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회 선에 속한 사람(3) - 사랑의 대상
2023년 1월 22 설교 - 로마서 강해 119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13절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2節∼13節
“12.望みを抱いて喜び、苦難に耐え、ひたすら祈りなさい。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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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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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9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3) - 사랑의 대상” 善側の人(3)-愛の対象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두 구절입니다만, 12절과 13절 중에서 우선 두 13절부터 살펴보고 마지막에 12절을 살펴보도록 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13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3節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이 말씀,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어쩌면 이 말씀은 지금까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여겨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우선 이 구절의 형식부터 살펴봅니다.

이 13절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앞에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는 말씀과 뒤에는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라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우선 앞부분부터 볼까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

(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


자, 여러분께 누가 이 말씀을 들고 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말하기를, 성경에 보면 우리가 쓸 것을 공급하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또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느냐.

자, 이렇게 말을 했다면,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겠지요?

“내가 좀 요즘 많이 어렵다. 돈 한 100만엔 정도만 꾸어달라.”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번 성경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꾸어준다.
2번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이니 안 꾸어준다.
3번 기타.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경 안에서 끝나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성경 따로 현실 따로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예수님은 성경 속에 있기만 한 이야기이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이지 현실에는 죄가 사해지지 읺았다……라고 하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따로 현실 따로>라고 하는 2번은 좀 문제가 있겠지요.

그럼 이제 남은 것은 1번과 3번입니다.

돈이 많은 분들이야 100만엔, 한국 돈 1000만원 정도가 적을지는 모릅니다만, 우리 같은 서민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 돈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나한테 100만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그냥 빌려주기에는 아주 상당히 무리가 있어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주여 믿습니다>하고 빌려줘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왔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니, 교회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곳이 아니냐.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내가 정말 절실하게 얼마가 필요하니까 돈을 좀 빌려달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그 사람한테 돈을 빌려줘야 돼요? 아니에요?

자, 우선 13절 앞부분부터 다시 한번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13.聖徒たちの必要をともに満たし、

여기서의 주어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저 <사람>이라고 되어 있나요? 아닙니다. 여기서의 주어는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이는 교회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본다면 총무부나 관리부 같은 곳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그 회사 직원들이 쓸 물건들을 파악해서 공급하는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우선 책상이나 의자, 컴퓨터 등이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전화기, 필기도구, 서랍장, 그 외에도 다양한 문구류 같은 것들이 착착 공급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이뻐서예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공짜가 있어요? 의자, 책상, 컴퓨터 뿐만이 아니라 볼펜 하나, 지우게 하나까지 다 돈이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급해 주는 이유는, 그 물품들을 써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뭘 달라고 하면, 볼펜 하나라도 마음대로 줄 수 있나요? 아무리 그 회사에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회사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반면에 회사에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이 회사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아무리 비싼 장비라 하더라도 기꺼이 구입을 해서 그 사람에게 공급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단어는 <교회>라고 하는 말과 하나가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무작정 도우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교회 구성원이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보면 정말 교회 물건을 안 아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성경이나 찬송가 같은 것들을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가지고 가요.

그러면서 왜 그걸 가져가냐고 하면, 집에서 보려고 한다는 거예요.

아니, 회사에서 준 컴퓨터를 집에 가져가서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생각해봐요. 그게 정상입니까.

교회에 있는 성경이나 여러 물품들도 사실 그게 다 돈이잖아요. 교인들 헌금으로 구입을 한 것인데, 그걸 왜 자기 가방에 넣느냐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필요하면 자기가 돈을 내서 사면 되잖아요. 요즘 같은 경우에는 인터넷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그냥 가지고 가요.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 보면 제가 섬기던 성가대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요. 성가대에 보면 성가대 가운이 있잖아요. 그럼 동복이 있고 하복이 있어요.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성가대원들이 자원해서 그 가운을 가져다가 드라이를 맡기고 난 다음에 가져와요. 그러면 그걸 교회에서 보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 가운이 몇 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언제 사라지냐 하면 누군가가 드라이를 맡긴다고 가져간 다음에 안 가져온다는 거죠. 물론 그게 누가 가져갔는지 체크를 하면 되겠지만, 그게 잘 안 됐나 봐요.

그렇다고 사실 그걸 체크를 꼭 해야 되요? 성가대 가운이라고 하는 게 무슨 외출복으로 입고 다닐 수도 없는 옷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운영위원으로 있을 때 보니까 회의시간 때 당시 총무님이 하는 말씀이, 아니, 무슨 집에서 잠옷으로 입나, 그걸 왜 안 가지고 오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건 예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이 그런 일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성가대에서도 보면 연습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해오시거든요.

그런데 누구는 사람들이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반찬을 자기 집에 가져간다고 챙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거 별거 아닌 것 같지요? 예전에 보니까 다른 교회에서도 똑 같은 일들이 있더라고요. 그거 가지고 서로 다툼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고 그럽니다.

아니, 사람들이 다 먹고 난 다음에 남은 반찬이나 음식을 싸가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요. 가만히 놔두면 버리게 되는데, 그럴 바에야 가져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 대접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그걸 자기가 먼저 챙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습니까.

이처럼 13절에서 말씀에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하는 데에 힘쓰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오해가 없도록 말씀을 드리면, 앞서 말씀 드린 마태복음 5장 42절 말씀도 살펴보고 넘어갈까요.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여기서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슨 큰 돈이나 재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웃에게 비싸고 큰 돈을 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마태복음 5장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고 고발까지 했어요.

그런데 뭘 빼앗으려고 해요? 예, 내가 입던 속옷이에요. 그렇다고 이건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새옷도 아닌, 그리고 겉옷도 아닌 그냥 내가 입던 중고 속옷, 그야말로 값어치가 별로 없는 것인데도 이걸 빼앗으려고 난리를 쳐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하면, 속옷만이 아니라 차라리 그냥 입고 있던 겉옷, 별로 값도 안 나가는 겉옷 헌 거까지 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외에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わたしの弟子だからということで、この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一杯の冷たい水でも飲ませる人は、決して報いを失うことがありません。」

자, 무엇을 주라고 하세요? 예, 냉수 한 그릇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값어치가 없는 것을 주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 목이 말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큰 돈이 필요해요? 금은보석이 필요합니까. 아니에요. 물 한 그릇이 필요한 것이지요.

주님은 무슨 큰 돈이나 재산을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것을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뒷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努めて人をもてなしなさい。)

자, 여러분께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적지 않게 좀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게 어떤 거냐 하면, 예를 들어서 그런 경우입니다.

가끔 그런 메일을 받아요.

제가 이번에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이카호중앙교회에서 꼭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동경에 아는 분이 계셔서 일본에 처음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우리 교회에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경에서 얼마나 걸립니까,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같은 동경이나 그러면 가능성은 있겠지요. 여차하면 택시를 타고 오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경에서 여기 군마까지 택시를 타고 오실 수도 없잖아요.

거기다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보시면 교회 주소도 다 나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가 어디쯤 되는지 질문하시는 것을 보면, 인터넷 검색이나 일본 지리에 있어서 적지 않게 어려움이 있는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교회에 다녔던 자매가 얼마 전에 오랜만에 왔었잖아요? 그러면 약속하기는 어렵지 않지요. 무슨 무슨 역에 어디 출구에 몇 시까지 오면 데리러 가겠다고 하면 됩니다. 여기 군마에 4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그게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일본에 처음 오시는 분, 군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는 분이라면 일본 지리는 물론이고 언어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으신 분이실 텐데, 그런 분께, 동경역이나 우에노 역에서 죠에츠 신칸센을 타고 다카사키까지 오시고는, 거기서 죠에츠센으로 갈아타서 시부카와 역으로 몇 시 몇 분까지 오시라고 할 수 있겠냐는 거죠.

사실 저 자신도 가끔 동경에 가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일본에 처음 오시는 분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오셨다면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식사라도 하시고, 그리고 기왕에 온천으로 유명한 이카호까지 오셨다면 온천이라도 모셔다 드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정도로 해야 좀 손님을 모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실제로 그 정도로 손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오신다고 하니까 다카사키나 시부카와가 아닌, 정말 하네다 공항까지 가서 모셔와서는 온천이나 식사는 물론이고 호텔까지 잡아드리고는 매일같이 제가 운전해서 관광도 해드리고 그랬던 적이 있었지요.

언제 그랬냐 하면 제가 결혼하기 전에 제 아내 될 사람과 장모님 될 분이 오셨을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부족했었습니다만, 그래도 장모님이 오신다면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여기 왔다가 가신 다음에 만에 하나라도 장모님이, “에이, 그 홍 목사, 안 되겠어” 뭐 이러셨다가는 큰일 나는 거 잖아요.


하지만 다른 분들까지도 그 정도로 대접을 해드릴 시간이나 경제적 여건이 되냐 하는 것이지요. 큰 교회 같은 경우에는 손님을 모실 경우 비용이 나올 지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는 다 개인 비용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경제적인 것도 그렇고 시간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현실적으로는 좀 어려움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건 다 제가 부족해서입니다만, 그 정도로 대접을 해드렸다고 해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가 이 정도로 대접을 해드렸으면, 이 정도는 감사헌금이나 선교후원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다른 교회에서도 보면 적지 않게 있다고 해요. 누가 와서 이렇게 극진히 대접을 하고 비용도 들었는데 그 사람은 헌금을 얼마 밖에 안 해서 서운했다……아마도 교회 운영에 조금 관여해보신 적이 있다면 이런 일들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게 정말 손님을 대접하는 진짜 의미가 있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렇게 목회를 하다 보면 단기선교를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의를 가끔 받습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까지 한 3~4번은 받아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아무리 오시는 팀이 자기 비용으로 한다고 해도, 그럼 우리가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일정이나 준비도 그렇고, 신경 쓸 일이 한 둘이 아니지요. 그리고 사실 교회 앞에서 이벤트를 해 봤자, 다들 차를 타고 다니고 무슨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요.

그렇다고 시내에 나가서 한국처럼 노방전도를 한다고 해도, 실제 교회 부흥으로 이어질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불필요한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부터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단기선교라고 하는 것이 선교지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이를 보내는 교회 쪽에서의 이벤트 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어떤 선교사님이 그러시더래요. 외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은 단기선교를 안 오는 것이라는 말을 하더랍니다.

뭐, 그래도 큰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파송 나와 있을 경우는 다르겠지요. 그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월급이나 주거비, 수당, 애들 학비 같은 것이 꼬박꼬박 나오고 그런 곳이라면, 본 교회에서 단기선교를 보내겠다는데 그걸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회사에서 본다면 자기 월급 주는 본사에서 자기가 있는 지사로 손님이 온다는데, 만사를 제쳐두고 최선을 다해서 신경을 써야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 교회 사정으로 봐서, 이 단기선교 또한 좀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개인적으로 오신다는 분께는 “저희 이카호중앙교회 주일 예배는 오전 11시부터 있고, 모든 분들께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단기선교에 대한 문의에 대해서는, 저희 교회 사정을 말씀 드리고는 정중하게 좀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이런 일들이 혹시나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하는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답은 역시 성경에 있었습니다.

자, 성경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자, 질문합니다.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게 무슨 사이비 같은 질문이냐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레 짐작하지 마시고,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다시 질문합니다.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예, 이 질문에 대해서 “목사를 대접해도 복을 안 받습니다”라고 하신다면 듣는 목사 기분 나쁘겠지요.


자, 그럼 당장은 동의하시기가 좀 어렵다 하더라도, 일단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질문입니다. 왜 목사님을 대접하면 복을 받습니까.

목사님은 주의 종이니까?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자, 성경말씀에 보시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14절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13.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14.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イエスはまた、ご自分を招いてくれた人にも、こう話された。「昼食や晩餐をふるまうのなら、友人、兄弟、親族、近所の金持ちなどを呼んではいけません。彼らがあなたを招いて、お返しをす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食事のふるまいをするときには、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を招きなさい。
その人たちはお返しができないので、あなたは幸いです。あなたは、義人の復活のときに、お返しを受けるのです。」


주님은 이 말씀에서 어떤 사람을 대접하라고 말씀 하십니까.

여기서 주님 말씀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貧しい人たち、からだの不自由な人たち、足の不自由な人たち、目の見えない人たち)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돈이 많거나 힘이 있거나 하는 사람들한테 대접을 했을 때 그에 대한 보답을 받게 되면 나중에 하늘에서 상이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상대방이 너에게 보답을 못해줄 사람한테 대접을 하라, 그래야 하늘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국 같은 데에 보면 이른바 뇌물을 주거나 받았을 때에 <대가성이 있는지>가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이나 어떤 선물을 받았을 뿐이라면 죄가 안 되지만, 그걸로 인해서 어떤 특혜를 준 근거가 있게 되었을 때 죄가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아니, 무슨 가족이나 친인척도 아닌데, 아무런 대가 없이 정치인이나 공직자들한테 큰 돈이나 비싼 물건을 줄 리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다만 그게 당장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다 자기가 받을 대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바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갚지 못할 사람을 대접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갚아주겠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보면 글쎄요. 큰 교회에 보면 무슨 직분을 받기 위해서 목사님한테 돈도 갖다 바치고 선물도 보낸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받은 직분이 주님 앞에서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뭐, 지금은 아직 그런 상황은 아니겠습니다만, 나중에 우리 교회가 커지고 중요한 직분을 임명할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좀 특별한 방법을 써서 사람의 생각이 개입되지 않게 할 생각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목사한테 대접을 해 봤자 무슨 받을 대가가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까. 그런 힘이 목사한테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한테 대접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목사님이 무슨 주의 종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 말씀은 꼭 목사만이 아니라, 뭐예요?

