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회 경계해야 할 우상
2023년 9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7절~19절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7節~19節
“17.ですから、神への奉仕について、私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誇りを持っています。
18.私は、異邦人を従順にするため、キリストが私を用いて成し遂げてくださったこと以外に、何かをあえて話そうとは思いません。キリストは、ことばと行いにより、
19.また、しるしと不思議を行う力と、神の御霊の力によって、それらを成し遂げてくださいました。こうして、私はエルサレムから始めて、イルリコに至るまでを巡り、キリストの福音をくまなく伝え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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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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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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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9번째 시간으로서 “경계해야 할 우상” 警戒すべき偶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보문 중에서 17절 첫부분에 보시면 “그러므로(ですから)”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구절인 15절과 16절의 문맥을 따라 “그렇기 때문에”라고 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복습하는 의미에서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피보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5절~16절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행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17절에서 <그러므로(ですから)> 라고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라고 이해해야 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17절에 보시면 그 받은 은혜로 말미맘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랑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서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기에 따라서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냐 하면, 내가 한 일들은 모두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신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행위는 모두 주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라는 식으로도 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후 주님께서 주신 사명,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적지 않게 곤란한 일이 되고 맙니다.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솔로몬은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 2대 왕이었던 다윗의 아들이자 이스라엘 3대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태생을 본다면 남들보다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누구냐 하면, 밧세바였습니다.

그러면 밧세바가 누구입니까.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다윗이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를 멀리서 훔쳐보고 반해서 그를 불러다가 불륜을 저지른 다음에,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신인 우리아를 일부러 전쟁터에서 죽이도록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 일로 인해서 사무엘하 12장에 의하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부정한 관계로 태어난 아이는 죽게 되고, 그 다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솔로몬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솔로몬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솔로몬이라는 이름, 혹시 누가 지었는지 아십니까.

역대하 22장 9절
“9.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見よ、あなたに一人の男の子が生まれる。彼は穏やかな人となり、わたしは周りのすべての敵から守って彼に安息を与える。彼の名がソロモンと呼ばれるのはそのためである。彼の世に、わたしはイスラエルに平和と平穏を与える。

이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얼마나 특별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는 크나큰 축복을 받은 왕이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2절~13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と判断の心を与える。あなたより前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く、あなたの後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起こらない。
そのうえ、あなたが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も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が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一人もいな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귀와 영광을 그에게 채워 주십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시면 그가 누렸던 축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 그 어느 강대국의 통치자라 하더라도 그만한 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을 누리면 정말 하루에 수십 번 하나님께 감사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는 하나님의 그 크나큰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잘못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오늘은 아직 그 죄악이 시작하기 전의 시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건축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건축에 있어서는 애초에 다윗 왕이 계획하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아닌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하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제1성전이라고도 불리는 하나님의 성전은 솔로몬 왕 때 완성하게 됩니다.

이제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왕이었다면 그 때 하나님께는 어떠한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기도로 채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어보면, 적지 않게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상 8장 13절
“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私は、あなたの御住まいである家を、確かに建てました。御座がとこしえに据えられる場所を。」


열왕기상 8장 20절~21절
“20.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21.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主はお告げになった約束を果たされたので、私は主の約束どおりに父ダビデに代わって立ち、イスラエルの王座に就いた。そしてイスラエルの神、主の御名のためにこの家を建て、
主の契約が納められている箱のために、そこに場所を設けた。その契約は、主が私たちの先祖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されたときに、彼らと結ばれたものである。」


열왕기상 8장 41절~45절
“41.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42.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43.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44.주의 백성이 그들의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옵소서


열왕기상 8장 41절~45절
同様に、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者でない異国人についても、その人があなたの御名のゆえに、遠方の地から来て、
彼らが、あなたの大いなる御名と力強い御手と伸ばされた御腕について聞き、やって来てこの宮に向かって祈るなら、
あなたご自身が、あなたの御座が据えられた場所である天でこれを聞き、その異国人があなたに向かって願うことをすべて、かなえ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地上のあらゆる民が御名を知り、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と同じようにあなたを恐れるようになり、私が建てたこの宮で御名が呼び求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るでしょう。
あなたの民が敵との戦いのために出て行くとき、遣わされる道で、あなたがお選びになった都、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宮に向かって主に祈るなら、
天で彼らの祈りと願いを聞いて、彼らの言い分を聞き入れてやってください。


열왕기상 8장 48절~50절
“48.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49.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50.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捕らわれて行った敵国で、心のすべて、たましいのすべてをもって、あなたに立ち返り、あなたが彼らの先祖にお与えになった彼らの地、あなたがお選びになったこの都、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に向かって、あなたに祈るなら、
あなたの御座が据えられた場所である天で、彼らの祈りと願いを聞き、彼らの訴えをかなえて、
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となったあなたの民を赦し、あなたに背いた、彼らのすべての背きを赦し、彼らを捕らえて行った者たちの前で彼らをあわれみ、その者たちがあなたの民をあわれむようにしてください。


여러분께서는 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좀 성격이 유별나서 그런지 적지 않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어디냐 하면 좀 부분적으로 발췌하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상 8장 13절
“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私は、あなたの御住まいである家を、確かに建てました。

열왕기상 8장 20절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私は主の約束どおりに……イスラエルの神、主の御名のためにこの家を建て、

열왕기상 8장 21절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スキップ)

열왕기상 8장 43절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私が建てたこの宮で御名が呼び求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るでしょう。

열왕기상 8장 44절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宮に向かって主に祈るなら、

열왕기상 8장 48절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に向かって、あなたに祈るなら、

이런 말들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무슨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해서 자기 성과를 미화하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이 말들에서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와 찬양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싸구려 정치꾼들이나 하는 선거유세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을까요? 아니, 사람인 저도 적지 않게 거슬리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이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다음 장인 열왕기상 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열왕기상 9장 4절~9절
“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9장 4절~9절
もしあなたが、あなたの父ダビデが歩んだように、全き心と正直さをもってわたしの前に歩み、わたしがあなたに命じたことすべてをそのまま実行し、わたしの掟と定めを守るなら、
わたしが、あなたの父ダビデに『あなたには、イスラエルの王座から人が断たれることはない』と約束したとおり、あなたの王国の王座をイスラエルの上にとこしえに立たせよう。
もし、あなたがたとあなたがたの子孫が、わたしに背を向けて離れ、あなたがたの前に置いたわたしの命令とわたしの掟を守らずに、行ってほかの神々に仕え、それを拝むなら、
わたしは彼らに与えた地の面からイスラエルを断ち切り、わたしがわたしの名のために聖別した宮をわたしの前から投げ捨てる。イスラエルは、すべての民の間で物笑いの種となり、嘲りの的となる。
この宮は廃墟となり、そのそばを通り過ぎる者はみな驚き恐れてささやき、『何のために、主はこの地とこの宮に、このような仕打ちをされたのだろう』と言う。
人々は、『彼らは、エジプトの地から自分たちの先祖を導き出した彼らの神、主を捨ててほかの神々に頼り、それを拝み、それに仕えた。そのため主はこのすべてのわざわいを彼らに下されたのだ』と言う。」


이 말씀이 축복 기도처럼 들리시나요?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표정을 한 번 떠올려보세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표정을 짓고 계실까요? 아니요. 오히려 완전히 굳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의 주된 내용은 뭐겠습니까.

너, 내 말 안 들으면 알아서 해. 네가 지었다고 하는 그 성전, 아무리 크고 대단할 지라도 내가 완전히 박살내 버릴 거야……. 그 말씀 아니겠습니까.

결국 솔로몬이 죽은 다음 그 죄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지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열왕기하 25장 8절~9절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第五の月の七日、バビロンの王ネブカドネツァル王の第十九年のこと、バビロンの王の家来、親衛隊の長ネブザルアダンがエルサレムに来て、
主の宮と王宮とエルサレムのすべての家を焼き、そのおもだった建物をことごとく火で焼いた。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가 사라지고 찬양이 사라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라진 그 빈 자리를 더러운 우상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러운 우상 중의 가장 조심해야 할 우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私は、私が)>라고 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냐 하면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거만, 교만, 오만, 자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우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간증을 하라고 하면 이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지, 자기를 높이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제 간증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제가 이 로마서 강해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면, 물론 여러분께서는 은혜로 받아들여 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여러분이었다면, 적지 않게 좀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내가 전하고 있는 말씀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니까, 여기에 반박을 하거나 토를 달지 말라는 것이잖아요. 이건 무슨 뜻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감히 그렇게 말씀 드릴 자신이 없어요.

물론 저는 간증은 있습니다. 제가 수십년 동안 신학을 공부해온 것도 아니고, 아직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0년도 안 되는 상황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하다 보니까, 사실 막상 이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주제설교 같은 경우를 보면 그냥 말씀을 전하기 좋은 구절을 구약이고 신약이고 간에 거기서 고를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강해는 차례차례로 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몇 장 전체를 그 주의 본문 말씀으로 삼기도 그렇죠. 이왕 강해를 한다면 가능한 한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꼼꼼하게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야, 이거 다음 주는 이 구절로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하나 하고 막막할 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이 떠오르고 해서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 어디까지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아, 정말 그때 그때마다 주님이 지혜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이는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간증이자 감사예요. 이를 만약에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면서, 이는 하나님께서 저한테 주신 말씀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제가 예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주님이 지혜나 말씀을 주셨다고 하는 확신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부족해서 제대로 여러분께 전해드리지 못할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전도를 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갈 때의 제가 방문하는 곳 한곳 한곳 모두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간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그렇다고 무슨 꿈이나 환상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이것저것 알아보고 해서 가는 것이지만, 그 발길 하나하나에도 주님이 간섭해주시고 인도해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제가 간다고 다 반겨 주시나요? 저는 전도를 가면 안에 들어가서 오래 있지 않습니다. 괜히 일 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지 모르니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전도지를 드리고 나와요. 그러면 어디는요, 정말 제가 더 황송할 정도로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곳이 있나 하면, 어디는 또 제 표정을 보는 순간 쌔 해지는 곳도 있고, 또 어디는 아주 알기 쉽게 오지 말라는 곳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새로운 곳 일곱 곳을 방문했습니다만, 그 중에서 세 곳은 아예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제가 가는 곳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곳이라고 한다면, 저더러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는 저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 되잖아요. 그럼 제가 가만히 있어야 돼요?

아니면 제가, 아니, 이 보세요. 제가 지금 주님이 보내서 온 건데, 저를 거절한다는 게 말이 돼요? 이러면 당신 벌 받습니다! 뭐 이렇게 한 마디라도 하고 와야 되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건 아니지요. 오지 말라고 하면 저는 아 예, 알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는 더 이상 방문하지는 않지요.


