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7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2022년 11월 20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9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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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9節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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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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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추수감사 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9번째 시간으로서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賜物で満たしてくださ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라고 말하면 꼭 돈이나 물질 같은 것을 떠올리기 쉬운데, 오늘은 주님께서 가득 채워 주시는 은사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에도 잠시 살펴보았던 내용이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잠시 지난 주 말씀을 복습 하실까요?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은사와 부르심에 대하여 후회하심이 없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신 적이 있으셨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후회를 안 하시도록 하는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피조물은 이 세상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다른 열매는 다 먹어도 좋아. 하지만 내가 말한 그 열매만은 먹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요. 설마 그 열매가 아까워서 그러셨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아도 못 먹잖아요. 그건 순종이 아니지요.


그럼 어떤 것이 순종이냐 하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는다면, 이것이 진정한 순종이겠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 동산의 어디에 있었습니까.

창세기 2장 9절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동산 가운데에 있었다는 것은, 에덴 어디에 있든지 제일 잘 보이는 곳, 제일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먹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가서 따먹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안 먹는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으로 쳐주겠다. 이와 같은 말씀이셨던 것이지요.


매일 삼시세끼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안 먹기만 하면, 그 말씀만 지키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여겨 주셔서, 영원토록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만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あるこの思いを、あなたがたの間でも抱きなさい。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모든 영광을 받고 계셨으나, 이를 마다하고 사람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불순종을 해결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죄의 근원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 사탄은 항상 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무기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순종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정말 괄목할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라고 하겠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에 의하면 모세는 120년을 살았다고 기록을 합니다.

그의 인생은 크게 40년 씩 세 단계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 40년은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할 때였고, 다음 40년은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서 쓸쓸히 광야에서 생활하는 시기,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와서 광야를 떠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언제가 가장 화려하겠습니까. 당연히 애굽에서 왕자로 생활할 때라고 하겠지요. 당시 애굽은 최고의 선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애굽인이 아닌 이스라엘 자손이면서 왕자로 인정을 받아서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리고 살았던 시기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시기를 성경은 얼마나 기록하냐 하면, 한 장도 아니에요. 모세의 출생부터 애굽에서의 생활을 마친 40년 동안의 세월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2장 2절~15절까지 달랑 14절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낯선 땅 광야에 머무르면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지내는 40년도 출애굽기 2장 15절에서 마지막 25절까지, 이건 더 짧아서 11절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광야에서 그의 생을 마치는 40년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장에서 40장까지 38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36장, 그리고 신명기 마지막 34장까지 무려 135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똑 같은 40년인데 왜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면 성경은 철저하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80. 이제 고령자가 된 모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옛날엔 좋았지. 그 강대국 애굽에서 권세를 누리며 살았을 때는 참 멋있었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나에게 머리를 숙이고, 내 명령 하나라면 모든 군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그랬었지.

그런데 사람 팔자 모를 일이야. 인생이 한 번 꼬이더니 모든 것을 다 잃고서는 이제 이 광야 땅에서 쓸쓸하게 나이를 먹었구나.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일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십니까.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今、行け。わたしは、あなたをファラオのもとに遣わす。わたしの民、イスラエルの子らをエジプトから導き出せ。」


너무나도 기가 막히는 노릇 아닙니까. 이제 인생 끝자락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세요. 아무리 사람이 끝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어떻게 돼요? 그렇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어려운 말씀을 쉽게 하세요.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 내게 하시겠다는 것인데, 지금 이팔청춘 젊은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팔십 먹은 할아버지한테 이 어마어마한 사명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 보더라도 외국에 잡혀 있는 사람 하나를 살려내려고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정부 고위층이 오랜 시간을 걸쳐 협상도 해야 하고 그래요.

그런데 지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입니까. 출애굽기 38장 26절과 민수기 4장 48절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수 방법에 조금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일단 성경에 나온 기록으로 본다면, 성인 남성이 603,550명에다가 레위 지파 8580명. 이를 더하면 612,130명. 이를 바탕으로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의 전체 수를 신학자들은 대략 20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놀고 있는 사람 데려오는 게 아니에요. 그 나라에서 종으로 살고 있다는 뜻은, 실질적인 노동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유인도 아니고 종, 그러니까 노예입니다. 200명도 아닌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말하자면 북한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런 막대한 사명을 누구한테요? 예, 80먹은 할아버지한테 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당연히 못 한다고 하지요.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저 이 나이까지 양이나 치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主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が手に持っているものは何か。」彼は答えた。「杖です。」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모세가 지금 못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 손에 뭐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지팡이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거 가지고 가.

참 말씀 쉽지요?

그래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또 뭐라고 하세요?

출애굽기 4장 14절
“14.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すると、主の怒りがモーセ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こう言われた。「あなたの兄、レビ人アロンがいるではないか。わたしは彼が雄弁であることをよく知っている。見よ、彼はあなたに会いに出て来ている。あなたに会えば、心から喜ぶだろう。

야. 너 자꾸 말 안 듣지? 알았어. 그럼 네 형 있잖아. 형도 붙여 줄게. 빨리 가.

이렇게 말씀하세요.

모세의 나이 여든 살. 그러면 모세의 형이라면 모세보다 젊겠어요? 늙었겠어요. 당연히 나이가 위잖아요.

출애굽기 7장 7절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彼らがファラオに語ったとき、モーセは八十歳、アロンは八十三歳であった。

그의 형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 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든 살, 그의 형 아론은 여든 세 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핍박 받고 있는 애굽에서 구해내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해준 것이 뭐였어요? 예, 나무 지팡이와 모세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할아버지 아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할아버지 둘이 200만명이나 되는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말하자면 북한 같은 곳에 쳐들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참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세가 이 말씀에 순종을 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참 너무하지 않아요?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시면서 새로 뭔가를 주신 것이 없어요. 지팡이? 원래 모세가 가지고 있었어요. 아론이요? 원래 있었던 형이잖아요. 다 원래 있던 거예요. 하지만 원래 있던 지팡이를 가지고, 원래 있던 아론 형과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럼 막강한 군대를 짠 하고 만들어주실 능력이 없으십니까. 아니요. 그 정도가 아니라 천군 천사를 보내셔서 애굽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팡이와 그의 형, 아니, 뭐 사실 형은 나중에 하도 모세가 자꾸 못 하겠다고 하니까 억지로 붙여준 것이지만, 솔직히 그 모세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지팡이 하나면 충분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가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애굽을 향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そこでモーセは妻や息子たちを連れ、彼らをろばに乗せて、エジプトの地へ帰って行った。モーセは神の杖を手に取った。

그 때까지는 양이나 치기 위해 쓰던 흔한 그 나무 지팡이였지만,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자 어느덧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못 한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네가 순종을 하면 내가 능력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합니다. 아니,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에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감사가 없어요.

항상 이게 없어요. 저게 없어요. 하고 불평을 합니다. 불만을 말해요. 하지만 어쩌면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기 위해서 모세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천군만마요? 막대한 돈이요? 아니요. 오로지 그의 순종이었습니다. 그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가지고 있던 나무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서,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나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은사도 주신다고 기록합니다.


은사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2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11절.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ある人には同じ御霊によって信仰、ある人には同一の御霊によって癒やしの賜物、
ある人には奇跡を行う力、ある人には預言、ある人には霊を見分ける力、ある人には種々の異言、ある人には異言を解き明かす力が与えられています。
同じ一つの御霊が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なさるのであり、御霊は、みこころのままに、一人ひとりそれぞれに賜物を分け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 보시면 유독 한국에서는 이 방언의 은사에 집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시면 방언을 하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だれかが異言で語るのであれば、二人か、多くても三人で順番に行い、一人が解き明かしをしなさい。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기도할 때 하라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방언으로 크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성경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도 해석하지 못하는 방언을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바깥에 나가서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던 바리새인들이 했던 짓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また、祈るとき偽善者たちのようであってはいけません。彼らは人々に見えるように、会堂や大通りの角に立って祈るのが好きだ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彼らはすでに自分の報いを受けているのです。

남들 앞에서 크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와~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이 좋구나~ 하고 칭찬할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가 받을 상은 이미 다 받았다. 그러니까 뭐예요? 내가 줄 상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혹 교회에 보면 은사 찾기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게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기도에 은사가 있다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제가 어느 교회에서 본 분인데 말이에요. 한 여자 집시님이셨어요. 그런데 무슨 예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즉흥으로 그 분이 식사기도인가를 하게 되었는데, 야, 정말 어쩌면 그렇게 기도를 잘 하세요? 길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즉석에서 하시는 기도인데 마치 정말 종이에 적어온 것처럼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잘 하는 것만이 은사인가요?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는 안수집사님이셨는데 당시 섬기고 계셨던 교회의 어느 한 교구가 크게 성장한다는 소식을 들었대요. 그런데 거기 구역장님이 정말 소문이 자자해서 자기도 한 번 가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였냐 하면 이 구역장님이 말씀을 하실 때 좀 많이 더듬는대요.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것도 좀 매끄럽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 그런가보다……했는데, 이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이야기 하시는데, 이러시더래요.


“음…음…음…”

말을 원래 더듬으시니까 매끄럽게 잘 안 나오죠. 그런데 신기한 것이 그 자리에 있던 구역 식구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들 마가복음을 펴더래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길래 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답니다. 아니, 어떻게 마가복음인지 알았습니까. 그랬더니, 아, 구역장님이 저렇게 말씀하실 때는 <마가복음>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래요.

그래서, 아니 <마>로 시작한다면 <마태복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가복음>이라고 알았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그러시더래요. 우리 구역장님이 마태복음을 말씀하실 때는 “마마마마마” 그러신대요.

이 분은 인간적으로는 말씀에 은사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구역장님 덕분에 크게 성장을 한다는 거예요.

다른 구역을 보면 구역장님이 말씀을 전할 때 다른 짓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도 있는데, 여기서는 잘못하면 못 알아들으니까 모두가 다 그 구역장님의 입을 본다는 거예요.

그만큼 집중을 해서 말씀을 들으니까 말씀이 심어지고 그 구역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눈으로 우리에게 없는 것만 자꾸 보려고 하는 것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순종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나무 막대기가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고, 인생의 끝이 놀라운 인생의 시작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넉넉하게 은사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인생, 축복과 은혜로 넘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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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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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6회 흔들림 없는 순종
2022년 11월 13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8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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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8절~29절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8節~29節
“28.彼らは、福音に関して言えば、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に敵対している者ですが、選びに関して言えば、父祖たちのゆえに、神に愛されている者です。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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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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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8번째 시간으로서 “흔들림 없는 순종” 揺るぎのない従順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로마서 11장 28절을 봅니다.

로마서 11장 28절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8.彼らは、福音に関して言えば、あなたがたのゆえに、神に敵対している者ですが、選びに関して言えば、父祖たちのゆえに、神に愛されている者です。

여기에 보시면 ‘그들’과 ‘너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키는 것이요, ‘너희’는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28절 내용은, 복음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방인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자라고 하십니다. 이는 누구에 대해서 원수가 된 자라는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원수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으로 인해서 분명 택하심을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경은 지금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잠시 복습을 한다면 본래 복음은 이스라엘에 전파되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를 거부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자 그들에게로 전파되었을 복음이 이제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서, 이방인이 구원 받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며,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말씀을 지난 주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29절에서는 어떻게 기록합니까.