예, 우리가 진정으로 대접해야 할 사람은 재력이나 권력이 있어서 나한테 인간적으로 보답을 해주거나 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나에게는 아무런 인간적인 보답을 해줄 수 없는, 그런 이웃을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섬겼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크나큰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건 정말 간증입니다만, 2015년에 일본에 와서 우리 교회를 보니까 성도님이 딱 두 분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그 중에서 한 분이 안 오세요. 그러니 교회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어떻게든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정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정말 심각한 상황까지 갔어요.

그래서 이제 안 되겠다 해서 정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님의 일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가능성이 안 보여요. 이대로 간 다면 머지 않아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제 비자가 종교자격이니까 목사로서의 일 말고는 할 수가 없거든요.

전도지도 만들어서 교회 주변에 돌려보았지만 무슨 사람이 있어야지요. 교회 주변을 돌아보아도 주택단지들이 좀 있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띄엄띄엄 집이 있을 뿐인데 별로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인데, 어떤 일본 분은 제가 찾아가니까 자기가 나이 들어서 이제 죽을 때가 다 됐기 때문에 왔냐고 그러더라고요.

잘못하면 이러다가 괜히 오해라도 생기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동영상으로 주일 예배 때에 전해드렸던 말씀을 다시 촬영하고 인터넷에 올리고는,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전세계에 매주 메일을 보냈어요.

그렇다고 확고한 희망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한테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일을 꾸준히 보냈던 이유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먹고 살긴 해야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금씩 선교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정말 신기하지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이 후원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면, 감사한 것을 넘어서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떤 분은요, 그 주일에는 선교후원을 해주신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다는 말씀을 했더니만, 그 날로 은행에 가셔서 비싼 수수료까지 내시면서까지 일본에 있는 은행으로 직접 보내주신 분도 계십니다. 그러니 감동이 안 되겠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좀 이상한 말이지만 진심으로 성경이 믿어집니다.

출애굽기에 보시면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 어떻게 홍해가 갈라질 수 있느냐고 의심을 합니다.

근데 제가 살아온 것이 얼마 되지 않은 세월이지만,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한 과정만 보더라도, 홍해는 갈라지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루하루 홍해가 갈라질 정도의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제 상황이 그래요.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슨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광야에서의 삶처럼 하루라도 만나가 안 내리면 큰일날 것만 같은, 제게 있어서도 그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다 그와 같은 정말 만나와도 같은 후원의 손길 덕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저한테 무슨 대가를 바라시겠습니까.

여기는 일본이고 하기 때문에 후원을 해주신 분들께 그 흔한 기부금영수증 하나 못 해드려요.

거기다가 대부분이 다 한 번도 뵌 적도 없는 분들인데, 제가 그분들께 인간적으로 무엇을 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인간적인 대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만나와 같은 후원을 해주시는 그런 분들이,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을 못 받는다면 누가 받겠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힘들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저는 분명히 여러분께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100프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돈을 꾸어드려요? 아니면 세상적인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드려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기도로 도움을 드리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イエスは言われた。「人にはできないことが、神にはできるのです。」

목사나 교회한테 세상적인 도움을 구하는 것은, 그것은 마치 변호사한테 가서 수술을 해달라거나, 의사한테 가서 재판을 도와 달라거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돈이나 세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가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만군의 주가 계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望みを抱いて喜び、苦難に耐え、ひたすら祈りなさい。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듣고 이루어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며 인내할 수 있고,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며, 우리 이웃, 정말 인간적으로는 갚지 못할 우리 이웃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에, 주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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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6회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2023년 1월 15 설교 - 로마서 강해 118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0절~11절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10節∼11節
“10.兄弟愛をもって互いに愛し合い、互いに相手をすぐれた者として尊敬し合いなさい。
11.勤勉で怠らず、霊に燃え、主に仕え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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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8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2) - 사랑의 시작” 善側の人(2)-愛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지난 주에 배웠던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랑들이 말하는 <사랑>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 이상형이나 아니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겠지요. 이를 바꾸어 말하면 객관적으로 보아서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 그와 같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선한 사람을 위해서, 의인을 위해서,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길을 잃은 양에 대한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7절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かが羊を百匹持っていて、そのうちの一匹をなくし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野に残して、いなくなった一匹を見つけるまで捜し歩かないでしょうか。
見つけたら、喜んで羊を肩に担ぎ、
家に戻って、友だちや近所の人たちを呼び集め、『一緒に喜んでください。いなくなった羊を見つけましたから』と言うでしょう。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一人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のためよりも、大きな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우선 양 100마리 중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있는데 나머지 한 마리가 어디 갔는지 안 보여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절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はどう思いますか。もしある人に羊が百匹いて、そのうちの一匹が迷い出たら、その人は九十九匹を山に残して、迷った一匹を捜しに出かけないでしょうか。

그러니까 사라진 양 한 마리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본다면 길을 잃지 않은 양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에요. 퍼센트로 하면 어떻습니까. 99%는 길을 잃지 않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길을 잃지 않은 99%의 양들이 대단히 똑똑했다기 보다는 그저 평균 정도라고 할 수 있겠고, 오히려 나머지 1%의 양이 좀 부족했었다고 하겠지요.

99%는 멀쩡히 길을 잃지 않았는데, 나머지 1%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 1%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세상적으로 본다면 양 아흔아홉 마리와 양 한 마리, 어느 쪽이 귀하겠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길을 잃지 않은 평균적인 양들 아흔아홉 마리와 길을 잃은 좀 부족한 한 마리 양.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겠지요?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를 챙겨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멀쩡한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둔 채로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는, 그것도 모자라서 친구들을 불러 잔치까지 벌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양은 본래 어깨에 메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 무게는 새끼 양이라 하더라도 20킬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20킬로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만, 요즘은 겨울이라 난로에 넣을 등유를 사가지고 오는데, 그 통 하나에 들어가는 기름 무게가 20킬로거든요. 이게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어깨에 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양을 발견한 기쁨이 그 무게보다도 훨씬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그야말로 어깨에 메고 춤이라도 출 정도로 너무나도 기뻤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목자는 정말 똑똑하고 영리한 양들, 사랑 받아 마땅한 양들을 뒤로한 채, 참으로 미련하고 말 잘 안 듣고 불순종한 양, 정말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양을 발견하고는 너무나도 기뻐했다는 주님의 마음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럭비라는 운동경기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리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대중적인 스포츠라고 하겠습니다. 웬만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는 럭비부가 있을 정도로 아주 활발합니다.


일본에서는 코시엔이라고 해서 전국고교 야구대회가 유명합니다만, 럭비도 전국 고교 대회가 있는데, 매년 겨울에 오오사카에 있는 하나조노 럭비경기장에서 열려요. 그래서 고교야구는 코시엔, 그리고 고교럭비는 하나조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럭비는 미식축구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우선 공 모양이 미식축구와 비슷한 타원형을 한 계란 모양인데 럭비가 좀 더 큽니다. 그리고 공을 들고 뛰는 것도 똑같은데, 미식축구는 헬벳에다가 이런저런 보호장비가 많지만 럭비는 그런 것을 쓰지 않고 그냥 맨몸으로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고 하는, 상당히 좀 과격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경기를 뛰는 한 팀의 인원이 구기종목 중에서는 제일 많은 15명이에요. 그러니까 양쪽 팀을 다 합하면 서른 명이 동시에 경기를 하는 셈이지요. 축구가 골기퍼를 포함해서 11명이고, 미식축구도 11명인데, 한 팀에 15명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라고 하겠지요.

그만큼 인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 번에 호흡을 맞춰야 하는 인원이 많다는 뜻이니까, 팀워크라고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쿄토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새로 체육 선생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전 일본 국가대표 럭비선수였습니다.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서 체육선생님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나중에 그렇게 회고했습니다. 자기는 이제 학교에 처음 가서 럭비부를 맡게 되면, 럭비부 학생들은 국가대표 출신 선생님이 왔다고 좋아할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꿈과 기대에 부풀어서 다음날 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럭비부 집합 시간이 됐는데 학생들이 하나도 안 나타났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학교는 정말 문제아들만 모인 학교였다고 합니다. 학교 유리창은 여기저기가 깨지고, 그리고 럭비부 부실에 가보니까 여기저기에 담배꽁초가 쌓여 있었대요.

수업중에도 학생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짓들이나 하고, 그리고 선생님들도 이미 포기를 해서 혼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괜히 건드렸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학교 꼴이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새롭게 부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열정이 넘쳤겠습니까. 그래서 선생님들한테도 좀 잘 해보자고 말을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한테 아무리 역설을 해 봤자 그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냐 하면, 이미 다 해봤다는 거예요.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자기가 맡은 럭비부를 보면 그냥 애들이 와서 선배들이 후배를 괴롭히고, 연습이라고는 가끔 모여서 좀 시늉만 하다가 힘들면 그만 두고……그런 식이었으니 실력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다가 학생들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불량학생들의 소굴……완전히 그런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선생님도 포기를 했느냐 하면, 아뇨, 어떻게든 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집 한집 찾아 다니면서 아이들을 연습에 나오게 하고, 그렇게 해서 정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럭비부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아이들이 전혀 안 따라준다는 거예요. 맨날 동네에서 문제나 일으키고 경찰서에 끌려가면 그걸 또 가서 데려오고……그런 나날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좀 승부욕을 생기게 해줘야겠다 해서 다른 학교와 연습시합을 하기로 했대요. 그런데 웬만한 학교에서는 자기네 학교와 연습시합을 하기 싫어했다는 거예요. 아니, 실력도 없고 그런 학교와 연습시합을 해봤자 시간낭비라는 것이죠.

그래도 이 선생님이 가서 몇 번이나 머리를 숙여가며 어렵게 연습시합을 하기로 하고, 그리고 자기 사비까지 털어서 학생들 하나하나의 기차표를 다 사고 그 날 아침에 역에서 기다렸다고 해요. 그런데…? 예, 한 놈도 안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런 참 말로 할 수 없이 형편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은 정기체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부임한 이후로 첫 공식대회예요.

거기서 처음에 붙은 학교가 어디였냐 하면 당시 럭비 명문 하나조노 고등학교였다고 합니다. 경기가 시작했습니다. 고교 럭비는 전반 30분, 그리고 후반 30분입니다.

경기가 이제 끝났습니다. 럭비 명문 하자조노 고등학교와 문제아들의 오합지졸인 이 고등학교의 승부는 어떻게 됐을까요. 점수 결과는 112대 0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점수가 야구나 축구처럼 1점씩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는 4점, 2점, 3점……이런 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만, 보통 럭비 점수라고 한다면 대충 20~30점대 30~40점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112대 0이라고 한다면 이는 참패도 보통 참패가 아니겠지요.

뭐, 굳이 비교한다면 프로팀과 초등학생 정도의 실력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이 선생님이셨다고 한다면, 시합이 끝나고 돌아온 학생들한테 무슨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그 때까지 그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잖아요. 선생님 말은 죽어라고 안 듣고, 지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문제만 일으키고 하다가 결국 정말 수치스러운 점수로 지고 돌아왔는데, 이노무 자식들 꼴 좋다, 뭐 그러면서 하고 싶은 말이 정말 트럭 한 대 분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선생님, 자기 학생들이 낯뜨거울 정도로 비참한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들을 지켜 보면서 정말 화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났냐고 하면, 이 선생님 하는 말이, 자기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이 말을 들고는 참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열 받아서 험한 말이라도 퍼부어줘도 시원치 않았을 텐데, 이 선생님은, 자기가 그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운 점수, 112대 0으로 지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이 선생님은 뭐라고 했냐 하면, 다른 말은 안 했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다친 데 없냐. 많이 속상했지?”

자신들은 선생님한테 심한 꾸중이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이 말을 듣게 되자, 그 순간 아이들이 울면서 무너졌다고 합니다.

“선생님, 나 정말 이기고 싶어요. 정말 열 받아요. 어떤 일이라도 참을 테니 내년에 저 학교를 이기게 해주세요”라면서 모두가 다 울었다고 해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말합니다. “좋아. 이기게 해줄게. 나만 따라와.”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맹훈련이 시작됩니다. 이제 연습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뛰라면 뛰고, 던지라면 던지고, 부딪치라면 부딪칩니다.

그 결과 1년 뒤 또다시 이 럭비명문 하나조노 고등학교와 붙습니다. 1년 전에 112대 0으로 진 그 학교와 붙었는데, 1뎐 뒤인 그 시합, 경기 막판에 역전을 해서 18대 12로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는 하나조노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럭비 명문학교로서 자리를 잡게 되고, 그리고 이 학교를 통해서 수많은 유명 럭비 선수들이 배출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에요. 이 문제아들이 모였던 학교가 지금은 다른 학교와 합병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학교 이름은 교토에 있는 후시미 공업고등학교이고, 이 선생님 이름은 야마구치 요시하루 선생님입니다. 아직도 살아 계세요.

이게 얼마나 유명하냐 하면 1984년에는 스쿨 워즈라고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 드라마가 당시 엄청 히트를 했었고, 그리고 그 때 제가 중고등학생이었는데, 제 또래 중에서 럭비를 시작했다고 하면 거의 100프로 이 드라마에서 영향을 받고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오늘은 좀 길게 이 럭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여기서 제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아이들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그렇게도 말을 듣지도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반항했던 학생들입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자기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처럼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뭐냐 하면, 이 선생님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을 다른 데에서 찾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을 꾸짖기는 쉬웠겠지요. 너 이 놈들아, 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런 게 아니냐 하는 말, 얼마나 하기 쉬운 말입니까.

