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회 문안하시는 주님
2023년 11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16절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3節~16節
“13.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14.アシンクリト、フレゴン、ヘルメス、パトロバ、ヘルマス、および彼らとともにいる兄弟たちによろしく。
15.フィロロゴとユリア、ネレウスとその姉妹、またオリンパ、および彼らとともにいるすべての聖徒たちによろしく。
16.あなたがたは聖なる口づけをもって互いにあいさつを交わしなさい。すべてのキリストの教会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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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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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9번째 시간으로서 “문안하시는 주님” 挨拶さ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5절부터 16절 중에서 보면 똑같이 문안인사를 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12절과 13절 사이에서 나누어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부터 먼저 살펴본 다음에 이 문안인사에 관한 대목을 정리를 하고, 그리고 이 문안인사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볼까 합니다.

우선 지난 주에는 5절부터 12절까지에 있어서 바울이 각 사람에 대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면서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3절에서 16절에 보시면,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단순하게 이름이 나열되어 있고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부분에서는 하나하나 설명했는데 뒤에 가니까 귀찮아져서 그냥 이름만 적은 것일까요?

다른 주석서에 찾아보아도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어떤 주석서에 보니까 앞에 나온 사람들은 바울과 비교적 가까웠던 사람들이라서 자세하게 썼는데, 13절 이후에 나온 사람들은 바울과 별로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이름만 적었을 것이라고 되어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


아니, 그럼 생각해보세요.

앞쪽에 이름이 적힌 사람에 비해서 자기는 바울과 별로 친하지 않으니까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 이름이 뒤에 나오는 것도 서러웠을 텐데, 설명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 본인은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마도 어쩌면 이 로마서가 적히고 지금까지 약 2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이해되지나 않았을까 합니다만, 오늘은 이 오해를 좀 풀어드릴까 합니다.

여기서 힌트가 되는 것이 바로 13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이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6장 13절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3節~16節
“13.主にあって選ばれた人ルフォスによろしく。また彼と私の母によろしく。

이 13절에서는 루포라는 사람과 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루포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 어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루포와 바울이 형제지간이라기 보다는 루포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루포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있는 반면, 루포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이 없어요.

그리고 14절 이후에는 대부분 이름만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13절에 나오는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바로 자세한 설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에 분기점이 생긴 것일까요.

지지난 주에 16장 3절에서 16절까지 내용 중에서 4명, 2쌍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말씀을 드렸고, 그 때는 이 중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면, 오늘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루포라고 하는 이름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딱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 로마서 16장 13절인데, 나머지 하나는 마가복음 15장 21절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이 장면, 우리가 잘 아는 장면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갑자기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한테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본론과는 좀 관련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문제를 내볼까요?

이 구레네 시몬은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갔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시는데 머리는 가시관으로 피범벅이 되고 온몸은 채찍을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기진맥진해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면서 올라가시다가 도중에 쓰러지시죠.


그 모습을 본 로마 군인이 생각하기를 더 이상 십자가를 짊어질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마침 그 옆에 있었던 구레네 시몬한테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잖아요?

예, 영화 같은 데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사실 <루포>라는 이름만 본다면 마가복음에만 등장합니다만, 구레네 시몬과 관련된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 깊었나봐요.

마가복음 외에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이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보실까요?

마태복음 27장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누가복음 23장 26절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うしろ)から運ばせた。


좀 신기하지 않으세요?

앞서 살펴본 마가복음의 기록을 비롯해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시면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쓰러지거나 넘어지셔서 걸어갈 수가 없게 되자 그 옆에 있던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본다면,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구레네라고 하는 시골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그러면 이 구레네라고 하는 곳이 시골이라고 하는데, 구레네가 어디길래 시골이라고 되어 있을까 하고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구레네라고 하는 곳은 영어발음으로는 싸이린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도시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예루살렘까지는 얼마나 되냐 하면, 인터넷으로 찍어보니까 자그마치 1800킬로나 됩니다.

그래서 걸어서 가게 되면 하루에 40킬로 정도 간다고 해도 45일 그러니까 한 달하고 보름이나 걸리는 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큰 명절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올라온 사람이었다는 것인데, 마침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엉겁결에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마가복음에 있는 구절을 살펴볼까요.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보면 앞서 로마서에 있는 구절에서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을 가리키면서 물음표가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루포>와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등장하는 <루포>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로마서 16장 13절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선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실 텐데, 이번에는 이 구절에서 다른 성경구절과 비교했을 때 좀 부자연스러운 점을 한 번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자, 어디가 부자연스럽습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에 있어서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역대상 4장 37절
“또 스마야의 오대 손 시므리의 현손 여다야의 증손 알론의 손자 시비의 아들은 시사이니”

シフイの子ジザ。シフイはアロンの子、アロンはエダヤの子、エダヤはシムリの子、シムリはシェマヤの子。


느헤미야 11장 15절
“레위 사람 중에는 스마야이니 그는 핫숩의 아들이요 아스리감의 손자요 하사뱌의 증손이요 분니의 현손이며”

レビ人のうちでは、ハシュブの子シェマヤ。ハシュブはアズリカムの子、アズリカムはハシャブヤの子、ハシャブヤはブンニの子である。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 보면 그 이름에 <성씨>가 있지요.

그래서 대충 어느 집안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은 성씨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소개를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이고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가 누구이고……라는 식의 기록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조상에 대해서 소개하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소개하려는 본인보다 조상이 더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정작 그 사람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손자이고 하면, 아하 누군가 했더니만 그 집안 아들이군! 하고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런 경우 있잖아요.

아, 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누구누구의 아들이고, 누구누구의 손자야……라고 하는 경우라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더 유명한 경우 아니겠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더라도 어떤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누구의 아들이요, 누구의 손자다……라는 식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은 어떻습니까.


마가복음 15장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이게 일반적이라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이렇게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인용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마가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아버지 시몬보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더 유명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단지 구레네 시몬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라고 하면, 아~~그 사람들의 아버지구나! 라고 알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알렉산더와 루포는 시몬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라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알렉산더와 시몬 이름이 없어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어쩌면 이 시점에서는 아버지 시몬과 큰아들 알렉산더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정리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우선 구레네라고 하는, 저기 아프리카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 시몬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그의 아들 루포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인물이 되었어요.

이렇게 본다면 로마서 16장 13절에서 왜 루포는 그 이름만 열거되었을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당시에 이 로마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루포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굳이 해설을 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한국사람한테 가수 조용필씨에 대해서 말하면서, 아 이 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 시작해서 이러이러한 히트곡이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인데……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휴, 이미 다 알아요. 한국사람 중에서 조용필 모르는 사람 있어요? 라고 하지 않겠어요?

뭐, 이 점에 대해서는 세대마다 좀 다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당시 이 로마서를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루포라는 인물은 달리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유명인사였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했었나봐요.

그러니까, 아,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인 루포 만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도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분이라고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14절 이후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이유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별로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우리에게 있어서는 낯선 이름이라 하더라도, 당시 로마에서 이 서한을 읽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있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나요?

자, 그럼 다음으로 문안인사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아무런 의미없이 쓰여진 것은 없습니다.

다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계속되는 문안을 그저 단순한 안부인사 정도만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 서한은 우리가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자매 뵈뵈가 고린도에서 그 먼 로마까지 그 험난한 길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 목숨을 건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본다면 이 로마서는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로마에 반드시 전달해야 했을 정도로 중요한 서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단순한 짐작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로마서를 공부해온 우리는 이미 이 로마서가 신앙적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처럼 중요한 서한, 그것도 자매 뵈뵈가 목숨을 걸고 험난한 길을 가면서 전해준 그 서한에, 단순한 안부인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면, 이건 좀 너무하지 않겠습니까.


종이도 지금 같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당시는 양피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에 부피도 컸을 뿐만 아니라 무게도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뵈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해서라도 정말 중요한 내용만 적으면 됐을 텐데, 굳이 한가하게 인사말까지도 적을 필요가 있었겠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런 저도 조금 생각해보면 알 만한 일인데, 바울이라고 그 점을 몰랐겠습니까.


그리고 이는 나중에 공부할 예정인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지금 대단히 몸이 쇠약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긴 문안인사까지를 굳이 기록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이 문안인사 대목은 도저히 뺄래야 뺄 수 없을 만큼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안인사가 적힌 부분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까요.

자, 우리 알기 쉽게 이 부분까지 좀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청와대……지금은 대통령실인가요? 아무튼 거기서 일본에 있는 한국대사관으로 대단히 중요한 긴 공문이 도착했어요.

그리고 그 중요한 공문 마지막에 뭐라고 적혀 있냐 하면 군마현에 있는 이카호중앙교회 홍훈표 목사님한테 문안해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공문을 받은 대사관에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교회로 연락을 하겠지요. 이카호중앙교회가 어디야? 하면서 연락처를 알아본 다음에 전화라도 한 통 걸어서 하는 말이, 지금 한국 대통령실에서 중요한 공문이 대사관으로 왔는데, 그 내용 중에 이카호중앙교회 홍훈표 목사님께 문안을 전해달라는 내용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 전화를 받은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쇼……라고 하고 그냥 끊어버리겠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오히려 아니, 무슨 공문이길래 대통령실에서 온 공문 중에 나한테 문안한다고 했을까?

혹시 나도 그 내용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라고 하지 않겠어요.

직장에서 보면 공문을 발송할 때 보면 수신란이 있고 그리고 참조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공문 내용은 수신인만이 아니라 참조란에 적힌 사람들까지도 읽도록 하라는 내용인 것이지요.

이 로마서 16장에 적힌 문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지금 뵈뵈가 목숨 걸고 가져가는 이 서한에 그저 한가롭게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하기 위해 적은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적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서한을 반드시 읽도록 하라는 요청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제부터 로마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아갈 핵심인물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주는 로마 교회의 직분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이름이 적힌 여러분들은 이 서한의 내용을 반드시 숙지해서 로마 교회를 굳건히 세워 나가야 한다면서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 로마서를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는 것,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이 로마서를 읽고 있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주님께서 역시 우리에게도 문안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사력을 다해 이 로마서를 기록하고, 그리고 자매 뵈뵈가 목숨을 걸고 이 로마서를 가져간 이유는, 단순히 2천년 전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을 전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2천년이 지난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이 귀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단순히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아, 그렇구나……하고 끝나라고 문안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로마만이 아니라 다름아닌 바로 이 땅에도 주님의 교회가 굳건히 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문안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요청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문안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서,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주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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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9회 심음과 거둠
2023년 11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5절~12절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5節~12節
“5.また彼らの家の教会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キリストに献げられたアジアの初穂である、私の愛するエパイネトによろしく。
6.あなたがたのために非常に労苦したマリアによろしく。
7.私の同胞で私とともに投獄されたアンドロニコとユニアによろしく。二人は使徒たちの間でよく知られており、また私より先にキリストにある者となりました。
8.主にあって私の愛するアンプリアトによろしく。
9.キリストにある私たちの同労者ウルバノと、私の愛するスタキスによろしく。
10.キリストにあって認められているアペレによろしく。アリストブロの家の人々によろしく。
11.私の同胞ヘロディオンによろしく。ナルキソの家の主にある人々によろしく。
12.主にあって労苦している、トリファイナとトリフォサによろしく。主にあって非常に労苦した愛するペルシスによろし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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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8번째 시간으로서 “심음과 거둠” 種まきと刈り入れ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로마서 16장 1절~2절은 바울의 이 귀한 서한을 겐그레아에서 로마까지 자그마치 10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가져간, 그것도 힘이 센 남자도 아닌 자매 뵈뵈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본 내용은 로마에서 고린도로 왔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 그들은 고린도에서 에베소, 에베소에서 로마,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 에베소로 이어지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마다 않고, 오로지 주님의 일을 위해 바울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한 부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5절부터 16절까지 보시면 계속해서 문안하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를 그냥 읽어 내려가면 재미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에 한 번 빠지게 되잖아요? 그러면 세상 학문이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무슨 소설가나 철학자가 쓴 책의 내용을 두고 그 내용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 후세 학자들이 여러 주장들을 내놓은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래봐야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이잖아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쓴 글이나 책이라 하더라도, 그 생각이나 주장이 항상 옳다고 만은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국어시험에 보면 본문이 있고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예전에 어디서 들어보니까 그 시험에 나온 본문의 필자가 직접 그 문제를 풀어봤대요.

그랬더니 절반도 못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저 글을 쓴 사람 따로, 그리고 해석한 사람 따로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어떤 글을 해석했다 하더라도 그게 정말로 그 글을 쓴 사람의 생각과 같은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문제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비록 이 성경이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 하더라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구약 39권, 신약 27권, 전체 66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올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로마서 16장 5절에서 16절까지를 보시면, 우선 한 곳에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나눌 수 있냐 하면 바로 12절과 13절 사이에서 나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다음 주에는 13절부터 16절까지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5절부터 12절까지를 함께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유명한 식당이나 요리를 소개하는 방송을 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와 같은 방송을 보시면 주로 인기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음식을 먹는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연예인들은 그런 것을 잘 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음식을 먹었을 때의 그 소감, 그 묘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걸 잘하는 사람을 보면요, 정말 보고 있는 제가 직접 그 음식을 먹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 맛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잘 못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냥 이걸 먹어도 아, 참 맛있네요. 저걸 먹어도 아, 정말 맛있네요……라는 말 밖에 안 하면 정말 보는 사람이 재미가 없죠.

