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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9회 저주 받은 고난과 축복 받은 고난
2021년 12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18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7節~18節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18.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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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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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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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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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5번째 시간으로서 “저주 받은 고난과 축복 받은 고난” 呪われた苦難と祝福された苦難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두 구절은 우선 각각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 전반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전반부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はじめと最後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17절의 앞부분은 이해가 됩니다. 자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격, 말하자면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예습하는 의미에서 로마서 8장 29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로 삼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맏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또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아하,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은 조물주이십니까. 피조물이십니까.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이냐 하면 이는 작은 의미의 태초와 큰 의미의 태초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의미의 태초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바로 이 시점이 작은 의미에서 태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의 기록과 같이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이 천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큰 의미에서의 태초라고 하는 것은 언제일까요. 이는 이 세상,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도 창조되기 훨씬 이전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셨을 때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큰 의미에서의 태초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태초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일까요.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몇 년째 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우리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하나님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90편 2절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山々が生まれる前から 地と世界を あなたが生み出す前から とこしえからとこしえまで あなたは神です。

이는 몇 백 만년, 몇 천 만년이라고 하는 단위가 아닌,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님도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또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은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피조물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의미는, 우리의 행위, 말하자면 율법적인 행위로서는 우리의 죄를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왜 율법적인 행위로는 용서 받을 수가 없습니까. 율법이 불완전해서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율법이 불완전하다고 한다면, 이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율법적인 행위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부족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이 세상에서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값없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마트에 가서 1만원짜리라고 적힌 물건을 1만원을 내고 샀어요. 이것은 은혜인가요?

아, 물론 여러분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은혜라고 여기시겠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은혜는 아니지요. 마트에서 1만원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1만원을 내고 샀다면 이는 은혜가 아니라 그냥 거래일 뿐이지요.

하지만 내가 빈털터리에요. 1만원은 고사하고 주머니에 10원짜리 동전 몇 개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빵 하나, 우유 한 개도 못삽니다. 바깥은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거기다가 배가 고프니까 너무나도 추워요.

그런데 마침 눈앞에 크고 멋진 백화점이 있어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안에 들어가서, 백화점 직원 옷을 입은 어떤 점잖은 사람한테 가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10원짜리 몇 개밖에 안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로는 이런 멋진 백화점에서 빵 한 봉지, 과자 한 조각도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도 춥고 배가 고픕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라도 상관 없으니 남는 빵이라도 하나 주시고, 여기 난방이 따뜻한 곳에서 몇 분만 쉬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점잖은 직원이 말합니다.

이보시오. 나는 이 백화점 사장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 백화점 안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드세요. 그리고 저기 가면 샤워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샤워를 하신 다음에, 이 백화점에 있는 옷 중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속옷부터 겉옷까지 마음대로 입으세요. 그리고 양말이나 신발도 편한 것으로 골라서 신으세요.

이제부터 언제라도 배가 고프거나 춥거나 입을 옷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오세요. 마음대로 드시고 마음대로 입어도 됩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돈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방을 얻으세요. 아, 그리고 우리 백화점에서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도 좋습니다.

이게 지금 이 배고픈 사람에게 감당할 일입니까? 아니에요. 이 사람은 이와 같은 놀라운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람은 여러가지 조건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멋진 백화점에 원서조차 내지 못할 상황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뭐예요? 예, 사장님이 마음대로 입으라고 하고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장님께서 자기가 뽑아주겠다고 하는데 누가 반대할 사람이 있겠어요.

이처럼 차마 감당하지 못하는 대접,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처럼 죄인이 무엇을 했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일거수일투족이 모두가 죄에서 시작해서 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얻어, 그야말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아니라면 받지 못할 축복과 사랑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아 주셔서,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은혜, 넘치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17절 전반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7절 후반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후반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中盤
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

이제 큰일났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어떤 것입니까. 온몸이 채찍에 의해 찢기고, 머리에는 가시로 된 관을 써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십니다.

건강한 사람이 빈손으로 오르는 것도 아닌, 얼굴은 머리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눈코입도 구분이 잘 안 됩니다. 눈은 침침해서 앞도 잘 안 보이고, 무겁고 까칠까칠한 십자가 나무는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 언덕길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이윽고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높은 곳에 세워졌습니다. 숨을 한 번 쉬기 위해서는 손과 발을 의지해서 상체를 올려야 하는데, 그 때마다 못이 박힌 손과 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증이 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상체를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나무 십자가의 가시가 예수님 등허리를 찌르고 할퀴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 것을 상상만으로 알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를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44절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すると、御使いが天から現れて、イエスを力づけた。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이 장면에 대한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 땀이 붉은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얼굴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워낙 한 번에 땀을 많이 흘리시다 보니, 마치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핏방울 같이 뚝뚝 하고 땀이 떨어졌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 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뭐예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을 우리도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대속’이라는 말씀에 문제가 생깁니다. ‘대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신해서 죄값을 치른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져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아무런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모순이 있는 것인가요?

이럴 경우에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대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적힌 책으로서,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니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정답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도 철저한 죄인으로서, 전무후무한 끔찍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キリストは、ご自分が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者となることで、私たちを律法ののろ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みな、のろ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베드로전서 2장 24절 전반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예수님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이처럼 끔찍한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으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시면서, 철저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뭐 물론 재미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좀 안 좋은 기억도 있지 않겠어요?

여러분께서는 학교 다니실 때 뭐가 가장 싫으셨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시험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을 좋아했던 분들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는 입학시험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입학시험은 어때요?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은 쉽게 말하자면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입니다. 모집정원보다 많은 수험생이 모였어요. 그러면 그 모집정원 이상 되는 수험생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그게 바로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입니다.

반면에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을 망쳤다고 학교에서 당장 내보내요? 아니요. 아무리 엄격한 학교라 하더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물론 점수는 잘 못 받겠죠. 그래도 공부가 시원치 않으면 선생님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러내서,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재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줄게, ……뭐 이러면서 어떻게 해서든 올바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선생님들이 애를 쓰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세요. 우리의 모습,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보시고 예수님이 보신다면, 만족해 하실까요? 물론 그런 훌륭한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은 이렇게 해라, 저것은 저렇게 해라……라는 규정을 많이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주셔서 그들이 먹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그냥 주시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이제 여러가지 방법을 붙이세요.

아침 일찍 들에 나가서 거둬라, 거둘 때에는 그날 먹을 것만 거두고 다음날까지 보관하지 말아라, 여섯째 날에는 평소 먹을 양보다 두 배를 거두고 다음날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을 테니, 들에 나가지 말아라……뭐 이런 명령들을 많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셨을까요. 만나 좀 주시면서 생색 내시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16장 4절 후반부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 후반부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これは、彼らがわたしのおしえに従って歩むかどうかを試みる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들을 많이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던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을 왜 학교에서 치릅니까. 그것은 수업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험은, 학생을 내쫓으려고 보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시험을 쳐야 내신성적을 올릴 수가 있잖아요. 점수를 줄 수가 있잖아요. 시험을 안 보면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이유는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을 넘치도록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 싫었던 것 두 번째는요, 이는 초등학교 때에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 바로 체벌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은 뭐 그러면 큰일난다고 하는데, 특히 일본은 그래도 체벌이 대체적으로 보면 비교적 빨리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데, 한국에는 꽤 최근까지 공공연하게 있었지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한국은 201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초중고를 일본에서 다녔습니다만, 초등학교는 신쥬쿠에 있는 동경한국학교 초등부를 나왔는데, 당시에는 한국학교라서 이것도 한국식이라 체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폭력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한 선생님은 대걸레 손잡이를 이만큼 잘라서 항상 그 선생님을 들고 다녔어요. 그리고 무슨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면, 남학생은 그걸로 엉덩이를 때리고, 여학생은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는데, 그 날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뭐 한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제 기억에는 적어도 4~5명 정도의 남학생이 앞에 나와서 차례대로 교탁 앞에 딱 엉덩이를 내밀고 한 세 대씩 맞았던 것 같아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겨울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도 동경에 있는 초등학교는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런데 추운 겨울 날에 반바지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으면, 무척 아프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때리시는 선생님도 고수라서 아프기는 무척 아픈데, 멍도 안 들고 붓지도 않아요. 아예 흔적도 안 남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 차례가 되어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데, 세 대를 맞는게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대 맞으면, 엉덩이를 비비면서 아이구 아파요……하고 하면 선생님이 빨리 대라고 호통을 치시죠. 그러면 또 쩔쩔 매면서 한 대를 맞아요. 그러면 또 저는 아이구 아파요 선생님……하면, 이 녀석이 가만히 좀 있으라고 또 큰 소리를 내십니다.

그러면 뭐 저는 아파 죽겠다는데 보는 애들은 어땠겠습니까. 자기들은 그런 모습들이 막 재미있다면서 깔깔 거리고 난리죠.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세 대를 맞았어요. 아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바로 뒤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그 아픔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요. 제 다음으로 엉덩이를 맞으러 나온 그 녀석은, 당당하게 교탁 앞에 떡 엉덩이를 내밀고 서더니만, 선생님이 세 대를 때리시는데 끝까지 꿈쩍도 안하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을 보고 애들이 오히려 박수를 치고 멋있다고 난리에요. 아, 그걸 보는 제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요. 아픈 것은 둘째치고 아, 정말 저 자신이 얼마나 창피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체벌에 찬성이다 반대다 하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환난을 당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미워해서요? 우리를 저주하기 위해서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저주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어긴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를, 우리를 대신해서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을 단 하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채찍을 맞으셨고, 철저한 저주 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라는 이름의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처럼 저주받는 고난, 죽음으로 향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어떻습니까. 이는 저주가 아닌 축복 받는 고난,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고난을 견디지 못할까 봐, 이것만 잘 넘기면 큰 축복을 주실 텐데 못 넘기면 어떻게 할까 하고 얼마나 노심초사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 기록합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은 미쁘사……이 미쁘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이는 참되다, 진실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잘 알고 계세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아예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할 길까지 다 예비해 주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에요? 이는 바로 그 시험을 우리가 통과함으로 인해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わが子よ、主の懲らしめを拒むな。その叱責を嫌うな。
父がいとしい子を叱るように、主は愛する者を叱る。


가끔 뉴스를 보면 자기 아이를 심하게 구타한 부모가 경찰에 잡혀가고는 하는 말이, 가정교육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세상 부모들이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에 모두가 잘했다고 만은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참되고 진실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계하실 때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이 또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꾸며낸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 중 18절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저주받는 고난, 죽음에 이르는 고난은, 예수님이 이미 2천년 전에, 누구를 대신해서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라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위한 고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을 위한 고난, 영광에 이르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만 정말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말로 못할 정도로 힘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릴 기회가 아니겠습까.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지금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라 하더라도 이후에 받을 영광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도 작은 고난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면, 우리 한 번 믿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에, 똑 같은 징계를 받더라도 누구는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누구는 박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로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2021년이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도 또다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확진자 수가 세계적으로 늘어가면서 내년에는 또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아니라, 이보다도 더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피할 길도 예비해주시는 주님,


그리고 이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믿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과 영광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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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8회 동행의 시작
2021년 12월 1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kirin.kr
kirin@kirin.kr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16절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5節~16節
“15.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陥れる、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す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こ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は「アバ、父」と叫びます。
16.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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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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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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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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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4번째 시간으로서 “동행의 시작” ともに歩むことの始まり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성탄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씀을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지난 추수감사주일 때와 같이 오늘 말씀드릴 로마서 차례도 성탄절에 걸맞는 말씀으로 여겨졌기에 계속해서 로마서로 말씀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16절 신약성경 249페이지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5節~16節
“15.あなたがたは、人を再び恐怖に陥れる、奴隷の霊を受けたのではなく、子とする御霊を受けたのです。こ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は「アバ、父」と叫びます。
16.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15절에 보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이는 지난 주에 살펴본 성경구절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앞 구절인 로마서 8장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로마서 5장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