그러나 이 선생님의 경우에는 어땠느냐 하면 그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던 것이지요. 저렇게 비참하고 부끄러운 시합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 정작 내가 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것이 하나도 없구나. 다 나 때문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제가 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남 탓을 하게 되면 발전이 없어요. 그러나 자기 탓을 하게 되면 발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일본어학원에서 가르칠 때도 보면 그랬습니다. 어떤 선생님을 보면 맨날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대요. 학생들이 자기 말을 듣지를 않는대요.

어디 그 뿐인가요. 학원 시간표에 자기 자리 글씨가 너무 작대요. 그래서 학생이 잘 안 온대요. 그리고 자기 사진이 어떻고 학원 시스템이 어떻고…… 자, 그런 선생님한테 발전이 있을까요?

주변 선생님들은 다 알고 있어요. 뭘 알고 있었느냐 하면, 자기 학생들 중에서도 그 선생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 학생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소문을 다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선생님이 수업을 너무 못한다는 거예요. 맨날 자기 혼자 떠들고, 그걸 못 알아들으면 성질을 낸다는 거예요. 아니, 학원이 무슨 졸업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 돈 내고 왜 그런 수업을 듣겠습니까.

그래서 학생들이 그 선생님 수업을 안 듣는 건 그 자기 수업에 문제가 있어서인데, 그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무조건 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요. 그러면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뭐라고 하셨냐 하면, 무조건 학생이 옳다는 거예요. 학생들은 바보가 아니다. 자기가 자기 돈 내고 수업을 듣는데 당연히 좋은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만약에 자기 수업에 학생이 줄었다고 한다면, 학생 탓을 하는 것도 아니요, 학원이나 교재 탓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면서 반성하고 그리고 새롭게 수업을 연구해야 한다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수업이 안 좋아질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그 학교 이야기로 잠시 돌아간다면, 이 선생님이 부임한 그 다음 해에 어떤 소문이 돌았대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불량배가 있는데 그 불량배 녀석이 자기네 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소문입니다.

불량배라고 해 봤자 다음 해에 고등학교에 들어온다면 중학생일거잖아요. 그런데도 아주 유명했다고 하니 뭐 대단했겠지요. 그 때 사진을 제가 봤는데, 정말 이게 무슨 중학생이야 할 정도로 좀 살벌하게 생겼습니다.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면 좀 옮기고 싶을 정도의 인상이에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입학식날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것도 혼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기 꼬봉들을 몇 명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이 야마구치라는 선생님이 그 불량배한테 어떻게 했냐 하면, 다짜고짜 가서 <너 럭비 하지 않을래?>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너 싸움 좋아하지? 럭비도 싸움이나 마찬가지야. 그냥 싸움은 나쁜 짓이지만, 럭비에서는 공만 가지면 뭘 해도 된단 말이야.>

이 말에 넘어가서 럭비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시작하고 보니 선생님 말과는 완전 다르더래요. 아니, 그렇죠. 아무리 과격한 럭비라고는 하지만, 다 룰이 있고 규칙이 있는데 공만 들었다고 뭐든 해도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시시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해 자기 선배들이 하나조노 고등학교에 18대 12로 이긴 다음에 기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는, 야…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럭비를 계속 해서 고등학교 때 럭비 명문인 호주로 유학을 갔다 오기도 하고, 그리고 체육대를 졸업하고는 세상에, 그 불량배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 분도 인터넷에서 사진을 봤어요. 이제 그 불량배였던 선생님도 나이를 먹고 정년퇴임을 했지만, 여전히 럭비감독을 계속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사람 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봐도 글쎄요. 길 갈다가도 길을 묻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인상은 안 바뀌더라도 인생은 놀랍게 바뀌지 않았습니까. 동네에서 유명한 불량배인 상태로 자랐더라면 그 인생이야 뻔했겠지요. 하지만 야마구치라는 선생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불량배가 대학까지 나와서 고등학교 선생님까지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남의 탓을 하지 않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으려고 했던 이 선생님 한 사람한테서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어쩌면 성경과도 같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いて悔い改めさせるためです。」

요한복음 12장 47절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だれか、わたしのことばを聞いてそれを守らない者がいても、わたしはその人をさばきません。わたしが来たのは世をさばくためではなく、世を救うためだからです。

2000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나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회개를 시키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너희들은 죄인이니까 너희들이 각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들의 죄값을 치러야 한다……그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이, 너희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누가 십자가를 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셨지만, 우리 탓을 하시거나 우리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주님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누가 남의 탓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의 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부모만 아니었더라면, 내 형제만 아니었더라면, 내 배우자만 아니었더라면, 내 친구만 아니었더라면……이렇게 남의 탓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내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로 나 스스로 홀로 남고 내 주면 사람들은 다 떠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제 누가 떠나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영화배우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함께 영화를 찍는 배우들도 다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이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 저 배우가 마음에 안 든다……이렇게 불평불만을 해보십시오. 그건 누구에 대한 불평불만입니까. 그렇죠. 영화감독에 대한 불평분만 아니겠습니까.

영화감독이 자기 작품에 맞는 사람들을 불러서 캐스팅해놨는데 이 사람도 싫다 저 사람도 싫다고 한다면 그건 감독이나 연출을 맡은 책임자를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한 두 번이면 모를까, 맨날 남의 탓만 하는 배우를,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 하더라도 그냥 지켜만 보겠습니까? 됐어. 싫으면 빠져. 다른 사람 쓸 거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항상 말씀 드리지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왜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우리 주변에 어렵게 모셔다 놓으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럼 그런 주님은 어떤 주님이세요? 그렇습니다. 완벽한 주님,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총감독을 맡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어떻게 주님과 이웃을 동일시할 수 있냐고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데,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 없는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천분의 일, 아니, 천 만분의 일이라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려고 한다면, 정말 우리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억지로 싫은데 좋은 척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보면 가끔 그런 사람들 계세요. 싫은데 억지로 좋은 척 해가면서, 그래도 할말 못할 말 다 하는 사람이 계신데, 그건 올바른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싫은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냐 하면, 억지로 좋은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 내가 저 사람을 정말 싫어하는데, 그러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주신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너는 네가 미워하는 이웃, 네가 싫어하는 그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인사도 안 하던 사이였지만 인사라도 한 마디 하는 것, 그것도 하기 어려우면 나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라도 한 번 해보십시오. 이는 분명 우리 삶에 있어서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 인용한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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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5회 선에 속한 사람(1) - 사랑의 의미
2023년 1월 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7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9절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9節
“9.愛には偽り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悪を憎み、善から離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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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7번째로 “선에 속한 사람(1) - 사랑의 의미” 善側の人(1)-愛の意味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12장 9절에서 시작해서 12장 마지막인 21절까지 크게 보면 하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보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한 번에 다루기 보다는 몇 회에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손자병법이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손무라는 사람이 쓴 병법, 말하자면 전쟁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 자체는 기원전 500년 경에 기록되었다고는 합니다만, 21세기인 지금에 있어서도 단순히 무슨 전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처세술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이처럼 최고의 병법서라고 할 수 있는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는 언제 결정이 난다고 되어 있을까요.

이 손자병법에 의하면 전쟁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는 언제 결정이 나냐고 되어 있냐 하면, 그것은 뚜껑을 열어본 다음이 아닌,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나 있다는 것이에요.

그도 그렇겠지요. 자기 나라에 어느 정도 힘이 있고, 상대방에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면, 전쟁을 하기 전에 이미 승부는 결정 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는 손자가 살아 있던 그 옛날이나 21세기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 믿음에 있어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요.


축복을 받기 위해서, 병이 낫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뭐, 이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더 쉽게 말하자면 장차 천국에 가기 위해서이지요. 좀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축복도 받았어요, 병도 나았어요. 부자도 되었어요. 그런데 천국에는 가지 못했어요. 이렇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쟁과 구원, 사실 좀 무서운 말이기 합니다만,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어떻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는 됐다가 또 언제는 안 됐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결정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여부는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 있을 심판에서 판결이 내려집니다.


성경에는 장차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それなのに、あなたは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さばくのですか。どうして、自分の兄弟を見下すのですか。私たちはみな、神のさばきの座に立つことになるのです。


고린도후서 5장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私たちはみな、善であれ悪であれ、それぞれ肉体においてした行いに応じて報いを受けるために、キリストのさばきの座の前に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우선 이 두 구절은 어떻습니까. 누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까. 죄를 지은 사람만 심판대 앞에 서게 되나요? 아니요. 우리가 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을 조금 아는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서는 모두 바울이 쓴 것인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냐 할지도 모릅니다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そして、人間には、一度死ぬことと死後にさばきを受けることが定まっているように、

여기에도 보시면 모든 사람은 한번 죽는다는 것이 정해져 있고, 그리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 또한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부분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이처럼 성경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 반복적으로 기록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큰 자나 작은 자나 예외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 부자였건 가난했건, 지위가 높건 낮건 상관이 없어요.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길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 언제 결정이 나는 것일까요. 뚜껑을 열어봐야 하나요?

아니요. 이미 심판대에 서기 전, 이 땅에 살고 있을 때 벌써 구원을 받을 사람과 못 받을 사람은 결정이 난다고 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재판은 사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절차도 복잡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는 어떤 증거나 증인이 제출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원고와 피고가 어떤 주장을 하는지, 사실관계나 법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에 심한 경우에는 몇 년이나 걸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변호사가 누구냐,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서 판결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세상 재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세상 재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만을 말한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어쩌면 누구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면하기 위해서 사실을 말하지 않거나, 또는 결정적인 증거를 감추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 만은 없겠지요.


하지만 하늘나라의 재판은 이렇게 오래 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그 보좌 앞에 있는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증인이나 증거가 없더라도 모든 행위, 이는 눈에 보이는 행위뿐만 아니라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까지도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전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없는, 100프로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시간을 끌 필요가 무엇입니까. 이는 완전하고도 완벽한 재판일 것이며 그 재판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을 받게 될 사람은 언제 정해진다고요? 그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정해진다고요? 아니요. 그 심판대 앞에 서기 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을 때 이미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몇 번 있어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이제 어떤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그래서 너는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고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자, 그 때 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 잘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가 씻겨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때 모든 죄가 씻겨져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뭐,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 은혜가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이 말처럼 아무리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심판대 앞에 가서 “아, 나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죄가 해결되었습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보십시오.

만일 이 말이 정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열심히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이 말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한 말, 구원 여부는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다고 말씀 드린 제 말이 잘못된 것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이 말에 의하면 심판대 앞에 가기까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른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만약에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최소한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로마서 12장 9절 이후의 내용은 필요가 없게 되고 맙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피만 의지했다고 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그 때까지 자기 멋대로 하지 못하고 성경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이 미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전쟁의 승패가 전쟁 전에 이미 결정 난다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 또한 그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예요?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 그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구원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9절
“9.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愛には偽り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悪を憎み、善から離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

이 말씀을 단순화 시켜보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에게는 악에 속한 사람과 선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 사람은 어디에 속한 사람? 그렇습니다. 선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선에 속한 사람이냐 하면 바로 <사랑>을 가진 사람이 선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선에 속한 것이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선에 속하지 않은 사람, 즉 악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랑>이 있는 사람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정말 선한 사람만이 사랑이 있고 악한 사람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자, 이 말씀을 보시면 악한 자라 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기 자식한테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을 위한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아무리 악에 속한 자라도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한테도 역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말 아닌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악한 사람도 자기 자식을 위할 줄 안다고 한다면, 그 악한 사람한테도 사랑이 있다는 뜻이 된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한테 잘해준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2절~33절
“32.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自分を愛してくれる者たちを愛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自分を愛してくれる者たちを愛しています。
自分に良いことをしてくれる者たちに良いことをしたとしても、あなたがたにどんな恵みがあるでしょうか。罪人たち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ます。

악인이나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7절~8절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正しい人のためであっても、死ぬ人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良な人のためなら、進んで死ぬ人が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이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누가 그 상을 받느냐 하면 그 상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그와 같은 크나큰 상을 받은 것은 우리가 의인이었기 때문인 아닙니다. 우리가 상을 받을 만한 훌륭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그와 같은 상상도 못하는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적으로 보면 사랑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세상에도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사랑과 세상적인 사랑이 질적으로 다른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정말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전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新しい戒めを与えます。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

예수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보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도 너희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한테까지도 사랑을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성경을 보아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지, 이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 혼동을 하게 된다면, 그저 다른 교양서적들이나 세상적인 사랑 이야기와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랑, 정말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한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이 바로 <선에 속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선에 속한 사람이냐, 아니면 악에 속한 사람이냐,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선에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악에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사랑은 내 사랑을 받아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람이 바로 선에 속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쉽습니까. 만약에 이게 쉽다면 저도 그냥 12장 9절부터 21절까지 한 번 쭈욱 읽고 끝내버릴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몇 번에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하는 이유는,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달아야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렵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제 말씀을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말씀해주시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진정한 선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에 구원 받고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천국시민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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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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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4회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2023년 1월 1 설교 - 로마서 강해 116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4절~8절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4節~8節
“4. 一つのからだには多くの器官があり、しかも、すべての器官が同じ働きをしてはいないように、
5. 大勢いる私たちも、キリストにあって一つのからだであり、一人ひとりは互いに器官なのです。
6. 私たちは、与えられた恵みにしたがって、異なる賜物を持っているので、それが預言であれば、その信仰に応じて預言し、
7. 奉仕であれば奉仕し、教える人であれば教え、
8. 勧めをする人であれば勧め、分け与える人は惜しまずに分け与え、指導する人は熱心に指導し、慈善を行う人は喜んでそれを行い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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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6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私たちにくださる賜物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합니다만 그 기능은 다 다르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과 섬김과 가르침과 위로와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이렇게 일곱 개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預言、奉仕、教えること、勧めること、分け与えること、指導すること、慈善を行うこと