제가 인터넷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 수많은 분들께 전도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 그러면 보내지 말라는 사람도 있어요. 가끔은 심한 말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 참 그런 거친 말을 하는 사람들 보면, 어떤 때는 꽤 유명한 대학 교수님이라는 분들도 계세요.

아무튼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안 좋죠. 저는 메일을 보낼 때 보면, 그래도 제가 보내는 메일을 받는 분들에 대해서는 주님이 아직 관심을 가지고 계신 증거다, 라고 생각하고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만, 그래도 그 마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 사실을 강요하게 된다면 이는 전도를 내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이 전도나 선교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나 강요가 아닌 은혜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끔 보면 전도 간증이라고 하면서 누구를 끈질기게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했다는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만,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싫다는 사람한테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교회로 데려오라는 말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의 고백에서 본다면,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얼마나 겸손하고 진정한 전도 방법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5장 17절~19절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7節~19節
“17.ですから、神への奉仕について、私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誇りを持っています。
18.私は、異邦人を従順にするため、キリストが私を用いて成し遂げてくださったこと以外に、何かをあえて話そうとは思いません。キリストは、ことばと行いにより、
19.また、しるしと不思議を行う力と、神の御霊の力によって、それらを成し遂げてくださいました。こうして、私はエルサレムから始めて、イルリコに至るまでを巡り、キリストの福音をくまなく伝えました。”


여기서 일루리곤(イルリコ)이라고 하는 곳은 바울이 전도한 지역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지금의 알바니아라고 해서 이태리 반도 동쪽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자신은 주님이 자기를 통하여 역사히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모든 일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결과 두루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사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도 바울만큼 놀랍고도 역사적인 성과를 가져온 선교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유심히 보면, 여기에는 흔히 선교사들이 내세우기 쉬운 성과, 자기가 개척한 교회가 몇 개다, 성도 수가 몇 명이다, 헌금액이 얼마다 하는 그런 말이 일체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면서 그 일을 감당했다는 감사의 마음만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에 의한다면 이는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대로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주님은 지금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중요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아브라함은 그가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라고 하는 토대 위에 하나님의 역사를 쌓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있어야 해요.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지만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행함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기도나 금식만 백날 해봐야 힘만 들고 배만 고픕니다.

진정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성경이 없다면 그 빈 자리를 누가 채웁니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이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죠. “내가”라고 하는 이 더럽고 지저분한 우상이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3장 15절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耳を傾けて聞け。高ぶるな。主が語られたからだ。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ついて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とすれば、です。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 <내가><(私は、私が)>라고 하는 우상, 거만, 교만, 오만, 자만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새 사람을 입고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달아 그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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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9회 버림 받은 예수님
2023년 9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マタイの福音書 27章 46節
“46.三時ごろ、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これは、「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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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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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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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버림 받은 예수님” 見捨てられ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은 계속해서 로마서 강해를 이어가고자 했습니다만, 지난 주에 어느 일본 분으로부터 메일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의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묻습니다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고 예수님은 버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부활이 있었다고는 하나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귀 교회에서 믿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침묵으로써 내버린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이후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이지 않는 예수님입니까.”

以前から持っていた疑問です。
十字架にかかった時、イエスは神様に尋ねますが、神様は答えずイエス様は捨てられました。
その後復活があったとはいえ、イエス様は歴史的に姿を消します。
貴教会で信じているのはイエス様を沈黙で出してしまった神様ですか。
それとも十字架以後、これといった行動を見せないイエス様ですか

간혹 이런 저런 메일을 받곤 합니다만, 이 메일을 받아보니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 글 내용을 보면 성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분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로마서 강해를 잠시 쉬고, 숨 좀 돌리는 의미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본 다음에 다시 강해로 넘어갈까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선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왜 침묵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다음 장면에 대한 질문으로 생각됩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50절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さて、十二時から午後三時まで闇が全地をおおった。
三時ごろ、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これは、「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そこに立っていた人たちの何人かが、これを聞いて言った。「この人はエリヤを呼んでいる。」
そのうちの一人がすぐに駆け寄り、海綿を取ってそれに酸いぶどう酒を含ませ、葦の棒に付けてイエスに飲ませようとした。
ほかの者たちは「待て。エリヤが救いに来るか見てみよう」と言った。
しかし、イエスは再び大声で叫んで霊を渡された。

이 장면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3절~37절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さて、十二時になったとき、闇が全地をおおい、午後三時まで続いた。
そして三時に、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エロイ、エロイ、レマ、サバクタニ。」訳すと「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そばに立っていた人たちの何人かがこれを聞いて言った。「ほら、エリヤを呼んでいる。」
すると一人が駆け寄り、海綿に酸いぶどう酒を含ませて、葦の棒に付け、「待て。エリヤが降ろしに来るか見てみよう」と言って、イエスに飲ませようとした。
しかし、イエスは大声をあげて、息を引き取られた。

여러분께서는 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혹시 몇 시인지 아시나요?

마가복음 15장 25절에 보시면 그 시간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彼らが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たのは、午前九時であった。

여기서 시간 표기 방법에 대해서 잠시 말씀 드리자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시간은 유대식 시간 표기이고,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 표기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시간은 알기 쉬워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간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시간에 대한 구절이 네 군데가 있는데, 그 중에서 4장 6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4장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이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장면인데, 그 때가 여섯 시쯤 되었다고 하니까 이는 지금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녁 여섯 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시는 상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같이 물을 길으러 나와야 하는데, 낮에는 햇빛이 강하다 보니까 오후 6시, 그러니까 저녁 때쯤 해서 여인들이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로마식 시간표기를 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유대식 시간으로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되냐 하면, 동이 트는 아침 시간을 0시로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대략 아침 해가 뜨는 오전 6시를 0시로 잡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오전 6시가 0시, 오전 9시가 제 삼시, 오후 12시가 제 육시, 그리고 오후 3시가 제 구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시간 순서로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마가복음 15장 25절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彼らが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たのは、午前九時であった。

마태복음 27장 45절
“45.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さて、十二時から午後三時まで闇が全地をおおった。

마태복음 27장 46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三時ごろ、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これは、「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마태복음 27장 50절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しかし、イエスは再び大声で叫んで霊を渡された。

이와 같은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제삼시 그러니까 오전 9시 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시간 뒤인 제육시부터 제구시 즉 오후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되고, 제 구시, 그러니까 오후 3시 경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잠시 후 큰 소리를 지르시고는 숨을 거두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침 9시 경부터 오후 3시 경까지 약 6시간 동안이나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계산이 됩니다.

자, 여기까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대략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분의 질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三時ごろ、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これは、「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마가복음 15장 34절
“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そして三時に、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エロイ、エロイ、レマ、サバクタニ。」訳すと「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意味である。

이 원어와 번역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만, 일단 오늘은 성경적으로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마태, 마가복음 모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선 참고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즉흥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는 예수님께서 시편을 인용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2편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わが神 わが神 どうして私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 私を救わず 遠く離れておられるのですか。 私のうめきのことばにもかかわらず。

이 말씀만으로 본다면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왜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안 하세요?

예, 사랑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당연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니까 사랑하겠지?

아뇨.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있어요.


마태복음 3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そして、見よ、天から声があり、こう告げた。「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

다음으로 마태복음 17장에 보시면 이른바 변화산 사건 때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彼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見よ、光り輝く雲が彼らをおおった。すると見よ、雲の中から「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彼の言うことを聞け」という声がした。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수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몸부림을 치신다면, 어, 그래. 얼마나 힘들겠니. 알았어. 내가 구해줄게……라고 하시고 당장 내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게 메일을 보내주신 그 분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아무런 도움도 두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완전히 외면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버림을 당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기도를 끝까지 외면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입장이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본체이시자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뜻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약에 나온 율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その死体を次の日まで木に残しておいてはならない。その日のうちに必ず埋葬しなければならない。木にかけられた者は神にのろわれた者だからである。あなたの神、主が相続地としてあなたに与えようとしておられる土地を汚してはならな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라고 율법은 기록합니다.

이에 대해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キリストは、ご自分が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者となることで、私たちを律法ののろ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みな、のろ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이보다 앞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その翌日、ヨハネは自分の方にイエスが来られるのを見て言った。「見よ、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子羊。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그 한 몸에 모두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자가 되어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게 되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모두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그와 같은 인물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사울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에 그는 아무런 노력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망각하고, 오직 자기 욕망을 채우고,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와 같은 사울을 하나님께서는 몇 번을 참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끝까지 참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게 되지요. 그러자 그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사무엘상 28장 6절~7절
“6.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7.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サウルは主に伺ったが、主は、夢によっても、ウリムによっても、預言者によってもお答えにならなかった。
サウルは家来たちに言った。「霊媒をする女を探して来い。私が彼女のところに行って、彼女に尋ねてみよう。」家来たちはサウルに言った。「エン・ドルに霊媒をする女がいます。」

여기서 <우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한 하나의 도구입니다만, 사울이 하나님께 어떠한 방법으로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응답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신접한 여인, 지금으로 말하자면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죄,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나무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를 확인시켜주는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절규이자 하나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罪の報酬は死です。しかし神の賜物は、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永遠のいのちです。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벌금형도 있고 금고나 징역형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있어서의 죄에 대한 형벌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최종 결재권자인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되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는 사면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이 완료가 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모두 용서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모든 내용을 하나로 압축한 구절이 바로 로마서 4장 25절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제대로 서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무슨 어려운 교리나 복잡한 증명이 필요 없어요.

로마서 4장 25절 이 한 구절을 100프로 믿을 수 있느냐 아니냐 그 뿐입니다.

누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닌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라고 해요.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무슨 마리아가 죽는다고, 베드로가 죽는다고 우리의 죄가 해결됩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떠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죽음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다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자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구절을 그야말로 토시 하나 빠트리지 않고 완전하게 믿어야지만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둘째로 예수님은 부활 이후로 자취를 감추셨다고 하는데, 이를 믿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자, 신약성경의 구조를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은 총 27권이지요?

이 중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복음서, 즉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실 때의 기록을 주로 담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대한 기록들은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를 비롯해서 유다서까지 21권은 서신,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편지입니다.