こういうわけで、ちょうど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界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こうして、すべての人が罪を犯したので、死がすべての人に広がったのと同様に──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전파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죄인의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망 곧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 율법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첫째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에요.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이는 100%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있어서 확실한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안타깝게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을 보면 참 지키기 어려운 것이 한 둘이 아니에요. 무슨 예물을 바치는 방법도 많고 종류도 많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매주 주일마다 양이나 염소를 끌고 와서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고 불로 태워가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면 얼마나 지키기가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지키기 어려운 건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레위기 19장 19절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9절 후반부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また、あなたは二種類の糸で織った布地の衣服を身に着けてはならない。

이거 지키기 쉽습니까. 이 말씀도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신데, 그러면 이 말씀도 지키려면 무슨 면 몇 프로, 폴리에스테르 몇 프로 섞인 옷을 입으면 안돼요. 물론 여기에도 담긴 깊은 뜻이 있긴 합니다만, 이 말씀 하나 지키려고 한다 해도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100% 지키면 100%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100% 지키지 못할 확률을 역시 100%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律法全体を守っても、一つの点で過ちを犯すなら、その人はすべてについて責任を問われるからです。

아니, 그 많은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를 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무슨 수로 율법을 모두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렵고 복잡한 율법을 떨리는 마음, 지킬 수는 없는데 그러나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서워하는 영을 받는 사람의 모습, 율법에 짓눌린 자들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까.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해 봤자 지키지 못하는 우리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죄 아래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아무리 노력을 해 봤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어요. 이대로라면 영원한 사망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려 죽어 주시고,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이 아닌 영원한 생명,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5절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しかし時が満ちて、神はご自分の御子を、女から生まれた者、律法の下にある者として遣わされました。
それは、律法の下にある者を贖い出すためであり、私たちが子としての身分を受けるためでした。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오늘 본문 15절 후반부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私たちは「アバ、父」と叫びます。


간혹 보면 여기서 ‘아빠’라는 말을 가지고, 무슨 어린 아이와 같이 아버지를 따르는 듯한 표현이라는 말씀을 듣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는 앞부분과 의미가 맞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아빠’ 또는 ‘아바’라는 식으로 마치 우리처럼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른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핵심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른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를 불문하고 요즘 언론들을 보면 부모 자식 간에 참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친부모가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친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접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상상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넘을래야 넘을 수가 없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문제가 많은 부모들도 있을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가장 사랑하시는 예수님마저도 아끼지 않고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나라의 왕이나 통치자를 함부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왕이나 통치자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그 자녀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완전히 해결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악관이라고 한다면 세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대통령이 사는 곳이고 업무를 보는 곳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에 잠시라도 들어가서 대통령과 면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정부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고위공직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인 사진이 있어요. 어떤 어린 아이가 대통령이 앉는 의자에 턱 하니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진들을 보면 대통령 집무실에서 좋다고 뛰어놀고 있어요. 그게 누구겠습니까. 그렇지요. 대통령 아이들입니다. 당시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었을 때인데, 대통령 취임이 44세였으니까 아이들이 어렸지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놀고 있는 사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5장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それだけではなく、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神を喜んでいます。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は和解させていただいたのです。

우리가 죄인이라면 함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시고 나와 함깨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뛰놀며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 16절을 다시 봅니다.

로마서 8장 16절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6.御霊ご自身が、私たちの霊とともに、私たちが神の子どもであることを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도 중요하고 실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 성경을 읽으면 다 거짓말 같아요. 성경은 어디를 읽어도 다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아요.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홍해가 갈라졌대. 웃기는 소리. 어떻게 바다가 갈라지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여리고성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했는데 그 높고 두꺼운 성벽이 무너졌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거 어짜다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대.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대.

뭐 이런 말을 읽어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안 와요. 다 꾸며낸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이구,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아요. 성경을 읽으니,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니 내 마음 속에 와 닿아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까지 모두가 다 나를 위해 적혀 있는 것 같아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오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려 주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부활하셨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이 믿어져요.

남들은 일요일이라서 놀러간다는데 교회에 모여요. 그런다고 누가 돈 주나요? 오히려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까지 내면서 섬겨요.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대요.

이와 같은 일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믿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걸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말을 한다고 해서 설득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께서 믿으시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말솜씨가 뛰어 나서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드리는 말씀이 제 이론이나 제 주장을 말씀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다만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다는 말씀만 드릴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어요. 그 말씀이 믿어져요.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시작이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탄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모든 은혜와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씻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넘치기 위한 시작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23절~24절
“23.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の方を振り向いて、彼らだけに言われた。「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る目は幸いです。
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多くの預言者や王たちは、あなたがたが見ているものを見たいと願ったのに、見られず、あなたがたが聞いていることを聞きたいと願ったのに、聞けませんでした。」


구약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다니실 때에도 십자가가 무엇이고 보혈이 무엇인지 알지를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압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압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 나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주님이 내게 주신 편지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언제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면 바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 이사야서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それゆえ、主は自ら、あなたがたに一つのしるしを与えられる。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み、その名をインマヌエルと呼ぶ。

이 임마누엘이라는 뜻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 2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見よ、処女が身ごもっている。そし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それは、訳すと「神が私たちととも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을 가리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은 성전 안 지성소에 계시며, 거기는 대제사장이 그것도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시고 십자가에 의해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어, 언제 어디서나 성령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년 12월 19일 현재를 본다면 한국을 비롯해서 이른바 위드 코로나……인터넷에서 보니까 이 말이 일본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코이케 동경 도지사가 먼저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신종 코로나 때문에 각종 규제를 했으나, 규제만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규제를 풀고, 방역대책을 하면서 극복해보자 하는 정책을 했는데, 그랬다가 지금 다시 확진자가 늘고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 큰일이에요. 연일 확진자나 사망자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줄고 있던 일본도 이 군마현을 비롯해서 또다시 증가추세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다들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요. 어떤 분 말에 의하면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이렇게 규제를 하면 코로나는 안 걸릴지 모르지만 먹고 살지 못해서 굶어 죽겠다는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고 하는데, 아유, 충분이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그래서 위드 코로나라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분들도 여전히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드 코로나라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안 되는 것이 위드…뭐겠습니까. 위드 마귀 사탄, 위드 세상, 위드 우상……이 되면 곤란합니다.

정말 제가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솔직히 우리가 성경에 적힌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술 담배요? 괜찮아요. 남들한테 민폐 안 끼치고, 그리고 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면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다만 단 한 가지. 우상을 섬기는 일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사랑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음란, 쉽게 말해서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해서 맺어졌는데, 그 마음이 다른 남자, 다른 여자한테 향해요.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서도 마찬가지에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음란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신명기 4장 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あなたの神、主は焼き尽くす火、ねたむ神だからである。

음란이 곧 사랑의 배신인 것처럼, 우상숭배는 곧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서운 죄를 멀리 하고, 오로지 우리 주님만을 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そしてわたしが父にお願いすると、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お与えくださり、その助け主が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この方は真理の御霊です。世はこの方を見ることも知ることもないので、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あなたがたは、この方を知っています。この方はあなたがたとともにおられ、また、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항상 위드 하나님, 위드 예수님, 위드 성령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왜 기쁜 날입니까. 바로 위드 하나님, 위드 예수님, 위드 성령님,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그 시작이 바로 크리스마스 성탄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영원한 아바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 우리의 보혜사 되신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을 통하여 크나큰 기쁨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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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선교회
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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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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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7회 구원의 이유
2021년 12월 12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2節~14節
“12.ですから、兄弟たちよ、私たちには義務があります。肉に従っ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肉に対する義務ではありません。
13.もし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ぬ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もし御霊によってからだの行いを殺すなら、あなたがたは生きます。
14.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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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3번째 시간으로서 “구원의 이유” 救いの理由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좀 우리에게 낯선 사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오늘 우선 살펴볼 인물은 바로 ‘롯’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롯’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경을 어느 정도 읽어보신 분이시라면 이 ‘롯’이 누구인지 정도는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께 하나 문제를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롯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의하면 롯은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베드로후서 2장 6절~7절에 보면 여기서는 롯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6절~7절
“6.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また、ソドムとゴモラの町を破滅に定めて灰にし、不敬虔な者たちに起こることの実例とされました。
そして、不道徳な者たちの放縦なふるまいによって悩まされていた正しい人、ロトを救い出されました。

저는 여기서 적지 않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의로운 롯’이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롯? 의로운 롯? 롯이 의롭다고?

저는 롯에 대해서 그를 의롭다고 기록한 성경에 대해서 수긍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 생각과 성경의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 성경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책이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성경은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 것입니다만 이는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영감, 하나님의 뜻으로서 기록된 책으로서,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은 모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오늘처럼 “내가 생각하기에는 롯이라고 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어요.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 하면,

“아, 나는 롯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잘못되었다”라고 해석을 하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나는 롯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의로운 롯’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이렇게 접근을 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롯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왜 의로운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지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우선 이 롯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롯은 누구인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시간관계상 성경구절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창세기 11장 26절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아직 고향에 살고있을 때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그리고 하란은 롯을 낳았습니다. 이 순서대로라면 아브라함은 첫째요 하란은 3남이 됩니다. 그리고 3남의 아들이 롯인 것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도 먼저 고향 땅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란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12장과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그 첫번째는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고, 그리고 두 번째는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인 하란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을 때에 부르셨습니다.

‘하란’이라고 하는 이름이 하나는 아브라함의 동생이자 롯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하고,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에 머물렀던 지명이기도 하고 해서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는 사람 이름이고, 또 하나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그의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출발했을 때에는 이미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첫째로는 당시 롯에게는 아버지 하란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는 롯,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들 즉 대를 이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아브라함을 따랐고, 아브라함도 롯을 데리고 나왔을 수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의 말씀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5절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する。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わたしは、あなたを祝福する者を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のろう。地のすべての部族は、あなたによって祝福される。」
アブラムは、主が告げられたとおりに出て行った。ロトも彼と一緒であった。ハランを出たとき、アブラムは七十五歳であった。
アブラムは、妻のサライと甥のロト、また自分たちが蓄えたすべての財産と、ハランで得た人たちを伴って、カナンの地に向かって出発した。こうして彼らはカナンの地に入った。


이 말씀의 흐름을 보시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롯에 대해서 언급하신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고는 합니다만, 우선 부부는 예나 지금이나 한 몸을 이룹니다. 예를 들어서 제 경우를 본다 하더라도 제가 일본의 종교비자를 취득하고 있다면, 제 아내는 종교비자가 없더라도 가족이기 때문에 체류자격이 인정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소유와 얻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재산과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예제가 있었던 당시에는 노예도 마치 재산처럼 소유를 할 수 있었고, 그리고 매매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집에 있었던 종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렇지 않아요. 롯은 아브라함의 친족이긴 하지만 가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도 아닌 자유인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롯을 데리고 가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을 이끌고 길을 나섭니다.

이게 별 문제가 되나 하고 생각하실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것으로 인해서 계속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3장 6절~11절
“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その地は、彼らが一緒に住むのに十分ではなかった。所有するものが多すぎて、一緒に住めなかったのである。
そのため、争いが、アブラムの家畜の牧者たちと、ロトの家畜の牧者たちの間に起こった。そのころ、その地にはカナン人とペリジ人が住んでいた。
アブラムはロトに言った。「私とあなたの間、また私の牧者たちとあなたの牧者たちの間に、争いがないようにしよう。私たちは親類同士なのだから。
全地はあなたの前にあるではないか。私から別れて行ってくれないか。あなたが左なら、私は右に行こう。あなたが右なら、私は左に行こう。」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ロトは、自分のために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選んだ。そしてロトは東へ移動した。こうして彼らは互いに別れた。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인하여 소유가 늘어가게 됩니다만, 본래 롯은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재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근심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아브라함도 느끼는 바가 있었나 보죠? 안되겠다. 우리가 헤어져야겠다 하고 롯에게 말하면서, 이후 선택권을 자신의 조카 롯에게 줍니다.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내가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겠다고 하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말해요.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13장 10절에 의하면 롯의 선택은 어땠습니까.