아니, 그 맛이 단지 매운지 짠지, 뜨거운지 차가운지, 식감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어떤지를 알려주면서 먹어야 하는데, 그냥 맛있다고만 하면 보는 사람은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별로 그 음식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어휘력이나 표현력이 딸린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먹으나 저걸 먹으나, 그냥 맛있다는 말로만 떼우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로마서 16장을 보시면 특히 12절까지에 대한 내용에 의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정성 들여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우선 5절에 등장하는 에베네도(エパイネト)라는 사람, 이 사람은 아시아에서 처음 맺은 열매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종종 <아시아>라고 하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이나 일본,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 다시 말해서 지금 터키 근방을 가리키는 소아시아 반도를 가리킵니다.

대략적인 지리적 위치를 본다면 이태리와 이스라엘 사이 부근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사역을 했는데 여기서 처음 전도한 사람이 바로 에베네도(エパイネ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6절에 의하면 <마리아>라는 자매가 나오는데,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안드로니고(アンドロニコ)와 유니아(ユニア), 암블리아(アンプリアト) 등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12절까지를 보면 각 사람마다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로마서 16장 1절부터 12절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등장한 인물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간단하게 구분해볼까요?

만약에 여기 나오는 사람들을, 심는 사람들과 거둔 사람들로 구분을 해본다면, 여기에 등장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 모두 다 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 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만, 주님 안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다 심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모세, 다윗, 그리고 바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면, 사실 우리에게 거두는 것이 아닌 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심기보다는 거두고 싶어 합니다. 하나를 심고 열을 거두고 싶어합니다. 열을 심고 백, 천, 만, 백만 억을 거두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저것을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지요.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면 누구는 한 해 동안 수입이 많이 늘어서 기뻐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한편으로는 수입이 늘기는커녕 빚만 늘었다는 분들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런 분들은 추수감사절이라고 해도 감사할 것이 없는 건가요?

그런데 잠깐요. 우리말로는 추수감사절이지만 영어로는 뭐라고 합니까. Thanksgiving 이라고 하지요.

사실 성경을 해석할 때 영어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어가 원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추수감사절 같은 경우는 영어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추수감사절의 시작은 성경이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수확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11월로 한 것은 과거에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난 다음부터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을 나타내는 Thanksgiving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볼까 하는데, 이 단어를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감사한다는 말도 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대한 감사>라고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회사원이라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 우리가 몇 억대의 큰 계약을 따왔어요. 이는 얼마나 큰 성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월급을 언제 받습니까.

1번 계약금이 입금되면 받는다.
2번 기타.

예, 계약금이 입금된다면 어디로 입금이 됩니까.

아무리 내가 계약을 따왔다고 해도 그 계약금이 내 통장으로 입금되지는 않잖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 돈이지요. 그렇다면 몇 억 짜리 계약을 따온 내 월급은 언제 입금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월급날에 입금되겠지요.

회사에 있으면서 놀라운 성과를 내면 보너스가 나올 수도 있고, 월급이 오를 수도 있고, 그리고 승진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회사에서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내 보너스를 줄 수도 없는 것이요, 내 마음대로 월급을 올릴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승진할 수도 없겠지요.

그러나 내가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올린다면, 분명 그에 걸맞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는 믿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물론, 세상에는 항상 공정하지만은 않겠지요. 내가 분명 성과를 올렸는데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이 먼저 승진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전혀 오차가 없습니다.

여기서 <때가 되면>이라는 뜻은 단순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다른 뜻이 아니라 <가장 좋을 때에> <가장 적합할 때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할 때에 우리를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도 안 믿어지십니까. 그런 분들을 위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0절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あなたがたは、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を軽んじたりしないように気をつけなさい。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天にいる、彼らの御使いたちは、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御顔をいつも見ているから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별볼일 없이 보이는 사람도 무시하지 말래요. 그 이유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항상 뵙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두고 카톨릭에서는 천사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런 말씀은 안 하세요.

그 대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요한복음 14장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일부 이단 교주들은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보혜사 말고 다른 보혜사도 보내주시겠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그게 누구냐 하면, <그게 바로 자기다>라고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혜사는 무엇이냐 하면 그게 천사라고 하나요? 아니요.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럼 보혜사는 무엇이냐 하면, 요한복음 15장 2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사를 시켜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 진리의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뵙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분명히 그럴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쩌면 천사들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늘에 기록하고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말씀에 있어서의 핵심은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사람 한사람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1961년에 존 F 캐네디는 미국 제35대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하지요.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国があなたのために何ができるかではなく、あなたが国のために何ができるかを問うてほしい

이런 말을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제부터 국정을 맡게 될 대통령이 될 사람의 말로서 이게 합당한지 저는 좀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대통령으로서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바라기 전에,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대통령이 했기 때문에 좀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이제 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사람한테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말을 다음과 같이 한 번 바꾸어 보았습니다.

“회사가 자네에게 무엇을 해줄지 생각하지 말고 자네가 회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도록 해.”

어떻습니까.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리겠습니까. 왜 내 월급은 안 올려주는 거야. 왜 나는 승진을 안 시켜 주는 거야. 왜 나는 남들처럼 넉넉하지 못한 거야……라고 불평 불만만 늘어놓겠습니까.

사실 그런 사람한테 회사에서 무슨 비중 있는 일을 맡기겠습니까. 맨날 회사 불평이나 하고 상사 불만이나 하고, 동료들 후배들 험담이나 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아무런 성과도 남길 수 없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회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우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심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리고 행함으로 심어야 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심었다면, 그러면 거두는 것은 누가 거둡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을 해서 큰 계약을 따왔다 하더라도, 그게 내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 돈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나서 때가 되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억울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님 안에서는 한치의 오차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내 노력을 회사나 조직이 알아주지 못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신앙에 있어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시편 121편 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見よ イスラエルを守る方は まどろむこともなく 眠ることもない。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는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 주시고, 그리고 인도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회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무나 그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나요?

그렇죠. 그 회사의 입사 시험에 합격 해야지만 그 회사에 들어가서 그 회사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선택 받은 사람만이 그 회사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エペソ人への手紙1章4節~5節
すなわち、神は私たちを世界の基の置かれる前から彼にあって選び、御前で聖く、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ました。
神は、みむねとみこころのままに、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심을 수 있는 것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그저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기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쁨을 가지고 믿음과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행함으로 심었을 때,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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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8회 어느 한 부부의 헌신
2023년 11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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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7번째 시간으로서 “어느 한 부부의 헌신” とある夫婦の献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3절에서 16절에 보시면 이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몇 명의 이름이 나오는지 궁금하실 수가 있는데, 이게 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이는 세는 사람들이 실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를 포함시키느냐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구체적인 이름 숫자만 세면 26명입니다만, 다음 구절을 한 번 봅니다.

로마서 16장 10절 후반부
“10.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アリストブロの家の人々によろしく。

여기에 등장하는 아리스도불로라는 사람은 헤롯 왕의 손자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은 아리스도불로가 아니라 그 집안 사람, 그러니까 그 가족이나 또는 그가 데리고 있는 노예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과 이 아리스도불로라고 하는 이름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11절 후반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6장 11절 후반부
“11.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ナルキソの家の主にある人々によろしく。

여기에 등장하는 나깃수도 역시 마찬가지로 바울이 문안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집에 속한 사람, 이는 가족 뿐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 수하에 있던 노예들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을 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 수가 구체적으로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름 구절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6장 5절 전반부
“5.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また彼らの家の教会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로마서 16장 14절 후반부
“14.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彼らとともにいる兄弟たちによろしく。

로마서 16장 15절 후반부
“15.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彼らとともにいるすべての聖徒たちによろしく。

이는 누가 보아도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나 교회 전체를 대상하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인원수를 짐작할 수는 없겠지요.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볼 때 지금 여기서 바울이 문안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몇 명이냐 하는 것은 이 기록으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인데, 성경 만으로 본다면 이 로마서 16장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성경이 아닌 다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들의 직업을 추정하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그와 같은 노력이 학문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고 했을 때, 그와 같은 추정, 그러니까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추정은 어디까지나 신학자들의 주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우리는 어디까지나 이 성경으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이 점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4명, 2쌍의 인물들에 대해서 주목을 해 볼만 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은 우선 그 중에서 2명, 1쌍의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3절~4절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하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 지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 이름은 여기 말고도 사도행전 18장 2절과 18절, 26절, 고린도전서 16장 19절,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9절, 이렇게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서 구절까지 더하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성경에 총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만, 그러면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사도행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성경이 있으신 분은 함께 살펴볼까요?

사도행전 18장 1절~3절
“1.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1.その後、パウロはアテネを去ってコリントに行った。
2.そこで、ポントス生まれでアキラという名のユダヤ人と、彼の妻プリスキラに出会った。クラウディウス帝が、すべてのユダヤ人をローマから退去させるように命じたので、最近イタリアから来ていたのである。パウロは二人のところに行き、
3.自分も同業者であったので、その家に住んで一緒に仕事をした。彼らの職業は天幕作りであった。

여기서 ‘아덴’이라고 하는 곳은 아테네 그러니까 그리스의 수도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고린도로 왔다고 하는데 아테네는 고린도의 동쪽에 있으니까 바울은 동쪽에서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본래 로마에 있다가 고린도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났다는 거예요.

여기서 브리스길라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부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데,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 서쪽 이태리 로마에서 왔고, 바울은 고린도 동쪽 아테네에서 왔는데, 마침 고린도에서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굴라는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바울도 같이 살면서 함께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교나 목회 활동을 하면서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텐트메이커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과 아굴라 내외는 단순히 면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살면서 일도 같이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겠습니까.

그들 부부의 기록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パウロは、なおしばらく滞在してから、兄弟たちに別れを告げて、シリアへ向けて船で出発した。プリスキラとアキラも同行した。パウロは誓願を立てていたので、ケンクレアで髪を剃った。

우선 바울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그의 서원에 대해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민수기 6장 5절과 18절에 보면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이 되기로 서원을 했다면 그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있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수리아로 떠나기 전에 머리를 잘랐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어디라고요? 예, 겐그레아라고 하는데, 겐그레아? 어디서 들어본 적 있지 않으세요?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자매 뵈뵈가 속해 있던 교회가 바로 겐그레아 교회였잖아요. 이게 바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적어도 바울은 이 시점에서 뵈뵈와 면식을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겐그레아는 항구도시라고 말씀 드렸었잖아요? 고린도도 항구도시이긴 했습니다만, 고린도는 서쪽에 있고 겐그레아는 동쪽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수리아로 가려고 했다고 하는데 수리아는 고린도에서 동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도중에 있거든요.

그래서 겐그레아 항을 통해서 출발한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그 때 이 아굴라 부부도 함께 갔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에서 수리아까지는 대략 400~500킬로 정도라고 하니까, 서울에서 제주도 정도, 동경에서는 오사카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하니까 결코 가까운 곳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굴라 부부는 이처럼 헌신적으로 바울과 함께 하면서 그의 사역을 도왔다고 하니, 바울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이 부부에 대한 인상은 어떻습니까. 왠지 그런 느낌,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손과 발이 되어서 충실하게 일하는 일꾼 같은 모습이 들지 않나요?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26절
“2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さて、アレクサンドリア生まれでアポロという名の、雄弁なユダヤ人がエペソに来た。彼は聖書に通じていた。
この人は主の道について教えを受け、霊に燃えてイエスのことを正確に語ったり教えたりしていたが、ヨハネのバプテスマしか知らなかった。
彼は会堂で大胆に語り始めた。それを聞いたプリスキラとアキラは、彼をわきに呼んで、神の道をもっと正確に説明した。

수리아 지방으로 건너온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 쪽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에베소에 있는 회당에서 한 언변이 좋은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믿음도 좋고 설교도 잘 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 부족했나봐요.


그러자 아굴라 부부가 어떻게 했냐 하면 그를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 가르침은 바울을 통해서 얻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니까 이 아굴라 부부는 단순히 바울의 잡일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지식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부부에 대한 수수께끼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부부는 로마에 있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따라서 수리아 지방에 있는 에베소로 갔다면서요?

그들이 에베소에 있었다는 근거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잠깐 고린도전서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도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 의해 쓰여진 것인데, 고린도전서가 어디에서 쓰여졌냐 하면 고린도전서 16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8절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しかし、五旬節まではエペソに滞在します。

그러니까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고린도를 거쳐서 에베소에 갔던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쓰여진 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19절에 보시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アジアの諸教会が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アキラとプリスカ、また彼らの家にある教会が、主にあって心から、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이 말은 뭐냐 하면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에베소로 건너온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는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분명히 에베소에 같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그 부부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자, 기억하시죠? 오늘 본문인 3절부터 16절은 문안 인사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뵈뵈는 문안이 아니라 추천을 했었다고 했지요?

그 이유는, 문안 인사의 경우 그 대상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뵈뵈는 로마가 아닌 고린도 인근 겐그레아 교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추천이라는 말을 썼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오늘 로마서 16장 3절에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분명히 로마로 보내는 서한 중에서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이는 분명 아굴라 부부는 당시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이를 정리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의하면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거기서 바울을 만나고 함께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옮겨 왔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해서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서를 쓰면서 에베소에 아굴라 부부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니까 바울과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에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 추정되는 디모데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私はすでに注ぎのささげ物となっています。私が世を去る時が来ました。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순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그도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이 디모데 전서와 후서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한의 수신자인 디모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1장 3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私がマケドニアに行くときに言ったように、あなたはエペソにとどまり、ある人たちが違った教えを説いたり、

즉 디모데는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상황에서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로마에는 누가 있어야 해요?


예, 바울을 돕던 아굴라 부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디모데후서에는 이 또한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また、オネシポロの家族によろしく。


여기서 또 이 아굴라 부부가 등장해요. 그럼 지금 아굴라 부부가 디모데에게 문안한다고 해요?

아니요. 오히려 디모데더러 아굴라 부부한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굴라 부부는 지금 어디 있어요?

