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方はアーメンと告白しましょう。



그냥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고난을 당하신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좀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와 같은 일을 반복해 봤자 어제와 같은 일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제와 같은 일을 반복해봤자 여전히 똑같은 내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언제까지 어리석은 짐승들처럼 어리석은 일들을 되풀이할 수가 있겠습니까.



ただの人ではない、神様のひとり子であられるイエス様が懲らしめを受けられたのが、まさに私たちのために、私のためにそのような目に遭わ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のであれば、私たちはいい加減、変わ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おとといのことを繰り返したって昨日のようなことしか起こりません。昨日のようなことを繰り返したって、依然として同じような明日が繰り返すだけなのであります。

いつまで愚かな獣たちのように愚かなことを繰り返すおつもりでしょうか。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진정한 말씀을 깨닫고, 그리고 진정한 행함을 시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私たちは新しく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新しく生まれなけらばならないのであります。

新しくなるためには、何よりも、まことの信仰をもって、まことのみ言葉を悟り、そして、まことの行いを始め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エペソ人への手紙4章22節~24節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썩어져가는 지식이나 경험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믿음, 진정한 말씀, 진정한 행함을 통해서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以前まで持っていた腐りゆく知識や経験に従う古い人を脱ぎ棄て、まことの信仰、まことのみ言葉、まことの行いを通して、まことの神様の御国を知ることにな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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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50회 구원의 약속 (3)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マルコの福音書16章19節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あと)、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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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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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5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그 세번째 시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와 지지난 주를 통해 우리는 마가 다락방에서의 제자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 그리고 라합과 그의 가족 친족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에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 드렸었지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쩌면 처음에는 500여 명이었는데 나중에 실제로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에는 120명밖에 안 남아있었습니다.

사실 다들 한가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귀에는 들리는 것이 없고 손에는 잡히는 것일 없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렸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 중 광야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못 들어갔을까요.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입버릇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출애굽기 14장 11절~12절
“11.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そしてモーセに言った。「エジプトに墓がないからといって、荒野で死なせるために、あなたはわれわれを連れて来たのか。われわれをエジプトから連れ出したりして、いったい何ということをしてくれたのだ。
エジプトであなたに『われわれのことにはかまわないで、エジプトに仕えさせてくれ』と言ったではないか。実際、この荒野で死ぬよりは、エジプトに仕えるほうがよかったのだ。」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連れ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민수기 11장 5절~6절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민수기 14장 2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이러면서 불평불만을 되풀이했던 그들은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민수기 14장 26절~35절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主はモーセとアロンに告げられた。
「いつまで、この悪い会衆は、わたしに不平を言い続けるの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子らがわたしにつぶやく不平を聞いた。
彼らに言え。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わたしは必ず、おまえたちがわたしの耳に語ったとおりに、おまえたちに行う。
この荒野におまえたちは、屍をさらす。わたしに不平を言った者で、二十歳以上の、登録され数えられた者たち全員である。
エフンネの子カレブと、ヌンの子ヨシュアのほかは、おまえたちを住まわせるとわたしが誓った地に、だれ一人入ることはできない。
おまえたちが『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と言った、おまえたちの子どもについては、わたしは彼らを導き入れる。彼らはおまえたちが拒んだ地を知るようになる。
しかし、おまえたちはこの荒野に屍をさらす。
おまえたちの子どもは、この荒野で四十年の間羊を飼う者となり、おまえたちがみな、屍となるまで、おまえたちの背信の責め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
おまえたちが、あの地を偵察した日数は四十日であった。その一日を一年と数えて、四十年の間おまえたちは自分の咎を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こうして、わたしへの反抗が何であるかを思い知ることになる。
主であるこのわたしが言う。一つになってわたしに逆らったこの悪い会衆のすべてに対して、わたしは必ずこうする。この荒野で彼らは死に絶える。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는 320킬로. 거의 서울에서 부산 (東京 名古屋) 까지의 거리와 비슷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직선거리이고, 실제로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까지 걸었던 거리는 640킬로 정도였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640킬로. 물론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잠을 자고 식사나 휴식을 하면서 걷는 것일 테니 하루에 8시간 정도 걸었다고 쳐요.

건강한 성인 남성의 경우 하루 8시간을 시속 4킬로 정도로 걸었다고 친다면 하루에 30킬로 정도 걷는 것이 되지만, 여기에는 고령자나 어린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20킬로 정도 걸었다고 계산을 해보면 그래도 30일하고 조금 더 걸으면 되는 거리입니다.

그들은 대략 한 달 정도만 참고 충성만 했었더라면 어마어마한 축복을 얻을 수 있었다. 노예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땅, 아니, 자신들의 나라를 가질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곧바로 못 들어가고 40년 뒤에 들어갔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성인들은 40년 동안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되어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 1세대 중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40년 전에 미성년자이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광야 2세대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라합과 그의 가족 친족들은 어땠습니까.

끝까지 그 집 안에 머물고 있었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으나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결국 죽고 말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무엇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기 전의 모습으로, 믿음이 적었던 과거로, 또는 우상을 섬기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도들이,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해서 예전에 했던 모습 고기잡이나 하자 하는 식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애굽을 탈출한 광야 1세대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민수기 14장 3절~4절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주셨는데, 조금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자신이 노예로 살던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게 진정으로 그들이 돌아갈 곳이었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7장 16절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ただし王は、決して自分のために馬を増やしてはならない。馬を増やすために民をエジプトに戻らせてはならない。主は「二度とこの道を戻ってはならない」とあなたがたに言われた。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광야 2세대들의 특징은 어땠습니까. 광야 1세대와는 무엇이 달랐습니까.

그들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 공략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황당한 명령, 6일 동안 하루에 한 번 여리고성 주위를 돌고, 마지막 7일째에는 일곱 번 돌고 난 다음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면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말씀에 대해서도 끝까지 순종해서 결국 여리고성 만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그 집 안에 머물러 있었더니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조금 오래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1982년에 개봉한 “사관과 신사”라는 영화를 보신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주연은 리처드 기어인데, 2024년 현재 그는 일흔살이 넘었지만 당시 그의 나이 삼십대 초반일 때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해군 부사관인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어요.


주인공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집을 뛰쳐나와 해군항공사관학교에 훈련생으로 입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혹독한 훈련을 겪게 되는데 동기 중에서 한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그 지역에 파티가 있어서 그 친구와 함께 각자 아름다운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이 여자친구들은 동네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는데, 사실 그 여공들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를 만나서 그 시골을 빨리 뜨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친구는 자기 여자친구를 사랑했었는데, 그는 혹독한 훈련을 견디다 못해 학교를 자퇴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성을 찾아가서 청혼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청혼을 기쁘게 생각했던 여공인 그녀는 그가 학교를 자퇴하고 왔다고 하자 태도가 돌변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그녀들은 단순이 그 남자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장교와 결혼할 것을 꿈꿔왔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관학교를 자퇴하고 왔다고 하니 그는 장교가 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녀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게 됩니다.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고 그 여자 친구에게로 돌아가면 자신을 기쁘게 받아줄 줄 알았던 그 주인공의 친구는 절망하고 결국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주인공은 그 혹독한 훈련을 끝까지 견딥니다. 한 번은 주인공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 때문에 당시 그들을 교육시켰던 담당 교관으로부터 그야말로 인격적으로 극심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 아주 지독한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교관은 주인공한테 말합니다.

"너 같은 놈은 집으로 돌아가! 때려치워! 넌 퇴학이야!"

그러자 그 주인공은 기합을 받으면서 울부짖습니다.

"I've got nowhere else to go!"

"난 돌아갈 곳이 없어요! 난 돌아갈 곳이 없단 말이에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집도, 그를 따뜻하게 받아줄 가정도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졸업식을 맞이하게 되고 꿈에도 그리던 장교로 임관을 하게 됩니다.

그 졸업식 자리에는 그를 끝까지 괴롭혔던 지독한 교관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교관의 계급은 상사인데 학교에서 자신이 가르쳤던 훈련생은 소위로 임관되었기 때문에 자기보다 계급이 높아진 것이에요.

졸업생들이 그 혹독한 훈련을 강요했던 교관을 찾아가서 한 사람 씩 인사를 하자 교관은 경례를 하면서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소위님”

한 졸업생이 그에게 “감사합니다. 교관님”이라고 하자 그 교관은 말합니다.

“교관님이 아니라 상사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경례를 하는 모습. 참 멋진 장면 아닙니까.

졸업식을 마친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이제 자신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하얀 장교복 차림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주인공. 마침내 그는 자신의 미래와 사랑을 모두 손에 넣게 된 것이죠.

이는 비록 영화이긴 합니다만, 이는 대단히 성경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의 친구는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두고라도 여자친구한테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이 자신이 돌아갈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가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를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친구는 그를 버렸습니다. 퇴학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이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는 절망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반면에 주인공은 어떻습니까. 그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도중에 포기한다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힘드십니까. 기다림이 힘드십니까.

