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회 소망의 이유
2023년 7월 2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1

홍성필 목사
www.kir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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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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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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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1번째 시간으로서 “소망의 이유” 希望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에 보시면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개역개정에 보시면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라고 되어 있는데, 새번역 성경에 보면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라고 되어 있고, 일본어 성경에도 역시 그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이를 직역할 경우, 읽기에 따라서는 인내와 위로를 <성경이 주는> 안에 포함 시킬 수도 있고, 위로만 포함 시킬 수도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선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내와 위로 중에서 성경은 위로만 주고 인내를 가르쳐 주시지는 않나 하는 것이지요. 사실 성경을 보면 인내로 넘칩니다.

기본적으로 인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다림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다림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까, 무슨 광고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만, 여러 종류의 강아지들이 쪼로록 앉아 있고, 그 앞에 밥그릇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들이 그것을 먹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요.

조금 있더니 신호를 보내자 그제서야 강아지들이 일제히 먹이를 먹기 시작합니다. 참 대단하지요.

자, 이와 같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강아지들한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훈련이 필요하겠지요.

사실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이 앞에 있다면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락할 때까지 먹어서는 안 되고,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요, 또한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먹는 것만이 아니지요. 집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길러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화장실 문제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물들이 어릴 때는 동물용 기저귀도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아기일 때는 어떻게 화장실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점차 커가는데도 가리지 못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교육>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는 두 강아지가 있는데 모두 배가 고픈 상황이에요. 한 강아지는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다른 강아지는 가만히 있어요. 그렇다면 가만히 있는 강아지는 왜 난리를 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여려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주인이 정해진 시간에 먹이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리한 강아지라면 수고스럽게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밥을 줄지 안 줄지 모르기 때문에 나 배고프다고 어서 밥 달라고 그러는 것이잖아요.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먹이를 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밥을 달라고 난리를 치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겠지요.

하지만 주인이 밥을 준다는 믿음이 없다면, 잘못하면 굶어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나 배고프다고, 나 굶어 죽는다고, 그러니까 어서 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믿음과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 즉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기다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시면 다윗이 등장하는데,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서 당시 사울 왕으로부터 시기를 받게 됩니다.

사실 다윗은 그 전인 사무엘상 16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세우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시고는, 다음 왕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의 용사 골리앗을 무찌르는 엄청난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그를 시기해서 그의 목숨을 노리게 되고, 아무런 잘못 없는 그는 사울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결국 그는 왕위에 오르게 되는 나이 서른 때까지 최소한 10년 이상을 도망 다니는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이보다 이전인 창세기 37장에 보시면 요셉은 17세 때 형제들에 의해 따돌림을 당하고는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까지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그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나락 속으로 빠져버리는 운명에 처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만, 그 자리에 오르게 될 때까지 그는 13년 동안을 노예생활과 감옥살이를 하면서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기다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전인 창세기 12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소원은 단 한 가지,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의 나이 100세 때였지요. 무려 25년 동안 그는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당시 애굽에서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제2인자로 자랐으나,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 혈혈단신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애굽에서 고통 받고 있던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는 쓸쓸한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기다린 사람은 없었을까요. 아니요. 있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명하십니다.

사실 이 상황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세히 알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주의 크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5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당시 한 규빗은 사람의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라고 하는데, 신학자들은 지금 길이로 대략 45센티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렇게 계산하면 방주의 크기가 어떻게 되냐 하면 그 길이가 135미터, 폭은 22.5미터, 높이는 13.5미터입니다. 단순하게 본다면 길이는 일반적으로 105미터라고 하는 축구장보다도 긴 135미터에, 건물 한 층 높이가 4미터 정도라고 하니까 높이 13.5미터라고 하면 3층 건물보다도 높은 빌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일반 도로를 본다면 1차선은 대략 3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22.5미터라고 하면 대략 7차선 도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리하자면 길이는 축구장보다도 길고, 높이는 3층 건물보다도 높고, 폭은 왕복 7차선 도로보다도 넓은 크기의 배를 만들라고 하나님께서는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야 며칠 만에 천지를 창조하실 수도 있으신 분이지만, 이게 사실 사람한테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해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머물지 않아요. 더 심각한 문제는 뭐냐 하면, 당시 노아는 방주는 고사하고 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당시에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3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이제부터는 모든 살아 있는 동물, 모든 움직이는 생물들을 마치 채소처럼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에요. 그 이전에는 오로지 채소만 먹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배를 타는 이유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채식만 했다고 한다면, 먹지도 못할 고기를 잡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또 이러실 수도 있겠지요. 아니, 배를 타는 이유가 꼭 고기잡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동수단으로도 당시에 배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일단 당시의 지형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는 점이지요.


