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회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
2023년 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7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로마서 14장 4절 |
한국어 동영상 |
마가복음 9장 41절 |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7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私たちが高められる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2023/03/28'에 해당되는 글 6건
- 2023.03.28 [설교동영상/본문] 제386회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 2023.03.28 [설교동영상/본문] 제385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 2023.03.28 [설교동영상/본문] 제384회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 2023.03.28 [설교동영상/본문]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1
- 2023.03.28 [설교동영상/본문] 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 2023.03.28 [설교동영상/본문] 제381회 채워야 하는 것
제385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 |
2023년 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6 | |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로마서 14장 1절~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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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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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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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4회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 |
2023년 3월 12일 설교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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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
마태복음 25장 21절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マタイの福音書 25章 21節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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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동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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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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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良い忠実なしもべの要件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은 좀 길지만 우리에게는 친숙한 내용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14.天の御国は、旅に出るにあたり、自分のしもべたちを呼んで財産を預ける人のようです。 15.彼はそれぞれその能力に応じて、一人には五タラント、一人には二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て旅に出かけた。するとすぐに、 16.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それで商売をし、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た。 17.同じように、二タラント預かった者も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た。 18.一方、一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地面に穴を掘り、主人の金を隠した。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20.すると、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が進み出て、もう五タラントを差し出し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五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私は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2.二タラントの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二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3.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4.一タラント預かっていた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あなた様は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厳しい方だと分かっていました。 25.それで私は怖くなり、出て行って、あなた様の一タラントを地の中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これがあなた様の物です。』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본문에 의하면 어느 한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종들에게 종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고는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하지요? 세 종에게 맡기기를 한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그리고 마지막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에, 그저 종들에게 금화, 그러니까 금으로 된 동전 다섯 개, 두 개, 그리고 한 개……이 정도로 나누어준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된 그림도 많이 봐왔었거든요. 하지만 이 달란트라고 하는 것이 동전 한 두 개 정도가 아니더라고요. 옛날과 지금의 화폐가치가 좀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당시 금 한 달란트가 지금의 환율로 얼마가 된다고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한 달란트>라고 하는 무게는 대략적으로 26킬로에서 30킬로 정도라고 합니다. 뭐, 그럼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1 달란트를 30킬로라고 하지요. 그러면 금 한 달란트가 금 30킬로라는 뜻이 되겠지요? 요즘 금 시세를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금이 참 많이 올랐더라고요. 금 1그램, 킬로가 아니라 1그램에 한국돈 10만원 정도, 일본돈으로는 1만엔 정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1000그램이 1킬로잖아요. 단순계산으로 1그램을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는 10만원의 1000배, 그러니까 1억원이 됩니다. 이게 1킬로예요. 그러면 1달란트를 30킬로로 계산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30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30억원이 1달란트예요. 그럼 여기에 보시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종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이 계산으로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150억원과, 60억원과 30억원을 맡겼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마지막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아니에요. 30억원이나 되는 큰 재산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그냥 아무한테나 그와 같은 큰 돈을 맡겼겠어요? 그것은 바로 그만큼 신임을 한 종한테 맡겼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주인이 이처럼 큰 돈을 맡기고 떠났다고 하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돈만 맡기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 점부터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회사에서 본다면 여러 직급이 있겠지요? 직원으로 본다면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그리고 그 위에는 임원이 됩니다. 큰 회사는 이사, 상무, 전무, 대표……등이 되겠지요. 그럼 본문에 나오는 주인을 대표라고 한다면, 여기에 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까요. 아무리 큰 기업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대리나 과장 정도 되는 사람한테 30억이나 60억, 150억이나 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어요? 그 정도의 돈에 대한 재량을 맡긴다면 아무리 못해도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좀 멀리 다녀와야 하는데, 그 동안 자, 이 정도 돈을 맡겨놓겠소. 그리고 주인이 떠나갔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왜 그 용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큰 돈을 신입사원한테 맡겼습니까. 아니에요. 직원도 아닌 임원들한테 맡긴 것입니다. 그 정도 되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지금 회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나 두 달란트 맡은 종은 굳이 주인한테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묻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이 자기한테 맡긴 그 범위 내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요. 