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회 삶의 목적
2023년 8월 6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6절~7절
“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6節~7節
“6.そうして、あなたがたが心を一つにし、声を合わせ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をほめたたえますように。
7.ですから、神の栄光のために、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受け入れ合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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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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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4번째 시간으로서 “삶의 목적” 人生の目的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6절 말씀부터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6절
“6.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6節
“6.そうして、あなたがたが心を一つにし、声を合わせて、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をほめたたえますように。

여러분께서는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한 번 볼까요.


이사야 43장 21절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 즉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지은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세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사야서를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이사야 48장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송과 영광을 결코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기록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는 제가 좀 성격이 온순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좀 낯간지럽지 않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았으면 좋겠다……뭐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생각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런 걸 받아서 뭐하게? 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해서 백성을 만드셨다고 하세요.

오늘은 우선 이 점부터 알아보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회사에 대해서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어떤 회사에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회사 사장님이 조회 시간에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을 해요.


“제가 이 회사를 세운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이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이윤을 창출할 생각이 없어요. 우리가 설령 이득을 보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회사가 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새로 회사에 들어갔는데, 회사 사장님이나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한 가지 권고 말씀을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그 회사, 당장 그만 두세요. 더 늦기 전에 나오셔야 합니다…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그 이유가 뭐예요. 예, 항상 말씀 드리듯이, 회사라고 하는 곳은 봉사단체가 아니에요. 정치단체도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선 돈을 벌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임이 바로 회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장님이 회사를 만들어 놓고는 회사로서 가장 중요한 목적인 돈을 벌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회사가 무슨 국민들 세금으로 운영되는 관공서도 아니고,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자선단체도 아니잖아요.

물건을 만들어서 팔든 서비스를 제공하든지 해서 어떻게 해서든 간에 이윤을 만들어야 회사도 운영하고 직원들 월급도 주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회사라고 하면서 이득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이는 다시 말해서 직원들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해요? 예, 더 늦기 전에 그런 회사는 빨리 나오는 것이 상책인 것이지요.

우리가 무슨 뭐, “돈 때문에 일을 한다” 라고 하면 안 좋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회사라고 하면서 돈을 안 벌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동차를 팔겠다면서 자동차를 안 만드는 회사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본질이 빠진 말이라는 것이지요.

회사 사장님이 회사를 차리는 이유는 뭐냐 하면,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조금 더 있어 보이게 표현한다면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장님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께서 회사를 차렸어요. 그러면 일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일단 몇 명이라도 직원들을 뽑아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직원은 최소한 회사에서는 누구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죠. 회사를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사장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선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이사야 43장 21절
“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여기서 <이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를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이 직원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뽑았나니 나를 위해 일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하면 너무 이기적으로 들릴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이게 사실 아니겠습니까. 사장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요. 그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려고 해요. 그렇다면 직원들은 그 사장님을 위해, 말하자면 사장님이 돈을 벌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하나로 해서 일을 같이 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이게 사장님만을 위한 일이에요? 사장님이 돈을 벌고 회사가 영업이익을 내야지만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있고 예상보다도 훨씬 큰 이익을 냈다고 하면 특별보너스 같은 것도 있겠지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나 장비들도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고, 직원들에게는 주거비나 자녀들 교육비 지원이 있을 수도 있고, 기타 여러 복리후생 같은 혜택도 제공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회사가 맨날 돈이 안 되는 일만 해요. 사장님은 돈을 벌 생각이 없고 맨날 골프만 치러 다닌다거나 이상한 곳에만 돈을 써요. 그러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겠지요.

또한 요즘은 취업난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뽑히는 것보다도 뽑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에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고는 합니다만, 사실 뽑히는 쪽 그러니까 지원자 입장 보다도, 신입사원을 뽑는 회사 쪽 입장이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하거든요.

왜냐하면 직원 입장에서는 싫으면 그냥 그만 두면 돼요.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사장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너 모가지야” 라고 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은 한국이나 일본을 보더라도 직원을 함부로 그만두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뽑아 놓으면 그야말로 범죄나 정말 심각한 악의적인 행위가 없는 이상, 단순히 일을 못한다고 해서 자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직원 하나를 뽑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회사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그만큼 신중하게, 경우에 따라서는 몇 번이나 면접을 보고 검토를 거친 다음에 선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앞서 살펴본 이사야 42장과 48장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이사야 48장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우리 회사에서 뽑은 우리 회사 직원이라면 당연히 우리 회사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직원이 우리 회사 사장님이나 회사 이름을 더럽힐 뿐 아니라 다른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어요.

만약에 이렇게 된다고 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업무상 배임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이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설마 돈 몇 푼을 원하시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이사야 44장 24절에 중반부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わたしは万物を造った主である。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깟 돈 몇 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예로부터 제물을 바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そこ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です。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으로 드리고, 지금도 예물을 주님께 바치는 이유가 단순히 그 재산적인 가치가 아닌, 거기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린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물을 바친다는 것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단순히 제물을 바쳤다고 해서 온전히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바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단서가 되는 것을 6절과 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6절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로마서 15장 6절 초반부
“6.한마음과 한 입으로……”

あなたがたが心を一つにし、声を合わせて

그렇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에스겔서 1장에 보시면 바퀴와 생물들에 대한 환상이 등장하는데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21절 말씀과 같습니다.

에스겔 1장 21절
“21.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生きものが進むときには輪も進み、生きものが止まるときには輪も止まり、生きものが地上から上がるときには輪も上がった。生きものの霊が輪の中にあったからである。

이 말씀에 보시면 바퀴들 가운데에는 생물의 영이 있는데,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바퀴가 달린 자동차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가기 위해서는 네 바퀴의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 중 하나가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고 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단순히 앞으로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에 있어서도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7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5장 7절
“7.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7節
“7.ですから、神の栄光のために、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受け入れ合いなさい。”

주님은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10절
“9.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彼らは新しい歌を歌った。「あなたは、巻物を受け取り、封印を解くのにふさわしい方です。あなたは屠られて、すべての部族、言語、民族、国民の中から、あなたの血によって人々を神のために贖い、
私たちの神のために、彼らを王国とし、祭司とされました。彼らは地を治め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스스로의 피로 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우리 믿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순종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다가가려고 해도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 앞을 막고 있는 바람에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성전에서 지성소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과도 같습니다. 그 휘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무슨 바람이 불면 펄럭이는 커튼 같은 것이 아니에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 크기는 높이가 22미터가 넘고, 그 두께가 10센티 이상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두께가 10미리가 아니라 10센티 이상이었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찰랑거리는 헝겊 같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벽이나 돌담처럼 두껍고 단단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가복음 15장 38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すると、神殿の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た。


그처럼 마치 벽이나 돌담과도 같았던 성소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찢어짐으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악이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지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오로지 예수님의 피로만이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앞서 회사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자면, 회사에 들어가면 월급만 주는 것이 아니라, 책상, 의자, 컴퓨터 등 많은 것으로 채워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로 쓰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와 같은 것들을 사용해서 회사를 위해 일을 하고, 회사에 이익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이를 뒤집어보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내가 회사를 위해서 일을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리고는 마침내 회사에서 쫓아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회사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회사나 직원 생각은 안 하고 자기 배만 불리기 위해 열을 올리는 사장님도 많이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우리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만 생각하는, 마치 악덕 기업주 같은 그런 이기적인 하나님이십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로마서 8장 32절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私たちすべてのために、ご自分の御子さえも惜しむことなく死に渡された神が、どうして、御子とともにすべてのものを、私たちに恵んで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회사가 어려워지면 직원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돈만 빼내서 도망가 버리는 사장도 있지만, 반면에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자기 개인 재산까지도 내놓는 사장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셨습니다.

멸망을 향해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든 살려 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낌 없이 우리에게 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우리가 왜 사는가, 라고 하는, 우리 삶의 목적을 다양하게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시편 57편 7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神よ 私の心は揺るぎません。 私の心は揺るぎません。 私は歌い ほめ歌います。


이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확정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도 아끼지 않고 그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 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도 넘치는 축복 놀라운 축복으로 가득 채워지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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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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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2회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2023년 7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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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5節
“5.どうか、忍耐と励ましの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ふさわしく、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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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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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3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イエス様と同じ思いを抱く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5.どうか、忍耐と励ましの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ふさわしく、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앞서 4절에 나와 있었던 바와 같이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서로 뜻이 같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본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느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연세 지극하신 어르신 두 분이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나눕니다.

말소리가 들려오길래 본의 아니게 들어보았더니 대충 이런 내용이더라고요.

둘 중 한 분이 어디 계시는데, 어떤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아마도 이 분에게 전도를 했나보죠?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그랬나봐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르신이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냐 하면, “이보시오. 당신 자식이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면 좋겠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 믿으라고 한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귀찮게 구는 예수쟁이를 물리친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을 말하듯이 자랑스럽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까 이 어르신이 그래도 성경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자, 그럼 만약에 여러분께서라면 이 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믿음이 없는 분한테 가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했더니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 자식이나 아니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면 좋겠냐고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십자가든 뭐든 하나님이 못박히라고 하면 못박혀야죠~라고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안 믿는 사람이 믿겠다고 하겠어요? 저 같아도 벌써, 그런 건 당신이나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셨나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대부분이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음을 맞이한 사도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달린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갖나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4장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い者は、わたしの弟子になる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는 말씀하셨으나, 한 번도 우리더러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하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했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참수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 십자가에 달리기를 원했지만 본의 아니게 참수를 당한 것인가요?