노아 당시에 일어났던 홍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건이었습니다. 누구는 40일 동안이었다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7장 12절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이를 보면 단순히 하늘에서 비가 내린 것이 40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책 좀 읽었다는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40일 동안 비가 내린다고 세상이 물에 잠기지 않는다고 해요.

아니, 그러니까 성경을 좀 제대로 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위인 창세기 7장 11절을 봅니다.

창세기 7장 11절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 것만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샘들도 터져서 거기서 지하수도 쏟아져 나온 것이지요.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땅에 있는 샘들이 터진 기간이 사십일이었고 그리고 이 세상 전체가 물에 잠긴 기간은 모두 다 합치면 1년 가까이가 됩니다. 그리고 땅이 다 마르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밖으로 나온 것은 그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1년 이상이 지난 후였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동안에 아마도 지형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 이전의 지형은 우리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이동수단으로서 배가 필요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 없겠습니다만,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뭐냐 하면 <배>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방주 이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배>라고 하는 단어가 그럼 언제 처음 등장하냐 하면 방주 이후로 창세기 49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방주 이전에는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노아는 <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랐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배가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그 말씀대로 지었던 것이지요.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뭐냐 하면, 당시 노아는 이 방주를 어디에 지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배를 지으라고 하면 어디에 지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축구장보다도 길고, 7차선 도로나 되는 폭에다가 3층짜리 빌딩 높이의 큰 배를 짓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연히 바닷가 근처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뜨는지 안 뜨는지도 알아보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을 때 곧바로 배를 타고 출항할 수도 있을 거잖아요.

하지만 이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뜬금 없는 곳에 배를 지은 것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에 적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창세기 7장 17절~18절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이 기록에 보시면 방주가 떠오른 것은 물이 많아진 다음이고, 그 방주가 물위를 떠다닌 것은 물이 더 많아진 다음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소를 만든다고 해보세요. 모두 다 바다가 있는 곳에 있잖아요. 그래야 배가 완성되면 곧바로 출항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설마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여기 군마현처럼 바다가 없는 곳에 만들겠어요?

하지만 노아는 아마도 이 바다가 없는 군마현 같은 곳에서 살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바다가 없는 곳에 배를 지을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누가 바다도 없는 군마현에 배를 세운다고 해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놀림을 받을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아마도 노아한테 묻지 않았겠어요?
이보시오. 아니, 왜 그런 걸 짓는단 말이오?

그러자 노아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홍수가 일어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을 거래.”

아마도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이고, 다 넋을 잃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이가 없어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노아를 정신 이상자로 여겼을지도 모를 노릇이에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시에는 <배>는 고사하고 <홍수>라는 개념조차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홍수가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장마다 태풍이다 해서 하늘로부터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장 5절~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지금 우리는 비가 내리는 것이 전혀 이상지도 않은 자연현상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로 이 땅에는 비, 그러니까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로 그런 상황인데, 그냥 비가 내린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주위에 바다도 없는데 홍수가 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죽는다는 것은, 이는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발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살펴본다면, 어떻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지금으로 본다면 단순히 배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이는 마치, 저 같은 문외한한테 달이나 화성으로 가는 우주로켓을 만들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몇몇 사람들을 보시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실제로 왕이 될 때까지 10년 이상을 기다린 다윗.
17세 때 형제들로부터 버림 받고 노예로 팔려가서 13년을 기다린 요셉,
아들을 주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5년 동안 기다렸던 아브라함.
모든 영광을 버리고 광야에서 살고 있었으나 80세 때 부름에 순종했던 모세.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최소한 70년 이상 순종해서 마침내 구원 받은 노아.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첫째,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의 삶은 결코 평탄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평 불만이 없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기름을 부었으면 빨리 왕으로 세워줄 것이지, 왜 저런 못난 사울한테 쫓기는 시세가 돼?

형제들 중에서 높여주겠다고 해서 좋아했는데, 노예로 팔려가서는 누명까지 씌어서 감옥살이까지 하게 돼?

자식을 주시겠다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이제 다 늙은 마당에 언제까지 안 주시는데?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내 나이 80인데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해 내?

수 십 년 동안 듣도 보지도 못한 배를 만들게 해서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게 해?

솔직히 불평 불만을 하려고 했다면, 할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 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이 분들, 무엇을 믿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끝까지 믿고 절대로 놓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묵묵히 주님께서 주신 일을 감당했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말씀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틀림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었더니 안 되더라>라고 되어 있으면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통 <믿었더니 되더라> 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귀로도 들리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성경에 보니 온통 <믿었더니 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위로를 받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요, 그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인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다윗과 함께 하시고,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리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노아와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었더니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님이 지금 바로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믿으면 됩니다.
우리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됩니다. 믿었더니, 되더라.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은 미쁘십니다. 참되십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루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믿으면 된다> <믿었더니 되더라>의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 닥쳐 오더라도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인내와 위로로 소망을 품고서, 마침내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받은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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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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