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회 로마서 16장 서론
2023년 10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4절
“24.(없음)”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4節
“24.(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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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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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5번째 시간으로서 “로마서 16장 서론” ローマ人への手紙16章序論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드디어 로마서 마지막 장인 16장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혹시 마태복음 1장에 대해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렇게 해서 마지막 25절에서는 예수님이 기록됩니다.

이 마태복음 1장,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글을 처음 읽으면 참 지루하고 따분합니다만, 구약을 다 읽고, 그 흐름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읽으면, 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벌써 이렇게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계셨구나 하고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로마서 1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이 로마서 16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구약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를 무심코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가면 대단히 큰 은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16장 첫 시간이기 때문에 우선 16장에 대한 개론과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부터 알아본 다음에 세부적으로 들어가볼까 합니다.

15장까지는 이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16장은 왜 이렇게 살펴보아야 하는가 하면 이는 15장까지와는 다르게 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선 16장에 대한 개론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바울 서신을 보시면 마지막 부분에, 누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 16장은 많은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나마 골로새서 4장에도 많은 이름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기타 다른 서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구체적인 이름들이 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16장에 대해서 일부 신학자들은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로마서 16장은 그 전에 있는 15장까지와는 별개로 쓰여진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글의 흐름이 앞부분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들기도 하고,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몇몇은 분명 에베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앞서 15장까지는 로마에 있는 교회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16장은 로마가 아닌 에베소로 보내는 서한이 여기에 끼었다는 주장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로마서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구성의 차이에 있어서 무려 15종류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논쟁은 로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데, 1장부터 50장까지 있는 창세기는 사실 여러 가지 문서들이 조합된 것이라고 하는 이른바 문서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도 나누어진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을 접하면 제가 학부 때 전공서적을 공부하던 기억이 납니다. 뭐, 별로 열심히 공부한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맨날 보면 다수설, 소수설, 절충설……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뭐, 법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정답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봉건주의나 전제주의 같은 독재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민주주의 국가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면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선거제도가 공정하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지도자가 선출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국회의원들이 훌륭한 법률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3권분립이 있다고는 하나, 판사들이 항상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고 할 수도 없고, 행정시스템이 항상 공정하게 돌아기만 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엄격하게 본다면 정답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 시대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들이 변화 되어감에 따라, 법률도 변화되어가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이는 법학만이 아니라 문학이나 경제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은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명확한 정답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학은 이 부분에 있어서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학에 있어서는 명확한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이야말로 진정한 정답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문과 학문은 명확한 정답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요. 반면에 이과를 보면 정답이 딱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내가 800원짜리 물건을 사고 1000원을 내면, 이와 같은 경우 거스름돈을 얼마 주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학자마다 견해가 갈라지는 경우는 없을 거 아니에요. 당연히 200원을 거슬러 줘야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문과라기 보다는 이과에 가까운 학문, 명확한 정답이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에 대해서 자꾸 사람의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로회를 창시한 장 칼벵의 경우를 보면 그도 성경에 대한 주석을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주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칼벵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쓴 다른 신학자들에 비해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명확한 근거라는 것은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에 대한 문제는 성경으로 풀 수 있었을 때에 비로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경우에는 성경 66권 중에서 계시록을 제외하면 65권인데,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 나머지 65권 중에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보면 이는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신학에 있어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칼벵이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안 쓰겠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계시록도 어떻게든 끼어 맞추려고 했다면 충분히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이는 오히려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용기 없는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는 생각이 깊지 않은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 또는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예언자나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계시록이나 기타 성경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그것을 무슨 율법이나 십계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강요를 합니다.

이는 비단 사이비 지도자만이 아닙니다.

지난 10월 26일자 어떤 기독교 신문에 의하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더라고요.

주일 예배 드리면서 커피를 마셔도 되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까.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이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다음 성경구절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敬虔と恐れをもって、神に喜ばれる礼拝をささげ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이는 무엇입니까. 주일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을 헤친다는 것 아닌가요?