우리 한 번 정리를 해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제자들은 얼마나 기다려야 했습니까. 예, 8일, 아무리 길어도 10일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 후에 성령님이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처음 도착하기까지 대략 30일 남짓이었고, 그리고 라합이 마음을 졸이면서 기다린 것도 길어봤자 20일도 채 안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얼마 안 되는 기간만 참으며 기다리면 됐었는데 그 기간을 참지 못해서 결국 크고 놀라운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이, 사실 지금도 보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32절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シモン、シモン。見なさい。サタンがあなたがたを麦のようにふるいにかけることを願って、聞き届けられました。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のために、あなたの信仰がなくならないように祈り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は立ち直ったら、兄弟たちを力づけてやりなさい。」

마귀들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귀들은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탈락시키려고 합니다. 그 때의 미끼가 무엇입니까.


다 포기해. 믿음은 무슨 믿음. 쓸데없는 소리야. 세상으로 돌아가. 그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밋밋합니까. 예배를 드려도 찬송을 드려도 감동이 없습니까.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으십니까. 잘 된다고 하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때가 엄청난 축복이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지금도 보면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척을 했다가도, 조금 어려움이 닥치면 그 짧은 기간도 견디지 못하고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버리고 그리고 말씀을 버리고는 세상으로 가버리고 우상한테 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믿음이 아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닌 내 생각을 의지하면 잘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오로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ヨハネの福音書14章6節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人々は信仰ではない世の中を自分が戻れる道だと思っています。主のみ言葉でない、自分の考えに頼ればうまくいくと勘違いをしているのです。

しかし、それは戻れる道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戻る道はただ、イエス様だけです。イエス様を通してのみ本当の救い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우리는 좁은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私たちは狭い門、いのちに至る門から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主はおっしゃいます。

マタイの福音書24章13節
「しかし、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ます。」

そうです。最後まで耐え忍ぶ人は救われると主は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다려봅시다.

그 고난의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ピリピ人への手紙3章14節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今、大変な思いをされていますか。苦しんでおられますか。もう少し、もう少しだけ主を信じ、主を頼りながら待ってみましょう。

その苦しみの期間も残りわずかです。もう少し待つことができれば、驚くべき祝福を受け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이제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면서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오로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서 마침내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주님 안에서 기쁨에 넘치는 구원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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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9회 구원의 약속 (2)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23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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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マルコの福音書16章19節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あと)、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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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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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4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그 두번째 시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 알아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고 3일만에 부활하신 다음 5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모습을 보시인 다음,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시기 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4절~5절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使徒たちと一緒にいるとき、イエスは彼らにこう命じられた。「エルサレムを離れないで、わたしから聞いた父の約束を待ちなさい。
ヨハネは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ましたが、あなたがたは間もなく、聖霊による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るからです。」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 인근에 있는 다락방에 모여서 기다리게 되는데, 사도행전 2장 1절 이후에 의하면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임하시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님이 오시기까지 그 기간이 어느 정도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지난 주에 잠시 알아보았습니다만, 주님께서는 40일 만에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하는데, 이 40일이라고 하는 것이 부활하신 후부터 계산한 숫자라고 한다면, 고난 받으신 날 즉 유월절부터 계산하게 되면 2일이 추가가 되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42일째가 되는 날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성령님이 오신 것이 오순절, 그러니까 유월절부터 50일 후가 되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다린 날은 8일에서 아무리 길어도 10일 정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렇다면 이 기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님께서 오시기까지 8일에서 10일이라고 하는 그 기간.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은 어떤 분위기였을까요.

정말로 알찬 믿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려고 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정말 은혜로운 기도나 찬양 그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무엇보다 성령충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나 찬양이 무슨 은혜가 되겠으며, 아무리 기도를 오래 했다 하더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은 기도에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는 아직까지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잖아요.

지금이라면 그래도 성경을 펴서 말씀을 나눌 수라도 있겠지만, 당시는 아직 성경, 그러니까 신약성경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락방 분위기는 어땠을까 하면 상당히 좀 썰렁한 분위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말하자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그런 뜨뜻미지근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제 상상이 아닙니다.

거기 모였던 그 사람들,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사도행전 1장 14절 이후에 보시면 그들이 기도에 힘썼다고는 하나, 그들이 한 것은 자신들의 손으로 사도를 하나 더 뽑은 것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사도는 열 두 명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한 자리가 비었으니 이 숫자를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1장 23절~26절
“23.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そこで彼らは、バルサバと呼ばれ、別名をユストというヨセフと、マッティアの二人を立てた。
そしてこう祈った。「すべての人の心をご存じである主よ。この二人のうち、あなたがお選びになった一人をお示しください。
ユダが自分の場所へ行くために離れてしまった、この奉仕の場、使徒職に就くためです。」
そして、二人のためにくじを引くと、くじはマッティアに当たったので、彼が十一人の使徒たちの仲間に加えられた。

자, 그들은 두 사람을 추천했고, 두 사람 중에서 제비를 뽑아서 그 중 한 사람을 유다 대신 사도 중 한 사람으로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일까 하는 것이지요.

이는 제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 후의 일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선 만약에 제비를 뽑는 방법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라고 그들이 확신을 했다면 그 후에도 무슨 결정을 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는 장면이 나와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맛디아가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도였다고 한다면, 그 이후에도 사도로서 맛디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그 이후 주님의 뜻을 묻는다면서 제비를 뽑는 일은 등장하지 않고 그리고 맛디아에 대한 어떤 행적에도 성경은 무관심합니다.

물론 전승에 의하면 맛디아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다고는 합니다만, 이는 사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역시 순교를 당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했던 일들, 제비를 뽑아서 맛디아를 사도로 세웠다는 그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들은 그렇게 의미가 없는 일을 했을까요. 이는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아직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 때문에 지난 주에 말씀 드린 어느 신학자의 주장같이 처음에는 그 다락방에 500영 정도 모였을지 모르나 결국은 120명 정도까지 줄었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말하자면 밋밋한 상황이 영원히 이어졌나요.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때가 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이 임하시더니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이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는 극히 일부 선지자들한테만 임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 이제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거기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나간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잖아요.


아무리 그 동안 그들과 같이 있었다고는 해도 성령님이 오시기 하루 전, 아니, 1시간 전이나 불과 몇 분 전에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을 받지 못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앞서 살펴본 사도행전 기록에 보면 우리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은 어떻게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홀연히” 즉 갑자기 오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8일이나 10일 동안 조금씩 좀 분위기가 느껴져요. 왠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성령님이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들려요.

뭐, 그렇다면 다들 거기에 머물러 있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조금씩”이 아니라 “홀연히”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구약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이제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리고 성 공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 성은 어떠한 최신 무기를 써도 절대로 그 성벽을 헐지 못할 정도로 난공불락이에요.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6장 2절~7절
“2.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主はヨシュアに告げられた。「見よ、わたしはエリコとその王、勇士たちをあなたの手に渡した。
あなたがた戦士はみな町の周りを回れ。町の周囲を一周せよ。六日間そのようにせよ。
七人の祭司たちは七つの雄羊の角笛を手にして、箱の前を進め。七日目には、あなたがたは七回、町の周りを回り、祭司たちは角笛を吹き鳴らせ。
祭司たちが雄羊の角笛を長く吹き鳴らし、あなたがたがその角笛の音を聞いたら、民はみな大声でときの声をあげよ。そうすれば町の城壁は崩れ落ちる。民はそれぞれ、まっすぐに攻め上れ。」
ヌンの子ヨシュアは祭司たちに呼びかけた。「契約の箱を担ぎなさい。七人の祭司たちは七つの雄羊の角笛を持ち、主の箱の前を進みなさい。」
そして民に言った。「進んで行き、町の周りを回りなさい。武装した者たちは主の箱の前を進みなさい。」


민수기 26장 51절에 의하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이스라엘 자손들 중의 성인 남성들의 수는 6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여리고성 공략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육십만명이 무기를 들고 돌진을 하라고 하십니까.

아니에요. 엿새 동안은 그냥 하루에 한 번 여리고 성 주위를 돌라고 하세요. 그리고 마지막 열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번 돌고 나서 나팔을 불 때 백성더러 큰 소리로 외치래요. 그러면 성벽이 무너진대요.

이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전략.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 좋아요. 그렇게 하루 이틀 했어요. 그렇다면 그러는 동안 여리고성 성벽이 조금씩 갈라졌대요? 아닙니다.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참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일곱번 돌고 나팔을 불 때 사람들이 외치자 어떻게 됩니까.

여호수아 6장 20절 중반부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民はときの声をあげ、祭司たちは角笛を吹き鳴らした。角笛の音を聞いて民が大声でときの声をあげると、城壁は崩れ落ちた。

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은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끝까지 순종하자 홀연히 그 성벽이 무너진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데, 그 순간을 다른 곳에서 애타게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 의하면 라합을 기생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에 따라서 해석이 분분한데, 어찌되었든 이 라합의 집은 사람들이 묵을 수도 있게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여리고성 공략을 앞두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게 되는데, 그들은 이 라합의 집에 묵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정탐을 위해 여리고성으로 침입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금 라합의 집에 있다는 사실이 탄로납니다.

