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회 믿음 말씀 행함의 법칙
2023년 6월 4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23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22節∼23節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23.しかし、疑いを抱く人が食べるなら、罪ありとされます。なぜなら、それは信仰から出ていないからです。信仰から出ていないことは、みな罪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7번째 시간으로서 “믿음 말씀 행함의 법칙” 信仰・聖書・実践の法則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로마서 14장 22절과 23절을 살펴보겠습니다만, 이 중에서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3절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23.しかし、疑いを抱く人が食べるなら、罪ありとされます。なぜなら、それは信仰から出ていないからです。信仰から出ていないことは、みな罪です。

여기서 의심하고 먹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믿음이 없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선생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그 사실에 대해서 믿지를 않았어요. 그러나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그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에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답을 썼습니다. 그러면 점수를 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예, 받을 수 있지요. 그 학생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선생님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 가르침을 달달달달 외운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난 시간에 <믿음>의 반대인 <불신>,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과 같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의심>의 상태로 가르침을 받는다면 이는 죄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여기에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이라고 하는 법칙을 우리가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20절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その日、すなわち週の初めの日の夕方、弟子たちがいたところでは、ユダヤ人を恐れて戸に鍵がかけられていた。すると、イエスが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こう言われた。「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
こう言って、イエスは手と脇腹を彼らに示された。弟子たちは主を見て喜んだ。


누가복음 24장 36절~43절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누가복음 24장 36절~43절
これらのことを話していると、イエスご自身が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彼らはおびえて震え上がり、幽霊を見ているのだと思った。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なぜ取り乱しているのですか。どうして心に疑いを抱くのですか。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こう言って、イエスは彼らに手と足を見せられた。
彼らが喜びのあまりまだ信じられず、不思議がっていたので、イエスは、「ここに何か食べ物がありますか」と言われた。
そこで、焼いた魚を一切れ差し出すと、
イエスはそれを取って、彼らの前で召し上が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해라 뭐 해라 하는 말씀이 없었어요. 오직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믿도록 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믿기를 원하셨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죠? 예, 구약입니다.

그럼 또 복습 하나 해볼까요?


구약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글자로만 본다면 무슨 뜻이에요. 그렇죠 오래된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약속이에요?

여기서 예수님 말씀을 인용한다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세주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부터 나오지요.

창세기 3장 15절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최초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어기고 말았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통한 인류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99%도 아니에요. 100%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장담할 수 있냐 하면, 아담과 하와는 100% 그 때의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사야서에 보시면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상세한 예언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7절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しかし、彼は私たちの背きのために刺され、私たちの咎のために砕かれたのだ。彼への懲らしめが私たちに平安をもたらし、その打ち傷のゆえに、私たちは癒やされた。
私たちはみな、羊のようにさまよい、それぞれ自分勝手な道に向かって行った。しかし、主は私たちすべての者の咎を彼に負わせた。
彼は痛めつけられ、苦しんだ。だが、口を開かない。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羊のように、毛を刈る者の前で黙っている雌羊のように、彼は口を開かない。

이와 같은 구절은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기록한 복음서보다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훨씬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이샤야서가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900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는 이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이사야만이 아니라 그 외의 내로라 하는 선지자라 하더라도, 이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을까 하면 여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이사야를 만나서는, 당신이 지금 예언을 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으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해요. 주님이 예언을 하라고 하니까 했을 뿐인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해요.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그와 같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벌을 받으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훨씬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만이 아니라 다른 예언서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비하면 대단히 추상적이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3장 16절~17절
“16.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しかし、あなたがたの目は見ているから幸いです。また、あなたがたの耳は聞いているから幸いです。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多くの預言者や義人たちが、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見られず、あなたがたが聞いていることを聞きたいと切に願ったのに、聞けませんでした。

과거에 아무리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솔로몬, 엘리야, 다니엘, 이사야라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도 없었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는데, 너희는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복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이는 비단 제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핵심인 부활도 성경을 통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복이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때 처음에는 이런 어려운 말씀을 안 하셨어요. 그냥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뭐 하셨어요? 예, 고기 구워서 함께 잡수셨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새로 교회에 온 형제 자매한테 첫날부터 무슨 어려운 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저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식사하고 그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되겠지요. 주님은 다음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5절~48절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それからイエスは、聖書を悟らせるために彼らの心を開いて、
こう言われた。「次のように書いてあります。『キリストは苦しみを受け、三日目に死人の中からよみがえり、
その名によって、罪の赦しを得させる悔い改めが、あらゆる国の人々に宣べ伝えられる。』エルサレムから開始して、
あなたがたは、これらのことの証人となります。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즉, 믿음이 심어진 그들에게 있어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어쩌다가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인 예언이 있어왔고, 그 결과로 오게 되셨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요? 예,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행함을 명령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과 행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전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말씀을 보거나 하물며 행함을 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 없이 말씀을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꼬투리를 잡습니다.