여기에서는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글을 쓴 것이기 때문에 따로 예수님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초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바울을 예수님이 직접 부르십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데,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령님은 유일하게 형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계시록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마침내 예수님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자, 우리 한 번 복습해볼까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있습니다. 구약은 오래된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약속을 뜻한다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 하시나요?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이 초림하신다는 약속이었고, 신약은 예수님이 재림 그러니까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지요.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신약 성경에도 넘쳐납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そしてこう言った。「ガリラヤの人たち、どうして天を見上げて立っているのですか。あなたがたを離れて天に上げられたこのイエスは、天に上って行くのをあなたがたが見たのと同じ有様で、またおいでになります。」

요한계시록 1장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見よ、その方は雲とともに来られる。すべての目が彼を見る。彼を突き刺した者たちさえも。地のすべての部族は彼のゆえに胸をたたいて悲しむ。しかり、アーメン。

요한계시록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見よ、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裸で歩き回って、恥ずかしい姿を人々に見ら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目を覚まして衣を着ている者は幸いである──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23절~27절
“2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そのとき、だれかが『見よ、ここにキリストがいる』とか『そこにいる』とか言っても、信じてはいけません。
偽キリストたち、偽預言者たちが現れて、できれば選ばれた者たちをさえ惑わそうと、大きなしるしや不思議を行います。
いいですか。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前もって話しました。
ですから、たとえだれかが『見よ、キリストは荒野にいる』と言っても、出て行ってはいけません。『見よ、奥の部屋にいる』と言っても、信じてはいけません。
人の子の到来は、稲妻が東から出て西にひらめくのと同じようにして実現するのです。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지금도 보면 자기가 무슨 재림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예, 누구는 몇몇 이름을 알기도 하겠지만 또 워낙 많으니까 다 알지 못하잖아요?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 사람들은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번개가 칠 때, 꼭 누가 지금 번개가 쳤다고 해야 알아요? 아니에요.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압니다. 그 임하는 것이 번개가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다고 하시잖아요.

번개 즉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킬로입니다. 지구 둘레는 4만킬로이니까 30만 킬로면 어떻게 돼요? 예, 30만 나누기 4만은 7.5, 그러니까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도는 속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되면 그 정도의 속도로 그 사실이 온 지구상에 알려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믿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환상이 아니에요. 그 때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も用心していなさい。人の子は思いがけない時に来るのです。

이미 그 때가 이른 다음에는 늦습니다. 더 늦기 전에 미리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이자 성경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맺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20절~21절
“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버림 받으신 예수님,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준비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기쁨으로 그 날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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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8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2023년 9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4절~16절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4節~16節
“14.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自身、善意にあふれ、あらゆる知識に満たされ、互いに訓戒し合うことができると、この私も確信しています。
15.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16.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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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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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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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8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②” 聖書をどう読むか② 라는 제목으로 지난 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물건을 잊어버리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 신문을 보니까 이른바 분실물에 대한 기록이 있길래, 잠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분실물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우산을 보니까, 작년 일본 동경에서의 자료에 의하면 습득한 우산 개수가 280,763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인 없는 우산이 신고가 들어온 총 개수가 동경만 해도 한 해에 28만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저도 얼마 전에 우산 하나를 두고 오는 바람에 나중에 따로 가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산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어떤 일본 신문을 보니까 흥미로운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산을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내용이었어요.


어느 한 심리학자 교수에 의하면,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다는 것입니다. (体から離さない)

자기는 좀처럼 바람이 강한 날이 아니면, 접는 우산을 가지고 나간다고 해요. 그래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실내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접어서 가방에 넣는다고 합니다.

둘째는, 비싼 우산을 산다는 것입니다.. (高い傘を買う)

앞서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작년 동경에서 발견된 우산 28만개 중에서 실제로 분실신고가 들어온 건수는 6,200개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잃어버린 우산 중에서 고작 2.2% 밖에 안 되는 숫자예요. 말하자면 나머지 97% 이상, 27만개 이상의 우산은 별로 찾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 잃어버려도 별로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반대로 본다면 그렇게 싸구려 우산을 사니까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지만, 비싼 우산을 사면 그만큼 안 잃어버리려고 신경을 더 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 살 때 비싼 우산을 사면 싸구려 우산을 샀을 때보다는 훨씬 더 안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셋째는, 시간적 여유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時間的余裕を作る)

특히 전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내리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내리게 되면, 정신이 없어서 우산을 잃어버리게 될 수가 있으니까, 자기가 내리기 몇 정거장 전부터 스마트폰 같은 것은 집어넣고 내릴 준비를 하게 되면 우산도 챙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넷째는 포스트잇이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付箋やほかの人の記憶を利用する)

자기가 있던 자리나 가방 같은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게 되면 나중에 그것을 볼 때, 우산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고, 그리고 그게 불편할 경우에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한테 “내가 좀 잘 잊어버려서 그런데, 있다가 우산을 챙기라고 말해줘”라고 해 놓으면, 만약에 자기가 깜빡했다고 하더라도 옆사람이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우산을 두고 오는 일을 줄일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왜 느닷없이 우산 이야기를 드리느냐 하면 이 분실물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제목을 보았습니다. 그 제목이 뭐였냐 하면 <기도가 먼저냐 전도가 먼저냐>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글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제목만 보고 제 마음이 적지 않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그 반면에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하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먼저입니까. 전도가 먼저입니까.

이는 마치 배가 고픈 상황에서 과자가 먼저냐 아이스크림이 먼저냐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기도나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에 있어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인지 신약인지, 노아가 먼저인지 모세가 먼저인지, 누가 사울이고 누가 바울인지, 누가 요한이고 누가 요셉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를 하고 무엇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저 기도하고 금식하면 성령님이 임하고 은사도 받고 축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

만약에 그렇다면 <오직 말씀>이라고 하면서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주장을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도 좋고 전도도 중요하지만, 말씀 없는 기도나 말씀 없는 전도는 그야말로 믿음이라고 하는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영적인 골다공증, 아니면 흰개미가 갉아먹은 낡은 목조건물처럼, 어느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완전히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성경말씀을 알아야지만 제대로 기도도 할 수 있고 제대로 전도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앞서 말씀 드린 우산 이야기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예,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体から離さない)

우리는 성경 말씀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께서는 아, 그래, 어디를 가든지 성경책을 항상 들고 다녀야겠구나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교회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때 보면 꼭 성경책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저도 그랬습니다만, 그러면 그 분들이 기도하다가 가끔 성경을 펼쳐 보시나 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냥 앞에 놓고 기도하거나 들고 기도하거나 하다가, 기도가 끝나면 그냥 들고 나가십니다.

여러분,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책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책은 책일 뿐이고 그냥 종이입니다. 그런데 가볍지도 않은 그걸 들고 다니면서 안에는 뭐가 적혀 있는지 보지도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건 마치 아주 좋은 약이라고 하면서 먹지는 않고 맨날 가방에 넣어서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가끔 보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에이,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어떻게 성경대로만 살아?”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것은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죽은 말씀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무슨 뜻이 됩니까. 예수님이나 십자가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다 그냥 책에 적혀 있는 이야기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바로 그 말이 되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슨 옛날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아니에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항상 우리의 머리 속, 그리고 마음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둘째는, 말씀의 가치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싸구려 우산은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얼마 하지 않는 것 까짓거 다시 사면 그만이잖아요. 귀찮게 찾아 나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잃어버렸던 우산이 별볼일 없는 것이었다면 굳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끼는 우산이었기 때문에 굳이 거기까지 가서 다시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성경책은 어떻습니까. 이 책이 그냥 우리 손까지 들어온 것 같나요?

생각해보십시오. 이 책이,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와 있습니까. 그것은 우연히 어쩌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이 복음이 바울을 거쳐 우리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당한 고난을 한번 볼까요?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8.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9.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3.……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24.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25.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26.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27.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참으로 눈물겹지 않습니까. 사실 바울은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라서 지금으로 본다면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청년관료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이와 같은 고생을 감수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고난은 바울만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쓴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4.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5.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6.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충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고, 이는 몇 년 전이나 몇 십년 전이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불러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를 알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의 그 귀한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과 동행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ですから、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う者はみな、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を襲っても、家は倒れませんでした。岩の上に土台が据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
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누구는 집을 단단한 반석 위에 지었고, 누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에 비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들겠지요. 기둥 하나 박기 위해 구멍을 파려고 해도, 단단한 바위 때문에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냥 기둥을 푹푹 꽂으면 세워집니다. 그러면서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을 보고 비웃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쁜 세상에 언제 그 단단한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앉았어. 참 미련하게 말이야. 사람이 효율을 생각할 줄 알아야지. 저런 반석 위에 집을 한 채 지을 시간이면, 여기 모래 위에는 집 10채라도 더 세우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바람이 불고 홍수가 닥치자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튼튼하게 서 있을 수 있었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예전에 노벨상을 받은 어떤 교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통 수학이나 과학에서 어떤 문제를 풀 경우를 보면 미리 정해진 공식에 따라 거기에 숫자를 대입해서 풀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 무엇보다 공식을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교수님은 수상 연설에서. 자기는 학생 때 어떤 문제를 보면, 학교에서 가르쳐준 공식을 쓰지 않고 풀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 문제를 풀더라도 다른 학생들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냐 하면, 공식 하나를 배우더라도 단순히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식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특히 공부 같은 경우를 보면, 무슨 머리 좋은 척하고 효율을 따지면서 공부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인 공부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보면 많은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라고 합니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를 다 읽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성경에 어떤 말씀들이 적혀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귀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래 다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말씀을 띄엄띄엄 밖에 모른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어떤 흐름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어서, 결국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그야말로 누더기와 같은 성경지식이 되고 말아요. 그런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 삶에 있어서 무슨 힘이 되겠으며, 우리 믿음에 있어서 무슨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휴, 그 두꺼운 성경을 언제 읽고 있어……가 아니라, 시간에 여유를 갖고 말씀을 믿음의 양식 삼아 미리미리 담아두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로 이 목사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설교에 있어서 생전처음 듣는 말씀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맨날 새로운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겠지요.

사실 목사의 임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고, 그 말씀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설명을 드리는 것, 그것이 가장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제 개인적인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많이 말씀 드리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이 기록하기를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도 어련히 잘 하고 계실 줄 알지만,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예배를 인도한다면서 이 강단에 서서, 성경에도 없는 제 꿈이나 환상 이야기나 하고, 세상 정치 이야기나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쩌면 그게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목사로서 할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 어느 SNS에 보니까 누가 이런 글을 써 놨더라고요.

자기는 목사인데, 정치인 누구를 지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그 낯뜨거운 말도 같이 말합니다. 그런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시죠? “제 말을 사람 말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 말입니다.

아니, 자기가 하는 말을 사람 말로 듣지 않으면 뭔데요? 자기가 무슨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라도 된다는 소리입니까.

가끔 이렇게 보면 자기가 목사라고 하면서 무슨 대단한 영적인 사람, 그야말로 물 위라도 걸을 수 있을 것처럼 하고, 여차하면 당장 홍해라도 가를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 설교 동영상을 봤는데, 이 분은 그래도 좀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설교에서 하시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말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그냥 <우리>면 <우리>지, <저와 여러분>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는 누구고 여러분은 누군데요? <자기>는 목사님이니까 특별하고 <여러분>은 목사님이 아니니까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들을 부끄럽지도 않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봅니다.

