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6회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2023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4節
“4. 他人のしもべをさばくあなたは何者ですか。しもべが立つか倒れるか、それは主人次第です。しかし、しもべは立ちます。主は、彼を立た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から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7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높임을 받을 때” 私たちが高められる時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4절
“4.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他人のしもべをさばくあなたは何者ですか。しもべが立つか倒れるか、それは主人次第です。しかし、しもべは立ちます。主は、彼を立た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るからです。

오늘 말씀에 보시면 남의 하인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자기 주인한테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선 <남의 하인>( 他人のしもべ)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하인>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른 사람 밑에 있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밑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하는 사람, 말하자면 그 사람의 주인이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사람에게는 이처럼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제3자는 여기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요즘 세상에 사장과 사원을 주인과 하인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고용주와 피고용주라고 하는 입장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원은 자기 스스로의 인사고과 그러니까 업무수행평가를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임금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을 승진시킬 것인지 아닌지, 월급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회사 경영진의 결정에 달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인사권에 대해서 제3자는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남의 회사 직원의 인사에 대해서 누구를 승진시켜라 마라, 누구 임금을 올려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가끔 보면 목사님들이 자기 자신을 놓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는 주의 종이기에 잘잘못이 있으면 주님이 판단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한국에는 이 목사에 대해서 신성시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 같고,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을 목회자 스스로가 강조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이 말씀이 과연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의문이 듭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사가 신성하다면 교인들은 신성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목사를 “주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무엇입니까.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대단하거나 신성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주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목사나 교역자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은 모두가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인’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밑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절~5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2.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3.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4.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5.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이 말씀의 구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선 1절~2절만 보실까요.

마태복음 7장 1절~2절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1.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自分がさばかれないためです。
2.あなたがたは、自分がさばく、そのさばきでさばかれ、自分が量るその秤で量り与えられるのです。

이 세상에 비판이나 비난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다 칭찬을 듣고 싶어하고 호평을 받고 싶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비판을 하면 너희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고, 너희가 누군가를 평가하면 너희도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재판을 하게 되면 판사가 죄인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그럼 그것을 두고 판사한테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합니까.

아니에요. 판사는 죄인에게 그가 저지른 죄에 따라서 판결을 내려야 해요. 그것은 판사와 죄인이라고 하는 분명한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는 입장이고, 죄인은 그 판결에 승복을 하여야 하는 절대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판사한테, 당신이 판결을 내리면 당신도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나 상대방이나 똑 같은 입장, 다시 말해서 똑같이 비판을 받을 만한 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판사가 죄인을 비판하고 판결을 내릴 수는 있지만, 죄인이 죄인에게 비판하고 판결을 내릴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이 3절~4절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7장 3절~5절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3.あなたは、兄弟の目にあるちりは見えるのに、自分の目にある梁には、なぜ気がつかないのですか。
4.兄弟に向かって、『あな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かせてください』と、どうして言うのですか。見なさい。自分の目には梁があるではありませんか。
5.偽善者よ、まず自分の目から梁を取り除きなさい。そうすれば、はっきり見えるようになって、兄弟の目からちりを取り除くことができます。

주님께서는 상대방을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들어 있으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에 대해서 트집 잡고 있는 사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들보라고 하면 대들보……말하자면 큰 나무 기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한테 있는 대단히 작은 흠집을 두고 그것을 나무라는 사람한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너한테는 그 먼지 같은 흠집이 아니라, 나무 기둥만한 흠집이 있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일종의 착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상대방을 비판하면 상대방보다 위에 있게 되고, 내가 상대방을 칭찬하면 상대방보다 밑에 있게 된다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치인들 보십시오. 정권을 누가 잡든, 여당이 야당을 칭찬하고 야당이 여당을 칭찬하는 것 보셨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상대방을 비판하고 비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상대방보다 위에 있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 상대방에 대해서 작은 티가 있다고 트집을 잡고 있는데, 너한테는 티가 없는 줄 알아? 티 정도가 아니라 들보만한 흠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비판할 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이 있다. 내가 정의이고 상대방은 불의하다.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 스스로도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끄러워서 상대방을 비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방을 비판하는 이유는 나한테는 잘못이 없고 상대방한테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그 비판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나요? 옳기만 한가요? 주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역시 똑같다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눈에는 들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해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눈에는 왜 다른 사람의 티가 보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 눈속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그 들보가 자기 잘못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말합니다. 지금 어디어디 지점 고속도로에서는 한 자동차가 역주행을 하고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하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보니까 자기가 달리고 있는 지점이에요. 그런데 주변을 보니까 역주행을 하고 있는 차가 한 대가 아니에요. 자기 주변을 달리고 있는 수 십대, 수 백대 자동차가 다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혼자 중얼거립니다. 역주행을 하고 있는 자동차가 한 대라니? 나 빼고 다 역주행을 하고 있잖아?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는 자기만 멀쩡하고 다른 차들이 다 잘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게 어디 정치인들만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들도 우리 이웃을 칭찬하고 높이기보다도 어떻게 하면 우리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헐뜯고 깎아 내리려고 합니까.


다른 사람한테 티가 있어 보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한테 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너한테 들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유는 너한테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하는 것처럼 생각이 되십니까.


어쩌면 사실은 나 혼자만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면 그 비판이 내게 돌아옵니다. 비난을 하면 그 비난이 나한테 고스란히 돌아오게 됩니다. 이는 제가 드리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하는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큰 폭력이요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모릅니다.

잠언 18장 21절
“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死と生は舌に支配される。どちらかを愛して、人はその実を食べる。

이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몰라요.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이 말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손과 발로 열심히 일을 하신 결과 천하만물을 지으셨습니까.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 3절부터 시작하는데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神は仰せられた。「光、あれ。」すると光があった。

그리고 6절, 9절, 11절, 14절 모두 어떻게 시작하냐 하면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神は仰せられた。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 시편 33편 6절입니다.


시편 33편 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主のことばによって 天は造られた。 天の万象もすべて 御口の息吹によって。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능력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했던 로마서에서도 있지 않았습니까.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우리는 어려운 계약서를 쓰고 도장 찍고 공증 받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입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4편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私はあらゆるときに 主をほめたたえる。 私の口には いつも主への賛美がある。

우리가 이 세상에 천년 만년 살 수는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은 그 수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말의 수는 제한적입니다. 그렇다면 말 한 마디로도 주님을 찬양하고 말 한 마디로도 이웃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높이는데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을 칭찬하면 내가 낮아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이웃을 비판해야지 내가 저 사람보다 높아질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우리가 하인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스스로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높이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나를 낮추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를 낮추는 방법은 주님을 높이고 우리 이웃을 높일 때 내가 낮아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웃을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높일 때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높이 세움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5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20233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3절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4章 1節∼3節
“1.信仰の弱い人を受け入れなさい。その意見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
2.ある人は何を食べてもよいと信じていますが、弱い人は野菜しか食べません。
3.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6번째 시간으로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 私たちを自由にする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특히 오해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선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검토한 다음에 전체적인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1절부터 보실까요.