그 결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이윤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본 주인의 평가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 대한 평가가 글자 하나 차이 없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21절과 23절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한 달란트를 30억원이라고 한다면, 다섯 달란트는 150억원, 두 달란트는 60억원이었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60억원을 남긴 종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는 150억원이나 이윤을 남긴 종이 더 칭찬을 받을 만한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 같이 칭찬을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150억도 큰 돈이요 60억도 큰 돈이지만, 150억을 맡은 사람이 훨씬 더 큰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150억 맡은 사람도 60억 맡은 사람도 똑같이 두 배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둘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사업을 했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한 달라트를 받은 종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땅속에 묻어놓았던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 종은 왜 그 많은 돈을 쓰지 않고 땅속에 묻어 놓았을까요. 단순히 사른 사람들보다 장사를 할 능력이 안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그렇게 큰 돈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상무나 전무 정도는 되는 임원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자리에 앉힐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주인이 그렇게 큰 돈을 맡겼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이 한 달란트를 맡은 종도 마음만 먹으면 다른 종들처럼 두 배로 늘릴 만한 능력이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충분히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불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왜 저 사람한테는 150억, 60억 씩이나 맡기면서 나한테는 30억만 주는 거야? 내가 저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 뭔데? 흥. 웃기고 있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 결과 그는 말하자면 항의의 표시로 일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27절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이 말씀이 좀 어렵다면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좋아. 네가 일을 하기 싫으면 차라리 은행에 맡길 수도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러면 내가 이자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너는 그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종이 그 정도도 몰랐을까요? 아니, 상무나 전무도 있을 정도로 큰 회사 임원인데 몰랐어요? 아니에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았는데도 왜 안 했어요. 이유는 단 하나에요.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회사에 손해를 입히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장님은 그에게 30억이나 되는 큰 돈을 맡길 정도로 신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임을 그 종은 배신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30절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결국 그는 그나마 있던 것마저도 다 빼앗겨 버리고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익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럼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말 잘 듣는 종이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주인이 무슨 명령을 했다는 말씀이 없잖아요. 그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충성된 종>이라는 뜻은 어떤 종입니까. 이를 쉽게 알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이와 반대되는 말을 살펴보면 알기 쉽습니다. <충성된 종>의 반대말은? 예, <무익한 종>이지요. 그러면 <무익하다>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익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충성된 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유익한 종>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면 누구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자기를 신임해주고 자기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8장과 누가복음 15장에 보시면 잃어버린 어린 양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대요.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양이 열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은 것이 아니에요. 백 마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럼 이 목자는 한 마리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무리 능숙한 목자라 하더라도 똑같이 생긴 양들이 백 마리가 있는지 99마리가 있는지는 한 눈에 보고 알아차리기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작년에 일본 뉴스를 보니까 그 여름날에 유치원 스쿨버스 안에 어린 아이들을 방치해 두었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여기저기서 발생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무슨 큰 학교도 아니고 유치원 스쿨버스라고 하면 커 봤자 아이들 40명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다 내렸는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는 문을 잠과 버려서, 결국 버스에 갇혀서 아이들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50명도 안 되는 아이들도 방심을 하면 이렇게 놓칠 수가 있는데 100마리나 되는 양이라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면 이 목자는 거기 있는 양들이 100마리가 아니라 99마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그렇죠. 이는 분명 세어보았기 때문에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 세어보았을까요? 아니요.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와서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세어봅니다. 초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세어봅니다.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동안에도 세어보고, 돌아오기 전에도 세어보고, 그리고 돌아온 다음에도 세어보았겠지요. 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부지런히 확인했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차리고는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본문에 의하면 주인이 종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맡겨놓고 얼마 만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9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그렇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동안 두 종은 각각 주인이 맡긴 재산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은행에도 맡기지 않고 땅을 파고는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자기도 안 쓰면서도 남들도 쓰지 못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땅속에 그토록 큰 돈을 묻어두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는 종들을 보고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할 때, 그 주인이 맡긴 돈을 땅에 묻어놓았던 종은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권리도 빼앗기고는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충성된 종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무익한 종의 모습입니까.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아이구 내가 무슨 몇 십억이나 되는 돈이 어디 있다고.