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회 승자의 조건
2023년 10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2절~24절
“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2節~24節
“22.そういうわけで、私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のを何度も妨げられてきました。
23.しかし今は、もうこの地方に私が働くべき場所はありません。また、イスパニアに行く場合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立ち寄ることを長年切望してきたので、
24.旅の途中であなたがたを訪問し、しばらくの間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て、まず心を満たされてから、あなたがたに送られてイスパニアに行きたいと願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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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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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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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2번째 시간으로서 “승자의 조건” 勝者の条件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멋진 인생이란 어떤 인생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자기가 원하는 삶,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굴러가면 그것이 가장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위너, 즉 승자가 되는 것이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루저, 즉 패배자가 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했었다고 해요. 이는 여기서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라 1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바울은 그 동안 로마로 가려고 했었지만 계속해서 길이 막혀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길이 막힌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길이 막혔다고 하기 보다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로마만이 아니라 유럽 끝자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결국 바울은 스페인까지 가지 못한 채 로마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그런 생각 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 바울이 누구입니까. 비록 젊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들이기까지 했습니다만, 그 후에는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絶えず祈りなさい。


그토록 기도를 강조하고 주님과의 교재를 많이 가졌던 바울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사람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고자 했을까요.

예를 들어서 아, 이제 내가 좀 예루살렘을 가고 싶어서, 로마가 좋다고 해서, 아니면 스페인에서 인간적인 결과를 남기기 위해서 가야겠다는 그런 세속적인 희망이나 욕심을 위해서 계획을 세웠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단순한 희망이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정도 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든 일이 다 계획한 대로 술술 풀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다 기도하고 결정한 것일 테니까 더욱 한치의 오차 없이 착착 진행이 되어야 마땅하잖아요.

하지만 성경을 보면 아무래도 그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방금 짧게 살펴본 것처럼 자기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못했던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바울은 병든 사람도 많이 고치고, 그리고 사도행전 20장에 보시면 죽은 청년을 살리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使いについて、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私は三度、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わたしの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自分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肉体のとげ)>에 대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신학자들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지병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죽은 자도 살렸던 바울인데 자기가 앓고 있는 질병 하나 못 고치겠어요? 그런데 그걸 고쳐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정작 자기는 고쳐주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니, 주님의 일을 무엇보다 열성적으로 감당하려 했던 바울인데 몸이라도 성해야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런 기록을 본다면 사도 바울 정도 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도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정말 자기가 원하던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나이가 75세 때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두 번 부르셨지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처음에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두 번째는 하란 땅에서 부르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의하면 하란 땅에서 그가 나왔을 때의 나이가 75세 때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셔서 나왔다고는 하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그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 가뭄이 들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땅을 버리고는 애굽으로 갑니다. 그러자 거기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만 나이는 먹어가는데 자식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는데 이 일로 인해서 가정에 불란이 생깁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납니다만, 이제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혀요. 이로 인해서 사라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내쫓으라고 아브라함한테 성화입니다.

결국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집에서 내보내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상당히 거친 땅이었던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여인과 어린 아이를 내보낸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추방이 아니라 죽으라고 내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거든요.

사라에게 있어서 하갈이나 이스마엘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브라함한테 있어서는, 비록 정실은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이스마엘은 친자식이고 하갈은 그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둘을 말하자면 죽음의 땅으로 내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도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떨까요. 어려서부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랐던 야곱의 아들 요셉은 창세기 37장에 의하면 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산 설고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에 그냥 살아도 어려움이 많을 텐데, 그의 나이 열 일곱 살에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인생 밑바닥 노예로 살아가게 된 요셉. 그런데 그의 역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노예살이를 했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써서 이제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지요.

이런 삶에 대해서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이구, 참 인생이 기구하다. 어떻게 꼬여도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있냐. 그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직 전쟁에도 나갈 수 없는 미성년자일 때 블레셋 용사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전쟁영웅이 되지요.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로부터 시기를 사게 됩니다. 결국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로부터 쫓김을 당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요셉이 무슨 잘못을 했어요. 다윗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런데도 더할 나위 없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다윗을 보면 그들이 원하던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나요? 그렇다고 그들이 패배자인가요?