우선 예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만, 무슨 기도를 하는 가운데 주님이나 천사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해주는 것이 예언의 은사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착각을 누가 하느냐. 믿음이 적은 분들이 하느냐 하면,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꽤나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응답을 받았다, 계시를 받았다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을 어설프게 읽고는 구약 시대 때의 선지자 흉내를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극히 한정된 선지자만을 택하셔서 하나님이 만나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 성령님이 내려오셨습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시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구세주의 탄생에 있어서 예언하기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으로 성취가 되지요. 그런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기록합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바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혹 교회에 보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좀 특별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무슨 구약에서 예언된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바로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1장 13절~14절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すべての預言者たちと律法が預言したのは、ヨハネの時まででした。
あなたがたに受け入れる思いがあるなら、この人こそ来たるべきエリヤなのです。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까. 이는 성경, 구체적으로는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구약에서 예언된 사람은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그 이후로는 제아무리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바울과 같은 대표적인 사도라 하더라도 예언된 바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 사도들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 모두가 주님을 찾으면 찾게 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예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꿈속에서 보인 예수님입니까. 금식하는 데에 들려온 음성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 교수나 목사의 말이라 하더라도 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약에 보시면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절~5절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それから六日目に、イエスはペテロと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
すると、弟子たちの目の前でその御姿が変わった。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衣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そして、見よ、モーセとエリヤが彼らの前に現れて、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
そこでペテロが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がここにいること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よろしければ、私がここに幕屋を三つ造ります。あなたのために一つ、モーセのために一つ、エリヤのために一つ。」
彼がまだ話している間に、見よ、光り輝く雲が彼らをおおった。すると見よ、雲の中から「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はこれを喜ぶ。彼の言うことを聞け」という声がした。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어떤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제자들이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모습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 장소가 무슨 산이었는지, 아니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예, 성경 어디에도 그 장소가 무슨 산이었는지, 아니면 그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 기록이 없겠어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 내용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소가 어디다, 무슨 말들이 오갔다고 하는 말들을 하면서, 마치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자기만 아는 것처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라고 한다면 그에게 상징되는 의미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모세는 곧 율법이었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어떻습니까. 그는 구약에서 선지자로 대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세례 요한을 예언하는 구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見よ。わたしは、主の大いなる恐るべき日が来る前に、預言者エリヤをあなたがたに遣わす。
彼は、父の心を子に向けさせ、子の心をその父に向けさせる。それは、わたしが来て、この地を聖絶の物として打ち滅ぼす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수님 외에 누구였지요? 예,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선지자로 상징되는 인물입니다. 음?

율법과 선지자가 뭐라고 그랬죠?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의 중심에 누가 계세요. 그렇죠.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율법과 선지자 즉 성경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그런 의문을 가져야지요. 그건 홍목사 당신의 해석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져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1절~22절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しかし今や、律法とは関わりなく、律法と預言者たちの書によって証しされて、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
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信じるすべての人に与えられる神の義です。そこに差別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들 즉 성경에 의해 증거를 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일부 몇몇 선지자들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의가 미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길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예언이라고 한다는 것은 무슨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을 깨닫는 것이요, 성경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7절~9절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私たちが以前にも言ったように、今もう一度、私は言います。もしだれかが、あなたがたが受けた福音に反する福音を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てい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사도행전 4장 11절~12절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あなたがた家を建てる者たちに捨てられた石、それが要の石となった』というのは、この方のことです。
この方以外には、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ありません。天の下でこの御名のほかに、私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人間に与えられていないからです。」


우리에게 구원을 위한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만이 우리의 구주시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의에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언 외에도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과 그리고 다스리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오해를 하면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중에서 어떤 은사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교회에 보면 이른바 은사 찾기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은사는 하나가 아닙니다.
둘째, 은사는 구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은사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경제학자 말에 의하면 지금 전세계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가, 현재 경제를 제대로 분석한 경제학 이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경제학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이에요. 이를 쉽게 말하자면 예를 들어서 경제학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분류를 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럼 여러분께서는 생산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소비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이게 말이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어디 생산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세상에 어디 소비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생산하는 사람이 소비도 하고, 또한 소비도 하는 사람이 생산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나누어서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처럼 설명하려고 하니까 이게 실제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기만 하는 사람?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 물론 교회도 규모가 어느 정도 되면 각 부서가 있지요. 회사도 그렇잖아요. 그러면 그 부서에 따라서 섬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위로하거나 구제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섬기기도 하다가 가르침을 받기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구제를 하다가도 위로를 받거나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나는 섬기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섬기기만 할 거야, 나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가르치기만 할 거야. 더 나아가서 나는 다스리는 은사를 받았으니까 다스리는 일 아니면 안 할 거야……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조직이 얼마나 혼란스럽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은사라고 하는 것은 자기한테 달라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 그래도 기도를 하면 다 주신다고 했는데 은사도 구하면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경에 보시면 은사를 구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은사를 구하라고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愛を追い求めなさい。また、御霊の賜物、特に預言することを熱心に求めなさい。

성경은 우리에게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기록을 합니다. 여러분, 예언이 뭐라고요? 예, 이는 기도하면서 무슨 음성을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다……가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한국에 보면 유독 무슨 방언의 은사를 달라 또는 신유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방언의 은사를 구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기를 바라지만, 그 중에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 않나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뭐라고 기록합니까.

고린도전서 14장 27절~28절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だれかが異言で語るのであれば、二人か、多くても三人で順番に行い、一人が解き明かしをしなさい。
解き明かす者がいなければ、教会では黙っていて、自分に対し、また神に対して語りなさい。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으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차례로 돌아가면서 하고 그 때마다 한 사람이 통역을 하라고 되어 있고,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 14장 23절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ですから、教会全体が一緒に集まって、皆が異言で語るなら、初心の人か信じていない人が入って来たとき、あなたがたは気が変になっていると言われることにならないでしょうか。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 교회에서 보면,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도 없고 자기도 해석하지 못하면서도 큰 소리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신유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제가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만, 자기 아내가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갔었는데 수술을 하라고 하더래요.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수술을 하려고 했더니만 교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더라는 거예요.

그 소문이 뭔지 아십니까. 아니, 목사님 정도 되면 기도로 병을 고쳐야지 왜 병원에서 수술을 받느냐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무슨 신유의 은사가 없다는 둥 기도가 부족하다는 둥, 나아가서 믿음이 적다는 둥 그런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힘들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병원에 가면 안 된다고 한다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아니겠어요? 아니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악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좋으면 환자를 보고도 기도를 열심히 해서 고치면 되지 왜 째고 꿰매고 약을 바르고 합니까. 그렇잖아요?

하지만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에요.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믿음이 좋은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을 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습니까. 그런 그 사람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마땅한 치료법이나 약 같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 때는 정말 기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손을 들었어요. 치료할 수가 없대요. 약도 없대요. 그러면 어떡합니까. 오로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병원에 가면 치료법도 있어요. 약을 먹으면 낫는 병이에요.


그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아요? 아니, 병원에 가는 것이 무슨 우상숭배를 하는 일인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사님들의 손길을 통해서도 주님이 역사해주셔서 치료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을 미련하게 해석을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하물며 목사님한테까지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정말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리고 은사를 구한다면서 무슨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고 그러면서 은사를 구합니까. 성경에 그렇게 해서 은사를 구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아가 무슨 다스리는 은사를 구한다면서, 이제 자기가 무슨 선거에 출마를 하려고 하는데 뭐라고 기도를 합니까.

이사야 6장 8절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합니다.

「ここに私がおります。私を遣わしてください。」

자, 생각해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왕이나 선지자들 중에서 자기가 왕이나 선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응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앞서 말씀 드린 모세나 엘리야가 기도 응답 받아서 선지자가 됐대요? 아니면 사울이나 다윗이 자기가 왕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원 가서 기도했다고 합니까.

대표적인 선지자인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한테 부름을 받아서 순종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7장에 의하면 그는 목자였고 뽕나무를 키우는 농부였습니다.

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은 모두가 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신 것이에요.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무슨 성수주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다른 하나도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9절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六日間働いて、あなたのすべての仕事をせよ。

맨날 아침이나 밤이나 평일이나 주말이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한다고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런 시기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무슨 시험 준비를 한다거나 하면 몇 개월에서 몇 년 동안 공부만 해야 할 때도 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공부가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평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도 중요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6일 동안 우리의 모든 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감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제 2023년 첫 주일, 하루를 내디뎠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머리 되신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깨달으면서 때로는 섬기기도 하고 때로는 가르치기도 하고, 그리고 위로하거나 구제하거나 다스리거나 긍휼을 베풀어 가면서 주님의 지체로서 역할을 감당해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374회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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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3회 바라보아야 할 주님
2023년 1월 1 송구영신 예배 설교 - 로마서 강해 115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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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3절
“3. 내게 주신 恩惠로 말미암아 너희 各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以上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分量대로 智慧롭게 생각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3節
“3.私は、自分に与えられた恵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一人ひとりに言います。思うべき限度を超えて思い上がっ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神が各自に分け与えてくださった信仰の量りに応じて、慎み深く考えな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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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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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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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2023년 송구영신예배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5번째로 “바라보아야 할 주님” 見つめるべき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제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참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되돌아보면 참 감회가 새롭지 않습니까. 저는 정말 참 그렇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삶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뭐, 저만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때로는 정말 힘겨워서 답이 보이지 않다가도 어떻게든 견뎌내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두가 다 주님의 은혜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2023년 새해를 맞이해서 첫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
“3. 내게 주신 恩惠로 말미암아 너희 各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以上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分量대로 智慧롭게 생각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3節
3. 私は、自分に与えられた恵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一人ひとりに言います。思うべき限度を超えて思い上がっ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神が各自に分け与えてくださった信仰の量りに応じて、慎み深く考えなさい。

이 말씀도 현대인의 성경판으로 한 번 보실까요?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2장 3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러분 각 사람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하고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

우선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에 보시면, 어떤 책은 저자가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만, 또 어떤 책은 저자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명확한 경우만 보더라도 신약성경의 절반 가까이를 바울이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이 오늘 무슨 말을 하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작은 생각에 갇혀 있으라는 말씀인가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복습하는 의미로 11장에 있던 말씀을 다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로마서 11장 20절 후반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思い上がることなく、むしろ恐れなさい。

이 말씀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이것은 바로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좁은 생각, 작은 생각에 갇혀 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량에 맞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 한 번 오늘은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학생이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청년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회사원으로 시시한 회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키우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큰 꿈을 가지고 그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어요.

이게 잘못인가요? 아니요. 잘못은커녕 대단히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청년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 회사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야 이 회사를 키울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부장님한테 말을 합니다. 부장님, 제가 이번에 있을 임원회의에 참석하겠습니다. 그러면 부장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오. 그래, 잘 생각했어. 참석하게……그러겠습니까


물론 회사에서 그 사람을 뽑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적어도 회사에서 월급을 주면서 일을 시키려고 했다면 그 사람에 대한 성장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직 신입사원이잖아요. 아무리 열정이 넘친다고 해도, 그리고 잠재적인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그건 일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지, 어떻게 하루 이틀만에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장님은 말합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임원회의라면 적어도 이사 이상, 상무, 전무, 그리고 대표이사가 참석하는 자리인데, 부장 과장은 고사하고 아직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사원이 어떻게 참석을 한다는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이번 임원회의에서 쓸 자료나 복사해와.

그럼 이 말을 들은 신입사원은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이깟 복사나 하려고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다는 거야? 나는 정말 큰 꿈이 있고 능력도 있는데, 이 회사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 아무래도 내가 회사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아……


만약에 이런 고민을 한다면 그것이 맞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장래가 유망합니다. 능력도 있어요. 하지만 그 진가를 발휘하려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전문지식도 더 배워야 합니다. 자기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알고 있는 것보다 알아야 하는 일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자세가 바람직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를 뽑아준 직장을 믿고,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 한다면 분명 놀라운 성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뭐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조직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 능력이 부족하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神の愚かさは人よりも賢く、神の弱さは人よりも強いからです。


이 세상에서 아무리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41장 4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だれが、最初から代々の人々に呼びかけてこれらをなし、これらを行ったのか。主であるわたしだ。わたしは初めであり、また終わりとともにある。わたしがそれだ。

이 세상 모든 일을 시작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행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마침내 이루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신용카드 회사를 보면 처음에는 이용 가능한 금액이 상당히 적습니다. 아니, 돈을 쓰겠다고 하는데도 처음에는 그 한도를 아주 조금밖에 안 줍니다. 하지만 카드를 쓰고 그 돈을 성실하게 갚잖아요? 그러면 이제 조금씩 그 한도액을 늘려 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봅니다. 뭐, 여러 견해를 가지신 분들이 계실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 정치인들을 보면 정말 자신의 분량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을 보면 대부분이 다 비슷합니다. 후보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교회나 성당을 비롯한 종교시설을 찾습니다. 자신의 종교와는 다른 종교시설도 찾아 갑니다.

예전에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들으신 적이 있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절대로 범하지 말아야 할 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다시 한번, 아니, 이후에도 수십 번이라도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절대로 우상숭배만은 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무슨 선거든지 간에 많은 곳을 찾아가야지요. 그게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 무엇을 합니까. 우상들한테 예를 표하고 때로는 그 우상들한테 절까지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겉으로는 절을 하지만, 마음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없지 않냐고 할지 모릅니다.