저는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다 알고 계셨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차마 그 엄청난 고난을 우리에게 겪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고통을 몰랐기 때문에 겁도 없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냥 혼자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농담이고, 이제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순교자들이 달린 십자가는 그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작은 공통점과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작은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는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네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6절
“36.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이 기도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십자가의 괴로움에 대해서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거 몰랐으니까 했지 알고는 못 했을 것이라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저도 예전에 코가 안 좋아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거 정말 몰랐으니까 했지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아마도 하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 간단한 수술도 힘든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힘든 언덕길을 올라가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야 했었던 것이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이고, 그리고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도 작은 점이 아니라 대단히 큰 점을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예전에 나왔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롯해서 우리는 영화나 그림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이나 그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서는 이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오죽하면 앞서 말씀 드린 겟네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 예수님께 있어서 무엇이 가장 힘드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채찍에 맞아서, 온몸에서 피를 흘리셔서 정신도 혼미하셨을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골고다까지 올라가셨으니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손과 발에 못 박혀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길을 오를 때에 도중에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대신해서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습니까.


예,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예수님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우셔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시면서 이제 더 이상 가실 수 없으셨는데, 로마 군인이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한테 억지로 대신 매고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느냐 하는 것이에요.

구레네 시몬에 대한 부분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성경 기자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인상 깊은 내용이었는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보시면 흥미롭습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1절~33절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1.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32.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33.ゴルゴタと呼ばれている場所、すなわち「どくろの場所」に来ると、


마가복음 15장 20절~22절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彼らはイエスを、ゴルゴタという所(訳すと、どくろの場所)に連れて行った。


누가복음 23장 25절~27절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すなわち、暴動と人殺しのかどで牢に入れられていた男を願いどおりに釈放し、他方イエスを彼らに引き渡して好きなようにさせた。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あと)から運ばせた。
民衆や、イエスのことを嘆き悲しむ女たちが大きな一群をなして、イエスの後(あと)について行った。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구절과 뒷구절을 함께 인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피범벅이 되셔서 지쳐 쓰러지시매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더라……라고 하는 구절이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 누가복음 어디에도 없어요.

물론, 우리가 짐작하건대 너무나도 힘드셨겠지요. 많이 아프셨겠지요. 채찍에 맞으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그리고 손과 발에 못 박혀서 죽으셨는데 얼마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으셨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 보시면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이,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모두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어서 어떤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수치, 모욕, 부끄러움입니다.

예전에 제가 휠체어를 타시는 분한테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 여자 분은 젊어서부터 사고 때문에 다리가 불편하셔서 휠체어를 타고 계신 분이신데, 저도 그 때까지는 몰랐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휠체어를 타면 비탈길을 내려갈 때가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내리막길 같은 경우에는 잘못하면 앞으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혼자서 내려갈 때에는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만 이용해서 내려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때도 그 자리에서 휠체어 앞 바퀴를 들어 보여 주시는데 아, 그거 무슨 서커스 같아서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내리막길에서 앞 바퀴를 들고 내려가면 위험할 때도 있지 않냐고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넘어진 적도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넘어지냐 하면 앞바퀴를 너무 많이 들어서 결국 뒤로 자빠진다는 것이지요.

제가 그 말을 듣고는, 아휴, 그럼 엄청 아프시겠어요. 라고 하니까, 그 분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혀 안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휠체어가 뒤로 넘어가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 있냐고 물었더니만, 이 분 하는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분, 참 밝은 분이신데, 이 분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너무나도 창피해서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부끄러움이 육체적인 아픔보다도 더욱 심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2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た。
「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おまえが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そして十字架から降りて来い。」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長老たちと一緒に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
「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彼はイスラエルの王だ。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うすれば信じよう。


누가복음 22장 63절~65절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さて、イエスを監視していた者たちは、イエスをからかい、むちでたたいた。
そして目隠しをして、「当ててみろ、おまえを打ったのはだれだ」と聞いた。
また、ほかにも多くの冒瀆のことばをイエスに浴びせた。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도 짐작할 수 있는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치나 모욕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점이 바로 예수님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에 있어서 넘을 수 없는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면,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과 똑 같은 육체적인 통증이나 고통은 느낄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수치와 모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제까지는 큰 나라의 왕이나 황제였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어요. 좋은 것만 입고 먹고 자랐습니다. 어마어마한 궁전에서 살았고, 가는 곳마다 고급 카펫이 깔려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그처럼 온 나라의 영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서 거의 알몸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속옷 하나 걸친 채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면 그 모욕감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만왕의 왕, 만군의 주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분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 많고 못난 인간들로부터 받으셨던 그 모욕과 수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사극 같은 데에 보시면 조선시대 때, 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과인이라고 하면 대단한 뜻처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과인의 <과>자는 <적을 과>입니다. 이른바 <과부>라고 할 때의 <과>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과인>이라고 하는 말은, 그 글자 자체를 본다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만한 사람한테 말하기를, 왕도 겸손한데 네가 어찌 그렇게 교만할 수 있겠느냐 하고 꾸짖기도 했다고 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도 자기를 비우시고 복종하셨는데 우리가 내 자존심을 세우면서 주님 앞에 교만하게 군다면 어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의 겸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고 하는 멍에를 메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따를 때에, 주님께서 넘치는 칭찬과 축복으로 채워 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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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1회 살아있는 말씀
2023년 7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2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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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2번째 시간으로서 “살아있는 말씀” 生きているみこと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은 15장 5절 이후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만, 그러기에는 15장 4절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을 너무 많은 것을 건너뛰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오늘도 같은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15장 4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여기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에 기록된 책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오직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 그러니까 성경은 무엇을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라고 하면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좀 너무 흔한 표현 같아요. 솔직히 지금도 서점에 보면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하는, 이른바 교양서적이라고 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거나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하면 좀 나을 거예요.

아니, 그렇다고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멋진 표현, 정말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말이 있었을 텐데도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좀 시시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교훈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식상한 표현을 썼을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지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니, 세상에는 값어치가 없는 책들도 많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지금도 서점에 가보면 좋은 책들도 있나 하면, 정말 값어치가 없는 책들, 그리 좋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 찬 책들도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책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말하자면 책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은 너무 쉽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출판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렇게 된 지는 얼마 안 됩니다.


몇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책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비쌌지요.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책들을 보면 모두 일일이 사람들이 손으로 베껴 쓰곤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사용되는 종이를 본다 하더라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히 비쌌기 때문에, 정말로 가치가 있는 책들에 한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값진 지식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지식들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모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모이고 모이면 학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과거>라고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 또는 자신이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입니다.


경제학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사회의 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뛰어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하고 분석해서 경제이론을 발표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법학 같은 것도 그렇지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1년에도 수없이 많은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거부터 있어왔던 일들에 대한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장 오늘 새롭게 일어난 일이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법은 만들어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자동차가 없었을 때에는 자동차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고, 비행기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비행기라는 것이 발명되고 한참이 지난 다음인 것이지요.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문학이지, 그 시대에서 벗어난 인문학적 지식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학 분야에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래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실 과거를 무시한 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첨단과학이라고 하면 어떤 것을 떠올리십니까.

이른바 첨단과학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미래가 아닌 과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재료도 과거에 발견된 것들이고, 구조도 과거에 개발된 기술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계들도 몇 년 지나면 이제 구형이 되어서 쓸모가 없게 되고 맙니다.

과학이라고 한다면 누구는 천문학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 이를 위해서는 역시 첨단학문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지난 날들에 대한 일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역사학이라고 하고, 더 오래 전 일에 대한 대한 학문을 고고학이라고 한다면, 사실 이 우주과학, 또는 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고고학 중의 고고학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주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주의 현재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혀 빛이 없는 곳이라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요.

사람의 눈에서 자체적으로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빛이 비추고는 그 빛이 반사되어 오는 것을 보고 사물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예를 들어서 제가 손을 이렇게 보고 있다면, 빛은 1초에 30만킬로를 가기 때문에 제가 손을 바라볼 때의 이 손의 모습은 지금 현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태양은 어떨까요. 태양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눈을 다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본다 하면, 우리는 태양의 지금 모습을 관찰할 수가 있을까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이 거리는 대략 시속 100킬로로 달린다고 한다면 도달할 때까지 171년 이상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래도 빛의 속도라고 한다면 빠를 것도 같은데, 빛의 속도로 지구에서 태양까지 간다고 해도 8분 이상이 걸립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지구에 도달한 빛은 8분 전에 태양에서 나온 빛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사람은 태양의 현재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8분 전의 태양 모습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 멀리 있는 별들은 어떠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별들 중에서는 몇 년 정도가 아니라, 몇 백만 년, 몇 천만 년 전의 우주, 지구가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우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의외로 많은 별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도달하는 동안에 이미 사라져버린 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는 고사하고 온통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지식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이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은 창세기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찬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는 과거가 없잖아요 오로지 현재와 미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고 하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과거에는 순종을 원하셨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원하시나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지요.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창세기 3장 4절~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이 마귀 사탄의 말을 보십시오.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귀 사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집착하기 때문에 본질에 대해서 놓치게 되는데,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핵심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순종하면 살 것이요, 불순종하면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해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유혹하지 않습니까.

이 마귀 사탄의 유혹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주리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세 가지 시험을 하지요.

