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4회 앞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2022년 10월 30 설교 - 로마서 강해 106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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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4절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4節
“24. あなたが、本来野生であるオリーブから切り取られ、元の性質に反して、栽培された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たのであれば、本来栽培された枝であった彼らは、もっとたやすく自分の元の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るは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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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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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6번째 시간으로서 “앞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行く道を平らにさ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서 접붙임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이 접붙임에 대해서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4절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4節
“24. あなたが、本来野生であるオリーブから切り取られ、元の性質に反して、栽培された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たのであれば、本来栽培された枝であった彼らは、もっとたやすく自分の元の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るはずです。”


자, 두 나뭇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려고 해요. 하나는 다른 나무인 돌감람나무에서 꺾어 온 나뭇가지이고, 또 하나는 본래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었다가 꺾였던 나뭇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나뭇가지 중에서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것과, 본래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던 나뭇가지를 다시 똑 같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것과, 무엇이 더 쉽겠습니까.

당연히 서로 다른 나무를 접붙임 하는 것보다 같은 나무를 접붙임 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본래 그 나무에 붙어 있었던 나뭇가지라면, 다른 데에서 가져온 나뭇가지보다 훨씬 더 접붙임을 하기 쉽겠지요.

이는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 돌감람나무라는 것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본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되어야 마땅했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완전히 버리셨느냐 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구원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서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더 수월하겠느냐 하는 기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시고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일 사랑하시고, 한국사람이나 일본 사람인 우리는 그 다음일 수밖에 없겠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좋겠다……라는 것인가요?

놀라운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겠다……하고 손가락 물고 부러워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전반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

여기서 <우리>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저기 먼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곧 창세 전에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참감람나무 나뭇가지일까 아니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일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님 앞에서 참감람나무 나뭇가지 같으십니까. 아니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 같으십니까.

글쎄요.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나뭇가지는 고사하고 그저 버러진 나무 막대기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말씀이 떠올랐어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です。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이 <미쁘다>라는 말은 참되다. 진실되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진실한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생각하기를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니까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 아니요.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기야 말로 죄인, 그것도 죄인 중의 죄인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도 그만 안 오셔도 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인인 나를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 만화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일본의 ‘너의 이름은’이라는 영화인데,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까,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을 어떤 사람이 계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보니까, 확률이 몇 억 분의 1이나 몇 조 분의 1 정도가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단위 분의 1이래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36자리 수의 번호를 한 번에 정확히 알아 맞추는 확률 곱하기 3이라고 합니다.

잘 감이 안 오죠?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이 상당히 낮다는 정도는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처럼 낮은 확률의 만남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구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시면 이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자기 본래 고향으로 보내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4장 3절~9절입니다.

“3.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私はあなたに、天の神、地の神である主にかけて誓わせる。私はカナン人の間に住んではいるが、あなたは、その娘たちの中から、私の息子の妻を迎え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は、私の国、私の親族のところに行って、私の息子イサクに妻を迎えなさい。」
しもべは彼に言った。「もしかしたら、その娘さんが、私についてこの地に来ようとしないかもしれません。その場合、ご子息をあなたの出身地へ連れて戻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
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気をつけて、息子をそこへ連れて戻ることのないようにしなさい。
天の神、主は、私の父の家、私の親族の地から私を連れ出し、私に約束して、『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方が、あなたの前に御使いを遣わされるのだ。あなたは、そこから私の息子に妻を迎えなさい。
もし、その娘があなたについて来ようとしないなら、あなたはこの、私との誓いから解かれる。ただ、私の息子をそこに連れて戻ることだけはしてはならない。」
それでしもべは、主人であるアブラハムのももの下に自分の手を入れ、このことについて彼に誓った。


자,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찾아 나서게 하는데, 여기에 보시면 그의 종에게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째로,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향까지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인을 구하라고 해요.

둘째로, 이삭을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어려운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서 그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라고도 하는 하란까지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가 하고 찾아 보았던니 무려 600킬로나 떨어져 있었다고 해요.

거기에 그 당시에는 비행기는 고사하고 자동차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걸어서 가야 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낙타를 타고 갔다고 해요.


그것 만도 보통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갔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그 도시에 가서 무슨 수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성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는 것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어서 구인광고를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먼저 보내셔서 찾아 주실 것이라는 거예요.

여기까지 보더라도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망성이 거의 없어요. 그야말로 사하라 사막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격이겠지요.

