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회 무엇을 전할 것인가
2023년 9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21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21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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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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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0번째 시간으로서 “무엇을 전할 것인가” 何を宣べ伝えるべき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본문 내용에 있어서도 전해드려야 할 부분이 좀 많기 때문에 시간관계상 이번주와 다음 주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0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이 구절은 바울의 전도방법에 있어서의 원칙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가 고백하기를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 그러니까 이미 신앙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 평생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바울 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사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졌습니다.

그 때 당시 유대교는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도행전 10장을 시작으로 해서 이제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고, 뿐만 아니라 성령님까지 임하시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선교회의 선교 방침에 따라서 계획적으로 파송을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바울 당시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지 아직까지는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누가 어느 쪽을 담당하고 누가 어느 지역에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마도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과정에 있어서 바울은 혹시라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 곳에까지 굳이 자신이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세우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이는 성경에 적혀 있는 내용이고, 성경은 성경무오, 그러니까 성경에는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경에 적힌 내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아멘……하고 믿을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휴, 그렇게 해서 언제 교회가 성장하겠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교회가 좀 시원찮다거나 하면 내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게 뭐 잘못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신천지는 더 하지요. 이른바 산 옮기기라고 해서 기존 교회에 침투해서 거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켜서 교회를 갈라지게 만들고는, 그 성도들을 모두 자기 교회로 옮겨 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뭐, 이런 이단 집단에서 하는 행태를 비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만, 문제는 뭐냐 하면 일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친구사이나 아는 사이인 사람이, 기왕이면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걸 잘못이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교회라고 한다면 꼭 내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교회에서나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 곳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오게끔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유, 그러니까 멀쩡하게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회로 데려오고 싶어해요. 그렇다고 가족이나 친구나 친인척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왜 자기 교회로 그렇게 데려오고 싶어할까요. 어쩌면 그것은 성과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본다면 이른바 전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 이름이 <전도왕>이라고 하지요? 이 말을 그대로 풀어서 보면 무슨 뜻이에요? 전도를 많이 하면 왕 대접을 해주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보더라도 매년 전도왕을 뽑고는 상을 주는데 그 날은 한복을 입고 나와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상과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 기억에 보면 대체적으로 여자분들이 많이 받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남자분들은 평일에는 대부분 출근을 하니까, 여자분들 중에서 주부이신 분들이 아마도 많이 상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도한 전도 대상자에 대해서 본다면, 전도한 사람의 숫자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반면에 그 전도 대상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도해서 자기 교회로 데려온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오게 된 것인지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교역자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전도하는 사람에 대해서 할당량이 있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전도대상자에 대한 명단을 제출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십니까. 교회 복음화와 부흥을 위해서 참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물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교회에 나오겠다고 한다거나, 아니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좀 이런저런 이유로 다니기가 어려워졌다고 했을 때, 그 때 자기 교회로 함께 나온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멀쩡히 지금 건전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기 교회로 데리고 나온다? 이건 아니지요. 세상에 이런 전도방법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 할당량이 있고 전도대상자 명단을 정기적으로 작성해서 제출한다? 저 이런 말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동차 영업 사원을 하고 있는 지인한테서 똑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이 분은 자동차를 판매해야 하는데, 당연히 팔아야 할 목표량이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자동차 구매대상자를 정기적으로 작성해서 회사에 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하는 말이, 제 이름도 거기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저는 아직 면허도 안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되냐고 되물으니까 상관 없다는 거예요.

그래요. 뭐, 자동차나 세상 일은 그렇다고 해요. 하지만 이를 그대로 교회에서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소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짠 소금과 짜지 않은 소금입니다.

짠 맛이 있는 소금은 쓸모가 있지만,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쓸모가 없어서 내버려지고 사람들한테 발로 밟힐 뿐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소금이라고 한다면 그냥 조미료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당시에 소금이라고 하면 대단히 귀한 것이어서, 당시에는 로마 군인들이 소금을 월급으로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라틴어로 소금이 sals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샐러리가 되고, 이를 받는 사람들이 샐러리맨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소금을 그냥 소금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우리 그냥 알기 쉽게 돈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든지 아니면 사업을 해서 수익을 얻든지 해서 돈을 벌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 돈이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보면 돈이 땅바닥에 마구 버려진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실제로 있는 나라에요. 그러면 여기는 대단히 잘 사는 나라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나라일까요?

돈이 땅바닥에 마구 버려져도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단히 부자 나라인 것처럼 생각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긴 어디냐 하면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여기는 과거에 대통령이 자신의 사치생활을 위해 돈을 부분별 하게 찍어내는 바람에 그 화폐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어디까지 떨어지냐 하면 100만도 100억도 아닌 100조…… 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숫자인지 감이 잡히세요? 0이 무려 14개나 됩니다. 그런데 그 100조 짐바브웨 달러로 살 수 있는 것은 고작 달걀 3개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뭐 돈이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말 그대로 땅에 버려져도 아무도 줍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금은 그 돈이 아예 없어지고 미국 달러를 차용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은 대단히 귀한 것이지만 그 가치가 없어지면 말 그대로 땅에 버려져서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금은 음식 안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소금을 음식 안에 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소금을 먹기 위해서요? 아니요. 음식을 맛이 있게 하기 위해서 소금을 넣는 것이지요.

