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좋은 이웃” 善き隣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이전 설교 내용에 있어서 좀 정정을 해야 할 뿐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우선 말씀
드리고 난 다음에 오늘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지지난주, 그러니까 지난 4월 21일 주일 설교 내용에 있어서 달란트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여기서 한 달란트는 30킬로 정도가
되고 금 30킬로는 1그램을 1만엔, 10만원으로 계산한다면 3억엔, 한국돈 30억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좀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말씀 드리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너무 많더라 했지. 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조금
더 들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그런 줄 알았고, 그리고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내용을 보더라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저도 큰 의심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이제 제가 동영상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어 설교를 마치고 일본어로 촬영을 막 하고 있는데, 도중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일본어로 설교를 할 때에 보면, 한국어로 된 원고를 보고 이것을 이제 일본어로 바꾸어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런데 성경
본문은 제마음대로 통역을 하게 되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 본문에 대해서는 일본어 성경을 입력해 놓거든요.
이제 한국어 설교 촬영을 마치고 다음으로 일본어로 설교 촬영을 하는데, 그런데 문득 제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어요. 그게 어디냐
하면 마태복음 25장 15절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彼は、おのおのその能力に応じて、ひとりには五タラント、ひとりには二タラント、もうひとり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それから旅に出かけた。
한국어 성경은 분명히 <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금, 그러니까 금은 골드이고, 무게는 대략 30킬로
정도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성경 신개역 2017을 보니까 <금>이라는 말이 없는 거예요. 그냥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입니다.
그래서 일본어 설교 동영상을 촬영하다가 도중에 일단 좀 멈추고 난 다음에, 서둘러서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다른
일본어성경에도 <금>이라고 하는 표현이 없고, 그리고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골드>라고 되어 있는 성경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봤지요. 그랬더니 거기에도 금을 나타내는 헬라어 <크뤼시온>이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른 번역본들을 보더라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나온 달란트를 <금> 그러니까 말하자면 골드로 표현한 번역본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한글개역과 한글개역개정 성경에만 <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금>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는 <골드>의 금이 아니라 <돈>을 나타내는 <금>이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보면 예를 들어서 <금일봉>이라고 해도 그게 금이 아니라 사실 돈이잖아요.
그래서 영어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NIV 성경에 보면 이를 금을 나타내는 <골드>가 아니라, 돈을 나타내는
<머니>로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한글 성경에서 본다면 공동번역 성경에 보니까 아예 <돈 다섯 달란트>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니까, 구약에서는 달란트라는 것을 무게로 사용해왔지만 신약에 있어서는 이를 화폐단위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이를 귀금속인 <금>의 무게로 해서 말씀을 전하신 분들은 잘못 전하신 것이냐 하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셨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의 본질은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약시대에 있어서 화폐단위로 사용된 달란트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냐 하면,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혹시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어느 정도라고 말씀드렸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래서 이를 편의상 요즘 하루 일당을 대략 1만엔, 10만원으로 잡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한 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이 1만엔이니까 한 달란트는 6000 곱하기 1만엔이잖아요. 그러면 6000데나리온 곱하기 1만엔, 10만원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 한 달란트는 화폐가치로 본다면 지금의 6000만엔, 한국돈 6억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를 무게가 아니라 화폐가치로
보게 된다면, 제가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3천만엔, 3억원보다도 두 배나 많은 돈이 됩니다.
하지만 뭐 한 달란트가 3천만엔이든 6천만엔이든, 그리고 3억원이든 6억원이든 간에 큰 돈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게로 이해를 하든 화폐가치로 이해를 하든 그 말씀의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지요.
하지만 이번 복음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 이번 기회에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이 점을 기억하고 넘어가고자 해서 말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오늘 본론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 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善きサマリア人のたとえ)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간과하고 있는 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선 지금 이 상황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 의하면 지금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사람은 <어떤 율법교사>(律法の専門家) 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난 다음에, 오늘 29절에 보니까 이 율법교사가 이웃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지요.