이런 말이 다 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잘 알지 못해서입니다. 구약 다니엘서에 보면, 왕이 오로지 자기가 세운 금으로 만든 우상한테만 절을 하라고 명을 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 그러면 죽인다고까지 해요.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겉으로는 우상들한테 절을 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우상한테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 3장 17절~18절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が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あなたの手からでも救い出します。
しかし、たとえ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は仕えず、あなたが建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만약에 겉으로는 우상에게 절을 할지라도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까.

이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가 이처럼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도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특히 한국의 수많은 정치인들을 보세요.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여러 종교시설에 가서는 그 우상한테 절을 하고, 누구는 거기서 지어주는 이름까지 받아오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큰 교회를 가요, 아니면 작은 교회를 가요. 예, 큰 교회를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설마 큰 교회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에요? 그게 아니지요. 그럼 큰 교회만 찾아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에 누가 있다? 예, 사람들, 특별히 유권자가 많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게 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한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부족한 저도 아는데, 주님이 그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당선되었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요. 이는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리 이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겨야, 그래야 우리가 복음을 전할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 이웃을 섬긴다는 것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일은 분명히 다른 일입니다.

유권자들의 한 표를 구걸하기 위해서 우상한테 절을 한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유권자들 뿐입니까. 그 자리에 주님도 계시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 대통령들 보면, 물론 그 권좌에 앉아 있을 때는 좋지만, 거기서 내려와서 보면 대부분이 기구한 삶을 살다가 갑니다.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자기 주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평탄치 않은 여생을 살다 가는 모습을 보면, 그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강연을 했을 때의 일인데, 거기서 어떤 일본 사람이 저에게 하는 말이, 왜 한국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잡혀가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분한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치인이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잡혀가지 않는 일본이 저는 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드리니까 웃더라고요.


뭐, 말은 그렇게 했습니다만, 그런 말을 외국 사람한테 들으니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다 이게 무엇 때문이요? 예,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 식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시편 57편 2절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私は いと高き方 神を呼び求めます。 私のために すべてを成し遂げてくださる神を。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人は心に自分の道を思い巡らす。しかし、主が人の歩みを確かにされる。

우리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이루는 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今、私は人々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神に取り入ろ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あるいは、人々を喜ばせようと努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もし今なお人々を喜ばせようとしているのなら、私はキリストのしもべ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은 하나님께만 좋게 하고 우리 이웃 사람들한테는 좋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생각을 앞세울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생각을 우선시할 것이냐 하는 말씀이에요.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 하나님 방법, 예수님 방법을 우선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2023년도 우리를 지켜보실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면서, 믿음과 말씀과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을 받으시는 새해 2023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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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72회 첫 번째 성탄
2022년 1225 설교 - 로마서 강해 114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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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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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성탄절 예배를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4번째 “첫 번째 성탄” 初めての聖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2節
2.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なさい。そうすれば、神のみこころは何か、すなわち、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판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12장 2절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도 지난 주처럼 마지막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完全であるのかを見分けるようになります。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무엇이 선한 일인지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완전하다고 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앞에서는 두 가지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는 길이요, 또 하나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입니다.

この世と調子を合わせる。

心を新たにすることで、自分を変えていただく

저도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어떻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신지를 금방금방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잖아요. 사실 그것이 정답인데, 그대로만 하면 축복을 받는데, 그런데 그 정답이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경에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정답을 쉽게 찾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해주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1번.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끝까지 지킨다.
2번.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고 뭐고 우선 살기 위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사실 주일학교 아이들이라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셨다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2장 10절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 땅을 마치 헌신짝 내버리듯이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는 대단히 곤혹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못 믿어서 결국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시켜서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멜이지요.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미처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은 어떻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생각으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에게 줄 축복을 가로채서 자신이 받아내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야곱이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야곱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까.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すると主は彼女に言われた。「二つの国があなたの胎内にあり、二つの国民があなたから分かれ出る。一つの国民は、もう一つの国民より強く、兄が弟に仕える。」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형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비록 간발의 차이로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야곱을 세우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못 미더웠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축복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집에서 나와 도망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그야말로 험난한 인생을 보내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의 삶도 좀 살기 편할 텐데 이를 잘못 짚는 바람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냐 하면, 오늘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는 길이라고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이 척박한 복음의 땅 일본에도 가는 여기저기서 캐롤이 흘러 나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도, 목욕탕에 가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도 크리스마스를 노래하고, 시내 곳곳에는 이 시골 군마현에도 크고 작은 불빛 장식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에 기독교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흔히들 말하는 것이 일본 전체 인구의 1프로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기독교인 1프로라고 하는 숫자에는 가톨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닌 완전히 다른 종교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다 똑 같은 그리스도교로 보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그 숫자에는 가톨릭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같은 곳도 다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에 입각한 복음주의 개혁주의 기독교 숫자만을 본다고 한다면 훨씬 더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클로스다 크리스마스 케익이다 하면서 장사를 하고 그러는 것을 보면 참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교회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시간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거기에 안 계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널리 알리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을 본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본받아야 할 텐데 어떻게 된 것이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 보더라도 왜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세상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교회에 갇혀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에 보더라도 인권이 유린되고 억압받고 있을 때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습니까.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에서, 인권운동에 앞장 섰던 분이 킹 목사님 아니셨습니까.

당시의 그와 같은 활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하고도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킹 목사님은 1968년 흉탄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활동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마침내 오바마 대통령도 탄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앞장 섰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과거에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기도 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암울한 시기에도 기독교인들이 그 아픔들을 위로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도 많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너도나도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다가, 이제 세상 좋아지니까 너도나도 말을 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옛날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인권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면, 요즘 보면 동영상 광고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아니면 자기가 좀 잘하면 감투라도 쓰기 위해서 그런 과격한 말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그래도 성경 좀 읽었다고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人はみな、上に立つ権威に従うべきです。神によらない権威はなく、存在している権威はすべて、神によって立てられ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을 인용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면서 복종해야 한다고 하다가, 이제 자기가 안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마귀다 사탄이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실 요즘 특히 한국 교회에 보면, 안타깝게도 귀가 얇은 분들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우리 목사님이 저렇게 말했으니까……그러면서 그 말에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귀가 얇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은 안 읽었지만, 교회 다닌 게 몇 년인데……라고 한다면, 정말 교회만 다니면 성경을 올바로 알게 되나요?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몇 년 동안 학교를 다닙니까. 초등학교 6년에 중고등학교 3년씩 6년, 다 합치면 12년이나 학교를 다녀요. 그렇다면 12년이나 학교만 다녔다면 모두가 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자기가 원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나요?

아니에요.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어떤 분은 이를 지도 몰라요. 아, 내가 교회에 이런 프로그램도 수료했고 무슨 성경학교도 수료했다……이건 마치 나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도 있고 개근상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그런 종이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내 머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13장을 공부할 때 다시 배우겠습니다만, 바울이 이 세상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도 이제 믿는 사람들이 곧 말세가 온다, 종말이 온다 그러니까 이 세상 제도를 따르려 하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이는 믿음이 올바로 서는 것이 아니라 혼란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이제 곧 오신다고 해서, 학교를 안 가도 되겠어요? 일을 안 해도 되요?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아도 돼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이와 같이 세상 규범들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무조건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복종하기만 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저도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만, 당시 대선 기간이었나 그랬는데, 제가 다니던 교회에 어떤 목사님이 초청이 되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뭐, 이름을 말씀 드리면 아실 만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때 말씀이 보니까 이건 교회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는지 아니면 특정 후보 지지 유세를 나왔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것들이 모두 다 이 세대를 본받는 길,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 때 조용기 목사님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조용기 목사님이 예전에 그런 간증을 하신 적이 있으셨대요. 그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자기가 설교를 하는데 맨날 예수님 얘기나 성경 얘기만 하니까 자기가 좀 부족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는 책방에 가서 철학책을 몇 권 사가지고는 그것을 읽고서, 설교 시간 때에도 그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면서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예배가 끝난 다음에 어떤 남자분이 찾아오더래요.. 그러면서 그 분이 목사님한테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무슨 무슨 대학교 철학과 교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 말씀하시는 철학에 대한 부분은 대학교 1학년생 정도도 아는 내용이에요. 저는 목사님한테 철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대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오로지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을 떠나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구는 그럴 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이 21세기인데 성경은 신약성경이라고 해봤자 2000년 전에 적힌 책 아니야.

그렇다면 믿음도 요즘 식으로 믿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주장도 있을 수가 있겠지요.


사무엘하 6장에 보시면 다윗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 왕 때 블레셋 사람들한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였겠습니까.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웃사라고 하는 실무 담당자가 이 과정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すると、主の怒りがウザに向かって燃え上がり、神はその過ちのために、彼をその場で打たれた。彼はそこで、神の箱の傍らで死んだ。

그러면 이 웃사라는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 사무엘하 6장 좀 앞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彼らは、神の箱を新しい荷車に載せて、それを丘の上にあるアビナダブの家から移した。アビナダブの子、ウザとアフヨがその新しい荷車を御した。
이들은 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싣고 갔다고 기록을 합니다. 이게 별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부분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부분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원인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4장 15절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宿営が移動する際には、アロンとその子らが聖所と聖所のすべての用具をおおい終わってから、その後でケハテ族が入って行って、これらを運ばなければならない。彼らが聖なるものに触れて死ぬことの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これらは、会見の天幕でケハテ族が運ぶ物である。

당시 이스라엘 지파에 속한 성인 남성은 전쟁이 시작하면 모두 싸워야 했습니다만, 여기서 예외였던 사람들이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는 대신 하나님의 성전과 거기서 사용하는 기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똑 같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그 자손에 따라서 맡은 역할이 달렸는데, 특별히 레위의 둘째 아들인 고핫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운반하는 방법은 수레에 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깨에 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여기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을 봅니다.

민수기 7장 6절~9절
“6.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8.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9.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そこでモーセは台車と雄牛を受け取り、それをレビ人に与えた。
ゲルション族には、その奉仕に応じて台車二台と雄牛四頭を与え、
メラリ族には、祭司アロンの子イタマルの監督のもとにある彼らの奉仕に応じて、台車四台と雄牛八頭を与えた。
しかしケハテ族には何も与えなかった。彼らの聖なるものに関わる奉仕は、肩に担いで運ぶことだったからである。


여기에 보시면 모세가 레위 지파에게 소를 나누어 주었대요 그런데 다른 자손들한테는 소를 나누어 주었는데, 유독 고핫 자손에게는 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가 아까워서가 아니에요.

그들이 맡은 일들이 법궤를 운반하는 일인데, 이는 소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매는 것이었기에 소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굳이 소를 주지 않았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웃사는 법궤를 어깨에 매지 않고 수레로 끌었을까요.


신학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고핫 자손이 운반하라고 하신 기록이 있는 민수기는 대략 기원전 1450년에 적힌 것이고, 그리고 웃사가 법궤를 수레로 끌었던 시기는 기원전 1000년 경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기원전 1450년이나 기원전 1000년이나 다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벌써 450년이라는 기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450년이라고 한다면 지금이 2022년이니까 450년 전이라고 하면 언제예요? 1572년입니다. 이 때는 조선 14대 왕인 선조 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450년 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옛날입니까.

그러니 21세기에 와서 법궤를 운반해야 하는데,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규정을 따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휴, 지금이 어느 시댄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웃사가 자기 멋대로 그 시대에 맞게 해석을 해서 일을 저질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그를 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天地は消え去ります。しかし、わたしのことばは決して消え去ることがありません。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여러분, 성경 말씀은 오래 되었다고 고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아무리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이라 하더라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닫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 받는 것이 아닌,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를 받는 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어제 밤에 갑자기 프린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오늘은 주보를 뽑지 못했습니다.

뭐, 이 프린터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지금까지도 이런 저런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프로그램을 깔거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살리기도 하고, 그리고 한 번은 분해를 해서 그 안을 청소도 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가끔 에러가 나면 껐다가 다시 켜고 그러면서 그럭저럭 사용해왔었습니다만, 어제 밤에 성경 필사 원고지를 뽑고 있는데 갑자기 전원이 퍽 하고 나가더라고요. 이런 일은 지금까지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시 전원을 켜봤지만 불이 깜빡깜빡 거리다가 다시 꺼지고 맙니다.

뭐, 비싼 프린터도 아니고, 그리고 워낙 오래 되기도 한 프린터이기 때문에 수명이 다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프린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도 이 프린터와 같은 삶을 보낼 수 있다면 괜찮은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 프린터처럼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랑할 만한 건 없지만, 끝까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조용히 주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값진 인생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세상에 물들어 세상을 찍어낼 수도 있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담아서 하나님을 찍어낼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이 있습니까. 주님이 계십니까.

예전에 2013년 5월 26일자 아사히신문 천성인어 칼럼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고령인 사람에는 세가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 사람, 옛날에는 젊었던 사람, 그리고 단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는 사람.

高齢の人には三つのタイプがあるとも言われる。まだ若い人、昔は若かった人、そして一度も若かったことのない人。


이 말씀이 성탄절인 오늘은 더욱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이유는 2천년 전에 주님께서 분명 우리에게 오시고,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여전히 주님이 계신 사람, 옛날에는 마음 속에 주님이 계셨던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마음 속에 주님이 계신 적이 없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계십니까.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오시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십니까.


