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회 사도 바울을 본받아
2023년 12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1절~24절
“21.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없음)”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1節~24節
“21.私の同労者テモテ、また私の同胞、ルキオとヤソンとソシパテロ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23.私と教会全体の家主であるガイオも、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市の会計係エラストと兄弟クアルトも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4.(な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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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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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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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2번째 시간으로서 “사도 바울을 본받아” 使徒パウロを見倣って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중에서 일단 24절에 대한 부분부터 말씀을 드릴까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이 로마서 16장 24절에 대해서, 성경에 따라서는 주가 달려 있는 경우도 있을 텐데, 여기에 보시면 “2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합니다.

24.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현재 성경은 구약 신약을 불문하고 원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사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복사기도 많고 하기 때문에 어떤 책에 대한 사본을 만들기는 쉬운 일입니다만, 과거에는 당연히 그런 것이 없었고, 무슨 복사기 이전에 인쇄술 자체도 없었기 때문에, 사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그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본 중에는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도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그것보다는 사본을 보고 또 그것을 베껴 쓴 사본, 그리고 또 그 사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사본들이 훨씬 많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시 성경 사본을 만드는 작업은 아무나 하지 못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기 위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오랜 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그리고 단순한 사본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로도 번역되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아무래도 세부적으로 차이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사실 지금 한국어 성경 하나만 보더라도 개역개정, 개역한글,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쉬운 성경 등등, 그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에 영어성경은 대표적인 것만으로도 NIV, NASB, KJV, 일본어 성경은 구어역, 신개역, 신개역2017, 신공동역 등등 참으로 다양하지요.

물론 성경 원본은 하나이지만, 지금 한 시대에도 이렇게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백 년,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글자 수 하나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 번역본에 따라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번역본에 있어서 어떤 성경은 가치가 있고 어떤 성경은 가치가 떨어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인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이 로마서 16장 24절을 안 넣는 것이 일반적이긴 합니다만, 일부 성경 사본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기 때문에 참고로 난외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이 난외주에 기록된 2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든 이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는 내용을 넣게 되면, 사실 여기서 본문 내용이 끝나게 됩니다.

24.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있는 내용, 25절~27절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일부 신학자들은, 사실 원래는 24절에서 끝났는데, 25절~27절은 나중에 추가된 부분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원본에는 과연 25절~27절까지가 적혀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이 중요하게 되는데,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24절을 넣어야 한다거나, 25절~27절 부분을 빼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논쟁은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들한테 맡겨 놓기로 하고, 우리는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내용 대로 살펴보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번 강해에서는 24절은 제외하고 공부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21절~23절까지를 다시 보시도록 할까요.

로마서 16장 21절~23절
“21.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1節~27節
21.私の同労者テモテ、また私の同胞、ルキオとヤソンとソシパテロが、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23.私と教会全体の家主であるガイオも、あなたがたに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市の会計係エラストと兄弟クアルトもよろしくと言っています。

여기서 우리 잠시 복습을 해볼까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를 지나 동쪽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로마서 16장 3절에 등장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지요?

사도행전 18장 2절에 의하면 이 부부는 로마, 그러니까 고린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서쪽에 있는 로마에서 고린도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서쪽 로마에서 온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동쪽에서 온 바울을 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부와 바울은 잠시 고린도에서 지내다가 에베소로 함께 건너가게 되지요.

그리고 바울은 다시 고린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우리가 이미 공부해서 아는 바와 같이, 로마서 16장 3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그 때 다시 로마에 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홀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나 하면, 이미 그에게는 또다른 사역자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이 사람들을 본다면 그 명단이 오늘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성경에서 본다면 그 정보양이 적어서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대부분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등장하는 디모데 정도입니다.

디모데는 정말 오랫동안 바울과 사역을 함께 하면서 큰 도움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외의 사람들은 솔직히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누구는 알아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생각해보세요. 이 로마서가 기록된 시기를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서기 56~57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가까이 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 이름이 2천년 뒤에까지 남아서, 사람들이 자기들 이름을 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솔직히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겠습니다만, 지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름이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과연 우리의 이름이 2000년 뒤에까지 남아 있을까요?

