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5회 축복과 축복소리
2023년 10월 22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9절~33절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9節~33節
“29.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ちあふれて行くことになると分かっています。
30.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また、御霊の愛によってお願いします。私のために、私とともに力を尽くして、神に祈ってください。
31.私がユダヤにいる不信仰な人々から救い出され、エルサレムに対する私の奉仕が聖徒たち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
32.また、神のみこころにより、喜びをもっ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き、あなたがたとともに、憩いを得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祈ってください。
33.どうか、平和の神が、あなたがたすべてとともにい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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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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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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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4번째 시간으로서 “축복과 축복소리” 祝福と祝福の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본문 내용을 살펴본 다음에 전반적인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9절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9절
“29.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9節
“29.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とき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ちあふれて行くことになると分かっています。

바울은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1장 11절~12절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바울은 1장에서부터 이미 로마로 가는 목적을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믿음을 강하게 하여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축복, 그리고 영적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무슨 초자연적인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무슨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바위에서 물을 내기 위해서 가나요? 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유람 서커스단이니지요.

진정한 영적인 축복과 영적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으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이방인들은 사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해요. 하나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면 꿈에서 예수님이 보이고 그렇습니까. 그게 주님을 만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1장 11절에 나오는 <신령한 은사(御霊の賜物)>라고 하는 말씀은 15장 29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キリストの祝福)>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즉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전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요?

로마서 15장 30절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0.兄弟たち。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また、御霊の愛によってお願いします。私のために、私とともに力を尽くして、神に祈ってください。

그 부탁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두 가지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31절입니다.


우선 첫째로 31절 전반부를 볼까요?

로마서 15장 31절 전반부
“31.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31.私がユダヤにいる不信仰な人々から救い出され、

자,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에 앞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했었지요? 그게 뭐였지요?

예, 바로 예루살렘에 가는 일이었지요?

복습하는 의미로 25절~26절, 그리고 28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먼저 25절~26절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しかし今は、聖徒たちに奉仕するために、私はエルサレムに行きます。
それは、マケドニアとアカイアの人々が、エルサレムの聖徒たちの中の貧しい人たちのために、喜んで援助をす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그리고 28절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それで私はこのことを済ませ、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通ってイスパニアに行くことにします。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모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먼저 갔다가, 그 다음에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 의하면 “이 헌금을 안전하게 전한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헌금을 무사히 잘 예루살렘에 전한 다음에 로마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교와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는 율법을 중요시하는 유대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동안에, 유대에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 즉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기도제목은 31절 후반부이지요.

로마서 15장 31절 후반부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エルサレムに対する私の奉仕が聖徒たちに受け入れられるように、

이 부분에 대해서 현대인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의 섬기는 일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자신이 가지고 가는 이 연보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기쁘게 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만, 일부 신학자들은 이방지역에서 온 지원을 그들이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가 어쩌면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외 기타 사정에 의한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기껏 이방 사람들이 정성 들여 헌금을 해주었고, 그리고 바울도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게 가져갔는데 이를 거절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를 무사히 잘 전달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 일이 모두 잘 마무리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로마로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본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말씀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우선 여러분께 한 번 확인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자, 주님께 드리는 기도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기도를 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 감사합니다.

사실, 성경에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기록이 넘쳐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るために、互いに罪を言い表し、互いのために祈りなさい。正しい人の祈りは、働くと大きな力があります。

그리고 주님께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何かをわたしに求めるなら、わたしがそれをしてあげます。

이외에도 기도는 능력이 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그 기도는 반드시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했다고 합니다.

음?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러면 기도를 하면 되지 왜 연보를 했을까요. 괜히 연보를 하는 바람에 본래 로마로 가려던 바울의 계획에도 완전히 반대방향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야 하는 차질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2.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돈이 넘쳐나서.
3. 기타.

예, 제가 드리는 문제의 선택지 중에서 “기타”가 있으면 그게 답일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정답은 3번 “기타”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왜 1번과 2번이 정답이 아니다 하는 점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게도냐 사람들과 아가야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연보를 모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죠.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생각하기를,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만약에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냥 덥석 받아 왔겠습니까.

아무리 돈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믿음이 부족했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우선 믿음부터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말하기를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연보를 했다고 하고, 그리고 그 연보를 스스로 예루살렘까지 가져다 주겠다고 한다면, 이는 그 사람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연보를 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둘째로, 그렇다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돈이 넘쳐났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지요?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교회도 아닌, 이제 막 세워지기 시작한 그것도 이방지역에 있는 교회인데, 자금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한푼 두 푼 모은 연보일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연보를 했을까요. 기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도 아니요,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했던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힌트는 다음 부분에 있습니다.

자, 지금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은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들은 결코 넉넉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보를 했어요.

그런데 이 편지는 지금 누구한테 쓰고 있는 것이었요? 예,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이었다고 한다면 로마에 대해서는 어떤 부탁을 해야 했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도움이 필요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없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연보를 했는데, 로마에서도 좀 도와줄 수 없겠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로부터 받은 연보를 예루살렘에 가져가면서 로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연보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부탁했지요? 예,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고린도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과 로마 사이에 있어요. 고린도에서 봤을 때 예루살렘은 동쪽에 있고 로마는 서쪽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로마는 완전히 반대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연보를 하겠다고 한다면, 바울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들고 서쪽 저 멀리 있는 로마까지 갔다가 다시 고린도를 거쳐서 예루살렘까지 가야 합니다.

그것도 이제는 로마에서 모은 연보까지 들고 가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만약에 바울이 지금 있는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데 그 도중에 로마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한테도 연보를 부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지리적으로만 보아도 그 먼 거리를 그것도 부피나 무게도 만만찮은 현금을 들고 왕래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고,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무엇보다 예루살렘에 대한 도움이 늦어질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대한 도움이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로마에 대해서 일단 지금은 기도로 도와 달라고 당부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있었는데, 로마에 대해서는 연보를 당부하지 않고 기도만 당부했던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에 대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로마 사람들은 연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라고 하는 말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인 있으신 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나 누군가가 무엇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면, 그 대답이 뭐예요?

예, “기도해보겠습니다”라는 말, 들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세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 솔직해 집시다. 싫다는 것 아니에요? 안 하겠다는 것이잖아요.

지금 세계 정세를 보면 2023년 10월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은 2년째 이어지고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는 지금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사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정말 하루 빨리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해달라고 그야말로 기도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 눈 앞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가 있고, 나한테는 그래도 입을 옷과 먹을 것이 있는데, 그 사람 앞에서 “아이고 불쌍하네요. 기도할게요” 라는 말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야고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17절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私の兄弟たち。だれかが自分には信仰があると言っても、その人に行いがないなら、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信仰がその人を救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兄弟か姉妹に着る物がなく、毎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ようなときに、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その人たち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にな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っても、からだに必要な物を与え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
同じように、信仰も行いが伴わないなら、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


내가 정말 기도밖에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내 이웃을 위해 도울 수 있다면 우선 그 직접적인 도움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기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난다면 이는 그야말로 행함이 없은 믿음, 즉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 보면 <しわい屋>라고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디에 구두쇠 한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구두쇠인지, 맨날 식사 때만 되면 집 앞에 있는 장어집에 가요. 요즘은 그런 곳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는 가게 앞에서 장어를 굽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가게 앞에서 장어를 구우면 연기가 많이 나고 냄새도 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 구두쇠는 끼니때만 되면 그 장어집 앞에 가서 그 장어 굽는 냄새를 맡고 집에 와서는 그 냄새를 떠올리면서 밥을 먹었다고 해요.

참 대단한 구두쇠죠?

그런데 이 장어집 주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구두쇠가 자기네 가게에서 장어는 안 사 먹으면서, 맨날 장어 굽는 냄새 만으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하면, 월말에 가서 돈을 청구하기로 한 것이죠.

이제 월말이 되었길래 한 달치 장어 값을 받아내려고 직원을 그 구두쇠 집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구두쇠는, 아니 내가 장어를 사 먹은 적이 없는데 무슨 돈을 받으려 왔느냐 하고 당연히 놀라지요.

그랬더니 그 직원이 하는 말이, 맨날 저희 집 앞에 와서 냄새만 맡고는 그 냄새로 식사를 하신다고 하기에 저의 주인님이 그 냄새값을 받아오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이 구두쇠가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더니만, 알았다고 하고는 뒤에 가서 돈을 꺼내 오더래요. 옛날이니까 종이 이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엽전을 꺼내면서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라고 하니까, 갑자기 그 엽전을 바닥에 뿌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와장창 소리가 났을 거 아니에요?

그걸 보고 그 직원이, 아니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만, 이 구두쇠 하는 말이, 나는 냄새만 맡았으니까 너도 돈 떨어지는 소리만 듣고 가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에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어요.


물론 주님은 구두쇠가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구하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道端に一本のいちじくの木が見えたので、そこに行って見ると、葉があるだけで、ほかには何もなかった。それでイエスはその木に「今後いつまでも、おまえの実は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すると、たちまちいちじくの木は枯れた。

마치 우리로부터 믿음의 열매를 얻기 위해 오셨지만, 정작 우리는 잎사귀 밖에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우리가 행함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우리가 말로 때우거나 하는 시늉만 하면서 주님께 냄새만 풍기게 하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실제로 축복은 받지 못하고 축복 받는 소리만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축복은 받지 못했는데, 축복 받는 소리만 듣는 경우가 성경에 있을까 했는데, 아이구, 있더라고요.

누가복음 16장에 보시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26절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ある金持ちがいた。紫の衣や柔らかい亜麻布を着て、毎日ぜいたくに遊び暮らしていた。
その金持ちの門前には、ラザロという、できものだらけの貧しい人が寝ていた。
彼は金持ちの食卓から落ちる物で、腹を満たしたいと思っていた。犬たちもやって来ては、彼のできものをなめていた。
しばらくして、この貧しい人は死に、御使いたち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懐に連れて行かれた。金持ちもまた、死んで葬られた。
金持ちが、よみで苦しみながら目を上げると、遠くにアブラハムと、その懐にいるラザロが見えた。
金持ちは叫んで言った。『父アブラハムよ、私をあわれんでラザロをお送りください。ラザロが指先を水に浸して私の舌を冷やすようにしてください。私はこの炎の中で苦しくてたまりません。』
するとアブラハムは言った。『子よ、思い出しなさい。おまえは生きている間、良いものを受け、ラザロは生きている間、悪いものを受けた。しかし今は、彼はここで慰められ、おまえは苦しみもだえている。
そればかりか、私たちとおまえたちの間には大きな淵がある。ここからおまえたちのところへ渡ろうとしても渡れず、そこから私たちのところへ越えて来ることもできない。』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 앞에 살면서 그가 버리는 것을 먹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당연이 부자는 나사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도우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철저하게 외면했었어요. 자기 배만 불리고 나사로한테는 작은 도움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 그는 놀랍게도 아브라함을 보게 되었는데,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 품에 안긴 나사로까지도 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면, 살아생전에 나사로에게 도움을 주었더라면, 이 불구덩이 속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저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그 모습만 보았을 뿐, 그는 영원토록 그 불지옥에서 괴로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허무한 축복 소리, 이처럼 남들이 축복 받은 모습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기도밖에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병원에서 내 가족이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주님을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 행할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행함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주님은 그 손길을 기쁘게 받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지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줄은 많은 분들이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채워주십니까.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も与えられます。詰め込んだり、揺すって入れたり、盛り上げたりして、気前良く量って懐に入れてもらえます。あなたがたが量るその秤で、あなたがたも量り返してもらえるからです。」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말씀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라고 하는 긴 말씀은 기억하면서. 맨 처음에 나오는 단 두 글자, “주라”라고 하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먼저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겠습니까.


사도행전 3장 6절~10절
“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6.すると、ペテロは言った。「金銀は私にはない。しかし、私にあるものをあげよう。ナザレ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
7.そして彼の右手を取って立たせた。するとたちまち、彼の足とくるぶしが強くなり、
8.躍り上がって立ち、歩き出した。そして、歩いたり飛び跳ねたりしながら、神を賛美しつつ二人と一緒に宮に入って行った。
9.人々はみな、彼が歩きながら神を賛美しているのを見た。
10.そしてそれが、宮の美しの門のところで施しを求めて座っていた人だと分かると、彼の身に起こったことに、ものも言えないほど驚いた。

무슨 집에 대들보를 뽑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빚을 내거나 목돈을 바치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내게 있는 것을 주님과 우리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못 걷던 사람이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고 주님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내 눈앞에는 눈부신 모습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 자신이 그 쪽으로 갈 수도 없고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게 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이제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우리 이웃을 섬기면서, 단지 실속 없는 공허한 축복의 소리만이 아닌, 진정한 축복,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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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4회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2023년 10월 15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5절~28절
“25.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5節~28節
“25.しかし今は、聖徒たちに奉仕するために、私はエルサレムに行きます。
26.それは、マケドニアとアカイアの人々が、エルサレムの聖徒たちの中の貧しい人たちのために、喜んで援助をすることにしたからです。
27.彼らは喜んでそうすることにしたのですが、聖徒たちに対してそうする義務もあります。異邦人は彼らの霊的なものにあずかったのですから、物質的なもので彼らに奉仕すべきです。
28.それで私はこのことを済ませ、彼らにこの実を確かに渡してから、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通ってイスパニアに行くことに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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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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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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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3번째 시간으로서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主の御国の拡張の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일단 본문 말씀을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일단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하는데,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해 후원을 해준 지원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빚진 곳이니까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로마에 먼저 가고자 했었지만, 이런 사정 때문에 우선 예루살렘에 먼저 갔다가 그 다음에 로마를 들르고, 그 다음에 서바나, 그러니까 스페인으로 가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상황을 좀 자세히 알기 위해서 각 도시의 대략적인 위치를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지금 바울이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이 로마서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신학자들은 아마도 고린도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이 로마서는 3차 전도여행 도중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인데, 고린도라고 하는 곳은 지금도 아직 있습니다. 지금 이름은 <코린트>라고 하는데, 그리스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럼 여기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로마, 그리고 스페인의 위치를 본다고 한다면, 단순하게 직선거리로 보아서 고린도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은 동쪽으로 약 1,300킬로, 그리고 로마는 서쪽으로 역시 약 1,300킬로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은 그 로마에서 더 서쪽으로 1400킬로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페인까지를 본다면 고린도에서는 로마를 거쳐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단순계산으로 2700킬로가 떨어져 있다는 계산이 됩니다.

