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회 섬기는 사랑
2023년 4월 3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2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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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16절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5節∼16節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16.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良いとしていることで、悪く言わ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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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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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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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2번째 시간으로서 “섬기는 사랑” 仕える愛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미리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15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먹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좁게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요 넓게는 신앙 전반에 있어서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우리 이웃이 신앙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그 이웃 잘못이라는 건가요? 그 이웃이 못나서 그렇대요? 아니요.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 이웃이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나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사랑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내 이웃이 힘들어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쉬울까요? 어쩌면 많은 분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이 부분은 나와 상관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최소한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힘들게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쪽으로는, 그래 누구는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한 적이 없지만, 저 사람이나, 아니, 저 사람은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해요.

예전에 어떤 분한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 군대를 본다면, 지금은 군대문화도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만, 옛날에는 군대에서의 폭력이 심각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무슨 군대얘기라도 나올 것 같으면, 아, 내가 군 생활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는데, 아 그 때는 이렇게 많이 맞았다, 저 때는 저렇게 많이 맞았다, 뭐 다들 그런 말을 많이 한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누구 하나 “나는 이렇게 때렸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다 자기는 억울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누군가를 때리거나 한 것은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은 하지만 차마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게 한국 군대의 문제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를 하실 때 보면 그런 말씀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 몇 번 들어봤습니다.

제가 교회에 나오시라고 말하면 그 때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가 좋다는 것 알고 예수님 좋다는 것 안다는 거예요. 하지만 교회에 있는 그 사람들이 꼴 보기 싫어서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교회가 어디 한 군데도 아니고 이 교회가 좀 그러면 다른 교회를 나가보시면 되잖아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다른 여러 교회를 다녀봐도 다 똑같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그 때부터 교회는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다시는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저도 어떻게 할 말이 없어요. 차라리 예수님이 뭔지 모르니까 못 믿겠다거나, 아니면 성경이 뭔지 모르겠다거나 하면 무슨 할 말이라도 있지요.

그런데 자기가 여러 교회에 나가봤지만 거기 다니는 사람들한테 질려서 더 이상 나가기가 싫다고 하면 정말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싫다고 해서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뭐예요? 예, 하지만 나 때문은 아니야. 나 꼴 보기 싫다고 해서 안 나오는 사람은 없어……우리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 그래, 나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에 안 나온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지요.


안 나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뭐예요? 예, 내가 상처를 받았으면 받았지, 나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은 없을 거야……하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군대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군대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건 우리나라 군대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의 장군이라고 하면 누구를 떠올리시나요? 예,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유능한 전술가이자 뛰어난 장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술도 탁월했다고 하지요.

용병술이라고 하면 그 중의 하나가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어디에 배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뭐 굳이 군대가 아니라 회사를 비롯한 모든 조직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지요.


나폴레옹은 군인을 다룰 때에 네 가지로 분류를 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첫째는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
둘째는 유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자.
셋째는 무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자.
넷째는 무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

이렇게 분류를 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는 지휘관에 적합하다고 해요. 그렇겠죠. 머리도 좋고 행동력이 강합니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명석한 판단력과 강한 행동력을 바탕으로,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해가면서 적들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유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자는 어떻습니까. 머리는 참 좋은데 실제로 사람을 부리거나 사람들 앞에 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면에 있어서는 좀 약해요. 그런 사람은 후방에서 작전참모를 맡기면 좋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을 다루거나 할 필요 없이, 여러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치밀한 작전을 짜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행동력이 없지만 유능한 사람은 그와 같은 임무에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셋째로 무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사람은 어디에 쓰면 좋을까요. 이런 사람은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 밑에 넣으면 아주 좋습니다. 유능하지 못하니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라요. 그리고 행동력도 부족하니까 자기 힘으로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요.

바로 그럴 때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지휘관이 있어서 그에게 명령을 하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능하고 행동력이 약한 사람은 전방에서 유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 밑에 배치를 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능하지만 행동력이 강한 사람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여러분이 나폴레옹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 무능하지만 행동력이 강한 사람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을 것 같으십니까.

무능하고 행동력이 강한 자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말합니다.

그 자를 지금 당장 죽여라.

今すぐ殺せ


왜냐 하면 그 사람은 조직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무능하고 행동력이 없기라도 한다면 자기 멋대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을 저지르지도 않거든요.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으면 조직을 위해서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하겠지요. 그러나 무능하고 행동력이 있다면 이는 오히려 무익한 일들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길을 포장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사람은 정해진 계획에 따라서 자갈들을 걷어내고 길을 닦은 다음에 시멘트를 덮어요. 유능하고 행동력이 없으면, 자기가 직접 일을 하지 않더라도 설계도와 실제 공정을 비교하면서 진척 상황을 확인해요. 무능하고 행동력이 없는 사람은 유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서 일을 억지로라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시키지 않은 다른 일은 안 해요. 왜냐하면 그만한 행동력이 없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무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막 이것저것 벌여놔요. 기껏 깨끗하게 시멘트를 덮어놨더니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 한 가운데를 저벅저벅 걸어가요. 왜냐하면 무능하지만 행동력은 넘치거든요. 이런 사람은 조직에 있어서 하나도 도움이 안 됩니다.

더구나 군대라고 생각해보세요. 자칫하면 이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자기 편 사람들이 희생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말하기를, 무능하고 행동력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죽여버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삼국지에 보시면 읍참마속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때는 후한 말, 재갈공명의 예측대로 천하는 조조가 지배하는 위, 손권이 지배하는 오, 그리고 유비가 지배하는 촉, 이렇게 세 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재갈공명은 북으로 군대를 진군시키는데 그 때 핵심이 되는 요충지가 바로 가정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 가정이라는 곳을 점령하기만 하면 북진을 해서 위나라를 공격할 교부도를 확고하게 할 수 있지만, 만약에 이 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촉나라에 있어서는 크나큰 타격을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전투였습니다.

제갈공명은 이 중요한 전투에 그가 그 동안 아끼던 마속을 투입시킵니다. 공명이 인정할 정도인데 얼마나 유능한 장군이었겠습니까.


이제 출전하려는 마속에게 공명이 말하기를 산이 아니라 반드시 도로에 진을 치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마속은 전쟁터에서 이를 듣지 않아요.

“제아무리 공명이 탁월한 승상이라고는 하나, 세상에 도로에 진을 치는 병법은 내가 듣도 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명의 명과는 달리 산자락에 진을 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냐 하면, 결국 위나라의 장합에 의해서 대패를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속이 공명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서 촉나라의 멸망은 앞당겨지게 되고 맙니다.

이 결과를 두고 공명은 어떻게 합니까. 비록 자기 자식처럼 아끼던 마속이긴 하지만, 명령을 어기고는 패배하고 돌아온 마속에 대해서 군법을 어겼다고 해서, 울면서 목을 칩니다. 그게 바로 읍참마속이라고 하는 뜻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조금 행동력이 없어서 그저 하라는 대로 하는 장군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얄팍한 자기 지혜를 믿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나폴레옹은 18세기에서 19세기 사람이고, 제갈공명과 마속은 서기 3세기 사람인데, 그보다도 훨씬 전인 예수님이 벌써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 혹시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わたしを信じる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大きな石臼を首にかけられて、海の深みに沈められるほうがよいのです。

이 말씀에 대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마태복음 18장 6절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죄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에 큰 맷돌짝을 달아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


자, 우선 여기에 연자맷돌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맷돌은 알지요.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것을 맷돌이라고 합니다만, 연자맷돌은 뭐냐 하면, 그것보다도 훨씬 커서 당나귀 같은 짐승의 힘으로 돌리는 맷돌입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대하여 목에 돌을 매달고 바다에 던지는 형벌이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시키는 길 바에야 그렇게 큰 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사실 그렇잖아요. 어린애 하나한테 잘못했다고 해서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 싶습니다만, 주님께서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큰 죄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이와 같은 말씀은 마태복음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また、わたしを信じる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者は、むしろ、大きな石臼を首に結び付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てしまうほうがよいのです。

누가복음 17장 1절~2절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つまずきが起こるのは避けられませんが、つまずきをもたらす者はわざわいです。
その者にとっては、これら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つまずかせるより、ひき臼を首に結び付けられて、海に投げ込まれるほうがましです。

이처럼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 복음서를 쓴 필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반복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족하게 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앙을 버리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また、人の子に逆らうことばを口にする者でも赦されます。しかし、聖霊に逆らうことを言う者は、この世でも次に来る世でも赦されません。

여기서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어떤 죄인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는 곧 성령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지 못할망정, 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 신앙을 저버리게 했다면 그 죄가 어떻게 가볍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여러분들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혹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아닌지 어디 한 번 확인을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하나님을 섬기신다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웃을 섬기십니까. 이웃을 섬기신다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섬기다”는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지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평소에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중요하게 생각하다? 소중하게 생각하다? 정말 그것이 정확한 뜻일까요?


국어사전에 보면 <섬기다>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우러러 떠받들다. 공경하다.”

目上の人のそばにいて、その人に奉仕する。

자, 그렇다면 쉽게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상대방을 떠받들거나 공경하기 위해서는 나는 그 사람의 위에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아래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예, 자기가 상대방을 우러러 떠받들기 위해서 자기는 그 사람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겠지요. 공경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러러 떠받들고 공경했나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뭐 대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신발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거든요. 말하자면 샌들 같은 신발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다가 당연히 대부분의 길은 비포장도로에요. 그러니까 발이 얼마나 지저분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발을 씻는다는 일은 오로지 하인이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 13장 13절~15절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あなたがたはわたしを『先生』とか『主』とか呼んでいます。そう言うのは正しいことです。そのとおりなのですから。
主であり、師であるこの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であれば、あなたがたもまた、互いに足を洗い合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したとおりに、あなたがたもするようにと、あなたがたに模範を示したのです。

예수님은 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제자들의 하인이 되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주님보다 높은 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그 분은 우리보다 한없이 낮아지셔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に来たのと、同じようにしなさい。」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아무리 낮아져서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하인이 있다 하더라도, 주인을 대신해서 죽어주는 하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하인보다도 더욱 낮아져서 마침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셨을 정도로 우리를 섬겨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이웃을 이 정도로 우러러 떠받들었던가요?

오히려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이웃에게 무엇을 해주기보다도 이웃이 나한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웃을 존중해주기보다 나를 무시한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까.

차라리 무능하고 행동력이 없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무능하고 행동력만 넘치지 않았습니까.

신앙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는 바로 말씀을 몰랐다는 뜻을 말합니다.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기가 믿음이 좋은 척, 신앙이 많은 척을 해가면서 우리 이웃을 힘들게 한 적은 없으신가요. 기도해라, 금식해라, 철야해라, 헌금해라, 전도해라 하면서 강요함으로써 우리 이웃에게 부담을 지우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しかし、イエスは言われた。「おまえたちもわざわいだ。律法の専門家たち。人々には負いきれない荷物を負わせるが、自分は、その荷物に指一本触れようとはしない。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힘든 일을 강요합니다.

그야말로 외유내강이 아닌 외강내유.

자기한테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한테만 엄격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높은 자리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0절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招かれたなら、末席に行って座りなさい。そうすると、あなたを招いた人が来て、『友よ、もっと上席にお進みください』と言うでしょう。そのとき、ともに座っている皆の前で、あなたは誉れ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자리의 위치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어느 때에든지 다른 이웃 형제 자매들보다 낮은 곳에 있음으로 해서, 상대방을 오히려 섬기는 데에 힘쓰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4장 16절
“16.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6.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良いとしていることで、悪く言わ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우리가 가진 이 믿음, 우리가 전해야 할 이 복음은 너무나도 선하고 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되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비방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만에 하나,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예수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우리가 목에 돌멩이를 매달고 물로 뛰어들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을 봅니다.

