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2회 어떻게 전할 것인가
2023년 10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21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21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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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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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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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1번째 시간으로서 “어떻게 전할 것인가” どのように宣べ伝えるべき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이고, 이 성경말씀을 우리가 올바로 깨닫고 우리 이웃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있어서 색의 삼원색과 빛의 삼원색을 말씀 드리면서, 색의 삼원색처럼 서로 섞으면 섞을수록 시커멓게 변하는 세상적인 방법을 교회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섞으면 섞을수록 환해지는 빛의 삼원색처럼 하나님의 방법, 믿음의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 성경을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믿음의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전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전도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제 막 전도를 나가시려고 할 때 어떤 마음 가짐으로 나가십니까.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예, 물론 그것도 좋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전도를 나갈 때 항상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의 전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익히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그래도 좀 가물가물하다고 하신 분들께서는, 요나서는 4장까지 밖에 없으니까 예배 후에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자, 이 요나서에 의하면 어느 날 갑자기 요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으로 요나서는 시작됩니다.

요나 1장 1절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アミタイの子ヨナ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요나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이가 몇 살이었고 직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를 뜻하는데, 이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비둘기처럼 온순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 때 붙여지는 것인데,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온순하게 생겼다고 해서 커서도 온순합니까. 그리고 또 어느 주석서에 보면 비둘기라고 하는 말에는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어리석다는 뜻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요나는 당시 성인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만, 그 이름의 뜻으로 당시 요나의 성품을 짐작하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비약적인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전반적인 문맥으로 짐작하자면, 아마도 요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놀라거나 하지 않고, 그리고 내용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요나는 어느 날 예고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이 2절이지요?

2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나 1장 2절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이 말씀만으로 본다면 요나에게 명하신 그 내용이,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죄가 많으니까 거기 가서 멸망을 시키라는 뜻인지, 아니면 회개를 시키라는 말씀인지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도록 선포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지고, 그리고 요나도 그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난 다음에 그가 한 행동을 보면,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명을 이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만약에 지금 당장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순종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했냐 하면 의외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나 1장 3절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しかし、ヨナは立って、主の御顔を避けてタルシシュへ逃れようとした。彼はヤッファに下り、タルシシュ行きの船を見つけると、船賃を払ってそれに乗り込み、主の御顔を避けて、人々と一緒にタルシシュへ行こうとした。

당시 다시스라고 하는 지명을 가진 곳은 여럿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는 동쪽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단순히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것과는 정반대 방향, 니느웨가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갔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동쪽에 계시니까 서쪽으로 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다는 뜻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자, 여기까지 일단 본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셨다면 두말 없이 순종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철저하게 불순종한 요나는 대단히 게으르거나 아니면 고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셨던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당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앗수르는 기회만 되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기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한다면 그야말로 할렐루야 하고 기뻐할 것만 같은 그와 같은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미운 나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을 나라가 앗수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해요?

이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떻게 될 수도 있겠습니까.

원래는 니느웨가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 당할 수도 있었는데, 요나가 거기까지 가서 회개를 선포하는 바람에 멸망하지 않았대……만약에 이런 소문이 나중에 이스라엘에 퍼지기라도 해보세요. 이건 완전히 요즘 말로 이적행위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정말 180도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측면, 세상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지극히 타당하다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이와 같은 명령, 이는 세상적인 명령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적인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도 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일을 세상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안 생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요나를 보시니까 아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불이 나게 도망쳐요. 그러면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한 구원계획을 포기하실까요.


아니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동쪽은 육지이지만 서쪽은 바다이기 때문에 서쪽 지역에 있는 다시스까지 가려면 천상 배를 타고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일으켜서 그 요나가 탄 배를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폭풍이 불어 닥쳐서 배는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만 같아요.


아마도 이 배는 작은 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크기였나 봅니다. 그래서 요나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승객만이 아니라 승무원들도 배가 침몰할 까봐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는데 요나는 태연합니다. 그것은 배가 안 뒤집힌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배가 폭풍을 만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이 폭풍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아 보자면서 제비를 뽑자고 해요.

그렇다고 뱃사람들이 폭풍을 만날 때마다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뱃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좀 이상한 점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나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전혀 폭풍이 일어날 계절이 아니었다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는 전혀 폭풍이 올 징조가 없었는데 갑자기 파도가 세졌다거나 하는, 아무튼 좀 수상한 점이 있었는지 제비를 뽑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나가 뽑히지 않았겠어요.

사람들은 요나한테 따집니다. 너 도대체 누군데 너 때문에 이렇게 폭풍이 일어나서 우리까지 죽게 생겼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자 요나는 말합니다.