본래 바울의 계획은 어디로 가는 것이었다고요? 예,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여행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돕기 위해서 후원금이 모였어요. 그래서 이 후원금을 예루살렘에 가져다 준 다음에 다시 로마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잘 와 닿지가 않을 것 같아서 좀 더 알기 쉽게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고린도가 서울이라고 해봐요. 그리고 예루살렘은 동경입니다. 그러면 로마는 어디냐 하면 중국 북경이라고 하고, 스페인은 몽골이라고 해보죠.

지금 우리는 서울에 있습니다. 그리고 계획은 북경을 지나서 몽골로 가려고 해요. 그런데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동경을 들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서울에서 동경을 들렀다가 다시 북경으로 가서 몽골로 가겠다는 것이에요.

사실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서울 동경 북경 몽골……이렇게 했습니다만, 실제 고린도나 예루살렘, 로마, 스페인을 본다면 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처럼 무슨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지금 서울에서 북경을 거쳐 몽골로 가려고 하는데, 동경에 먼저 간다고 한다면 완전히 반대 방향이 됩니다. 거기다가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후원금을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그 금액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그래도 손수 가져다 준다고 하는데, 아주 적은 금액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벼운 종이 돈, 지폐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금속으로 된 화폐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그 부피도 그렇고 무게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일본에서는 이틀 정도 전국적으로 타행이체가 안 되는 은행시스템 장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쪽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해서 저쪽 은행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입금을 시키기도 했다는데, 아무래도 목돈을 들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바울의 경우는 이 은행에서 저 은행 정도가 아니지요.

거리도 그렇고 무게도 문제이지만 보안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위험요소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 간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고단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무거운 돈을 들고 다니니까 힘도 들겠지만 안전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위험한 여정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그토록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후원금을 전달하려고 했을까요.

사실 예루살렘이라고 하면 복음이 시작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적지 않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유대교와의 마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 하더라도,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로지 교회와 관련된 일이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사회권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종교지도자가 곧 사회지도자였으며, 문화나 관습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종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이는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박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바울도 젊었을 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그랬었는데, 이는 그렇다고 다른 민족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들였다는 것이 됩니다.

비록 바울은 회심해서 이제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바울 자신도 스스로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자기들이 믿는 신앙과 다른 것을 전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겠지요. 하지만 같은 유대인한테 복음을 전하는 경우에도 역시 핍박을 당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명처럼 지켜왔던 율법을 이제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팔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율법에 규정되어 있고, 만약에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할례를 받아야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바울은 어떻게 주장을 합니까.

로마서 2장 28절~29절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外見上のからだの割礼が割礼ではないからです。
かえって人目に隠れた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御霊による心の割礼こそ割礼だからです。その人への称賛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ます。

바울이 말하기를 할례는 이제 마음에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굳이 예전처럼 직접적으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율법에서는 먹어도 되는 음식,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19절에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すべての食物をきよい)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 먹지 못할 음식은 없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한테서도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움이 심해지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갔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신앙의 중심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은, 비록 그 여정이 험난하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굳이 로마로 가기 전에, 로마와는 정반대인 예루살렘에 먼저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아니,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야말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일을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감당했던 사람 아닌가요.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기적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본 것처럼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만, 그 정도가 아니에요.

사도행전 19장 12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彼が身に着けていた手ぬぐいや前掛けを、持って行って病人たちに当てると、病気が去り、悪霊も出て行くほどであった。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한테 얹으면 병이 낫기도 하고 악귀도 나갔다는 거예요. 이런 기록은 정말 구약에서의 모세나 엘리야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요. 그와 같은 바울이 굳이 산 넘고 물 건너 바다를 건너가며 후원금을 모으고 그리고 그 후원금 배달까지 가야 하나요?

출애굽기 때 보세요. 모세가 바위를 쳤더니 물이 나오기도 했다잖아요. 사실 그런 장면을 그려 놓은 무슨 그림들을 보면 무슨 옹달샘처럼 물이 나오는 것처럼 되어 있는 그림들이 많은데, 아니, 생각해보세요. 그 물로 인해서 당시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셨다는 것 아니에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기 12장 37절에 의하면 성인 남성만이 60만명이었다고 해요. 이를 바탕으로 추정을 하면 남녀노소 전체 인구는 대략 200만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신학자들은 예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바위에서 나온 물로 200만명이 마셨다고 하는데, 그 양이 졸졸졸졸 나오는 정도의 물이었겠어요? 아마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했다기보다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땅에서는 하늘에서든 간에 돈이 펑펑펑펑 쏟아져도 될 법하지 않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후원금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방 지역에서 세운 교회인데 그 사람들이 넉넉해 봐야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서로 없는 가운데에도 한푼 두 푼 모은 후원금일 것이고, 그리고 그 돈을 낑낑 매고 고린도에서 예루살렘까지 위험을 무릅쓴 채로 가지고 갔다고 하는 것인데, 굳이 바울이 그래야 했었냐는 것이지요.

설마 하나님의 능력이 광야에서 물은 낼 수 있지만 돈은 못 내시는 분은 아니실 거잖아요.

여기에는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지금 가지고 가고자 하는 <연보>는 단순한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모금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에 바쳐진 헌금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헌금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구약에 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섬긴다는 증거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조공을 바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내가 당신 나라를 섬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열왕기하 17장 4절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しかし、アッシリアの王はホセアの謀反に気がついた。ホセアがエジプトの王ソに使者たちを遣わし、アッシリアの王には年々の貢ぎ物を納めなかったからである。そこで、アッシリアの王は彼を捕らえて牢獄につないだ。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 있을 때, 북 이스라엘 19대 왕이었던 호세아가 강대국 애굽을 믿고 그 때까지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자 호세아가 무엇을 했다고 해요? 예, 배반을 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6절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あなたのうちの男子はみな、年に三度、種なしパンの祭り、七週の祭り、仮庵(かりいお)の祭りのときに、あなたの神、主が選ばれる場所で御前に出なければならない。主の前には何も持たずに出てはならない。

하나님께서는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하나님을 뵙지 말라, 즉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고 반드시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하나님 말씀을 악용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적지 않게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해서 대전제는 뭐냐 하면, 무조건 많이 내면 복 받고 적게 내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속죄제에 대한 규례를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위기 5장 6절~7절
“6.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7.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6.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ために償いとして、羊の群れの子羊であれ、やぎであれ、雌一匹を主のもとに連れて行き、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のために、罪を除いて宥(なだ)めを行う。
7.しかし、もしその人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自分が陥っていた罪の償いとして、山鳩(やまばと)二羽あるいは家鳩(いえばと)のひな二羽を主のところに持って行く。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とする。


레위기 5장 11절
“11.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もしその人が、山鳩二羽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さえも手に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なら、自分の罪のために、ささげ物として、十分の一エパの小麦粉を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して持って行く。その人はその上に油を加えたり、その上に乳香を添えたりしてはならない。これ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であるから。

속죄제에서는 양이나 염소를 드려야 하는데, 경제적 여건이 어려우면 비둘기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집안형편이 비둘기를 바치기도 어렵다고 한다면 곡물가루로 바칠 수도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을 바치면 큰 죄도 용서받지만 곡물가루를 바치면 작은 죄만 용서받는다고 하세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그 예물을 받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예물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예,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 주님을 내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통일교 같은 것이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거기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집안이 엉망이 되도록 고액의 돈을 내라고 유도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일로 인해서 가정이 파탄하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고 해요.

그리고 그런 가정의 피해자 중 하나가 아베 전 총리를 저격한 범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기존 교회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우려되는 일입니다.

돈 많이 내면 많이 축복 받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각자 형편에 맞게 기쁜 마음으로 드리라고 하잖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일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수입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맞게, 적은 사람은 역시 그 비율대로 드리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돈을 채워서 목돈을 내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헌금이다 저런 헌금이다 해서 각 지역에 목표금액을 책정하고 어떻게든 거기에 맞추어서 내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다른 이단 사이비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되면 믿음으로 자유가 사라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피해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돈 많이 내야 천국 갈 수 있다” 뭐 이런 말을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데,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에 흔들리게 되고, 천국에 못 갈까봐 괜히 불안해져서, 결국 나쁜 종교 지도자들한테 속아넘어가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희도 교회에서 사례비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저희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에도 지금 이 순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도 어떤 선교사님은 탄자니아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고, 또 매주 메일을 보내주시는 한 선교사님께서는 캄보디아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교회들이 굳건히 서기 위해서는 당장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가 무슨 장사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하겠습니까.

당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겠지요.

사실 저도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선교후원을 당부하기 위해서 매주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전도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는데, 정말 일면식도 없는 분들께서 해주시는 선교후원 덕분에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분들 중에는, 사실 물론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좀 넉넉히 후원을 해주시는 경우에는 참 큰 힘이 되지요.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금액의 경우를 본다면, 이 또한 은혜가 넘칩니다. 이 후원을 해주시는 그 손길에 얼마나 큰 간절함이 있을까 하는 그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친 말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밤을 새고 이른 아침까지 무슨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는데, 지난 2021년……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지요? 2021년 11월 11일 새벽 5시 38분에 전화가 울려요. 왜 정확하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어제 찾아보니까 아직 기록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받아보니까 어느 남자분이신데 처음에는 점잖게 말씀을 하세요. 자기가 어디서 공부를 하고 어디서 학위를 받았고 뭐 그래요.

그런데 느낌이 좀 약주를 한 잔 하신 것 같더라고요.


아니 뭐 약주 한 잔 하신 것 정도가 큰 문제인가요. 그래서 아, 예……하고 듣고 있었는데, 똑 같은 말씀을 반복하는 거예요.

자기가 어디서 공부했고 어디서 학위를 받았고 뭐 그래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더러 자기가 나온 그 학교 신학과를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서 알 수 있대요.

마침 그 때 제 아내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건 혼자 듣기 아깝다 싶어서 스피커폰을 켜서 같이 듣고 있었지요. 그랬더니 그 자기 이력을 몇 번 반복을 하시더니만, 갑자기 제 학교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 법대를 나왔다는 게 거짓말 아니냐는 거예요. 거기 법대 나와서 목사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체포조를 보내서 저를 잡아가겠다고 막 난리를 치십니다.

그래서 어쩌겠어요. 더 이상 듣고 있으면 이 분도 쉬지 못하실 것 같아서 그냥 끊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끊은 게 오전 6시 4분이었습니다.

오전 5시 38분부터 6시 4분까지 한 26분 정도 되는 통화였네요.

아마 저 혼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누구는 거짓말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체포조가 오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만 안 오시더라고요.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사실 들더라고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떤 사이비 종교에 대한 시사방송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교주가 그 법대를 나왔다고 했대요. 그런데 방송국에서 알아보니까 학적부에 그 교주 이름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저도 그런 사람처럼 보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을 하다가, 메일주소를 쓸 때 일반 메일과 함께 제 학교 메일을 쓰면 어떨까 했어요.

하지만 그걸 보고 오히려 또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는데 하고 제 아내와 상의를 해보니까, 학교 메일 주소도 같이 적어 넣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메일을 보내 드리고 하는 이유는, 물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선교후원을 당부 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전도를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선교후원을 당부 드리면서 죄송한 마음도 있긴 합니다만, 저는 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역을 주님께서 원하고 계시다는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꼭 저희 교회에 대한 후원만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제2, 제3 그리고 수많은 예루살렘 교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지금도 있으며, 그와 같은 교회들에 대해서 도움을 드리는 손길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리고 분명히 그 손길 위에 넘치는 축복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실 염치 불구하고 매주 메일을 보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 저희 선교회도 어서 성장해서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있는 미자립교회를 후원하고 주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아가가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의 부흥을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 확장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바로 우리의 손을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의 작은 손길로 인해서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을 함께 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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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3회 승자의 조건
2023년 10월 8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2절~24절
“22.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2節~24節
“22.そういうわけで、私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のを何度も妨げられてきました。
23.しかし今は、もうこの地方に私が働くべき場所はありません。また、イスパニアに行く場合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立ち寄ることを長年切望してきたので、
24.旅の途中であなたがたを訪問し、しばらくの間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て、まず心を満たされてから、あなたがたに送られてイスパニアに行きたいと願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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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2번째 시간으로서 “승자의 조건” 勝者の条件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멋진 인생이란 어떤 인생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마다 개인차는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자기가 원하는 삶,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굴러가면 그것이 가장 멋진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위너, 즉 승자가 되는 것이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루저, 즉 패배자가 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떨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 가려고 했었다고 해요. 이는 여기서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라 1장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바울은 그 동안 로마로 가려고 했었지만 계속해서 길이 막혀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길이 막힌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길이 막혔다고 하기 보다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로마만이 아니라 유럽 끝자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바나 즉 스페인까지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결국 바울은 스페인까지 가지 못한 채 로마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그런 생각 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니, 바울이 누구입니까. 비록 젊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들이기까지 했습니다만, 그 후에는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私は、あなたがたのだれよりも多くの異言で語っていることを、神に感謝しています。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絶えず祈りなさい。


그토록 기도를 강조하고 주님과의 교재를 많이 가졌던 바울이었다고 한다면 그가 사람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고자 했을까요.

예를 들어서 아, 이제 내가 좀 예루살렘을 가고 싶어서, 로마가 좋다고 해서, 아니면 스페인에서 인간적인 결과를 남기기 위해서 가야겠다는 그런 세속적인 희망이나 욕심을 위해서 계획을 세웠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단순한 희망이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을 것이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정도 되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든 일이 다 계획한 대로 술술 풀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다 기도하고 결정한 것일 테니까 더욱 한치의 오차 없이 착착 진행이 되어야 마땅하잖아요.

하지만 성경을 보면 아무래도 그러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방금 짧게 살펴본 것처럼 자기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못했던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바울은 병든 사람도 많이 고치고, 그리고 사도행전 20장에 보시면 죽은 청년을 살리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9절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その啓示のすばらしさのため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は肉体に一つのとげ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は私が高慢にならないように、私を打つためのサタンの使いです。
この使いについて、私から去らせてくださるようにと、私は三度、主に願いました。
しかし主は、「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わたしの力は弱さのうちに完全に現れるから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ですから私は、キリストの力が私をおおうために、むしろ大いに喜んで自分の弱さを誇りましょう。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肉体のとげ)>에 대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신학자들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지병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죽은 자도 살렸던 바울인데 자기가 앓고 있는 질병 하나 못 고치겠어요? 그런데 그걸 고쳐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정작 자기는 고쳐주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니, 주님의 일을 무엇보다 열성적으로 감당하려 했던 바울인데 몸이라도 성해야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런 기록을 본다면 사도 바울 정도 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도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정말 자기가 원하던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바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의 나이가 75세 때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두 번 부르셨지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처음에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두 번째는 하란 땅에서 부르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의하면 하란 땅에서 그가 나왔을 때의 나이가 75세 때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셔서 나왔다고는 하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그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 가뭄이 들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 땅을 버리고는 애굽으로 갑니다. 그러자 거기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만 나이는 먹어가는데 자식이 안 생깁니다. 그래서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는데 이 일로 인해서 가정에 불란이 생깁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납니다만, 이제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혀요. 이로 인해서 사라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내쫓으라고 아브라함한테 성화입니다.