잠언 6장 6절~8절
“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8.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怠け者よ、蟻のところへ行け。そのやり方を見て、知恵を得よ。
蟻には首領もつかさも支配者もいないが、
夏のうちに食物を確保し、刈り入れ時に食糧を集める。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잠언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지혜로 넘쳤던 솔로몬 왕의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만, 지혜가 있으면 한낱 개미를 보고도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개미 앞에서도 겸손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교만하게 굽니다. 뻑 하면 자기를 무시한다, 자기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아~ 기도하라고 해요. 금식하라고 해요, 아니, 왜 그런 말을 함부로 해가면서 사람한테 상처를 주냐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야말로 말씀을 모르는 무능이면서, 불필요한 행동력이 있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이 그래, 저 사람이 그래……라고 한다면……이건 곤란하겠지요.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비쳐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혹시라도 나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온다든지 나 때문에 신앙을 버렸다든지 그런 사람이 있을 확률이 0.1프로라도 된다면, 지금이라도 주님 앞에 우리의 교만과 거만과 자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이웃 앞에서 낮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낮아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나보다 낫다. 이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솔직히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능력으로 보았을 때 개미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미 앞에서도 그래, 개미야, 네가 나보다 낫다……라고 하니까 그 속에서 지혜가 보인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 위에 군림할 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보다 낮아질 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실 정도로 섬겨주신 주님을 본 받아서,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섬기듯 우리 이웃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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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90회 양식과 음식
2023년 4월 23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1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15절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4節∼15節
“14.私は主イエスにあって知り、また確信しています。それ自体で汚れている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ただ、何かが汚れていると考える人には、それは汚れたものなのです。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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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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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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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1번째 시간으로서 “양식과 음식” 二つの食べ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고, 그리고 다음 주는 여기에 더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오늘은 우선 먼저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
“14.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4.私は主イエスにあって知り、また確信しています。それ自体で汚れている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ただ、何かが汚れていると考える人には、それは汚れたものなのです。

자,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속되다>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속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4장 14절
“내가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음식 자체는 더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그것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습니다.”

즉 <속되다>라는 말의 뜻은 더럽다 즉 불결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더러운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5장 11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口に入る物は人を汚しません。口から出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이건 뭐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더럽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사도행전에 보시면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16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9.翌日、この人たちが旅を続けて、町の近くまで来たころ、ペテロは祈るために屋上に上った。昼の十二時ごろであった。
10.彼は空腹を覚え、何か食べたいと思った。ところが、人々が食事の用意をしているうちに、彼は夢心地になった。
11.すると天が開け、大きな敷布のような入れ物が、四隅をつるされて地上に降りて来るのが見えた。
12.その中には、あらゆる四つ足の動物、地を這うもの、空の鳥がいた。
13.そして彼に、「ペテロよ、立ち上がり、屠って食べなさい」という声が聞こえた。
14.しかし、ペテロは言った。「主よ、そんなことはできません。私はまだ一度も、きよくない物や汚れた物を食べたことがありません。」
15.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16.このようなことが三回あってから、すぐにその入れ物は天に引き上げられた。


베드로가 기도를 하고 있었더니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를 보니까 온갖 생물들이 다 들어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말소리가 들러오기를 일어나서 잡아먹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거기 안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이는 이 베드로의 말을 보시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보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보고 말하자면 기겁을 했습니다. 하늘에서는 먹으라고 하는데, 자기는 먹지 못하겠다고 해요.

그럼 베드로는 왜 먹지 못하겠다고 했을까요. 무슨 음식 알러지가 있어서요? 아니요.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의하면 베드로는 고기잡이 어부 출신입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많이 배우지는 못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그도 역시 유대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철저하게 지켰을까요. 그것은 바로 율법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율법에 정해진 대로 할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안에 있어서도 율법은 철저하게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많이 배운 사람들만이 지키는 것이 아닌, 거의 상식처럼 아주 뼛속까지 배인 가르침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 아니겠습니까.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나 신명기 같은 곳을 보면 정말 세부적인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먹어도 되는 것, 먹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율법도 포함되어 있는데, 베드로가 여기서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율법에서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않았다. 이게 잘못한 것인가요?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 때 베드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면서 칭찬 받았을까요?


사도행전 10장 15절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5.すると、もう一度、声が聞こえた。「神がきよめた物を、あなたがきよくないと言ってはならな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베드로가 기대했던 말과는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네가 네 마음대로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 상황은 본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만 믿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있어서 상당히 차별을 하고 있었지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사상, 말하자면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전도는커녕 말도 서로 하지 않을 정도로 차별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환상을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이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비로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언제는 율법을 통해서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이제 그걸 안 먹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는데 왜 안 먹냐고 혼 내십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하겠지요. 먹지 말라고 하셨던 때와 이제 먹으라고 하셨던 때,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구약에 보시면 백성들이 제사장을 통해서 속죄제다 속건제다 하면서 여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내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내가 불결해졌는데 제사를 통해서 내 죄를 용서 받으려고 양도 바치고 염소도 바치고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으로는 죄를 없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완전한 제사를 드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이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우리를 억누르는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아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율법에 얽매여서 이것은 속되다 이것은 속되지 않다고 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쓰는 시기는 여전히 과거의 율법과 지금의 복음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을 먹어도 되는지에 대해서 의견들이 분분했던 것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 14절에서는 흥미로운 말씀이 있지요. 자기가 속되다고 생각하고 여기면 속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상으로 본다면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었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적으로 부정한 것이냐 하면, 아니에요.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 이후에는 정결해졌습니다. 마음 놓고 드셔도 되요.

하지만 율법에서 금지된 음식을 내가 먹음으로 인해서 내가 율법을 어기겠다. 하나님을 버리겠다, 신앙을 버리겠다,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먹는다면 그것은 부정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5.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이 말씀을 1차적으로 본다면, 우리 이웃이 율법에 금지된 음식을 먹는다는 일에 대해서 근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그 이웃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이웃에 대해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을 위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는 우리 이웃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주님께서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쁜 소식,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와 같은 이웃들을 무엇으로 망하게 하지 말게 하라고 해요?

<음식>으로? 아니에요. <네 음식>으로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14절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 스스로 더러운 것은 없다고 하잖아요. 말하자면 스스로 불결한 음식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냥 <음식>이 아니라 <네 음식>이 불결할 수는 있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네 음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가 만든 음식이라는 뜻인가요?

자, 우리 한 번 복습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려고 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사람들이에요? 아니면 유대인들이에요?

예, 유대인들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니까 죽여야 한다고들 주장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보면 예전에 어떤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이건 제가 재수할 때 어떤 기숙사에 들어가 있을 때에 목격한 일입니다. 아니, 뭐, 그렇다고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보통 일반 독서실을 보면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씩 고정이 되어 있는데, 그 때 거기는 좀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할까요? 마음대로 의자를 옮겨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 의자 중에 보면 좀 눈에 띄는 의자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는 대부분이 그냥 나무 의자였는데, 그 의자만은 하이팩 의자라고 하지요? 얇은 나무로 되어 있어서 등받이에 탄력이 있는 의자였습니다.

하루는 제가 그 독서실에 있는데, 어떤 학생이 그 의자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학생이 들어와서 그 의자를 쓰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 좀 이상하잖아요. 아니, 다른 의자들도 많고 빈 자리도 많은데, 다른 사람이 쓰고 있는 의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좀 이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의자를 내놓으라는 사람이 선배 같지도 않아요. 나이또래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앉고 있는 학생이 말하기를, “어? 이거 제가 맨날 쓰는 의자인데……”라는 것이에요. 아니, 내가 맨날 쓰는 의자이고, 지금도 내가 쓰고 있는 의자인데 이걸 내놓으라는 건 좀 이상한 게 아니냐……라는 말이었겠지요.

뭐, 그 학생이 평소에 쓰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제가 알 수야 없지만, 적어도 지금 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의자를 내놓으라는 것은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야, 이거 또 싸움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다음에 그 의자를 내놓으라는 학생의 딱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요. 이 학생, 뭐라고 했을까요.


딱 여섯 글자였습니다. 뭐라고 했냐 하면,

“이 의자, 내 건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의자는 내가 돈 주고 산 거야. 이 의자의 주인은 나야. 아무리 네가 자주 썼다 하더라도 그건 내 의자를 내 허락 없이 네가 쓴 거나 마찬가지야.” 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니 아무리 평소에 내가 자주 썼었다고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주인이 나타났는데요. 어쩔 수 없이, 아, 죄송해요……라고 하면서 슬그머니 일어나더라고요.


누가복음 6장 1절~5절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ある安息日に、イエスが麦畑を通っておられたときのことである。弟子たちは穂を摘んで、手でもみながら食べていた。
すると、パリサイ人のうちの何人かが言った。「なぜあなたがた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ことをする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ダビデと供の者たちが空腹になったとき、ダビデが何をしたか、
どのようにして、神の家に入り、祭司以外はだれも食べてはならない臨在のパンを取って食べ、供の者たちにも与えたか、読んだことがないのですか。」
そして彼らに言われた。「人の子は安息日の主です。」


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더러 안식일을 어긴다면서 비판을 해요? 안식일에 이걸 하면 안 된다, 저걸 하면 안 된다 하면서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해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너희들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야.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진정한 주인을 가르치려고 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음식>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림 같은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유명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면 뭐 한 둘이 아닙니다만, 그런데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서 똑 같은 그림인데 그 그림이 실려있는 책이나 포스터 같은 것을 보면 서로 색이 다르다고 느끼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다른가 했더니만, 얼마 전에 출판 전문가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 분에 의하면 색을 똑같이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잡지사 출신이었는데, 자기가 신입사원 때 교육을 받기 위해서 인쇄소에 갔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당시 <인쇄의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사람한테서 들은 말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뭐라고 했냐 하면, 어떤 그림을 화보로 만들 때에 본다면, 사진에 70, 인쇄에 70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본래 그림을 사진으로 찍으면 그 품질 그러니까 색깔은 원본의 70%밖게 구현을 할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인쇄를 하면 거기서 또 70%밖에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처음 사진에 찍을 때 70%가 되고, 인쇄할 때는 그 70% 중에서 70%라고 하니까 몇 프로입니까. 77이 49이니까 49%, 그러니까 마지막에 인쇄할 때에는 원화의 절반도 안 되는 49%밖에 나타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건 아무리 좋은 기계나 잉크나 종이를 쓴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49%보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몇 십 년 뒤에 그림 쪽 편집 일을 하게 되었었는데, 실제로 자기가 직접 가서 같이 작업을 해보니까 정말 그렇더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지금의 디지털 기술로 한다 하더라도 별반 차이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의 진정한 가치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 직접 가서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70%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나 쓸 수 있는 만능은 아니라고는 합니다만, 저는 이 말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성경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는 믿음이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에 있어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여러분께서는 몇 프로 정도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통틀어서, 솔직한 심정으로 내가 70% 정도라도 올바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포함해서라고 생각해야 되겠지요.

감히 외람되지만 넉넉잡아 70%라고 해보죠. 제가 성경의 70%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성경말씀을 제가 여러분께 전할 때에는, 그럼 제가 이해하고 있는 70%를 100% 전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이해하고 있는 100%를 모두 전한다고 해봐야 성경 원본의 70%잖아요.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도 본래 예정했던 내용을 모두 담지 못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1시간이 넘어갈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면 이 또한 넉넉잡아서 70%만 전해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순간 제가 여러분께 전해드린 것은 49%밖에 안 되겠지요?

그러면 제가 드린 말씀을 여기에서 70%만 이해하셨다고 한다면, 49%의 70%는 34.3%에요. 그럼 제가 드린 말씀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 말씀을 듣고 이해하신 것이 34.3%라고 한다면 거기 중에서 70%를 전하게 되었다고 하면, 34.3%의 70%는 24%밖에 안 된다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만 믿게 된다면 그 지식은 34.3%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면 그건 24%밖에 안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여기서 문제는 이것 만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24%를 전하게 된다면, 성경 전체에 있어서 24%만 전한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릅니다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그럼 뭐가 문제가 되냐 하면, 24%의 성경 지식이라면 100%중에서 몇 프로가 남아요? 100 빼기 24는? 예, 76프로가 남지요.

그렇다면 이 76프로가 뭐가 되냐 하면, 바로 자기 생각, 자기 해석, 자기 주장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613가지라고 신학자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율법의 종류는 무려 2134개였다고 하는 것이지요. 2134개 중에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 개수인 613개를 빼면 1521개가 됩니다.