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손목 하나를 생각해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손목에 대한 엑스레이를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의사선생님이 그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 여기 보는 것처럼 손목에는 작은 뼈들이 여덟 개가 있는데, 이 뼈들이 절묘하게 조합이 되어서 손목이 이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걸 건드리면 사람의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하게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손목 하나, 아니, 이 손가락 하나,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래처럼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아무리 큰 돈을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1분 1초도 되돌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그깟 수 십억이나 수 백억보다 훨씬 더 값인 시간과 건강을 선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성된 종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익한 종, 그러니까 주님께 유익한 종이 바로 충성된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혹시 지금 어디 묻어 놓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디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결산할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묻어놓은 달란트가 없는지, 만약에 있다면 어서 캐어내어서,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어 결산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크나큰 칭찬을 받아 놀라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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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5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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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11절~1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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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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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 |
2023년 2월 26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4 | |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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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8절~10절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8節∼10節 “8.だれに対しても、何の借りもあってはいけません。ただ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は別です。他の人を愛する者は、律法の要求を満たしているのです。 9.「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10.愛は隣人に対して悪を行いません。それゆえ、愛は律法の要求を満たすもので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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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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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4번째 시간으로서 “사랑의 빚과 실천” 愛の借りと実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말씀 전체를 한 번 살펴본 다음에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8절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8.だれに対しても、何の借りもあってはいけません。ただ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は別です。他の人を愛する者は、律法の要求を満たしているのです。 우리는 사랑에 대한 빚을 졌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랑이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마음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랑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솔직히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도 이와 같은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세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꼭 말을 해야 아나요? 아니요. 속으로 좋아하는 감정,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기만 눈치 빠른 동물들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또는 자기한테 밥을 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리고 수컷은 암컷을, 그리고 암컷은 수컷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물들도 새끼를 낳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굳이 성경에서 말씀하실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의인이었다고 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우리가 얻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벗어나 천국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죄가 없는 의인을 위한 것이지 죄인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냐 하면,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해야 해결됩니까.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있나요? 만약에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 친구나 형제 지간의 사랑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사실 이는 얼마든지 갚을 기회도 있고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서로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랑은 성경에서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요?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제대로 갚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요. 우선 우리는 죄가 없어야 하고 예수님은 죄인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이어야 하고 예수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 더 해볼까요?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니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을래야 갚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나한테 갚으려고 해 봤자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큰 돈을 빌려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해준다는 것만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인데, 동부는 그나마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고는 합니다만, 서부를 보면 여긴 정말 군마 같애요. 물론 큰 도시에는 전철도 있고 버스도 많이 다닌다고는 합니다만, 그 외에는 자동차가 없으면 도무지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 미국에 갔는데 당장 무슨 차가 있어요. 면허도 없는데요. 그러면 어쩔 수가 없어요. 사람 신세를 져야 합니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미안하고 그랬는지 몰라요. 아니, 거기 사는 사람들이라고 무슨 한가하겠습니까. 다들 바쁘지요. 하지만 거기 가서 얼마 동안은 어디를 움직이려고 해도 도움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정말 거기 교회 사람들이나 학교 사람들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한테 제가 신세를 갚을 수가 있어요? 신세를 갚으려면 그 사람들이 차가 필요할 때 제가 태워드리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거든요. 그래서 참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그래서 하루는 어떤 분한테 그랬습니다. 아휴,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그랬더니 그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미국에 처음 오면 누구나 어쩔 수가 없대요. 자기도 처음 왔을 때에는 사람들 신세를 많이 졌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자기한테 갚지 않아도 되니까, 다음에 미국에 처음 오는 사람을 도울 일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갚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참 저는 이 말이 머리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자기한테 갚지 않아도 되니까 다른 사람한테 갚으라는 말씀, 정말 참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주님께 갚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사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 벌써 내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정도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의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9절~10절입니다. 로마서 13장 9절~10절입니다.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9.「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10.愛は隣人に対して悪を行いません。それゆえ、愛は律法の要求を満たすものです。 이는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겠지요. 출애굽기 20장 13절~17절 “13.살인하지 말라 14.간음하지 말라 15.도둑질하지 말라 16.