결국 그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집에서 내보내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상당히 거친 땅이었던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여인과 어린 아이를 내보낸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추방이 아니라 죽으라고 내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거든요.

사라에게 있어서 하갈이나 이스마엘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브라함한테 있어서는, 비록 정실은 아니더라도 어찌 되었든 이스마엘은 친자식이고 하갈은 그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둘을 말하자면 죽음의 땅으로 내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도 자기가 계획한 대로 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떨까요. 어려서부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랐던 야곱의 아들 요셉은 창세기 37장에 의하면 그의 나이 열 일곱 살 때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산 설고 물 설고 낯선 이국 땅에 그냥 살아도 어려움이 많을 텐데, 그의 나이 열 일곱 살에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인생 밑바닥 노예로 살아가게 된 요셉. 그런데 그의 역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노예살이를 했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써서 이제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지요.

이런 삶에 대해서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아이구, 참 인생이 기구하다. 어떻게 꼬여도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있냐. 그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아직 전쟁에도 나갈 수 없는 미성년자일 때 블레셋 용사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전쟁영웅이 되지요.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당시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울로부터 시기를 사게 됩니다. 결국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울로부터 쫓김을 당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요셉이 무슨 잘못을 했어요. 다윗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런데도 더할 나위 없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다윗을 보면 그들이 원하던 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나요? 그렇다고 그들이 패배자인가요?

아니요. 아브라함은 평생동안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 46절에 의하면 요셉은 나이 서른에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애굽의 2인자가 되어 평생동안 다스리게 되고, 사무엘하 5장 4절에 의하면 다윗 또한 그의 나이 서른에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승자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생에 있어서 승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2장에 보시면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좋은 의미로 본다면 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25장에 의하면 그는 쌍둥이였는데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형 에서의 발꿈치는 잡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자가 되려고 꾀를 부려 형 에서한테서 장자권을 빼앗게 되고, 나중에는 형이 받으려고 했던 아버지의 상속권까지 가로채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쫓아오지요. 어쩔 수 없이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해서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본가 그러니까 야곱의 외갓집으로 피신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아내 둘을 얻게 되는데, 자기 외삼촌 라반 밑에서 일하면서 자기 재산들을 늘려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참 여러가지 꾀를 부려가며 노력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외삼촌 라반이 곱게 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야곱은 20년 만에 자기가 모아 놓은 전재산과 가족들을 이끌고 도망쳐 나와서는 자신의 고향 가나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걸리는 게 뭐냐 하면 바로 형 에서의 존재입니다.

아무리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에서가 자기에 대한 원한을 아직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지금 만나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초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관문이 얍복강가에서 자기 가축이나 재산들을 노예한테 시켜서 앞서 건너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걸 에서한테 먼저 주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한 다음, 두 번째로 자기 가족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자기가 만나겠다고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한 이유는 뭐냐 하면, 자기 재산을 에서에게 바쳐서 그것을 받으면 가족이 안전할 것이요, 만약에 그것을 받기 거부하면 가족이 도망가면 된다는 것이고, 만에 하나 에서가 가족을 해치거나 했다면 그 때 자기가 도망치면 결국 자기는 제일 안전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여러가지로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건너 보내고, 가장 안전한 곳에 자기 혼자 남았을 때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창세기 32장 24절~29절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ヤコブが一人だけ後に残ると、ある人が夜明けまで彼と格闘した。
その人はヤコブに勝てないのを見てとって、彼のももの関節を打った。ヤコブのももの関節は、その人と格闘しているうちに外れた。
すると、その人は言った。「わたしを去らせよ。夜が明けるから。」ヤコブは言った。「私はあなたを去らせません。私を祝福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何というのか。」彼は言った。「ヤコブです。」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ヤコブは願って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名を教えてください。」すると、その人は「いったい、なぜ、わたしの名を尋ねるのか」と言って、その場で彼を祝福した。


제가 어떤 방송 보고 있었더니 거기서 누군가가 하는 말이, 이 내용이 도대체 무슨 교훈을 주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는데, 야곱이 워낙 씨름을 잘 하니까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쳤더니, 씨름할 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대요.

날이 밝으려 하자 그 사람이 떠나려고 하니까 야곱이 그 사람한테 말하기를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까 이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고 축복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자, 우선 이 말씀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성경적으로 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야곱의 씨름을 무엇이라고 들으셨습니까. 많은 분들은 이를 두고 야곱의 기도라고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끈질긴 기도에 못 이겨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분의 말씀에 의하면 마지막에 멋진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다……

이렇게 말하면 참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 그럼 기도라는 것이 우리의 고집을 관철시키고 하나님을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그 이전에 야곱은 이 씨름으로 인해서 허벅지 뼈가 어긋났다고 하잖아요.

그럼 기도를 열심히 하면 허벅지 뼈가 어긋나는 것인가요? 두 다리가 멀쩡하신 분들은 모두 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본문 내용을 성경적으로 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벌인 씨름을 두고 이를 기도라고 설명한 성경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물며 기도를 열심히 하면 허벅지 뼈나 관절이 상할 수도 있다는 말씀도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 중에 바로 승자가 되는 조건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우선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는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이지요.

호세아 12장 3절~4절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ヤコブは母の胎で兄のかかとをつかみ、その力で神と争った。
御使いと格闘して勝ったが、泣いてこれに願った。ベテルでは神に出会い、神はそこで彼に語りかけた。

야곱이 씨름한 상대는 분명 천사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호세아서에는 천사라고 되어 있는데 왜 창세기에는 천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처음에 그가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왜 그 사람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사실 성경에 보아도 천사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사람이 만났을 때, 상대방이 그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는 많았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시면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보고도 그를 못 알아보았으며, 사사기 13장에서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도 몰라보았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났을 때에도 마리아가 그를 천사라고 알아보았다는 기록이 없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그 빈 무덤에 있던 천사들을 보고도 사람들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면 금방 알아볼 자신이 있으신가요?

만약에 알아보실 수 있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알아보시겠습니까. 어쩌면 대부분의 분들이 그 등에 달린 날개를 보고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룹천사(ケルビム), 둘째는 스랍천사(セラフィム),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룹천사는 천사들 중에서 가장 처음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こうして神は人を追放し、いのちの木への道を守るために、ケルビムと、輪を描(えが)いて回る炎の剣(つるぎ)をエデンの園の東に置かれた。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한 다음에 에덴을 지켰던 천사가 바로 그룹천사(ケルビム)인데, 하나님께서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룹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룹천사에는 날개가 있었습니다.


역대하 3장 10절~11절
“10.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혔으니
11.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왼쪽 그룹의 한 날개는 다섯 규빗이니 성전 벽에 닿았고 그 다른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오른쪽 그룹의 날개에 닿았으며”

ソロモンは至聖所の中に、彫像のケルビムを二つ作り、これに金をかぶせた。
ケルビムの翼は、長さが二十キュビトであった。片方のケルビムの一方の翼は五キュビトで、神殿の壁に届いていて、もう一方の翼も五キュビトで、もう片方のケルビムの翼に届いていた。



이는 에스겔이 본 환상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에스겔 10장 16절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ケルビムが行くと輪もそのそばを進み、ケルビムが翼を広げて地上から上るとき輪もそのそばを離れず、向きを変えなかった。

이처럼 그룹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스랍천사(セラフィム)도 마찬가지로 날개가 있습니다.


이사야 6장 2절~3절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セラフィムがその上の方に立っていた。彼らにはそれぞれ六つの翼があり、二つで顔をおおい、二つで両足をおおい、二つで飛んでいて、
互いにこう呼び交わしていた。「聖なる、聖なる、聖なる、万軍の主。その栄光は全地に満ちる。」

그룹천사(ケルビム)는 지키는 천사이고 스랍천사(セラフィム)는 찬양하는 천사인데, 이 두 천사는 각각 날개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는 하나님의 명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자에 대해서는 날개가 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정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볼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야곱도 분명 처음에 씨름을 할 때에는 도대체 내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 지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이 되어서야 그 씨름하고 있는 상대방이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축복해달라고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 장면에 대해서 우리가 좀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전에 여러분의 국어실력부터 한 번 시험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자, 승자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예, 패자입니다.

그러면 패자의 반대말은? 예, 승자이지요.

이 정도만 아시면 다음에 제가 드리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 야곱의 씨름에 대한 광경을 보면 우리가 놓치기 쉬운 장면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장면을 보실까요?


창세기 32장 24절~29절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ヤコブが一人だけ後に残ると、ある人が夜明けまで彼と格闘した。
その人はヤコブに勝てないのを見てとって、彼のももの関節を打った。ヤコブのももの関節は、その人と格闘しているうちに外れた。
すると、その人は言った。「わたしを去らせよ。夜が明けるから。」ヤコブは言った。「私はあなたを去らせません。私を祝福してくださらなければ。」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何というのか。」彼は言った。「ヤコブです。」
その人は言った。「あなたの名は、もうヤコブとは呼ばれない。イスラエルだ。あなたが神と、また人と戦って、勝ったからだ。」
ヤコブは願って言った。「どうか、あなたの名を教えてください。」すると、その人は「いったい、なぜ、わたしの名を尋ねるのか」と言って、その場で彼を祝福した。


자, 여기서 야곱은 어떤 사람, 나중에는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무튼, 처음에는 그저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야곱보다 힘이 센 사람인가요? 아니면 약한 사람인가요.

야곱과 씨름을 하던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만 본다면 야곱보다 힘이 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는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할 능력까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야곱보다 힘이 약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관절을 어긋나게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승부는 누가 이겼어요?

예, 그 ‘어떤 사람’이 이긴 것 아니겠습니까. 승자는 그 어떤 사람이고, 그럼 승자 반대말은 뭐라고 했지요? 예, 패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야곱더러 패자라고 했나요? 아니요. 야곱더러 이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이와 같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를 다 무시하고 무조건 야곱이 기도를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성경이 말씀해주시는 본래의 뜻을 놓치고 맙니다.


구체적으로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은 야곱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너무나도 강하게 나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다리를 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축복하라고 말을 하지요. 그런데 그와 같은 야곱을 두고 패자가 아닌 승자라고 합니다.

이를 네 단계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씨름을 시작, 2. 허벅지 타격, 3, 축복을 구함, 4. 야곱 승리 선언.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2와 3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를 쳐서 다리를 상하게 했는데 이를 두고 야곱은 그 사람에게 축복할 것을 구합니다.

야곱의 이 태도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순간 야곱은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던 그 사람이 그냥 어떤 불량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씨름은 분명 하나님의 사자가 승리하고 야곱은 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곧 야곱의 승리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이 씨름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그가 깨달은 것, 그것은 자신과 씨름을 하고 있던 상대방은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 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야곱이 에서를 다시 만났을 때의 나이가 몇 살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그 당시 나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만,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나이와 시기를 계산해보며 그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는데, 야곱이 에서를 피해 집을 나간 것은 77세였을 때였고, 다시 에서를 만난 나이는 그로부터 20년 뒤인 97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나이 97세. 그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97년 동안 계속해서 씨름을 해왔습니다. 눈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피하거나 또는 자신의 머리로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기려 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에서 대신 장자가 되었습니까. 외갓집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까. 그 재산들이 다 자기 것이 되었습니까. 대부분 다 에서한테 헌납하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 평생동안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서 씨름을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패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허무한 삶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이 얍복강에서의 씨름을 통해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기려고 씨름을 했던 상대방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앉아서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을 하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곧바로 달려가고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행동력으로 그는 승리하는 삶을 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행동력이 있을 때 그는 패배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자기 힘에 의지하여 무조건 기를 쓰고 이기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벅지 뼈가 상하고 이제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33장 1절~3절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ヤコブが目を上げて見ると、見よ、エサウがやって来た。四百人の者が一緒であった。そこで、ヤコブは子どもたちを、レアとラケルと二人の女奴隷の群れに分け、
女奴隷たちとその子どもたちを先頭に、レアとその子どもたちをその後(あと)に、ラケルとヨセフを最後に置いた。
ヤコブは自ら彼らの先に立って進んだ。彼は兄に近づくまで、七回地にひれ伏した。


그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습니다.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재산 뒤에 숨어 있던 야곱, 가족 뒤에 숨어 있던 야곱, 그리고 자기 지혜 뒤에 숨어 있던 야곱이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모두 뒤로 물리쳐 놓고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앞에 나아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야곱이었다면 그것이 패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구나.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야곱아. 이제서야 네가 승자가 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 힘들고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든 내 힘으로 이겨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것은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래 구덩이에 빠졌을 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패자가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패자가 되어야 하나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자가 되셨을 때 비로소 우리 또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방법을 보여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뜻대로 되는 삶이 멋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요한복음 5장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わたしは、自分からは何も行うことができません。ただ聞いたとおりにさばきます。そして、わたしのさばきは正しいのです。わたしは自分の意志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求めるからです。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이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これらのことをあなたがたに話したのは、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あって平安を得るためです。世にあっては苦難があります。しかし、勇気を出しなさい。わたしはすでに世に勝ちました。」


예수님이 만약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패자가 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기를 쓰고 이를 악 물고라도 씨름을 해야 되겠지요. 그리고 상대방을 땅에 쓰러뜨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엇이 없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순종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까.

좋습니다. 하나님과 한번 씨름을 해 보십시오.

내가 내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이기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승자가 아니라 패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승자로 높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의하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동생이 형보다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꼭 그렇게 형을 속이고 그리고 아버지를 속여야만 했습니까.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그의 인생이 더 고달파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사람의 머리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이겨보려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차라리 형 에서를 존중해주고 배려를 해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훨씬 더 복된 삶이었을 것입니다.

