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회 살아있는 말씀
2023년 7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42

홍성필 목사
www.kir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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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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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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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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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42번째 시간으로서 “살아있는 말씀” 生きているみこと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은 15장 5절 이후의 말씀을 전하고자 했습니다만, 그러기에는 15장 4절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을 너무 많은 것을 건너뛰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오늘도 같은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15장 4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여기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과거에 기록된 책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오직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 그러니까 성경은 무엇을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라고 하면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요.


좀 너무 흔한 표현 같아요. 솔직히 지금도 서점에 보면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하는, 이른바 교양서적이라고 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거나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하면 좀 나을 거예요.

아니, 그렇다고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멋진 표현, 정말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말이 있었을 텐데도 <우리의 교훈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좀 시시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교훈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식상한 표현을 썼을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지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니, 세상에는 값어치가 없는 책들도 많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지요. 지금도 서점에 가보면 좋은 책들도 있나 하면, 정말 값어치가 없는 책들, 그리 좋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 찬 책들도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책들이 범람하는 이유는 말하자면 책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은 너무 쉽게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출판과 관련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하루에도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렇게 된 지는 얼마 안 됩니다.


몇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책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비쌌지요.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거의 책들을 보면 모두 일일이 사람들이 손으로 베껴 쓰곤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렸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지요. 사용되는 종이를 본다 하더라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히 비쌌기 때문에, 정말로 가치가 있는 책들에 한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히 값진 지식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지식들을 본다면 어떻습니까. 이는 모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모이고 모이면 학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과거>라고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 또는 자신이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입니다.


경제학을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사회의 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뛰어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하고 분석해서 경제이론을 발표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법학 같은 것도 그렇지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1년에도 수없이 많은 법률들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거부터 있어왔던 일들에 대한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장 오늘 새롭게 일어난 일이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법은 만들어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자동차가 없었을 때에는 자동차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고, 비행기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비행기라는 것이 발명되고 한참이 지난 다음인 것이지요.

인문학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대의 문화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문학이지, 그 시대에서 벗어난 인문학적 지식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학 분야에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래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실 과거를 무시한 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첨단과학이라고 하면 어떤 것을 떠올리십니까.

이른바 첨단과학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는 미래가 아닌 과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재료도 과거에 발견된 것들이고, 구조도 과거에 개발된 기술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기계들도 몇 년 지나면 이제 구형이 되어서 쓸모가 없게 되고 맙니다.

과학이라고 한다면 누구는 천문학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 이를 위해서는 역시 첨단학문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지난 날들에 대한 일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역사학이라고 하고, 더 오래 전 일에 대한 대한 학문을 고고학이라고 한다면, 사실 이 우주과학, 또는 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고고학 중의 고고학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주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주의 현재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빛이 우리 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혀 빛이 없는 곳이라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어요.

사람의 눈에서 자체적으로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빛이 비추고는 그 빛이 반사되어 오는 것을 보고 사물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예를 들어서 제가 손을 이렇게 보고 있다면, 빛은 1초에 30만킬로를 가기 때문에 제가 손을 바라볼 때의 이 손의 모습은 지금 현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태양은 어떨까요. 태양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눈을 다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본다 하면, 우리는 태양의 지금 모습을 관찰할 수가 있을까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이 거리는 대략 시속 100킬로로 달린다고 한다면 도달할 때까지 171년 이상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래도 빛의 속도라고 한다면 빠를 것도 같은데, 빛의 속도로 지구에서 태양까지 간다고 해도 8분 이상이 걸립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지구에 도달한 빛은 8분 전에 태양에서 나온 빛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사람은 태양의 현재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8분 전의 태양 모습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더 멀리 있는 별들은 어떠냐 하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별들 중에서는 몇 년 정도가 아니라, 몇 백만 년, 몇 천만 년 전의 우주, 지구가 생겨나기도 훨씬 전의 우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의외로 많은 별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도달하는 동안에 이미 사라져버린 별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는 고사하고 온통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지식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어떻습니까. 이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은 창세기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찬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는 과거가 없잖아요 오로지 현재와 미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고 하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과거에는 순종을 원하셨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원하시나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지요.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창세기 3장 4절~5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이 마귀 사탄의 말을 보십시오.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마귀 사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집착하기 때문에 본질에 대해서 놓치게 되는데,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핵심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순종하면 살 것이요, 불순종하면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해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유혹하지 않습니까.

이 마귀 사탄의 유혹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주리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세 가지 시험을 하지요.

첫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3절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두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그리고 세 번째 시험.

마태복음 4장 8절~9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이 세 가지 시험은 우리에게 크나큰 가르침을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만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인생에 있어서 적어도 실족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선 3절에 나오는 유혹은 어떤 것입니까.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돌을 먹어도 됩니까. 아니면 먹으면 안 됩니까. 예,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돌을 먹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은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돌을 떡덩이로 생각하고 먹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처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어버린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주머니에 넣어버린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범죄인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뇌물도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賄賂を受け取ってはならない。賄賂は聡明な人を盲目にし、正しい人の言い分をゆがめる。

이처럼 먹어서는 안 되는 것, 내 것이 아니거나, 아니면 정당하지 못한 것은 모두 먹어서는 안 되는 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먹어도 되는 떡덩이로 생각하고 먹는 것은 범죄이기 때문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음으로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유혹을 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마귀는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신앙적인 명예로 유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보시면 가끔 간증을 한다고 하면서도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높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게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이렇게 많이 기도를 했더니,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금식을 했더니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나마 좀 귀여운 축에 속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나 종교 지도자 중에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죠. 자기가 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목사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 사실 이런 사람이 지금도 있지만 옛날에도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다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박수를 받고,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하기에,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까. 아니요. 자기가 영광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항상 그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영광을 받으라고 하면서 사람의 교만을 충동하는 것이 바로 마귀 사탄의 유혹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귀 사탄은 무슨 유혹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경배하라고 하지요. 온 세상의 모든 부귀 영화를 다 주겠다. 그러니까 나를 경배하라고 마귀는 유혹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간단한 법칙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만 했었다면,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그 한 가지 말씀만 지켰더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크나큰 축복을 영원토록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죽음>이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배가 고프다고 돌멩이를 드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죽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돌덩이는 절대로 드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성전 꼭대기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면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 즉 <멸망> 뿐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마귀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법칙에 의하면 이 유혹에 넘어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역시 죽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잠언에 보면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 7장 21절~22절
“21.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22.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彼女は心動かすことばで彼を誘惑し、滑らかな唇で彼をいざなう。
彼はただちに、彼女の後について行く。牛が屠り場に引かれて行くように、足かせが愚か者を懲らしめているかのように。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까.

내 것이 아닌 떡덩이를 먹으려고 하고 있나요.

영적인 교만이 슬금슬금 얼굴을 내미나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십니까.

성경은 그 모습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마귀의 유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만 나와 있으면 되잖아요. 왜 마귀의 유혹까지 성경에 나와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만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도 어제와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그 이전에는 아무리 달콤해 보이는 유혹이라 하더라도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외 없이 <죽음> 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과거에도 그랬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도 살아서 숨쉬는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
“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ローマ人への手紙 15章 4節
“4.かつて書かれたものはすべて、私たちを教えるために書かれました。それは、聖書が与える忍耐と励ましによって、私たちが希望を持ち続けるためです。”


성경 말씀의 교훈은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 말씀은 바로 지금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 다름아닌 바로 <나>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인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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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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