창세기 13장 10절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그가 좌우 중 어디를 선택할까 하고 눈을 들어보았더니, 저기 물이 넉넉한 지방이 보였습니다. 당시는 농사를 짓건 목축을 하건 간에 이 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했지요. 그런데 요단 쪽을 바라보니까, 아 정말 땅이 비옥해 보였다는 것이에요. 거기가 얼마나 비옥해 보였냐 하면 당시 최대 선진국이었던 애굽과도 같고, 그리고 더 나아가 여호와의 동산 같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롯은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요. 당연히 그쪽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어디라고요?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곳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버린 땅, 저주의 땅입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땅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거기는 장차 멸망 당할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 자신의 눈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어디를 가든, 거기서 반드시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즉 어디를 가든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롯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어디에도 없어요. 롯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거나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만약에 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기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자, 좌로 갈 것인지 우로 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는 말을 했을 때 우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겠지요.

그리고 창세기 14장 12절에 의하면 롯은 소돔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의지 했었더라면 만에 하나라도 저주의 땅 멸망의 땅인 소돔으로 인도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이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롯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결국 그 죄악의 도시 소돔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졌을 때가 정확히 몇 년이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하란 땅을 나설 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하고,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13장에서 서로 결별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얼마 안 되었을 시기였을 것입니다.

편의상 하란에서 나와서 곧바로 헤어졌다고 친다면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 때 둘은 결별을 하고 롯은 소돔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면 롯이 얼마 동안이나 살았냐 하면, 창세기 18장 10절에 의하면 내년에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시면서 뿐만 아니라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는 계획도 함께 말씀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듬해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얻게 되는데, 창세기 21장 5절에 의하면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소돔이 멸망한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부터 99세 때까지 롯이 소돔에서 살았다고 한다면 자그마치 25년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롯이 소돔에 머물렀던 기간을 최대한도로 본다면 25년이라는 뜻이 됩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두 천사가 소돔으로 옵니다. 롯은 그들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랬더니 소돔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9장 4절~5절
“4.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彼らが床につかないうちに、その町の男たち、ソドムの男たちが若い者から年寄りまで、その家を取り囲んだ。すべての人が町の隅々からやって来た。
そして、ロトに向かって叫んだ。「今夜おまえのところにやって来た、あの男たちはどこにいるのか。ここに連れ出せ。彼らをよく知りたいのだ。」


여기서 ‘그들을 상관하리라’ 라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성폭행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떤 낯선 사람들이 롯의 집에 왔는데, 소돔사람들이 몰려와서 롯한테 말하기를, 지금 너희 집에 온 사람들을 우리에게 내놔라, 우리가 그들을 성폭행하겠다고 하면서, 노소를 막론하고 멀리서부터도 몰려왔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소돔이라고 하는 곳이 얼마나 죄악으로 넘쳐났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롯의 행동은 뭐냐 하면, 롯이 그 몰려온 폭도들에 말합니다.

창세기 19장 7절~8절
“7.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そして言った。「兄弟たちよ、どうか悪いことはしないでください。
お願いですから。私には、まだ男を知らない娘が二人います。娘たちを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連れて来ますから、好きなようにしてください。けれども、あの人たちには何もしないでください。あの人たちは、私の屋根の下に身を寄せたのですから。」


이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악한 무리들이 손님들을 성폭행하겠다고 내놓으라고 하는데, 롯은 차라리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자기 딸들을 내줄 테니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보호하겠다고 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자기 딸들을 내주겠다는 것은, 이 또한 우리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은 행동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이 죄악의 도시 소돔 식 문제 해결 방식이었는 지는 모르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천사는 소돔의 멸망 계획을 롯에게 알립니다. 그러면서 네 가족만이 아니라 네 사위까지도 소돔 바깥으로 도망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족들도 문제예요.

창세기 19장 14절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そこで、ロトは出て行き、娘たちを妻にしていた婿たちに告げた。「立って、この場所から出て行きなさい。主がこの町を滅ぼそうとしておられるから。」しかし、彼の婿たちには、それは悪い冗談のように思われた。

롯의 두 딸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같이 도망가자고 했더니만 사위들은 농담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결혼전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장인이 될 사람이 말을 하는데도 이를 농담이라고 들었다는 것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누구는 장인어른의 말도 우습게 여길 정도로 두 사위 될 사람은 인간성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사위 될 사람들한테도 우습게 보일 정도로 롯이 신임을 얻지 못했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어찌됐든 정상적인 가족관계는 아닙니다.

16절에 의하면 천사들은 빨리 도망가라고 그들이 지체하고 있으니까, 천사들이 직접 롯과 그의 아내, 그의 딸들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어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26절에 의하면 롯의 아내는 이 말을 지키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맙니다 .

어디 그 뿐인가요. 31절 이후에 보면, 롯의 두 딸이 말하기를, 이제 자기들과 결혼할 두 사위들은 소돔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모두 멸망하고 말았으니 우리가 결혼을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아버지 롯을 술 취하게 해가지고는 아버지의 아이를 갖자고 합니다.

이 두 딸은 롯이 소돔에서 사는 동안에 얻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이 또한 소돔식 문제해결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이 또한 우리 상식에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결국 두 딸은 아버지 롯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큰 딸이 낳은 아이의 후손은 모압 족속이고, 작은 딸이 낳은 아이의 후손은 암몬 족속인데, 이 조카 롯의 가정에서 근친상간의 결과로 낳은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 롯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창세기 19장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가 몇 살까지 살았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성경에서는 그의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롯의 인생,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초에 아브라함을 따라 나선 것을 가지고 롯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죄악의 도시 소돔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본래 그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아브라함도 그를 데려가지는 않았겠지요.

앞서 롯을 의롭다고 기록한 베드로후서 2장에 보더라도 2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8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この正しい人は彼らの間に住んでいましたが、不法な行いを見聞きして、日々その正しい心を痛めていたのです。

이를 쉽게 표현해 본다면, 이 롯이 죄악의 도시 소돔에 살면서 거기 생활에 물들고 많이 망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전에 그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그의 삶을 통해서 본다면 훌륭한 점이나 본받을만한 구석이 어디에도 없어요.

그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적어도 거기서 낳은 두 딸들이 시집갈 정도로 자랄 때까지 죄악의 도시 소돔에 머물렀습니다. 만약에 롯이 소돔에 노예로 팔려갔다고 한다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자유인이었습니다. 그가 원했었더라면 언제든지 소돔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어떤 자신의 사업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속해서 소돔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의 두 딸들을 지킨다는 강한 의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두 딸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사위들로부터도 무시를 당했습니다. 아내는 천사의 말도 가볍게 여겨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딸은 지극히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인생 어디에서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왜 롯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했을까요.

자, 지난 주에도 드렸던 질문을 또다시 드립니다. 이번에는 정답을 말씀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성경에서 의로운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예,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 사람, 구원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원을 못 받으면 그 사람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볼 때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의인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지요.

롯은 인간적으로 볼 때 솔직히 본받을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멸망하는 소돔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린다 하더라도 이상할 곳이 없어요.

그렇다면 결국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렸을까. 왜 그는 멸망하는 소돔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짚이는 딱 한 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29절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神が低地の町々を滅ぼしたとき、神はアブラハムを覚えておられた。それで、ロトが住んでいた町々を滅ぼしたとき、神はロトをその滅びの中から逃れるようにされた。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롯을 부르시지는 않았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도 그렇거니와 그의 가족들도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의 가정은 완전히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행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롯이 사로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은 목숨을 걸고 그를 구출해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사랑했는데, 롯이 만약에 소돔에서 멸망해버린다면 얼마나 아브라함이 가슴 아파 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다시 말해서 롯이 이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뻐서 하나님께서는 롯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14절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2節~14節
“12.ですから、兄弟たちよ、私たちには義務があります。肉に従って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肉に対する義務ではありません。
13.もし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ぬ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もし御霊によってからだの行いを殺すなら、あなたがたは生きます。
14.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성경은 우리가 ‘빚진 자’라고 기록을 합니다. 다른 번역본에 보면 이를 ‘의무가 있다’고 번역을 한 성경도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빚진 자가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말로 채무자, 즉 채무를 이행할 의무, 쉽게 말하자면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분명 빚진 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가 필요 없게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없이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런 모진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어 주신 것은, 바로 우리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격 미달인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하는 소돔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 자기가 이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롯이 알았다면, 그의 미래는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돔에서는 구원을 받았으나 그 이후 그의 인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뭐가 이쁘다고 구원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마태복음 10장 32절~33절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ですから、だれでも人々の前でわたしを認めるなら、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認めます。
しかし、人々の前で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う者は、わたしも、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の前で、その人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을 통한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열어주신 길이 구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길은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시요,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주시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믿고 시인하기만 하면,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해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생각하사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な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그리고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8장 14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4.神の御霊に導かれる人はみな、神の子どもです。”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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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2021년 12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0節~11節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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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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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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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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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2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私たちが持つべき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부터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시고, 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바로 지난 주의 성경 말씀을 잘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여기서 9절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神の御霊)’과 후반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キリストの御霊)’이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이요, 성령님의 영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기인 합니다만,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든 예수님의 영이든 성령님의 영이든 우리 안에 거하시면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고, 11절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말이 안 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こう言って、息を引き取られた。

예수님께서 만약에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 자신의 영혼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으셨겠지요.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혼을 부활시키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분명히 스스로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35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神はイエスをよみがえらせ、彼らの子孫である私たちにその約束を成就してくださいました。詩篇の第二篇に、『あなたはわたしの子。わたしが今日、あなたを生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そして、神が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もはや朽ちて滅びることがない方とされたことについては、こう言っておられました。『わたしはダビデへの確かで真実な約束を、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ですから、ほかの箇所でもこう言っておられます。『あなたは、あなたにある敬虔な者に滅びをお見せになりません。』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역시 오늘 본문 11절에 등장하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라고 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어 없어지게 되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게 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인해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합니다.

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여기서 보시면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본문 11절에 있는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씀의 구도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로마서 8장 9절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고 하시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이 같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 즉 성령님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짧은 두 구절에서 우리의 중요한 믿음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삼위일체를 끝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 많은 사람만큼 골치 아픈 사람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왜 9절과 비슷한 말씀을 10절과 11절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디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러던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갔던 말이 뭐냐 하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그러신대요.

“자, 여기는 중요하니까 선생님 한 번 밖에 말 안한다”
라고 한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중고등학교를 일본학교에서 배웠으니까 이런 말 자주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아니, 다른 곳은 한 번만 설명하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요. 뭐,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요한 곳이라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라도 이해를 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보면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반복적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이 성경책이 왜 이렇게 두껍겠습니까. 우리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한 번 말해가지고는 안 듣거든요. 이 사실을 누가 잘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맨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러다가 이제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상하게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경고하시죠.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큰 일 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그 때까지 멀쩡히 조용하던 이웃나라에서 갑자기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해요. 그러면 이제 그 때가 돼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를 하지요. 하지만 또 어떻게 돼요? 예,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또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중요한 것은 한 번만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누가 제일 잘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이시지만, 그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이 금방 머리에 딱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우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인데, 우선 이를 단순화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과 성령님의 영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영이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통일시키고, 그리고 11절의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을 ‘성령(聖霊)’으로 변환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또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 神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聖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렇게 보시면 아까보다는 단순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10절에서는 몸은 죽지만 영은 살아있다고 하는데, 11절에서는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합니다.

그럼 결국 몸은 죽는다는 거야 아니면 안 죽는다는 거야. 라고 하는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면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0절은 현재를 나타내는 말씀이고 11절은 장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10절과 11절을 나누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자, 오랜만에 이 문제를 다시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많은 유혹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혹에는 사실 정신적인 유혹도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바로 육신에 의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는 유혹에 빠지는,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멸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르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11절은 장래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죽은 우리의 몸까지도 살리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있을 부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을까요. 마치 무슨 유령처럼 부활하셨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령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유령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유령처럼 부활하신 것인가요?