그럼 1521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613개밖에 안 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1521개는?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각, 자신들의 생각을 넣은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어떤 숫자가 나오냐 하면, 2134개 중에서 613는 28%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그들이 주장했던 율법 중에서 진정으로 성경에 따른 율법은 30%도 안 되고, 나머지 70%가 넘는 가르침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해석, 자기들의 주장이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네 음식>이라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6장 27절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なくなってしまう食べ物のためではなく、いつまでもなくならない、永遠のいのちに至る食べ物のために働きなさい。それは、人の子が与える食べ物です。この人の子に、神である父が証印を押されたのです。」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화를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그 그림을 직접 봐야지만 그 그림의 색감이나, 유화의 경우에는 그 붓의 흐름까지도 이해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원화를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내가 있는 나라에 그 그림이 온다면 그나마 볼 기회라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 있는 그림이라면 적지 않게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야만 들을 수가 있나요? 아니요. 바로 우리가 가진 성경을 펼치면 됩니다. 성경을 펼치시는 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내 머리 속에서 나온 내 음식, 내 생각, 내 주장, 내 해석이 아닙니다. 30%가 아니요. 70%가 아니에요. 우리는 100%의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100%의 참된 양식, 참된 말씀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100%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리고 성령님을 알게 되어, 100%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100%의 하나님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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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89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2023년 4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0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13절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0節∼13節
“10.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11.次のように書かれています。「わたしは生きている──主のことば──。すべての膝は、わたしに向かってかがめられ、すべての舌は、神に告白する。」
12.ですから、私たちはそれぞれ自分について、神に申し開きをすることになります。
13.こういうわけで、私たちはもう互いにさばき合わ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いや、むしろ、兄弟に対して妨げになるもの、つまずきになるものを置くことはしないと決心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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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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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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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0번째 시간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隣人の愛し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는 전혀 생소하지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로마서 14장에만 보더라도 이미 몇 번이나 등장했던 말씀이기 때문이지요.

로마서 14장 1절에서도 “비판하지 말라”, 3절에서도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4절에서도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판단하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모든 무릎이 하나님 앞에 꿇게 될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내가 자백을 안 하면 하나님이 모르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 앞에 펼쳐진 그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인을 할래야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군가의 죄에 대해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에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죄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도 죄가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지요?


마태복음 7장 1절~5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주님께서는 우리 이웃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눈에 들보가 들어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 눈에는 큰 기둥만한 들보가 들어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작은 먼지만한 티를 지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그 들보부터 빼라, 그 다음에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내 눈 속에 박힌 들보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기서의 들보와 티라고 한다는 것은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큰 잘못과 작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기한테는 큰 잘못이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 이웃들한테 있는 작은 잘못을 가지고 그것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 이웃들의 그 작은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먼저 해결하라고 하시잖아요. 그런 다음에 우리 이웃의 작은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우리 중에서 우리 스스로의 큰 잘못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의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잖아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의인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의인이 있다면 누가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까. 그렇죠.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일부 사람이나 대다수의 사람이 아니에요.

30%나 90%가 아니라 10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값 없이 의롭게 되어, 구원 받을 자격, 천국 백성이 될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아무리 겉으로는 착한 척, 젊잖은 척을 한다 하더라도 그 누구 하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똑 같은 죄인끼리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요,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교회에서는 자꾸만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나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선 죄의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에 보시면 알기 쉽습니다.


우선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를 볼까요?

1.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第1戒「あなたには、わたしのほかに、ほかの神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第2戒「あなたは、自分のために、偶像を造ってはならない。」
第3戒「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の御名を、みだりに唱えてはならない。」
第4戒「安息日を覚えて、これを聖なる日とせよ。」

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어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어떻습니까.

5.네 부모를 공경하라.
6.살인하지 말라.
7.간음하지 말라.
8.도둑질하지 말라.
9.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第5戒「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第6戒「殺してはならない。」
第7戒「姦淫してはならない。」
第8戒「盗んではならない。」
第9戒「あなたの隣人に対し、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
第10戒「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ってはならない。」

이처럼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우리와 우리 이웃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우선 여기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간에 반드시 <상대방과의 관계>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라고 하는 것도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나와 이웃이라고 하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해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쩌면 이해하기가 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웃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이렇게 생각하면 좀 어려울 수 있으니까 십계명 중에서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다시 한 번 보시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쉽게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를 어기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공통점을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를 반대로 하나하나 다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5.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
6.살인을 한다.
7.간음을 한다.
8.도둑질 한다.
9.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한다.
10.네 이웃의 집을 탐낸다.

第5戒「あなたの父と母を敬わない。」
第6戒「殺人を犯す。」
第7戒「姦淫を犯す。」
第8戒「盗みを犯す。」
第9戒「あなたの隣人に対し、偽りの証言をする。」
第10戒「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がる。」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우선 1차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 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공동체가 있지요. 거기서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공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그 공동체가 건전하게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도 마찬가지지요. 살인을 하게 되면 당사자에게는 물론이요 그 가족이나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안겨주게 됩니까.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한 연애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혼을 비롯해서 우리에게 허락된 연애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벗어난 대상과 연애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연애대상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게 됩니다.

도둑은 이웃에 대한 금전적이나 재산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또한 우리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저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봤다고 증언을 하게 된다면 자칫, 무죄한 사람이 벌을 받을 수 있게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있어서의 이 탐하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사실 이 탐심이라고 하는 것은 제1계명부터 제9계명까지를 모두 범할 수 있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탐심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할 수 있는 것이요, 내 탐심 때문에 우리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그리고 생명이나 재산상의 손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더욱 간단하게 죄에 대해서 정의를 하자면,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것이요, 내 가족이나 이웃을 가볍게 여기고 생명이나 재산 또는 윤리적인 죄를 저지르는 일은 모두 이웃을 배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별히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야 하는 교회에서 왜 이웃사랑이 사라져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평신도 때 교회에 다니면서 그래도 설교 말씀도 많이 듣고 그랬을 텐데, 이건 제 기억력이 딸려서 그런지 몰라도, 특별히 이웃사랑에 초점을 맞춘 말씀은 그리 많이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나 축복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어요. 기적이나 은사에 대해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딱히 기억에 남는 설교 말씀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성경을 한 번 보시면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이 넘쳐납니다.

우선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씀을 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럼 “둘째도 그와 같으니”가 무슨 뜻이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이는 두 번째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중요하고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과 이웃과 화목하는 것.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이 중요하냐 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왜 형제한테 원망을 듣겠습니까. 그것은 네 형제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네 형제를 배신했기 때문에, 즉 네 이웃에 대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만약에 예배를 드리려다가 그런 일이 생각나거든, 예배보다도 어서 이웃과 화목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예,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만큼 중요하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神を愛す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んでいるなら、その人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してい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나한테 있는 것을 다 퍼준다거나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건 오히려 사랑이 아니지요.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7절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愛は寛容であり、愛は親切です。また人をねたみません。愛は自慢せず、高慢になりません。
礼儀に反することをせず、自分の利益を求めず、苛立たず、人がした悪を心に留めず、
不正を喜ばずに、真理を喜びます。
すべてを耐え、すべてを信じ、すべてを望み、すべてを忍びます。

이 유명한 구절을 많은 사람들은 자꾸 결혼생활이라고만 해석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좁은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자기 배우자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한 말씀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오랫동안 가졌던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 동안 혼자서만 고민하다가 결국 어느 변호사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진 문제가 너무나도 부끄럽고, 도대체 왜 자기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이해해 줄 것인가 하는 마음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사람한테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다행히 이 사람이 상담을 한 변호사는 아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그 변호사한테 자신의 문제를 다 털어놓으면서 “저도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만 그 변호사가 그러더라는 거예요. “괜찮아요. 사람 살다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이 상담을 했던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말 한 마디에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면 무엇이든지 털어놓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말이 지금도 제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쩌면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말씀처럼 오래 참고 온유함을 가진다면, “그래, 사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저 사람이 나한테 저렇게 심한 말을 하거나 했다 하더라도, 그래,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야……. 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편해질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이 말씀,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마태복음 7장 2절
“너희가 남을 판단하는 것만큼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며 남을 저울질하는 것만큼 너희도 저울질 당할 것이다”

우리가 저울질 하는 것만큼 우리도 저울질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럼 누구한테 우리가 저울질을 당할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저울질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웃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래 괜찮아. 사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라고 한다면, 우리 주님도 우리의 잘못을 이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해서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라고 저울질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아니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라고 하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그리고 오늘 말씀 중 로마서 14장 10절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0.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남은 삶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은혜와 자비로운 헤아림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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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88회 나오라고 하시는 주님
2023년 4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9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7節∼9節
“7.私たちの中でだれ一人、自分のために生きている人はなく、自分のために死ぬ人もいないからです。
8.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9.キリストが死んでよみがえられたのは、死んだ人にも生きている人にも、主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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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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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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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9번째 시간으로 “나오라고 하시는 주님” 出て来なさいと言わ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9절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4章7節~9節
7.私たちの中でだれ一人、自分のために生きている人はなく、自分のために死ぬ人もいないからです。
8.私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にます。ですから、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たちは主のものです。
9.キリストが死んでよみがえられたのは、死んだ人にも生きている人にも、主となるためです。


자, 성경에 보시면 정말 은혜로운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 한 구절을 읽으면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을 때도 있고, 새로운 깨우침을 얻을 때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산다고 하는데, 이 말씀에 진정으로, 아, 맞습니다. 하는 마음이, 글쎄요. 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뭐, 편하게 생각해봐요. 뭐, 누구를 위해 사느냐 뭐 그런 좀 어려운 말을 하면 골치 아플 수도 있으니까, 한 번 쉽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은행에 예금이 있지 않습니까. 많든 적든 간에 있잖아요? 그거, 누굴 위한 것입니까.

솔직히 나를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아니, 어떻게 그게 나만을 위한 돈이냐. 우리 가족을 위해, 우리 자녀를 위해 모아 놓은 재물이 아니냐 하고 말씀하시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거기에서 차지하는 <나>의 비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돈이 있는 곳이 어디 은행 뿐이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가족 몰래, 자기만의 돈을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잖아요. 다른 돈은 몰라도 그건 자기 몫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요즘 일본에 살러 오는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보면, 왜 미국에서 살게 되었냐고 하면 대부분 자녀 교육을 위해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그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자녀 교육은 무슨. 솔직히 자녀 교육이라기 보다는 대부분이 자기들이 살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 나를 위해 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내 삶이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래요. 조금 범위를 넓혀 본다 하더라도 나나 내 가족을 위해서 산다……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뭐 죽어도 나나 내 가족을 위해 죽는다……라고 하면 좀 무서우니까, 그냥 우리가 살아도 나나 내 가족을 위해 산다……이상한가요? 그 정도로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말씀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에요. 이 부담스러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성경에 적혀 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 안 믿어지더라도 아멘 하고 그냥 믿는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글쎄요. 그런 게 정말 믿음이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믿음이라기보다는, 성경적으로 본다면 외식, 그냥 겉치레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 16장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일단 누가복음 16장 1절~9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절~9절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イエスは弟子たちに対しても、次のように語られた。「ある金持ちに一人の管理人がいた。この管理人が主人の財産を無駄遣いしている、という訴えが主人にあった。
2.主人は彼を呼んで言った。『おまえについて聞いたこの話は何なのか。会計の報告を出しなさい。もうおまえに、管理を任せておくわけにはいかない。』
3.管理人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主人は私から管理の仕事を取り上げようとしている。土を掘る力はないし、物乞いをするのは恥ずかしい。
4.分かった、こうしよう。管理の仕事をやめさせられても、人々が私を家に迎えてくれるようにすればよいのだ。』
5.そこで彼は、主人の債務者たちを一人ひとり呼んで、最初の人に、『私の主人に、いくら借りがありますか』と言った。
6.その人は『油百バテ』と答えた。すると彼は、『あなたの証文を受け取り、座ってすぐに五十と書きなさい』と言った。
7.それから別の人に、『あなたは、いくら借りがありますか』と言うと、その人は『小麦百コル』と答えた。彼は、『あなたの証文を受け取り、八十と書きなさい』と言った。
8.主人は、不正な管理人が賢く行動したのをほめた。この世の子らは、自分と同じ時代の人々の扱いについては、光の子らよりも賢いのである。
9.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不正の富で、自分のために友をつくりなさい。そうすれば、富がなくなったとき、彼らがあなたがたを永遠の住まいに迎えてくれます。

이 말씀을 볼 때는 마지막 9절에 나오는 “불의의 재물(不正の富)”이라는 점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말들을 듣습니다만, 일단 그것은 조금 있다가 살펴보고 우선 문장 구성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 부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부자이고 둘째는 부자의 청지기, 그리고 셋째는 이 부자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청지기가 부자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청지기에게 말하기를 해고 통보를 하게 되지요. 너 모가지야. 그러니까 인수인계 할 준비를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이 청지기는 큰일 났습니다. 비록 청지기라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지식이 있어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식으로 하자면 경영이나 회계학 같은 지식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가 되어보세요. 그 바닥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소문이 나 버린 마당에 어떻게 재취업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이제 와서 막노동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를 어쩌나 하고 고민을 하더니만, 이제 주인한테 빚이 있는 사람들을 집합시킵니다.