만에 하나, 지금까지 우리 마음 안에 진정한 주님이 안 계셨다면, 이제부터라도 바로 오늘을 우리 삶에 있어서 첫 성탄절로 삼으셔서 주님을 모셔드리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 세대를 본받는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오직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오로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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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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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1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2022년 1218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3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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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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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3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神が喜ばれる礼拝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부터는 이제 12장을 함께 살펴봅니다. 로마서가 16장까지니까 이제 많이 왔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공부하신 분이시라면 어느 정도 로마서의 흐름도 이해가 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만약에 복습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이시라면 언제든지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서 동영상이든 음성이든, 아니면 텍스트로든 복습이 가능하니까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우선 오늘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이 문장을 좀 끝에서부터 해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에서 보면 일단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예배’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영적 예배’의 반대말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영적’의 반대말은 ‘육적’이 되겠지요. ‘육적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형식적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쁜데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심해서요? 사람들 만나러요? 바람 쐬려고요? 아니면 사업 때문에 나오시나요?

큰 교회에 보면 그런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업을 하는데 고객이 교회에 많이 있어요. 그래서 고객관리 차원에서 교회에 나간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것은 다 알맹이 없는 껍질에 불과합니다. 제가 예전에 어디 보니까 그런 사람도 있더라고요. 평소에는 차 운전을 잘 안 하는데, 교회에 갈 때 타기 위해서 고급차를 샀다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주차장에서 긁혀가지고 너무나도 속이 상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 사람 말대로 단지 교회에 가기 위해서 차를 샀다면 왜 고급차를 사요?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영광은 무슨,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람들한테 자랑하려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예배가 하나님 앞에 무슨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육적인 예배, 형식적인 예배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영적인 예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예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1절 말씀 조금 앞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 중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예배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선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 생각해보겠습니다.

몸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까. 여기 혹시 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하는 분 계십니까.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저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영혼만 가지고 있어요……라고 하는 분이 계시면……어떻게 해야 되요? 예,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정말 작년 이맘때는 이제 1년 정도면 코로나도 끝나겠지 했는데, 이제 일본은 8차 유행에 돌입했다고 하잖아요. 지난 13일 발표에 의하면 군마현이 역대 최고기록인 확진자 3576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주변에 그런 분이 계시면, 좀 위로도 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드리는 예배라는 의미는, 첫째로 남자든 여자든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그리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누구든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은 몇 개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입니다. 내가 집에 있으면 집에 있는 것이요, 내가 교회에 있으면 교회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시면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시잖아요. 살아 있는 상태에서 몸을 어떻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내 몸은 산 채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주변에 계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예, 잘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귀찮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화장실에 가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봐, 나를 대신해서 예배 좀 드려달라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에스겔 18장 19절~20절
“19.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あなたがたは『なぜ、その子は父の咎を負わなくてよいのか』と言う。その子は、公正と義を行い、わたしのすべての掟を守り行ったのだから、必ず生きる。
罪を犯したたましいが死ぬのであり、子は父の咎について負い目がなく、父も子の咎について負い目がない。正しい人の義はその人の上にあり、悪しき者の悪はその者の上にある。

부모와 자식간이라 하더라도 공의나 악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대신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몸>을 드리는 예배의 두 번째 의미는, 예배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예배라고 하는 것은 바로 행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행함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행함 만으로는 온전히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배라고 해서 꼭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와서 한 두 시간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서 그 순간순간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행함으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믿음과 말씀이 무엇보다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기 쉽게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자동차로 비유를 해본다면, 믿음은 우선 자동차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말씀은 휘발유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차가 좋아도 기름을 넣지 않으면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넣었다고 한다면, 이제 시동을 걸고 출발해야지요.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차만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차가 없는 상태에서는 기름을 넣을 수도 없고, 시동도 걸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본다고 한다면, 믿음만 있다고 주님 앞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그런 사람 있어요. 성경도 안 읽고, 그저 금식하고 기도하고……그러면서 응답 받았다는 사람 있습니다. 물론 초신자 때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도 여전히 성경도 모르면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그러고는 무슨 환상을 봤다느니, 방언을 한다느니, 응답을 받았다느니 하면서, 자기가 무슨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그야말로 엉터리 무당이지,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그리고 성령님을 제대로 알아야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령님을 압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야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하지, 성경도 모르면서 무슨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다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깨달았다면, 이제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러면서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죠? 내 이웃도 사랑하는 것 아시죠? 제가 뭘 꼭 해야 되요? 그냥 주님을 믿고 성경만 읽을게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이러고 있으면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 말을 하는 것도 그래요. 말을 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엄연한 행함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10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なぜなら、もしあなたの口でイエスを主と告白し、あなたの心で神は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からです。
人は心に信じて義と認められ、口で告白して救われるのです。

그냥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놀라운 행함인 것입니다.

지난 12월 14일자 일본 신문에 보니까, 부부나 커플에 있어서 서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어느 지방이 많이 하느냐 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와 있었습니다.

서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일본 지차제가 어디일 것 같으십니까.

이게 북해도라고 해요. 올 한 해에 평균 71.1회, 그러니까 일흔 번이 넘게 상대방한테 사랑한다, 좋아한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2위는 66.7회인 쿠마모토현이고 3위는 카나가와현 60.0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국평균은 34.3회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군마현은 47개 일본 지자체 중에서 몇 번째로 상대방에게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까요.

예, 47개 지자체 중에서 47위. 영광스럽게도 최하위였다고 합니다. 올 한해 동안 부부나 커플 사이에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한 게 13.4회였다는 거예요. 1위인 홋카이도에 비하면 5분의 1도 안 되고, 전국평균 34.3회에 비해도 절반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물론 마음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입으로 고백하는 행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구는 그러실지도 모르겠지요. 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성경에서도 우리더러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잖아요.

사랑하는 우리 군마현민 여러분께서도 조금 더 분발해서 서로의 사랑을 고백하는 놀라운 행함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40절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そして彼らのうちの一人、律法の専門家がイエスを試そうとして尋ねた。
「先生、律法の中でどの戒めが一番重要ですか。」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용할 때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는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아직 좀 이해가 안 된다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 아닐까?

그렇게 의심을 하는 이유를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이웃은 그냥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래서 왠지 하나님을 정말 첫째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으로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만약에 “하나님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다면 어떻습니까. 여기는 논리적으로 심각한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あなたの神、主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우리와 우리 이웃은 같아요? 달라요. 예,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 같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우리 이웃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우리 이웃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한테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면 불쾌하듯이, 내 이웃이 가진 것을 내가 빼앗는다면 역시 불쾌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이웃과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셔도 우리가 하나님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요.

あなたの神、主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득이하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하지만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바꾸어 볼 수는 있다는 뜻입니다.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隣人を愛しなさい。』


주님은 우리와 우리 이웃이 동일하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ですから、人からしてもらいたいことは何でも、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人にしなさい。これが律法と預言者です。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한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면서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세요.

이와 비슷한 말씀이 아까 마태복음 22장에서도 나왔었잖아요?

마태복음 22장 40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핵심, 성경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 성경 모든 것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놀라운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반대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2장 1절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12章1節
1.ですから、兄弟たち、私は神のあわれ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からだを、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きた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それこそ、あなたがたにふさわしい礼拝です。

우리는 주님 앞에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남녀노소, 그리고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든지 그 삶을 주님께 제물로서 드릴 수 있다는 것.

둘째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자기 자신이 드릴 수 있다는 것,

셋째로, 단순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요, 행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배웠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

『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隣人を愛しなさい。』

이것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이루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남녀노소,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가만히 혼자서 생각만 하는 마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함입니다. 실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성경 전체를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과 말씀을 통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진정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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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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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0회 졸음을 물리치는 방법
2022년 1211 설교 - 로마서 강해 112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5절~36절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5節~36節
“35.だれがまず主に与え、主から報いを受けるのですか。」
36.すべてのものが神から発し、神によって成り、神に至るのです。この神に、栄光がとこしえ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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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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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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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2번째 시간으로서 “졸음을 물리치는 방법” 眠気の退け方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우선 35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5.だれがまず主に与え、主から報いを受けるのですか。」

이 말씀의 뜻이 좀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이 내용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욥기 4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욥기 41장 11절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だれが、まずわたしに与えたというのか。わたしがそれに報い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に。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나에게 갚으라고 할 때는 어떤 경우입니까. 그냥 달라는 것과 갚으라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지요.

상대방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1만원을 달라” 라는 말과 “나에게 1만원을 갚으라”라는 말은 다릅니다. 그럼 “갚으라”라고 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1만원을 빌려주었을 때 할 수 있는 말 아니겠어요?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빌려주었거나, 아니면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었을 경우,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때 갚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되냐 하면, “갚는다”라고 한다면 “내가 주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상대방이 나에게 갚는 것”이 먼저입니까.

이는 당연히 “내가 주는 것”이 먼저인 것이지요. 일단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꾸어 주든, 아니면 무슨 일을 해주든 간에, 우선 내가 상대방에게 먼저 해 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나한테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한테 먼저 주고 그 대가를 나한테 갚으라고 하겠느냐 하는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나한테 돈이든 뭐든 꾸어 달라고 해요. 그럼 아쉬운 쪽이 누구겠어요.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아니면 꾸어주는 사람이에요. 당연히 꾸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쉬운 쪽이지요.

그러니까 세상에 보더라도 돈을 꾸어 주면 거기에 이자까지 받아서 갚으라고 하잖아요. 이게 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대표적으로 본다면 사실 은행이 그 장사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동차 살 때 돈 빌려 줄게. 집 살 때 돈 빌려 줄게. 그러면서 그 빌려준 돈의 이자로 수익을 얻고 있는 게 은행이잖아요. 이건 어디까지는 빌리는 사람이 아쉬우니까 이자를 감당하면서까지 은행을 이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쉬운 게 있어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꾸고는 그것을 갚으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세요. 그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앞서 욥기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욥기 41장 11절 후반부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天の下にあるものはみな、わたしのものだ。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리고 모든 것이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욥기 38장 4절~6절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わたしが地の基(もとい)を定めたとき、あなたはどこにいたのか。分かっているなら、告げてみよ。
あなたは知っているはずだ。だれがその大きさを定め、だれがその上に測り縄を張ったかを。
その台座は何の上にはめ込まれたのか。あるいは、その要の石はだれが据えたのか。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람은 어디에 있었느냐 하고 하나님께서는 묻습니다. 어디에 있긴 어디 있어요. 아직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지요. 그 뿐만 아니라 이 36장을 읽어보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욥기 38장 32절~35절
“32.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33.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34.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5.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あなたは十二宮をその時にかなって、引き出すことができるか。牡牛座をその子の星とともに導くことができるか。
あなたは天の掟を知っているか。地にその法則を立てることができるか。
あなたの声を密雲にまであげ、みなぎる水にあなたをおおわせることができるか。
あなたは稲妻を向こうに行かせ、あなたに向かって「私たちはここです」と言わせることができるか。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법칙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이 무슨 아쉬운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꾸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말씀을 간결하게 정리한 내용이 오늘 본문 중에서 36절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36.すべてのものが神から発し、神によって成り、神に至るのです。この神に、栄光がとこしえにありますように。アーメン。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로 돌아간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わたしはアルファであり、オメガである。最初であり、最後である。初めであり、終わりである。」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더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는 분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계시지 않나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고 싶어 하세요.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러십니까. 지난 번에 어떻게 배웠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우리를 사랑해서에요? 아니면 우리를 미워해서에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쓰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음으로 인해서 놀랍고 넘치는 축복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이루어 놓은 것처럼 교만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했다 저것을 했다 하면서 하나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세우는 모습도 많아 봐왔습니다.

다음에 공부하게 될 12장에서도 배우겠습니다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꾸어 드리는 것이 되나요?

간단한 문제를 한 번 내보겠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예배 때 헌금 1만원을 했어요.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무언가를 해주셔야 할 의무가 생긴다. 맞아요? 틀려요?

오늘은 내가 좀 큰 기도제목이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헌금 10만원을 내야겠다. 돈을 많이 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실 의무가 생긴다. 맞아요? 틀려요?

얼마 전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한국에서 제일 돈이 많은 대기업 회장의 재산이 한국 돈 13조원이라고 해요. 잘 감이 안 잡히죠? 아무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또 같은 것으로 본다면 아무리 부지런히 로또를 산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에 한 번도 1등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대략 계산을 해보았더니만 로또 1등 당첨을 1400번 정도는 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진 사람한테, 자기가 가진 전재산이라면서 1000만원을 주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이렇게 돈을 많이 냈으니까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게 자기한테는 큰 돈일지는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게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8조원에 비하면 1000만원은 130만분의 1이에요. 요즘 뭐 1억이라고 해봤자 부자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8조원에 1000만원이라고 한다면, 1억에 77원입니다.