로마서 11장 29절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29.神の賜物と召命は、取り消されることがないからです。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믿음을 한 번 가지면 절대로 구원의 취소가 안 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わたしはサウルを王に任じたことを悔やむ。彼はわたしに背を向け、わたしのことばを守らなかったからだ。」それでサムエルは怒り、夜通し主に向かって叫んだ。

이 구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는데, 사무엘상 15장 11절 말씀에 보시면 분명히 후회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15장 11절은 어쩌다가 우연히 좀 잘못 기록된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사람이 있을 까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5장 35절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サムエルは死ぬ日まで、再びサウルを見る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サムエルはサウルのことで悲しんだ。主も、サウルを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ことを悔やまれた。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것을 놓칠 까봐,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점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후회하셨던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만, 우리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그 동안 종살이를 하고 있던 애굽에서 탈출하고는 무려 40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한 끝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에 이어 그들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부터 시작해서 대대로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사사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대단한 권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사기 17장 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そのころ、イスラエルには王がなく、それぞれが自分の目に良いと見えることを行っていた。

사사기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そのころ、イスラエルには王がなく、それぞれが自分の目に良いと見えることを行っていた。

그러니까 사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왕이나 대통령 같은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글쎄요. 쉽게 말하자면 정신적인 지도자 정도로 인식 되어 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사의 말을 들으면 좋겠지만, 안 듣는다고 해서 체포한다거나 특별한 형벌을 내린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참으로 이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왕을 원했던 것이지요. 참 이상한 노릇이지요? 왕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명령을 할 것이요, 자신들의 세금도 가져갈 것이요, 얼마나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시면, 왕을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시 사사였던, 정확하게는 일선에서 은퇴하고 자기 아들에게 사사를 물려주었던 사무엘은, 왕을 세우게 될 경우의 불이익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역설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끝까지 왕을 세워달라고 해요. 그들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8장 19절~20절
“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しかし民は拒んで、サムエルの言うことを聞こうとしなかった。そして言った。「いや。どうしても、私たちの上には王が必要です。
そうすれば私たちもまた、ほかのすべての国民のようになり、王が私たちをさばき、私たちの先に立って出陣し、私たちの戦いを戦ってくれるでしょう。」

참 단순하지요? 생각해보세요. 물론 당시에 전쟁을 하게 된다면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어디 항상 그러나요. 보통은 후방에서 보고를 받거나 군대를 지휘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럼 직접적으로 전쟁은 누가 합니까. 당연히 병사들이 하는데, 병사는 말하자면 그 나라 백성, 그러니까 자기들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왕을 세우면 왕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전쟁도 해주고 얼마나 좋아?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지요.

사무엘이 아무리 만류를 해도 백성들이 도무지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도 그들 위에 왕을 세우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미국도 그렇습니다만, 그깟 몇 년밖에 못하는 대통령이나 총리 한 번 하려 해도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까. 그런데 원칙적으로 죽을 때까지 평생 할 수 있는 왕이 되기 위해서 사울이 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은 것은 99%도 아니고 100%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어떻게 해야했겠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결국 사울은 하나님을 후회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던 것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아말렉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무엘상 15장 2절~3절
“2.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万軍の主はこう言われる。『わたしは、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上って来る途中で、アマレクがイスラエルに対して行ったことを覚えている。
今、行ってアマレクを討ち、そのすべてのものを聖絶しなさい。容赦してはならない。男も女も、幼子も乳飲み子も、牛も羊も、らくだもろばも殺しなさい。』」

이런 말씀을 보시면 참 무섭고 잔인하지요. 아니, 성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젖 먹는 아이나 가축들까지도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는 단순한 공격이나 점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알기 쉬운 예로, 소돔과 고모라를 보더라도 거기에 무슨 어린 아이들이나 가축들은 남겨두고 멸망한 것이 아니잖아요?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그 도시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흔적도 남김없이 전멸하신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입니다만, 출애굽기 17장에 의하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홍해를 건너고 얼마 가니까 이 아말렉 족속들이 공격을 해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고, 그 심판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신 사울을 통해서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무엘상 15장 7절~9절
“7.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8.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サウルは、ハビラからエジプトの国境にあるシュルに至るまで、アマレク人を討ち、
アマレク人の王アガグを生け捕りにし、その民のすべてを剣の刃で聖絶した。
サウルとその兵たちは、アガグと、肥えた羊や牛の最も良いもの、子羊とすべての最も良いものを惜しんで、これらを聖絶しようとしなかった。ただ、つまらない値打ちのないものだけを聖絶したのである。


사울은 별볼일 없는 하찮은 가축들은 다 죽였지만, 아말렉 왕인 아각이 가지고 있던 최고의 가축들은 남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15절에 의하면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아니요. 오히려 이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해서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어느 쪽을 좋아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기뻐하실 것도 같지만,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좋은 제물을 갖다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말렉을 심판하라는 명령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얻은 그깟 가축 몇 마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サムエルは言った。「主は、全焼のささげ物やいけにえを、主の御声に聞き従うことほどに喜ばれるだろうか。見よ。聞き従うことは、いけにえにまさり、耳を傾けることは、雄羊の脂肪にまさる。

그 어떤 제사나 그 어떤 제물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도 끝까지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고집,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무엘상 31장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린 사울은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이스라엘 왕위는 다윗에게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성경을 알게 되면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다면서요. 전지전능이 무슨 뜻이에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처럼 순종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을 텐데, 왜 왕으로 세우시고는 후회를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만약에 사울이 순종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게 되잖아요.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서나 위인전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객관적인 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앞에 두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사울에 대한 후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란 무엇인가>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세워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지금의 왕도 그렇습니다만, 이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대를 이어 계승되는 것이 바로 왕위인 것입니다.


사실 사울이 범한 실수는 이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13장에서 처음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제사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결국 자신이 대신 제사를 드리는,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월권행위를 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14절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サムエルはサウルに言った。「愚かなことをしたものだ。あなたは、あなたの神、主が命じた命令を守らなかった。主は今、イスラエルにあなたの王国を永遠に確立されたであろうに。
しかし、今や、あなたの王国は立たない。主はご自分の心にかなう人を求め、主はその人をご自分の民の君主に任命しておられる。主があなたに命じられたことを、あなたが守らなかったから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왕이 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울을 통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다림>이라고 하는 단순한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わたしを遣わされた父が引き寄せてくださらなければ、だれもわたしのもとに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わたしはその人を終わりの日によみがえらせます。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우리는 우리가 내 의지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내 의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워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1장 6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その異邦人たちの中にあって、あなたがたも召さ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りました──


고린도전서 3장 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のもの、キリストは神のものです。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혼자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의 소유가 되고, 그리고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축복은 결코 후회하심, 즉 취소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해주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신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수많은 모래알 속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세워 주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버리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헌신짝 버리듯 버림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의 원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남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후회하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후회하게 하셔도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흔들림 없는 순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림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서, 마침내 넘치는 축복과 넘치는 은혜를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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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5회 구원의 약속
2022년 11월 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5節~27節
“25.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この奥義を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人の一部が頑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の満ちる時が来るまでであり、
26.こうして、イスラエル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救い出す者がシオンから現れ、ヤコブから不敬虔を除き去る。
27.これこそ、彼らと結ぶわたしの契約、すなわち、わたしが彼らの罪を取り除く時であ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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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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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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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7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약속” 救いの約束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5節~27節
25.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自分を知恵のある者と考えないようにするために、この奥義を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イスラエル人の一部が頑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の満ちる時が来るまでであり、
26.こうして、イスラエルはみな救われるのです。「救い出す者がシオンから現れ、ヤコブから不敬虔を除き去る。
27.これこそ、彼らと結ぶわたしの契約、すなわち、わたしが彼らの罪を取り除く時であ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일단 25절에 보시면 하나의 신비 즉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님을 통한 대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십 번 십자가에 못박힌다 하더라도, 아무리 수백 번 채찍에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 이웃의 죄는커녕 우리 자신의 죄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만 우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에 대한 우둔함은 예수님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요, 구원에 대해서도 우둔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중 일부가 이처럼 우둔하게 된 이유가 뭐라고 배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둔하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을 버리셨다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실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하기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수가 충만해 진다> <수가 찬다>는 말을 들으면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이에요. 사실 이런 집단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마다 일만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명만 인치심을 받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지막 날에는 이 십사만 사천명 안에 들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열두 지파를 만들어놓고는, 각 지파에 들어가는 명단을 만들어요. 그래서 각 지파에서 12,000명 안에 들어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말하는 12,000명 안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면, 그 종교집단의 말을 잘 들어야 그 명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뭐예요? 예, 헌금을 많이 내면 그 명단에 들어가게 되고, 헌금을 못 내면 그 12,000명에서 밀려나게 되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말합니다. 공짜 천국은 없다. 그러니까 헌금을 많이 내라. 신자들을 많이 모아와라. 그래야 천국 간다. 그러면서 외칩니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이런 걸 들으면요. 정말 참 장사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렇게 하면 교회 재정도 좀 넉넉해지고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런 말씀을 못 드립니다.

물론 성경에는 물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무조건 많이 내기만 하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어요.

말라기 3장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人は、神のものを盗む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だが、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ものを盗んでいる。しかも、あなたがたは言う。『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あなたのものを盗んだでしょうか』と。十分の一と奉納物においてだ。

말라기 3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十分の一をことごとく、宝物倉(ほうもつぐら)に携えて来て、わたしの家の食物とせよ。こうしてわたしを試してみよ。──万軍の主は言われ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ために天の窓を開き、あふれるばかりの祝福をあなたがたに注ぐかどうか。


십일조 즉 자신의 수입에 있어서 10분의 1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바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하고, 뿐만 아니라 어디 한 번 십일조를 드려봐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이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차지 않나 한 번 하나님을 시험해봐라.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계세요.

누구는 십일조는 구약에만 있는 것이고 예수님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말씀을 안 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わざわいだ、偽善の律法学者、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イノンド、クミン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律法の中ではるかに重要なもの、正義とあわれみと誠実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누가복음 11장 42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だが、わざわいだ、パリサイ人。おまえたちはミント、うん香、あらゆる野菜の十分の一を納めているが、正義と神への愛をおろそかにしている。十分の一もおろそかにしてはいけないが、これこ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의와 긍휼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중요하지만, 뿐만 아니라 십일조도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보험이 많습니다만, 저는 그 보험 중의 보험이 바로 십일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종종 보면 이 십일조가 얼마나 시험에 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예전에 회사생활 할 때를 생각하면, 꼭 십일조만 내지 않으면 딱 맞아요. 십일조를 내면 그 만큼 적자가 날 것만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딱 감고 바치기만 하면, 길이 열리고 주님께서 물질과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경험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분을 보니까, 자기는 십일조를 지금보다 열 배 스무 배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니 무슨 교회에 돈을 많이 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나……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예, 자기 수입이 열 배 스무 배 늘어나게 해달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걸 듣고 그것 참 자혜로운 기도네……라고 감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수입이 열 배 스무 배 이상 늘어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가 돈 이야기 한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목사가 하는 일이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십일조에 대해서도 안 전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이 하는 돈 이야기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무조건 돈을 많이 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그들은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은 못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 지파마다 12,000명, 총 144,000명 안에 들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재적교인만 보더라도 75만명이라고 하는데, 전세계, 그것도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다 포함을 한다면 어떻게 그 절대적인 숫자만이 구원받겠습니까.

좋습니다. 100보 양보를 해서, 1명 2명 3명……해서 정말 144,000명이 구원을 받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명단을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요? 자기들이 멋대로 명단을 만들어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보여드리면, 그 명단 대로 주님이 그걸 보시고 구원을 해 주신대요? 자기들이 뭔데요?

이렇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을 그 안에 있으면 교묘하게 세뇌를 해서, 성경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믿도록 한다는 것인데, 이게 참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2,00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성경에 나오는 완전수입니다. 성경에는 12만이 아니라 3이나 40 같은 수도 완전수라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이를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 말씀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その手紙でパウロは、ほかのすべての手紙でもしているように、このこと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その中には理解しにくいところがあります。無知な、心の定まらない人たちは、聖書の他の箇所と同様、それらを曲解して、自分自身に滅びを招きます。

교회 좀 다니고 설교 좀 들었다고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면, 그냥 조금 잘못될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꼬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인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경에 적혀 있는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약속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이 맨날 말만 했지 도무지 지키는 모습이 안 나와요.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도 믿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최대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문제를 내볼까요?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말 그대로 본다면 구약은 오래된 약속이요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에요. 이렇게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약속의 책입니다.

조금 더 알기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구약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요, 신약은 아직 안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은 어디서 나누어질까요.

많은 분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 구약이요 예수님이 오신 다음이 신약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사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부터 신약성경이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부터 신약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지 말아야 하잖아요?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성취가 된다면 그 성취까지가 구약이 되는 것이요, 새로운 약속이 선포되고 시작되는 시점이 신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사실은 구약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예언되어 왔습니다. 구약 39권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오신다는 예언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53장이지요. 시간관계상 인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이사야 53장에 보면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생생하게 예언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자, 그럼 구약의 예언이 어디서 완전히 끝나게 되느냐 하면, 이는 예수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そして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がまだ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たころ、あなたがたに話したことばはこうです。わたしについて、モーセの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と詩篇に書いてあることは、すべて成就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내용인데, 여기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것,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왔던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구약의 예언은 모두가 성취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예,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가신 것이 아니지요?

사도행전 1장 3절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

イエスは苦しみを受けた後、数多くの確かな証拠をもって、ご自分が生きていることを使徒たちに示された。四十日にわたって彼らに現れ、神の国のことを語られた。

사도행전 1장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こう言ってから、イエスは使徒たちが見ている間に上げられた。そして雲がイエスを包み、彼らの目には見えなくなった。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두 개가 있는데, 모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상장이라도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답은 두 개입니다.

