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회 구원의 약속
2022년 11월 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7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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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5節~27節
“25.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この奥義を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人の一部が頑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の満ちる時が来るまでであり、
26.こうして、イスラエル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救い出す者がシオンから現れ、ヤコブから不敬虔を除き去る。
27.これこそ、彼らと結ぶわたしの契約、すなわち、わたしが彼らの罪を取り除く時であ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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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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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7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5節~27節
25.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この奥義を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人の一部が頑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の満ちる時が来るまでであり、
26.こうして、イスラエル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救い出す者がシオンから現れ、ヤコブから不敬虔を除き去る。
27.これこそ、彼らと結ぶわたしの契約、すなわち、わたしが彼らの罪を取り除く時であ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일단 25절에 보시면 하나의 신비 즉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한 대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십 번 십자가에 못박힌다 하더라도, 아무리 수백 번 채찍에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의 죄는커녕 우리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만 우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에 대한 우둔함은 예수님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요, 구원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중 일부가 이처럼 우둔하게 된 이유가 뭐라고 배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둔하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셨다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실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하기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수가 충만해 진다> <수가 찬다>는 말을 들으면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이에요. 사실 이런 집단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마다 일만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명만 인치심을 받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지막 날에는 이 십사만 사천명 안에 들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열두 지파를 만들어놓고는, 각 지파에 들어가는 명단을 만들어요. 그래서 각 지파에서 12,000명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말하는 12,000명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그 종교집단의 말을 잘 들어야 그 명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뭐예요? 예, 헌금을 많이 내면 그 명단에 들어가게 되고, 헌금을 못 내면 그 12,000명에서 밀려나게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말합니다. 공짜 천국은 없다. 그러니까 헌금을 많이 내라. 신자들을 많이 모아와라. 그래야 천국 간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런 걸 들으면요. 정말 참 장사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렇게 하면 교회 재정도 좀 넉넉해지고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말씀을 못 드립니다.

물론 성경에는 물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무조건 많이 내기만 하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요.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だ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と。十分の一と奉納物においてだ。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十分の一をことごとく、宝物倉(ほうもつぐら)に携えて来て、わたしの家の食物とせよ。こうしてわたしを試してみよ。──万軍の主は言われ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の窓を開き、あふれるばかりの祝福をあなたがたに注ぐかどうか。


십일조 즉 자신의 수입에 있어서 10분의 1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바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하고, 뿐만 아니라 어디 한 번 십일조를 드려봐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이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지 않나 한 번 하나님을 시험해봐라.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계세요.

누구는 십일조는 구약에만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씀을 안 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イノンド、クミン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律法の中ではるかに重要なもの、正義とあわれみと誠実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누가복음 11장 42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だが、わざわいだ、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うん香、あらゆる野菜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正義と神への愛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의와 긍휼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중요하지만, 뿐만 아니라 십일조도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보험이 많습니다만, 저는 그 보험 중의 보험이 바로 십일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종종 보면 이 십일조가 얼마나 시험에 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회사생활 할 때를 생각하면, 꼭 십일조만 내지 않으면 딱 맞아요. 십일조를 내면 그 만큼 적자가 날 것만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바치기만 하면, 길이 열리고 주님께서 물질과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경험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분을 보니까, 자기는 십일조를 지금보다 열 배 스무 배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니 무슨 교회에 돈을 많이 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나……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 자기 수입이 열 배 스무 배 늘어나게 해달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걸 듣고 그것 참 자혜로운 기도네……라고 감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수입이 열 배 스무 배 이상 늘어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가 돈 이야기 한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이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십일조에 대해서도 안 전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이 하는 돈 이야기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무조건 돈을 많이 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그들은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은 못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 지파마다 12,000명, 총 144,000명 안에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재적교인만 보더라도 75만명이라고 하는데, 전세계, 그것도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다 포함을 한다면 어떻게 그 절대적인 숫자만이 구원받겠습니까.

좋습니다. 100보 양보를 해서, 1명 2명 3명……해서 정말 144,000명이 구원을 받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명단을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요? 자기들이 멋대로 명단을 만들어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보여드리면, 그 명단 대로 주님이 그걸 보시고 구원을 해 주신대요? 자기들이 뭔데요?

이렇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을 그 안에 있으면 교묘하게 세뇌를 해서, 성경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믿도록 한다는 것인데, 이게 참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2,00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성경에 나오는 완전수입니다. 성경에는 12만이 아니라 3이나 40 같은 수도 완전수라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이를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교회 좀 다니고 설교 좀 들었다고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면, 그냥 조금 잘못될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꼬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인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경에 적혀 있는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이 맨날 말만 했지 도무지 지키는 모습이 안 나와요.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도 믿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최대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문제를 내볼까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말 그대로 본다면 구약은 오래된 약속이요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약속의 책입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구약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요, 신약은 아직 안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은 어디서 나누어질까요.

많은 분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 구약이요 예수님이 오신 다음이 신약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사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부터 신약성경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부터 신약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지 말아야 하잖아요?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성취가 된다면 그 성취까지가 구약이 되는 것이요, 새로운 약속이 선포되고 시작되는 시점이 신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사실은 구약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습니다. 구약 39권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오신다는 예언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이지요. 시간관계상 인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이사야 53장에 보면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예언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자, 그럼 구약의 예언이 어디서 완전히 끝나게 되느냐 하면, 이는 예수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내용인데, 여기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것,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왔던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구약의 예언은 모두가 성취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예,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가신 것이 아니지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사도행전 1장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こ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使徒たちが見ている間に上げられた。そして雲がイエスを包み、彼らの目には見えなくな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상장이라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답은 두 개입니다.

자,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지 않지만, 올라가시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 중 하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하나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2절~3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3절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用意し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がいるところに、あなたがたもい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주시기 위해서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어때요?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144,000밖에 없다고 하시나요? 아니요. 걱정하지 마세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서 가려고 하실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모두 다 마치고 난 다음 천천히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며칠 전에 차를 타고 제 아내와 어디를 가는 길에 보니까, 그럴 때 있잖아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쫙 비치는 모습이요. 서울이나 동경 같은 도시에서는 하늘이 넓지 않으니까 그런 걸 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군마 같은 경우는 하늘이 넓으니까 참 멋진 경치를 볼 기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그 구름 사이로 몇 갈래나 햇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 마치 예수님이 오실 것 같다는 거예요.

글쎄요. 실제로는 어떤 상황에서 오실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니까 정말 영화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 같은 분위기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에요.

그래서, 오, 정말 그러네?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예수님을 만나면 뭐라고 할 거냐고 저한테 물어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딱 만나면 뭐라고 하실 것 같으세요? 할렐루야! 주여! 그러시겠어요?

저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겠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첫 마디는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할 거 같애요.

자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기에는 거할 곳이 많은데, 너는 어디서 살고 싶니.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으십니까. 큰 집에서 살고 싶어요? 교통편이 좋은 곳에서? 경치가 좋은 곳? 산이나 바다가 가까운 곳? 아니면 설마 땅값이 비싼 곳?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한 가지 좋은 답이 떠오른 것 같아요.

사실 이 답은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 드리려고 했는데, 여러분께만 특별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어디에 살고 싶냐고 물으시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싶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니까 왕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누가 사냐 하면, 최측근이 살지 않습니까. 그래야 왕이나 대통령이 부를 때 언제든지 제일 빨리 갈 수 있잖아요.


이는 그렇다고 무슨 천국에 가서까지도 권력에 욕심을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이 가장 귀하고 값진 삶이 아니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부어주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 주십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시고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주신다는 구원의 약속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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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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