로마서 14장 1절
“1.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信仰の弱い人を受け入れなさい。その意見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부분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이게 정말인지, 홍해가 갈라졌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지 잘 안 믿어진다……사실 초신자 때에는 그럴 수 있잖아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믿음이 부족하다>라고 하는데, 그런데 오늘 여기서 <믿음이 연약하다>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주석서에 보니까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 말씀이 비교적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라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다른 주석서에 보니까 보다 자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그러니까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근거 없는 기준을 가진 자>를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대단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말씀 드린다면,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의 본래 의미보다도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다음에 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2절
“2.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2.ある人は何を食べてもよいと信じていますが、弱い人は野菜しか食べません。

자, 본문 말씀에 보시면 좀 흥미로움 말씀이 나오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어떻게 한대요? 예, 채소만 먹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우선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고기를 좋아하십니까. 예, 저도 고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맨처음부터 고기를 먹었던 것은 아니에요.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첫 계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부분만 주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 앞부분도 이 또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에덴에 있는 각종 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채식 그러니까 과일만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됩니까. 그것은 사람이 창조된 이후 훨씬 나중이 되어서입니다.


성경 기록에 따라서 계산해 보면 아담이 창조되고 1656년이 지난 다음에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때까지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홍수가 끝나고 세상에 가득 찼던 물이 다 마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방주에서 나온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3절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生きて動いているものはみな、あなたがたの食物となる。緑の草と同じように、そのすべてのものを、今、あなたがたに与える。

자, 여기서 하나님은 비로소 사람에게 동물 즉 고기를 먹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창세기 9장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ただし肉は、そのいのちである血のあるままで食べてはならない。


하나님은 고기를 먹을 때에 그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조건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지요.

여기에 보시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규정들이 있습니다. 시간관계상 이에 대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 14장 등에 보시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고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시면 다음과 갈은 기록이 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16절
“8.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9.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10.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
11.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12.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13.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14.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15.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16.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ダニエルは、王が食べるごちそうや王が飲むぶどう酒で身を汚すまいと心に定めた。そして、身を汚さないようにさせてくれ、と宦官の長に願うことにした。
神は、ダニエルが宦官の長の前に恵みとあわれみを受けられるようにされた。
宦官の長はダニエルに言った。「私は、あなたがたの食べ物と飲み物を定めた王を恐れている。あなたがたの顔色が同年輩の少年たちよりもすぐれないのを、王がご覧になるのはよいことだろうか。あなたがたのせいで、私は王に首を差し出さなければならなくなる。」
そこでダニエルは、宦官の長がダニエル、ハナンヤ、ミシャエル、アザルヤのために任命した世話役に言った。
「どうか十日間、しもべたちを試してください。私たちに野菜を与えて食べさせ、水を与えて飲ませてください。
そのようにして、私たちの顔色と、王が食べるごちそうを食べている少年たちの顔色を見比べて、あなたの見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このしもべたちを扱ってください。」
世話役は彼らのこの申し出を聞き入れ、十日間、彼らを試した。
十日が終わると、彼らは、王が食べるごちそうを食べているどの少年よりも顔色が良く、からだつきも良かった。
そこで世話役は、彼らが食べるはずだったごちそうと飲むはずだったぶどう酒を取り下げ、彼らに野菜を与えることにした。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따로 뽑아서 왕을 보필하도록 했는데 그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왕을 모시는 사람인데 용모가 지저분하거나 빈약해 보이면 그렇잖아요. 그래서 다니엘 1장 4절~5절에 의하면 그들은 왕을 섬기는 일을 하기 전에 3년 동안 교육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는 식단까지도 철저하게 관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이 먹는 음식들, 정확하게는 고기와 포도주가 아니라 채식과 물을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을 관리하는 환관장은 긴장을 해요. 왜냐하면 아니, 좀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어야지 얼굴 살도 좀 보기 좋아지고 할텐데, 괜히 채소나 줬다가 초췌해지거나 하면 그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봐, 내가 고기나 포도주 같은 영양가가 있는 것을 주지 않고 괜히 채소나 맹물만 줬다가 잘못되면 내 목이 날라갈까 겁이 난다고 했더니만, 다니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시험 삼아 열흘 동안만 그렇게 시험해보라고 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여전히 고기와 포도주를 주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한테는 열흘 동안만 시험 삼아서 채소와 맹물만 줘봤는데, 열흘이 지난 다음에 비교해보니까, 영양가가 많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은 사람들보다 채소와 맹물을 먹은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얼굴색이 훨씬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 환관장은 이제 안심하고 그 이후에는 고기와 포도주 대신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채소와 맹물을 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자, 여기까지 들은 여러분께서는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기의 피는 절대로 먹지 말고, 뿐만 아니라 율법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음식물도 먹지 말고, 그리고 다니엘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채식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어떻습니까. 제 말씀이 이상해요? 아니, 다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잖아요.

우선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거 지킬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무슨 선지나 육회 같은 것을 안 먹으면 된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고기 스테이크 같은 경우를 보면 미디엄 정도로 익혀도 피가 살짝 보일 때가 있잖아요? 율법적으로 본다면 그건 먹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럼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피가 안 나오도록 잘 익혀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니, 성경을 왜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을 해요. 하나님이 언제 피는 익혀 먹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대로 먹든 익혀 먹든 간에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완전히 제거한 다음에 굽든지 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에 14장에서 금하신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볼까요?

여기에 보시면 좀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돼지 삼겹살 좋아하시나요?


레위기 11장 7절~8절
“7.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豚。これはひづめが分かれていて、完全に割れてはいるが、反芻しないので、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あなたがたは、それらの肉を食べてはならない。また、それらの死骸に触れてもいけない。それらは、あなたがたには汚れたものである。

이 말씀에 의하면 돼지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레위기 11장 12절
“12.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水の中にいるもので、ひれや鱗のないものはすべて、あなたがたには忌むべきものである。

물속에 있는 생물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먹을 수 없냐 하면, 제가 좋아하는 오징어나 문어를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오징어나 문어는 물속에 살지만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잖아요.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보시면 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고 했냐 하면, 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왕궁에서 먹었던 모든 고기나 포도주 같은 것은 그냥 조리가 된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잡고는 먼저 우상한테 바쳐진 다음에 사람이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한 이유는 육식이냐 채식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상한테 바쳐진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3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3절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3.食べる人は食べない人を見下してはいけないし、食べない人も食べる人を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神がその人を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のです。

이와 같은 이유로 먹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바로 1절에 나왔던 것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信仰の弱い人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지요?

그럼 이제 본문 전체의 내용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반적으로 본다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 그러니까 앞서 주석서 내용대로 한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근거 없는 기준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에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 우리는 고기를 먹을 때 피를 완전히 제거한 고기만 먹든지, 아니면 돼지고기나 오징어, 문어 같은 것은 먹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아예 우상한테 바쳐진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합니까.