자,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7.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の益になるのです。去って行かなければ、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はおいでになりません。でも、行けば、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助け主を遣わします。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지 않지만, 올라가시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 중 하나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하나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2절~3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3절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わたしの父の家には住む所がたくさんあります。そうでなかったら、あなたがたのために場所を用意しに行く、と言ったでしょうか。
わたしが行って、あなたがたに場所を用意したら、また来て、あなたがたをわたしのもとに迎えます。わたしがいるところに、あなたがたもいるようにするため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주시기 위해서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시면 어때요?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144,000밖에 없다고 하시나요? 아니요. 걱정하지 마세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서 가려고 하실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모두 다 마치고 난 다음 천천히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며칠 전에 차를 타고 제 아내와 어디를 가는 길에 보니까, 그럴 때 있잖아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쫙 비치는 모습이요. 서울이나 동경 같은 도시에서는 하늘이 넓지 않으니까 그런 걸 볼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군마 같은 경우는 하늘이 넓으니까 참 멋진 경치를 볼 기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그 구름 사이로 몇 갈래나 햇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 마치 예수님이 오실 것 같다는 거예요.

글쎄요. 실제로는 어떤 상황에서 오실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니까 정말 영화에서 예수님이 오실 것 같은 분위기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에요.

그래서, 오, 정말 그러네?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예수님을 만나면 뭐라고 할 거냐고 저한테 물어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딱 만나면 뭐라고 하실 것 같으세요? 할렐루야! 주여! 그러시겠어요?

저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겠습니다만, 글쎄요.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첫 마디는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할 거 같애요.

자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기에는 거할 곳이 많은데, 너는 어디서 살고 싶니.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으십니까. 큰 집에서 살고 싶어요? 교통편이 좋은 곳에서? 경치가 좋은 곳? 산이나 바다가 가까운 곳? 아니면 설마 땅값이 비싼 곳?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한 가지 좋은 답이 떠오른 것 같아요.

사실 이 답은 아무한테나 안 가르쳐 드리려고 했는데, 여러분께만 특별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어디에 살고 싶냐고 물으시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싶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니까 왕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이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누가 사냐 하면, 최측근이 살지 않습니까. 그래야 왕이나 대통령이 부를 때 언제든지 제일 빨리 갈 수 있잖아요.


이는 그렇다고 무슨 천국에 가서까지도 권력에 욕심을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삶이 가장 귀하고 값진 삶이 아니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부어주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 주십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 주시고 우리가 거할 곳을 예비해주신다는 구원의 약속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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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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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4회 앞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2022년 10월 30 설교 - 로마서 강해 10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4절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4節
“24. あなたが、本来野生であるオリーブから切り取られ、元の性質に反して、栽培された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たのであれば、本来栽培された枝であった彼らは、もっとたやすく自分の元の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るは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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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6번째 시간으로서 “앞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行く道を平らにされる神様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서 접붙임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이 접붙임에 대해서 알아보는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4절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4節
“24. あなたが、本来野生であるオリーブから切り取られ、元の性質に反して、栽培された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たのであれば、本来栽培された枝であった彼らは、もっとたやすく自分の元のオリーブに接ぎ木されるはずです。”


자, 두 나뭇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려고 해요. 하나는 다른 나무인 돌감람나무에서 꺾어 온 나뭇가지이고, 또 하나는 본래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었다가 꺾였던 나뭇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나뭇가지 중에서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것과, 본래 참감람나무에 붙어 있던 나뭇가지를 다시 똑 같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는 것과, 무엇이 더 쉽겠습니까.

당연히 서로 다른 나무를 접붙임 하는 것보다 같은 나무를 접붙임 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본래 그 나무에 붙어 있었던 나뭇가지라면, 다른 데에서 가져온 나뭇가지보다 훨씬 더 접붙임을 하기 쉽겠지요.

이는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여기서 돌감람나무라는 것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본래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되어야 마땅했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완전히 버리셨느냐 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구원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어서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더 수월하겠느냐 하는 기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시고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제일 사랑하시고, 한국사람이나 일본 사람인 우리는 그 다음일 수밖에 없겠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좋겠다……라는 것인가요?

놀라운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겠다……하고 손가락 물고 부러워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전반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が据えられる前から、

여기서 <우리>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저기 먼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곧 창세 전에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참감람나무 나뭇가지일까 아니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일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주님 앞에서 참감람나무 나뭇가지 같으십니까. 아니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 같으십니까.

글쎄요. 여러분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나뭇가지는 고사하고 그저 버러진 나무 막대기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말씀이 떠올랐어요.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です。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이 <미쁘다>라는 말은 참되다. 진실되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만, 모든 사람들이 받아야 할 진실한 말씀은 바로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생각하기를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니까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 아니요.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기야 말로 죄인, 그것도 죄인 중의 죄인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도 그만 안 오셔도 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죄인인 나를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께서는 혹시 그 만화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일본의 ‘너의 이름은’이라는 영화인데,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거기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두 남녀 주인공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까,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을 어떤 사람이 계산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보니까, 확률이 몇 억 분의 1이나 몇 조 분의 1 정도가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단위 분의 1이래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36자리 수의 번호를 한 번에 정확히 알아 맞추는 확률 곱하기 3이라고 합니다.

잘 감이 안 오죠?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이 상당히 낮다는 정도는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처럼 낮은 확률의 만남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구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시면 이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자기 본래 고향으로 보내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4장 3절~9절입니다.

“3.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私はあなたに、天の神、地の神である主にかけて誓わせる。私はカナン人の間に住んではいるが、あなたは、その娘たちの中から、私の息子の妻を迎え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は、私の国、私の親族のところに行って、私の息子イサクに妻を迎えなさい。」
しもべは彼に言った。「もしかしたら、その娘さんが、私についてこの地に来ようとしないかもしれません。その場合、ご子息をあなたの出身地へ連れて戻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
アブラハムは彼に言った。「気をつけて、息子をそこへ連れて戻ることのないようにしなさい。
天の神、主は、私の父の家、私の親族の地から私を連れ出し、私に約束して、『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と誓われた。その方が、あなたの前に御使いを遣わされるのだ。あなたは、そこから私の息子に妻を迎えなさい。
もし、その娘があなたについて来ようとしないなら、あなたはこの、私との誓いから解かれる。ただ、私の息子をそこに連れて戻ることだけはしてはならない。」
それでしもべは、主人であるアブラハムのももの下に自分の手を入れ、このことについて彼に誓った。


자,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찾아 나서게 하는데, 여기에 보시면 그의 종에게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째로,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향까지 가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인을 구하라고 해요.

둘째로, 이삭을 고향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어려운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서 그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라고도 하는 하란까지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가 하고 찾아 보았던니 무려 600킬로나 떨어져 있었다고 해요.

거기에 그 당시에는 비행기는 고사하고 자동차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걸어서 가야 합니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낙타를 타고 갔다고 해요.


그것 만도 보통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렇게 갔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갑자기 그 도시에 가서 무슨 수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성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는 것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어서 구인광고를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먼저 보내셔서 찾아 주실 것이라는 거예요.

여기까지 보더라도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망성이 거의 없어요. 그야말로 사하라 사막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격이겠지요.

자, 좋아요. 백 보 양보를 해서 그 바늘을 찾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지요? 마땅한 여성을 찾았다고 해도 그 여성이, 얼굴도 뭐도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역시 600킬로 떨어진 곳까지 와 주어야 합니다. 이는 그 여성만의 결심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여성의 부모님도 허락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황당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은 이를 믿고 그 먼 길을 출발합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24장 10절~27절까지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제가 정리를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제 오랜 시간을 걸쳐 드디어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기서 이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창세기 24장 13절~15절

“13.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ご覧ください。私は泉のそばに立っています。この町の人々の娘たちが、水を汲みに出て来るでしょう。
私が娘に、『どうか、あなたの水がめを傾けて、私に飲ませてください』と言い、その娘が、『お飲みください。あなたのらくだにも水を飲ませましょう』と言ったなら、その娘こそ、あなたが、あなたのしもべイサクのために定めておられた人です。このことで、あなたが私の主人に恵みを施されたことを、私が知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
しもべがまだ言い終わらないうちに、見よ、リベカが水がめを肩に載せて出て来た。リベカはミルカの子ベトエルの娘で、ミルカはアブラハムの兄弟ナホルの妻であった。

거기에 보면 우물가가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여인 중 한 소녀에게 말하기를, 내가 목이 마르니까 물을 좀 달라고 할 텐데, 만약에 그 소녀가 말하기를 당신만이 아니라 당신이 데리고 온 낙타 열 마리한테도 물을 마시게 하겠다고 한다면, 그 소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소녀라고 믿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자, 이걸 보시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 사람이 목마르다고 하면 아무리 갈증이 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컵으로 물 한 두잔 정도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낙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낙타 혹에 보면 그게 지방으로 되어 있어서 수분이나 영양분을 몸에 저장해 놓을 수 있다고 하니까, 물을 마셔도 한 번에 무척이나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더구나 낙타는 지금 방금 도착했어요. 얼마나 갈증이 나 있는 상황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낙타가 몇 마리요?

10절에 보시면 낙타가 10마리였다고 합니다. 솔직히 성인 남자라 하더라도 지금 목이 탄 낙타 열 마리가 마실 물을 길어서 나른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 시집도 안 간 젊은 소녀가, 그렇다고 무슨 이쪽이 부탁을 한 건도 아닌데 열 마리의 낙타가 마실 물을 길어 나른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리 못해도 무거운 물통을 들고 우물과 낙타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중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해줄 소녀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에다가 돈도 받지도 않았는데 그 쪽이 먼저 그런 말을 해준다? 이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바로 처음 눈에 띈 소녀한테, 자기가 마실 물 한 잔 달라고 하니까, 이 소녀가 뭐래요?


창세기 24장 18절~20절
“18.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すると彼女は、「どうぞ、お飲みください。ご主人様」と言って、すばやくその手に水がめを取り降ろし、彼に飲ませた。
水を飲ませ終わると、彼女は、「あなたのらくだにも、飲み終わるまで、水を汲みましょう」と言った。
彼女は急いで水がめの水を水ぶねにあけ、水を汲みに、再び井戸まで走って行き、すべてのらくだのために水を汲んだ。

대뜸 하는 말이 당신이 데려온 낙타들한테도 물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낙타들한테 한 머금씩 주겠다는 게 아니에요. 낙타들이 배가 부를 때까지 마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소녀는 이 때부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물과 낙타 구유 사이를 왔다갔다 했겠지요. 그러면 이 종은 뭐라고 했을까요. 아냐아냐. 그만하면 됐어. 그랬을까요?


창세기 24장 21절~22절
“21.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22.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この人は、主が自分の旅を成功させてくださったかどうかを知ろうと、黙って彼女を見つめていた。
らくだが水を飲み終わったとき、その人は、重さ一ベカの金の飾り輪と、彼女の腕のために、重さ十シェケルの二つの金の腕輪を取り、

그 종은 그 소녀가 정말 낙타가 배부를 때까지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하는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낙타가 물을 다 마시고 나니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던 것이지요. 알고 보니까 이 소녀가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친척 집안이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끝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이 소녀가 600킬로나 떨어진 자기 집 주인한테 가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 부모님도 이를 허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마침내 그 리브가라고 하는 그 소녀를 데리고 돌아와서 이삭의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말이 쉬워 600킬로지 당시 감각으로 본다면 한국과 일본 정도로 먼 거리로 여겨졌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요, 자, 일본에 있는 한국사람이 자기 아들의 아내를 구하려고 해요. 그래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한국에 가서 자기 아들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그 일하는 사람은 알았다고 하고 10명의 일행들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을 딱 나가자 마자, 그 공항 건물 입구에서 어떤 아리따운 소녀를 발견해요.

이 사람이 그 소녀한테 말합니다. 이봐. 내가 좀 배가 고픈데 말이야. 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 사주지 않겠니?

그러자 이 소녀가 하는 말이, 그러지 마시고, 당신만이 아니라 같이 계신 10명한테도 부페를 대접해드리겠다고 해요…….

뭐, 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럴 확률이 있어요? 없습니다. 36자리 숫자를 맞출 확률이 아니라 360자리 숫자를 맞출 확률보다도 낮겠지요.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4장 40절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すると主人は答えました。『私は主の前に歩んできた。その主が御使いをあなたと一緒に遣わし、あなたの旅を成功させてくださる。あなたは、私の親族、私の父の家から、私の息子に妻を迎えなさ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을 주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주셨을까요.


누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감람나무 나뭇가지 보다도 못한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해서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평탄한 길이 허락되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평탄한 길이 아무런 대가 없이 허락되었나요?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하나님과 사람의 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어마어마하게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를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대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까.