그러면서 당신 얼마나 빚 졌느냐. 그래? 그럼 더 적게 빚졌다고 여기 쓰라고 하면서 그 빚을 자기 멋대로 깎아주기 시작해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부자가 왜 이 청지기한테 화가 났습니까.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유 때문에 화가 났다면서요. 그러면 청지기가 조금이라도 용서를 빌라고 했었다면, 그 낭비한 돈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빚진 돈을 더 받아내면 받아냈지 줄이면 안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기 멋대로 액수를 막 줄여요.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이봐, 당신은 얼마나 빚졌어? 1000만원? 그럼 여기 증서에 500만원이라고 써. 당신은 얼마나 빚졌어? 1억원? 그럼 여기에 8000만원이라고 써. 뭐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막 깎아줘요.

그럼 주인은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아니 이 녀석 봐라. 내가 내 재산을 낭비한다고 해서 모가지를 시키려고 했는데, 이제 막판에 가서는 내 재산을 더 낭비하고 있잖아? 너 오늘 당장 나가! 라고 해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8절에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해서 칭찬했다고 합니다.

主人は、不正な管理人が賢く行動したのをほめた。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점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만 본다면 주인은 예전보다 훨씬 더 손해를 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그것은 이 청지기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점을 살펴보면 정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갑자기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씀 내용으로 본다면 청지기에게 있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아무런 대비도 해 놓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깎아주었습니다. 여기서 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빚을 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6절에 보시면 기름을 100말(バテ) 빚졌다고 해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기름 한 말은 대략 23리터 정도라고 합니다. 그럼 100말이라고 하면 2300리터예요. 이걸 당시 돈으로 환산다면 1000데나리온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라고 하니까 편의상 10000엔 정도라고 한다면 10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얼마냐 하면 10000엔 곱하기 1000이니까 10,000,000엔 그러니까 한국 돈으로 1억원 정도가 되는 것이지요.


7절에서는 밀 100석(コル)을 빚졌다고 하지요. 당시 밀 한 석은 돈으로 환산하면 25데나리온이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1 데나리온을 1만엔으로 환산해본다면 25만엔이 되겠지요. 그런데 100석이라고 하니까 2500만엔. 우리 돈으로 2억 5천만원을 빚졌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빚을 진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이 청지기의 주인이 아무리 부자였다고는 하지만, 아무한테나 몇 천만엔, 몇 억원이나 되는 돈을 빌려주었겠습니까.


지금도 회계상으로 본다면 자산이라고 하면 자본만이 아니라 부채도 포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채도 자산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 빚진 사람들도 알고 보면 상당한 재력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청지기도 만약에 여기서 해고가 된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한테 잘 보여놓으면 이 사람들이 나를 고용해줄 수도 이을 테니까 내가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판단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부자한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잔머리를 굴려서 남의 돈을 가지고 인심 쓴 것 아니겠습니까.

음? 제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 청지기는 누구 돈을 가지고 인심을 쓴 것이에요? 자기 돈이에요? 아니에요. 남의 돈으로 인심을 쓴 것이지요.

이 청지기는 자기가 영원히 그 일을 계속할 줄 알았습니다. 그 돈을 주인 돈이 아닌 자기 돈으로 생각하고 일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고 통보를 받고 보니까, 아차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내 맘대로 빌려주고 싶으면 빌려주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해서 다 내 돈인 줄 알았는데, 이게 알고 보니까 다 내 돈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내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여기서 나가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했던 것은 바로 이 점, 그러니까 그게 다 네 돈이 아니다. 네가 지금 네 돈인 줄 알고 있는 돈에 대한 주인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청지기를 칭찬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9절에서는 “불의의 재물(不正の富)”이라고 합니다.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여기서는 자기가 주인이 아닌 재물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 우선 여기까지를 보시겠습니다. 청지기는 회계를 담당했습니다. 돈을 꾸어줄지 여부를 이 사람이 심사했을 수도 있겠지요. 이 청지기는 상당히 까다롭게 심사를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만, 어쩌면 이 청지기는 거기서 횡령……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인센티브를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조금이라도 더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해고통보를 받고 난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아, 이게 다 내 것이 아니었구나. 진정한 주인이 따로 있었구나. 그래서 그는 그 때부터 인심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 이유는 바로 그게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 자기 주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만,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기록된 장면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それからイエスはエリコに入り、町の中を通っておられた。
2.するとそこに、ザアカイという名の人がいた。彼は取税人のかしらで、金持ちであった。
3.彼はイエスがどんな方かを見ようとしたが、背が低かったので、群衆のために見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4.それで、先の方に走って行き、イエスを見ようとして、いちじく桑の木に登った。イエスがそこを通り過ぎようとしておられたからであった。
5.イエスはその場所に来ると、上を見上げて彼に言われた。「ザアカイ、急いで降りて来なさい。わたしは今日、あなたの家に泊まることにしているから。」
6.ザアカイは急いで降りて来て、喜んでイエスを迎えた。
7.人々はみな、これを見て、「あの人は罪人のところに行って客となった」と文句を言った。
8.しかし、ザアカイは立ち上がり、主に言った。「主よ、ご覧ください。私は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たちに施します。だれかから脅し取った物があれば、四倍にして返します。」
9.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今日、救いがこの家に来ました。この人もアブラハムの子なのですから。
10.人の子は、失われた者を捜して救うために来たのです。」


당시 세리라고 하면 죄인의 대명사였지요. 그 때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거기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지역에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을 로마인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임명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세리들을 보는 눈이 곱겠습니까. 일제 시대 때 조선 사람들한테서 세금을 거두어서 일본에 갖다 바치는 사람이 조선 사람이었다고 해보세요. 말 그대로 일본 앞잡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당시 세리를 보면,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만큼만 세금을 거두어들이면 자기들은 남는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거두어 들여서, 일정 금액은 로마에 바치고 그 나머지는 자기들이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들은 이스라엘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사람을 보니까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세리장 삭개오는 예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해요.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자기는 키가 작아요. 그래도 군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평소에도 미워하는 그 삭개오한테 사람들이 길을 양보해주겠습니까.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만 보면 그냥 뭐 그런가보다 하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삭개오한테 있어서는 대단한 결단을 한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무에 오를 때의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 26절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あなたはわたしの祭壇に階段で上るようにしてはならない。その上で、あなたの裸があらわにな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지금은 바지를 입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천을 그냥 뒤집어 쓰고 둘둘 감은 듯한 옷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상태로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요즘 식으로 본다면 여자기 치마를 입고 나무에 올라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뜻입니다.


당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옷 길이를 길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 복장을 하게 되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뛰어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좀 목에 힘을 준다는 사람들은 평소에 서두른다 하더라도 웬만해서 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그냥 세리도 아니고 세리장이에요. 동족 유대인들한테는 미움을 받았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사회적으로는 목에 힘깨나 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뛸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부끄러움을 보일 수도 있는 나무에 올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자기의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그 절박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돈이야 많았지만 그 돈에 묻은 자신의 죄악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번민도 깊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그 탐욕이라고 하는 무덤 속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합니다. 그는 어쩌면 예수님이 자신을 그 갇혀 있던 어둠 속에서 건져내 주실 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을 저 멀리서나마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다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체면도 명예도 교만도 오만도 자만도 버렸습니다. 빤쓰가 보이든 부끄러운 모습이 보이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신 없이 허겁지겁 나무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저 멀리 지나갈 뿐만 아니라, 나무 위에 있는 자기를 바라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연히 나무 위를 보셨을까요?

기본적으로 사람은 앞을 바라보거나 아래를 보긴 하지만 위를 바라보지는 않아요. 그래서 예전에 보면 형사 같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감시할 때를 보면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내려다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시선보다 높은 곳에 있으면 잘 들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셨어요. 이는 우연히 보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의도적으로 굳이 위를 올려다 보셨다고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쳐다보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외국어 번역에 보면 모두 위를 올려다 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까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어요. 뿐만 아니라 내가 오늘은 너희 집에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이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유명한 사람이 온다기에 멀리서나마 보러 갔더니만, 아니 그 사람이 나를 쳐다봐준 것만으로도 황송한데 악수까지 해줘요. 그리고 오늘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 정도가 아니에요. 오늘 너네 집에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뭐 좁은 집이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삭개오는 부자였어요. 귀한 손님을 맞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겠지요

그는 너무나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신 다음에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누가복음 19장 8절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しかし、ザアカイは立ち上がり、主に言った。「主よ、ご覧ください。私は財産の半分を貧しい人たちに施します。だれかから脅し取った物があれば、四倍にして返します。」

좀 뜬금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더러 이런 나쁜 녀석이라고 화를 내셨습니까.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셔드린 순간 그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 안에 가득 차고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모든 재산들이 다 내 것이 아니구나. 나쁜 짓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다 내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제 그는 비로소 자기가 그 때까지 갇혀있던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그 탐욕과 죄악이라고 하는 무덤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5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5절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
ニコデモはイエスに言った。「人は、老いていながら、どうや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ますか。もう一度、母の胎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などできるでしょう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まことに、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人は、水と御霊によって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ません。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그 전에 갇혀 있었던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하지요.

처음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들 속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20절~23절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イエスはまた言われた。「人から出て来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内側から、すなわち人の心の中から、悪い考えが出て来ます。淫らな行い、盗み、殺人、
姦淫、貪欲、悪行、欺き、好色、ねたみ、ののしり、高慢、愚かさで、
これらの悪は、みな内側から出て来て、人を汚すのです。」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악한 생각, 탐욕, 교만 등이라고 하는 어두운 무덤 속에 갇혀 버립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나를 생각하고, 이웃을 섬기기 전에 내 배를 채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다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옳지 않은 청지기, 믿음이 없는 청지기는 그 사실을 해고통보를 받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 사실을 깨달을까요. 병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3개월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깨달으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이 부활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14장 9절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9.キリストが死んでよみがえられたのは、死んだ人にも生きている人にも、主となるためです。


주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주가 되시고 산 자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무덤 안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 무덤으로부터 나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장사를 지낸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イエスは言われた。「その石を取りのけなさい。」死んだラザロの姉妹マルタは言った。「主よ、もう臭くなっています。四日になりますから。」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서 외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4절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そ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ラザロよ、出て来なさい。」
すると、死んでいた人が、手と足を長い布で巻かれたまま出て来た。彼の顔は布で包まれていた。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ほどいてやって、帰らせなさい。」

이미 무덤 속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상황이었으나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염을 한 상태로 걸어서 나왔다는 것이에요.