내 허벅지가 다치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빨리 하나님을 이기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이기는 지름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이기게 해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범사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시편 50편 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感謝のいけにえを献げる者は わたしをあがめる。 自分の道を正しくする人に わたしは神の救いを見せる。」

인생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 생각대로 안 됩니까. 그래요. 아브라함도 바울도 자기 뜻대로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패자가 아닌 승자로 기록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먼저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6절~37절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こう書かれています。「あなたのために、私たちは休みなく殺され、屠られる羊と見なされています。」
しかし、これらすべてにおいても、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方によって、私たちは圧倒的な勝利者です。


이제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내 승리를 원하시는 주님께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승자로서의 삶, 주님의 이름으로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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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2회 어떻게 전할 것인가
2023년 10월 1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21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21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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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1번째 시간으로서 “어떻게 전할 것인가” どのように宣べ伝えるべき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 말씀이고, 이 성경말씀을 우리가 올바로 깨닫고 우리 이웃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에 있어서 색의 삼원색과 빛의 삼원색을 말씀 드리면서, 색의 삼원색처럼 서로 섞으면 섞을수록 시커멓게 변하는 세상적인 방법을 교회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섞으면 섞을수록 환해지는 빛의 삼원색처럼 하나님의 방법, 믿음의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 성경을 세상적인 방법이 아닌 믿음의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전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전도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이제 막 전도를 나가시려고 할 때 어떤 마음 가짐으로 나가십니까.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예, 물론 그것도 좋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전도를 나갈 때 항상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나의 전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익히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그래도 좀 가물가물하다고 하신 분들께서는, 요나서는 4장까지 밖에 없으니까 예배 후에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자, 이 요나서에 의하면 어느 날 갑자기 요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으로 요나서는 시작됩니다.

요나 1장 1절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アミタイの子ヨナ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요나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이가 몇 살이었고 직업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를 뜻하는데, 이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비둘기처럼 온순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 때 붙여지는 것인데,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온순하게 생겼다고 해서 커서도 온순합니까. 그리고 또 어느 주석서에 보면 비둘기라고 하는 말에는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어리석다는 뜻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요나는 당시 성인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만, 그 이름의 뜻으로 당시 요나의 성품을 짐작하는 것은 이는 너무나도 비약적인 추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전반적인 문맥으로 짐작하자면, 아마도 요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놀라거나 하지 않고, 그리고 내용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요나는 어느 날 예고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내용이 2절이지요?

2절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요나 1장 2절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이 말씀만으로 본다면 요나에게 명하신 그 내용이,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죄가 많으니까 거기 가서 멸망을 시키라는 뜻인지, 아니면 회개를 시키라는 말씀인지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도록 선포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지고, 그리고 요나도 그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난 다음에 그가 한 행동을 보면,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명을 이해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만약에 지금 당장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순종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했냐 하면 의외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요나 1장 3절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しかし、ヨナは立って、主の御顔を避けてタルシシュへ逃れようとした。彼はヤッファに下り、タルシシュ行きの船を見つけると、船賃を払ってそれに乗り込み、主の御顔を避けて、人々と一緒にタルシシュへ行こうとした。

당시 다시스라고 하는 지명을 가진 곳은 여럿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명하신 니느웨는 동쪽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단순히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것과는 정반대 방향, 니느웨가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갔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동쪽에 계시니까 서쪽으로 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다는 뜻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자, 여기까지 일단 본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셨다면 두말 없이 순종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철저하게 불순종한 요나는 대단히 게으르거나 아니면 고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명하셨던 니느웨라고 하는 곳은 당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앗수르는 기회만 되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번 기회에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한다면 그야말로 할렐루야 하고 기뻐할 것만 같은 그와 같은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미운 나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을 나라가 앗수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해요?

이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떻게 될 수도 있겠습니까.

원래는 니느웨가 자신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 당할 수도 있었는데, 요나가 거기까지 가서 회개를 선포하는 바람에 멸망하지 않았대……만약에 이런 소문이 나중에 이스라엘에 퍼지기라도 해보세요. 이건 완전히 요즘 말로 이적행위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정말 180도 반대 방향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측면, 세상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지극히 타당하다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이와 같은 명령, 이는 세상적인 명령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적인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도 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일을 세상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안 생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요나를 보시니까 아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불이 나게 도망쳐요. 그러면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한 구원계획을 포기하실까요.


아니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동쪽은 육지이지만 서쪽은 바다이기 때문에 서쪽 지역에 있는 다시스까지 가려면 천상 배를 타고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일으켜서 그 요나가 탄 배를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폭풍이 불어 닥쳐서 배는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만 같아요.


아마도 이 배는 작은 배가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크기였나 봅니다. 그래서 요나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는데, 승객만이 아니라 승무원들도 배가 침몰할 까봐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는데 요나는 태연합니다. 그것은 배가 안 뒤집힌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배가 폭풍을 만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은 이 폭풍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아 보자면서 제비를 뽑자고 해요.

그렇다고 뱃사람들이 폭풍을 만날 때마다 제비를 뽑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뱃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좀 이상한 점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 않았나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전혀 폭풍이 일어날 계절이 아니었다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는 전혀 폭풍이 올 징조가 없었는데 갑자기 파도가 세졌다거나 하는, 아무튼 좀 수상한 점이 있었는지 제비를 뽑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요나가 뽑히지 않았겠어요.

사람들은 요나한테 따집니다. 너 도대체 누군데 너 때문에 이렇게 폭풍이 일어나서 우리까지 죽게 생겼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자 요나는 말합니다.

요나 1장 10절~12절
“10.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人々は非常に恐れて、彼に「何ということをしたのか」と言った。人々は、ヨナが彼らに告げたことによって、彼が主の御顔を避けて逃れ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知ったからである。
彼らはヨナに言った。「私たちのために海が静まるようにするには、あなたをどうすればよいのか。」海がますます荒れてきたからである。
ヨナは彼らに言った。「私を抱え上げて、海に投げ込みなさい。そうすれば、海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静かになるでしょう。私は分かっています。この激しい暴風は、私のせいであなたがたを襲ったのです。」


요나는 말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라. 나 때문에 폭풍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긴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더니 바다는 잔잔해집니다. 그리고 요나는 큰 물고기가 잡아먹어서 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동물이든 물고기든 간에 잡아 먹히게 되면 그 강한 소화액으로 인해서 금방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살아있게 되고 그 캄캄한 곳에서 홀로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되지요.

이제 어쩌겠습니까.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겠구나 하는 사실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사흘 뒤에 물고기가 요나를 뱉어내자 그는 터벅터벅 니느웨를 향하여 걸어갑니다.


이제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 그가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자, 제가 지금 여기까지, 그야말로 요나서 본문보다도 길게 설명해온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에 강제로 끌려와서 회개를 선포하는 요나의 마음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요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해서, 니느웨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이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냥 마지못해, 죽지 못해 그저 무거운 발걸음을 걸어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참 묘한 일이 생깁니다.

조금 길지만 요나 3장을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요나 3장 1절~10절
“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再びヨナ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わたしがあなたに伝える宣言をせよ。」
ヨナは、主のことばのとおりに、立ってニネベに行った。ニネベは、行き巡るのに三日かかるほどの非常に大きな都であった。
ヨナはその都に入って、まず一日分の道のりを歩き回って叫んだ。「あと四十日すると、ニネベは滅びる。」
すると、ニネベの人々は神を信じ、断食を呼びかけ、身分の高い者から低い者まで粗布をまとった。
このことがニネベの王の耳に入ると、彼は王座から立ち上がって、王服を脱ぎ捨てて粗布をまとい、灰の上に座った。
そして、王と大臣たちの命令によって、次のような布告がニネベに出された。「人も家畜も、牛も羊もみな、何も味わってはならない。草をはんだり、水を飲んだりしてはならない。
人も家畜も、粗布を身にまとい、ひたすら神に願い、それぞれ悪の道と、その横暴な行いから立ち返れ。
もしかすると、神が思い直してあわれみ、その燃える怒りを収められ、私たちは滅びないですむかもしれない。」
神は彼らの行いを、すなわち、彼らが悪の道から立ち返ったのをご覧になった。そして神は彼らに下すと言ったわざわいを思い直し、それを行われなかった。


3절에 보시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한 성읍이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3일 정도를 걸어야지만 성읍 전체를 돌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그런데 요나는 얼마나 돌았어요? 사흘을 돌았나요?

아니요. 아직 하루 밖에 안 돌았어요. 그리고 그가 외친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あと四十日すると、ニネベは滅びる。」 라고 하는, 정말 최소한의 말씀만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단 하루밖에 안 돌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것도 일반 주민들 만이 아니라 니느웨 왕까지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아니, 잠깐만요. 니느웨가 어떤 곳이었대요? 무슨 의인들이 살고 믿음이 좋고 신실한 그런 성읍이었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가리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요나 1장 2절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立ってあの大きな都ニネベに行き、これに向かって叫べ。彼らの悪がわたしの前に上って来たからだ。」

니느웨가 얼마나 악에 가득 찼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멸망시키시겠다고까지 할 정도였다고 하잖아요. 그야말로 소돔이나 고모라 같은 죄로 물든 성읍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자, 거기서 요나가 전도를 합니다.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러면 그 목소리가 어땠겠습니까. 성경에는 <외쳤다>라고 되어 있긴 합니다만, 솔직히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이토록 소극적인 외침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겉으로는 마지못해 회개를 <외쳤다>라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어땠겠습니까. 이 나쁜 나라, 어서 망해버려라……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서 아직 3분의 1밖에 안 돌았어요. 몸도 제대로 풀리지 않을 정도인데, 그 큰 성읍, 죄에 물든 니느웨가 위에는 우두머리인 니느웨 왕부터 시작해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전도 관련 부흥회도 실제로 가보기도 하고 영상으로 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만, 대부분 보면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어떤 식으로 집 문을 열게 해서 교회 전단지를 건네느냐 하는 방법이거나, 아니면 싫다고 오지 말라고 해도 얼마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결국은 교회에 나오게 하느냐 하는 말씀을 주로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흥강사와 요나를 두고 보았을 때, 이 두 사람이 전도에 있어서 간증을 하게 된다면 어느 쪽이 더욱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총 동원해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전도를 한 결과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경우와, 반면에 자신은 어떻게 보면 소극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전도밖에 한 것이 없는데 회개와 은혜의 바람이 불어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하는 경우를 본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사람의 노력이 강조될 수 있겠으나, 요나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한국이나 일본에 보더라도 끈질기게 전도를 해서 성장한 교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하지만, 동경의 어느 한국인 교회의 경우,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좀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공략을 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도 수가 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는 전도 방법이고 교회 성장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14절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神はみこころのままに、あなたがたのうちに働いて志を立てさせ、事を行わせてくださる方です。
すべてのことを、不平を言わずに、疑わずに行いなさ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역시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해당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서로 안 좋은 소리가 오간다 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도 사람의 힘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된다면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을 높이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사람의 생각, 사람의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들 때에는 이 요나의 전도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전도도 그렇고 선교도 그렇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요,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 는 데에 그 초점이 맞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방법을 따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그리고 주의 소식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깨닫게 되기 위한 복음 전도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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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1회 무엇을 전할 것인가
2023년 9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21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21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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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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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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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50번째 시간으로서 “무엇을 전할 것인가” 何を宣べ伝えるべき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본문 내용에 있어서도 전해드려야 할 부분이 좀 많기 때문에 시간관계상 이번주와 다음 주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0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0절
“20.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0節
“20.このように、ほかの人が据えた土台の上に建てないように、キリストの名がまだ語られていない場所に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を、私は切に求めているのです。

이 구절은 바울의 전도방법에 있어서의 원칙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그가 고백하기를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 그러니까 이미 신앙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 평생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바울 뿐만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사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졌습니다.

그 때 당시 유대교는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만,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도행전 10장을 시작으로 해서 이제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고, 뿐만 아니라 성령님까지 임하시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선교회의 선교 방침에 따라서 계획적으로 파송을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바울 당시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지 아직까지는 체계화가 되어 있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누가 어느 쪽을 담당하고 누가 어느 지역에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마도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과정에 있어서 바울은 혹시라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 곳에까지 굳이 자신이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세우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이는 성경에 적혀 있는 내용이고, 성경은 성경무오, 그러니까 성경에는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경에 적힌 내용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아멘……하고 믿을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휴, 그렇게 해서 언제 교회가 성장하겠어……”라는 생각, 안 드십니까.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교회가 좀 시원찮다거나 하면 내가 다니는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게 뭐 잘못이야? 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신천지는 더 하지요. 이른바 산 옮기기라고 해서 기존 교회에 침투해서 거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켜서 교회를 갈라지게 만들고는, 그 성도들을 모두 자기 교회로 옮겨 오기도 한다고 합니다.


뭐, 이런 이단 집단에서 하는 행태를 비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만, 문제는 뭐냐 하면 일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친구사이나 아는 사이인 사람이, 기왕이면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같이 다니자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걸 잘못이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교회라고 한다면 꼭 내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교회에서나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요즘은 그렇지 않은 곳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오게끔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이유, 그러니까 멀쩡하게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회로 데려오고 싶어해요. 그렇다고 가족이나 친구나 친인척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왜 자기 교회로 그렇게 데려오고 싶어할까요. 어쩌면 그것은 성과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본다면 이른바 전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 이름이 <전도왕>이라고 하지요? 이 말을 그대로 풀어서 보면 무슨 뜻이에요? 전도를 많이 하면 왕 대접을 해주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보더라도 매년 전도왕을 뽑고는 상을 주는데 그 날은 한복을 입고 나와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상과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 기억에 보면 대체적으로 여자분들이 많이 받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남자분들은 평일에는 대부분 출근을 하니까, 여자분들 중에서 주부이신 분들이 아마도 많이 상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도한 전도 대상자에 대해서 본다면, 전도한 사람의 숫자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반면에 그 전도 대상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도해서 자기 교회로 데려온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오게 된 것인지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교역자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전도하는 사람에 대해서 할당량이 있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전도대상자에 대한 명단을 제출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십니까. 교회 복음화와 부흥을 위해서 참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물론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교회에 나오겠다고 한다거나, 아니면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가 좀 이런저런 이유로 다니기가 어려워졌다고 했을 때, 그 때 자기 교회로 함께 나온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멀쩡히 지금 건전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기 교회로 데리고 나온다? 이건 아니지요. 세상에 이런 전도방법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전도 할당량이 있고 전도대상자 명단을 정기적으로 작성해서 제출한다? 저 이런 말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동차 영업 사원을 하고 있는 지인한테서 똑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이 분은 자동차를 판매해야 하는데, 당연히 팔아야 할 목표량이 있겠지요. 뿐만 아니라 자동차 구매대상자를 정기적으로 작성해서 회사에 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하는 말이, 제 이름도 거기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아니, 저는 아직 면허도 안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되냐고 되물으니까 상관 없다는 거예요.

그래요. 뭐, 자동차나 세상 일은 그렇다고 해요. 하지만 이를 그대로 교회에서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あなたがたは地の塩です。もし塩が塩気をなくしたら、何によって塩気をつけるのでしょうか。もう何の役にも立たず、外に投げ捨てられ、人々に踏みつけられるだけです。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소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짠 소금과 짜지 않은 소금입니다.