누가복음 24장 39절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처럼 연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다음에도 뼈와 살이 있어서 우리와 직접 말을 하고 만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시게 되면, 지금처럼 뼈와 살이 있는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을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일으켜 주셔서 부활을 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말씀을 들으시면 기쁘십니까. 저는 가끔 이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해드릴 때 느끼는 것은, 왠지 모르게 듣는 분들이 느끼는 공허함이 전해져 옵니다.

아, 부활! 기쁩니다! 할렐루야! 라고 목사님이 앞에서 말씀하시니까 그냥 그래, 아멘……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때요?

아휴, 부활은 무슨 부활. 부활 안 해도 좋으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돈이나 좀 많이 벌어봤으면 좋겠다. 큰 집에서 좋은 차 몰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당장 지금 살아가기도 힘든데 무슨 부활이야.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지만 이 부활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우리는 부활할 거니까 지금은 죽어라 고생을 해도 참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하더라도,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돼 봐야 다만 잠시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마저도 이를 물리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음마저도 물리치고 부활로 일으켜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무슨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なら、と言うのです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누가복음 8장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娘は救われます。」

성경은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중요할까요.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の信仰を見て、中風の人に「子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言わ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시편 107편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まことに主は 渇いたたましいを満ち足らせ 飢えたたましい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た。


죽음마저도 물리치시는 주님,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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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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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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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6회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2021년 12월 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0節~11節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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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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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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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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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2번째 시간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 私たちが持つべき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먼저 본문부터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시고, 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바로 지난 주의 성경 말씀을 잘 기억하고 계신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여기서 9절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神の御霊)’과 후반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キリストの御霊)’이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것이요, 성령님의 영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기인 합니다만,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든 예수님의 영이든 성령님의 영이든 우리 안에 거하시면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고, 11절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인가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로 말이 안 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イエスは大声で叫ばれた。「父よ、わたし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ゆだねます。」こう言って、息を引き取られた。

예수님께서 만약에 스스로의 힘으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 자신의 영혼을 다른 이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으셨겠지요.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영혼을 부활시키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분명히 스스로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35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神はイエスをよみがえらせ、彼らの子孫である私たちにその約束を成就してくださいました。詩篇の第二篇に、『あなたはわたしの子。わたしが今日、あなたを生んだ』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そして、神が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て、もはや朽ちて滅びることがない方とされたことについては、こう言っておられました。『わたしはダビデへの確かで真実な約束を、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ですから、ほかの箇所でもこう言っておられます。『あなたは、あなたにある敬虔な者に滅びをお見せになりません。』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역시 오늘 본문 11절에 등장하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라고 하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있으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어 없어지게 되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게 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인해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합니다.

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私たち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여기서 보시면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십니다.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 혹시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오늘 본문 11절에 있는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이 말씀의 구도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로마서 8장 9절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고 하시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이 같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 즉 성령님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짧은 두 구절에서 우리의 중요한 믿음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삼위일체를 끝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 많은 사람만큼 골치 아픈 사람이 없어요.

자, 그렇다면 왜 9절과 비슷한 말씀을 10절과 11절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디서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러던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갔던 말이 뭐냐 하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그러신대요.

“자, 여기는 중요하니까 선생님 한 번 밖에 말 안한다”
라고 한답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중고등학교를 일본학교에서 배웠으니까 이런 말 자주 들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합니다. 아니, 다른 곳은 한 번만 설명하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요. 뭐,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고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요한 곳이라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라도 이해를 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보면 중요한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반복적으로 설명을 드리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이 성경책이 왜 이렇게 두껍겠습니까. 우리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한 번 말해가지고는 안 듣거든요. 이 사실을 누가 잘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맨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러다가 이제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이상하게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경고하시죠. 너희들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큰 일 난다.

하지만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요. 그러면 그 때까지 멀쩡히 조용하던 이웃나라에서 갑자기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많은 괴로움을 당해요. 그러면 이제 그 때가 돼서야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를 하지요. 하지만 또 어떻게 돼요? 예,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되면 또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중요한 것은 한 번만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누가 제일 잘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각 다른 영이시지만, 그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이 시점에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11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ご自分の御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 말씀이 금방 머리에 딱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우선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인데, 우선 이를 단순화 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과 예수님의 영과 성령님의 영은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의 영이기 때문에 이를 모두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통일시키고, 그리고 11절의 ‘그의 영(ご自分の御霊)’을 ‘성령(聖霊)’으로 변환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0.또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0.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11. 神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 神は、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聖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からだも生かしてくださいます。”

이렇게 보시면 아까보다는 단순해 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니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10절에서는 몸은 죽지만 영은 살아있다고 하는데, 11절에서는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합니다.

그럼 결국 몸은 죽는다는 거야 아니면 안 죽는다는 거야. 라고 하는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면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0절은 현재를 나타내는 말씀이고 11절은 장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10절과 11절을 나누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0.キリスト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おられるなら、からだは罪のゆえに死んでいても、御霊が義のゆえにいのちとなっています。

자, 오랜만에 이 문제를 다시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많은 유혹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혹에는 사실 정신적인 유혹도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바로 육신에 의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는 유혹에 빠지는,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멸망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영적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르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11절은 장래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죽은 우리의 몸까지도 살리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있을 부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을까요. 마치 무슨 유령처럼 부활하셨을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령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우선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는 유령을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유령처럼 부활하신 것인가요?

누가복음 24장 39절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わたしの手やわたしの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です。わたしにさわって、よく見なさい。幽霊なら肉や骨はありません。見て分かるように、わたしにはあります。」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처럼 연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다음에도 뼈와 살이 있어서 우리와 직접 말을 하고 만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시게 되면, 지금처럼 뼈와 살이 있는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여기까지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을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일으켜 주셔서 부활을 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럼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이라는 말씀을 들으시면 기쁘십니까. 저는 가끔 이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해드릴 때 느끼는 것은, 왠지 모르게 듣는 분들이 느끼는 공허함이 전해져 옵니다.

아, 부활! 기쁩니다! 할렐루야! 라고 목사님이 앞에서 말씀하시니까 그냥 그래, 아멘……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어때요?

아휴, 부활은 무슨 부활. 부활 안 해도 좋으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돈이나 좀 많이 벌어봤으면 좋겠다. 큰 집에서 좋은 차 몰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당장 지금 살아가기도 힘든데 무슨 부활이야.

솔직히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하지만 이 부활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우리는 부활할 거니까 지금은 죽어라 고생을 해도 참아야 한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생하시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 하더라도,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돼 봐야 다만 잠시 연장시킬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마저도 이를 물리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9절~11절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あなたがたのうちのだれが、自分の子がパンを求めているのに石を与えるでしょうか。
魚を求めているのに、蛇を与えるでしょうか。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음마저도 물리치고 부활로 일으켜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무슨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능력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がたの信仰が薄いからです。まことに、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もし、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あるなら、この山に『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言えば移ります。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言われた。「できるなら、と言うのですか。信じる者に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ですから、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が祈り求めるものは何でも、すでに得たと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そのとおりになります。


누가복음 8장 5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これを聞いて、イエスは答えら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娘は救われます。」

성경은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중요할까요.


마가복음 2장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の信仰を見て、中風の人に「子よ、あなたの罪は赦された」と言われた。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시편 107편 9절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まことに主は 渇いたたましいを満ち足らせ 飢えたたましいを良いもので満たされた。


죽음마저도 물리치시는 주님,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축복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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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5회 그리스도의 영을 품으라
2021년 11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9節
“9.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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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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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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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1번째 시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을 품으라” キリストの御霊を抱きなさ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선 본문 말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9節
“9.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서는 육신에 있는 사람과 영에 있는 사람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하는데, 후반부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자, 여기서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오늘 8장 9절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씀하시고 9절 뒷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 같다는 말이 되지요. 이 점은 인정 하시나요?

좋습니다. 이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즉,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라고 하는 가르침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영입니다. 예전에 잠시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모두 하나의 같은 영이다……라고 하는 주장은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하나님은 본래 한 분이신데,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2천년 전에는 그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서 사역을 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성령님이라는 모습으로 내려오셨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른바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성경에 있어서 크나큰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サムエルは言った。「主は、全焼のささげ物やいけにえを、主の御声に聞き従うことほどに喜ばれるだろうか。見よ。聞き従うことは、いけにえにまさり、耳を傾けることは、雄羊の脂肪にまさる。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좋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보다도 훨씬 낫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 중앙에 먹으면 안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참 짓궂으시다. 애당초 먹으면 안되는 걸 왜 만들어 놓으셨냐 하고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그게 사실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짓궂은 하나님이신가요?

아니에요. 이는 하나님이 짓궂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지켜서 선악과를 먹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100% 순종한 것이라고 쳐 줄게. 그리고 그 순종의 대가로 폭포수처럼 넘치는 축복을 부어 줄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게 하고 말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마귀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마귀 사탄의 말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좋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셨던 아름다운 축복, 넘치는 축복은 다 빼앗겨버렸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후에 영원토록 그들에게 약속된 놀라운 축복들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 죄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있는 나무들의 각종 열매는 무엇이든 먹어도 괜찮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에 처하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러면 이것이 그토록 지키기 어려운 명령이었을까요?

당시 에덴에 어느 정도의 나무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성경은 에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창세기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神である主は、その土地に、見るからに好ましく、食べるのに良いすべての木を、そして、園の中央にいのちの木を、また善悪の知識の木を生えさせた。


이 기록에 의하면 에덴에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들이 많았습니다. 수십 그루 수백 그루 정도가 아닌, 어마어마한 수의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들이 영원히 누릴 수 있을 만큼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단 하나였습니다. 비율로 보면 어느 정도가 되었을까요.

이 역시 10분의 1이나 100분의 1도 아닙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만 분의 일, 수천 분의 일 정도는 되었겠지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수백만 분의 일, 수천만 분의 일만 지키면 내가 놀라운 축복, 넘치는 축복을, 언제까지요? 예, 그렇습니다. 영원토록 주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사람은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람은 불순종, 배신으로 갚아버렸습니다.

그 결과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용서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5절~8절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イエスのうちにあるこの思いを、あなたがたの間でも抱きなさい。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그렇습니다. 불순종했던 아담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순종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시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기 쉬운 점에 대해서 볼까 합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성부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하나라는 교리 아닙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죄를 해결해 주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불순종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저질렀던 이 불순종이라고 하는 죄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동일한 존재, 구약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모습으로, 2천년 전에는 똑 같은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모습으로, 그리고 역시 똑 같은 하나님이 지금은 성령님이라는 모습으로 역사하신다면, 여기에는 ‘순종’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잖아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죽도록 순종해요? 이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지극히 비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비논리적인 주장이 성경이라고 한다면, 구약의 모든 말씀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그리고 마지막 날에 임할 심판도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이 양태론이라고 하는 주장 자체가 말장난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이를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세 신격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가 아니에요. 분명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라는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인 것이지요.


그러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동등한 관계에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A와 B가 동등한 친구사이인데, 아니면 직장 입사동기인데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서 순종을 한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그 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무슨 관계입니까. 그렇죠. 상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생깁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와 같은 세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상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일본 분으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자신은 어디어디에 속한 사람이래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神は三位一体ではなく、イエスは神の子で神に次ぐ別個の存在であり、「エホバ」こそ至高の唯一の神である、と聖書そのものから学んでいます。

이게 그러니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다음 가는 존재로서,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성경에서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를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했다면서. 그리고 순종했다는 대표적인 증거가 십자가라면서.
삼위일체라고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동등하다는 것인데,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분명 상하관계 아니야?
상하관계인데 어떻게 하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라고 하는 교리는 잘못된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주장을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그러고보니 그러네……그러시겠습니까?

있잖아요.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마귀 사탄들이 얼마나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아십니까.

창세기에서 보면 에덴에서 마귀가 어떻게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을 알았을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라고 하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작전을 짜서 교묘하게 하와, 이 말씀을 어기도록 만들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약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마귀 사탄이 뭐라고 합니까.

마태복음 4장 6절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이는 분명 마귀 사탄이 한 말입니다만, 여기서 “기록되었으되……”이후에 나온 말은 성경 시편 91편 11절~12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장면은 마귀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있는,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장면입니다.

