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회 어느 한 부부의 헌신
2023년 11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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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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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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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7번째 시간으로서 “어느 한 부부의 헌신” とある夫婦の献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3절에서 16절에 보시면 이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몇 명의 이름이 나오는지 궁금하실 수가 있는데, 이게 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이는 세는 사람들이 실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를 포함시키느냐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구체적인 이름 숫자만 세면 26명입니다만, 다음 구절을 한 번 봅니다.

로마서 16장 10절 후반부
“10.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アリストブロの家の人々によろしく。

여기에 등장하는 아리스도불로라는 사람은 헤롯 왕의 손자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도불로가 아니라 그 집안 사람, 그러니까 그 가족이나 또는 그가 데리고 있는 노예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과 이 아리스도불로라고 하는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11절 후반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6장 11절 후반부
“11.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ナルキソの家の主にある人々によろしく。

여기에 등장하는 나깃수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울이 문안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집에 속한 사람, 이는 가족 뿐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 수하에 있던 노예들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을 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 수가 구체적으로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름 구절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6장 5절 전반부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また彼らの家の教会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로마서 16장 14절 후반부
“14.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彼らとともにいる兄弟たちによろしく。

로마서 16장 15절 후반부
“15.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彼らとともにいるすべての聖徒たちによろしく。

이는 누가 보아도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나 교회 전체를 대상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인원수를 짐작할 수는 없겠지요.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볼 때 지금 여기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몇 명이냐 하는 것은 이 기록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인데, 성경 만으로 본다면 이 로마서 16장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성경이 아닌 다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들의 직업을 추정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그와 같은 노력이 학문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고 했을 때, 그와 같은 추정, 그러니까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추정은 어디까지나 신학자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성경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이 점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4명, 2쌍의 인물들에 대해서 주목을 해 볼만 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은 우선 그 중에서 2명, 1쌍의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3절~4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하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 지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이름은 여기 말고도 사도행전 18장 2절과 18절, 26절, 고린도전서 16장 19절,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9절, 이렇게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서 구절까지 더하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성경에 총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만, 그러면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사도행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성경이 있으신 분은 함께 살펴볼까요?

사도행전 18장 1절~3절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1.その後、パウロはアテネを去ってコリントに行った。
2.そこで、ポントス生まれでアキラという名のユダヤ人と、彼の妻プリスキラに出会った。クラウディウス帝が、すべてのユダヤ人をローマから退去させるように命じたので、最近イタリアから来ていたのである。パウロは二人のところに行き、
3.自分も同業者であったので、その家に住んで一緒に仕事をした。彼らの職業は天幕作りであった。

여기서 ‘아덴’이라고 하는 곳은 아테네 그러니까 그리스의 수도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왔다고 하는데 아테네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으니까 바울은 동쪽에서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본래 로마에 있다가 고린도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났다는 거예요.

여기서 브리스길라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부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 서쪽 이태리 로마에서 왔고, 바울은 고린도 동쪽 아테네에서 왔는데, 마침 고린도에서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굴라는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바울도 같이 살면서 함께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교나 목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텐트메이커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과 아굴라 내외는 단순히 면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살면서 일도 같이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겠습니까.

그들 부부의 기록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パウロは、なおしばらく滞在してから、兄弟たちに別れを告げて、シリアへ向けて船で出発した。プリスキラとアキラも同行した。パウロは誓願を立てていたので、ケンクレアで髪を剃った。

우선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그의 서원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민수기 6장 5절과 18절에 보면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이 되기로 서원을 했다면 그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있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기 전에 머리를 잘랐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어디라고요? 예, 겐그레아라고 하는데, 겐그레아? 어디서 들어본 적 있지 않으세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자매 뵈뵈가 속해 있던 교회가 바로 겐그레아 교회였잖아요. 이게 바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적어도 바울은 이 시점에서 뵈뵈와 면식을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겐그레아는 항구도시라고 말씀 드렸었잖아요? 고린도도 항구도시이긴 했습니다만, 고린도는 서쪽에 있고 겐그레아는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수리아로 가려고 했다고 하는데 수리아는 고린도에서 동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도중에 있거든요.

그래서 겐그레아 항을 통해서 출발한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그 때 이 아굴라 부부도 함께 갔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수리아까지는 대략 400~500킬로 정도라고 하니까, 서울에서 제주도 정도, 동경에서는 오사카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하니까 결코 가까운 곳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굴라 부부는 이처럼 헌신적으로 바울과 함께 하면서 그의 사역을 도왔다고 하니, 바울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이 부부에 대한 인상은 어떻습니까. 왠지 그런 느낌,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손과 발이 되어서 충실하게 일하는 일꾼 같은 모습이 들지 않나요?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26절
“2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さて、アレクサンドリア生まれでアポロという名の、雄弁なユダヤ人がエペソに来た。彼は聖書に通じていた。
この人は主の道について教えを受け、霊に燃えてイエスのことを正確に語ったり教えたりしていたが、ヨハネのバプテスマしか知らなかった。
彼は会堂で大胆に語り始めた。それを聞いたプリスキラとアキラは、彼をわきに呼んで、神の道をもっと正確に説明した。

수리아 지방으로 건너온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 쪽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에베소에 있는 회당에서 한 언변이 좋은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믿음도 좋고 설교도 잘 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 부족했나봐요.