예, 디모데가 지금 있는 곳, 그러니까 또 에베소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어떻게 되냐 하면 로마에 있던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왔습니다. 거기서 아테네 쪽에서 온 바울을 만났어요. 그리고 함께 에베소로 건너갑니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이지요.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여전히 바울과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로 다시 와서 로마에 있는 교회로 편지를 하는데 그 내용에 보니 아굴라 부부는 다시 로마에 있다잖아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아굴라 부부는 어디 있어요? 예, 다시 에베소에 와 있어요.

이를 보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아, 거 참 이 아굴라 부부는 이사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까지 말씀을 안 드린 것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사실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처음 만난 시점부터 순교를 앞두고 있는 시점까지, 바울은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아굴라 부부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이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서 로마서를 쓸 때에도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문안하라고 편지를 썼고, 그리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이제 순교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아굴라 부부가 에베소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면 다음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굴라 부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로마서 16장 3절~4절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3節~4節
“3.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私の同労者、プリスカとアキラによろしく伝えてください。
4.二人は、私のいのちを救う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危険にさらしてくれました。彼らには、私だけでなく、異邦人のすべての教会も感謝しています。”


이 부부는 얼마나 헌신적으로 바울은 도왔냐 하면 하물며 자기들의 목숨, 이는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분명 <자기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가 합심해서 헌신적으로 바울을 도왔을 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아굴라 부부는 바울에게 있어서 누구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시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는 분명하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을 때 아니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디모데후서를 쓰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시점에서 자신을 가장 잘 도와줄 사람을 필요로 할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아굴라 부부를 부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이 아굴라 부부가 지금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あなたは、何とかして早く私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い。

바울은 디모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와 달라고 하지요. 순교를 앞둔 상황에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겨둘 가르침도 있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러 부탁도 함께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あなたが来るとき、トロアスでカルポのところに置いてきた外套を持って来てください。また書物、特に羊皮紙の物を持って来てください。

그런데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도 단 한 가지 부탁을 안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굴라 부부를 데려와 달라는 부탁입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들도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했기 때문에 안 불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젊은 디모데가 모셔오든지, 아니면 올 수 있는지 한 번 살펴봐 달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 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이 아굴라 부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굴라 부부에 대한 문안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분명 바울이 그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울의 선교활동 중에서 이 아굴라 부부만큼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없었을 것이고, 단순히 세상적으로 도왔을 뿐만 아니라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신앙적 지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바울로부터 성경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교육받았을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는 바울의 사역과 함께 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그 부부를 로마로 보내서 로마 교회에 대한 사역을 부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은 자신을 대신해서 아굴라 부부로 하여금 에베소로 보내서 역시 거기에 있는 교회를 믿음 위의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해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그 이동 거리를 한 번 볼까요? 고린도부터 시작한다면 고린도에서 에베소까지 400킬로,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1700킬로, 그리고 다시 로마에서 에베소까지 1700킬로.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 그 시기에 이토록 먼 거리를 남자인 아굴라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브리스가까지 함께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 살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까요.


하지만 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합심해서 끝까지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헌신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 어쩌면 금방은 눈에 띄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 21세기에도 그들의 헌신은 이처럼 성경 속에서 흐려지는 일 없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이제 우리도 조금 더 힘을 내어서 주님의 사역에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름이 조금도 흐려지는 일 없이 영원토록 선명하게 하늘에 기록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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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7회 로마로 향하는 뵈뵈
2023년 11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2절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節~2節
“1.私たちの姉妹で、ケンクレアにある教会の奉仕者であるフィベを、あなたがたに推薦します。
2.どうか、聖徒にふさわしく、主にあって彼女を歓迎し、あなたがたの助けが必要であれば、どんなことでも助けてあげてください。彼女は、多くの人々の支援者で、私自身の支援者でもあ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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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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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6번째 시간으로서 “로마로 향하는 뵈뵈” ローマに向かうフィベ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16장 본문의 전체 구성을 살펴본 다음에 드디어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먼저 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27절까지 있는 로마서 16장의 구성은 네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2절, 3절부터 16절, 17절부터 20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21절부터 27절입니다.

우선 1절부터 2절은 뵈뵈의 추천, 3절부터 16절은 문안 인사, 17절부터 20절은 본론, 그리고 21절부터 마지막인 27절까지는 맺음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본어 시험반, 그리고 일본대학 입시반을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만, 특히 많은 수험생들이 독해과목을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독해 문제 중에서도 이른바 “본문 내용”과 “필자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 제일 까다롭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본문 내용과 같은 것은 무엇인가, 또는 필자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문장 전체의 흐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독해문제를 풀기 위해서 문장 전체를 모두 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 독해문제는 본문 전체를 이해하고 푸는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내는 문제라고 했었지요.

그래서 독해 본문의 특징 중에서 본다면, 본문 중에서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핵심 내용이 마지막에 오는 본문입니다. 서론 본론으로 이어지고는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이 나오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는 핵심 내용이 처음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우선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을 처음에 땅 하고 말한 다음에 그 이유에 대해서 서술하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핵심 내용이 중간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핵심 내용이 본문의 중간에 오는 경우가 있나요? 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편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편지의 경우에는 일단 처음에는 인사말이 들어가지요? 예를 들어서 무슨 계절인사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본론이 있고 마지막에 맺음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입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보게 될 로마서 16장에 있어서, 그 핵심내용은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번, 1절부터 2절인 뵈뵈의 추천 부분
2번, 3절부터 16절까지인 문안 인사 부분
3번, 17절부터 20절까지인 본론 부분
4번, 21절부터 27절까지인 맺음말 부분

이 중에서 어디에 그 핵심 내용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번, 1절부터 2절인 뵈뵈의 추천 부분
2번, 3절부터 16절까지인 문안 인사 부분
3번, 17절부터 20절까지인 본론 부분
4번, 21절부터 27절까지인 맺음말 부분

이 중에서 핵심 부분은? 예, 그것은 바로 전부 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 문장과 성경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요한삼서 2절.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구절이 좀 어렵게 들릴지는 모르기 때문에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영혼이 건강한 것처럼 그대의 모든 일이 잘 되고 몸도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내용을 보세요. 이 구절은 일반적인 문장으로 본다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안 인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이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안았을 때,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살펴볼 이 로마서 16장에 있어서도, 아, 이건 문안인사라서, 이건 맺음말이라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단어, 한 글자마다 우리가 버리는 것 없이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뵈뵈라는 이름이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느냐 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이 이름은 성경에서 이 곳에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 이름이 나오지 않아요.

이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둘째 이유는 바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주제설교를 계속 했었다면 주일 말씀에 이 부분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분도 다룰 수 있는 것이 바로 강해설교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2절
“1.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私たちの姉妹で、ケンクレアにある教会の奉仕者であるフィベを、あなたがたに推薦します。
どうか、聖徒にふさわしく、主にあって彼女を歓迎し、あなたがたの助けが必要であれば、どんなことでも助けてあげてください。彼女は、多くの人々の支援者で、私自身の支援者でもあるのです。”

여기서 바울은 한 교회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겐그레아 교회입니다. 이는 교회 이름이라기보다는 겐그레아라는 곳에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가 어디 있냐 하면, 주석서에 의하면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11킬로 떨어진 항구도시였다고 합니다.

제가 앞서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한 장소가 고린도였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이 추정한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로마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한 성도를 추천하는데 그 성도가 고린도 바로 인근인 겐그레아에 있는 자매이기 때문에, 분명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은 고린도 또는 그 근방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지요.

자,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만, 3절부터 16절까지 이어지는 문안인사에 이 뵈뵈라고 하는 자매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안이 아니라 분명 추천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뵈뵈라고 하는 자매가 그녀의 소속된 교회는 겐그레아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 로마 쪽에 있다고 한다면, 뭐, “주 안에서 사랑하는 자매 뵈뵈에게 문안하라” 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분명 문안이 아니라 추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안의 특징을 살펴본다면 다음 두 가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문안은 그들이 만나거나 연락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대면하거나 아니면 편지나 기타 방법을 통해서 연락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을 때 문안을 할 수 있겠지요.

둘째로 문안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가 저한테 편지 하기를 거기 누구누구한테 안부 전해주세요……라고 해봤자 제가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면 안부를 전할래야 전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내용으로 본다면 뵈뵈라는 자매에 대해서 문안이 아니라 분명 추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 볼 때, 로마에 있는 교회 사람들은 이 뵈뵈에 대해서 그 때까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모르는 사람을 추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이유 중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이 바울이 쓴 편지, 그러니까 이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교회까지 가지고 간 인물이 다름 아닌 뵈뵈였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자신이 쓴 서한을 로마에 있는 교회까지 전해달라면서 이를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 자매인 뵈뵈한테 부탁했고, 뵈뵈는 이를 들고 겐그레아에서 로마까지 간 것으로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서한을 들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달했다고 해도, 그들은 바울은 알아도 뵈뵈라는 자매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누군데 이걸 가지고 왔느냐 하고 의심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뵈뵈라는 자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녀는 대단히 신뢰할 수 인물이라고 하여 추천한다는 말까지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글을 읽으면, 아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거리가 대충 얼마 정도라고 말씀 드렸는지 기억하십니까.

예, 직선거리로 1300킬로 정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까 코스에 따라서 1222킬로에서 2400킬로 정도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코스를 보니까, 참 세상 많이 좋아졌어요. 군마 시골에 있으면서도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까 금방 떠요.

고린도가 있는 그리스와 이태리 사이에는 바다가 있기 때문에 도중에 패리를 타고 간다면 그게 1222킬로인데 이렇게 가면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19시간 정도 걸린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다를 건너지 않고 육로로만 간다면, 북쪽으로 삥 돌아가게 되어서 2400킬로나 되는데, 이렇게 자동차만으로만 간다면 무려 30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자동차도 없었고 지금처럼 패리가 있었을 리도 만무하지요. 결국 육로는 걸어가야 하고 바다는 느린 배로 건너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편의상 거리가 1300킬로라고 하고, 이 길을 모두 걸어간다고 하면 얼마나 걸릴까요.

사람의 걸음걸이가 성인 남성의 경우 시속 4킬로라고 하고, 하루에 일어나 있는 시간을 16시간, 그리고 여기에 식사도 하고 휴식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실제로 걸어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 하루에 대략 40킬로 걸으면 많이 걷는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건 남성인 경우이지만 뵈뵈는 자매라면서요. 그녀의 나이가 몇 살 정도였는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편의상 하루에 평균 30킬로를 걸었다고 해보죠. 그러면 총 거리 1300킬로를 하루에 30킬로 정도 걸었다고 한다면,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는 데 며칠이나 걸립니까.


단순계산으로 1300 나누기 30하면 되겠죠? 답은? 예, 대략 44일, 그러니까 한달 하고도 보름 정도라는 답이 나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무슨 서울 시민 걷기 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제 아내와 걸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대략 10킬로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어땠을 것 같습니까. 예,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도 익숙한 길도 아닌 처음 가는 길이니까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그런데 거기에 3배를, 그것도 한달 반 이상이나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걸어야 하는 거리가 바로 이 뵈뵈가 갔던 여정이었습니다.

사실 이것만 보더라도 참 먼 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지요.

본문에 보시면 뵈뵈는 무슨 일행이 있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일행이 있었고 거기에 남자도 포함되어 있었다면, 굳이 자매인 뵈뵈 이름만을 쓰지는 않았겠지요. 훨씬 더 힘이 있는 형제 이름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매 뵈뵈만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분명합니다. 바울의 서한을 들고 그 먼 거리를 간 인물은 자매 뵈뵈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형제도 아닌 자매인 뵈뵈에게 이 서한을 맡겼을까요. 그 지역 사람 수가 적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지명사전에 의하면 거기는 당시 고린도나 앞서 말씀 드린 겐그레아 항구들이 있어서 상업과 물질적인 번영을 누린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구 수 자체가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바울은 자신의 서한에 대한 가치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있어서 로마는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습니까. 이스라엘과 유럽을 비롯해서 그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심장부가 바로 로마인데, 여기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전파에 있어서 말하자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 내용은 어떻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혼란한 가운데에 있을 때 신약 시대에 있어서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이 서한이 무슨 사고로 인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도중에 유실된다고 한다면, 이는 복음전파는 고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혼란은 종잡을 수 없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요한 일을 감당할 인물로 바울이 자매 뵈뵈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는 사람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로마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바로 자매 뵈뵈야 말로 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웬만한 남자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임무를 자매인 뵈뵈한테 맡기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매 뵈뵈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그 결과 로마에 이 서한이 전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이 귀한 로마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자매 뵈뵈는 정말로 놀랍고도 귀한 일을 해낸 인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입니다.

요즘도 여성이 혼자 여행을 한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른다고 하는데, 당시는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녀의 노력은 분명 보상이 따랐을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2절
“2.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どうか、聖徒にふさわしく、主にあって彼女を歓迎し、あなたがたの助けが必要であれば、どんなことでも助けてあげてください。彼女は、多くの人々の支援者で、私自身の支援者でもあるのです。”

이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사랑으로 주 안에서 그녀를 정중하게 맞아들이고 무슨 일이든지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때는 아낌없이 도와 주십시오. 그녀는 많은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나도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서한을 받은 로마 교회 사람들은 무사히 도착한 자매 뵈뵈에 대해서 여자라고 무시하거나 하지 않고 크나큰 대우로 그녀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도중은 험난했을 것입니다. 로마까지 가는 길에서는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만한 사람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오히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생명까지도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따랐을 것입니다.

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우리 인생 가운데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면, 쉽게 낙담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경우에 우리는 이 뵈뵈를 한 번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그 외로운 여정 가운데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로마로 향하던 뵈뵈.