로마서 15장 15절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여기서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되어 있지요?

자, 여기 원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한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 예수님의 말씀을 적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제 말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예, 여기서 제 말을 안 믿겠다고 하면 좀 서운하겠죠?

그럼 백 보 양보를 해서 제 말을 믿으셨다고 쳐봐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적어왔다고 해요. 그렇다면 이 글이 이제부터 무슨 야고보서나 유다서와 같은 성경처럼 성필서……가 된다? 안 된다?

되긴 뭐가 되겠습니까. 이 원고요? 예전에 무슨 강연할 일이 있어서 그 때 써 둔 원고예요. 그 때 썼던 원고를 그냥 이면지에 찍어 두었던 거예요.



갈라디아서를 봅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8절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6.私は驚い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自分たちを召してくださった方から、このように急に離れて、ほかの福音に移って行くことに。
7.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8.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여러분,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 더 이상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이것이 성경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웬만하면 목사님 하시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말씀이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었을 때에 한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완전히 자기 생각으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말, 세상적인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에 목사님 말씀이라고 해서 꼭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성경적이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2.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예, 성경을 많이 읽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제 떡만이 아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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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7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2023년 8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4절~16절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4節~16節
“14.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自身、善意にあふれ、あらゆる知識に満たされ、互いに訓戒し合うことができると、この私も確信しています。
15.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16.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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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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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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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7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①” 聖書をどう読むか①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드릴 말씀이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늘과 다음주로 2회에 걸쳐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ペテロに働きかけて、割礼を受けている者への使徒とされた方が、私にも働きかけて、異邦人への使徒と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した。

예수님의 사도 중에서 베드로는 할례자 즉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전파라는 사명을 받았다면 바울 자신은 이방인을 향한 선교라는 사명을 받은 사도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특히 이 서신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수신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만 그 말씀에 적힌 본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 로마서를 ‘너희’에게 썼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인 즉 이방인에게 쓴 서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하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썼는데, 그 이유는 내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략 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 의하면 바울은 그들이 이미 믿음 안에서 잘하고 있는 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썼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성경을 읽어 보셨습니까. 만약에 한 번도 안 읽어 보셨다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 무엇이 성경에서 벗어난 엉터리 가르침인지 구분을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한 두 번 읽어 보셨다고 한다면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라고 하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두 번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학교 교과서도 한 두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든데, 그 방대한 내용의 성경을 몇 번 읽었다고 해서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성경을 수도 없이 많이 읽으신 분 계십니까. 제가 진정으로 말씀 드립니다. 정말로, 정말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전혀 읽지 않아도 문제입니다만, 그저 많이 읽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신 창세기에 대해서 한 번 볼까요.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니, 교회에 전혀 다닌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도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많이 읽어 보신 분들은 뭐 달달달달 외울 정도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러나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아름다운 것으로 넘치고 부족함이 없던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 마저도 빼앗겨서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 없으시죠? 그렇다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는 주일학교에서도 종종 나오는 질문인데,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좀 제대로 만드시지 왜 죄를 범하도록 지으셔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애초에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드셨으면 좋았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뱀이 유혹한다고 거기에 넘어가는 바람에 죄를 짓고 말았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는 아주 모범답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그저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게만 움직이도록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안 지을 수도 있는 그와 같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에요.

이 주장을 누가 처음에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 현재 보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부분의 주석서에 그렇게 적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이 주장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 보니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만약에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한다면, 그런 의지는 꼭 사람한테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는데, 그 강아지한테 공을 던지면 재빨리 뛰어가서 물고 오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공을 던져도 자기가 귀찮으면 안 가지고 와요. 그렇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강아지한테 자유의지를 주신 결과인가요?

이렇게 조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그걸 그대로 베끼면서 그게 하나님 말씀인 줄 알고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야말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고 말았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여기서 제일 잘 못한 건 누구에요? 예,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쓸데없이 자유의지를 주신 바람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달리도록 만드셨다면, 가장 비난 받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비난 받아야 한다? 이는 궤변입니다. 절대로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에 담긴 뜻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성경을 수십 번 읽은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에요.


자, 이 논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자유의지>라는 단어입니다. 누가 집어넣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엉뚱한 단어를 집어넣으니까 그 결과가 뭐예요? 예, 가장 잘못한 분은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결론밖에 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풀어야 한다? 예, 그렇습니다.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선 기본적으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하는 자유의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성경에 그와 같은 기록이 나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굳이 마귀 사탄의 유혹이 없었다 하더라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을 하는 부분이 나올 만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고민을 한 결과, 아, 역시 먹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뱀을 가장한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해서 유혹할 때까지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그 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유의지고 뭐고 간에 그들은 그와 같은 생각, 말하자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 사탄이 귓가에서 속삭였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죄에 대한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장면을 보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자유의지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예를 들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전거가 초보일 때에는 정말 달리는 모습도 불안정하고, 커브를 돌 때 같은 경우에 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몇 년 정도 자전거를 탔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없겠지요.

정말 자전거에 어디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일은 거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말합니다. 지금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넘어져보세요……라고 하면 가능할까요?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인데 자전거 핸들을 엉뚱한 데로 꺾으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어느 정도 타는 사람이 이를 하기 위해서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안 넘어지도록 핸들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억지로 넘어지게 한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핸들을 꺾는다? 여러분께 이를 해보시라는 말씀은 절대로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웬만한 각오가 없으면 이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떨까요. 마귀가 속삭입니다. 너, 돈 필요하지? 저기 서 있는 고급차 보여? 그 차가 출발할 때 그 앞에서 힘껏 넘어져봐. 그러면 돈을 뜯어낼 수 있을 거야.

이런 유혹이 들어왔을 때 넘어가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전거가 아니라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달리는 차 앞에 일부러 맨몸으로 뛰어나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 여러분도 들어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맨정신인 사람한테 칼을 주면서, 자, 이 칼로 저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공격해……라고 누군가가 한다면,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냐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 되어 있을 때, 마귀 사탄이 유혹을 한다면 이와 같은 범죄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뉴스를 통해서도 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우리에게도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해야 하겠지요.

만약에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아담과 하와도 이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되냐 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유의지로 인하여 죄를 짓는다는 행위를 선택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내용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 구절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堅く信仰に立って、この悪魔に対抗しなさい。ご存じのように、世界中で、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が同じ苦難を通ってきているのです。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귀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되어 그 유혹에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단 한 번도 이를 먹어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유혹을 하자 그들은 비로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17절~18절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もし一人の違反により、一人によって死が支配するようになったのなら、なおさらのこと、恵みと義の賜物をあふれるばかり受けている人たちは、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いのちにあって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즉 아담은 한 범죄를 저지름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정죄 즉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 것은 <의로운 행위(義の行為)>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그 행위가 죄악이었다고 한다면, <의로운 행위>는 그 열매를 먹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접근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었는다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열매를 먹지 않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답은 결국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우리는 그 열매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더러 금하신 구체적인 행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거나 어디를 가지 말라고 하셨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이 불순종,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이렇게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점은,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것이 그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몇 번 읽었느냐 하는 것은, 마치 교회에 몇 년 다녔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한 구절 읽었다 하더라도, 단순히 유명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맞겠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 그와 같은 마음 가짐이 필요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이 귀한 로마서를 썼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에게 A냐 B냐, 라고 하는 식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불순종이냐, 순종이냐>, <육신이냐, 영이냐>, 그리고 <멸망이냐 영생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이제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깨달아 감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을,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통해서, 마침내 멸망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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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6회 순결한 소망
2023년 8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0절~13절
“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0節~13節
“10.また、こう言われています。「異邦人よ、主の民とともに喜べ。」
11.さらに、こうあります。「すべての異邦人よ、主をほめよ。すべての国民が、主をたたえるように。」
12.さらにまたイザヤは、「エッサイの根が起こる。異邦人を治めるために立ち上がる方が。異邦人はこの方に望みを置く」と言っています。
13.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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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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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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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6번째 시간으로서 “순결한 소망” 混じり気のない望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 중에서 우선 12절과 13절을 보고 난 다음에 10절과 11절로 돌아오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2절
“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2.さらにまたイザヤは、「エッサイの根が起こる。異邦人を治めるために立ち上がる方が。異邦人はこの方に望みを置く」と言っています。

이 말씀 중에서 12절은 이사야 서를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여기서 이새의 뿌리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새는 누구입니까. 그렇죠.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새의 뿌리에서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메시야 즉 구세주가 누구냐 라고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계보에 보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이새와 다윗을 거처 요셉 그리고 예수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는데, 이는 바로 <열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본다면 이사야 11장 10절이나 로마서 15장 12절에 보면 모두 <열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어나 다른 번역본을 본다면, 이사야 서에서의 <열방>을 <모든 민족>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 로마서에서는 이를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방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소망을 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우선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것처럼 이새의 뿌리, 이새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육적인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이방인 즉 이 세상 모든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서 소망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12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13절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5장 13절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것,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은 홀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에 그 시작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으로 끝나버렸다면 이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더라……라고 하는 옛날 이야기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소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지금까지는 많은 내용들을 좀 간략하게 정리를 했기 때문에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새의 뿌리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이전에는 안 계셨다는 뜻은 아니지요.



요한복음 1장 1절~3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으며 하나님 또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 사람처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예수님도 지으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만약에 피조물이었다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별로 대단하지 않을 것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 그것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피조물인 사람은 누군가의 죄를 대신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성경에도 의인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노아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한테 부탁해서, "야, 미안한데 말이야,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네가 대신 십자가에 달려줄 수 있겠니?" 라고 하면 되지 않았겠어요?


역사상 보면 지금까지도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의인이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순교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님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 주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겨졌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집에 있으면서도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는 그러더라고요. 학원에 가지 않더라도 웬만한 자격시험은 인터넷 동영상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딸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직접 시도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사실 정말 그럴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가톨릭의 어떤 한 젊은 신부님이 말씀을 전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왜 그 방송을 클릭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마침 그 동영상을 보니까 미사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모습 같던데, 그 말씀을 들어보니까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독교 개신교는 <오직 성경이다, 오직 말씀이다>라고 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못 마땅하셨나 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독교에는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있지 않느냐, 삼위일체라는 말도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믿으면서, 마리아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듣고 있으니까 좀 흥미롭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나 하고 계속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또 하시는 말씀이, 구약에 보더라도 마리아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 말씀 자체는 맞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는 마태복음에 보더라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되어 예수님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인용하나 했더니만 아니더라고요.

