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회 나를 아시는 주님
2022년 124 설교 - 로마서 강해 111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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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34절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3節~34節
"33.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神のさばきはなんと知り尽くしがたく、神の道はなんと極めがたいことでしょう。
34.「だれが主の心を知っ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主の助言者になったの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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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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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1번째 시간으로서 “나를 아시는 주님” 私を知ってお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감탄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34절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3節~34節
33.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神のさばきはなんと知り尽くしがたく、神の道はなんと極めがたいことでしょう。
34.「だれが主の心を知っ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主の助言者になったのですか。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감탄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스라엘 자손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이 점을 들어서 유대인들이 어리석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ち)の雨のように。


여호와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자 명철이기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분명 상하관계이긴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하나이십니다. 생각에 있어서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요한복음 7장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教えは、わたしのもの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ものです。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말씀을 하시고 모든 일을 행하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서 구약성경을 달달달달 외울 정도로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을 때, 우리가 오, 주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영접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사람의 생각으로 배우기만 했다면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성경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배운 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성경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 마지막인 말라기까지 성경은 온통 예수님에 대한 말씀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의 머리로만 풀려고 하다 보니 엉뚱한 지식만 쌓이게 되어서, 결국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ので、思い違いをしています。


이런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해요. 아니, 자기들은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박사학위도 받고 유명 신학교 교수이자 전문가 중 전문가인데,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밖에 안 되고 무슨 대단한 학교도 나오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그리고 성경 전문가인 자신들한테 당신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나름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달려듭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때 배운 사람들이라고 아픈 데가 없었겠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어요? 아니요. 그런 문제들이 있었겠지요. 영육간에 문제들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앞에 누가 계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얼마나 큰 기회입니까. 그러면 정말 체면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저를 고쳐주세요. 제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하면 주님이 그것을 해결 안 해 주셨겠어요?

하지만 얄팍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간에 말로 예수님을 이겨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만 합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세요. 눈이 안 보여요. 보길 원합니다. 하면 고쳐 주시고,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해요, 걷게 해주세요. 하면 그 소원을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에요? 무슨 지식이 없고 순진한 사람만 예수님을 믿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뛰어난 과학자라고 하면 믿음이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뭔가 사람의 머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힘을 느낀다는 것이에요.

괜히 좀 어려운 책 몇 권 읽고 나서 지식인인 척 하는 수준의 사람들은 성경을 안 받아 들이려고 하지만, 과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연구하다 보면, 이건 단순한 우연이나 확률이 아닌 무슨 강한 힘이나 의지가 있어야지만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을 많이 본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보면 율법학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남들의 눈을 피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진정한 천국 복음을 듣고는 구원을 받기도 하고 병고침을 받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서 이방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고, 오히려 이방인들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도 구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넘쳐납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세상을 심판하시고는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서 그를 통해서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신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노년에까지 아이가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이 하나 둘 정도가 아니라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을 때는 훨씬 더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니, 기왕 주실 거면 좀 일찍 주시든지 하시지, 좋은 세월 다 보내고 이제 늙어서 주신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등등 아브라함이라고 할 말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지난 번에 공부한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군천사들을 이끌고 애굽에 쳐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든 살과 여든 세 살 먹은 할아버지 두 사람을 통해서 최대 강국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200만명을 구출해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의 머리로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군대를 모아서 애굽에 쳐들어가서 강제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냈다면 분명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의지했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시면 사무엘이 이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을 대신할 왕을 찾아 나섭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아들 중에서 택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이새한테 가서 당신 아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더니만 일곱 명이 왔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새한테 물어요. 당신 아들이 이 뿐이냐. 그러자 지금 막내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지금 양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지금은 한창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인데, 형제들이 다 오면 양을 누가 지킵니까. 그래서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아들한테 일을 다 떠넘기고 형들은 아버지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서 그 막내아들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이제 그가 사무엘 앞에 섰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무엘상 16장 12절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エッサイは人を遣わして、彼を連れて来させた。彼は血色が良く、目が美しく、姿も立派だった。主は言われた。「さあ、彼に油を注げ。この者がその人だ。」