요한1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私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私たちを愛し、私たちの罪のために、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の御子を遣わされました。ここに愛があるのです。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면 됐지, 왜 우리는 죽어라고 예수님을 매달립니까. 예수님에 매달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이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우리는 죄악 속에서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회복되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26장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正しい人の行く道は平らです。あなたは正しい人の道をならし、平らにされます。

이제 돌감람나무 가지보다도 못한 우리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접붙임을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앞길을 평탄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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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3회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2022년 10월 23 설교 - 로마서 강해 10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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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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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5번째 시간으로서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 素晴らしい神様の接ぎ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접붙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이 말씀을 좀 쉽게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그들도 믿는 데에 머무르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あの人たちも、もし信仰の中に居続ける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여기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는 참 감람나무 가지가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그들이 축복을 받았을 텐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감람나무 가지가 꺾이고, 그들이 받아야 할 복음이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어떻게 말씀드렸었지요? 참 감람나무 가지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꺾이심으로 말미암아, 돌감람나무 가지 즉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서 그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난 주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공부해오면서, 그저 그런가 보다……하고 막연하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접붙임과 하나님의 접붙임. 같을까요. 다를까요.

예,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사람의 힘으로 접붙임을 하는 것과 하나님의 힘으로 접붙임을 하는 것.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시러큐스(シラキュース) 대학에는 한 놀라운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분명 한 그루의 나무인데 이 대학 미대 교수님이 하나하나 접붙임을 함으로 인해서, 이 한 나무에서 40종류의 과일이 맺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A라고 하는 나무에 B라고 하는 나뭇가지를 접붙임 했어요. 그렇다면 B라고 하는 나뭇가지는 시간이 지나면 A라고 하는 나뭇가지가 된다? 아니면 계속 B라고 하는 나뭇가지이다?

만약에 접붙임을 한 결과 본래 나뭇가지의 성질이 변해서 그 접붙임 한 나무와 동일하게 된다면, 아무리 접붙임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40종류의 과일이 열리지는 않을 것 아니에요. 처음에는 조금 다른 과일이 열리다가, 접붙임 한 나무와 같아진다면 40번이 아니라 400번을 접붙임 해봐야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한 가지 열매 밖에는 안 열릴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대학에 있는 나무는 어떤가 하면, 본래 그 나뭇가지가 가지고 있던 성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접붙임을 한 나무와는 다른 열매를 계속해서 맺는다는 것이에요.


자, 그럼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참감람나무가 있어요. 제가 어딘가에서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를 꺾어 왔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의 나뭇가지도 꺾어서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 했습니다. 그렇다면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는 참감람나무의 열매가 일릴까요. 아니면 돌감람나무 열매가 일릴까요.

그렇죠. 앞서 그 미국 대학에 있는 그 나무에 40종류의 과일이 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어떤 나무에 다른 나뭇가지를 접붙임 해도 그 나뭇가지의 본래 성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양한 과일이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사과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복숭아 나무에 접붙임을 하든,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는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안 난다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한 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간증해주세요.


자, 우리는 그러면 이 시점에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라고 하는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 참감람나무 열매 맺기를 기대하실까요 아니면 돌감람나무 열매 맺기를 기대하실까요.

잠시 이사야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 5장 1절~2절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さあ、わたしは歌おう。わが愛する者のために。そのぶどう畑についての、わが愛の歌を。わが愛する者は、よく肥えた山腹にぶどう畑を持っていた。
彼はそこを掘り起こして、石を除き、そこに良いぶどうを植え、その中にやぐらを立て、その中にぶどうの踏み場まで掘り、ぶどうがなるのを心待ちにしていた。ところが、酸いぶどうができてしまった。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기름진 땅에 최고의 환경을 갖추어 놓으시고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고 난 후에도 열심히 가꾸셨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와 같이 노력을 했다면 어떤 열매가 맺었겠습니까. 최고의 토양에 최고의 포도를 심고 최고의 기술로 가꾸었다면 당연히 최고의 포도가 맺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포도 맺기를 바라셨대요? 그렇습니다. 좋은 포도, 최고의 포도 맺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어쩌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부으시고 정성껏 가꾸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맺혔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하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분명 최고의 포도를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들포도가 날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바라셨대요? 그렇습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뒤집어서 오늘 말씀에 적용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좋은 참감람나무라 하더라도 그 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돌감람나무 가지에서는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안 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로마서 11장 23절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3節
23.あの人たちも、もし不信仰の中に居続けないなら、接ぎ木されます。神は、彼らを再び接ぎ木す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のです。

생각해보세요. 그깟 돌감람나무 열매를 얻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이셨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단순히 나무를 꺾어다가 접붙이실 뿐만이 아니라,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와도 같은 우리라 하더라도, 믿음에 머묾으로 인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면,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참감람나무열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변화에 있습니다.

이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은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본래 어부였습니다. 그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보다는 배를 탔을 것이며, 고기잡이에 대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의 나이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참고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4절~15절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それからイエスはペテロの家に入り、彼の姑が熱を出して寝込んでいるのをご覧になった。
イエスは彼女の手に触れられた。すると熱がひき、彼女は起きてイエスをもてなした。

여기 보시면 베드로에게는 그의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장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베드로는 당시 결혼을 했었다는 말이 되지요?

베드로가 결혼을 했었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5절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私たちには、ほかの使徒たち、主の兄弟たちや、ケファのように、信者である妻を連れて歩く権利がないのですか。

여기서 <게바>라고 하는 이름은 요한복음 1장 42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사역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당시 가정을 가질 만한 충분한 나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충분한 나이와 함께, 그에 걸맞는 고기잡이로서의 지식과 경험도 갖추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시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혹시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는 함께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절~2절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5:01 さて、群衆が神のことばを聞こうとしてイエスに押し迫って来たとき、イエスはゲネサレ湖の岸辺に立って、
5:02 岸辺に小舟が二艘あるのをご覧になった。漁師たちは舟から降りて網を洗っていた。

여기서 게네사렛 호숫가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보니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는 그물을 씻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기잡이를 하면 그 다음에 그물을 손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조금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왔다고 한다면 그물을 손질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잡아온 고기를 실어 날라야지요. 고기를 내버려두고 그물을 손질할 수가 있나요. 하지만 그들은 배에서 내린 다음 그저 그물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는 날라야 할 물고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3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5:03 イエスはそのうちの一つ、シモンの舟に乗り、陸から少し漕ぎ出すようにお頼みになった。そして腰を下ろし、舟から群衆を教え始められた。

예수님께서는 거기 빈 배 중에서 하나를 골라 거기 앉으시고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아마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들도 일을 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의외의 행동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04 話が終わるとシモンに言われた。「深みに漕ぎ出し、網を下ろして魚を捕りなさ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앉아 계셨던 배의 주인인 시몬 베드로에게로 다가가십니다.

여러분, 보통 처음 만난 사람과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급하더라도 일단 안녕하시냐는 인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많이 바쁘시죠, 고기는 많이 잡혔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 다 생략. 베드로에게 다가가서는 뭐라고 하셨다고요? 예, 다짜고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부자연스럽지 않은 범위 내에서, 한 번 베드로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5절에서 보시면 알다시피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어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갈릴리 바닷가는 물이 맑기 때문에 환할 때 그물을 던지면 고기들이 다 도망가 버린대요. 그래서 밤에 고기잡이를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어요. 말하자면 완전히 장사를 망쳤습니다.

거기다가 밤까지 샜으니 얼마나 피곤 하겠어요. 밤새도록 일을 해서 몸은 피곤한데 고기도 안 잡혔으니 대단히 심기가 불편했겠지요. 본래 뱃사람이라고 한다면 좀 거친 성격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투덜투덜 거리면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는데, 저기 보니까 낯선 남자 하나가 와서는 사람들한테 무슨 말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자세히는 안 들리지만 거기 모인 마을 사람들이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저게 누구야? 사람 바빠 죽겠는데 아침부터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어쭈? 나한테 허락도 없이 내 배에 올라타네?

뭐 그러면서 대단히 불편한 심기로 예수님과 거기 모인 사람들을 보고 있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사람이 말을 마치고 자기한테로 와요. 옳지. 잘 됐다. 내가 속상한데 쓴 소리 한 번 해줘야겠다. “아니, 이 보쇼. 주인한테 허락도 없이 남의 배에…….” 이렇게 말하려고 했더니만 그 사람이 먼저 말을 해요.

깊은 데에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뱃사람은 뱃사람을 알아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이야 여러 기계들도 있고 해서 옛날보다는 편해졌을 지는 모르지만, 옛날에는 그야말로 고기잡이에 있어서 모든 것을 힘으로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고기잡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는 어느 정도 몸집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 타고난 뱃사람인 베드로가 자기한테 말을 하는 사람을 보니까, 전혀 고기잡이처럼 보이지가 않아요. 예수님은 그 때까지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 집에서 자랐을 테니까 목수 일을 하셨었겠지요. 그것도 편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기잡이만큼 힘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전혀 고기잡이를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렇잖아도 지금 일을 망쳐서 심기가 불편한데 꼭두새벽부터 다짜고짜 다시 고기잡이를 나가래?

열 받아요? 안 받아요? 사실 여기서는 열이 받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아니, 지가 뭔데……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런 베드로도 차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분명 그 자리에는 방금 전까지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무리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남자한테 선생님이라고 해요.

여기서 베드로가 함부로 성질을 부렸다가는, 아니, 지금 선생님한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냐면서 혼날 지도 몰라요.

그에게는 이 순간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자존심과 지식과 경험, 또 하나는 그 남자가 하는 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는 놀랍게도, 어쩌면 평소의 베드로 답지 않게 그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 보기로 결정을 합니다.


누가복음 5장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05 すると、シモンが答えた。「先生。私たちは夜通し働きましたが、何一つ捕れませんでした。でも、おことばですので、網を下ろしてみましょう。」

그 선생이라는 사람의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보쇼. 슨상님, 우리 같은 고기잡이 프로가 밤새도록 노력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소. 그런데 지금 보자 하니 고기잡이는커녕 그물 한 번 못 잡아 본 것 같으면서, 우리한테 가르치려 한단 말이제.

좋소. 여기 많은 사람들도 있고, 당신 체면도 있을 테니 그래, 한번만 따라 봅시다.

저에게는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해요. 제가 너무 오버한 것 같으십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좀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해야지만 말이 맞아요.

그 이유는 좀 뒤에 보시면 압니다.


자, 베드로는 그의 형제 야고보와 요한 등과 함께 다시 배에 올라탑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에 대해서 의문이었습니다. 아니, 갈릴리 호수가 좀 넓어요? 얼마나 넓으면 분명히 호수인데 갈릴리 바다라고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깊은 데”가 어딘 줄 알고 거기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나 거기서 고기잡이를 하는 뱃사람이라면 그들 사이에서는 “깊은 곳”이라고 한다면 “아, 거기”라고 하는 곳이 있지 않았을까 해요.

만약에 베드로가 알지 못했다고 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깊은 곳이 어디냐”하고 물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기 뱃사람들은 “깊은 곳”이 어딘지는 다들 알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낯선 선생님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보자고 생각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들만 아는 그런 말을 예수님께서 사용했기 때문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뭐,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국에 가서 베드로한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요.


아무튼 베드로와 그 친구들은 또다시 손질하던 그물들을 다시 배에 싣고서 그 “깊은 곳”을 향해 나갑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 다음에 할 말을 이미 준비해 두었을 지도 몰라요.

그는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냐 하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봤자 소용없다. 우리는 괜한 짓만 하다가 또다시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선생인지 뭔지 하는 사람한테 그 빈 그물을 내던지면서,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한 마디 해줘야겠다.

그런데, 결과가 어땠습니까.

누가복음 5장 6절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06 そして、そのとおりにすると、おびただしい数の魚が入り、網が破れそうになった。

그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고기가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가능성이 1%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가득 차서 찢어지고 있는 그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누가복음 5장 7절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5:07 そこで別の舟にいた仲間の者たちに、助けに来てくれるよう合図した。彼らがやって来て、魚を二艘の舟いっぱいに引き上げたところ、両方とも沈みそうになった。

이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물고기가 많은지 배가 잠길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이제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워집니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건방진 소리를 한 거야. 나는 이제 끝장이야. 천벌을 받을 지도 몰라.

돌아온 그는 예수님 앞에 나갑니다.