첫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3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두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그리고 세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8절~9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이 세 가지 시험은 우리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만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인생에 있어서 적어도 실족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3절에 나오는 유혹은 어떤 것입니까.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돌을 먹어도 됩니까. 아니면 먹으면 안 됩니까. 예,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돌을 먹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돌을 떡덩이로 생각하고 먹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처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어버린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주머니에 넣어버린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범죄인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뇌물도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賄賂を受け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は聡明な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

이처럼 먹어서는 안 되는 것, 내 것이 아니거나, 아니면 정당하지 못한 것은 모두 먹어서는 안 되는 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먹어도 되는 떡덩이로 생각하고 먹는 것은 범죄이기 때문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유혹을 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마귀는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신앙적인 명예로 유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보시면 가끔 간증을 한다고 하면서도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많이 기도를 했더니,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금식을 했더니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나마 좀 귀여운 축에 속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나 종교 지도자 중에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죠. 자기가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목사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 사실 이런 사람이 지금도 있지만 옛날에도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다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박수를 받고,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에,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까. 아니요. 자기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그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영광을 받으라고 하면서 사람의 교만을 충동하는 것이 바로 마귀 사탄의 유혹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 사탄은 무슨 유혹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지요. 온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를 다 주겠다. 그러니까 나를 경배하라고 마귀는 유혹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간단한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만 했었다면,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그 한 가지 말씀만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크나큰 축복을 영원토록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죽음>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배가 고프다고 돌멩이를 드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죽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돌덩이는 절대로 드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전 꼭대기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면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 즉 <멸망> 뿐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마귀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법칙에 의하면 이 유혹에 넘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역시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잠언에 보면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 7장 21절~22절
“21.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彼女は心動かすことばで彼を誘惑し、滑らかな唇で彼をいざなう。
彼はただちに、彼女の後について行く。牛が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ように、足かせが愚か者を懲らしめているかのように。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까.

내 것이 아닌 떡덩이를 먹으려고 하고 있나요.

영적인 교만이 슬금슬금 얼굴을 내미나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십니까.

성경은 그 모습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마귀의 유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만 나와 있으면 되잖아요. 왜 마귀의 유혹까지 성경에 나와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만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도 어제와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그 이전에는 아무리 달콤해 보이는 유혹이라 하더라도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외 없이 <죽음> 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과거에도 그랬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도 살아서 숨쉬는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성경 말씀의 교훈은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 말씀은 바로 지금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 다름아닌 바로 <나>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인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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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400회 소망의 이유
2023년 7월 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1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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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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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1번째 시간으로서 “소망의 이유” 希望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에 보시면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개역개정에 보시면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라고 되어 있는데, 새번역 성경에 보면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라고 되어 있고, 일본어 성경에도 역시 그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이를 직역할 경우, 읽기에 따라서는 인내와 위로를 <성경이 주는> 안에 포함 시킬 수도 있고, 위로만 포함 시킬 수도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선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내와 위로 중에서 성경은 위로만 주고 인내를 가르쳐 주시지는 않나 하는 것이지요. 사실 성경을 보면 인내로 넘칩니다.

기본적으로 인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다림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다림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까, 무슨 광고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만, 여러 종류의 강아지들이 쪼로록 앉아 있고, 그 앞에 밥그릇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들이 그것을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요.

조금 있더니 신호를 보내자 그제서야 강아지들이 일제히 먹이를 먹기 시작합니다. 참 대단하지요.

자, 이와 같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강아지들한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사실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이 앞에 있다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락할 때까지 먹어서는 안 되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요, 또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먹는 것만이 아니지요. 집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길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화장실 문제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어릴 때는 동물용 기저귀도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아기일 때는 어떻게 화장실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점차 커가는데도 가리지 못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는 두 강아지가 있는데 모두 배가 고픈 상황이에요. 한 강아지는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다른 강아지는 가만히 있어요. 그렇다면 가만히 있는 강아지는 왜 난리를 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여려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주인이 정해진 시간에 먹이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리한 강아지라면 수고스럽게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밥을 줄지 안 줄지 모르기 때문에 나 배고프다고 어서 밥 달라고 그러는 것이잖아요.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먹이를 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밥을 달라고 난리를 치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겠지요.

하지만 주인이 밥을 준다는 믿음이 없다면, 잘못하면 굶어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나 배고프다고, 나 굶어 죽는다고, 그러니까 어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믿음과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 즉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기다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시면 다윗이 등장하는데,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서 당시 사울 왕으로부터 시기를 받게 됩니다.

사실 다윗은 그 전인 사무엘상 16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시고는, 다음 왕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의 용사 골리앗을 무찌르는 엄청난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그를 시기해서 그의 목숨을 노리게 되고, 아무런 잘못 없는 그는 사울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결국 그는 왕위에 오르게 되는 나이 서른 때까지 최소한 10년 이상을 도망 다니는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이보다 이전인 창세기 37장에 보시면 요셉은 17세 때 형제들에 의해 따돌림을 당하고는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까지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그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나락 속으로 빠져버리는 운명에 처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만, 그 자리에 오르게 될 때까지 그는 13년 동안을 노예생활과 감옥살이를 하면서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기다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전인 창세기 12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소원은 단 한 가지,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의 나이 100세 때였지요. 무려 25년 동안 그는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당시 애굽에서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자랐으나,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 혈혈단신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애굽에서 고통 받고 있던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쓸쓸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기다린 사람은 없었을까요. 아니요. 있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명하십니다.

사실 이 상황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알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주의 크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5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당시 한 규빗은 사람의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라고 하는데, 신학자들은 지금 길이로 대략 45센티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방주의 크기가 어떻게 되냐 하면 그 길이가 135미터, 폭은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입니다. 단순하게 본다면 길이는 일반적으로 105미터라고 하는 축구장보다도 긴 135미터에, 건물 한 층 높이가 4미터 정도라고 하니까 높이 13.5미터라고 하면 3층 건물보다도 높은 빌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일반 도로를 본다면 1차선은 대략 3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22.5미터라고 하면 대략 7차선 도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리하자면 길이는 축구장보다도 길고, 높이는 3층 건물보다도 높고, 폭은 왕복 7차선 도로보다도 넓은 크기의 배를 만들라고 하나님께서는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야 며칠 만에 천지를 창조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지만, 이게 사실 사람한테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해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머물지 않아요. 더 심각한 문제는 뭐냐 하면, 당시 노아는 방주는 고사하고 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에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3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이제부터는 모든 살아 있는 동물, 모든 움직이는 생물들을 마치 채소처럼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에요. 그 이전에는 오로지 채소만 먹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배를 타는 이유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채식만 했다고 한다면, 먹지도 못할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또 이러실 수도 있겠지요. 아니, 배를 타는 이유가 꼭 고기잡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동수단으로도 당시에 배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일단 당시의 지형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는 점이지요.


노아 당시에 일어났던 홍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건이었습니다. 누구는 40일 동안이었다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7장 12절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이를 보면 단순히 하늘에서 비가 내린 것이 40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책 좀 읽었다는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40일 동안 비가 내린다고 세상이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해요.

아니, 그러니까 성경을 좀 제대로 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위인 창세기 7장 11절을 봅니다.

창세기 7장 11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 것만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샘들도 터져서 거기서 지하수도 쏟아져 나온 것이지요.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땅에 있는 샘들이 터진 기간이 사십일이었고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물에 잠긴 기간은 모두 다 합치면 1년 가까이가 됩니다. 그리고 땅이 다 마르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그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1년 이상이 지난 후였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동안에 아마도 지형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 이전의 지형은 우리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이동수단으로서 배가 필요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 없겠습니다만,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뭐냐 하면 <배>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방주 이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배>라고 하는 단어가 그럼 언제 처음 등장하냐 하면 방주 이후로 창세기 49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방주 이전에는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노아는 <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배가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그 말씀대로 지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뭐냐 하면, 당시 노아는 이 방주를 어디에 지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배를 지으라고 하면 어디에 지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축구장보다도 길고, 7차선 도로나 되는 폭에다가 3층짜리 빌딩 높이의 큰 배를 짓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연히 바닷가 근처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뜨는지 안 뜨는지도 알아보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을 때 곧바로 배를 타고 출항할 수도 있을 거잖아요.

하지만 이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뜬금 없는 곳에 배를 지은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에 적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창세기 7장 17절~18절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이 기록에 보시면 방주가 떠오른 것은 물이 많아진 다음이고, 그 방주가 물위를 떠다닌 것은 물이 더 많아진 다음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소를 만든다고 해보세요. 모두 다 바다가 있는 곳에 있잖아요. 그래야 배가 완성되면 곧바로 출항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여기 군마현처럼 바다가 없는 곳에 만들겠어요?

하지만 노아는 아마도 이 바다가 없는 군마현 같은 곳에서 살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바다가 없는 곳에 배를 지을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누가 바다도 없는 군마현에 배를 세운다고 해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놀림을 받을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아마도 노아한테 묻지 않았겠어요?
이보시오. 아니, 왜 그런 걸 짓는단 말이오?

그러자 노아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홍수가 일어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을 거래.”

아마도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이고, 다 넋을 잃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이가 없어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노아를 정신 이상자로 여겼을지도 모를 노릇이에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에는 <배>는 고사하고 <홍수>라는 개념조차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홍수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장마다 태풍이다 해서 하늘로부터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장 5절~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지금 우리는 비가 내리는 것이 전혀 이상지도 않은 자연현상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로 이 땅에는 비, 그러니까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로 그런 상황인데, 그냥 비가 내린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주위에 바다도 없는데 홍수가 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는다는 것은, 이는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발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살펴본다면, 어떻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단순히 배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이는 마치, 저 같은 문외한한테 달이나 화성으로 가는 우주로켓을 만들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사람들을 보시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실제로 왕이 될 때까지 10년 이상을 기다린 다윗.
17세 때 형제들로부터 버림 받고 노예로 팔려가서 13년을 기다린 요셉,
아들을 주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 동안 기다렸던 아브라함.
모든 영광을 버리고 광야에서 살고 있었으나 80세 때 부름에 순종했던 모세.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최소한 70년 이상 순종해서 마침내 구원 받은 노아.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첫째,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의 삶은 결코 평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평 불만이 없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기름을 부었으면 빨리 왕으로 세워줄 것이지, 왜 저런 못난 사울한테 쫓기는 시세가 돼?

형제들 중에서 높여주겠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노예로 팔려가서는 누명까지 씌어서 감옥살이까지 하게 돼?

