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회 언제부터입니까
2022년 11월 27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0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0절~32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0節~32節
“30.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神に不従順でしたが、今は彼らの不従順のゆえに、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
31.それと同じように、彼らも今は、あなたがたの受けたあわれみのゆえに不従順になっていますが、それは、彼ら自身も今あわれみを受けるためです。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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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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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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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0번째 시간으로서 “언제부터입니까” いつからです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장 30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0.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神に不従順でしたが、今は彼らの不従順のゆえに、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

여기서 30절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된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긍휼’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를 직역을 하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복음’ 즉 구원의 말씀이라고 하면 좀 이해가 쉽습니다.


본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파되어야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부를 했어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부터가 조금 어려워집니다.

3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1절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それと同じように、彼らも今は、あなたがたの受けたあわれみのゆえに不従順になっていますが、それは、彼ら自身も今あわれみを受けるためです。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너희’라고 하는 것은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긍휼 즉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었는데, 이제는 이방인이 받은 복음으로 그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역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배웠습니까.

로마서 11장 11절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それでは尋ねますが、彼らがつまずいたのは倒れるため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彼らの背きによって、救いが異邦人に及び、イスラエルにねたみを起こさせました。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전에는 이방인이 받은 축복을 보고 시기를 하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조금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 점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나머지 32절을 마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여기서는 이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범위를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까지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구원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31절에서 생길 수도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1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받아야 했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가 되어서, 자신들이 받아야 할 축복을 이방인들이 받게 된 사실을 알고 시기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시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무슨 남의 집 담장 넘어 보듯이 훔쳐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는 하기 힘들잖아요.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면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복음을 받은 우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처럼 우리더러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지난 주에 우리가 공부 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이세요? 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좋으시니까 그저 아멘 하고 받아들이시겠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시다면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면서.

그러면 뭐예요? 그럼 자기가 하지 왜 우리한테 시킬까.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솔직히 저는 해봤습니다.

거 참 이상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도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니셨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는 것이 말하자면 복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모든 민족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하나님께 있어서 어려운 일이에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우리한테 이 일을 시키려고 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말이에요.

자,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번 기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미워하십니까. 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야말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 그럼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미 답까지 다 말씀드린 것이지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본인이 하시지 왜 우리를 귀찮게 하면서 우리더러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1.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2.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주에 에덴에 심겨져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굳이 에덴 동산 그것도 정중앙,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아담과 하와가 미워서 그랬습니까. 괜히 시험을 주어서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열매를 먹지만 않는다면, 그것 하나만 지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순종한 것으로 쳐주어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축복을 막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면 모든 사람한테 그냥 축복을 주시면 될 것 아니야. 꼭 그렇게 열심히 믿고 순종을 해야지만 축복을 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를 별로 안 사랑하시나보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사실을 알면 그렇지 않습니다. 뭐, 우리 알기 쉽게 돈 이야기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일시적으로 가난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가난이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이 어느 정도 돈을 주면 축복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1억? 2억? 좀 넉넉하신 분들은 1억이나 2억이라고 해 봤자 부족하다고 하실지 모르니까, 좋습니다. 100억이라고 칩시다. 그 정도면 돈으로 본다면 축복이라고 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고 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100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순간 전세계 경제는 마비가 될 것입니다. 물가는 순식간에 오르게 되고, 여기저기에서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문제들로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지난 동경 올림픽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죠. 사실 원래는 2020년에 치러질 예정이었습니다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연기가 되었잖아요?


그리고 난 다음에는 1년 뒤인 2021년에 하느냐 아니면 취소를 하느냐 하는 많은 논란이 있었고,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 2021년에 무관객으로 개최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어땠을까요. 올림픽을 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안 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 그거 괜히 올림픽을 하게 되면 훈련도 힘들게 해야 되고, 고생이 많은데 차라리 안 하는게 낫지 않아? 생각 없는 분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선수들, 특별히 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선수들은 올림픽 개최를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운동경기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운동경기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 목표가 국가대표, 올림픽. 더 나아가서 올림픽 금메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올림픽이 열려야 메달을 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어요. 올림픽이 열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놀라운 상을 받을 기회조차도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만약에 올림픽이 취소되고 그 대신 출전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금메달을 하나씩 걸어주겠다고 하면, 선수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금메달에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 건 아무리 금메달이 아니라 그냥 금색 메달이지요. 상이라기보다는 기념품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힘써 땀을 흘린 끝에 금메달을 따기를 원하는 것, 그 때 비로소 전세계 국민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고 그 나라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금메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마침 월드컵 축구가 한창입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일본과의 경기는 중계를 해줍니다만, 한국 경기는 볼 수가 없지요. 인터넷으로 보려고 해도 “해외에서는 이용하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나와서 볼 수가 없어요. 이럴 때보면 참 외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얼마 전에 보니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이 독일을 꺾고 화제가 되고, 한국도 강팀인 우루과이와 비겼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나 자기 나라 팀이 이기는 것을 원합니다만, 그렇다면 자기 나라 팀이 갑자기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천사가 되어서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축구 강국인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라 하더라도 천사로 구성된 축구팀이 못 이기겠어요? 당연히 이기겠지요. 그러면 그것으로 본래 축구선수들이 좋아하겠어요?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대표선수가 다 천사들로 대체되었어요. 그러면 천사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그깟 금메달이 아니라 세계신기록을 못 세우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박수를 선수들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선수들이 받지 못합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시면 누가 상을 못 받아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을 못 받아요. 아니, 우리가 무슨 공을 세워야 우리가 상을 받을 텐데,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어요. 이는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기보다는 아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뭐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스스로가 하시는 편히 훨씬 쉽고 빠름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32절을 보세요. 이 사실을 모르고 보시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실을 알고 보시면 완전히 이해가 됩니다.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원하시면 한 순간에 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과업을 누구한테 맡기셨어요? 그렇죠. 우리한테 맡기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상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이렇게 전도를 하다 보면요, 여러 가지 간증 거리가 많습니다. 우선 제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제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한테는 다시는 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도를 하는 데에 있어서 그 사람이 거부를 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끈질기게 전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 5절~6절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どの家に入っても、まず、『この家に平安があるように』と言いなさい。
そこに平安の子がいたら、あなたがたの平安は、その人の上にとどまります。いなければ、その平安はあなたがたに返って来ます。