여러분,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 유혹하기 딱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그럴 듯하게 자기 입맛에 맞춰서 자기들 멋대로 해석해 놓고는, 그 엉터리 교리를 가지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왜 넘어갑니까.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것이에요.

우리가 아는 믿음 좋은 사람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 물론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간혹 보면 그런 경우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들고 주여~주여~불로~불로~불로~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물론 그래요. 성경에도 사무엘상 1장에 보시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ハンナ)가 너무나도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를 하는데 소리는 안 들리고 입술만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 엘리가 술취한 줄 알았다고 하는데, 마음이 괴롭고 그러면 정말 기도도 안 나올 때도 있어요. 정말 주여……주여……밖에 안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데도 그저 손 들고 주여~주여~불로불로불로……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그러시겠습니까. 가만히 서서 우리가 말씀 드리기를 기다리실 텐데……맨날 주여 주여 불로불로불로……그러면,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그러시지 않겠어요?

비록 엉터리이긴 합니다만, 이단들도 성경을 공부하고, 마귀들도 성경을 달달 외우는데 우리가 성경을 모른다면 어떻게 이단들을 대항하고 마귀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책은 앞에 놓고 기도하라고, 손에 들고 흔들면서 기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책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9.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해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안 된다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 된다거나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한다면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영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이다 라고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앞서 소개해드린 그 메일을 보내신 사람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은 별개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이 성경 구절은 틀렸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 분은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배웠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 분이 자기가 어디 다닌다고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아무튼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음으로 상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건너뛸 수 없는 관계입니다. 언제는 아버지였다가 언제는 아들이었다가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라고 한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서 어느 회사에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있다고 해요. 회장님은 아버지고 부회장님은 아들입니다. 이제 회사 직원이 어떤 서류에 결제를 받으려고 하는데 부회장님은 사인을 해줬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반대를 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밑에 사람이 아무리 결제를 해서 올린다 하더라도, 최종결정권자가 사인을 안 해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서류를 만들어서 처음부터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장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결정권은 다 부회장한테 맡길게. 부회장이 사인하면 내가 한 걸로 치게.”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부회장님이 사인한 걸 가지고 다시 회장님한테 서류를 가지고 갈 필요가 없어요.

부회장님의 결정이 곧 회장님의 결정이 되기 때문에 부회장님의 사인 만으로 모든 것이 다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창세기 41장에 보시면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꿉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꿈 해석을 하지 못해요. 그러자 당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서,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까지 써서 감옥에 갇혀 있던 요셉이 불려와서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꿈의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애굽에는 7년 동안 풍년이 있다가 그 후에는 7년 동안 혹독한 흉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께서는 지혜로운 자를 세워서 애굽을 다스리게 하셔서 혹독한 흉년을 대비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니까 애굽 왕 바로가 말합니다.


창세기 41장 38절~43절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そこで、ファラオは家臣たちに言った。「神の霊が宿っているこのような人が、ほかに見つかるだろうか。」
ファラオはヨセフに言った。「神がこれらすべてのことをおまえに知らされたからには、おまえのように、さとくて知恵のある者は、ほかにはいない。
おまえが私の家を治めるがよい。私の民はみな、おまえの命令に従うであろう。私が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
ファラオはさらにヨセフに言った。「さあ、私はおまえ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よう。」
そこで、ファラオは自分の指輪を指から外してヨセフの指にはめ、亜麻布の衣服を着せ、その首に金の首飾りを掛けた。
そして、自分の第二の車に彼を乗せた。人々は彼の前で「ひざまずけ」と叫んだ。こうしてファラオは彼に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た。

이름도 없는 이국 땅에서 종으로 팔려온 요셉, 그것도 모자라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는 죄수로서 감옥 갇혀 있던 요셉이, 이 한 순간에 강대국 애굽의 2인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벼락 출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면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때 애굽 왕 바로가 뭐라고 말합니다
.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왕이라고 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 뿐이니까 네가 이 나라를 다스리라고 하면서 인장 반지, 말하자면 왕의 도장을 주어서 네가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권한을 위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私がまさっているのは王位だけだ、エジプト全土を支配させよう、といって、王の印章である自分の指輪を外してヨセフに与え、自分の権限を委任する場面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ります。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28장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イエスは近づいて来て、彼らにこう言われた。「わたしには天においても地においても、すべての権威が与えられています。

빌립보서 2장 9절~11절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それゆえ神は、この方を高く上げて、すべての名にまさる名を与えられました。
それは、イエスの名によって、天にあるもの、地にあるもの、地の下にあるもののすべてが膝をかがめ、
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す」と告白して、父なる神に栄光を帰す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세우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결제 서류에 사인을 했는데 하나님이 놀라시면서 야, 예수야. 너 지금 왜 그러냐. 그러면서 반대를 하시거나,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이 사인을 했는데 예수님이 놀라시면서, 아이구 아버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한다거나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마치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으니까 둘 모두에게 결제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예수님 중에 한분이 허락했다 하더라도 다른 한 분이 반대할 수도 있다면 두 분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나중에 뒤탈이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항상 그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의견의 충돌이 없으세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빌립의 대화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10절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ピリポはイエスに言った。「主よ、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そうすれば満足します。」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ピリポ、こんなに長い間、あなたがたと一緒にいるのに、わたしを知らないのですか。わたしを見た人は、父を見たのです。どうしてあなたは、『私たちに父を見せてください』と言うのですか。
わたしが父のうちにいて、父がわたしのうちにおられることを、信じていないのです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言うことばは、自分から話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のうちにおられる父が、ご自分のわざを行っておられるのです。

이 말은 뭐예요? 부회장님, 부회장님이 하시는 건 알겠는데, 회장님도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은 다 아버지가 허락하신 말씀이야. 그런데 왜 아버지를 보이라고 그래? 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회장님이 자기 아들인 부회장님한테 모든 권한을 위임했는데, 부하직원이 말하기를 그래도 회장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우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회장님과 부회장님 둘 모두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그렇잖아요?

첫째로는 회장님이 부회장님한테 모든 권한을 위임했는데, 부하직원은 그 위임 받은 부회장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그리고 둘째로는 위임을 했다고 하는 회장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아~ 예수님은 2인자니까 예수님 만으로는 부족해요. 빨리 하나님 나오라고 해요. ……라고 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어야 한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어떻게 성경을 공부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しかし、助け主、すなわち、父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は、あなたがたにすべてのことを教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話したすべてのことを思い起こさせてくださいます。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이며(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영(父がイエス様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이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보면 왕이 왕명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면, 그가 어떤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왕으로서 대우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왕이 왕의 이름으로 명령을 보내는 사람이었기에, 그 사신이 전하는 말에는 왕과 똑 같은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父から出る真理の御霊),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イエス様の名によってお遣わしになる聖霊)이라고 하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일들 역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しかし、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るのです。もし、キリストの御霊を持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その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주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영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을 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 예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기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첫째도 순종, 둘째도 순종,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드리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그리고 성령님의 영을 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순종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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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4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2021년 11월 2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7절~8절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7節~8節
“7.なぜなら、肉の思いは神に敵対するからです。それは神の律法に従いません。いや、従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8.肉のうちにある者は神を喜ば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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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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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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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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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0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神様を喜ばせる者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오던 로마서 강해를 잠시 쉬고 다른 구절로 말씀을 준비할까 했습니다만, 오늘 전할 차례인 로마서 구절을 보니 이 또한 추수감사절, 특히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도 많이 힘든 과정을 지나고 있는 와중의 추수감사절이라는 뜻에 맞는 내용이기에 오늘도 계속해서 로마서로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는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 둘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육의 사람은 애굽을 의지하고 영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끔 영의 사람이라고 하면 이를 좀 오해하는 분들도 계시지 않나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거나, 꿈이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 때 이러이러한 말씀을 했으니까 그 말씀을 믿으라는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서 여러분께 전한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의외로 상당히 많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제가 기도를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갔다 오겠다고 해요. 그리고 한 두 달 정도 안 보이다가 갑자기 제가 책 한 권을 가지고 나타났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가 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과 경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성경에 없다고 해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2천년 전에 기록된 것이지만 이 책은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 기록된 말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홍 목사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고 여러분께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제 말씀을 믿는 분들도 계실 수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안 믿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데 제 말을 안 믿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좀 서운하기는 하겠지요.

그러면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홍 목사님은 영의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홍 목사님께 말씀을 전하셨다면 믿어야지. 그러시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인간적으로는 기쁠 지는 모르지만 성경적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 6절~8절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6.私は驚い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恵みによって自分たちを召してくださった方から、このように急に離れて、ほかの福音に移って行くことに。
7.ほかの福音といっても、もう一つ別に福音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を動揺させて、キリストの福音を変えてしまおうとする者たちがいるだけです。
8.しかし、私たちであれ天の御使いであれ、もし私たちがあなたがたに宣べ伝えた福音に反することを、福音として宣べ伝えるなら、そのような者はのろわれるべきです。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한 내용입니다. 즉 바울이 말하기를 자신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어디서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나 천사가 나타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다른 새로운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 이것이 참으로 황당하게 들리실 지 모르지만, 이른바 신흥종교집단에 보면 다들 그래요. 거기 교주가 그런 체험을 했다는 말은, 사실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하지만 그런 게 영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 그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15절
“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14.しかし、驚くには及びません。サタンでさえ光の御使いに変装します。
15.ですから、サタンのしもべどもが義のしもべに変装したとしても、大し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彼らの最後は、その行いにふさわしいものとなるでしょう。

아무리 휘황찬란한 빛 가운데에서 나타난 천사라 하더라도 우리가 가진 성경 말씀과 다른 것을 전한다고 한다면 이는 마귀의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하게 하고 우리를 교란시키려는 사탄의 짓이기 때문에, 이는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교회에 보면, 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말씀을 받았다 하면서 이것은 이래야 한다, 저것은 저래야 한다고 하면서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 영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영으로부터 장해를 받고 있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몇 천년 전에 적힌 책이라고 해서 옛날 이야기입니까.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책인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성경은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손에 의해 적힌 글입니다만, 이는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적힌 것이기에, 우리는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イエス・キリストは、昨日も今日も、とこしえ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사람은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제는 A가 옳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B가 옳은 것 같다……이런 경우도 많이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20년 전, 200년 전, 2000년 전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 옳았던 것은 지금도 옳고, 그 당시 옳지 않았던 것은 지금도 여전히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언제나 들을 수 있고, 이 성경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이 성경에 의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진정한 영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아브라함이 애굽을 의지해서 봉변을 당하는 일을 소개해드렸습니다만, 이와 같은 일을 보고 아브라함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사실 우리도 과거를 되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넘어지지 않고 인도해 주셨으니 참 이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 아브람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의 기도제목, 그것은 땅도 아니요 재산도 아닌 아이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7장 17절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 상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적게 잡아 25년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이루어져서 아브라함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가 90세 때 그토록 원했던 아들 이삭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된 것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분이 계셨는데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 진정으로 놀라운 장면은 창세기 22장에 등장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끔찍하지요?


창세기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神は仰せられた。「あなたの子、あなたが愛しているひとり子イサクを連れて、モリヤの地に行きなさい。そして、わたしがあなたに告げる一つの山の上で、彼を全焼のささげ物として献げなさい。」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차라리 내가 주기로 했던 가나안 땅, 역시 그 말 취소할 게. 다시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주었던 재산들을 다 뱉어 내라. 만약에 그러셨다면 그나마 감당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삭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살아온 믿음의 핵심 아니었겠습니까. 아들을 준다고 했기에 그 동안 그 약속을 믿었던 것이요, 믿음으로 기다렸더니 노년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할렐루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아들을 내 놓으시래요. 그것도 그냥 데려가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제물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불로 태워서 드리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손으로 제물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아끼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그리고 불로 태워서 바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창세기 22장 2절.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의 다음 구절, 창세기 22장 3절은 어떤 말씀이 어울릴까요.