2000년 뒤, 그러니까 서기 4000년 경에 누군가가 내 이름을 듣는다면, 아, 그 사람, 하고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드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0년전 한국에 있었던 왕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2천년 전 일본에 있었던 왕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세상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상대방을 죽이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비석도 세우고 하면서 자기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비석들은 부서지고 낡아지고 대부분이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라고 해봐야 몇몇 전문가들이나 보는 고전 역사서에나 기록되어 있겠지요. 그리고 쓸쓸히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왕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권력싸움을 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나라를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이나 그들의 이름들이 수많은 성경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이 세상에 있는 성경책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나라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しかし、霊どもがあなたがたに服従することを喜ぶのではなく、あなたがたの名が天に書き記されていることを喜びなさい。」


요한계시록 3장 5절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勝利を得る者は、このように白い衣を着せられる。またわたしは、その者の名をいのちの書から決して消しはしない。わたしはその名を、わたしの父の御前と御使いたちの前で言い表す。


이 땅에 이름이 남아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땅에 아무리 자기의 큰 동상을 세워봐야 주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귀하게 여겨 주시고,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22절입니다.

로마서 16장 22절
“22.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2.この手紙を筆記した私テルティオも、主にあってあなたがたにごあいさつ申し上げます。

이 말씀에 보면 갑자기 어느 한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이 <더디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앞에 등장했던 다른 사람처럼 단순한 동역자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라고 하지 않아요?

느닷없이 깜짝 등장한 이 더디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사실 이 사람의 이름은 역시 신구약을 통틀어 여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가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는 분명합니다. 바로 대필을 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바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사람이 바로 더디오라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른바 바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 중에서 대필을 한 것은 로마서만이 아닙니다.

현재 신학자들이 바울서신으로 꼽는 것은 총 13권이 있습니다만, 이 중에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 이렇게 네 권은 바울이 대부분의 내용을 대필하도록 했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빌레몬서를 넣을 것이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최소한 이 네 권,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는 아마도 대부분을 바울이 말을 하고 이를 다른 사람이 받아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다음 성경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1절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골로새서 4장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あいさつを記します。……

여기서 보면 각각 “친필로 기록한다”가 아니라 바울이 “친필로 문안한다”고 되어 있는 점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좀 직역을 해본다면, “나 바울은 직접 내 손으로 이 인사말을 씁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바울 서신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문안인사 부분이 나오는데, 이 문안 인사 부분은 나 바울이 직접 썼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을 뒤집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이 문안인사 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자기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 썼다는 것을 뜻한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바울이 글을 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일까요?

아니,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전에 하던 일이 무슨 어부였다거나 아니면 목자였다거나 하면 글을 읽고 쓰는 데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청년 관료 출신입니다. 지금으로 본다면 고시를 패스한 수준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대에 있어서는 그래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필을 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무슨 육체적인 어려움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신학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고린도후서 12장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이 부분을 들어서 아마도 바울은 당시 어떤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렇다면 무슨 병을 앓고 있었을까.

사실 그 구체적인 병명을 알지는 못하더라도, 과연 어떤 증상을 앓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요.

그래서 바울이 서한들을 대필하도록 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 스스로가 긴 글을 쓰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바울 본인이 밝히고 있는 이와 같은 육체의 가시 즉 질병에서 오는 증상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추정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있어서 일부 신학자들은 아마도 안질, 그러니까 눈의 질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기 전인 바울, 그 때는 아직 사울이라는 이름이었는데, 그는 당시 청년관료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 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ところが、サウロが道を進んでダマスコの近くまで来たとき、突然、天からの光が彼の周りを照らした。

그는 이 빛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그 이후 3일 동안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3일 후에 아나니아의 기도를 받고 또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는데, 당시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3절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その途中のこと、王様、真昼に私は天からの光を見ました。それは太陽よりも明るく輝いて、私と私に同行していた者たちの周りを照らしました。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의 그 빛이 해보다도 더 밝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강렬한 빛 때문에 바울의 눈에 질병이 생겨서 시력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대부분의 서한을 대필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바울의 구체적인 증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냥 단순히 신학자들이 추정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으로 본다면 어떨까요.