우상한테 바쳐진 음식은 먹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 왜요. 명절날 친척집에 가면, 우리가 차리지는 않더라도 차례나 제사상에 올라갔던 음식들 있잖아요. 그것도 말하자면 우상한테 바쳐진 음식 아니겠습니까. 그거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조금 더 확대해볼까요? 성경에서 안식일은 언제입니까. 지금의 토요일이지요. 정확히는 금요일 해가 진 다음부터 토요일은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면 십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토록 율법을 지키고 싶다면 다 지켜야지요. 구약에 나와 있는 절기도 다 지키고, 그 앞에서 양이나 염소를 잡고 불로 태워서 속죄제, 속건제도 드리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祝いの日

그런데 제가 보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기까지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좀 이상하지요.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 해도 오징어 다리 하나 뜯으면 율법을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이 요즘 교회에 있어서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유명한 배우 중 하나인 브래드 피트에 대한 기사를 예전에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본래 대단히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냐 하니까, 그는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부모님한테서 이걸 하면 안돼. 저걸 하면 안돼……라고 그런 말만 듣고 자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게 지겨워서 자기는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기사를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선지를 안 먹는다, 무엇을 안 먹는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으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먹고 싶은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억지로 안 먹는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에요.

디모데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3절~5절
“3.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彼らは結婚することを禁じたり、食物を断つことを命じたりします。しかし食物は、信仰があり、真理を知っている人々が感謝して受けるように、神が造られたものです。
神が造られたものはすべて良いもので、感謝して受けるとき、捨てるべきものは何もありません。
神のことばと祈りによって、聖なるものとされるからです。

물론 몸에 해롭거나 아니면, 글쎄요 법으로 금지된 것이나 하면 먹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口に入る物は人を汚しません。口から出るもの、それが人を汚すのです。」

우리가 먹는 것으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럽게 하는 것이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더럽게 하지 않습니까.

신앙을 지킨다고 드시고 싶은 것 억지로 참지 마시고,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좋은 말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주님의 거룩한 복음을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흥미로운 말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시계전문가이기도 한데, 보통 시계를 가지면 시간에 구속이 된다고 살고 있는데, 이 분의 말씀에 의하면 정확한 시계가 있으면 사람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正確な時計があるからこそ人は時間から自由になれる

처음에는 이 말씀을 잘 알지 못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누구와 12시에 약속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지금 몇 시인지 몰라요. 그럼 불안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괜히 서둘러야 할 것 같고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그렇겠지요.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게 되면 어떻습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 때까지 시간이 얼마 있으니까 그동안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된다……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 인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면 불안해요. 초조해요.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알고 나면 그 불안과 초조와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그렇습니다.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아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그렇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고,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32절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イエスは、ご自分を信じたユダヤ人たち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ことばにとどまるなら、本当にわたしの弟子です。
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불안해합니다. 초조해합니다. 걱정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터리 교주나 엉터리 주장들 때문에 무서워 떨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교회에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어요. 뻑 하면 이걸 하면 안 된다, 저걸 하면 안 된다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면, 아니,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냐고 하면, 그런 건 성경에 없어도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러면 다 알게 된대요.

아니, 이단이 별겁니까. 그런 게 이단이지?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성경이 없었어요. 구약은 물론 있었지만 신약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성경 66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 말씀처럼 이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여기서 벗어나는 의견, 앞서 주석서의 내용을 인용한다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근거 없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비난한다거나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제가 드리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올바른 기도를 하고 올바른 금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올바로 알게 되면 불안해할 것이 없어요. 주님의 품 안에서 진정한 말씀을 깨닫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유일한 말씀이신 이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이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

← 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84회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20233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マタイの福音書 25章 21節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착하고 충성된 종의 요건” 良い忠実なしもべの要件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은 좀 길지만 우리에게는 친숙한 내용입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1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14.天の御国は、旅に出るにあたり、自分のしもべたちを呼んで財産を預ける人のようです。
15.彼はそれぞれその能力に応じて、一人には五タラント、一人には二タラント、もう一人には一タラントを渡して旅に出かけた。するとすぐに、
16.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それで商売をし、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た。
17.同じように、二タラント預かった者も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た。
18.一方、一タラント預かった者は出て行って地面に穴を掘り、主人の金を隠した。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20.すると、五タラント預かった者が進み出て、もう五タラントを差し出し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五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私はほかに五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2.二タラントの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私に二タラント預けてくださいましたが、ご覧ください、ほかに二タラントをもうけました。』
23.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4.一タラント預かっていた者も進み出て言った。『ご主人様。あなた様は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厳しい方だと分かっていました。
25.それで私は怖くなり、出て行って、あなた様の一タラントを地の中に隠しておきました。ご覧ください、これがあなた様の物です。』
26.しかし、主人は彼に答えた。『悪い、怠け者のしもべだ。私が蒔かなかったところから刈り取り、散らさなかったところからかき集めると分かっていたというのか。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본문에 의하면 어느 한 주인이 타국에 갈 때 종들에게 종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러고는 자기의 소유를 맡겼다고 하지요? 세 종에게 맡기기를 한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종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그리고 마지막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 말씀을 처음 읽었을 때에, 그저 종들에게 금화, 그러니까 금으로 된 동전 다섯 개, 두 개, 그리고 한 개……이 정도로 나누어준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된 그림도 많이 봐왔었거든요.

하지만 이 달란트라고 하는 것이 동전 한 두 개 정도가 아니더라고요. 옛날과 지금의 화폐가치가 좀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당시 금 한 달란트가 지금의 환율로 얼마가 된다고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신학자들에 의하면 <한 달란트>라고 하는 무게는 대략적으로 26킬로에서 30킬로 정도라고 합니다.

뭐, 그럼 우리가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1 달란트를 30킬로라고 하지요. 그러면 금 한 달란트가 금 30킬로라는 뜻이 되겠지요? 요즘 금 시세를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금이 참 많이 올랐더라고요. 금 1그램, 킬로가 아니라 1그램에 한국돈 10만원 정도, 일본돈으로는 1만엔 정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1000그램이 1킬로잖아요. 단순계산으로 1그램을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킬로는 10만원의 1000배, 그러니까 1억원이 됩니다. 이게 1킬로예요. 그러면 1달란트를 30킬로로 계산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30억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30억원이 1달란트예요. 그럼 여기에 보시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종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이 계산으로 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150억원과, 60억원과 30억원을 맡겼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떻습니까. 마지막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고 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아니에요. 30억원이나 되는 큰 재산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그냥 아무한테나 그와 같은 큰 돈을 맡겼겠어요? 그것은 바로 그만큼 신임을 한 종한테 맡겼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주인이 이처럼 큰 돈을 맡기고 떠났다고 하는데, 그 용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돈만 맡기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이 점부터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회사에서 본다면 여러 직급이 있겠지요? 직원으로 본다면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그리고 그 위에는 임원이 됩니다. 큰 회사는 이사, 상무, 전무, 대표……등이 되겠지요.

