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7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2022년 11월 2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9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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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9節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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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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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9번째 시간으로서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賜物で満たし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라고 말하면 꼭 돈이나 물질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 오늘은 주님께서 가득 채워 주시는 은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에도 잠시 살펴보았던 내용이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잠시 지난 주 말씀을 복습 하실까요?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사와 부르심에 대하여 후회하심이 없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신 적이 있으셨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후회를 안 하시도록 하는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피조물은 이 세상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다른 열매는 다 먹어도 좋아. 하지만 내가 말한 그 열매만은 먹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설마 그 열매가 아까워서 그러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못 먹잖아요. 그건 순종이 아니지요.


그럼 어떤 것이 순종이냐 하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는다면, 이것이 진정한 순종이겠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 동산의 어디에 있었습니까.

창세기 2장 9절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동산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은, 에덴 어디에 있든지 제일 잘 보이는 곳, 제일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먹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가서 따먹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안 먹는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으로 쳐주겠다. 이와 같은 말씀이셨던 것이지요.


매일 삼시세끼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안 먹기만 하면, 그 말씀만 지키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여겨 주셔서, 영원토록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만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あるこの思いを、あなたがたの間でも抱きなさい。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모든 영광을 받고 계셨으나, 이를 마다하고 사람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불순종을 해결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죄의 근원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사탄은 항상 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무기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순종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정말 괄목할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라고 하겠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의하면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의 인생은 크게 40년 씩 세 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 40년은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할 때였고, 다음 40년은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 쓸쓸히 광야에서 생활하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서 광야를 떠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언제가 가장 화려하겠습니까. 당연히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할 때라고 하겠지요. 당시 애굽은 최고의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애굽인이 아닌 이스라엘 자손이면서 왕자로 인정을 받아서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리고 살았던 시기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시기를 성경은 얼마나 기록하냐 하면, 한 장도 아니에요. 모세의 출생부터 애굽에서의 생활을 마친 40년 동안의 세월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2장 2절~15절까지 달랑 14절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낯선 땅 광야에 머무르면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지내는 40년도 출애굽기 2장 15절에서 마지막 25절까지, 이건 더 짧아서 11절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에서 그의 생을 마치는 40년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장에서 40장까지 38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36장, 그리고 신명기 마지막 34장까지 무려 135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똑 같은 40년인데 왜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면 성경은 철저하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80. 이제 고령자가 된 모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옛날엔 좋았지. 그 강대국 애굽에서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때는 참 멋있었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에게 머리를 숙이고, 내 명령 하나라면 모든 군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그랬었지.

그런데 사람 팔자 모를 일이야. 인생이 한 번 꼬이더니 모든 것을 다 잃고서는 이제 이 광야 땅에서 쓸쓸하게 나이를 먹었구나.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일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십니까.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너무나도 기가 막히는 노릇 아닙니까. 이제 인생 끝자락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세요. 아무리 사람이 끝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어떻게 돼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어려운 말씀을 쉽게 하세요.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 내게 하시겠다는 것인데, 지금 이팔청춘 젊은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팔십 먹은 할아버지한테 이 어마어마한 사명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 보더라도 외국에 잡혀 있는 사람 하나를 살려내려고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정부 고위층이 오랜 시간을 걸쳐 협상도 해야 하고 그래요.

그런데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출애굽기 38장 26절과 민수기 4장 48절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수 방법에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일단 성경에 나온 기록으로 본다면, 성인 남성이 603,550명에다가 레위 지파 8580명. 이를 더하면 612,130명. 이를 바탕으로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전체 수를 신학자들은 대략 20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놀고 있는 사람 데려오는 게 아니에요. 그 나라에서 종으로 살고 있다는 뜻은, 실질적인 노동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유인도 아니고 종, 그러니까 노예입니다. 200명도 아닌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말하자면 북한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런 막대한 사명을 누구한테요? 예, 80먹은 할아버지한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당연히 못 한다고 하지요.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저 이 나이까지 양이나 치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세가 지금 못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손에 뭐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지팡이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거 가지고 가.

참 말씀 쉽지요?

그래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또 뭐라고 하세요?

출애굽기 4장 14절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すると、主の怒りがモーセ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こう言われた。「あなたの兄、レビ人アロンがいるではないか。わたしは彼が雄弁である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見よ、彼はあなたに会いに出て来ている。あなたに会えば、心から喜ぶだろう。

야. 너 자꾸 말 안 듣지? 알았어. 그럼 네 형 있잖아. 형도 붙여 줄게. 빨리 가.

이렇게 말씀하세요.