출애굽 당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언약궤에 넣고 이스라엘 자손들, 더 구체적으로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짊어지고 다니잖아요? 그 언약궤가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거예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창세기에 보시면 아버지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주려고 했던 축복을 동생 야곱이 속임수를 써서 가로채 버리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당연히 화를 내지요. 그래서 이 야곱을 죽이겠다고 찾아 나서자 그는 멀리 자기 어머니 고향을 향해 도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28장에 보시면 그 과정에 야곱이 길에서 잠을 자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마리아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마리아가 어디 등장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면서 들어보세요.

이 신부님 말씀에 그렇다는 건데…….

창세기 28장 12절~15절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 12절~15절
すると彼は夢を見た。見よ、一つのはしごが地に立てられていた。その上の端は天に届き、見よ、神の使いたちが、そのはしごを上(のぼ)り下(お)りしていた。
そして、見よ、主がその上に立って、こう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父アブラハムの神、イサクの神、主である。わたしは、あなたが横たわっているこの地を、あなたとあなたの子孫に与える。
あなたの子孫は地のちりのように多くなり、あなたは、西へ、東へ、北へ、南へと広がり、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また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祝福される。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て、あなたがどこへ行っても、あなたを守り、あなたをこの地に連れ帰る。わたしは、あなたに約束したことを成し遂げるまで、決してあなたを捨てない。」

내용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찾으셨습니까. 이 신부님은 이 구절 중에서 어디에 마리아가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의 꿈속에 등장한 사닥다리가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마리아를 인정 안 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었어요.

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넣어두었던 언약궤와 야곱의 꿈속에 나타난 사닥다리가 마리아라고 하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예, 상당히 특수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우스갯소리가 아니에요. 상당히 특수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을 통틀어도 언약궤나 꿈속에 나타난 사닥다리가 마리아라고 하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데 이걸 믿으라는 거예요. 하지만 이를 믿기 위해서는 성경을 초월한 상당히 특수한 믿음이 필요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가톨릭에서 이 마리아라고 하는 개념이 등장한 그 배경에는 사실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복음이 그리스 지역으로 전해지는 가운데에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잘 받아드릴까 하는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에 보면 아프로디테다 아르테미스다 해서 여러 가지 여신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복음에도 여신이라고 하는 요소를 가미 시키면 그 사람들이 더 잘 믿게 되지 않을까 해서, 말하자면 마리아를 여신처럼 해서 전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합니까. 그와 같은 가르침은 성경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더니 문득 한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창세기 6장 1절~3절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さて、人が大地の面(おもて)に増え始め、娘たちが彼らに生まれたとき、
神の子らは、人の娘たちが美しいのを見て、それぞれ自分が選んだ者を妻とした。
そこで、主は言われた。「わたしの霊は、人のうちに永久にとどまることはない。人は肉にすぎないからだ。だから、人の齢は百二十年にしよう。」


이는 노아의 방주 사건이 있기 전에 기록된 내용인데, 대표적인 성경의 난해한 구절 중 하나라고 하지요.

우선 1절부터 볼까요?


창세기 6장 1절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さて、人が大地の面(おもて)に増え始め、娘たちが彼らに生まれたとき、

이 말씀부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은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잖아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위해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당연히 딸들도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이 구절이 그나마 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앞뒤가 거꾸로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굳이 사람들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고, 그 다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2절을 볼까요?

창세기 6장 2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神の子らは、人の娘たちが美しいのを見て、それぞれ自分が選んだ者を妻とした。


여기를 보면 더욱 흥미롭지 않습니까. 1절에는 <그들에게서 난 딸들(娘たちが彼らに生まれたとき)>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이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까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렇다면 창세기 당시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의 딸들과 결혼을 하셨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여기에 보시면 <아들>이 아니라 <아들들(子ら)>이라고 되어 있어요. 즉, <한 아들>이 아니라 <여러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아들들(神の子ら)이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美しい人の娘たち)을 아내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게 참 무슨 내용인지 난해하지요.

그런데 3절을 보면 한 가지 명확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そこで、主は言われた。「わたしの霊は、人のうちに永久にとどまることはない。人は肉にすぎないからだ。だから、人の齢は百二十年にしよう。」


이 구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이고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백이십 년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하여 일부 신학자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나온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해 보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은 100년이 안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사람의 수명이 120년으로 될 것이라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5장에 의하면 홍수 이전에는 나이가 900살 이상까지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만, 홍수 이후에는 그 수명이 점점 줄어들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그 수명이 120세까지 못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수명을 900세에서 120세 정도까지 줄였다는 해석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들과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에 있어서는 바로 복음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고 하는 말을 <하나님의 생각들(思い)>과 <사람의 생각들(思い)>이라고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 그 자체로 남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의 생각들과 뒤섞이게 되어 결국 육신 즉 육의 생각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에 대한 내용으로는 다음 구절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이처럼 영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으로 인해서 오염이 되면 결국은 그 생각이 악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어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순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편 12편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主のことばは 混じり気のないことば。 土の炉で七度試され 純化された銀。

이 구절에서 <순결>이라는 말로 사용된 히브리어 원어는 <테호로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는 <다른 것과 섞이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시고 새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제 이 소망을 온 천하 만민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 만민이라고 해서 꼭 무슨 아프리카나 밀림 오지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아직 복음을 모르는 우리 이웃, 바로 거기가 땅끝이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이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과정에서 성경에 없는 사람의 생각을 전해요?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엉뚱한 사람의 생각을 전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무조건 금식하면 병이 낫는다? 무조건 기도 많이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사실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막무가내 식으로 금식이나 기도만 강조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의 생각이 되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근본은 바로 성경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도 모르고 어떻게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겠으며, 성경도 모르고 금식만 한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뒤섞인 또다른 우상숭배나 미신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15장 10절~1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0절~11절
“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0.また、こう言われています。「異邦人よ、主の民とともに喜べ。」
11.さらに、こうあります。「すべての異邦人よ、主をほめよ。すべての国民が、主をたたえるように。」


이제 우리가 올바른 말씀,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아직 믿음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우리 이웃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한 목소리로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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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5회 해방을 주신 예수님
2023년 8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9절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8節~9節
“8.私は言います。キリストは、神の真理を現すために、割礼のある者たちのしもべとなられました。父祖たちに与えられた約束を確証するためであり、
9.また異邦人もあわれみのゆえに、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れゆえ、私は異邦人の間で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あなたの御名をほめ歌い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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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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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5번째 시간으로서 “해방을 주신 예수님” 解放をくださっ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가상칠언이라는 말씀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가상>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위>라는 뜻이고, <칠언>이라고 하는 것은 일곱가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상칠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하신 일곱가지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彼らは、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が分かっていないのです。」


둘째는 누가복음 23장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日、わたしとともにパラダイスにいます。」

셋째는 요한복음 19장 26절~27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女の方、ご覧なさい。あなたの息子です」/「ご覧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

넷째는 마태복음 27장 46절과 마가복음 15장 34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

다섯째는 요한복음19장 28절
“내가 목마르다”

「わたしは渇く」

여섯째는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完了した」

일곱째는 누가복음 23장 46절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

이렇게 일곱가지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상팔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세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가상칠언에 대해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오늘은 이 중에서 여섯 번째 말씀에 좀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나오는 요한복음 19장 30절 전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られ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た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完了した」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죄를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사역을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모든 사역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은 설교 말씀, 어디 좀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사실 많은 분들께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아니,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은혜로운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저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마침표를 찍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좀 찝찝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 있어서 제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영어 성경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은 영어성경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께서는 마치 원어를 인용하듯이 영어성경을 인용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영어성경도 또한 하나의 번역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글성경의 경우를 본다면 기본적으로 구약은 히브리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신약은 헬라어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성경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느냐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성경 말씀을 살펴볼 때에는 기본적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성경을 사용합니다만, 그 뜻을 살펴볼 때에는 원어도 물론입니다만, 우선 영어 성경을 살펴봅니다.

일단 일본어 성경을 살펴보는 이유는, 동영상 촬영을 할 때 한국어만이 아닌 일본어로도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럴 때에는 일본어 성경을 인용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어는 한국어와 문법상으로도 상당히 유사하고, 그리고 같은 한자권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영어 성경은 어떠냐 하면, 미국이나 유럽 등 영어권을 본다면 동양에 비해 성경 연구에 대한 역사가 월등하게 길고, 그리고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회자 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 성경을 비교해보면 각각 그 번역자들이 원어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원어 성경만을 읽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이 있게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있어서 영어성경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영어권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영어성경은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성경은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KJV (King James Version)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NIV 성경은 가장 일반적인 성경으로서, 단어가 현대어와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본다면 현대인의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NASB 성경은 주로 신학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성경으로 알고 있어요. 좀 문장이 문어체에 다소 가깝습니다. 이 성경이 한글로 본다면 개역개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KJV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한국에서는 흠정역이라고도 하는 성경입니다. 이 흠정역은 한글로 번역한 한국어판 킹제임스 성경도 있습니다.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일부 단체에서는 오로지 이 KJV 흠정역 성경만이 진정한 성경이라고 하면서 다른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은 물론이고,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흠정역 모두 공인된 성경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어떨까요.

한국어 성경에 본다면 개역개정만이 아니라 표준새번역,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 모두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新共同譯 「成し遂げられた」
新改譯 「完了した。」
口語譯 「すべてが終った」

자, 그렇다면 영어성경에 있어서 이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개역개정 성경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한다면, 언뜻 생각하기에 <done>이나 <complete> 처럼 <성취했다>, <완료했다>는 뜻의 단어가 쓰였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영어성경을 보면 앞서 말씀드렸던 대표적인 영어성경에서 모두 <finished>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어요.

이를 번역하면 <성취했다>거나 <완료했다> 라기 보다는 그냥 <끝났다> 라는 뜻이 되어버리거든요.

아니,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고 역사도 깊은데, 왜 <다 이루었다> 또는 <완료했다>는 단어가 아니라 굳이 <끝났다>는 말을 썼는지 오랫동안 의문이었습니다.

참고로 헬라어 원어는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어느 쪽으로든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만약에 이를 <다 이루었다>거나 <완료했다>가 아니라 <끝났다>라고 번역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다 끝났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적지 않게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일단 처음 드는 의문이 <뭐가 끝났다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그래, 뭐, finish 라는 단어에도 의역을 한다면 <다 이루었다>, <완료했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치자……이 정도로, 말하자면 타협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어? 이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등장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어쩌면 <다 끝났다>였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 끝났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와 <다 끝났다>. 이 두 말씀 중에서 <다 끝났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좀 단순하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다 끝났다>라고 하셨다면, 성경에는 다른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끝난다> 즉 <끝>이 있다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끝>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바로 <시작>입니다.

나중이 있다면 처음이 있어야 하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끝났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무엇이 끝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반대말인 <시작>을 찾아야만, 그 끝난 것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의 반대편에 있는 <시작>은 어디일까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시작>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영상을 보시거나 음성으로 들으시는 분께서는 잠시 멈추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성경에서 <시작>은 어디일까요.

