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회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2023년 7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3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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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5節
“5.どうか、忍耐と励ましの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ふさわしく、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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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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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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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3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하여” イエス様と同じ思いを抱くため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
“5.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5.どうか、忍耐と励ましの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ふさわしく、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

앞서 4절에 나와 있었던 바와 같이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 항상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서로 뜻이 같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본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느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연세 지극하신 어르신 두 분이 식사를 하시면서 말씀을 나눕니다.

말소리가 들려오길래 본의 아니게 들어보았더니 대충 이런 내용이더라고요.

둘 중 한 분이 어디 계시는데, 어떤 교회에 다니시는 분이 아마도 이 분에게 전도를 했나보죠?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그랬나봐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르신이 그 사람한테 뭐라고 했냐 하면, “이보시오. 당신 자식이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면 좋겠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 믿으라고 한 사람이 아무 말도 못 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귀찮게 구는 예수쟁이를 물리친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을 말하듯이 자랑스럽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까 이 어르신이 그래도 성경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자, 그럼 만약에 여러분께서라면 이 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직 믿음이 없는 분한테 가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시라고 했더니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 자식이나 아니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면 좋겠냐고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십자가든 뭐든 하나님이 못박히라고 하면 못박혀야죠~라고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안 믿는 사람이 믿겠다고 하겠어요? 저 같아도 벌써, 그런 건 당신이나 믿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셨나요?

두 번째 질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대부분이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음을 맞이한 사도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달린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갖나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い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누가복음 14장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い者は、わたしの弟子になる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는 말씀하셨으나, 한 번도 우리더러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つく者は、自分の肉を、情欲や欲望とともに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

하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했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참수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 십자가에 달리기를 원했지만 본의 아니게 참수를 당한 것인가요?

저는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이미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다 알고 계셨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차마 그 엄청난 고난을 우리에게 겪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고통을 몰랐기 때문에 겁도 없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냥 혼자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건 어디까지나 그냥 농담이고, 이제 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질문에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와 순교자들이 달린 십자가는 그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작은 공통점과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작은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에는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네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6절
“36.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이 기도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십자가의 괴로움에 대해서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경험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거 몰랐으니까 했지 알고는 못 했을 것이라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저도 예전에 코가 안 좋아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거 정말 몰랐으니까 했지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아마도 하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 간단한 수술도 힘든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힘든 언덕길을 올라가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야 했었던 것이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것이고, 그리고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의미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도 작은 점이 아니라 대단히 큰 점을 놓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 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예전에 나왔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비롯해서 우리는 영화나 그림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이나 그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분께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서는 이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오죽하면 앞서 말씀 드린 겟네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신 예수님께 있어서 무엇이 가장 힘드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채찍에 맞아서, 온몸에서 피를 흘리셔서 정신도 혼미하셨을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골고다까지 올라가셨으니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손과 발에 못 박혀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길을 오를 때에 도중에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지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대신해서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습니까.


예,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예수님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우셔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시면서 이제 더 이상 가실 수 없으셨는데, 로마 군인이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한테 억지로 대신 매고 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정작 성경에는 어떻게 나와 있느냐 하는 것이에요.

구레네 시몬에 대한 부분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성경 기자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인상 깊은 내용이었는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보시면 흥미롭습니다.

먼저 마태복음부터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1절~33절
“31.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1.こうして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マント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32.兵士たちが出て行くと、シモンという名のクレネ人に出会った。彼らはこの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
33.ゴルゴタと呼ばれている場所、すなわち「どくろの場所」に来ると、


마가복음 15장 20절~22절
“20.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彼らはイエスをからかってから、紫の衣を脱がせて、元の衣を着せた。それから、イエスを十字架につけるために連れ出した。
兵士たちは、通りかかったクレネ人シモンという人に、イエスの十字架を無理やり背負わせた。彼はアレクサンドロとルフォスの父で、田舎から来ていた。
彼らはイエスを、ゴルゴタという所(訳すと、どくろの場所)に連れて行った。


누가복음 23장 25절~27절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すなわち、暴動と人殺しのかどで牢に入れられていた男を願いどおりに釈放し、他方イエスを彼らに引き渡して好きなようにさせた。
彼らはイエスを引いて行く途中、田舎から出て来たシモンというクレネ人を捕まえ、この人に十字架を負わせてイエスの後(あと)から運ばせた。
民衆や、イエスのことを嘆き悲しむ女たちが大きな一群をなして、イエスの後(あと)について行った。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구절과 뒷구절을 함께 인용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피범벅이 되셔서 지쳐 쓰러지시매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더라……라고 하는 구절이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 누가복음 어디에도 없어요.