그녀는 어쩌면 다음 성경말씀을 의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恐れるな。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る。たじろぐな。わたしがあなたの神だから。わたしはあなたを強くし、あなたを助け、わたしの義の右の手で、あなたを守る。

우리가 가는 그 길, 힘들고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굳세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십니다.

強く、助けて、守って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고난과 역경을 뚫고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던 자매 뵈뵈의 믿음과 행함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여, 마침내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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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6회 로마서 16장 서론
2023년 10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4절
“24.(없음)”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4節
“24.(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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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5번째 시간으로서 “로마서 16장 서론” ローマ人への手紙16章序論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드디어 로마서 마지막 장인 16장으로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혹시 마태복음 1장에 대해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계보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生み、イサクがヤコブを生み、ヤコブがユダとその兄弟たちを生み、

그렇게 해서 마지막 25절에서는 예수님이 기록됩니다.

이 마태복음 1장,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글을 처음 읽으면 참 지루하고 따분합니다만, 구약을 다 읽고, 그 흐름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 읽으면, 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벌써 이렇게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계셨구나 하고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이 로마서 1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이 로마서 16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구약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를 무심코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가면 대단히 큰 은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16장 첫 시간이기 때문에 우선 16장에 대한 개론과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부터 알아본 다음에 세부적으로 들어가볼까 합니다.

15장까지는 이렇게 하지는 않았는데 16장은 왜 이렇게 살펴보아야 하는가 하면 이는 15장까지와는 다르게 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선 16장에 대한 개론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바울 서신을 보시면 마지막 부분에, 누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특별히 이 로마서 16장은 많은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나마 골로새서 4장에도 많은 이름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기타 다른 서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구체적인 이름들이 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16장에 대해서 일부 신학자들은 독특한 학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로마서 16장은 그 전에 있는 15장까지와는 별개로 쓰여진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글의 흐름이 앞부분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들기도 하고,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몇몇은 분명 에베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앞서 15장까지는 로마에 있는 교회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16장은 로마가 아닌 에베소로 보내는 서한이 여기에 끼었다는 주장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 로마서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구성의 차이에 있어서 무려 15종류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논쟁은 로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데, 1장부터 50장까지 있는 창세기는 사실 여러 가지 문서들이 조합된 것이라고 하는 이른바 문서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도 나누어진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을 접하면 제가 학부 때 전공서적을 공부하던 기억이 납니다. 뭐, 별로 열심히 공부한 편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맨날 보면 다수설, 소수설, 절충설……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뭐, 법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정답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봉건주의나 전제주의 같은 독재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민주주의 국가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면 꼭 그렇다고 만은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선거제도가 공정하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지도자가 선출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국회의원들이 훌륭한 법률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요.

3권분립이 있다고는 하나, 판사들이 항상 올바른 판결을 내린다고 할 수도 없고, 행정시스템이 항상 공정하게 돌아기만 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엄격하게 본다면 정답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 시대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들이 변화 되어감에 따라, 법률도 변화되어가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이는 법학만이 아니라 문학이나 경제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은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명확한 정답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학은 이 부분에 있어서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학에 있어서는 명확한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획이야말로 진정한 정답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반적으로 문과 학문은 명확한 정답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요. 반면에 이과를 보면 정답이 딱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내가 800원짜리 물건을 사고 1000원을 내면, 이와 같은 경우 거스름돈을 얼마 주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학자마다 견해가 갈라지는 경우는 없을 거 아니에요. 당연히 200원을 거슬러 줘야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문과라기 보다는 이과에 가까운 학문, 명확한 정답이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성경해석에 대해서 자꾸 사람의 생각을 집어넣으려고 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로회를 창시한 장 칼벵의 경우를 보면 그도 성경에 대한 주석을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주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칼벵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쓴 다른 신학자들에 비해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명확한 근거라는 것은 어떻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에 대한 문제는 성경으로 풀 수 있었을 때에 비로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경우에는 성경 66권 중에서 계시록을 제외하면 65권인데,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 나머지 65권 중에서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보면 이는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신학에 있어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칼벵이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안 쓰겠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계시록도 어떻게든 끼어 맞추려고 했다면 충분히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이는 오히려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용기 없는 행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는 생각이 깊지 않은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 또는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가 예언자나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계시록이나 기타 성경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그것을 무슨 율법이나 십계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강요를 합니다.

이는 비단 사이비 지도자만이 아닙니다.

지난 10월 26일자 어떤 기독교 신문에 의하면 그런 내용이 나와 있더라고요.

주일 예배 드리면서 커피를 마셔도 되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까.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이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다음 성경구절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敬虔と恐れをもって、神に喜ばれる礼拝をささげ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이는 무엇입니까. 주일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을 헤친다는 것 아닌가요?

여기에 대해서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찬반의견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예배 때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교회가 무슨 영화관이냐. 예배 드리는 시간 정도는 커피를 안 마셔도 되지 않냐.” “커피도 중독이다. 예배 때는 마시면 안 된다”라고 해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의 어떤 대형교회 원로목사님도 예배 때 커피를 들고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거들고 나섰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기사를 읽으니까 얼마 전에 읽었던 또 하나의 신문기사가 떠올랐습니다. 10월 23일자 기사였는데, 한국 어느 교회에서 목사 안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어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내용이 뭐였냐 하면,

“목사가 된 다음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유혹이 하나 있다. 성경을 잘 읽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변할 수 있다”며 “본질적인 것에서 떠나선 안 된다. 목사가 되어 성경을 더 가까이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듣고 느낀 점은 뭐냐 하면,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판사 임명식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축사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분은 이제부터 법전을 열심히 읽도록 하세요. 라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있는 판사들이 법전을 제대로 읽고 있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판사님들이야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목사님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금 목사님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지 않으면 세상에 목사 안수식에 이런 말이 나오겠냐 하는 것이지요.


제가 오늘은 신문기사 이야기를 계속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신문기사를 하나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다 요즘 읽은 기사입니다만, 이는 10월 24일자 신문기사입니다.

한국에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부분 4년제 대학을 나온 다음에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쳐야 그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학부 전공은 상관없이 일단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신학대학원에 지원을 할 수가 있는데, 작년에 보니까 신학과 학부과정 중에서 상당수가 미달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요. 뭐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꼭 학부를 신학과에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번 신문을 보니까 국내 대형 신학대학원이 대부분 미달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나마 한 곳만 1.4:1을 기록하면서 간신히 정원을 채웠고, 다른 대형 신학대학원들은 다 88%, 79%, 74%, 69%였고, 어디 한 곳은 정원의 18%만 지원을 한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대학교가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교수도 좋아야 하고 건물이나 시설도 그렇고 거기에 위치가 좋고 등록금도 싸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명문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명문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졸업생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 학교를 나온 졸업생들이 모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뛰어난 성과를 낸다고 한다면, 설령 등록금이 비싸거나 위치가 별로 좋지 않더라도 명문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인 경우는 좋은 대학들이 다 대도시에 있습니다만, 미국 같은 곳을 본다면 상당히 외진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은 대부분 사립대학이라서 등록금도 보통 비싼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렇죠. 졸업생들이 쟁쟁합니다. 세계적으로 평가 받은 사람들도 많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래서 그 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거기를 들어가려고 몰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한국의 신학대학원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누워서 침뱉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100프로 신학교를 나온 기존 목회자들이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무엇을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문제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설교 시간 때라 하더라도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고,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도 성경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자기 멋대로 풀게 된다면 그게 이단 사이비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던 커피 문제도 그렇습니다.

이건 미국 목사님의 말씀이었다고 하는데, 히브리서를 인용하면서 커피를 들고 예배 시간 때 들어오는 것이 경건하지 않다? 이는 그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さばかれません。人を不義に定めてはいけません。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不義に定められません。赦し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赦されます。

만약에 예배 시간 때 담배를 피운다거나 하는 것은 옆사람에게 민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술을 마신다는 것도 냄새가 날 수도 있고 그렇겠지요.

뭐,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예배시간 때 컵라면을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냄새도 나고 소리도 나고 그러니까 그 주변 사람한테 얼마나 민폐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요, 그저 예배 시간 때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는 성경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커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만 안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안 마시는 사람더러 비판할 수 있나요?

로마서 14장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만약에 예배 시간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생각도 비난 받아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자신의 경건함을 헤치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자기가 안 마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자의 경우 예배 때 넥타이를 꼭 매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만약에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기는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만, 넥타이를 매지 않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거나 비난하는 일은, 이는 대단히 옳지 않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뭔데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이와 같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무슨 커피가 어쨌다거나 하는 말들이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요? 예,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가지고 남들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의 학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이는 인학도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잡학들이 교회에서 판을 칩니다. 그러니 누가 목사가 되려 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이나 일본을 보면 법대나 의대가 인기학과라고는 하지만, 그 나라 법조인들, 판사나 변호사들이 법을 너무나도 몰라요. 맨날 판결을 보면 엿장수 마음대로예요.

아니면 의사들이 너무나도 공부를 안 해요. 맨날 수술을 하고 주사만 놓으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요.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누가 법대나 의대에 가려고 하겠습니까.

이건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지금 교회가 이런 상황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 때문에 상처를 받고 다툼만 일어나요. 이러니 누가 목사가 되고 싶어하겠습니까.

구약에서도 보면 자기 생활을 절제하는 나실인의 경우를 본다 하면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기가 스스로 결정을 해서 나실인이 되는 경우는 있지만,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보고 나실인이 되라고 해서 되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판사가 법을 모르면 무죄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의사가 의술을 모르면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목사가 성경을 모르면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거나 상처를 입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ですから、私たちは、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에는 사람의 생각을 개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하고, 그리고 거기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내 생각으로 풀려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으로 풀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비난이 아니라 화평을 세우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제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이 로마서 16장에서도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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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5회 축복과 축복소리
2023년 10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9절~33절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9節~33節
“29.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ちあふれて行くことになると分かっています。
30.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また、御霊の愛によってお願いします。私のために、私とともに力を尽くして、神に祈ってください。
31.私がユダヤにいる不信仰な人々から救い出され、エルサレムに対する私の奉仕が聖徒たち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
32.また、神のみこころにより、喜びをもっ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き、あなたがたとともに、憩いを得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ってください。
33.どうか、平和の神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い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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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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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4번째 시간으로서 “축복과 축복소리” 祝福と祝福の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본문 내용을 살펴본 다음에 전반적인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9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9절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9節
“29.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ちあふれて行くことになると分かっています。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1장 11절~12절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바울은 1장에서부터 이미 로마로 가는 목적을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믿음을 강하게 하여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축복, 그리고 영적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무슨 초자연적인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무슨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바위에서 물을 내기 위해서 가나요? 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유람 서커스단이니지요.

진정한 영적인 축복과 영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으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이방인들은 사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해요. 하나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면 꿈에서 예수님이 보이고 그렇습니까. 그게 주님을 만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1장 11절에 나오는 <신령한 은사(御霊の賜物)>라고 하는 말씀은 15장 29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キリストの祝福)>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즉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요?

로마서 15장 30절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0.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また、御霊の愛によってお願いします。私のために、私とともに力を尽くして、神に祈ってください。

그 부탁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두 가지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31절입니다.


우선 첫째로 31절 전반부를 볼까요?

로마서 15장 31절 전반부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31.私がユダヤにいる不信仰な人々から救い出され、

자,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에 앞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했었지요? 그게 뭐였지요?

예, 바로 예루살렘에 가는 일이었지요?

복습하는 의미로 25절~26절, 그리고 28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먼저 25절~26절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しかし今は、聖徒たちに奉仕するために、私はエルサレムに行きます。
それは、マケドニアとアカイアの人々が、エルサレムの聖徒たちの中の貧しい人たちのために、喜んで援助をす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그리고 28절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それで私はこのことを済ませ、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通ってイスパニアに行くことにします。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먼저 갔다가, 그 다음에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의하면 “이 헌금을 안전하게 전한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헌금을 무사히 잘 예루살렘에 전한 다음에 로마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교와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율법을 중요시하는 유대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에, 유대에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 즉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기도제목은 31절 후반부이지요.

로마서 15장 31절 후반부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エルサレムに対する私の奉仕が聖徒たち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

이 부분에 대해서 현대인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의 섬기는 일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자신이 가지고 가는 이 연보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기쁘게 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만, 일부 신학자들은 이방지역에서 온 지원을 그들이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가 어쩌면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외 기타 사정에 의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기껏 이방 사람들이 정성 들여 헌금을 해주었고, 그리고 바울도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게 가져갔는데 이를 거절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를 무사히 잘 전달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 일이 모두 잘 마무리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로마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말씀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우선 여러분께 한 번 확인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자,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 감사합니다.

사실, 성경에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기록이 넘쳐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るために、互いに罪を言い表し、互いのために祈りなさい。正しい人の祈りは、働くと大きな力があります。

그리고 주님께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이외에도 기도는 능력이 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그 기도는 반드시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했다고 합니다.

음?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러면 기도를 하면 되지 왜 연보를 했을까요. 괜히 연보를 하는 바람에 본래 로마로 가려던 바울의 계획에도 완전히 반대방향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야 하는 차질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2.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돈이 넘쳐나서.
3. 기타.

예, 제가 드리는 문제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답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정답은 3번 “기타”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왜 1번과 2번이 정답이 아니다 하는 점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게도냐 사람들과 아가야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연보를 모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생각하기를,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만약에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냥 덥석 받아 왔겠습니까.

아무리 돈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이 부족했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우선 믿음부터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고 하고, 그리고 그 연보를 스스로 예루살렘까지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면, 이는 그 사람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를 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둘째로, 그렇다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돈이 넘쳐났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지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교회도 아닌, 이제 막 세워지기 시작한 그것도 이방지역에 있는 교회인데, 자금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한푼 두 푼 모은 연보일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연보를 했을까요.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니요,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했던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힌트는 다음 부분에 있습니다.

