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회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
2023년 12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기린선교회 www.3927.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27절
“25.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 16章 25節~27節
“25.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すべての異邦人に信仰の従順をもたらすために知らされ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あなたがたを強くすることができる方、
27.知恵に富む唯一の神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栄光がとこしえまで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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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63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 イエス様が背負われた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로마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오늘로 로마서를 끝내려고 했었습니다만, 여기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좀 많아서 부득이하게 오늘과 다음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자, 오늘 살펴볼 본문 내용은 로마서 마지막 송영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성경만이 아니라 일반 책들도 마지막 부분까지 가면 이제 서둘러 건성건성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성경은 그 어디 하나 버릴 곳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구석구석까지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영양분으로 가득 찬 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이라 하더라도 오늘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으신 분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그냥 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지막 인사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하지만 이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대단히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집중을 해서 함께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은 좀 금방 머리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25절에서 27절에 걸친 구절이 모두 한 문장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오늘 본문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무엇보다 짧게 끊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25절 전반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전반부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私の福音、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伝える宣教によって、

여기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일단 <나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바울이 전하는 신앙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이미 공부해온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인가,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 율법도 역시 지켜야 하는지, 예를 들어 구약 때처럼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많은 점에 대한 혼란이 있어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律法と預言者はヨハネまでです。それ以来、神の国の福音が宣べ伝えられ、だれもが力ずくで、そこに入ろうとしています。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 때까지이며, 그 이후 즉 예수님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볼 것 같으면, 구약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 선민 즉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은 어디에요? 예,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유대인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 외의 민족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구약 대로라면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 유대인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에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 하면, 예,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외의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렇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하셨어요.

이와 같은 상황이 되니까 이제부터 어떻게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지 사람들마다 혼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뭐라고 말씀 드렸지요?

예,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그렇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왜 살아나셨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즉 우리를 구원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부분이 바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해당되는 부분이 다음부터 공부하게 될 <복음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우선 복음서부터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바울이 전하는 가르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릅니다만,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본다면, 법대는 법대인데 1학년 때에는 법을 거의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법대에 들어갔으니까 법전을 좀 사야되나 했는데, 선배들이 말리더라고요. 법전 사봐야 그거 1학년 때 쓰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법전은 2학년 때부터 쓰게 되는데, 법이라는 게 매년 바뀌다보니 내년이 되면 어차피 새로 사야 된다고 하면서, 1학년 때는 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1학년 때에는 기껏 법학과목을 듣는 게 법학개론 밖에 없어요. 이는 완전히 개론서, 그러니까 개념에 대해서 정리한 과목, 말하자면 입문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외에는 교양필수가 경제학개론이 있었고, 그리고는 모두 다 교양과목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법대생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뭘해요. 법대 건물이 15동인데, 1년 동안 15동에서 들은 과목이라고 해봐야 기초과목인 그 법학개론 하나 뿐이었고, 그것도 한 학기만 들어요. 그리고 그 외에는 다 여기저기 다른 학과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교양과목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선 개념을 잡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학에서의 공부를 어느 정도 적응도 하고, 그리고 법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념을 정리해 놓은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전공공부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강해 순서에 있어서, 우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부터 하고, 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복음서를 공부하기로 한 것입니다.

자, 이와 같이 바울이 복음과 예수님에 대해서 전파한다고 하는데, <전파함은>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전파하는 이유는>이라는 뜻, 그러니까 전파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25절 후반부와 26절 전반부까지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6장 25절 후반부에서 26절 전반부
“25.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25. ……また、世々にわたって隠されていた奥義の啓示によって──
26.永遠の神の命令にしたがい、預言者たちの書を通して今や明らかにさ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구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구약에 있어서의 율법학자들이나 제사장들이 <예수>라는 이름은 알 수 없었지요. 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합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わたしは敵意を、おまえと女の間に、おまえの子孫と女の子孫の間に置く。彼はおまえの頭を打ち、おまえは彼のかかとを打つ。」

창세기부터 이미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록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아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구약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책이 바로 이사야서지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사야 11장 10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その日になると、エッサイの根はもろもろの民の旗として立ち、国々は彼を求め、彼のとどまるところは栄光に輝く。