누가복음 10장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0.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오늘 중요한 핵심내용은 사실 이 구절에 대부분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이지, 나이든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 첫째이고, 다음으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짐은
물론이고 옷까지도 빼앗겨버렸다는 점이 둘째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사람의 상태가 거의 죽은 것이었다는 점이 셋째입니다.
당시는 인종차별이 대단히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차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 있어서도
여자와 미성년자들은 사람 수를 셀 때에 인구에도 포함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홀대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음으로 이 사람은 현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강도들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어요. 하물며 이 사람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벗겨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거의 죽은 것 같다고 했지요. 이는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이렇게 멀리서 보기만 한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시고 다음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1절~32절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1.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32.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여기서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주로 사두개파 사람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라고 하면 모세와 아론의 후손으로서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당대에 있어서 누구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지금 이 강도를 만난 사람 옆을 지나가는데, 그를 도와주지는 않고 똑같이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짐작해본다면 그 옆을 지나간 사람들이 어디 이 두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그 외 많은 사람들도 이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 곁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이지 알지 못해서, 아니면
어린애나 여자를 괜히 건드렸다가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불안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옷까지
벗겨진 사람을 살려봤자 마땅한 대가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옆을 그냥 지나갔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마저도 인정머리 없게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그림을 봤는데 이는 이 장면, 그러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사람 곁을 피해서 가는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었는데, 그 그림을 보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 사람 옆을 아주 몰래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지나가는 듯이 그려 놓은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방금 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지나온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멈춰 세우고는, 아니, 당신
지금 너무한 거 아니냐. 사람이 지금 저렇게 쓰러져 있는데 그걸 보고도 그냥 지나쳐오면 어떡하냐…… 만약에 이렇게 따졌다면 그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어떻게 말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아이구, 들켜버렸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할까요?
저는 장담합니다. 지금 강도 옆을 피해서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절대로 죄를 지었다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상태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상태가 어땠다고 했습니까.
강도들이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멀리서 이렇게 보기만 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아니, 그렇다면 다가가서 흔들어 보기라도 하면 될 것 아닌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민수기 19장 11절~13절
“11.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その者は三日目と七日目に、先の水で身の汚れを除いて、きよくなる。三日目と七日目に身の汚れを除かなければ、きよくならない。
死人、すなわち死んだ人間のたましいに触れ、身の汚れを除かない者はみな、主の幕屋を汚す。その者はイスラエルから断ち切られる。その者は汚れを除く水を振りかけられていないので汚れていて、その者の中になお汚れがあるからである。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만지게 되면 그 사람은 하루도
아닌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고 해요. 그리고 정결하게 되지 않은 상태라면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큰 문제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죠. 제사장과 레위인 아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큰 지장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직접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부정하게 되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하루 뿐이냐 하면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잖아요. 다시 말해서 한 번 부정하게 되면 일주일 동안 일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지나가다가 누가 땅에 쓰러져 있는데 움직이질 않아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괜히 만졌다가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면 7일 동안 부정해져서 자기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 일이라는 것이 그냥 개인적인 일이에요? 아니에요.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고 있는데 그 일을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냐. 그러니까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사람 옆을 피해 왔는데,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이냐. 오히려 율법을 잘 지켰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고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냐.”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분명 이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말도 서로 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심한 차별을 받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든 사람인지 어린 사람인지, 재산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그리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그 사람한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졌나요? 예, 만질 정도가 아니지요.
누가복음 10장 34절~35절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4.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35.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을 만졌을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성껏 치료를 해주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거기서도 돌보아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 날에 자기는 떠나야 하기 때문에 숙소를 나서게 되지만 이 다친 사람은 거동할 수가 없었나보죠? 그래서 거기
주인한테 2데나리온, 그러니까 2만엔, 한국돈 20만원 정도를 주면서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혹시 부족했다면 그 때가서 나머지도 자기가 갚겠다고 해요.