자식을 주시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이제 다 늙은 마당에 언제까지 안 주시는데?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내 나이 80인데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해 내?

수 십 년 동안 듣도 보지도 못한 배를 만들게 해서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게 해?

솔직히 불평 불만을 하려고 했다면, 할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 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이 분들, 무엇을 믿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끝까지 믿고 절대로 놓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묵묵히 주님께서 주신 일을 감당했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말씀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틀림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었더니 안 되더라>라고 되어 있으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통 <믿었더니 되더라> 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귀로도 들리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성경에 보니 온통 <믿었더니 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요, 그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인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다윗과 함께 하시고,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노아와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었더니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바로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믿으면 됩니다.
우리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됩니다. 믿었더니, 되더라.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은 미쁘십니다. 참되십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루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믿으면 된다> <믿었더니 되더라>의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 닥쳐 오더라도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품고서, 마침내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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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99회 기쁨을 주님께
2023년 6월 25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0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3절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3節
“3. キリストもご自分を喜ば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でした。むしろ、「あなたを嘲る者たちの嘲りが、わたしに降りかかっ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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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0번째 시간으로서 “기쁨을 주님께” 喜びを主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3절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3節

“3. キリストもご自分を喜ば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でした。むしろ、「あなたを嘲る者たちの嘲りが、わたしに降りかかっ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주님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만, 사실 이 기록을 보더라도 바울이 얼마나 주님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성경에 대해서 4차원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4차원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 계셨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만, 사실 좀 실망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학에서의 1차원에서 시작해서 4차원이라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책은 4차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좀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의 내용을 보면 4차원이라기보다는 네 가지 요소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갑자기 물리학 이야기를 말하냐 하면, 시간관계상 가급적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일단 성경은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좀 몇 권 읽고서는 성경이 비과학적이라는 둥 전설이라는 둥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조금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해본다면 훨씬 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차원>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잠시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1차원이라는 세계는 위치만 있고 면적은 없는 세계입니다.

다음으로 2차원이라는 세계는 면적은 있어요. 하지만 높이는 없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3차원이라는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서, 위치도 있고 면적도 있고 높이도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정리를 하자면 1차원은 위치가 있고, 2차원은 위치와 면적이 있고, 3차원은 위치와 면적과 높이가 있어요.

하지만 각각 넘지 못하는 장벽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1차원 세계에서는 면적이라고 하는 것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위치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위치일 뿐이지 면적은 될 수 없거든요.

2차원 세계는 면적은 있어요. 하지만 높이, 그러니까 입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면적이 모여도, 이것이 쌓여서 높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세계는 어떻습니까. 위치도 있고, 면적도 있고, 거기에 높이까지 있어요.

그러면 이제 이 3차원 세계에서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우선 쉬운 부분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는 공간이라고 하는 제약이 있어요.

방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그 문을 열지 않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동을 한다 하더라도 이동수단이 발달해서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짧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미국에 간다고 한다면, 옛날에는 배를 타고 몇 개월이나 걸려서 갔으나,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하루 만에 갈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까지의 거리 자체가 짧아진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길이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쉽게 말해서 우리가 SF 소설처럼 과거에 갔다 온다거나 미래에 갔다 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장벽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베드로후서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しかし、愛する人たち、あなたがたはこの一つのことを見落としてはいけません。主の御前では、一日は千年のようであり、千年は一日のようです。

우리가 잘 아는 이와 같은 말씀은 이 차원에 대한 내용을 알면 훨씬 더 깊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에게 있어서는 시간의 제약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이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간에 대한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신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된다면 빌립보서 2장 말씀이 새롭게 이해가 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여기서 특히 7절에 보시면 <종의 형체를 가지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종>을 <노예>라는 말로 해석한 번역본도 있는 반면, <섬기는 자>라고 해석한 번역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3차원과 4차원이라는 문제를 알게 되면, 여기서의 <종>이라고 하는 말씀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존재>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처럼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되는 분이시기에 이와 같은 제약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으로 막힌 이 땅에 오셨으나, 부활하신 다음에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요?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설명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왜 굳이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일찍부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それからイエスは、人の子は多くの苦しみを受け、長老たち、祭司長たち、律法学者たちに捨てられ、殺され、三日後によみが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弟子たちに教え始められた。

누가복음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22절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そして、人の子は多くの苦しみを受け、長老たち、祭司長たち、律法学者たちに捨てられ、殺され、三日目によみが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語られた。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우리는 내일 일, 아니, 몇 시간 뒤, 몇 분 뒤, 몇 초 뒤도 알 수가 없습니다.

종의 모습 즉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이 3차원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시점에는 당연히 아직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자들도 설마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그 두꺼운 책인데도 불구하고 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기뻐 웃으셨다는 기록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イエスは涙を流された。

이처럼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즐겁게 웃으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는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리고 예수님은 장난이 아닙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영원한 죽음으로 빠져버리게 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그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만약에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이 있으셨다면 무엇을 위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장차 어떠한 일이 닥치게 될 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이를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주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 후에 겪게 될 일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일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게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야구선수들이 시합을 할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때는 여유를 보일 때도 있지만, 시합 때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타자가 공을 치려는 순간 실실 웃는 선수들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말하자면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장난 삼아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다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장난 삼아 십자가를 짊어지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장난이 아니에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주셨습니까. 왜 죽으시고 왜 부활하시고 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시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나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이제 마침내 나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끔찍한 사고가 있었지요. 바닷속 4000미터 속에 잠겨 있는 타이타닉 호를 보러 가는 잠수정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몇 시간 만에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통신이 두절된 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수색을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시시각각 전해져 오는 그 뉴스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어른 다섯 명이 지금 이 순간 그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만약에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께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까.


저는 그럴 것 같습니다.

주님, 만약에 저를 이곳에서 구해주신다면, 저는 남은 인생을 덤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를 이 곳에서 구해주세요.

저는 그럴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해보세요. 알고 보니까 그게 다 꿈이었어요. 그러면 저는 얼마나 다행스러워 하겠습니까. 아, 정말 끔찍한 상황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다 꿈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그런 끔찍한 일도 겪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 있어요.

그러면 꼭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았더라도 지금 오늘 이 순간부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될까요. 이를 한 마디로 하자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더 구체적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은 무엇에 대해서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요? 자기 꿈 속에 나타난 예수님이나 천사가 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말씀이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삶에 있어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있어서 누군가가 기뻐하고 누군가가 슬퍼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때로는 주님이 기뻐하실 수도 있겠으나, 때로는 마귀 사탄이 기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선택에 있어서 마귀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주님이 가슴을 치며 슬퍼하신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저는 오늘 전해드리는 말씀 중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를 기쁘게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입니다.

마귀를 기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에베소서 4장 26절~27절까지를 함께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27절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怒っても、罪を犯してはなりません。憤ったままで日が暮れる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예,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화를 품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 되고 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 일본에 살면 일본어가 늘고 미국에 살면 영어가 자동적으로 늘어요?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늡니까. 그것은 바로 공부를 해야 느는 것이지요.


사전을 찾아가면서 단어를 외우고 글을 읽어야 실력이 느는 것이지,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공기를 마시면서, 드라마나 보고 노래만 외운다고 실력이 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찬송만 부르고, 설교만 듣고, 부흥회만 쫓아다닌다고 믿음이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알기 위한 지름길은 바로 성경입니다. 말씀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진정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을 알게 되어, 이를 바탕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함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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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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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8회 영광에 이르는 길
2023년 6월 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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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2절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2節
“2.私たちは一人ひとり、霊的な成長のため、益となることを図って隣人を喜ばせるべき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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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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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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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9번째 시간으로서 “영광에 이르는 길” 栄光に至る道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짧은 구절이긴 한데, 대단히 추상적인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대할 때를 보면, 뭐, 그냥 좋은 말이지 뭐……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의 본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넘어가게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성경을 아무리 수 십 번 읽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은 그냥 기분에 따라서 대충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로 적힌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구절을 한 번 읽는다 하더라도, 그 말씀에 담겨진 뜻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선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단어부터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절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2.私たちは一人ひとり、霊的な成長のため、益となることを図って隣人を喜ばせるべきです。

여기에 보면, 우리 각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 선을 이루는 것, 그리고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궁금증이 바로, 어떻게 해야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을 이루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겠지요.

오늘은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씩 정리해 나아가면서,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중에서 보면,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 오신 분들께서는 조금 익숙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덕을 세우다>라는 부분입니다. 霊的な成長


로마서 14장 19절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ですから、私たちは、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여기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씀의 뜻을 뭐라고 설명해드렸는지 기억하시나요?

이는 다른 번역본에 따르면 영적인 성장이라는 뜻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원어의 1차적인 뜻은 바로 <집을 짓다, 건설하다> 라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집을 짓는 것처럼, 서로 힘을 합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덕을 세우기 위해서, 즉 우리가 힘을 합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선을 이룬다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막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를 다른 번역본에서 보면 상대방에게 이득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조금은 더 알기 쉽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선을 이룬다, 착한 일을 한다, 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이득이 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좋아해요? 싫어해요? 예, 좋아하지요. 그것이 바로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뒤에서부터 해석을 해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씀 드릴 수가 있겠지요.

우선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절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2.私たちは一人ひとり、霊的な成長のため、益となることを図って隣人を喜ばせるべきです。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렇게 되겠지요.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이득이 되게 해야 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지금으로 본다면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요.

교회나 종교단체? 봉사단체?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한다는 점만 본다면 교회나 선교단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를 조금 더 바꾸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상대방에게 이득이 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 나아가는 것.