짠 맛이 있는 소금은 쓸모가 있지만,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쓸모가 없어서 내버려지고 사람들한테 발로 밟힐 뿐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 소금이라고 한다면 그냥 조미료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당시에 소금이라고 하면 대단히 귀한 것이어서, 당시에는 로마 군인들이 소금을 월급으로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라틴어로 소금이 sals 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샐러리가 되고, 이를 받는 사람들이 샐러리맨이 되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소금을 그냥 소금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우리 그냥 알기 쉽게 돈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든지 아니면 사업을 해서 수익을 얻든지 해서 돈을 벌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 돈이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보면 돈이 땅바닥에 마구 버려진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실제로 있는 나라에요. 그러면 여기는 대단히 잘 사는 나라일까요? 아니면 가난한 나라일까요?

돈이 땅바닥에 마구 버려져도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단히 부자 나라인 것처럼 생각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긴 어디냐 하면 아프리카에 있는 짐바브웨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여기는 과거에 대통령이 자신의 사치생활을 위해 돈을 부분별 하게 찍어내는 바람에 그 화폐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결국 어디까지 떨어지냐 하면 100만도 100억도 아닌 100조…… 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숫자인지 감이 잡히세요? 0이 무려 14개나 됩니다. 그런데 그 100조 짐바브웨 달러로 살 수 있는 것은 고작 달걀 3개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뭐 돈이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말 그대로 땅에 버려져도 아무도 줍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금은 그 돈이 아예 없어지고 미국 달러를 차용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돈은 대단히 귀한 것이지만 그 가치가 없어지면 말 그대로 땅에 버려져서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소금은 음식 안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소금을 음식 안에 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소금을 먹기 위해서요? 아니요. 음식을 맛이 있게 하기 위해서 소금을 넣는 것이지요.

소금을 넣음으로써 음식이 맛있어진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소금으로 인해서 다른 음식만이 변화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은 소금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는 설렁탕을 가끔 먹곤 했었습니다만, 소금을 안 넣은 설렁탕을 생각해보세요. 그걸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 하지만 소금을 조금 넣게 되면 참 구수하고 진짜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소금이 녹아서 그 짠맛으로 인해 주변 음식 맛을 변화시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금을 아무리 넣어도 짠맛이 안 나요. 짜지도 녹지도 않고, 무슨 모래처럼 어그적 어그적 씹히기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걸 누가 먹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이처럼 신앙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세상 방법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오면 이게 어떻게 되냐 하는 것이지요.

믿음의 방법과 세상 방법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미술 쪽에 보면 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이 있습니다.

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달라요. 예를 들어서 물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감을 섞으면 섞을수록 어떻게 됩니까. 예, 섞으면 섞을수록 어두워지죠. 색의 3원색은 빨강, 파랑, 노랑이 있는데, 이를 서로 섞으면 여러 가지 색이 나오지만 본래 빨강, 파랑, 노랑색보다는 진한 색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깔을 다 섞으면 어떻게 되죠? 예, 시커멓게 되고 말지요. 이게 감색혼합, 그러니까 색이 줄어드는 혼합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빛의 3원색은 어떻습니까.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색조명을 서로 섞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섞으면 섞을수록 빛이 밝아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색을 가진 조명을 다 섞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하얀 색깔의 빛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 것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을 섞어 놓으면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이 시커멓게 물들어 가게 돼요. 거기에는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메말라 가요.

하지만 하늘에서 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섞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하얗게 됩니다. 우리 주변이 변화되어 환하게 밝아지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두웠던 우리 주변이 환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오늘 본문 다음 구절 로마서 15장 21절 말씀이 됩니다.


로마서 15장 21절
“21.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1.こう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彼のことを告げられていなかった人々が見るようになり、聞いたことのなかった人々が悟るようになる。」”

그렇습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우리 주변이 변하여 환해지게 되면 그 때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인지, 둘째로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첫번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우리는 무엇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경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 성경도 모르고 무조건 하라고 하니까 전도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직히 본다면 우리나라 성경수준은 참 심각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몇 년 전 어떤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분은 권사님이라고 하셨는데, 짧은 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사님 답게 품위가 느껴지는 문장이었다고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입니다.

그 메일 내용은 뭐였냐 하면, 제가 보내 드리는 선교소식을 읽으시고 우리 교회를 좀 돕고 싶은데, 제가 지금 다니는 교회가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에 안타깝게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다면서 이해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권사님 말씀, 맞아요? 틀려요?

옛날에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하다가 저한테 대뜸 이러는 것이었습니다.

“야, 입이 열 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이 말을 하고는 그 친구녀석도 생각하기를, 자기도 자기가 말해 놓고 좀 이상했나보죠? 눈을 껌뻑껌뻑 뜨고 저를 처다 보더라고요? 그리고 듣는 저도 이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고 해서 갸우뚱 했었습니다.


“입이 열개라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여러분, 이게 맞는 말이에요? 아니에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와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를 이상하게 합쳐 놓은 말인 것이죠.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두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에요?


지금 매주 기도로 그리고 물질로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다면 그 분들은 성경 말씀을 어기고 계신 것인가요?

후원해주시는 분들 중에는 목사님도 계시고, 그리고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후원해주시는 곳도 계신데, 그렇다면 그 목사님이나 교회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누가복음 16장 13절 중에서 우선 전반부부터 봅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전반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どんなしもべ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

그러면 이 말씀이 두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뜻이냐 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6장 13절 후반부에는 뭐라고 적혀있는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3절 후반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냐 돈이냐가 아닌, 앞서 말씀 드린 색의 3원색과 빛의 3원색처럼 세상 방법과 믿음의 방법을 똑같이 존중할 수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두 교회를 섬길 수 없다고 해석한다면, 그것도 권사님이 그것도 목사한테 보내는 메일에 그렇게 적으실 정도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는 그렇다고 그 권사님 한 분을 탓하려고 한다거나, 무슨 선교후원을 안 해 주셔서 서운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고 직분을 받을 정도의 성도님이라 하더라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의심스러운 사람이 적지 않게 계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우려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전해야 할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지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부터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면, 제가 항상 드리는 구절 있지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이 말씀에 대해서만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면 그 말씀이 귀한 말씀이요, 그 발걸음이 복된 걸음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님들을 보면 가끔 기독교 서적이나 기독교 영화를 많이 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그게 잘못이라고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음식으로 따지자면 주식이 아니라 간식이에요.

예를 들어서 십계 같은 영화의 경우, 성경 말씀을 모르고 보면 정말 멋진 영화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알고 난 다음에 보니까, 이건 성경을 무시하고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바꿔 놓고 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어서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십계라는 영화가 명화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쩌면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설교말씀도 그래요. 예전에 성경을 잘 몰랐을 때에는, 그저 말씀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그리고 유머감각 있게 하시는 설교가 좋은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말씀들을 들으니까, 그렇게 설교하시는 어떤 분의 말씀은 성경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주로 말씀하시고 계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그 전까지는 주목하지 않았던 다른 목사님이, 비록 말씀을 조용하게 하시고 유머는 좀 없다 하더라도 정말 하나하나가 성경에 맞는 훌륭한 말씀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우리 이웃에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며, 우리 이웃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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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10회 경계해야 할 우상
2023년 9월 17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7절~19절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7節~19節
“17.ですから、神への奉仕について、私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誇りを持っています。
18.私は、異邦人を従順にするため、キリストが私を用いて成し遂げてくださったこと以外に、何かをあえて話そうとは思いません。キリストは、ことばと行いにより、
19.また、しるしと不思議を行う力と、神の御霊の力によって、それらを成し遂げてくださいました。こうして、私はエルサレムから始めて、イルリコに至るまでを巡り、キリストの福音をくまなく伝え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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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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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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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9번째 시간으로서 “경계해야 할 우상” 警戒すべき偶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보문 중에서 17절 첫부분에 보시면 “그러므로(ですから)”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구절인 15절과 16절의 문맥을 따라 “그렇기 때문에”라고 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복습하는 의미에서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피보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5절~16절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행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17절에서 <그러므로(ですから)> 라고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라고 이해해야 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17절에 보시면 그 받은 은혜로 말미맘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자랑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서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기에 따라서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냐 하면, 내가 한 일들은 모두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신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행위는 모두 주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다……라는 식으로도 들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후 주님께서 주신 사명,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적지 않게 곤란한 일이 되고 맙니다.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솔로몬은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 2대 왕이었던 다윗의 아들이자 이스라엘 3대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태생을 본다면 남들보다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누구냐 하면, 밧세바였습니다.

그러면 밧세바가 누구입니까.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다윗이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를 멀리서 훔쳐보고 반해서 그를 불러다가 불륜을 저지른 다음에,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신인 우리아를 일부러 전쟁터에서 죽이도록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 일로 인해서 사무엘하 12장에 의하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부정한 관계로 태어난 아이는 죽게 되고, 그 다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솔로몬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솔로몬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솔로몬이라는 이름, 혹시 누가 지었는지 아십니까.

역대하 22장 9절
“9.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見よ、あなたに一人の男の子が生まれる。彼は穏やかな人となり、わたしは周りのすべての敵から守って彼に安息を与える。彼の名がソロモンと呼ばれるのはそのためである。彼の世に、わたしはイスラエルに平和と平穏を与える。

이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니 그 사랑이 얼마나 특별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는 크나큰 축복을 받은 왕이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12절~13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が言ったとおりにす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に、知恵と判断の心を与える。あなたより前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なく、あなたの後に、あなたのような者は起こらない。
そのうえ、あなたが願わなかったもの、富と誉れもあなたに与える。あなたが生きているかぎり、王たちの中であなたに並ぶ者は一人もいな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귀와 영광을 그에게 채워 주십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보시면 그가 누렸던 축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 그 어느 강대국의 통치자라 하더라도 그만한 영화를 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을 누리면 정말 하루에 수십 번 하나님께 감사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는 하나님의 그 크나큰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잘못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오늘은 아직 그 죄악이 시작하기 전의 시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전 건축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건축에 있어서는 애초에 다윗 왕이 계획하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아닌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하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제1성전이라고도 불리는 하나님의 성전은 솔로몬 왕 때 완성하게 됩니다.

이제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왕이었다면 그 때 하나님께는 어떠한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기도로 채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를 들어보면, 적지 않게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열왕기상 8장 13절
“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私は、あなたの御住まいである家を、確かに建てました。御座がとこしえに据えられる場所を。」


열왕기상 8장 20절~21절
“20.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21.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主はお告げになった約束を果たされたので、私は主の約束どおりに父ダビデに代わって立ち、イスラエルの王座に就いた。そしてイスラエルの神、主の御名のためにこの家を建て、
主の契約が納められている箱のために、そこに場所を設けた。その契約は、主が私たちの先祖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されたときに、彼らと結ばれたものである。」


열왕기상 8장 41절~45절
“41.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42.그들이 주의 크신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43.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44.주의 백성이 그들의 적국과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께서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그들이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옵소서


열왕기상 8장 41절~45절
同様に、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者でない異国人についても、その人があなたの御名のゆえに、遠方の地から来て、
彼らが、あなたの大いなる御名と力強い御手と伸ばされた御腕について聞き、やって来てこの宮に向かって祈るなら、
あなたご自身が、あなたの御座が据えられた場所である天でこれを聞き、その異国人があなたに向かって願うことをすべて、かなえ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地上のあらゆる民が御名を知り、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と同じようにあなたを恐れるようになり、私が建てたこの宮で御名が呼び求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るでしょう。
あなたの民が敵との戦いのために出て行くとき、遣わされる道で、あなたがお選びになった都、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宮に向かって主に祈るなら、
天で彼らの祈りと願いを聞いて、彼らの言い分を聞き入れてやってください。


열왕기상 8장 48절~50절
“48.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 곧 주께서 택하신 성읍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49.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일을 돌아보시오며
50.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捕らわれて行った敵国で、心のすべて、たましいのすべてをもって、あなたに立ち返り、あなたが彼らの先祖にお与えになった彼らの地、あなたがお選びになったこの都、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に向かって、あなたに祈るなら、
あなたの御座が据えられた場所である天で、彼らの祈りと願いを聞き、彼らの訴えをかなえて、
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となったあなたの民を赦し、あなたに背いた、彼らのすべての背きを赦し、彼らを捕らえて行った者たちの前で彼らをあわれみ、その者たちがあなたの民をあわれむようにしてください。


여러분께서는 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좀 성격이 유별나서 그런지 적지 않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어디냐 하면 좀 부분적으로 발췌하면 다음 구절입니다.

열왕기상 8장 13절
“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私は、あなたの御住まいである家を、確かに建てました。

열왕기상 8장 20절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私は主の約束どおりに……イスラエルの神、主の御名のためにこの家を建て、

열왕기상 8장 21절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スキップ)

열왕기상 8장 43절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私が建てたこの宮で御名が呼び求めら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知るでしょう。

열왕기상 8장 44절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宮に向かって主に祈るなら、

열왕기상 8장 48절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私が御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に向かって、あなたに祈るなら、

이런 말들을 들으면 여러분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무슨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해서 자기 성과를 미화하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이 말들에서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와 찬양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싸구려 정치꾼들이나 하는 선거유세를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을까요? 아니, 사람인 저도 적지 않게 거슬리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이 솔로몬의 기도에 대해서 다음 장인 열왕기상 9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열왕기상 9장 4절~9절
“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열왕기상 9장 4절~9절
もしあなたが、あなたの父ダビデが歩んだように、全き心と正直さをもってわたしの前に歩み、わたしがあなたに命じたことすべてをそのまま実行し、わたしの掟と定めを守るなら、
わたしが、あなたの父ダビデに『あなたには、イスラエルの王座から人が断たれることはない』と約束したとおり、あなたの王国の王座をイスラエルの上にとこしえに立たせよう。
もし、あなたがたとあなたがたの子孫が、わたしに背を向けて離れ、あなたがたの前に置いたわたしの命令とわたしの掟を守らずに、行ってほかの神々に仕え、それを拝むなら、
わたしは彼らに与えた地の面からイスラエルを断ち切り、わたしがわたしの名のために聖別した宮をわたしの前から投げ捨てる。イスラエルは、すべての民の間で物笑いの種となり、嘲りの的となる。
この宮は廃墟となり、そのそばを通り過ぎる者はみな驚き恐れてささやき、『何のために、主はこの地とこの宮に、このような仕打ちをされたのだろう』と言う。
人々は、『彼らは、エジプトの地から自分たちの先祖を導き出した彼らの神、主を捨ててほかの神々に頼り、それを拝み、それに仕えた。そのため主はこのすべてのわざわいを彼らに下されたのだ』と言う。」


이 말씀이 축복 기도처럼 들리시나요?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표정을 한 번 떠올려보세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표정을 짓고 계실까요? 아니요. 오히려 완전히 굳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의 주된 내용은 뭐겠습니까.