소금을 넣음으로써 음식이 맛있어진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소금으로 인해서 다른 음식만이 변화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은 소금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설렁탕을 가끔 먹곤 했었습니다만, 소금을 안 넣은 설렁탕을 생각해보세요. 그걸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하지만 소금을 조금 넣게 되면 참 구수하고 진짜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소금이 녹아서 그 짠맛으로 인해 주변 음식 맛을 변화시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금을 아무리 넣어도 짠맛이 안 나요. 짜지도 녹지도 않고, 무슨 모래처럼 어그적 어그적 씹히기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걸 누가 먹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이처럼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세상 방법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면 이게 어떻게 되냐 하는 것이지요.

믿음의 방법과 세상 방법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미술 쪽에 보면 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이 있습니다.

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달라요. 예를 들어서 물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감을 섞으면 섞을수록 어떻게 됩니까. 예, 섞으면 섞을수록 어두워지죠. 색의 3원색은 빨강, 파랑, 노랑이 있는데, 이를 서로 섞으면 여러 가지 색이 나오지만 본래 빨강, 파랑, 노랑색보다는 진한 색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깔을 다 섞으면 어떻게 되죠? 예, 시커멓게 되고 말지요. 이게 감색혼합, 그러니까 색이 줄어드는 혼합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빛의 3원색은 어떻습니까.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색조명을 서로 섞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섞으면 섞을수록 빛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을 가진 조명을 다 섞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하얀 색깔의 빛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 것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을 섞어 놓으면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이 시커멓게 물들어 가게 돼요. 거기에는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메말라 가요.

하지만 하늘에서 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섞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하얗게 됩니다. 우리 주변이 변화되어 환하게 밝아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두웠던 우리 주변이 환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오늘 본문 다음 구절 로마서 15장 21절 말씀이 됩니다.


로마서 15장 21절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그렇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 주변이 변하여 환해지게 되면 그 때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인지, 둘째로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첫번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우리는 무엇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경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 성경도 모르고 무조건 하라고 하니까 전도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직히 본다면 우리나라 성경수준은 참 심각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몇 년 전 어떤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분은 권사님이라고 하셨는데, 짧은 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사님 답게 품위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고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입니다.

그 메일 내용은 뭐였냐 하면, 제가 보내 드리는 선교소식을 읽으시고 우리 교회를 좀 돕고 싶은데,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가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안타깝게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다면서 이해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권사님 말씀, 맞아요? 틀려요?

옛날에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하다가 저한테 대뜸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야,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 말을 하고는 그 친구녀석도 생각하기를, 자기도 자기가 말해 놓고 좀 이상했나보죠? 눈을 껌뻑껌뻑 뜨고 저를 처다 보더라고요? 그리고 듣는 저도 이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고 해서 갸우뚱 했었습니다.


“입이 열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여러분, 이게 맞는 말이에요? 아니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와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를 이상하게 합쳐 놓은 말인 것이죠.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두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지금 매주 기도로 그리고 물질로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면 그 분들은 성경 말씀을 어기고 계신 것인가요?

후원해주시는 분들 중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그리고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후원해주시는 곳도 계신데, 그렇다면 그 목사님이나 교회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누가복음 16장 13절 중에서 우선 전반부부터 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전반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どんなしもべ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

그러면 이 말씀이 두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뜻이냐 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6장 13절 후반부에는 뭐라고 적혀있는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후반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냐 돈이냐가 아닌, 앞서 말씀 드린 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처럼 세상 방법과 믿음의 방법을 똑같이 존중할 수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두 교회를 섬길 수 없다고 해석한다면, 그것도 권사님이 그것도 목사한테 보내는 메일에 그렇게 적으실 정도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는 그렇다고 그 권사님 한 분을 탓하려고 한다거나, 무슨 선교후원을 안 해 주셔서 서운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고 직분을 받을 정도의 성도님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적지 않게 계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우려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전해야 할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지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부터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면, 제가 항상 드리는 구절 있지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이 말씀에 대해서만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면 그 말씀이 귀한 말씀이요, 그 발걸음이 복된 걸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님들을 보면 가끔 기독교 서적이나 기독교 영화를 많이 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그게 잘못이라고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음식으로 따지자면 주식이 아니라 간식이에요.

예를 들어서 십계 같은 영화의 경우, 성경 말씀을 모르고 보면 정말 멋진 영화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알고 난 다음에 보니까, 이건 성경을 무시하고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바꿔 놓고 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어서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십계라는 영화가 명화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쩌면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설교말씀도 그래요. 예전에 성경을 잘 몰랐을 때에는, 그저 말씀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그리고 유머감각 있게 하시는 설교가 좋은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말씀들을 들으니까, 그렇게 설교하시는 어떤 분의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주로 말씀하시고 계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그 전까지는 주목하지 않았던 다른 목사님이, 비록 말씀을 조용하게 하시고 유머는 좀 없다 하더라도 정말 하나하나가 성경에 맞는 훌륭한 말씀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우리 이웃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며, 우리 이웃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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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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