그럼 본문에 나오는 주인을 대표라고 한다면, 여기에 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까요. 아무리 큰 기업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대리나 과장 정도 되는 사람한테 30억이나 60억, 150억이나 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어요?

그 정도의 돈에 대한 재량을 맡긴다면 아무리 못해도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좀 멀리 다녀와야 하는데, 그 동안 자, 이 정도 돈을 맡겨놓겠소. 그리고 주인이 떠나갔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왜 그 용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 큰 돈을 신입사원한테 맡겼습니까. 아니에요. 직원도 아닌 임원들한테 맡긴 것입니다. 그 정도 되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지금 회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나 두 달란트 맡은 종은 굳이 주인한테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묻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이 자기한테 맡긴 그 범위 내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요.

그 결과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이윤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본 주인의 평가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 대한 평가가 글자 하나 차이 없이 똑같다는 것이지요.

21절과 23절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1.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한 달란트를 30억원이라고 한다면, 다섯 달란트는 150억원, 두 달란트는 60억원이었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60억원을 남긴 종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는 150억원이나 이윤을 남긴 종이 더 칭찬을 받을 만한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 같이 칭찬을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답이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 후반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多く与えられた者はみな、多くを求められ、多く任された者は、さらに多くを要求されます。

150억도 큰 돈이요 60억도 큰 돈이지만, 150억을 맡은 사람이 훨씬 더 큰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150억 맡은 사람도 60억 맡은 사람도 똑같이 두 배를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둘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사업을 했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한 달라트를 받은 종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땅속에 묻어놓았던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 종은 왜 그 많은 돈을 쓰지 않고 땅속에 묻어 놓았을까요.

단순히 사른 사람들보다 장사를 할 능력이 안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그렇게 큰 돈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상무나 전무 정도는 되는 임원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자리에 앉힐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주인이 그렇게 큰 돈을 맡겼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적어도 이 한 달란트를 맡은 종도 마음만 먹으면 다른 종들처럼 두 배로 늘릴 만한 능력이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충분히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불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왜 저 사람한테는 150억, 60억 씩이나 맡기면서 나한테는 30억만 주는 거야? 내가 저 사람들보다 못한 것이 뭔데? 흥. 웃기고 있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 결과 그는 말하자면 항의의 표시로 일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주인은 뭐라고 합니까.

27절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7.それなら、おまえは私の金を銀行に預けておくべきだった。そうすれば、私が帰って来たとき、私の物を利息とともに返してもらえたのに。


이 말씀이 좀 어렵다면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3절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좋아. 네가 일을 하기 싫으면 차라리 은행에 맡길 수도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러면 내가 이자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너는 그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종이 그 정도도 몰랐을까요? 아니, 상무나 전무도 있을 정도로 큰 회사 임원인데 몰랐어요? 아니에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았는데도 왜 안 했어요. 이유는 단 하나에요.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회사에 손해를 입히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장님은 그에게 30억이나 되는 큰 돈을 맡길 정도로 신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임을 그 종은 배신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28절~30절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8.だから、そのタラントを彼から取り上げて、十タラント持っている者に与えよ。
29.だれでも持っている者は与えられてもっと豊かになり、持っていない者は持っている物までも取り上げられるのだ。
30.この役に立たないしもべは外の暗闇に追い出せ。そこで泣いて歯ぎしりするのだ。』

결국 그는 그나마 있던 것마저도 다 빼앗겨 버리고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다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무익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럼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말 잘 듣는 종이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주인이 무슨 명령을 했다는 말씀이 없잖아요.


그럼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충성된 종>이라는 뜻은 어떤 종입니까. 이를 쉽게 알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이와 반대되는 말을 살펴보면 알기 쉽습니다. <충성된 종>의 반대말은? 예, <무익한 종>이지요. 그러면 <무익하다>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익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충성된 종>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유익한 종>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면 누구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렇죠. 자기를 신임해주고 자기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8장과 누가복음 15장에 보시면 잃어버린 어린 양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대요.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양이 열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은 것이 아니에요. 백 마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럼 이 목자는 한 마리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무리 능숙한 목자라 하더라도 똑같이 생긴 양들이 백 마리가 있는지 99마리가 있는지는 한 눈에 보고 알아차리기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작년에 일본 뉴스를 보니까 그 여름날에 유치원 스쿨버스 안에 어린 아이들을 방치해 두었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여기저기서 발생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무슨 큰 학교도 아니고 유치원 스쿨버스라고 하면 커 봤자 아이들 40명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다 내렸는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는 문을 잠과 버려서, 결국 버스에 갇혀서 아이들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50명도 안 되는 아이들도 방심을 하면 이렇게 놓칠 수가 있는데 100마리나 되는 양이라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면 이 목자는 거기 있는 양들이 100마리가 아니라 99마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그렇죠. 이는 분명 세어보았기 때문에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 세어보았을까요? 아니요.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와서 간밤에 아무 일 없었는지 세어봅니다. 초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세어봅니다.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동안에도 세어보고, 돌아오기 전에도 세어보고, 그리고 돌아온 다음에도 세어보았겠지요.

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부지런히 확인했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차리고는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본문에 의하면 주인이 종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맡겨놓고 얼마 만에 돌아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19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19.さて、かなり時がたってから、しもべたちの主人が帰って来て彼らと清算をした。

그렇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동안 두 종은 각각 주인이 맡긴 재산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은행에도 맡기지 않고 땅을 파고는 감추어 두었다는 것은, 자기도 안 쓰면서도 남들도 쓰지 못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땅속에 그토록 큰 돈을 묻어두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는 종들을 보고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할 때, 그 주인이 맡긴 돈을 땅에 묻어놓았던 종은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던 권리도 빼앗기고는 내쫓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충성된 종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무익한 종의 모습입니까.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아이구 내가 무슨 몇 십억이나 되는 돈이 어디 있다고.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손목 하나를 생각해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손목에 대한 엑스레이를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 의사선생님이 그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 여기 보는 것처럼 손목에는 작은 뼈들이 여덟 개가 있는데, 이 뼈들이 절묘하게 조합이 되어서 손목이 이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걸 건드리면 사람의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하게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손목 하나, 아니, 이 손가락 하나,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떻습니까.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래처럼 완벽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진 귀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아무리 큰 돈을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1분 1초도 되돌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그깟 수 십억이나 수 백억보다 훨씬 더 값인 시간과 건강을 선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성된 종은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익한 종, 그러니까 주님께 유익한 종이 바로 충성된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혹시 지금 어디 묻어 놓지는 않으셨습니까. 어디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결산할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묻어놓은 달란트가 없는지, 만약에 있다면 어서 캐어내어서,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때가 되어 결산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크나큰 칭찬을 받아 놀라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
← 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202335 설교 - 로마서 강해 125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1절~14절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11節∼14節
“11.さら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のような時であるか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のですから。
12.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3.遊興や泥酔、淫乱や好色、争いやねたみの生活ではなく、昼らしい、品位のある生き方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4.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てはいけません。”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5번째 시간으로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キリストを着るというこ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11절부터 14절까지 말씀 중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본 다음에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1절~12절입니다.