자, 지금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은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들은 결코 넉넉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보를 했어요.

그런데 이 편지는 지금 누구한테 쓰고 있는 것이었요? 예,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이었다고 한다면 로마에 대해서는 어떤 부탁을 해야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도움이 필요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없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연보를 했는데, 로마에서도 좀 도와줄 수 없겠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로부터 받은 연보를 예루살렘에 가져가면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연보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부탁했지요? 예,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고린도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과 로마 사이에 있어요. 고린도에서 봤을 때 예루살렘은 동쪽에 있고 로마는 서쪽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로마는 완전히 반대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연보를 하겠다고 한다면, 바울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들고 서쪽 저 멀리 있는 로마까지 갔다가 다시 고린도를 거쳐서 예루살렘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도 이제는 로마에서 모은 연보까지 들고 가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만약에 바울이 지금 있는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데 그 도중에 로마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한테도 연보를 부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리적으로만 보아도 그 먼 거리를 그것도 부피나 무게도 만만찮은 현금을 들고 왕래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고,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무엇보다 예루살렘에 대한 도움이 늦어질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대한 도움이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로마에 대해서 일단 지금은 기도로 도와 달라고 당부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있었는데, 로마에 대해서는 연보를 당부하지 않고 기도만 당부했던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에 대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로마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라고 하는 말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인 있으신 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나 누군가가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그 대답이 뭐예요?

예, “기도해보겠습니다”라는 말, 들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세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 솔직해 집시다. 싫다는 것 아니에요? 안 하겠다는 것이잖아요.

지금 세계 정세를 보면 2023년 10월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은 2년째 이어지고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지금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사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정말 하루 빨리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해달라고 그야말로 기도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가 있고, 나한테는 그래도 입을 옷과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아이고 불쌍하네요. 기도할게요” 라는 말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17절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私の兄弟たち。だれかが自分には信仰があると言っても、その人に行いがないなら、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信仰がその人を救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내가 정말 기도밖에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내 이웃을 위해 도울 수 있다면 우선 그 직접적인 도움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기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난다면 이는 그야말로 행함이 없은 믿음, 즉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 보면 <しわい屋>라고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디에 구두쇠 한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구두쇠인지, 맨날 식사 때만 되면 집 앞에 있는 장어집에 가요. 요즘은 그런 곳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가게 앞에서 장어를 굽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가게 앞에서 장어를 구우면 연기가 많이 나고 냄새도 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 구두쇠는 끼니때만 되면 그 장어집 앞에 가서 그 장어 굽는 냄새를 맡고 집에 와서는 그 냄새를 떠올리면서 밥을 먹었다고 해요.

참 대단한 구두쇠죠?

그런데 이 장어집 주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구두쇠가 자기네 가게에서 장어는 안 사 먹으면서, 맨날 장어 굽는 냄새 만으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월말에 가서 돈을 청구하기로 한 것이죠.

이제 월말이 되었길래 한 달치 장어 값을 받아내려고 직원을 그 구두쇠 집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구두쇠는, 아니 내가 장어를 사 먹은 적이 없는데 무슨 돈을 받으려 왔느냐 하고 당연히 놀라지요.

그랬더니 그 직원이 하는 말이, 맨날 저희 집 앞에 와서 냄새만 맡고는 그 냄새로 식사를 하신다고 하기에 저의 주인님이 그 냄새값을 받아오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 구두쇠가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더니만, 알았다고 하고는 뒤에 가서 돈을 꺼내 오더래요. 옛날이니까 종이 이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엽전을 꺼내면서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라고 하니까, 갑자기 그 엽전을 바닥에 뿌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와장창 소리가 났을 거 아니에요?

그걸 보고 그 직원이, 아니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만, 이 구두쇠 하는 말이, 나는 냄새만 맡았으니까 너도 돈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 가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에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어요.


물론 주님은 구두쇠가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구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道端に一本のいちじくの木が見えたので、そこに行って見ると、葉があるだけで、ほかには何もなかった。それでイエスはその木に「今後いつまでも、おまえの実は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すると、たちまちいちじくの木は枯れた。

마치 우리로부터 믿음의 열매를 얻기 위해 오셨지만, 정작 우리는 잎사귀 밖에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우리가 행함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우리가 말로 때우거나 하는 시늉만 하면서 주님께 냄새만 풍기게 하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실제로 축복은 받지 못하고 축복 받는 소리만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축복은 받지 못했는데, 축복 받는 소리만 듣는 경우가 성경에 있을까 했는데, 아이구, 있더라고요.

누가복음 16장에 보시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26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その金持ちの門前には、ラザロという、できものだらけの貧しい人が寝ていた。
彼は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たちもやって来ては、彼のできものをなめていた。
しばらくして、この貧しい人は死に、御使いたち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懐に連れて行かれた。金持ちもまた、死んで葬られた。
金持ちが、よみ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遠くにアブラハムと、その懐にいるラザロが見えた。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するとアブラハムは言った。『子よ、思い出しなさい。おまえは生きている間、良いものを受け、ラザロは生きている間、悪いものを受けた。しかし今は、彼はここで慰められ、おまえは苦しみもだえている。
そればかりか、私たちとおまえたちの間には大きな淵がある。ここからおまえたちのところへ渡ろうとしても渡れず、そこから私たちのところへ越えて来ることもできない。』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 앞에 살면서 그가 버리는 것을 먹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당연이 부자는 나사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도우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철저하게 외면했었어요. 자기 배만 불리고 나사로한테는 작은 도움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 그는 놀랍게도 아브라함을 보게 되었는데,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 품에 안긴 나사로까지도 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살아생전에 나사로에게 도움을 주었더라면, 이 불구덩이 속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저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그 모습만 보았을 뿐, 그는 영원토록 그 불지옥에서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허무한 축복 소리, 이처럼 남들이 축복 받은 모습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기도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병원에서 내 가족이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주님을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 행할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행함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주님은 그 손길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지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줄은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채워주십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말씀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라고 하는 긴 말씀은 기억하면서. 맨 처음에 나오는 단 두 글자, “주라”라고 하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먼저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10절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6.すると、ペテロは言った。「金銀は私にはない。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あげよう。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
7.そして彼の右手を取って立たせた。するとたちまち、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
8.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そして、歩いたり飛び跳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二人と一緒に宮に入って行った。
9.人々はみな、彼が歩きながら神を賛美しているのを見た。
10.そしてそれが、宮の美しの門のところで施しを求めて座っていた人だと分かると、彼の身に起こったことに、ものも言えないほど驚いた。

무슨 집에 대들보를 뽑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내거나 목돈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내게 있는 것을 주님과 우리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못 걷던 사람이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주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내 눈앞에는 눈부신 모습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 자신이 그 쪽으로 갈 수도 없고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게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이제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우리 이웃을 섬기면서, 단지 실속 없는 공허한 축복의 소리만이 아닌, 진정한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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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4회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2023년 10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5절~28절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5節~28節
“25.しかし今は、聖徒たちに奉仕するために、私はエルサレムに行きます。
26.それは、マケドニアとアカイアの人々が、エルサレムの聖徒たちの中の貧しい人たちのために、喜んで援助をす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27.彼らは喜んでそう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が、聖徒たちに対してそうする義務もあります。異邦人は彼らの霊的なものにあずかったのですから、物質的なもので彼らに奉仕すべきです。
28.それで私はこのことを済ませ、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通ってイスパニアに行くことに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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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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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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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3번째 시간으로서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主の御国の拡張の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일단 본문 말씀을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일단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하는데,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해 후원을 해준 지원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빚진 곳이니까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로마에 먼저 가고자 했었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우선 예루살렘에 먼저 갔다가 그 다음에 로마를 들르고, 그 다음에 서바나, 그러니까 스페인으로 가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상황을 좀 자세히 알기 위해서 각 도시의 대략적인 위치를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지금 바울이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이 로마서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신학자들은 아마도 고린도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이 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 도중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인데, 고린도라고 하는 곳은 지금도 아직 있습니다. 지금 이름은 <코린트>라고 하는데, 그리스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럼 여기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로마, 그리고 스페인의 위치를 본다고 한다면, 단순하게 직선거리로 보아서 고린도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은 동쪽으로 약 1,300킬로, 그리고 로마는 서쪽으로 역시 약 1,300킬로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그 로마에서 더 서쪽으로 1400킬로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까지를 본다면 고린도에서는 로마를 거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단순계산으로 2700킬로가 떨어져 있다는 계산이 됩니다.

본래 바울의 계획은 어디로 가는 것이었다고요? 예,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여행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돕기 위해서 후원금이 모였어요. 그래서 이 후원금을 예루살렘에 가져다 준 다음에 다시 로마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잘 와 닿지가 않을 것 같아서 좀 더 알기 쉽게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고린도가 서울이라고 해봐요. 그리고 예루살렘은 동경입니다. 그러면 로마는 어디냐 하면 중국 북경이라고 하고, 스페인은 몽골이라고 해보죠.

지금 우리는 서울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획은 북경을 지나서 몽골로 가려고 해요. 그런데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동경을 들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서울에서 동경을 들렀다가 다시 북경으로 가서 몽골로 가겠다는 것이에요.

사실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서울 동경 북경 몽골……이렇게 했습니다만, 실제 고린도나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을 본다면 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처럼 무슨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서울에서 북경을 거쳐 몽골로 가려고 하는데, 동경에 먼저 간다고 한다면 완전히 반대 방향이 됩니다. 거기다가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후원금을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그 금액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그래도 손수 가져다 준다고 하는데, 아주 적은 금액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벼운 종이 돈, 지폐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금속으로 된 화폐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그 부피도 그렇고 무게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일본에서는 이틀 정도 전국적으로 타행이체가 안 되는 은행시스템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쪽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해서 저쪽 은행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입금을 시키기도 했다는데, 아무래도 목돈을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이 은행에서 저 은행 정도가 아니지요.

거리도 그렇고 무게도 문제이지만 보안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위험요소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 간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고단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무거운 돈을 들고 다니니까 힘도 들겠지만 안전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위험한 여정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토록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후원금을 전달하려고 했을까요.

사실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복음이 시작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대교와의 마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 하더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로지 교회와 관련된 일이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사회권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종교지도자가 곧 사회지도자였으며, 문화나 관습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는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바울도 젊었을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그랬었는데, 이는 그렇다고 다른 민족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들였다는 것이 됩니다.

비록 바울은 회심해서 이제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바울 자신도 스스로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자기들이 믿는 신앙과 다른 것을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겠지요. 하지만 같은 유대인한테 복음을 전하는 경우에도 역시 핍박을 당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명처럼 지켜왔던 율법을 이제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팔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고, 만약에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할례를 받아야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바울은 어떻게 주장을 합니까.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바울이 말하기를 할례는 이제 마음에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굳이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율법에서는 먹어도 되는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19절에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すべての食物をきよい)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 먹지 못할 음식은 없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한테서도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움이 심해지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갔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은, 비록 그 여정이 험난하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굳이 로마로 가기 전에, 로마와는 정반대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아니,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야말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일을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감당했던 사람 아닌가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본 것처럼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그 정도가 아니에요.

사도행전 19장 12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彼が身に着けていた手ぬぐいや前掛けを、持って行って病人たちに当てると、病気が去り、悪霊も出て行くほどであった。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한테 얹으면 병이 낫기도 하고 악귀도 나갔다는 거예요. 이런 기록은 정말 구약에서의 모세나 엘리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요. 그와 같은 바울이 굳이 산 넘고 물 건너 바다를 건너가며 후원금을 모으고 그리고 그 후원금 배달까지 가야 하나요?

출애굽기 때 보세요. 모세가 바위를 쳤더니 물이 나오기도 했다잖아요. 사실 그런 장면을 그려 놓은 무슨 그림들을 보면 무슨 옹달샘처럼 물이 나오는 것처럼 되어 있는 그림들이 많은데, 아니, 생각해보세요. 그 물로 인해서 당시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셨다는 것 아니에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기 12장 37절에 의하면 성인 남성만이 60만명이었다고 해요. 이를 바탕으로 추정을 하면 남녀노소 전체 인구는 대략 200만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신학자들은 예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바위에서 나온 물로 200만명이 마셨다고 하는데, 그 양이 졸졸졸졸 나오는 정도의 물이었겠어요? 아마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했다기보다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땅에서는 하늘에서든 간에 돈이 펑펑펑펑 쏟아져도 될 법하지 않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후원금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방 지역에서 세운 교회인데 그 사람들이 넉넉해 봐야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서로 없는 가운데에도 한푼 두 푼 모은 후원금일 것이고, 그리고 그 돈을 낑낑 매고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 위험을 무릅쓴 채로 가지고 갔다고 하는 것인데, 굳이 바울이 그래야 했었냐는 것이지요.

설마 하나님의 능력이 광야에서 물은 낼 수 있지만 돈은 못 내시는 분은 아니실 거잖아요.