아니요. 아브라함은 평생동안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 46절에 의하면 요셉은 나이 서른에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2인자가 되어 평생동안 다스리게 되고, 사무엘하 5장 4절에 의하면 다윗 또한 그의 나이 서른에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승자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생에 있어서 승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2장에 보시면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좋은 의미로 본다면 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에 의하면 그는 쌍둥이였는데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형 에서의 발꿈치는 잡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자가 되려고 꾀를 부려 형 에서한테서 장자권을 빼앗게 되고, 나중에는 형이 받으려고 했던 아버지의 상속권까지 가로채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쫓아오지요. 어쩔 수 없이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해서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본가 그러니까 야곱의 외갓집으로 피신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아내 둘을 얻게 되는데, 자기 외삼촌 라반 밑에서 일하면서 자기 재산들을 늘려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참 여러가지 꾀를 부려가며 노력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외삼촌 라반이 곱게 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야곱은 20년 만에 자기가 모아 놓은 전재산과 가족들을 이끌고 도망쳐 나와서는 자신의 고향 가나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걸리는 게 뭐냐 하면 바로 형 에서의 존재입니다.

아무리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에서가 자기에 대한 원한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지금 만나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초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관문이 얍복강가에서 자기 가축이나 재산들을 노예한테 시켜서 앞서 건너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걸 에서한테 먼저 주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한 다음, 두 번째로 자기 가족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자기가 만나겠다고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한 이유는 뭐냐 하면, 자기 재산을 에서에게 바쳐서 그것을 받으면 가족이 안전할 것이요, 만약에 그것을 받기 거부하면 가족이 도망가면 된다는 것이고, 만에 하나 에서가 가족을 해치거나 했다면 그 때 자기가 도망치면 결국 자기는 제일 안전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여러가지로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건너 보내고, 가장 안전한 곳에 자기 혼자 남았을 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창세기 32장 24절~29절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ヤコブが一人だけ後に残ると、ある人が夜明けまで彼と格闘した。
その人はヤコブに勝てないのを見てとって、彼のももの関節を打った。ヤコブのももの関節は、その人と格闘しているうちに外れた。
すると、その人は言った。「わたしを去らせよ。夜が明けるから。」ヤコブは言った。「私はあなたを去らせません。私を祝福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何というのか。」彼は言った。「ヤコブです。」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ヤコブは願って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名を教えてください。」すると、その人は「いったい、なぜ、わたしの名を尋ねるのか」と言って、その場で彼を祝福した。


제가 어떤 방송 보고 있었더니 거기서 누군가가 하는 말이, 이 내용이 도대체 무슨 교훈을 주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는데, 야곱이 워낙 씨름을 잘 하니까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쳤더니, 씨름할 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대요.

날이 밝으려 하자 그 사람이 떠나려고 하니까 야곱이 그 사람한테 말하기를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까 이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고 축복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자, 우선 이 말씀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성경적으로 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야곱의 씨름을 무엇이라고 들으셨습니까. 많은 분들은 이를 두고 야곱의 기도라고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끈질긴 기도에 못 이겨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분의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에 멋진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다……

이렇게 말하면 참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 그럼 기도라는 것이 우리의 고집을 관철시키고 하나님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그 이전에 야곱은 이 씨름으로 인해서 허벅지 뼈가 어긋났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허벅지 뼈가 어긋나는 것인가요? 두 다리가 멀쩡하신 분들은 모두 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본문 내용을 성경적으로 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벌인 씨름을 두고 이를 기도라고 설명한 성경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물며 기도를 열심히 하면 허벅지 뼈나 관절이 상할 수도 있다는 말씀도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 중에 바로 승자가 되는 조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우선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이지요.