그러자 아굴라 부부가 어떻게 했냐 하면 그를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가르침은 바울을 통해서 얻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니까 이 아굴라 부부는 단순히 바울의 잡일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지식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부부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부부는 로마에 있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따라서 수리아 지방에 있는 에베소로 갔다면서요?

그들이 에베소에 있었다는 근거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잠깐 고린도전서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도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인데, 고린도전서가 어디에서 쓰여졌냐 하면 고린도전서 16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8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しかし、五旬節まではエペソに滞在します。

그러니까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를 거쳐서 에베소에 갔던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쓰여진 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19절에 보시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アジアの諸教会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アキラとプリスカ、また彼らの家にある教会が、主にあって心から、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 말은 뭐냐 하면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에베소로 건너온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는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분명히 에베소에 같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그 부부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자, 기억하시죠? 오늘 본문인 3절부터 16절은 문안 인사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뵈뵈는 문안이 아니라 추천을 했었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문안 인사의 경우 그 대상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뵈뵈는 로마가 아닌 고린도 인근 겐그레아 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추천이라는 말을 썼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로마서 16장 3절에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분명히 로마로 보내는 서한 중에서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는 분명 아굴라 부부는 당시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이를 정리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의하면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거기서 바울을 만나고 함께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옮겨 왔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해서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서를 쓰면서 에베소에 아굴라 부부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니까 바울과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에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 추정되는 디모데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私はすでに注ぎのささげ物となっています。私が世を去る時が来ました。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순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그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이 디모데 전서와 후서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한의 수신자인 디모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1장 3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私がマケドニアに行くときに言ったように、あなたはエペソにとどまり、ある人たちが違った教えを説いたり、

즉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상황에서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로마에는 누가 있어야 해요?


예, 바울을 돕던 아굴라 부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디모데후서에는 이 또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また、オネシポロの家族によろしく。


여기서 또 이 아굴라 부부가 등장해요. 그럼 지금 아굴라 부부가 디모데에게 문안한다고 해요?

아니요. 오히려 디모데더러 아굴라 부부한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굴라 부부는 지금 어디 있어요?

예, 디모데가 지금 있는 곳, 그러니까 또 에베소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어떻게 되냐 하면 로마에 있던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왔습니다. 거기서 아테네 쪽에서 온 바울을 만났어요. 그리고 함께 에베소로 건너갑니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이지요.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여전히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로 다시 와서 로마에 있는 교회로 편지를 하는데 그 내용에 보니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에 있다잖아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아굴라 부부는 어디 있어요? 예, 다시 에베소에 와 있어요.

이를 보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아, 거 참 이 아굴라 부부는 이사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안 드린 것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사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처음 만난 시점부터 순교를 앞두고 있는 시점까지, 바울은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아굴라 부부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서 로마서를 쓸 때에도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문안하라고 편지를 썼고,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이제 순교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면 다음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굴라 부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이 부부는 얼마나 헌신적으로 바울은 도왔냐 하면 하물며 자기들의 목숨, 이는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분명 <자기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가 합심해서 헌신적으로 바울을 도왔을 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아굴라 부부는 바울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시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는 분명하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디모데후서를 쓰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시점에서 자신을 가장 잘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할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아굴라 부부를 부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이 아굴라 부부가 지금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あなたは、何とかして早く私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い。

바울은 디모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와 달라고 하지요. 순교를 앞둔 상황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겨둘 가르침도 있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러 부탁도 함께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あなたが来るとき、トロアスでカルポのところに置いてきた外套を持って来てください。また書物、特に羊皮紙の物を持って来てください。

그런데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도 단 한 가지 부탁을 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굴라 부부를 데려와 달라는 부탁입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들도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에 안 불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젊은 디모데가 모셔오든지, 아니면 올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봐 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 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이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굴라 부부에 대한 문안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분명 바울이 그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울의 선교활동 중에서 이 아굴라 부부만큼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단순히 세상적으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신앙적 지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바울로부터 성경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교육받았을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는 바울의 사역과 함께 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그 부부를 로마로 보내서 로마 교회에 대한 사역을 부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은 자신을 대신해서 아굴라 부부로 하여금 에베소로 보내서 역시 거기에 있는 교회를 믿음 위의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해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그 이동 거리를 한 번 볼까요? 고린도부터 시작한다면 고린도에서 에베소까지 400킬로,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1700킬로,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 에베소까지 1700킬로.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 그 시기에 이토록 먼 거리를 남자인 아굴라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브리스가까지 함께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 살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하지만 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합심해서 끝까지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헌신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 어쩌면 금방은 눈에 띄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 21세기에도 그들의 헌신은 이처럼 성경 속에서 흐려지는 일 없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이제 우리도 조금 더 힘을 내어서 주님의 사역에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름이 조금도 흐려지는 일 없이 영원토록 선명하게 하늘에 기록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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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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