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회 기쁨을 주님께
2023년 6월 25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0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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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3절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3節
“3. キリストもご自分を喜ば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でした。むしろ、「あなたを嘲る者たちの嘲りが、わたしに降りかかっ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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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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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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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0번째 시간으로서 “기쁨을 주님께” 喜びを主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3절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3節

“3. キリストもご自分を喜ば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でした。むしろ、「あなたを嘲る者たちの嘲りが、わたしに降りかかっ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주님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만, 사실 이 기록을 보더라도 바울이 얼마나 주님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성경에 대해서 4차원이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4차원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이 계셨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만, 사실 좀 실망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학에서의 1차원에서 시작해서 4차원이라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책은 4차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좀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의 내용을 보면 4차원이라기보다는 네 가지 요소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갑자기 물리학 이야기를 말하냐 하면, 시간관계상 가급적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일단 성경은 대단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좀 몇 권 읽고서는 성경이 비과학적이라는 둥 전설이라는 둥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조금만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을 해본다면 훨씬 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차원>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잠시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1차원이라는 세계는 위치만 있고 면적은 없는 세계입니다.

다음으로 2차원이라는 세계는 면적은 있어요. 하지만 높이는 없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3차원이라는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서, 위치도 있고 면적도 있고 높이도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정리를 하자면 1차원은 위치가 있고, 2차원은 위치와 면적이 있고, 3차원은 위치와 면적과 높이가 있어요.

하지만 각각 넘지 못하는 장벽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1차원 세계에서는 면적이라고 하는 것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위치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위치일 뿐이지 면적은 될 수 없거든요.

2차원 세계는 면적은 있어요. 하지만 높이, 그러니까 입체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면적이 모여도, 이것이 쌓여서 높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세계는 어떻습니까. 위치도 있고, 면적도 있고, 거기에 높이까지 있어요.

그러면 이제 이 3차원 세계에서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우선 쉬운 부분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는 공간이라고 하는 제약이 있어요.

방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그 문을 열지 않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동을 한다 하더라도 이동수단이 발달해서 빨리 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짧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미국에 간다고 한다면, 옛날에는 배를 타고 몇 개월이나 걸려서 갔으나,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하루 만에 갈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까지의 거리 자체가 짧아진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길이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쉽게 말해서 우리가 SF 소설처럼 과거에 갔다 온다거나 미래에 갔다 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장벽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베드로후서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しかし、愛する人たち、あなたがたはこの一つのことを見落としてはいけません。主の御前では、一日は千年のようであり、千年は一日のようです。

우리가 잘 아는 이와 같은 말씀은 이 차원에 대한 내용을 알면 훨씬 더 깊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에게 있어서는 시간의 제약이라고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八日後、弟子たちは再び家の中におり、トマスも彼らと一緒にいた。戸には鍵がかけられていたが、イエスがやって来て、彼らの真ん中に立ち、「平安があなたがたにあるように」と言われた。

이 말씀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간에 대한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나신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된다면 빌립보서 2장 말씀이 새롭게 이해가 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여기서 특히 7절에 보시면 <종의 형체를 가지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종>을 <노예>라는 말로 해석한 번역본도 있는 반면, <섬기는 자>라고 해석한 번역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3차원과 4차원이라는 문제를 알게 되면, 여기서의 <종>이라고 하는 말씀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존재>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처럼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되는 분이시기에 이와 같은 제약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으로 막힌 이 땅에 오셨으나, 부활하신 다음에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요? 그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설명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왜 굳이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렸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일찍부터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それからイエスは、人の子は多くの苦しみを受け、長老たち、祭司長たち、律法学者たちに捨てられ、殺され、三日後によみが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弟子たちに教え始められた。

누가복음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 22절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そして、人の子は多くの苦しみを受け、長老たち、祭司長たち、律法学者たちに捨てられ、殺され、三日目によみが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語られた。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우리는 내일 일, 아니, 몇 시간 뒤, 몇 분 뒤, 몇 초 뒤도 알 수가 없습니다.

종의 모습 즉 시간적인 제약이 있는 이 3차원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 시점에는 당연히 아직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자들도 설마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십자가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그 두꺼운 책인데도 불구하고 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기뻐 웃으셨다는 기록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イエスは涙を流された。

이처럼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은 있으나, 즐겁게 웃으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는 당연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리고 예수님은 장난이 아닙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영원한 죽음으로 빠져버리게 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그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만약에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이 있으셨다면 무엇을 위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장차 어떠한 일이 닥치게 될 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이를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주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그 후에 겪게 될 일들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일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게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야구선수들이 시합을 할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때는 여유를 보일 때도 있지만, 시합 때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타자가 공을 치려는 순간 실실 웃는 선수들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말하자면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장난 삼아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다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장난 삼아 십자가를 짊어지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장난이 아니에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주셨습니까. 왜 죽으시고 왜 부활하시고 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나를 위해 오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시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나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시고는,
이제 마침내 나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끔찍한 사고가 있었지요. 바닷속 4000미터 속에 잠겨 있는 타이타닉 호를 보러 가는 잠수정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몇 시간 만에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통신이 두절된 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수색을 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시시각각 전해져 오는 그 뉴스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어른 다섯 명이 지금 이 순간 그 좁고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만약에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일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께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까.


저는 그럴 것 같습니다.

주님, 만약에 저를 이곳에서 구해주신다면, 저는 남은 인생을 덤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를 이 곳에서 구해주세요.

저는 그럴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해보세요. 알고 보니까 그게 다 꿈이었어요. 그러면 저는 얼마나 다행스러워 하겠습니까. 아, 정말 끔찍한 상황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다 꿈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그런 끔찍한 일도 겪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 있어요.

그러면 꼭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았더라도 지금 오늘 이 순간부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될까요. 이를 한 마디로 하자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더 구체적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삶은 무엇에 대해서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요? 자기 꿈 속에 나타난 예수님이나 천사가 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완전한 말씀이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삶에 있어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있어서 누군가가 기뻐하고 누군가가 슬퍼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때로는 주님이 기뻐하실 수도 있겠으나, 때로는 마귀 사탄이 기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선택에 있어서 마귀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주님이 가슴을 치며 슬퍼하신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저는 오늘 전해드리는 말씀 중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간단한 방법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를 기쁘게 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입니다.

마귀를 기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에베소서 4장 26절~27절까지를 함께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27절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怒っても、罪を犯してはなりません。憤ったままで日が暮れる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예,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화를 품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이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 되고 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 일본에 살면 일본어가 늘고 미국에 살면 영어가 자동적으로 늘어요?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늡니까. 그것은 바로 공부를 해야 느는 것이지요.


사전을 찾아가면서 단어를 외우고 글을 읽어야 실력이 느는 것이지,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공기를 마시면서, 드라마나 보고 노래만 외운다고 실력이 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찬송만 부르고, 설교만 듣고, 부흥회만 쫓아다닌다고 믿음이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알기 위한 지름길은 바로 성경입니다. 말씀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진정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을 알게 되어, 이를 바탕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함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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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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