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회 두 가지 믿음
2023년 5월 2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6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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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23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22節∼23節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23.しかし、疑いを抱く人が食べるなら、罪ありとされます。なぜなら、それは信仰から出ていないからです。信仰から出ていないことは、みな罪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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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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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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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6번째 시간으로서 “두 가지 믿음” 二つの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14장을 마무리하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한 번에 마무리를 하려 했습니다만, 역시 여기도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좀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두 번으로 나누어서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은 우선 두 구절 중에서 22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23절과 함께 전반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한 가지 확인을 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22절과 23절에서는 각각 중요한 단어가 하나씩 등장합니다. 그 단어가 뭐냐 하면 22절에서는 <믿음(信仰)>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23절에서는 <의심(疑い)>이라는 말이 기록됩니다.

이 두 단어를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불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구절을 보면 믿음의 반대말로서 <의심>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생각이 좀 잘못되었나 하고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단어 중에 <의심>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참 성경은 놀랍습니다. 2천년 전에 적힌 책인데도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니 참 놀랍다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의심>이라고 하는 말은, 그러니까 완전히 안 믿는 건 아니지만, 정말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가는 상황이라 한다 하더라도 이는 이미 <불신> 즉 안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염두고 두시고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2절부터 볼까요.

로마서 14장 22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여기에는 한 가지 부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앞에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뒤에 나오는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옳다 하는 바>가 되겠습니다.

앞에는 <믿음> 뒤에는 <자기가 옳다 하는 바> 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바꾸어 본다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 <자기가 옳다 하는 바>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真の信仰
自分が正しいと思っている信仰

그럼 이렇게 바꾸어서 22절을 다시 보면 어떻게 될까요.

네게 있는 진정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으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真の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
自分が正しいと思っている信仰の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앞에 나오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 성경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뒤에 나오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믿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여기에는 우상이나 미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상을 세워 놓거나 아니면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을 놓고 절을 한다고 하는 것은 이는 어디까지나 우상이나 미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구는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를 보고, 기독교는 자기 조상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백 보 양보를 해서 조상님의 영이 제사를 지내고 차례를 지내는 그 자리에 있다면 모를까, 성경적으로 보자면 그 영은 그 자리에 있지 않거든요.

믿음이 없는 분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분들도,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시죠? 좋은 곳으로 가서 편안히 쉬시라는 말씀. 여러분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하지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마태복음 3장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また手に箕を持って、ご自分の脱穀場を隅々まで掃ききよめられます。麦を集めて倉に納め、殻を消えない火で焼き尽くされます。」

성경에 보시면 이 세상을 떠난 영이 한가롭게 우리 주변을 맴돌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어요.

육신을 벗어버린 영은 곧바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자리에서 알곡은 곳간 즉 구원에 이르고 되는 것이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 조상님의 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고 제물을 바치고 절을 하게 되면 이는 다른 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영은 무슨 영입니까. 설마 천사가 자기를 섬기라고 하겠습니까.

사사기 13장 16절
“16.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主の使いはマノアに言った。「たとえ、あなたがわたしを引き止めても、わたしはあなたの食物は食べない。もし全焼のささげ物を献げたいなら、それは主に献げなさい。」マノアはその方が主の使いである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ある。

구약에 보시면 천사 즉 여호와의 사자가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 앞에 나타났을 때, 마노아는 천사한테 제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요. 천사는 번제를 자기가 아닌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보면 이와 같은 장면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私は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すると、御使いは私に言った。「いけません。私はあなたや、イエスの証しを堅く保っている、あなたの兄弟たちと同じしもべです。神を礼拝しなさい。イエスの証しは預言の霊なのです。」

요한계시록 22장 8절~9절
“8.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これらのことを聞き、また見たのは、私ヨハネである。私は、聞いたり見たりした後に、これらのことを示してくれた御使い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礼拝しようとした。

이처럼 우리 같은 사람이 천사를 경배하려 해도 천사들은 이를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나를 경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천사숭배문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에 보시면 천사에 대한 숭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조상님 사진을 놓고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를 주님이 와서 받으시겠습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시면 주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적은 수라 하더라도 누구 이름으로 모인 곳이요? 그렇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 이름이 아닌, 돌아가신 조상님 이름으로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제사를 주님이 슬쩍 와서 받으세요?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마태복음 7장 8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성령을 구하면 받을 것이요, 주님을 찾으면 찾아낼 것이요, 주님의 말씀을 두드리면 열리게 되어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으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지만, 주님을 찾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상님의 사진을 모셔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천사도 그 제사를 받지 않아요. 주님을 찾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당연히 주님도 안 계세요. 그러면 어떤 영이 있겠습니까. 소거법으로 하면 간단하지요.

조상님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고, 주님의 영도 아니라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악한 영 밖에 더 있겠습니까.

악한 영은 주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로채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제사나 차례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오랫동안 여러 관습을 따라 살아오게 되면 이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한국에 보더라도 새해마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음양오행 사주팔자 따져가며 토정비결을 봐야 하죠. 삼재가 끼면 굿판을 벌이든 부적을 사든 해서 액운을 막아야지요. 뭐, 해야 될 게 얼마나 많습니까.

오랫동안 그런 문화에 젖어 살아왔는데, 이런 걸 안 하면 찝찝하지 않겠어요?

일본에 보더라도 웬만한 집에는 불단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 먼저 떠난 가족이나 친족들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찡 하고 종을 울리고는 합장을 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를 하고 그러는데, 이는 종교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혀 있어요.

그런데 이제 주님을 믿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일들이 모두 다 허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몸에 배었던 그런 습관들(しきたり)을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갈등도 하고 고민도 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문제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도 있었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그럼 그 때는 무엇에 대한 문제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어요.

그렇습니다. 율법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율법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자, 오랜만에 한번 여쭈어볼까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그렇다면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을 자격이 주어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어떻게 해야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말씀대로 해서 제대로 율법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은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면 구원을 못 받는 것이고, 이처럼 모두 자기 책임으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문제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3장 20절을 다시 볼까요?

로마서 3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なぜなら、人はだれも、律法を行うことによっては神の前に義と認められないからです。律法を通して生じるのは罪の意識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서 구원 받을 수 있대요? 예, 단 한 사람도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불로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해서 그 죄값을 치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율법을 어긴 죄로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각 사람이 죄값을 치른 것으로 쳐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좋은 소식, 복음 아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있겠습니다만, 율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갈등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로마서 14장 15절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もし、食べ物のことで、あなたの兄弟が心を痛めているなら、あなたはもはや愛によって歩んではいません。キリストが代わりに死んでくださった、そのような人を、あなたの食べ物のことで滅ぼさないでください。

자,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무엇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음식이요? 아니요.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네 음식>이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이는 자기들 멋대로 만들어낸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자기들의 생각, 자기들의 해석, 자기들의 주장이 바로 <네 음식>이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는 단순히 우리 형제를 죽이게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20절 전반부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의하지 않은 가르침은 그 형제 하나만을 망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 전체를 망치게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주님은 우리가 율법과 복음, 구습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キリストは、自由を得させるために私たちを解放してくださいました。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堅く立って、再び奴隷のくびきを負わさ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주님께서는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 인해서 자유함과 평안을 얻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2절
“22.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2.あなたが持っている信仰は、神の御前で自分の信仰として持っていなさい。自分が良いと認めていることで自分自身をさばかない人は幸いです。

아직도 세상적인 구습을 따르며 구습의 종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성경에 의하지 않는 가르침에 얽매여있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그 세상적인 종의 멍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얻을 수 있게 된 복음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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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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