누가복음 5장 8절~11절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5:08 これを見たシモン・ペテロは、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言った。「主よ、私から離れてください。私は罪深い人間ですから。」
5:09 彼も、一緒にいた者たちもみな、自分たちが捕った魚のことで驚いたのであった。
5:10 シモンの仲間の、ゼベダイの子ヤコブやヨハネも同じであった。イエスはシモンに言われた。「恐れることはない。今から後、あなたは人間を捕るようになるのです。」
5:11 彼らは舟を陸に着けると、すべてを捨ててイエスに従った。


그는 예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친구들을 축복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록 그가 믿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보다 말씀을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배를 육지에 댔다면,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뭐였다고요? 아니, 그토록 원했던 고기를 잡았는데, 그것도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수많은 고기를 잡았다면 그 물고기들을 이제 날라야 하잖아요.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잡아온 수많은 물고기를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때까지 생명처럼 아껴왔던 배나 그물이나 물고기들마저도 이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때까지 세상이라고 하는 이름, 지식이라고 하는 이름, 경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을 때, 그는 돌감람나무 나뭇가지에서 참감람나무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18절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良い木はみな良い実を結び、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ます。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접붙임을 하려고 해 봤자 결국은 돌감람나무 열매 밖에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접붙임 되면, 참감람나무로 변화하게 됩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놀라운 하나님의 접붙임의 능력으로서 과거의 돌감람나무 뿌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이라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서, 30배 60배 100배, 300배 600배 1000배의 좋은 열매,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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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2회 머물러야 하는 곳
2022년 10월 1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22절
“20.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20節後半∼22節
“20.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21.もし神が本来の枝を惜しまなかったとすれば、あなたをも惜しまれないでしょう。
22.ですから見なさい、神のいつくしみと厳しさを。倒れた者の上にあるのは厳しさですが、あなたの上にあるのは神のいつくしみです。ただし、あなたがそのいつくしみの中にとどまっていればであって、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も切り取られ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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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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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4번째 시간으로서 “머물러야 하는 곳” とどまるべき場所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함께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등등.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니, 이게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중요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잠언을 봅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여기서 지식의 근본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를 바꾸어 본다면 아무리 다른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은 근본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경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건만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멸시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쉬운 말로 한다면 두려워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앞서 드린 말씀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성경을 많이 알고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동안 헛수고만 했다는 뜻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0.......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글쎄요. 저는 이 번역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게 어느 부분이냐 하면 ‘높은 마음’이라는 부분인데,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이 됩니까. 이는 큰 뜻을 품지 말라. 그냥 작은 것에 만족하라……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 20절 후반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

현대인의 성경에는 <교만하지 말고 두려워하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은 큰 꿈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해요? 무엇을 두려워 하라고요? 그렇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이른바 구원의 취소는 없다고 하면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괜찮아, 좀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씻어 주셨으니까, 우리는 100% 천국에 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

사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성경을 찾아보아도 그런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이 바울이 쓴 로마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 쓴 서한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형제자매들한테 쓴 글이에요.


11장 20절 전반부만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20절 전반부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そのとおりです。彼らは不信仰によって折られましたが、あなたは信仰によって立っています。

자,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왔으니까 어렵지 않게 아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접붙임에 대해서 공부 했었잖아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지가 꺾이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서 그 축복을 모두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어요. 한 번 접붙임을 받았어요. 말하자면 한 번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러면 이제 여기서 구원의 취소가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안심해. 이제 걱정하지 마. 100% 틀림없이 구원 받아 천국에 갈 거야……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20절 후반부에 보면 뭐라고요?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즉,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국어 공부 좀 해볼까요?

이 구절을 좀 바꾸어 본다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라고 해도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자, 그럼 쉬운 부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이 글에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라는 것은 누구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까.

그렇죠.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문장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지요.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는 한 문장인데 앞부분과 뒷부분의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뒷부분과 앞부분의 문장에 대한 대상은 동일하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두려운 마음을 품으라는 뒷부분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앞부분의 대상도 역시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하는 그 대상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교만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씀 드렸던, 이제 나는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다. 할렐루야! 나는 구원 받았다! 하고 이제 무엇을 해도 된다는 마음,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거기 보면 사장님이 계실 것 아니에요? 상당히 큰 회사인데, 그런데 자기가 신입사원인데도 사장님이 아주 잘 해주세요. 맨날 점심시간이면 같이 밥을 먹자고 해요. 그리고 밥값도 당연히 내주세요. 말씀도 아주 편하게 하세요.


그렇게 되니까 어느새 이 신입사원이 생각하길, 에이 사장님이라고 별거 아니네.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나를 위해서 많은 걸 다 해 주시잖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게 조금 지나자 아주 사장님을 우습게 알아요. 말도 픽픽 놓고 지각도 밥 먹듯이 하고, 사장님이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요. 어차피 사장님은 나를 아주 좋아하시거든. 괜찮아. 괜찮아. 우리 사장님은 아주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 하셔서 화도 안 내셔.

그런데 사장님이 보시기에 좀 신입사원이라서 잘 해 주려고 했는데 도무지 회사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아요. 부장님이나 과장님을 보니까 사장님이 딱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데 이 신입사원은 일어서지도 않고 “오셨어요?” 하고 고개만 까딱 합니다

사장님은 이런 신입사원한테 말을 해요. 이봐. 자네 보니까 요즘 좀 이상해. 자기한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야 되지 않아?

그러자 이 신입사원은 말합니다. “에이,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사장님이 왜 그러세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좀 내버려두세요.”


그러면 이 사장님이 계속해서 그 신입사원을 그대로 놔두겠습니까. 사장님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사권을 가지고 있지요. 승진을 시킬 수도 있고 자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법적으로 해고를 마음대로 시킬 수는 없다고 해도, 다른 부서로 좌천을 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그저 좋은 사장님, 사랑이 많으신 사장님, 이거 달라고 하면 이걸 주시고 저걸 달라고 하면 저걸 주시는 사장님……. 만약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머지않아 회사에서 크게 혼이 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회사에 다니는 분들 중에서 이런 사람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런 사람, 어디에 있느냐.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그러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한 번 믿으면 괜찮다고 하면서 참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믿음이 좋아서요?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원 가지라고 하는 것을 둘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이 가지를 꺾어서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을 접붙임 하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참감람나무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 같은 우리를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해서 꺾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보혈의 대가로 우리를 접붙임 하셔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에서 21절 말씀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로마서 11장 21절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1.もし神が本来の枝を惜しまなかったとすれば、あなたをも惜しまれないでしょう。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이스라엘 자손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망설임없이 그 나뭇가지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포도나무이자 참감람나무이신 독생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무참하게 죽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긴 했으나, 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는, 독생자 예수님 마저도 아낌없이 십자가에 달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잊어버린 채로, 언제까지 철없는 어린애같이 아, 나는 괜찮아. 나는 기도를 많이 하니까, 나는 금식을 많이 하니까, 나는 방언을 많이 하니까,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니까 괜찮아……하고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교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도시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있지요. 그곳은 죄악의 도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당한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도시라고 한다면 어떤 모습이라고 상상을 하십니까. 으스스하고 어두컴컴한 그야말로 마귀의 소굴 같은 그런 곳을 상상하시나요?

창세기 13장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이제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지요.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 쪽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이 기록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땅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큰 강을 점령하려고 전쟁을 벌이곤 했습니다만, 소돔과 고모라에는 이미 물이 넉넉했어요.

참으로 풍요로운 땅, 그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점차 죄로 물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세기 19장 24절~25절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そのとき、主は硫黄と火を、天から、主のもとからソドムとゴモラの上に降らせられた。
こうして主は、これらの町々と低地全体と、その町々の全住民と、その地の植物を滅ぼされた。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받은 땅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멸해버리고 마셨습니다.

로마서 11장 22절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2.ですから見なさい、神のいつくしみと厳しさを。倒れた者の上にあるのは厳しさですが、あなたの上にあるのは神のいつくしみです。ただし、あなたがそのいつくしみの中にとどまっていればであって、そうでなければ、あなたも切り取られます。”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아껴 주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셨습니다. 그토록 우리를 아끼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교만에 빠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자하심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꺾어 버리셨던 그 손으로 우리를 찍어 버리실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습하는 의미로 로마서 14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바울이 쓴 로마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 쓴 서한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형제자매들한테 쓴 글이에요.

그런데 그들한테 말하기를 우리도 다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심판을 받든 안 받든, 말하자면 유죄판결을 받든 무죄판결을 받든, 우리는 모두가 다 한 번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유죄냐 무죄냐, 말하자면 지옥이냐 천국이냐 하는 판결이 내려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말이 누구를 향한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신앙 속에서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빌립보서도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한입니다만, 사도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보다도 한참 못한 우리가 언제 여유를 부릴 새가 있겠습니까.


잠언 1장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준엄하심이 아닌 인자하심 속에 머물면서, 마지막 날에 한 사람도 남김 없이 구원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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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1회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2022년 10월 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3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9절~20절 전반부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19節∼20節 前半
“19.すると、あなたは「枝が折られたのは、私が接ぎ木されるためだった」と言うでしょう。
20.そのとおりです。彼らは不信仰によって折られましたが、あなたは信仰によって立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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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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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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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3번째 시간으로서 “접붙임을 위해 필요한 것” 接ぎ木のために必要な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무들의 가지를 접붙임 할 때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냥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나무에 갖다 대기만 하면 알아서 붙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접붙임을 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접붙임을 하려는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본래 나무에 있는 가지를 꺾은 다음에 거기에 접붙임 하려는 가지를 가져다가 연결을 하고 이를 단단히 고정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나무가 있어요. 거기에 제가 가지고 온 나뭇가지를 접붙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에서는 나뭇가지를 꺾어야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렇다면 어떤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건강한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다 죽어서 말라 비틀어진 가지를 꺾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건강한 가지를 꺾어야 합니다.


접붙임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 나무로부터 나오는 진액, 말하자면 그 영양분을 접붙임 하려는 나뭇가지로 하여금 받게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죽은 나뭇가지를 꺾으면 어떻게 됩니까. 말라 죽은 나뭇가지가 괜히 죽었나요? 그 이유는 본 나무로부터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니까 말라서 죽어버린 것이잖아요.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미 혈관이 죽어서 더 이상 피가 안 통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지요. 거기에 아무리 좋은 가지를 가져다가 접붙임을 해봤자 결국 말라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멀쩡한 나뭇가지를 꺾어 버리기가 아깝다고 해서 다 죽은 나뭇가지에다가 접붙임을 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나뭇가지를 꺾어야 해요? 그렇습니다. 건강한 가지, 튼튼한 가지……말하자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야지만 제대로 접붙임을 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7장 24절
“스스로 죽은 것의 기름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의 기름은 다른 데는 쓰려니와 결단코 먹지는 말지니라”

動物の死骸にある脂肪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動物の脂肪は、何に使っても差し支えない。しかし、決して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

레위기 17장 15절~16절
“15.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16.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

だれでも、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るなら、この国に生まれた者であれ寄留者であれ、自分の衣服を洗い、水を浴び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人は夕方まで汚れる。それから彼はきよくなる。
もし自分の衣服を洗わず、身に水を浴びないなら、その人は自分の咎を負う。」

레위기 22장 8절
“시체나 찢겨 죽은 짐승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死んだ動物や野獣にかみ裂かれたものを食べて汚れてはならない。わたしは主である。

이처럼 율법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죽은 짐승에 대해서 부정하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사람들은 절대로 스스로 죽었거나 들짐승한테 찢겨 죽은 것은 먹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죽거나 짐승들한테 찢겨 죽은 짐승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와 같은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선 스스로 죽은 것은, 늙어서 죽었는지 아니면 나쁜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에는 특히나 그 고기 안에 나쁜 균이 있는지 여부를 가려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먹는다는 것은 위생적으로 대단히 위험할 수 있었겠지요.

짐승들한테 찢겨 죽은 것도 그렇습니다. 무슨 짐승이 공격을 해서 죽였는 지도 알 수 없고, 그리고 그 공격한 짐승 안에 어떤 병균이 있었다면 그것이 옳겨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스스로 죽었거나 짐승들한테 찢겨 죽었다면, 이는 언제 죽었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요. 지나가다가 보니까 짐승이 죽어 있어요. 그렇다면 방금 전에 죽었는지 며칠 전에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고기가 부패되었기 때문에 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 또한 대단히 위험할 수가 있겠지요.

따라서 이와 같은 고기는 과학적으로 보나 위생적으로 보나 지금도 안 먹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굳이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단순히 우리 몸에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사실 더욱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앞서 말씀 드린 <희생>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의 전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희생>에 있어서의 대원칙은 바로 <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금전이나 아니면 가축 같은 재산을 비롯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인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통한 제물이 바로 <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기르고 있던 가축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죽었거나 아니면 다른 맹수들한테 죽임을 당한 짐승들은, 하나님께 바침으로 해서 손실이 발생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바치기 이전에 이미 손실이 발생을 했어요.