너, 내 말 안 들으면 알아서 해. 네가 지었다고 하는 그 성전, 아무리 크고 대단할 지라도 내가 완전히 박살내 버릴 거야……. 그 말씀 아니겠습니까.

결국 솔로몬이 죽은 다음 그 죄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지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열왕기하 25장 8절~9절
“8.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第五の月の七日、バビロンの王ネブカドネツァル王の第十九年のこと、バビロンの王の家来、親衛隊の長ネブザルアダンがエルサレムに来て、
主の宮と王宮とエルサレムのすべての家を焼き、そのおもだった建物をことごとく火で焼いた。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가 사라지고 찬양이 사라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라진 그 빈 자리를 더러운 우상들이 차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러운 우상 중의 가장 조심해야 할 우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私は、私が)>라고 하는 우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냐 하면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거만, 교만, 오만, 자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우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간증을 하라고 하면 이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지, 자기를 높이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제 간증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제가 이 로마서 강해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면, 물론 여러분께서는 은혜로 받아들여 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여러분이었다면, 적지 않게 좀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내가 전하고 있는 말씀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니까, 여기에 반박을 하거나 토를 달지 말라는 것이잖아요. 이건 무슨 뜻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감히 그렇게 말씀 드릴 자신이 없어요.

물론 저는 간증은 있습니다. 제가 수십년 동안 신학을 공부해온 것도 아니고, 아직 목사 안수를 받은 지 10년도 안 되는 상황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가지로 많이 부족하다 보니까, 사실 막상 이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주제설교 같은 경우를 보면 그냥 말씀을 전하기 좋은 구절을 구약이고 신약이고 간에 거기서 고를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강해는 차례차례로 해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몇 장 전체를 그 주의 본문 말씀으로 삼기도 그렇죠. 이왕 강해를 한다면 가능한 한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꼼꼼하게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야, 이거 다음 주는 이 구절로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하나 하고 막막할 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이 떠오르고 해서 지금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 어디까지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아, 정말 그때 그때마다 주님이 지혜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이는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간증이자 감사예요. 이를 만약에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면서, 이는 하나님께서 저한테 주신 말씀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라고 한다면 이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제가 예수님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주님이 지혜나 말씀을 주셨다고 하는 확신은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부족해서 제대로 여러분께 전해드리지 못할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전도를 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갈 때의 제가 방문하는 곳 한곳 한곳 모두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간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그렇다고 무슨 꿈이나 환상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이것저것 알아보고 해서 가는 것이지만, 그 발길 하나하나에도 주님이 간섭해주시고 인도해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제가 간다고 다 반겨 주시나요? 저는 전도를 가면 안에 들어가서 오래 있지 않습니다. 괜히 일 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지 모르니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전도지를 드리고 나와요. 그러면 어디는요, 정말 제가 더 황송할 정도로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곳이 있나 하면, 어디는 또 제 표정을 보는 순간 쌔 해지는 곳도 있고, 또 어디는 아주 알기 쉽게 오지 말라는 곳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새로운 곳 일곱 곳을 방문했습니다만, 그 중에서 세 곳은 아예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제가 가는 곳이 주님께서 인도해 주신 곳이라고 한다면, 저더러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이는 저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 되잖아요. 그럼 제가 가만히 있어야 돼요?

아니면 제가, 아니, 이 보세요. 제가 지금 주님이 보내서 온 건데, 저를 거절한다는 게 말이 돼요? 이러면 당신 벌 받습니다! 뭐 이렇게 한 마디라도 하고 와야 되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건 아니지요. 오지 말라고 하면 저는 아 예, 알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는 더 이상 방문하지는 않지요.


제가 인터넷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 수많은 분들께 전도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 그러면 보내지 말라는 사람도 있어요. 가끔은 심한 말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 참 그런 거친 말을 하는 사람들 보면, 어떤 때는 꽤 유명한 대학 교수님이라는 분들도 계세요.

아무튼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안 좋죠. 저는 메일을 보낼 때 보면, 그래도 제가 보내는 메일을 받는 분들에 대해서는 주님이 아직 관심을 가지고 계신 증거다, 라고 생각하고 메일을 보내 드립니다만, 그래도 그 마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 사실을 강요하게 된다면 이는 전도를 내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이 전도나 선교라고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나 강요가 아닌 은혜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끔 보면 전도 간증이라고 하면서 누구를 끈질기게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했다는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만,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싫다는 사람한테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교회로 데려오라는 말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의 고백에서 본다면, 보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얼마나 겸손하고 진정한 전도 방법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5장 17절~19절
“17.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7節~19節
“17.ですから、神への奉仕について、私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誇りを持っています。
18.私は、異邦人を従順にするため、キリストが私を用いて成し遂げてくださったこと以外に、何かをあえて話そうとは思いません。キリストは、ことばと行いにより、
19.また、しるしと不思議を行う力と、神の御霊の力によって、それらを成し遂げてくださいました。こうして、私はエルサレムから始めて、イルリコに至るまでを巡り、キリストの福音をくまなく伝えました。”


여기서 일루리곤(イルリコ)이라고 하는 곳은 바울이 전도한 지역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지금의 알바니아라고 해서 이태리 반도 동쪽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자신은 주님이 자기를 통하여 역사히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모든 일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결과 두루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사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도 바울만큼 놀랍고도 역사적인 성과를 가져온 선교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유심히 보면, 여기에는 흔히 선교사들이 내세우기 쉬운 성과, 자기가 개척한 교회가 몇 개다, 성도 수가 몇 명이다, 헌금액이 얼마다 하는 그런 말이 일체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께 순종하면서 그 일을 감당했다는 감사의 마음만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에 의한다면 이는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대로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주님은 지금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중요합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아브라함은 그가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라고 하는 토대 위에 하나님의 역사를 쌓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있어야 해요. 성경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지만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행함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도 모르면서 기도나 금식만 백날 해봐야 힘만 들고 배만 고픕니다.

진정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성경이 없다면 그 빈 자리를 누가 채웁니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이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그렇죠. “내가”라고 하는 이 더럽고 지저분한 우상이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3장 15절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耳を傾けて聞け。高ぶるな。主が語られたからだ。



에베소서 4장 21절~24절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ただし、本当に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について聞き、キリストにあって教えられているとすれば、です。真理はイエスにあるのですから。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이제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 <내가><(私は、私が)>라고 하는 우상, 거만, 교만, 오만, 자만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새 사람을 입고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달아 그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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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8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2023년 9월 3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4절~16절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4節~16節
“14.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自身、善意にあふれ、あらゆる知識に満たされ、互いに訓戒し合うことができると、この私も確信しています。
15.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16.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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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8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②” 聖書をどう読むか② 라는 제목으로 지난 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물건을 잊어버리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 신문을 보니까 이른바 분실물에 대한 기록이 있길래, 잠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분실물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우산을 보니까, 작년 일본 동경에서의 자료에 의하면 습득한 우산 개수가 280,763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인 없는 우산이 신고가 들어온 총 개수가 동경만 해도 한 해에 28만개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실 저도 얼마 전에 우산 하나를 두고 오는 바람에 나중에 따로 가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산을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어떤 일본 신문을 보니까 흥미로운 기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산을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내용이었어요.


어느 한 심리학자 교수에 의하면,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다는 것입니다. (体から離さない)

자기는 좀처럼 바람이 강한 날이 아니면, 접는 우산을 가지고 나간다고 해요. 그래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실내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접어서 가방에 넣는다고 합니다.

둘째는, 비싼 우산을 산다는 것입니다.. (高い傘を買う)

앞서 살펴본 자료에 의하면 작년 동경에서 발견된 우산 28만개 중에서 실제로 분실신고가 들어온 건수는 6,200개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잃어버린 우산 중에서 고작 2.2% 밖에 안 되는 숫자예요. 말하자면 나머지 97% 이상, 27만개 이상의 우산은 별로 찾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 잃어버려도 별로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반대로 본다면 그렇게 싸구려 우산을 사니까 제대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지만, 비싼 우산을 사면 그만큼 안 잃어버리려고 신경을 더 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 살 때 비싼 우산을 사면 싸구려 우산을 샀을 때보다는 훨씬 더 안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셋째는, 시간적 여유를 만든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時間的余裕を作る)

특히 전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내리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내리게 되면, 정신이 없어서 우산을 잃어버리게 될 수가 있으니까, 자기가 내리기 몇 정거장 전부터 스마트폰 같은 것은 집어넣고 내릴 준비를 하게 되면 우산도 챙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넷째는 포스트잇이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付箋やほかの人の記憶を利用する)

자기가 있던 자리나 가방 같은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게 되면 나중에 그것을 볼 때, 우산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고, 그리고 그게 불편할 경우에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한테 “내가 좀 잘 잊어버려서 그런데, 있다가 우산을 챙기라고 말해줘”라고 해 놓으면, 만약에 자기가 깜빡했다고 하더라도 옆사람이 알려줄 수 있기 때문에, 우산을 두고 오는 일을 줄일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왜 느닷없이 우산 이야기를 드리느냐 하면 이 분실물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제목을 보았습니다. 그 제목이 뭐였냐 하면 <기도가 먼저냐 전도가 먼저냐>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글을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제목만 보고 제 마음이 적지 않게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줄어들고 그 반면에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하는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먼저입니까. 전도가 먼저입니까.

이는 마치 배가 고픈 상황에서 과자가 먼저냐 아이스크림이 먼저냐 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기도나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에 있어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인지 신약인지, 노아가 먼저인지 모세가 먼저인지, 누가 사울이고 누가 바울인지, 누가 요한이고 누가 요셉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를 하고 무엇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저 기도하고 금식하면 성령님이 임하고 은사도 받고 축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

만약에 그렇다면 <오직 말씀>이라고 하면서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주장을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도 좋고 전도도 중요하지만, 말씀 없는 기도나 말씀 없는 전도는 그야말로 믿음이라고 하는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영적인 골다공증, 아니면 흰개미가 갉아먹은 낡은 목조건물처럼, 어느 순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완전히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성경말씀을 알아야지만 제대로 기도도 할 수 있고 제대로 전도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앞서 말씀 드린 우산 이야기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예,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体から離さない)

우리는 성경 말씀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께서는 아, 그래, 어디를 가든지 성경책을 항상 들고 다녀야겠구나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교회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 때 보면 꼭 성경책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저도 그랬습니다만, 그러면 그 분들이 기도하다가 가끔 성경을 펼쳐 보시나 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냥 앞에 놓고 기도하거나 들고 기도하거나 하다가, 기도가 끝나면 그냥 들고 나가십니다.

여러분,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책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책은 책일 뿐이고 그냥 종이입니다. 그런데 가볍지도 않은 그걸 들고 다니면서 안에는 뭐가 적혀 있는지 보지도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건 마치 아주 좋은 약이라고 하면서 먹지는 않고 맨날 가방에 넣어서 들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가끔 보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에이,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지. 어떻게 성경대로만 살아?”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것은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죽은 말씀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 무슨 뜻이 됩니까. 예수님이나 십자가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다 그냥 책에 적혀 있는 이야기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바로 그 말이 되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슨 옛날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아니에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숨쉬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항상 우리의 머리 속, 그리고 마음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삶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둘째는, 말씀의 가치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싸구려 우산은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얼마 하지 않는 것 까짓거 다시 사면 그만이잖아요. 귀찮게 찾아 나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저도 얼마 전에 잃어버렸던 우산이 별볼일 없는 것이었다면 굳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끼는 우산이었기 때문에 굳이 거기까지 가서 다시 찾아온 것 아니겠어요?

그러나 성경책은 어떻습니까. 이 책이 그냥 우리 손까지 들어온 것 같나요?

생각해보십시오. 이 책이,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와 있습니까. 그것은 우연히 어쩌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이 복음이 바울을 거쳐 우리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당한 고난을 한번 볼까요?


고린도후서 1장 8절~9절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8.兄弟たち。アジアで起こった私たちの苦難について、あなたがたに知らずにいてほしくありません。私たちは、非常に激しい、耐えられないほどの圧迫を受け、生きる望みさえ失うほどでした。
9.実際、私たちは死刑の宣告を受けた思いでした。それは、私たちが自分自身に頼らず、死者をよみがえらせてくださる神に頼る者となるためだったのです。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3.……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24.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25.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26.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27.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참으로 눈물겹지 않습니까. 사실 바울은 출세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라서 지금으로 본다면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청년관료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이와 같은 고생을 감수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고난은 바울만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쓴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이렇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だが今、主はこう言われる。ヤコブよ、あなたを創造した方、イスラエルよ、あなたを形造った方が。「恐れるな。わたしがあなたを贖ったからだ。わたしはあなたの名を呼んだ。あなたは、わたしのもの。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4.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5.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6.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충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확하게 지명해서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닌, 주님이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고, 이는 몇 년 전이나 몇 십년 전이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불러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 전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치를 알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의 그 귀한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과 동행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27절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ですから、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う者はみな、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を襲っても、家は倒れませんでした。岩の上に土台が据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
また、わたしのこれら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行わない者はみな、砂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たとえることができます。
雨が降って洪水が押し寄せ、風が吹いてその家に打ちつけると、倒れてしまいました。しかもその倒れ方はひどいものでした。」

누구는 집을 단단한 반석 위에 지었고, 누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에 비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들겠지요. 기둥 하나 박기 위해 구멍을 파려고 해도, 단단한 바위 때문에 힘이 많이 듭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냥 기둥을 푹푹 꽂으면 세워집니다. 그러면서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을 보고 비웃습니다.

아니, 이렇게 바쁜 세상에 언제 그 단단한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앉았어. 참 미련하게 말이야. 사람이 효율을 생각할 줄 알아야지. 저런 반석 위에 집을 한 채 지을 시간이면, 여기 모래 위에는 집 10채라도 더 세우겠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바람이 불고 홍수가 닥치자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튼튼하게 서 있을 수 있었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예전에 노벨상을 받은 어떤 교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통 수학이나 과학에서 어떤 문제를 풀 경우를 보면 미리 정해진 공식에 따라 거기에 숫자를 대입해서 풀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 무엇보다 공식을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교수님은 수상 연설에서. 자기는 학생 때 어떤 문제를 보면, 학교에서 가르쳐준 공식을 쓰지 않고 풀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 문제를 풀더라도 다른 학생들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냐 하면, 공식 하나를 배우더라도 단순히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식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특히 공부 같은 경우를 보면, 무슨 머리 좋은 척하고 효율을 따지면서 공부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인 공부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보면 많은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라고 합니다.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를 다 읽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성경에 어떤 말씀들이 적혀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귀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래 다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말씀을 띄엄띄엄 밖에 모른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어떤 흐름 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어서, 결국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그야말로 누더기와 같은 성경지식이 되고 말아요. 그런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 삶에 있어서 무슨 힘이 되겠으며, 우리 믿음에 있어서 무슨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휴, 그 두꺼운 성경을 언제 읽고 있어……가 아니라, 시간에 여유를 갖고 말씀을 믿음의 양식 삼아 미리미리 담아두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기억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바로 이 목사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설교에 있어서 생전처음 듣는 말씀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맨날 새로운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겠지요.