이를 알아차린 여리고 왕이 라합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당장 잡아오라고 명령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자 라합은 그들을 숨겨줍니다. 그리고 잡으러 온 사람들이 떠나가자 정탐꾼들에게 말을 하지요.


여호수아 2장 9절~13절
“9.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彼らに言った。「主がこの地をあなたがたに与えておられること、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対する恐怖に襲われていること、そして、この地の住民がみな、あなたがたのために震えおののいていることを、私はよく知っています。
あなたがたがエジプトから出て来たとき、主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葦の海の水を涸(か)らされたこと、そして、あなたがたが、ヨルダンの川向こうにいたアモリ人の二人の王シホンとオグにしたこと、二人を聖絶したことを私たちは聞いたからです。
私たちは、それを聞いたとき心が萎えて、あなたがたのために、だれもが気力を失ってしまいました。あなたがたの神、主は、上は天において、下は地において、神であられるからです。
今、主にかけて私に誓ってください。私はあなたがたに誠意を尽くした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また、私の父の家に誠意を尽くし、私に確かなしるしを与え、
私の父、母、兄弟、姉妹、また、これに属するものをすべて生かして、私たちのいのちを死から救い出す、と誓ってください。」


이미 하나님께서 이 여리고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내가 안다.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은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내가 믿는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나와 우리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자 정탐꾼들은 뭐라고 합니까.

여호수아 2장 18절~21절
“18.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見なさい、私たちはこの地に入って来ます。私たちをつり降ろした窓に、この赤いひもを結び付けておきなさい。あなたの父、母、兄弟、そして、あなたの一族全員をあなたの家に集めておきなさい。
あなたの家の戸口から外に出る者がいれば、その人の血はその人自身の頭上に降りかかり、私たちに罪はありません。しかし、あなたと一緒に家の中にいる者のだれにでも手が下されたなら、その人の血は私たちの頭上に降りかかります。
だが、もしあなたが私たちの、このことをだれかに告げるなら、あなたが私たちに誓わせた、あなたへの誓いから私たちは解かれます。」
彼女は「おことばどおりにしましょう」と言い、二人を送り出した。彼らは去り、彼女は窓に赤いひもを結んだ。


그 정탐꾼은 말합니다. 좋다. 우리를 살려주었으니 우리도 너희를 살려주겠다. 하지만 여기에 조건을 제시하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은 누가 라합이고 누가 라합의 가족인지 얼굴을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희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너희 집에 가족들을 다 모아 놔라. 그 집 안에 있으면 살겠지만 거기서 나가게 되면 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떠납니다.

자, 이제 라합은 비상입니다. 언제 여리고성이 무너질지 몰라요. 그러니까 아마도 정탐꾼이 떠난 다음날부터 라합은 여리고성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과 친인척들을 자기 집으로 집합을 시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세한 설명은 못할 것 아니에요. 괜히 모든 것을 다 털어놨다가 정보가 새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니라 여리고성 사람들한테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 저런 구실로 어떻게 해서든 설득을 해서 가족과 친족들을 라합의 집에 모아 놓았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예요. 그들이 언제 들어올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공격해올 때 이 집에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살려주겠다고는 말했지만, 언제 공격해올 것인지는 말을 안 해주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예, 그저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라합은 그래도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어땠을까요. 조금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면 극구 말렸을 것입니다. 지금 나가면 안 된다고, 이 집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붙잡았겠지요.

아니, 그러면 왜 안 되냐고 하면 뭐라고 해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합니다. 그리고 또 서로 싸움도 일어났을지도 몰라요. 아니, 왜 우리를 여기에 가둬 놓느냐. 이유를 말해줘야 될 것 아니냐. 하면서 그 중의 일부는 애원하는 라합을 뿌리치고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정탐꾼이 나가고 난 다음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까지 얼마나 걸렸을까요. 제가 여호수아서를 샅샅이 뒤지고 하나하나 단서를 찾으면서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대충 얼마나 됐을 것 같습니까. 라합이 정탐꾼을 도망가게 해주고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까지 성경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아무리 길어도 20일이 안 돼요. 대략 19일 정도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19일 동안만 참고 기다렸으면 되는데, 이를 참지 못하고 라합의 집에서 나가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 죽고 마는 것이지요.

그럼 그 19일 동안 라합의 집에 있으면 무슨 성령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고 그랬을까요. 글쎄요. 물론 사람들이 많이 묵을 수 있는 집이었으니까 집 자체를 본다면 좁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일가 친인척이 모두 모여서,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그것도 보름 이상이나 갇혀 있으니 얼마나 서로 예민해져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어쩌면 여기저기서 험한 소리도 나오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견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 6장 25절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しかし、遊女ラハブと、その一族と、彼女に連なるすべての者をヨシュアが生かしておいたので、彼女はイスラエルの中に住んで今日に至っている。エリコを偵察させようとしてヨシュアが送った使いたちを、彼女がかくまったからである。


그렇습니다.

라합만이 아니라 그 집에 끝까지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7편 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ダビデは告白しております。

詩篇23篇6節
まことに 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 いつくしみと恵みが 私を追って来るでしょう。 私はいつまでも 主の家に住まいます。

詩篇27篇4節
一つのことを私は主に願った。 それを私は求めている。 私のいのちの日の限り 主の家に住むことを。 主の麗(うるわ)しさに目を注ぎ その宮で思いを巡らすために。


우리가 거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에 거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맨날 교회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이 교회 건물입니까.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 주신 믿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집이며, 믿음과 말씀 안에 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私たちが住ま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どこでしょうか。そうです。それはまさしく主の家、神様の家に住ま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年がら年中教会の中で暮ら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主の家、神様の家とは教会という建物でしょうか。

いいえ。そうではなく、まさしく主がくださった信仰、主が下さったみ言葉こそが、本当の主の家、神様の家であり、信仰とみ言葉の内に住まわ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잠언 4장 27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이제 우리의 생각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고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箴言4章27節
右にも左にもそれ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足を悪から遠ざけよ。


これからは自分の考えで右や左にそれるのではなく、ただ主がくださった救いの約束を信じ、希望を持って待つことによって、遂には主から驚くべき救いを受けら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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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8회 구원의 약속 (1)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マルコの福音書16章19節
“主イエスは彼らに語った後(あと)、天に上げられ、神の右の座に着か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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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3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그 첫번째 시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내용은 좀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세 번으로 나누어서 이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은 한 가지 확인부터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는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 중에서도 확인해야 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선 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을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이상한 질문, 아마도 이런 질문을 여러분께서는 받아 보신 적도 없고, 생각해보신 적도 없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좀 드릴까 해요.


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께서는 몇 프로나 믿고 계십니까. 100프로요?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한 번 볼까요?

성경에는 네 복음서가 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아예 언급이 없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28장 18절~20절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18.イエスは近づいて来て、彼らにこう言われた。「わたしには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すべての権威が与えられています。
19.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20.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마태복음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언급이 없어요.


다음으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1장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ペテロに言われた。「わたしが来るときまで彼が生きるように、わたしが望んだとしても、あなたに何の関わりがありますか。あなたは、わたしに従いなさい。」

그러고는 역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두 복음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나올 게 아니냐. 하시겠지요.

예,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요.

일단 마가복음부터 볼까요?

오늘 본문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가복음 16장 19절인데, 가지고 계신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마가복음 16장 9절부터 마지막 20절까지 괄호가 쳐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냐 하면, 자,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성경은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성경은 아무리 오래된 자료라 하더라도 모두 다 사본이에요.

당시는 지금처럼 복사기나 카메라가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본이라고 하면 모두가 사람이 하나하나 손으로 베껴 쓴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본 제작에는 각별한 주의가 기울어져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수 백 년,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과정이다 보니 아무래도 사본에 따라서는 그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끔 괄호가 쳐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사본에 따라서 어떤 사본에는 적혀 있는데, 또 어떤 사본에는 안 적혀 있는 경우에는 괄호로 처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가복음 16장에 보시면 9절부터 20절까지 괄호가 쳐져 있지 않습니까.

이는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사본에 따라서는 적혀 있는 경우도 있고 안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에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누가복음은 어떨까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누가복음 24장 51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そして、祝福しながら彼らから離れて行き、天に上げられた。

祝福しておられるうちに、彼らを離れて[天にあげられた。](口語訳)

아하, 여기에는 분명히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겠네요.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입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핵심부분, [하늘로 올려지시니] [天にあげられた。]라는 부분이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또 괄호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역시 사본에 따라서는 이 누가복음 24장 51절 후반부에 기록된 <하늘로 올려지시니>[天にあげられた。]라는 부분이 안 적혀 있는 것도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렇게 보시면 어떻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네 개의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아예 언급이 없고, 그나마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괄호가 쳐져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본도 있다는 것이잖아요.

이 점을 들어서 누구는 예수님의 승천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점에 대해서 몇 프로나 믿으십니까.