이런 것은 하나님께 바치든 안 바치든 어차피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어차피 버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하지만 이런 것은 부정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세요. 그 이유는 거기에 <희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하는 것이니, 까짓거 인심이나 쓰자 하는 식의 제물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옛날에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1장 8절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あなたがたは盲目の動物を献げるが、それ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足の萎えたものや病気のものを献げるの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か。さあ、あなたの総督のところにそれを差し出してみよ。彼はあなたを受け入れるだろうか。あなたに好意を示すだろうか。──万軍の主は言われる──

언제 죽었는지, 병에 걸렸는 지도 모르는 짐승, 이미 쓸모 없이 되어버린 짐승들을 그냥 버릴 바에야 하나님한테나 바치자 하는 식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병든 짐승들을 끌고 가서, 그걸 너희들 높은 사람한테 가져다 무슨 선물이라고 하면서 줘봐라. 그 받는 사람이 좋아 하겠느냐는 것이에요.

누가복음에 보시면 공생애를 하실 때 예수님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 전반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イエスは、働きを始められたとき、およそ三十歳で、……

공생이를 시작하실 때의 나이가 삼십 세 정도이시고, 그리고 공생애 기간을 신학자들은 대략 3년에서 3년 반 정도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시편 90편 10절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私たちの齢は七十年。 健やかであっても八十年。 そのほとんどは 労苦とわざわいです。 瞬く間に時は過ぎ 私たちは飛び去ります。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옛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30대 초반에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3년 반 정도 후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33~34세 정도에 죽음을 당하셨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어떻습니까. 남자 30대 초반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을 시작해볼 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기서 또 스스로 죽거나 맹수한테 이미 죽임을 당한 짐승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본다면, 그런 죽은 짐승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피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짐승도 그렇습니다만, 죽은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피가 몸 안에서 굳어져버립니다. 그리고 맹수한테 죽임을 당한 짐승이라면 벌써 피는 다 흘려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단 앞에서 짐승을 잡았을 때 피가 나온다는 것은 진정으로 거룩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말하자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피를 다 흘려 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しかし兵士の一人は、イエスの脇腹を槍で突き刺した。すると、すぐに血と水が出て来た。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다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더니 거기서도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 이보다 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접붙임을 위해서 가지를 꺾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도 귀한 예수님이라고 하는 가지를 십자가 위에서 꺾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지난 주에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를 공부했었지요. 본래는 돌감람나무 뿌리에 참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하는 것이 정상인데, 하나님께서는 돌감람나무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가져다가 참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뭇가지를 꺾으셔서, 거기에 우리를 접붙임 해주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자, 그렇다면 접붙임에 있어서 생각해볼 때, 꺾이는 것은 본 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가지 뿐입니까. 아니에요. 본 나무에 붙일 나뭇가지 또한 꺾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 나뭇가지를 접붙임하기 위해서는 참감람나무 나뭇가지도 꺾여야 할 뿐만 아니라, 돌감람나무의 나뭇가지도 꺾어야지만 그 나뭇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돌감람나무 나뭇가지가 꺾인다는 것은 돌감람나무 뿌리로부터 결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라고 하는 이름, 세상이라고 하는 이름, 불신앙이라고 하는 이름의 뿌리인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0절 전반부에 보시면 버림을 당한 나뭇가지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당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다. 즉 접붙임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돌감람나무의 뿌리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時が満ち、神の国が近づいた。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

그런데 우리는 이 회개에 대해서 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후회와 회개는 무엇이 다를까요.

저는 이 두 단어의 차이, 후회와 회개의 차이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 답을 얻었어요. 그리고 난 다음에 한참 지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제가 그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해서 간신히 답을 찾아냈다고 뿌듯해 했었는데, 국어사전에 보니까 너무나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제가 옳은 답을 찾아냈었구나 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국어사전을 찾아볼 걸”이라고 하는 좀 허탈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자, <후회>라는 단어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自分のしてしまっ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失敗であったとくやむこと。

그렇다면 <회개>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역시 국어사전에 의하면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過去の過ちを反省して心がけを変える。

이 차이를 아시겠어요?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

「後悔」は、自分のしてしまったことを、あとになって失敗であったとくやむこと。
「悔い改め」過去の過ちを反省して心がけを変える。

이 둘을 좀 알기 쉽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회개>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

「後悔は」は、悔やむこと
「悔い改め」は、悔やんで変えること

여기에서의 차이는 <고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것>과 <잘못을 고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건 쉽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기만 한 것>은 겉으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마음 속으로 한 것이 <뉘우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그 사람이 진짜로 뉘우쳤는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고치는 것>이 되면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겉으로 볼 수가 있어요. 알아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고치는 것> 즉 <회개>는 바로 행함, 실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행함이 아닌 그저 <잘못만 뉘우치는 것>에 머물고 만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누구는 “에이, 그래도 후회를 하게 되면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몇 번이나 다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후회만 한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후회>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적힌 지옥의 모습을 보십시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기 떨어진 사람들이 후회를 안 할 것 같습니까. 내가 지금 지옥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래 내가 그래도 세상에 살면서 나쁜 짓을 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만족해……라고 그러겠어요?


아닙니다. 아, 내가 괜히 그랬다. 괜히 죄를 짓고 괜히 남에게 상처를 주고 괜히 하나님을 욕하고 예수님을 안 믿고 그랬다……. 이렇게 지옥에 떨어져서 이처럼 고통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내가 죄를 짓지 말고 우리 주님과 이웃을 조금 더 섬겼을 텐데……이런 후회를 100% 다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죄라는 죄는 다 짓고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도 다 하는 그런 <후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기도를 해도, 거기서 끝나버리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 기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개입니까. 그렇습니다. 실제로 고쳐지는 것, 행함 곧 실천으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나뭇가지를 꺾으시고, 그 귀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해서, 이 돌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후회가 아닌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썩어져 가는 돌감람나무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예수님께 접붙임 되어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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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0회 부지런한 섬김
2022년 10월 2 설교 - 로마서 강해 102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6절~18절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16節∼18節
“16.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こねた粉もそうなのです。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なのです。
17.枝の中のいくつかが折られ、野生のオリーブであるあなたがその枝の間に接ぎ木され、そのオリーブの根から豊かな養分をともに受けているのなら、
18.あなたはその枝に対して誇ってはいけません。たとえ誇るとしても、あなたが根を支えているのではなく、根があなたを支えてい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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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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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2번째 시간으로서 “부지런한 섬김” 勤勉なる仕え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기본적으로 이방인을 향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장13절에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말을 한다고 선언하고 난 후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유대인이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 말씀을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단순한 대조만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를 우리가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6절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6.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こねた粉もそうなのです。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なのです。


우선 바울은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하고, 뿌리와 가지를 비교합니다.

곡식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했을 때 사람이 보기에는 당장 배를 채울 수 있는 떡덩이가 더 좋아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은 그 떡덩이를 만든 곡식가루가 더 거룩하다고 합니다.

특별히 처음 익은 곡식가루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첫 수확물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9절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最初に胎を開くものはすべて、わたしのものである。あなたの家畜の雄の初子はみな、牛も羊もそうである。

우리 앞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려고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를 가장 아끼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면, 누구한테 제일 좋은 것을 주는지를 살펴보면 되겠지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귀하고, 가장 값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을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수확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사실 제일 처음 얻은 수확물은 너무나도 귀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금광을 캔다고 생각해봐요.

자, 여기를 파면 금이 나온다고 해서 그 금광을 우리가 샀어요. 아주 비싼 돈을 주고 샀습니다. 여기서 금이 많이 나오면 부자도 될 수 있고, 그리고 이웃들도 많이 도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대 반 불안 반의 마음을 가지고 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와! 정말 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처음 난 금을, 자기 것으로 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웃한테 기부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것으로 먼저 하겠지요. 이게 나쁜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계속 파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나올지 모르잖아요?

정말 금이 듬뿍듬뿍 나와서 이제 내가 먹고 살기에 남아도 아주 많이 남을 정도가 되었어요. 이제 더 이상 채워 넣을 곳이 없어요. 그러면 이제 이웃에게 나누어 주거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금광을 캘 기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그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사업을 시작했어요. 아니면 우리가 취직을 했어요. 하지만 사업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게 정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몇 개월 못 가서 문을 닫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취직도 그렇습니다. 경기가 안 좋을 때에는 당장 취직을 했다고 해도 내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얼마 안 되어서 짤리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 열매를 바치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라고 하시겠습니까.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다 지으셨고, 그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첫 열매를 바치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받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가해보세요. 그와 같은 불안한 상황에서 첫 수확물 즉 첫 수입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주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 3장을 봅니다.

잠언 3장 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あなたの財産で主をあがめよ。あなたのすべての収穫の初物(はつもの)で。

이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몇 푼 안 되는 첫 수확물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 믿음의 손길을 받으시겠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뿌리와 가지는 어떻습니까. 가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무엇보다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지만 뿌리는 어때요? 일단 기본적으로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파보면 거기에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보기도 좀 아름답지가 않아요.

그렇다면 뿌리에는 값어치가 없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지요.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자라나지 못합니다. 꽃도 못 피우고 열매를 맺지도 못하지요.

꽃집에서 아름다운 꽃을 사옵니다. 그것을 사다가 꽃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아 놓지요. 그러면 며칠은 갑니다만, 얼마 못 가서 시들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뿌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는 몰라도, 뿌리가 없다면 결국 꽃도 피우게 할 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처음 익은 곡식가루와 떡덩이를 비교해보았을 때, 떡덩이보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더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값어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믿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더욱 거룩한 것이요, 그리고 뿌리와 가지를 비교해 왔을 때,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값진 열매를 맺게 하는 가지라 한다 하더라도 뿌리가 없으면 꽃도 피울 수 없고 열매도 맺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가지보다 뿌리가 더욱 거룩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7절에 보시면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가 나옵니다. 감람나무라고 하는 것은 올리브 나무를 뜻하는데, 쉽게 말해서 돌감람나무는 야생이고 참감라나무는 귀하게 가꾸어진 값진 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참감람나무는 귀하기 때문에 빨리 자라게 하고 싶은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하냐 하면 참감람나무 가지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임을 한다고 합니다.

어차피 뿌리는 똑같잖아요. 영양분을 끌어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능은 야생 올리브나무나 값진 올리브나무나 같아요. 그러니까 이미 많이 자라서 튼튼한 뿌리가 있는 야생 올리브나무를 찾아서, 거기에 값진 참올리브나뭇가지를 접붙임 하게 된다면 손쉽게 귀한 올리브를 수확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떻습니까. 이를 보면 완전히 반대입니다. 값어치가 없은 야생 올리브나무에 값진 참올리브나뭇가지를 접붙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참올리브나무 뿌리에 야생올리브나무가지를 접붙임 했다는 것이에요.

이건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아니, 기껏 값진 참올리브나무가 있어서, 가만히 놔두면 거기서 귀한 올리브 열매를 거둘 수 있는데, 굳이 거기에 야생올리브나무가지를 접붙임 해요? 이는 누가 보아도 상식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나요? 저를 포함해서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그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는 1차적으로 본다면 참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감람나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가지를 접붙임 하게 되어서, 참감람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돌감람나무가 받도록 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는 축복과 구원을 이방인에게도 받도록 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가 공부해 본 바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이방인이 믿게 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인에게 믿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이방인이 대단히 의로워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의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자신들이 더 의로워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참감람나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그 뿌리로 하여금 이방인이라고 하는 돌감람나무도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올라가버리는 식의 엉뚱한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우선 16절에서 보면 <처음 익은 곡식 가루>(麦の初穂)가 나옵니다. 즉 이는 처음 얻어진 수확물, 처음 얻어진 열매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しかし、今やキリストは、眠った者の初穂として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れました。

하나님은 열매를 거두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에서 벗어나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이며, 그 첫 열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열매에 대한 말씀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만, 오늘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道端に一本のいちじくの木が見えたので、そこに行って見ると、葉があるだけで、ほかには何もなかった。それでイエスはその木に「今後いつまでも、おまえの実はならないように」と言われた。すると、たちまちいちじくの木は枯れた。

마가복음 11장 13절~14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예수님께서는 잎사귀가 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열매를 얻지 못하셨어요. 그 이유가 뭐래요? 예, 무화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열매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나무가 말라 버려서 이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완전히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배가 고파서 열매를 따려고 갔더니, 열매가 없어서 예수님이 성질을 내신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를 잘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 첫째로 예수님은 열매를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보셨겠지요. 셋째로 예수님은 어떤 무화과나무에 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넷째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왜 그 나무, 어떤 한 무화과나무한테로 가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가복음 11장 13절 앞부분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마가복음 11장 13절 전반부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한테 가신 이유는 그 잎사귀가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멀리서 보았는데도 잎사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니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렇다면 왜 잎사귀가 않은 것을 보시고 무화과나무에 가셨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의 특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지만 벚꽃이 만발하지요? 봄에 꽃이 필 때를 보시면, 잎사귀가 아니라 우선 꽃이 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잎사귀가 돋아나지요.