이런 일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회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회사는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까. 그것은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지요. 이는 대단히 명확합니다. 그래서 회사를 예로 들면 알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회사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결국은 돈을 벌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기 때문에, 이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게 되면, 이는 제대로 회사가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돈을 벌겠습니다. 그 수단은 다양합니다. 제조업도 있을 것이요, 운송업, 서비스 업 등 회사에서 하는 일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고객 만족>이 최우선목표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돈을 번다고 해서 자기들이 돈을 찍어낼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돈을 번다는 것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몰래 훔쳐온다거나 속여서 빼앗는다거나 하면 범죄가 되잖아요.

이와 같은 범죄가 아니라 정당하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고객이 만족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럼 언제 고객이 만족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객에게 이득이 발생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회사가 어떤 제품을 만들었어요. 가격이 1만원이에요.

그것을 보고 고객이 생각하기를 내가 이 제품을 1만원 내고 구입하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되면 절대로 돈을 내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 돈을 내고 구입하는 것이 자기한테 이익이라고 판단되면 그 때에 비로소 1만원을 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고객은 비록 1만원을 내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얻어진 결과로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회사 쪽에서는 그 수익으로 회사를 운영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이 로마서 15장 2절 하나만으로도 제대로 우리가 이해를 하게 된다면 훌륭한 회사를 경영하기 위한 기본 철학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버릴 데가 없습니다.

예전에 어느 기독교 방송에서 보니까 성경을 하루에 몇 번이나 읽는다는 사람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단순히 몇 번 읽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한 번 읽는다 하더라도, 단 한 구절을 읽는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온전히 내가 이해했을 때 크나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지혜와 은혜를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처럼 세상적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이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단순히 회사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 아니지요.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든 적든 그래도 어느 정도 되는 자본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냐 하는 문제지요.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단, 돈이나 선물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상대방이 기뻐하기 위해서는 만족을 해야 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만족을 하냐 하면, 자기가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 만족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돈도 안 쓰고, 선물도 안 하고 그러는데도 어떻게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가 있을까요.

지난 주에 제가 드렸던 말씀,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자랑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지요. 돈 자랑, 가족 자랑, 집안 자랑 등등 이런 자랑들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것은 바로 열등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했습니다만, 저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열등감>이 아닐까 합니다.

열등감이 뭐예요? 예,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돈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집안도 그렇고, 어디 그 뿐인가요. 학력이나 외모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 점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점은 뭐냐 하면, 사실 알고 보면 그 사람은 그와 같은 점에 대해서 그다지 부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도 안 들이고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입> 그러니까 말로 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은 무엇으로 합니까. 입이 있다고 하지만 입만으로는 말을 할 수가 없지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혀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시면 이 <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이 있는지 모릅니다.

잠언 15장 4절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穏やかな舌はいのちの木。舌のねじれは霊の破れ。

잠언 17장 4절
“악을 행하는 자는 사악한 입술이 하는 말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悪を行う者は邪悪な唇に聞き入り、偽り者は破滅の舌に耳を傾ける。


잠언 21장 23절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自分の口と舌を守る者は、自分自身を守って苦難にあわない。

잠언 25장 15절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忍耐強く説けば、首領も納得する。柔らかな舌は骨を砕く。

잠언 25장 23절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北風は大雨を起こし、陰口をたたく舌は怒り顔を生む。

이처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상상도 못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짧고 부드러운 혀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 좋은 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에베소서 4장 29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悪いことばを、いっさい口から出し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必要なときに、人の成長に役立つことばを語り、聞く人に恵みを与えなさい。

사실 알고 보면 우리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상대방에게 만족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지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내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을 많이 해줘요. 그러면 얼마나 나한테 힘이 생깁니까. 돈 한푼 안 들이고 내 삶에 있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겠다는 그와 같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이웃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데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우리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잘 하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인 것이죠.

정치인들 보세요. 맨날 여당이 야당을 야당이 여당을 비판합니다. 그 이유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를 뒤집어 본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칭찬하게 되면 자신들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치인들이 그런다고 해도 우리까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한 번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앞을 안 보고 폰을 보면서 걸어오고 있어요. 저는 앞을 보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누가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예, 길에서는 앞을 보고 걸어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앞은 안 보고 폰만 보고 걸어가고 있다면 되겠습니까. 분명 그 사람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조금씩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힘없는 나이 어린 애들이나 힘이 없는 여성이라면 뭐라도 한 마디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건장한 사람이라면 아무 말 없이 길을 내주거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조건을 다 제거한 상태에서 단순히 A와 B가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어느 쪽이 길을 내주게 될까요.

우선 지금의 저라면 제가 먼저 길을 내줄 것 같으십니까. 아니면 상대방한테 먼저 길을 비키라고 할 것 같습니까.

저는 무조건 길을 먼저 양보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일단 멈춰 서서 상대방이 판단해서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지나가도록 합니다.

그 이유는 왜일까요. 제가 목사라서? 제가 착한 사람이라서? 아니에요. 그것은 제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거든요.

제가 만약에 그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고, “야, 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아? 건방지게 말이야. 어서 비키지 못해?” 라고 해보세요. 물론 그런 말을 듣고 상대방이 비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뭐 어째고 어째? 네가 비켜” 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거기서 험악한 분위기가 되겠지요? 그리고 싸움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세요.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이 올 수도 있고, 일이 복잡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잘못하면 비자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그리고 선교활동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만이 아니라 저희 가족도 지켜야 하고 그래야 하잖아요.

만약에 제게 지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서 제 자존심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서 그래, 경찰에 잡혀가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게 된다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작은 것 정도를 양보해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없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후반부에서 12절 전반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절 후반부에서 12절 전반부
11.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私たちが、キリストとともに死んだのなら、キリストとともに生きるようになる。
耐え忍んでいるなら、キリストとともに王となる。……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이 그냥 평범한 길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왕이 되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에요.

왕이라고 해서 이 세상의 권력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해봐야 5년밖에 못 합니다. 일본에서는 가장 오래 총리를 해본 사람도 다 해봐야 8년도 안 됩니다.

한국에 5년 대통령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 같습니까. 장관 하나 임명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고 청문회를 거쳐야 합니다. 임기 중이라 하더라도 잘못이 드러나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일본의 총리도 국회에서 맨날 질문공세에 시달리고, 뭐 하나 실수라도 한다면 여기저기서 비판 받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이 세상에서 절대권력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고 해봐야 100년도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다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운명인 것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나라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품에서 크나큰 기쁨과 놀라운 영광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왕위에 오르는 대관식을 하기 위해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를 타고 간다면 신호위반을 하겠습니까. 속도위반을 할까요? 그랬다가 잘못하면 큰 것을 잃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오히려 내가 지금 작은 것을 양보하고 차라리 우리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 이웃이 기쁨을 얻고, 뿐만 아니라 주님에 대해서도 크나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2절
“2.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2.私たちは一人ひとり、霊的な成長のため、益となることを図って隣人を喜ばせるべきです。

이제 우리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높여주며 기쁨을 주는 선을 행하는 실천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능히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영광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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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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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7회 믿음이 강한 자
2023년 6월 1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節
“1.私たち力のある者たちは、力のない人たちの弱さを担うべきであり、自分を喜ばせるべき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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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8번째 시간으로서 “믿음이 강한 자” 信仰の力ある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이제 오늘부터는 드디어 로마서 15장에 들어갑니다. 로마서는 16장까지이지만 16장은 맺음말과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실질적인 로마서는 15장까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은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節
1.私たち力のある者たちは、力のない人たちの弱さを担うべきであり、自分を喜ばせるべき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서 주어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우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를 수식하고 있는 말은 바로 <믿음이 강한>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 주어는 <믿음이 강한 우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생각했을 때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본인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믿음이 약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그렇다면 믿음이 약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이 약하다는 것이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알아보았습니까.

말씀도 중요하고 행함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아무리 말씀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는 행함을 한다 하더라도 믿음이라고 하는 밭이 갈려져 있지 않으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강한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강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6장에 보시면 바울은 악한 영을 대적하기 위해 영적으로 무장을 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ですから、邪悪な日に際して対抗できるように、また、一切を成し遂げて堅く立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神のすべての武具を取りなさい。


이 구절은 아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시에 전쟁에 나간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장비가 필요했겠지요. 그렇다면 그와 같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장비는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바로 <검> 아니겠습니까. 갑옷이나 방패가 튼튼하다고 하면 상대방으로부터의 공격은 막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반드시 필요할 텐데, 이는 지금 식으로 본다면 총이 될 것이요, 옛날에는 검이나 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은 영적인 전쟁에서 <검>에 해당되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에베소서 6장 17절
“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救いのかぶとをかぶり、御霊の剣、すなわち神のことばを取りなさい。

그렇습니다. 성령의 검, 악한 영을 물리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강한 믿음을 가진 다음에 비로소 말씀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새신자분들은 성경 근처에도 가면 안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약한 믿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 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어진 깨달음으로 행함도 해야지요.


행함이라고 해서 무슨 당장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를 하고 그런 것만이 행함이 아니에요.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 모두가 훌륭한 행함입니다.

그런데 행함에서 끝나면 믿음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행함을 통해서 다시 믿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함을 통해서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쉽게 말씀 드리자면 이런 식입니다. 내가 작은 믿음을 가졌어요. 그리고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읽었어요. 그랬더니 믿어지는 것도 있고 안 믿어지는 것도 있어요.

성경을 처음 읽고 아직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작은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읽었는데, 조금 믿어지는 말씀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선 그 말씀들만 믿었어요. 그리고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그랬는데, 어, 정말 내가 믿었던 말씀대로 된 거예요.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들어요? 어, 정말 성경말씀대로 되네? 난 안될 줄 알았는데, 내가 조금 믿고 말씀대로 행하니까 정말 되는구나. 야, 이거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아. 정말 예수님이 있는 게 맞는 것 같네. 정말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걸까?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믿음이 성장을 합니다. 그러면 그 성장한 상황에서 말씀을 읽으면 작은 믿음을 가졌을 때보다 조금 더 말씀이 이해가 되요. 그러면 이제 조금 더 큰 행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마치 우리 인체와도 같습니다. 혈액이 심장에서 출발해서 온 몸을 다 돌잖아요. 하지만 한 번 심장에서 나간 혈액이 심장으로 안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죽고 말겠지요.