로마서 13장 11절~12절
“11.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1.さら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のような時であるか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のですから。
12.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성경은 지금 이 시기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시기라고 하는 것은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시기나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시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가 어떤 시기냐 하면,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12절에 보시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세요. 구원이 가까웠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바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씀을 하십니다.
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
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
闇のわざを脱ぎ捨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よう

자, 우선 이 두 구절의 구성을 보시면,

첫째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둘째로 처음 믿을 때보다 구원이 가까웠다
셋째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

眠りからさめるべき時刻が、もう来ている
私たちが信じたときよりも、今は救いがもっと私たちに近づいている
夜は深まり、昼は近づいて来ました

우선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전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잠이 들었을 때에는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도 없어요.

이는 바로 복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인 죄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바로 잠을 잘 때입니다.

그렇다면 왜 잠을 자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밤이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보다 뛰어나서 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힘이 센 짐승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할 수는 없어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이 땅을 지배하도록 하는 축복을 주신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육신의 구조가 모든 동물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맨몸으로는 곰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힘으로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뛰는 속도도 맹수들보다 사람이 훨씬 못 미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눈을 보십시오. 부엉이나 야행성 동물들은 캄캄한 밤에도 앞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눈이 좋다고 해도 사람은 캄캄한 곳에서 앞을 볼 수가 없어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작은 빛이 있어도 볼 수 있는 경우는 있겠지만, 빛이 완전히 없는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빛이 있어야 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빛이 있어서 그 빛이 사물에 비춘 다음에 반사되어서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인식할 수 있는데, 빛이 하나도 없으면 반사해서 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밤에 어디를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전혀 불빛이 없어요. 가로등도 없고 달이나 별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정말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가 길인지도 모르고 여기 빠졌다가 저기 넘어졌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백날이 지나도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빛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わたしは光として世に来ました。わたしを信じる者が、だれも闇の中にとどまる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무슨 반짝이는 멋진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뭐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사람은 빛이 있어야 그 빛으로 하여금 사물을 알아본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으로 바라보아야 온전하게 보이는 것이지, 예수님 없이 바라본다면 이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41절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わたしはさばきのためにこの世に来ました。目の見えない者が見えるようになり、見える者が盲目となるためです。」
パリサイ人の中でイエスとともにいた者たちが、このことを聞いて、イエスに言った。「私たちも盲目なのですか。」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もしあなたがたが盲目であったなら、あなたがたに罪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今、『私たちは見え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の罪は残ります。」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죄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안 보이는데 보인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분간할 수 없는데 분간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도 모르면서 자기들 멋대로 행하고 있는데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둠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이나 우리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무엇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이 가까웠다는 뜻은 그러면 무엇이냐 하면 이제 밤이 지나가고 낮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그렇습니다. 이제 어둠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입고 다녀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밤, 그러니까 캄캄해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한다 해도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상태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그저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낮이에요. 이제 세상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이는 사람들한테 나에 대해서 감추어진 것이 없고 다 보여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보시면 이 낮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누가복음 12장 3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が暗闇で言ったことが、みな明るみで聞かれ、奥の部屋で耳にささやいたことが、屋上で言い広められるのです。


이제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까지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모를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아무도 안 듣는 줄 알고 말했던 것이 온 천하에 다 들리고, 분명히 한 사람한테만 귀에 대고 한 말인데 전세계에 다 전파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2천년 전에 이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에이, 말도 안돼.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그게 불가능합니까. 가끔 뉴스를 보십시오. 둘이서 나눈 은밀한 대화가 모두 녹음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녹음을 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제법 크기가 있는 녹음기가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녹음을 하려면 거기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갔어야 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초등학생도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녹음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능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어디 음성녹음 뿐이에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동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퍼지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정말 주님께서는 2천년 전에 하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욱 알기 쉽게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미래 사회에 대한 단순한 예언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허락하신 날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그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을 줄 알았던 모든 일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나중에 들키지 않도록 잘 숨겨놓으라고 말씀하세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13절과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3장 13절~14절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3.遊興や泥酔、淫乱や好色、争いやねたみの生活ではなく、昼らしい、品位のある生き方をしようではありませんか。
14.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てはいけ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차피 낮이 되면 다 드러나게 되니까 오히려 반대로 다 들킨다고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밤에 멋대로 하면서 놀면 즐겁지요. 그 밤이 언제까지나 안 끝나고 계속됐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밤은 끝나고 반드시 낮이 온다고 말씀하세요. 숨겨두었던 것이 모두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대비해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특히 14절을 주목해서 본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主イエス・キリストを着なさい。ということは欲望を満たそうと、肉に心を用いないこと

오늘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人々にたとえを話された。「ある金持ちの畑が豊作であった。
彼は心の中で考えた。『どうしよう。私の作物をしまっておく場所がない。』
そして言った。『こうしよう。私の倉を壊して、もっと大きいのを建て、私の穀物や財産はすべてそこにしまっておこう。
そして、自分のたましいにこう言おう。「わがたましいよ、これから先何年分もいっぱい物がためられた。さあ休め。食べて、飲んで、楽しめ。」』
しかし、神は彼に言われた。『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自分のために蓄えても、神に対して富まない者はこのとおりです。」

옛날에는 재산을 쌓아두려고 하면 손이 많이 갔습니다. 이 말씀처럼 곡식을 쌓아두려고 하면 곳간을 새로 지어야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요즘은 어떻습니까. 돈을 쌓아 두기 위해서 무슨 창고를 지어야 합니까. 은행에 돈을 많이 넣어두면 어느 날 은행에서 전화가 와서, 아휴,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돈을 넣을 곳이 없네요. 그래요?

아니에요. 이제는 재물을 쌓아놓으려고 한다면, 거의 무한대로 쌓아놓을 수 있습니다. 넣을 곳이 없으니까 제발 그만 가져오라고 하는 곳이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렇죠. 평생 동안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곳간에 넣어둡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년 만년을 생각하고 돈을 쌓아두려고 합니다. 한국에는 그런 말이 있지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정말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돈을 벌어서는 쓸 때는 점잖게 인심도 베풀면서 쓴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어디 사람이 그렇게 되나요.


그러면 얼마나 벌어야 벌만큼 벌었다는 것이 됩니까. 그 상한선이 없어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승 같이 돈 한 번 못 써보고, 결국 평생동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멍멍이처럼 돈을 벌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건강은 돌보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돈만 벌다가,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엑스레이에 좀 이상한 그림자가 보인다면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해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번 돈을 병원비로 다 쓰고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큰 돈을 남기고 떠났다고 해도, 그 돈을 가지고 유산이다 상속이다 해가면서 서로 싸우고 재판하고 그러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오해 하실까봐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엇이 없느냐 하면, 두 가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 지금까지 공부해왔지 않습니까. 믿음에 있어서의 헌법이 뭐였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면 풍요롭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셔서 넉넉해졌는데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부자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저 더 벌어들이고 더 쌓아 두어서 남은 인생 나 하나 편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신다고요?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오늘 네 목숨을 취하면 그 많은 재산들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냐 하는 것이지요.