여기서의 2데나리온, 2만엔, 20만원이라는 돈이 꼭 적은 액수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다음 날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아서,
그래도 이 사람의 여행에 있어서는 큰 지장이 없는 지출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까지 말씀을 마치시고 그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예수님은 묻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어려운 사람을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 율법을 어기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이 중에서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한 사람도 율법교사라고 할 정도이니까 당연히 율법을 잘 알고 있었겠지요. 만약에 이 중에서 누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냐고 예수님이 물으셨다면, 이 율법교사는 어쩌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율법교사는 절대로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 그러니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기 때문인데,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이 율법교사가 처음에 했던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9절 말씀을 다시 볼까요.
누가복음 10장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29.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이 율법교사는 애초에 자기 이웃을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어떤 사람이 진정한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쩌면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교사한테는 이렇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율법교사야, 네가 이렇게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너를 살려주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너를 살려줬어. 그럼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니.”
아마도 그의 귀에는 이렇게 들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아니, 지금 자기가 죽어가는 마당에 율법을 지키는 게 중요해요? 그러니까 무조건 자기를 살려준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철저하게 차별하고 있었는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그는 간신히 <자비를 베푼 사람이 제 이웃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
이 말을 들으셨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셔야 해요? 그래. 맞다. 율법을 어기면서도 너를 살려준 사람이 네 이웃이다……이렇게
끝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극적 반전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풀이 죽어 있는 그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0장 37절 후반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어쩌면 이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까지 율법교사는 자기가 강도 만난 피해자이고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에 보면
뭐예요?
율법을 어길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도움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도움을 베푸는 입장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예전에 어느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 보니까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미혼 젊은 여성들에게 당신들의 이상형인 남성은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뭐, 대답이 뻔해요. 키는 몇 센티 이상, 학력은 어디어디 대학 이상이고 연봉은 얼마 이상에다가 외모는 어떻고 집안은
어떻고……하는 조건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거기 나온 강사가 하는 말이, 자, 여러분이 말씀하신 이 조건들을 모두 갖춘 남성, 그것도 미혼 남성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상위 5프로에 드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봐라. 여러분이 자기자신을 생각했을 때, 이 나라에서 상위
5프로에 드는 남성이 당신을 선택할 것 같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자만이 아니지요. 남녀를 떠나서 상대방도 바보가 아닌데, 단순히 계산해봐도 상위 5프로에 드는 상대방이 자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상위 5프로에 들 정도는 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 자신은 정말 그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이지요.
정작 자기는 거기에 전혀 미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조건만 높아진다면 그게 실현가능성이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것 참 맞는
말씀 같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이웃이 되어서,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기 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율법도 좋고 규례(命令)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율법을 빌미로, 규례를 빌미로 해서 우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핍박하고 비난하고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편 94편 20절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破滅をもたらす法廷が あなたを仲間に加えるでしょうか。 おきてに従いながら 邪悪なことを謀る者どもが。
때로는 율법을 빙자하고 규례를 빙자해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공격하거나 차별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차별하면 주님은 우리를 차별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율법이나 계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강도 만난
사람 옆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피해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이웃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이웃을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을 찾아 나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웃에게 우리가
아낌없이 도움을 주는 좋은 이웃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서, 장차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みなさん、素晴らしい隣人が欲しいですか。私たちが困っているとき、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隣人を望みますか。主は私たちにそのような素晴らしい隣人を探し求めなさいとはおっしゃいません。むしろ私たち自身が素晴らしい隣人になりなさい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これからは、私たちを助けてくれる隣人を探し求めるのではなく、私たちの助けを必要とする隣人、私たちが助けてあげられる隣人に、私たちが惜しみなく助けてあげる素晴らしい隣人になることによって、神様に対する愛と隣人に対する愛の模範になるような人生を送り、やがて主から大きな称賛を受けられる皆さまであらんことを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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