이제 조금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こ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使徒たちが見ている間に上げられた。そして雲がイエスを包み、彼らの目には見えなくなった。

자, 여기에는 괄호도 없어요. 아주 선명하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여기저기 부분부분만 읽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전체를 다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는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 이는 100프로 사실이라는 점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지금부터 이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까 하는데, 오늘은 그 초점을 예수님이 아닌 그 제자들에게 맞추어 볼까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 장면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0절~11절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イエスが上って行かれるとき、使徒たちは天を見つめていた。すると見よ、白い衣を着た二人の人が、彼らのそばに立っていた。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특히 여기서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에 대해서입니다.


이 사도행전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올라가신 뒤에도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긴장한 채로 열중해서’ 보고 있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또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사도라고 해요.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심정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왔을 것 같습니까.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어쩌면 저는 이런 생각을 했을 지도 몰라요.

“아니, 자기 혼자 올라가면, 이제부터 우리 더러 어쩌라는 건데……”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않겠어요? 지난 3년 동안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다녔는데, 이 분만 따라다니면 그래도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군인들한테 잡히고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크게 낙담 했었는데, 세상에, 다시 살아나셨어요.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와, 이 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보다. 지금 보니까 이제 죽지도 않아. 완전 불사신이야. 이렇게 된다면 지금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고 있는 로마를 물리치는 게 문제겠어? 세계정복도 꿈이 아니야. 그러면 내 장래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솔직히 그런 꿈을 가질 수도 있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그럼 난 이제 갈게. 수고해” 마치 그러듯이 예수님은 또다시 그들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말 난감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일까요?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사도행전 1장 4절~5절
“4.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使徒たちと一緒にいるとき、イエスは彼らにこう命じられた。「エルサレムを離れないで、わたしから聞いた父の約束を待ちなさい。
ヨハネは水でバプテスマを授けましたが、あなたがたは間もなく、聖霊によるバプテスマを授けられるからです。」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데 가지 말고 성령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는 이미 전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분명히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으신 다음에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가만히 모여서 기도를 했나요?


요한복음 21장 2절~3절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シモン・ペテロ、デドモと呼ばれるトマス、ガリラヤのカナ出身のナタナエル、ゼベダイの子たち、そして、ほかに二人の弟子が同じところにいた。
シモン・ペテロが彼らに「私は漁に行く」と言った。すると、彼らは「私たちも一緒に行く」と言った。彼らは出て行って、小舟に乗り込んだが、その夜は何も捕れなかった。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래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다음 구절, 요한복음 21장 4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夜が明け始めていたころ、イエスは岸辺に立たれた。けれども弟子たちには、イエ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かった。


이제 예수님도 죽으시고 나도 뭘 해야 할지 모르니, 에라 원래 하던 고기잡이나 하자……하고 했더니만 그게 잘 되었다던가요? 아니요. 허탕만 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딱 걸렸죠.

예수님이 말씀은 안 하셨지만, 속으로 뭐라고 그러셨겠어요.

“얘들아, 너네 지금 뭐하고 있니?” 라고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또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또 들키면 이제는 변명의 여지도 없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어요.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고 하는데, 아니, 지금까지 그런 걸 경험해본 적도 없고, 성령을 받는 사람을 보지도 못한 마당에 무엇을 믿고 기다리란 말이에요.

저 같았으면 참으로 답답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기다리라고 하니까 기다려야죠.

사도행전 1장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そこで、使徒たちはオリーブという山からエルサレムに帰った。この山はエルサレムに近く、安息日に歩くことが許される道のりのところにあった。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는 감람원이라고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곳이 감람원이라고 해서, 지금 이 감람원에는 예수승천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락방(屋上の間)에 모여서 주님의 말씀대로 기다리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 전반부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そのころ、百二十人ほどの人々が一つになって集まっていたが、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그 다락방에는 백이십 명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신학자는 처음부터 120명 정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5장을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8절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私があなたがたに最も大切なこととして伝えたのは、私も受けたことであって、次のことです。キリストは、聖書に書いてあるとおりに、私たちの罪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
また、葬られたこと、また、聖書に書いてあるとおりに、三日目によみがえられたこと、
また、ケファに現れ、それから十二弟子に現れたことです。
その後(のち)、キリストは五百人以上の兄弟たちに同時に現れました。その中にはすでに眠った人も何人かいますが、大多数は今なお生き残っています。
その後(のち)、キリストはヤコブに現れ、それからすべての使徒たちに現れました。
そして最後に、月足らずで生まれた者のような私にも現れてくださいました。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500 여명에게 보이셨기 때문에 아마 이 때에도 처음에는 500 명 정도가 모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인원수가 점차 줄어서 120명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성경 기록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 여기서 또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그들은 얼마 동안이나 함께 모여서 지냈을까요.

더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얼마 후에는 정말로 성령님이 강림하시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얼마 후에 일어난 일일까요.

이는 성경 기록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도 제자들에게 보이셨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사십일 동안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40일이라고 하는 날짜를 고난을 받으신 날,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날부터 계산할 것인지, 아니면 부활하신 날부터 계산할 것인지에 대해서 주장이 갈리긴 합니다만, 문맥상으로 본다면 후자가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신 것은 부활한 이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날부터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셨기 때문에 십자가부터 계산하면 42일만에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마가복음 14장 12절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種なしパンの祭りの最初の日、すなわち、過越の子羊を屠る日、弟子たちはイエスに言った。「過越の食事ができるように、私たちは、どこへ行って用意をしましょうか。」

본래 유월절에는 양을 먹게 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날에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그 다음 날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셔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사흘 만에 살아나시게 되었는데,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부활하시고 40일 후, 십자가에 달리신 날부터는 42일 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난 것은 언제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 2장 1절~4절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五旬節(ごじゅんせつ)の日になって、皆が同じ場所に集まっていた。
すると天から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たような響きが起こり、彼らが座っていた家全体に響き渡った。
また、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て現れ、一人ひとりの上にとどまった。
すると皆が聖霊に満たされ、御霊が語らせるままに、他国のいろいろなことばで話し始めた。


예, 바로 오순절날에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무교절 즉 유월절부터 계산해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흐름을 정리하자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오르시기까지 42일,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유월절부터 50일이 되는 날에 성령님이 오셨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고는 며칠 후에 성령님이 오셨다는 계산이 됩니까.

그렇죠. 8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8일 만에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제자들에게 보이셨다고 하는 40일을 십자가에 달리신 날부터 계산을 한다고 해도 승천하신 날부터 성령강림까지 10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응답이 늦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당시에도 처음에는 500명이 모여 있었으나 점점 그 수가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120명까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하지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이라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성령님이 오신다고 하면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신다고 하면 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지체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뜻은, 단순히 빨리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오셔야 할 바로 그 때에 정확하게 오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へブル人への手紙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聖霊が授けられるとおっしゃったら、授けられます。そして、主が来られるとおっしゃったら、来られる方だ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ここで、遅れることはない、とおっしゃってるのは、ただ単に早く来られ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来られるべきその時に、間違いなく来られるという意味なのであります。

오늘은 <구원의 약속>에 대한 첫 시간입니다. 다음 주도 오늘에 이어서 구원의 약속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만, 이 구원은 단순히 말씀만으로 하신 것이 아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여주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그 피값으로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낙심이나 좌절이나 절망이 아닌 도리어 소망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今日は「救いの約束」に関する1回目の時間でありまして、来週も引き続き「救いの約束」についてもう少し深く掘り下げ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が、この「救い」というのは単に言葉だけで話されたのではなく、主が十字架に架けられ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に見せてくださった約束だ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これからは主が私たちに、その血の代価によって下された「救いの約束」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落胆や挫折や絶望ではなく、むしろ希望をもって主と共に歩まれ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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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7회 세 고을의 가르침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24절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マタイの福音書11章20節~24節
“20.それからイエスは、ご自分が力あるわざを数多く行った町々を責め始められた。彼らが悔い改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
21.「ああ、コラジン。ああ、ベツサイダ。おまえたちの間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ツロとシドンで行われていたら、彼らはとうの昔に粗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ていたことだろう。
22.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ツロとシドンのほうが、おまえたち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23.カペナウム、おまえ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があるだろうか。よみにまで落とされるのだ。おまえのうち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ソドムで行われていたら、ソドムは今日まで残っていたことだろう。
24.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ソドムの地のほうが、おまえ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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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2번째 시간으로서 “세 고을의 가르침” 三つの町の教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약 3년에 걸친 공생애 기간 중에 이스라엘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셨으며, 죽은 자도 살리시는 많은 역사를 감당하셨습니다.

21장까지 있는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イエスが行われたことは、ほかにもたくさんある。その一つ一つを書き記すなら、世界もその書かれた書物を収められないと、私は思う。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신 일이 얼마나 많냐 하면, 이를 모두 기록하게 될 경우 이 세상에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도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고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 중 대표적인 곳이 첫째는 고라신(コラジン), 둘째는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셋째는 가버나움(カペナウム)입니다.

먼저 고라신이라는 곳은 성경에 딱 두 번만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21절이고 또 하나는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다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입니다.