『愚か者、おまえのたましいは、今夜おまえから取り去られる。おまえが用意した物は、いったいだれのものになるのか。』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너한테 그 많은 재산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도 있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다 잃어버렸어요.


성경에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성경은 그 사람이 믿은 대로 갚아 주겠다? 배운 대로 갚아 주겠다? 아니요. 그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요? 중요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믿음이 있고,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을 위해, 그리고 이웃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신다고요?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자여”가 되는 것입니다. 愚か者

마가복음 10장 17절~25절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イエスが道に出て行かれると、一人の人が駆け寄り、御前にひざまずいて尋ねた。「良い先生。永遠のいのちを受け継ぐためには、何をしたらよ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なぜ、わたしを『良い』と言うのですか。良い方は神おひとりのほか、だれもいません。
戒めはあなたも知っているはずです。『殺してはならない。姦淫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だまし取っ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父と母を敬え。』」
その人はイエスに言った。「先生。私は少年のころから、それらすべてを守ってきました。」
イエスは彼を見つめ、いつくしんで言われた。「あなたに欠けていることが一つあります。帰って、あなたが持っている物をすべて売り払い、貧しい人たちに与え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は天に宝を持つことになります。そのうえで、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すると彼は、このことばに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多くの財産を持っていたからである。
イエスは、周囲を見回して、弟子たちに言われた。「富を持つ者が神の国に入るのは、なんと難しいことでしょう。」
弟子たちはイエスのことばに驚いた。しかし、イエスは重ねて彼らに言われた。「子たちよ。神の国に入ることは、なんと難しいことでしょう。
金持ちが神の国に入るよりは、らくだが針の穴を通るほうが易しいのです。」

믿음과 말씀과 행함은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어떻습니까. 믿음이 없었나요? 아니요. 믿음이 있었으니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이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 재물 많이 가지고 있지? 그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줘라. 네가 아무리 믿음이 있고 말씀을 잘 안다고 해도 이웃 사랑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잖니? 이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건요.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해요? 이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힘들어 합니다.

결국 그 재물이 많은 사람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부자를 미워해서 그랬습니까. 아니에요. 이 말씀에 보시면 분명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いつくしんだ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가 큰 상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이웃을 섬기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에요.

하지만 그는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웃 사랑을 위해 꼭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어디 돈 뿐인가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건강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서 베풀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노력으로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건강도 없어요? 그렇다면 기도로도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은 낮이 다가왔다는 사실, 다 드러나는 날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요,

둘째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행함으로 우리가 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시편 57편 8절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私のたましいよ 目を覚ませ。 琴よ 竪琴よ 目を覚ませ。 私は暁を呼び覚まそう。

시편 108편 2절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琴よ 竪琴よ 目を覚ませ。 私は暁を呼び覚まそう。

한국에서는 새벽기도에 가면 꼭 이 구절을 말씀하세요.

하지만 이건 꼭 새벽기도에 나오라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무도 진리를 모를 때에 내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게 한다는 뜻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도 싹이 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리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믿음과 말씀이 있어도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과 말씀에 입각한 행함으로 열매를 맺을 때 진정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큰 상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함을 말씀하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픈 기색을 띠며 근심하며 되돌아가시겠습니까.


顔を曇らせ、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て行かれますか。


이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낮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

← 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82회 사랑의 빚과 실천
2023226 설교 - 로마서 강해 12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10절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8節∼10節
“8.だれに対しても、何の借りもあってはいけません。ただ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は別です。他の人を愛する者は、律法の要求を満たしているのです。
9.「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10.愛は隣人に対して悪を行いません。それゆえ、愛は律法の要求を満たすも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4번째 시간으로서 “사랑의 빚과 실천” 愛の借りと実践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말씀 전체를 한 번 살펴본 다음에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8절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8.だれに対しても、何の借りもあってはいけません。ただ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は別です。他の人を愛する者は、律法の要求を満たしているのです。

우리는 사랑에 대한 빚을 졌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랑이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마음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랑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줄 아는 사랑입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려볼까요? 솔직히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도 이와 같은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세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꼭 말을 해야 아나요? 아니요. 속으로 좋아하는 감정,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기만 눈치 빠른 동물들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또는 자기한테 밥을 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리고 수컷은 암컷을, 그리고 암컷은 수컷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물들도 새끼를 낳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굳이 성경에서 말씀하실 필요도 없겠지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과 세상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의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의인이었다고 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우리가 얻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벗어나 천국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죄가 없는 의인을 위한 것이지 죄인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냐 하면, 우리의 죄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해야 해결됩니까.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このキリストにあって、私たちはその血による贖い、背きの罪の赦しを受けています。これは神の豊かな恵みによることです。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피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있나요? 만약에 부모 자식 간의 사랑,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 친구나 형제 지간의 사랑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사실 이는 얼마든지 갚을 기회도 있고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서로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랑은 성경에서의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요? 우리가 받은 사랑은 우리가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 제대로 갚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겠지요.

우선 우리는 죄가 없어야 하고 예수님은 죄인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이어야 하고 예수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

더 해볼까요?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니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을래야 갚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나한테 갚으려고 해 봤자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큰 돈을 빌려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해준다는 것만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인데, 동부는 그나마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고는 합니다만, 서부를 보면 여긴 정말 군마 같애요. 물론 큰 도시에는 전철도 있고 버스도 많이 다닌다고는 합니다만, 그 외에는 자동차가 없으면 도무지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 미국에 갔는데 당장 무슨 차가 있어요. 면허도 없는데요. 그러면 어쩔 수가 없어요. 사람 신세를 져야 합니다. 글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미안하고 그랬는지 몰라요.

아니, 거기 사는 사람들이라고 무슨 한가하겠습니까. 다들 바쁘지요. 하지만 거기 가서 얼마 동안은 어디를 움직이려고 해도 도움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정말 거기 교회 사람들이나 학교 사람들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한테 제가 신세를 갚을 수가 있어요? 신세를 갚으려면 그 사람들이 차가 필요할 때 제가 태워드리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거든요. 그래서 참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그래서 하루는 어떤 분한테 그랬습니다. 아휴,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그랬더니 그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미국에 처음 오면 누구나 어쩔 수가 없대요. 자기도 처음 왔을 때에는 사람들 신세를 많이 졌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자기한테 갚지 않아도 되니까, 다음에 미국에 처음 오는 사람을 도울 일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갚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참 저는 이 말이 머리에 오랫동안 남았습니다. 자기한테 갚지 않아도 되니까 다른 사람한테 갚으라는 말씀, 정말 참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주님께 갚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사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 벌써 내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정도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의 사랑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9절~10절입니다.


로마서 13장 9절~10절입니다.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9.「姦淫してはならない。殺してはならない。盗んではならない。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戒め、またほかのどんな戒めであっても、それらは、「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ばに要約されるからです。
10.愛は隣人に対して悪を行いません。それゆえ、愛は律法の要求を満たすものです。


이는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겠지요.