호세아 12장 3절~4절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ヤコブは母の胎で兄のかかとをつかみ、その力で神と争った。
御使いと格闘して勝ったが、泣いてこれに願った。ベテルでは神に出会い、神はそこで彼に語りかけた。

야곱이 씨름한 상대는 분명 천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호세아서에는 천사라고 되어 있는데 왜 창세기에는 천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그가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왜 그 사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사실 성경에 보아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사람이 만났을 때,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는 많았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보고도 그를 못 알아보았으며, 사사기 13장에서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도 몰라보았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났을 때에도 마리아가 그를 천사라고 알아보았다는 기록이 없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 빈 무덤에 있던 천사들을 보고도 사람들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면 금방 알아볼 자신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알아보실 수 있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알아보시겠습니까. 어쩌면 대부분의 분들이 그 등에 달린 날개를 보고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룹천사(ケルビム), 둘째는 스랍천사(セラフィム),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룹천사는 천사들 중에서 가장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えが)いて回る炎の剣(つるぎ)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한 다음에 에덴을 지켰던 천사가 바로 그룹천사(ケルビム)인데, 하나님께서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룹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룹천사에는 날개가 있었습니다.


역대하 3장 10절~11절
“10.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혔으니
11.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왼쪽 그룹의 한 날개는 다섯 규빗이니 성전 벽에 닿았고 그 다른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오른쪽 그룹의 날개에 닿았으며”

ソロモンは至聖所の中に、彫像のケルビムを二つ作り、これに金をかぶせた。
ケルビムの翼は、長さが二十キュビトであった。片方のケルビムの一方の翼は五キュビトで、神殿の壁に届いていて、もう一方の翼も五キュビトで、もう片方のケルビムの翼に届いていた。



이는 에스겔이 본 환상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에스겔 10장 16절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ケルビムが行くと輪もそのそばを進み、ケルビムが翼を広げて地上から上るとき輪もそのそばを離れず、向きを変えなかった。

이처럼 그룹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스랍천사(セラフィム)도 마찬가지로 날개가 있습니다.


이사야 6장 2절~3절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セラフィムがその上の方に立っていた。彼らにはそれぞれ六つの翼があり、二つで顔をおおい、二つで両足をおおい、二つで飛んでいて、
互いにこう呼び交わしていた。「聖なる、聖なる、聖なる、万軍の主。その栄光は全地に満ちる。」

그룹천사(ケルビム)는 지키는 천사이고 스랍천사(セラフィム)는 찬양하는 천사인데, 이 두 천사는 각각 날개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는 하나님의 명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자에 대해서는 날개가 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정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볼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야곱도 분명 처음에 씨름을 할 때에는 도대체 내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 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이 되어서야 그 씨름하고 있는 상대방이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 장면에 대해서 우리가 좀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여러분의 국어실력부터 한 번 시험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자, 승자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예, 패자입니다.

그러면 패자의 반대말은? 예, 승자이지요.

이 정도만 아시면 다음에 제가 드리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 야곱의 씨름에 대한 광경을 보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장면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보실까요?


창세기 32장 24절~29절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ヤコブが一人だけ後に残ると、ある人が夜明けまで彼と格闘した。
その人はヤコブに勝てないのを見てとって、彼のももの関節を打った。ヤコブのももの関節は、その人と格闘しているうちに外れた。
すると、その人は言った。「わたしを去らせよ。夜が明けるから。」ヤコブは言った。「私はあなたを去らせません。私を祝福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何というのか。」彼は言った。「ヤコブです。」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ヤコブは願って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名を教えてください。」すると、その人は「いったい、なぜ、わたしの名を尋ねるのか」と言って、その場で彼を祝福した。


자, 여기서 야곱은 어떤 사람, 나중에는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그저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야곱보다 힘이 센 사람인가요? 아니면 약한 사람인가요.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만 본다면 야곱보다 힘이 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는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할 능력까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야곱보다 힘이 약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관절을 어긋나게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승부는 누가 이겼어요?