탐욕과 음란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하는 어둡고 캄캄한 무덤 속에 갇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다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 나오게 되니, 이제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는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것이 아깝습니까. 아까운 것은 내가 가진 돈이나 재산이 아니라, 내게 남겨진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1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가복음 16장 11절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不正の富に忠実でなければ、だれがあなたがたに、まことの富を任せるでしょうか。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불의한 재물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는 재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가면 진정한 참된 것, 참된 재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4장 9절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それは頭に麗しい花の冠を与え、輝かしい冠をあなたに授ける。」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試練に耐える人は幸いです。耐え抜いた人は、神を愛する者たちに約束された、いのちの冠を受けるからです。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어두운 무덤 속을 뛰쳐나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충성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을 만나는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참된 재물, 참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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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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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_기린선교회_http://www.kirin.kr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7회 놓아야 할 손
2023년 4월 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5절~6절
“5.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5節∼6節
“5.ある日を、他の日に比べて、大事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が、どの日も同じ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それぞれ自分の心の中で確信を持ちなさい。
6.日を守る人は、主のために守っています。食べる人は、主のために食べています。なぜなら、神に感謝しているからです。食べない人も、主のために食べないのであって、神に感謝し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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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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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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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고난주간을 맞아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8번째 시간으로서 “놓아야 할 손” 放すべき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께 몇 가지 질문을 해보려고 합니다.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고 웃어넘기지 마시고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본래는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형벌을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교회에 좀 다니고 그러면 이와 같은 신앙고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분명히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만, 오늘은 한 번 실제로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째로,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지요. 특히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로,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까. 여기에는 예수님이 사람이면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보다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그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12장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마가복음 3장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すぐに、ヘロデ党の者たちと一緒に、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여러분께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정확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하기 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사실 나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본래는 하나님 말씀을 남들보다 잘 지키려고 했었던 사람들,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 이 두 구절, 마태복음 12장 14절과 마가복음 3장 6절은 모두 같은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데, 오늘은 마가복음 구절을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3장 1절~5절
“1.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1.イエスは再び会堂に入られた。そこに片手の萎えた人がいた。
2.人々は、イエスがこの人を安息日に治すかどうか、じっと見ていた。イエスを訴えるためであった。
3.イエスは、片手の萎えたその人に言われた。「真ん中に立ちなさい。」
4.それから彼らに言われた。「安息日に律法にかなっているのは、善を行うことですか、それとも悪を行うことですか。いのちを救うことですか、それとも殺すことですか。」彼らは黙っていた。
5.イエスは怒って彼らを見回し、その心の頑なさを嘆き悲しみながら、その人に「手を伸ばしなさい」と言われた。彼が手を伸ばすと、手は元どおりになった。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니까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자 주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모두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이 주시했던 이유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2절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3장 2절
“2.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2.人々は、イエスがこの人を安息日に治すかどうか、じっと見ていた。イエスを訴えるためであった。

그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이전에도 예수님의 기적은 많이 봐왔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그 병자를 치료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낫게 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그들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라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일을 하시느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서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대단히 엄합니다. 출애굽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1장 14절~15절
“14.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4.あなたがたは、この安息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れ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聖なるものだからである。これを汚す者は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安息中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自分の民の間から断ち切られる。
15.六日間は仕事をする。しかし、七日目は主の聖なる全き安息である。安息日に仕事をする者は、だれでも必ず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안식일에 일을 하셨어요.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께서 2천년 전의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였다면, 예수님의 이 행동을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어쩌면 누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신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1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一匹持っていて、もしその羊が安息日に穴に落ちたら、それをつかんで引き上げてやらないでしょうか。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아무리 안식일이라고는 하나 자기들도 정말로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거나 하면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끌어내고 그랬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를 비난하고, 뿐만 아니라 죽이고자 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일단 여기까지 살펴보고 다음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동시에 세 가지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마음 속으로 그렇다, 아니다, 하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 구약 때 안식일은 신약 때의 주일이다.
2.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예배는 반드시 일요일에 드려야 한다.
3. 주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1번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 구약 때의 안식일은 토요일……더 정확하게는 금요일 밤에 해가 졌을 때부터 토요일 밤까지가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일은 일요일이니까 신약이 되면서 하루 늦춰진 것인가요? 사실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안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주일은 무슨 날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지요.

마태복음 28장 1절, 마가복음 16장 2절 등에 의하면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안식일인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 무덤으로 갔더니 거기서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최소한 일요일 아침에는 부활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해서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주일예배가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 드리자면 구약 때의 안식일이 신약 때의 일요일이 된 것이 아니라, 이 둘은 완전히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예배를 일요일에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사실 왜 이렇게 재미도 없는 안식일 얘기를 많이 하냐 하면, 이는 바로 오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5절~6절
“5.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5節∼6節
“5.ある日を、他の日に比べて、大事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が、どの日も同じだと考える人もいます。それぞれ自分の心の中で確信を持ちなさい。
6.日を守る人は、主のために守っています。食べる人は、主のために食べています。なぜなら、神に感謝しているからです。食べない人も、主のために食べないのであって、神に感謝し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라고 하는 말씀은, 이를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안식일과 주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로마서가 쓰이는 시기는 당연히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어떤 식으로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자면 누구는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또 누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해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6절에 보면 어느 날을 중요하게 여기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교회들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다른 요일에도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일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성경말씀을 어기고 있는 것인가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조금 큰 교회가 되면 수요일에는 수요예배가 있고 금요일에는 금요철야가 있잖아요? 그럼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어떻습니까.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이단이에요?

제가 한국에서 섬기던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보면 토요예배도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일요일에 못 나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드려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그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요?


사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하는 분들 사이에도 이와 같은 점이 서로 혼돈이 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 헷갈려 하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배는 일요일에만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다른 날에 드리는 것도 거룩한 예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9.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30.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구약에서는 안식일에만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루 하루가 주님 안에서 쉼을 얻는 거룩한 주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세 번째로 주일날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만약에 일요일에 영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일요일에 영업을 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성경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와 같은 말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누구는 아, 일요일에 문을 닫았더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면서 간증을 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갈은 일은 어쩔 수 없이 일요일에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단히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업무상 주일에 쉴 수가 없대요. 하지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요일만 아르바이트생을 구해서 자기는 교회에 나간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이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논리로 한다면, 그건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 아르바이트생은 구원을 못 받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믿음이 있다면 그 아르바이트생도 전도해서 같이 교회에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자기만 교회에 가서 축복 받고 그 아르바이트생은 축복받지 못하게 합니까.

그러면 주일날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요? 주일 날 영업하는 백화점이나 편의점을 이용해요? 주일날 영화나 텔레비전을 봐요? 주일에는 피해를 당해도 경찰을 안 부르고, 불이 나도 소방차를 안 부르실 건가요?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주일과 안식일을 혼돈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앞서 예배로 돌아간다면 어디는 토요일만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문제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자기들은 옳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믿음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는 거예요.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9장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しかし、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やめさせ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がたに反対しない人は、あなたがたの味方です。」 
그리고 교회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요일에만 드리는 예배만 거룩한 예배인가요. 사실 여건이 허락만 된다면 교회에서 일주일 내내 매일 같은 시간 대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 무슨 요일이라 하더라도 항상 같은 그 시간에 가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교회로서 이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 식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다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판과 비난이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이러면 안 된다, 저러만 안 된다는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과거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강조했던 이유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요, 더욱 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처럼 형식을 강조하려는 이유는 바로 권력 또는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종교혁명 이전의 교회에서도 유럽에 보면 유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설교가 교인들이 못 알아듣는 라틴어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도 라틴어로 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은 성경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었느냐 하면, 당시 사제들이 하는 말이 곧 성경 말씀이자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도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성경을 읽을 필요 없다. 내가 하는 말이 곧 성경 말씀이니까 내 말만 따르라. 이렇게 강조했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2천년 전 바리새인들의 모습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이 2천년 전에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이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혁명을 일으키고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이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국어나 일본어, 우리의 모국어로 된 성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뭐예요? 예, 안 읽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 목사님의 말이나 기독교서적만을 읽고 믿어요.

아니, 목사님의 말씀이나 그와 같은 책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분이 쓰고 아무리 많이 팔리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해악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났는지 아닌지를 몰라요. 왜 모르냐 하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을 보세요. 다들 성경은 읽지 않고 자기 교주가 쓴 책들을 보면서 그걸 믿으라고 합니다.

사실 이게 다 백지창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경은 읽지 않고 자기 교회 담임목사님 설교만 듣거나, 그 분이 쓴 책만 읽는다면 이를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분들은 신앙에 있어서 기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중요하지요. 그러나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말씀 드리고 있잖아요. 여기에 기도라고 하는 말은 들어가지 않아요.

그럼 기도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도는 행함 중의 하나에요.

우리가 궁할 때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행함 중의 하나에요.

올바른 행함,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주일이 뭐다 안식일이 뭐다 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게 되면, 이는 자칫 우리 이웃에게 상처를 주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은 여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는 겉잡을 수 없는 자만과 오만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교만이 없습니까. 자만이나 오만이 없습니까. 이를 어설픈 성경지식이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손을 한 번 보십시오. 만약에 우리 손에 그처럼 이웃을 상처 주는 교만이 있다면, 그 손은 다름 아닌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손인 것입니다.

이제 그 교만과 오만과 자만에 물든 손을 놓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망치가 든 그 끔찍한 손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주님의 보혈로 씻고, 이제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귀한 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면 꿈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을 펼치는 일입니다. 성경을 펴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교만과 오만과 자만을 떨쳐 버리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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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6회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2023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4節
“4. 他人のしもべをさばくあなたは何者ですか。しもべが立つか倒れるか、それは主人次第です。しかし、しもべは立ちます。主は、彼を立た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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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7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私たちが高められる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4.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他人のしもべをさばくあなたは何者ですか。しもべが立つか倒れるか、それは主人次第です。しかし、しもべは立ちます。主は、彼を立た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からです。

오늘 말씀에 보시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자기 주인한테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선 <남의 하인>( 他人のしもべ)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하인>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사람 밑에 있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밑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하는 사람,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주인이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사람에게는 이처럼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제3자는 여기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 사장과 사원을 주인과 하인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고용주와 피고용주라고 하는 입장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원은 자기 스스로의 인사고과 그러니까 업무수행평가를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임금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을 승진시킬 것인지 아닌지, 월급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회사 경영진의 결정에 달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인사권에 대해서 제3자는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남의 회사 직원의 인사에 대해서 누구를 승진시켜라 마라, 누구 임금을 올려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가끔 보면 목사님들이 자기 자신을 놓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는 주의 종이기에 잘잘못이 있으면 주님이 판단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한국에는 이 목사에 대해서 신성시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을 목회자 스스로가 강조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이 말씀이 과연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듭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사가 신성하다면 교인들은 신성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무엇입니까.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대단하거나 신성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목사나 교역자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은 모두가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인’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밑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5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2.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3.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4.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5.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이 말씀의 구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1절~2절만 보실까요.

마태복음 7장 1절~2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1.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2.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 비판이나 비난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다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호평을 받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비판을 하면 너희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고, 너희가 누군가를 평가하면 너희도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재판을 하게 되면 판사가 죄인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그럼 그것을 두고 판사한테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합니까.

아니에요. 판사는 죄인에게 그가 저지른 죄에 따라서 판결을 내려야 해요. 그것은 판사와 죄인이라고 하는 분명한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입장이고, 죄인은 그 판결에 승복을 하여야 하는 절대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판사한테, 당신이 판결을 내리면 당신도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나 상대방이나 똑 같은 입장, 다시 말해서 똑같이 비판을 받을 만한 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판사가 죄인을 비판하고 판결을 내릴 수는 있지만, 죄인이 죄인에게 비판하고 판결을 내릴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3절~4절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7장 3절~5절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3.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4.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5.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주님께서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들어 있으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에 대해서 트집 잡고 있는 사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들보라고 하면 대들보……말하자면 큰 나무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한테 있는 대단히 작은 흠집을 두고 그것을 나무라는 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너한테는 그 먼지 같은 흠집이 아니라, 나무 기둥만한 흠집이 있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일종의 착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상대방을 비판하면 상대방보다 위에 있게 되고, 내가 상대방을 칭찬하면 상대방보다 밑에 있게 된다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인들 보십시오. 정권을 누가 잡든, 여당이 야당을 칭찬하고 야당이 여당을 칭찬하는 것 보셨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상대방보다 위에 있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 상대방에 대해서 작은 티가 있다고 트집을 잡고 있는데, 너한테는 티가 없는 줄 알아? 티 정도가 아니라 들보만한 흠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비판할 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이 있다. 내가 정의이고 상대방은 불의하다.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스스로도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끄러워서 상대방을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방을 비판하는 이유는 나한테는 잘못이 없고 상대방한테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그 비판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나요? 옳기만 한가요? 주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역시 똑같다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눈에는 들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눈에는 왜 다른 사람의 티가 보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 눈속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그 들보가 자기 잘못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지금 어디어디 지점 고속도로에서는 한 자동차가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하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보니까 자기가 달리고 있는 지점이에요. 그런데 주변을 보니까 역주행을 하고 있는 차가 한 대가 아니에요. 자기 주변을 달리고 있는 수 십대, 수 백대 자동차가 다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혼자 중얼거립니다. 역주행을 하고 있는 자동차가 한 대라니? 나 빼고 다 역주행을 하고 있잖아?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는 자기만 멀쩡하고 다른 차들이 다 잘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게 어디 정치인들만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들도 우리 이웃을 칭찬하고 높이기보다도 어떻게 하면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깎아 내리려고 합니까.