이사야서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700년 경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도 전에 예언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어떻습니까. 이미 창세기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 즉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그뿐 만이 아니라 그 분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새가 누구입니까. 그는 다윗의 아버지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는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장차 오실 메시아는 유다 지파이자 이새의 뿌리,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실 것도 기록합니다.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ベツレヘム・エフラテよ、あなたはユダの氏族の中で、あまりにも小さい。だが、あなた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その出現は昔から、永遠の昔から定まっている。」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당시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도 아니요 분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구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생생하게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14절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私がまた、夜の幻を見ていると、見よ、人の子のような方が天の雲とともに来られた。その方は『年を経た方』のもとに進み、その前に導かれた。
この方に、主権と栄誉と国が与えられ、諸民族、諸国民、諸言語の者たちはみな、この方に仕えることになった。その主権は永遠の主権で、過ぎ去ることがなく、その国は滅びることがない。

이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예언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달달달달 외울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결과적으로 볼 때 주님께서는 이 예언과 다르게 오셨나요? 아니요. 정확하게 이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아직 결혼하기 전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태어나신 곳도 베들레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성경내용을 다 잘 알고 있었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하나님 식이 아닌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구세주,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 같으세요.

정말 멋진 모습으로, 영광된 모습으로 오실 것 같잖아요. 그냥 무슨 왕도 아니하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세주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만약에 당시 이스라엘에 계셨다면 예수님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님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성령님도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도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육안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장차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된다면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리고 예수님도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신 상황, 그저 요셉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 예수님을 우리가 당시 보게 된다면, 금방 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실 어린양! 이라면서 마치 세례 요한이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아마 그건 좀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는 제 생각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彼は主の前に、ひこばえのように生え出た。砂漠の地から出た根のように。彼には見るべき姿も輝きもなく、私たちが慕うような見栄えもない。


이를 좀 이해하기 쉽도록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오는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이사야 53장 2절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습은 튼튼한 줄기가 아니라 연한 순 같다고 해요. 바람이 불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그리고 누군가가 꺾으려고 하면 쉽게 꺾일 것만 같은 아주 연약한 새싹 같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하잖아요.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란 줄기라면 아주 굵고 튼튼한 나무 줄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보시면 장차 오실 메시아를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비옥하지도 않고 오히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는 거예요. 그리고 풍채도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마도 몸집은 위풍당당, 어깨도 쫙 벌어지고 얼굴에는 귀티가 나고, 그 누가 봐도 거룩함이 넘치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좀 호리호리 하다못해 빼빼 마른 몸집에, 누가 살짝 밀기만 해도 넘어질 것 같고, 얼굴도 그리 위엄이 느껴지지도 않는, 이런 말을 하면 좀 혼날지는 모르지만, 좀 빈상? 정도가 아니었을까 해요. 아니, 이는 제 불경스러운 상상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하자면 정말 그렇잖아요.

어디를 보더라도 좀 귀한 집 아들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 그리고 또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는 예수님의 본모습이 그렇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모습,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의 모습이 그러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자란 곳이 어디에요?

예, 마태복음 2장 23절에 의하면 나사렛에서 자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은 이스라엘 북쪽 지역입니다만, 그러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이스라엘 북쪽지역인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누가복음 2장에 의하면 호적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인 이스라엘 남쪽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은 어떤 지역이었을까요.

보통 신약에 등장하는 지명을 보면 구약부터 존재하는 곳이 많습니다. 그만큼 역사가 깊은 곳이지요. 베들레헴 같은 경우는 창세기에 이미 등장합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명은 구약에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전혀 주목받지도 못한 지역이었거나, 아니면 아예 지명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복음 1장 45절~46절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ピリポはナタナエルを見つけて言った。「私たちは、モーセが律法の中に書き、預言者たちも書いている方に会いました。ナザレの人で、ヨセフの子イエスです。」
ナタナエルは彼に言った。「ナザレから何か良いものが出るだろうか。」ピリポは言った。「来て、見なさい。」


여기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은 다른 곳에 등장하는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이라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그의 친구 빌립이 그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하니까, 그가 대뜸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대단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 하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는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 때까지도 여전히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지역, 다른 곳은 몰라도 그 곳에서는 절대로 대단한 인물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두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니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 정복 때 유다 지파가 받은 지역은 이스라엘 남쪽 지역이었는데, 여기에 베들레헴이 포함됩니다. 베들레헴은 또한 다윗 왕의 고향이기도 하지요.

