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5회 축복과 축복소리
2023년 10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9절~33절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9節~33節
“29.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ちあふれて行くことになると分かっています。
30.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また、御霊の愛によってお願いします。私のために、私とともに力を尽くして、神に祈ってください。
31.私がユダヤにいる不信仰な人々から救い出され、エルサレムに対する私の奉仕が聖徒たち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
32.また、神のみこころにより、喜びをもっ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き、あなたがたとともに、憩いを得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ってください。
33.どうか、平和の神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い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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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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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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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4번째 시간으로서 “축복과 축복소리” 祝福と祝福の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본문 내용을 살펴본 다음에 전반적인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9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9절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9節
“29.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ちあふれて行くことになると分かっています。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1장 11절~12절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바울은 1장에서부터 이미 로마로 가는 목적을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믿음을 강하게 하여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축복, 그리고 영적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무슨 초자연적인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무슨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바위에서 물을 내기 위해서 가나요? 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유람 서커스단이니지요.

진정한 영적인 축복과 영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으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이방인들은 사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해요. 하나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면 꿈에서 예수님이 보이고 그렇습니까. 그게 주님을 만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1장 11절에 나오는 <신령한 은사(御霊の賜物)>라고 하는 말씀은 15장 29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キリストの祝福)>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즉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요?

로마서 15장 30절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0.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また、御霊の愛によってお願いします。私のために、私とともに力を尽くして、神に祈ってください。

그 부탁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두 가지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31절입니다.


우선 첫째로 31절 전반부를 볼까요?

로마서 15장 31절 전반부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31.私がユダヤにいる不信仰な人々から救い出され、

자,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에 앞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했었지요? 그게 뭐였지요?

예, 바로 예루살렘에 가는 일이었지요?

복습하는 의미로 25절~26절, 그리고 28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먼저 25절~26절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しかし今は、聖徒たちに奉仕するために、私はエルサレムに行きます。
それは、マケドニアとアカイアの人々が、エルサレムの聖徒たちの中の貧しい人たちのために、喜んで援助をす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그리고 28절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それで私はこのことを済ませ、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通ってイスパニアに行くことにします。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먼저 갔다가, 그 다음에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의하면 “이 헌금을 안전하게 전한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헌금을 무사히 잘 예루살렘에 전한 다음에 로마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교와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율법을 중요시하는 유대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에, 유대에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 즉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기도제목은 31절 후반부이지요.

로마서 15장 31절 후반부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エルサレムに対する私の奉仕が聖徒たち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

이 부분에 대해서 현대인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의 섬기는 일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자신이 가지고 가는 이 연보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기쁘게 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만, 일부 신학자들은 이방지역에서 온 지원을 그들이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가 어쩌면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외 기타 사정에 의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기껏 이방 사람들이 정성 들여 헌금을 해주었고, 그리고 바울도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게 가져갔는데 이를 거절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를 무사히 잘 전달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 일이 모두 잘 마무리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로마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말씀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우선 여러분께 한 번 확인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자,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 감사합니다.

사실, 성경에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기록이 넘쳐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るために、互いに罪を言い表し、互いのために祈りなさい。正しい人の祈りは、働くと大きな力があります。

그리고 주님께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이외에도 기도는 능력이 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그 기도는 반드시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했다고 합니다.

음?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러면 기도를 하면 되지 왜 연보를 했을까요. 괜히 연보를 하는 바람에 본래 로마로 가려던 바울의 계획에도 완전히 반대방향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야 하는 차질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2.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돈이 넘쳐나서.
3. 기타.

예, 제가 드리는 문제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답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정답은 3번 “기타”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왜 1번과 2번이 정답이 아니다 하는 점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게도냐 사람들과 아가야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연보를 모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생각하기를,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만약에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냥 덥석 받아 왔겠습니까.

아무리 돈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이 부족했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우선 믿음부터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고 하고, 그리고 그 연보를 스스로 예루살렘까지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면, 이는 그 사람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를 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둘째로, 그렇다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돈이 넘쳐났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지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교회도 아닌, 이제 막 세워지기 시작한 그것도 이방지역에 있는 교회인데, 자금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한푼 두 푼 모은 연보일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연보를 했을까요.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니요,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했던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힌트는 다음 부분에 있습니다.

자, 지금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은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들은 결코 넉넉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보를 했어요.

그런데 이 편지는 지금 누구한테 쓰고 있는 것이었요? 예,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이었다고 한다면 로마에 대해서는 어떤 부탁을 해야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도움이 필요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없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연보를 했는데, 로마에서도 좀 도와줄 수 없겠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로부터 받은 연보를 예루살렘에 가져가면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연보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부탁했지요? 예,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고린도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과 로마 사이에 있어요. 고린도에서 봤을 때 예루살렘은 동쪽에 있고 로마는 서쪽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로마는 완전히 반대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연보를 하겠다고 한다면, 바울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들고 서쪽 저 멀리 있는 로마까지 갔다가 다시 고린도를 거쳐서 예루살렘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도 이제는 로마에서 모은 연보까지 들고 가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만약에 바울이 지금 있는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데 그 도중에 로마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한테도 연보를 부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리적으로만 보아도 그 먼 거리를 그것도 부피나 무게도 만만찮은 현금을 들고 왕래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고,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무엇보다 예루살렘에 대한 도움이 늦어질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대한 도움이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로마에 대해서 일단 지금은 기도로 도와 달라고 당부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있었는데, 로마에 대해서는 연보를 당부하지 않고 기도만 당부했던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에 대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로마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라고 하는 말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인 있으신 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나 누군가가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그 대답이 뭐예요?

