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2022년 12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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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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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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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3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神が喜ばれる礼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12장을 함께 살펴봅니다. 로마서가 16장까지니까 이제 많이 왔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공부하신 분이시라면 어느 정도 로마서의 흐름도 이해가 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만약에 복습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이시라면 언제든지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이든 음성이든, 아니면 텍스트로든 복습이 가능하니까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우선 오늘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이 문장을 좀 끝에서부터 해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에서 보면 일단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예배’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영적 예배’의 반대말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영적’의 반대말은 ‘육적’이 되겠지요. ‘육적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형식적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쁜데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심해서요? 사람들 만나러요? 바람 쐬려고요? 아니면 사업 때문에 나오시나요?

큰 교회에 보면 그런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업을 하는데 고객이 교회에 많이 있어요. 그래서 고객관리 차원에서 교회에 나간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것은 다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합니다. 제가 예전에 어디 보니까 그런 사람도 있더라고요. 평소에는 차 운전을 잘 안 하는데, 교회에 갈 때 타기 위해서 고급차를 샀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주차장에서 긁혀가지고 너무나도 속이 상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 사람 말대로 단지 교회에 가기 위해서 차를 샀다면 왜 고급차를 사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영광은 무슨,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람들한테 자랑하려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예배가 하나님 앞에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육적인 예배, 형식적인 예배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영적인 예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예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1절 말씀 조금 앞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 중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생각해보겠습니다.

몸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 혹시 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분 계십니까.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영혼만 가지고 있어요……라고 하는 분이 계시면……어떻게 해야 되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정말 작년 이맘때는 이제 1년 정도면 코로나도 끝나겠지 했는데, 이제 일본은 8차 유행에 돌입했다고 하잖아요. 지난 13일 발표에 의하면 군마현이 역대 최고기록인 확진자 3576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좀 위로도 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드리는 예배라는 의미는, 첫째로 남자든 여자든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누구든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은 몇 개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입니다. 내가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것이요, 내가 교회에 있으면 교회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시면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시잖아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내 몸은 산 채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주변에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귀찮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화장실에 가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봐, 나를 대신해서 예배 좀 드려달라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에스겔 18장 19절~20절
“19.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あなたがたは『なぜ、その子は父の咎を負わなくてよいのか』と言う。その子は、公正と義を行い、わたしのすべての掟を守り行ったのだから、必ず生きる。
罪を犯したたましいが死ぬのであり、子は父の咎について負い目がなく、父も子の咎について負い目がない。正しい人の義はその人の上にあり、悪しき者の悪はその者の上にある。

부모와 자식간이라 하더라도 공의나 악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대신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드리는 예배의 두 번째 의미는, 예배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예배라고 하는 것은 바로 행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행함 만으로는 온전히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배라고 해서 꼭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한 두 시간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그 순간순간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행함으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믿음과 말씀이 무엇보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기 쉽게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자동차로 비유를 해본다면, 믿음은 우선 자동차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말씀은 휘발유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기름을 넣지 않으면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넣었다고 한다면, 이제 시동을 걸고 출발해야지요.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차만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차가 없는 상태에서는 기름을 넣을 수도 없고, 시동도 걸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다고 한다면, 믿음만 있다고 주님 앞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그런 사람 있어요. 성경도 안 읽고,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그러면서 응답 받았다는 사람 있습니다. 물론 초신자 때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도 여전히 성경도 모르면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고는 무슨 환상을 봤다느니, 방언을 한다느니, 응답을 받았다느니 하면서, 자기가 무슨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엉터리 무당이지,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그리고 성령님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령님을 압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하지, 성경도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다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깨달았다면, 이제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러면서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죠? 내 이웃도 사랑하는 것 아시죠? 제가 뭘 꼭 해야 되요? 그냥 주님을 믿고 성경만 읽을게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이러고 있으면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 말을 하는 것도 그래요. 말을 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엄연한 행함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그냥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놀라운 행함인 것입니다.

지난 12월 14일자 일본 신문에 보니까, 부부나 커플에 있어서 서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어느 지방이 많이 하느냐 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와 있었습니다.

서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일본 지차제가 어디일 것 같으십니까.

이게 북해도라고 해요. 올 한 해에 평균 71.1회, 그러니까 일흔 번이 넘게 상대방한테 사랑한다, 좋아한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2위는 66.7회인 쿠마모토현이고 3위는 카나가와현 60.0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국평균은 34.3회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군마현은 47개 일본 지자체 중에서 몇 번째로 상대방에게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까요.

예, 47개 지자체 중에서 47위. 영광스럽게도 최하위였다고 합니다. 올 한해 동안 부부나 커플 사이에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게 13.4회였다는 거예요. 1위인 홋카이도에 비하면 5분의 1도 안 되고, 전국평균 34.3회에 비해도 절반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물론 마음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입으로 고백하는 행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구는 그러실지도 모르겠지요. 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성경에서도 우리더러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잖아요.

사랑하는 우리 군마현민 여러분께서도 조금 더 분발해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는 놀라운 행함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どの戒めが一番重要です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용할 때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는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아직 좀 이해가 안 된다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그렇게 의심을 하는 이유를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이웃은 그냥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왠지 하나님을 정말 첫째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만약에 “하나님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다면 어떻습니까. 여기는 논리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あなたの神、主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우리와 우리 이웃은 같아요? 달라요. 예,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 같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 이웃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우리 이웃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한테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면 불쾌하듯이, 내 이웃이 가진 것을 내가 빼앗는다면 역시 불쾌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이웃과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셔도 우리가 하나님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あなたの神、主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득이하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하지만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바꾸어 볼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隣人を愛しなさい。』


주님은 우리와 우리 이웃이 동일하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ですから、人からしてもらいたいことは何でも、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人にしなさい。これが律法と預言者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한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면서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세요.

이와 비슷한 말씀이 아까 마태복음 22장에서도 나왔었잖아요?

마태복음 22장 40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핵심, 성경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성경 모든 것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우리는 주님 앞에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남녀노소, 그리고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든지 그 삶을 주님께 제물로서 드릴 수 있다는 것.

둘째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자기 자신이 드릴 수 있다는 것,

셋째로,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요,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배웠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隣人を愛しなさい。』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이루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남녀노소,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가만히 혼자서 생각만 하는 마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함입니다. 실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과 말씀을 통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진정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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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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