1억 가진 사람한테 77원 줄 테니까 자기 소원 들어달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장난 하냐고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8조원 정도가 아니라 온 천하를 다 가지신 분이시라면서요. 그런 하나님한테 내가 이렇게 많은 돈을 바쳤으니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해봐야, 그 돈 액수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드렸을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あなたの宝のあるところ、そこにあなたの心もあるのです。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주님 앞에 드렸다고 해도 그것이 오직 내 힘으로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두 역사해주셨기 때문에 벌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라는 것은, 아무리 많은 액수라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작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보시느냐 하면 바로 그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이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단순히 소원 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라고 하는 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さて、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向かう途中、サマリアとガリラヤの境を通られた。
ある村に入ると、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十人の人がイエスを出迎えた。彼らは遠く離れたところに立ち、
声を張り上げて、「イエス様、先生、私たちをあわれんでください」と言った。
イエスはこれを見て彼らに言われた。「行って、自分のからだを祭司に見せなさい。」すると彼らは行く途中できよめられた。
そのうちの一人は、自分が癒やされたことが分かると、大声で神をほめたたえながら引き返して来て、
イエスの足もとにひれ伏して感謝した。彼はサマリア人であった。
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十人きよめら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九人はどこにいるのか。
この他国人のほかに、神をあがめるために戻って来た者はいなかったのか。」
それからイエスはその人に言われた。「立ち上がって行きなさい。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のです。」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저 멀리서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자기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들은 바로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었습니다. 이 나병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한센병이라고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센병도 있었겠습니다만,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성 피부병도 포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당시 이 나병에 걸리게 되면, 이는 전염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에서는 함께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시 외곽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청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목소리를 들으시고는 제사장한테 그 몸을 보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 이유는, 당시에도 그 나병이 낫는 경우가 있었는데, 완치되었는지 여부는 제사장이 판단하게 되어 있었거든요. 이는 단순한 관행이 아니라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율법에 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이 나병을 앓고 있던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사장한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여서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 받으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제사장에게로 가는 시점과 병이 나은 시점을 비교해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점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자신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직 낫지 않았어요. 그러면 언제 낫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보이러 가다가 보니 치료함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아니, 내 병이 나아야 제사장한테 보이든지 말든지 하지,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제사장한테 가봤자 뭘하냐 하고 따질 만도 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제사장한테 가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믿음이 있다는 것도 대단한 것이지요. 그랬더니 가다가 보니까 나음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감기나 배탈이 아니에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음을 받은 열 명 중 아홉 명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당시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도 안 했을 정도로 차별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면서 그토록 잘난 척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와 같은 넘치는 축복을 받고서도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반면에 자신이 질병에서 해방되었던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렸는데, 이를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것을 달라 저것을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중요하지요.


마태복음 7장 7절~11절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探しなさい。そうすれば見出します。たたきなさい。そうすれば開かれます。
だれでも、求める者は受け、探す者は見出し、たたく者には開かれます。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주님은 분명히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시겠다고 하시잖아요.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두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주실까요. 1번 즉시, 2번 기타.

네, 제가 문제를 드릴 때 <기타>가 있으면 대부분 그게 답입니다. 하지만 <기타>라고 대답하셨다면 주관식으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까요.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언제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실 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기도 응답을 늦추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아무리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3~4살 밖에 안된 아이한테 자동차를 사주겠습니까. 그리고 나이만 먹었다고 차를 사달란다고 사주겠습니까.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해요. 그렇죠. 면허가 필요하죠.


아무리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면허도 따지 않았는데 운전을 하라고 차를 사준다면 이것이 축복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끔찍한 저주나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식이 달라는 대로 돈을 펑펑 준다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24절~25절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私たちは、この望みとともに救われたのです。目に見える望みは望みではありません。目で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望むでしょうか。
私たちはまだ見てい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のですから、忍耐して待ち望みます。

우리가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없는 것, 그러나 꼭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바랍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오래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에이, 그게 말이 돼? 안 들어주실거야……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주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에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たゆみなく祈りなさい。感謝をもって祈りつつ、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가끔 보면 기도를 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그런데 왜 기도를 안 들어주냐는 거예요.


아니, 오늘 말씀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빚진 것이 있어요? 그런 기도는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말씀드리지요? 기도라고 하는 것이 꼭 교회에 나와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에요. 우리가 평소에 길을 가다가도 할 수가 있고, 누워서 자기 전에 할 수가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대화를 하는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의 졸음은 바로 포기입니다. 안 될 거야. 소용없어…라고 하는 포기는 그야말로 우리의 축복을 막는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졸음이 오면 사탕이나 껌을 씹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잖아요? 기도에 있어서 졸음을 물리치는 것은 감사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고, 그리고 가장 좋을 때에 응답해주시기 위해서야……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에 보면 옛날에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어떻게 해야 맛있는 밥이 되는지에 대한 요령을 짧게 정리해놓은 말이 있어요.

はじめちょろちょろ なかぱっぱ……

이렇게 시작되는 말인데, 그러니까 처음에는 불을 작게 하고 중간 쯤에 가서 강한 불로 끓이라는 말인데, 이 마지막이 흥미롭습니다.

赤子泣いてもふたとるな

이 말은 뭐에요. 아기가 울더라도 뚜껑을 열지 말래요. 그러니까 밥을 다 짓고 난 다음에 뜸을 들여야 하는데, 아기가 배고프다고 운다고 해도 서둘러서 뚜껑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밥을 다 망쳐 버리기 때문인 것이지요.

아직 기도 응답이 안 오십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기가 막힌 밥을 짓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울어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 이유는 우리를 미워 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神の力強い御手の下にへりくだりなさい。神は、ちょうど良い時に、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를 높이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참음으로 기다리며, 지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깨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예비하신 때가 되었을 때,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크게 높임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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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

제369회 나를 아시는 주님
2022년 124 설교 - 로마서 강해 111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34절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3節~34節
"33.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神のさばきはなんと知り尽くしがたく、神の道はなんと極めがたいことでしょう。
34.「だれが主の心を知っ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主の助言者になったの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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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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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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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1번째 시간으로서 “나를 아시는 주님” 私を知っておられる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감탄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34절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3節~34節
33.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神のさばきはなんと知り尽くしがたく、神の道はなんと極めがたいことでしょう。
34.「だれが主の心を知っているのですか。だれが主の助言者になったのですか。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감탄하고 있는 것은 우선 이스라엘 자손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는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이 점을 들어서 유대인들이 어리석다고 하기도 합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보면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ち)の雨のように。


여호와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자 명철이기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분명 상하관계이긴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에 있어서는 그 마음이 하나이십니다. 생각에 있어서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が天から下って来たのは、自分の思いを行うため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みこころを行うためです。

요한복음 7장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そこで、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わたしの教えは、わたしのものではなく、わたしを遣わされた方のものです。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あなたがたは心を騒がせてはなりません。神を信じ、またわたしを信じなさ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말씀을 하시고 모든 일을 행하시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놀라운 구원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서 구약성경을 달달달달 외울 정도로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을 때, 우리가 오, 주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영접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오히려 어렵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사람의 생각으로 배우기만 했다면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성경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했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배운 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성경에 없습니까.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 마지막인 말라기까지 성경은 온통 예수님에 대한 말씀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의 머리로만 풀려고 하다 보니 엉뚱한 지식만 쌓이게 되어서, 결국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2장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イエスは彼らに答えられた。「あなたがたは聖書も神の力も知らないので、思い違いをしています。


이런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해요. 아니, 자기들은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박사학위도 받고 유명 신학교 교수이자 전문가 중 전문가인데,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밖에 안 되고 무슨 대단한 학교도 나오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그리고 성경 전문가인 자신들한테 당신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神は、知恵ある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愚かな者を選び、強い者を恥じ入らせるために、この世の弱い者を選ばれました。
有るものを無いものとするために、この世の取るに足りない者や見下されている者、すなわち無に等しい者を神は選ばれたのです。
肉なる者がだれも神の御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나름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달려듭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 때 배운 사람들이라고 아픈 데가 없었겠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어요? 아니요. 그런 문제들이 있었겠지요. 영육간에 문제들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들 앞에 누가 계세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얼마나 큰 기회입니까. 그러면 정말 체면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 저를 고쳐주세요. 제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하면 주님이 그것을 해결 안 해 주셨겠어요?

하지만 얄팍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간에 말로 예수님을 이겨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만 합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보세요. 눈이 안 보여요. 보길 원합니다. 하면 고쳐 주시고, 다리가 아파서 걷지를 못해요, 걷게 해주세요. 하면 그 소원을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이에요? 무슨 지식이 없고 순진한 사람만 예수님을 믿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뛰어난 과학자라고 하면 믿음이 없을 것 같은데, 오히려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뭔가 사람의 머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힘을 느낀다는 것이에요.

괜히 좀 어려운 책 몇 권 읽고 나서 지식인인 척 하는 수준의 사람들은 성경을 안 받아 들이려고 하지만, 과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은,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연구하다 보면, 이건 단순한 우연이나 확률이 아닌 무슨 강한 힘이나 의지가 있어야지만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을 많이 본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보면 율법학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남들의 눈을 피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진정한 천국 복음을 듣고는 구원을 받기도 하고 병고침을 받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복음은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서 이방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고, 오히려 이방인들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들도 구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넘쳐납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세상을 심판하시고는 노아를 통해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서 그를 통해서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신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노년에까지 아이가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이 하나 둘 정도가 아니라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다고요?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それで、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을 때는 훨씬 더 세월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니, 기왕 주실 거면 좀 일찍 주시든지 하시지, 좋은 세월 다 보내고 이제 늙어서 주신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등등 아브라함이라고 할 말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지난 번에 공부한 모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군천사들을 이끌고 애굽에 쳐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여든 살과 여든 세 살 먹은 할아버지 두 사람을 통해서 최대 강국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200만명을 구출해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의 머리로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군대를 모아서 애굽에 쳐들어가서 강제로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냈다면 분명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의지했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시면 사무엘이 이제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을 대신할 왕을 찾아 나섭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아들 중에서 택하라고 하세요.

그래서 이새한테 가서 당신 아들을 불러 모으라고 했더니만 일곱 명이 왔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사무엘이 이새한테 물어요. 당신 아들이 이 뿐이냐. 그러자 지금 막내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지금 양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지금은 한창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인데, 형제들이 다 오면 양을 누가 지킵니까. 그래서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아들한테 일을 다 떠넘기고 형들은 아버지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어서 그 막내아들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이제 그가 사무엘 앞에 섰더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무엘상 16장 12절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エッサイは人を遣わして、彼を連れて来させた。彼は血色が良く、目が美しく、姿も立派だった。主は言われた。「さあ、彼に油を注げ。この者がその人だ。」

그게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들한테는 물론이요 아버지에게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맨날 형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만 맡게 됩니다.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
“34.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ダビデはサウルに言った。「しもべは、父のために羊の群れを飼ってきました。獅子や熊が来て、群れの羊を取って行くと、
しもべはその後(あと)を追って出て、それを打ち殺し、その口から羊を救い出します。それがしもべに襲いかかるようなときは、そのひげをつかみ、それを打って殺してしまいます。

그는 이처럼 험한 일들을 도맡아 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는 아직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하는 미성년자였어요. 참, 아버지나 형도 매정하지요. 어떻게 어린 애한테 이처럼 험한 일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이와 같은 생활에 대해서 다윗이 불평불만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 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직 전쟁터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블레셋 군의 용사 골리앗을 무찌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윗이 좀 머리가 모자라서 그랬었던 건가요? 여러분, 하나님은 미련한 자를 택하셨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그것은 지능이 좀 모자란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바울이 좀 머리가 부족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지금으로 본다면 명문대를 나와서 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엘리트 청년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제 장래는 보장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겠다고 하면,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모자라서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유능했기 때문에, 그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바울은 그렇다고 치고 베드로 같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에게는 대단한 학문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어부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주님께 순종하자 주님께서는 그를 높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시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방언이 막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말하자면 외국어에요. 그런데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사도행전 2장 7절~8절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彼らは驚き、不思議に思って言った。「見なさい。話しているこの人たちはみな、ガリラヤの人ではないか。
それなのに、私たちそれぞれが生まれた国のことばで話を聞くとは、いったいどうしたことか。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저기 있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인데 어떻게 다른 지방 말들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뜻이고, 둘째는 갈릴리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학문 수준이 높지 않은 지역인데, 거기 출신 사람들이 어떻게 저처럼 유창하게 외국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의 여러분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부족하십니까.

저도 한 번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참 좀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각나는지 모릅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실격’이라는 책은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라고 시작합니다만, 정말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남들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남의 것을 빼앗은 적도 있고 남을 속인 적도 있었고…… 정말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낯이 뜨거워져서 자다가도 가끔 벌떡벌떡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의 머리는 나쁜 기억부터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좀 안 그런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쁜 기억 투성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뭐, 반면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 이런 나쁜 기억만 남게 하시는 것도 너무 교만하지 말라고, 좀 겸손 하라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저라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분명 계획이 있으시지 않겠습니까. 1976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인도해주신 주님께서는, 어쩌면 몇 십년 뒤에 일본에서 해야 할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 벌써 그 때부터 준비하신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저만 그런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18장 3절~6절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私が陶器師の家に下って行くと、見よ、彼はろくろで仕事をしているところだった。
陶器師が粘土で制作中の器は、彼の手で壊されたが、それは再び、陶器師自身の気に入るほかの器に作り替えられた。
それから、私に次のような主のことばがあった。
「イスラエルの家よ、わたしがこの陶器師のように、あなたがた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か──主のことば──。見よ。粘土が陶器師の手の中にあるように、イスラエルの家よ、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手の中にある。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토기장이가 되셔서 우리를 빚으시고 만드시고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귀한 그릇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서 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順境の日には幸いを味わい、逆境の日にはよく考えよ。これもあれも、神のなさること。後(のち)のことを人に分からせないためである。

전도서 8장 7절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何が起こる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いつ起こるかを、だれも告げることはできない。

전도서 10장 14절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愚か者はよくしゃべる。人はこれから起こることを知らない。これから後(のち)に起こることを、だれが彼に告げ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

많은 사람들은 장래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왜 알지 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죠.