지금으로 본다면 요셉과 마리아의 주소지는 북쪽 나사렛이었지만 본적지는 남쪽 베들레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나라에서 지시가 있으면 본적에 가서 신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나사렛에서 남쪽 베들레헴까지 가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본적지 베들레헴이 아닌, 멀리 북쪽 나사렛 땅에서 살았을까요.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는 역사적 과정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 지역이 아닌, 거기서 멀리 떨어진 나사렛이라고 하는 외딴 동네에서 살았다는 것이잖아요.

이를 본다면, 그들은 말하자면 그 나사렛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유지……라기 보다는 오히려 나사렛에서는 그 지역에 뿌리가 없는, 어찌 보면 같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외지인에 가까운 존재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그들이 살았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가 얼마일까 하고 알아보았습니다만, 그 거리가 150킬로 정도가 된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40킬로 정도를 걷는다고 한다면 나흘 정도가 걸리는 거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건강한 성인남성의 경우입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까지 갔다고 되어 있는데, 마리아는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베들레헴까지 가는 과정도 보통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간신이 본적지인 베들레헴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대요?

누가복음 2장 6절~7절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ところが、彼らがそこにいる間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
男子の初子を産んだ。そして、その子を布にくるんで飼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い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


호적을 하러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왔는데, 그 때 왔던 사람들이 이 둘 뿐이겠어요? 아마도 각처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로 베들레헴이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빈 방을 찾을 수가 없었나보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았는데, 마땅히 누일 곳이 없어서 가축들의 먹이를 넣어두는 구유에 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은,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니신 분이시라면 대부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실 지는 모르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지금 누가 태어났어요? 그렇죠.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님이 태어나셨어요. 우주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신 역사적인 순간이에요.

그런데 실상은 어땠대요? 예, 묵을 곳이 없었대요. 여관에 빈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도, 그 날 베들레헴 여관 방은 못 잡으셨대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는 지난 번에 잠시 알아본 점이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요?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 집안의 경제사정은 어땠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자녀를 낳았을 때의 율법규정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12장 6절~8절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8.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彼女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ら、息子の場合であっても娘の場合であっても、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一歳の子羊一匹と、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して家鳩のひなか山鳩を一羽、会見の天幕の入り口にいる祭司のところに持って行く。
祭司はこれを主の前に献げ、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その出血の汚れからきよくなる。これが、男の子であれ女の子であれ、子を産む女についてのおしえである。
しかし、もし彼女に羊を買う余裕がなければ、二羽の山鳩か、二羽の家鳩のひなを取り、一羽は全焼のささげ物、もう一羽は罪のきよめのささげ物とする。祭司は彼女のために宥めを行い、彼女はきよくなる。」

자녀를 낳았을 때 여인은 어린 양을 바쳐야 하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양을 바치기가 어렵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바치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주 살이 포동포동 찐 최고급 어린양을 바쳤을까요?



누가복음 2장 21절~24절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八日が満ちて幼子に割礼を施す日となり、幼子の名はイエスとつけられた。胎内に宿る前に御使いがつけた名である。
そして、モーセの律法による彼らのきよめの期間が満ちたとき、両親は幼子をエルサレムに連れて行った。
それは、主の律法に「最初に胎を開く男子はみな、主のために聖別された者と呼ばれ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幼子を主に献げるためであった。
また、主の律法に「山鳩一つがい、あるいは家鳩のひな二羽」と言わ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って、いけにえを献げるためであった。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양 대신 비둘기를 바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 당연히 경제적인 이유에서였겠지요. 이는 다시 말해서 요셉과 마리아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고 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3절
“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イエスはそこを去って郷里に行かれた。弟子たちもついて行った。
安息日になって、イエスは会堂で教え始められた。それを聞いた多くの人々は驚いて言った。「この人は、こういうことをどこから得たのだろう。この人に与えられた知恵や、その手で行われるこのような力あるわざは、いったい何なのだろう。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다고 하는데, 이 고향은 분명 나사렛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문맥을 자세히 보면 아무래도 그 놀란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가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 우리가 이 사람 집안에 대해서 좀 아는데, 어떻게 저런 지혜와 지식이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당시 높은 교육을 받았었다고 한다면 놀라지 않았겠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여기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 >라고 하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명문대에서 고등교육을 배웠다,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 회당에서 율법을 전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니까 다들 놀랍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면서 놀래요? 예, 어? 쟤 목수 아들 아냐?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집도 넉넉하지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도 못했으면서, 언제 저런 걸 배웠어? 라고 하면서 놀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 중에서 또 한 곳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 전반부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


여기서는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성인이 되신 후에 요셉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예수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 하고 신학자들은 추정을 하고 있거든요.