무화과의 경우를 보면 희한한 것이 봄이 되면 잎사귀가 나기 전에 열매부터 맺힌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정말 이파리가 없는 앙상한 나무 가지에 무화과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열매가 맺힌 다음에 이제 잎사귀가 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뭐예요? 예, 당연히 거기에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 저렇게 잎사귀가 무성 하다면 당연히 먹음직한 열매도 많이 있겠구나 짐작하시고 다가가셨는데, 막상 나무를 살펴보셨더니 정작 먹을만한 열매는 없고, 먹지도 못하는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이에요.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나무는 아무데도 쓸 모가 없는 나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하셨다는 뜻인 것이지요.

열매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잎사귀라도 없었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잎사귀들은 많았지만 정작 쓸모가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이와 같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디에 접붙임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기 중동에 있는 먼 나라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접붙임을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枝です。人がわたしにとどまり、わたしもその人にとどまっているなら、その人は多くの実を結びます。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요한복음 15장 8절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あなたがたが多くの実を結び、わたしの弟子となることによって、わたしの父は栄光をお受けになります。


우리가 접붙임을 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고 하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열매는 없고 온갖 잎사귀 투성이는 아니십니까. 교회에 오래 다니고 이런저런 잎사귀는 많이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취하실 만한 열매는 없는, 그런 인생을 보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5장을 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14절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あなたがたは、年数からすれば教師にな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にもかかわらず、神が告げたことばの初歩を、もう一度だれかに教えてもらう必要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固い食物ではなく、乳が必要になっています。
乳を飲んでいる者はみな、義の教えに通じてはいません。幼子なのです。
固い食物は、善と悪を見分ける感覚を経験によって訓練された大人のものです。


아기들을 보세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집안 일을 하겠어요. 아니면 나가서 돈을 벌어 오겠어요. 주변에서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아요. 그저 주는 젖을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이제 스물이 되고 서른, 마흔이 됩니다. 몸도 어디 하나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정도 되었으면 이제 나가서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맨날 집에서 주는 젖이나 먹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게 정상입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되면 괜찮아요. 그런데 교회도 오래 다니고 그랬는데도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해요. 맨날 교회가 나한테 뭘 해주길 바라고, 이웃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래요. 내가 먼저 교회나 이웃을 섬기지를 않아요.

그건 뭐예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인데, 여전히 목에 아직 탁받이나 하고 장난감 젖꼭지나 입에 물고 집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과 뭐가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쉽게 말하면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성경에 보면 이 게으른 사람을 참 흥미롭게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 26장 15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怠け者は皿に手を伸ばしても、その手を口に持って行くのを面倒がる。

게으른 사람은 먹을 것이 있는 그릇에 손을 넣고도 그걸 집어서 입에 넣기도 귀찮아 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것도 챙겨주고 저것도 챙겨줍니다. 초신자 때에는 그냥 교회에 와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열매를 맺지 못해요. 생활이 바뀌지 않아요. 믿음 생활은 그냥 취미로 생각해요. 맨날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고, 하나님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라고, 이웃이 나한테 뭘 해주기만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뻑하면, 내가 교회에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알아? 내가 직분이 뭔지 알아? 내가 몇 대째 목사 장로 권사인지 알아?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이게 뭐예요? 그렇습니다. 다 잎사귀에요. 주님께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잎사귀들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믿음 안에서 게으른 사람의 모습입니까.

마태복음 25장 26절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누가복음 3장 9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斧もすでに木の根元に置かれています。だから、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すべて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저도 부지런한 편은 아닙니다. 좀 빠릿빠릿 하게 일처리도 그때그때 잘하면 좋겠는데, 자꾸 미루게 되고 게을리하게 됩니다. 이 설교 준비도 좀 미리미리 해두면 좋을 텐데 오늘 이 말씀도 오늘 아침 새벽 5시쯤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인간적인 게으름이 아니에요. 신앙적인 게으름입니다. 신앙적인 게으름은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게으름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꾸짖고 계시고 마지막 날에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잎사귀 같은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걸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勤勉で怠らず、霊に燃え、主に仕えなさ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나무에 접붙임 되어서,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부지런한 섬김을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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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59회 기다리시는 주님
2022년 9월 25 설교 - 로마서 강해 101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5절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5節
“15. もし彼らの捨てられることが世界の和解となるなら、彼ら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死者の中からのいのちでなくて何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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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1번째 시간으로서 “기다리시는 주님” 待た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후에 보시면 이른바 돌아온 탕자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교회에 몇 년 다녀 보신 분들이라면, 아니, 교회에 다녀보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많은 분들이 익히 알고 계신 내용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오늘은 함께 자세히 살펴보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을 함께 나누면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깨달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성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는 한 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 신약성경 121페이지가 되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24절까지인데, 우선 세 곳으로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절~14절에서 14설까지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14절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1 イエスはまた、こう話された。「ある人に二人の息子がいた。
12 弟のほうが父に、『お父さん、財産のうち私がいただく分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財産を二人に分けてやった。
13 それから何日もしないうちに、弟息子は、すべてのものを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財産を湯水のように使ってしまった。
14 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後、その地方全体に激しい飢饉が起こり、彼は食べることにも困り始めた。

여기에 보시면 세 사람이 등장하지요. 아버지와 두 아들 그러니까 첫째와 둘째입니다.

그런데 둘째가 어느 날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자기에게 물려줄 상속분을 미리 달라고 말합니다. 보통 아버지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 배우자나 자식들이 상속을 받는데,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을 몫을 달라고 아버지한테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둘째를 너무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좀 이 둘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한 번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자신에게 물려줄 몫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게 나쁜 것인가 하면, 아나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를 생전증여라고 해요. 상속이라고 하는 것은 돌아가신 다음에 발생하는 것이지만, 증여는 생전에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보고 둘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왜 아버지에게 생전증여를 요구했을까요. 정말로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유흥비로 펑펑 써버리고 싶어서였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주목해 볼만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둘째가 이와 같은 요구를 했을 때 아버지가 이를 금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보았을 때 정말 이 둘째한테 나쁜 버릇이 있어서, 정말 그가 요구하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면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 둘째의 요구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둘째에게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정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쁜 곳에 펑펑 써버리고 말았을까. 저는 여기에 대해서도 편견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둘째의 아버지는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 대단히 큰 부자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렇잖아요. 일반 서민층이라고 한다면 자식이 아버지한테 자기 상속분을 먼저 달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아버지는 대단한 거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요즘 식으로 본다면 대기업 정도 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 둘째가 아버지의 하는 방식을 보니까, 좀 불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요.


지금은 아버지처럼 가축을 사들일 게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보아서 송아지보다는 양들을 더 많이 매입을 해서 키우면 나중에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서 이건 아버지처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대로 이렇게 해야 하는데……그와 같은 불만이 이 둘째한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이 둘째가 아버지의 재산을 속여서 빼앗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이 아버지 사업 방식에 대해서 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걸 가지고 꼭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그 동안 몇 번이나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무지 자기 의견을 들어주지 않아요. 그래서 참다못해 아버지한테 말하기를, 아버지, 이제는 제가 나이도 먹었고 하니 제 방식대로 사업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세요.

뭐,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에 대해 아버지도 납득을 하고 그래, 그러면 내가 네 몫을 줄게, 한 번 해봐라……라고 허락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이제 둘째는 거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집 근처에서 할 수는 없잖아요. 괜히 가까운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기껏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니까 아예 멀리 갔는지도 모릅니다.

자, 이제 먼 나라로 왔습니다. 이 정도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가 있어요. 그럼 무엇부터 할까. 그래, 일단 회사 건물을 알아 봐야겠지요. 괜히 변두리 자리를 잡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사나이가 이왕 시작하는 것, 도시 중심에서 깃발을 꽂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만한 자금력은 충분히 되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이제 사장 아들이 아니라 본인이 사장님이에요. 그러면 이제 옷도 좀 새로 맞춰야죠. 구질구질하게 입으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업을 하려면 사교계에도 진출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아버지는 맨날 회사에서 일만 했는데, 요즘은 사업을 하려면 인맥이 있어야 돼. 그러면 파티도 참석해야 하고 골프도 쳐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래서 아주 멋진 옷도 갖추고, 고급 파티도 갔습니다. 물론 골프채도 제일 비싼 걸로 샀지요. 일단 그 정도 돈은 아버지한테 받았거든요.

자,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상류층들, 셀럽들이 모이는 파티장이나 골프장에 버스나 전철 타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자동차도 사야 하는데, 그런 셀럽들 사이에 끼려고 하는데, 경차나 중고차를 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 부유층 사람들과 비교를 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의 고급 자동차도 샀습니다.

자,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이 둘째 아들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까. 물론 좀 소비가 지나쳤다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받은 돈도 그 정도 있고 뭐 그런 상황인데, 고급 옷이나 차를 샀다거나 아니면 골프를 치거나 파티장에 간다는 것이 무슨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없잖아요.

누가복음 15장 30절에 보면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둘째 아들이 아버지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렸다고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첫째 아들의 상상이죠. 그 동안 먼 나라에 있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직 만나지도 못했는데, 동생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를 형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제 동생은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자본금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가 했던 그런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하자면 정보화 시대에 맞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다방면으로 멋지게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지, 자신의 생각대로 잘 굴러가지 않아요. 여러 인맥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분석해서 투자를 했는데, 어찌 된 게 내가 증권을 사면 떨어지고, 팔았다 하면 올라요. 부동산도 구입을 했더니 무슨 규제에 묶이게 되고, 마침 또 그 때 외환시장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어떻게 된 게 손을 대는 것들이 모두 손해를 보게 됩니다.

분명 다시 기회가 있을 거야. 다시 일어서고 말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는데,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안 좋아집니다. 이제 빚이 늘어갑니다.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되었어요. 이제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회사나 자동차 같은 모든 재산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나라 상황이 그나마 괜찮다면 어디 취업이라도 해보겠는데,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잖아요. 경제는 좋은데 자기만 망했다면 일자리도 있었겠지요. 월급을 받으면서 빚도 갚고 근근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상황도 말이 아니에요. 말하자면 대공황이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그곳은 먼 나라였잖아요. 그렇잖아도 일자리가 없는데 이왕 사람을 구한다면 내국인을 먼저 뽑지 외국인을 먼저 뽑을 리는 만무합니다.

다음으로 15절~1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19절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 それで、その地方に住むある人のところ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送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16 彼は、豚が食べてい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だったが、だれも彼に与えてはくれなかった。
17 しかし、彼は我に返って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なんと大勢いること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ようとしている。
18 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こう。そし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
19 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一人にしてください。」』

여기서 15절을 보시면, 이 둘째가 있었던 곳이 아버지 집으로부터 단순히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완전히 외국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이제 이 둘째는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었는데 간신히 얻은 것이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서 돼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젖이나 가죽을 얻기 위해서 기를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돼지의 경우를 본다면 먹지 못한다면 달리 기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둘째가 머물고 있었던 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정말 산 설고 물 설은 완전 남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문득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해왔던 방식이 옳았는지 모른다. 괜히 내 생각대로 했다가 다 말아먹게 되었다……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지. 여기서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꿈꿔왔던 금의환향, 그 동안 나를 무시했던 아버지나 형님한테 보란 듯이 성공해서 집으로 돌아갈 테야.

하지만 그러다가 결국 밑바닥 중에서 완전히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젠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는 키우키는커녕 불결한 짐승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돼지들을, 먹고 살기 위해서 애지중지 돌보아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그 돼지 먹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그것조차도 먹지 못해요. 말하자면 자기 신세가 그 불결하게 여겼던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야, 정말 멋진 꿈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사람은 고사하고 돼지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었구나. 차라리 아버지한테 돌아가자. 지금 내 몰골이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보다 못하지 않냐.