모세의 나이 여든 살. 그러면 모세의 형이라면 모세보다 젊겠어요? 늙었겠어요. 당연히 나이가 위잖아요.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ファラオ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그의 형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 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든 살, 그의 형 아론은 여든 세 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핍박 받고 있는 애굽에서 구해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해준 것이 뭐였어요? 예, 나무 지팡이와 모세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할아버지 아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할아버지 둘이 200만명이나 되는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말하자면 북한 같은 곳에 쳐들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참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세가 이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참 너무하지 않아요?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시면서 새로 뭔가를 주신 것이 없어요. 지팡이? 원래 모세가 가지고 있었어요. 아론이요? 원래 있었던 형이잖아요. 다 원래 있던 거예요. 하지만 원래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원래 있던 아론 형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럼 막강한 군대를 짠 하고 만들어주실 능력이 없으십니까. 아니요. 그 정도가 아니라 천군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팡이와 그의 형, 아니, 뭐 사실 형은 나중에 하도 모세가 자꾸 못 하겠다고 하니까 억지로 붙여준 것이지만, 솔직히 그 모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지팡이 하나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애굽을 향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そこでモーセは妻や息子たちを連れ、彼らをろばに乗せて、エジプトの地へ帰って行った。モーセは神の杖を手に取った。

그 때까지는 양이나 치기 위해 쓰던 흔한 그 나무 지팡이였지만,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자 어느덧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못 한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순종을 하면 내가 능력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합니다. 아니,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에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감사가 없어요.

항상 이게 없어요. 저게 없어요. 하고 불평을 합니다. 불만을 말해요. 하지만 어쩌면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모세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천군만마요? 막대한 돈이요? 아니요. 오로지 그의 순종이었습니다. 그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가지고 있던 나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나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은사도 주신다고 기록합니다.


은사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11절.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ある人には同じ御霊によって信仰、ある人には同一の御霊によって癒やしの賜物、
ある人には奇跡を行う力、ある人には預言、ある人には霊を見分ける力、ある人には種々の異言、ある人には異言を解き明かす力が与えられています。
同じ一つの御霊が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なさるのであり、御霊は、みこころのままに、一人ひとりそれぞれに賜物を分け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 보시면 유독 한국에서는 이 방언의 은사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시면 방언을 하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だれかが異言で語るのであれば、二人か、多くても三人で順番に行い、一人が解き明かしをしなさい。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기도할 때 하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방언으로 크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성경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도 해석하지 못하는 방언을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바깥에 나가서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던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남들 앞에서 크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와~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좋구나~ 하고 칭찬할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가 받을 상은 이미 다 받았다. 그러니까 뭐예요? 내가 줄 상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혹 교회에 보면 은사 찾기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게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기도에 은사가 있다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제가 어느 교회에서 본 분인데 말이에요. 한 여자 집시님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예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즉흥으로 그 분이 식사기도인가를 하게 되었는데, 야, 정말 어쩌면 그렇게 기도를 잘 하세요? 길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즉석에서 하시는 기도인데 마치 정말 종이에 적어온 것처럼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잘 하는 것만이 은사인가요?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는 안수집사님이셨는데 당시 섬기고 계셨던 교회의 어느 한 교구가 크게 성장한다는 소식을 들었대요. 그런데 거기 구역장님이 정말 소문이 자자해서 자기도 한 번 가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였냐 하면 이 구역장님이 말씀을 하실 때 좀 많이 더듬는대요.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것도 좀 매끄럽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 그런가보다……했는데, 이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이야기 하시는데, 이러시더래요.


“음…음…음…”

말을 원래 더듬으시니까 매끄럽게 잘 안 나오죠.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 자리에 있던 구역 식구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들 마가복음을 펴더래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길래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답니다. 아니, 어떻게 마가복음인지 알았습니까. 그랬더니, 아, 구역장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때는 <마가복음>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래요.

그래서, 아니 <마>로 시작한다면 <마태복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가복음>이라고 알았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그러시더래요. 우리 구역장님이 마태복음을 말씀하실 때는 “마마마마마” 그러신대요.

이 분은 인간적으로는 말씀에 은사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구역장님 덕분에 크게 성장을 한다는 거예요.

다른 구역을 보면 구역장님이 말씀을 전할 때 다른 짓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서는 잘못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모두가 다 그 구역장님의 입을 본다는 거예요.

그만큼 집중을 해서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이 심어지고 그 구역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우리에게 없는 것만 자꾸 보려고 하는 것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순종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나무 막대기가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고, 인생의 끝이 놀라운 인생의 시작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넉넉하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인생, 축복과 은혜로 넘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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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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