예, “기도해보겠습니다”라는 말, 들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세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 솔직해 집시다. 싫다는 것 아니에요? 안 하겠다는 것이잖아요.

지금 세계 정세를 보면 2023년 10월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은 2년째 이어지고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지금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사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정말 하루 빨리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해달라고 그야말로 기도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가 있고, 나한테는 그래도 입을 옷과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아이고 불쌍하네요. 기도할게요” 라는 말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17절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私の兄弟たち。だれかが自分には信仰があると言っても、その人に行いがないなら、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信仰がその人を救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내가 정말 기도밖에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내 이웃을 위해 도울 수 있다면 우선 그 직접적인 도움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기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난다면 이는 그야말로 행함이 없은 믿음, 즉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 보면 <しわい屋>라고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디에 구두쇠 한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구두쇠인지, 맨날 식사 때만 되면 집 앞에 있는 장어집에 가요. 요즘은 그런 곳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가게 앞에서 장어를 굽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가게 앞에서 장어를 구우면 연기가 많이 나고 냄새도 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 구두쇠는 끼니때만 되면 그 장어집 앞에 가서 그 장어 굽는 냄새를 맡고 집에 와서는 그 냄새를 떠올리면서 밥을 먹었다고 해요.

참 대단한 구두쇠죠?

그런데 이 장어집 주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구두쇠가 자기네 가게에서 장어는 안 사 먹으면서, 맨날 장어 굽는 냄새 만으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월말에 가서 돈을 청구하기로 한 것이죠.

이제 월말이 되었길래 한 달치 장어 값을 받아내려고 직원을 그 구두쇠 집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구두쇠는, 아니 내가 장어를 사 먹은 적이 없는데 무슨 돈을 받으려 왔느냐 하고 당연히 놀라지요.

그랬더니 그 직원이 하는 말이, 맨날 저희 집 앞에 와서 냄새만 맡고는 그 냄새로 식사를 하신다고 하기에 저의 주인님이 그 냄새값을 받아오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 구두쇠가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더니만, 알았다고 하고는 뒤에 가서 돈을 꺼내 오더래요. 옛날이니까 종이 이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엽전을 꺼내면서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라고 하니까, 갑자기 그 엽전을 바닥에 뿌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와장창 소리가 났을 거 아니에요?

그걸 보고 그 직원이, 아니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만, 이 구두쇠 하는 말이, 나는 냄새만 맡았으니까 너도 돈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 가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에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어요.


물론 주님은 구두쇠가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구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道端に一本のいちじくの木が見えたので、そこに行って見ると、葉があるだけで、ほかには何もなかった。それでイエスはその木に「今後いつまでも、おまえの実は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すると、たちまちいちじくの木は枯れた。

마치 우리로부터 믿음의 열매를 얻기 위해 오셨지만, 정작 우리는 잎사귀 밖에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우리가 행함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우리가 말로 때우거나 하는 시늉만 하면서 주님께 냄새만 풍기게 하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실제로 축복은 받지 못하고 축복 받는 소리만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축복은 받지 못했는데, 축복 받는 소리만 듣는 경우가 성경에 있을까 했는데, 아이구, 있더라고요.

누가복음 16장에 보시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26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その金持ちの門前には、ラザロという、できものだらけの貧しい人が寝ていた。
彼は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たちもやって来ては、彼のできものをなめていた。
しばらくして、この貧しい人は死に、御使いたち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懐に連れて行かれた。金持ちもまた、死んで葬られた。
金持ちが、よみ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遠くにアブラハムと、その懐にいるラザロが見えた。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するとアブラハムは言った。『子よ、思い出しなさい。おまえは生きている間、良いものを受け、ラザロは生きている間、悪いものを受けた。しかし今は、彼はここで慰められ、おまえは苦しみもだえている。
そればかりか、私たちとおまえたちの間には大きな淵がある。ここからおまえたちのところへ渡ろうとしても渡れず、そこから私たちのところへ越えて来ることもできない。』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 앞에 살면서 그가 버리는 것을 먹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당연이 부자는 나사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도우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철저하게 외면했었어요. 자기 배만 불리고 나사로한테는 작은 도움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 그는 놀랍게도 아브라함을 보게 되었는데,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 품에 안긴 나사로까지도 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살아생전에 나사로에게 도움을 주었더라면, 이 불구덩이 속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저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그 모습만 보았을 뿐, 그는 영원토록 그 불지옥에서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허무한 축복 소리, 이처럼 남들이 축복 받은 모습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기도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병원에서 내 가족이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주님을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 행할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행함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주님은 그 손길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지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줄은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채워주십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말씀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라고 하는 긴 말씀은 기억하면서. 맨 처음에 나오는 단 두 글자, “주라”라고 하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먼저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10절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6.すると、ペテロは言った。「金銀は私にはない。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あげよう。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
7.そして彼の右手を取って立たせた。するとたちまち、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
8.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そして、歩いたり飛び跳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二人と一緒に宮に入って行った。
9.人々はみな、彼が歩きながら神を賛美しているのを見た。
10.そしてそれが、宮の美しの門のところで施しを求めて座っていた人だと分かると、彼の身に起こったことに、ものも言えないほど驚いた。

무슨 집에 대들보를 뽑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내거나 목돈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내게 있는 것을 주님과 우리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못 걷던 사람이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주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내 눈앞에는 눈부신 모습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 자신이 그 쪽으로 갈 수도 없고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게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이제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우리 이웃을 섬기면서, 단지 실속 없는 공허한 축복의 소리만이 아닌, 진정한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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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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