다른 사람한테 티가 있어 보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한테 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너한테 들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유는 너한테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되십니까.


어쩌면 사실은 나 혼자만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이 내게 돌아옵니다. 비난을 하면 그 비난이 나한테 고스란히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제가 드리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하는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큰 폭력이요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잠언 18장 21절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死と生は舌に支配される。どちらかを愛して、人はその実を食べる。

이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몰라요.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이 말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손과 발로 열심히 일을 하신 결과 천하만물을 지으셨습니까.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하는데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그리고 6절, 9절, 11절, 14절 모두 어떻게 시작하냐 하면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神は仰せられた。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 시편 33편 6절입니다.


시편 33편 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主のことばによって 天は造られた。 天の万象もすべて 御口の息吹によって。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능력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했던 로마서에서도 있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우리는 어려운 계약서를 쓰고 도장 찍고 공증 받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입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4편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私はあらゆるときに 主をほめたたえる。 私の口には いつも主への賛美がある。

우리가 이 세상에 천년 만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은 그 수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의 수는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말 한 마디로도 주님을 찬양하고 말 한 마디로도 이웃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높이는데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을 칭찬하면 내가 낮아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이웃을 비판해야지 내가 저 사람보다 높아질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우리가 하인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스스로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높이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나를 낮추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를 낮추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우리 이웃을 높일 때 내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높일 때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이 세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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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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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5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2023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3절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節∼3節
“1.信仰の弱い人を受け入れなさい。その意見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
2.ある人は何を食べてもよいと信じていますが、弱い人は野菜しか食べません。
3.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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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6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私たちを自由にする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특히 오해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선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검토한 다음에 전체적인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1절부터 보실까요.


로마서 14장 1절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信仰の弱い人を受け入れなさい。その意見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부분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이게 정말인지, 홍해가 갈라졌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지 잘 안 믿어진다……사실 초신자 때에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믿음이 부족하다>라고 하는데, 그런데 오늘 여기서 <믿음이 연약하다>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주석서에 보니까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 말씀이 비교적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라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주석서에 보니까 보다 자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그러니까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근거 없는 기준을 가진 자>를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대단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말씀 드린다면,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의 본래 의미보다도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절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2.ある人は何を食べてもよいと信じていますが、弱い人は野菜しか食べません。

자, 본문 말씀에 보시면 좀 흥미로움 말씀이 나오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어떻게 한대요? 예, 채소만 먹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우선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고기를 좋아하십니까. 예, 저도 고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맨처음부터 고기를 먹었던 것은 아니에요.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첫 계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부분만 주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 앞부분도 이 또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에덴에 있는 각종 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채식 그러니까 과일만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됩니까. 그것은 사람이 창조된 이후 훨씬 나중이 되어서입니다.


성경 기록에 따라서 계산해 보면 아담이 창조되고 1656년이 지난 다음에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때까지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홍수가 끝나고 세상에 가득 찼던 물이 다 마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3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生きて動いているものはみな、あなたがたの食物となる。緑の草と同じように、そのすべてのものを、今、あなたがたに与える。

자, 여기서 하나님은 비로소 사람에게 동물 즉 고기를 먹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창세기 9장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ただし肉は、そのいのちである血のあるままで食べてはならない。


하나님은 고기를 먹을 때에 그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조건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지요.

여기에 보시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규정들이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이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 14장 등에 보시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고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시면 다음과 갈은 기록이 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16절
“8.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
11.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14.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15.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16.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ダニエルは、王が食べるごちそうや王が飲むぶどう酒で身を汚すまいと心に定めた。そして、身を汚さないようにさせてくれ、と宦官の長に願うことにした。
神は、ダニエルが宦官の長の前に恵みとあわれみを受けられるようにされた。
宦官の長はダニエルに言った。「私は、あなたがたの食べ物と飲み物を定めた王を恐れている。あなたがたの顔色が同年輩の少年たちよりもすぐれないのを、王がご覧になるのはよいことだろうか。あなたがたのせいで、私は王に首を差し出さ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
そこでダニエルは、宦官の長がダニエル、ハナンヤ、ミシャエル、アザルヤのために任命した世話役に言った。
「どうか十日間、しもべたちを試してください。私たちに野菜を与えて食べさせ、水を与えて飲ませてください。
そのようにして、私たちの顔色と、王が食べるごちそうを食べている少年たちの顔色を見比べて、あなたの見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このしもべたちを扱ってください。」
世話役は彼らのこの申し出を聞き入れ、十日間、彼らを試した。
十日が終わると、彼らは、王が食べるごちそうを食べているどの少年よりも顔色が良く、からだつきも良かった。
そこで世話役は、彼らが食べるはずだったごちそうと飲むはずだったぶどう酒を取り下げ、彼らに野菜を与えることにした。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따로 뽑아서 왕을 보필하도록 했는데 그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왕을 모시는 사람인데 용모가 지저분하거나 빈약해 보이면 그렇잖아요. 그래서 다니엘 1장 4절~5절에 의하면 그들은 왕을 섬기는 일을 하기 전에 3년 동안 교육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는 식단까지도 철저하게 관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이 먹는 음식들, 정확하게는 고기와 포도주가 아니라 채식과 물을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을 관리하는 환관장은 긴장을 해요. 왜냐하면 아니, 좀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어야지 얼굴 살도 좀 보기 좋아지고 할텐데, 괜히 채소나 줬다가 초췌해지거나 하면 그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봐, 내가 고기나 포도주 같은 영양가가 있는 것을 주지 않고 괜히 채소나 맹물만 줬다가 잘못되면 내 목이 날라갈까 겁이 난다고 했더니만, 다니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시험 삼아 열흘 동안만 그렇게 시험해보라고 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여전히 고기와 포도주를 주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한테는 열흘 동안만 시험 삼아서 채소와 맹물만 줘봤는데, 열흘이 지난 다음에 비교해보니까, 영양가가 많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은 사람들보다 채소와 맹물을 먹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얼굴색이 훨씬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 환관장은 이제 안심하고 그 이후에는 고기와 포도주 대신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채소와 맹물을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자, 여기까지 들은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기의 피는 절대로 먹지 말고, 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음식물도 먹지 말고, 그리고 다니엘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채식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제 말씀이 이상해요? 아니, 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잖아요.

우선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거 지킬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무슨 선지나 육회 같은 것을 안 먹으면 된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고기 스테이크 같은 경우를 보면 미디엄 정도로 익혀도 피가 살짝 보일 때가 있잖아요? 율법적으로 본다면 그건 먹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럼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피가 안 나오도록 잘 익혀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니, 성경을 왜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해요. 하나님이 언제 피는 익혀 먹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대로 먹든 익혀 먹든 간에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완전히 제거한 다음에 굽든지 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에 14장에서 금하신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볼까요?

여기에 보시면 좀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돼지 삼겹살 좋아하시나요?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이 말씀에 의하면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레위기 11장 12절
“12.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水の中にいるもので、ひれや鱗のないものは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忌むべきものである。

물속에 있는 생물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먹을 수 없냐 하면, 제가 좋아하는 오징어나 문어를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오징어나 문어는 물속에 살지만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잖아요.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보시면 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고 했냐 하면,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왕궁에서 먹었던 모든 고기나 포도주 같은 것은 그냥 조리가 된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잡고는 먼저 우상한테 바쳐진 다음에 사람이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한 이유는 육식이냐 채식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한테 바쳐진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3절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3.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이와 같은 이유로 먹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바로 1절에 나왔던 것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信仰の弱い人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럼 이제 본문 전체의 내용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반적으로 본다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그러니까 앞서 주석서 내용대로 한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근거 없는 기준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고기를 먹을 때 피를 완전히 제거한 고기만 먹든지, 아니면 돼지고기나 오징어, 문어 같은 것은 먹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아예 우상한테 바쳐진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합니까.

우상한테 바쳐진 음식은 먹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 왜요. 명절날 친척집에 가면, 우리가 차리지는 않더라도 차례나 제사상에 올라갔던 음식들 있잖아요. 그것도 말하자면 우상한테 바쳐진 음식 아니겠습니까. 그거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조금 더 확대해볼까요? 성경에서 안식일은 언제입니까. 지금의 토요일이지요. 정확히는 금요일 해가 진 다음부터 토요일은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면 십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토록 율법을 지키고 싶다면 다 지켜야지요. 구약에 나와 있는 절기도 다 지키고, 그 앞에서 양이나 염소를 잡고 불로 태워서 속죄제, 속건제도 드리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祝いの日

그런데 제가 보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좀 이상하지요.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오징어 다리 하나 뜯으면 율법을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이 요즘 교회에 있어서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유명한 배우 중 하나인 브래드 피트에 대한 기사를 예전에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본래 대단히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냐 하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부모님한테서 이걸 하면 안돼. 저걸 하면 안돼……라고 그런 말만 듣고 자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게 지겨워서 자기는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선지를 안 먹는다, 무엇을 안 먹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으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먹고 싶은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억지로 안 먹는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에요.

디모데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3절~5절
“3.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彼らは結婚することを禁じたり、食物を断つことを命じたりします。しかし食物は、信仰があり、真理を知っている人々が感謝して受けるように、神が造られたものです。
神が造られたものはすべて良いもので、感謝して受けるとき、捨てるべきものは何もありません。
神のことばと祈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るからです。

물론 몸에 해롭거나 아니면, 글쎄요 법으로 금지된 것이나 하면 먹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口に入る物は人を汚しません。口から出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우리가 먹는 것으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럽게 하는 것이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더럽게 하지 않습니까.

신앙을 지킨다고 드시고 싶은 것 억지로 참지 마시고,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좋은 말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주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시계전문가이기도 한데, 보통 시계를 가지면 시간에 구속이 된다고 살고 있는데, 이 분의 말씀에 의하면 정확한 시계가 있으면 사람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正確な時計があるからこそ人は時間から自由になれる

처음에는 이 말씀을 잘 알지 못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누구와 12시에 약속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몇 시인지 몰라요. 그럼 불안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괜히 서둘러야 할 것 같고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그렇겠지요.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게 되면 어떻습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 때까지 시간이 얼마 있으니까 그동안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된다……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 인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면 불안해요. 초조해요.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알고 나면 그 불안과 초조와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그렇습니다.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아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그렇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고,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イエスは、ご自分を信じたユダヤ人たち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ことばにとどまるなら、本当にわたしの弟子です。
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불안해합니다. 초조해합니다. 걱정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 교주나 엉터리 주장들 때문에 무서워 떨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에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어요. 뻑 하면 이걸 하면 안 된다, 저걸 하면 안 된다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면, 아니,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냐고 하면, 그런 건 성경에 없어도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러면 다 알게 된대요.