여기에는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지금 가지고 가고자 하는 <연보>는 단순한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모금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에 바쳐진 헌금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헌금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구약에 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섬긴다는 증거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조공을 바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내가 당신 나라를 섬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열왕기하 17장 4절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しかし、アッシリアの王はホセアの謀反に気がついた。ホセアがエジプトの王ソに使者たちを遣わし、アッシリアの王には年々の貢ぎ物を納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そこで、アッシリアの王は彼を捕らえて牢獄につないだ。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을 때, 북 이스라엘 19대 왕이었던 호세아가 강대국 애굽을 믿고 그 때까지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자 호세아가 무엇을 했다고 해요? 예, 배반을 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6절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あなたのうちの男子はみな、年に三度、種なしパンの祭り、七週の祭り、仮庵(かりいお)の祭りのときに、あなたの神、主が選ばれる場所で御前に出なければならない。主の前には何も持たずに出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하나님을 뵙지 말라, 즉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고 반드시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하나님 말씀을 악용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적지 않게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해서 대전제는 뭐냐 하면, 무조건 많이 내면 복 받고 적게 내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속죄제에 대한 규례를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위기 5장 6절~7절
“6.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7.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6.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ために償いとして、羊の群れの子羊であれ、やぎであれ、雌一匹を主のもとに連れて行き、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のために、罪を除いて宥(なだ)めを行う。
7.しかし、もしその人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償いとして、山鳩(やまばと)二羽あるいは家鳩(いえばと)のひな二羽を主のところに持って行く。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とする。


레위기 5장 11절
“11.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もしその人が、山鳩二羽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さえも手に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なら、自分の罪のために、ささげ物として、十分の一エパの小麦粉を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行く。その人はその上に油を加えたり、その上に乳香を添えたりしてはならない。これ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であるから。

속죄제에서는 양이나 염소를 드려야 하는데, 경제적 여건이 어려우면 비둘기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비둘기를 바치기도 어렵다고 한다면 곡물가루로 바칠 수도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을 바치면 큰 죄도 용서받지만 곡물가루를 바치면 작은 죄만 용서받는다고 하세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그 예물을 받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예물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예,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 주님을 내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통일교 같은 것이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거기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집안이 엉망이 되도록 고액의 돈을 내라고 유도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로 인해서 가정이 파탄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고 해요.

그리고 그런 가정의 피해자 중 하나가 아베 전 총리를 저격한 범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기존 교회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우려되는 일입니다.

돈 많이 내면 많이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각자 형편에 맞게 기쁜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잖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일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수입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맞게, 적은 사람은 역시 그 비율대로 드리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돈을 채워서 목돈을 내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헌금이다 저런 헌금이다 해서 각 지역에 목표금액을 책정하고 어떻게든 거기에 맞추어서 내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다른 이단 사이비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자유가 사라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피해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돈 많이 내야 천국 갈 수 있다” 뭐 이런 말을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데,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에 흔들리게 되고, 천국에 못 갈까봐 괜히 불안해져서, 결국 나쁜 종교 지도자들한테 속아넘어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희도 교회에서 사례비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저희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에도 지금 이 순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선교사님은 탄자니아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고, 또 매주 메일을 보내주시는 한 선교사님께서는 캄보디아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교회들이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당장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가 무슨 장사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하겠습니까.

당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저도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선교후원을 당부하기 위해서 매주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전도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는데, 정말 일면식도 없는 분들께서 해주시는 선교후원 덕분에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들 중에는, 사실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좀 넉넉히 후원을 해주시는 경우에는 참 큰 힘이 되지요.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금액의 경우를 본다면, 이 또한 은혜가 넘칩니다. 이 후원을 해주시는 그 손길에 얼마나 큰 간절함이 있을까 하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친 말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밤을 새고 이른 아침까지 무슨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는데, 지난 2021년……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지요? 2021년 11월 11일 새벽 5시 38분에 전화가 울려요. 왜 정확하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어제 찾아보니까 아직 기록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받아보니까 어느 남자분이신데 처음에는 점잖게 말씀을 하세요. 자기가 어디서 공부를 하고 어디서 학위를 받았고 뭐 그래요.

그런데 느낌이 좀 약주를 한 잔 하신 것 같더라고요.


아니 뭐 약주 한 잔 하신 것 정도가 큰 문제인가요. 그래서 아, 예……하고 듣고 있었는데, 똑 같은 말씀을 반복하는 거예요.

자기가 어디서 공부했고 어디서 학위를 받았고 뭐 그래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더러 자기가 나온 그 학교 신학과를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 알 수 있대요.

마침 그 때 제 아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건 혼자 듣기 아깝다 싶어서 스피커폰을 켜서 같이 듣고 있었지요. 그랬더니 그 자기 이력을 몇 번 반복을 하시더니만, 갑자기 제 학교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 법대를 나왔다는 게 거짓말 아니냐는 거예요. 거기 법대 나와서 목사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체포조를 보내서 저를 잡아가겠다고 막 난리를 치십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더 이상 듣고 있으면 이 분도 쉬지 못하실 것 같아서 그냥 끊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끊은 게 오전 6시 4분이었습니다.

오전 5시 38분부터 6시 4분까지 한 26분 정도 되는 통화였네요.

아마 저 혼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누구는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체포조가 오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만 안 오시더라고요.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사실 들더라고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떤 사이비 종교에 대한 시사방송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교주가 그 법대를 나왔다고 했대요. 그런데 방송국에서 알아보니까 학적부에 그 교주 이름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저도 그런 사람처럼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을 하다가, 메일주소를 쓸 때 일반 메일과 함께 제 학교 메일을 쓰면 어떨까 했어요.

하지만 그걸 보고 오히려 또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는데 하고 제 아내와 상의를 해보니까, 학교 메일 주소도 같이 적어 넣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메일을 보내 드리고 하는 이유는, 물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선교후원을 당부 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전도를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선교후원을 당부 드리면서 죄송한 마음도 있긴 합니다만, 저는 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역을 주님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꼭 저희 교회에 대한 후원만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제2, 제3 그리고 수많은 예루살렘 교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지금도 있으며, 그와 같은 교회들에 대해서 도움을 드리는 손길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리고 분명히 그 손길 위에 넘치는 축복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실 염치 불구하고 매주 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 저희 선교회도 어서 성장해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있는 미자립교회를 후원하고 주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가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의 부흥을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 확장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바로 우리의 손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의 작은 손길로 인해서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을 함께 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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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3회 승자의 조건
2023년 10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2절~24절
“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2節~24節
“22.そういうわけで、私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のを何度も妨げられてきました。
23.しかし今は、もうこの地方に私が働くべき場所はありません。また、イスパニアに行く場合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立ち寄ることを長年切望してきたので、
24.旅の途中であなたがたを訪問し、しばらくの間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て、まず心を満たされてから、あなたがたに送られてイスパニアに行きたいと願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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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2번째 시간으로서 “승자의 조건” 勝者の条件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멋진 인생이란 어떤 인생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자기가 원하는 삶,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굴러가면 그것이 가장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위너, 즉 승자가 되는 것이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루저, 즉 패배자가 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했었다고 해요. 이는 여기서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라 1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바울은 그 동안 로마로 가려고 했었지만 계속해서 길이 막혀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길이 막힌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길이 막혔다고 하기 보다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로마만이 아니라 유럽 끝자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결국 바울은 스페인까지 가지 못한 채 로마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그런 생각 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 바울이 누구입니까. 비록 젊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들이기까지 했습니다만, 그 후에는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絶えず祈りなさい。


그토록 기도를 강조하고 주님과의 교재를 많이 가졌던 바울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사람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고자 했을까요.

예를 들어서 아, 이제 내가 좀 예루살렘을 가고 싶어서, 로마가 좋다고 해서, 아니면 스페인에서 인간적인 결과를 남기기 위해서 가야겠다는 그런 세속적인 희망이나 욕심을 위해서 계획을 세웠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단순한 희망이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정도 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든 일이 다 계획한 대로 술술 풀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다 기도하고 결정한 것일 테니까 더욱 한치의 오차 없이 착착 진행이 되어야 마땅하잖아요.

하지만 성경을 보면 아무래도 그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방금 짧게 살펴본 것처럼 자기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못했던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바울은 병든 사람도 많이 고치고, 그리고 사도행전 20장에 보시면 죽은 청년을 살리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使いについて、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私は三度、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わたしの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自分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肉体のとげ)>에 대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신학자들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지병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죽은 자도 살렸던 바울인데 자기가 앓고 있는 질병 하나 못 고치겠어요? 그런데 그걸 고쳐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정작 자기는 고쳐주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니, 주님의 일을 무엇보다 열성적으로 감당하려 했던 바울인데 몸이라도 성해야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런 기록을 본다면 사도 바울 정도 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도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정말 자기가 원하던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나이가 75세 때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두 번 부르셨지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처음에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두 번째는 하란 땅에서 부르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의하면 하란 땅에서 그가 나왔을 때의 나이가 75세 때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셔서 나왔다고는 하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그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 가뭄이 들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땅을 버리고는 애굽으로 갑니다. 그러자 거기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만 나이는 먹어가는데 자식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는데 이 일로 인해서 가정에 불란이 생깁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납니다만, 이제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혀요. 이로 인해서 사라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내쫓으라고 아브라함한테 성화입니다.

결국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집에서 내보내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상당히 거친 땅이었던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여인과 어린 아이를 내보낸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추방이 아니라 죽으라고 내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거든요.

사라에게 있어서 하갈이나 이스마엘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브라함한테 있어서는, 비록 정실은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이스마엘은 친자식이고 하갈은 그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둘을 말하자면 죽음의 땅으로 내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도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떨까요. 어려서부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랐던 야곱의 아들 요셉은 창세기 37장에 의하면 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산 설고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에 그냥 살아도 어려움이 많을 텐데, 그의 나이 열 일곱 살에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인생 밑바닥 노예로 살아가게 된 요셉. 그런데 그의 역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노예살이를 했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써서 이제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지요.

이런 삶에 대해서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이구, 참 인생이 기구하다. 어떻게 꼬여도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있냐. 그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직 전쟁에도 나갈 수 없는 미성년자일 때 블레셋 용사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전쟁영웅이 되지요.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로부터 시기를 사게 됩니다. 결국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로부터 쫓김을 당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요셉이 무슨 잘못을 했어요. 다윗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런데도 더할 나위 없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다윗을 보면 그들이 원하던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나요? 그렇다고 그들이 패배자인가요?

아니요. 아브라함은 평생동안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 46절에 의하면 요셉은 나이 서른에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2인자가 되어 평생동안 다스리게 되고, 사무엘하 5장 4절에 의하면 다윗 또한 그의 나이 서른에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승자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생에 있어서 승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2장에 보시면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좋은 의미로 본다면 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에 의하면 그는 쌍둥이였는데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형 에서의 발꿈치는 잡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자가 되려고 꾀를 부려 형 에서한테서 장자권을 빼앗게 되고, 나중에는 형이 받으려고 했던 아버지의 상속권까지 가로채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쫓아오지요. 어쩔 수 없이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해서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본가 그러니까 야곱의 외갓집으로 피신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아내 둘을 얻게 되는데, 자기 외삼촌 라반 밑에서 일하면서 자기 재산들을 늘려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참 여러가지 꾀를 부려가며 노력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외삼촌 라반이 곱게 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야곱은 20년 만에 자기가 모아 놓은 전재산과 가족들을 이끌고 도망쳐 나와서는 자신의 고향 가나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걸리는 게 뭐냐 하면 바로 형 에서의 존재입니다.

아무리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에서가 자기에 대한 원한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지금 만나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초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관문이 얍복강가에서 자기 가축이나 재산들을 노예한테 시켜서 앞서 건너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걸 에서한테 먼저 주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한 다음, 두 번째로 자기 가족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자기가 만나겠다고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한 이유는 뭐냐 하면, 자기 재산을 에서에게 바쳐서 그것을 받으면 가족이 안전할 것이요, 만약에 그것을 받기 거부하면 가족이 도망가면 된다는 것이고, 만에 하나 에서가 가족을 해치거나 했다면 그 때 자기가 도망치면 결국 자기는 제일 안전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여러가지로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건너 보내고, 가장 안전한 곳에 자기 혼자 남았을 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창세기 32장 24절~29절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ヤコブが一人だけ後に残ると、ある人が夜明けまで彼と格闘した。
その人はヤコブに勝てないのを見てとって、彼のももの関節を打った。ヤコブのももの関節は、その人と格闘しているうちに外れた。
すると、その人は言った。「わたしを去らせよ。夜が明けるから。」ヤコブは言った。「私はあなたを去らせません。私を祝福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何というのか。」彼は言った。「ヤコブです。」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ヤコブは願って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名を教えてください。」すると、その人は「いったい、なぜ、わたしの名を尋ねるのか」と言って、その場で彼を祝福した。


제가 어떤 방송 보고 있었더니 거기서 누군가가 하는 말이, 이 내용이 도대체 무슨 교훈을 주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는데, 야곱이 워낙 씨름을 잘 하니까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쳤더니, 씨름할 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대요.

날이 밝으려 하자 그 사람이 떠나려고 하니까 야곱이 그 사람한테 말하기를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까 이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고 축복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자, 우선 이 말씀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성경적으로 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야곱의 씨름을 무엇이라고 들으셨습니까. 많은 분들은 이를 두고 야곱의 기도라고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끈질긴 기도에 못 이겨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분의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에 멋진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다……

이렇게 말하면 참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 그럼 기도라는 것이 우리의 고집을 관철시키고 하나님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그 이전에 야곱은 이 씨름으로 인해서 허벅지 뼈가 어긋났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허벅지 뼈가 어긋나는 것인가요? 두 다리가 멀쩡하신 분들은 모두 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본문 내용을 성경적으로 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벌인 씨름을 두고 이를 기도라고 설명한 성경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물며 기도를 열심히 하면 허벅지 뼈나 관절이 상할 수도 있다는 말씀도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 중에 바로 승자가 되는 조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우선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이지요.