일단 바울은 글을 읽거나 쓰는 데에 있어서 그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적어도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그리고 이 로마서는 대필을 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유는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육체적인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어디가 불편했을까.

글을 쓰기 어려울 정도의 육체적인 질병이라면 단순히 눈이나 손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에 위와 같은 기록들이 있었으니까 아마도 눈에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추정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로마서를 제외한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의 경우에는, 다른 부분은 대필을 하도록 하긴 했지만, 마지막 문안 인사 부분만은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는 바울 자신의 서한이라고 인정을 했다는, 말하자면 글 마지막 부분에 하는 서명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 글을 쓰는 데에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화룡점정, 마지막 문안인사 부분은 바울이 직접 씀으로 인해서 그 서한을 완성시켰다고 본다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이 로마서는 어떻습니까.

다른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이 세 권과는 달리 이 로마서는 마지막에 있는 문안인사까지도 바울이 아닌 더디오라는 인물이 기록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기록은 13권의 바울서신 중에서도 이 로마서가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유독 로마서만 끝까지 그 기록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까요.

그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바울 선생님을 만났을 때 여쭤봐야지만 알 수 있는 부분이겠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첫째로 바울은 여러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에도 마지막 문안인사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기록할 정도로 이 문안인사 부분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둘째로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부분을 직접 쓰지 못할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이와 같은 점은 우리가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중요한 마지막 부분을 쓰지 못할 정도의 사정이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이는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그야말로 바울 자신이 쇠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짧은 글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주님의 일을 포기하려고 했나요?

아니요. 우리가 이미 공부했잖아요? 바울은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다고 해요.

마게도니야와 아가야 사람들이 모아준 연보를 예루살렘에 전달해주고 난 다음에 다시 정 반대방향인 로마에까지 가겠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예전에 제가 회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배운 것 중 하나가, 회사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바쁘다”는 말이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어서 누가 나한테 언제까지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약속한 그 날까지 하지 못했어요.


그럼 상대방은 왜 못했냐고 물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때, “아, 제가 좀 바빠서요……”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상대방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자기만 바쁘고 다른 사람은 다 한가한 줄 알아?

당연히 그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아, 물론 정말로 바쁠 때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때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내일 임원회의가 있는데 여기에 쓸 회의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 며칠째 밤을 새고 있어요……아니면 내일 제출해야 할 제안서가 있어서 다른 일들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라고 상대방한테 설명을 하면, 상대방도 그래, 나도 뭐 그럴 때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냥 바빠서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몸이 안 좋아서요? 먹고 살기가 바빠서요?

여러분, 바울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몸이 좀 피곤해서, 이래저래 바빠서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육체적인 어려움, 외적인 난관이 닥쳐와도 바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으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만약에 이 말이 맞다면 바울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열심히 수고하는 사람들은 쓸데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이 말씀.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 절대로 빼앗기는 일이 없다면 굳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실 성경을 본다면 천국에 바울이 못 간다면 누가 가겠습니까. 회심한 후 바울은 평생동안 주님의 일을 열정적으로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바울도 자신은 내가 이만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제 안심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께서 주실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누워 있겠습니까. 쉬고만 있겠습니까.

아니면, 바울 앞에서 내가 좀 바빠서요, 그러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겠습니까.

그만큼 쉬었으면 이제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일어설 때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발을 내디딜 때인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私に倣う者となってください。


고린도전서 11장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私がキリストに倣う者であるように、あなたがたも私に倣う者でありなさい。

이제 우리를 기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이제부터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날까지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의 일을 힘차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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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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