예, 그 ‘어떤 사람’이 이긴 것 아니겠습니까. 승자는 그 어떤 사람이고, 그럼 승자 반대말은 뭐라고 했지요? 예, 패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야곱더러 패자라고 했나요? 아니요. 야곱더러 이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이와 같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를 다 무시하고 무조건 야곱이 기도를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성경이 말씀해주시는 본래의 뜻을 놓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은 야곱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너무나도 강하게 나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다리를 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라고 말을 하지요. 그런데 그와 같은 야곱을 두고 패자가 아닌 승자라고 합니다.

이를 네 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씨름을 시작, 2. 허벅지 타격, 3, 축복을 구함, 4. 야곱 승리 선언.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2와 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다리를 상하게 했는데 이를 두고 야곱은 그 사람에게 축복할 것을 구합니다.

야곱의 이 태도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순간 야곱은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 그냥 어떤 불량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씨름은 분명 하나님의 사자가 승리하고 야곱은 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곧 야곱의 승리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가 깨달은 것, 그것은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던 상대방은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 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야곱이 에서를 다시 만났을 때의 나이가 몇 살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그 당시 나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나이와 시기를 계산해보며 그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데, 야곱이 에서를 피해 집을 나간 것은 77세였을 때였고, 다시 에서를 만난 나이는 그로부터 20년 뒤인 97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 97세. 그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97년 동안 계속해서 씨름을 해왔습니다. 눈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피하거나 또는 자신의 머리로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기려 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에서 대신 장자가 되었습니까. 외갓집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까. 그 재산들이 다 자기 것이 되었습니까. 대부분 다 에서한테 헌납하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 평생동안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서 씨름을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패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허무한 삶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얍복강에서의 씨름을 통해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기려고 씨름을 했던 상대방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아서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을 하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곧바로 달려가고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행동력으로 그는 승리하는 삶을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력이 있을 때 그는 패배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자기 힘에 의지하여 무조건 기를 쓰고 이기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벅지 뼈가 상하고 이제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33장 1절~3절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ヤコブ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エサウがやって来た。四百人の者が一緒であった。そこで、ヤコブは子どもたちを、レアとラケルと二人の女奴隷の群れに分け、
女奴隷たちとその子どもたちを先頭に、レアとその子どもたちをその後(あと)に、ラケルとヨセフを最後に置いた。
ヤコブは自ら彼らの先に立って進んだ。彼は兄に近づくまで、七回地にひれ伏した。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습니다.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산 뒤에 숨어 있던 야곱, 가족 뒤에 숨어 있던 야곱, 그리고 자기 지혜 뒤에 숨어 있던 야곱이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모두 뒤로 물리쳐 놓고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앞에 나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야곱이었다면 그것이 패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야곱아. 이제서야 네가 승자가 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 힘들고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든 내 힘으로 이겨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래 구덩이에 빠졌을 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패자가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패자가 되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자가 되셨을 때 비로소 우리 또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방법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뜻대로 되는 삶이 멋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요한복음 5장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わたしは、自分からは何も行うことができません。ただ聞いたとおりにさばきます。そして、わたしのさばきは正しいのです。わたしは自分の意志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求めるからです。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이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これらのことをあなたがたに話したの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あって平安を得るためです。世にあっては苦難があります。しかし、勇気を出しなさい。わたしはすでに世に勝ちました。」


예수님이 만약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패자가 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기를 쓰고 이를 악 물고라도 씨름을 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상대방을 땅에 쓰러뜨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엇이 없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순종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까.

좋습니다. 하나님과 한번 씨름을 해 보십시오.

내가 내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이기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승자로 높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의하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동생이 형보다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꼭 그렇게 형을 속이고 그리고 아버지를 속여야만 했습니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이 더 고달파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람의 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겨보려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차라리 형 에서를 존중해주고 배려를 해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훨씬 더 복된 삶이었을 것입니다.

내 허벅지가 다치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빨리 하나님을 이기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이기는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이기게 해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범사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献げる者は わたしをあがめる。 自分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 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る。」

인생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 생각대로 안 됩니까. 그래요. 아브라함도 바울도 자기 뜻대로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패자가 아닌 승자로 기록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먼저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6절~37절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이제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내 승리를 원하시는 주님께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승자로서의 삶, 주님의 이름으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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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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