물론, 우리가 짐작하건대 너무나도 힘드셨겠지요. 많이 아프셨겠지요. 채찍에 맞으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그리고 손과 발에 못 박혀서 죽으셨는데 얼마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으셨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 보시면 그와 같은 육체적인 고통이,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모두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어서 어떤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수치, 모욕, 부끄러움입니다.

예전에 제가 휠체어를 타시는 분한테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 여자 분은 젊어서부터 사고 때문에 다리가 불편하셔서 휠체어를 타고 계신 분이신데, 저도 그 때까지는 몰랐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휠체어를 타면 비탈길을 내려갈 때가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내리막길 같은 경우에는 잘못하면 앞으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에 혼자서 내려갈 때에는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만 이용해서 내려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때도 그 자리에서 휠체어 앞 바퀴를 들어 보여 주시는데 아, 그거 무슨 서커스 같아서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내리막길에서 앞 바퀴를 들고 내려가면 위험할 때도 있지 않냐고 하니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넘어진 적도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넘어지냐 하면 앞바퀴를 너무 많이 들어서 결국 뒤로 자빠진다는 것이지요.

제가 그 말을 듣고는, 아휴, 그럼 엄청 아프시겠어요. 라고 하니까, 그 분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혀 안 아프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휠체어가 뒤로 넘어가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 있냐고 물었더니만, 이 분 하는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 분, 참 밝은 분이신데, 이 분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너무나도 창피해서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부끄러움이 육체적인 아픔보다도 더욱 심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절~42절
“3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た。
「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もしおまえが神の子なら自分を救ってみろ。そして十字架から降りて来い。」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長老たちと一緒に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
「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彼はイスラエルの王だ。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うすれば信じよう。


누가복음 22장 63절~65절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さて、イエスを監視していた者たちは、イエスをからかい、むちでたたいた。
そして目隠しをして、「当ててみろ、おまえを打ったのはだれだ」と聞いた。
また、ほかにも多くの冒瀆のことばをイエスに浴びせた。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도 짐작할 수 있는 육체적 통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치나 모욕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 점이 바로 예수님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에 있어서 넘을 수 없는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면, 마음만 먹으면 예수님과 똑 같은 육체적인 통증이나 고통은 느낄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수치와 모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제까지는 큰 나라의 왕이나 황제였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어요. 좋은 것만 입고 먹고 자랐습니다. 어마어마한 궁전에서 살았고, 가는 곳마다 고급 카펫이 깔려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그처럼 온 나라의 영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서 거의 알몸이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속옷 하나 걸친 채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면 그 모욕감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만왕의 왕, 만군의 주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기서 <그>라고 하는 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은 분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 많고 못난 인간들로부터 받으셨던 그 모욕과 수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사극 같은 데에 보시면 조선시대 때, 왕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 과인이라고 했습니다. 과인이라고 하면 대단한 뜻처럼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과인의 <과>자는 <적을 과>입니다. 이른바 <과부>라고 할 때의 <과>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과인>이라고 하는 말은, 그 글자 자체를 본다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만한 사람한테 말하기를, 왕도 겸손한데 네가 어찌 그렇게 교만할 수 있겠느냐 하고 꾸짖기도 했다고 하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도 자기를 비우시고 복종하셨는데 우리가 내 자존심을 세우면서 주님 앞에 교만하게 군다면 어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의 겸손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30절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わたしは心が柔和でへりくだっているから、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くびきを負って、わたしから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たましいに安らぎを得ます。
わたしのくびき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す。」


이제 주님께서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고 하는 멍에를 메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길을 따를 때에, 주님께서 넘치는 칭찬과 축복으로 채워 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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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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