사실 목사의 임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고, 그 말씀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설명을 드리는 것, 그것이 가장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말씀을 전할 때에, 제 개인적인 말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많이 말씀 드리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이 기록하기를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계신 여러분들께서도 어련히 잘 하고 계실 줄 알지만,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예배를 인도한다면서 이 강단에 서서, 성경에도 없는 제 꿈이나 환상 이야기나 하고, 세상 정치 이야기나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쩌면 그게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목사로서 할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 어느 SNS에 보니까 누가 이런 글을 써 놨더라고요.

자기는 목사인데, 정치인 누구를 지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그 낯뜨거운 말도 같이 말합니다. 그런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시죠? “제 말을 사람 말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는 말 말입니다.

아니, 자기가 하는 말을 사람 말로 듣지 않으면 뭔데요? 자기가 무슨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라도 된다는 소리입니까.

가끔 이렇게 보면 자기가 목사라고 하면서 무슨 대단한 영적인 사람, 그야말로 물 위라도 걸을 수 있을 것처럼 하고, 여차하면 당장 홍해라도 가를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 설교 동영상을 봤는데, 이 분은 그래도 좀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설교에서 하시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말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그냥 <우리>면 <우리>지, <저와 여러분>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는 누구고 여러분은 누군데요? <자기>는 목사님이니까 특별하고 <여러분>은 목사님이 아니니까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들을 부끄럽지도 않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봅니다.

로마서 15장 15절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여기서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되어 있지요?

자, 여기 원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한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 예수님의 말씀을 적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제 말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예, 여기서 제 말을 안 믿겠다고 하면 좀 서운하겠죠?

그럼 백 보 양보를 해서 제 말을 믿으셨다고 쳐봐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적어왔다고 해요. 그렇다면 이 글이 이제부터 무슨 야고보서나 유다서와 같은 성경처럼 성필서……가 된다? 안 된다?

되긴 뭐가 되겠습니까. 이 원고요? 예전에 무슨 강연할 일이 있어서 그 때 써 둔 원고예요. 그 때 썼던 원고를 그냥 이면지에 찍어 두었던 거예요.



갈라디아서를 봅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8절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6.私は驚い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自分たちを召してくださった方から、このように急に離れて、ほかの福音に移って行くことに。
7.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8.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여러분,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 더 이상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 이것이 성경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웬만하면 목사님 하시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 말씀이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었을 때에 한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라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전혀 성경적이지 않고 완전히 자기 생각으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말, 세상적인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에 목사님 말씀이라고 해서 꼭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성경적이지 않은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2.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예, 성경을 많이 읽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제 떡만이 아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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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7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2023년 8월 27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4절~16절
“14.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4節~16節
“14.私の兄弟たちよ。あなたがた自身、善意にあふれ、あらゆる知識に満たされ、互いに訓戒し合うことができると、この私も確信しています。
15.ただ、あなたがたにもう一度思い起こしてもらうために、私は所々かなり大胆に書きました。私は、神が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ゆえに、
16.異邦人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仕える者となったからです。私は神の福音をもって、祭司の務めを果たしています。それは異邦人が、聖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た、神に喜ばれるささげ物とな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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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7번째 시간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①” 聖書をどう読むか①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드릴 말씀이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늘과 다음주로 2회에 걸쳐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ペテロに働きかけて、割礼を受けている者への使徒とされた方が、私にも働きかけて、異邦人への使徒と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した。

예수님의 사도 중에서 베드로는 할례자 즉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전파라는 사명을 받았다면 바울 자신은 이방인을 향한 선교라는 사명을 받은 사도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특히 이 서신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수신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만 그 말씀에 적힌 본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 로마서를 ‘너희’에게 썼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인 즉 이방인에게 쓴 서한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잘 하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썼는데, 그 이유는 내가 이방인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략 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에 의하면 바울은 그들이 이미 믿음 안에서 잘하고 있는 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하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썼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성경을 읽어 보셨습니까. 만약에 한 번도 안 읽어 보셨다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 무엇이 성경에서 벗어난 엉터리 가르침인지 구분을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을 한 두 번 읽어 보셨다고 한다면 역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라고 하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두 번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학교 교과서도 한 두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든데, 그 방대한 내용의 성경을 몇 번 읽었다고 해서 어떻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성경을 수도 없이 많이 읽으신 분 계십니까. 제가 진정으로 말씀 드립니다. 정말로, 정말로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전혀 읽지 않아도 문제입니다만, 그저 많이 읽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신 창세기에 대해서 한 번 볼까요.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니, 교회에 전혀 다닌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담과 하와에 대한 이야기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도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많이 읽어 보신 분들은 뭐 달달달달 외울 정도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그러나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아름다운 것으로 넘치고 부족함이 없던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 마저도 빼앗겨서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만 것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 없으시죠? 그렇다면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는 주일학교에서도 종종 나오는 질문인데,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좀 제대로 만드시지 왜 죄를 범하도록 지으셔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애초에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드셨으면 좋았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뱀이 유혹한다고 거기에 넘어가는 바람에 죄를 짓고 말았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있어서는 아주 모범답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그저 주어진 프로그램에 맞게만 움직이도록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안 지을 수도 있는 그와 같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에요.

이 주장을 누가 처음에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 현재 보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부분의 주석서에 그렇게 적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이 주장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을 때 보니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만약에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자유의지라고 한다면, 그런 의지는 꼭 사람한테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는데, 그 강아지한테 공을 던지면 재빨리 뛰어가서 물고 오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공을 던져도 자기가 귀찮으면 안 가지고 와요. 그렇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강아지한테 자유의지를 주신 결과인가요?

이렇게 조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그걸 그대로 베끼면서 그게 하나님 말씀인 줄 알고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야말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고 말았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여기서 제일 잘 못한 건 누구에요? 예,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이 쓸데없이 자유의지를 주신 바람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달리도록 만드셨다면, 가장 비난 받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비난 받아야 한다? 이는 궤변입니다. 절대로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에 담긴 뜻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성경을 수십 번 읽은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에요.


자, 이 논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자유의지>라는 단어입니다. 누가 집어넣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엉뚱한 단어를 집어넣으니까 그 결과가 뭐예요? 예, 가장 잘못한 분은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결론밖에 안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풀어야 한다? 예, 그렇습니다.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선 기본적으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하는 자유의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성경에 그와 같은 기록이 나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굳이 마귀 사탄의 유혹이 없었다 하더라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을 하는 부분이 나올 만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고민을 한 결과, 아, 역시 먹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뱀을 가장한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해서 유혹할 때까지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는 장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그 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단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유의지고 뭐고 간에 그들은 그와 같은 생각, 말하자면 죄를 지으려고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일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 사탄이 귓가에서 속삭였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죄에 대한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고 마는 장면을 보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자유의지라고 해버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예를 들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전거가 초보일 때에는 정말 달리는 모습도 불안정하고, 커브를 돌 때 같은 경우에 넘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몇 년 정도 자전거를 탔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없겠지요.

정말 자전거에 어디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라도 발생하지 않는 이상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일은 거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말합니다. 지금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다가 넘어져보세요……라고 하면 가능할까요? 물론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겠지요.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인데 자전거 핸들을 엉뚱한 데로 꺾으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어느 정도 타는 사람이 이를 하기 위해서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안 넘어지도록 핸들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억지로 넘어지게 한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핸들을 꺾는다? 여러분께 이를 해보시라는 말씀은 절대로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웬만한 각오가 없으면 이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떨까요. 마귀가 속삭입니다. 너, 돈 필요하지? 저기 서 있는 고급차 보여? 그 차가 출발할 때 그 앞에서 힘껏 넘어져봐. 그러면 돈을 뜯어낼 수 있을 거야.

이런 유혹이 들어왔을 때 넘어가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신가요? 아니요.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전거가 아니라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달리는 차 앞에 일부러 맨몸으로 뛰어나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 여러분도 들어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맨정신인 사람한테 칼을 주면서, 자, 이 칼로 저기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공격해……라고 누군가가 한다면,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냐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 되어 있을 때, 마귀 사탄이 유혹을 한다면 이와 같은 범죄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뉴스를 통해서도 접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두고 우리에게도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해야 하겠지요.

만약에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아담과 하와도 이와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되냐 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유의지로 인하여 죄를 짓는다는 행위를 선택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내용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 구절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堅く信仰に立って、この悪魔に対抗しなさい。ご存じのように、世界中で、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が同じ苦難を通ってきているのです。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귀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되어 그 유혹에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단 한 번도 이를 먹어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유혹을 하자 그들은 비로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그들이 저지른 죄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17절~18절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もし一人の違反により、一人によって死が支配するようになったのなら、なおさらのこと、恵みと義の賜物をあふれるばかり受けている人たちは、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により、いのちにあって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違反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不義に定めら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義の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認められ、いのちを与えられ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한 사람 즉 아담은 한 범죄를 저지름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정죄 즉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 것은 <의로운 행위(義の行為)>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그 행위가 죄악이었다고 한다면, <의로운 행위>는 그 열매를 먹지 않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접근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었는다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열매를 먹지 않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답은 결국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우리는 그 열매를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 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더러 금하신 구체적인 행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거나 어디를 가지 말라고 하셨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로 이 불순종,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의로운 행위>가 무엇입니까. 그렇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하는 <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장 19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이렇게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점은, 우리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것이 그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몇 번 읽었느냐 하는 것은, 마치 교회에 몇 년 다녔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한 구절 읽었다 하더라도, 단순히 유명한 목사님이나 신학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맞겠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담긴 주님의 마음을 알고자 노력하는 것, 그와 같은 마음 가짐이 필요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로마에 있는 형제들을 향해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이 귀한 로마서를 썼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에게 A냐 B냐, 라고 하는 식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불순종이냐, 순종이냐>, <육신이냐, 영이냐>, 그리고 <멸망이냐 영생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神は、実に、そのひと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それは御子を信じる者が、一人として滅びることなく、永遠のいのちを持つためである。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이제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깨달아 감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이 아니라 순종을,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통해서, 마침내 멸망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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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6회 순결한 소망
2023년 8월 20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0절~13절
“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0節~13節
“10.また、こう言われています。「異邦人よ、主の民とともに喜べ。」
11.さらに、こうあります。「すべての異邦人よ、主をほめよ。すべての国民が、主をたたえるように。」
12.さらにまたイザヤは、「エッサイの根が起こる。異邦人を治めるために立ち上がる方が。異邦人はこの方に望みを置く」と言っています。
13.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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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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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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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6번째 시간으로서 “순결한 소망” 混じり気のない望み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 중에서 우선 12절과 13절을 보고 난 다음에 10절과 11절로 돌아오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2절
“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2.さらにまたイザヤは、「エッサイの根が起こる。異邦人を治めるために立ち上がる方が。異邦人はこの方に望みを置く」と言っています。

이 말씀 중에서 12절은 이사야 서를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여기서 이새의 뿌리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새는 누구입니까. 그렇죠.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누구나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새의 뿌리에서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메시야 즉 구세주가 누구냐 라고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계보에 보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이새와 다윗을 거처 요셉 그리고 예수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는데, 이는 바로 <열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본다면 이사야 11장 10절이나 로마서 15장 12절에 보면 모두 <열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어나 다른 번역본을 본다면, 이사야 서에서의 <열방>을 <모든 민족>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 로마서에서는 이를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방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소망을 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우선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것처럼 이새의 뿌리, 이새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육적인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이방인 즉 이 세상 모든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서 소망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12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13절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15장 13절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どうか、希望の神が、信仰によるすべての喜びと平安であなたがたを満たし、聖霊の力によって希望にあふれ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이 소망이라고 하는 것,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은 홀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에 그 시작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으로 끝나버렸다면 이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더라……라고 하는 옛날 이야기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소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지금까지는 많은 내용들을 좀 간략하게 정리를 했기 때문에 다소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조금 더 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새의 뿌리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이전에는 안 계셨다는 뜻은 아니지요.



요한복음 1장 1절~3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셨으며 하나님 또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 사람처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예수님도 지으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만약에 피조물이었다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별로 대단하지 않을 것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 그것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피조물인 사람은 누군가의 죄를 대신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성경에도 의인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노아나 아브라함 같은 사람한테 부탁해서, "야, 미안한데 말이야, 많은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네가 대신 십자가에 달려줄 수 있겠니?" 라고 하면 되지 않았겠어요?


역사상 보면 지금까지도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의인이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순교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님 없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 주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겨졌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집에 있으면서도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누구는 그러더라고요. 학원에 가지 않더라도 웬만한 자격시험은 인터넷 동영상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딸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직접 시도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사실 정말 그럴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가톨릭의 어떤 한 젊은 신부님이 말씀을 전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왜 그 방송을 클릭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마침 그 동영상을 보니까 미사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모습 같던데, 그 말씀을 들어보니까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독교 개신교는 <오직 성경이다, 오직 말씀이다>라고 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못 마땅하셨나 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독교에는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있지 않느냐, 삼위일체라는 말도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믿으면서, 마리아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듣고 있으니까 좀 흥미롭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나 하고 계속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이 또 하시는 말씀이, 구약에 보더라도 마리아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 말씀 자체는 맞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는 마태복음에 보더라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되어 예수님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인용하나 했더니만 아니더라고요.

출애굽 당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언약궤에 넣고 이스라엘 자손들, 더 구체적으로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짊어지고 다니잖아요? 그 언약궤가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거예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창세기에 보시면 아버지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주려고 했던 축복을 동생 야곱이 속임수를 써서 가로채 버리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서는 당연히 화를 내지요. 그래서 이 야곱을 죽이겠다고 찾아 나서자 그는 멀리 자기 어머니 고향을 향해 도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28장에 보시면 그 과정에 야곱이 길에서 잠을 자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마리아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마리아가 어디 등장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면서 들어보세요.

이 신부님 말씀에 그렇다는 건데…….

