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복음서 강해 43번째 시간으로서 “빌라도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하면 서두 부분에서 사도신경을 드리지요.
그리고 주일예배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에 목사님의 축도로 끝나게 되지만 주일예배가 아닌 새벽기도나 수요예배, 금요예배 같은 경우,
또는 아직 안수를 받지 않은 교역자가 예배를 인도한 경우에는 예배 마지막에 주기도문을 드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는 사도신경입니다만, 저는 여기서 좀 오랫동안 머리 한 구석에
걸려 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빌라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여러분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오늘은 이 점에 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은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도신경의 위상에 대해서 먼저 확인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앞서 사도신경과 함께 주기도문을 말씀 드렸습니다만, 여러분께 한 번 이런 질문을 드려볼까요?
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먼저 주기도문에 대해서 본다면 이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까지에 나와 있는 내용이며,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아시나요?
예, 사실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하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하고도
완전한,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사도신경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에, 그것 만으로 본다면 내용의 중요성에 있어서 주기도문보다 훨씬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지금까지 여러 번 추가가 되기도 하고 바뀌기도 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이유는 믿음에
대한 이해, 말하자면 올바른 신앙이 정립해 오는 과정에 따라 변천되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수많은 논쟁들이 있어왔고,
그 과정에서 완성되어 온, 말하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또는 신학의 결정체가 바로 이 사도신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빌라도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신약성경에 보시면 빌라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로마 관리로서 당시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잡아 와서는 십자가에 매단 사람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1절~2절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장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을 결박한 이들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서기관들, 말하자면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빌라도는 어땠을까요.
마가복음 15장 10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여기서 ‘그’라고 하는 것은 총독 빌라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대세자장들이 예수님을 자기한테 끌고 와서 죽여 달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저들이 예수님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고 했었다고 하는 사실을 총독 빌라도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22절~24절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가복음 15장 12절~14절
“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누가복음 23장 13절~15절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9장 6절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이와 같이 사복음서 전체를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처벌에 있어서 상당히 소극적 또는 부정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렇다고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재판장으로서 예수님을 처벌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막상 사형판결을 내리려고
한다면 마음이 상당히 괴롭다고 합니다.
그렇잖아요. 직접 자기 손으로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마치 사람을 해하는 것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아무리 잘못을 찾으려고 해도 말하자면 예수님을 처벌할 법조항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가 없는 무고한 사람에게 단순히 여론 때문에 극형을 선고한다? 이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사태가 심각해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물론 로마에는 막강한 군대가 있어요. 만에 하나 그와 같은 일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진압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민란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지요.
로마 정부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이 됐다고 한다면 그 지역을 아무런 문제 없이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현저하게 떨어지겠지요. 그렇게 되면 자신의 출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잘못하다가는 황제로부터 엄한 질책을 당하거나 또는 한직으로 밀려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 24절~26절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힘을 써봤지만 대제사장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끌고 온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요구가 너무나도 완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사도신경을 한 번 볼까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만약에 여러분이 빌라도 총독이라고 한다면 이 문장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니, 무슨 소리야. 나는 예수님을 놔주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썼는데 그래. 성경에도 나와 있잖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었다니까.”
혹시 그러지 않겠어요?
사실 빌라도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반복해서 마치 빌라도가 가해자인
것처럼 전해져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빌라도가 적극적으로 사형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당시 총독에게는 분명히 예수님을 풀어줄 권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에 못박게 내주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애를 쓰지 않았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무슨 잡범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8장 29절부터 19장 11절까지에는 예수님과 빌라도와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상당히 깊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을 썼지만, 몰려든 대중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그들의 손에 내주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실 이런 부분도 있고 해서 요즘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잘못되어 있는 것인가요?
빌라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가요?
뭐,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주기도문과 달리 사도신경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서로 합의만 된다면 충분히
고칠 수도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사도신경이 맞을 수도 있다는 시각에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빌라도에게 분명히 잘못이 있었다는 점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썼으나, 여론 때문에 놔주지 않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 아니요. 저는 그것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있어서 구체적이고도 결정적인 잘못이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점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요. 이는 다름 아닌 사도신경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 중에서 빌라도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자, 오늘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살펴보았던 본문이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본문을 보시면 어디에도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무엇을 했대요? 예,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음? 빌라도가 십자가 말고 고난을 당하게 했어요? 예,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채찍질입니다.