“이에 아브라함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며 여호와를 원망하더라”

すると、アブラハムは大声をあげて叫び、一晩中泣き明かし、主に対して激しく不平を言った。

이런 구절 어떻습니까. 이런 말씀이 와도 대단히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런 말을 했다는 구절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애굽으로 갔다가 봉변을 당하거나,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아이를 낳거나 하는 그와 같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끔찍한 명령을 듣고도 아브라함은 불평불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순종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때 쓸 장작을 싣고, 그리고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창세기 22장 4절에 의하면 사흘 길을 걸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곳에 도착해서는 이제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들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 곧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창세기 22장 11절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そのとき、主の使いが天から彼に呼びかけられた。「アブラハム、アブラハム。」彼は答えた。「はい、ここにおります。」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름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부르시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창세기 46장 2절에서 “야곱아 야곱아” 하고 야곱을 두 번 부르시고, 출애굽기 3장 4절에서는 “모세야 모세야” 하고 모세를 두 번 부르시고, 그리고 사무엘상 3장 10절에서는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사무엘을 두 번 부르셨는데, 이름을 처음 두 번 부르신 경우가 바로 이 창세기 22장 11절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두 번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참고로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10장 41절에서 마르다를,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시몬을, 그리고 사도행전 9장 4절에서 사울이라고 했던 바울을 두 번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장면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총 7개 장면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데, 이 중에서 본다면 아무래도 이 아브라함을 두 번 부르셨을 때가 가장 다급함이 느껴진다고 하겠지요. 그렇잖아요. 지금 막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던 순간에 이를 만류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지요. 마음 같아서는 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 그것도 아주 빠르고 큰 소리로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막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제지하시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2절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御使いは言われた。「その子に手を下してはならない。その子に何もしてはならない。今わたしは、あなたが神を恐れていることがよく分かった。あなたは、自分の子、自分のひとり子さえ惜しむことがなかった。」

그리고 창세기 22장 16절~18절에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창세기 22장 16절~18절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こう言われた。「わたしは自分にかけて誓う──主のことば──。あなたがこれを行い、自分の子、自分のひとり子を惜しまなかったので、
確かに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に祝福し、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海辺の砂のように大いに増やす。あなたの子孫は敵の門を勝ち取る。
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地のすべての国々は祝福を受けるようになる。あなた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ったからである。」

저는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이처럼 흥분하시면서 기뻐하시는 장면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너무나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이 이 말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갖지 않으십니까.

이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믿음의 조상으로서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물이 될 뻔만 이삭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당시 이삭은 몇 살이었을 것 같으십니까.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를 어린 소년 정도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지금 제단에서 결박을 당한 채 죽임을 당하려는 그 순간에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저항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였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하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당시 그의 나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록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일부 신학자들은 당시 그의 나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추측을 합니다.

창세기 22장에 이와 같은 기록이 있고,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창세기 23장 1절에 보면 사라가 127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아마도 이 사건이 있고 곧바로 얼마 후에 사라가 죽은 것이 아니냐 하고 추측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라가 127세 때 이삭이 몇 살인지를 계산해보면 되는데, 이삭은 아브라함 100세 때, 그리고 사라가 90세 때 태어납니다. 사라가 90세 때 이삭이 0살이라고 한다면 사라가 127세라고 한다면 37년 뒤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당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이삭의 나이는 37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전후를 살펴본다면 정확히 37세가 아닐 수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22장 19절에 의하면 그들은 돌아와서 브엘세바(ベエル・シェバ)에 살았다고 하는데, 23장 2절에 보면 헤브론 기럇아르바 (ヘブロン、キルヤテ・アルバ)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주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삭의 나이는 어린 아이나 소년이 아닌 거의 30대 중 후반 정도의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봐야겠지요.

창세기 25장 20절에 의하면 이삭이 결혼한 나이가 40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자 나이 37세라고 한다면 어른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을 결박하려는 나이든 아버지의 손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 바로 직전에는 아버지가 칼로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과 이삭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24장 35절~36절
“35.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36.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5.主は私の主人を大いに祝福されましたので、主人は富んでおります。主は主人に、羊や牛、銀や金、男女の奴隷、らくだやろば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
36.私の主人の妻サラは、年をとってから主人に男の子を産み、主人はこの子に自分の全財産を譲っておられます。

믿음에는 희생에서 시작해서 희생으로 끝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슬픔에서 시작해서 슬픔으로 끝나는 믿음도 없습니다.

시편 126편 5절~6절
“5.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涙とともに種を蒔く者は 喜び叫びながら刈り取る。
種入れを抱え 泣きながら出て行く者は 束を抱え 喜び叫びながら帰って来る。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께 순종의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7절~8절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7節~8節
“7.なぜなら、肉の思いは神に敵対するからです。それは神の律法に従いません。いや、従う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
8.肉のうちにある者は神を喜ば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갈 수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난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과 인내와 순종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에,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내하고 순종한 아브라함처럼 30배 60배 100배, 누르고 흔들어 넘치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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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회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
2021년 11월 1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5節~6節
“5.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6.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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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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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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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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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9번째 시간으로서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 肉の人と御霊の人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시면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에 대한 비교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5절~6절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5節~6節
5.肉に従う者は肉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が、御霊に従う者は御霊に属することを考えます。
6.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여기서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따르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이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 이유는 6절에 나와 있지요.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 속에서 구원을 받으나,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고 만다는 무서운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영을 따르는 사람,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육신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반면에 영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를 성경적으로 본다면 ‘육신’이라고 하는 것을 ‘애굽’, 그리고 ‘영’을 ‘가나안’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主はアブラムに言わ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土地、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きなさい。

성경 말씀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그 동안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해 출발을 합니다.


그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장 7절 전반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主はアブラムに現れて言わ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子孫にこの地を与える。」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는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떠났더니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최종목적지가 그들이 도착한 가나안 땅이며, 그 땅을 주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자,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착하도록 지정해 주신 땅에서 살게 된다면, 일이 잘 풀려야 해요? 안 풀려야 해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면,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나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 하나부터 열까지 척척 풀려가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시겠다는 땅은 가나안이었는데, 거기서 살다 보니까 기근이 들었데요.

아니, 내가 평생 살던 터전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왔다면, 하는 일마다 잘 풀려도 모자랄 판에 기근이 들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아브라함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짐작컨대 그의 아내 사라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니, 여보, 하나님이 큰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니까, 지금까지 잘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온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지금 뭐예요? 이렇게 기근이 들었는데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에요!

아마도 이렇게 다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사라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가 있어요. 성경에 보시면 기근이 그냥 기근도 아니고 기근이 아주 심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까.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가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땅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요. 그것을 의심할까봐 친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거기가 바로 내가 준 땅이라고 말씀까지 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이게 웬 일이에요. 이제 짐도 좀 풀고 살아볼까 했더니 기근 그것도 아주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생활은 점점 힘들어 가고, 이에 비례해서 사라의 잔소리도 나날이 늘어만 갑니다. 아무리 기다려봐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다.

자,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겨납니다.

1.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애굽 땅으로 간다.

당시 애굽이라고 하면 상당한 선진국이었습니다. 경제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뛰어난 나라, 대단히 풍요운 나라였습니다. 가나안 땅의 경우에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도 지을 수 없고 풀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경우에는 거대한 나일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안정적으로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중에는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정답을 고를 수 있겠습니다만, 정작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하였더라……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0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창세기 12장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その地に飢饉が起こったの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にしばらく滞在するために下って行った。その地の飢饉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이 기록을 보면 ‘기근’과 ‘애굽’이라는 단어가 한 구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어라? 기근이 들었네? 에라 다 틀렸나보다. 여보, 그냥 애굽으로 갑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망설임 없이 2번을 선택하고 후딱후딱 짐을 싸서 애굽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옳았을까요?

1.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애굽 땅으로 간다.

이 두 가지를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1. 기근이 심한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기근이 없는 풍요로운 애굽 땅으로 간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주저없이 애굽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해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머문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애굽 땅으로 간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아브라함에게 애굽으로 가라는 말씀을 안 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본다면 현명한 선택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대단히 어리석은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갔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12장 11절~20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 뻔한 봉변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애굽’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적인 선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와 같은 이 외에도 많이 나옵니다.

자, 이제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와서 살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안 들어주세요. 아브라함의 가장 큰 기도 제목은 무엇이었냐 하면, 그것은 땅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이를 갖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주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そして主は、彼を外に連れ出して言われた。「さあ、天を見上げなさい。星を数えられるなら数えなさい。」さらに言われた。「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

아니, 내가 지금 아들이 하나도 없으니까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니, 참 뜬구름 같은 말씀 아닙니까.

제발 그런 허황된 말씀 마시고 그냥 아들이나 하나 주세요……이런 말이 안 나오겠어요?

그래도 아브라함은 기다립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75세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나이는 곧 가나안 땅에서 살기 시작한 나이이기도 합니다.

75세부터 가나안 땅에 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몇 년을 기다렸냐 하면 자그마치 10년을 기다렸어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10년을 기다렸는데 여전히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나이 85입니다.


에이, 옛날 사람들은 800세, 900세까지 살았으니까 젊은 거야……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아의 홍수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홍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수명은 점점 짧아져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집니다.

아브라함은 그래도 오래 살아서 창세기 25장 7절에 의하면 175세까지 살았다고는 하나,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10년을 기다렸습니다. 10년, 짧습니까? 아니요. 길지요. 참으로 긴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화가 난 사람은 그의 아내 사라였지요. 사라는 말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안 해주시니까, 차라리 자기 여종인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라. 그러면 내 여종이 낳은 아이니까 그 아이를 내 아이로 삼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다그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또다시 선택지가 등장합니다.

1. 기다린다.
2.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이제 이 선택지를 우리는 제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그냥 기다린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다린다.
2.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라의 말대로 사라의 여종 하갈 사이에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치 아브라함이 애굽을 의지해서 가나안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이주한 것처럼,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애굽’을 의지하는 것인가요?

성경에는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갈’이 어떤 여인이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 16장 1절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アブラムの妻サライは、アブラムに子を産んでいなかった。彼女にはエジプト人の女奴隷がいて、その名をハガルといった。

그렇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려고 했던 사라의 여종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갈이 애굽 여인이었다는 기록은 창세기 16장 1절만이 아닙니다.

창세기 16장 3절 전반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創世記 16章3節 後半
彼女の女奴隷であるエジプト人ハガルを連れて来て、夫アブラムに妻として与えた。

창세기 21장 9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サラは、エジプトの女ハガルがアブラハムに産んだ子が、イサクをからかっているのを見た。

창세기 25장 12절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これは、サラの女奴隷、エジプト人ハガルがアブラハムに産んだ、アブラハムの子イシュマエルの歴史である。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여종 ‘하갈’이라는 이름 앞에 ‘애굽 사람’ ‘애굽인’ ‘애굽 여인’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붙입니다.

이를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을 의지한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 여성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애굽을 의지한 결과였다는 사실,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들 멋대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인 애굽 여인 하갈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고자 했던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멋대로 이주를 했던 것처럼, 그들은 애굽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한 결과가 어땠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하갈은 아브라함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닙니다. 애굽을 의지하고 세상을 의지한 결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브라함 가정에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인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하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이끌어 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종하나요? 아니요. 그들의 입버릇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6장 3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イスラエルの子らは彼らに言った。「エジプトの地で、肉鍋のそばに座り、パンを満ち足りるまで食べていたときに、われわれは主の手にかかって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事実、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をこの荒野に導き出し、この集団全体を飢え死にさせようとしている。」

민수기 11장 5절~6절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エジプトで、ただで魚を食べていたことを思い出す。きゅうりも、すいか、にら、玉ねぎ、にんにくも。
だが今や、私たちの喉はからからだ。全く何もなく、ただ、このマナを見るだけだ。」


이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로 그들을 종살이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었더니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도자로 세우신 모세를 원망하고, 그러면서 노예로 살았던 애굽을 그리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뭐라고 합니까.

민수기 14장 2절~4절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그들은 끝까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나안 땅 보다도 세상에 순종하는 애굽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서도 못 들어간 채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떠돌고는 흙먼지 날리는 광야 땅에서 하나 둘씩 죽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조금 선택지를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자,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들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1. 평안해 한다.
2. 불안해 한다.