심장에서 혈액이 나가더라도 우리가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다시 혈액이 심장으로 돌아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믿음과 말씀과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심장에서 말씀이라고 하는 혈액이 행함이라는 힘을 통해서 온 몸을 돌고 난 다음에는 다시 믿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도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결코 성장할 수가 없어요.

이는 아무리 뛰어난 전쟁장비라 하더라도 방어만 해서는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뛰어난 공격용 무기가 필요하듯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검>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를 시작하시기 전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試みてはならない』とも書いてある。」

마태복음 4장 10절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下がれ、サタン。『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礼拝しなさい。主にのみ仕えなさい』と書いてある。」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마귀와의 싸움에서 모두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시지 않았습니까.

이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변호사라 하더라도 법조문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재판에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 성경말씀이라고 하는 강력한 영적인 <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심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는 겉으로 봐서는 누가 진정한 말씀의 <검>을 가졌는지 눈으로 봐서는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떤 모습을 떠올립니까.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 방언을 많이 하는 사람? 높은 직분을 받은 사람?

정말 그런 분들 가끔 보면 계십니다. 자기와는 별로 상관 없는 데에까지도 간섭하기 좋아하고,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지적을 많이 하시는 분들, 아마도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거나 아니면 계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해요. 자기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자기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자기가 얼마나 영적 체험을 많이 했는지, 자기가 얼마나 금식을 많이 하고, 얼마나 기도 응답을 많이 받았는지에 대해서 줄줄줄줄 말이 나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믿음이 좋아 보이죠. 하지만 정말로 믿음이 좋은지 아닌지는 언제 분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위기가 닥쳤을 때입니다.

2015년 9월, 일본 관동지방에는 비가 많이 내려서 결국 기누가와라고 하는 강이 범람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일대가 모두 물바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들까지도 다 떠내려가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사람들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얀 집 한 채였습니다. 왜 그 집에 사람들이 주목을 했냐 하면, 다른 집들은 다 물에 떠내려가고 그러는데 그 집 한 채만 떠내려가지 않고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에요. 저기서 떠내려가는 집이 그 집에 부딪혔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됐냐 하면 그 하얀 집이 떠내려 온 집의 무게를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에요.


그 결과 어떻게 됐냐 하면, 그 떠내려가던 집에 있던 사람들도 목숨을 건질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 하얀 집 뒤쪽에 보면 전봇대에 매달려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 하얀 집이 떠내려온 집을 버티지 못했더라면, 그 떠내려온 집에 있는 사람들도 위험했을 것이고, 그 뒤쪽에서 전봇대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던 사람도, 떠내려온 집과 함께 물살에 휩쓸려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범람한 강물이 할퀴고 지나간 곳에는 광활한 벌판만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떠내려가고 대부분은 집이 있었던 흔적 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벌판에 그 하얀 집 한 채만은 당당하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그 집은 그와 같은 지진이나 천재지변을 대비해서 지어진 집이었다고 합니다. 40대인 이 집주인은 이왕이면 튼튼한 집을 짓고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일반 집을 짓는 것보다 두 배 이상이나 돈이 들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그처럼 튼튼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 집이 무슨 군사기지처럼 무지막지하게 생기거나 하지 않았어요.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건물처럼 보입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범람이 일어나기 전에는 다른 집들과 구분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위기가 닥치자 다른 집들은 다 부서지고 떠내려가버리고 말았지만, 그 집 하나는 끝까지 남지 않았습니까.

평소에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막상 위기가 닥치면 그랬던 분들 대부분 뭐라고 해요?

아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 없어. 예수님이 살아 계신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면서 난리를 칩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뭐 어쩌고 하면서, 기도원에 가겠다는 둥 금식을 하겠다는 둥 말도 못해요.

아니, 지금 문제가 발생했으면 정신을 차리고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기도원으로 도망가서 금식하겠다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神は彼らのため、速やかにさばきを行ってくださいます。だが、人の子が来るとき、はたして地上に信仰が見られるでしょうか。」

주님께서는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속히 해결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예요? 예. 그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냐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평소에 믿음이 있는 척은 많이 했다가도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비방하고 그러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오늘 말씀 다시 보실까요?

로마서 15장 1절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節
1.私たち力のある者たちは、力のない人たちの弱さを担うべきであり、自分を喜ばせるべきではありません。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강한 척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보살펴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는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강한 척을 하는 사람, 어떻게 합니까.

교회 나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 그것 밖에 안 되셨구나.

직분을 받으신 것은 있어요? 아직 직분도 못 받으셨어요? 아니면 아직 집사밖에 못 받으셨어요?

금식은 얼마나 해보신 적이 있어요? 3일금식 밖에 못 해봤어요?

은사는 받은 게 있어요? 아, 방언도 아직 못 받으셨구나.


성경은 몇 번이나 읽어보셨어요? 아직 그것밖에 못 읽어보셨어요…….

처음 교회에 나갔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다시 그 교회 나가고 싶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믿음이 좋은 척만 하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이처럼 믿음이 좋은 척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믿음이 약한 사람을 보살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오늘 저는 이런 사람을 미워하자고 하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람, 왜 이렇게 믿음이 좋은 척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주 나쁜 사람이라서요? 아니면 무슨 악한 마귀가 씌어서 그래요?

아니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하지 못하고 약한 사람이라 그런 것이에요.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평소에 강한 척 하면서 목에 힘 주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연약한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약한데도 불구하고 강한 척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열등감, 콤플렉스가 있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 계시잖아요. 뻑 하면, 당신 나 무시하는 거야? 라고 하는 분들. 사실 왜 그런 말씀을 하냐 하면, 남들이 자기를 무시할 수 있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금방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고, 그리고 평소에도 고압적인 태도를 하는 것이지요.



대체로 보면 이와 같이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잘난 척을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아니요. 오히려 자기가 가진 작은 것을 남들이 안 알아줄까봐. 자기가 가진 것을 남들한테 빼앗길까봐 안절부절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가 먼저 나서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대할 때보면 때로는 감정적이 되어서 험악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그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어서 그런 분들을 보살펴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강한 척 하는 사람들 만이 아닙니다. 돈 자랑 하는 사람들, 집안 자랑 하는 사람들, 가족 자랑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실상은 외로운 사람들, 불안해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를 본다면 이는 어떻게 보면 구조신호, SOS인 경우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처럼 애타게 구조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만나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마음으로 우리의 사랑을 실천할 기회로 삼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15장 1절
“1.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1節
1.私たち力のある者たちは、力のない人たちの弱さを担うべきであり、自分を喜ばせるべきではありません。


이제 우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약한 우리 이웃의 약점을 담당하고 보살피는 믿음이 강한 자가 되셔서, 우리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위로를,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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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96회 믿음 말씀 행함의 법칙
2023년 6월 4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23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22節∼23節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23.しかし、疑いを抱く人が食べるなら、罪ありとされます。なぜなら、それは信仰から出ていないからです。信仰から出ていないことは、みな罪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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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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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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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7번째 시간으로서 “믿음 말씀 행함의 법칙” 信仰・聖書・実践の法則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로마서 14장 22절과 23절을 살펴보겠습니다만, 이 중에서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3절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23.しかし、疑いを抱く人が食べるなら、罪ありとされます。なぜなら、それは信仰から出ていないからです。信仰から出ていないことは、みな罪です。

여기서 의심하고 먹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믿음이 없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선생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그 사실에 대해서 믿지를 않았어요. 그러나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그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에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답을 썼습니다. 그러면 점수를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예, 받을 수 있지요. 그 학생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선생님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 가르침을 달달달달 외운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난 시간에 <믿음>의 반대인 <불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과 같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의심>의 상태로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는 죄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여기에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하는 법칙을 우리가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누가복음 24장 36절~43절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누가복음 24장 36절~43절
これらのことを話していると、イエスご自身が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彼らはおびえて震え上がり、幽霊を見ているのだと思った。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なぜ取り乱しているのですか。どうして心に疑いを抱くのですか。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こう言って、イエスは彼らに手と足を見せられた。
彼らが喜びのあまりまだ信じられず、不思議がっていたので、イエスは、「ここに何か食べ物がありますか」と言われた。
そこで、焼いた魚を一切れ差し出すと、
イエスはそれを取って、彼らの前で召し上が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해라 뭐 해라 하는 말씀이 없었어요. 오직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믿도록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믿기를 원하셨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죠? 예, 구약입니다.

그럼 또 복습 하나 해볼까요?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글자로만 본다면 무슨 뜻이에요. 그렇죠 오래된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약속이에요?

여기서 예수님 말씀을 인용한다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세주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부터 나오지요.