출애굽기 20장 13절~17절
“13.살인하지 말라
14.간음하지 말라
15.도둑질하지 말라
16.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殺してはならない。
姦淫してはならない。
盗んではならない。
あなたの隣人について、偽りの証言をしてはならない。
あなたの隣人の家を欲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の妻、男奴隷、女奴隷、牛、ろば、すべてあなたの隣人のものを欲してはならない。」

지난 번에 헌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 나라에는 수많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법이든 간에 헌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십계명을 비롯해서 어떠한 율법이나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적용은 주님 안에서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법률 중에서 좋은 법이라면 그 법을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서 시행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 법이 훌륭한 법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헌법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도 없고 도입해서도 안 되는 법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목사님이 한 말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이나 가르침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그 즉시로 무효가 되는 가르침, 말하자면 절대로 따라서는 안 되는 가르침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점을 일단 염두에 두고 다음으로는 이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37절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비유에 보시면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강도를 만난 사람, 둘째는 제사장, 셋째는 레위인, 넷째는 사마리아인이지요.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들이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옷을 벗기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 점을 기억해두시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갔는데 이 모습을 보고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피하여 지나갔다고 해요. 다음으로 누가 지나갔냐 하면 레위인도 지나갔다고 하는데 역시 그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은 불쌍히 여겼다고 해요.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 다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막까지 태워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늦었나 보죠? 그 사람과 같이 그 주막에 묵고는 다음 날 그 주막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기는 가야 할 길이 때문에 출발해야 하지만, 저 사람을 돌보아주라고 하면서 두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다고 하니까, 요즘 기준으로 한다면 쉽게 생각해서 하루 1만엔, 10만원이라고 한다면 2만엔, 20만원을 그 여관 주인한테 주면서 저 사람을 좀 돌봐달라고 하고, 그리고 만약에 돈이 부족하면 내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를 텐데 그 때 내가 주겠다고까지 말했다고 해요.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멀쩡한 사람이야 제사장이다 레위인이다, 아니면 사마리아인이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이 다쳤으면 어떤 사람인지도 안 나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시면 주막에 묵었는데, 그 사람이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목숨은 붙어 있어서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 사마리아 인이 떠날 때까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나중에 깨어난다 하더라도 자기를 돌봐 준 사람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이 사마리아 사람이다, 라는 말씀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 마지막에 뭐라고 하십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니까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뜻을 머릿속으로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특별한 문제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말씀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자, 아까 어느 한 부분을 기억해 달라는 말씀 드렸지요? 그게 어디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땠느냐 하면 단순히 쓰러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땠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거의 죽은 것 같았다는 것이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단순히 그 사람을 지나쳤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했다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피해갔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사장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요, 레위인은 출애굽부터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지요.

그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
“11.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이외에도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율법을 잘 아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단순히 그들이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 피해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의 모습이 어땠다고 해요. 거의 죽은 것 같았다고 하잖아요.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죽어 있는 사람이라면 괜히 만졌다가 부정해지면 어떡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순히 부정해지면 좀 찝찝하다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정해지면 하나님의 일을 7일 동안 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를 요즘식으로 바꾸어 말해볼까요? 지금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정해지면 7일 동안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고 해보죠.

그런데 주일날 아침 제가 교회에 오는 길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요. 물론 요즘 같아서는 전화로 112나 119로 신고를 하면 되겠습니다만, 자, 우선 사람을 돌봐주어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살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괜히 만졌는데 죽어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율법적으로 본다면 부정해진 것이니까 그 날 예배를 인도하지 못해요.


그러나 제가 만지고 돌봐주었더니 잘못하면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릴 수가 있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는 그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부정해질 수도 있다는 각오, 그 날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가지고 그 사람을 만져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날 주일 예배를 위해 못 본척하고 그냥 교회로 와야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앞서 말씀 드렸던 믿음의 헌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율법이고 교리이고 간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은 그것은 완전히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망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장 그 사람, 우리 이웃을 돌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빨리 그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백날 인도해봐야 거기에 이웃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히 헛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우리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이웃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걸 안 지켜. 성경에는 저렇게 적혀 있는데, 저 사람은 저걸 안 지켜.

이건 올바른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는 그와 같은 해석이나 주장은 주님 앞에서 당장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이웃을 비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는 굿 뉴스 즉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어요. 그럼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 우리가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웃을 비판하면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1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神は愛です。)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율법도 사랑이고 복음도 사랑입니다.
도저히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랍고도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값지고 놀라운 사랑의 빚을 깨닫고, 우리 이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리 이웃을 위한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널리 전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3회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
← 제381회 채워야 하는 것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
홍성필 목사 설교_이카호중앙교회_http://www.ikahochurch.com
제381회 채워야 하는 것
20232월 19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23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3章 7節
“7.すべての人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なさい。税金を納めるべき人には税金を納め、関税を納めるべき人には関税を納め、恐れるべき人を恐れ、敬うべき人を敬いなさい。”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23번째 시간으로서 “채워야 하는 것” 満たすべき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6절과 7절을 살펴보며 세금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7절을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이 구절을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구분을 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앞부분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 전반부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7.すべての人に対して義務を果たしなさい。税金を納めるべき人には税金を納め、関税を納めるべき人には関税を納め、

여기서 조세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일반적인 세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관세는 무엇입니까. 관세라고 하는 것은 외국 물건을 수입해서 판매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국내 생산자들에게 불이익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똑 같은 품질의 물건인데 환율이 낮은 외국에서 수입해서 그대로 판매할 경우 국내의 생산자를 보호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관세를 부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동일한 수준의 물건이라면 국산품보다 수입품 가격을 높임으로 해서 자국민의 경제활동을 보장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관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습니다만,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내가 세금을 내도 대부분 나한테 돌아온다는 마음이 별로 없다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급적 세금을 안 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로 많은 국민들이 세금을 안 내느냐 하면, 아니요. 대부분이 성실하게 납세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세무서에 가서 신고를 하고 왔어요.

그렇다면 나한테 돌아올 부분도 별로 없는데도 왜 사람들이 내고 있습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요?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더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내지 않으면 나한테 불이익이 생겨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내도 나한테 좋은 일은 없지만, 안 낼 경우 내가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낸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만이 아니라 마땅한 소득이 없는 사람들도 신고를 해야 합니다. 제가 세무서에 가서 신고를 한 이유도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내야 할 세금이 있든 없든 간에 세무신고는 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좀 불안해집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어쩌면 많은 분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로마서 5장 1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여기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여기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에덴에서의 사건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요. 뱀을 가장한 마귀가 하와를 유혹합니다.