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殺してはならない。 姦淫してはならない。 盗んではならない。 あなたの隣人について、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の妻、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 지난 번에 헌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 나라에는 수많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법이든 간에 헌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십계명을 비롯해서 어떠한 율법이나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적용은 주님 안에서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률 중에서 좋은 법이라면 그 법을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서 시행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 법이 훌륭한 법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헌법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도 없고 도입해서도 안 되는 법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목사님이 한 말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그 즉시로 무효가 되는 가르침, 말하자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점을 일단 염두에 두고 다음으로는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비유에 보시면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강도를 만난 사람, 둘째는 제사장, 셋째는 레위인, 넷째는 사마리아인이지요.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들이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옷을 벗기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 점을 기억해두시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갔는데 이 모습을 보고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피하여 지나갔다고 해요. 다음으로 누가 지나갔냐 하면 레위인도 지나갔다고 하는데 역시 그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은 불쌍히 여겼다고 해요.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막까지 태워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늦었나 보죠? 그 사람과 같이 그 주막에 묵고는 다음 날 그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기는 가야 할 길이 때문에 출발해야 하지만, 저 사람을 돌보아주라고 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하니까, 요즘 기준으로 한다면 쉽게 생각해서 하루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2만엔, 20만원을 그 여관 주인한테 주면서 저 사람을 좀 돌봐달라고 하고, 그리고 만약에 돈이 부족하면 내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를 텐데 그 때 내가 주겠다고까지 말했다고 해요.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멀쩡한 사람이야 제사장이다 레위인이다, 아니면 사마리아인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이 다쳤으면 어떤 사람인지도 안 나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주막에 묵었는데, 그 사람이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목숨은 붙어 있어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 사마리아 인이 떠날 때까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중에 깨어난다 하더라도 자기를 돌봐 준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이 사마리아 사람이다, 라는 말씀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 마지막에 뭐라고 하십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뜻을 머릿속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말씀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자, 아까 어느 한 부분을 기억해 달라는 말씀 드렸지요? 그게 어디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땠느냐 하면 단순히 쓰러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거의 죽은 것 같았다는 것이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단순히 그 사람을 지나쳤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했다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피해갔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사장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요, 레위인은 출애굽부터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 “11.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이외에도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율법을 잘 아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단순히 그들이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피해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땠다고 해요. 거의 죽은 것 같았다고 하잖아요.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죽어 있는 사람이라면 괜히 만졌다가 부정해지면 어떡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순히 부정해지면 좀 찝찝하다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정해지면 하나님의 일을 7일 동안 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를 요즘식으로 바꾸어 말해볼까요?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정해지면 7일 동안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고 해보죠. 그런데 주일날 아침 제가 교회에 오는 길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물론 요즘 같아서는 전화로 112나 119로 신고를 하면 되겠습니다만, 자, 우선 사람을 돌봐주어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살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괜히 만졌는데 죽어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율법적으로 본다면 부정해진 것이니까 그 날 예배를 인도하지 못해요. 그러나 제가 만지고 돌봐주었더니 잘못하면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릴 수가 있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그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부정해질 수도 있다는 각오, 그 날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가지고 그 사람을 만져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날 주일 예배를 위해 못 본척하고 그냥 교회로 와야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말씀 드렸던 믿음의 헌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율법이고 교리이고 간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은 그것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망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장 그 사람, 우리 이웃을 돌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빨리 그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백날 인도해봐야 거기에 이웃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히 헛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우리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이웃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걸 안 지켜. 성경에는 저렇게 적혀 있는데, 저 사람은 저걸 안 지켜. 이건 올바른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는 그와 같은 해석이나 주장은 주님 앞에서 당장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웃을 비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는 굿 뉴스 즉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어요. 그럼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우리가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비판하면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1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神は愛です。)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도 사랑이고 복음도 사랑입니다. 도저히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랍고도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값지고 놀라운 사랑의 빚을 깨닫고, 우리 이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널리 전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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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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