창세기 28장 12절~15절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세기 28장 12절~15절
すると彼は夢を見た。見よ、一つのはしごが地に立てられていた。その上の端は天に届き、見よ、神の使いたちが、そのはしごを上(のぼ)り下(お)りしていた。
そして、見よ、主がその上に立って、こう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父アブラハムの神、イサクの神、主である。わたしは、あなたが横たわっているこの地を、あなたとあなたの子孫に与える。
あなたの子孫は地のちりのように多くなり、あなたは、西へ、東へ、北へ、南へと広がり、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また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祝福される。
見よ。わたしはあなたとともにいて、あなたがどこへ行っても、あなたを守り、あなたをこの地に連れ帰る。わたしは、あなたに約束したことを成し遂げるまで、決してあなたを捨てない。」

내용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찾으셨습니까. 이 신부님은 이 구절 중에서 어디에 마리아가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의 꿈속에 등장한 사닥다리가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마리아를 인정 안 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었어요.

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넣어두었던 언약궤와 야곱의 꿈속에 나타난 사닥다리가 마리아라고 하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예, 상당히 특수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우스갯소리가 아니에요. 상당히 특수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을 통틀어도 언약궤나 꿈속에 나타난 사닥다리가 마리아라고 하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데 이걸 믿으라는 거예요. 하지만 이를 믿기 위해서는 성경을 초월한 상당히 특수한 믿음이 필요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가톨릭에서 이 마리아라고 하는 개념이 등장한 그 배경에는 사실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복음이 그리스 지역으로 전해지는 가운데에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잘 받아드릴까 하는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에 보면 아프로디테다 아르테미스다 해서 여러 가지 여신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복음에도 여신이라고 하는 요소를 가미 시키면 그 사람들이 더 잘 믿게 되지 않을까 해서, 말하자면 마리아를 여신처럼 해서 전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합니까. 그와 같은 가르침은 성경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더니 문득 한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창세기 6장 1절~3절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さて、人が大地の面(おもて)に増え始め、娘たちが彼らに生まれたとき、
神の子らは、人の娘たちが美しいのを見て、それぞれ自分が選んだ者を妻とした。
そこで、主は言われた。「わたしの霊は、人のうちに永久にとどまることはない。人は肉にすぎないからだ。だから、人の齢は百二十年にしよう。」


이는 노아의 방주 사건이 있기 전에 기록된 내용인데, 대표적인 성경의 난해한 구절 중 하나라고 하지요.

우선 1절부터 볼까요?


창세기 6장 1절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さて、人が大地の面(おもて)に増え始め、娘たちが彼らに生まれたとき、

이 말씀부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은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잖아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위해서는 아들만이 아니라 당연히 딸들도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이 구절이 그나마 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앞뒤가 거꾸로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굳이 사람들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고, 그 다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2절을 볼까요?

창세기 6장 2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神の子らは、人の娘たちが美しいのを見て、それぞれ自分が選んだ者を妻とした。


여기를 보면 더욱 흥미롭지 않습니까. 1절에는 <그들에게서 난 딸들(娘たちが彼らに生まれたとき)>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이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까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렇다면 창세기 당시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의 딸들과 결혼을 하셨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여기에 보시면 <아들>이 아니라 <아들들(子ら)>이라고 되어 있어요. 즉, <한 아들>이 아니라 <여러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아들들(神の子ら)이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美しい人の娘たち)을 아내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게 참 무슨 내용인지 난해하지요.

그런데 3절을 보면 한 가지 명확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 3절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そこで、主は言われた。「わたしの霊は、人のうちに永久にとどまることはない。人は肉にすぎないからだ。だから、人の齢は百二十年にしよう。」


이 구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이고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백이십 년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하여 일부 신학자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나온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해 보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은 100년이 안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사람의 수명이 120년으로 될 것이라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5장에 의하면 홍수 이전에는 나이가 900살 이상까지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만, 홍수 이후에는 그 수명이 점점 줄어들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있어서도 그 수명이 120세까지 못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수명을 900세에서 120세 정도까지 줄였다는 해석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들과 아름다운 사람의 딸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에 있어서는 바로 복음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고 하는 말을 <하나님의 생각들(思い)>과 <사람의 생각들(思い)>이라고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 그 자체로 남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의 생각들과 뒤섞이게 되어 결국 육신 즉 육의 생각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에 대한 내용으로는 다음 구절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서 8장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이처럼 영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으로 인해서 오염이 되면 결국은 그 생각이 악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어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순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편 12편 6절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主のことばは 混じり気のないことば。 土の炉で七度試され 純化された銀。

이 구절에서 <순결>이라는 말로 사용된 히브리어 원어는 <테호로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는 <다른 것과 섞이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주시고 새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이제 이 소망을 온 천하 만민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 만민이라고 해서 꼭 무슨 아프리카나 밀림 오지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아직 복음을 모르는 우리 이웃, 바로 거기가 땅끝이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이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과정에서 성경에 없는 사람의 생각을 전해요?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엉뚱한 사람의 생각을 전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무조건 금식하면 병이 낫는다? 무조건 기도 많이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사실 그럴 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막무가내 식으로 금식이나 기도만 강조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의 생각이 되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근본은 바로 성경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도 모르고 어떻게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겠으며, 성경도 모르고 금식만 한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뒤섞인 또다른 우상숭배나 미신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15장 10절~1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0절~11절
“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0.また、こう言われています。「異邦人よ、主の民とともに喜べ。」
11.さらに、こうあります。「すべての異邦人よ、主をほめよ。すべての国民が、主をたたえるように。」


이제 우리가 올바른 말씀,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아직 믿음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우리 이웃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한 목소리로 우리의 소망되신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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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5회 해방을 주신 예수님
2023년 8월 13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9절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8節~9節
“8.私は言います。キリストは、神の真理を現すために、割礼のある者たちのしもべとなられました。父祖たちに与えられた約束を確証するためであり、
9.また異邦人もあわれみのゆえに、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れゆえ、私は異邦人の間で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あなたの御名をほめ歌い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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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5번째 시간으로서 “해방을 주신 예수님” 解放をくださったイエス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가상칠언이라는 말씀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가상>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위>라는 뜻이고, <칠언>이라고 하는 것은 일곱가지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상칠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하신 일곱가지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누가복음 23장 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彼らは、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が分かっていないのです。」


둘째는 누가복음 23장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まことに、あなたに言います。あなたは今日、わたしとともにパラダイスにいます。」

셋째는 요한복음 19장 26절~27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

「女の方、ご覧なさい。あなたの息子です」/「ご覧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

넷째는 마태복음 27장 46절과 마가복음 15장 34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

다섯째는 요한복음19장 28절
“내가 목마르다”

「わたしは渇く」

여섯째는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完了した」

일곱째는 누가복음 23장 46절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

이렇게 일곱가지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상팔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세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가상칠언에 대해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오늘은 이 중에서 여섯 번째 말씀에 좀 주목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이 나오는 요한복음 19장 30절 전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イエスは、酸いぶどう酒を受けられると、「完了した」と言われた。そして、頭をたれて、霊をお渡しになった。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完了した」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죄를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사역을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모든 사역을 다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와 같은 설교 말씀, 어디 좀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사실 많은 분들께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아니,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은혜로운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저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마침표를 찍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좀 찝찝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에 있어서 제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영어 성경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은 영어성경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께서는 마치 원어를 인용하듯이 영어성경을 인용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영어성경도 또한 하나의 번역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글성경의 경우를 본다면 기본적으로 구약은 히브리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신약은 헬라어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성경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느냐 하면,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성경 말씀을 살펴볼 때에는 기본적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성경을 사용합니다만, 그 뜻을 살펴볼 때에는 원어도 물론입니다만, 우선 영어 성경을 살펴봅니다.

일단 일본어 성경을 살펴보는 이유는, 동영상 촬영을 할 때 한국어만이 아닌 일본어로도 말씀을 전해야 하고, 그럴 때에는 일본어 성경을 인용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어는 한국어와 문법상으로도 상당히 유사하고, 그리고 같은 한자권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영어 성경은 어떠냐 하면, 미국이나 유럽 등 영어권을 본다면 동양에 비해 성경 연구에 대한 역사가 월등하게 길고, 그리고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회자 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 성경을 비교해보면 각각 그 번역자들이 원어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원어 성경만을 읽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이 있게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 그렇다면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있어서 영어성경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영어권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영어성경은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성경은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KJV (King James Version)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NIV 성경은 가장 일반적인 성경으로서, 단어가 현대어와 가장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본다면 현대인의 성경이나 표준새번역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NASB 성경은 주로 신학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성경으로 알고 있어요. 좀 문장이 문어체에 다소 가깝습니다. 이 성경이 한글로 본다면 개역개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KJV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한국에서는 흠정역이라고도 하는 성경입니다. 이 흠정역은 한글로 번역한 한국어판 킹제임스 성경도 있습니다.

이건 좀 여담입니다만, 일부 단체에서는 오로지 이 KJV 흠정역 성경만이 진정한 성경이라고 하면서 다른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은 물론이고,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흠정역 모두 공인된 성경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어떨까요.

한국어 성경에 본다면 개역개정만이 아니라 표준새번역,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 모두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新共同譯 「成し遂げられた」
新改譯 「完了した。」
口語譯 「すべてが終った」

자, 그렇다면 영어성경에 있어서 이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개역개정 성경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한다면, 언뜻 생각하기에 <done>이나 <complete> 처럼 <성취했다>, <완료했다>는 뜻의 단어가 쓰였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영어성경을 보면 앞서 말씀드렸던 대표적인 영어성경에서 모두 <finished>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어요.

이를 번역하면 <성취했다>거나 <완료했다> 라기 보다는 그냥 <끝났다> 라는 뜻이 되어버리거든요.

아니,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고 역사도 깊은데, 왜 <다 이루었다> 또는 <완료했다>는 단어가 아니라 굳이 <끝났다>는 말을 썼는지 오랫동안 의문이었습니다.

참고로 헬라어 원어는 <테텔레스타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어느 쪽으로든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만약에 이를 <다 이루었다>거나 <완료했다>가 아니라 <끝났다>라고 번역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다 끝났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적지 않게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일단 처음 드는 의문이 <뭐가 끝났다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그래, 뭐, finish 라는 단어에도 의역을 한다면 <다 이루었다>, <완료했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치자……이 정도로, 말하자면 타협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어? 이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등장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어쩌면 <다 끝났다>였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 끝났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와 <다 끝났다>. 이 두 말씀 중에서 <다 끝났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좀 단순하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다 끝났다>라고 하셨다면, 성경에는 다른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 <끝난다> 즉 <끝>이 있다면 무엇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끝>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죠. 바로 <시작>입니다.

나중이 있다면 처음이 있어야 하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예수님께서 <끝났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무엇이 끝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반대말인 <시작>을 찾아야만, 그 끝난 것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의 반대편에 있는 <시작>은 어디일까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시작>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동영상을 보시거나 음성으로 들으시는 분께서는 잠시 멈추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성경에서 <시작>은 어디일까요.

자, 조금 더 쉽게 말씀 드려볼까요? 성경에서 <시작> 그러니까 다른 말로, <태초(はじめ)>는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끝>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어디냐 하면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무엇을 말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말씀으로 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모두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私たちは、律法が霊的なもの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しかし、私は肉的な者であり、売り渡されて罪の下にある者です。

로마서 7장 22절~24절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私は、内なる人としては、神の律法を喜んでいますが、
私のからだには異なる律法があって、それが私の心の律法に対して戦いを挑み、私を、からだにある罪の律法のうちにとりこに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のです。
私は本当にみじめな人間です。だれがこの死のからだから、私を救い出してくれるのでしょうか。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나 창세기에서 시작된 죄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해도 내 안에 있는 죄가 자꾸만 나를 사로잡고 있어요. 내 힘으로는 내 능력으로는 이를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또 그로 인해서 다른 죄를 짓게 되고 맙니다.

이 악순환을 끝내려고 해도 내 힘으로는 끝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불순종으로 비롯된 이 죄의 악순환을 끝내주시고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9절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私は言います。キリストは、神の真理を現すために、割礼のある者たちのしもべとなられました。父祖たちに与えられた約束を確証するためであり、
また異邦人もあわれみのゆえに、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れゆえ、私は異邦人の間で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あなたの御名をほめ歌い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예수님께서는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割礼のある者たちのしもべとなられました)고 하는데, 그 이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잠시 여기서 우리는 법률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 나라에 있는 헌법이나 법률은 기본적으로 누가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이는 원칙적으로 당연히 그 나라 국민이 지키도록 만들어진 것이지요. 말하자면 그 나라의 국민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명시해 놓은 것이 바로 그 나라의 헌법이자 법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습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율법은 출애굽 때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즉 이 율법을 지켜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들이었던 것이고, 그 징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할례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시면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고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징계를 받지도 못하시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가 없어요.

어쩌면 예수님께 있어서 가장 쉬운 일은 율법을 없애 버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에 율법을 만드실 수도 있고 없애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이 있었는데, 그 법률을 없애 버렸어요. 그러면 그 법이 있었을 때에는 그 행위가 범죄였습니다만, 그 법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그 행위는 범죄가 아니게 됩니다. 범죄가 아니게 되면 당연히 처벌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만약에 율법을 없애 버리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율법을 없애 버리게 되면 이제 사람을 처벌할 근거가 없어졌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 있어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처벌할 근거를 없애 버리는 것이요, 또 하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쉽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쉬운 일은 율법을 없애 버리는 일이겠지요. 그러면 우리도 죄에서 해방이 되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도 먹고 알도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 치고 가제 잡고, 마당 쓸고 돈도 줍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희한하게도 예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그대로 둔 채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시는 쪽을 선택하셨던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우리보다 머리가 좀 딸려서 깜박하고 미처 그런 생각을 못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중에서 9절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로마서 15장 9절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また異邦人もあわれみのゆえに、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それゆえ、私は異邦人の間で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あなたの御名をほめ歌い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서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율법을 폐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순종이자 반역 아니겠습니까.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요, 정면으로 반항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택하셨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율법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모두 받아 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그 저주와 사망을 끝내주시고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요한계시록 말씀이 새로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わたしはアルファであり、オメガである。最初であり、最後である。初めであり、終わりである。」

예수님께서는 시작하실 능력도 있으시고 끝내실 권능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 끝내는 권능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만약에 거기서 끝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살아나셨나요?

사도행전 2장 24절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しかし神は、イエスを死の苦しみから解き放って、よみがえらせました。この方が死につながれていることなど、あり得なか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권한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서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아닌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하나님이 살리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 천국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 시작과 끝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끝까지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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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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