창세기 3장 15절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최초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어기고 말았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한 인류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99%도 아니에요. 100%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장담할 수 있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100% 그 때의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사야서에 보시면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상세한 예언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7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이와 같은 구절은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기록한 복음서보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훨씬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이샤야서가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900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는 이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이사야만이 아니라 그 외의 내로라 하는 선지자라 하더라도, 이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을까 하면 여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이사야를 만나서는, 당신이 지금 예언을 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으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해요. 주님이 예언을 하라고 하니까 했을 뿐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그와 같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벌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훨씬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만이 아니라 다른 예언서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비하면 대단히 추상적이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3장 16절~17절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の目は見ているから幸いです。また、あなたがたの耳は聞いているから幸い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多くの預言者や義人たちが、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見られず、あなたがたが聞いていることを聞き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聞けませんでした。

과거에 아무리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솔로몬, 엘리야, 다니엘, 이사야라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도 없었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는데, 너희는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복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는 비단 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핵심인 부활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복이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처음에는 이런 어려운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냥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뭐 하셨어요? 예, 고기 구워서 함께 잡수셨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새로 교회에 온 형제 자매한테 첫날부터 무슨 어려운 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저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식사하고 그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되겠지요. 주님은 다음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5절~48절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それからイエスは、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を開いて、
こう言われた。「次のように書いてあります。『キリストは苦しみを受け、三日目に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り、
その名によって、罪の赦しを得させる悔い改めが、あらゆる国の人々に宣べ伝えられる。』エルサレムから開始して、
あなたがたは、これらのことの証人となります。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즉, 믿음이 심어진 그들에게 있어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어쩌다가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인 예언이 있어왔고, 그 결과로 오게 되셨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요? 예,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행함을 명령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과 행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전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말씀을 보거나 하물며 행함을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 없이 말씀을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꼬투리를 잡습니다.


여기는 이래서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고, 저기는 저래서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디 어떤 부분이 맞지 않는다면서 수고스럽게도 꼼꼼하게 정리해놓은 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어서, 메말라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앞에 주님의 말씀으로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셨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서 그것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허기져서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음식들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서 분석을 하고 연구를 하고 그러면서, 오랜 시간 뒤에, 결국은 자기 생각에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인체에 해로울 것 같아서 안 먹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는데 주님이 밥상을 차려주셨다면, “아이구 감사합니다!”하고 그 복음의 음식을 먹으면 영육간에 강건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내 영혼이 구원을 얻어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결국 메말라 죽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본다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사본이지요. 그러다 보니 문서가 오래된 경우에는 극히 일부분에 있어서 훼손이 되어서 해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무오, 그러니까 성경에는 오류가 없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 아니겠습니까.

교과서를 비롯한 세상에 있는 책들은 사람의 생각을 사람이 쓴 책들이에요.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말하자면 그 책을 쓴 사람의 주장을 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구약과 신약 모든 성경을 본다면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 안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얄팍한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성경이 잘못되거나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아무리 사람이 지혜롭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책 좀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두고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정도로 지적을 하려면, 그래도 성경을 자세히 읽었을 터인데,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을 비판하고,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비판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믿음도 없고 말씀도 몰라요. 그러면 그런 상태에서 행함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 11절~14절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사도행전 19장 11절~14절
神はパウロの手によって、驚くべき力あるわざを行われた。
彼が身に着けていた手ぬぐいや前掛けを、持って行って病人たちに当てると、病気が去り、悪霊も出て行くほどであった。
ところが、ユダヤ人の巡回祈祷師のうちの何人かが、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たちに向かって、試しに主イエスの名を唱え、「パウロの宣べ伝えているイエスによって、おまえたちに命じる」と言ってみた。
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たのは、ユダヤ人の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であった。



여기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보고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자기들도 해보자 하고 흉내를 냈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마술하는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지금처럼 매직 쇼를 하고 그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무당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그래도 귀신을 다룰 줄 안다고 생각했나 보죠? 그래서 어디 나도 한 번 바울처럼 놀라운 일을 해서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아보자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누가 했냐 하면 14절에 나오죠?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

지금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방지역인데 여기에 왜 유대의 제사장 아들들이 와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무당 짓이나 하고 돌아다녔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분명한 점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그와 같은 무당짓을 하는 행위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었거든요.

레위기 19장 26절 후반부
"26.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まじないをしてはならない。占いをしてはならない。

신명기 18장 10절~11절
"10.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あなたのうちに、自分の息子、娘に火の中を通らせる者、占いをする者、卜者、まじない師、呪術者、
呪文を唱える者、霊媒をする者、口寄せ、死者に伺いを立て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제사장 아들이라 하더라도 성경 말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도 없고 말씀도 모르는 채로 그들은 그저 <시험삼아> 그러니까 호기심만 가지고 행함을 했더니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사도행전 19장 15절~16절을 볼까요?

사도행전 19장 15절~16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そして、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が彼らに飛びかかり、皆を押さえつけ、打ち負かしたので、彼らは裸にされ、傷を負ってその家から逃げ出した。

그들이 마귀한테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 명하니까 마귀가 그럽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하느냐 하고 오히려 달려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이기지 못해 입은 옷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치는 망신을 당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その日には多く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多くの奇跡を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
しかし、わたしはそのとき、彼らにはっきりと言います。『わたしはおまえたちを全く知らない。不法を行う者たち、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내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했었다 하더라도, 네게 진정한 믿음이 없고, 말씀도 모른 채로 행함만 했었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요, 너는 불법을 행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 없이, 말씀 없이 한 행함은 곧 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말씀 없이 그냥 흉내만 낸 것이라면, 이는 올바른 행함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할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비유로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바로 믿음은 밭이요, 말씀은 씨앗이요, 그리고 행함은 물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씨앗이 있고, 행함으로 열심히 물을 준다 하더라도, 밭이 제대로 갈려져 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렸다 하더라도 제대로 심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확실한 믿음, 잘 갈려진 밭과도 같은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씨가 제대로 심겨지고 물을 주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여러 가지 어려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성경 구절 하나만 기억하도록 합시다. 이미 배운 구절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 한 번 함께 따라 해 볼까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셨고,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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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95회 두 가지 믿음
2023년 5월 2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23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22節∼23節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23.しかし、疑いを抱く人が食べるなら、罪ありとされます。なぜなら、それは信仰から出ていないからです。信仰から出ていないことは、みな罪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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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6번째 시간으로서 “두 가지 믿음” 二つの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14장을 마무리하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한 번에 마무리를 하려 했습니다만, 역시 여기도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좀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두 번으로 나누어서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은 우선 두 구절 중에서 22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23절과 함께 전반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22절과 23절에서는 각각 중요한 단어가 하나씩 등장합니다. 그 단어가 뭐냐 하면 22절에서는 <믿음(信仰)>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23절에서는 <의심(疑い)>이라는 말이 기록됩니다.

이 두 단어를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불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구절을 보면 믿음의 반대말로서 <의심>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생각이 좀 잘못되었나 하고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단어 중에 <의심>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참 성경은 놀랍습니다. 2천년 전에 적힌 책인데도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니 참 놀랍다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의심>이라고 하는 말은, 그러니까 완전히 안 믿는 건 아니지만, 정말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가는 상황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는 이미 <불신> 즉 안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염두고 두시고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2절부터 볼까요.

로마서 14장 22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여기에는 한 가지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앞에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뒤에 나오는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옳다 하는 바>가 되겠습니다.

앞에는 <믿음> 뒤에는 <자기가 옳다 하는 바> 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바꾸어 본다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 <자기가 옳다 하는 바>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真の信仰
自分が正しいと思っている信仰

그럼 이렇게 바꾸어서 22절을 다시 보면 어떻게 될까요.

네게 있는 진정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으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真の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
自分が正しいと思っている信仰の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앞에 나오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 성경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뒤에 나오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여기에는 우상이나 미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상을 세워 놓거나 아니면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을 놓고 절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는 어디까지나 우상이나 미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구는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를 보고, 기독교는 자기 조상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백 보 양보를 해서 조상님의 영이 제사를 지내고 차례를 지내는 그 자리에 있다면 모를까, 성경적으로 보자면 그 영은 그 자리에 있지 않거든요.

믿음이 없는 분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분들도,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시죠? 좋은 곳으로 가서 편안히 쉬시라는 말씀.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성경에 보시면 이 세상을 떠난 영이 한가롭게 우리 주변을 맴돌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

육신을 벗어버린 영은 곧바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자리에서 알곡은 곳간 즉 구원에 이르고 되는 것이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 조상님의 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고 제물을 바치고 절을 하게 되면 이는 다른 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영은 무슨 영입니까. 설마 천사가 자기를 섬기라고 하겠습니까.

사사기 13장 16절
“16.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献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구약에 보시면 천사 즉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 앞에 나타났을 때, 마노아는 천사한테 제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요. 천사는 번제를 자기가 아닌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보면 이와 같은 장면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이처럼 우리 같은 사람이 천사를 경배하려 해도 천사들은 이를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나를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천사숭배문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보시면 천사에 대한 숭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조상님 사진을 놓고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를 주님이 와서 받으시겠습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시면 주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적은 수라 하더라도 누구 이름으로 모인 곳이요? 그렇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 이름이 아닌, 돌아가신 조상님 이름으로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를 주님이 슬쩍 와서 받으세요?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7장 8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성령을 구하면 받을 것이요, 주님을 찾으면 찾아낼 것이요, 주님의 말씀을 두드리면 열리게 되어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으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지만, 주님을 찾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상님의 사진을 모셔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천사도 그 제사를 받지 않아요. 주님을 찾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당연히 주님도 안 계세요. 그러면 어떤 영이 있겠습니까. 소거법으로 하면 간단하지요.

조상님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고, 주님의 영도 아니라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악한 영 밖에 더 있겠습니까.

악한 영은 주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로채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제사나 차례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오랫동안 여러 관습을 따라 살아오게 되면 이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한국에 보더라도 새해마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음양오행 사주팔자 따져가며 토정비결을 봐야 하죠. 삼재가 끼면 굿판을 벌이든 부적을 사든 해서 액운을 막아야지요. 뭐, 해야 될 게 얼마나 많습니까.

오랫동안 그런 문화에 젖어 살아왔는데, 이런 걸 안 하면 찝찝하지 않겠어요?

일본에 보더라도 웬만한 집에는 불단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 먼저 떠난 가족이나 친족들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찡 하고 종을 울리고는 합장을 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를 하고 그러는데, 이는 종교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혀 있어요.