마태복음 27장 26절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장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요한복음 19장 1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복음서의 기록을 본다면 여기에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당시 채찍질이라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혹독한 처벌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사용된 채찍에는 금속조각이 달려 있어서 한 번 맞을
때마다 살이 파이기도 했다고 해요.
율법에서는 채찍질 그러니까 태형을 가할 때에도 제한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신명기 25장 2절~3절
“2.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3.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
율법에 의하면 채찍질을 아무리 많이 해도 마흔번을 넘기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이 이 규정을 지킬 의무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로마에서는 대단히 과도하게 채찍질을 하기도 했고, 그렇게 되니까 채찍질을 당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채찍질을 당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당시에 몇 번이나 채찍질을 당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이 부분이 더 끔찍하게 느껴져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율법에서는 아무리 많이 때린다 하더라도 마흔 번을 넘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때릴 때마다 그 회수를 셀
필요가 있었겠지만, 로마에서는 회수가 중요하지 않잖아요?
그냥 상관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무자비하게 때렸을 테니까 아마도 회수를 안 세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쩌면 십자가보다도 더한 고통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놔주려고 애를 썼던 빌라도는 왜 예수님께 채찍질을 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의 말에서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3절~16절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누가복음 23장 22절~23절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때리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 죽일 만한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구절을 볼까요.
마태복음 27장 19절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서 그의 남편에게 말을 전하기를,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처벌하지 말라고 간청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와 같은 정황들로 보았을 때 빌라도는 최소한 예수님을 처벌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이유는 처벌을 원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 당신들이 지금 이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달라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죄가 없으니까 그냥 채찍질을 하겠으니 그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떻겠냐. 말하자면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채찍질로 인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풀려나지도 못한 채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빌라도의 판단은 아무리 그가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채찍질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더욱 괴롭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그의 판단은 분명 잘못되었으며, 비록 그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을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 성경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로마서 3장 5절~8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우선 7절에서 8절까지를 먼저 볼까요.
로마서 3장 7절~8절
“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들은 바울더러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내가 거짓말을 해도 그 거짓말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나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을 행해도 괜찮다.” 이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꿈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천사를 만났다. 그런데 이런 계시를 받았다. 저런 예언을 들었다. 그런
말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니까 일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서 하는 말이, 저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제 5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이 말씀을 조금 풀어서 해보면, 우리가 불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고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불의하다는 것인가 하는 말씀인데, 이를 조금 더 쉽게 말씀을 해드리자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불의를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내리신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는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함이 거짓되거나 올바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과 빌라도로 바꾸어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라고 하는 좋은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위해 예수님께 채찍질을 한다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를 옳게 보시지 않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자 제 머리속에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시간 관계상 그 중 하나만 말씀 드리자면, 교계에서 예전에 한창 이슈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세습 문제였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신 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이 은퇴를 하시면서 그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많은 말들이
나왔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성명도 내고 주일날 그 교회 앞에까지 몰려 가서 반대집회도 하고 그러기도 했었지요.
저는 장담합니다만, 그와 같이 행동하신 사람들은 절대로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을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세습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는 것이요, 성경적으로도 맞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닐까
해요.
다만, 그 사람들이 한 행동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주에 잠시 알아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날 그것도 그 교회 교인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의 교회 앞에까지 가서는 마이크를 들고 큰 소리로 비난
연설을 하고 그러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겠냐는 것이지요.
아무리 자신들이 생각하기를 세습 반대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이웃 형제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외국에 보더라도 교회나 선교단체를 아버지가 아들이나 가족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경우는 별반 말씀이
없더라고요. 혹시 영어가 딸려서 그렇습니까.
만약에 아들이나 가족에게 물려 준다거나 하는 그 결정과정에 있어서, 예를 들어서 무슨 문을 걸어 잠근다거나 아니면 또 무슨 강제로
어떻게 한다는 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결정이 되었다면 이는 분명 비난의 소지가 있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결정된 것을 가지고 외부에서 비판을 하고 비난을 하고 하는 것은, 이는 말하자면 자신들은
올바르고 그 교회 사람들은 다 잘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그와 같은 불의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진노를 내리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아무리 선한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하물며 주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는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등의 불의한 행함을 하게 된다면, 이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께 채찍질을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싶으십니까.
그럴 시간에 우리 이웃을 위해서 기도를 해봅시다.
우리 이웃을 비난하고 싶으십니까.
그럴 시간에 우리 이웃을 위해서 전도지 한 장이라도 돌려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제 예수님께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비판이나 비난 대신 예수님의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온유함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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