여기는 이래서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고, 저기는 저래서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디 어떤 부분이 맞지 않는다면서 수고스럽게도 꼼꼼하게 정리해놓은 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어서, 메말라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앞에 주님의 말씀으로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셨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서 그것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허기져서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 음식들을 핀셋으로 하나하나 집어서 분석을 하고 연구를 하고 그러면서, 오랜 시간 뒤에, 결국은 자기 생각에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인체에 해로울 것 같아서 안 먹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있는데 주님이 밥상을 차려주셨다면, “아이구 감사합니다!”하고 그 복음의 음식을 먹으면 영육간에 강건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내 영혼이 구원을 얻어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결국 메말라 죽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본다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사본이지요. 그러다 보니 문서가 오래된 경우에는 극히 일부분에 있어서 훼손이 되어서 해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무오, 그러니까 성경에는 오류가 없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 아니겠습니까.

교과서를 비롯한 세상에 있는 책들은 사람의 생각을 사람이 쓴 책들이에요.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말하자면 그 책을 쓴 사람의 주장을 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구약과 신약 모든 성경을 본다면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 안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얄팍한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성경이 잘못되거나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아무리 사람이 지혜롭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책 좀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두고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이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정도로 지적을 하려면, 그래도 성경을 자세히 읽었을 터인데,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을 비판하고,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비판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믿음도 없고 말씀도 몰라요. 그러면 그런 상태에서 행함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9장 11절~14절
“11.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사도행전 19장 11절~14절
神はパウロの手によって、驚くべき力あるわざを行われた。
彼が身に着けていた手ぬぐいや前掛けを、持って行って病人たちに当てると、病気が去り、悪霊も出て行くほどであった。
ところが、ユダヤ人の巡回祈祷師のうちの何人かが、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たちに向かって、試しに主イエスの名を唱え、「パウロの宣べ伝えているイエスによって、おまえたちに命じる」と言ってみた。
こ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たのは、ユダヤ人の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であった。



여기에 보시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보고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자기들도 해보자 하고 흉내를 냈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마술하는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지금처럼 매직 쇼를 하고 그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쉽게 말하자면 무당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그래도 귀신을 다룰 줄 안다고 생각했나 보죠? 그래서 어디 나도 한 번 바울처럼 놀라운 일을 해서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아보자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누가 했냐 하면 14절에 나오죠?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祭司長スケワという人の七人の息子たち

지금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방지역인데 여기에 왜 유대의 제사장 아들들이 와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무당 짓이나 하고 돌아다녔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분명한 점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그와 같은 무당짓을 하는 행위는 율법에서 금하고 있었거든요.

레위기 19장 26절 후반부
"26. ……점을 치지 말며 술법을 행하지 말며"

……まじないをしてはならない。占いをしてはならない。

신명기 18장 10절~11절
"10.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あなたのうちに、自分の息子、娘に火の中を通らせる者、占いをする者、卜者、まじない師、呪術者、
呪文を唱える者、霊媒をする者、口寄せ、死者に伺いを立てる者があってはならな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제사장 아들이라 하더라도 성경 말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도 없고 말씀도 모르는 채로 그들은 그저 <시험삼아> 그러니까 호기심만 가지고 행함을 했더니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사도행전 19장 15절~16절을 볼까요?

사도행전 19장 15절~16절
“15.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すると、悪霊が彼らに答え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し、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しかし、おまえたちは何者だ。」
そして、悪霊につかれている人が彼らに飛びかかり、皆を押さえつけ、打ち負かしたので、彼らは裸にされ、傷を負ってその家から逃げ出した。

그들이 마귀한테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 명하니까 마귀가 그럽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하느냐 하고 오히려 달려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이기지 못해 입은 옷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치는 망신을 당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23절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その日には多くの者がわたしに言うでしょう。『主よ、主よ。私たちはあなたの名によって預言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あなたの名によって多くの奇跡を行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
しかし、わたしはそのとき、彼らにはっきりと言います。『わたしはおまえたちを全く知らない。不法を行う者たち、わたしから離れて行け。』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내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했었다 하더라도, 네게 진정한 믿음이 없고, 말씀도 모른 채로 행함만 했었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요, 너는 불법을 행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 없이, 말씀 없이 한 행함은 곧 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말씀 없이 그냥 흉내만 낸 것이라면, 이는 올바른 행함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할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멋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비유로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바로 믿음은 밭이요, 말씀은 씨앗이요, 그리고 행함은 물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말씀이라고 하는 좋은 씨앗이 있고, 행함으로 열심히 물을 준다 하더라도, 밭이 제대로 갈려져 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렸다 하더라도 제대로 심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확실한 믿음, 잘 갈려진 밭과도 같은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의 씨가 제대로 심겨지고 물을 주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여러 가지 어려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성경 구절 하나만 기억하도록 합시다. 이미 배운 구절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 한 번 함께 따라 해 볼까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셨고,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