호세아 12장 3절~4절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ヤコブは母の胎で兄のかかとをつかみ、その力で神と争った。
御使いと格闘して勝ったが、泣いてこれに願った。ベテルでは神に出会い、神はそこで彼に語りかけた。

야곱이 씨름한 상대는 분명 천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호세아서에는 천사라고 되어 있는데 왜 창세기에는 천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그가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왜 그 사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사실 성경에 보아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사람이 만났을 때,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는 많았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보고도 그를 못 알아보았으며, 사사기 13장에서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도 몰라보았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났을 때에도 마리아가 그를 천사라고 알아보았다는 기록이 없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 빈 무덤에 있던 천사들을 보고도 사람들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면 금방 알아볼 자신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알아보실 수 있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알아보시겠습니까. 어쩌면 대부분의 분들이 그 등에 달린 날개를 보고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룹천사(ケルビム), 둘째는 스랍천사(セラフィム),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룹천사는 천사들 중에서 가장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えが)いて回る炎の剣(つるぎ)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한 다음에 에덴을 지켰던 천사가 바로 그룹천사(ケルビム)인데, 하나님께서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룹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룹천사에는 날개가 있었습니다.


역대하 3장 10절~11절
“10.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혔으니
11.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왼쪽 그룹의 한 날개는 다섯 규빗이니 성전 벽에 닿았고 그 다른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오른쪽 그룹의 날개에 닿았으며”

ソロモンは至聖所の中に、彫像のケルビムを二つ作り、これに金をかぶせた。
ケルビムの翼は、長さが二十キュビトであった。片方のケルビムの一方の翼は五キュビトで、神殿の壁に届いていて、もう一方の翼も五キュビトで、もう片方のケルビムの翼に届いていた。



이는 에스겔이 본 환상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에스겔 10장 16절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ケルビムが行くと輪もそのそばを進み、ケルビムが翼を広げて地上から上るとき輪もそのそばを離れず、向きを変えなかった。

이처럼 그룹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스랍천사(セラフィム)도 마찬가지로 날개가 있습니다.


이사야 6장 2절~3절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セラフィムがその上の方に立っていた。彼らにはそれぞれ六つの翼があり、二つで顔をおおい、二つで両足をおおい、二つで飛んでいて、
互いにこう呼び交わしていた。「聖なる、聖なる、聖なる、万軍の主。その栄光は全地に満ちる。」

그룹천사(ケルビム)는 지키는 천사이고 스랍천사(セラフィム)는 찬양하는 천사인데, 이 두 천사는 각각 날개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는 하나님의 명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자에 대해서는 날개가 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정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볼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야곱도 분명 처음에 씨름을 할 때에는 도대체 내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 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이 되어서야 그 씨름하고 있는 상대방이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 장면에 대해서 우리가 좀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여러분의 국어실력부터 한 번 시험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자, 승자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예, 패자입니다.

그러면 패자의 반대말은? 예, 승자이지요.

이 정도만 아시면 다음에 제가 드리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 야곱의 씨름에 대한 광경을 보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장면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보실까요?


창세기 32장 24절~29절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ヤコブが一人だけ後に残ると、ある人が夜明けまで彼と格闘した。
その人はヤコブに勝てないのを見てとって、彼のももの関節を打った。ヤコブのももの関節は、その人と格闘しているうちに外れた。
すると、その人は言った。「わたしを去らせよ。夜が明けるから。」ヤコブは言った。「私はあなたを去らせません。私を祝福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何というのか。」彼は言った。「ヤコブです。」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ヤコブは願って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名を教えてください。」すると、その人は「いったい、なぜ、わたしの名を尋ねるのか」と言って、その場で彼を祝福した。


자, 여기서 야곱은 어떤 사람, 나중에는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그저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야곱보다 힘이 센 사람인가요? 아니면 약한 사람인가요.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만 본다면 야곱보다 힘이 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는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할 능력까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야곱보다 힘이 약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관절을 어긋나게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승부는 누가 이겼어요?

예, 그 ‘어떤 사람’이 이긴 것 아니겠습니까. 승자는 그 어떤 사람이고, 그럼 승자 반대말은 뭐라고 했지요? 예, 패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야곱더러 패자라고 했나요? 아니요. 야곱더러 이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이와 같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를 다 무시하고 무조건 야곱이 기도를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성경이 말씀해주시는 본래의 뜻을 놓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은 야곱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너무나도 강하게 나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다리를 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라고 말을 하지요. 그런데 그와 같은 야곱을 두고 패자가 아닌 승자라고 합니다.

이를 네 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씨름을 시작, 2. 허벅지 타격, 3, 축복을 구함, 4. 야곱 승리 선언.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2와 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다리를 상하게 했는데 이를 두고 야곱은 그 사람에게 축복할 것을 구합니다.

야곱의 이 태도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순간 야곱은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 그냥 어떤 불량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씨름은 분명 하나님의 사자가 승리하고 야곱은 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곧 야곱의 승리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가 깨달은 것, 그것은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던 상대방은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 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야곱이 에서를 다시 만났을 때의 나이가 몇 살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그 당시 나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나이와 시기를 계산해보며 그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데, 야곱이 에서를 피해 집을 나간 것은 77세였을 때였고, 다시 에서를 만난 나이는 그로부터 20년 뒤인 97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 97세. 그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97년 동안 계속해서 씨름을 해왔습니다. 눈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피하거나 또는 자신의 머리로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기려 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에서 대신 장자가 되었습니까. 외갓집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까. 그 재산들이 다 자기 것이 되었습니까. 대부분 다 에서한테 헌납하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 평생동안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서 씨름을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패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허무한 삶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얍복강에서의 씨름을 통해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기려고 씨름을 했던 상대방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아서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을 하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곧바로 달려가고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행동력으로 그는 승리하는 삶을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력이 있을 때 그는 패배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자기 힘에 의지하여 무조건 기를 쓰고 이기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벅지 뼈가 상하고 이제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33장 1절~3절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ヤコブ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エサウがやって来た。四百人の者が一緒であった。そこで、ヤコブは子どもたちを、レアとラケルと二人の女奴隷の群れに分け、
女奴隷たちとその子どもたちを先頭に、レアとその子どもたちをその後(あと)に、ラケルとヨセフを最後に置いた。
ヤコブは自ら彼らの先に立って進んだ。彼は兄に近づくまで、七回地にひれ伏した。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습니다.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산 뒤에 숨어 있던 야곱, 가족 뒤에 숨어 있던 야곱, 그리고 자기 지혜 뒤에 숨어 있던 야곱이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모두 뒤로 물리쳐 놓고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앞에 나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야곱이었다면 그것이 패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야곱아. 이제서야 네가 승자가 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 힘들고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든 내 힘으로 이겨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래 구덩이에 빠졌을 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패자가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패자가 되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자가 되셨을 때 비로소 우리 또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방법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뜻대로 되는 삶이 멋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요한복음 5장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わたしは、自分からは何も行うことができません。ただ聞いたとおりにさばきます。そして、わたしのさばきは正しいのです。わたしは自分の意志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求めるからです。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이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これらのことをあなたがたに話したの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あって平安を得るためです。世にあっては苦難があります。しかし、勇気を出しなさい。わたしはすでに世に勝ちました。」


예수님이 만약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패자가 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기를 쓰고 이를 악 물고라도 씨름을 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상대방을 땅에 쓰러뜨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엇이 없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순종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까.

좋습니다. 하나님과 한번 씨름을 해 보십시오.

내가 내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이기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승자로 높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의하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동생이 형보다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꼭 그렇게 형을 속이고 그리고 아버지를 속여야만 했습니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이 더 고달파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람의 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겨보려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차라리 형 에서를 존중해주고 배려를 해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훨씬 더 복된 삶이었을 것입니다.

내 허벅지가 다치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빨리 하나님을 이기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이기는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이기게 해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범사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献げる者は わたしをあがめる。 自分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 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る。」

인생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 생각대로 안 됩니까. 그래요. 아브라함도 바울도 자기 뜻대로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패자가 아닌 승자로 기록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먼저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6절~37절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이제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내 승리를 원하시는 주님께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승자로서의 삶, 주님의 이름으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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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2회 어떻게 전할 것인가
2023년 10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21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21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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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1번째 시간으로서 “어떻게 전할 것인가” どのように宣べ伝えるべき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이고, 이 성경말씀을 우리가 올바로 깨닫고 우리 이웃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있어서 색의 삼원색과 빛의 삼원색을 말씀 드리면서, 색의 삼원색처럼 서로 섞으면 섞을수록 시커멓게 변하는 세상적인 방법을 교회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섞으면 섞을수록 환해지는 빛의 삼원색처럼 하나님의 방법, 믿음의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 성경을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믿음의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전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전도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제 막 전도를 나가시려고 할 때 어떤 마음 가짐으로 나가십니까.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예, 물론 그것도 좋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전도를 나갈 때 항상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의 전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익히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그래도 좀 가물가물하다고 하신 분들께서는, 요나서는 4장까지 밖에 없으니까 예배 후에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자, 이 요나서에 의하면 어느 날 갑자기 요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으로 요나서는 시작됩니다.

요나 1장 1절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アミタイの子ヨナ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요나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이가 몇 살이었고 직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를 뜻하는데, 이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비둘기처럼 온순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 때 붙여지는 것인데,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온순하게 생겼다고 해서 커서도 온순합니까. 그리고 또 어느 주석서에 보면 비둘기라고 하는 말에는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어리석다는 뜻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요나는 당시 성인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만, 그 이름의 뜻으로 당시 요나의 성품을 짐작하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비약적인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전반적인 문맥으로 짐작하자면, 아마도 요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놀라거나 하지 않고, 그리고 내용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요나는 어느 날 예고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이 2절이지요?

2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나 1장 2절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이 말씀만으로 본다면 요나에게 명하신 그 내용이,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죄가 많으니까 거기 가서 멸망을 시키라는 뜻인지, 아니면 회개를 시키라는 말씀인지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도록 선포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지고, 그리고 요나도 그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난 다음에 그가 한 행동을 보면,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명을 이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만약에 지금 당장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순종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했냐 하면 의외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나 1장 3절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しかし、ヨナは立って、主の御顔を避けてタルシシュへ逃れようとした。彼はヤッファに下り、タルシシュ行きの船を見つけると、船賃を払ってそれに乗り込み、主の御顔を避けて、人々と一緒にタルシシュへ行こうとした。

당시 다시스라고 하는 지명을 가진 곳은 여럿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는 동쪽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단순히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것과는 정반대 방향, 니느웨가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갔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동쪽에 계시니까 서쪽으로 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다는 뜻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자, 여기까지 일단 본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셨다면 두말 없이 순종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철저하게 불순종한 요나는 대단히 게으르거나 아니면 고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셨던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당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앗수르는 기회만 되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기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한다면 그야말로 할렐루야 하고 기뻐할 것만 같은 그와 같은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미운 나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을 나라가 앗수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해요?

이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떻게 될 수도 있겠습니까.

원래는 니느웨가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 당할 수도 있었는데, 요나가 거기까지 가서 회개를 선포하는 바람에 멸망하지 않았대……만약에 이런 소문이 나중에 이스라엘에 퍼지기라도 해보세요. 이건 완전히 요즘 말로 이적행위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정말 180도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측면, 세상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지극히 타당하다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이와 같은 명령, 이는 세상적인 명령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적인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도 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일을 세상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안 생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요나를 보시니까 아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불이 나게 도망쳐요. 그러면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한 구원계획을 포기하실까요.


아니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동쪽은 육지이지만 서쪽은 바다이기 때문에 서쪽 지역에 있는 다시스까지 가려면 천상 배를 타고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일으켜서 그 요나가 탄 배를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폭풍이 불어 닥쳐서 배는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만 같아요.


아마도 이 배는 작은 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크기였나 봅니다. 그래서 요나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승객만이 아니라 승무원들도 배가 침몰할 까봐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는데 요나는 태연합니다. 그것은 배가 안 뒤집힌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배가 폭풍을 만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이 폭풍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아 보자면서 제비를 뽑자고 해요.

그렇다고 뱃사람들이 폭풍을 만날 때마다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뱃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좀 이상한 점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나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전혀 폭풍이 일어날 계절이 아니었다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는 전혀 폭풍이 올 징조가 없었는데 갑자기 파도가 세졌다거나 하는, 아무튼 좀 수상한 점이 있었는지 제비를 뽑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나가 뽑히지 않았겠어요.

사람들은 요나한테 따집니다. 너 도대체 누군데 너 때문에 이렇게 폭풍이 일어나서 우리까지 죽게 생겼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자 요나는 말합니다.

요나 1장 10절~12절
“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人々は非常に恐れて、彼に「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と言った。人々は、ヨナが彼らに告げたことによって、彼が主の御顔を避けて逃れ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知ったからである。
彼らはヨナに言った。「私たちのために海が静まるようにするには、あなたをどうすればよいのか。」海がますます荒れてきたからである。
ヨナは彼らに言った。「私を抱え上げて、海に投げ込みなさい。そうすれば、海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静かになるでしょう。私は分かっています。この激しい暴風は、私のせいであなたがたを襲ったのです。」


요나는 말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라. 나 때문에 폭풍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긴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는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요나는 큰 물고기가 잡아먹어서 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동물이든 물고기든 간에 잡아 먹히게 되면 그 강한 소화액으로 인해서 금방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살아있게 되고 그 캄캄한 곳에서 홀로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되지요.

이제 어쩌겠습니까.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사흘 뒤에 물고기가 요나를 뱉어내자 그는 터벅터벅 니느웨를 향하여 걸어갑니다.


이제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 그가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자, 제가 지금 여기까지, 그야말로 요나서 본문보다도 길게 설명해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에 강제로 끌려와서 회개를 선포하는 요나의 마음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요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해서, 니느웨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이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냥 마지못해, 죽지 못해 그저 무거운 발걸음을 걸어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참 묘한 일이 생깁니다.