요나 1장 10절~12절
“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人々は非常に恐れて、彼に「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と言った。人々は、ヨナが彼らに告げたことによって、彼が主の御顔を避けて逃れ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知ったからである。
彼らはヨナに言った。「私たちのために海が静まるようにするには、あなたをどうすればよいのか。」海がますます荒れてきたからである。
ヨナは彼らに言った。「私を抱え上げて、海に投げ込みなさい。そうすれば、海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静かになるでしょう。私は分かっています。この激しい暴風は、私のせいであなたがたを襲ったのです。」


요나는 말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라. 나 때문에 폭풍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긴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는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요나는 큰 물고기가 잡아먹어서 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동물이든 물고기든 간에 잡아 먹히게 되면 그 강한 소화액으로 인해서 금방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살아있게 되고 그 캄캄한 곳에서 홀로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되지요.

이제 어쩌겠습니까.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사흘 뒤에 물고기가 요나를 뱉어내자 그는 터벅터벅 니느웨를 향하여 걸어갑니다.


이제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 그가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자, 제가 지금 여기까지, 그야말로 요나서 본문보다도 길게 설명해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에 강제로 끌려와서 회개를 선포하는 요나의 마음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요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해서, 니느웨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이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냥 마지못해, 죽지 못해 그저 무거운 발걸음을 걸어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참 묘한 일이 생깁니다.

조금 길지만 요나 3장을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요나 3장 1절~10절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再びヨナ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わたしがあなたに伝える宣言をせよ。」
ヨナは、主のことばのとおりに、立ってニネベに行った。ニネベは、行き巡るのに三日かかるほどの非常に大きな都であった。
ヨナはその都に入って、まず一日分の道のりを歩き回って叫んだ。「あと四十日すると、ニネベは滅びる。」
すると、ニネベの人々は神を信じ、断食を呼びかけ、身分の高い者から低い者まで粗布をまとった。
このことがニネベの王の耳に入ると、彼は王座から立ち上がって、王服を脱ぎ捨てて粗布をまとい、灰の上に座った。
そして、王と大臣たちの命令によって、次のような布告がニネベに出された。「人も家畜も、牛も羊もみな、何も味わってはならない。草をはんだり、水を飲んだりしてはならない。
人も家畜も、粗布を身にまとい、ひたすら神に願い、それぞれ悪の道と、その横暴な行いから立ち返れ。
もしかすると、神が思い直してあわれみ、その燃える怒りを収められ、私たちは滅びないですむかもしれない。」
神は彼らの行いを、すなわち、彼らが悪の道から立ち返ったのをご覧になった。そして神は彼らに下すと言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し、それを行われなかった。


3절에 보시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한 성읍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3일 정도를 걸어야지만 성읍 전체를 돌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그런데 요나는 얼마나 돌았어요? 사흘을 돌았나요?

아니요. 아직 하루 밖에 안 돌았어요. 그리고 그가 외친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あと四十日すると、ニネベは滅びる。」 라고 하는, 정말 최소한의 말씀만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단 하루밖에 안 돌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것도 일반 주민들 만이 아니라 니느웨 왕까지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아니, 잠깐만요. 니느웨가 어떤 곳이었대요? 무슨 의인들이 살고 믿음이 좋고 신실한 그런 성읍이었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가리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나 1장 2절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니느웨가 얼마나 악에 가득 찼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고 하잖아요. 그야말로 소돔이나 고모라 같은 죄로 물든 성읍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 거기서 요나가 전도를 합니다.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가 어땠겠습니까. 성경에는 <외쳤다>라고 되어 있긴 합니다만, 솔직히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이토록 소극적인 외침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겉으로는 마지못해 회개를 <외쳤다>라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어땠겠습니까. 이 나쁜 나라, 어서 망해버려라……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아직 3분의 1밖에 안 돌았어요. 몸도 제대로 풀리지 않을 정도인데, 그 큰 성읍, 죄에 물든 니느웨가 위에는 우두머리인 니느웨 왕부터 시작해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전도 관련 부흥회도 실제로 가보기도 하고 영상으로 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만, 대부분 보면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어떤 식으로 집 문을 열게 해서 교회 전단지를 건네느냐 하는 방법이거나, 아니면 싫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얼마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결국은 교회에 나오게 하느냐 하는 말씀을 주로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흥강사와 요나를 두고 보았을 때, 이 두 사람이 전도에 있어서 간증을 하게 된다면 어느 쪽이 더욱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총 동원해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전도를 한 결과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경우와, 반면에 자신은 어떻게 보면 소극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전도밖에 한 것이 없는데 회개와 은혜의 바람이 불어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하는 경우를 본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사람의 노력이 강조될 수 있겠으나, 요나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한국이나 일본에 보더라도 끈질기게 전도를 해서 성장한 교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하지만, 동경의 어느 한국인 교회의 경우,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공략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도 수가 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는 전도 방법이고 교회 성장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14절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神はみこころのままに、あなたがたのうちに働いて志を立てさせ、事を行わせてくださる方です。
すべてのことを、不平を言わずに、疑わずに行いなさ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역시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해당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서로 안 좋은 소리가 오간다 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도 사람의 힘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된다면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을 높이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사람의 생각, 사람의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들 때에는 이 요나의 전도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전도도 그렇고 선교도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요,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 는 데에 그 초점이 맞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방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그리고 주의 소식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깨닫게 되기 위한 복음 전도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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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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