다음으로 벳새다(ベツサイダ)는 몇 번 등장하는데 요한복음 1장 44절에 의하면 여기는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역시 사도 빌립(ピリポ)의 고향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버나움(カペナウム)입니다. 이 곳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합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13절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イエスはヨハネが捕らえられたと聞いて、ガリラヤに退かれた。
そしてナザレを離れ、ゼブルンとナフタリの地方にある、湖のほとりの町カペナウムに来て住まわれた。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 계시다가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사시기도 하셨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13절에서는 백부장(百人隊長)의 하인(しもべ)을 치료하셨고, 14절~15절에서는 베드로의 장모도 고치셨습니다.

이 외에도 마태복음 8장 16절에 의하면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0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それからイエスは、ご自分が力あるわざを数多く行った町々を責め始められた。彼らが悔い改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

여기에 나오는 <권능>이라는 말은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헬라어로 <뒤나미스> 또는 <두나미스>라고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면 <두나미스>라고 붙여진 교회나 교회시설 이름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고라신(コラジン),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하나님의 크나큰 권능을 행하셨어요. 그것도 상당히 많이 행한 곳이 바로 이 도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상당히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는 단순히 비교하자면 다른 도시들보다도 많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셨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도시에서 회개와 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1절~24절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1.「ああ、コラジン。ああ、ベツサイダ。おまえたちの間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ツロとシドンで行われていたら、彼らはとうの昔に粗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ていたことだろう。
22.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ツロとシドンのほうが、おまえたち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23.カペナウム、おまえが天に上げられることがあるだろうか。よみにまで落とされるのだ。おまえのうちで行われた力あるわざがソドムで行われていたら、ソドムは今日まで残っていたことだろう。
24.おまえたちに言う。さばきの日には、ソドムの地のほうが、おまえよりもさばきに耐えやすいのだ。」”

이 말씀에 의하면 고라신(コラジン)과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도 두나미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두로와 시돈(ツロとシドン)에 대한 심판은 정확하게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소돔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9장에 의하면 죄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9장 24절~25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예전에 어느 기독교 방송에서 과거에 소돔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 아무리 오래 되더라도 거기에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흔적이라도 있는 것이 보통인데, 거기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허허벌판이에요. 거기에 큰 도시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 땅 표면에 보면 유황성분이 검출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 지질학자의 말에 의하면, 보통 땅 표면에서 유황이 검출될 경우에는 땅 표면 밑에도 유황성분이 있어서, 그 성분이 땅 위에까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그곳의 경우를 보면 땅속에는 전혀 유황성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땅 표면에서만 유황이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는 성경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본래 그 지역에는 지질학적으로 유황성분이 없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유황이 쏟아졌기 때문에 지금도 유황성분이 검출된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왜 유황만 쏟아진 것이 아니라 유황과 함께 불이 쏟아졌을까 하는 것인데, 이는 간단합니다. 유황만 쏟아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불이 붙게 되면 크나큰 화재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화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화약 가루만 뿌린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여기에 불이 붙게 되면 큰 폭발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역시 어마어마한 양의 유황과 불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모두 삼켜버리고는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소돔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13장 13절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ところが、ソドムの人々は邪悪で、主に対して甚だしく罪深い者たちであった。

소돔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큰 죄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를 소돔과 고모라로 보내셔서 구원 받을 기회나 회개할 기회도 주신 적도 없었고 경고를 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만약에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행했던 두나미스, 하나님의 능력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만약에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소돔에서 보여주었더라면 소돔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께로 돌아왔을 것이고, 그럼으로 인해서 소돔은 멸망을 면하고 지금까지 있었을 것이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고라신(コラジン)과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은 지금은 모두 멸망하고 고대 유적들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에 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지금 고라신(コラジン)과 벳새다(ベツサイダ), 그리고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 사역을 하신 분이 누구세요? 그렇죠. 예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 의하면 베드로가 한 번 설교를 했더니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세 고을은 어땠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6절~17절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6.この時代は何にたとえたらよいでしょうか。広場に座って、ほかの子どもたちにこう呼びかけている子どもたちのようです。
17.『笛を吹いてあげたのに君たちは踊らなかった。弔いの歌を歌ってあげたのに胸をたたいて悲しまなかった。』


고라신(コラジン)이나 벳새다(ベツサイダ)나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는 마치 이 말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많은 권능을 나타내셨지만, 결국 회개도 안 일어나고 부흥도 안 일어났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실패하신 것인가요. 다른 곳은 몰라도 고라신(コラジン)이나 벳새다(ベツサイダ)나 가버나움(カペナウム)에서의 예수님의 선교는 성공하지 못한 실패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고라신(コラジン)이나 벳새다(ベツサイダ)나 가버나움(カペナウム)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명을 받아 선교사역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한다면, 역시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그 세 고을로 가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세 고을에 부흥을 일으키지 못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혼이 나야 하는 쪽은 불쌍한 세 고을 사람들이 아니라, 선교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예수님 아니겠습니까.

자,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황당한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시면 앞서 말씀드린 소돔과 고모라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멸망시켰던 일입니다.


신명기 20장 16절~18절
“16.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17.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次の民の町々では、息のある者を一人も生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
すなわち、ヒッタイト人(じん)、アモリ人、カナン人、ペリジ人、ヒビ人、エブス人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られたとおり必ず聖絶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は、彼らが、その神々に行っていたすべての忌み嫌うべきことをするようにあなたがたに教え、あなたがたが、あなたがたの神、主の前に罪ある者と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이와 같은 무서운 명령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절~4절
“1.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4.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主は私を遣わして、あなたに油を注ぎ、主の民イスラエルの王とされた。今、主の言われることを聞きなさい。
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上って来る途中で、アマレクがイスラエルに対して行ったことを覚えている。
今、行ってアマレクを討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しなさい。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幼子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しなさい。』」
サウルは兵を呼び集めた。テライムで彼らを数えると、歩兵が二十万、ユダの兵が一万であった。

예전에 저는 누구한테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가나안 사람들이나 아말렉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 아니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도 사랑과 자비로 살려줘야지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버리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셨어요. 노아의 홍수 때를 보십시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보았을 때에 지구상에는 지금보다도 인구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서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고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명 만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나안 사람들도 죽이고, 아말렉 사람들도 죽이라고 하신 하나님, 더 나아가 노아의 홍수로 전세계 거의 모든 인류를 멸망시키셨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한 하나님, 무자비한 하나님이십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고 아말렉 사람들을 죽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보이시고, 그리고 거기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자, 주일학교 때의 질문을 한 번 살펴볼까요. 성경은 누구 읽으라고 쓰여진 책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 읽으라고, 더 구체적으로는 나 읽으라고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심판하신 내용이 성경에 적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 하나를 살리려고, 어떻게 해서든 나 하나를 살려 보시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가나안 사람들이나 아말렉 사람들이 문제예요?

아니, 노아 때 멸망한 전세계 사람들이 문제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채찍을 맞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아무리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이 온 천하 만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피 한 방울보다 귀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한 방울 정도가 아닌 모든 피를 흘려 주셨으며, 이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것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지요. <교사>라고 하면 <나도 저 사람 같이 되어야지>하고 내가 본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반면교사라고 한다면 반대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배운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논어에 보시면 삼인행 필유아사……라는 말도 그렇지요.

세 명이 가고 있으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뜻인데, 스승이라고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으로부터 반면교사 식으로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世の中には反面教師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教師」といえば「私もあの人のようになりたい」というように見習いたいという人と言えますが、「反面教師」というと、逆に「私はあの人のようにはならないようにしよう」という意味で学びがあ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論語に出てくる「三人行けば必ず我が師有り」もそうです。

人が三人いれば、その中には必ず自分の師となる人物がいるということですが、師と言っても必ずしも優れた人物でなくても、その人から反面教師として学ぶべき点があるという意味だと言えます。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コラジンやベツサイダ、そしてカペナウムはイエス様を受け入れず、結局裁きを受けてしまいました。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イエス様の働きが失敗に終わった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

むしろ、私たちが進むべき道、私たちが福音を受け入れ、私たちが悔い改めるということがどれ程大事なことなのかを悟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히브리서 10장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제 우리는 고라신이나 벳새다나 가버나움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보혈에 힘입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へブル人への手紙10章19節
「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私たちはイエスの血によって大胆に聖所に入ることができます。」

これから私たちは、コラジンやベツサイダ、そしてカペナウムのようになってはな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手遅れになる前に悔い改め、そして主に従うことによって、イエス様の血によって大胆に主が許された救いに至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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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6회 이루어지는 삶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6월 2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ヨハネの福音書15章7節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はかなえ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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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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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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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21번째 시간으로서 “이루어지는 삶” かなえられる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특히 성인이 되어서 믿음을 갖게 된다면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 아니겠습니까. 내 질병이 낫고 내가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지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게 나쁜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병이 낫기 원하는 것이 어떻게 나쁠 수가 있으며, 그리고 또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나쁠 수가 있겠습니까. 질병이 축복이 아니듯 가난도 역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계시면 모든 질병이 치유 받고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 넉넉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말이에요. 이를 믿기는 하는데, 실제로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맨날 교회에 다니고 기도도 하는데 여전히 질병은 그대로 있고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오늘 말씀에 보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해요. 그런데 아무리 구해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렇다면 성경은 틀린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쓰여진 2천년 전에는 그랬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두꺼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어제와 오늘과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도제목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특별히 믿음이 좋은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일단 기도를 많이 하시게 되겠지요. 누구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기도를 하신다고 하는데,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를 하실 수 있는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예배도 많이 드립니다. 한국은 특히 교회에서 예배를 많이 드리지요?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새벽예배 수요예배 철야예배 등 많은 예배가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래도 안 되면 금식을 하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하루 금식, 사흘 금식, 또는 그 이상도 금식을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 보면 40일 금식을 하셨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니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비판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금식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것,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내가 기도를 많이 했어요. 예배도 많이 드렸어요. 그리고 금식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예, 응답을 받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가 부족해서? 예배가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러면 답은 쉽겠네요. 내 모든 생업, 학교도 직장도 가정도 모두 포기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금식을 하면서 40일이든 50일이든 버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은 본인에게 한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해요.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아, 저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을 안 해서 저렇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좀 해보신 분들은 이런 말씀, 자신이 누구한테서 직접 듣지는 않더라도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한다는 사실을 들으신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사실입니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이 부족해서?