그러면서 이제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20절부터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24절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0 こうして彼は立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へ向か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て、かわいそうに思い、駆け寄って彼の首を抱き、口づけした。
21 息子は父に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あなたの前に罪ある者です。もう、息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22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24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이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가 외국으로 갈 때에는 몇 대나 되는 마차를 끌고서 제일 멋진 말을 타고서는 편안하고 우아하게 출발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꼼짝없이 걸어갈 수 밖에 없어요. 그것도 한 두시간이 아닙니다. 먼 나라 외국에서 아버지 집까지는 몇 날 며칠을 가야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이제 멀리 아버지 집이 있는 동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글쎄요. 여기 군마가 아버지 집이었다고 한다면, 저 멀리 군마현청이 보여옵니다. 이제 지친 몸을 끌고 걸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 달려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만약에 집 근처까지 갔을 때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했다면 우연히 맞닥뜨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집에 가까이 간 것도 아니에요. 아직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둘째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죠.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딸이 집을 나갔는데, 그 딸의 어머니가 언제 돌아와도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끼니때마다 밥을 차리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돌아왔는데 집이 없어지면 못 찾아 올까봐 이사도 안 가고 기다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쩌면 둘째는 집으로 돌아오는 그 몇 날 며칠 동안,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몇 번이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말로 용서를 빌까. 어떻게 말씀을 드리면 나를 받아 주실까.

아버지가 달려오자 아들은 몇 번이고 되뇌인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너 이 자식아 그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많던 돈은 다 어디에 쓰고 이런 꼴로 돌아왔어? 돈은 얼마나 남은 거야? 등등……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물어볼 것이 많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다고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15장 22절~23절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2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衣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手に指輪をはめ、足に履き物をはかせなさい。
23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屠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

아버지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가 아무리 돈을 탕진했다 하더라도 아버지 집은 여전히 풍족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합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이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도록 하라고 종들한테 명합니다만, 아들이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주시는 최고급 옷도 좋지만 이 누더기도 버릴 수 없습니다. 순금반지도 좋지만 철사로 만들어진 반지도 끼고 있을래요. 비싼 신발은 이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신을래요……이러면 되겠습니까.

아니죠. 새롭게 좋은 옷을 입기 위해서는 옛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싸구려 가락지들을 주렁주렁 끼고 있었다면 이를 빼 버려야지 아버지가 주시는 가락지를 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발은 더하지요. 그 먼 거리를 걸어오느라고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벗어버려야지만 아버지가 주시는 최고급 신발을 신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옷만 입으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맨날 너덜너덜한 추리닝 차림으로 다니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헌 옷인데, 뭐가 묻으면, 대충 쓱쓱 문지르거나 어디든지 그냥 땅바닥에 앉아도 상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최고급 정장을 입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여기저기 아무데나 앉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이제 몸가짐도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락지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내가 이제 큰 일을 맞게 되었는데, 예전처럼 동네 건달처럼 행동해서 되겠습니까. 무슨 욕이나 상스러운 말들을 내뱉어서야 되겠냐 하는 말이에요. 그 주어진 권위에 걸맞는 말과 행동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발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최고급 신발이 아니더라도 새신발을 사 신으면 적어도 그 날은 어떻습니까. 그 깨끗한 신발을 신은 채로 진흙탕에 들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옛 옷들을 입고 있었습니다. 옛 가락지와 낡아빠진 신발들이 제일 좋은 것인 줄 알고, 그것 하나 놓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거리며, 그런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바로 세상적인 생각이자 세상적인 교만인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세상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교만을 끝까지 고집 했었더라면,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요, 아버지가 주는 새 옷과 새 가락지, 새 신발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생각,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맞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끌어안은 아버지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복음 15장 24절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に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に見つかったのだから。』こう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5절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もし彼らの捨てられることが世界の和解となるなら、彼ら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死者の中からのいのちでなくて何でしょうか。

여기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먼 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한 덕분에 아버지를 다시 알게 되고 새사람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인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보고 시기하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죽은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주님 앞에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その教えとは、あなたがたの以前の生活について言えば、人を欺く情欲によって腐敗していく古い人を、あなたがたが脱ぎ捨てること、
また、あなたがたが霊と心において新しくされ続け、
真理に基づく義と聖をもって、神にかたどり造られた新しい人を着ることでした。

우리는 이제 옛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 옷을 입을 수 있고, 새 가락지를 끼울 수 있고, 새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잘못될 수 있어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보다 아들 생각이 더 맞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틀리고 우리가 맞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어요. 우리는 공의롭고 진리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옳은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날을 저 멀리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에게 주실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예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기다려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차례입니다.

낡은 생각, 낡은 고집, 낡은 자존심을 벗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믿음, 새로운 말씀, 새로운 행함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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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58회 마음 속의 우상
2022년 9월 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00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13절~14절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1章13節~14節
“13.そこで、異邦人である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が、私は異邦人への使徒ですから、自分の務めを重く受けとめています。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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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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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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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00번째 시간으로서 “마음 속의 우상” 心の中の偶像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しかし、主はアナニアに言われた。「行きなさい。あの人はわたしの名を、異邦人、王たち、イスラエルの子らの前に運ぶ、わたしの選びの器です。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그래 뭐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력이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청년관료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탄압 했었다는 과거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 들여졌을까요. 이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공생애 기간 중 유대교의 당시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백성들을 따뜻하게 대하였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해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심하게 꾸짖으신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잘못됐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거나 바꾸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다면, 그러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잘못이 없고 예수님도 잘못이 없고, 그리고 율법도 잘못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잘못의 원인은 바로 그들, 당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자기들 생각에 맞추어서 마음대로 해석을 한 다음, 그것을 백성들에게도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냐 하면 말씀에 변질이 생깁니다.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순수한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 빛은 1000년 전이나 1000년 후나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은 모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변하고 녹이 슬고, 끝내는 그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고철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금이라고 한다면, 순금 중의 순금인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자신들은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던 종교지도자들은 그 순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수많은 불순물로 인해서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른바 가톨릭에 대해서 기독교를 개신교라고 하지요. 그래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교회가 생겨났고, 그 명맥을 가톨릭이라고 한다면, 우리 기독교는 1517년 종교 혁명 때 탄생한, 아직 500년도 안 된 새로운 종교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과연 그런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신데,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마틴 루터입니다만,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카톨릭 사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카톨릭의 가르침을 보면 볼수록 어딘가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여기에 자꾸 사람의 생각, 사람의 주장, 사람의 전통 등이 들어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해서 그가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생각, 사람의 주장, 사람의 전통이라고 하는 불순물로 인해서 변질되었던 믿음에서 벗어나, 변질되기 이전인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가 신교라기보다는 오히려 구교보다도 훨씬 이전, 변질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잖아요. 그는 직접 예수님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고, 또한 철저한 유대교 교육을 받았던 그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전히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잡아들이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제 예수님의 부름을 받게 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되자,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동안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한 유대인들, 그리고 다름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성경을 크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순금이고 예수님이 불순물이 섞인 금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들은 형편없는 고철덩어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순금 중의 순금, 완전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ことば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するものです。私はその罪人のかしらです。

그래서 그는 자신이야말로 참된 믿음을 가진 의인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 의인이는커녕 죄인 그것도 죄인 중에서 괴수였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리고 이방인들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데, 이 길은 대단히 험난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고철덩어리한테 고철덩어리라고 하면 듣는 고철덩어리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일반 서민층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당신들의 생각들 틀렸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이는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바울도 유대인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그야말로 힘든 사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뿐만 아니라 그는 이방인에게도 가야 했습니다.

바울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쉽지요. 유대인이 아니면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이방인이라면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이사야서 44장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사야 44장 13절~18절
13.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곡선자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집에 두게 하며
14.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3.木で細工する者は測り縄で測り、朱で輪郭をとり、かんなで削り、コンパスで線を引き、人の形に造り、人間の立派な姿に仕上げて、神殿に安置する。
14.杉の木を切り、うばめ樫(がし)や樫の木を選んで、林の木の中で自分のために育てる。月桂樹を植えると、大雨がそれを生長させる。
15.それは人間のために薪(たきぎ)になり、人はその一部を取って暖をとり、これを燃やしてパンを焼く。また、これで神を造って拝み、これを偶像に仕立てて、これにひれ伏す。
16.半分を火に燃やし、その半分の上で肉を食べ、肉をあぶって満腹する。また、温まって、『ああ、温まった。炎が見える』と言う。
17.その残りで神を造って自分の偶像とし、ひれ伏してそれを拝み、こう祈る。『私を救ってください。あなたは私の神だから』と。
18.彼らはよく知りもせず、理解もしない。その目はふさがれていて見ることもできず、その心が賢くなることはない。


사람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그것을 베어 가져와서, 추울 때에는 그걸 땔감으로 해서 장작불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리고 일부는 그 나무들로 불을 일으켜서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그리고 나머지로는 조각을 해서 그걸 신이라고 하면서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 소원을 빈다는 것입니다.

아니, 땔감으로 썼던 장작이나,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었던 나무나, 우상을 만든 나무나, 그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에요. 똑 같은 나무에요. 이런 말을 하면, 아, 그 조각에는 만드는 사람이 혼을 불어넣는다……뭐 그런 표현을 씁니다만, 아니, 혼을 불어넣는 건 아무나 합니까.

혼을 불어 넣는 것은 누가 할 수 있어요? 그렇죠. 하나님이 하셨던 일입니다. 사람은 혼을 불어 넣을 수가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혼을 불어넣었다면 살아서 움직여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나무나 돌 우상이 움직입니까.

그리고 백 보 양보 해서 정말 사람이 그 우상에게 혼을 불어넣어서 그 우상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되었다면, 그 우상이 대단해요? 아니면 그 우상을 만든 사람이 대단해요? 당연히 그 우상을 만든 사람이 더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구원할 신을 만든 사람인데.

그렇다면 그 우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만든 사람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세상에, 신을 만든 사람인데 말이에요.

사람이 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그냥 그만큼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혼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지요.

이 이사야서는 대략 기원전 70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그로부터 2700년이 지난, 21세기의 지금도 역시 이처럼 우상을 섬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은 이 우리의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우상이 아니라 조금 다른 우상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그 이전에 오늘 본문 중에서 14절을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자, 여러분이 이방인이라고 합시다. 이방인인데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와서 여러분께 말합니다. 복음이 왜 당신한테 전해지게 되었고, 당신이 왜 구원을 받게 된 줄 알아? 그건 말이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질투 나게 하기 위해서야.

만약에 이런 말음 들었다고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까요?

“아니, 무슨 소리에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셔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거예요.”

그러자 바울이 말합니다.

“알아. 그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복음이 너한테까지 전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방인인 네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질투를 일으키게 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좀 어떻게 구원 받게 하려고 한 거야.”

물론 여러분께서는 인간성이 좋으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제가 만약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저한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바울이라 하더라도 좀 마음이 안 좋았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 좀 삐졌을 것 같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게 알고 보면 상당히 골치 아픈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존심,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이 이상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존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나 자신을 존중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에요.

예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때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논하고 신앙을 가르치면 껌뻑 죽고 순종을 하는데, 고작 서른 정도 밖에 안 된 젊은 사람 입에서 율법이 막 나오고 성경이 나오는데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어요.

자기들이 생각해도 그 말에서 모순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자기들이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들의 주장이 모순처럼 느껴지게 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했어요?

마가복음 3장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パリサイ人たちは出て行ってすぐに、ヘロデ党の者たちと一緒に、どうやっ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た。

그렇습니다. 그들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마음이 거룩한가요? 우리 마음이 거룩하다면 우리가 가진 자존심 또한 거룩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거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12절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悟る者はいない。神を求める者はいない。
すべての者が離れて行き、だれもかれも無用の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だれ一人いない。」

여러분, 우리 마음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거룩하기만 합니까. 사실 알고 보면 그 마음 안에는 얼마나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까.

마가복음 7장 20절~23절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イエスはまた言われた。「人から出て来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内側から、すなわち人の心の中から、悪い考えが出て来ます。淫らな行い、盗み、殺人、
姦淫、貪欲、悪行、欺き、好色、ねたみ、ののしり、高慢、愚かさで、
これらの悪は、みな内側から出て来て、人を汚すのです。」

아무리 우리 자존심이 거룩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 자존심은 마치 거룩해 보이는 나무 신상이 알고 보면 땔감에 쓰이는 나무와 같은 것처럼, 우리의 자존심도 우리를 더럽게 하는 마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자존심이 안 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4.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이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 나에게로 온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れば、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만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아브라함이 무슨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기 위해, 그 당시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 대신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あるとおりです。

자, 오랜만에 그 질문 한 번 여쭈어볼까요?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구원 받을 자격,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귀한 자격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이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로 여겨 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예수님 근처에도 갈 자격도 없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값없이 의롭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그 부족한 자존심이라고 하는 우상을 벗어버리고, 내가 잘나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넘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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