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7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2023년 8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4절~16절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4節~16節
“14.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自身、善意にあふれ、あらゆる知識に満たされ、互いに訓戒し合うことができると、この私も確信しています。
15.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16.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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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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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7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①” 聖書をどう読むか①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드릴 말씀이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늘과 다음주로 2회에 걸쳐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ペテロに働きかけて、割礼を受けている者への使徒とされた方が、私にも働きかけて、異邦人への使徒と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した。

예수님의 사도 중에서 베드로는 할례자 즉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전파라는 사명을 받았다면 바울 자신은 이방인을 향한 선교라는 사명을 받은 사도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특히 이 서신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수신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만 그 말씀에 적힌 본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 로마서를 ‘너희’에게 썼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인 즉 이방인에게 쓴 서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하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썼는데, 그 이유는 내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략 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 의하면 바울은 그들이 이미 믿음 안에서 잘하고 있는 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썼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성경을 읽어 보셨습니까. 만약에 한 번도 안 읽어 보셨다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 무엇이 성경에서 벗어난 엉터리 가르침인지 구분을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한 두 번 읽어 보셨다고 한다면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라고 하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두 번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학교 교과서도 한 두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든데, 그 방대한 내용의 성경을 몇 번 읽었다고 해서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성경을 수도 없이 많이 읽으신 분 계십니까. 제가 진정으로 말씀 드립니다. 정말로, 정말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전혀 읽지 않아도 문제입니다만, 그저 많이 읽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신 창세기에 대해서 한 번 볼까요.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니, 교회에 전혀 다닌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도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많이 읽어 보신 분들은 뭐 달달달달 외울 정도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러나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아름다운 것으로 넘치고 부족함이 없던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 마저도 빼앗겨서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 없으시죠? 그렇다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는 주일학교에서도 종종 나오는 질문인데,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좀 제대로 만드시지 왜 죄를 범하도록 지으셔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애초에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드셨으면 좋았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뱀이 유혹한다고 거기에 넘어가는 바람에 죄를 짓고 말았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는 아주 모범답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그저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게만 움직이도록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안 지을 수도 있는 그와 같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에요.

이 주장을 누가 처음에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 현재 보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부분의 주석서에 그렇게 적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이 주장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 보니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만약에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한다면, 그런 의지는 꼭 사람한테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는데, 그 강아지한테 공을 던지면 재빨리 뛰어가서 물고 오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공을 던져도 자기가 귀찮으면 안 가지고 와요. 그렇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강아지한테 자유의지를 주신 결과인가요?

이렇게 조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그걸 그대로 베끼면서 그게 하나님 말씀인 줄 알고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야말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고 말았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여기서 제일 잘 못한 건 누구에요? 예,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쓸데없이 자유의지를 주신 바람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달리도록 만드셨다면, 가장 비난 받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비난 받아야 한다? 이는 궤변입니다. 절대로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에 담긴 뜻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성경을 수십 번 읽은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에요.


자, 이 논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자유의지>라는 단어입니다. 누가 집어넣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엉뚱한 단어를 집어넣으니까 그 결과가 뭐예요? 예, 가장 잘못한 분은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결론밖에 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풀어야 한다? 예, 그렇습니다.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선 기본적으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하는 자유의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성경에 그와 같은 기록이 나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굳이 마귀 사탄의 유혹이 없었다 하더라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을 하는 부분이 나올 만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고민을 한 결과, 아, 역시 먹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뱀을 가장한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해서 유혹할 때까지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그 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유의지고 뭐고 간에 그들은 그와 같은 생각, 말하자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 사탄이 귓가에서 속삭였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죄에 대한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장면을 보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자유의지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예를 들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전거가 초보일 때에는 정말 달리는 모습도 불안정하고, 커브를 돌 때 같은 경우에 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몇 년 정도 자전거를 탔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없겠지요.

정말 자전거에 어디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일은 거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말합니다. 지금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넘어져보세요……라고 하면 가능할까요?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인데 자전거 핸들을 엉뚱한 데로 꺾으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어느 정도 타는 사람이 이를 하기 위해서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안 넘어지도록 핸들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억지로 넘어지게 한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핸들을 꺾는다? 여러분께 이를 해보시라는 말씀은 절대로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웬만한 각오가 없으면 이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떨까요. 마귀가 속삭입니다. 너, 돈 필요하지? 저기 서 있는 고급차 보여? 그 차가 출발할 때 그 앞에서 힘껏 넘어져봐. 그러면 돈을 뜯어낼 수 있을 거야.

이런 유혹이 들어왔을 때 넘어가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전거가 아니라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달리는 차 앞에 일부러 맨몸으로 뛰어나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 여러분도 들어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맨정신인 사람한테 칼을 주면서, 자, 이 칼로 저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공격해……라고 누군가가 한다면,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냐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 되어 있을 때, 마귀 사탄이 유혹을 한다면 이와 같은 범죄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뉴스를 통해서도 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우리에게도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해야 하겠지요.

만약에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아담과 하와도 이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되냐 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유의지로 인하여 죄를 짓는다는 행위를 선택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내용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 구절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堅く信仰に立って、この悪魔に対抗しなさい。ご存じのように、世界中で、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が同じ苦難を通ってきているのです。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귀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되어 그 유혹에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단 한 번도 이를 먹어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유혹을 하자 그들은 비로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17절~18절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もし一人の違反により、一人によって死が支配するようになったのなら、なおさらのこと、恵みと義の賜物をあふれるばかり受けている人たちは、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いのちにあって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즉 아담은 한 범죄를 저지름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정죄 즉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 것은 <의로운 행위(義の行為)>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그 행위가 죄악이었다고 한다면, <의로운 행위>는 그 열매를 먹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접근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었는다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열매를 먹지 않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답은 결국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우리는 그 열매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더러 금하신 구체적인 행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거나 어디를 가지 말라고 하셨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이 불순종,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이렇게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점은,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것이 그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몇 번 읽었느냐 하는 것은, 마치 교회에 몇 년 다녔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한 구절 읽었다 하더라도, 단순히 유명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맞겠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 그와 같은 마음 가짐이 필요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이 귀한 로마서를 썼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에게 A냐 B냐, 라고 하는 식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불순종이냐, 순종이냐>, <육신이냐, 영이냐>, 그리고 <멸망이냐 영생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이제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깨달아 감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을,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통해서, 마침내 멸망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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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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