사실 이와 같은 말이, 무슨 신앙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귀한 충고처럼 여기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말은 대부분이 상대방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의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아니면 금식이 부족해서 그 사람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믿고 계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예,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먼저 기도하고 내가 먼저 금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그게 진정한 이웃 사랑 아니겠습니까. 상대방더러 기도해라 금식해라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가 부족하고 금식이 부족한 것이 정말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금식하고 기도해주면 될 것 아니에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와 같은 분들? 기도가 부족한 내 이웃을 위해서 금식까지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40년 넘게 해왔는데 그런 분들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반면에 상대방더러 당신은 기도가 부족해서 믿음이 부족해서 금식이 부족해서 응답을 못 받는다고 충고하는 말씀? 제 주위에서 수도 없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상대방에게 기도해라 금식해라 하는 말씀은 이는 충고가 아니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 그럼 처음으로 돌아와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왜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일까요.

일본에 보면 경찰이 수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격언들이 몇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현장 백번”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냐 하면, 예를 들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범인을 잡기 위해서 아무리 수사를 해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범행현장으로 것입니다. 사건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반드시 사건 현장에 있다. 처음에는 그것을 놓칠 수도 있으니 100번이라도 현장을 찾게 된다면 반드시 사건의 실마리,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의 격언입니다.

이를 우리 신앙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신앙에 있어서의 100번이라도 더 찾아야 할 현장은 어디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결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성경에는 분명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현장을 100번이라도 찾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럼 그 말씀이 적혀 있는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5장 7절을 다시 한 번 봐야 하겠지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에서 경찰이나 탐정이 수사할 때 보면 돋보기 같은 것을 들고 보는 경우도 있잖아요? 자,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それはかなえられます。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어떻습니까. 분명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리라” (何でも欲しいものを求めれば、かなえられます。) 라는 말씀은 있습니다만, 이것 만이 아니지요? 여기에는 분명히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면(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のことばがあなたがた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이라는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우리가 원한다 하더라도 이 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나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 하더라도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에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기도도 좋고 금식도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면 이는 말짱 헛것입니다. 그야말로 공허한 믿음, 자칫하면 미신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나 세워놓고 거기에 대고 절하면서 기도한다면 그게 올바른 믿음입니까. 성경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그저 손에 들고 흔들면서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고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나 성경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해요? 예, 물론 돈을 가져가야 하겠지요. 하지만 돈만 가져가면 됩니까.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다고 해요. 돈도 넉넉하게 가져갔습니다. 이제 종업원이 메뉴를 가져 오면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요. 주위 사람들은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 테이블 위에는 물 한잔도 없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오겠지 하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결국 가게 영업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식당은 뷔페식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먹을 것을 가져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계속 기다리고 있기만 하니까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밥 한 숟가락 먹지도 못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그저 웃자고 한 소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이야기처럼 아무리 좋은 식당에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갔다 하더라도 그 식당의 방식을 모르면 음식을 못 먹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금식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방식,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을 모르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이를 근거로 해서 기도를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성경도 모르고 밤낮 기도를 해봐야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 하나를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사야 60장 22절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最も小さい者も軍団となり、最も弱い者も強国となる。わたしは主。時が来れば、速やかにそれをする。」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 자세히 보시면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신약 베드로전서에도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일본어 성경에 보니까 베드로전서에서의 “때가 되면”이라는 말씀을 “가장 좋을 때” “가장 적절할 때”라고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 이는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드릴까요? 이 ‘때’는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정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면 바로 이 “때”를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이는 바로 대단히 힘들고 고단해지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응답은 간혹 우리가 원하는 바와 다르게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모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그 백성들 대부분이 포로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빨리 바벨론에서 풀려나서 내 나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도제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응답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4절~10절
“4.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エレミヤ書29章4節~10節
「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エルサレムからバビロンへわたしが引いて行かせたすべての捕囚の民に。
家を建てて住み、果樹園を造って、その実を食べよ。
妻を迎えて、息子、娘を生み、あなたがたの息子には妻を迎え、娘を嫁がせて、息子、娘を産ませ、そこで増えよ。減ってはならない。
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引いて行かせた、その町の平安を求め、その町のために主に祈れ。その町の平安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平安を得ることになるのだから。』
まことに、イスラエルの神、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あなたがたのうちにいる預言者たちや、占い師たちにごまかされるな。ま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夢に聞き従ってはならない。
なぜなら、彼らはわたしの名を使って、偽りをあなたがたに預言しているからだ。わたしは彼らを遣わしていない──主のことば。』
まことに、主はこう言われる。『バビロンに七十年が満ちるころ、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顧み、あなたがたにいつくしみの約束を果たして、あなたがたをこの場所に帰らせる。


이게 뭐예요? 기껏 내 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응답이 뭐라고요? 예, 그냥 거기서 결혼하고 애 낳고 살라는 거예요.

다른 선지자들이나 점쟁이들이 아, 이제 곧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말을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세요? 예, 70년이 차면 너희를 돌려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때를 누가 정하셨죠? 예, 하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해 우리의 고집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에 맞는 기도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분은 아, 주님의 뜻과 달리 내 기도로 응답을 받은 적이 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캄캄한 밤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침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어요. 주여, 어서 아침이 되게 하옵소서……. 속히 아침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도 아침이 안 돼요.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몇 시간이고 기도했습니다. 배가 고파도 금식하면서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점점 날이 밝아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동쪽에서 환하게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를 보고 그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제가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간증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응답 받았다고 하면서.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안 해서라고, 자기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장담합니다.

자, 이 사람의 주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명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현명한 것이 아닌, 대단히 피곤한 신앙생활, 미련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이 밝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기도를 해서예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아침이 밝은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서 5장 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るために、互いに罪を言い表し、互いのために祈りなさい。正しい人の祈りは、働くと大きな力があります。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모든 생활을 다 포기하고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기도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나서 2장에서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상황에서 기도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대단히 많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알아가야 합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しかし私たちがこの世で生きている間は、やるべきことがたくさんあります。主に仕え、隣人に仕えるためにやるべきことがどれほどたくさんあるでしょうか。

そして、なにより、主の心を学び、知っ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ホセア書6章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성경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힘써 주님을 알자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 오류가 없이 완전하고도 유일하신 하나님 말씀이신 성경말씀을 힘써 알아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聖書は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いようと記されております。

それでは、どのようにすれば主を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まさしく私たちに下さった、誤りのない、完全でかつ、唯一の神様のみ言葉である聖書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이에요.

이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이암아,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私たちが主を知ることができれば、主が私たちに最も望まれている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主を知るためには、そうです、聖書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れからは、主の中にとどまり、主のみ言葉を正しく理解す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が主に求めるとき、かなえられる人生となりますよう、主の御名においてお祈り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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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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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5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 이루리라선교회
2024년 5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선교회
www.IRURIRA.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절~7절
“5.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ヨハネの福音書 11章 5節~7節
“5.イエスはマルタとその姉妹とラザロを愛しておられた。
6.しかし、イエスはラザロが病んでいると聞いてからも、そのときいた場所に二日とどまられた。
7.それからイエスは、「もう一度ユダヤに行こう」と弟子たちに言わ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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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찾으러 오시는 주님” 捜しに来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잃어버린 양이라는 비유로서,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양 한 마리가 안 보여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목자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산 한 가운데인데 만일 자기가 없으면 이 양떼들이 흩어질 지도 모르고, 뿐만 아니라 맹수들이 와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목자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귀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둔 채로 목자는 그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본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누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이지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는 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기서 길을 잃은 양에 대해서 우선 한 번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 왜 길을 잃었을까요. 어떤 분은 양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은 어린 양……그래서 그림 같은 것도 보면 길을 잃은 양은 항상 새끼 양으로 그려지는 것을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것이 어린 양이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은 오늘 마태복음 18장 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옵니다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어디를 보더라도 그저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볼까요. 이 양, 도대체 왜 길을 잃었던 것일까요.