여기에 대해서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찬반의견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예배 때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교회가 무슨 영화관이냐. 예배 드리는 시간 정도는 커피를 안 마셔도 되지 않냐.” “커피도 중독이다. 예배 때는 마시면 안 된다”라고 해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의 어떤 대형교회 원로목사님도 예배 때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거들고 나섰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기사를 읽으니까 얼마 전에 읽었던 또 하나의 신문기사가 떠올랐습니다. 10월 23일자 기사였는데, 한국 어느 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내용이 뭐였냐 하면,

“목사가 된 다음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유혹이 하나 있다. 성경을 잘 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변할 수 있다”며 “본질적인 것에서 떠나선 안 된다. 목사가 되어 성경을 더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듣고 느낀 점은 뭐냐 하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판사 임명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축사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이제부터 법전을 열심히 읽도록 하세요. 라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있는 판사들이 법전을 제대로 읽고 있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판사님들이야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목사님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금 목사님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지 않으면 세상에 목사 안수식에 이런 말이 나오겠냐 하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은 신문기사 이야기를 계속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신문기사를 하나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다 요즘 읽은 기사입니다만, 이는 10월 24일자 신문기사입니다.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부분 4년제 대학을 나온 다음에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쳐야 그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학부 전공은 상관없이 일단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신학대학원에 지원을 할 수가 있는데, 작년에 보니까 신학과 학부과정 중에서 상당수가 미달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요. 뭐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꼭 학부를 신학과에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번 신문을 보니까 국내 대형 신학대학원이 대부분 미달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나마 한 곳만 1.4:1을 기록하면서 간신히 정원을 채웠고, 다른 대형 신학대학원들은 다 88%, 79%, 74%, 69%였고, 어디 한 곳은 정원의 18%만 지원을 한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대학교가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교수도 좋아야 하고 건물이나 시설도 그렇고 거기에 위치가 좋고 등록금도 싸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명문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명문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졸업생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 학교를 나온 졸업생들이 모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뛰어난 성과를 낸다고 한다면, 설령 등록금이 비싸거나 위치가 별로 좋지 않더라도 명문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인 경우는 좋은 대학들이 다 대도시에 있습니다만, 미국 같은 곳을 본다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은 대부분 사립대학이라서 등록금도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렇죠. 졸업생들이 쟁쟁합니다. 세계적으로 평가 받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거기를 들어가려고 몰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국의 신학대학원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누워서 침뱉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100프로 신학교를 나온 기존 목회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무엇을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문제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설교 시간 때라 하더라도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고,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도 성경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자기 멋대로 풀게 된다면 그게 이단 사이비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커피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건 미국 목사님의 말씀이었다고 하는데, 히브리서를 인용하면서 커피를 들고 예배 시간 때 들어오는 것이 경건하지 않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不義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不義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ます。

만약에 예배 시간 때 담배를 피운다거나 하는 것은 옆사람에게 민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술을 마신다는 것도 냄새가 날 수도 있고 그렇겠지요.

뭐,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예배시간 때 컵라면을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냄새도 나고 소리도 나고 그러니까 그 주변 사람한테 얼마나 민폐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요, 그저 예배 시간 때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는 성경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만 안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안 마시는 사람더러 비판할 수 있나요?

로마서 14장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만약에 예배 시간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생각도 비난 받아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신의 경건함을 헤치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자기가 안 마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의 경우 예배 때 넥타이를 꼭 매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만약에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는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만, 넥타이를 매지 않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거나 비난하는 일은, 이는 대단히 옳지 않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뭔데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이와 같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무슨 커피가 어쨌다거나 하는 말들이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요? 예,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가지고 남들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학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이는 인학도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잡학들이 교회에서 판을 칩니다. 그러니 누가 목사가 되려 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법대나 의대가 인기학과라고는 하지만, 그 나라 법조인들, 판사나 변호사들이 법을 너무나도 몰라요. 맨날 판결을 보면 엿장수 마음대로예요.

아니면 의사들이 너무나도 공부를 안 해요. 맨날 수술을 하고 주사만 놓으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요.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누가 법대나 의대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이건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지금 교회가 이런 상황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때문에 상처를 받고 다툼만 일어나요. 이러니 누가 목사가 되고 싶어하겠습니까.

구약에서도 보면 자기 생활을 절제하는 나실인의 경우를 본다 하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기가 스스로 결정을 해서 나실인이 되는 경우는 있지만,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보고 나실인이 되라고 해서 되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판사가 법을 모르면 무죄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의사가 의술을 모르면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목사가 성경을 모르면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상처를 입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ですから、私たちは、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사람의 생각을 개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내 생각으로 풀려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으로 풀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비난이 아니라 화평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제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이 로마서 16장에서도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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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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