창세기 3장 4절~6절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すると、蛇は女に言った。「あなたがたは決して死にません。
それを食べるそのとき、目が開かれて、あなたがたが神のようになって善悪を知る者となることを、神は知っているのです。」
そこで、女が見ると、その木は食べるのに良さそうで、目に慕わしく、またその木は賢くしてくれそうで好ましかった。それで、女はその実を取って食べ、ともにいた夫にも与えたので、夫も食べた。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 열매를 따먹고,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었더니 그도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すなわち、ちょうど一人の人の不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罪人とされたのと同様に、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義人とされるのです。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이라는 죄를 엄청난 죄를 저지름으로 해서 받은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16절~19절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女にはこう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苦しみとうめきを大いに増す。あなたは苦しんで子を産む。また、あなたは夫を恋い慕うが、彼はあなたを支配することになる。」
また、人に言われた。「あなたが妻の声に聞き従い、食べてはならないとわたしが命じておいた木から食べたので、大地は、あなたのゆえにのろわれる。あなたは一生の間、苦しんでそこから食を得ることになる。
大地は、あなたに対して茨とあざみを生えさせ、あなたは野の草を食べる。
あなたは、顔に汗を流して糧を得、ついにはその大地に帰る。あなたはそこから取られたのだから。あなたは土のちりだから、土のちりに帰るのだ。」

그들이 받은 형벌은 임신과 출산, 즉 자손에 대한 고통과 생계에 대한 저주,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이라고 하는 멸망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은 본래 대단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도 첫째나 둘째도 아닌 막내였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하시고는 왕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도 함께 하시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버립니다. 그때 우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전쟁터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그리고 다윗 왕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신의 충신의 아내를 빼앗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다윗의 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이를 숨기기 위해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일부러 전사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일을 아무도 몰랐을까요?

“한 가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가지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一つの嘘を本当らしくするためには、いつも七つだけ嘘を必要とする。

이는 종교혁명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말입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양진(楊震)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한 사지(四知)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지, 즉 네 가지 아는 것이라는 뜻인데, 이는 “천지 지지 여지 아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이 있어요.

天知る地知る人知る我知る

누군가가 나한테 뇌물을 주면서,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해봐야 정말 아무도 모르느냐고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알고 나도 아는데 아무도 모르는 게 무슨 소리냐 하는 것이지요.

다윗과 밧세바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겠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 의하면 다윗은 목욕을 하는 여인을 보고 누군지 알아보도록 사람을 보내요. 그리고 그를 또 데려오라고 전령을 보냅니다. 그럼 왕이 부르는데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오겠습니까. 그것만도 여러 사람이 벌써 움직여야 했겠지요.

그리고 와서는 목욕을 하고 잠자리를 함께 했다고 합니다. 그럼 왕이 불러서 온 사람인데, 밧세바가 무슨 혼자 와서 샤워하고 침실로 갔겠습니까. 여기서도 여러 여인들이 시중을 들었겠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이제 구체적인 이름이 나와요. 사무엘하 11장 14절~15절에 보니 그의 부하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라고 합니다.

이게 보통 무거운 죄입니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하 12장 7절 후반부~11절
“7.……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に油を注いで、イスラエルの王とした。また、わたしはサウルの手からあなたを救い出した。
さらに、あなたの主君の家を与え、あなたの主君の妻たちをあなたの懐に渡し、イスラエルとユダの家も与えた。それでも少ないというのなら、あなたにもっと多くのものを増し加えたであろう。
どうして、あなたは主のことばを蔑み、わたしの目に悪であることを行ったのか。あなたはヒッタイト人ウリヤを剣で殺し、彼の妻を奪って自分の妻にした。あなたが彼をアンモン人の剣で殺したのだ。
今や剣は、とこしえまでもあなたの家から離れない。あなたがわたしを蔑み、ヒッタイト人ウリヤの妻を奪い取り、自分の妻にしたからだ。』
主はこう言われる。『見よ、わたしはあなたの家の中から、あなたの上にわざわいを引き起こす。あなたの妻たちをあなたの目の前で奪い取り、あなたの隣人に与える。彼は、白昼公然と、あなたの妻たちと寝るようになる。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셔서, 그의 목숨을 노리던 사울로부터 구원해주셨고, 부와 권세와 명예와 뿐만 아니라 여인까지도 모두 다 그에게 더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었더라면 이것도 저것도 다 줬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씻을 수 없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선 그 자녀들 사이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서 형제들 사이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났더니 이제 그 자녀 중에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다윗은 광야로 내몰리게 되고는, 결국 그가 가장 아끼던 아들 압살롬은 그의 부하 요압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40년을 다스리게 되었다면 70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되지요. 젊었을 때에는 그의 공적이 화려하게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 밧세바 사건을 사이에 두고 그 이후에는 그의 공적이 사라집니다. 성경은 그가 죽는 수십 년 동안의 통치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본인만이 아니라 본인의 주변이나 자손들에게 불행이 닥친다는 것은 에덴이나 구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요? 그렇습니다. 감사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에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무화과 이파리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히 거짓말을 해가면서 나 자신을 가리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이 무너지고 뿐만 아니라 내 가정이 무너지고 결국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 후반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恐れるべき人を恐れ、敬うべき人を敬いなさい。”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하고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사실 모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일본 뉴스를 보면 지난 동경올림픽을 둘러싸고 뇌물을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옵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들이에요? 머리가 나쁜 사람들입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많이 배운 사람들, 이 시대에 엘리트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저렇게 경찰한테 잡혀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5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恐れなければならない方を、あなたがたに教えてあげましょう。殺した後で、ゲヘナに投げ込む権威を持っておられる方を恐れなさい。そうです。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この方を恐れなさい。

오로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물질이나 봉사로 섬기는 것을 단순히 벌 받을까봐 한다면, 여기에는 무엇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가 없는 것이지요.

감사가 없다면 이는 아, 그런가보다, 하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주어서는 안 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그렇습니다.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에덴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을 것 같습니까.

창세기 2장에 기록된 에덴의 모습을 보시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기쁨과 감사로 충만할 것 같은데, 그들은 여기에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기어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뱀의 탈을 쓴 마귀가 기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다윗 왕, 이제 그는 이스라엘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실상부한 영웅이자 절대군주였습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다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더 주었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여기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기어옵니다. 세상적인 육적인 유혹들이 슬금슬금 기어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된다면, 여기에는 두려움이 오게 됩니다. 피곤함이 오게 되지요. 나아가 온갖 유혹들이 나를 삼키기 위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에 있어서 틈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틈을 보이는 순간 마귀는 하와나 다윗에게 접근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9절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身を慎み、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あなたがたの敵である悪魔が、吼えたける獅子のように、だれかを食い尽くそうと探し回っています。
堅く信仰に立って、この悪魔に対抗しなさい。ご存じのように、世界中で、あなたがたの兄弟たちが同じ苦難を通ってきているのです。

우리는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들을 대적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대적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움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대적해서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가 있었더라면 다윗은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요, 무엇보다 아담과 하와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기쁨과 감사로 채움으로 말미암아 마귀 사탄을 대적하여 물리쳐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생명과 구원을 얻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81회 채워야 하는 것 →

← 제380회 하나님 나라의 세금

 

반응형
Posted by 홍성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