자, 조금 더 쉽게 말씀 드려볼까요? 성경에서 <시작> 그러니까 다른 말로, <태초(はじめ)>는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끝>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디냐 하면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무엇을 말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말씀으로 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모두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私たちは、律法が霊的な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しかし、私は肉的な者であり、売り渡されて罪の下にある者です。

로마서 7장 22절~24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나 창세기에서 시작된 죄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해도 내 안에 있는 죄가 자꾸만 나를 사로잡고 있어요. 내 힘으로는 내 능력으로는 이를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또 그로 인해서 다른 죄를 짓게 되고 맙니다.

이 악순환을 끝내려고 해도 내 힘으로는 끝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비롯된 이 죄의 악순환을 끝내주시고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9절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私は言います。キリストは、神の真理を現すために、割礼のある者たちのしもべとなられました。父祖たちに与えられた約束を確証するためであり、
また異邦人もあわれみのゆえに、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れゆえ、私は異邦人の間で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あなたの御名をほめ歌い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예수님께서는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割礼のある者たちのしもべとなられました)고 하는데, 그 이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잠시 여기서 우리는 법률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 나라에 있는 헌법이나 법률은 기본적으로 누가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이는 원칙적으로 당연히 그 나라 국민이 지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요. 말하자면 그 나라의 국민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명시해 놓은 것이 바로 그 나라의 헌법이자 법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습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율법은 출애굽 때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즉 이 율법을 지켜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들이었던 것이고, 그 징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할례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시면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고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징계를 받지도 못하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가 없어요.

어쩌면 예수님께 있어서 가장 쉬운 일은 율법을 없애 버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에 율법을 만드실 수도 있고 없애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있었는데, 그 법률을 없애 버렸어요. 그러면 그 법이 있었을 때에는 그 행위가 범죄였습니다만, 그 법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 행위는 범죄가 아니게 됩니다. 범죄가 아니게 되면 당연히 처벌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만약에 율법을 없애 버리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율법을 없애 버리게 되면 이제 사람을 처벌할 근거가 없어졌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 있어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처벌할 근거를 없애 버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쉽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쉬운 일은 율법을 없애 버리는 일이겠지요. 그러면 우리도 죄에서 해방이 되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도 먹고 알도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 치고 가제 잡고, 마당 쓸고 돈도 줍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희한하게도 예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그대로 둔 채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는 쪽을 선택하셨던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보다 머리가 좀 딸려서 깜박하고 미처 그런 생각을 못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중에서 9절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로마서 15장 9절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また異邦人もあわれみのゆえに、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れゆえ、私は異邦人の間で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あなたの御名をほめ歌い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서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율법을 폐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순종이자 반역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요, 정면으로 반항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택하셨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율법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그 저주와 사망을 끝내주시고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요한계시록 말씀이 새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わたしはアルファであり、オメガである。最初であり、最後である。初めであり、終わりである。」

예수님께서는 시작하실 능력도 있으시고 끝내실 권능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 끝내는 권능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만약에 거기서 끝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셨나요?

사도행전 2장 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しかし神は、イエスを死の苦しみから解き放って、よみがえらせました。この方が死につながれていることなど、あり得なか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아닌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하나님이 살리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 시작과 끝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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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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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4회 삶의 목적
2023년 8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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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6절~7절
“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6節~7節
“6.そうして、あなたがたが心を一つにし、声を合わせ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をほめたたえますように。
7.ですから、神の栄光のために、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受け入れ合いなさい。”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4번째 시간으로서 “삶의 목적” 人生の目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6절 말씀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6절
“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6節
“6.そうして、あなたがたが心を一つにし、声を合わせ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をほめたたえますように。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한 번 볼까요.


이사야 43장 21절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지은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세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사야서를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이사야 48장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송과 영광을 결코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기록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제가 좀 성격이 온순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좀 낯간지럽지 않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았으면 좋겠다……뭐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생각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런 걸 받아서 뭐하게? 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해서 백성을 만드셨다고 하세요.

오늘은 우선 이 점부터 알아보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회사에 대해서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어떤 회사에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회사 사장님이 조회 시간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해요.


“제가 이 회사를 세운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이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이윤을 창출할 생각이 없어요. 우리가 설령 이득을 보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회사가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새로 회사에 들어갔는데, 회사 사장님이나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한 가지 권고 말씀을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그 회사, 당장 그만 두세요. 더 늦기 전에 나오셔야 합니다…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 이유가 뭐예요. 예, 항상 말씀 드리듯이, 회사라고 하는 곳은 봉사단체가 아니에요. 정치단체도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선 돈을 벌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임이 바로 회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장님이 회사를 만들어 놓고는 회사로서 가장 중요한 목적인 돈을 벌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회사가 무슨 국민들 세금으로 운영되는 관공서도 아니고,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자선단체도 아니잖아요.

물건을 만들어서 팔든 서비스를 제공하든지 해서 어떻게 해서든 간에 이윤을 만들어야 회사도 운영하고 직원들 월급도 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회사라고 하면서 이득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이는 다시 말해서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해요? 예, 더 늦기 전에 그런 회사는 빨리 나오는 것이 상책인 것이지요.

우리가 무슨 뭐, “돈 때문에 일을 한다” 라고 하면 안 좋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회사라고 하면서 돈을 안 벌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동차를 팔겠다면서 자동차를 안 만드는 회사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본질이 빠진 말이라는 것이지요.

회사 사장님이 회사를 차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조금 더 있어 보이게 표현한다면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장님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께서 회사를 차렸어요. 그러면 일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일단 몇 명이라도 직원들을 뽑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직원은 최소한 회사에서는 누구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죠. 회사를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사장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선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이사야 43장 21절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여기서 <이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를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이 직원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뽑았나니 나를 위해 일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하면 너무 이기적으로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이게 사실 아니겠습니까. 사장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요. 그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려고 해요. 그렇다면 직원들은 그 사장님을 위해, 말하자면 사장님이 돈을 벌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하나로 해서 일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게 사장님만을 위한 일이에요? 사장님이 돈을 벌고 회사가 영업이익을 내야지만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있고 예상보다도 훨씬 큰 이익을 냈다고 하면 특별보너스 같은 것도 있겠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나 장비들도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고, 직원들에게는 주거비나 자녀들 교육비 지원이 있을 수도 있고, 기타 여러 복리후생 같은 혜택도 제공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회사가 맨날 돈이 안 되는 일만 해요. 사장님은 돈을 벌 생각이 없고 맨날 골프만 치러 다닌다거나 이상한 곳에만 돈을 써요. 그러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지요.

또한 요즘은 취업난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뽑히는 것보다도 뽑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에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고는 합니다만, 사실 뽑히는 쪽 그러니까 지원자 입장 보다도, 신입사원을 뽑는 회사 쪽 입장이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직원 입장에서는 싫으면 그냥 그만 두면 돼요.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사장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너 모가지야” 라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은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직원을 함부로 그만두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뽑아 놓으면 그야말로 범죄나 정말 심각한 악의적인 행위가 없는 이상, 단순히 일을 못한다고 해서 자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직원 하나를 뽑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회사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그만큼 신중하게, 경우에 따라서는 몇 번이나 면접을 보고 검토를 거친 다음에 선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앞서 살펴본 이사야 42장과 48장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이사야 48장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우리 회사에서 뽑은 우리 회사 직원이라면 당연히 우리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직원이 우리 회사 사장님이나 회사 이름을 더럽힐 뿐 아니라 다른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어요.

만약에 이렇게 된다고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업무상 배임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이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설마 돈 몇 푼을 원하시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이사야 44장 24절에 중반부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わたしは万物を造った主である。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깟 돈 몇 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예로부터 제물을 바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そこ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으로 드리고, 지금도 예물을 주님께 바치는 이유가 단순히 그 재산적인 가치가 아닌, 거기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린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물을 바친다는 것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단순히 제물을 바쳤다고 해서 온전히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바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단서가 되는 것을 6절과 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6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로마서 15장 6절 초반부
“6.한마음과 한 입으로……”

あなたがたが心を一つにし、声を合わせて

그렇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에스겔서 1장에 보시면 바퀴와 생물들에 대한 환상이 등장하는데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21절 말씀과 같습니다.

에스겔 1장 21절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生きものが進むときには輪も進み、生きものが止まるときには輪も止まり、生きものが地上から上がるときには輪も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이 말씀에 보시면 바퀴들 가운데에는 생물의 영이 있는데,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바퀴가 달린 자동차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가기 위해서는 네 바퀴의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 중 하나가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고 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단순히 앞으로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도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7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5장 7절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7節
“7.ですから、神の栄光のために、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受け入れ合いなさい。”

주님은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스스로의 피로 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순종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다가가려고 해도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앞을 막고 있는 바람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 지성소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과도 같습니다. 그 휘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무슨 바람이 불면 펄럭이는 커튼 같은 것이 아니에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크기는 높이가 22미터가 넘고, 그 두께가 10센티 이상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두께가 10미리가 아니라 10센티 이상이었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찰랑거리는 헝겊 같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벽이나 돌담처럼 두껍고 단단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가복음 15장 38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すると、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그처럼 마치 벽이나 돌담과도 같았던 성소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찢어짐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악이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지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오로지 예수님의 피로만이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앞서 회사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회사에 들어가면 월급만 주는 것이 아니라, 책상, 의자, 컴퓨터 등 많은 것으로 채워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로 쓰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와 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회사를 위해 일을 하고, 회사에 이익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를 뒤집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내가 회사를 위해서 일을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리고는 마침내 회사에서 쫓아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회사나 직원 생각은 안 하고 자기 배만 불리기 위해 열을 올리는 사장님도 많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우리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만 생각하는, 마치 악덕 기업주 같은 그런 이기적인 하나님이십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로마서 8장 32절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회사가 어려워지면 직원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돈만 빼내서 도망가 버리는 사장도 있지만, 반면에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자기 개인 재산까지도 내놓는 사장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셨습니다.