아니, 알 수 있어요.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만 의지하면 잘 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면 잘 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걸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세요. 우리의 그 얄팍한 지식으로 어찌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했을 때 참 여러가지로 힘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회사에 대해서, 회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뭐, 제가 힘들었다기 보다는 솔직히 제 주변사람들이 힘들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저는 어떤 업무가 있으면, 그 업무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다 알고 난 다음에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 간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겠습니까. 요즘 같으면 무슨 인턴사원이다 뭐다 해서 회사 업무도 어느 정도 익힐 기회도 많겠습니다만, 저는 그냥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들어가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참 여러 가지로 막막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느 세월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난 다음에 시작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참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냥 시작해요. 아브라함도 맨 처음에는 어디로 가는지 말씀도 안 해주세요. 그냥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여기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わたしの思いは、あなたがたの思いと異なり、あなたがたの道は、わたしの道と異なるからだ。──主のことば──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しかし神は、私の行く道を知っておられる。私は試されると、金のようになって出て来る。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神を愛する人たち、すなわち、神のご計画にしたがって召された人たちのためには、すべてのことがともに働いて益となること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며, 마침내 순금과도 같이 귀한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22년 마지막 남은 한 달을 주님 안에서 잘 마무리 하시고, 다가올 2023년에는 주님께 순종하는 한 해, 주님을 의지하는 한 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 상상도 하지 못했던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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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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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8회 언제부터입니까
2022년 11월 27일 설교 - 로마서 강해 110
홍성필 목사
www.kirinmission.com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0절~32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1章30節~32節
“30.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神に不従順でしたが、今は彼らの不従順のゆえに、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
31.それと同じように、彼らも今は、あなたがたの受けたあわれみのゆえに不従順になっていますが、それは、彼ら自身も今あわれみを受けるためです。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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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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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10번째 시간으로서 “언제부터입니까” いつからですか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장 30절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0.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神に不従順でしたが、今は彼らの不従順のゆえに、あわれみを受けています。

여기서 30절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된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긍휼’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를 직역을 하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복음’ 즉 구원의 말씀이라고 하면 좀 이해가 쉽습니다.


본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파되어야 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부를 했어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부터가 조금 어려워집니다.

31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1절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それと同じように、彼らも今は、あなたがたの受けたあわれみのゆえに不従順になっていますが、それは、彼ら自身も今あわれみを受けるためです。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고, ‘너희’라고 하는 것은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겠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긍휼 즉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었는데, 이제는 이방인이 받은 복음으로 그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역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시고, 반드시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배웠습니까.

로마서 11장 11절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それでは尋ねますが、彼らがつまずいたのは倒れるためでしょうか。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かえって、彼らの背きによって、救いが異邦人に及び、イスラエルにねたみを起こさせました。

로마서 11장 14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私は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て、彼らのうち何人かでも救いたいのです。

이 말씀에 의하면 전에는 이방인이 받은 축복을 보고 시기를 하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조금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만, 그 점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나머지 32절을 마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여기서는 이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범위를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까지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구원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31절에서 생길 수도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1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받아야 했던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파가 되어서, 자신들이 받아야 할 축복을 이방인들이 받게 된 사실을 알고 시기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시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무슨 남의 집 담장 넘어 보듯이 훔쳐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는 하기 힘들잖아요.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면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は行って、あらゆる国の人々を弟子としなさい。父、子、聖霊の名において彼らにバプテスマを授け、
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命じておいた、すべてのことを守るように教えなさい。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복음을 받은 우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이처럼 우리더러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께서는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지난 주에 우리가 공부 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하나님이세요? 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좋으시니까 그저 아멘 하고 받아들이시겠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 없으시다면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면서.

그러면 뭐예요? 그럼 자기가 하지 왜 우리한테 시킬까.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솔직히 저는 해봤습니다.

거 참 이상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온 천하보다도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니셨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는 것이 말하자면 복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모든 민족들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게 하나님께 있어서 어려운 일이에요?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우리한테 이 일을 시키려고 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우리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말이에요.

자,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번 기본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미워하십니까. 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私たちは自分たちに対する神の愛を知り、また信じています。神は愛です。愛のうちにとどまる人は神のうちにとどまり、神もその人のうちにとどまっておられます。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 그야말로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자, 그럼 문제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미 답까지 다 말씀드린 것이지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면 본인이 하시지 왜 우리를 귀찮게 하면서 우리더러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1.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2.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난 주에 에덴에 심겨져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대해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굳이 에덴 동산 그것도 정중앙,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시고,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지요?


아담과 하와가 미워서 그랬습니까. 괜히 시험을 주어서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열매를 먹지만 않는다면, 그것 하나만 지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완전히 순종한 것으로 쳐주어서,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축복을 막 부어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면 모든 사람한테 그냥 축복을 주시면 될 것 아니야. 꼭 그렇게 열심히 믿고 순종을 해야지만 축복을 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를 별로 안 사랑하시나보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사실을 알면 그렇지 않습니다. 뭐, 우리 알기 쉽게 돈 이야기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항상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일시적으로 가난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가난이 축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럼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이 어느 정도 돈을 주면 축복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1억? 2억? 좀 넉넉하신 분들은 1억이나 2억이라고 해 봤자 부족하다고 하실지 모르니까, 좋습니다. 100억이라고 칩시다. 그 정도면 돈으로 본다면 축복이라고 하겠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고 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100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순간 전세계 경제는 마비가 될 것입니다. 물가는 순식간에 오르게 되고, 여기저기에서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문제들로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는 것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 진정한 축복인 것입니다.

지난 동경 올림픽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죠. 사실 원래는 2020년에 치러질 예정이었습니다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연기가 되었잖아요?


그리고 난 다음에는 1년 뒤인 2021년에 하느냐 아니면 취소를 하느냐 하는 많은 논란이 있었고,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결국 2021년에 무관객으로 개최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어땠을까요. 올림픽을 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안 하는 게 낫겠어요.

아니, 그거 괜히 올림픽을 하게 되면 훈련도 힘들게 해야 되고, 고생이 많은데 차라리 안 하는게 낫지 않아? 생각 없는 분들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선수들, 특별히 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선수들은 올림픽 개최를 열망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운동경기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운동경기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 목표가 국가대표, 올림픽. 더 나아가서 올림픽 금메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올림픽이 열려야 메달을 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어요. 올림픽이 열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놀라운 상을 받을 기회조차도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만약에 올림픽이 취소되고 그 대신 출전하는 모든 선수들에게 금메달을 하나씩 걸어주겠다고 하면, 선수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금메달에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 건 아무리 금메달이 아니라 그냥 금색 메달이지요. 상이라기보다는 기념품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선수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힘써 땀을 흘린 끝에 금메달을 따기를 원하는 것, 그 때 비로소 전세계 국민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고 그 나라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금메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마침 월드컵 축구가 한창입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일본과의 경기는 중계를 해줍니다만, 한국 경기는 볼 수가 없지요. 인터넷으로 보려고 해도 “해외에서는 이용하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나와서 볼 수가 없어요. 이럴 때보면 참 외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얼마 전에 보니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이 독일을 꺾고 화제가 되고, 한국도 강팀인 우루과이와 비겼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나 자기 나라 팀이 이기는 것을 원합니다만, 그렇다면 자기 나라 팀이 갑자기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천사가 되어서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축구 강국인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라 하더라도 천사로 구성된 축구팀이 못 이기겠어요? 당연히 이기겠지요. 그러면 그것으로 본래 축구선수들이 좋아하겠어요?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대표선수가 다 천사들로 대체되었어요. 그러면 천사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그깟 금메달이 아니라 세계신기록을 못 세우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박수를 선수들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선수들이 받지 못합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시면 누가 상을 못 받아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을 못 받아요. 아니, 우리가 무슨 공을 세워야 우리가 상을 받을 텐데,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어요. 이는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기보다는 아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뭐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스스로가 하시는 편히 훨씬 쉽고 빠름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32절을 보세요. 이 사실을 모르고 보시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실을 알고 보시면 완전히 이해가 됩니다.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원하시면 한 순간에 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과업을 누구한테 맡기셨어요? 그렇죠. 우리한테 맡기셨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상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이렇게 전도를 하다 보면요, 여러 가지 간증 거리가 많습니다. 우선 제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간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제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한테는 다시는 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도를 하는 데에 있어서 그 사람이 거부를 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끈질기게 전도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 5절~6절
“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どの家に入っても、まず、『この家に平安があるように』と言いなさい。
そこに平安の子がいたら、あなたがたの平安は、その人の上にとどまります。いなければ、その平安はあなたがたに返って来ます。

누가복음 10장 10절~11절
“10.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しかし、どの町であれ、人々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ないなら、大通りに出て言いなさい。
『私たちは、足に付いたこの町のちりさえ、おまえたちに払い落として行く。しかし、神の国が近づいたことは知っておきなさい。』


제가 매주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해서 메일을 보내면서 선교후원금을 당부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아직 지원이 안되기 때문에 저희 가정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교 후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구걸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설령 사람한테 선교후원을 구걸할 지언정 복음은 절대로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 사업장에 대해서 방문 전도를 시작할 때에는 여러 가지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오지 말라고 물을 뿌리거나 소금을 뿌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아니, 웃으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로 그런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시는 분들은 없으셨어요.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물론 뭐, 오지 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요. 다른 곳은 몰라도 오지 말라고 하는 곳은 절대로 다시는 안 갑니다.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에요. 제 실수가 아니라면, 메일을 안 받겠다고 하는 분에게는 다시 보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거나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제가 아닌 다른 손길을 예비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제 방문을 받아보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제가 방문하면 오래 있지 않습니다. 제가 준비한 전도지를 드리고, 그리고 일 하시는 데에 방해가 될까봐 금방 나옵니다.

그리고 간혹 제가 찾아 뵈었을 때 헌금이라고 하시면서 돈을 주시려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이는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사양을 합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제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제가 받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저도 사람인데, 만약에 어디를 갔는데 헌금을 해주셨어요. 그럼 다음에 갈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번에 가면 또 주실까? 어? 그런데 이번에는 안 주시네? 라고 하면 저 자신이 얼마나 못난 사람이 됩니까.

그리고 주신 쪽도 마찬가지죠. 제가 자주 찾아 뵈면, 이휴, 저 인간, 왜 이렇게 자주 와? 지난 번에 돈 줬는데 이번에도 줘야 하나? 돈 주길 바라고 이렇게 자주 오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안 생기겠어요? 아니, 이건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전도지를 들고 찾아 뵈었을 때, 행여 돈을 주거나 하는 일이 없으시도록 간곡히 당부를 드립니다. 그래야 제가 찾아 뵙는 발걸음도 가볍지요.


예전에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상반된 두 경우인데, 이제 코스를 따라서 차례차례 방문을 하는데, 다음은 어디를 방문할 차례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말 가기가 싫어요. 거기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고, 한국과 관련된 사업장 같은데 한국사람이 하는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몇 번 갔었거든요.

그 때까지 사람은 못 만나고 그냥 문에다가 전도지를 넣고만 왔었는데, 그 날 따라 그렇게 거기를 가기가 싫더라고요. 하지만 이게 마귀가 전도를 방해해서인지 아니면 성령님이 가지 말라고 해서인지 제가 구분이 잘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뭐 예정에 있었던 곳이니까 억지로 갔어요.

그랬더니 마침 주차장에 한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여기 분이냐고 물으면서 전도지를 드리니까, 자기는 종교가 달라서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전도지를 드리면서 그냥 시간 나실 때 보시라고 하니까 그것도 안 받으시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그래, 주님께서는 다른 손길을 예비해 놓고 계시나 보다 하고, 더 이상 그곳은 방문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곳은, 여기는 안 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어요. 다만 제가 방문전도를 하는 곳은 한국 분이 하시는 곳만 찾아 뵙는데, 거기는 한국 분이 운영하는 곳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여길 일본 분이 운영하는 곳이면 가지 말아야 같은데 어떻게 알 길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는 사업장 안에 들어갔더니, 어떤 사장님 같은 분이 이름표 목걸이를 걸었는데, 거기에 한국 이름이 적혀 있잖아요.

그래서 아하, 성령님이 이런 것도 보게 하시는구나 하고, 거기는 요즘도 계속해서 방문하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 정말 이처럼 성령님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사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오프라인 전도보다 온라인 전도입니다. 온라인은 얼굴이 안 보이니까 정말 얼마나 좀 힘든 일도 많이 겪는지 모릅니다.

온라인 상에서 보면 정말 평생 듣지도 못했던 참 심한 말도 많이 듣습니다. 제가 보내드리는 메일을 받기 싫으면 안 받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꼭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참 여러 가지 의미로 화려한 답장을 보내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게 되면 반드시 이런 일을 겪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마음 아픈 경험을 하는 것은, 그것은 말하자면 운동할 때의 근육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운동할 때 근육통이 온다면 그것은 몸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통이 없다면 이는 오히려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너무 나무라거나 미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거라고 2천년 전에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32절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로마서 11장 32절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2.神は、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うちに閉じ込めましたが、それはすべての人をあわれむためだったのです。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해서 축복을 받으려고 해도, 주변에 전도할 사람이 없으면 곤란 하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 곁에 아직 순종하지 않는 사람, 즉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남겨 두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를 싫다는 대도 억지로 하라는 말씀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みことばを宣べ伝えなさい。時が良くても悪くてもしっかりやりなさい。忍耐の限りを尽くし、絶えず教えながら、責め、戒め、また勧めなさい。

여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는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복음 전파, 언제부터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 말씀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 전파는 선택이 아닙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이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 성령님께서 섬세한 손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마음에 상처를 좀 입어도 괜찮습니다. 자존심 상해도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크나큰 축복으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바로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상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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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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