이는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는데, 이를 부정하실 분은 아마도 안 계시지 않을까 해요. 이 양은 왜 길을 잃었을까 하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좀 모자라서입니다. 다른 양들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갑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좀 부족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무슨 어린 애들만 고집이 세나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니,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다가 큰 일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에 보더라도 고령자분들의 교통사고가 많이 늘어나서, 정말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잘 못 밟아서 사람들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군마처럼 자동차가 없으면 정말 생활하기 어려운 곳에 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대중교통이 많이 있는 곳인데도, 이제 운전을 하지 마시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시라고 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운전을 얼마나 잘 하는 줄 아냐고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그만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길을 잃은 양은 비단 어린 양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과, 조오금 부족한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아니, 그냥 아흔아홉과 하나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똘똘한 한 마리 양과 부족한 아흔아홉을 비교하는 것도 아닌, 똘똘한 아흔아홉과 여러가지로 조금 부족한 한 마리 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비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거 맨날 모자라서 말도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양이라면 오히려 없어지는 편이 속히 편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그 양 한 놈 때문에 속을 썩였는데, 에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그거 한 놈 없어져도 여기 아흔아홉만 잘 키우면 또 매년 새끼는 태어나니 별 걱정이 있겠나.

사실 이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전혀 반대로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은 내버려둔 채로, 그 좀 모자라고, 그런 주제에 고집은 세서 맨날 일만 벌이고 사고만 치는, 그래서 이번에도 길을 잃고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고 다니는 양, 똘똘한 양이라면 어쩌면 자기가 길을 찾아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 좀 모자란 양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국 이 목자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 양을 찾아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잃을 양이 누구라고요? 예, 아, 그때 그 사람, 맞아, 아 그 때 저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좀 모자랄 뿐이라면 길을 잃지도 않아요. 오히려 겁이 많아서 목자나 양한테 꼭 붙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딱한 양은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고집도 세요. 그래서 그냥 자기 멋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맨날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도 내고, 여기저기 부딪쳐서 머리도 깨지고 무릎도 성할 날이 없는, 그런 양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는 우리가 똘똘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까.

역시 주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내가 좀 잘한 것이 있으니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으니까 나를 선택해주신 것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반복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제발 그런 황당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神は私たちを救い、また、聖なる招きをもって召してくださいましたが、それは私たちの働きによるのではなく、ご自分の計画と恵みによるものでした。この恵みは、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私たちに永遠の昔に与えら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힘이 셌기 때문입니까. 그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고분고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까.



신명기 7장 6절~8절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主が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を選ばれたのは、あなたがたがどの民よりも数が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事実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のうちで最も数が少なかった。
しかし、主があなたがたを愛されたから、またあなたがたの父祖たちに誓った誓いを守られたから、主は力強い御手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導き出し、奴隷の家から、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手からあなたを贖い出されたのである。


우리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잖아요. 맨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난리를 치고, 맨날 이걸 달라 저걸 달라며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살만 하면 뭘 해요? 예,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 보면 황소 모양을 세워놓고 거기에다가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예로 살면서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똑같이 거기에 대고 숭배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거기에 있는 온갖 잡신들, 그것도 모자라서 외국에서 건너온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경고를 하신 바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3절~26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気をつけて、あなたがたの神、主があなたがたと結ばれた契約を忘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またあなたの神、主の命令に背いて、いかなる形の彫像も造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みの神である。
あなたが子や孫をもうけ、あなたがたがその地に長く住むうちに堕落して、何かの形に刻んだ像を造り、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御怒りを引き起こすようなことがあれば、
私は今日、次のことで、あなたがたに対して天と地を証人に立てる。あなたがたは、ヨルダン川を渡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その地から追われ、たちまち滅び失せる。そこで、あなたがたは長く生きるどころか、すっかり根絶やしにされる。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놨는데도 허사였습니다. 맨날 말을 안 듣고 우상숭배를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맨날 일을 저지르고 사고를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는, 그야말로 좀 모자란 길 잃은 양과도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때로는 경책하시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신 이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도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인도해 내셨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분은 좀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이면 믿음의 조상이요, 자기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그와 같은 의인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도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로마서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때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등장은 사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상당히 생뚱맞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바로 앞장인 11장에서도 그 때까지는 이름이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착한 일을 했다거나 좋은 일을 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없어요. 사실 좀 막무가내입니다.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명령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이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려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거기서 그의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기다려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그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사랑,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이 살펴 본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는, 언뜻 보면 우리가 신앙을 갖기 전,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를 때에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불러 주셔서 이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이해를 하시게 되지요.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양이 될 염려가 없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좀 모자라서 때로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와 같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은 초신자 딱지를 뗀 지 오래된 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우리가 뭐 동물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있지요?

우선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자기가 알아서 풀을 찾아 먹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사실 그렇게 양이 똘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그리고 먹이를 찾기 위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러니 일일이 목자가 그 양떼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먹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을 친다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양을 칠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당시 사울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러니까 양 주위에는 항상 이와 같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 내가 지금 길을 잃었어요. 언제 사자나 곰이 와서 나를 공격할지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당장 근육을 키워서 그런 맹수들이 공격해와도 이길 수 있도록 훈련을 해요? 내가 양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헤집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점점 더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고, 해는 떨어지고 배도 고파지고, 체력은 더 떨어져서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그러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인생을 다 포기해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오늘 말씀처럼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와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틀림없이 나를 찾아와 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私は切に 主を待ち望んだ。 主は私に耳を傾け 助けを求める叫びを聞いてくださった。

잠언 8장 34절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레미야애가 3장 25절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기다림이 아니라, 마치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해 나아가면서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이 기다림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무엇을 안 하는 것이 기다림이냐 하면, 바로 낙심을 안 하고, 포기를 안 하고, 좌절을 안 하고 절망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다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의 문화청 청장도 지낸 적이 있는 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 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늦은 밤에 일본 전철 역에서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표를 사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막차가 걱정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역무원에게 문의를 했는데, 그 때 역무원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여기서 “노조미”라고 하는 말은, “희망” 또는 “소망”이라는 뜻이 있고, “히카리”는 빛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를 직역을 하면, 소망은 없지만 빛은 있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외국 사람이 들으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겠습니다만, 이 대화가 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노조미’나 ‘히카리’는 사실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KTX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은 신칸센 종류가 많아서 이름도 다양하거든요.

그러니까 역무원은 단순히 신칸센 노조미는 막차가 없지만 신칸센 히카리는 아직 있다는 뜻으로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라고 말한 것인데, 이게 듣기에 따라서는 “소망은 없으나 빛은 있습니다”로도 들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심리학자는, 물론 그 역무원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 뜻도 알았지만, 그보다도, 그래, 이 세상 소망은 끊어지더라도(失っても) 하늘에서 비치는 빛은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대단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바울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바울로 하여금 오직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빛으로 친히 우리가 있는 이 낮은 땅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수천 수만 마리 양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다 내팽겨 치고서라도,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오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져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そうです。主は光として来られました。 私たちが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自ら私たちのいる低いところまで下ら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皆さん、道に迷っておられますか。苦しみと苦難のただ中におられますか。大丈夫です。主が来られます。九十九匹の羊どころか、何千何万の羊であろうともすべてを山に残し、あなた一人を助けるために走って来られる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この世においての望みを失っても、光として来られた主を待ち望み、頼りさえすれば私たちは生きられます。勝利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제 아무리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소망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いくら人間的、世俗的な望みを失っても、ただ主のみを頼り、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るため、道に迷っている私たちの捜しに来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そして待ち望むことによって、不安と落胆と挫折と絶望を振り払い、光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とともに勝利す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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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44회 찾으러 오시는 주님 - 기린선교회
2024년 5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14절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マタイの福音書 18章 12節~14節
“12.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ある人に羊が百匹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
13.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その羊を見つけたなら、その人は、迷わなかった九十九匹の羊以上にこの一匹を喜びます。
14.このように、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が滅びることは、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のみこころ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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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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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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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찾으러 오시는 주님” 捜しに来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잃어버린 양이라는 비유로서, 대단히 유명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양 한 마리가 안 보여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목자는 지금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둔 채,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곳은 산 한 가운데인데 만일 자기가 없으면 이 양떼들이 흩어질 지도 모르고, 뿐만 아니라 맹수들이 와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목자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귀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둔 채로 목자는 그 길을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본다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누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길을 잃은 양이라는 것이지요.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우리이기 때문에, 다른 희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보기에 따라서는 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 여기서 길을 잃은 양에 대해서 우선 한 번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양, 왜 길을 잃었을까요. 어떤 분은 양이 어렸기 때문이라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길을 잃은 어린 양……그래서 그림 같은 것도 보면 길을 잃은 양은 항상 새끼 양으로 그려지는 것을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것이 어린 양이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말씀은 오늘 마태복음 18장 만이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에도 나옵니다만,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어디를 보더라도 그저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어린 양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볼까요. 이 양, 도대체 왜 길을 잃었던 것일까요.