멸망을 향해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든 살려 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낌 없이 우리에게 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우리가 왜 사는가, 라고 하는, 우리 삶의 목적을 다양하게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시편 57편 7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神よ 私の心は揺るぎません。 私の心は揺るぎません。 私は歌い ほめ歌います。


이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확정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도 아끼지 않고 그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 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도 넘치는 축복 놀라운 축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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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3회 다시 시작하신 하나님
2023년 7월 30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9장 19절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創世記 9章 19節
“19.この三人がノアの息子たちで、彼らから全世界の民が分かれ出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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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시 시작하신 하나님” 再び始められた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제가 요즘 눈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교회 예배 인도를 쉬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오늘은 로마서 강해에서 잠시 벗어나 창세기 말씀을 살펴볼까 합니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의 자손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유인원에서 진화해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네안데르탈인이다, 크로마뇽인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오늘은 성경적으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에 보시면 인류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냐 하면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신약에 보시면 예수님의 계보가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누가복음 3장 23절에서 38절에 등장하는 계보를 보시면, 마지막에 아담이 있고 그 다음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모두를 아담의 자손이라고 하기에는 좀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담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조상이 누구냐 라고 할 때에는 기왕이면 훌륭한 사람, 옛날 식으로 본다면 공을 많이 세운 사람, 벼슬이 높은 사람, 널리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조상으로 삼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을 조상이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아담의 자손이라고 한다면 가인도 아담의 자손이 되지 않습니까. 가인이 누구입니까. 가인은 사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지요. 그러나 그는 동생 아벨에 대해 시기를 품습니다.

창세기 4장에 의하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받으셨지만, 형 가인이 바친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인은 불만이 폭발하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서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말지요.

누구는 그래요. 가인이야말로 인류역사상 가장 흉악한 학살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의하면 당시 인류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 아벨을 살해했다는 것은 전인류의 1/4을 살해한 것이 되니 이보다 더 흉악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와 같은 가인도 아담이 조상인데, 우리까지 가인과 똑 같은 조상이라고 말하기가 좀 그러니까 그런 이유도 있고 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하기는 좀 꺼려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자손일까요. 아담이 아니라면 그의 아들 셋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라면 장자인 가인으로부터 그 혈통이 이어지려고 했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첫째 아들 가인은 벌을 받아 헤매는 자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아벨은 살해당했고 해서, 결국 셋째 아들로 태어난 셋으로부터 인류가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인류에는 또다시 크나큰 위기에 맞닥뜨리게 되지요. 그것은 바로 노아의 홍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6장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神はノアに仰せられた。「すべての肉なるものの終わりが、わたしの前に来ようとしている。地は、彼らのゆえに、暴虐で満ちているからだ。見よ、わたしは彼らを地とともに滅ぼし去る。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전인류를 포함하여 하늘과 땅에 사는 생물들을 철저하게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환난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오로지 노아와 그의 가족인 총 8명 뿐이었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노아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그렇게 보는 것도 타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도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창세기 9장 19절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この三人がノアの息子たちで、彼らから全世界の民が分かれ出た。


창세기 5장에 기록된 계보를 본다면 노아는 셋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이 홍수로 인해서 가인의 후손들은 모두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이라고 하기에는 역시 인류가 죄로 물들어 버렸지요. 그래서 그 중의 노아와 그의 가족만 구원 받은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노아의 후손이다……라고 하면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노아에게는 세 명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있었는데, 창세기 9장에 보시면 이 중에서 함의 자손이 잘못을 범하게 되어 결국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가리켜서 노아의 자손이라고 하기에도 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 과정에서 이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의 이름은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그의 삶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대단히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이삭을 축복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6장 4절~5절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そして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のように増し加え、あなたの子孫に、これらの国々をみな与える。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地のすべての国々は祝福を受けるようになる。
これは、アブラハム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い、わたしの命令と掟とおしえを守って、わたしへの務めを果たしたからである。」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두고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계보 중 마태복음 1장에 보시면 그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세요.


시편 139편 1절~4절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主よ あなたは私を探り 知っておられます。
あなたは 私の座るのも立つのも知っておられ 遠くから私の思いを読み取られます。
あなたは私が歩くのも伏すのも見守り 私の道のすべてを知り抜いておられます。
ことばが私の舌にのぼる前に なんと主よ あなたはそのすべてを知っておられます。


마태복음 19장 26절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彼らをじっと見つめて言われた。「それは人にはできないことですが、神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ます。」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르는 것이 없고 불가능이 없으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아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애초에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좀 제대로 만드셨다면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의 아들 가인도 좀 착하게 태어나도록 하셨다면 아벨을 죽이는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요. 신경 좀 써서 잘 지으셨다면 홍수로 말미암아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6장 5절~7절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主は、地上に人の悪が増大し、その心に図ることがみな、いつも悪に傾くのをご覧になった。
それで主は、地上に人を造ったことを悔やみ、心を痛められた。
そして主は言われた。「わたしが創造した人を地の面から消し去ろう。人をはじめ、家畜や這うもの、空の鳥に至るまで。わたしは、これらを造ったことを悔やむ。」

아니, 잠깐만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다고요? 예,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해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께서 한탄을 하시고 근심을 하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어요.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께 대해서 불순종을 몇 번이나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사무엘상 15장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サムエルは死ぬ日まで、再びサウルを見る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サムエルはサウルのことで悲しんだ。主も、サウルを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ことを悔やまれた。

아니, 지금 누가 후회를 해요? 예,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셨다는 것이에요.

사실 우리는 어떨 때에 후회를 합니까. 우리가 어떤 인생의 갈림길 앞에 섰을 때, 잘될 것을 예상하고 한 쪽을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안됐어요. 바로 그럴 때 아,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아니면 할 걸, 하지 말 걸, 하면서 후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야 미래를 알지 못하니까 선택을 잘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후회를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미래의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실 수도 있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하나님은 전지전능이 아니라, 불완전한 하나님 아니시겠습니까.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를 푸는 열쇠는 바로 안식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2절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神は第七(しち)日(にち)に、なさっていたわざを完成し、第七(しち)日(にち)に、なさっていたすべてのわざをやめられた。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는 7일째에 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즉 쉬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분명 하나님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럼 7일째에 쉬시는 하나님이신가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시편 121편 3절~4절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主は あなたの足をよろけさせず あなた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い。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 노는 날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주6일 밖에 일을 안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그 날에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도 노는 날이라고 해서 도와주지 않으세요.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우리 앞길을 인도해 주지도 않으세요. 마귀가 공격을 해와서 살려 달라고 해도, 오늘은 하나님 노는 날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라고 하신다고 해보세요.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해요.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안식일은 왜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15절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신명기 5장 14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七日目は、あなたの神、主の安息である。あなたはいかなる仕事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も、あなたの息子や娘も、それに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牛、ろば、いかなる家畜も、また、あなたの町囲(まちがこ)みの中にいる寄留者も。そうすれば、あなたの男奴隷や女奴隷が、あなたと同じように休むことができる。

사실 주인은 자기가 쉬고 싶을 때 언제든지 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자기가 쉬고 싶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쉴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일주일에 한 번은 쉬게 하라고 한다 하더라도 마음씨가 나쁜 주인이 하인은 쉬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평일에 일반 직원이 쉬기 위해서는 휴가계를 내고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사장님이 쉬겠다는데 뭐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법적으로 근로시간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일부 회사에서는 위법한 초과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결국 사장님이나 상사의 지시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면 아무리 법이 있다 하더라도,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고, 걸린다 하더라도 그 벌칙이 가볍기 때문에 과로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그 직원한테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직원들에 대한 법정근로시간을 위반한 회사 대표는 사형에 처한다” 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모든 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이를 위반하면 100% 걸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일이 바쁘고 돈이 좋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초과근무를 시키는 사장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이처럼 엄하게 규정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사람 특히 약자를 위한 규정으로서, 힘이 없는 하인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확실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아담부터 시작해서 앞서 살펴본 내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인류가 타락했을 때, 모든 것을 진멸하고 새로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시점부터 다시 시작하신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시 시작하신 하나님의 핵심을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수 없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멸망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모든 것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주시고,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까지 해가면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첫째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멸하시는 것은 쉽지만 이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남겨두시고 다시 시작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후회할 일이 많습니까. 아,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것이 다 끝났어……라고 생각하고 절망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 세부적인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본다면, 이제 돌이킬 수가 없다, 되돌릴 수가 없어, 이제 모든 것이 다 끝장이야, 그와 같은 절망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도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후회되니? 근심되니? 한탄스럽고 너무나도 괴로워 슬프니? 이제 끝이다? 아니야. 얘야, 나도 이렇게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지 않았니. 나도 후회하고 근심하고 한탄했잖니. 그러니까 괜찮아. 자, 일어나. 아직 끝이 아니야. 괜찮아. 그리고 나와 함께 다시 한 번 시작해보자.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해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후회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모든 것이 끝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인도해주시고 구원해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고난, 수치, 좌절, 절망, 이는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주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 절망 가운데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힘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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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2회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2023년 7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3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5節
“5.どうか、忍耐と励ましの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ふさわしく、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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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3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イエス様と同じ思いを抱く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5.どうか、忍耐と励ましの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ふさわしく、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앞서 4절에 나와 있었던 바와 같이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서로 뜻이 같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본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느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연세 지극하신 어르신 두 분이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나눕니다.

말소리가 들려오길래 본의 아니게 들어보았더니 대충 이런 내용이더라고요.

둘 중 한 분이 어디 계시는데, 어떤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아마도 이 분에게 전도를 했나보죠?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그랬나봐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르신이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냐 하면, “이보시오. 당신 자식이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면 좋겠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 믿으라고 한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귀찮게 구는 예수쟁이를 물리친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을 말하듯이 자랑스럽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까 이 어르신이 그래도 성경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자, 그럼 만약에 여러분께서라면 이 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믿음이 없는 분한테 가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했더니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 자식이나 아니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면 좋겠냐고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십자가든 뭐든 하나님이 못박히라고 하면 못박혀야죠~라고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안 믿는 사람이 믿겠다고 하겠어요? 저 같아도 벌써, 그런 건 당신이나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셨나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대부분이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음을 맞이한 사도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달린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갖나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4장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い者は、わたしの弟子になる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는 말씀하셨으나, 한 번도 우리더러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하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했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참수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 십자가에 달리기를 원했지만 본의 아니게 참수를 당한 것인가요?

저는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다 알고 계셨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차마 그 엄청난 고난을 우리에게 겪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고통을 몰랐기 때문에 겁도 없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냥 혼자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농담이고, 이제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순교자들이 달린 십자가는 그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작은 공통점과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작은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는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네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6절
“36.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이 기도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십자가의 괴로움에 대해서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거 몰랐으니까 했지 알고는 못 했을 것이라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저도 예전에 코가 안 좋아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거 정말 몰랐으니까 했지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아마도 하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 간단한 수술도 힘든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힘든 언덕길을 올라가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야 했었던 것이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이고, 그리고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도 작은 점이 아니라 대단히 큰 점을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예전에 나왔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롯해서 우리는 영화나 그림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이나 그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서는 이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오죽하면 앞서 말씀 드린 겟네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 예수님께 있어서 무엇이 가장 힘드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채찍에 맞아서, 온몸에서 피를 흘리셔서 정신도 혼미하셨을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골고다까지 올라가셨으니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손과 발에 못 박혀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길을 오를 때에 도중에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대신해서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습니까.


