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회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하여 (2)
2023년 5월 21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3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9절~21절
“19.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9節∼21節
“19.ですから、私たちは、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20.食べ物のために神のみわざを台無しにしてはいけません。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21.肉を食べず、ぶどう酒を飲まず、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をしないのは良いこと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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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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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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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5번째 시간으로서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하여②” 平和と主のみ計画を立てるために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주의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본문 내용은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 즉, 다툼을 없애고 힘을 합쳐서 하나님의 사업을 함께 이루어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음식, 그러니까 율법이나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은혜를 모두 받으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이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완전히 망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음식, 즉 율법이나 말씀에 입각하지 않은 가르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게 되면 여기에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건축물을 세울 때에 쓰이는 콘크리트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되겠지요. 튼튼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없는 콘크리트를 써야 하는데 재료비를 아끼거나 아니면 비리 같은 것 때문에 여기에 불순물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콘크리트를 써서 건물을 짓는다면, 완성되었을 때는 차이를 모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콘크리트 안에 든 철근이 녹슬기 시작해요. 그러면 이제 겉잡을 수가 없어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대참사를 막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말씀에 대한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덕지덕지 발라놨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온전한 말씀을 올바로 깨달을 때에, 진정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을 이룰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21절부터 보실까요.


로마서 14장 21절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1.肉を食べず、ぶどう酒を飲まず、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をしないのは良いことです。”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판에서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4장 21절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지게 하거나 꺼림칙하게 하는 것이라면 고기도 먹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고 그 밖의 일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는다면 고기도 먹지 말고 술도 끊어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난 번에 다니엘서를 통해 알아본 내용을 기억 하시나요?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지혜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왕을 보필하게 했는데, 그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있었잖아요.

다니엘서 1장에 의하면 왕은 그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도록 한다면서 고기와 포도주를 제공했는데 그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고기와 포도주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당시 그와 같은 음식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음식으로 불결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기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을 달라고 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우리는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진 바 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罪があなたがたを支配することはないからです。あなたがたは律法の下にではなく、恵みの下にあるのです。

오늘 본문 20절에도 보시면 만물이 다 깨끗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무엇을 먹어도 은혜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이 적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는 율법과 복음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도 과거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안 지켜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세례를 받으면서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리고 율법의 규정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여전히 안 먹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선언하기를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라도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 다시 말해서 그래도 율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형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1절
“21.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1.肉を食べず、ぶどう酒を飲まず、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をしないのは良いことです。”

여기서 보시면 우선 바울은 이를 명령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정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형제>는 바로 믿음이 약한 형제, 그러니까 아직 율법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는 해요. 그러나 오래된 가르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다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억지로 이를 어기도록 강요하지 말라고 바울은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네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않는 일>(あなたの兄弟がつまずくようなこと)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거부반응이 있는 형제가 있어요. 그러면 억지로 먹으라고 한다거나,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한다면 예를 들어서 술이나 담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물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이웃에게 민폐를 끼친다거나 한다면 이는 당연히 문제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고 단순히 즐기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술이나 담배에 있어서 무슨 큰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만, 기본적으로 술이나 담배라고 하는 것 자체에 있어서는 그저 기호품입니다. 이를 즐긴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를 들어서 목사가 맨날 술이나 담배를 달고 산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저도 예전에는 담배를 참 많이 피웠습니다. 저는 특히 좀 독한 담배를 좋아했었거든요. 그런데 담배를 끊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담배를 피우시는 분들은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납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잘 몰라요. 그냥 양치질만 하면 냄새가 사라지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옆 사람이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로는 아, 이 사람 담배 한 대 피우고 왔구나……하고 알아차리거든요.

그렇다고 뭐 교인분들이야 큰 문제는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일단 예배 시작하기 전에 한 대 태우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1시간 이상이나 어떻게 참을 수 있겠어요.

그러면 뭐 양식 있는 여러분께서 내색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아, 목사님, 한 대 태우고 오셨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에 마에바시나 다카사키 쪽으로 전도지를 돌리러 가니까, 전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인데도 여기저기서 목사님 결혼하셨다면서요? 축하 드려요. 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담배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소문이 안 퍼지고 베기겠습니까. 그것도 좋은 의미로 퍼지겠어요?