이는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는데, 이를 부정하실 분은 아마도 안 계시지 않을까 해요. 이 양은 왜 길을 잃었을까 하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좀 모자라서입니다. 다른 양들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잘 따라갑니다. 그러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뭐예요? 예, 좀 부족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가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마는 것이지요.

사람들도 그렇잖아요. 무슨 어린 애들만 고집이 세나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아니, 거기로 가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다가 큰 일이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본에 보더라도 고령자분들의 교통사고가 많이 늘어나서, 정말 한 달에 몇 번이나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잘 못 밟아서 사람들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군마처럼 자동차가 없으면 정말 생활하기 어려운 곳에 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대중교통이 많이 있는 곳인데도, 이제 운전을 하지 마시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시라고 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운전을 얼마나 잘 하는 줄 아냐고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그만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길을 잃은 양은 비단 어린 양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과, 조오금 부족한 한 마리 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아니, 그냥 아흔아홉과 하나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똘똘한 한 마리 양과 부족한 아흔아홉을 비교하는 것도 아닌, 똘똘한 아흔아홉과 여러가지로 조금 부족한 한 마리 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비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거 맨날 모자라서 말도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양이라면 오히려 없어지는 편이 속히 편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그 양 한 놈 때문에 속을 썩였는데, 에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 그거 한 놈 없어져도 여기 아흔아홉만 잘 키우면 또 매년 새끼는 태어나니 별 걱정이 있겠나.

사실 이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전혀 반대로 똘똘한 아흔아홉 마리 양은 내버려둔 채로, 그 좀 모자라고, 그런 주제에 고집은 세서 맨날 일만 벌이고 사고만 치는, 그래서 이번에도 길을 잃고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고 다니는 양, 똘똘한 양이라면 어쩌면 자기가 길을 찾아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 좀 모자란 양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결국 이 목자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서 양을 찾아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잃을 양이 누구라고요? 예, 아, 그때 그 사람, 맞아, 아 그 때 저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직히 좀 모자랄 뿐이라면 길을 잃지도 않아요. 오히려 겁이 많아서 목자나 양한테 꼭 붙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딱한 양은 모자랄 뿐만 아니라 고집도 세요. 그래서 그냥 자기 멋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맨날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도 내고, 여기저기 부딪쳐서 머리도 깨지고 무릎도 성할 날이 없는, 그런 양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우리는 우리가 똘똘해서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까.

역시 주님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셔.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내가 좀 잘한 것이 있으니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으니까 나를 선택해주신 것 아니겠어? 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반복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제발 그런 황당한 소리 좀 그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神は私たちを救い、また、聖なる招きをもって召してくださいましたが、それは私たちの働きによるのではなく、ご自分の計画と恵みによるものでした。この恵みは、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私たちに永遠の昔に与えら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구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힘이 셌기 때문입니까. 그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고분고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입니까.



신명기 7장 6절~8절
“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聖なる民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は地の面のあらゆる民の中からあなたを選んで、ご自分の宝の民とされた。
主が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を選ばれたのは、あなたがたがどの民よりも数が多かったからではない。事実あなたがたは、あらゆる民のうちで最も数が少なかった。
しかし、主があなたがたを愛されたから、またあなたがたの父祖たちに誓った誓いを守られたから、主は力強い御手をもってあなたがたを導き出し、奴隷の家から、エジプトの王ファラオの手からあなたを贖い出されたのである。


우리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잖아요. 맨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난리를 치고, 맨날 이걸 달라 저걸 달라며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살만 하면 뭘 해요? 예,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에 보면 황소 모양을 세워놓고 거기에다가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예로 살면서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똑같이 거기에 대고 숭배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거기에 있는 온갖 잡신들, 그것도 모자라서 외국에서 건너온 우상들을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경고를 하신 바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3절~26절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26.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気をつけて、あなたがたの神、主があなたがたと結ばれた契約を忘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またあなたの神、主の命令に背いて、いかなる形の彫像も造ることがないようにしなさい。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みの神である。
あなたが子や孫をもうけ、あなたがたがその地に長く住むうちに堕落して、何かの形に刻んだ像を造り、あなたの神、主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い、御怒りを引き起こすようなことがあれば、
私は今日、次のことで、あなたがたに対して天と地を証人に立てる。あなたがたは、ヨルダン川を渡って所有しようとしているその地から追われ、たちまち滅び失せる。そこで、あなたがたは長く生きるどころか、すっかり根絶やしにされる。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켜놨는데도 허사였습니다. 맨날 말을 안 듣고 우상숭배를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맨날 일을 저지르고 사고를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는, 그야말로 좀 모자란 길 잃은 양과도 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때로는 경책하시고 그리고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신 이유,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을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자, 이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도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인도해 내셨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어떤 분은 좀 의아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이면 믿음의 조상이요, 자기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그와 같은 의인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도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도 사랑하시게 된 것이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로마서 말씀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함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때가 되어서야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등장은 사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상당히 생뚱맞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바로 앞장인 11장에서도 그 때까지는 이름이 아브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착한 일을 했다거나 좋은 일을 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없어요. 사실 좀 막무가내입니다.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명령을 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물론 그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기껏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서 이 땅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뭄이 들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버려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잖아요. 거기서 그의 아내 사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기다려서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데, 이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셨던 것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의 열두 아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제 그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사랑,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이 살펴 본다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는, 언뜻 보면 우리가 신앙을 갖기 전, 우리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를 때에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불러 주셔서 이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이해를 하시게 되지요.

아니,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로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은 양이 될 염려가 없습니까.

사실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좀 모자라서 때로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와 같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은 초신자 딱지를 뗀 지 오래된 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로운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 우리가 뭐 동물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알 수 있는 것은 있지요?

우선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자기가 알아서 풀을 찾아 먹을 수 있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만, 사실 그렇게 양이 똘똘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그리고 먹이를 찾기 위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러니 일일이 목자가 그 양떼들을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서 먹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양을 친다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양을 칠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당시 사울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러니까 양 주위에는 항상 이와 같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자, 내가 지금 길을 잃었어요. 언제 사자나 곰이 와서 나를 공격할지 몰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당장 근육을 키워서 그런 맹수들이 공격해와도 이길 수 있도록 훈련을 해요? 내가 양인데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여기저기 닥치는대로 헤집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점점 더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고, 해는 떨어지고 배도 고파지고, 체력은 더 떨어져서 그야말로 목숨이 위험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도 아니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그러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인생을 다 포기해 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길을 잃은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오늘 말씀처럼 길을 잃은 양을 목자가 찾아와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목자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틀림없이 나를 찾아와 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이 기다림에 대해서 많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私は切に 主を待ち望んだ。 主は私に耳を傾け 助けを求める叫びを聞いてくださった。

잠언 8장 34절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레미야애가 3장 25절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기다림이 아니라, 마치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해 나아가면서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이 기다림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무엇을 안 하는 것이 기다림이냐 하면, 바로 낙심을 안 하고, 포기를 안 하고, 좌절을 안 하고 절망을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다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의 문화청 청장도 지낸 적이 있는 심리학자 카와이 하야오 라고 하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 분이 이제 늦은 밤에 일본 전철 역에서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표를 사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막차가 걱정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역무원에게 문의를 했는데, 그 때 역무원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여기서 “노조미”라고 하는 말은, “희망” 또는 “소망”이라는 뜻이 있고, “히카리”는 빛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를 직역을 하면, 소망은 없지만 빛은 있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외국 사람이 들으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겠습니다만, 이 대화가 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노조미’나 ‘히카리’는 사실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KTX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은 신칸센 종류가 많아서 이름도 다양하거든요.

그러니까 역무원은 단순히 신칸센 노조미는 막차가 없지만 신칸센 히카리는 아직 있다는 뜻으로 “노조미는 없지만 히카리는 있습니다”(のぞみはありませんが、ひかりはあります) 라고 말한 것인데, 이게 듣기에 따라서는 “소망은 없으나 빛은 있습니다”로도 들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심리학자는, 물론 그 역무원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 뜻도 알았지만, 그보다도, 그래, 이 세상 소망은 끊어지더라도(失っても) 하늘에서 비치는 빛은 있구나! 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대단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바울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오죽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바울로 하여금 오직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둠에 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빛으로 친히 우리가 있는 이 낮은 땅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까.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수천 수만 마리 양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다 내팽겨 치고서라도,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달려오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져도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고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そうです。主は光として来られました。 私たちが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自ら私たちのいる低いところまで下られた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いたします。

皆さん、道に迷っておられますか。苦しみと苦難のただ中におられますか。大丈夫です。主が来られます。九十九匹の羊どころか、何千何万の羊であろうともすべてを山に残し、あなた一人を助けるために走って来られる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信じ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この世においての望みを失っても、光として来られた主を待ち望み、頼りさえすれば私たちは生きられます。勝利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이제 아무리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소망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불안과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これからは、いくら人間的、世俗的な望みを失っても、ただ主のみを頼り、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るため、道に迷っている私たちの捜しに来られるということを信じ、そして待ち望むことによって、不安と落胆と挫折と絶望を振り払い、光として来られたイエス様とともに勝利する皆様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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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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