예,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예수님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우셔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시면서 이제 더 이상 가실 수 없으셨는데, 로마 군인이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한테 억지로 대신 매고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느냐 하는 것이에요.

구레네 시몬에 대한 부분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성경 기자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인상 깊은 내용이었는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보시면 흥미롭습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1절~33절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1.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32.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33.ゴルゴタと呼ばれている場所、すなわち「どくろの場所」に来ると、


마가복음 15장 20절~22절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彼らはイエスを、ゴルゴタという所(訳すと、どくろの場所)に連れて行った。


누가복음 23장 25절~27절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すなわち、暴動と人殺しのかどで牢に入れられていた男を願いどおりに釈放し、他方イエスを彼らに引き渡して好きなようにさせた。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あと)から運ばせた。
民衆や、イエスのことを嘆き悲しむ女たちが大きな一群をなして、イエスの後(あと)について行った。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구절과 뒷구절을 함께 인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피범벅이 되셔서 지쳐 쓰러지시매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더라……라고 하는 구절이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 누가복음 어디에도 없어요.

물론, 우리가 짐작하건대 너무나도 힘드셨겠지요. 많이 아프셨겠지요. 채찍에 맞으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그리고 손과 발에 못 박혀서 죽으셨는데 얼마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으셨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 보시면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이,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모두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어서 어떤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수치, 모욕, 부끄러움입니다.

예전에 제가 휠체어를 타시는 분한테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 여자 분은 젊어서부터 사고 때문에 다리가 불편하셔서 휠체어를 타고 계신 분이신데, 저도 그 때까지는 몰랐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휠체어를 타면 비탈길을 내려갈 때가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내리막길 같은 경우에는 잘못하면 앞으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혼자서 내려갈 때에는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만 이용해서 내려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때도 그 자리에서 휠체어 앞 바퀴를 들어 보여 주시는데 아, 그거 무슨 서커스 같아서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내리막길에서 앞 바퀴를 들고 내려가면 위험할 때도 있지 않냐고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넘어진 적도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넘어지냐 하면 앞바퀴를 너무 많이 들어서 결국 뒤로 자빠진다는 것이지요.

제가 그 말을 듣고는, 아휴, 그럼 엄청 아프시겠어요. 라고 하니까, 그 분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혀 안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휠체어가 뒤로 넘어가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 있냐고 물었더니만, 이 분 하는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분, 참 밝은 분이신데, 이 분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너무나도 창피해서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부끄러움이 육체적인 아픔보다도 더욱 심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2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た。
「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おまえが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そして十字架から降りて来い。」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長老たちと一緒に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
「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彼はイスラエルの王だ。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うすれば信じよう。


누가복음 22장 63절~65절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さて、イエスを監視していた者たちは、イエスをからかい、むちでたたいた。
そして目隠しをして、「当ててみろ、おまえを打ったのはだれだ」と聞いた。
また、ほかにも多くの冒瀆のことばをイエスに浴びせた。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도 짐작할 수 있는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치나 모욕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점이 바로 예수님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에 있어서 넘을 수 없는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면,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과 똑 같은 육체적인 통증이나 고통은 느낄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수치와 모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제까지는 큰 나라의 왕이나 황제였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어요. 좋은 것만 입고 먹고 자랐습니다. 어마어마한 궁전에서 살았고, 가는 곳마다 고급 카펫이 깔려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그처럼 온 나라의 영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서 거의 알몸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속옷 하나 걸친 채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면 그 모욕감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만왕의 왕, 만군의 주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분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 많고 못난 인간들로부터 받으셨던 그 모욕과 수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사극 같은 데에 보시면 조선시대 때, 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과인이라고 하면 대단한 뜻처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과인의 <과>자는 <적을 과>입니다. 이른바 <과부>라고 할 때의 <과>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과인>이라고 하는 말은, 그 글자 자체를 본다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만한 사람한테 말하기를, 왕도 겸손한데 네가 어찌 그렇게 교만할 수 있겠느냐 하고 꾸짖기도 했다고 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도 자기를 비우시고 복종하셨는데 우리가 내 자존심을 세우면서 주님 앞에 교만하게 군다면 어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의 겸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고 하는 멍에를 메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따를 때에, 주님께서 넘치는 칭찬과 축복으로 채워 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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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1회 살아있는 말씀
2023년 7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2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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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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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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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2번째 시간으로서 “살아있는 말씀” 生きているみこと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은 15장 5절 이후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만, 그러기에는 15장 4절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을 너무 많은 것을 건너뛰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오늘도 같은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15장 4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여기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에 기록된 책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오직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 그러니까 성경은 무엇을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라고 하면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좀 너무 흔한 표현 같아요. 솔직히 지금도 서점에 보면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하는, 이른바 교양서적이라고 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거나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하면 좀 나을 거예요.

아니, 그렇다고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멋진 표현, 정말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말이 있었을 텐데도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좀 시시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교훈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식상한 표현을 썼을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지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니, 세상에는 값어치가 없는 책들도 많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지금도 서점에 가보면 좋은 책들도 있나 하면, 정말 값어치가 없는 책들, 그리 좋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 찬 책들도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책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말하자면 책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은 너무 쉽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출판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렇게 된 지는 얼마 안 됩니다.


몇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책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비쌌지요.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책들을 보면 모두 일일이 사람들이 손으로 베껴 쓰곤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사용되는 종이를 본다 하더라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히 비쌌기 때문에, 정말로 가치가 있는 책들에 한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값진 지식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지식들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모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모이고 모이면 학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과거>라고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 또는 자신이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입니다.


경제학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사회의 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뛰어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하고 분석해서 경제이론을 발표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법학 같은 것도 그렇지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1년에도 수없이 많은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거부터 있어왔던 일들에 대한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장 오늘 새롭게 일어난 일이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법은 만들어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자동차가 없었을 때에는 자동차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고, 비행기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비행기라는 것이 발명되고 한참이 지난 다음인 것이지요.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문학이지, 그 시대에서 벗어난 인문학적 지식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학 분야에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래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실 과거를 무시한 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첨단과학이라고 하면 어떤 것을 떠올리십니까.

이른바 첨단과학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미래가 아닌 과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재료도 과거에 발견된 것들이고, 구조도 과거에 개발된 기술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계들도 몇 년 지나면 이제 구형이 되어서 쓸모가 없게 되고 맙니다.

과학이라고 한다면 누구는 천문학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 이를 위해서는 역시 첨단학문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지난 날들에 대한 일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역사학이라고 하고, 더 오래 전 일에 대한 대한 학문을 고고학이라고 한다면, 사실 이 우주과학, 또는 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고고학 중의 고고학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주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주의 현재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혀 빛이 없는 곳이라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요.

사람의 눈에서 자체적으로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빛이 비추고는 그 빛이 반사되어 오는 것을 보고 사물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예를 들어서 제가 손을 이렇게 보고 있다면, 빛은 1초에 30만킬로를 가기 때문에 제가 손을 바라볼 때의 이 손의 모습은 지금 현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태양은 어떨까요. 태양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눈을 다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본다 하면, 우리는 태양의 지금 모습을 관찰할 수가 있을까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이 거리는 대략 시속 100킬로로 달린다고 한다면 도달할 때까지 171년 이상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래도 빛의 속도라고 한다면 빠를 것도 같은데, 빛의 속도로 지구에서 태양까지 간다고 해도 8분 이상이 걸립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지구에 도달한 빛은 8분 전에 태양에서 나온 빛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사람은 태양의 현재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8분 전의 태양 모습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 멀리 있는 별들은 어떠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별들 중에서는 몇 년 정도가 아니라, 몇 백만 년, 몇 천만 년 전의 우주, 지구가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우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의외로 많은 별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도달하는 동안에 이미 사라져버린 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는 고사하고 온통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지식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이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은 창세기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찬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는 과거가 없잖아요 오로지 현재와 미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고 하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과거에는 순종을 원하셨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원하시나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지요.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창세기 3장 4절~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이 마귀 사탄의 말을 보십시오.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귀 사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집착하기 때문에 본질에 대해서 놓치게 되는데,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핵심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순종하면 살 것이요, 불순종하면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해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유혹하지 않습니까.

이 마귀 사탄의 유혹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주리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세 가지 시험을 하지요.

첫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3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두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그리고 세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8절~9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이 세 가지 시험은 우리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만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인생에 있어서 적어도 실족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3절에 나오는 유혹은 어떤 것입니까.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돌을 먹어도 됩니까. 아니면 먹으면 안 됩니까. 예,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돌을 먹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돌을 떡덩이로 생각하고 먹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처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어버린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주머니에 넣어버린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범죄인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뇌물도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賄賂を受け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は聡明な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

이처럼 먹어서는 안 되는 것, 내 것이 아니거나, 아니면 정당하지 못한 것은 모두 먹어서는 안 되는 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먹어도 되는 떡덩이로 생각하고 먹는 것은 범죄이기 때문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유혹을 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마귀는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신앙적인 명예로 유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보시면 가끔 간증을 한다고 하면서도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많이 기도를 했더니,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금식을 했더니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나마 좀 귀여운 축에 속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나 종교 지도자 중에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죠. 자기가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목사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 사실 이런 사람이 지금도 있지만 옛날에도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다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박수를 받고,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에,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까. 아니요. 자기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그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영광을 받으라고 하면서 사람의 교만을 충동하는 것이 바로 마귀 사탄의 유혹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 사탄은 무슨 유혹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지요. 온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를 다 주겠다. 그러니까 나를 경배하라고 마귀는 유혹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간단한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만 했었다면,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그 한 가지 말씀만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크나큰 축복을 영원토록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죽음>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배가 고프다고 돌멩이를 드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죽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돌덩이는 절대로 드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전 꼭대기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면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 즉 <멸망> 뿐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마귀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법칙에 의하면 이 유혹에 넘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역시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잠언에 보면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 7장 21절~22절
“21.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彼女は心動かすことばで彼を誘惑し、滑らかな唇で彼をいざなう。
彼はただちに、彼女の後について行く。牛が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ように、足かせが愚か者を懲らしめているかのように。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까.

내 것이 아닌 떡덩이를 먹으려고 하고 있나요.

영적인 교만이 슬금슬금 얼굴을 내미나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십니까.

성경은 그 모습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마귀의 유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만 나와 있으면 되잖아요. 왜 마귀의 유혹까지 성경에 나와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만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도 어제와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그 이전에는 아무리 달콤해 보이는 유혹이라 하더라도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외 없이 <죽음> 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과거에도 그랬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도 살아서 숨쉬는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성경 말씀의 교훈은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 말씀은 바로 지금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 다름아닌 바로 <나>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인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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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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