아니, 이단이 별겁니까. 그런 게 이단이지?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어요. 구약은 물론 있었지만 신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성경 66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 말씀처럼 이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여기서 벗어나는 의견, 앞서 주석서의 내용을 인용한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근거 없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비난한다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제가 드리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올바른 기도를 하고 올바른 금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올바로 알게 되면 불안해할 것이 없어요. 주님의 품 안에서 진정한 말씀을 깨닫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유일한 말씀이신 이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이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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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회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20233월 12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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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マタイの福音書 25章 21節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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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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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良い忠実なしもべの要件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은 좀 길지만 우리에게는 친숙한 내용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14.天の御国は、旅に出るにあたり、自分のしもべたちを呼んで財産を預ける人のようです。
15.彼はそれぞれその能力に応じて、一人には五タラント、一人には二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て旅に出かけた。するとすぐに、
16.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それで商売をし、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た。
17.同じように、二タラント預かった者も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た。
18.一方、一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地面に穴を掘り、主人の金を隠した。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20.すると、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が進み出て、もう五タラントを差し出し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五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私は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2.二タラントの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二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3.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4.一タラント預かっていた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あなた様は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厳しい方だと分かっていました。
25.それで私は怖くなり、出て行って、あなた様の一タラントを地の中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これがあなた様の物です。』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본문에 의하면 어느 한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종들에게 종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고는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하지요? 세 종에게 맡기기를 한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그리고 마지막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에, 그저 종들에게 금화, 그러니까 금으로 된 동전 다섯 개, 두 개, 그리고 한 개……이 정도로 나누어준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된 그림도 많이 봐왔었거든요.

하지만 이 달란트라고 하는 것이 동전 한 두 개 정도가 아니더라고요. 옛날과 지금의 화폐가치가 좀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당시 금 한 달란트가 지금의 환율로 얼마가 된다고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한 달란트>라고 하는 무게는 대략적으로 26킬로에서 30킬로 정도라고 합니다.

뭐, 그럼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1 달란트를 30킬로라고 하지요. 그러면 금 한 달란트가 금 30킬로라는 뜻이 되겠지요? 요즘 금 시세를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금이 참 많이 올랐더라고요. 금 1그램, 킬로가 아니라 1그램에 한국돈 10만원 정도, 일본돈으로는 1만엔 정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1000그램이 1킬로잖아요. 단순계산으로 1그램을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는 10만원의 1000배, 그러니까 1억원이 됩니다. 이게 1킬로예요. 그러면 1달란트를 30킬로로 계산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30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30억원이 1달란트예요. 그럼 여기에 보시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종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이 계산으로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150억원과, 60억원과 30억원을 맡겼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마지막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아니에요. 30억원이나 되는 큰 재산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그냥 아무한테나 그와 같은 큰 돈을 맡겼겠어요? 그것은 바로 그만큼 신임을 한 종한테 맡겼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주인이 이처럼 큰 돈을 맡기고 떠났다고 하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돈만 맡기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 점부터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회사에서 본다면 여러 직급이 있겠지요? 직원으로 본다면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그리고 그 위에는 임원이 됩니다. 큰 회사는 이사, 상무, 전무, 대표……등이 되겠지요.

그럼 본문에 나오는 주인을 대표라고 한다면, 여기에 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까요. 아무리 큰 기업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대리나 과장 정도 되는 사람한테 30억이나 60억, 150억이나 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어요?

그 정도의 돈에 대한 재량을 맡긴다면 아무리 못해도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좀 멀리 다녀와야 하는데, 그 동안 자, 이 정도 돈을 맡겨놓겠소. 그리고 주인이 떠나갔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왜 그 용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큰 돈을 신입사원한테 맡겼습니까. 아니에요. 직원도 아닌 임원들한테 맡긴 것입니다. 그 정도 되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지금 회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나 두 달란트 맡은 종은 굳이 주인한테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묻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이 자기한테 맡긴 그 범위 내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요.

그 결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이윤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본 주인의 평가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 대한 평가가 글자 하나 차이 없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21절과 23절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한 달란트를 30억원이라고 한다면, 다섯 달란트는 150억원, 두 달란트는 60억원이었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60억원을 남긴 종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는 150억원이나 이윤을 남긴 종이 더 칭찬을 받을 만한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 같이 칭찬을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150억도 큰 돈이요 60억도 큰 돈이지만, 150억을 맡은 사람이 훨씬 더 큰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150억 맡은 사람도 60억 맡은 사람도 똑같이 두 배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둘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사업을 했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한 달라트를 받은 종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땅속에 묻어놓았던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 종은 왜 그 많은 돈을 쓰지 않고 땅속에 묻어 놓았을까요.

단순히 사른 사람들보다 장사를 할 능력이 안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그렇게 큰 돈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상무나 전무 정도는 되는 임원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자리에 앉힐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주인이 그렇게 큰 돈을 맡겼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이 한 달란트를 맡은 종도 마음만 먹으면 다른 종들처럼 두 배로 늘릴 만한 능력이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충분히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불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왜 저 사람한테는 150억, 60억 씩이나 맡기면서 나한테는 30억만 주는 거야? 내가 저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 뭔데? 흥. 웃기고 있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 결과 그는 말하자면 항의의 표시로 일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27절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이 말씀이 좀 어렵다면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좋아. 네가 일을 하기 싫으면 차라리 은행에 맡길 수도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러면 내가 이자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너는 그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종이 그 정도도 몰랐을까요? 아니, 상무나 전무도 있을 정도로 큰 회사 임원인데 몰랐어요? 아니에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았는데도 왜 안 했어요. 이유는 단 하나에요.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회사에 손해를 입히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장님은 그에게 30억이나 되는 큰 돈을 맡길 정도로 신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임을 그 종은 배신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30절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결국 그는 그나마 있던 것마저도 다 빼앗겨 버리고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익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럼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말 잘 듣는 종이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주인이 무슨 명령을 했다는 말씀이 없잖아요.


그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충성된 종>이라는 뜻은 어떤 종입니까. 이를 쉽게 알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이와 반대되는 말을 살펴보면 알기 쉽습니다. <충성된 종>의 반대말은? 예, <무익한 종>이지요. 그러면 <무익하다>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익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충성된 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유익한 종>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면 누구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자기를 신임해주고 자기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8장과 누가복음 15장에 보시면 잃어버린 어린 양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대요.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양이 열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은 것이 아니에요. 백 마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럼 이 목자는 한 마리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무리 능숙한 목자라 하더라도 똑같이 생긴 양들이 백 마리가 있는지 99마리가 있는지는 한 눈에 보고 알아차리기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작년에 일본 뉴스를 보니까 그 여름날에 유치원 스쿨버스 안에 어린 아이들을 방치해 두었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여기저기서 발생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무슨 큰 학교도 아니고 유치원 스쿨버스라고 하면 커 봤자 아이들 40명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다 내렸는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는 문을 잠과 버려서, 결국 버스에 갇혀서 아이들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50명도 안 되는 아이들도 방심을 하면 이렇게 놓칠 수가 있는데 100마리나 되는 양이라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면 이 목자는 거기 있는 양들이 100마리가 아니라 99마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그렇죠. 이는 분명 세어보았기 때문에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 세어보았을까요? 아니요.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와서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세어봅니다. 초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세어봅니다.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동안에도 세어보고, 돌아오기 전에도 세어보고, 그리고 돌아온 다음에도 세어보았겠지요.

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부지런히 확인했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차리고는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본문에 의하면 주인이 종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맡겨놓고 얼마 만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9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그렇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동안 두 종은 각각 주인이 맡긴 재산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은행에도 맡기지 않고 땅을 파고는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자기도 안 쓰면서도 남들도 쓰지 못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땅속에 그토록 큰 돈을 묻어두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는 종들을 보고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할 때, 그 주인이 맡긴 돈을 땅에 묻어놓았던 종은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권리도 빼앗기고는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충성된 종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무익한 종의 모습입니까.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아이구 내가 무슨 몇 십억이나 되는 돈이 어디 있다고.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손목 하나를 생각해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손목에 대한 엑스레이를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의사선생님이 그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 여기 보는 것처럼 손목에는 작은 뼈들이 여덟 개가 있는데, 이 뼈들이 절묘하게 조합이 되어서 손목이 이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걸 건드리면 사람의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하게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손목 하나, 아니, 이 손가락 하나,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래처럼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아무리 큰 돈을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1분 1초도 되돌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그깟 수 십억이나 수 백억보다 훨씬 더 값인 시간과 건강을 선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성된 종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익한 종, 그러니까 주님께 유익한 종이 바로 충성된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혹시 지금 어디 묻어 놓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디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결산할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묻어놓은 달란트가 없는지, 만약에 있다면 어서 캐어내어서,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어 결산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크나큰 칭찬을 받아 놀라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
← 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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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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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202335 설교 - 로마서 강해 12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1절~14절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11節∼14節
“11.さら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のような時であるか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のですから。
12.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3.遊興や泥酔、淫乱や好色、争いやねたみの生活ではなく、昼らしい、品位のある生き方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4.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てはいけ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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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5번째 시간으로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キリストを着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11절부터 14절까지 말씀 중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본 다음에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1절~12절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12절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1.さら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のような時であるか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のですから。
12.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성경은 지금 이 시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기라고 하는 것은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시기나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시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가 어떤 시기냐 하면,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12절에 보시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세요. 구원이 가까웠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바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을 하십니다.
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
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
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

자, 우선 이 두 구절의 구성을 보시면,

첫째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둘째로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웠다
셋째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

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
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
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

우선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전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잠이 들었을 때에는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없어요.

이는 바로 복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인 죄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바로 잠을 잘 때입니다.

그렇다면 왜 잠을 자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밤이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보다 뛰어나서 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힘이 센 짐승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할 수는 없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이 땅을 지배하도록 하는 축복을 주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육신의 구조가 모든 동물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맨몸으로는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힘으로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뛰는 속도도 맹수들보다 사람이 훨씬 못 미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눈을 보십시오. 부엉이나 야행성 동물들은 캄캄한 밤에도 앞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사람은 캄캄한 곳에서 앞을 볼 수가 없어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작은 빛이 있어도 볼 수 있는 경우는 있겠지만, 빛이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빛이 있어야 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빛이 있어서 그 빛이 사물에 비춘 다음에 반사되어서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데, 빛이 하나도 없으면 반사해서 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밤에 어디를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전혀 불빛이 없어요. 가로등도 없고 달이나 별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정말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여기 빠졌다가 저기 넘어졌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백날이 지나도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무슨 반짝이는 멋진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사람은 빛이 있어야 그 빛으로 하여금 사물을 알아본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으로 바라보아야 온전하게 보이는 것이지, 예수님 없이 바라본다면 이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41절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はさばきのためにこの世に来ました。目の見えない者が見えるようになり、見える者が盲目となるためです。」
パリサイ人の中でイエスとともにいた者たちが、このことを聞いて、イエスに言った。「私たちも盲目な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죄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안 보이는데 보인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분간할 수 없는데 분간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멋대로 행하고 있는데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둠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이나 우리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무엇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이 가까웠다는 뜻은 그러면 무엇이냐 하면 이제 밤이 지나가고 낮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그렇습니다. 이제 어둠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고 다녀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밤, 그러니까 캄캄해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한다 해도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태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그저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낮이에요. 이제 세상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는 사람들한테 나에 대해서 감추어진 것이 없고 다 보여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보시면 이 낮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제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까지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모를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아무도 안 듣는 줄 알고 말했던 것이 온 천하에 다 들리고, 분명히 한 사람한테만 귀에 대고 한 말인데 전세계에 다 전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2천년 전에 이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에이, 말도 안돼.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그게 불가능합니까. 가끔 뉴스를 보십시오. 둘이서 나눈 은밀한 대화가 모두 녹음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녹음을 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제법 크기가 있는 녹음기가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녹음을 하려면 거기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갔어야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초등학생도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녹음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능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어디 음성녹음 뿐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퍼지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정말 주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욱 알기 쉽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미래 사회에 대한 단순한 예언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허락하신 날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그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을 줄 알았던 모든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나중에 들키지 않도록 잘 숨겨놓으라고 말씀하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3장 13절~14절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遊興や泥酔、淫乱や好色、争いやねたみの生活ではなく、昼らしい、品位のある生き方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4.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てはいけ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차피 낮이 되면 다 드러나게 되니까 오히려 반대로 다 들킨다고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밤에 멋대로 하면서 놀면 즐겁지요. 그 밤이 언제까지나 안 끝나고 계속됐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밤은 끝나고 반드시 낮이 온다고 말씀하세요. 숨겨두었던 것이 모두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대비해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특히 14절을 주목해서 본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ということは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ないこと

오늘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人々にたとえを話された。「ある金持ちの畑が豊作であった。
彼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私の作物をしまっておく場所がない。』
そして言った。『こうしよう。私の倉を壊して、もっと大きいのを建て、私の穀物や財産はすべてそこにしまっておこう。
そして、自分のたましいにこう言おう。「わがたましいよ、これから先何年分もいっぱい物がためられた。さあ休め。食べて、飲んで、楽しめ。」』
しかし、神は彼に言われた。『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自分のために蓄えても、神に対して富まない者はこのとおりです。」

옛날에는 재산을 쌓아두려고 하면 손이 많이 갔습니다. 이 말씀처럼 곡식을 쌓아두려고 하면 곳간을 새로 지어야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돈을 쌓아 두기 위해서 무슨 창고를 지어야 합니까. 은행에 돈을 많이 넣어두면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와서, 아휴,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돈을 넣을 곳이 없네요. 그래요?