그게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들한테는 물론이요 아버지에게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맨날 형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만 맡게 됩니다.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あと)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는 이처럼 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는 아직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하는 미성년자였어요. 참, 아버지나 형도 매정하지요. 어떻게 어린 애한테 이처럼 험한 일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이와 같은 생활에 대해서 다윗이 불평불만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 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블레셋 군의 용사 골리앗을 무찌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윗이 좀 머리가 모자라서 그랬었던 건가요? 여러분, 하나님은 미련한 자를 택하셨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것은 지능이 좀 모자란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좀 머리가 부족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지금으로 본다면 명문대를 나와서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엘리트 청년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제 장래는 보장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겠다고 하면,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모자라서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유능했기 때문에, 그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바울은 그렇다고 치고 베드로 같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에게는 대단한 학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어부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주님께 순종하자 주님께서는 그를 높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방언이 막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말하자면 외국어에요. 그런데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사도행전 2장 7절~8절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彼らは驚き、不思議に思って言った。「見なさい。話しているこの人たちはみな、ガリラヤの人ではないか。
それなのに、私たちそれぞれが生まれた国のことばで話を聞くとは、いったいどうしたことか。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저기 있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지방 말들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뜻이고, 둘째는 갈릴리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학문 수준이 높지 않은 지역인데, 거기 출신 사람들이 어떻게 저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의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부족하십니까.

저도 한 번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참 좀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나는지 모릅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실격’이라는 책은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라고 시작합니다만, 정말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남들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남의 것을 빼앗은 적도 있고 남을 속인 적도 있었고…… 정말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낯이 뜨거워져서 자다가도 가끔 벌떡벌떡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의 머리는 나쁜 기억부터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좀 안 그런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쁜 기억 투성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뭐, 반면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 이런 나쁜 기억만 남게 하시는 것도 너무 교만하지 말라고, 좀 겸손 하라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저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분명 계획이 있으시지 않겠습니까. 1976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인도해주신 주님께서는, 어쩌면 몇 십년 뒤에 일본에서 해야 할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 벌써 그 때부터 준비하신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저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18장 3절~6절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私が陶器師の家に下って行くと、見よ、彼はろくろで仕事をしているところだった。
陶器師が粘土で制作中の器は、彼の手で壊されたが、それは再び、陶器師自身の気に入るほかの器に作り替えられた。
それから、私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イスラエルの家よ、わたしがこの陶器師のように、あなたがた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か──主のことば──。見よ。粘土が陶器師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토기장이가 되셔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드시고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귀한 그릇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ち)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전도서 8장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何が起こる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いつ起こるかを、だれも告げることはできない。

전도서 10장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愚か者はよくしゃべる。人はこれから起こることを知らない。これから後(のち)に起こることを、だれが彼に告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많은 사람들은 장래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왜 알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죠.

아니, 알 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만 의지하면 잘 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걸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세요. 우리의 그 얄팍한 지식으로 어찌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했을 때 참 여러가지로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회사에 대해서, 회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뭐, 제가 힘들었다기 보다는 솔직히 제 주변사람들이 힘들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저는 어떤 업무가 있으면, 그 업무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다 알고 난 다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 간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무슨 인턴사원이다 뭐다 해서 회사 업무도 어느 정도 익힐 기회도 많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들어가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참 여러 가지로 막막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세월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난 다음에 시작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참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냥 시작해요. 아브라함도 맨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말씀도 안 해주세요. 그냥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여기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며, 마침내 순금과도 같이 귀한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2년 마지막 남은 한 달을 주님 안에서 잘 마무리 하시고, 다가올 2023년에는 주님께 순종하는 한 해, 주님을 의지하는 한 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 상상도 하지 못했던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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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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