누가복음 10장 10절~11절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しかし、どの町であれ、人々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ないなら、大通りに出て言いなさい。
『私たちは、足に付いたこの町のちりさえ、おまえたちに払い落として行く。しかし、神の国が近づいた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


제가 매주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메일을 보내면서 선교후원금을 당부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아직 지원이 안되기 때문에 저희 가정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교 후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구걸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설령 사람한테 선교후원을 구걸할 지언정 복음은 절대로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 사업장에 대해서 방문 전도를 시작할 때에는 여러 가지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오지 말라고 물을 뿌리거나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아니, 웃으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로 그런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시는 분들은 없으셨어요.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물론 뭐, 오지 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다른 곳은 몰라도 오지 말라고 하는 곳은 절대로 다시는 안 갑니다.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에요. 제 실수가 아니라면, 메일을 안 받겠다고 하는 분에게는 다시 보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거나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제가 아닌 다른 손길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제 방문을 받아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제가 방문하면 오래 있지 않습니다. 제가 준비한 전도지를 드리고, 그리고 일 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까봐 금방 나옵니다.

그리고 간혹 제가 찾아 뵈었을 때 헌금이라고 하시면서 돈을 주시려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양을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제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제가 받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저도 사람인데, 만약에 어디를 갔는데 헌금을 해주셨어요. 그럼 다음에 갈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번에 가면 또 주실까? 어? 그런데 이번에는 안 주시네? 라고 하면 저 자신이 얼마나 못난 사람이 됩니까.

그리고 주신 쪽도 마찬가지죠. 제가 자주 찾아 뵈면, 이휴, 저 인간, 왜 이렇게 자주 와? 지난 번에 돈 줬는데 이번에도 줘야 하나? 돈 주길 바라고 이렇게 자주 오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안 생기겠어요? 아니, 이건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전도지를 들고 찾아 뵈었을 때, 행여 돈을 주거나 하는 일이 없으시도록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그래야 제가 찾아 뵙는 발걸음도 가볍지요.


예전에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두 경우인데, 이제 코스를 따라서 차례차례 방문을 하는데, 다음은 어디를 방문할 차례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말 가기가 싫어요. 거기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고, 한국과 관련된 사업장 같은데 한국사람이 하는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몇 번 갔었거든요.

그 때까지 사람은 못 만나고 그냥 문에다가 전도지를 넣고만 왔었는데, 그 날 따라 그렇게 거기를 가기가 싫더라고요. 하지만 이게 마귀가 전도를 방해해서인지 아니면 성령님이 가지 말라고 해서인지 제가 구분이 잘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뭐 예정에 있었던 곳이니까 억지로 갔어요.

그랬더니 마침 주차장에 한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기 분이냐고 물으면서 전도지를 드리니까, 자기는 종교가 달라서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전도지를 드리면서 그냥 시간 나실 때 보시라고 하니까 그것도 안 받으시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그래, 주님께서는 다른 손길을 예비해 놓고 계시나 보다 하고, 더 이상 그곳은 방문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곳은, 여기는 안 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어요. 다만 제가 방문전도를 하는 곳은 한국 분이 하시는 곳만 찾아 뵙는데, 거기는 한국 분이 운영하는 곳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여길 일본 분이 운영하는 곳이면 가지 말아야 같은데 어떻게 알 길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는 사업장 안에 들어갔더니, 어떤 사장님 같은 분이 이름표 목걸이를 걸었는데, 거기에 한국 이름이 적혀 있잖아요.

그래서 아하, 성령님이 이런 것도 보게 하시는구나 하고, 거기는 요즘도 계속해서 방문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 정말 이처럼 성령님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오프라인 전도보다 온라인 전도입니다. 온라인은 얼굴이 안 보이니까 정말 얼마나 좀 힘든 일도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온라인 상에서 보면 정말 평생 듣지도 못했던 참 심한 말도 많이 듣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메일을 받기 싫으면 안 받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참 여러 가지 의미로 화려한 답장을 보내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게 되면 반드시 이런 일을 겪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마음 아픈 경험을 하는 것은, 그것은 말하자면 운동할 때의 근육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운동할 때 근육통이 온다면 그것은 몸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통이 없다면 이는 오히려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너무 나무라거나 미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거라고 2천년 전에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32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해서 축복을 받으려고 해도, 주변에 전도할 사람이 없으면 곤란 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 곁에 아직 순종하지 않는 사람, 즉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를 싫다는 대도 억지로 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みことばを宣べ伝えなさい。時が良くても悪くてもしっかりやりなさい。忍耐の限りを尽くし、絶えず教えながら、責め、戒め、また勧めなさい。

여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는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복음 전파, 언제부터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 말씀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 전파는 선택이 아닙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 성령님께서 섬세한 손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마음에 상처를 좀 입어도 괜찮습니다. 자존심 상해도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바로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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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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