자, 좋아요. 백 보 양보를 해서 그 바늘을 찾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지요? 마땅한 여성을 찾았다고 해도 그 여성이, 얼굴도 뭐도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역시 600킬로 떨어진 곳까지 와 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 여성만의 결심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여성의 부모님도 허락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황당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은 이를 믿고 그 먼 길을 출발합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24장 10절~27절까지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제가 정리를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제 오랜 시간을 걸쳐 드디어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서 이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창세기 24장 13절~15절

“13.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ご覧ください。私は泉のそばに立っています。この町の人々の娘たちが、水を汲みに出て来るでしょう。
私が娘に、『どうか、あなたの水がめを傾けて、私に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い、その娘が、『お飲みください。あなたのらくだにも水を飲ませましょう』と言ったなら、その娘こそ、あなたが、あなたのしもべイサクのために定めておられた人です。このことで、あなたが私の主人に恵みを施されたことを、私が知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
しもべがまだ言い終わらないうちに、見よ、リベカが水がめを肩に載せて出て来た。リベカはミルカの子ベトエルの娘で、ミルカはアブラハムの兄弟ナホルの妻であった。

거기에 보면 우물가가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여인 중 한 소녀에게 말하기를, 내가 목이 마르니까 물을 좀 달라고 할 텐데, 만약에 그 소녀가 말하기를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이 데리고 온 낙타 열 마리한테도 물을 마시게 하겠다고 한다면, 그 소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소녀라고 믿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자, 이걸 보시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 사람이 목마르다고 하면 아무리 갈증이 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컵으로 물 한 두잔 정도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낙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낙타 혹에 보면 그게 지방으로 되어 있어서 수분이나 영양분을 몸에 저장해 놓을 수 있다고 하니까, 물을 마셔도 한 번에 무척이나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더구나 낙타는 지금 방금 도착했어요. 얼마나 갈증이 나 있는 상황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낙타가 몇 마리요?

10절에 보시면 낙타가 10마리였다고 합니다. 솔직히 성인 남자라 하더라도 지금 목이 탄 낙타 열 마리가 마실 물을 길어서 나른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 시집도 안 간 젊은 소녀가, 그렇다고 무슨 이쪽이 부탁을 한 건도 아닌데 열 마리의 낙타가 마실 물을 길어 나른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리 못해도 무거운 물통을 들고 우물과 낙타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중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줄 소녀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에다가 돈도 받지도 않았는데 그 쪽이 먼저 그런 말을 해준다?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로 처음 눈에 띈 소녀한테, 자기가 마실 물 한 잔 달라고 하니까, 이 소녀가 뭐래요?


창세기 24장 18절~20절
“18.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すると彼女は、「どうぞ、お飲みください。ご主人様」と言って、すばやくその手に水がめを取り降ろし、彼に飲ませた。
水を飲ませ終わると、彼女は、「あなたのらくだにも、飲み終わるまで、水を汲みましょう」と言った。
彼女は急いで水がめの水を水ぶねにあけ、水を汲みに、再び井戸まで走って行き、すべてのらくだのために水を汲んだ。

대뜸 하는 말이 당신이 데려온 낙타들한테도 물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낙타들한테 한 머금씩 주겠다는 게 아니에요. 낙타들이 배가 부를 때까지 마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소녀는 이 때부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물과 낙타 구유 사이를 왔다갔다 했겠지요. 그러면 이 종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냐아냐. 그만하면 됐어. 그랬을까요?


창세기 24장 21절~22절
“21.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22.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この人は、主が自分の旅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どうかを知ろうと、黙って彼女を見つめていた。
らくだが水を飲み終わったとき、その人は、重さ一ベカの金の飾り輪と、彼女の腕のために、重さ十シェケルの二つの金の腕輪を取り、

그 종은 그 소녀가 정말 낙타가 배부를 때까지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하는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낙타가 물을 다 마시고 나니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지요. 알고 보니까 이 소녀가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친척 집안이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끝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이 소녀가 600킬로나 떨어진 자기 집 주인한테 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부모님도 이를 허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마침내 그 리브가라고 하는 그 소녀를 데리고 돌아와서 이삭의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말이 쉬워 600킬로지 당시 감각으로 본다면 한국과 일본 정도로 먼 거리로 여겨졌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요, 자, 일본에 있는 한국사람이 자기 아들의 아내를 구하려고 해요. 그래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한국에 가서 자기 아들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그 일하는 사람은 알았다고 하고 10명의 일행들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을 딱 나가자 마자, 그 공항 건물 입구에서 어떤 아리따운 소녀를 발견해요.

이 사람이 그 소녀한테 말합니다. 이봐. 내가 좀 배가 고픈데 말이야. 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 사주지 않겠니?

그러자 이 소녀가 하는 말이, 그러지 마시고, 당신만이 아니라 같이 계신 10명한테도 부페를 대접해드리겠다고 해요…….

뭐, 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럴 확률이 있어요? 없습니다. 36자리 숫자를 맞출 확률이 아니라 360자리 숫자를 맞출 확률보다도 낮겠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4장 40절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すると主人は答えました。『私は主の前に歩んできた。その主が御使いをあなたと一緒に遣わし、あなたの旅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あなたは、私の親族、私の父の家から、私の息子に妻を迎えなさ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주셨을까요.


누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감람나무 나뭇가지 보다도 못한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평탄한 길이 허락되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평탄한 길이 아무런 대가 없이 허락되었나요?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하나님과 사람의 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어마어마하게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를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대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까.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면 됐지, 왜 우리는 죽어라고 예수님을 매달립니까. 예수님에 매달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이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우리는 죄악 속에서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26장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正しい人の行く道は平らです。あなたは正しい人の道をならし、平らにされます。

이제 돌감람나무 가지보다도 못한 우리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접붙임을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앞길을 평탄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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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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