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2회 지혜로운 삶
2023년 12월 10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9절~20절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19節~20節
“19.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20.平和の神は、速やかに、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サタンを踏み砕いてくださいます。どうか、私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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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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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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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1번째 시간으로서 “지혜로운 삶” 賢い人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두 구절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사실 이는 별개가 아니라 연결된 한 내용으로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19절


“19.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19.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の耳に届いています。ですから、私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が、なお私が願うのは、あなたがたが善にはさとく、悪にはうとくあることです。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20절


“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0.平和の神は、速やかに、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サタンを踏み砕いてくださいます。どうか、私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이와 같은 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사탄은 우리 힘으로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럼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면, 바로 19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잠시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우선 마태복음을 잠시 보실까요?


마태복음 10장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いいですか。わたしは狼の中に羊を送り出すようにして、あなたがたを遣わします。ですから、蛇のように賢く、鳩のように素直でありなさい。

오늘 19절에 나오는 <미련하다>라고 하는 뜻은 이 구절에 나오는 <순결>이라는 단어와 같은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미련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무식하다거나 어리석다고 하는 부정적인 뜻이라기 보다는 <순결하다, 순진하다>라는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예를 들어서 무슨 불법 마약을 사는 방법이라거나 아니면 불법 도박을 하는 장소 같은 것을 모른다고 무식한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런 것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좀 이상한 것이지, 그런 것과 관련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면 모르는 것이 나쁘다기 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비슷한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兄弟たち、考え方において子どもになってはいけません。悪事においては幼子でありなさい。けれども、考え方においては大人になりなさい。

이 말씀과 오늘 본문 중 19절 말씀을 같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한 데에 있어서는 장성한 어른처럼 지혜롭고, 악한 데는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라, 순진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반대 아니겠습니까. 선한 데는 미련하고 오히려 악한 데에 지혜롭습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죠.

창세기 8장 21절 중반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人の心が思い図ることは、幼いときから悪であるからだ。……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시면 어떻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는 데에는 아주 교묘한지 몰라요.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힌 방법으로 사기를 칩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무슨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기 치는 방법을 배웠겠어요?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사기를 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을 빼앗습니다.

정말 악한 데에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몰라요.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읽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은 선한 데에 지혜롭고 악한 데에는 좀 미련하라, 순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반대로 그렇게도 나쁜 데에는 지혜롭고 선한 데에는 미련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런데 문득 그런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실까요.

성경은 마지막 날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지막 날은 언제라고 성경에는 적혀 있습니까.


일본에 어디 보니까 중요한 것은 다섯 번 말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섯 구절만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です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日、その時をあなたがたは知らないのですから。


마태복음 24장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ただし、その日、その時がいつなのかは、だれも知りません。天の御使いたちも子も知りません。ただ父だけが知っておられます。

사도행전 1장 7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いつとか、どんな時とかいうことは、あなたがたの知るところ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父がご自分の権威をもって定めておられることです。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しかし、主の日は盗人のようにやって来ます。その日、天は大きな響きを立てて消え去り、天の万象は焼けて崩れ去り、地と地にある働きは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


요한계시록 16장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見よ、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裸で歩き回って、恥ずかしい姿を人々に見ら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目を覚まして衣を着ている者は幸いである──

어느 정도 연배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1992년에 일어난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1992년 10월 28일날 휴거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고 뭐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아니,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주님은 말씀 하셨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안다고 하니 이게 무엇입니까.

그건 성경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도 그리고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하니 이처럼 알기 쉬운 이단이 어디 있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기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피해, 재산적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또 조만간 이 시한부 종말론은 분명 다시 고개를 듭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거든요.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면 그저 막연한데,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면 정말 믿기 쉬워질 것 같잖아요.

그래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본다면 주기적으로 이 시한부종말론이 등장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말을 잘하고 그리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성경과 다르면 그건 99%도 아닙니다. 100% 이단입니다.


이는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절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요, 만약 이를 따르게 되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왜 마지막 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분명히, 그것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0장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もうしばらくすれば、来たるべき方が来られる。遅れることはない。

언제 오신다고요? 예, 잠시 잠깐 후면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씀은 성경 후반에 가면 갈수록 더욱 절박하게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イエス・キリストの黙示。神はすぐに起こるべきことをしもべたちに示すため、これをキリストに与えられた。そしてキリストは、御使いを遣わして、これをしもべヨハネに告げられた。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는 요한계시록은 벌써 1장 1절부터 속히 일어난다고 시작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1장에 이어 3장에 또다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면 갈수록 이 긴박함은 더해갑니다.

요한계시록이 몇 장까지 있지요? 예, 22장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22장에 보시면 마지막 날이 언제 임할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6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御使いは私に言った。「これらのことばは真実であり、信頼できます。」預言者たちに霊を授ける神である主は、御使いを遣わして、すぐに起こるべきことをしもべたちに示された。


요한계시록 22장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この書の預言のことばを守る者は幸いである。」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これらのことを証しする方が言われる。「しかり、わたしはすぐに来る。」アーメン。主イエスよ、来てください。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에 보시면 처음으로 애굽 왕 바로 앞에 선 요셉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왕의 꿈에 대한 해설을 이 요셉이 하게 되는데 그는 이제부터 7년 동안 풍년이 있고 난 다음에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하게 되지요.

이 상황에서 요셉은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창세기 41장 32절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夢が二度ファラオに繰り返されたのは、このことが神によって定められ、神が速やかにこれをなさるからです。


사실 바로는 같은 날 밤에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말하기를 그 꿈이 갖는 의미는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보여주셨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두 번이요? 아니요.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요한계시록에만 보더라도 여섯 번,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장에만 보더라도 네 번이나 등장합니다.


아니, 두 번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하나님께서 일을 정하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이처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이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그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사실, 주님께서는 이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되겠지요.

그 중에는 여럿이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삶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재산을 얻기를 원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면서, 이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알면서도 잘 지킬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내 욕심 때문 아니겠습니까.

일단 내 배가 부른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든 이웃을 섬기든 할 것 아니야……하면서 어떻게 해요?

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이웃을 섬기지도 않은 채, 그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남은 시간이 없어요. 주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면 돈을 받아요. 그런데 그 돈의 화폐가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말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돈에 대해서 욕심을 갖겠습니까.

이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얻을 명예에 대한 욕심을 갖겠습니까.

다니엘 서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서 이 세상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니엘 2장 34절~35절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あなたが見ておられると、一つの石が人手によらずに切り出され、その像の鉄と粘土の足を打ち、これを粉々に砕きました。
そのとき、鉄も粘土も青銅も銀も金も、みなともに砕け、夏の脱穀場の籾殻のようになり、風がそれを運んで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そして、その像を打った石は大きな山となって全土をおおいました。

이 세상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세상을 다스리고 싶은 권력에 대한 욕심을 갖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겠지요.

오히려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오로지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편 43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わがたましいよ なぜ おまえはうなだれているのか。 なぜ 私のうちで思い乱れているのか。 神を待ち望め。 私はなおも神をほめたたえる。 私の救い 私の神を。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를 떠나 우리에게 허락된 날이 언제까지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수명이 아무리 오래 남았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100년 뒤까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날이 어쩌면 수십년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의외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가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날이 속히 온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그것도 반복적으로 하신 이유는, 우리가 불안에 떨면서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어떤 삶입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삶이야말로 선한 데에 지혜롭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선한 데에 지혜롭고 악한 데에 미련한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 크나큰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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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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