지금 일본 선교를 위해서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그보다도 먼저 <저 이카호중앙교회 홍 목사는 담배 피우는 목사>라는 그런 소문이 먼저 퍼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담배라는 것이 아무리 믿음의 본질과 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소문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면서, 아, 담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이러고 다녀요? 만약에 그런다고 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담배라는 것이 믿음과 문제는 없다 하더라도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된다면 이를 버리는 것이 차라리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20절 말씀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20절 후반부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すべての食べ物はきよいのです。しかし、それを食べて人につまずきを与えるような者にとっては、悪いものなのです。


이를 현대인의 성경판으로 보시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4장 20절 후반부

“……음식은 다 좋은 것이지만 어떤 음식을 먹어서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다른 식으로 한다면 <실족하게 한다>, 또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1차적으로는 당시 믿음이 아직 연약한 사람, 즉 율법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서 억지로 율법을 어길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술이나 담배가 구원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좀 믿어보려는 사람 앞에서 술이나 담배 또는 무분별한 습관을 강요한다는 것은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런 말씀을 보면 정말로 성경 말씀은 세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아직 여린 이웃을 위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큰 은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은혜로운 말씀을 우리는 알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넘어져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기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기독교에서 가톨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듣고 참으로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이 올바로 세워져 있으면 절대로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현재 기독교에 있어서 얼마나 이 성경 말씀이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미사포에 대한 말씀을 드렸지요? 예전에 어떤 분은 그 분은 가톨릭에 다니는 여자 분이셨는데, 가톨릭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그 미사포가 예뻐서였다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잠시 인용했던 성경구절들을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5절~6절
“5.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しかし、女はだれでも祈りや預言をするとき、頭にかぶり物を着けていなかったら、自分の頭を辱め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頭を剃っているのと全く同じことなのです。
女は、かぶり物を着けないのなら、髪も切ってしまいなさい。髪を切り、頭を剃ることが女として恥ずかしいことなら、かぶり物を着けなさい。


고린도전서 14장 34절~35절
“3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女の人は教会では黙っていなさい。彼女たちは語ることを許されていません。律法も言っているように、従いなさい。
もし何かを知りたければ、家で自分の夫に尋ねなさい。教会で語ることは、女の人にとって恥ずかしいことなのです。


당시에는 남녀 간에 있어서 차별이 심했다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오죽하면 여자는 인구 수에 포함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되니까 이른바 남존여비 같은 일들은 대단히 심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머리를 가린다는 것은 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에 있는 말씀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했던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신앙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여자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있어서 제대로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간섭하게 되면 문제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지요.

요즘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녀를 불문하고 성경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회 내의 이런 일 저런 일에 대해서 자기 멋대로 지적하고 간섭하고 참견하고 비판하게 된다면 엉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여자분이라 하더라도 남자와 똑같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보더라도 웬만한 남자 목사님보다도 뛰어난 여자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다녔던 순복음교회도 보면, 조용기 목사님은 물론이지만, 최자실 목사님이 안 계셨다면 그 정도로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조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이는 성경의 본질과는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도, 이는 남자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것, 말하자면 남존여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시대에는 통용될 수 있었지만, 이를 무턱대고 지금 사회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성에게 있어서는 굴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미사포임에도 불구하고, 레이스로 장식하고 예쁘게 보인다는 이유로 이를 쓰고 싶어 한다?

이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쁘고 반질반질한 종이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자신의 노비문서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 본질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있어서 얼마나 이해가 부족하면, 아니,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지요. 그 동안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노력이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냐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을 때, 무슨 질병이 있을 때, 40일 금식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치료 받을 수 있고 해결 받을 수 있다고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원에 가서 나무를 붙잡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하고 계속하면 렐렐렐렐 하면서 방언이 터지는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들고 불로 불로 불로 불로……하면 성령님이 임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말씀에 아멘 하신 분들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시간 관계상 금식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자면, 40일 금식은 성경에 구약에서는 모세가 했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만, 이는 질병 치료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モーセはそこに四十日四十夜、主とともにいた。彼はパンも食べず、水も飲まなかった。そして、石の板に契約のことば、十のことばを書き記した。

마태복음 4장 1절~2절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
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구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40일 동안 금식을 자연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을 주리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어떤 분은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누구는 40일 금식하고 병이 낫다는 간증을 들었다, 누가 쓴 책에 보면 40일 금식하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런 말씀 많이 듣지 않습니까.

여러분, 금식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사야 58장 6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わたしの好む断食とはこれではないか。悪の束縛を解き、くびきの縄目をほどき、虐げられた者たちを自由の身とし、すべてのくびきを砕くことではないか。

하지만 무턱대고 굶기만 하는 금식을 주님께서 어찌 기뻐하시겠습니까.

앞서 말씀 드렸던 그와 같은 막무가내 식 믿음, 이제는 그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원에 가서 펴보지도 않는 성경책 붙들고 흔들어가며 기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조용한 도서관이나 독서실에 가서 성경책을 펼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는 누구를 알아야 합니까.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호세아 6장 3절 전반부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

우리가 알아야 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시요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아는 방법은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경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말씀으로 굳게 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에 따라 진정한 화평과 덕을 굳건히 세워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平和に役立つことと、お互いの霊的成長に役立つことを追い求め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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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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