저는 이 시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8장, 마가복음은 4장, 누가복음은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마가복음에 있는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36절~41절입니다.


마가복음 4장 36절~41절
“36.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そこで弟子たちは群衆を後に残して、イエスを舟に乗せたままお連れした。ほかの舟も一緒に行った。
すると、激しい突風が起こって波が舟の中にまで入り、舟は水でいっぱいになった。
ところがイエスは、船尾で枕をして眠っておられた。弟子たちはイエスを起こして、「先生。私たちが死んでも、かまわないのですか」と言った。
イエスは起き上がって風を叱りつけ、湖に「黙れ、静まれ」と言われた。すると風はやみ、すっかり凪になった。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彼らは非常に恐れて、互いに言った。「風や湖までが言うことを聞くとは、いったいこの方はどなたなのだろうか。」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심하게 몰아칩니다. 제자들은 지금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급했던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웠더니,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놀라운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하라고 배웠어요? 예, 기도하라고 배웠습니다. 부르짖으라고 배웠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주무시고 계시면 어떡하냐고 흔들어 깨웠던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어야 마땅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잠을 깨워서 신경질이 난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どうして怖がるのですか。まだ信仰がないのですか。」

제자들이 무서워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주무시고 계셨던 것일까요.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폭풍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고 과시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강한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6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6.肉の思いは死ですが、御霊の思いはいのちと平安です。

우리 삶 속에서도 어려움이 닥칠 때 폭풍우가 몰아칠 때,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왔습니까.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우리가 육신의 생각,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게 된다면, 이는 마치 사람의 생각으로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요, 결국 사망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생각,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게 된다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요, 생명과 평안이 임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애굽을 의지하는 육신의 생각, 세상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영적인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할 때, 진정한 생명과 평안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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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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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2회 사랑으로 이루신 주님
2021년 11월 7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절~4절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節~4節
“3.肉によって弱くなったため、律法にできなくなったことを、神はしてくださいました。神はご自分の御子を、罪深い肉と同じような形で、罪のきよめのために遣わし、肉において罪を処罰されたのです。
4.それは、肉に従わず御霊に従って歩む私たちのうちに、律法の要求が満たされるためな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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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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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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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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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8번째 시간으로서 “사랑으로 이루신 주님” 愛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た主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가을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단풍 소식이 들려옵니다. 올해의 경우 저희는 아직 못 갔습니다만, 특히 자연이 넘치는 이곳 군마현의 경우를 보면 조금만 나가도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히 화려한 것은 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국도 물론 그렇습니다만 특히 일본은 벚꽃이 국화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벚나무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매년 봄이 되면 시내라고 하더라도 여기저기에서 화려하게 자태를 자랑하는 벚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계절에는 정말 어디를 찍어도, 조금 과장을 하자면 눈을 감고 대충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멋진 사진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로마서를 보면 마치 그와 같은 풍경이 떠오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로마서 어디를 도려내서 본다 하더라도, 마치 봄철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곳에서 사진을 찍듯이 어디를 보더라도 진정한 복음 중의 복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 또한 진정한 복음 중의 복음, 주님의 말씀이 넘치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른바 법치국가에 있어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법을 지키기만 한다면 자유와 평등사회,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입법부인 국회에서는 많은 법을 만들고 행정부에서는 이 법에 따라서 정책을 추진하고,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생긴다면 사법부에서 이를 판단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율법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이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나라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연약해서, 너무나도 부족해서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범죄자가 되는 것처럼,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즉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모두 충족 시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일거수일투족이 죄에서 시작하여 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마태복음 7장 28절~29절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イエスがこれらのことばを語り終えられると、群衆はその教えに驚いた。
イエスが、彼らの律法学者たちのようにではなく、権威ある者として教えられたからである。

그 때까지의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이 전하는 말들은 그 속에서 소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을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지 말라. 이것을 하면 벌받는다. 저것을 하면 벌받는다 하면서, 백성들에게 자꾸만 무거운 짐들을 지우게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소망은 고사하고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 마음 안에 들어오게 되자 기쁨이 넘쳐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진정으로 구원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구나. 이와 같은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돼요. 이제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이제 확실이 구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그 때까지 진짜였던 척을 했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권위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지 않는다고 퍼뜨리고 다닙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마가복음 3장 22절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また、エルサレムから下って来た律法学者たちも、「彼はベルゼブルにつかれている」とか、「悪霊どものかしらによって、悪霊どもを追い出している」と言っていた。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를 보고 그들이 한 말은, 예수님이 마귀 사탄의 힘으로 이와 같은 일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전에 제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이제 학교를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인데, 그 때 첫 직장에서 처음 근무했던 부서가 기획실이었거든요. 보통 기획실은 사장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시 저는 입사한지 몇 개월 안 된 신입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혼자 쓰윽 들어오더니, 누구한테 뭘 물어보거나 하는 것도 없이 곧바로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 날은 사장님이 외부에 나가 계셨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사장님 비서도 자리를 비우고 있었던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노인네 한 분이 들어와서 텅 빈 사장실에 혼자 들어가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저는 그냥 멍하니 있었더니, 옆 부서인 관리부 선배가 저를 보고 하는 말이, 가만히 보고만 있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황급히 사장실에 가보니까, 사장실에 있는 접대용 쇼파 중에서 제일 상석에 혼자 앉아 있더라고요.

순간 저도 어이가 없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나이 드신 분이신데 다짜고짜 끌어낼 수도 없고 해서 조심스럽게 그 분을 보고 “저……누구시죠……?”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를 슬쩍 보고 하시는 말이, “아, 모르는구만……” 이 한 마디를 해요.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있었는데, 저기서 제 직속 상사인 기획실장이 황급하게 달려와요. 그러면서 저한테, 저리 비키라고 손짓을 합니다. 그래서, 아, 자기가 끌어내려고 하나보다 했더니만, 이 기획실장님이 사장실 입구에서 그 분한테 90도 인사를 하고 들어가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그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누구였냐 하면 제가 들어간 회사의 그룹 회장님이셨습니다.

그럼 저는 자기가 입사한 회사의 회장님 얼굴을 왜 몰랐느냐 하면, 그때까지의 대주주였던 회사에 문제가 생기고, 그래서 막 그때가 다른 회사로 인수가 된지 얼마 안된 시기였거든요.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제가 들어간 회사를 인수한 회사의 회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뭐 어디에 사진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입사 시험 때 면접관으로 들어왔던 것도 아니고 하니까 제가 알 길이 없었던 것이지요.

참고로 저한테 가보라고 했던 그 관리부 선배도 사실 그 양반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거예요.

결국 이렇게 되니까 말단 신입사원이 그룹 회장님한테 “저……누구시죠……?” 라고 말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참 민망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본체(神の御姿)”시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조물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가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시는 곳마다 맹인이 보게 되고,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사람이 듣게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누가 먼저 알아보냐 하면, 영적인 존재인 마귀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すると見よ、彼らが叫んだ。「神の子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まだその時ではないのに、もう私たちを苦しめに来たのですか。」

누가복음 4장 34절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ああ、ナザレの人イエスよ、私たち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私たちを滅ぼしに来たのですか。私はあなたがどなたなのか知っています。神の聖者です。」

마귀들은 예수님이 그냥 다가가시기만 해도 먼저 알아보고 벌벌 떱니다. 그러나 이를 누가 모르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혼자서 똑똑한 척만 하는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당대에 똑똑하다고 자랑했던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わたしが律法や預言者を廃棄するために来た、と思ってはなりません。廃棄するためではなく成就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논리로 하신다는 것이냐 하면, 바로 그 방법이 오늘 본문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3절~4절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3節~4節
“3.肉によって弱くなったため、律法にできなくなったことを、神はしてくださいました。神はご自分の御子を、罪深い肉と同じような形で、罪のきよめのために遣わし、肉において罪を処罰されたのです。
4.それは、肉に従わず御霊に従って歩む私たちのうちに、律法の要求が満たされるためなのです。”

예를 들어서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왕이 직접 만든 법이 있는데, 그런데 백성들이 죄를 지었어요. 왕은 백성들의 죄를 해결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있었던 법을 없애요? 만약에 법을 없앤다고 한다면 그것은 왕이 스스로 선포했던 법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원했느냐 하면, 일단 외국에 살고 있는 자기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얘야, 잘 지내니? 네가 좀 내 백성이 사는 나라로 가 줘야겠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로 갔습니다.

그렀더니 아버지가 또 말씀하십니다.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까 네가 살고 있던 나라 국적을 버리고 죄 많은 백성들이 사는 국적을 취득해라.

그래서 아들은 왕이신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기가 살던 좋은 나라의 국적을 포기하고, 죄 많은 나라로 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 한 장을 보여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종이에 싸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하는 자백서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 아들은 아무런 죄도 지은 적이 없습니다. 죄는 그 나라 백성들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왕인 아버지는 아들한테 그 자백서에 싸인을 하라는 거예요.

네가 싸인을 하면 저 죄 많은 백성들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싸인을 했어요.

그러자 왕인 아버지는 말합니다. 내가 판결을 내리겠다. 내 백성들은 무죄. 그리고 내 아들 너는 사형!

이렇게 해서 죄 많은 백성들은 용서를 받았고, 반면에 아무런 죄가 없는 왕의 아들은 백성들의 죄를 모두 다 뒤집어쓴 채로 죽었습니다.

만약에 이런 옛날 동화 이야기가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 벌써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구원하시는 방법은 율법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없앤다는 것은 성경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요, 하나님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루기를 원하셨느냐 하면, 우선 죄 없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벌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냐 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죄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아니라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예, 죄가 없는 온전한 예수님이 감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에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조물주 하나님이세요. 반면에 율법은 누가 지켜야 할 법입니까. 그렇죠. 사람이 지켜야 할 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이나 일본이나 그 나라 법으로 외국에서 잘 살고 있는 외국인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그랬다가는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 외국인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면 이제 그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이 된 것이니까 아무런 외교적인 문제 없이 처벌할 수가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인 우리가 율법을 어겨서 벌을 받아야 하는데, 내국인을 대신해서 외국인이 벌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대신해서 벌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주시고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 아들에게 모두 덮어씌우시고, 율법을 어기면 죽음에 처하라는 율법 규정 그대로 그 유죄판결을 내리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써 율법을 모두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죄인입니다. 아무도 율법 앞에서 나는 죄가 없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다 받아 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전 사형수라는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인데 일본에서는 전 사형수 元死刑囚 라는 말인데 이는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에게 사용합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사형수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즉, 사형수는 이미 죽음으로써 자신의 죄값을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적으로 보았을 때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죄가 없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6장 29절~32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看守は明かりを求めてから、牢の中に駆け込み、震えながらパウロとシラスの前にひれ伏した。
そして二人を外に連れ出して、「先生方。救われるためには、何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と言った。
二人は言った。「主イエスを信じ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もあなたの家族も救われます。」
そして、彼と彼の家にいる者全員に、主のことばを語った。

저는 얼마 전에 어떤 신앙이 없는 분으로부터 대단히 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여러분께서 들으셨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분들이, 교회에 오래 다니셨다고 해도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넘치는 축복을 못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된다?

예,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우리를 부요하게도 해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단순히 그것 만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큰 오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낫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채찍을,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그리고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병이 나음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자격이 주어졌고, 우리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고,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내일 당장 멸망하게 된다면, 아무리 내 질병이 나음을 받고, 아무리 큰 돈을 벌고, 아무리 많은 문제들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축복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으로 이루신 주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하여, 마침내 기쁨으로 주님 품에 안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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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1회 주님 안에
2021년 10월 31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2절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節~2節
“1.こういうわけで、今や、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者が罪に定められることは決してありません。
2.なぜなら、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いのちの御霊の律法が、罪と死の律法からあなたを解放し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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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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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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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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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7번째 시간으로서 “주님 안에” 主の内に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산’ 이야기부터 좀 해볼까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초모란마, 우리는 에베레스트라고 알려진 산입니다. 높이는 8848미터이지요. 그런데 이 높이를 들어도 웬만한 사람들은 잘 감이 안 오지요?