그런데 이제 주님을 믿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일들이 모두 다 허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몸에 배었던 그런 습관들(しきたり)을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갈등도 하고 고민도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문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도 있었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럼 그 때는 무엇에 대한 문제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어요.

그렇습니다. 율법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율법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자, 오랜만에 한번 여쭈어볼까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렇다면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말씀대로 해서 제대로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은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면 구원을 못 받는 것이고, 이처럼 모두 자기 책임으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문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 20절을 다시 볼까요?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구원 받을 수 있대요? 예, 단 한 사람도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불로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해서 그 죄값을 치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율법을 어긴 죄로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각 사람이 죄값을 치른 것으로 쳐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좋은 소식, 복음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있겠습니다만, 율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갈등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로마서 14장 15절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자,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무엇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음식이요? 아니요.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네 음식>이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이는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해석, 자기들의 주장이 바로 <네 음식>이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는 단순히 우리 형제를 죽이게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20절 전반부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의하지 않은 가르침은 그 형제 하나만을 망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 전체를 망치게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주님은 우리가 율법과 복음, 구습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キリストは、自由を得させるために私たちを解放してください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堅く立って、再び奴隷のくびきを負わさ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주님께서는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 인해서 자유함과 평안을 얻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아직도 세상적인 구습을 따르며 구습의 종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성경에 의하지 않는 가르침에 얽매여있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그 세상적인 종의 멍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얻을 수 있게 된 복음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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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94회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하여 (2)
2023년 5월 2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9절~21절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9節∼21節
“19.ですから、私たちは、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20.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21.肉を食べず、ぶどう酒を飲まず、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をしないのは良い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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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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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5번째 시간으로서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하여②” 平和と主のみ計画を立てるために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주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본문 내용은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 즉, 다툼을 없애고 힘을 합쳐서 하나님의 사업을 함께 이루어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음식, 그러니까 율법이나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이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완전히 망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음식, 즉 율법이나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가르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게 되면 여기에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건축물을 세울 때에 쓰이는 콘크리트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되겠지요.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없는 콘크리트를 써야 하는데 재료비를 아끼거나 아니면 비리 같은 것 때문에 여기에 불순물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콘크리트를 써서 건물을 짓는다면, 완성되었을 때는 차이를 모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콘크리트 안에 든 철근이 녹슬기 시작해요. 그러면 이제 겉잡을 수가 없어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대참사를 막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말씀에 대한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덕지덕지 발라놨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온전한 말씀을 올바로 깨달을 때에, 진정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이룰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21절부터 보실까요.


로마서 14장 21절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1.肉を食べず、ぶどう酒を飲まず、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をしないのは良いことです。”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판에서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4장 21절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지게 하거나 꺼림칙하게 하는 것이라면 고기도 먹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고 그 밖의 일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고기도 먹지 말고 술도 끊어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다니엘서를 통해 알아본 내용을 기억 하시나요?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지혜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왕을 보필하게 했는데, 그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있었잖아요.

다니엘서 1장에 의하면 왕은 그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도록 한다면서 고기와 포도주를 제공했는데 그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고기와 포도주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당시 그와 같은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음식으로 불결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을 달라고 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우리는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진 바 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오늘 본문 20절에도 보시면 만물이 다 깨끗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무엇을 먹어도 은혜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이 적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는 율법과 복음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도 과거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안 지켜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세례를 받으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리고 율법의 규정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여전히 안 먹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선언하기를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라도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 다시 말해서 그래도 율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형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1절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1.肉を食べず、ぶどう酒を飲まず、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をしないのは良いことです。”

여기서 보시면 우선 바울은 이를 명령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정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형제>는 바로 믿음이 약한 형제, 그러니까 아직 율법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는 해요. 그러나 오래된 가르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다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억지로 이를 어기도록 강요하지 말라고 바울은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네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않는 일>(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거부반응이 있는 형제가 있어요. 그러면 억지로 먹으라고 한다거나,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예를 들어서 술이나 담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물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이웃에게 민폐를 끼친다거나 한다면 이는 당연히 문제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고 단순히 즐기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술이나 담배에 있어서 무슨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기본적으로 술이나 담배라고 하는 것 자체에 있어서는 그저 기호품입니다. 이를 즐긴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를 들어서 목사가 맨날 술이나 담배를 달고 산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저도 예전에는 담배를 참 많이 피웠습니다. 저는 특히 좀 독한 담배를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담배를 끊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담배를 피우시는 분들은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납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잘 몰라요. 그냥 양치질만 하면 냄새가 사라지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옆 사람이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로는 아, 이 사람 담배 한 대 피우고 왔구나……하고 알아차리거든요.

그렇다고 뭐 교인분들이야 큰 문제는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일단 예배 시작하기 전에 한 대 태우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1시간 이상이나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요.

그러면 뭐 양식 있는 여러분께서 내색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아, 목사님, 한 대 태우고 오셨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에 마에바시나 다카사키 쪽으로 전도지를 돌리러 가니까, 전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인데도 여기저기서 목사님 결혼하셨다면서요? 축하 드려요. 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담배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소문이 안 퍼지고 베기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의미로 퍼지겠어요?


지금 일본 선교를 위해서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그보다도 먼저 <저 이카호중앙교회 홍 목사는 담배 피우는 목사>라는 그런 소문이 먼저 퍼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담배라는 것이 아무리 믿음의 본질과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소문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면서, 아, 담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이러고 다녀요? 만약에 그런다고 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담배라는 것이 믿음과 문제는 없다 하더라도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된다면 이를 버리는 것이 차라리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20절 말씀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20절 후반부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이를 현대인의 성경판으로 보시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4장 20절 후반부

“……음식은 다 좋은 것이지만 어떤 음식을 먹어서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다른 식으로 한다면 <실족하게 한다>, 또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1차적으로는 당시 믿음이 아직 연약한 사람, 즉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서 억지로 율법을 어길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술이나 담배가 구원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좀 믿어보려는 사람 앞에서 술이나 담배 또는 무분별한 습관을 강요한다는 것은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런 말씀을 보면 정말로 성경 말씀은 세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아직 여린 이웃을 위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큰 은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는 알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넘어져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기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기독교에서 가톨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듣고 참으로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이 올바로 세워져 있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현재 기독교에 있어서 얼마나 이 성경 말씀이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미사포에 대한 말씀을 드렸지요? 예전에 어떤 분은 그 분은 가톨릭에 다니는 여자 분이셨는데, 가톨릭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그 미사포가 예뻐서였다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잠시 인용했던 성경구절들을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5절~6절
“5.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しかし、女はだれでも祈りや預言をするとき、頭にかぶり物を着けていなかったら、自分の頭を辱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頭を剃っているのと全く同じことなのです。
女は、かぶり物を着けないのなら、髪も切ってしまいなさい。髪を切り、頭を剃ることが女として恥ずかしいことなら、かぶり物を着けなさい。


고린도전서 14장 34절~35절
“3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女の人は教会では黙っていなさい。彼女たちは語ることを許されていません。律法も言っているように、従いなさい。
もし何かを知りたければ、家で自分の夫に尋ねなさい。教会で語ることは、女の人にとって恥ずかしいことなのです。


당시에는 남녀 간에 있어서 차별이 심했다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오죽하면 여자는 인구 수에 포함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되니까 이른바 남존여비 같은 일들은 대단히 심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머리를 가린다는 것은 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에 있는 말씀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했던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신앙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여자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있어서 제대로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간섭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지요.

요즘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녀를 불문하고 성경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 내의 이런 일 저런 일에 대해서 자기 멋대로 지적하고 간섭하고 참견하고 비판하게 된다면 엉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여자분이라 하더라도 남자와 똑같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보더라도 웬만한 남자 목사님보다도 뛰어난 여자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다녔던 순복음교회도 보면, 조용기 목사님은 물론이지만, 최자실 목사님이 안 계셨다면 그 정도로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조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이는 성경의 본질과는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도, 이는 남자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것, 말하자면 남존여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시대에는 통용될 수 있었지만, 이를 무턱대고 지금 사회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성에게 있어서는 굴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미사포임에도 불구하고, 레이스로 장식하고 예쁘게 보인다는 이유로 이를 쓰고 싶어 한다?

이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쁘고 반질반질한 종이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자신의 노비문서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 본질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있어서 얼마나 이해가 부족하면, 아니,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지요. 그 동안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노력이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무슨 질병이 있을 때, 40일 금식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치료 받을 수 있고 해결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원에 가서 나무를 붙잡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하고 계속하면 렐렐렐렐 하면서 방언이 터지는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들고 불로 불로 불로 불로……하면 성령님이 임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말씀에 아멘 하신 분들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시간 관계상 금식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40일 금식은 성경에 구약에서는 모세가 했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만, 이는 질병 치료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記した。

마태복음 4장 1절~2절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
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구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40일 동안 금식을 자연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을 주리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어떤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누구는 40일 금식하고 병이 낫다는 간증을 들었다, 누가 쓴 책에 보면 40일 금식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런 말씀 많이 듣지 않습니까.

여러분, 금식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 58장 6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わたしの好む断食とはこれではないか。悪の束縛を解き、くびきの縄目をほどき、虐げられた者たちを自由の身とし、すべてのくびきを砕くことではないか。

하지만 무턱대고 굶기만 하는 금식을 주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그와 같은 막무가내 식 믿음, 이제는 그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원에 가서 펴보지도 않는 성경책 붙들고 흔들어가며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용한 도서관이나 독서실에 가서 성경책을 펼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는 누구를 알아야 합니까.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호세아 6장 3절 전반부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

우리가 알아야 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시요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아는 방법은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경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말씀으로 굳게 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에 따라 진정한 화평과 덕을 굳건히 세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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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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