자, 이렇게 보시면 어떻습니까.

여기까지 한 번 정리해본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외모에 대해서 본다면 예, 쉽게 말해서 잘생기지도 않았고, 몸집이 크지도 않았고, 아무튼 딱 봐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아라고 느낄 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출신지역은 어떻습니까. 유다 지파의 전통적인 지역 베들레헴이나 유다 지역이 아닌 저 멀리 북쪽,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저 변방 나사렛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셋째로 출생환경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외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방도 아닌 곳에서 태어났어요. 성경에 본다면 구유에 뉘었다는 구절 때문에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확히 그 곳이 마구간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흔한 여관방 보다도 못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하겠지요. 참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넷째로 경제사정은 어떻습니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는 이미 경제적 사적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태어나셨으니 사정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장 3절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この人は大工ではないか。マリアの子で、ヤコブ、ヨセ、ユダ、シモンの兄ではないか。その妹たちも、ここで私たちと一緒にいるではないか。」こうして彼らはイエスにつまずいた。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마리아의 자녀가 아니라 사촌이라고 하면서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기록에 의하면 비록 예수님께서 잉태하실 때에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예수님의 출생 이후에는 요셉과 사이에 아들 딸 낳고 살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들이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을 더한다면 아들만 다섯 명이에요. 그리고 자매들은 어땠냐 하면 <누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누이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두 명 이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적게 잡아서 그 가정에는 자녀가 아들 다섯 명과 딸이 둘 이상, 도합 7남매 이상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 가정이 어땠어요? 예, 넉넉하지 못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적게 잡아 7남매라고 한다면 어땠겠습니까. 참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지요.

다섯 번째로 가족사정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예수님 당시는 어땠겠습니까. 그야말로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약자였던 것이지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지역이나 친인척 간에 있어서도 생각 없는 사람들로부터 결손가정이다 뭐다 하면서 어쩌면 마리아나 예수님을 비롯한 그 형제들까지 때로는 수치를 당하는 일도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섯 번째로 예수님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 대단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앞서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하잖아요.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4장 28절~30절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8.これを聞くと、会堂にいた人たちはみな憤りに満たされ、
29.立ち上がってイエスを町の外に追い出した。そして町が建っていた丘の崖の縁まで連れて行き、そこから突き落とそうとした。
30.しかし、イエスは彼らのただ中を通り抜けて、去って行かれた。

아니,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는 어쩌면 그만큼 예수님과 그 집안 사람들을 좀 무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좀 쉽게 말하자면 대단한 집안도 아니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주제에, 젊은 놈이 건방지게 누구를 가르치려고 들어? 뭐,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모질게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오래된 연고도 없고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집안이라면서, 어쩌면 그 지역 사람들한테 있어서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자,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 어떻습니까.

외모문제, 출신지역, 출생환경, 경제사정, 가족환경, 그리고 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 하나 평탄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현대 사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이 열등감, 콤플렉스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경우를 보세요. 열등감을 가질 만한 부분이 어디 한 둘입니까. 외모, 출신, 출생, 경제, 가족, 학력문제 ……이렇게만 보더라도 여섯 개나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중 한 두개만 되더라도 괴로워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이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왜 이와 같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을까요.

여기서 다시 로마서 4장 25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4장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主イエスは、私たちの背きの罪のゆえに死に渡され、私たちが義と認められるために、よみがえられました。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된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리를 할 때 쓰이는 믹서가 있지요? 예, 믹서에 과일이나 야채를 넣고 돌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예외 없이 완전히 갈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자면 믹서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십자가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법칙,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은 무엇이든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더니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또 무엇을 짊어지셨습니까.

이는 성경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まことに、彼は私たちの病を負い、私たちの痛みを担った。それなのに、私たちは思った。神に罰せられ、打たれ、苦しめられたのだと。

이 말씀을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これは、預言者イザヤを通して語られたことが成就するためであった。「彼は私たちのわずらいを担い、私たちの病を負った。」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나 질병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것도 짊어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질병 그리고 연약한 것까지 모두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외모, 출신, 출생, 경제, 가족, 학력문제 그 외에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때로는 부끄러워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는 모든 문제들, 그리고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모든 연약한 것을 다 짊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人の子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ための贖いの代価として、自分のいのちを与えるために来たのと、同じよう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그대로 우리를 섬겨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와 질병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오르셨고, 그리고 바로 그 모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 우리의 연약한 것을 모두 해결해주시기 위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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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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