아니에요. 이제는 재물을 쌓아놓으려고 한다면, 거의 무한대로 쌓아놓을 수 있습니다. 넣을 곳이 없으니까 제발 그만 가져오라고 하는 곳이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렇죠. 평생 동안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곳간에 넣어둡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년 만년을 생각하고 돈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한국에는 그런 말이 있지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정말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돈을 벌어서는 쓸 때는 점잖게 인심도 베풀면서 쓴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디 사람이 그렇게 되나요.


그러면 얼마나 벌어야 벌만큼 벌었다는 것이 됩니까. 그 상한선이 없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승 같이 돈 한 번 못 써보고, 결국 평생동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멍멍이처럼 돈을 벌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건강은 돌보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돈만 벌다가,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엑스레이에 좀 이상한 그림자가 보인다면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해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번 돈을 병원비로 다 쓰고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큰 돈을 남기고 떠났다고 해도, 그 돈을 가지고 유산이다 상속이다 해가면서 서로 싸우고 재판하고 그러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해 하실까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엇이 없느냐 하면, 두 가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 지금까지 공부해왔지 않습니까. 믿음에 있어서의 헌법이 뭐였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면 풍요롭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셔서 넉넉해졌는데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부자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저 더 벌어들이고 더 쌓아 두어서 남은 인생 나 하나 편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신다고요?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오늘 네 목숨을 취하면 그 많은 재산들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냐 하는 것이지요.

『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너한테 그 많은 재산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도 있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다 잃어버렸어요.


성경에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성경은 그 사람이 믿은 대로 갚아 주겠다? 배운 대로 갚아 주겠다? 아니요. 그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요? 중요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믿음이 있고,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을 위해, 그리고 이웃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신다고요?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자여”가 되는 것입니다. 愚か者

마가복음 10장 17절~25절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イエスが道に出て行かれると、一人の人が駆け寄り、御前にひざまずいて尋ねた。「良い先生。永遠のいのちを受け継ぐためには、何をしたらよ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なぜ、わたしを『良い』と言うのですか。良い方は神おひとりのほか、だれもいません。
戒めはあなたも知っているはずです。『殺してはならない。姦淫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だまし取っ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その人はイエスに言った。「先生。私は少年のころから、それらすべてを守ってきました。」
イエスは彼を見つめ、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あなたに欠けていることが一つあります。帰って、あなたが持っている物をすべて売り払い、貧しい人たちに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は天に宝を持つことになります。そのうえで、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すると彼は、このことばに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多くの財産を持っていたからである。
イエスは、周囲を見回して、弟子たちに言われた。「富を持つ者が神の国に入るのは、なんと難しいことでしょう。」
弟子たちはイエスのことばに驚いた。しかし、イエスは重ねて彼らに言われた。「子たちよ。神の国に入ることは、なんと難しいことでしょう。
金持ちが神の国に入るよりは、らくだが針の穴を通るほうが易しいのです。」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어떻습니까. 믿음이 없었나요? 아니요. 믿음이 있었으니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이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 재물 많이 가지고 있지? 그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줘라. 네가 아무리 믿음이 있고 말씀을 잘 안다고 해도 이웃 사랑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잖니? 이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건요.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해요? 이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합니다.

결국 그 재물이 많은 사람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부자를 미워해서 그랬습니까. 아니에요. 이 말씀에 보시면 분명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いつくしんだ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가 큰 상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이웃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에요.

하지만 그는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웃 사랑을 위해 꼭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어디 돈 뿐인가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강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서 베풀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노력으로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건강도 없어요? 그렇다면 기도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은 낮이 다가왔다는 사실, 다 드러나는 날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요,

둘째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행함으로 우리가 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시편 57편 8절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私のたましいよ 目を覚ませ。 琴よ 竪琴よ 目を覚ませ。 私は暁を呼び覚まそう。

시편 108편 2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琴よ 竪琴よ 目を覚ませ。 私は暁を呼び覚まそう。

한국에서는 새벽기도에 가면 꼭 이 구절을 말씀하세요.

하지만 이건 꼭 새벽기도에 나오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무도 진리를 모를 때에 내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게 한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싹이 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리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믿음과 말씀이 있어도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에 입각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때 진정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큰 상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함을 말씀하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픈 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되돌아가시겠습니까.


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て行かれますか。


이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낮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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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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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2023226 설교 - 로마서 강해 12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10절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8節∼10節
“8.だれに対しても、何の借りもあってはいけません。ただ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は別です。他の人を愛する者は、律法の要求を満たしているのです。
9.「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10.愛は隣人に対して悪を行いません。それゆえ、愛は律法の要求を満たす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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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4번째 시간으로서 “사랑의 빚과 실천” 愛の借りと実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말씀 전체를 한 번 살펴본 다음에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8절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8.だれに対しても、何の借りもあってはいけません。ただ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は別です。他の人を愛する者は、律法の要求を満たしているのです。

우리는 사랑에 대한 빚을 졌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랑이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마음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랑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솔직히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도 이와 같은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세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꼭 말을 해야 아나요? 아니요. 속으로 좋아하는 감정,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기만 눈치 빠른 동물들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또는 자기한테 밥을 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리고 수컷은 암컷을, 그리고 암컷은 수컷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물들도 새끼를 낳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굳이 성경에서 말씀하실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의인이었다고 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우리가 얻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벗어나 천국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죄가 없는 의인을 위한 것이지 죄인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냐 하면,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해야 해결됩니까.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있나요? 만약에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 친구나 형제 지간의 사랑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사실 이는 얼마든지 갚을 기회도 있고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서로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랑은 성경에서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요?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제대로 갚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요.

우선 우리는 죄가 없어야 하고 예수님은 죄인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이어야 하고 예수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

더 해볼까요?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니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을래야 갚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나한테 갚으려고 해 봤자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큰 돈을 빌려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해준다는 것만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인데, 동부는 그나마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고는 합니다만, 서부를 보면 여긴 정말 군마 같애요. 물론 큰 도시에는 전철도 있고 버스도 많이 다닌다고는 합니다만, 그 외에는 자동차가 없으면 도무지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 미국에 갔는데 당장 무슨 차가 있어요. 면허도 없는데요. 그러면 어쩔 수가 없어요. 사람 신세를 져야 합니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미안하고 그랬는지 몰라요.

아니, 거기 사는 사람들이라고 무슨 한가하겠습니까. 다들 바쁘지요. 하지만 거기 가서 얼마 동안은 어디를 움직이려고 해도 도움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정말 거기 교회 사람들이나 학교 사람들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한테 제가 신세를 갚을 수가 있어요? 신세를 갚으려면 그 사람들이 차가 필요할 때 제가 태워드리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거든요. 그래서 참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그래서 하루는 어떤 분한테 그랬습니다. 아휴,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그랬더니 그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미국에 처음 오면 누구나 어쩔 수가 없대요. 자기도 처음 왔을 때에는 사람들 신세를 많이 졌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자기한테 갚지 않아도 되니까, 다음에 미국에 처음 오는 사람을 도울 일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갚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참 저는 이 말이 머리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자기한테 갚지 않아도 되니까 다른 사람한테 갚으라는 말씀, 정말 참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주님께 갚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사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 벌써 내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정도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의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9절~10절입니다.


로마서 13장 9절~10절입니다.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9.「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10.愛は隣人に対して悪を行いません。それゆえ、愛は律法の要求を満たすものです。


이는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겠지요.

출애굽기 20장 13절~17절
“13.살인하지 말라
14.간음하지 말라
15.도둑질하지 말라
16.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殺してはならない。
姦淫してはならない。
盗んではならない。
あなたの隣人について、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の妻、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

지난 번에 헌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 나라에는 수많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법이든 간에 헌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십계명을 비롯해서 어떠한 율법이나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적용은 주님 안에서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률 중에서 좋은 법이라면 그 법을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서 시행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 법이 훌륭한 법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헌법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도 없고 도입해서도 안 되는 법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목사님이 한 말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그 즉시로 무효가 되는 가르침, 말하자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점을 일단 염두에 두고 다음으로는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비유에 보시면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강도를 만난 사람, 둘째는 제사장, 셋째는 레위인, 넷째는 사마리아인이지요.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들이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옷을 벗기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 점을 기억해두시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갔는데 이 모습을 보고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피하여 지나갔다고 해요. 다음으로 누가 지나갔냐 하면 레위인도 지나갔다고 하는데 역시 그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은 불쌍히 여겼다고 해요.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막까지 태워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늦었나 보죠? 그 사람과 같이 그 주막에 묵고는 다음 날 그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기는 가야 할 길이 때문에 출발해야 하지만, 저 사람을 돌보아주라고 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하니까, 요즘 기준으로 한다면 쉽게 생각해서 하루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2만엔, 20만원을 그 여관 주인한테 주면서 저 사람을 좀 돌봐달라고 하고, 그리고 만약에 돈이 부족하면 내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를 텐데 그 때 내가 주겠다고까지 말했다고 해요.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멀쩡한 사람이야 제사장이다 레위인이다, 아니면 사마리아인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이 다쳤으면 어떤 사람인지도 안 나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주막에 묵었는데, 그 사람이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목숨은 붙어 있어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 사마리아 인이 떠날 때까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중에 깨어난다 하더라도 자기를 돌봐 준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이 사마리아 사람이다, 라는 말씀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 마지막에 뭐라고 하십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뜻을 머릿속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말씀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자, 아까 어느 한 부분을 기억해 달라는 말씀 드렸지요? 그게 어디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땠느냐 하면 단순히 쓰러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거의 죽은 것 같았다는 것이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단순히 그 사람을 지나쳤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했다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피해갔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사장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요, 레위인은 출애굽부터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
“11.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이외에도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율법을 잘 아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단순히 그들이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피해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땠다고 해요. 거의 죽은 것 같았다고 하잖아요.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죽어 있는 사람이라면 괜히 만졌다가 부정해지면 어떡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순히 부정해지면 좀 찝찝하다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정해지면 하나님의 일을 7일 동안 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를 요즘식으로 바꾸어 말해볼까요?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정해지면 7일 동안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고 해보죠.

그런데 주일날 아침 제가 교회에 오는 길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물론 요즘 같아서는 전화로 112나 119로 신고를 하면 되겠습니다만, 자, 우선 사람을 돌봐주어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살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괜히 만졌는데 죽어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율법적으로 본다면 부정해진 것이니까 그 날 예배를 인도하지 못해요.


그러나 제가 만지고 돌봐주었더니 잘못하면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릴 수가 있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그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부정해질 수도 있다는 각오, 그 날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가지고 그 사람을 만져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날 주일 예배를 위해 못 본척하고 그냥 교회로 와야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말씀 드렸던 믿음의 헌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율법이고 교리이고 간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은 그것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망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장 그 사람, 우리 이웃을 돌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빨리 그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백날 인도해봐야 거기에 이웃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히 헛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우리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이웃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걸 안 지켜. 성경에는 저렇게 적혀 있는데, 저 사람은 저걸 안 지켜.

이건 올바른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는 그와 같은 해석이나 주장은 주님 앞에서 당장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웃을 비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는 굿 뉴스 즉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어요. 그럼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우리가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비판하면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1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神は愛です。)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도 사랑이고 복음도 사랑입니다.
도저히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랍고도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값지고 놀라운 사랑의 빚을 깨닫고, 우리 이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널리 전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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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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