조금 길지만 요나 3장을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요나 3장 1절~10절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再びヨナ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わたしがあなたに伝える宣言をせよ。」
ヨナは、主のことばのとおりに、立ってニネベに行った。ニネベは、行き巡るのに三日かかるほどの非常に大きな都であった。
ヨナはその都に入って、まず一日分の道のりを歩き回って叫んだ。「あと四十日すると、ニネベは滅びる。」
すると、ニネベの人々は神を信じ、断食を呼びかけ、身分の高い者から低い者まで粗布をまとった。
このことがニネベの王の耳に入ると、彼は王座から立ち上がって、王服を脱ぎ捨てて粗布をまとい、灰の上に座った。
そして、王と大臣たちの命令によって、次のような布告がニネベに出された。「人も家畜も、牛も羊もみな、何も味わってはならない。草をはんだり、水を飲んだりしてはならない。
人も家畜も、粗布を身にまとい、ひたすら神に願い、それぞれ悪の道と、その横暴な行いから立ち返れ。
もしかすると、神が思い直してあわれみ、その燃える怒りを収められ、私たちは滅びないですむかもしれない。」
神は彼らの行いを、すなわち、彼らが悪の道から立ち返ったのをご覧になった。そして神は彼らに下すと言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し、それを行われなかった。


3절에 보시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한 성읍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3일 정도를 걸어야지만 성읍 전체를 돌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그런데 요나는 얼마나 돌았어요? 사흘을 돌았나요?

아니요. 아직 하루 밖에 안 돌았어요. 그리고 그가 외친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あと四十日すると、ニネベは滅びる。」 라고 하는, 정말 최소한의 말씀만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단 하루밖에 안 돌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것도 일반 주민들 만이 아니라 니느웨 왕까지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아니, 잠깐만요. 니느웨가 어떤 곳이었대요? 무슨 의인들이 살고 믿음이 좋고 신실한 그런 성읍이었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가리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나 1장 2절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니느웨가 얼마나 악에 가득 찼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고 하잖아요. 그야말로 소돔이나 고모라 같은 죄로 물든 성읍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 거기서 요나가 전도를 합니다.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가 어땠겠습니까. 성경에는 <외쳤다>라고 되어 있긴 합니다만, 솔직히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이토록 소극적인 외침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겉으로는 마지못해 회개를 <외쳤다>라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어땠겠습니까. 이 나쁜 나라, 어서 망해버려라……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아직 3분의 1밖에 안 돌았어요. 몸도 제대로 풀리지 않을 정도인데, 그 큰 성읍, 죄에 물든 니느웨가 위에는 우두머리인 니느웨 왕부터 시작해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전도 관련 부흥회도 실제로 가보기도 하고 영상으로 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만, 대부분 보면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어떤 식으로 집 문을 열게 해서 교회 전단지를 건네느냐 하는 방법이거나, 아니면 싫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얼마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결국은 교회에 나오게 하느냐 하는 말씀을 주로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흥강사와 요나를 두고 보았을 때, 이 두 사람이 전도에 있어서 간증을 하게 된다면 어느 쪽이 더욱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총 동원해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전도를 한 결과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경우와, 반면에 자신은 어떻게 보면 소극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전도밖에 한 것이 없는데 회개와 은혜의 바람이 불어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하는 경우를 본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사람의 노력이 강조될 수 있겠으나, 요나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한국이나 일본에 보더라도 끈질기게 전도를 해서 성장한 교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하지만, 동경의 어느 한국인 교회의 경우,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공략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도 수가 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는 전도 방법이고 교회 성장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14절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神はみこころのままに、あなたがたのうちに働いて志を立てさせ、事を行わせてくださる方です。
すべてのことを、不平を言わずに、疑わずに行いなさ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역시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해당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서로 안 좋은 소리가 오간다 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도 사람의 힘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된다면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을 높이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사람의 생각, 사람의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들 때에는 이 요나의 전도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전도도 그렇고 선교도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요,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 는 데에 그 초점이 맞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방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그리고 주의 소식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깨닫게 되기 위한 복음 전도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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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1회 무엇을 전할 것인가
2023년 9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21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21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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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0번째 시간으로서 “무엇을 전할 것인가” 何を宣べ伝えるべき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본문 내용에 있어서도 전해드려야 할 부분이 좀 많기 때문에 시간관계상 이번주와 다음 주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0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이 구절은 바울의 전도방법에 있어서의 원칙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가 고백하기를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 그러니까 이미 신앙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 평생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바울 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사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졌습니다.

그 때 당시 유대교는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도행전 10장을 시작으로 해서 이제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고, 뿐만 아니라 성령님까지 임하시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선교회의 선교 방침에 따라서 계획적으로 파송을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바울 당시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지 아직까지는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누가 어느 쪽을 담당하고 누가 어느 지역에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마도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과정에 있어서 바울은 혹시라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 곳에까지 굳이 자신이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세우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이는 성경에 적혀 있는 내용이고, 성경은 성경무오, 그러니까 성경에는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경에 적힌 내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아멘……하고 믿을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휴, 그렇게 해서 언제 교회가 성장하겠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교회가 좀 시원찮다거나 하면 내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게 뭐 잘못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신천지는 더 하지요. 이른바 산 옮기기라고 해서 기존 교회에 침투해서 거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켜서 교회를 갈라지게 만들고는, 그 성도들을 모두 자기 교회로 옮겨 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뭐, 이런 이단 집단에서 하는 행태를 비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만, 문제는 뭐냐 하면 일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친구사이나 아는 사이인 사람이, 기왕이면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걸 잘못이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교회라고 한다면 꼭 내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교회에서나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 곳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오게끔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유, 그러니까 멀쩡하게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회로 데려오고 싶어해요. 그렇다고 가족이나 친구나 친인척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왜 자기 교회로 그렇게 데려오고 싶어할까요. 어쩌면 그것은 성과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본다면 이른바 전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 이름이 <전도왕>이라고 하지요? 이 말을 그대로 풀어서 보면 무슨 뜻이에요? 전도를 많이 하면 왕 대접을 해주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보더라도 매년 전도왕을 뽑고는 상을 주는데 그 날은 한복을 입고 나와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상과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 기억에 보면 대체적으로 여자분들이 많이 받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남자분들은 평일에는 대부분 출근을 하니까, 여자분들 중에서 주부이신 분들이 아마도 많이 상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도한 전도 대상자에 대해서 본다면, 전도한 사람의 숫자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반면에 그 전도 대상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도해서 자기 교회로 데려온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오게 된 것인지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교역자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전도하는 사람에 대해서 할당량이 있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전도대상자에 대한 명단을 제출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십니까. 교회 복음화와 부흥을 위해서 참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물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교회에 나오겠다고 한다거나, 아니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좀 이런저런 이유로 다니기가 어려워졌다고 했을 때, 그 때 자기 교회로 함께 나온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멀쩡히 지금 건전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기 교회로 데리고 나온다? 이건 아니지요. 세상에 이런 전도방법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 할당량이 있고 전도대상자 명단을 정기적으로 작성해서 제출한다? 저 이런 말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동차 영업 사원을 하고 있는 지인한테서 똑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이 분은 자동차를 판매해야 하는데, 당연히 팔아야 할 목표량이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자동차 구매대상자를 정기적으로 작성해서 회사에 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하는 말이, 제 이름도 거기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저는 아직 면허도 안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되냐고 되물으니까 상관 없다는 거예요.

그래요. 뭐, 자동차나 세상 일은 그렇다고 해요. 하지만 이를 그대로 교회에서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소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짠 소금과 짜지 않은 소금입니다.

짠 맛이 있는 소금은 쓸모가 있지만,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쓸모가 없어서 내버려지고 사람들한테 발로 밟힐 뿐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소금이라고 한다면 그냥 조미료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당시에 소금이라고 하면 대단히 귀한 것이어서, 당시에는 로마 군인들이 소금을 월급으로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라틴어로 소금이 sals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샐러리가 되고, 이를 받는 사람들이 샐러리맨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소금을 그냥 소금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우리 그냥 알기 쉽게 돈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든지 아니면 사업을 해서 수익을 얻든지 해서 돈을 벌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 돈이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보면 돈이 땅바닥에 마구 버려진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실제로 있는 나라에요. 그러면 여기는 대단히 잘 사는 나라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나라일까요?

돈이 땅바닥에 마구 버려져도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단히 부자 나라인 것처럼 생각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긴 어디냐 하면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여기는 과거에 대통령이 자신의 사치생활을 위해 돈을 부분별 하게 찍어내는 바람에 그 화폐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어디까지 떨어지냐 하면 100만도 100억도 아닌 100조…… 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숫자인지 감이 잡히세요? 0이 무려 14개나 됩니다. 그런데 그 100조 짐바브웨 달러로 살 수 있는 것은 고작 달걀 3개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뭐 돈이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말 그대로 땅에 버려져도 아무도 줍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금은 그 돈이 아예 없어지고 미국 달러를 차용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은 대단히 귀한 것이지만 그 가치가 없어지면 말 그대로 땅에 버려져서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금은 음식 안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소금을 음식 안에 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소금을 먹기 위해서요? 아니요. 음식을 맛이 있게 하기 위해서 소금을 넣는 것이지요.

소금을 넣음으로써 음식이 맛있어진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소금으로 인해서 다른 음식만이 변화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은 소금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설렁탕을 가끔 먹곤 했었습니다만, 소금을 안 넣은 설렁탕을 생각해보세요. 그걸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하지만 소금을 조금 넣게 되면 참 구수하고 진짜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소금이 녹아서 그 짠맛으로 인해 주변 음식 맛을 변화시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금을 아무리 넣어도 짠맛이 안 나요. 짜지도 녹지도 않고, 무슨 모래처럼 어그적 어그적 씹히기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걸 누가 먹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이처럼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세상 방법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면 이게 어떻게 되냐 하는 것이지요.

믿음의 방법과 세상 방법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미술 쪽에 보면 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이 있습니다.

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달라요. 예를 들어서 물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감을 섞으면 섞을수록 어떻게 됩니까. 예, 섞으면 섞을수록 어두워지죠. 색의 3원색은 빨강, 파랑, 노랑이 있는데, 이를 서로 섞으면 여러 가지 색이 나오지만 본래 빨강, 파랑, 노랑색보다는 진한 색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깔을 다 섞으면 어떻게 되죠? 예, 시커멓게 되고 말지요. 이게 감색혼합, 그러니까 색이 줄어드는 혼합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빛의 3원색은 어떻습니까.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색조명을 서로 섞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섞으면 섞을수록 빛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을 가진 조명을 다 섞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하얀 색깔의 빛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 것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을 섞어 놓으면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이 시커멓게 물들어 가게 돼요. 거기에는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메말라 가요.

하지만 하늘에서 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섞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하얗게 됩니다. 우리 주변이 변화되어 환하게 밝아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두웠던 우리 주변이 환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오늘 본문 다음 구절 로마서 15장 21절 말씀이 됩니다.


로마서 15장 21절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그렇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 주변이 변하여 환해지게 되면 그 때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인지, 둘째로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첫번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우리는 무엇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경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 성경도 모르고 무조건 하라고 하니까 전도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직히 본다면 우리나라 성경수준은 참 심각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몇 년 전 어떤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분은 권사님이라고 하셨는데, 짧은 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사님 답게 품위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고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입니다.

그 메일 내용은 뭐였냐 하면, 제가 보내 드리는 선교소식을 읽으시고 우리 교회를 좀 돕고 싶은데,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가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안타깝게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다면서 이해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권사님 말씀, 맞아요? 틀려요?

옛날에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하다가 저한테 대뜸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야,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 말을 하고는 그 친구녀석도 생각하기를, 자기도 자기가 말해 놓고 좀 이상했나보죠? 눈을 껌뻑껌뻑 뜨고 저를 처다 보더라고요? 그리고 듣는 저도 이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고 해서 갸우뚱 했었습니다.


“입이 열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여러분, 이게 맞는 말이에요? 아니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와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를 이상하게 합쳐 놓은 말인 것이죠.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두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지금 매주 기도로 그리고 물질로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면 그 분들은 성경 말씀을 어기고 계신 것인가요?

후원해주시는 분들 중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그리고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후원해주시는 곳도 계신데, 그렇다면 그 목사님이나 교회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누가복음 16장 13절 중에서 우선 전반부부터 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전반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どんなしもべ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

그러면 이 말씀이 두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뜻이냐 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6장 13절 후반부에는 뭐라고 적혀있는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후반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냐 돈이냐가 아닌, 앞서 말씀 드린 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처럼 세상 방법과 믿음의 방법을 똑같이 존중할 수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두 교회를 섬길 수 없다고 해석한다면, 그것도 권사님이 그것도 목사한테 보내는 메일에 그렇게 적으실 정도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는 그렇다고 그 권사님 한 분을 탓하려고 한다거나, 무슨 선교후원을 안 해 주셔서 서운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고 직분을 받을 정도의 성도님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적지 않게 계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우려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전해야 할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지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부터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면, 제가 항상 드리는 구절 있지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이 말씀에 대해서만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면 그 말씀이 귀한 말씀이요, 그 발걸음이 복된 걸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님들을 보면 가끔 기독교 서적이나 기독교 영화를 많이 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그게 잘못이라고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음식으로 따지자면 주식이 아니라 간식이에요.

예를 들어서 십계 같은 영화의 경우, 성경 말씀을 모르고 보면 정말 멋진 영화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알고 난 다음에 보니까, 이건 성경을 무시하고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바꿔 놓고 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어서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십계라는 영화가 명화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쩌면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설교말씀도 그래요. 예전에 성경을 잘 몰랐을 때에는, 그저 말씀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그리고 유머감각 있게 하시는 설교가 좋은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말씀들을 들으니까, 그렇게 설교하시는 어떤 분의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주로 말씀하시고 계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그 전까지는 주목하지 않았던 다른 목사님이, 비록 말씀을 조용하게 하시고 유머는 좀 없다 하더라도 정말 하나하나가 성경에 맞는 훌륭한 말씀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우리 이웃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며, 우리 이웃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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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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