8848미터, 길이로 하자면 9킬로가 좀 안 됩니다. 성인남성의 걸음 속도가 시속 4킬로 정도라고 하니까, 평지에서 직선 거리라고 한다면 2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 넉넉잡아서 3시간도 안 되는 거리 아니겠어요? 이렇게 들으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교해본다면 일본에서 제일 높은 산인 후지산은 3776미터. 4킬로도 안 돼요. 평지라면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입니다.

에이 뭐, 별거 아니네.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한국은 어떻습니까.

애국가에도 나오는 백두산, 민족의 영산이라고도 하는 백두산 그 높이가 2744미터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굳이 가려고 한다면 중국으로 가서 거기서 중국 쪽에서 올라가야 하겠지요. 참고로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백두산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백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껏해봐야 장백산을 오를 수 있을 뿐이지 백두산은 사실상 오르기는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면 남한에서 높은 산에 오를 수 있는 곳은 어디냐 하면, 이는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인데, 한라산 높이는 2000미터도 안 됩니다. 한라산 1947미터 밖에 안 돼요. 평지라면 성인 남성이 걸어서 30분도 안 되는 거리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에베레스트 산, 8848미터나 되는 산이 얼마나 높은 산이지 상상이 가시겠지요?

저도 서울에서 살 때에 쉬는 날에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은 북한산이나 관악산에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오르기도 했습니다만, 후지산만 하더라도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물며 에베레스트 산? 9000미터에 육박하는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선 입장료도 1만불이 넘습니다. 한국 돈으로는 1000만원이 넘는 셈이지요. 그러면 돈만 내면 쉽게 오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에베레스트 같은 경우에는 도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상조건이나 여러 문제가 발생해서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고, 뿐만 아니라 등반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동상에 걸리거나 부상을 입기도 한다고 하지요.


이처럼 8,848미터, 9킬로도 안되는 높이이지만, 그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힘들고, 세계적인 전문 산악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고 간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산이 바로 에베레스트입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8000미터나 9000미터가 아닌, 그보다도 훨씬 높은 12,000미터에서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전문 산악인이라 하더라도 좀처럼 오를 수 없는 곳이 9000미터도 안 되는 높이인데, 그 보다도 훨씬 더 높은 12,000미터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을 여러분께서는 상상하시겠습니까.

그야말로 산악인 중의 산악인, 어떠한 추위가 닥쳐와도 끄떡없는 장비와 체력을 가진 소유자. 산소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초인적인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요. 복장이요? 아무도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강인한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있고 어린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높은 곳에 있으면서, 거기서 밥을 먹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하물며 태평하게 잠을 자기도 해요.

이 사람들은 무슨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인가요? 그렇다 하더라도 고도 12,000미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 그럼 문제입니다.

특수부대원들도 아니고 전문산악인도 아닌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깥 공기는 영하 40~50도를 넘나들고 있으나, 여객기 기내에는 상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방한복이나 산소통도 필요 없습니다. 편안한 복장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책을 읽는 사람들, 대화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 나이 드신 분들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여객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고도 10,000미터 이상인 상황, 바깥 기온 영하 40~50도인 상황에서도 이처럼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비행기라고 하는 공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완전한 제사를 드려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절~2절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節~2節
“1.こういうわけで、今や、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者が罪に定められることは決してありません。
2.なぜなら、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いのちの御霊の律法が、罪と死の律法からあなたを解放したからです。”

오늘 본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비행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고도나 기온도 문제이지만 산소 자체도 거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고등학교 때 후지산에 올라갔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리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는 하나 12,000미터에 비하면 1/3에도 못 미치는, 고작 4,000미터도 안 되는 산을 오를 때에도 산소가 부족해서 머리가 아파오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12,000미터라니요. 이는 산소가 없어서 제대로 숨 조차 쉴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영하 40~50도. 어디 그 뿐인가요. 비행기는 보통 시속 900킬로 정도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어떤 코미디 방송을 이렇게 혼자서 보고 있었는데, 거기서 보니까 어느 개그맨이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짜장면을 먹는 방송을 봤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짜장면을 먹는데, 그걸 카메라로 찍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됐겠습니까. 롤러코스터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달려가는데 짜장면을 먹으려고 하면 짜장도 날라가고 면도 얼굴에 달라붙고 뭐 난리가 아니지요.

사실 그냥 별것도 아닌 그런 코미디 방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보면서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비행기에 비하면 불과 몇 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달리는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짜장면을 먹으려고 해도 정말 힘든 상황인데, 영하 40~50도인 고도 12,000미터, 그것도 900킬로로 달리는 상황이요? 이것은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사람이 살아남을 수가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건장한 남성이라고 해도 얼마 버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비행기 안에 머물면 어때요? 예,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몸이 약한 분이라 하더라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차이입니까. 이는 바로 비행기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 하는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형벌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받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해도 정죄함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가면 안 되듯이, 예수님으로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밖으로 나간다면 이는 큰일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도 장로교 목사입니다만, 장로교 창시자인 존 칼빈의 강령을 놓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독특한 주장을 합니다. 특히 5대 강령 중에서 다섯 번째 내용인데, 이를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 우리는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는 칼빈 자신이 그대로 주장을 했다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정리한 것인데,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무엇을 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게 과연 사실이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무엇을 보면 됩니까. 그렇죠. 번거롭게 제 주장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시면 됩니다.

이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의 많은 부분들을 모두 다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늘은 요한계시록 부분만 보시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밧모섬(パトモス)은 지금도 그리스 에게해에 있습니다. 발음은 파트모스……라고 하는데 섬 전체 인구가 3천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인지 아니면 다른 요한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만, 성경해석에 있어서 이 부분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계시록 2장~3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각각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에베소 교회(エペソにある教会),
2.서머나 교회(スミルナにある教会),
3.버가모 교회(ペルガモンにある教会),
4.두아디라 교회(ティアティラにある教会),
5.사데 교회(サルディスにある教会),
6.빌라델비아 교회(フィラデルフィアにある教会),
7.라오디게아 교회(ラオディキアにある教会),

이렇게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를 자세하게 지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교회 이름은 당시 지명에서 따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카호 교회, 이세사키 교회, 뭐 그런 식이지요. 이 도시는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지명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밧모섬에서 육지로 건너가면 시계방향으로 삥 도는 순서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 편지는 누구한테 보냈다고요? 예, 불신자한테 보낸 것이 아니라 교회, 즉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한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 내용, 각 교회에 보낸 편지 내용을 보시면 한 교회도 빠짐 없이 경고에 의미를 담은 글들이 눈에 띕니다.

먼저 에베소 교회(エペソにある教会)에 대해서 보시면,

요한계시록 2장 4절~5절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初めの愛から離れてしまった。
だから、どこから落ちたのか思い起こし、悔い改めて初めの行いをしなさい。そうせず、悔い改めないなら、わたしはあなたのところに行って、あなたの燭台をその場所から取り除く。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너희는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니 어서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촛대를 옮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네가 만약 회개하지 않고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너에게 줄 축복을 옮겨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옮겨 버리신다는데 축복이 옮겨져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억지 아니겠습니까.

서머나 교회(スミルナにある教会)에 대해서도 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耳のある者は、御霊が諸教会に告げることを聞きなさい。勝利を得る者は、決して第二の死によって害を受けることはない。』

여기서 말씀하시는 둘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닌 멸망을 가리킵니다.

너희는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가만히 있어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해주겠다……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붙지요? 그렇습니다. ‘이기는 자’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하루하루 벌어지는 악한 마귀 사탄과의 전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기는 자에게만 구원이 허락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 (ペルガモンにある 教会)는요.

요한계시록 2장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だから、悔い改めなさい。そうしないなら、わたしはすぐにあなたのところに行き、わたしの口の剣をもって彼らと戦う。

만약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하시는데, 구원 받은 사람들과 예수님이 싸우신다? 이는 말이 안 됩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은 시간 관계상 성경구절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번째로 두아디라 교회(ティアティラにある 教会)에 대한 경고 말씀,

요한계시록 2장 20절~23절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けれども、あなたには責めるべきことがある。あなたは、あの女、イゼベルをなすがままにさせている。この女は、預言者だと自称しているが、わたしのしもべたちを教えて惑わし、淫らなことを行わせ、偶像に献げた物を食べさせている。
わたしは悔い改める機会を与えたが、この女は淫らな行いを悔い改めようとしない。
見よ、わたしはこの女を病の床に投げ込む。また、この女と姦淫を行う者たちも、この女の行いを離れて悔い改めないなら、大きな患難の中に投げ込む。
また、この女の子どもたちを死病で殺す。こうしてすべての教会は、わたしが人の思いと心を探る者であることを知る。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行いに応じて一人ひとりに報いる。


다섯 번째 사데 교회(サルディスにある教会)에 대한 경고 말씀,

요한계시록 3장 2절~3절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目を覚まし、死にかけている残りの者たちを力づけなさい。わたしは、あなたの行いがわたしの神の御前に完了したとは見ていない。
だから、どのように受け、聞いたのか思い起こし、それを守り、悔い改めなさい。目を覚まさないなら、わたしは盗人のように来る。わたしがいつあなたのところに来るか、あなたには決して分からない。

여섯 번째 빌라델비아 교회(フィラデルフィアにある 教会)에 대한 말씀,

요한계시록 3장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わたしはすぐに来る。あなたは、自分の冠をだれにも奪われないように、持っているものをしっかり保ちなさ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ラオディキアにある教会)에 대한 말씀

요한계시록 3장 15절~16절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わたしはあなたの行いを知っている。あなたは冷たくもなく、熱くもない。むしろ、冷たいか熱いかであってほしい。
そのように、あなたは生ぬるく、熱くも冷たくもないので、わたしは口からあなたを吐き出す。

이와 같이 본다면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 모두에게 “안심하라. 너희는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책망을 받지 않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너 지금까지는 잘하고 있어. 하지만 방심하지 마. 자칫 잘못하면 빼앗길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게 해”

이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이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는 단순히 당시 이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신학자들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의 취소는 없다고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내용은 단순히 계시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해서 성경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사상, 한 번 구원 받으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비성경적인 사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교회에 보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목회자나 직분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한 번 믿으면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데 무엇이 문제겠어? 만약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오늘은 일본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들으셨겠습니다만, 이 며칠 동안 여러 동네에서 후보자들이 선거용 차량에 스피커를 달고 돌아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선거 차량을 이용해서 마이크로 정말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후보자 이름을 말하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어제 10월 30일에도 선거차량으로 방송이 허용되어 있는 오후 7시 59분까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죠. 당선되기 위해서, 말하자면 떨어질까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4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私は、すでに得たのでもなく、すでに完全にされているのでもありません。ただ捕らえようとして追求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れを得るようにと、キリスト・イエスが私を捕らえてくださったのです。
兄弟たち。私は、自分がすでに捕らえたなどと考えてはいません。ただ一つのこと、すなわち、うしろのものを忘れ、前のものに向かって身を伸ばし、
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が上に召してくださるという、その賞をいただくために、目標を目指して走っているのです。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그렇게 많은 일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잡은 줄로 생각하지 않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주실 상을 위해서 있는 힘껏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오신 일이 바울보다 많으시다면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될지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日から今に至るまで、天の御国は激しく攻められています。そして、激しく攻める者たちがそれを奪い取っています。

여기서 ‘침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열심히 온 힘을 다해서 공격하는 것, 즉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왜 달려갑니까. 그렇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 번 구원 받았으면 걱정 없다”? 아닙니다. 우리는 긴장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고 선거운동원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해서 달려가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失望せずに善を行いましょう。あきらめずに続ければ、時が来て刈り取ることになります。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많이 부족한 것 같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주님과 함께 달려가기 시작하면, 장차 주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1절~2절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節~2節
“1.こういうわけで、今や、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者が罪に定められることは決してありません。
2.なぜなら、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いのちの御霊の律法が、罪と死の律法からあなたを解放したからです。”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 시켜주신 주님 안에 있으면서, 주님과 함께 푯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서, 마침내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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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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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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